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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학교 특강 /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


우선순위 세우기, 말씀보기, 순종하기

 

 

 

 

 

이 땅에서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가진 인물로 기록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분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열정적으로 닮아 그분과 같이 되길 원하신다.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순종을 말이다.

그러나 너무 염려하지 말라. 예수님을 닮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1장 28~30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최근 하나님과 친밀함을 만들어갈 수 있는 3가지 방법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 하나님을 항상 첫번째로 두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눅 2:49)

예수님은 12세 때 이같은 말씀을 하셨다. 어떤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보다 우선하지 않으셨다. 또 우리는 다른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기 전과 하신 후에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지셨다는 내용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기쁨이셨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 6:12)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마 14:23)

 

2. 성경 읽기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 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고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눅 2:46~47)

12살 된 소년이 모든 성경 교사와 앉은 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틀림없이 성경에 대한 굉장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누가복음 4장 1~13절에도 주님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마귀의 유혹을 이기신 장면이 나온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신 분이다. 말씀이 육신되신 분이고 말씀을 신실하게 붙드셨던 분이시다.

 

3. 말씀에 순종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아버지의 거처에서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말씀이 육체가 되시고,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신 주님께서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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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국내에서의 성경번역 신약

 

언더우드·아펜젤러, 성경번역 첫 단추 끼우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경이 전래된 때는 1816(순조 16) 95일로 알려져 있다. 영국 정부로부터 조선 서해안 해도(海圖) 작성 명령을 받은 해안 탐사선 알레스트호와 리라호가 충남 서천군 서면의 마량진(갈곶)에 상륙했는데, 함장 머레이 맥스웰과 바질 홀 대령이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현감 이승렬에게 화려한 장정의 책 한 권을 선물했다. 이것이 한반도에 전해진 최초의 성경인데, 흠정역(KJV) 성경이었을 것이다.

 

 

그 후 18327월 귀츨라프와 186566년 토마스에 의해 중국어 성경이 조선에 소개됐다. 성경의 도래와 함께 1880년대 만주와 일본에서는 은밀하게 성경이 번역되기 시작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 성경이 번역되었고 오늘 우리 손에 들려지게 되었을까?

 

국내 첫 번역성경은?

 

내한한 선교사들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과제는 성경 번역이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던 5명의 선교사들, 곧 언더우드 아펜젤러 알렌 스트랜톤, 그리고 헤론은 188727일 성서번역위원회를 구성하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번역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들이 펴낸 첫 성경이 1887년 간행된 마가의 젼한복음셔 언해였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책은 이수정의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해’(1885)의 개역본이었다. 한글성경이 없는 상태에서 이 책을 잠정적으로 이용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위원회 차원에서 역간 작업은 더 이상 추진되지 못했으나 아펜젤러의 보라달로마인셔(保羅達羅馬人書)’(1890), ‘마태복음젼’(1892), 게일의 사도행젼’(1892), 펜윅(M C Fenwick)요한복음젼등 사역본(私譯本)이 발행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성서공회는 한국성서위원회에 로스역 성경의 수정을 요청했다. 번역보다는 수정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이 요청에 부응해 아펜젤러가 로스역 누가복음을 수정했는데, 이것이 1890년에 나온 누가복음전이다. 수정본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되자 성서번역위원회는 국내에서 완전한 새로운 성경을 번역하기로 결정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게 이 일이 위임되었다. 그러나 작업은 지연되었고 후에는 언더우드 대신 게일이, 아펜젤러 대신 스크랜톤이 이 일을 추진해 1892120마태복음전이 나왔다. 이 책은 기존 성경의 수정본이 아니라 국내에서 번역된 첫 한국어 성경이었다. 이 성경은 30만부 간행됐다.

 

성경번역자회의 조직과 열매

 

한국어 성경번역사에 있어 중요한 변화는 18935상임성서실행위원회가 조직되고 그 휘하에 성경번역자회를 설립한 일이다. 언더우드 게일 아펜젤러 스크랜톤이 번역위원이었고, 1895년에는 레이놀즈가 추가됐다. 1895년 성서공회가 설립된 일 또한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번역위원들은 분배된 신약 책들을 그리스어 성경과 영어개역성경(RV)을 대본으로 번역하되 한국인 조사들은 한문 및 일본어 성경 대본을 참고해 선교사들을 돕고, 번역을 완성하면 다른 번역자들에게 보내 의견을 청취하고, 이를 다시 원번역자들에게 보내 검토하게 한 뒤 전체 번역자들이 참가하는 번역자회에서 토론과 표결을 거쳐 번역자회에서 통과된 대본을 시안본으로 채택하기로 했다.

 

이런 번역 과정이 충실하게 지켜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노력의 결과로 1895년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이 간행됐다. 마태복음은 아펜젤러가 1892년 번역한 마태복음젼을 번역자회가 시안본으로 승인한 것이지만 마가복음(아펜젤러), 요한복음(게일), 사도행전(게일)은 개인 역본이었다. 곧 누가복음(1896), 갈라디아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이상 1897),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요한1, 2, 3서와 유다서(이상 1898), 에베소서(1899), 그리고 요한계시록(1900)이 번역됐다. 신약의 모든 책이 번역되자 낱권을 묶어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됐다. 이것이 국내에서 번역된 최초의 신약전서인 신약젼셔’(1900). 마태복음부터 로마서까지는 번역자회의 공식적인 의결을 거친 시안본이었으나 그 이후의 책들은 개인 역본들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최초로 신약을 완역한 일은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이를 기념해 190099일 서울 정동감리교회에서 신약성경 봉헌감사예배가 드려졌다.

 

성경 번역 헌신했던 아펜젤러, 결국 순직

 

비록 신약전서가 출판되었으나 고린도전서 이후의 책들은 번역위원회의 수정이나 독회를 거치지 않은 개인역에 불과했으므로 출판과 함께 수정 작업이 시작됐다. 이 일은 아펜젤러, 레이놀즈, 그리고 게일에게 위임됐다. 이 작업을 위해 아펜젤러는 인천을 출발해 번역자회가 모이는 목포로 가던 중 조난 사고로 한국인 조사 조성규(趙成奎, 趙漢奎라고도 불림)와 함께 순직했다. 1902611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장로교 선교부는 게일과 언더우드를, 남장로교는 레이놀즈를 성경번역 사업에 전념토록 배려했다. 결국 이 세 사람의 노고로 수정 작업이 추진돼 1906년에는 성경번역자회가 공인한 공인역본 신약젼서가 출판됐다. 이 성경이 1938개역신약성서가 출판되기까지 한국교회 강단과 성도들이 사용했던 공인본 신약성경이다. 성경번역 사업은 선교사들만이 아니라 한국인 조력자의 수고 또한 적지 않았다. 아펜젤러의 어학선생이자 조사였던 조성규, 게일의 일생 동안의 동료였던 이창직(李昌稙) 정동명(鄭東鳴), 언더우드의 조사였던 송덕조(宋德祚), 레이놀드의 조사였던 김정삼(金鼎三) 이승두(李承斗) 등이 바로 그들이다.

 

(고신대· 이상규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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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복 있는 사람  

 

마태복음 5장 3절

10여년 전 단기선교팀을 이끌고 아프리카 케냐의 해안가 무슬림 지역을 방문했던 때였습니다. 아프리카는 물 사정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해안가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물을 파도 얕게 파면 짠물이 섞여 있기 때문에 깊이 파야 해서 비용이 많이 듭니다. 그런데 무슬림 사원인 모스크에는 언제나 우물이 있습니다. 모스크에서는 이방인이나 이방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우물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고, 무슬림들만 이용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무슬림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바로 옆 모스크에 우물이 있어도 수㎞를 걸어가 물을 길어 와야 했습니다. 그 마을에서 우리가 전도를 시작하자 한 무슬림이 우리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알라는 이렇게 돈이 많아서 우리에게 우물도 파주고 한다. 그런데 너희가 믿는 예수는 가난해서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그를 믿어야 하는가.” 이 말이 오늘도 제 귓전을 때립니다. 돈이 없는 가난한 예수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해주지 못한 것인가. 가난하면 안 되는 것인가.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렇게 가난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는가.

최근 한 선배 선교사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아프리카에 있었던 영적 부흥의 역사를 알았습니다. 아프리카 교회의 역사에도 선교사가 아니라 주민들 스스로 영적인 변화를 통해 부흥을 일으킨 시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도 이 아프리카에 어느 대륙보다 큰 영적 부흥이 있고, 4억명 정도의 크리스천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선배 선교사께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가난했기 때문에 다른 것을 붙잡지 못하고 예수님만 붙잡을 수 있었다. 다른 것은 바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만 의지했다.”

가난이 힘들기는 하지만 그 가난이 우리의 인생과 삶을 진지하게 한다는 것을 저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고 삶의 진정한 가치를 알려고 하는 것이 가난함에 있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어느 인디언 추장이 미국 대통령에게 이런 조언을 했다지요. “어떻게 하늘, 그리고 땅을 팔고 살 수가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아주 이상한 생각입니다. 신선한 공기와 반짝이는 물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팔 수 있습니까.” 세상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존재할 때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유지하고 지킬 수 있습니다. 신앙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믿음도 돈으로 매겨보려 하는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주님의 귀한 가르침마저 뒷전으로 밀리고 있습니다. 저는 무슬림의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전에는 더 많은 재정을 이곳 아프리카에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재정만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저에게도, 저의 자녀에게도 그리고 아프리카 형제와 자매들에게도 돈으로 살 수 없는 예수를 제대로 전하고 싶습니다.

한국의 어느 시골 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드릴 때 그곳 목사님이 부르셨던 노래가 기억납니다. 지금도 그 노랫소리가 귀에 쟁쟁합니다. 그 노래를 부르며 울었던 그 시간을 기억합니다.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잘 생겨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지식으로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이상윤 목사 (케냐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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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예수가 빛이다   

  

마태복음 4장 12∼23절

이사야서의 전체적인 배경은 ‘흑암’과 ‘어둠’입니다. 이사야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올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흑암과 어둠은 절망을 의미합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절망하는 존재’로 규정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실존하는 인간,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제외한 모든 인간’은 절망합니다.

‘믿음 없음’이 곧 절망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절망합니다. 절망은 곧 죄입니다.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흑암과 어둠은 믿음 없이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사야가 이들에게 비쳐올 것이라고 예언한 빛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가장 먼저 “빛이 있으라”(창1:3)고 하셨습니다. 그 빛으로 어둠을 밝히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을 보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께서, 그 로고스(말씀)께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 빛이 비치는 곳마다 생명이 싹트게 하는 참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캄캄하고 공허하고 절망적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정치 지도자들이 미덥지 못하거나 범죄자들이 들끓어서인가요. 주머니 사정이 좋아지지 않아서인가요. 그런 것도 한몫하겠지만 근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에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밝기는 달라집니다. 흑암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의 빛이고 소망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셨고, 부름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여기서 ‘따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가르치셨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께서 가는 곳마다 수많은 무리들이 따라다녔습니다. 하지만 이후 수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성난 군중이 됐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돌변한 이유는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것은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 위에 뿌려졌습니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잔인함은 흑암이라 말할 수 있으나 그들의 순교는 결코 흑암이 될 수 없습니다. 고난 속에 감춰진 십자가의 영광이며, 그 영광의 빛은 지금까지도 우리를 강하게 비춥니다. 진정한 영성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순교한 이들의 삶 속에서 빛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빛을 발했던 것처럼 말이죠.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주현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마4:16)는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지어다.

김동진 목사 (맑은샘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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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공평하신 하나님을 아는 온전함    

 

마태복음 5장 38∼48절

한 학생이 “풍족하고 자원이 넘치는 나라가 있는 반면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 놓인 나라도 많은데 왜 하나님은 이런 불공평함을 그대로 지켜보시느냐.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 끊이지 않는 각종 범죄를 왜 그냥 내버려두시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정말 불공평하게 느껴지겠구나. 그럼 모두가 온통 얼음과 가스로 돼 있는 저 목성과 토성에서 살면 공평할까.”

 

과연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똑같다면 진정 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찾아 나선 공산주의가 과연 진정 인간이 꿈꾸는 유토피아를 만들었는지요?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꿈꾸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참된 복이 무엇인지,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또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5:45)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인가 잘해내면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억울해도 참고, 손해를 봐도 넘어가고, 손가락질 당하거나 폭력을 당해도 침묵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고 천국을 소유하게 됐는지요? ‘크리스천 콤플렉스’를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크리스천은 늘 무언가 이익을 보지 못하고 누군가 화를 내면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참아야 하며 억울해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덮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도 인내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우리의 한계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판단해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맹세하고 무엇을 해냈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과연 한계가 뚜렷한 우리가 무엇을 기준으로 공평함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까. ‘그 어떤 것에도 맹세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에 그 답이 있습니다. 하늘로도 땅으로도 저 성읍으로도 심지어 우리의 것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머리로도 하지 말라고 명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여름철에 내리는 비가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지만 농부들에게는 작물을 잘 길러내는 데 필요한 단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힘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은총은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가장 연약한 곳을 채워주십니다. 그 은총을 누가 막아내거나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사람의 기분과 상황을 감안해 쉽고 편안하게 전해지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감동이나 재미를 주려고 전파되는 게 아니라 선포 그 자체에 목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평함입니다. 복음은 신분과 지역과 환경을 초월해 전파되고 있습니다. 이를 믿는 가운데 우리가 온전함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우리의 자랑은 온전히 아버지 하나님인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3:23)고 말했습니다. 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오직 예수 안에서 온전함을 입어 공평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안신광 목사 (큰빛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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