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자녀들을 성인으로 훈련시키기

 

한국 사회에서 성인으로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되는 것은 사안에 따라 다르지만 19세 전후이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성인으로 간주된다. 대표적으로 그들은 선거권을 갖게 되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게 된다. 한국 교회는 어떨까? 놀라웁게도 한국 교회는 교회법상 15세부터 성인으로 간주한다. 입교식은 유아세례를 받은 이가 정식으로 교회의 정식 멤버로 등록되는 예식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법상으로는 한국 사회보다 훨씬 진보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실제 교회 생활 속에서 그들은 전혀 성인으로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아니 훈련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개혁교회에서 입교식은 "신앙 고백"(confession of faith)라고 불리운다. 원래 이 예식의 기원은 견신례(confirmation)에 있다. 동방교회는 이것을 "기름부음" (Chrismation)이라고 불렀고 대개의 경우 유아 세례 직후에 시행한 반면, 서방교회는 일정한 성인이 된 후에 교리문답의 과정을 거쳐 이 예식을 시행하였다. 서방교회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개혁교회는 이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카톨릭에서 이 예식을 7가지 성례 중 하나로 보는 반면, 개혁 교회에서는 이 견해를 부정하였다.

 

개혁교회가 입교를 성례로 거부하였다고 해서 이 예식을 소홀이 생각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개혁교회의 부모들은 아이가 성년이 되면(보통 고등학교 2학년) 입교를 위한 목사가 인도하는 교리문답 교육에 1주일에 한 번씩 참여시킨다. 교육이 끝나면 당회에서 심사하여 교인으로 받을 것을 결정하고 오는 주일날 예배 시간에 입교식을 한다. 여기까지는 우리 한국교회와 매우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한국 교회는 이것이 매우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는 반면, 개혁교회에서는 철저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좀 독특한 것은 입교식을 하는 시간에 목사는 당회에 제출된 개인의 신앙고백서를 읽는다는 것이었다. 그 속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 학생의 진실한 고백이 담겨져 있다. 그 학생들은 좌석 제일 앞에 앉는데 이어지는 성찬식에서 가장 먼저 포도주와 잔을 분배 받는다. 예배가 끝나고 나면 목사와 장로들이 가장 먼저 와서 온교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축하의 악수를 나눈다. 그들이 교회의 정식 회원이 되는 순간이다.

 

개혁교회에서 이렇게 입교식이 끝나면 정말로 교인이 된다. 그것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그 학생들이 공동의회에 참석하는 것이다. 공동회의는 보통 주중 저녁에 실시되는데, 아버지(내가 다녔던 교회에서는 여성에게는 투표권이 없으며 공동의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자기 자녀들을 데리고 그 자리에 참석하게 한다. 보통 자녀들은 아버지 옆에 앉는다. 공동의회는 물론 매우 질서정연하게(decently) 이루어진다. 예를 하나들면, 공동의회는 회의실에서 실시되었는데, 1인용 의자가 8개씩(중간에 통로를 남기고) 배열되어 있었고,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착석을 하였다. 따라서 몇명이 참석해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갓 입교한 학생들은 개혁교회의 정치를 자연스럽게 배운다.

 

한 번은 노회에 참석한 일이 있는데, 놀란 것 중의 하나는 고등학교 학생들이 수업시간 중 시간을 내어 방청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학생들은 이 교단에서 운영하는 기독교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다. 학생들은 자기 노트에 다음 시간에 발표할 내용을 메모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보고 배움으로써 책임있는 성년이 되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런 훈련들을 어려서부터 받아서 인지는 모르지만, 개혁교회의 고등학생들은 대부분의 경우 (덩치도 크지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정말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 나는 한국교회의 정서와 큰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공동의회에 잘 참석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의 경우에는 겉으로는 참석하라고 광고는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참가하는 것을 막는 분위기이다. 솔직히 회의문화가 천박한 경우가 많아서 아이들의 참석을 가급적 막는 분위기이고 이것은 아이들에게 교회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겨주게 된다.

 

우리가 이런 좋은 개혁교회의 전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어른들의 뼈를 깎는 자성의 모습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보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어른들은 (나의 세대도 마찬가지) 제대로 된 교회 정치의 모습을 본적이 없다. 인간들은 원래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모르면, 겸손히 성경과 교회의 전통 속에서 참된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보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가 이 땅에서 개혁교회를 참된 모습을 이루기 위해서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겸손하게 자신들의 무식을 인정하고 성경에서 참된 개혁교회의 원리를 연구하고 때로는 협력하고 연구하여 온 성도들이 함께 훈련을 받는 길 외에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에게 최선을 다하여 책임있는 성인으로 훈련시키는 것이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고 여기에 개혁교회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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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예배를 향하여

 

개혁주의 예배관 / 개혁주의를 말하다

이성호 교수

 

1. 서론: 예배의 대상이신 삼위 하나님

예배의 현장에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과 예배를 드리는 그의 백성이 존재한다. 둘 중에 누가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당연히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예배를 받으시는 분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온전한 예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오늘날 예배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예배를 받는 분에 대한 논의는 진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마치 예배를 받는 분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배를 받는 분에 대한 논의가 없으니 예배학이 하나의 인간학이 되어 버린다. 예배학이 범주 상 신학에 속한다면 예배의 주된 관심사도 예배를 받는 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예배와 나쁜 예배를 나누는 기준도 내가 얼마나 예배 속에서 은혜를 받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나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셨는가?”가 되어야 한다. 또한 예배학에 있어서 핵심 질문도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드릴 것인가?”가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예배를 받으시는가?”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를 거짓 종교와 구분 짓는 핵심교리이다. 이 교리가 이해하기 힘든 교리라고 해서 아예 제쳐 놓아서는 안 된다. 비록 이해하고 설명하기는 힘들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체험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예배는 그것을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는 현장이다. 예배의 부름 속에서 삼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당신이 베푸신 잔치로 초대하시고, 우리는 송영을 통하여 그 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 삼위 하나님은 설교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 분에게 찬송과 기도로 응답한다; 삼위 하나님은 성찬 속에서 굶주리고 배고픈 우리의 영혼에게 참된 양식과 음료를 주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 양식을 받아 먹는다; 삼위 하나님은 축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는 아멘으로 화답한다. 예배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예배는 왕이신 삼위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함께 누리는 언약적 친교(covenantal communion)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신학과 예배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된 목적에 대해서 질문한다. 여기에 대한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고신교회의 진정한 고백이라면 예배는 교회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위치한다. 참된 예배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소교리문답이 가장 첫 질문에서 예배가 신자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라는 것을 두드러지게 교회에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교리문답은 교리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교리 혹은 신학은 예배를 위해서 존재한다.

 

신학과 예배는 분리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예배가 신학이고, 신학이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을 테오로기아(theologia)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theos)’(logos)’의 합성어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혹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로 번역될 수 있다. 신학을 이렇게 정의한다면 예배야 말로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은 설교를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들은 백성이 하나님께 기도와 찬송으로 응답하기 때문이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신학은 이성적인 성격이 강하다면 예배는 경험적 혹은 체험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신학적 작업을 통하여, 우리는 보다 분명하고 풍성한 이해를 가지고 예배에 임하게 되고, 그 예배의 결과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신학에 대하여 보다 굳건한 확신을 얻게 된다.

 

예배가 본질적으로 체험적이기 때문에 올바른 신학적 작업이 없다면 원래의 순수성에서 벗어날 위험성을 항상 안고 있다. 이것은 성경 자체가 그렇게 증거하고 있고, 교회 역사 속에서도 입증되어 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숭배의 늪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하였으며, 신약 이후의 교회에서도 순수한 예배 속에 세속적인 누룩이 항상 침투해 들어 왔다. 중세 로마 교회가 교리적으로 타락했을 때, 문제는 교리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예배의 타락으로 이어졌다. 만약 교리 자체만이 신*구교 사이에 문제였다면 종교개혁은 단지 교리의 개혁으로 끝났을 것이고 교회의 분열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개혁파 교회가 출현하게 된 결정적이 이유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고 싶은 거룩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이전의 예배 형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예배가 교회에서 드려지게 되었고, 참 성도는 그 예배 안에서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3. ‘오직 성경과 예배

 

일반적으로 종교개혁 당시 카톨릭과 개신교의 근본적인 교리의 차이를 이신칭의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들은 성찬에서 찾기도 한다. 처음에는 그렇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 그룹의 본질적인 차이는 권위에 관한 것이 분명해졌다. 개신교의 교리가 맞는지 아니면 로마교회의 교리가 맞는지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최종 권위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사소한 교리적 문제도 해결될 수가 없었다. 두 그룹이 결국 하나가 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 최종 권위에 대한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 두 그룹은 모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였으나 카톨릭은 성경의 충분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교회의 전통을 성경과 동일한 권위로 인정하였다. 반대로 개신교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충분하며, 모든 종교적 논쟁에 있어서 최종적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데, 언뜻 보면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 원리 때문에 두 교회가 결국 분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오직 성경은 특별히 예배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개혁교회는 이전에 전통의 이름으로 관습화되어 왔던 예전들을 비평적으로 검토하여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거나 부족한 것이 있으면 철저하게 개혁을 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개혁교회의 예배는 철저하게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예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개혁교회의 예배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성경에 충실한 예배라고 할 수 있겠다. 개혁교회의 역사는 바로 이 예배를 교회 안에 올바르게 정착시키기 위한 긴 투쟁의 역사였다.

 

4. 규범적 원칙(Regulative Principle): 개혁교회 예배원리의 독특성

 

오직 성경의 원칙을 교회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특히 이것은 예배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였다. 개신교 교회가 모두 오직 성경의 원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각 교파들 사이에 예배는 다양성이라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루터파와 개혁파의 예배가 다르고, 개혁파와 재세례파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다. 이 말은 오직 성경이라는 원칙을 각 교파마다 달리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터파의 경우 성경의 명시적인 가르침과 충돌하지 않는 한 성경이 허용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 결과 루터파는 성경의 가르침과 상충하는 로마교회의 화체설은 거부하였지만 로마 교회의 성만찬 예식은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한편 재세례파의 경우에는 성경이 직접적으로 명령한 것만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성경에서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가르침이 없는 유아세례는 예배에 있어서 거부되었다. 반면, 개혁파는 성경이 명시적으로 명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성경의 전체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고,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추론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필연적이고 선하다면 성경의 가르침으로 인정하였다. 유아세례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 특히 언약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너무나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예배에 대한 논쟁은 영국교회에서 보다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영국교회의 교권주의자들은 예배의 일치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영국교회는 영국 안의 모든 교회들이 따라야 할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작성하였다. 이름과 달리 이 책 속에는 기도에 관한 가르침뿐만 아니라 예배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예배 형식에 관한 세세한 규정을 담고 있는데 영국교회의 머리라고 불린 영국 왕들은 모든 영국교회 회원들이 이 책의 규정에 따라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엄하게 명하였다.

 

공동기도서는 내용에 있어서 로마교회의 반성경적 혹은 비성경적 예배를 배척하였고, 심지어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대륙의 개혁교회의 영향을 많이 반영하기도 하였지만, 보다 더 철저하게 예배가 개혁되기를 원하였던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이들은 청교도라고 불렸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공동기도서의 가장 큰 문제는 개 교회의 자유가 박탈당하였다는 사실에 있었다. 청교도는 성경이 명시적으로 규정한 것만이 신자의 양심을 구속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은 개 교회의 자유에 맡겨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규범적 원칙이라고 하는데,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모토가 예배의 영역에 적용된 것이다.

 

예를 들어 성직자가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는 성경에서 침묵하고 있는 비본질적인 영역(아디아포라)이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각 교회가 알아서 판단할 문제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각 교회에 주신 자유의 영역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고 보았다. 반면 영국교회 지도자들은 각 교회에 그와 같은 자유가 주어지게 되면 교회의 가시적 일치가 상실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기 때문에 성경과 명백히 상충하지 않는 한 비본질적인 문제는 교회의 지도자, 보다 구체적으로 주교회의에 의해 결정되어 통일성 있게 실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예배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위해 오랫동안 투쟁을 하였고 마침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예배모범에서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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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와 부목사

 

한국 개신교회에서 직분을 바라보는 관점이 계서적(Hierarchy)인 관점으로 굳어진 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목사, 장로, 집사는 평등한 관계가 아닌 수직적인 관계로 바뀌었다. 더구나 목사, 장로, 집사의 수는 피라미드 구조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구조는 자연히 성도들에게 목사는 가장 높고, 그 다음은 장로이고, 그 다음은 집사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심어준다. 하지만 개혁교회는 일반적으로 장로의 수와 집사의 수를 비슷하게 함으로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여 왔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같은 직분 안에서도 서열화가 진행되어 왔다는 것이다. 목사 안에는 원로목사, 공로 목사, 담임목사, 수석 부목사, 부목사, 교육목사로 분화 되고, 장로 안에서도 선임장로를 정점으로한 서열이 매겨지며, 집사에도 안수집사와 서리집사로 구분되었다. , 단순하게 목사, 교사(신학교수), 장로, 집사라는 단순한 개혁주의적 직분이 보다 복잡한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을 그냥, 현대 교회에서 나오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안에는 로마 카톨릭교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그대로 안게 될 수 있다는 데 큰 문제가 있다.

 

종교개혁 당시, 로카 카톨릭 교회 안에는 수많은 직분들이 있었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여, 추기경, 대주교, 주교, 사제, 부사제, 등등. 개혁가들은 이러한 것이 성경에 전혀 맞지 않다고 공격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누리게 된 단순한 직분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특히 직분과 관련하여 그들은 적어도 2가지 가장 근본적인 주장을 참된 교회에 확립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직분의 평등"이다. , 목사와 장로 집사는 하는 일만 다를 뿐이지 다 동등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적용시킨다면, 집사는 장로가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집사가 장로가 될 수도, 나중에 목사가 될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집사는 집사의 일을 잘하는 사람을, 장로는 장로의 일을 잘하는 사람을, 목사는 목사의 일을 잘하는 사람을 교회에 세워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또한 목사직 자체에도 적용이 된다. 목사직 역시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목사직 안에 대주교, 주교, 사제, 부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목사들은 다 동등하다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이다. 이것을 오늘날 한국교회에 엄격하게 적용시킨다면, 목사 안에 담임목사, 부목사, 협동 목사가 계서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는 목사직을 복잡하게 함으로 종교개혁 이전시대로 돌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목사에 대한 개혁교회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목사는 반드시 교인들의 선출에 의해서 임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개인적 소명은 교회의 소명에 의해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로마 카톨릭에서는 주교가 성직 임명에 있어서 모든 권한을 행사하고, 주교의 임직은 교황이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였다. 목사의 임직을 교인들에게 돌려 준 것은, 직분론에 있어서 개혁신학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부목사를 보도록 하자. 부목사를 교회에서 청빙함에 있어서 대부분의 교회에 있어서 담임목사가 거의 일방적으로 결정한다. 물론 당회의 허락과 제직회를 통과해야 하지만, 거의 형식적일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목사는 그냥 담임 목사가 알아서 결정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을 한다.

 

더구나 담임 목사는 부목사를 해임시키는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런 장치들이 만들어지게 된 상황을 이해는 할 수 있다. 부목사가 자기 편을 만들어 언제든지 교회를 분열하게 만들 위험이 있으니 그 위험의 싹을 처음부터 자르는 것이 지혜롭다고 판단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부목사로 하여금 교인들을 위한 목사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담임 목사를 위한 목사가 되게 한다. , 부목사에게 중요한 것은 담임 목사의 의중이지, 교인들의 생각이 아닌 것이다. , 이것이 로마 카톨릭교의 주교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무엇인가? 개혁가들은 바로 일반 성도들을 위한 목사직의 확립을 위해 그토록 싸웠는데, 오늘날은 그 반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담임 목사든, 부목사든, 목사는 교인들의 부르심을 받아 청빙되어야 함이 개혁신학의 근본원리이다. , 부목사는 담임목사가 부르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혁신학을 지향하는 우리교회는 이 원리를 가능한 한 살리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운영상 담임 목사의 의중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을 교인들이 청빙하는 것도 교회의 덕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는 교회의 헌법도 존중해야 한다.

 

따라서 가장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을 찾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마 부목사는 교회의 전부 보다는 어떤 한 기관을 맞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회에서 부목사를 철저하게 심사하여, 섬기게 될 기관에 속한 성도들에게 물어보게 하는 것은 어떨까? 예를 들면, 중고등부 담당 부목사를 청빙한다면, 부목사의 지원자 중에서 당회가 잘 심사한 다음, 담임 목사와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을 2명 정도 선정한다음, 최종적인 선택은 중고등부 담당 교사들과 학부형들에게 주는 것이다. 이것은 담임 목사가 마음만 먹는다면, 현 교단 헌법 안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개혁교회의 근본 원리를 거스리지 않으면서 또한 담임 목사와 부목사의 긴장관계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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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세례Baptism

세례(洗禮) 또는 세례 성사(洗禮聖事)는 물을 이용하는 정화의식이다. 세례는 기독교, 만다야교, 시크교를 포함하여 여러 종교에서 행해진다. 기독교의 세례는 유대교의 의식인 "미크바"에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영세(領洗)라고 한다.

초기 기독교 예술에서의 침례.

 

기독교의 세례

파울로스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영적(靈的)으로 연합되어 그의 죽음에 동참한다고 설명한다.대부분의 기독교 종파에서는 물을 이용하는 세례 의식을 행하고, 이를 예수께서 성만찬과 더불어 친히 제정한 성사라고 믿는다. 하지만 세례의 의미나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자격, 세례의 형태 등에 대해서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령운동을 강조하는 오순절 교회를 비롯한 몇몇 종파에서는 물에 의한 세례는 성령에 의한 세례로 대체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물에 의한 세례는 기독교 전통에 의해 불필요하게 계승되었다고 보고 있다.

 

세례의 형태

기독교 공동체의 전통에 따라 세례의 예식은 다음과 같다.

침수례 - 몸 전체를 물속에 담그는 방식 (침례라고도 한다.)

살수례 - 물을 머리에 뿌리는 방식

관수례 - 물을 머리에 붓는 방식

이 중 정교회나 침례교, 오순절교회에서는 침수례를, 로마 가톨릭교회는 관수례를 실시하며, 성공회, 감리교, 장로교 등의 개신교 종파는 관수례를 실시한다. 원래 고대에 채택되던 형태는 침수례이나, 살수례와 관수례는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 시간을 줄이기 위해 약식으로 제정된 전통이다.

 

세례의 의미와 기능

기독교 내에서도 세례의 의미와 효력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루터교, 성공회, 감리교 등

세례는 구원을 받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며 성사의 요구조건으로 하고 있다. 한 예로서,마르틴 루터는 1529년에 "The Large Catechism"(대요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세례의 능력과 효과와 유익과 열매는 구원이다. 왕자가 되기 위해 세례를 받는 사람은 없다. 단어 그대로 "구원받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죄와 사망, 사탄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가 그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다. ”

 

성공회(聖公會)에서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6:3-4("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를 근거로 세례성사를 죄의 용서와 구원에 필요한 성사(Sacrament)로 보고 있다. 또한 어른과 어린이 모두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어린이에게 사제가 세례성사를 집전하는 유아세례가 있다.

침례교

침례가 가치있는 관습이긴 하지만 아무런 성스러운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은 보이지 않고 내적인 것이며, 성례전 자체와는 독립적인 것으로서, 침례는 이 능력의 결과를 외적으로 증언하는 행위라는 견해이다. 침례 '의식'이 의미있고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치나, 유아세례는 반대한다.

개혁주의 (개혁교회 및 장로교)

개혁주의는 예수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보며, 세례를 성찬과 더불어 예수가 그의 백성들에게 시행하라고 제정한 성례전으로 본다. 이는 구약의 할례와 유월절 의식이 신약의 교회에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언약 신학의 한 내용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자기 위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라고 본다. 그것을 물로 씻는 형태로 제정된 것은 다른 종파들과 같이 예수의 피흘림으로 죄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의 징표'라는 의미에서 구약 시대에는 아직 신앙이 확인 되지 않은 어린 아이에게도 할례를 시행했는데, 이것을 본받아 개혁주의 역시 유아 세례를 기독교 가정 내에서 시행하는 것을 동조한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

회복된 기독교를 자처하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에서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의 계명을 지킨다는 성약의 표시이며, 죄를 회개하여 침수로서의 침례로 물로 장사 지내고 물에서 올라 옴으로서 과거의 옛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표징이며, 하나님의 교회의 백성이 된다는 선언이 되고, 교회 회원이 되는 관문이 된다.

 

침례를 받은 이에게는 성신의 안수례가 주어지며, 매주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기념하는 성찬 의식을 행함으로써 침례 성약을 새롭게 한다.

 

유아들(정신박약자 포함)은 죄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의 상속자가 되므로 침례를 행하지 않는다.[1] 어린이에게 복음을 가르쳐서 만 8세 이후에 성약을 맺게하여 침례를 베푼다.

 

침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합당한 절차에 의해 교회에서 승인된 방식에 따라야 함을 믿으며, 신권의 권능을 가진 이로써 지명받은 자라야 하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줄 수 있다. 침례를 줄 수 있는 신권은 아론 신권이라고도 하는 소신권 중에서 제사 신권이 있고, 대신권으로서 장로나 대제사가 있다. 이들의 교리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침례 요한) 또한 아론 신권을 가진 이었다.

 

1829515일 몰몬경을 번역하던 조셉 스미스와 이를 기록하던 올리버 카우드리가 서스케하나 강변에서 침례 성역에 관해 알고자 기도하던 중에 침례자 요한이 부활한 영광스러운 신분으로 이들에게 나타나 아론 신권을 안수성임하였는데, 이 교회에서는 매년 이날을 신권회복 기념일로 기린다.

 

합당한 신권소유자는 합당한 회원에게 회원들의 지지하에 안수함으로써 신권을 부여하고 성임하게 된다.

 

침례 받을 사람과 같이 물에 들어가 침례 주는 이가 침례 의식문을 선언하고 침수로서의 침례를 주는데 그 의식문은 다음과 같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위임을 받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의 이름으로 그대를 침례하노라. 아멘"

 

침례를 받은 개종자는 대신권 소유자로부터 성신의 안수례를 받게 된다.

 

Masaccio (14251426), Baptism of the Neophytes (it), Brancacci Chapel, Florence. This painting depicts baptism by affusion, which continues in the East except for infants, but in the West it had dropped almost completely out of use by the 15th century. The artist may have chosen an archaic form for this depiction of baptism by St. Peter.

성 베드로에 의해 침례 묘사

 

세례의 자격 /신자의 세례

 

세례(침례)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은 교파마다 다르나, 대개 자기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로서, 글로서 신앙을 고백하거나 공개적으로 신앙을 선언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유아 세례

로마 가톨릭교회, 성공회, 장로교 등에서 행하는 유아 세례의 경우에는 세례를 받고 신앙고백을 한 부모가 자녀를 대신하여 유아세례의 자격을 받을 수 있다. 유아 세례의 기록은 성서에는 없지만 4세기에 교부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에 의해 그 필요성이 기술되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세례가 죄를 씻어주기 때문에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도 행해져야 하는데, 이는 갓난아기도 원죄에 의해 더렵혀졌으며 따라서 세례를 받기 전에 사망할 경우 죄의 저주를 받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보다 한 세기 전에 교부인 터툴리안은 믿음으로 받는 세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 "상황과 개인적인 성향, 또한 나이를 고려하여 세례를 늦추는 것이 좋다. 하지만 어린 아이의 경우에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 수 있게 되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라." ”

 

성공회의 종교개혁 전통을 강조하는 저교회파 성공회를 포함한 많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세례가 "내적인 변화를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세례는 그리스도를 따라 행해지는 것이며, 그들의 삶을 그리스도께 맡기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났을 때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편지 517) 그 내적인 변화를 다른 사람들에게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세례

기독교에서 침례가 교회 공동체로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일정한 의식이 된 것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이 예언자라고 믿는 사람들은 그가 준 침례를 앞으로 올 메시아에 대해 준비하는 회개의 메시지로 받아들인다.(루가 복음서 33-6, 8) 요한은 죄사함이 있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죄의 얼룩은 지워질 수 있는 것이며, 타락한 행위로부터 돌이켜 주님의 길로 돌아갈 때에 지워질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은 세례 의식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세례 요한이 그의 세례가 충분한 것이 아니며, 회개만으로는 죄로부터의 분리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고 가르쳤을 것이며, 죄로부터의 해방을 위해서는 그가 줄 수 없는 더 큰 세례가 필요하다고 가르쳤을 것이라 믿고 있다. 루가 복음서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자신이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안 되는 높은 분이 오셔서 성령과 불로써 침례를 주실 것이라 말하였다. (루가 복음서 316) 기독교에서는 세례가 보여주는 것은, 사람이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려는 노력은, 죄의 대가를 대신 지시는 하느님의 어린양(라틴어: Agnus Dei)에 의해 대체되고 완전해진다는 것이라고 믿는다.

 

마태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열두 제자에게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임무를 맡긴다.(마태오 복음서 2819) 이 구절은 세례의 일반적인 방식이 되었는데, 실제로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은 갈릴래아의 예수에서 마태오 복음서 2819절을 교회사적으로 해석하였다. 안병무 선생에 의하면 기독교의 성격이 예수운동에서 보편교회로 바뀌면서 직제와 전례를 정하게 되었으므로 예수가 성부, 성자, 성령으로 세례를 주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들어간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로는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만으로 세례를 준 것으로 되어 있다. (사도행전 816, 1048, 195)

 

유대교의 정결 의식

세례는 유대교의 의식을 부르는 말로 사용되지는 않지만, 유대교 율법에서 정한 정결의식인 미크바(Mikvah)에서 세례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유대교의 경전과 다른 문서들에는 종교적인 정화를 위한 목욕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제정되어 있는데, 이는 "종교적으로 정결한 상태"를 위한 것이다. 한 예로서, 시체를 만진 유대인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 "오염된 상태"가 되어,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mikvah를 행하여 정결한상태가 되어야 한다. 유대교로 개종하기 위해서는 물에 잠기는 의식이 요구된다. 이러한 의식 전반에 걸쳐, mikvah에서 물에 잠기는 것은 정화와 회복을 의미하며, 유대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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