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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다원주의의 심각성

 

기독교 역사와 전통을 가진 유럽과 미국의 교회에서는 종교다원주의가 타종교도 기독교와 대등한 종교로 인정하는 정도이지만, 한국을 위시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다종교 사회에서는 종교다원주의가 혼합종교의 형성을 유발하고 촉진한다. 한국에 종교다원주의가 확산되고 혼합종교가 성행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심각하다.

“오소서 성령이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주제 아래 열린 WCC 총회에서 무당굿을 하며 해방신학에 초점을 맞춰 읊은 정현경의 초혼문(招魂文)의 내용을 보면 실로 황당할 뿐이다.

“오소서, 우리들의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에 의하여 이용당하고 버림받은 검둥이 여종, 이집트 여인 하갈의 영이여, 오소서렁렁렁” 하는 말로 시작하여, 다윗에게 죽임을 당한 우리아의 영, 입다의 딸의 영, 헤롯의 군사들에 살해당한 남자 아이들의 영, 잔 다르크의 영, 마녀사냥으로 말미암아 불타 죽은 중세기 여인들의 영, 십자군 전쟁 때 희생된 사람들의 영, 기독교가 식민주의 시대와 이교도 세계에 대한 우월 의식을 지니고서 선교하던 시대에 학살된 토착민들의 영을 차례로 불러들인다(미출판된 자료집: WCC, 천주교, WEA 관련자료,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고려), 7).

KNCC의 홈페이지 기도자료실에 버젓이 올려있는 모 기독교대학의 교수이며 서울 모 교회 교육목사가 작성한 “생명의 강 살릴 종교 여성 공동기도문”을 보면 혼합종교화의 심각성을 실감하게 된다.

 

오, 하느님, 부처님!

살려 달라 매달려야 하는 건 우리 자신인데,

거꾸로 당신이 우리를 향해 애원하시다니요?

무력한 당신, 한없이 작은 당신, 아직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당신,

한 중생이라도 더 구제하기 위하여 극락 언저리를 서성대는 당신.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아래로 아래로 오랜 세월 흐르는 강물은 바로

당신의 눈물입니다.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

 

하늘에 계신 하느님, 부처님,

성모 마리아님과 소태산 대조사님의 마음에 연하여

오늘 4대 종단의 종교여성이 일심(一心)으로 간구하오니

부디 이 땅에서 죽임의 굿판 대신에 신명나는 살림의 굿판이 벌어지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
 

나무아미타불, 아멘.

 

그뿐 아니다. 2009년 6월 18일의 한 시국 성명에는 “부엉이 바위에 묻어 있는 핏자국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진 예수의 죽음을 봅니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 1,024명의 목사들이 서명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

 

지난 50년의 역사를 보면 WCC 지도부의 교회 통일에 대한 이상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WCC 신학은 우리 선배 목사님들이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급격하게 극단적인 방향으로, 즉 탈기독교적인 종교다원주의로 발전해 왔으며 그것이 세계 교회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1960대 초반에 한국에서 선교적인 차원에서 토착화 신학을 주장하던 이들이 1990년대에는 종교다원주의 입장에 서 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의 입으로 종교다원주의는 토착화 신학의 종착점이라고 실토하고 있다. 그것은 혐오스런 일이긴 하나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종교다원주의는 역사적인 예수를 부정하고 칼케돈 신조를 폐기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종착점이기 때문이다.

 

WCC가 추진해 온 사회 참여와 사회봉사만 하더라도 급진적인 자유주의 신학의 견지에서 추진하는 것이어서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신앙과 신학을 가진 교회들은 따르기 힘들다.

 

역사에 사신 나사렛 예수가 곧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지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으면서, 그리고 잘못된 신앙을 가진 자들을 경계하고 교회에서 축출함으로 교회의 성결을 지키라는 말씀은 외면한 채 교회더러 하나가 되라는 말씀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켜야 하는 말씀이라고 강변하는 것은 모순이다.

 

WCC의 회원이 되고 있는 교회에는 복음적이며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WCC도 그러하지만 그 어떤 단체나 기관을 불건전한 신앙과 사상을 가진 개인이나 지도부가 관장했을 경우 그 단체나 기관은 대체로 지도자나 지도부의 지도를 받고 따르게 되어 있다. 특히 기독교 학교나 신학교의 경우 지도자 한 사람의 영향으로 학교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역사와 우리의 주변에서 목격하고 경험하면서 우리는 안쓰럽고 통분한 마음을 금하지 못한다.

 

오늘에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도 ‘성령 충만’과는 다른 개념인 ‘영성’이란 말을 즐겨 사용하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이 말이 유행하게 된 것은 1990년대부터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의와 교파 교회들이 가진 신앙고백을 외면하거나 폐기하고 그 대신에 모든 교회들에 통할 수 있는 막연한 ‘영성’을 강조하는 WCC 신학의 영향이다.

 

‘영성’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종교성’과 같은 말로 모든 종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적인 요소이다. 좀 더 좁혀서 기독교에 국한하여 좀 더 긍정적인 의미로 이해하려고 하더라도 ‘영성’은 성령에 호응할 수 있는 우리 인간이 가진 영적 속성이라거나 영적 상태 혹은 영적 분위기 정도의 개념을 가진 말이다. 중세의 신비주의자들이 즐겨 쓴 말이다. 그러므로 ‘영성’은 ‘우주적 그리스도’, ‘하나님의 선교’라는 말과 함께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종교로 유도하는 말들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박형룡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이 일찍이 WCC의 신학과 목적을 직시하고 경고를 발해 준 데 대하여 우리는 그들의 혜안과 신앙을 높이 평가하며, 그들의 지도력에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 분립의 아픔을 무릅쓰고 그들의 경고에 호응하여 WCC에 대치하는 선을 구축함과 동시에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고백을 보수해 온 선배 목사님들을 치하하며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하나님이 피로 사신 교회를 노략하는 이리떼들로부터 지키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말씀(행 20:27-31)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7, 8)고 하는 경고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하여 선배들이 구축한 방어선을 확고히 지켜야 한다.

 

문화를 배경으로 기독교 교파 교회들을 넘어서서 모든 종교들과 연합하여 엄청난 세력으로 몸을 불리고 있는 WCC에 대항하거나 그것과 경쟁하려면 연합 전선을 펴야 하고, 능동적으로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넓히는 일에 힘을 다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전통적인 정통 신앙을 표방하는 동일한 신앙고백을 가진 교단들은 명분 없는 분열과 분립을 지양하고 교단들의 연합과 일치를 추구하며 선교에서 협력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 출처: 기독교 개혁신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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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연합과 에큐메니칼 운동(WCC)에 대한 소고


 

김영재 교수(합동신학원)

 

 

시작하는 말

 

2013년 세계기독교연합회(WCC)가 한국에서 개최되는 일을 앞두고 한국기독교협의회(KNCC)가 거기에 속하지 않은 회원 교회에 동참을 권유하며 협조를 요청하고 있어서, 이러한 요청에 한국 교계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논의를 거듭하고 있다.

현재 한국기독교협의회에 속한 교단 교회는 기독교 장로회(기장), 예수교 장로회(통합), 기독교 감리회, 성공회, 구세군, 복음교회, 정교회, 순복음교회(기독교하나님의성회)의 8개 교단이다.

KNCC와 양립하는 교회 연합 조직으로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있다. 거기에는 보수적인 장로교회를 비롯하여 보수적인 복음주의 교회들이 속해 있으나, 통합측 장로교단과 기독교하나님의성회가 양 기관에 다 회원이 되어 있으므로 한기총이 WCC에 반대하는 기관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한국 교회 여러 교단을 상대로 한 여론 조사에서는 WCC에 대한 찬반의 의견이 거의 반반이었다. 그것은 KNCC에 속하지 않은 교회 사람들 가운데서도 찬성하는 사람들이 상당 수가 된다는 뜻이다. 보수적인 교회 교단 사람들도 꽤 많은 사람들이 찬성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교회 연합의 명분이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은 주 예수께서 소원하시고 명하신 것이며, 사도 바울도 교회에 관하여 말씀할 때 간곡이 부탁하는 것이다. 반면에 교회가 하나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WCC를 반대하는 이들은 무엇 때문에, 무슨 명분으로 반대하는 것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1. 역사 속에 나타난 교회의 분열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단으로 정죄 받은 교회들이 분립하는 경우들이 더러 있었다. 1054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하는 동방교회와 로마를 중심하는 서방교회로 크게 둘로 분열하였다. 교회가 동방과 서방으로 나누진 원인은 언어, 문화, 역사적 배경의 차이가 너무 커서 더 이상 하나로 싸맬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양 교회는 15세기에도 하나가 되려고 회의를 열어 노력하기도 하였다.

동방과 서방의 교회가 각기 유지해 오던 중, 16세기 종교개혁이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면서 서방 교회는 여러 교파와 국민 교회들로 분열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교회들이 각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 말로 성경을 읽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예배를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분열된 것이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사람들이 알아듣든 말든 라티어로 예배하고 성경도 라틴어 성경만 허용하였다. 그러한 처사는 교회를 하나로 유지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으나 사람들은 무지에 내버려둠을 당하였으며, 그럼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부패하게 된 것이다. 로마 가톨릭과 종교개혁 교회는 서로 다시 연합해 보려고 더러 시도하였으나 그럴 때마다 교황주의 및 사제주의와 성찬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재확인할 뿐이었다.

개신교 교회들이 다시 연합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강하게 갖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18세기 말에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부흥이 교파를 초월하여 확산 되고, 교회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부흥에 참여하면서부터이다. 특히 아직 교회 전통이 없는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은 누구보다 더 교회 연합에 대한 이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파를 초월한 선교회들이 서게 되었으며,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이 하나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일도 있었다.

선교사들이 전하는 복음, 예수 그리스도, 회개, 중생, 새 사람으로 사는 일 등의 교리는 실은 모든 교파 교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신앙이다. 분수를 두고 말하자면 공통분모인 셈이다. 그래서 교회 연합의 이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많은 선교 단체들이 교회 연합을 모색한 결과 드디어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제1회 WCC 총회가 열렸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세계에는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아졌다. 그리고 이런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이들이 교회 연합에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그것이 WCC가 출발할 때부터 안게 된 문제였다.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전한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며, 전통적인 신앙고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시인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라고 고백하지도 않으면서 기독교의 종교적 가치는 인정하고 윤리적인 교훈 만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다.

 

2. 1950년대의 한국 교회와 WCC

 

한국에서는 WCC가 있기 이전, 즉 1924년 9월에 한국기독교협의회가 결성되어 복음을 공동으로 증언하는 일에 힘을 썼다. 1930년대 이후 신사참배의 시련을 당하면서부터는 그 기능을 다하지 못했으나 해방을 맞이한 이듬해 1946년 10월 9일 제1회 한국기독교연합회총회를 열었다.

거기서 KNCC는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리는 세계기독교연합회 창립총회에 장로교회의 김관식 목사와 엄요섭 목사, 감리교회의 변홍규 목사를 파견하여 참석케 하였다. 진보적인 기장측은 처음부터 WCC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KNCC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하지만 1950년대 중반에만 하더라도 WCC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 관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한국의 보수적인 장로교회를 주도해 오고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를 공고히 한 분이 조직신학자 박형룡 목사님과 성경신학자 박윤선 목사님이다. WCC에 대하여 제일 먼저 경종을 울린 이는 박윤선 목사님이다. 이미 1950년 고려신학교에 재직할 때였다. 그는 ‘한국 교회는 어디로?’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여 WCC에 반대하는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선명하게 밝힌 바 있다.

 

“우리 장로회는 세계기독교연합회(World Council of Churches)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회에 참가하고 있는 것이 우리 장로교 교리에 대한 위반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위의 세계기독교연합회의 움직임이 전통적인 정통주의 그대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정통주의가 아닌 사실은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장로교회더러 그 옳지 않은 회(세계기독교연합회)와 보조를 같이 하며 합류하라고 가르치는 분들도 그것을 자증하고 있습니다.

세계기독교연합회에는 신신학자(新神學者), 위기신학자, 사회복음주의자 등이 그 주동 인물이 되어 있습니다. 그 회의 주요한 목적은 세계 교회의 사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세계 교회의 진로(進路)를 교도(敎導)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암스테르담 회의에서 결정한 것입니다.

그들은 급속히 처음부터 각 교파의 교리를 그들의 그릇된 주장대로 통일하려는 행동은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적으로 먼저 교회 실권(교회 정치력, 다대한 사람 수 내지 국가의 권력) 잡기를 노력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들은 이런 실권을 잡은 후에 그것으로 세계 교회를 장악하려 합니다. 사태가 결국 그렇게 되는 때에는 세계 교회의 각 교파는 성경과 교리에 의거하여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그런 세계 교회 운동의 실권에게 포로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박형룡 목사님은 그 이후 8년이 지난 1958년 초 “신학지남”에 ‘에큐메니칼 운동의 교리와 목적’이란 글을 씀으로써 그의 견해를 밝혔다. 그의 글은 장로교회뿐 아니라 다를 교파 교회에도 WCC의 정체를 관망하던 사람들에게 각자의 견해에 따라 헤쳐 모여 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박형룡 교수는 글을 맺는말에서 우리 교회는 결코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순응할 수 없으며 교회 합동과 단일 교회를 바라보는 목적에 찬동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는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WCC 총회에 남한 총회의 대표가 가서 참여하고 그 후 WCC의 지부인 대한기독교연합회(NCC)의 일원이 되어 오므로 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칼빈주의 개혁파 장로교회의 전통적 복음주의 신앙을 충실히 보수하여 오는 입장에 있으니 이 WCC 에큐메니칼 운동에 방심하고 무조건 참여할 수 없는 형편이다. 우리 교회는 결코 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자유주의 지도에 순응할 수 없으며 교회합동 단일 교회를 바라보는 목적에 찬동할 수 없다.

1957년 제42회 총회는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의 보고에 의하여 우리 교회는 이 운동의 교회친선과 사업협동에만 참여하고 교파합동에는 반대한다는 결의를 지었다. 이것은 상술(上述)의 대책에 적응하는 결의라 할 수 있으니 우리 교회는 세계적 교회친선의 중요함을 생각하여 이 운동에 참여하나 교리상 경계와 비타협의 태도를 취할 것이며, 장차 어떤 날 교파합동의 계획이 구체화할 때는 이 운동으로부터 단연 탈퇴할 것이다.”

 

그 당시 한국 장로교회는 세 교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국 장로교회는 1952년에 분립한 고신측과 1953년에 분립한 기장측이 있었다. 그리고 1959년에 총회측이 WCC 회원으로 잔류하기를 찬성하는 통합측(연동측)과 반대하는 합동측(승동측)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박윤선 목사와 박형룡 목사의 정보가 정확했으며 그 운동의 진로에 대한 예측은 적중했는가?

 

3. WCC의 역정(歷程)

 

WCC는 제1차 총회 때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교회는 정치적 및 사회적인 이념을 초월해야 한다면서 공산주의를 용납하였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 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교리나 신앙고백은 덮어두기로 했다.

제2차 총회에서도 일치된 선교의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각 교파와 교회의 전통과 특성을 부인하는 결단을 해야 한다고 했다. 선교도 사람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선교보다는 교회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61년 제3차의 뉴델리 총회에는 러시아의 그리스정교의 대표들을 비롯하여 루마니아, 불가리아, 폴란드 대표들이 참가하였다. 그리고 타종교와의 대화가 제안되었으며 ‘우주적 그리스도’ 혹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강조하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1968년의 제4차 총회에서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강조되어 교회의 사회 참여가 첨예화되었다. 마르크스주의 등 사회학적인 통찰을 기독교 신학에 적극 수용하였으며, 불의에 대항하는 폭력을 정당하고 가능한 것으로 수용함으로써 비폭력적 혁명을 교회가 도와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해방신학의 탄생과 때를 같이한 주장이었다.

이어 1969년 3월 WCC의 주최로 제네바 근방의 까르티니(Cartigny)에서 22명의 회교도와 기독신자들이 모임을 가졌으며, 197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타종교와의 대화를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기독교와 타종교의 대화국(對話局)을 신설하고 본격적으로 ‘대화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1975년의 제5차 나이로비 총회에는 90개국에서 대표들이 참석했으며, 로마 가톨릭, 불교, 힌두교, 이슬람, 유대교 등이 옵서버로 참석하였으며 영성의 문제를 두고 각 문화의 전통적 경건과 극단적 성령 운동의 체험, 동양의 신비주의 등 다양한 종교 요소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혼합 종교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제7차 총회는 1991년 2월 호주 캔버라에서 “오소서 성령이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개최되었고 온 지구를 구원하는데 성령 현존의 중요성 또는 영성의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한국인 참가자 정현경은 성령의 강림을 부르느라 무당의 강신굿도 행하였다. 이처럼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종교에 문을 활짝 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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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WCC

 

- 문병호 목사, 총신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이 원고는 2013년 합신총동문회수련회 특강 원고이며 “우리는 왜 WCC를 반대하는가?”를 다음과 같은 순서로 연재합니다. 1. 한국교회와 WCC. 2. 아홉 차례 총회를 중심으로 본 WCC의 정체성. 3. WCC 에큐메니칼 신학. 4. WCC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허구. 5. WCC의 가시적, 기구적 교회일치론 비판. / 편집자 주>

 

1. 제10차 부산 총회의 실상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 제10차 총회가 2013년 10월 말부터 약 열흘간 부산 벡스코에서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God of Life, Lead Us to Justice and Peace, 사 42:1-4)라는 주제로 개최될 예정이다.

 

 

부산 총회는 140개국 349회원 교회에 속한 5,000명이 넘는 참석자들이 모이는 명실상부한 기독교의 유엔총회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모임에서 150명의 중앙위원을 선출하고 차기총회 때까지 수행할 주요정책을 결정할 것이다. 그리고 ‘마당’이라고 부르는 몇몇 행사들을 선보일 것이다.

 

 

부산 총회는 ‘생명의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지구촌의 생태 문제,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를 극복할 경제정의 실현 문제, 새로운 동서간의 냉전 기류를 극복할 군비축소 문제 등을 다룰 것이다. 이러한 취지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총회의 의의와 준비”라는 그들의 문건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WCC에서는 폭력극복 10년 운동에 연이어 가난퇴치와 기후변화를 위한 새로운 운동을 전개하자는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부산총회는 이 새로운 운동의 발전과 함께 하나님이 주인이신 생명중심의 문명(Life-giving civilization)을 건설하기 위한 선교적 행진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중심의 문명은 우주공동체를 관계적이고 유기적인 상생의 생명공동체로 인식하는 아시아적 사고로 신학을 새롭게 조명하고 실천하는 기본 방향이 될 것이다

 

이렇듯 부산총회가 주제로 삼고 있는 “생명의 하나님”은 이 땅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문명’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폭력을 뿌리뽑고, 가난을 퇴치하며, 기후변화를 되돌려 지구 환경을 개선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의 능력에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다(롬 14:17; 고전 4:20).

 

 

그들이 말하고 있는 “우주공동체를 관계적이고 유기적인 상생의 생명공동체로 인식하는 아시아적 사고”는 무엇인가? 혹시 그것이 서로간의 원한을 풀고 함께 살아가자는 일부 토속 종교의 상생해원(相生解寃) 사상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들이 말하고 있는 “관계적이고 유기적인 상생”은 무엇인가? 혹시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동양적 범신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WCC는 제10차 총회의 주제와 관련하여 2012년 5월 22-25일 ‘부산 커뮤니케이션 선언문’(Busan Communication Statement)을 채택하였다. 여기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사역 전부를 “커뮤니케이션”의 역할로 여긴다. 그리고 복음을 “커뮤니케이션(소통)”으로, 복음전파자를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 전달자)”로 정의하고, 생명의 핵심이 “커뮤니케이션”에 있다고 선언한다.

 

커뮤니케이션이 없다면 생명도 없는 것이다. 창조는 커뮤니케이션의 행위였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커뮤니케이션은 창조의 행위였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모든 생명체들은 무수한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 세포들이야말로 자기들 간에 커뮤니케이션이 없다면 생존할 수 없다. 동아시아와 여러 토착 민족들의 전통적인 세계관에 따르면, 우주는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전체이자, 서로 연관된 하나의 유기체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라 우리는 바로 커뮤니케이션이야 말로 생명의 핵심인 것과 인간들은 모든 창조물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며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렇듯 낯설고 급진적인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WCC는 “동아시아와 여러 토착 민족들의 전통적인 세계관”을 거론한다. 여기에는 창조의 하나님도, 생명의 하나님도 없다. 다만 ‘세포’와 ‘유기체’로 표현된 자연이 있을 뿐이다. 성경은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고 가르치는데(요 1:4), 어찌 그들은 피조물의 ‘커뮤니케이션’이 생명의 핵심이라고 말하는가?

 

부산 총회가 다룰 주제인 “생명의 하나님”은 단지 자연적인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생명을 돌보시는 분일 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특별한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구원의 영생과는 무관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은 철학적 개념들인 ‘통전성’(通典性, wholeness)과 ‘공동 선’(common good)을 거론하면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의 방식을 따르는 커뮤니케이션이란 통전성과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빌립보 2:7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을 비우셔서,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 이 말은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섬기셨으며, 특별히 가난한 이들, 고난 받는 이들, 차별 받고, 연약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편드셨다는 뜻이다. 정의를 위한 의사소통자들은 자기 자신을 비워 복음의 종으로 행동할 것이다- 이것이 기존의 권력 구조에 대한 도전을 뜻한다 하더라도.

 

WCC는 예수를 무리의 지도자로, 그 무리를 억압에 반항하여 일어나는 민중으로, 지도자와 민중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복음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기존의 권력 구조에 대한 도전”을 그 커뮤니케이션의 일부로 여기고 있다. 과연 여기에서 아들을 통하여 계시하신 “생명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는가?

 

WCC는 부산에서 총회를 열기로 결정하면서 그 이유 중의 하나로 한국교회가 “타종교와 평화로운 공존과 협력을 해 오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과연 이러한 이유가 설득력이 있는가? 한국교회의 제일 특성은 일체 타협 없이 십자가의 도만을 믿는 성도의 믿음에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부산 개최의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로 “한국교회는 복음주의 교회와 오순절 교회가 공존하며 협력적이라는 점”을 든다. 그러나 실상 개혁주의 보수신앙에 바로 서 있는 많은 한국교인들은 오순절 신앙을 오히려 거부해 오지 않았던가?

 

대다수 한국교회 성도들은 다른 신을 멀리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인정하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굳게 믿는다(고전 1:18, 21).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 전혀 오류가 없음을 믿는다. 그리하여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로 성도의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므로 WCC는 한국교회에 대한 비뚤어진 시각을 버리고 그들과 함께 손잡고 있는 몇몇 국내 회원교단들이 성경적인 한국교회의 보편적인 정서를 제대로 대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WCC는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것들을 부산 총회를 통하여 더욱 강화해나갈 것이다. 물론 한국교회의 정서를 고려하여 어떤 것은 아예 감추고 어떤 것은 덜 드러내려고 하겠지만, WCC 본래의 색깔은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일회적 행사와 의식(儀式)에 미혹되지 말고, 예리한 시각을 갖추어 모호한 언어에 숨어있는 그들의 사상을 꿰뚫어보도록 해야 한다.

 

2. WCC를 반대하는 한국교회의 입장

 

WCC는 처음에 147개 회원교회들로 출발했으며 현재 8개 권역으로(유럽, 아프리카, 북미, 아시아, 중동, 남미, 카리브지역, 태평양 지역) 나뉜 140개국 349개 교단에 속한 5억 7천만의 회원들을 두고 있는 초대형 단체이다. WCC에는 정교회를 비롯해서 성공회, 루터교회, 개혁교회, 침례교회, 감리교회, 연합교회, 오순절 교회 등 20개 이상의 다양한 교파들이 회원교회로 참여하고 있다. 그 중 정교회가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한국교회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 속한 대한성공회,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가 가입했다. NCCK에 속한 구세군대한본영,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정교회한국대교구는 WCC에 동의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회원으로 가입은 하지 않고 있다.

 

WCC 문제는 한국교회 장로교 교단 분열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를 찬성하는 측과, 51인 신앙동지회를 중심으로 한 이를 반대하는 측의 대립으로 인하여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교 합동측과 통합측이 분열되었다. 합동측은 WCC가 비성경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단일한 교회를 추구하고, 이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급진적인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며, 특정 정치 이념에 빠져있다는 사실 등을 들어서 반대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은 제44회 총회(1959년, 대전중앙교회-승동교회)에서 “WCC와 그 노선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우리 교회의 거룩함과 또 그리스도의 합일의 속성을 저해함을 확인하였음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이에 WCC에 항구히 탈퇴하고 그 에큐메니칼 운동에 관계치 않기로 함을 총회에 선언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제45회 총회(1960년, 승동교회)에서는 “WCC를 탈퇴하고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전폐하고”라면서 이를 다시 확인하였다. 그리고 교단의 목사들이 “WCC 및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이 비성경적이고 위태로운 것”이라고 서약하게 한 후 목회하게 하였다.

 

이러한 혼란 가운데, 당시 보수신학을 대표했던 죽산 박형룡 박사는 WCC를 “자유주의 광장”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이 무분별하게 사회복음을 끌어들이고 경계를 넘어서 타종교와의 교통을 추구한다고 비판하였다. 죽산은 교회가 아닌 세속적 기구를 통하여 교회의 연합을 이루고자 하는 생각 자체가 비성경적이라고 간파하고 WCC가 추구하는 것은 교회의 하나 됨이 아니라 하나의 모양내기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

 

WCC 제10차 총회의 부산 개최가 결정되면서 한국교회에는 다시금 이 기구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의 회오리가 일고 있다. 행사를 유치한 측에서는 이를 한국교회 전체가 경사로 여길 “기독교 올림픽”이라고 자축하고 있으나, 반대편에서는 WCC 자체를 순수한 기독교단체로 인정하지 않으며 부산 유치를 몇몇 교단의 합작품 정도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은 이 시점에 한국교회를 진리의 터 위에 더욱 굳건하게 세우고 이를 계기로 교회의 진정한 연합과 부흥을 도모하고자 “WCC대책위원회”(위원장 서기행 목사)를 구성해서 중앙위원회를 두고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었다.

 

그 결실로 2010년과 2011년에 「WCC 신학 비판」과 「WCC는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제목으로 두 권의 책을 출판하여 총회에 배포하였다. 그리고 2012년 총회를 통하여 「‘교회의 하나 됨’과 ‘교리의 하나임.’ WCC의 ‘비성경적,’ ‘반교리적’ 에큐메니즘 비판: 정통 개혁주의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라는 제목의 책과 이를 쉽게 풀어 쓴 본서를 함께 배포할 계획에 있다.

 

본 대책위원회가 주도하여 2010년 1월 25일에 19개 교단이 서울 앰배서더 호텔에 모여서 채택한 다음의 결의문은 한국교회 전반의 정서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함께 동참한 교단은 다음과 같다: 예장(합동), 예장(고신), 예장(고려), 예장(합신), 예장(대신), 기성, 예성, 예장(웨신), 예장(개혁국제), 기침, 예감, 예장(재건), 예장(합동중앙), 예장(합동진리), 예장(고려개혁), 예장(합동총신), 예장(합동동신), 예장(보수합동), 예장(합동보수).

 

1. 우리는 오직 성경, 오직 예수, 믿음만이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의 진리라고 굳게 믿으며, 한국교회 보수 교단들은 힘을 합해 공동으로 한국교회 정체성을 사수하며, 한국교회를 보호할 것을 다짐한다.

 

2. 우리는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는 성경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인본주의 신앙이므로 이를 단호히 배격하고, 초혼제 등 무당굿을 신앙의 행위로 정당화하며, 이를 용납하는 그 어떠한 단체나 기관과의 연합도 단호히 거부할 것을 굳게 다짐한다.

 

3. 우리는 한국교회 극히 소수의 교파(NCCK)가 참여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 한국 개최를 마치 한국교회 전체가 유치하는 대회로 과장 보도하고, 이를 한국교회 올림픽이라고 선전하는 것에 매우 유감을 표하며, 자제해 줄 것을 주최 측과 언론 등에게 엄중히 주문한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 대다수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하고 말씀에 집중해서 교회를 회복하자는 소망이 높아지고 있는 시점에서, 이것을 거스르는 WCC 부산 총회가 세속주의, 혼합주의, 다원주의를 확산시켜 한국교회가 서구교회와 같이 몰락의 길에 접어들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WCC 총회의 부산 유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주로 WCC의 과거 행적이나 교리적인 성향이 비성경적이라는 점을 이유로 든다. 반면에 유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대한 시대적, 문화적, 인류적 필요성을 부각시키면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WCC 가입 문제로 한국교회는 교단이 분리되는 큰 아픔을 이미 경험하였다. 금번 부산 총회 유치로 그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3. 마치는 말

 

에큐메니즘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교리로 하나가 되는 것을 본질적인 목적으로 삼는다. 교회의 연합과 일치는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만 구현될 수 있다. 진리가 없는 사랑은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모양과 다름없다.

 

‘에큐메니즘’(ecumenism)은 헬라어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나온 말로서 헬라어 ‘코스모스’(kosmos)와 의미가 통한다. 그것은 ‘우주’ 혹은 ‘전 세계’를 뜻하는 공간적 개념뿐만 아니라 ‘진리’ 혹은 ‘질서’를 뜻하는 원리적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말뜻에 비추어 본다면, 에큐메니즘 혹은 이를 구현하기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진리를 떠나서는 논의될 수도, 추구될 수도 없다.

 

진정한 에큐메니즘은 말씀의 진리에 서서 하나님의 시대적 섭리를 구하는 겸손한 자세에서 비롯된다. 대다수 한국교회 교인들은 성경무오(聖經無誤)를 믿고 참 교리의 터 위에서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 WCC는 신학적, 신앙적 모호성에 물든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순수한 열심을 이용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입버릇 같이 ‘WCC 반대자들은 잘 몰라서 그럴 테니까 직접 와서 체험해 보면 오해가 풀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WCC의 실체를 바로 알게 되면 될수록 더욱 비판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많은 한국교회가 WCC를 반대하는 이유는 이 기구가 성경의 진리에 바로 서 있지 못함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WCC 문제는 타협할 수 없는 진리의 문제이다. 이를 먼저 해결하지 않은 채 그저 와보라고 재촉만 하고 그 초대에 응하지 않으면 마치 분파주의나 되는 듯이 매도하는 것 자체가 진리와는 무관한 WCC의 현주소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그들은 먼저 주님의 다음 말씀을 잘 새겨보고 자신의 입장부터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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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의 종말, 새 시대의 탄생’ 에딘버러 회의


본지에 ‘배본철 교수의 성령론 Q&A’를 연재 중인 배본철 교수(성결대)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관련, WCC의 태동과 그 역사적 배경, 신학적 실체 등을 분석한 글을 본지에 보내왔습니다. 배 교수는 “현재 WCC 논쟁이 과다한 정치적 논리와 교계 분열의 양상으로 치닫는 것을 보면서, 이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학문적이고도 교회사적인 입장에서 차분하게 WCC를 비평해 정리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임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이 글은 단지 반대를 위한 반대는 아니며, 어떤 정치적인 목적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며 “오직 바람이 있다면 한국교회가 바른 복음적 의식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것”이라고 이 글을 쓰게 된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배 교수의 글은 ‘WCC, 그 실체를 밝힌다’는 제목으로, 매월 1회 총 5부에 걸쳐 연재될 예정입니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교회연합운동의 태동
② 세계대전의 격랑 속에서
③ WCC 창립 총회와 Missio Dei
④ 왜곡된 복음의 뒤안길을 걷다
⑤ 간과될 수 없는 역사적 과오

  

무엇이 문제인가?

 

최근 한국 기독교계의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 WCC 문제는 교회사를 전공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현대교회사 영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터라 늘 관심 있게 연구하고 있었다. 그런데다 최근 불거진 2013년 WCC 총회 한국 유치 관계로 WCC 진영과 복음주의 사이의 향후 관계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중, 최근 복음주의신학회에서 WCC에 대해 발표한 필자의 논문은 교계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배본철, “WCC 선교론의 변천과 논제”, <WCC에 대한 역사신학적 고찰> (2010.4.3); “복음주의자들이 제시한 WCC 논쟁 종결의 길: 배본철 박사 NCCK, 설득하려 하기 전에 숙고를” <크리스천투데이> (2010.4.3); “WCC, NCCK, 불신 허물려면 과거행적 고백 먼저”, <국민일보> (2010.4.6))

 

이러한 과정 속에서 <크리스천투데이> 지를 통해 WCC의 전반적인 역사와 신학에 대해 기고할 수 있게 된 것은 한국교회의 신학적 정체성과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 큰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본다. 필자는 앞으로 5부에 걸쳐서 WCC의 왜곡된 역사를 파헤침으로서 WCC에 대한 아물지 않은 상처를 안고 있는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을 다시 한 번 굳건히 하고자 한다.

 

2009년 8월 3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WCC 중앙위원회에서는 2013년 WCC 제 10차 총회를 대한민국 부산에서 열기로 확정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이 총회가 한국교회의 자랑이 될 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위상을 세계교회 앞에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NCCK에서는 한국교회 대부분 교단들의 반(反) WCC적 정서를 의식해서인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을 통하여 WCC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 확산하기에 분주한 상황이다. NCCK에서는 2010년 2월부터 4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WCC에 대한 오해와 이해’라는 주제로 신학토론회를 마련하였다.(‘WCC에 대한 오해와 이해’의 제 1차 토론회는 2월 19일 열렸고 발제자는 장신대 이형기 교수였다. 제 2차 발제는 3월 25일 열렸으며 전주대 김은수 교수와 이화여대 장윤재 교수가 담당하였다. NCCK에서는 제 3차 토론회를 4월 26일 갑론을박 형식으로 열기로 예정하였다.)

 

그러나 WCC를 바라보는 복음주의 교단들의 시선은 매우 따갑다. 뿐만 아니라 NCCK에 가맹되어 있지 않은 대부분 개신교 교단들의 WCC 대회 유치 반대 내지는 WCC 비판론이 점차 거세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월간 <목회와신학>에서는 2009년 10월호와 2010년 1월호에서 WCC 문제를 다룬 바 있다.(<목회와신학>에서는 WCC를 긍정하는 이형기 교수의 글과 WCC를 부정하는 평택대학교 양광호 외래교수의 글을 차례로 실었다.) 그리고 ‘미래목회포럼’에서는 2010년 3월 25일 서울 종로 기독교연합회관에서 ‘한국교회, WCC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주제로 정기포럼을 개최하였다. 이 포럼은 최초로 WCC에 대한 진보주의와 복음주의적 시각에서의 학문적 논쟁의 시간이었다. 이런 중요한 시점에서 2010년 4월 3일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에서 개최한 WCC 문제에 대한 복음주의신학자들의 논문발표회는 한국 복음주의적 교단들의 확실한 입장 정리의 차원에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필자의 글은 WCC를 대하는 복음주의신학의 시각을 소개하려는 데 그 첫 번째 목적이 있다. 일각에서 보는 대로 정말 복음주의자들은 WCC의 진면목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인가? 필자는 오히려 복음주의자들이야말로 WCC가 마땅히 걸어 나가야 할 길을 뚜렷이 인식하고 그 바른 길을 가도록 촉구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려 한다. 이 글의 두 번째 목적은 WCC가 원래 선교적 연합을 위한 초기 의도에서는 벗어나 점차 우려할 만한 길을 걸어 온 역사를 정리하고자 함이다. 문제는 신학적인 면에서 볼 때 WCC의 행보가 원래 그 헌장과 취지에 부응하지 못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선교론의 문제가 있다. 이런 점에서 WCC 선교론의 변천을 가져온 중요한 몇 가지 대회들의 특징을 살펴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2013년 WCC 부산 유치의 과제를 안고 있는 NCCK가 풀어나가야 할 당면 과제를 지적하고 그 하나의 해결 방안을 제시하려 한다.

 

에딘버러 회의

 

19세기를 위대한 선교의 세기였다고 할 것 같으면, 20세기는 초교파적인 교회연합운동(敎會聯合運動), 즉 에큐메니칼운동의 세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20세기의 초교파적인 교회연합운동은 모트(John R. Mott; 1865-1955)라는 위대한 인물을 필두(筆頭)로 발전되었으며, 1910년의 에딘버러 회의(Edinburgh Conference, 1910)라는 최초의 선교회의를 시작으로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앤더슨(Gerald H. Anderson)에게서도 잘 나타나는데, 그는 20세기의 선교를 7개의 층으로 구분하면서, 그 첫 번째 단계를 1910년의 에딘버러 회의로 들고 있다.(Gerald H. Anderson(ed.), The Theology of the Christian Mission (Nashville: Abingdon Press, 1961), 5.)

 

그런 의미에서 세계 최초의 선교회의인 1910년의 에딘버러 회의는 교회연합운동의 기원이며, 또 이런 점에서 교회사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에딘버러 회의는 하나의 렌즈로 묘사될 수 있겠다. 이 렌즈는 선교 협력을 위한 일 세기 간의 모든 시도로부터 비추어진 여러 빛들을 받아 그것들을 모아서 미래를 향해 발하게 맞춘 렌즈라고 할 수 있다.(David J. Bosch, 「선교신학」, 전재옥 역 (서울: 두란노서원, 1985), 191.) 결국 1910년은 에큐메니칼운동이나 선교운동을 위해서나 결정적인 해이며, 에딘버러는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는 목적으로 개신교가 함께 모이게 된 초창기 연합의 시발점이요 결정인 것이다.

 

에딘버러 회의는 비록 선교단체를 위해 권위 있는 입법기관의 역할은 못했을지라도, 연합한 행동의 준비를 위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는 있었다. 이 최초의 세계선교회의에서 던져진 중요한 물음은 ‘어떻게 선교할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즉 선교는 복종되어야 할 그리스도의 명령(마 28:19)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자연히 선교의 전략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1908년에 채택된 국제위원회에서 8개의 주제가 총회의 주제목으로 선정되었다. 이 주제들을 위해 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은 후에 교회일치운동의 좋은 전례를 만들어 주었다. 이들 위원회는 여러 방면의 통신교환을 통해 다양한 의견과 정보를 교환하였다. 최초 위원회장인 모트(Mott)는 전 세계의 600명 이상에게 개인적으로 편지하였다. 이렇게 유인물과 의견을 수집하는 동안 일치운동의 분위기는 고조되었으며, ‘에큐메니칼 대화’(Ecumenical Conversations)라는 전례를 만들었다.

 

다음은 에딘버러 회의의 주제들을 다룬 것이다;

-복음을 모든 비기독교세계에 전파한다(Carrying the Gospel to all the Non-Christian World)
-선교지에서의 교회(the Church in the Mission Field)
-각 나라의 고유한 생활의 기독교화와 관련된 교육(Education in relation to the Christianization of National Life)
-비기독교 종교와 관련된 선교 메시지(the Missionary Message in relation to the Non-Christian Religions)
-선교사들의 준비(the Preparation of Missionaries)
-선교의 본부기지(the Home Base of Missions)
-선교와 정부(Missions and Governments)
-협동과 연합의 증진(Co-operation and the Promotion of Unity)

 

위의 주제들 가운데 세 개는 교회연합운동의 성장에 특별한 기여를 하였다. 그중 첫 번째는 교회의 범세계적인 선교를 강조하였고, 두 번째는 신생교회(the Young Churches)라 불리는 선교지 교회에 대한 선교사업의 목적인 자치(Self-governing), 자립(Self-supporting), 자전(Self-propagating)하는 선교지 교회의 발전에 중점을 두었다. 마지막 것은 제목이나 의도에 있어서 분명한 에큐메니칼운동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910년의 에딘버러 회의는 독창적인 사건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1854년 뉴욕과 런던, 1860년의 리버풀대회, 1878년 런던, 1879년 런던, 그리고 1900년의 뉴욕대회 등으로 계승된 것이다. 그러나 비록 과거의 총회들을 계승했지만, 에딘버러 회의는 많은 면에 있어서 전례를 뒤엎고 명백한 진보를 나타내었다.

1888년과 1900년에 있었던 초기의 2개 총회는 여러 선교기구에 의해서 대표단이 임명되었으며, 오고자하는 사람에게는 개방되어 있었다. 그러나 에딘버러 회의는 기구에서 파견된 대표단으로 그 숫자가 제한되었으며,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중인 선교단체만이 참가할 수 있었고, 대표단도 선교비를 지원하는 액수의 비율에 따라 정해졌다. 또한 종전과 같은 성회의 성격보다는, 이 회의는 각 교회가 대변하는 권위있는 공식기구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은 선교단체의 총회였지 교회의 총회는 아니었다. 또한 이 총회는 모든 선교단체가 초청된 것은 아니었고, 비기독세계에서 일하는 단체만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규제는 총회가 그 목적을 위해 날카롭게 초점을 맞춘 면에서 온당한 것으로 보였다. 비기독교세계에서의 선교를 목적하는 수많은 선교단체들이 그들이 지닌 저마다의 신앙적 확신과 신학적 다양성을 가지고 들어오게 되었다. 이러한 에딘버러 회의의 성격은 에큐메니칼운동에 더욱 넓은 포용성을 지니게 해주었다.

 

에딘버러 회의에서 신생교회(新生敎會)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신생교회들의 잠재적인 중요성은 그들이 보낸 지도자를 훈련하는데 보여진 관심에서 잘 나타났다. 한 신생교회의 지도자는 1860년 리버풀회의의 토론에 참가하여, 더 많은 나라가 성경 번역의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중요한 발언을 하였다. 그러나 1888년 영국에서 개최된 개신교 선교 백주년 세계대성회에서 신생교회는 거의 대표되지 못했으며, 1900년 뉴욕의 에큐메니칼 선교총회에서는 6명 정도가 발언하였고, 1907년 상하이의 중국 선교 백주년 선교총회에서는 1170명 중에서 불과 6,7명이, 그것도 방문객으로서만 신생교회 지도자들이 참석했다.(Ruth Rouse, A History of the Ecumenical Movement, 1517-1948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7), 359-60.) 에딘버러 회의에도 신생교회 대표자들의 숫자는 매우 적었다. 그러나 비록 17명밖에 안 되는 숫자였으며 47회의 연설 가운데 겨우 6회의 기회를 가졌지만, 이들은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큰 일을 해냈다. 이들 가운데 3명은 계속되는 총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이러한 진보는 미래의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해서 신생교회가 차지하게 될 위치에 대한 예언이기도 했다. 즉 앞으로의 에큐메니칼운동은 신생교회나 기존의 교회를 동등한 입장에서 수용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1910년의 에딘버러 회의는 대부분의 구성원이 Anglo-American 계통의 사람들이었다. 신생교회가 극히 적을 뿐 아니라, 유럽대륙 출신의 대표도 역시 극소수였다. 또한 로만 가톨릭과 정교회의 대표가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사실은 가톨릭과 정교회는 이 회의에 초대 받지 못했다.) Anglo-American이 주구성원을 이루었다. 그 결과로 에큐메니칼운동이 아일랜드, 미국 그리고 영국 등지에 주로 영향을 주고 유럽 대륙으로 퍼져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전세계적인 에큐메니칼운동을 위해서 다음 총회에서는 로만 가톨릭과 정교회 그리고 신생교회들의 참여가 언급되었다. 1910년의 에딘버러 회의는 후에 에큐메니칼운동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훌륭한 훈련의 장소였다. 그러한 인물로는 모트(John R. Mott), 올드햄(Joseph H. Oldham), 아자리아(V. S. Azariah), 브렌트(Charlse H. Brent), 템플(William Temple) 등을 들 수 있다. 

모트는 초대 준비위원장이자 국제선교위원회의 회장으로서 모든 회의를 주관하였다. 그는 신앙 대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은 영적 인물로서, 지도자로서의 역량과 설득력 있는 연설 능력 등을 구비한 사람이었다. 감리교의 평신도로서 신학도 하지 않은 그는 모국어인 영어 밖에는 사용하지 못했지만, 수많은 국가와 종족 그리고 교회를 연결시켰으며, 또 많은 사람들에게서 존경과 협력을 얻어내었다. 그리고 모트의 행정 비서인 스코트랜드인인 올드햄은 모트와 함께 총회의 창의적인 일들을 도왔는데, 기독학생운동과 인도의 YMCA운동의 산파 역할을 하였다. 에딘버러 총회와 그 실행에 있어서의 범세계적인 기독교 연합은 1908년부터 26년 동안 올드햄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는 1905년 할레신학교에서 공부한 관계로 독일인의 심성을 잘 알았고, 이를 토대로 독일 지도자들의 신임을 얻어 종전의 Anglo-American이 압도적이었던 회의 분위기에 대륙적인 힘을 가입시키는 데 큰 힘을 쏟았다.

 

이러한 에큐메니칼운동의 발전은 서구에서보다는 신생교회에서 더욱 급속히 발전되었는데, 이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긴급한 불모지의 상황이 기존의 교파나 신앙고백의 장벽을 초월하여 연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에딘버러 회의는 유럽 대륙과 영-미의 서로 다른 선교신학을 융합하지 못했으며, 신학적 열매를 거두는데 큰 성과를 이루진 못했다. 그러나 에딘버러 회의는 한 시대의 종말과 또 다른 시대를 탄생케 한 분수령(分水嶺)이 되어 주었다. 왜냐하면 에딘버러 회의가 남긴 발자국은 앞으로 진행될 에큐메니칼운동의 발전과 조직을 위한 커다란 전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910년의 에딘버러 회의는 20세기 에큐메니칼운동을 위한 새로운 예언자적 운동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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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다원주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황요한23세 종교간 대화/ 배타주의 포괄주의/

 

종교다원주의가 기독교에 미치는 위기고찰과 대응자세


현대는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시대이다. 아득한 인류의 기원 이래 인간의 의식이 확대되고 그 의식이 삶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됨에 따라 각각 그 자신의 궁극적 해답을 제시하는  수많은 종교들이 존재해왔다. 다양한 종교의 공존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과거 수세기 동안 종교간의 갈등과 분쟁이 세계사에 긴장을 조성해 왔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는 종교 자체의 본질과 종교들간의 상호작용,나아가 현재 팽배해지고 있는 다원주의적 경향속에서 종교의 역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것이다.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기독교만이 참종교요 절대 종교라고 믿는 기독교 절대주의 (Christion absolutism)의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종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절대 종교란 있을 수 없고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위가 일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관계는 기독교의 자기 이해를 위한 주제가 된 동시에, 다원주의는 기독교인에게 큰 도전과 위협이 되었다.


기독교처럼 자신을 절대적으로 유일한 종교 혹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라고 주장하는 종교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인류는 어느 특정종교 하나가 제시하는 신념체제에 의하여 구원 받을 수 없도록 다원화된 세계에 살고 있으며,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의 기도만을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이론을 주장함으로써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다.

 

 이처럼 기존의 논리들이 혼란하게된 다원주의 시대속에서 종교다원주의가 기독교에 미치는 영향과 다종교 시대속에서 갖추어야 할 자세를 종교다원주의의 발생 배경과 주요사상,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의 반응,내제하는 문제점등을 살펴봄으로서 고찰(考察)해 보기로 한다.                        

        

A.종교다원주의의 발생 배경


아담과 하와 이후 부터 지금까지, 종교다원화의 문제는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 왔다. 구약 시대의 여호와 하나님과 다른 신들의 관계 문제,교부시대의 기독교와 고전문화의 관계문제,그리고 현대의 종교 혼합주의로 인식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가 그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도 기독교는 절대주의의 입장을 고수해왔다.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에 의하면 종교적 다원주의 문제는 교회가 다른 신앙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었던 선교지 최일선의 선교사들과 비교종교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최근 한국에서 퍼져가는 종교신학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다원주의와 때를 같이한 신학이다. 이 WCC의 종교다원주의를 또한 종교다원주의의 발생점으로 본다.  한편,과학의 발전도 들수 있겠다.

 
가. 선교사들

 

기독교는 313년 로마제국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종교의 자유를 공인받게 되며 데오도시오스 황제 치하(379-395)에서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됨에 따라 로마 제국과 기독교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로마 제국은 기독교 왕국이 되었고 제국의 안정은 교회의 안정과 직결되었다. 이에 따른 18,19세기의 기독교 선교정책은 식민주의적,제국주의적 이었다. 서구의 종교가 동양의 나라를 점령하면,선교사가 뒤따라 들어가 기독교로 그 지역의 종교를 점령하는 정책이었다.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이 전통적인 선교의 목적이었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는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확산에 도움을 주지만,정복식의 선교정책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54년 인도 정부는 개종을 주 목적으로 활동하는 선교사들을 철수하도록 명령했으며,그 후 선교사들은 각지에서 동일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선교상황이 이론과 실제 양면 모두에서 위기에 처하게 되자,다른 신앙과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었던 선교지 최일선의 일부 선교사들에 의해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그와 대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나.비교종교학자들


비교종교학이 발전함에 따라 비교학자와 종교사 연구가들을 통해 다른 종교가 기독교와 동일한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일어나게 되었다. 19세기 종교사학파의 대표자 트뢸치(Ernest Troeltsch,1865-1923)가 기독교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종교의 상대주의를 주장했으며,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며 제 각기 진리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므로 어느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 할 수 없다. 이렇듯,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비교하는 사람들에 의해 종교다원주의가 일어났다고 볼수 있다.

       

 

다. WCC

 

WCC안의 다원주의적 동향은 1928년 예루살렘에서 개최한 제2차 세계선교 협의회(IMC)에서 이미 폴(K.T.Paul)과 차오(T.C.Chao)에 의하여 나타났다.

 

그리고,종교다원주의적 관심은 1938년 탐바람에서 개최한 제3차 IMC대회에서 크래머(H.Kraemer)와 충돌을 격은 후 잠잠해 졌다가,1950년에 타종교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1961년에는 뉴델리에서 개최한 제3차 WCC총회에서 종교다원주의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 총회에서 인도신학자 더바너난단(P.Devanandan)은 피조물의 영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영과 타종교들의 다양한 종교체험을 혼돈함으로써 쟝교뎌?隙瑛퓔? 수립하려고 했다.

라. 과학의 발전

 

과학의 발전도 종교적 다원주의의 발생을 촉진했다고 볼수 있다. 16세기 이후 유럽에 발견과 탐험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콜롬부스,마젤란등의 탐험으로 기독교 세계밖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으며 거기에 기독교와 서로 다른 종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역사,인류학,과학 연구가들이 인류 기록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세계의 다른 곳에도 종교의 유형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되자,동서의 활발한 교류를 통한 서구의 기독인들이 다른 종교권의 사람들과 빈번하게 접촉하게 되고 그들의 종교에 관한 문헌에 긴급하게 일어났다.

 

B. 종교다원주의의 중심사상

       

가.종교의 상대성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상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첫번째 사상이다.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상대성을 띈다는 것은 기독교와 큰 차이점이 될수 있다.

 

트뢸치는 "역사주의에 의한[순전한 상대주의 ]역사주의의 극복"에다 초점을맞추었다.   뢸취의 역사주위에는 세계에 내재할 뿐 아니라 세계에 대해 초월적이기도 한 하나님의 자리가 없다. 즉 하나님의 실재를 배제한다. 그리고,그에게 있어서는 역사의 실질적인 근거를 오직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경험적 혹은 "과학적" 관찰에서만 온다. 물론 창조주 하나님은 과학적으로 관찰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순전한 상대주의의 심각한 가능성과 싸워야 했다. 그의 "역사의 형이사학"에도 불구하고,그의 최후의 말은 "상대성 속에 있는 절대성"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트뢸취의 "신앙"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순전한 상대주의에서 그를 구원하지 못했다.  모든 종교가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트뢸취는 하나님의 계시가 모든 사람,모든 종교에 주어졌다는 것을 신념으로 삼고 있었다.

 

이와 같이 모든 종교를 상대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상 하나님의 유일회적인 성육신이요 전 인류의 구원자라고 믿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와 모순된다.

    

나. 신념의 동일성

 

세계 60억 인구중에서 15억만이 예수를 믿고있다. "나머지 45억은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들이 생기게 된다. 이런 물음들 속에서 모든 종교는 같다고 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만약,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신 다면 시간과 공간,문화와 상황을 넘어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며,깊이 관찰해 보면 모든 종교는 동일하고 단지 모든 문화와 상황 배후에는 하나의 신,즉 공동의 본질이 있고,이것에 도달하는 방법이 각 종교마다 다르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종교가 공동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기독교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계시의 유일회성과 규범성의 궁극성에 대한 신앙을 부정한 것이 되버린다.


다. 심리학적 기원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이 무의식 속에서 느끼는 불안과 초조의 심리학적 사건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유일회성과 절대성을 부정한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Carl Gustav Jung)같은 학자들이 종교를 심리학으로 환원시키려는 현대 심리학자들의 시도로서 모든 종교를 각 개인에게 공동으로 존재하는 심리학적 과정으로 본다. 이러한 융의 주장은 종교를 지나치게 주관주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며 예수의 유일회성을 부정한 것이 된다.          

 

 

C.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 기독교의 반응


가. 기독교

 

기독교는 배타적인 선교정책을 써왔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당혹스러한 문제였다. 수세기 동안 기독교의 주장은 예수의 유일성과 보편성에 근거해 왔다. 그것은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런 신조에 의하여 교회는 스스로 모든 진리에 있어서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세 기독교는 고립된 생활을 자랑스럽게 영위하고 외부 세계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고수하면서 다른 종교와 생산적이고 의미있는 관계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요한 23세가 "쇄신과 적응(aggio-rnamento)"이라는 슬로건을 공포한 후 로마 카톨릭 교회는 변화를 겪게되었다. 다른 종교 전통들과 대화를 시작했고,'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이 포기되었다. 그리고 다른 종교의 정신적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현대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가 타종교와의 만남에 대한 반응은 세 유형으로 나뉘어진다.

       


1)폐쇄적인 배타주의

 

바르트는 모든 종교를 은총에 의한 계시의 경험과 변증법적으로 분리시킴으로써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에 반격을 가하고 기독교를 신의 은총과 계시가 나타나는 유일한 종교라고 주장한다.

       


2)개방적인 포괄주의

 

다른 종교를 통한 신의 은총과 구원의  행위를 인정하고,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구원 계시의 최종성,독특성,규범성을 주장한다.

   

①  칼 라너(Karl Rahner)

 

칼 라너의 신학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 의지를 존중하면서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을 긍정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이다. 라너는 다음의 네가지 명제로 자신의 위치를 확립한다.

 

첫째,기독교는 모든 사람을 위한 절대적인 종교로서 자신을 이해하며,그러므로 어떤 다른 종교도 그것과 같은 것으로 인정될 수 없다.

 

둘째,복음이 한 개인의 역사적 상황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비기독교적인 종교는 그 개인을 위해서 하느님에 대한 자연적인 지식과 은총의 초자연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셋째,그러므로 기독교는 다른 종교의 성원을 단순히 비기독교인으로서 대할 것이 아니라,익명의 기독교인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는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넷째,교회는 스스로를 구원에 대한 권리를 가진 배타적인 공동체로서가 아니라,오히려 역사적인 선구자,다른 종교에 숨어 있는 실재로서 나타나 있는 기독교적 희망의 명백한 표현으로 여겨야 한다.

 

이러한 4가지 명제를 통하여 라너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은 은총과 그것에 대한 명백하고 완전한 기준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동시에 수용한다. 결  라너의 입장은 타종교가 그리스도의 참된 보편적인 교회로 수렴되고 성취된다는 교회 중심주의적 입장 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타 신앙인에 대한 보다 '낙관적인' 그리스도교적 태도를 밝히고,타신앙도'익명의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서 그리스도교의 배타주의를 깨트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현대 세계의 종교다원주의와 종교의 자유를 진지하게 고려한 것일까 하는 문제점이 제기된다.

     


② 폴 틸리히(Paul Tillich)

 

폴 틸리히는 유한적인 현현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확증하려고 했다. 그에 의하면 계시 경험은 인간에게 보편적이고,모든 종교에는 계시와 구원 능력이 있다. 계시는 유한한 인간에 의해 수용되기 때문에 항상 왜곡되며,따라서 신비적,예언자적,세속적인 종교비판이 가능해진다. 틸 히는 다른 종교들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타종교들로부터의 비판을 수용하는 개방된 그리스도교의 태도를 예로 제시한다. 이러한 개방적인 태도를 인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타종교인들을 개종시키려는 대신 자기 비판과 대화를 모색하게 된다고 한다. 그는 인간의 궁극적 실재를 지향하는 역사상의 모든 종교들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신학적 다원주의를 취하고 있다. 그는 열등한 다른 종교들을 배재하거나 포괄하는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최종적인 계시인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를 중심으로 타종교를 관계를 맺는 능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관계적 절대성(relational absoluteness)'이 입증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3) 종교적 다원주의

       

① 존 힉(John Hick)

 

힉은 다른 종교에 접근하는 방법으로서 오늘날 서구 신학에서 지배적인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접근과 상이한 신 중심적 모델을 제안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독실한 이슬람교인이나 힌두교인,혹은 유태교인들을 "익명의 기독교인(an anonymous Christion)"으로 간주하는 칼라너와 같은 신학자도 여전히 하나님보다는 그리스도를 중심에 위치시킨 해

묵은 교회안에 머물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한 관점에서는 단지 기독교인들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그래서 우리는 경건하고 독실한 비기독교인들을 어떤 형이상학적 의미의 기독교이거나,혹은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알지 못하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힉은 프톨레마이우스의 천동설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비유로 들어 그의 입장을 전개시켰다. 프롤레마이로스의 천동설에서는 지구를 다른 혹성들이 그 둘레를 공전하는 태양계의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에,프롤레마이오스 시대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가 종교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진다. 다른 종교들은 기독교의 주위를 맴 도는 것으로 여겨지며,기독교와의 원근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기도 한다. 힉은 그러한 프롤레마이스적인 접근이 다른 종교에 의해서도 마찬가지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힉은 그리스도교 종교신학의 문제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문제인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을 재해석함으로써 그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 힉 신학은 칸트적 배경위에 있다. 하느님은 인간 경험에 의해 구조화된 선험적인(a priori) 관념이다. 그러나 잠재된 문제는 힉이 "신"이란 용어를 불교인이나 아드바이타 베단타(Advaita Vedanta,불이일원론)의 힌두교인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선험적인 것으로 사용한다는 데 있다.

       

 

② 파니카(R.Panikkar)

 

파니카는 기독교와 힌두교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대화의 삶을 살아왔다. 로마 카톨릭 내에서,파니카의 저술은 종교간의 관계를 다루는 영역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종교들 사이의 다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범 세계적'일치운동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종교적 차이는 생동적인 힘을 발휘하며,'근본적인 종교적 사실'에 대한 각각의 해석과 각각의 이름들은 '순수하게 초월적'인 것만도,순수하게 내재적인 것만도 아닌 그 신비를 풍요하게 규정한다.

 

파니카에 있어서 삼위일체는 모든 종교의 진정한 영역 차원이 기독교적 사상안에서 함께 만나는 접합점이다.                       

 


D.종교다원주의에 내재하는 문제점

          

가.선교 활동

 

어려움이 분명히 드러나는 곳은,자가 자신의기준을 타자에게 부과하는 문제가 타자를 개종시키려는 노력으로 지속되면서 발생하는 선교 활동에서이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확신을 타자와 공유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일부이다. 어려움은 자신의 설교나 가르침을 타자에 전달하고자 하는 욕망과 방향성이 투쟁적이거나 배타적으로 될때,그 결과로서 생기는 것이다. 다원주의는,우리 자신의 특수한 종교 이해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점을 늘 요구해 올것이다.

 

이러한 다원주의에서는 모든 종교는 표현 방법과 규정내용 및 의식이 다를 뿐이지 결국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또는 다른 명칭의 조물조께로 인도하고 있다는 주장으로서,어떤 종교든지 열심히 그리고 종교가 요구하는 율법과 교리를 성실하게 준행하기만 하면,구원을 받게 된다는 식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한편 또다른 주장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데,다른 종교에도 그리스도가 숨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자기가 속한 문화권에서 믿고 있는 종교를 성실하게 믿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즉 반드시 기독교를 믿어야 할 이유가 없고,불교도나 회교도라는 다른 이름을 가진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나. 평등

 

현대의 종교다원주의에 있는 또 다른 어려움은 "평등"에 대한 헌법상의 진술(미국과 인도의 헌법속에서 발견되는)과,개인의 이해에 있어 각 개인들을 영적인 깨달음의 다양한 단계들에 걸쳐 있는,따라서 평등하지 않은 존재로서 이해하고 있는 종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이다. 그러한 갈등이 생길때,평등과 요청은 힌두교와 같은 종교의 교훈과 관행들을 합법적으로 짓밟고,그렇게 함으로써 종교적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

 

평등의 문제는 현대의 문화와 종교의 다원주의에 의해 야기된 많은 문제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종교적인 전통및 인식과 세속적인 전통및 인식이 서로 충돌하게 될 것이다.

       


다. 배타주의

 

종교다원주의의 창조적 기여에 대한 한 가지 위협은 때때로 몇몇 종교인들이 다원주의의 도전에 투쟁적인 배타주의로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대응은 현대 이란이 역사가 증명해 주듯이,보통 영적인 침체와 "종교적 폭력"을 야기시킨다는 점에서 항상 유감스러운 것이다. 가정에서처럼 상호 존중과 상호 인정의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호간의 차이의 수용은 선을 위한 강력한 촉매가 될 수 있다. 자기 중심적인 편협한 마음은 항상 파괴적이며,어떤 종교 전통에서는 진정한 종교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E.종교다원주의에서의 기독교의 대응책

       

가. 기독교적(성서적)인 자세

 

한스 큉(Hana Kung)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비기독교 민족이 서구의 기독교 민족을 수적으로 훨씬 앞질러 갈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통계를 생각할때도 당신들은 여전히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고 감신대의 변선환 교수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면 인류의 대다수는 신의 저주를 받고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함으로,기독인만 구원받는다는 기독교 전통적인 견해를 그대로 받이들일 수 없다는 큉의 주장은 너무나도 자명하다"고 했다. 또 홍정수 교수는 "우리의 신은 제 자식만 사랑하는 편협한 인간의 마음을 가진 신인가? 아니면 악인에게도 비를 내리고 자비를 베푸는 가없는 은총의 신인가? ... 하나님께서 만일 무신론자나 이교도까지 사랑한다고 하면 우리는 당연히 그들을 포용하고 사랑해야한다."라고 말을했다.

 

이와같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인도적인 관점으로부터 기독교와 다른 종교 문제에 접근하여 합리적으로 구원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의 진리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성경을 오도하는 것이다.

 

우선,"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의 질문에 대답할 줄 알아야 한다. 존 힉(John Hick)은 "예수를 성육하신 성자 하나님이셨다."는 진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한다. 그것은 사실에 대한 진술인가? 그 의미는 문자적인가,비유적인가,상징적인가,신화적인가,아니면 시작인가? 그리고 그는 예수가 사람이자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원이 사각형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런 질문과 주장들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성자 하나님이 신적인 특성을 가지고 계시며,성육신을 통해 인간의 특성을 지니게 되셨고,그 양자가 그분의 신적인 인격의 통일성 속에서 '유지되고'결합되었다.그러므로 그분은 한 인격으로서 참 하나님이시며,참 사람이시다. 또한,성경은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고전1:21)라고 말씀하셨다. 종교다원주의는 하나님의 계시대신에 인간의 이성과 인도주의에 근거하여 그들 나름대로의 논리를 전개해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영역 밖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분명히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종교다원주의 자들의 또 다른 주장인 본질은 하나이고 이름만 다른 하나님이란 주장에 성경은 이렇게 답한다. "너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출20:#i  너희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찌니라"(출23:24),"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시96:5),"너희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나외에 다른 신이 없는니라"(사44:6)

 

하나님께서 만약 타종교와 같은 신,이름만 다르지 동일한 신이라면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겠는가? 다른 한편 구원에 대한 문제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몇 교수들이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여 큰 혼란을 야기 시켰는데 성경은 여기에 이렇게 답한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행4:12),"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1:8)

 

인간의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임에도 다원주의자들은 이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려 하며,이렇듯이 성경의 진리를 거부하고 이를 다른 복음으로 대치하려는 인간적인 노력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이들을 보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롬2:8)라고 말씀하신다.

       

 

나. 대화의 자세

 

한스 큉은 [세계 도덕성의 과제]라는 책을 선보이면서 이렇게 말한다. "세계도덕이 없는 생존은 없다. 종교 평화가 없는 세계평화는 없다. 종교대화가 없는 세계평화는 없다." 결국 추구되어야 할 세계도덕은 서로 다른 종교들간의 대화로 부터 비로서 정초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라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들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종교진리에 대한 문제를 정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진리광신주의자들은 자기가 믿는 종교만이 절대적 진리이고 다른 모든 종교는 거짓 종교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종교적 평화는 하나의 참된 종교에 의하여 달성되고 보장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종교적 제국주의와 패권주의,배타주의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만약 다른 종교가 기독교에 의해서 "완성"혹은 "보다 성숙"되어질 수 있다면,기독교도 타종교에 의해서 "보다 더"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대화를 주장하는 것이 기독교적 정당성을 지니지 못한다면,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대화하여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 인간으로서,자기 신앙을 감추고서 대화에 임하는 것이다.

 

결국 진정한 대화에 이르는 길에서 신의 보편성과 종교의 특정 진리에 대한 절대적 헌신을 향한 인간적 욕구가 모두 강조되어야 한다. "서로 다른 종교들이 서로 다른 빛을,그것을 필요로 하는 영혼의 서로 다른 세계에 비추어줄 수 있는가?" 라  타고르가 제기한 물음이 함축하고 있듯이 서로의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겸허하게 인정하고 대화를 경험하면서 기독교인들은 보다 나은 기독교인으로 영적인 깊이를 더해야 되겠고 사랑과 봉사의 헌신적 삶을 통하여 보다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할것이다.

       

 

다. 선교에서의 자세

 

이러한 다원주의 상황에서 선교관은 성경적인 선교관과 판이하게 달라진다. 다원주의적 선교의 목적은 인간화이며 세계평화 공동체의 형성이므로 우상숭배와 불신앙으로부터의 회개는 요청하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개종을 목적으로 선교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를 요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복음전도와 하나님께로의 회심이 아니라,오히려 탈기독교적 탈고백적,탈사도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선교에서 우리는 먼저 상황인식을 먼저 해야된다. 복음은 어느 선교지에서든지 현지문화와 충돌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의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려면 선교현지의 문화를 보면(물론 문화 자체를 놓고 우열을 가리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지만) 기독교 문화 보다 열등하다. 그 문화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그 문화속에서,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불변하는 진리인 복음의 메시지가 단지 표현 방법이 다른 즉,다양한 "포장"을 하고 전달될때 선교지의 상황은 쉽게 파악될 것이다.

 


둘째,복음의 순수성을 재인식해야 한다. 복음의 순수성은 먼저 성경의 영적인 권위를 인정하고,그 내용의 정확성과 무오성을 믿으며 크리스챤의 신앙과 삶에 있어 최선의 기준과 척도가 된다는 것을 믿어야하다. 그래서 복음은 어떤 문화나 상황에서도 수정되거나 부인할 수 없는 메시지이며,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불변하는 영적인 원리이다.                        


결론

       

현대의 다종교 현실을 부인할 수 없다. 종교간의 갈등이 있어서는 않되고,종교 사이의 평화야말로 세계평화를 위해 긴요한 조건임에도 종교간의 갈등이 전쟁과 다툼을 유발시키는 어두운 현실임을 보아왔다.

 

종교는 개인은 말할것도 없이 집단과 사회 더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위해 평안과 화목,행복등을 가져다 주는 매개체임을 안다. 그래서 이런 다종교 사회에서 갈등과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대화를 통해서 극복해야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타종교를 이해하고,또한 타종교에게 우리의 종교를 이해시켜야 한다.

 

다종교들 사이에서는 많은 유사점들이 있는데,타종교들이 말하는 신(god)은 우리 기독교의 신(God)과 비교될 수 없을 뿐더러 절대적 진리인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컬어서도 안될 것이다. 그리고,우리 기독교의 독특성과 당연한 진리들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물론 기독교의 절대성을 강조하면서 타종교를 배타적으로 취급하여 갈등을 일으켜서도 않된다. 그러므로 선교적 차원에서도 타문화를 극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는 그 문화속에 살며 그 문화속에서 서서히 문화와의 충돌없이 전해야 올바른 방법이 될 것이다.

 

또,기독교의 구원은 타종교들의 구원의 개념과 다름을 알고있다. 원죄로 인해 끊임없이 발생하는 죄의 굴레속에서 해방되어,영생을 누리며 하나님과 접촉하는 삶을 사는 것이 구원이며,"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는 주장을 너그럽게 보아줄 수 가 없는 것이다. 이 많은 논쟁들 속에 성경은 답을 주신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요14:6),"다른 이로써는"(행4:12) 아버지께 갈자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렇다. 다종교 상황속에서 기독교는 흔들리지 말고 진리를 보존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넓게 전해야한다.                    

 

***** 참 고 문 헌 *****

변 선 환.[종교다원주의와 신학적 과제]. 서울:

홍 정 수. [다종교와 기독교]. 서울:조명문화사, 1990.

John Hick and Brian Hebblethwait(ed.), Christianity and Religious.

              Philadelphia:Fortress Press, 1981.

Hallencreutz C.F., Der Dialog in der Geschichte der okumenischcen

              Bewegung. Frankfurt:Dialog mit andern Religlonen,1972

Karl Rahner, Christianity and the Non-Christion Religions. in Chris-

              tianity and Other Religious,1989.

God Has Many Names, Macmillan, 1983.

Horold,Coward. 한국종교연구회역.[종교다원주의와 세계종교].서울:서광사,

                                   1990.

Gustav Menshing. 변선환역.[불타와 그리스도].서울:종로서적,1987.

차 옥 승."종교다원주의 세계에서의  종교간 대화와 협력에 관한 연구",[신

                             학사상].1990.여름.

박 광 철."토착종교와 기독교선교",[목회와 신학].1991.9.

김    진."현실과 요청",[신학사상].1991.겨울.

유 동 식."한국종교와 타종교",[기독교사상].1966.

위 거 찬."종교간 대화를 지향한 종교사 신학의 연구".미간행 박사학위 논

                   문. 서울:서울 대학교,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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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의 타종교 선교정책에 관한 비판적 고찰:

NCCK1) 신학노선을 중심으로

소윤정 서울기독대학교

I. 들어가는 말

2010년 8월 31일 스위스 제네바 에큐메니칼센터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2) (WCC) 중앙위원회가 7년마다 열리는 '2013년 WCC 10차 세계총회’의 개최지를 부산으로 결정하자, 한국 교회는 크게 환호하는 그룹과 크게 우려하는 그룹으로 나뉘어 자명한 입장을 포명하고 있다.

세계 110여 개국 350여개 개신교회의 대표들 5,000여 명이 부산 벡스코에 모여들 것이고 이로 말미암아 세계 속에서 한국기독교의 위상이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로 일부 교단은 일찍부터 축제의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으나 '예장합동', '예장고신', '예장합신', '예장백석'등 보수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교단들은 한국교회의 복음의 순수성이 훼손되고 한국교회에 종교다원주의가 만연해지고 혼합주의가 확산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면서 다각도에서 WCC 총회를 반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2010년 5월 31일에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을 비롯한 160개 보수주의 교단들과 28개 보수적인 선교단체들이 연합하여 'WCC 총회유치 반대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2013년 WCC 부산 총회 개최를 저지하기로 결의한 후 결의문과3) 성명서를4) 발표하였다.5)

그리고 2010년 8월 31일 WCC 부산 총회유치가 결정나자 보수성향의 한기총은 반대입장을 명확히 하고 가시적 활동을 펼치기 위해 최근 범교단적인 '한국기독교 WCC 대책위원회(위원장 홍재철, 이하 대책위)'를 구성했다.

한기총을 중심으로 복음주의적 성격이 강한 4개 교단을 중심으로 연합해 만들어진 대책위는 얼마 전 사단법인으로 등록됐다. 대책위는 WCC 신학의 종교다원주의, 종교대화주의, 종교혼합주의, 사회구원지상주의, 용공주의, 개종전도금지주의, 로마가톨릭주의, 가시적 교회일치주의, 신앙고백 형식주의, 성경불신주의 등을 10가지 반대이유로 들었다.6)

이미 1959년 WCC가입 문제로 한국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가 통합과 합동으로 분열되고, 이어서 1960년 대한예수교성결교회가 기성과 예성으로 분열되는 아픔을 체험했다. 무엇보다도 WCC가 선교적 차원에서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타종교를 선교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1963년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고 선교사파송을 중지한 것은 한국교회의 분열과 아픔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하여 WCC를 반대할 충분한 근거가 된다.

이에 필자는 WCC의 타종교 선교정책에 관하여 NCCK의 입장을 중심으로 생각해보고자 한다.

II. WCC의 타종교 선교정책

1. ‘모라토리움’ 선언

1973년 방콕 선교대회는 ‘모라토리움(Moratorium)’이라는 선교정책을 내놓은 첫 번째 선교대회이다. 1972년 12월 29일부터 1973년 1월 9일까지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96개국 330명의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CWME (Commissi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 -세계선교와전도위위원회)7) 제2차 회의가 열렸다.

특별히 1973년 방콕대회의 명칭은 “오늘의 구원에 관한 세계대회(World Conference on Salvation Today)”였다.8) 이는 시대적 상황이 필요로 하는 교회론과 선교론에 따른 사회구원을 강조한 대회였다.

1973년 방콕대회의 주제 선정에 있어서 이미 1971년 토마스 위서(Thomas Wieser)에 의하여 발표된 논문 “오늘날의 구원체험(The Experience of Salvation Today)”에서 토마스는 성경과 다른 종교들의 전통들을 인용하면서 교회의 구원 기능적 역할은 오늘날 구원의 매개체 중 단지 한 집단으로써 이해된다고 하였다.9)

이처럼 1973년 방콕 선교대회의 ‘구원’개념은 1971년 토마스 위서에 의해 재 정의된 사회적 구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본질적 가치를 훼손하고 사회적 상황만을 중시한 비복음적 구원관인 것이다.

비록 방콕대회에서 복음주의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개인의 회심과 교회의 성장, 교회의 다양성 속의 일치성이 강조되었지만 ‘모라토리움’ 선교정책을 내놓은 배경 또한 ‘바르바도스(Barbados)’섬에서의 인디언 해방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1973년 방콕대회는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구원관을 제시하였다.10)

1972년 “중국혁명가운데 나타난 구원관 (Salvation in the Chinese Revolution)”등 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방콕대회가 이야기 하고 있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 구원이 아닌 무비판적 상황화에 근거한 ‘구원’이었다.

그러므로 방콕대회가 제시하고 있는 ‘구원’은 전혀 비성경적이며 인본주의적 인간화를 위한 것 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이 인간의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는 인간화를 소망하고 있지만 참다운 인간화는 신본주의적 구원의 결과물로 얻어진다는 것이다.11)

1952년부터 WCC내에서 팽창된 새로운 선교사상(Missio Dei)아래 선교비를 해방운동보조비나 제3세계 유학생 교육비등으로 사용하기 시작하고 선교사 파송과 후원을 위한 선교비 지원을 중단한 것이 ‘모라토리움’이다.12) 1971년 1월 ‘바르바도스’섬에서 인디언 해방을 목표로 세미나를 개최했는데 이들은 선교에 대하여 “식민주의 이념이 종교적 가면을 쓰고 인디언 문화를 배척하고, 인디언을 선교 대상으로 굴복시키고 과소평가하며, 선교사들은 오히려 물질적으로 그리고 이상적으로 자기를 실현하고, 식민주의를 행했다.”13)는 내용으로 ‘바르바도스’ 선언문을 발표한 것이다.

또한 이로 인하여 1973년 방콕 대회에서 ‘모라토리움’을 선언하여 피선교 교회들의 우위성과 동질성을 확립할 목적으로 선교비 및 선교사 보내기를 중단하게 된 것이다.

1973년 방콕대회에서 ‘모라토리움’을 선언한 배경으로 우리는 남미의 해방신학적 배경을 간과 할 수 없다. 해방신학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밝혀야 할 것이 ‘해방’이란 무엇인가이다.

해방신학적 범주에서 ‘해방’이란 전인과 만인의 포괄적 해방이다. 단 한 사람이라도 제외됨이 없이 모든 사람의 삶에 있어서 모든 차원의 억압에서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14)

여기서 ‘해방’이란 개념은 성경과 기독교 교회가 전통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구원관과 동떨어진 상황 중심적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구티에레즈(Gustavo Gutierrez)가 해방 개념 또는 해방 운동에 대한 세 가지 차원을 정의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구티에레즈가 정의한 첫 번째 단계의 해방은 압제받는 대중과 사회계급의 염원을 표현한 것으로써 강대국의 제국주의적인 지배와 그 종속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단계의 해방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인간을 자기 운명을 의식하고 책임지는 존재로써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란 진정한 자유와 새로운 인간성, 그리고 질적으로 변혁된 사회를 추구하는 노력의 주체라는 것이다.

끝으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가 가져오는 ‘해방’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불의와 압제와 근본적 죄로부터 해방되므로 이기심을 극복하고 참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하나님과 이웃과 진정으로 교제할 수 있게 하는 의미로서의 해방을 뜻한다.15)

그러나 구티에레즈가 정의하고 있는 세 번째 단계의 성경적 ‘해방’이란 구티에레즈가 전제하고 있는 ‘죄’의 개념과 성경적 ‘죄’의 개념이 다름을 이해할 때 구티에레즈가 정의 하고 있는 ‘해방’이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신학 태동의 배경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 분석의 이론적 도구와 역사 철학으로써 해방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부르주아와 프로레타리아, 억압자와 피억압자, 자본가와 노동자로 분석했다. 해방 신학은 현실 분석을 통해 가난의 구조적 원인을 발견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론을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으로부터 도입했다.

해방 신학이 이분법적으로 사회를 분석하고 계급 투쟁이나 폭력에 의한 혁명을 인정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었다.16)

마르크스는 인간이 본래 악하다는 것을 부인한다. 우리는 악하게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악한 성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인류의 악은 계급 투쟁에 의해서 형성된 속박적인 사회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인간의 본성을 괴롭히는 것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계급 투쟁이 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계급 투쟁은 인간이 서로에게 과하는 모든 살인, 원한, 증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모든 범죄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17) 마르크스의 첫 번째 핵심 이론은, 모든 사회는 계급 투쟁에 의해서 얽혀 있으며, 이 계급 투쟁이 인간 죄악의 진정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위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해방신학의 정의를 내려보면 다음과 같다. 해방신학은 1970년대에 라틴 아메리카에서 정치, 경제적인 자유를 박탈당한 특수한 상황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신학이론이다.

전통신학이 개인의 영혼구원을 교회의 중요한 사명으로 보고 있는데 반하여, 해방신학자들은 현실사회를 조직적인 억압사회로 규정하고 모든 형태의 억압과 착취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을 말한다.18)

이것은 라틴 아메리카와 제3세계 나라들에서 발생한 운동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경험과 그들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준거점으로 삼는 신학운동이다.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 특히 제3세계의 빈곤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시작하는 신학적 과제의 새로운 급진주의적 접근법으로써, 억압을 떨쳐 버리고자 하는 그들의 투쟁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는 신학이다.19)

이처럼 해방신학,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으로 ‘모라토리움’을 선언한 WCC는 1970년부터 1986년까지 17년 동안 약 250만 불을 ANC, SWAPO, PAC20)와 같은 반백인통치 투쟁단체들에게 지급하였고, 전세계 30개국의 100개 이상 기관에 모두 700만불을 지급하였다.21) 원

조를 받은 나라들과 단체들은 마르크스주의 영향권 아래 있는 행동주의 단체들이었으며 이막대한 재정은 WCC의 예산과 후원기금과 1973년 방콕 선교대회에서 결정한 ‘모라토리움’의 결과로 축적된 선교비로 지불된 것이다.22)

2013년 제10차 WCC총회의 주제가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사42:1-4)” 이다.23) 우리는 WCC의 지난역사와 신학적 입장을 고려하여 2013년 WCC총회가 구현하고자 하는 “정의와 평화”에 대한 분명한 입장규명이 필요하다.

해방신학적 입장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으로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고 선교사파송과 지원을 중단했던 WCC가 교회일치와 연합을 앞세워1910년 에딘버러에서 시발된 순수 교회연합운동인 에큐메니칼 정신을 계승하고자 나선다는 것은 복음주의 선교신학적 입장에서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에 많은 복음주의적 교단들이 우려의 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주제선정과 관련하여 중앙위원들은 ‘정의’ ‘평화’ ‘생명’ ‘일치’를 WCC 총회 주제에 넣기 위해 다양한 제안을 내놨다.

필리핀의 한 중앙위원은 “WCC가 설립된 1948년부터 지금까지 총회 주제에 정의나 평화란 이름이 사용된 적이 없다”는 입장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올라프 트베이트 WCC 총무가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결국 하나됨으로의 부르심”이라고 중재해 합의를 이끌었다.

또한 총회 주제와 관련해 WCC 중앙위원이자 기획위원인 시리아정교회 소속 모르 로함 교부는 “이번 주제는 전 세계와 관련된 것”이라며 “이 주제는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에게까지 다양하게 읽혀질 것”이라고 말했다.24) 이번 WCC총회 주제선정에서 중앙위원들이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을 보면 “정의와 평화를 통한 연합과 하나됨”이 2013년 제10차 WCC 총회의 목표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주제선정과 관련하여 다루어진 내용들과 언급들을 살펴보면 WCC의 연합정신은 지금까지 WCC가 추구해왔던 사회적 ‘교회연합’으로써2010년 에딘버러에서 주창된 순수 교회연합정신의 범주를 넘어 사회연합적 성격임이 확실시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날 분열을 부산 총회 성공희생 제물로”25)라는 낙관적인 한국교회의 대응은 실로 내실이 없는 공허한 외침에 불가할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2013년 WCC총회를 한국에서 개최함으로 한국교회의 복음의 능력을 WCC에 전하고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의 주역으로 설 수 있도록 하자는 입장이 있으며, 또 다른 입장으로는 이미 결정된 2013년 부산 WCC 총회에 대하여 번복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회개최를 방해할 수는 없으나 대회참가는 거부하겠다는 입장이 복음주의 내에서 정리되지 못 한 채 한국교회의 내적반응으로 보고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를 대표하고 있는 NCCK는 진보적 성향이 강한 단체로써 WCC신학의 문제점들을 간과하고 성공적인 대회를 위한 조직구성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예장 백석의 경우에는 “WCC 부산총회 비판적 지지”를 공개 표명하고 나섰는데, 장종현 백석학원 설립자는 “한국교회는 WCC가 주도적으로 종교다원주의, 종교혼합주의, 개인구원을 약화시킨 사회복음주의,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란 원리의 포기와 인본주의 성경관과 각종 비평학설의 수용, 성찬에 대한 프로테스탄트 이해의 포기, 이신칭의 교리의 로마 가톨릭적 이해, 선교무용론에 대한 혐의 등에서 벗어나도록 개혁을 유도하는 게 시급하다”고 밝혔다.26)

2. “대화” 프로그램

WCC의 종교다원주의를 잘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1971년 사마르타에 의하여 시행된 “Dialogue Program” 이다.27)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근본적인 차이는 “대화”에 대한 근본적인 입장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화”는 1928년 폴(Paul)과 차우(Chao)에 의하여 제2차 IMC(세계선교협의회)대회에서 처음 도입된 개념이었다. 그러나 1928년 거론되었던“대화”는 타종교와의 대화가 아니라 서양의 세속주의에 대항하여 힌두교, 불교, 유교의 종교들이 연합하여 대화하자는 것이었다.

1938년 탐바람 선교대회에서 종교다원주의적인 대화는 클래머(H. Kraemer)와의 충돌로 잠시 주춤하다가 1950년대에 다시 활발하게 거론되어졌다. 그리고 본격적인 종교다원주의적인 대화가 1961년 인도신학자 데바난단(P. Devanandan)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는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다”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세상과 화목하시려고 오셨으므로 더 이상 인간 사이에도 분쟁과 다툼이 없는 평안만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다원주의적이 입장에서 기독교 진리를 다양한 타종교의 종교철학적 체계에서 재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데바난단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추진된 종교다원주의적인 “대화”는 1967년 스리랑카에서 막스주의자들과의 대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본격적으로 WCC 내에 "Dialogue Program"이 형성되기 이전에 1970년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지도자들이 아잘톤, 베이루트에 모여서 함께 예배하는 종교 의식을 갖았다.

이 의식을 통하여 그들은 말하기를 “아시아의 범신론적 영성에 기독교의 진리가 용해됨을 느낀다.”라고 하였다.28) 데바난단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적인 영성을 아시아의 혼합주의적인 범신론적 영성에 희석시키고 기독교의 진리의 유일성을 거부하면서 타종교와의 대화를 모색하였다.

본격적으로 WCC내에 대화프로그램 (Dialogue Program)이 생긴 것은 1971년이다. WCC는 인도신학자 사마르타(S. J. Samartha)에게 대화프로그램을 일임하였다. 사마르타 역시 힌두교의 범신론적 입장에서 기독교의 진리와 하나님을 해석하였다.

그는 “경계선이 불안해 진다.”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하여 타종교와의 연합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그리스도가 기독교에만 계신 것이 아니고 타종교의 철학 속에서도 얼마든지 계실 수 있으므로 선교는 타종교의 철학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사명이라고 한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을 확대하여 잘못해석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심은 인간개인의 구원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 화목하고 또 인간 사이에 화목케 하여 평화를 주려고 온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평화 -“샬롬”-이 오게 하는 것이 곧 종교의 목표라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기독교는 진리의 유일성을 배제하고 타종교와 주체대 주체로서 다양한 대화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타종교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 선교라는 것이다.29) 사마르타는 이와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진리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대화 방식을 거부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배제한 “그리스도의 보편성”과 “포괄적 성령론”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론에 대한 정면적인 대응이다. 그가 말하는 성령은 아시아의 범신론적 혼합주의 영성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영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는 타종교의 다양한 영적 체험을 성령으로 간주하여 “포괄적인 성령론”의 입장에서 타종교와의 대화를 이끌어나가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은 그에게 무의미 하고 “샬롬”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모두가 평안하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WCC의 종교다원주의 운동에 힘입어 한국에서도 유동식 박사에 의하여 1990년 1월 19일 20일에 걸친 세미나를 통하여 “한국종교와 신학적 과제”라는 제목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타종교의 존재와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의 문제가 다루어 졌다.30)본 학술대회의 서문에는 이에 대한 변선환 박사의 글이 발표되었는데 종교다원주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내용이었다.

변선환 박사는 더 이상 한국교회는 타종교를 전도의 대상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대화를 통하여 타종교와 연합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타종교와의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타종교를 대화의 주체로 보아 서로가 진리를 상대적으로 받아들이고 서로의 종교철학적 체계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31)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적 “대화”는 1971년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제7차 WCC 총회에서 혼합주의적 성향으로 더욱 부각되어졌다.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총회에서 현경32)은 주제 강연을 맡았는데, 한국무속의 모티브를 빌려 마치 무당처럼 십자군 전쟁에서 죽은 무슬림, 정신대에 끌려가 죽은 할머니, 베트남 전쟁에서 죽은 군인 등인류 역사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영을 부른 다음 해원을 시켜주는‘초혼제’를 지냈다.

그러면서 “성령은 바로 이렇게 한에 맺혀서 울부짖는 울음을 듣고 그 울음을 치유하고 우리를 온전함으로 이끌어주는 삶의 에너지이자 생명력”이라고 메시지를 건넸다.

기독교의 성령이 보통 서양미술사에서 보면 서양 남자의 얼굴로 그려지잖아요. 저는 아시아 여성이 보는 성령의 얼굴을 ‘관세음보살’로 잡았어요. 어짜피 성령은 눈에 잡히지 않는 것이고 사람은 자기 무의식의 세계를 반영하는 가장 자비로운 치유자의 얼굴로 성령을 표현하잖아요. 제가 여성적인 관세음 보살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내가 아시아 여성으로서 느끼는 성령의 아이콘이다.’라고 선언하니까 그런 불교 이미지를 본 기독교인들이 모두 뒤로 넘어갔죠.33)

이와 같이 WCC의 종교다원주의적 “대화 프로그램”은 WCC의 혼합주의를 태동시켰다. 타종교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고, 타종교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발견하고자 하는 이러한 다원주의는 1968년부터 1975년까지 WCC 중앙위원회 위원장 이었던 인도 신학자 토마스(M. M. Thomas)의 혼합주의에서 더욱 확고해졌다.34)

이미 1973년 방콕대회에서 힌두교인은 종교를 바꾸거나 새로운 종교 공동체로 이동해 갈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서 그 자신의 문화 공동체 안에 그대로 있으면서 ‘기독교적 힌두’가 될 것35)이라고 주장했던 토마스는 2년 후 나이로비총회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혼합주의”를 주장했다.

이에 정현경은 토마스가 주장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혼합주의’를 아주 잘 실현한 에큐메니칼 학자인 것이다.

정현경은 그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경계를 넘나드는 자’ ‘다리를 놓는 자’ ‘문화 통역가’로 정의를 내리고 이러한 것들을 통털어 ‘살림이스트(Salimist)’라고 하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냈다. ‘살림이스트’란 순수한 한국말 명사 ‘살림’에서 온 말이다. ‘살림’은 모든 것을 살아나게 한다는 말이다.36)

“무당 같다고요? 전 그 말이 최고로 영광스런 찬사라고 생각해요. 우리 안에는 모두 ‘신적인 생명력’ 즉 우주의 창조력이 있어요. 그리고 신적인 생명력의 씨를 싹트게 해야 할 의무도 있고요. 저는 사람들을 만나면 ‘신(神)나게 사세요!’ 하고 인사하는데요. 마음껏 신기를 발휘하면서 살아야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 수 있거든요. ‘꼴리는’대로 살라는 말도 방

종이 아니라 ‘존재이유’를 찾으라는 그런 의미죠.37)

현경은 미국 케임브리지 젠 센타에서 숭산스님을 만나 ‘대광명’이라는 불명을 받고 계룡산 신원사에서 삭발 동안거에 들어가는가 하면 히말라야 산속에서 ‘옴 마니 반메 훔’만트라를 외우고 베트남의 틱낫한에게서 명상을 통한 수행을 배우는 등 신학자로서의 자기만의 정체성을 세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만을 위한 제단(altar)을 만들것을 그의 책에서 제안하고 있다.

너의 방이나, 네 방이 없다면 공원의 한 구석이나 어는 한 장소를 너의 성지(Holy Place)로 정하고 그곳을 네가 성스럽게 여기는 ‘파워 오브젝트(Power Object)'들로 꾸며봐.성경책, 불경, 예수님, 부처님, 여신들의 사진, 혹은 네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닮고 싶은 사람들의 사진, 아니면 아름다운 조약돌, 깃털, 꽃, 초, 향물, 음악 등, 무엇이든 네게 힘을 주는 오브젝트들로 성스러운 제단을 만들고, 그 구석에 앉아 네가 되고 싶은 너 자신, 너의 가장 와일드한 꿈들, 그 모든 것들을 상상하며 너 자신에게 마술을 걸어봐. 그래서 그 가장 이상적인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네 모습을 관찰하는 거야. Enjoy it!38)

이처럼 정현경이 보여주고 있는 WCC신학은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선교의 본질인 복음전도가 전혀 요구되지 않는 종교다원주의적 혼합주의 신학인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NCCK는 2013년 WCC 부산총회가 성황리에 모든 교단과 교회가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뤄지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2010년 에딘버러에서 세계선교를 위한 복음 선교적 차원에서 거론되어졌던 교회연합차원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그 의미를 상실한 채세계선교가 아니라 교회연합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인류연합 운동 즉, 세계 평화공동체 형성 그 자체가 WCC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2013년 WCC 부산 총회를 위하여 취해야할 NCCK의 입장은 손님을 맞는 한국교0회로서 예의를 갖추어 손님접대에 최선을 다하되WCC의 신학동향과 문제점을 바로 인식하고 한국교회가 WCC의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적 경향에 편향되는 일이 없도록 WCC 신학 알리기 운동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한국교회들은 아직까지도 WCC의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가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무시한 채 대회유치와 성공만을 기원한다면 대회이후 WCC의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 신학으로 인한 한국교회의 혼동과 분열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다행인 것은 2013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 준비가 한창인 가운데 NCCK와는 별개로 일부 보수교단의 WCC 총회 비판 움직임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국내 최대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합동 WCC 대책위원회(위원장 서기행 목사)는 30일 ‘WCC는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란 책을 전국 총대, 교회, 주요 기관에 발송했다.

이 책은 기독론, 교회론 등 WCC의 실체를 비판하는 교단 산하 신학교 교수 12명의 논문을 실은 것이다. 서기행목사는 논문집에 대해 “WCC 신앙노선이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며 “논문집을 통해 교단 소속 목회자들부터 WCC가 신앙적·신학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39)

III. 다종교 세계에서의 기독교 신앙 간증

(CHRISTIAN WITNESS IN A MULTI-RELIGIOUS WORLD)40)

2011년 1월 28일 스위스 제네바 WCC본부에서 WCC와 WEA41)와 로마교황청이 공동의 선교 문서를 발표했다. 2013년 WCC 총회의 한국유치와 더불어 2014년은 WEA의 한국대회가결정되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WCC와 WEA의 공동 선교문서발표는 향후 한국선교신학의 방향에도 큰 도전이 될 것이다.

또한 지난 2011년 10월 1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WCC 총회 준비위원회 모임에서 롤프 힐레(64) 세계복음주의연맹(WEA) 에큐메니컬위원회 위원장과 박성원 WCC 중앙위원(영남신대 석좌교수)이 만나 보수교단이 우려하는 WCC의 신학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았다. 튀빙겐대 신학대 학장을 역임한 힐레 위원장은 1986년부터 2008년까지 WEA신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이 WEA의 신학적 정체성을 지키는 데 앞장서 왔다.

그는 “에큐메니컬 운동과 복음주의 운동은 상호 보완적이며, 세계적으로 양 진영이 서로의 합치점을 찾아가고 있는 새로운 상황에 있다”면서“전혀 새로운 운동에 직면해있기 때문에 한국교회도 과거의 이분법적 구도에 함몰되지 말고 대화에 나서는 게 좋을 것” 이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그는 “WCC의 신앙고백을 받아들이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귀띔했다.42) 그러나 실상 WCC의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로 교단의 분열과 신학적 분리를 일찍이 경험한 한국복음주의 교단이 받아들이기에는 힐레 위원장의 이같은 견해가 다소 부적절해 보인다. 왜냐하면 에큐메니칼 진영과의 대화는 이전에도 있어왔기 때문이다.

에큐메니칼 진영은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에서 복음주의도 다양한 입장중의 하나로 받아드리는데 어려움이 없을 수도 있겠으나 복음주의적 입장은 성경에 근거한 복음주의적 입장을 고수하기에 신학적 검증단계를 거치지 않고 대화를 통한 상호보완을 논의하는 것이 상당히 부적절해 보인다.

또한 힐레 목사는 “70년대와 달리 오늘날 에큐메니컬과 복음주의는 양극단을 달리던 구도에서 상당히 다른 상황에 와 있다. 에큐메니컬 운동이 에반젤리컬화 되고, 에반젤리컬이 에큐메니컬화 된 성향을 보이고 있다. 상당한 방향 전환이 있었고 배움으로 서로 많이 융합이 된 상태다. 과거의 에큐메니컬 운동과 전혀 다른 운동이라고 생각해도 좋다.”43) 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WCC의 신학노선은 WEA의 신학노선과 상당히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앞서서 보았듯이 역사를 통하여 형성된 WCC의 많은 프로그램들과 WCC 홈페이지 웹사이트에서도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타종교를 통한 구원의 개연성은 절대적으로 복음주의 선교신학에서는 받아드려질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특별히 지난 1월 28일 공동으로 WCC와 WEA와 로마교황청이 발표한 선교 문서이다. 다음은 선교 문서 지침사항중 제 2, 3조항이다.

2. 모든 종교인들과 존중과 신뢰의 관계를 정립하고 특별히 교회와 다른 신앙 공동체들과 단체적 차원에서 계속적인 타 종교 간의 대화를 다른 기독교적 활동과 더불어 해 나가야 합니다. 수년간의 긴장과 대립 속에 깊은 의혹을 쌓고 신뢰를 잃은 단체 간의 상황에서는, 종교 간의 대화가 대립을 완화하고 정의를 구현하고 상처를 치유한 기억과, 화해와 평화 증진의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3. 타 종교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두텁게 하고 타 종교가 지지하는 시각도 받아들이되, 기독교의 주체성과 신앙을 강화하도록 기독교인들을 격려합니다.

위의 내용에서처럼 필자가 선교문서 내용 중 제 2, 3조항을 언급하고자하는 것은 특별히 제2조항은 종교간의 대화를 강조하고 있으며, 제3조항은 타 종교가 지지하는 시각을 받아들일

것을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2조항에서 언급하고 있는 ‘대화’의 전제가 무엇인지 분명히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WCC의 입장에서는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입장에서 대화를 하게 될 것이고, WEA의 복음주의적 입장에서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대화를 시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제3조항에서 언급하고 있는 ‘타종교가 지지하는 시각’이 무엇인지 구원관에 관한 시각이라면 WCC의 종교다원주의적 혼합주의 구원관은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다.

WEA(The World Evangelical Alliance)의 기원을 살펴보면, 1846년 EAG(The Evangelical Alliance of Great Britain)이 창설되고 이와 함께 영적 일치와 기도에 합심하여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돕고 격려하며 부흥을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WEF(The World Evangelical Fellowship)으로 시작하였다. 그 후 특별한 동기가 없었고 미국 남부 노예제도에 대한 합일점을 찾지 못한 채 활동이 멈추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복음주의자들의 교제권을 다시 형성하려는 바람이 있게 되어서 1951년에 EAG와 새롭게 만들어진 th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U.S)와 21개 국가의 대표자들이 모여 WEF를 다시 구성하게 되었다.44)

정흥호 교수는 2010년 12월 13일 한국연합선교회 주최학술대회에서 “WEA의 신학노선과 방향”에 대하여 발제를 바치면서 결론에서 “크게 복음주의란 차원에서 본다면 WEA의 신학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으며 로잔 1차 선언(1974)인 Lausanne Covenant나 2차선언 (1989)인 Manila Manifesto, 3차 로잔대회의 The Cape Town Commitment(2010)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5) 고 하였다.

그런데 지난 1월 28일 WCC와 WEA와 로마교황청이 공동으로 발표한 선교 문서에서는 무엇보다도 선교문서 작성 배경 중타종교와의 대화와 협력을 중시하면서 1번 조항46)에서 “타 종교 간의 기도 (1997-1998)”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WEA가 크게는 복음주의적 선언문들과 같은 맥락에서 있는 듯 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이나 활동면에서 좀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IV. 결론

한국교회는 지금 WCC 2013년 부산 총회를 맞아 한기총을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 진영의 우려와 NCCK를 중심으로 한 에큐메니칼 진영의 축제분위기가 엇갈리고 있다. 물론 이미 총회개최가 확정된 마당에 총회를 저지하려는 움직임은 없지만 WCC신학의 문제점들을 매스컴과 교회교육들을 통해 알리면서 WCC신학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음을 밝히고 한국교회가 WCC신학의 유입으로 인하여 복음의 순수성이 사라지고 선교의 열정이 식는 일이 없도록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다.

이에 최근 1월 28일 WEA와 WCC, 그리고 로마교황청이 공동발표한 선교문서는 상호 합의하에 이루어진 공동문건이라는 차원에서 주의 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필자가 본론 부분에서 다룬 ‘모라토리움’선언과 ‘대화 프로그램’은 WCC의 선교정책을 대표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선교정책들이다. 해방신학적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받은 ‘모라토리움’ 선언은 WCC의 ‘일치와 화해’ 혹은 ‘정의와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외면적인 용어 사용만 보아서는 WCC가 추구하는 내용들이 성경적이고 복음적인지 가늠할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WCC의 과거 활동사를 통하여 종교다원적이고 혼합주의적인 WCC의 선교정책을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비판하였다. 무엇보다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음을 전제로 한 ‘대화 프로그램’은 복음주의적 입장에서의 ‘대화’에 대한 선입견을 낳았으며 마치 복음주의자들이 전혀 타종교인들과 대화하지 않는 듯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지난 1월 28일 공동발표한 선교문서에서는 타종교 간의 대화와 상호 지지가 촉구되었다. 그러나 타종교 간의 대화에 관한 전제조건이 구원의 상대성을 인정하는데 있는 것인지 어떤 지가 불명확하고 무엇을 위한 대화인지 WCC 홈페이지에서 보여주고 있는 WCC의 대화프로그램에 대한 선행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부디 2013년 WCC부산 총회를 통하여 한국교회가 WCC의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의 영향으로 표류하는 일이 없기를 소망하면서 이번기회를 통하여 한국교회가 WCC의 실체를 알고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면역력을 키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주제어)

복음주의, 에반젤리칼, 교회연합주의, 에큐메니칼, WCC, WEA,대화, 모라토리움, 해방, 구원

각 주

1)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2) 이하 WCC

3)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764408&cp=du, 2011년 10월 2일. (결의문)

1. 오늘 모인 160개 교단 지도자들과 28개 선교단체장들은 12개 항목의 성명서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WCC의 비기독교적 행위를 강력히 규탄한다.

2. 36년간 일제침략과 6.25 사변의 격동기에도 오직 예수로 순교자적 피흘림의 발자취를 지켜온 우리 개혁주의 신앙의 지도자들은 WCC의 한국진출을 철저히 배격한다.

3. WCC의 부산총회 유치가 마치 한국기독교 전체의 축제인양 언론매체를 통하여 홍보하여 1,200만 성도들의 복음의 열정을 꺾어 버리려고 우롱한 극소수의 몇몇 교단과 한국교회 분열을 가져온 몇 몇 목회자들은 철저히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를 바라며 향후 한국교계 분열의 책임은 그들과 그들의 교단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라며 오늘 모인 우리 개혁주의 보수교단 지도자들은 끝까지 WCC 부산 총회를 반대하기로 결의한다.

주후 2010년 5월31일

한국 기독교 WCC 반대 대책위원회

160개 교단장 및 28개 선교단체장 일동

4)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출판국, 『WCC 무엇이 문제인가?』(서울: 총회출판국, 2010),

241-243.

(한국 기독교 WCC 반대 대책위원회 성명서)

복음적 신앙을 고백하는 한국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이하 WCC)가 기독교 복음전파에 역행하고, 교회건설 사명을 방해할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절대성을 약화시키는 반성경적, 비기독교적 단체이기에, 이 단체의 한국총회(2013년) 개최를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제시하는 바이다.

1. WCC는 성경이 신앙의 행위의 유일한 최종적 규범이라는 것과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2. WCC는 성경의 기본 교리를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의 일치를 추구하며, 이단과 적그리스도와 자유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규제하지 않고, 교회의 변증적 사명을 무시한다.

3. WCC는 개신교회의 토대인 전통적인 구원관, 특히 이신칭의 시낭을 약화시키거나 상대화하며, 인간 해방과 혁명을 구원 행위로 본다.

4. WCC는 다른 종교에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있다고 하며, 종교 다원주의를 표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을 부정한다.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당위성을 포기한다.

5. WCC는 성령을 정령과 동일시하는 초혼제를 용납하고, 성령을 물활론적으로 해석하는 비기독교적 사상을 방조하였다.

6. WCC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을 선교에 도입하여 인간화, 화해, 사회참여 등을 선교의 지상과제로 보며,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이심을 선포하는 전도의 긴박성과 구령사업을 저해한다.

7. WCC는 통전적 선교를 말하면서도 실상은 빈곤퇴치와 사회활동과 구조악 철폐 등에 치우친 선교를 하고 있다.

8. WCC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일치를 추구하고 정교회를 회원으로 가입시켜, 선교유예를 시행하도록 하여, 성경적 복음 진리 전파를 방해한다.

9. WCC는 마르크스주의와 해방신학과 궤를 같이하는 좌파 성향의 용공주의 태도를 지녀왔고, 공산권 안에서 일어나는 인권유린, 생명 박탈, 신앙의 억압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

10. WCC는 교회의 연합체라고 하면서도 실상은 성찬중심의 교제단체이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 교회의 첫 번째 표지인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실상 교회의 본질인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을 포기한다.

11. WCC는 신학적 다원주의와 신앙무차별주의를 지향하며, 교리는 분열시킨다고 하면서 기독교 교리의 중요성을 폄하하고 교회의 생명력을 쇠퇴시킨다.

12. WCC의 외형적 기구 일치운동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진리안에서 일치된 신앙고백 공동체, 즉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분열시킨다.

2010년 4월29일

한국기독교 WCC 반대 대책위원회

5)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764408&cp=du, 2011년 10월 2일.

6) http://www.unionpress.co.kr/news/detail.php?number=98520&thread=01r02r01, 2011년 10월 1일.

7) 이하 CWME.

8) 본 논문의 1차 자료는 WCC의 홈페이지 (http://www.oikoumene.org) 를 참조하였음.

9) Roger E. Hedlund revised and enlarged, Roots of The Great Debate in Mission : Mission in Historical and Theological Perspective (India, Bangalore : Theological Book Trust, 2nd. edition, 1993), 258.

10) Roger E. Hedlund revised and enlarged, Roots of The Great Debate in Mission : Mission in Historical and Theological Perspective 259.

11) Hassing, "Salvation Today", 256. Roger E. Hedlund revised and enlarged, Roots of The Great Debate in Mission : Mission in Historical and Theological Perspective 에서 재인용.

12) P. Beyerhaus, Bangkok'73, Anfang oder Ende der Weltmission? (Neuhausen- Stuttgart, 1973), 102, 108. 이동주, 『현대선교신학』(서울 :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8), 201에서 재인용.

13) K. Bockmuhl, Herausforderung des Marxismus (Giessen, 1979), 128. 이동주, 『현대선교신학』, 201에서 재인용.

14) L. 보프, 『해방신학의 올바른 이해』(서울 : 분도출판사, 1984), 131.

15) 구르사보 구티에레즈,『해방신학』성염 옮김, (서울 : 분도출판사, 2000), 57-58.

16) 목창균, 『현대신학 논쟁』,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1995), 337.

17) 계급 투쟁은 수세기 동안 사회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접전을 일으켜 왔다고 말하며, 그는 자신이‘생산 관계들’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가진 자’와 ‘못가진 자’를 구분하고 있다. 공산당 선언에서 말한 바에 의하면 계급의 분류가 역사의 장을 따라 분명하게 구획되어진 것은 아니나 자본주의 시대에 와서는 이 선들이 명백하다. 자본가 - 소유자는 부르주아 계급이고, 노동자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규정되며, 이것이 모든 악을 조장하고 모든 사회 관계들을 규정하는 투쟁을 일으키게 된다고 주장한다.

18) 박영호, 『해방․민중신학 문답』(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1984), 19.

19) 스탠리 그렌츠․로저 올슨, 『20세기 신학』신재구역, (서울: IVP, 1997), 341.

20) ANC (African National Congress0, SWAPO (South West Africa Peoples Organization), PACC (Pan Africanist Congress on Azania).

21) E.W. 레훼버,『암스텔담에서 나이로비까지』전호진 역, (한국 기독교 교육 연구원, 1981), 201.

22) 이동주,『현대선교신학』, 202.

23) 국민일보 2011년 10월 7일자 29면.

24)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4673524&cp=du, 2011년 10월 2일

25) 국민일보 2011년 10월 7일자 29면.

26)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4542828&cp=du, 2011년 10월 2일

27) http://www.oikoumene.org/en/programmes/interreligiousdialogue.html 참조

28) 이동주,『현대선교신학』, 10-12.

29) 이동주,『현대선교신학』, 12-14.

30 이동주,『현대선교신학』, 9.

31) 이동주,『현대선교신학』, 10..

32) 현경의 본명은 정현경 이다. 한국여성들이 벌이고 있는 호주제 폐지운동을 지지하기 위하여 저자는 그의 책,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출간을 계기로 그녀의 이름을 현경으로 바꾸기로 했다. 어머니가 세 분이므로 그 성들을 이름 앞에 붙이면 오강장정현경이 되기 때문에 아예 더 평등한 방법으로 어머니와 아버지의 성을 다 빼기로 했다.

33). 박윤희, “파격적인 언행과 새로운 여성신학관으로 주목받는 세계적인 신학자 현경”「여성동아」, 2002. 7.

12. newsroom@donga.com. 소윤정, “정현경의 혼합주의적 신론에 관한 비판적 연구 - 성령론을 중심으로 -”,『복음과 선교』Vol.9 (2008), 217에서 재인용.

34) 이동주,『현대선교신학』, 15.

35) K. Bockmuhl, Herausforderung des Marxismus (Giessen, 1979), 142. 이동주, 『현대선교신학』, 15에서 재인용.

36). 현경,『미래에서 온 편지』,(서울: 도서출판 열림원, 2003), 232, “살림이스트 선언”. : 살림은 한국여성이 매일 하는 가정일을 일컬음. 예를 들면 나무하기, 물긷기, 음식하기, 빨래하기, 베 짜기, 아이 키우기, 병간호, 노인 돌보기, 꽃․나무 가꾸기, 우물 지키기, 소․닭․개 키우기, 그리고 집의 영(靈)들을 돌보기 등. 살림은 또한 망가지는 것(냄비, 신발, 그리고 가슴 등)을 고치는 일을 일컬음. 한국 사람들이 “저 여자 살림꾼이네”하고 말하면 그것은 그 여성이 모든 것을 살아나게 하는 기술, 예술 전문성이 있음을 말함. 예를 들면 모든 사람을 배부르고 행복하게 먹이는 것,가족의 평화, 건강, 풍요함을 끌어내는 것(이때의 가족은 모든 종류의 생명을 포용하는 큰 가족 개념을 의미), 아름다운 삶의 환경을 만드는 일 등.

37). 박윤희, “파격적인 언행과 새로운 여성신학관으로 주목받는 세계적인 신학자 현경”『여성동아』,newsroom@donga.com, 2002, 7, 12.

38). 현경『미래에서 온 편지』,, 28.

39)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5308981&cp=du, 2011년 8월 31일

40) http://www.worldevangelicals.org/resources/source.htm?id=288, 2011년 10월 8일, 공동 선교문서 <부록> 참조.

41) 세계복음주의연맹

42)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5422579&cp=du, 2011년 10월 8일

43)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5422579&cp=du, 2011년 10월 8일

44) David M. Howard, "World Evangelical Fellowship", in Evangelical Dictionary of World Missions. ed. by Scott Moreau (Grand Rapids, Mich, : Baker Book House, 2000), 1027-28. 정흥호, "WEA의 신학 노선과 방향“,『WEA와 WCC의 신학과 선교』, 한국연합선교회 학술대회 자료집 (2010.12.13), 11.

45) 정흥호, "WEA의 신학 노선과 방향“,『WEA와 WCC의 신학과 선교』, 21.

46) 1. 오늘날 세계에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그리고 기독교인들과 다른 종교인들 간에 협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PCID와 WCC 내 종교 간 대화와 협력(IRDC) 프로그램은 이와 같은 협력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PCID 와 WCC-IRDC 가 과거에 협력한 문제들의 예로는 타 종교인들 간의 결혼 (1994-1997), 타 종교간의 기도 (1997-1998), 그리고 아프리카의 종교성 (2000-2004) 등이 있습니다. 본 문서는 이 협력의 결과물입니다.

<부록>

한국어 번역본

다종교 세계에서의 기독교 신앙 간증

(CHRISTIAN WITNESS IN A MULTI-RELIGIOUS WORLD)

수행 지침

서론

선교는 교회 존재의 중심에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과 세계에 증거하는 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일을 모든 인류에 대한 존경과 사랑으로 복음의 방식에 따라서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서로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가지거나 기독교 신앙 간증에 대한 다른 해석을 가진 인종과 집단들 간에 긴장감이 존재한다는 인

식 하에, 교황청 종교간대회평의회(PCID), 세계교회협의회 (WCC), 그리고 WCC가 초청한, 세계복음연맹(WEA)은 지난 5여년간의 교류를 통해 기독교인의 신앙 간증 행동 지침으로써 사용될 본 문서를 집필했습니다.

이 문서의 목적은 선교에 관한 신학적인 선언을 하고자 함이 아니며, 다종교 세계에서 기독교 신앙 간증에 관한 실질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습니다. 이 문서의 목적은 교회와, 교회 협회들, 그리고 선교 단체들이 현재 행하는 선교 방식들을 회고하고, 이 문서를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무종교인들을 향한 그들의 고유의 전도와 선교 방식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준비하는 데 활용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세계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이 문서가 그리스도의 신앙을 증거하는 그들 고유의 행동 양식에 있어 말과 행동 모두로 적용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독교 신앙 간증의 기초

1.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그들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를 온유함과 경외를 가지고 할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이요, 기쁨이다. (베드로전서 3:15)

2.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최고의 간증이다. (요한복음 18:37) 기독교인의 신앙 간증은 하나님나라, 이웃에 대한 섬김,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끌지라도 자기 자신을 전부 내어주는 자기 비움의 선포 형식을 띄는 간증을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의 힘으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신자들도 말과 행동에 있어 성삼위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선교지에 보내진다.

3. 예수 그리스도와 초기 교회의 본보기와 가르침은 기독교 선교에 있어 가이드가 되어야 마땅하다. 200여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좋은 소식을 나눔으로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것을 추구해 왔다. (누가복음 4:16-20)

4. 다종교 세계의 기독교 신앙 간증은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에 참여 하는 것을 포함한다. (사도행전 17:22-28)

5. 어떤 상황들에서는 복음을 실천하고 선포하는 것이 힘들거나, 이러한 활동이 박해받거나 심지어는 금지되어 있지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에 있어 서로가 연합하고, 신실하게 증거

를 계속해나가는 것이 그리스도가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사명이다. (마태복음 28:19-20; 마가복음 16:14-18; 누가복음 24:44-48; 요한복음 20:21;사도행전 1:8)

6. 기독교인들이 속임수와 강제적인 수단에 의지한 부적합한 방법으로 선교를 행하고 있다면 그들은 복음에 위배되는 일을 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야기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은 회개를 요하며 우리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가 필요한 것을 상기시킨다. (로마서 3:23)

7.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를 간증하는 것이 그들의 책임이지만, 개종은 온전히 성령에 의한 것 임을 확신한다. (요한복음 16:7-9; 사도행전10:44-47) 기독교인들은 성령이 인간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원칙

기독교인들은 적합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루는 것을 추구하며, 다음의 원칙들을 고 수하는 것이 요청된다. 이는 특별히 다종교 간의 맥락에서 더욱 그렇다.

1.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모든 사랑의 근원이라고 믿으며 그들의 신앙 간증의 행위 안에서도 사랑의 삶을 실천하고 그들의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요구된다는 것을 믿는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모델 삼는다. 기독교인들은 삶의 모든 영역과, 그리고 특별히 신앙 간증의 행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님께 영광과 존귀를 드리며 그리스도의 본보기와 가르침을 따를 것이 요구된다.

3. 기독교인들의 도덕성. 기독교인들은 성실, 자비, 연민, 그리고 겸손으로 행동할 것이며, 모든 종류의 교만과, 타인을 업신여기는 행위, 그리고 차별을 극복할 것이 요구된다.

4. 섬김과 정의 실천. 기독교인들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는 일에 부름 받았다. (미가 6:8)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을 섬기고 그 섬기는 형제 자매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다. 교육의 제공, 의료 제공, 구제, 정의의 실천, 시민단체 활동 등의 섬김의 실천은 복음을 증거하는 데 불가결한 요소이다. 기독교인들의 전도 활동에 가난과 노동 착취의 현장이 있어서는 안된다. 기독교인들은 섬김에 있어 금전적인 동기나 보수를 미끼로 사용하는 모든 방식들을 철폐해야 한다.

5. 치유사역에 있어서의 분별력. 복음 선포의 중요한 부분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치유의 사역을 실천한다. 치유사역을 행하면서 인간 존엄성에 경외함을 가지고 사람들의 연약함과 치유에 대한 필요가 남용되지 않도록 분별력을 가질 것이 요구된다.

6. 폭력의 배제. 기독교인들은 신앙 간증의 힘을 남용한 모든 종류의 폭력, 심지어는 심리적인 또는 사회적인 폭력들을 배제해야 한다. 예배당,종교적 상징 또는 경전의 파괴를 포함한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권력에 의한 폭력, 불공정한 차별과 억압을 배제해야 한다.

7. 종교와 믿음의 자유. 공공 장소에서 자신의 종교를 선포하고 행하고 전파하고 전도하는 권리를 포함한 종교적 자유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됐다는 데에 근거한 인간의존엄성과 관계된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동일한 권리와 책임을 가진다. 정치적인 목표에 종교가 사용되는 곳 또는 종교적 탄압이 일어나는 곳에서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이들을 규탄하는 예언적 증거에 참여해야 한다.

8. 상호 존중과 협력. 기독교인들은 상호 존중의 자세를 가지고 헌신하는 것이 요구되며, 정의,평화와 공동의 선을 목표로 해야 한다. 서로 다른 종교 간의 협력은 이런 노력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

9. 모든 사람들에 대한 존중. 기독교인들은 복음이 문화에 도전을 주는 동시에 문화를 증진시킨다는 점을 직시한다. 복음이 문화의 어떤 부분에 도전을 줄 경우, 기독교인들은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요구된다. 기독교인들은 또한 자신의 문화에서도 복

음에 의해 도전 받는 부분들을 잘 분별해야 한다.

10. 거짓증거의 철폐. 기독교인들은 진지하게, 또한 책임감 있게 말해야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신념과 행동 양식을 배우고 이해하기 위해 많이 들어야 하고, 그들 안에 진실되고 좋은 것들을 인정하고 가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어떠한 의견과 비판적인 자세는 상호존중의 분위기에서 이뤄져야 하며, 다른 종교에 관한 거짓 증거를 피하도록 분명히 해야한다.

11. 개인적 분별력 의 확보. 기독교인들은 한 사람의 종교를 바꾸는 일은 중대한 일이며, 이는 개인의 자유를 확신하는 과정을 통해 올바른 회고와 준비를 위한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야 하는 일임을 인정해야 한다.

12. 다른 종교간의 관계 증진. 기독교인들은 보다 더 깊은 상호 이해, 화합과 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다른 종교인들과 존경과 신뢰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일을 지속해야 한다.

지침

WEA, PCID의 도움으로, 그리고 가장 큰 기독교 공동체 (가톨릭, 정교, 기독교, 복음주의와 성령주의) 의 참여로 WCC가 주최한 본 제3차 컨설테이션은 에큐메니컬 협력의 정신으로 이 문서를 교회, 국가와 지역의 신앙 고백적 공동체와 선교 단체들, 그리고 특별히 종교 간 관계에서 사역하는 이들에 의해 고려되도록 준비해 왔으며, 다음을 권면합니다:

1. 각 상황에 적용 가능한 이 서류와 기독교 증거에 관한 정식 행동 지침 상의 이슈들을 연구하십시오. 가능할 경우 이는 다른 종교 대표들의 자문을 통해야 하며 초교파적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2. 모든 종교인들과 존중과 신뢰의 관계를 정립하고 특별히 교회와 다른 신앙 공동체들과 단체적 차원에서 계속적인 타 종교 간의 대화를 다른 기독교적 활동과 더불어 해 나가야 합니다. 수년간의 긴장과 대립 속에 깊은 의혹을 쌓고 신뢰를 잃은 단체 간의 상황에서는, 종교간의 대화가 대립을 완화하고 정의를 구현하고 상처를 치유한 기억과, 화해와 평화 증진의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3. 타 종교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두텁게 하고 타 종교가 지지하는 시각도 받아들이되, 기독교의 주체성과 신앙을 강화하도록 기독교인들을 격려합니다.

4. 다른 종교 단체들과 함께 정의와 공익을 위한 범종교적 시민단체 활동에 참여하고, 갈등 상황에 처한 사람들과 함께 연합하는 일에 협력하여야 합니다.

5. 많은 나라들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것이 억제된 것을 인정하면서도 종교 자유가 적당하고 포괄적으로 존중되는 것을 보장받기 위해 정부에 요청하도록 합니다.

6. 주변 이웃들과 그들의 복지를 위해 기도하고, 또한 기도가 기독교인들의 선교일 뿐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에 관련되어 있으며, 또한 우리가 하는 일에 있어 중요한 부분임을 인지합니다.

부록: 본 문서의 배경

1. 오늘날 세계에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그리고 기독교인들과 다른 종교인들 간에 협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PCID와 WCC 내 종교 간 대화와 협력(IRDC) 프로그램은 이와 같은 협력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PCID 와 WCC-IRDC 가 과거에 협력한 문제들의 예로는 타 종교인들 간의 결혼 (1994-1997), 타 종교 간의 기도 (1997-1998), 그리고 아프리카의종교성 (2000-2004) 등이 있습니다. 본 문서는 이 협력의 결과물입니다.

2. 오늘날 세계에도 다른 종교 간 폭력, 인간 생명의 상실을 포함한 갈등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그리고 다른 원인이 이러한 긴장을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때로는 본의가 아니거나 또는 본의를 가지고 핍박하거나 폭력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도 이런 갈등에 개입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PCID 와 WCC-IRDC 는 기독교 신앙증거 행위에 관한 지침을 공동으로 만드는 협력 과정에 참여하여 이 문제들에 대해 다루기로 결정했습니다. IRDC 는 이 과정에 WEA가 참여하도록 초대하였고, 이 초대는 기꺼이 수락됐습니다.

3. 처음에는 두 번의 컨설테이션이 열렸습니다. 첫번째 모임은 이탈리아의 라리아노에서 2006 년에 ‘현실의 평가(Assessing the Reality)’라는 주제로 각기 다른 종교의 대표들이 그들의 개종에 대한 관점과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이 컨설테이션의 성명서의 한 부분은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의 이해에 다른 사람들을 초대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종교적 감성을 침해해서는 안되는 것을 확실시 한다. 종교의 자유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종교 외의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자신의 신앙의 우월성을 확증하는 목적으로 다른종교를 부정하거나, 비방하거나, 잘못 전하지 않아야 하는 우리 모두가 타협해서는 안되는 책임을 포함한다”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4. 두 번째 모임은2007년 프랑스 뚤루즈에서 기독교인들 간의 공동의 이슈들을 논의하기 위해서 개최됐습니다. 가족과 공동체 (Family and Community), 타인 존중 (Respect for Others), 경제 (Economy), 마케팅과 경쟁 (Marketing and Competition), 그리고 폭력과 정치 (Violence and Politics)에 관한 질문들이 상세하게 토론됐습니다. 이 주제에 관련된 목회와 선교적인 이슈는 신학적인 회고의 배경과, 또한 본 문서 안에서 발전적으로 전개된 원칙을 세우는 데 배경이 되었습니다.

5. 세 번째로는 2011년 25일부터 28일까지 태국 방콕에서 열린 기독교인 들 간의 컨설테이션에 참석한 이들이 이 문서를 완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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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과 통합의 차이점 
 

합동과 통합의 차이점에 대하여

보통 사람들은 WCC 때문에 나뉘어진 것만으로 아는데 이후에 신학적인 노선이 달라졌고

뿌리가 달라졌습니다.

이들의 차이점을 살펴보려면 일단 우선적으로 살펴봐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1) 신앙고백 (2) 미국 근대장로교회사

 

(1) 장로교회(영미)와 개혁교회(화란)의 신앙고백으로 벨직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도르트 신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이중에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을 주의깊게 살펴봐야 하는데 이 신앙고백이 변화를 겪기 때문입니다.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작성될 당시에는 33항으로 3항과 10항에서 제한속죄론(즉 예정론)을 기반으로 하였는데 알미니안주의가 미국 뉴욕 유니언 신학교를 중심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1903년 미국 북장로교회는 신앙고백을 35항으로 개정하고, 3항. 10항에 대해서 보편구원론적으로 바꾸게 되었지요. 더군다나 34항은 성령에 관하여 35항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2) 1903년 신앙고백이 개정된 이후 북장로교회는 1906년 알미니안주의를 지지하며 탈퇴했던 컴버랜드 장로교회와 합동하면서 프린스턴 신학이라 불리던 정통 개혁주의가 도전을 받게 되고 벤자민 워필드 등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그 신학전통을 지켰으나 프린스턴 신학교 또한 신학에 대하여 포용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에 찬성한 자들이 있고 반대한 자들이 있는데 반대한 대표적인 사람이 세계적인 신약학자였던

그레셤 메이첸이었습니다. 메이첸은 계속해서 자유주의에 대해서 방어하고자 했으나

북장로교회는 이미 넘어가고 있던 상황이었고,

1929년 메이첸과 그의 제자 등은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선교부를 운영합니다.

하지만 북장로교회는 용납하지 않았고 그들을 제명시켰습니다.

그 결과 1936년 메이첸은 미국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를 세웠지만

북장로교회의 (PCUSA)와 비슷하다 하여 여러 압박이 들어왔고

1939년 교단 이름을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로 바꿉니다.

 

통합과 합동은 크게 3가지면에서 차이가 납니다.

 

첫째. 그들이 계승하는 신학이 다릅니다.

1959년 WCC를 이유로 교단이 분열했을 때만 해도 신학은 비교적 같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통합의 경우에는 에큐메니컬 신학에 근간한 보수 신앙을 추구하며

개혁주의 신학의 20세기 계승자로 칼 바르트를 뽑고 있으며 대체적으로 칼 바르트 신학을 따라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합동 측의 경우에는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를 따르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신학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통합 측에서는 흔히 박형룡 박사와 메이첸 박사가 칼바르트에 대해 알지 못하고 비판한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칼 바르트 비평의 영향을 준 것은 <변증학>의 권위자 반틸과 박윤선 박사였다는 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둘째. 그들이 교류하는 교단이 다릅니다.

통합은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와 스코틀랜드 개혁교회, 프랑스 개혁교회 등과 교류하고 있지만

합동은 미국장로교회(PCA - 이 교단은 남장로교의 좌경화에 반발하여 세워진 교단임)와 정통장로교회(OPC)와 자매교단처럼 교류하고 있으며 미국의 기독교개혁교회(CRC)와도 교류하고 있지만

여성목사 안수와 칼 바르트 신학 등에 대한 포용적 자세로 인해 교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많은 것도 사실이며

기독교개혁교회는 합동 측보다는 합동 비주류에서 시작한 백석 측과의 교류가 더 많은 편이다.

 

셋째. 사소한 면에서 차이가 난다.

통합 측의 경우에는 예배에 있어서도 성찬 중심, 예전 중심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합동 측의 경우에는 말씀 선포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강단의 구조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증명한다. 통합 측 교회를 가면 대부분 강대상 뒤에 성찬상을 두고 있으며

목회자들의 경우에 스톨을 걸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합동 측 교회에서는 강대상 외에는 다른 것을 강단에서 찾아볼 수 없고

목회자들이 성의를 입지 않는 경우들도 많아졌지만 입는다 하더라도 스톨을 걸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통합 측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있어 35항을 채택한 1903년 판을 따르고 있으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 (1986) 과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 (2001)을 채택하고 있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16C 신앙관을 다루고 있으므로 21C에 맞는 신앙고백이 필요하다는 시각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통합은 대소요리문답의 경우 대요리문답은 채택하지 않고 소요리문답만을 채택하여 <요리문답>으로서 세례 시에 가르치고 있다.

반면 합동의 경우 1647년 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으며 대소요리문답을 그대로 채택하고 있다. (대요리문답은 목회자들을 훈련하는 등 성인들을 대상으로 두고 있는 것이며 소요리문답은 청소년들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통합은 여성 목사 안수를 허용하고 있으며 여성 장로 장립도 허용하지만

합동 측은 딤전 2:11 - 12과 고전 14 : 33 - 34를 근거로 여성 목사와 여성 장로를 거부하고 있다.

또 축도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합동 목사는 고후 13 : 13를 근거로 끝부분에 "함께 계실지어다."로 마무리하지만

통합 목회자들은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로 끝내고 있다.

 

칼 바르트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서 더 알고싶으신 것이 있다면 개혁주의를 연구하는 단체(SDG 개혁신앙연구회) 등에서 배우시고 더 전문적인 것이 필요하시다면 <개혁신학회>에 들어가셔서 2012년 봄에 장로교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발표된 논문들이 게재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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