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설교

제목 : 세상을 이기는 믿음

말씀 : 시27:1-6

1.진정한 승리는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여러분,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큰 소리를 치며 유럽대륙과 러시아와 이집트까지 정복했던 나폴레옹은 키가 157Cm 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저는 그 보다 조금 큽니다. 그래봤자 그야말로 도토리 키재기이지만.... 그런데 여러분, 이 세기의 영웅 나폴레옹은 자신의 작은 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키는 땅에서부터 재면 가장 작지만 하늘에서부터 재면 제일 크다.’고 말입니다. 그는 이런 자신감과 당당함으로 큰 소리를 치며 세계 정복에 대한 꿈을 가지고 결국 유럽대륙과 러시아와 아프리카까지 정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치며 승승장구했던 나폴레옹도 별 수 없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 유명한 워털루전투에서 영국과 프러시아의 연합군에게 비참하게 패하게 되는데요, 여러분, 나폴레옹이 워털루전투에서 패한 이유가 어떻게 보면 아주 웃긴다고 합니다. 그는 만성 위궤양이 있었는데 그로 인하여 심한 변비가 생기가 되었고, 변비 때문에 치질에 걸리게 되었고, 심한 치질 때문에 말을 타기가 힘들어 전쟁에 나갈 때는 항문 주위에 마취제 주사를 맞아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워털루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하필 치질이 너무 심하여 전쟁을 2시간가량 늦추게 되었는데 그 사이에 영국을 지원하는 프로이센군이 합류하여 나폴레옹은 아주 강력한 마취제를 투여하고 전쟁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국부적인 마취제였지만 너무 강력한 마취제를 맞아 정신이 좀 몽롱한 상태에서 지휘를 하다가 그만 힘도 못쓰고 패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큰소리를 쳤던 세기의 영웅 나폴레옹이 그 놈의 치질 때문에 결국 쓰디쓴 패배를 당하고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초라하게 생을 마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패한 다른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있었겠지만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큰 소리쳤던 나폴레옹도 치질 하나도 제대로 다스릴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의 것은 그것이 사람이든 권력이든 부귀영화든 아무리 크고 높고 대단해봐야 별거 아닙니다. 아무리 대단한 영웅호걸이라도 금방 늙고 병들고 결국 죽습니다. 제아무리 큰 권세라도, 제아무리 천하 없는 부귀영화라도 금방 썩어지고 없어지고 그야말로 물거품과 같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립니다. 또 사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도 별거 없습니다. 많은 것을 가졌다고 행복에 겨워 죽을 지경인 것도 아니고, 가진 것이 별로 없다고 맨 날 슬프고 고통스럽고 비참한 것도 아닙니다. 있는 자나 없는 자 때론 웃고 울기도 하고, 때론 평안하기도 하고 근심 걱정이 있을 때도 있고 다 그렇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벧전1:24,25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육체는 풀과 같이 연약해서 금방 스러질 것이요, 그 영광도 풀의 꽃과 같이 곧 시들어 질것이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 그 약속 안에서 주어지는 영광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풀과 같이 시들어 버릴 세상의 것들 바라보고 의지하고 거기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별 것 아닌 것들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하고 낙심하고 절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별것 아닌 것 때문에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하찮은 것들에 얽매어 믿음 생활도 제대로 못하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안 그래요? 그거 뭐 사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뭐 좀 많이 가졌으면 어떻고 좀 적게 가졌으면 어떻습니까? 그게 뭐 인생의 행복을 좌우합니까? 아닙니다. 행복은 결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분명코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백만원 수입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있고, 천만원 수입으로도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눅12:15절에서도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인생의 행복이 결코 세상의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시오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기쁨과 능력과 은혜와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물질과 상황과 환경을 초월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총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2.하나님의 전을 사모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온전히 누리려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며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려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지요.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고,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자연히 세상의 사람이나 환경이나 상황이나 돈이나 명예나 혹은 죄와 마귀사탄의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살게 되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빛의 은총을 누리려면 빛을 가까이 해야 하지 않습니까? 선하고 아름답고 능력 있는 사람을 가까이해야 뭔가 유익한 것을 얻지 않겠습니까? 더럽고 추하고 악하고 사납고 흉악한 사람을 가까이하면 얻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공기가 오염된 공간에 머물면 어떻게 됩니까? 오물과 썩은 것들이 잔뜩 쌓여 있는 공간에 머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선하고 아름답고 능력과 지혜가 충만해서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주는 존재를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 그런 존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밖에 무엇이 있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완전한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영원한 복을 주겠습니까? 누가 우리에 영원한 소망과 위로를 주며, 누가 우리를 영원히 온전히 지켜 줄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가까이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받아 누렸던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할 만큼 믿음을 인정받고 하나님의 큰 은혜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놀라운 은총을 누릴 있었던 것은 물론 저절로 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을 간절히 사모하며 가까이 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했기 때문에 틈만 나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아니 틈만 나면이 아니라 틈을 만들어서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사모했는지 그 말씀을 그리워하며 늘 묵상하였고, 그래서 말씀의 맛이 꿀과 송이 꿀보다 달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능력과 은혜를 받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했는지 오늘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참 놀랍지 않습니까? 다윗이 정말 간절히 원하는 한 가지 소망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 영호와의 집 곧 성전에 살면서 여호와를 사모하며 그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집이 무엇입니까?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하는지 교회에서 사는 게 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 소망이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 소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세상에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부귀영화 누리면서 사는 것도 소원이 아니요, 자식이 잘되고 자식 자랑하며 자식 덕 좀 보며 사는 것도 소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누리는 것, 이것이 딱 한 가지 유일한 평생의 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인지요? 자식이 잘되는 것입니까? 돈을 많이 버는 것입니까?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입니까? 나라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더욱 발전하여 온 국민들이 평안하게 잘 먹고 잘사는 것입니까? 서로 사랑과 은혜를 나누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좀 더 고상하게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돕고 희망과 위로를 주며 사는 것이 소원입니까? 물론 당연히 그런 소망들도 가져야 합니다. 저도 그런 소망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런 소망은 결코 온전한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소망을 곧 사라지고 썩어지고 없어지고 결국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설령 그런 것들이 이루어져도 우리에게 온전한 행복을 주는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영원히 온전히 생명의 기쁨을 주는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소망,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고자 하는 소망만이 진정으로 영원토록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가치를 누리게 하는 복되고 고귀한 소망인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줍니까? 무엇이 우리를 끝까지 지켜줄 수 있습니까? 무엇이 정녕 우리를 영원토록 온전하게 행복하고 평안하고 자유하고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있습니까?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돈도 명예도 지식도 과학도 권력도 우리에게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과 사랑과 평화와 자유를 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하고 온전한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도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해서 기쁨과 은혜와 행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 지식과 능력이 없어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 수 있게 하는 소망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합3:17,18절을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주시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없어도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에 완전한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십니다.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을 이기게 하십니다. 세상의 환경과 상황과 조건도 이기게 하십니다. 모든 마귀사탄의 권세와 사망의 권세와 지옥의 권세에서 승리케 하십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는 물론 지금 여기서도 분명히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의 기쁨 가운데 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공연히 우리에게 진정으로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주지 못하는 세상의 것을 바라보며 그것을 위하여 살면서 그것에 끌려 다니면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구원과 생명과 진리와 은혜와 사랑과 기쁨과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모든 상황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이와 같이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더욱 큰 믿음과 능력과 은혜를 주셔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하나님께도 인정받고 세상 영광도 누리며 하나님의 역사도 이루어가는 위대한 신앙인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여러분, 참 대단한 신앙고백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빛이시고 구원이시고 생명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기시는 것은 물론 우리에게도 힘과 능력과 은혜를 주셔서 모든 것을 이기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그런 하나님이 계신데, 그런 하나님을 믿는데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으며, 낙심되고 한탄하고 불평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다윗이 이렇게 큰소리를 치는 것은 결코 상황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오늘 시27편 전체 말씀을 보면 다윗은 결코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6절에 보면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원수 위에 들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아직은 들리지 않은 것입니다. 또 9절에서는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말아달라고 호소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뭔가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까지 몰린 것입니다. 또 12절에서는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나를 치려고 하오니 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위경에서도 한탄 원망 불평 불신 근심 걱정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는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하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빛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시고 빛이신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빛을 비춰주셔서 은혜를 주실 것인데 두려워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고 근심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윗은 이것을 분명히 믿었기 때문에 그런 위대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이렇게 큰 믿음과 능력으로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위험과 유혹과 죄와 왜곡된 가치관과 악한 것들을 이길 수 있는 능력과 지혜는 어디 나왔습니까? 물론 하나님께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까? 물론 성전에서 사는 것이 소원이라고 할 만큼 하나님 가까이 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맛이 꿀보다 더 달다고 할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그 수많은 전투와 도전과 위험 속에서도 찬양하는 생활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더욱 큰 믿음과 지혜와 능력과 은혜를 주심으로 그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위기와 유혹 앞에서 요동하지 아니하고 의연하게 헤쳐 나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또 시56:11절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이라도 여전히 살아계시고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눈에 보기에는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역사를 주관하시고 계십니다.

만약 우리가 그걸 잘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영의 눈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영성이 뭔가 둔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영성을 풍성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집이며 주님의 몸인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럴 때 능력이 임합니다. 은혜가 충만해 집니다.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지혜의 영으로 충만해 지게 됩니다. 그러면 마귀사탄 따위가 역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세상의 유혹과 핍박이 우리를 어찌 할 수 없게 됩니다. 때론 하나님께 직접 보호하여 주심으로, 때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것을 넉넉히 이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은혜의 길을 잘 달려가 세상 모든 것을 이기고 영원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이제 이후로 더욱 교회를 가까이 함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인도와 보호 가운데 세상의 모든 시험이나 유혹이나 환난이나 핍박이나 기타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주님의 권능으로 이기고 승리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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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성령을 좇아 행하라(갈5:16-24)

제목 : 성령을 따라 행하라

말씀 : 갈5:16-24

1.육신의 지배 속에 사는 인생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납니다. 살인사건, 성폭행사건, 폭력사건, 강도사건... 또 국가 간에도 전쟁과 억압과 착취와... 심지어 옛날에는 사람을 붙잡아다가 노예를 삼아 짐승처럼 부려 먹기도 하고.... 하기야 요즘에 보니까 어떤 섬에서는 외국인들을 데려다가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임금도 제대로 안주고 부려 먹기도 한다는 군요. 하기야 남나물 콩나물 할게 뭐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서로 편이 갈라져 쌈박질이나 해대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왜 비 인간적이고 비 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너무나 많은 인생들이 육체에게 지배당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신과 영혼이 심각하게 병이 들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함으로 육신의 소욕의 노예가 되어 인간이하의 삶을 영위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19-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마땅히 영혼이 마음과 몸을 다스리며 아름답고 가치있게 살아가야 하는데 정신과 영혼이 죽어 있어 육신의 지배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온갖 죄를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체’라는 단어입니다. 이 육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savrx(사르크스)인데 이 말은 단순히 육체를 가르키는 말이 아니라 몸과 더불어 거기에 깃들여져 있는 어떤 육체적, 정신적 욕망까지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라고 말할 때 육체의 일이란 단순히 몸으로 하는 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오염된 육체의 정욕에 따라 살아가는 모습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바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한 것 등등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인생에게 발생되는 문제의 원인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인류의 역사 속에서 도저히 인간이 할 짓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일들이 저질러지고 있느냐하면 우리 인간이 육신의 정욕에 지배당하여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마땅히 육신과 정신이 영혼의 지배를 받아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게 되는데 영혼이 죽어 있어 육과 정신이 미쳐서 엉뚱한 짓들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인간으로서의 참된 가치와 의미와 기쁨과 고귀함을 누리지 못하고 무가치하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사는 인생은 어떻게 된다고 하였습니까? 21절 하반절 보세요.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어떻게 된다고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영혼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다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로봇은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의 통제 안에서 움직일 때만이 올바른 기능을 하게 됩니다. 로봇을 구성하고 있는 몸체들이 제작자가 구성한 프로그램대로 움직일 때에 로봇은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프트웨어가 고장나 로봇의 몸체들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이 로봇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고쳐서 쓸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끝까지 말썽을 부리면 폐기처분 당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의 통제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과 몸이 영혼의 통제를 받아 움직일 때 인간은 올바르게 제 기능과 역할을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는 복되고 가치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통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이 고장난 로봇과 같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음행과 술수와 우상숭배와 원수 짓는 것과 분쟁과 술취함과 방탕함과 같은 수많은 죄악들이 이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이 시대의 이 문제의 핵심이 육체의 소욕이 영혼의 지배를 떠나 제멋대로 움직이는데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결코 육체의 소욕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삶이 되지 않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이 주셨던 그 순수한 영혼이 여러분을 지배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신 영혼이 우리의 몸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올바르게 이끌어 감으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잘 달려가 주님이 주시는 그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가치를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복을 가져다 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육신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영혼의 지배를 따라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16,1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니까 우리 인류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죄된 본성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를 끊임없이 죄의 길로 내 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좇아 행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우리에게도 죄된 육신의 소욕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음으로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이 죄된 육신의 소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끊임없이 자신 쳐서 복종시켜 성령의 소욕을 따르기를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참 어려운 문제지요. 죄된 본성이 우리에게 있고, 그것이 우리를 자꾸만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게 하는데 그러기에 어찌 하든지 성령의 소욕을 따라야 하겠는데 그 놈의 죄된 본성 때문에 그게 잘 안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 속에서 갈등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가 있습니까? 방법은 하나입니다. 어찌하든지 우리의 심령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성령으로 우리의 심령을 채워서 죄된 본성을 쫓아내서 그것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는 무엇이 나를 사로잡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내 안에 가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전자에 맑은 물이 들어 있으면 맑은 물이 나오고, 흙탕물이 들어 있으면 흙탕물이 나옵니다. 단물이 들어 있으면 단물이 나오고, 쓴 물이 들어 있으면 쓴물이 나옵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들어 있으면 사랑이 나오고, 미움이 들어 있으면 미움이 나옵니다. 원망과 불평이 들어 있으면 원망과 불평이 나오고, 감사가 들어 있으면 감사가 나옵니다. 성령이 가득차 있으면 성령의 행실이 나오고, 세상의 영이 가득차 있으면 세상의 행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5:17,1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육체를 따라 세상의 엉뚱한 것을 따라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것에도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성령님이 충만하니까 당연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은혜의 길로 잘 달려가 생명의 은총을 온전하게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성령을 좇아 행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려면 어찌하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생활을 통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리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지배 속에서 의의 길, 진리의 길을 달려갈 때에 더욱 은혜와 기쁨과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의 모습.

여러분, 우리가 성령의 지배가운데 들어가면 이제는 새로운 삶이 전개됩니다. 전에 육체의 지배를 받던 삶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생명,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존재, 새로운 가치, 새로운 목표, 새로운 방향, 새로운 방법을 가지고 인생을 영위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난 삶인 것입니다.

고후5:1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나를 억누르고 있던 옛주인 마귀사탄이 쫓겨나가고 진리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 새 주인이 되므로 육신의 소욕을 따르던 옛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임하시면 전혀 새로운 인생이 전개됩니다. 과거에는 사탄의 권세 아래서 내가 주인 노릇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사탄이 주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속아 내 이성과 지성과 경험대로 살면 내가 왕노릇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보는 대로 행했습니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길로 갔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습니다. 내 육신의 즐거움을 추구했습니다. 세상이 가는대로 갔습니다. 세상의 조류를 따라 흘러갔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게 인생이라고 여겼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고 죽어라고 그 길이 맞다고 여기며 고집을 피우며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어리석게도 도리어 생명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비웃고 조롱하고 멸시하며 심지어는 핍박하며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이것인 바로 육신의 소욕을 따라 죄의 노예로 살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면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생명의 영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은혜의 영이신 성령이 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쫓겨가고 죄의 권세가 물러갑니다. 마귀사탄의 역사로 내 안에 들어와있던 죄와 어둠과 죽음과 권세가 물러갑니다.

그런 죄와 어둠과 마귀의 권세가 물러가니 영혼과 마음과 눈과 귀가 밝아집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바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안에 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추악한 모습들이 밝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천국과 지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영광이 나라가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드디어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게 됩니다.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해 집니다. 그래서 드디어 생명의 열매,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육신의 소욕을 물리치면 세상의 온갖 죄되고 잡다한 것들이 물러가고 이런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성령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열매는 생명의 열매입니다. 거듭남입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알고 믿고 받아들이게 되고 그러면 죄사함과 새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이 핵심적인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듭남을 체험한 사람은 결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새생명을 얻게 되면 그 새생명을 가진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와 거룩함을 향하여 달려가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바랍니다. 더욱 깨어 기도하며 말씀묵상하며 열심히 찬양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빛의 은혜를 받으려면 빛을 가까이 해야 하지 않습니까? 물을 마시려면 물가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려면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곳으로 가야하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어디에 임재하십니까? 말씀과 기도와 찬양하는 곳에 임재하시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기를 힘쓸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았습니까?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 말씀을 전할 때에 그 가정에 성령이 임재하지 않았습니까?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할 때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님을 정말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힘씀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더욱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성령충만함을 받아은 생활과 열결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성령강림주일임과 동시에 어버이 주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들은 성령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충만 받은 것을 방언받고, 병고치는 은사받고, 예언하고 맨날 기도나 하고 찬양이나 하고 예배만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만약 거기서 끝난다면 그건 성령 충만 받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지배를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당연히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마땅히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부모님 공경이 인간에 대한 계명 중 첫 번째 계명입니다. 출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그러므로 부모님을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제아무리 기도 잘하고 찬양 잘하고 예배 잘 드려도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 관계에 대하여 주신 첫 번째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며 어찌 그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이라 하겠습니까?

여러분, 다시한번 말씀드리거니와 성령 충만함은 결코 기도와 찬양과 말씀과 예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의 삶속에 접목시켜야 합니다.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가정생활, 사회생활, 학교생활, 직장생활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성령충만한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오늘 성령강림주일이며 동시에 어버이 주일입니다. 그 의미를 되새기며 이제는 더 이상 죄와 무지와 어둠 가운데 있는 육신의 소욕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우리를 언제나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위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아래로 사람들을 잘 섬기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충만히 맺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웃을 사랑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 함께 생명의 기쁨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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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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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은혜받기 원하십니까? (Sunday Sermon)

말씀 : 막10:46-52

제목 : 은혜받기를 원하십니까?

 

1.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유명한 찬송가 작시자 ‘화니 제인 크로스비’는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맹인이 되어 교회에 다니긴 했지만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여 때때로 낙심과 좌절감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30세가 되던 해 뉴욕에서 한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이 집회에서는 집회 내내 죄와 허물속에 있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찬송가143장)을 계속 불렀습니다. 그러자 참석한 모든 회중들에게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되었고, 그녀도 어느 순간 큰 은혜를 체험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주님, 나같이 천하고 쓸모없는 소경이 무엇이 그렇게 귀하다고 날 위해 돌아가셨습니까?’ 라고 혼자 되 뇌이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이렇게 앞을 볼 수 없는 천한 몸도 무언가 주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그때 그녀의 귓가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무슨 말이냐? 내가 너에게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는 지혜를 주지 않았느냐?’ 이러한 주님의 음성에 그녀의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비록 육신의 눈은 그대로 있었지만 심령의 눈이 활짝 열려 예수님이 보였고,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과 감격이 마음 가득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녀는 곧바로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처음 작사했던 것이 찬송가531장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부르시네’ 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인애하신 구세주여’, ‘나의 갈길 다가도록’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비롯하여 무려 8,000여곡의 주옥같은 찬송시를 써서 그중에 24편의 시가 찬송가에 들어오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게 있습니다. 여러분, 화니 제인 크로스비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이나 후에 외견상으로는 변한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육신의 눈은 여전히 감겨져 있어 사랑하는 사람도 아름다운 꽃도 그 밖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돈이 생긴 것도 아니고 출세를 한 것도 아니고 건강이 회복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그녀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천국백성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낙심과 좌절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감사와 기쁨과 희망과 사랑과 은혜와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어둠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활짝 떠졌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눈이 활짝 떠지자 자신이 갇혀 있었던 어둠의 세계에서 해방되어 빛의 세계, 생명의 세계로 나아와 하나님과 천국을 확실히 보면서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대부분이 자꾸 하나님께 요구만 합니다. 하나님, 건강하게 해주세요. 부자 되게 해주세요. 자식이 잘되게 해주세요. 경제가 활성해되게 해주세요. 물론 그것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설령 그런 것들을 얻는다해도 마음의 눈과 영혼의 눈이 떠지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그래봤자 계속 죄와 무지와 원망과 근심과 불평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의 눈이 떠지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러면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진짜배기를 볼 수 있습니다. 진리를 보고, 하나님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보고, 자신과 이웃과 세상을 바르게 보게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은혜 속에 살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세상이 얼마나 복된 세상인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6:22,23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하나님께서 주신 눈, 신령한 눈, 은혜의 눈으로 자신과 세상을 보면 올바른 분별력으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가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되지만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육신의 눈으로 자신과 세상을 보면 어둠속에서 방황할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꾸만 인간의 그 작고 편협되고 어둡고 한계 속에 있는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하지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의 눈, 영적인 눈을 활짝 뜨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밝히 보며 주님의 음성을 바르게 분명하게 들으며 주님과 동행함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자신의 상태를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눈을 떠서 주님을 보고, 영원한 세계를 보려면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고 어둠속에 갇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무지와 한계를 알아야 교만하게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야 겸손하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그래야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다 알고 다 보고 다 할 수 있다고 여기면 교만하게 자기마음대로 삽니다. 주님을 찾지도 않고 찾아오시는 주님도 거부함으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9:41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자신이 소경, 즉 다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무지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며 죄사함의 은총을 얻었을 것인데 자기가 다 본다고, 다 안다고 제멋대로 했기 때문에 구원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얼마나 무지한 존재인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지 맹인 바디매오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소경이요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알습니다. 그래서 그는 풍요로운 도시 여리고에 살고 있었지만 그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하고 비굴하게 엎드려 동전 몇 닢 얻어서 무시당하고 천대받으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도 그렇게 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마침내 자신을 그런 처지에서 해방시켜 줄 분이 나타난 것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자기 앞에 지나신다는 소식을 듣고 사생결단하고 구원을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4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뭐라고 예수님이 오셨다고? 그러면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 분이 오셨으면 난 죽어도 그분을 만나야 된다는 심정으로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이 불쌍한 인생을 불쌍히 여시고서. 나는 어둠속에 있는 인생입니다. 나는 무시받고 천대받으며 사는 인생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실 분은 당신 뿐입니다. 그러니 저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십시오. 제 어둠을 밝혀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살겠나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를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이와같이 자신의 죄됨과 어두움과 한계와 무능함을 아는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이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예수님 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하게 되고,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셔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까? 자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다 아는 것처럼, 다 보고 있는 것처럼,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맞고, 내경험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면 비웃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제일 똑똑하니까요. 그래서 자기 이성으로는 천국과 지옥 같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제 잘났다고 제멋대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교회에 다니면서도 은혜가운데 살지 못합니까? 왜 10년 20년 30년을 교회에 다녀도 생명력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죄와 무지와 연약함과 한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가치나 경험이나 지식들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대로 삽니다. 왜요? 자기가 똑똑하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간절함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리지 않고 그야말로 아전인수격으로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적용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인생은 부족하고 연약하고 무지하고 어둠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깊은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 별거 아닙니다. 우리 생각, 이성, 잣대 옳지 않은 것 너무 많습니다. 우리 경험, 지식 정말 작은 것입니다. 시73:22절 보십시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설마 짐승같기야 하겠습니까만 그러나 정말 무지하고 어리석고 죄가운데 있고 한계와 약함과 허물가운데 있는 것이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이걸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걸 인정한다면 제발 그 알량한 내 생각과 지식과 이성과 경험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죄와 어둠과 무지와 연약함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간절히 주님을 부르짖어 찾으며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주께서 역사하심으로 정말 새 생명의 은총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께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일단은 자신의 죄와 무지와 작음을 인정하였으면 이제는 하나님 앞에 나와 엎드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우리 인생의 죄와 무지와 연약함과 한계를 해결해 주셔서 온전한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실 분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어두움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인생의 무지와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 인생의 현재와 영원한 미래에 대하여 답변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과 구원하심 밖에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거지 맹인 바디매오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이라는 고백 속에 주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결국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47절 말씀 다시 보겠습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여러분,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그는 ‘나사렛 예수’가 왔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지릅니다. 여러분, ‘나사렛 예수’와 ‘다윗 자손 예수’는 천지차이입니다. 나사렛은 빈민촌과 같은 곳으로 나사렛 사람은 가난하고 무식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는 것은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의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비하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이란 하나님께서 일찍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즉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한 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의 주이심을 믿었기에 그야말로 사생결단하고 요청을 했습니다.

48절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보세요.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너 같은 더럽고 추한 거지가 어딜 감히 예수님께 가까이가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존귀하신 예수님이 너 같은 것은 거들떠 볼 시간이 없으니 저리 꺼지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니들이 뭐라 그래도 좋다. 날 무시하고 욕하고 천대해도 좋다. 그러나 난 저분을 붙잡아야 된다. 저분만이 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 나는 누가 뭐래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다 하면서 더욱 큰 소리를 질러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야 합니다. 나오는데 그냥 나오는 둥 마는 둥, 나오면 나오고, 아니면 말고 하는 어정쩡한 태도로 주님 앞에 나오면 은혜받기 어렵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 아니면 나는 죽습니다. 은혜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삽니다. 이런 각오로 누가 뭐래도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죽어도 예수님 만나 은혜 받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기어이 받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나올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바로 그랬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시하거나 말거나 욕을 하거나 말거나 그냥 죽자사자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49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바디매오를 부르셨습니다. 드디어 구원의 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그러자 바디매오는 모든 것 다 팽개쳐 버리고 예수님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이때 예수께서 선포하십니다.

52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그의 간절한 요청을 듣고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말씀한마디에 날 때부터 몇십년 동안 감겨져 있던 눈이 떠져 모든 어둠이 물러간 것입니다. 모든 멸시와 천대와 고통도 사라진 것입니다. 어둠과 좌절과 멸시 속에서 살던 인생이 은혜와 기쁨과 감사 속에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으로 완전히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죄와 무지와 한계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는 진정하고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일한 구세주이시오,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우주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을 물리쳐 주십니다. 어둠과 절망과 낙심과 원망과 불평을 없애 주십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시고 생명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으로 살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오늘 바디매오처럼 예수님께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나의 지식도 경험도 이성도 얼마나 작은지요. 그런데 어리석게도 지금까지 그 알량한 지식과 경험과 이성에 의지해서 살아왔습니다. 주여 용서하여 주소서. 나를 받아 주소서. 오직 주님만이 나의 생명, 나의 기쁨, 나의 구원이십니다. 그러므로 나 이제 오직 주님만을 따르겠사오니 저를 받아주시고 인도하여 주소서하면서 그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의 성령께서 여러분의 심령 속에 임하실 것입니다. 눈이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천국이 선명하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어둠과 약한 것들과 추한 것들이 물러갈 것입니다. 오늘 바디매오에게 임했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변화되고 생명의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통하여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그곳에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 크게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 이런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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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Sunday Sermon)

제목 : 함께 삶의 축복

말씀 : 전4:9-12


1.좋은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인간은 함께 살아가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함께 하지 않고는 존재 그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제아무리 재주가 뛰어나고, 지혜가 많고 능력이 많아도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만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가족과 이웃과 사회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본적으로 생존이 가능하고, 문화생활도 가능하고, 물질문명도 발달시킬 수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가족이 없이 어떻게 인류가 존재할 수 있습니까? 이웃과 사회공동체가 없이 인류가 어떻게 이 많은 것을 이룰 수가 있었겠습니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근자에 보면 너무나 개인 이기주의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남이야 어떻든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여기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고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편한대로만 하려고 합니다. 왜 내가 남을 위해서 희생해야 하느냐, 왜 남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왜 하기 싫은 일을 남의 이목 때문에 해야 하느냐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편안함만을 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역할은 생각하지 않고 교회가 무엇을 해 주기만을 바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모습들은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들의 왜곡된 가치관이지 결코 옳고 아름답고 귀한 가치관이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이 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가정도 교회도 직장도 사회도 아름답게 유지될 수 없습니다. 도리어 갈등과 시기와 분쟁 속에서 상처와 고통과 슬픔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살줄 알아야 합니다. 함께 살려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손해 보아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남의 눈치도 보아야 합니다. 양보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적극 참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이고 그게 우리 사회를 유지하며 우리가 함께 평화롭게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는 길입니다.

물론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교회공동체는 이 원리가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공동체입니다. 왜냐하면 마귀사탄은 교회공동체를 와해시키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전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과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들을 유혹하여 진리의 길, 생명의 도를 외면하게하고 나아가서는 진리 안에 있는 자들을 핍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탄의 방해공작과 핍박과 도전을 이기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는 것은 물론 더욱 하나 되어 협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사탄의 역사를 이기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 가실 때에 특별히 헌신된 사람을 세워주심과 동시에 많은 동역자들을 세워 함께 그 역사를 이루어가게 하셨습니다. 모세에게는 아론과 훌과 갈렙과 여호수아와 같은 훌륭한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요압과 아비새와 후새와 같은 동역자들을 세워 주셨습니다. 바울에게는 바나바와 실라와 디모데와 누가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등의 많은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열 두 명의 제자를 세워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이든 마을이든 회사이든 교회이든 우리는 함께 해야 합니다. 좋은 동역자,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공동체가 아름답게 세워져가고 그럴 때 우리 각 개인이 평안과 자유와 부요함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반대로 그저 자신만을 생각하며 자신의 평안함과 안일함과 유익만을 구한다면 자유와 평안과 번성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갈등과 시기와 분쟁과 상처와 아픔만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9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함께 수고함으로 더 좋은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다 부족하고 허물 많고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며 먼저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되 그러나 우리가 서로 하나되어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할 때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아름답게 세워지고 그래서 결국 우리가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가정이든 교회이든 직장이든 기타 다른 어떤 공동체이든 결코 분열을 조장하고 공동체의 평화를 와해시키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좋은 협력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협력자가 되어 함께 수고함으로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사회를 아름답게 세워감으로 우리 모두가 함께 주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협력이 그토록 절실하게 요청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물론 앞에서 개괄적으로 말씀드렸지만 본문의 내용을 통해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혼자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뭐 사실 말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함께해야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앞에서 보았던 9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쉽게 말하면 힘을 모으고 뜻을 모아 함께 수고할 때에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그게 바로 함께 함의 상급이라는 것입니다. 뭐 사실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같은 일이라도 여러 사람이 함께 하면 훨씬 능률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도 두 사람이면 할 수 있고, 두 사람이 못하는 일도 세 사람이면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100Kg의 물건은 천사장사라면 모르겠지만 웬만한 사람은 혼자서는 자신의 힘만으로 들어 옮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옮길 수 있습니다. 세사람이라면 더 쉽게 옮길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인 협동의 원리인 것입니다. 비단 물리적으로만 그런 게 아닙니다. 지적 감정적 정신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한사람의 지식과 지혜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를 열사람의 지식과 지혜를 모으며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정신적으로도 함께 하면 서로 힘과 위로와 격려와 용기와 의욕을 줌으로 몇 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마 많인 들어본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기러기들은 먼 거리를 이동할 때 보통 V자 형태로 날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형태로 무리를 지어서 날아가면 혼자서 날아갈 때 보다 70%의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뒤에서 날아가는 기러기들은 앞에서 날아가는 기러기들이 날개짓을 하면서 일으킨 바람을 타고 날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앞의 기러기가 에너지를 방출하여 일으킨 기류를 다른 기러기가 활용하여 날아감으로 다른 기러기는 최소의 에너지를 가지고 멀리 날아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에 있는 기러기가 당연히 먼저 지치겠지요. 그러면 다른 기러기가 교대하여 앞에서 인도하는 방법으로 멀리 간다는 것입니다. 참 대단하지요.

인간의 삶도 동일합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마음과 힘을 합하여 일하면 서로 상승작용을 하게 됩니다. 서로 격려가 되고,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의욕을 주고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같은 일도 훨씬 쉽고 효과적으로 기쁨으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무슨 일을 하든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협력하지 않으면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함께 하지 않고 심지어는 열심히 함께 하는 일에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반대하고 그러면 다른 사람들까지도 맥이 빠지고 의욕이 꺽이고 힘 빠지게 만들어 점점 어려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도 안하고 남도 못하게 만드는 심각할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어느 집단에 있든지 좋은 협력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마을과 사회에서 결코 공동체를 분열시키거나 갈등관계를 조장하거나 걸림돌이 되지 말고 좋은 협력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세워주고 그래서 유익을 주고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힘든 사람을 세워 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협력의 또 다른 유익은 서로를 세워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를 세워줌으로 가정이든 교회이든 다른 어떤 공동체이든 결국 공동체를 잘 세워 나감으로 결국 우리 모두가 함께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 보겠습니다.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말씀 그대로입니다.

만약 길을 가다가 제법 깊은 곳에 떨어져 큰 상처를 입었는데 옆에 아무도 없어 도와줄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행자가 있어서 이 사람의 상처를 싸매주고, 얼른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해 준다면 생명을 보존하고 온전히 회복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꼭 육체적으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큰 시련으로 절망가운데 있을 때 그와 함께 하는 사람이 없다면 이 사람의 절망감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와함께 하며 그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위로하며 격려와 용기와 희망을 북돋워 주면 절망감은 축소되고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자살하는 사람들의 80%는 자살을 시도하기 수개월 전부터 어떤 형태로든 자살의 징조를 보인다고 합니다. 이런 낌새를 바로 알아채고 누군가 곁에서 도움을 주면 대부분의 자살은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변의 사람들이 이를 잘 알아차리지를 못함으로 실제로 자살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함께 함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니겠습니까?

죄의 유혹을 받을 때도 그렇습니다. 죄의 유혹 속에 갈등하고 있을 때에 아무도 그와 함께 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를 권면하고, 만류하고, 통제하지 않는다면 그는 더 쉽게 죄의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함께 하며 그의 잘못된 생각들을 진정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해 주고 바른 길로 인도해 준다면 죄의 구렁 속에서 헤어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들도 때로는 절망감에 빠지거나 원망과 불평 속에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때 그와 함께 하는 신실한 신앙인이 없다면 자칫 불신의 늪으로 빠져 들어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그를 위해 기도하며 권면하며 위로할 때 그는 다시금 주님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함께 해야 합니다. 서로에게 좋은 동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마을에서나 좋은 동행자, 좋은 협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일으켜 주고, 위로자가 되고, 기도해주며, 돌보아주며, 감싸주며, 용기를 북돋아주고, 희망과 소망을 주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은 정말 아름다울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와 사회공동체는 아름답게 세워지고 그 가운데서 우리의 삶도 더욱 평안하고 가쁨과 은혜와 소망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어느 곳에 있든 좋은 협력자, 동행자가 되어 가정과 교회와 이웃과 직장과 다른 모든 공동체를 아름답게 세워나감으로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고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려드리고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도 아름답게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함께 하면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함께 함의 또다른 유익은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사랑과 기쁨과 은혜가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이 말씀은 팔레스틴 지역의 기후적 특성에서 나온 경험담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팔레스틴 지방은 광야가 많는데 광야지역은 낮에는 매우 뜨겁고 덮지만 일단 해가 지고나면 무척 쌀쌀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광야에서 여행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밤이 되면 함께 모여서 일부의 겉옷은 아래에 깔고 일부는 함께 덮고 자곤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침구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게다가 서로의 체온 때문에 밤의 추위를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함께 하면 따뜻합니다. 단지 몸만 따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몸도 마음도 영혼도 따뜻해지고 기쁨과 은혜가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혼자 있으면 어떻습니까? 혼자서는 기쁨도 사랑도 환희도 열정도 갖기 어렵습니다. 육체적으로 따뜻하지 않습니다. 마음적으로도 외롭습니다. 영적으로도 뜨거운 열정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장작불은 모여 있을 때에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마음적으로 영적으로 여럿이 함께 할 때에 열정과 기쁨과 감격을 느끼기 쉽습니다.

여러분, 가정도 그렇지 않습니까? 가정에 부부가 있고 자녀가 있고 그러면 얼마나 보기가 좋습니까? 그런 곳에 이야기가 있고 웃음이 있고 기쁨이 있고 위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 있으면 얼마나 적적하겠습니까? 몇 년 전에 우리 집 양반이 병원에서 3주 입원해 있는데 나 혼자 집에서 자려니까 얼마나 적적한지 죽을 뻔 했습니다. 그러니 가족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고맙고 행복한 일입니까?

또 교회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교회에 나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옆에 계신 분들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존재들입니까? 이렇게 고맙고 소중하고 감사한 존재라면 우리가 얼마나 서로 사랑하고 귀히 여기며 한마음 한뜻이 되어 서로를 세워주고 위로와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면서 더불어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곁에 누군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되새기며 정말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며 그래서 함께 하면서 좋은 동행자로 협력자로 살아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함께 하면 어려움을 이깁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함께 함의 또 하나의 유익은 난관에 봉착해도 실망하지 않고 능히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혼자 하다가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일도 여럿이 하면 어렵고 힘든 일도 포기하지 않고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잖아요. 어떤 이일을 추진하다가 난관에 봉착했어요. 물론 우리는 그때마다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혼자할 때는 잘 안될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가 곁에 있어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격려하고 위로하고 힘을 주고 용기를 줄 때 다시금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힘써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여러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마귀는 바로 그렇게 혼자 할 때를 공격의 기회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났는데 함께 하는 자가 없고 기도도 위로도 격력도 용기도 주지 않으면 자칫하면 넘어지기 쉽습니다. 마귀는 이렇게 약한 때를 이용하며 더 수작을 부립니다. 거봐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공연히 헛수고하지 말고 그만둬라. 그리고 또 솔직히 네가 뭐라고 그렇게 열심히 하려고 하느냐? 대충해라. 그냥 적당히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면서 살아라. 그게 네 신상에 좋다. 하면서 온갖 수작을 부리며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칫하면 무기력하게 넘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믿음의 동행자가 있어서 기도해주고 격려해주고 힘을 주고 용기를 주면 다시금 힘을 얻어 믿음의 길로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나아가 결국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가정이든 교회이든 직장이든 기타 다른 어떤 공동체이든 결코 분열을 조장하고 공동체의 평화를 와해시키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좋은 협력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협력자가 되어 함께 수고함으로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사회를 아름답게 세워감으로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나라도 이루어가며 주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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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설날)  /복된 동행, 복된 인생(Sunday Sermon)

제목 : 복된 동행, 복된 인생

본문 : 창5:21-24

 

1.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복된 인생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민족의 명절인 설날을 맞이하여 모든 성도 여러분과 고향을 찾은 모든 성도여러분의 가족과 일가친척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귀한 설 명절을 맞이하여 온 가족 친지들이 함께 모여서 정말 하나님 앞에 큰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혈육간에도 진정 아름다운 사랑과 은혜를 마음껏 나누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저는 명절 때면 가끔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저희 집은 가난해서 초가 삼 칸에 살았는데 우리 이웃에는 안채는 커다란 ㄱ자 기와집이고 사랑채도 우리 집보다 훨씬 좋은 기와집인데다가 큰 대문이 있는 부잣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집을 부러워하는 마음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집에는 제 또래의 예쁜 소녀가 살고 있기도 해서 가끔 그 집 대문 안을 기웃거려 보곤 하였습니다. 그 집 안뜰에는 화단도 잘 가꾸어져 있었고 여기저기 꽃나무도 심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명절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성대하게 제사도 지내는 등 그 집은 저의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때는 제가 어린 마음에 철도 없고 예수님도 몰랐기 때문에 부러워하긴 했는데 그게 정말 부러움의 대상일까요? 물론 뭐 그런 것도 좋은 것이긴 하지요. 가난하고 초라하게 사는 것보다야 기왕이면 좋은 집에서 좋은 옷 입고 좋은 것 먹으며 좋은 환경에서 사는 게 좋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사실은 그러한 외적인 환경들이 우리를 정말 아름답고 귀하고 가치 있고 복되고 위대한 인생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귀하고 아름답고 대단하고 멋있는 인생은 말할 것도 없이 완전히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우시고 전능하시고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알고 믿고 섬기며 그 뜻대로 바르게 아름답게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인생의 가치가 있고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고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대궐같은 집에서, 명절이면 시커먼 승용차가 몇 대씩 몰려오고, 뭐 가문에서 장관이 나고, 판검사가 나고 그래서 집안에 큰 일이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제사를 성대하게 지내는 것들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여러분, 그런 것들 정말 별거 아닙니다. 암만 그래봐야 그런 것들이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가치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하여 거짓과 편법을 행하기 쉽고 그래서 상처와 고통을 주기 쉽고, 시기와 질투를 유발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런 것들 바라보다가 하나님과 멀어지고 그래서 결국 영원한 진노를 당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십상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떵떵거리며 잘먹고 잘사는 것이 멋있고 가치있고 위대한 삶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건 죄와 무지와 왜곡된 가치관속에 있는 인생들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정녕 중요한 것은 우주 만물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섬기며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시며, 생명의 주관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님 안에서 성실하게 열심히 주님과 동행하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이라야 지금 여기서도 정말 아름답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인생이요, 나아가서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인생인 것입니다.

잠4:7~9절을 보겠습니다.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 /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느니라” 보세요. 지혜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도를 따르는 것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다른 무엇보다도 지혜를 얻고 지혜를 높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영화로운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의 도를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복된 설명절에 오늘까지 하나님안에서 살아온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에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이후로도 계속해서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에 정말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정말 그렇게 귀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2.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귀하고 복된 인생이 되려면 다른 무엇보다도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생명이시고 기쁨이시고 평안이시고 영광이신데 그 주님과 동행하면 그 은총을 누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총을 주지 못하는 것들과 동행하면 어찌 그 은총을 누리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에녹이라는 사람은 온전히 주님과 동행함으로 놀라운 은총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인간적으로는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것도 아니고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도 없습니다. 22절 말씀 보세요.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므두셀라는 그냥 보통 사람으로 밥먹고 일하고 결혼해서 아기 낳아 기르면서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에녹에게 큰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 이래로 오직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오는 에녹과 선지자 엘리야, 이 두 사람에게만 주어졌던 너무나 영광스럽고 특별한 은총이었습니다. 그게 뭡니까? 육체적인 죽음을 당하지 않고 천국으로 옮겨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24절을 보겠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말씀그대로 에녹이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니까 그를 산채로 데리고 가셔서 세상에 있지 않고 천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황홀했겠습니까? 산채로 그 몸이 영화의 몸이 되어 두둥실 떠올라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꿈속에서 가끔 새처럼 날아다닐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 속된 말로 기분이 얼마나 째집니까? 그런데 여러분, 그건 속된 말로 새발의 피도 안됩니다. 에녹은 더 이상 세상의 시간과 공간과 모든 힘들고 약하고 어려운 것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화의 몸이 되어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올라간 것입니다. 한번 그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가슴이 벅차오르고 황홀했겠습니까? 너무나 감격스러워 할렐루야! 할렐루야가 저절로 터져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에녹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까요? 그것은 앞에서 보았던 22절과 24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속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단어가 있는데 그게 뭡니까?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에녹은 365년을 살면서 온전히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가는 특별한 은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면 분명히 은혜를 충만하게 받습니다. 당연하잖아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과 신뢰와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고,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죽어도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믿음이 있다면 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과 동행이 안되는 것은 자꾸 세상에 뭐 다른 좋은 것은 없나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좋은 것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요? 하나님 안에 정말 좋은 게 있는데 왜 한눈을 팔겠습니까? 그런데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들이 자꾸 다른 것을 바라봅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와 즐거움을 바라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동행이 잘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면 곤란한 거예요. 이건 결국 하나님을 잘 못믿는 거예요. 안 그래요? 아니 하나님 안에 생명과 기쁨과 진리와 은혜와 사랑과 평안과 축복이 있는데 왜 그걸 놔두고 엉뚱한데 가서 기웃거리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직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 어느 때 어떤 상황에서도 이걸 잊지 말고 그저 갓난아기처럼 사나 죽으나 하나님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 잘났다고 내 생각이나 가치관이나 경험이나 지식을 따라 내 눈에 보이는대로 살아가지 말고 주님이 가시는 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그까짓 별것 아닌 세상의 돈이나 명예와 권세나 지식이나 이런 것들 따라가지도 말고 오직 우리의 유일한 생명이시며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안에 있는 그 놀라운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되고 아름답고 귀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하나님의 목표와 방향을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으나사나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는데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목표에 우리의 뜻과 우리의 뜻을 일치시켜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려면 하나님과 뜻이 같아야 하고, 방향과 목표가 같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울이 목표인 사람과 부산이 목표인 사람이 함께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의사가 되려는 사람과 축구선수가 되려는 사람이 같이 공부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목표와 내 목표가 다르면 결코 동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하나님과 목표와 방향이 일치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건 내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하나님의 목표와 방향과 뜻에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 안에 생명과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와 무지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고 배운 것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향과 나의 방향이 다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이걸 일치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날 따라오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데,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나의 뜻보다 높고 깊고 완벽하신데 하나님께 나를 따라오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요10:2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당연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목자이신데 거기에 생명과 평안과 안식이 있는데 무얼 따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말씀 듣고 기도하며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과 목표와 방향을 고집하지 말고, 자꾸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목표와 방향에 맞추어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과 온전히 동행할 때에 하나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과정과 방법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목표와 뜻이 같더라도 방법이 다르면 동행할 수 없습니다. 안 그래요? 같이 제주도가 목적지라해도 한 사람은 비행기 타고 가고 한 사람은 배타고 가면 동행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백두산에 오르면서 한 사람은 중국 쪽에서 올라가고, 다른 사람은 북한 쪽에서 올라가면 동행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려면 목표와 뜻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과정과 방법까지도 하나님의 뜻과 동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날과 같이 물질만능주의, 과학지상주의, 개인이기주의 풍조가 만연된 세대에서는 우리는 이점을 특히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돈도 많이 벌고, 출세도 하고, 권력도 얻고, 문명의 이기도 가능한 많이 누려야 합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 문화적 혜택을 보다 많이 누리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공부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물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돈을 벌고, 지식을 쌓고, 권력을 얻고, 문화생활을 즐기되 그러한 것들을 획득하고 누리는 과정이나 방법들도 하나님 뜻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실만한 방법과 과정으로 돈과 명예와 권력도 얻고 또 얻은 것들을 사용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현대인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무엇인가를 얻는 과정에서도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으로 방법과 과정을 무시한 채 얻으려고 할 때가 많고 또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사용할 때에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해야 하는데 그저 자신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진정한 기쁨과 은혜를 누리지 못할뿐더러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주고 시기와 질투와 갈등과 싸움을 유발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생은 결코 성공할 수도 없고 진정한 생명의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설령 인간적으로 성공을 한 것처럼 보여도 결코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면 설령 많은 것을 가졌어도 물거품이 될 것이요, 더 나아가서는 결국 심판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11:9절을 보십시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러므로 여러분, 먼저 목표와 방향을 하나님의 뜻에 맞춤과 동시에 그것을 이루는 방법과 과정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추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설령 돌아가는 일이 있어도, 설령 늦게 성취하는 한이 있어도, 설령 성취하지 못하는 일이 있어도 오직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그저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생각대로 어떤 일들을 추진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그렇게 해서 얻은 것들을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하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받고 동행하는 삶을 위하여 또 하나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과 연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보면 에녹은 무려 300여년 간이나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 연합입니다. 하나님과 연합해 있으면 자연히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어떻게 동행이 가능합니까? 연합되면 가능한 것입니다.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영적으로 서로 한 덩어리로 묶여져 있으면 온전한 동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따로따로 떨어져 있으면 기분이 좋고 사이가 좋고 상황과 환경이 좋으면 어느 정도 동행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뭔가 좀 상황과 환경이 좋지 않다거나 둘 사이의 관계가 소원해지면 동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묶여져 있으면 기분과 환경과 상황에 관계없이 함께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완전히 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절대 분리되면 안됩니다. 주님을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들이고 살아야 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주인으로 모셔 들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주인과 종으로 연합된 것 아닙니까? 그렇게 주인과 종으로 연합되었으면 이제는 당연히 주님이 생각하는대로 생각하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말하고, 주님이 가시는 곳에 가고, 주님이 하시는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합된 관계요 그러면 자연히 동행하게 되고 그러면 자연히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 15:5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과 온전히 연합되어 주님을 멀리하거나 따로따로 놀거나 세상의 것을 바라보며 엉뚱한 것과 동행하지 말고 오직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그래서 내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주님께 맞추시기 바랍니다. 그 목표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여러분의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사용하는 과정에서도 오직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이 주님과 온전히 연합되어 동행할 때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신 주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기쁨과 감사와 위로와 평안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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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세상을 이긴 사람들 (Sunday Sermon) 

제 목 : 세상을 이긴 사람들

말 씀 : 요16:31~33

 

1.자신의 무지를 알아야 합니다.

금번 설날에 저도 87세 되신 어머니가 계셔서 고향에 가서 하룻밤 자고 왔는데요, 저녁 때 쯤에 저희 형님이 바둑을 좋아하셔서 바둑 TV에서 프로 9단끼리 두는 바둑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보고 있더니 ‘에이, 저건 아무래도 너무 과했다.’ 그러는 거예요. 내 참 기가 차서.... 지금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몇단 이라고요? 프로 9단. 우리 형님은 아마 3급쯤 되는 것 같아요. 바둑에서 프로 9단이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서 입신이라고 하는데 아마 3급 주제에 감히 입신들이 두는 바둑을 보면서 과했다니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아도 유분수지 감히 누구 앞에서 판단을 하는 겁니까? 정말 가소롭지 않습니까? 아마 3급짜리하고 프로 9단하고 맞바둑을 두면 아마 살아 남을 게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런데 감히 판단을 하다니 정말 가소롭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쩌면 그게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실상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고 배워서 아는 세계는 정말 쥐꼬리 만큼도 안되는데 마치 세상 모든 걸 아는 양 말하고 행동할 때가 너무나 많다는 거죠. 여러분, 안 그래요? 이 무한한 우주공간속에서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이 얼마나 있습니까? 아니 우주 공간은 고사하고 지금 바로 우리 눈앞에 있는 것들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게 부지기수입니다.

지금 우리 눈 앞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먼지들이 떠다니고 있고, 음파, 전자파, 바이러스, 세균들을 비롯한 별의 별 것들이 다 떠다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시고 있는 공기 중에는 질소, 산소, 아르곤, 이산화탄소, 탄산가스, 네온, 헬륨, 메탄, 크리프톤, 수소, 아산화질소, 키세논 등 12가지의 물질들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 들이 하나나 보입니까?

여러분, 소리는 얼마나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인간의 가청 주파수는 20hz~20Khz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귀가 아주 밝을 경우이고 보통은 그 절반인 50hz~10Khz대의 음파만을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즉 귀가 아무리 밝아봐야 세상에 존재하는 소리의 몇백분의 일, 몇천분의 일도 못 듣고 있고, 눈이 아무리 밝아봐야 우주공간 속에 우리가 볼수 있는 것은 몇억분의 일도 안되는 것입니다. 물론 아는 것도 그렇고 경험한 것도 그렇습니다. 모르는 것이 백배 천배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세상 일 다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하나님도 없고 천국도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떠듭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죽어라고 안 믿습니다. 또 어떤 분은 성경을 보면서도 이건 도대체 말이 안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여러분, 이런 모습들은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저 겸손히 엎드려야 합니다. 조용히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그냥 아멘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달리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되는 거예요.

고전1:25절 말씀보세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은 어리석은 것도 없고 약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혹시 만에 하나 그런 것이 있다고 해도 사람의 가장 똑똑하고 잘나고 강한 것보다 하나님의 약하고 어리석은 것이 천만배 강하고 똑똑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된 말로 까불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잠3:5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약함과 무지와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아멘으로 화답하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모든 능력과 생명과 기쁨과 평안의 근원이신 주님의 은총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하나님 안에 온전한 승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해하지 못하고 믿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의 모든 생각과 경험과 이성을 내려놓고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셔서 결국 진리의 길로 달려가게 되고 그 대에 진정한 승리자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우리가 좀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 있는데요, 33절 말씀 보겠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말씀이 뭐가 이해가 안가냐? 그것은 이 말씀을 주실 때의 상황을 알면 왜 이해가 잘 안가는 말씀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때의 상황은 32절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같이 보실까요?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너희가 곧 흩어질 것이다. 그리고 나 혼자 있을 거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 그런 말씀이지요. 즉 이때는 예수님이 곧 체포당하시고 십자가의 처형의 때가 가까운 시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세상을 이겼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말이 안 되잖아요. 이제 곧 군인들에게 잡혀서 온갖 조롱과 핍박과 멸시와 침 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록 채찍질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분이 세상을 이겼다니 이게 말이 되냐구요?

그러나 결과는 어땠습니까? 물론 당연하지만 예수님 말씀처럼 결국 이기셨습니다. 무지한 로마병정들과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조롱과 채찍과 침뱉음과 십자가 죽음의 권세를 다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내 안에 있는 너희도 이길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 말라. 너희에게도 반드시 승리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제자들도 그 말씀대로 믿음으로 승리하고 영원한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 작은 지식과 이성과 경험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뜻을 살피고 주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고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답이 보이고 길이 보입니다. 승리의 길이 열립니다. 인생의 승패는 외적인 환경이나 상황에 의하여 의하여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인생의 승패는 오직 믿음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 알량한 지식이나 경험이나 이성을 의지하는 자는 100% 실패합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과 복과 은혜와 평안의 근원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100% 완전한 승리자가 됩니다. 그래서 요일5:4에서는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언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대로 자신의 생각과 이성대로 판단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주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동행할 때에 진정한 승리자가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32절)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은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는데 이유는 간단합니다. 32,33절 다시 보십시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너희가 나를 버리고 떠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떠날지라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따라서 나는 반드시 승리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하나님의 그 능력과 지혜와 권세와 사랑과 은혜로써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할 것이다. 때로는 환난과 핍박이 있겠지만 그것은 패배가 아니다. 결국 너희들은 영광의 승리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따르는 너희들에게도 나와 함께하는 내 아버지께서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께서 함께하시는 한 절대로 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아버지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너희들의 사명을 감당하거라. 이런 말씀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이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승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망할래야 망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실패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망할 수 없습니다.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는 불가능은 없다고 하였지만 용기는 가상하지만 교만하고 무지하고 어리석은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있습니다. 실패가 있습니다. 낙심과 절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런 따위는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오직 승리와 기쁨과 생명과 은혜와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영원무궁하십니다.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십니다.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는 그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반드시 승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니 안 그래요? 어떻게 집니까? 질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한번 말씀해보세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는데 져요?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져요? 어떻게 져요? 질 수 없습니다. 반드시 이깁니다.

롬8:37~39절 보세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인 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혹시 어려움이 있어도 잠시 잠깐입니다.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뭔가 그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지금에 눈에 보이지 않아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연약함이요 부족함이요 어리석음이지 결코 그게 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혹시 인생의 여정에서 무언가 앞이 좀 어둡다고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원망하거나 근심하고 좌절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 앞에 기도하며 주님을 믿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시든지 능력과 지혜와 용기를 주셔서 이기게 하시든지 여하튼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에서도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33절)

여러분, 우리가 승리할 수 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면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와 평강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33절 다시 보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여러분, 보세요.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비록 지금 육체적으로는 너희를 떠나지만 그러나 영으로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와 함께 하고 너희가 나와 함께 하면 내 안에 있는 은혜와 평안이 너희의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고 감사와 기쁨으로 너의 일을 하라. 그러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그냥 함께 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능력과 지혜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평강은 완전하고 영원한 것이므로 그 안에 있는 자는 반드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게 되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100%이깁니다.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지식에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승리가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거기에 성공한 사람은 성공한 인생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런 것들 바라보고 거기서 인생의 성공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100% 실패합니다. 당연하잖아요? 사람이든 물질이든 지식이든 사람에게서 오는 것은 다 불완전하고, 다 한계가 있고, 다 죄에 오염되어 있고, 썩어지고 사라지는 것들 아닙니까? 그러니 그런 것들이 어떻게 우리를 지켜줍니까? 지켜주기는커녕 그런 것들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듦으로 죄사함의 은총을 얻지 못하여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하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원합니다. 완전합니다. 끝까지 나와 함께 합니다. 아니 끝이 없습니다. 100% 확실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조건에 구애되지도 않습니다. 모든 조건과 환경과 상황과 시간을 초월해서 영원토록 우리에게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평안을 주는 것입니다.

요14:27절을 보세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 안에 있으면 세상이 주는 것과는 질적으로 시간적으로 완전히 다른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과 지혜와 평강을 주셔서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완전한 평강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족합니다. 약합니다. 어리석습니다. 모자랍니다. 미련합니다. 죄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나 혼자서는 반드시 집니다. 마귀사탄과 나 혼자 싸우면 절대로 승리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전지전능하십니다. 은혜와 사랑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있는 자는 100% 승리합니다. 감히 사탄이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믿음으로 살았던 우리의 위대한 신앙의 선진들은 모두가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노아는 그러한 믿음으로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 120년 세월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보며 노아의 가족을 무시하고 조롱하였고, 그 배를 짓느라고 수없는 어려움과 힘든 일이 있었지만 믿음으로 구원의 날을 바라보며 방주를 지어 결국 그 가족 여덟 식구가 구원받아 최후의 승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조건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는 말씀을 듣고 고향을 떠나 죽을 고비도 여러번 넘기고 부인을 빼앗길 뻔하기도 하고 아들 이삭을 그것도 백살에 낳은 외동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도 안되는 명령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생각이나 세상적인 척도가 아닌 오직 주님을 믿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끝까지 믿음을 지켜 결국 승리하였습니다.

바울은 수없이 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고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지만 그러나 결국 믿음으로 승리하였습니다.

다윗에게도 여러 가지 기가 막힌 상황들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사울에게 쫓겨 다른 나라로 도망가 몇 년동안 고통의 세월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자식에게 쫓겨 도망다니기도 하였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범죄로 선지자에게 혼나고 자식이 죽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결국 가장 위대한 성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일희일비하지도 말고, 내 생각이나 지혜나 경험으로 판단하지도 말고, 어렵고 힘든 일이 있다고 인생 끝난 것처럼 좌절하고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세상 누구도 무엇도 당할 수 없는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상황과 환경이 좋지 않아도 주님의 방법을 따르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용기와 지혜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진정한 승리의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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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인생( Sunday Sermon)

 

말씀 : 계1:1~3

제목 :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인생

1.주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여러분, 방송에서 북한에 대해서 나오는 것을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참 가관이지 않습니까?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서 김정은 앞에서 열광하는 모습이나 모란봉 악단이니 무슨 악단이니 하는 것을 만들어놓고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김정은을 찬양하는 모습이나 김정은의 측근들이 손자뻘 되는 김정은 앞에서 안절부절하면서 무릎을 꿇고 아부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오죽하면 저러겠나 하면서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 나이에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저 짓을 하고 있나하면서 정말 딱한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아마 둘 중에 하나일 겁니다. 하나는 진짜로 김일성이나 김정일이나 김정은을 위대한 지도자로 알기 때문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혹은 거기 붙어서 아부하며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겠죠.

그러면 여러분,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뭐 좀 생각나는 게 없습니까? 여러분, 보세요. 북한 주민들 중 어떤 사람들은 김정은을 위대한 지도자로 생각하며 저렇게 열광적으로 찬양을 하고 복종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저런 망나니 같은 김정은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얼마나 영광을 돌리고 얼마나 열광적으로 찬양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고작해야 육신의 생명을 살리거나 죽일 수 있는 권력자 앞에서도 저렇게 두려워서 벌벌 떨고 어쩔 줄 몰으며 복종하고 있는데 하물며 영혼을 천국에도 보내고 지옥에도 보내는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며 순종하며 살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바르게 안다면 정말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고, 경외한다면 마땅히 순종해야 합니다. 아니 진짜 안 그렇습니까? 세상의 별것 아닌 권세에도 그렇게 두려워 떠는데 어찌 그것과는 비교 대상조차 되지 않는 하나님의 권세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저 어리석고 무지 몽매하고 악한 인간에게 속아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그 앞에 순종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그 능력과 사랑과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은혜와 구원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안다면 어찌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하며 따라가지 않겠습니까?

마8장에 보면 유명한 로마의 백부장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중풍병에 걸려 몹시 괴로워하는 하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 백부장을 가상히 여겨 흔쾌히 가서 고쳐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그가 뭐라고 합니까? 마8:8절을 한번 보실까요?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여러분, 정말 얼마나 순전한 믿음입니까? 여러분, 여기에 보면 두 가지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은 우주만물의 절대적인 주권자로서 나 같은 인간은 주님의 종노릇 할 자격도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다는 것은 그런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주님은 우주만물의 절대적인 통치자이기 때문에 주님이 굳이 가실 필요없이 그냥 말씀 한마디면 그까짓 중풍병은 물러갈 수 밖에 없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주님께 대한 절대적인 경외심과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왔을 때 주님께서 그 믿음에 감동받아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본적이 없다고 하시면서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하시니까 즉시 중풍병이 나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와같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경외심과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을 아는 자의 올바른 태도이고 바로 그럴 때 능력이 임합니다. 은혜가 임합니다. 당연하잖아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전적인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바라보고 따라가는데 주님이 왜 은혜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은혜와 능력을 주시면 불가능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믿음으로 그 앞에 겸손히 엎드리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정말 그 알량한 지식 경험 이성 생각 가치관 그거 좀 고집하지 말고 진심으로 경외하며 믿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아, 정말 어떤 때 답답할 때가 있어요. 정말 인간의 생각 경험 이성 지식 먼지 만도 못한 건데 왜 그걸 내려놓지 못하고 자꾸 그걸 따라가려고 하는지. 그래서 하나님과 경외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교회 생활하고..... 그러면 어떻게 주님의 능력과 은혜를 덧입겠습니까? 여러분, 꼭 겸손히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경외하며 따라감으로 생명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정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은총과 그 안에 있는 구원과 생명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안 그래요? 거기 생명이 있고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고 그래서 그 안에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있는데 어찌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잖아요. 그 좋은 것을 놔두고 무엇하러 다른 곳에 뭐 좋은 것이 없을까하면서 기웃거리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아니 안 그래요? 빛을 가까이 해야 빛의 은혜를 누릴 것 아닙니까? 좋은 것을 가까이 해야 좋은 것을 누릴 것 아닙니까? 능력 있고 멋있고 훌륭하고 인자하고 사랑이 풍성한 사람을 가까이해야 좋은 것을 얻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런 존재가 누굽니까? 뭡니까? 하나님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정말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게 뭡니까? 가장 기본적으로 말씀과 기도와 찬양입니다. 곧 예배입니다. 이게 기본입니다. 물론 그러고 나서 삶속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 까지 해야 되지만 일단 하나님의 교회를 가까이하고 예배와 기도와 찬송과 말씀 생활에 힘쓰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의 기본이고, 이 기본이 올바르게 잘되면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온갖 풍성한 은혜들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정말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사랑에 빠진 연인들과 같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싶어 안달이 나게 마련입니다. 안 그래요? 주님 안에 영원하고 완전한 기쁨이 있는데요, 생명이 있는데요,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있는데요. 그러면 주님을 만나 이것을 경험하게 되었다면 어찌 주님을 가까이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요? 하나님 안에 있는 그 굉장한 맛을 보았는데 어찌 가까이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집에 자꾸 가려고 하면 집에 꿀단지 묻어놨나 왜 자꾸 가려고 하느냐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 하나님 안에 꿀단지와는 비교도 안되는 게 있는데 어찌 자꾸 하나님을 향하여 가까이 가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고 직접 경험하며 늘 찬양하며 살았던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시19:8~10절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여러분, 이게 바로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의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생명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그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그래서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우리의 눈을 밝게 하여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의 맛이 얼마나 단지 꿀보다 더 답니다. 꿀보다 더 단 말씀의 맛을 본 사람은 그 인생이 꿀 같은 인생이 됩니다. 감사와 기쁨과 사랑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이 넘쳐납니다. 그래서 주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향기를 발하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은혜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함으로 진정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기쁨으로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물론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주님을 만난 사람은 우리는 정말 주님의 종노릇 할만한 자격도 없는 존재라는 걸 아는데 어찌 그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에 겸손히 귀 기울이며 아멘으로 화답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에 어찌 생명의 은혜가 가득한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느헤미야 8장에 보면 제사장 에스라에 의하여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온 백성을 수문 앞 광장에 모아 놓고 제사장 에스라를 초빙하여 말씀을 읽고 해석을 해주는데 그러니까 곧 설교겠지요. 이 때 백성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새벽부터 오정까지 무려 여섯시간동안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데 그냥 듣는 게 아니라 에스라가 말씀을 선포하는 동안에 그들은 계속 아멘아멘하면서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를 하면서 들었습니다. 느8:6절을 봅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그러자 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온 백성들은 다 어찌할꼬 하는 마음으로 울면서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따르지 못하던 모든 모습들을 청산하고 말씀대로 살기를 다짐합니다. 그리하여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그들에게 민족적 큰 숙원 사업이었던 성벽 중건 사업을 성공리에 마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평안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승리가 어디서부터 옵니까? 진정한 평강과 위로와 소망이 기쁨이 어디서 옵니까? 은혜가 충만한데서 옵니다. 은혜가 충만하면 환경이나 상황을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이기게 됩니다. 마귀사탄이 아무리 역사해도 사탄의 역사를 바르게 분별하고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쳐 버립니다. 모든 시험과 유혹과 도전과 환경과 상황과 조건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습니까? 물론 기도할 때도 은혜를 받습니다. 찬송할 때도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니 뭐니뭐니해도 은혜와 능력의 근원은 말씀입니다. 자신의 죄와 연약함과 무지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엎드려 말씀 들으며 아멘으로 화답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아멘으로 화답할 때에 그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인하여 지혜를 얻게 되고 능력을 얻게 되고 힘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어두운 것들이 물리치고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20:32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듣는 일에 정열을 쏟으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읽고 듣되 그 알량한 자신의 생각이나 이성이나 경험이나 지식 따위는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의 성령의 역사가 여러분 심령 가운데 일어날 때에 여러분의 영혼이 살아나고 풍성해 짐으로 더욱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단 말씀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을 때에 마땅히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에 아멘 했으면 다음에는 순종해야 합니다. 안 그래요? 아멘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러면 누구 말 맞다나 립서비스 밖에 안되는 것이지요. 물론 기왕이면 립서비스도 안하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좋지만 그러나 립서비스만 하면 그건 아부가 되니까 립서비스만 하면 안되지요. 실제 행동으로 해야 그게 진짜배기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로만하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자칫하면 버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좋은 케이스가 있지 않습니까? 누굽니까?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입니다. 그는 키가 아주 크고 외모가 훤칠했으며, 게다가 처음에는 겸손하기도 했고, 하나님도 잘 섬기는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된 후 그는 초심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권력과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보다는 인간적으로 어떻게 하면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에 연연하였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을 치고 사람이든 짐승이든 진멸시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제사를 드린다는 명목으로 좋은 양과 소를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오직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제사를 사무엘이 빨리 오지 않는다는 핑계로 자신이 직접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무시하는 사울의 왕위를 폐하고 다윗을 왕으로 삼기로 결정하시고 사무엘 선지자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사울왕을 찾아가 이렇게 꾸짖습니다. 삼상15:22,23절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당신 멋대로 행하여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도 당신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와는 반대되는 사람은 다윗과 아브라함입니다. 그들은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무조건 떠나라,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시자 그 말씀에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100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어불성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하늘의 별과같이 땅의 티끌과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100세에 겨우 아들 하나 달랑 줘 놓고 그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명령입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순종합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아내 사라에게는 말도 하지 않고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이삭을 밧줄로 묶어 번제단의 위에 올려놓고 잡아 번제로 드리려고 칼을 높이 듭니다. 이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하나님께서 되레 깜짝 놀라 다급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그래서 그는 결국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되었고, 결국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되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경외한다면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이자 본분입니다. 왜요? 그분이 창조주이시니까요. 거기에 생명과 능력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 복과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 축복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된 생명과 진리와 은혜와 능력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만이 유일하게 우리를 생명의 길로 진리의 길로 영생복락의 길로 인도해 줍니다. 그래서 그 말씀 안에 살아가는 사람은 생명의 능력과 사랑과 은혜와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세상의 모든 어두운 것과 왜곡된 것을 이기고 상황과 환경을 이기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나 영원한 천국에서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 속에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직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며 그 그 말씀을 존중히 여기고 사모하며 읽고 듣고 아멘으로 순종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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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주일낮예배설교 /유혹 앞에서 (August Sunday Sermon)

제목 : 유혹 앞에서

성경 : 마4:1-11

 

1.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요즘에 보면 상대적 빈곤감 또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보면 즉 실제로는 빈곤한 게 아닌데 많이 가진 자들과 비교하며 상대적으로 가난하게 여기고 박탈감을 느끼면 불평불만을 하게 되고 그래서 자존감도 잃어버리고 진짜로 가난한 자처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바보 같은 일입니까? 실상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데 하필이면 없는 것을 가지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남이 가진 것을 보면서 시기하고 질투하며 가지고 있는 것도 누리지 못하고 진짜로 가난한 자처럼 기쁨을 모르고 산다면 이렇게 어리석은 일이 어딨습니까?

그럼 왜 그렇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꾸 남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월급 200만원도 못 받는데 남이 300만원 500만원 1,000만원 받으니까 저 사람은 무슨 복이 많아서 머리가 좋아서 일류대학 나와 대기업에 들어가고 출세하여 잘먹고 잘사나, 저 사람은 무슨 복이 많아서 부잣집에 태어나서 저렇게 좋은 조건 속에서 온갖 좋은 혜택을 누리며 잘먹고 잘사는데 나는 왜 쎄가 빠지게 일해도 이 모양인가 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항하고 시비를 걸고 그래서 결국 스스로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그러면 안됩니다. 남이 월급을 1,000만을 받든 1억을 받든, 대궐 같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온갖 사치를 누리든 그런 거 배 아파하지 말고 그냥 하나님 앞에서 믿음 안에서 성실하게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누리고 있는 것 자체를 보면 우리는 결코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힘든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이 정도면 먹고 살만한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하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영원한 영광까지 주셨습니다. 그럼 됐지 자꾸 더 바라고 욕심을 내고 비교하며 원망하고 불평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그럴 일이 뭐 있습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행복은 자꾸 도망가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즘 세상이 그렇지를 못합니다. 완전히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서 그저 좋은 집에서 좋은 것 먹으며 좋은 옷 입고 많은 것을 소유하면 행복할 줄 압니다. 그래서 죽어라하고 돈돈돈 경제경제경제하면서 온통 관심의 초점을 돈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물질적 외형적인 것만 남과 비교하며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너무나 많은 갈등과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게 바로 마귀사탄의 역사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마치 옛날에 나라에 시끄러운 일이 있으면 소위 북풍이라고하여 작은 일을 크게 부풀리든지 없는 일을 만들든지하여 북한 공산당이 무슨 큰 일을 저지른 것처럼 하여 국민들의 관심의 초점을 그쪽으로 돌리게 함으로 시끄러운 일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귀사탄이 우리의 관심을 온통 돈에게 두게 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믿음이니 사랑이니 진리니 의니 선이니 이런 것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잘먹고 잘살면 장땡이라고 여기며 예수님도 안 믿고, 심지어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예수님보다 돈을 좋게 여기게 만들어 자꾸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돈을 따라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깨어 기도하며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마귀 사탄의 유혹에 속지 말고 진리를 따라 살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엡5:16~18절을 보겠습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여러분, 보세요. 세월이 선하다고 했습니까? 악하다고 했습니까? 악하다고 했습니다. 악한 게 뭡니까? 죄와 무지 속에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저 돈과 명예와 권력과 세상 즐거움에 빠져 사망 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알려면 세상의 것에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올바르게 판단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거짓되고 왜곡된 것들을 물리치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왜곡된 가치관이 만연된 세상에서 정말 깨어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 올바른 영성을 가지고 모든 왜곡된 가치관과 유혹을 바르게 분별하고 물리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까?

2.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왜곡되고 유혹 많은 세상에서 진정한 승리자가 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조건은 오직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하지요.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시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 안에 있을 때만이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왜곡된 가치관과 악한 것들을 올바르게 분별하고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요,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 더럽고 추하고 악한 마귀 따위에게 시험을 받을 수 있습니까?

물론 왜 이유가 없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마귀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분임을 명백히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최초의 인간 아담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는데 예수님은 사탄의 권세와 유혹을 물리침으로 마귀에게 저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살리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함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능동적으로 시험에 임하셔서 사탄을 호통을 쳐서 쫓아내심으로 사탄의 권세룰 물리치고 우리를 구원해 주실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마귀에게 속아 죄와 무지 가운데 빠진 인생은 결코 자기 힘으로는 죄와 사탄의 권세를 이길 수 없습니다. 선이나 진리나 의에 대한 온전한 분별력도 없고, 악을 이길 힘도 없습니다. 자신이건 남이건 죄과 마귀와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이나 과학이나 다른 어떤 능력이나 지혜로도 안됩니다.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으나사나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임으로 그 안에 있으면 안전한 것입니다. 사탄 마귀가 넘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설령 사탄 마귀가 도전해도 주님의 능력으로 이기게 됩니다. 사탄 마귀가 어떻게 교묘하게 유혹하고 시험하고 도전해도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분별하고 물리치게 됩니다. 세상의 왜곡되고 그럴듯한 가치관에 속지도 않고 물질이나 권력이나 명예 따위에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세상의 물결이 아무리 거세게 밀려와도 휩쓸려가지 않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그런 것들을 이기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기쁨과 자유와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5: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지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서 그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심으로 세상의 모든 죄와 사탄의 권세를 이기고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물질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가장 먼저 이겨내야 할 시험은 물질의 시험입니다. 사탄은 온갖 방법으로 교묘하게 우리를 유혹하는데 가장 흔한 것이 물질을 통한 유혹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간사한 마귀가 심지어 예수님께도 물질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즉 40일 동안이나 금식하여 주리신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린 배도 채워서 좋고 권능을 보여주면 하나님의 아들임이 증명될 거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런 수작이 예수님께 통할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말을 듣고 사탄을 꾸짖습니다. 마4:4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한마디로 떡 즉 물질이 우리를 지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물질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좌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영생복락의 말씀인데 그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고 썩어 없어질 물질이 지배하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생명의 길도 진리의 길도 모르고 썩어 없어질 물질만 따라가다가 영원한 멸망길로 가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내가 배가 고프고 힘든 건 사실이지만 너 따위의 말은 들을 수 없다며 사탄의 교묘한 물질적 유혹을 일축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물질은 요긴한 것이긴 하지만 절대로 물질이 내 삶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물질적 가치에 의하여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그 말씀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당연히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 세상은 물질지상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이 믿음이나 사랑이나 진리나 의보다는 물질에 의하여 좌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 때문에 싸우고, 때리고 심지어 죽이기도 합니다. 물질 때문에 이웃과 친구와 심지어는 가족 간의 관계가 파괴될 때가 많습니다. 믿는 사람들도 물질 때문에 신앙생활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풍조가 세상을 뒤덮고 있어서 그게 도리어 정상인 것처럼 여겨질 지경입니다. 그러나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그건 속고 있는 것입니다. 껍데기에 인생을 거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 껍데기에 지배당하는 인생은 당연히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 지를 잊지 알고 더욱 깨어 기도하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며 말씀으로 무장하여 물질보다 오직 주님을 앞세우시기 바랍니다. 물질적 이해관계에 의하여 내 삶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과 믿음과 사랑과 진리와 선과 의의 참된 가치를 앞세우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참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명예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여러분, 마귀는 물질적 시험에 실패하자 이번에는 예수님의 명예욕을 자극시켜며 유혹합니다. 즉 성전 꼭대기로 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붙들어 다치지 않게 하실 것이고, 그러면 너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웅대접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그런 수작에 넘어갈 분이 아니시죠. 그래서 또 마귀를 꾸짖습니다. 마4:7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내가 너 따위의 말을 듣고 여기서 뛰어 내린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게다가 여기서 뛰어 내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이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사탄 따위의 말을 듣고 뛰어 내린다는 것 자체가 그 말에 순종하는 것이니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설령 뛰어 내려서 좋은 결과가 있다고 할지라도 마귀의 말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 그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여러분, 우리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한다면 그게 바로 사탄의 말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설령 돈보따리가 생긴다해도 마귀 따위의 말에 순종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마귀의 말에 의해서든 아니면 자기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서든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전에서 뛰어 내리는 행위는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방법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있다면 마귀의 말처럼 뛰어내릴 때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면 자신이 영웅이 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런 방법으로 명예를 주지는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갈 때에 명예를 주는 것이지 영웅심리를 가지고 쓸데없이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지켜 줌으로 영웅이 되게 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게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이 지켜 주실 만한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그렇게 해 주실지 안 해 주실지 한번 테스트해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무모하게 행동하면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 뜻 안에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말씀에 합당하게 믿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이게 올바른 믿음이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명예와 영광도 아울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기본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을 비롯하여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무엇을 하든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코 영웅심리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무언가를 행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함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명예도 얻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영적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시험이 실패로 끝나자 마지막으로 사단은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영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높은 산으로 가서 예수님에게 천하만국을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을 모두 주겠다는 것입니다. 즉 그저 눈 한번 질끈 감고 자신에게 절하면 세상만국을 다 주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탄이 그럴만한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 까짓 게 무슨 그런 권세가 있습니까? 그저 예수님이 지금 40일동안이나 전혀 아무것도 안 잡수시고 약해져 있으니까 이 약해진 틈을 노려 어떻게든 예수님을 넘어트리려고 술수를 쓰고 있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수작이 예수님께 어떻게 씨알머리나 먹히겠습니까? 예수님은 사탄을 향해 호통을 치십니다. 마4:10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내 지금 비록 힘이 들어도 어딜 감히 나한테 수작을 부리느냐? 오직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거늘 어찌 더럽고 추하고 악한 너 따위에게 경배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사탄은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나에게 절하라. 그러면 천하만국 즉 명예와 권세와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갖 우상을 섬기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돈과 명예와 권세와 세상 즐거움을 미끼로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신은 없다고도 했다가 신은 똑같다고 하면 믿지 말든지 아무거나 적당히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다. 돈과 명예와 권력에 행복이 있다. 그걸 소유하라. 그러면 행복하리라고 하면서 우리를 미혹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그 길로 갑니다. 자기 생각대로 갑니다. 그저 돈돈돈 경제경제경제 하면서 삽니다. 그게 바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모습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볼때에 보기에도 탐스럽고 먹음직스럽고 먹으면 뭔가 지혜와 생기를 얻을 것처럼 보여 덜커덕 따 먹음으로 죄의 굴레를 뒤집어썼던 것처럼 지금은 더 크고 더 좋은 선악과들이 세상에 널려 있어서 사람들이 그런 것들에게 쉽사리 걸려들어 선악과 따먹으며 죄의 길로,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 소리에 속으면 안됩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향락이나 세상의 가치관 앞에 무릎을 꿇으면 안됩니다. 그건 죽음의 길입니다. 오직 우리가 경배해야할 분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뿐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뿐입니다. 세상의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명예나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특별히 사순절을 보내면서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묵상함으로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영적 시험을 이기고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능력을 온전히 맛보며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신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가 갈 수 이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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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주일낮예배설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August Sunday Sermon)


말씀 : 고전10:31-33

제목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분, 사람이든 물건이든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무엇인든 본래 그것을 만든 목적에 부합되는 상태를 유지하고 그 목적에 맞게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TV가 아무리 크고 디자인이 좋아도 영상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자동차가 아무리 크고 멋있어도 잘 달리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것이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인물이 훤하고 키가 크고 능력이 많아도 사람 노릇 제대로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지식과 능력과 부와 명예와 권세가 있어도 그걸 본래의 목적에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아무 유익이 없지 않습니까? 아니 유익은커녕 도리어 그걸 잘못 사용하면 인간의 삶에 해악을 끼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존재의 목적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생명과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거기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정말 멋있고 아름답고 가치 있고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고귀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1.인간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생 뭐 있냐 잘 먹고 잘 놀고 잘살면 되지 그럽니다. 기왕이면 부귀영화도 누리고 명예도 누리고 그래서 떵떵거리며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그게 인생이지 그럽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잘먹고 잘살기 위하여 인생의 모든 것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부귀영화 누리면서 살다가 죽으면 대단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누구 맘대로 그게 인생이라고 그럽니까? 그건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이 자기 멋대로 생각하는 인생이지 결코 그게 인생이 아닙니다. 여러분, 인간의 목적은 사람이 정하는 게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만들어진 존재가 어떻게 자신의 목적을 정합니까? 텔레비전이 자기가 목적을 정했나요? 밥그릇이 나는 밥을 담는 그릇이 되어야지 하면 자기가 목적을 정하고 만들어졌나요? 사람이 태어나면서 나는 이런 인생이 되어야지 하면서 스스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나요? 아닙니다. 물건은 그것을 만든 사람이 정하고 우리의 목적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은 것입니다.

그게 뭡니까? 그건 사43:7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같이 보실까요?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무엇이 인간의 목적이라고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어졌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자세히 말하면 길어지니까 간단히 말씀드리면 첫째는 직접적인 의미로서 우리를 지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며 찬양하여 섬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간접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혜와 능력을 잘 활용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되게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아름다운 창조의 세계에서 인간도 자연도 하나님의 은혜를 흡족하게 누리며 살아감으로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신 의미와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은 인간은 무조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말하면 뭐하겠습니까?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약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간이 우주만물의 창조주로서 전지전능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완전히 거룩하고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사랑과 은혜만이 충만하신 하나님께 어찌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드리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걸 모르는 인생이라면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모르는 자로서 결국 하나님의 은총에서 끊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갈 때에 세상은 가장 아름답고 복된 세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행하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무엇을 하든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생각과 지식과 경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길을 따르게 됩니다. 선과 진리와 의를 따르게 됩니다. 목적도 방법도 의도도 선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바르게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도 영광이 돌려지고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내 영광을 위하여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죄와 무지 속에 있는 내 생각과 방법과 경험과 지식을 따라 행하게 됩니다. 그러면 물론 옳은 것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죄와 무지가운데 있기 때문에 선하고 아름답고 귀한 목적과 방법과 의도를 가지고 하지 못하고 잘못된 목적과 방법과 의도를 가지고 하기가 십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기도 하고 헛된 것에 인생을 바치기도 하고 그저 자신의 욕심과 영광을 위해 하다보니까 시기와 질투와 분쟁과 싸움이 일어나 결국은 서로 아픔과 고통과 상처를 주는 어리석은 삶을 살 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겸손하게 엎드려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으로 행할 때에 선과 진리와 의를 따름으로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내 경험과 지식과 이성이나 세상의 왜곡된 풍조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여러분도 귀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모든 행위를 하나님의 영광과 결부시켜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영광과 결부시켜야 합니다. 즉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인지 혹은 가리는 일인지를 깊이 생각하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쪽으로 결론이 나고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3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보십시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구이며 행위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본능적인 욕구나 행위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살기 위해서 먹는다거나 아니면 식탐을 채우기 위하여 먹는 것이 아니라 먹음으로 건강을 유지하여 그 건강한 육신으로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먹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의식주 생활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의식주 생활도 정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방법으로 영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 중에서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멀리까지 유명한 음식점을 찾아 여기저기 다니기도 합니다. 또 일인분이 몇 만원, 몇 십만원씩하는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기도 합니다. 혹은 몇 만원짜리도 수두룩한데 굳이 몇 십만 몇 백만 원짜리 옷을 입기도 하고, 그저 삼십여평만 되어도 충분할 것 같은 데 굳이 몇 십 평짜리 집에 살면서 온갖 비싸고 좋은 것들로 장식을 하고 호화롭게 살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런 모습들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일일까요? 어떤 분들은 내가 능력이 있어서 돈 잘 벌어서 내 돈 가지고 내가 쓰는데 왠 잔소리냐 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능력도 지혜도 여건도 환경도 상황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필요이상으로 크고 화려한 곳에서 살며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옷 입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영광과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므로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제적 능력이 있어도 적당한 수준에서 검소하게 의식주생활을 하면서 내 영광과 내 기쁨을 위하여 사용하는 그것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뭐 기타 지식이나 권력이나 지위나 그 어떤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릴 것은 드리고,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사용하고, 이웃을 위해서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남에게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주고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우리도 귀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이 사실을 잊지 말고 가장 기본적으로 먹고 마시는 일 조차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말을 할 때나 공부를 할 때나 일을 할 때나 직장 생활을 할 때나 결혼을 할 때나 무엇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대전제를 잊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고 여러분도 주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남을 세워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일 중의 하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그건 다름 아니라 남을 세워주는 자 즉 남에게 힘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과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가져다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인데 어떻게 그 귀한 존재를 아프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겠습니까? 또 그렇게 서로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고 넘어지게 하면 서로가 얼마나 힘들겠으며 또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서로 사랑하고 세워주고 위로하고 힘을 주고 하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더 아름답고 풍요로워지겠으며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겠습니까?

오늘 32,3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누구에게나 남을 걸려 넘어지게 만들고,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주는 자가 아니라 기쁨과 위로를 가져다주는 자라가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뭐 당연하지요.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 세워주고 위로하고 힘을 주고 유익을 줄때에 우리 모두가 함께 복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내 식구나 남의 식구나 할 것없이 누구라도 걸려서 넘어지게 하고,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는 자가 아니라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복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의무이고 그게 우리가 서로 행복한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 반대로 행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오직 자기 영광을 위하여 남을 넘어뜨리고라도 자신의 유익을 취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기치고 도적질하고 싸우고 때리고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남에게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줄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이런 모습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헐뜯고 싸우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입니까? 이건 우선은 교인들을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일입니다. 나아가서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막는 행위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결코 이런 우를 범하지 말고 서로 정말 사랑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것들이 사랑과 진리와 의 안에서 이루어지게 해야 합니다. 어떤 삶의 자리에 있든 자신이 있는 삶의 현장에서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정직하고 모범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갈등과 시기와 질투와 아픔을 주는 자가 아니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이 사회를 아름답게 세워가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우리들도 생명의 은혜가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꼭 이런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영혼구원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남을 유익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남을 가장 유익하게 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머니가 아니라 복음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유익한 것입니까? 물론 생명이지 않습니까? 온 천하를 얻어도 생명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니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으며 이보다 기쁨과 유익과 은혜를 주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33절 다시 보십시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어찌하든지 남을 유익하게 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여 구원의 길로 이끌라는 말씀입니다. 즉 남에게 유익을 주는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고, 병든 자를 고쳐주고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만약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물론 먹을 것을 주고, 입혀주고, 병을 고쳐주는 일들은 그것대로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기에 그런 일도 중요하고 당연히 해야할 일이지만 그러나 단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것을 통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남을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에 보다 더 관심과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가운데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에서 누려야 할 영적, 물질적, 정신적, 육체적 은혜도 누리다가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 인생을 전인적으로 영원히 유익하게 하는 일이요, 행복하게 하는 일이요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사순절과 대강절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평소에도 해야할 일이고 또 평소에 사랑과 거룩과 진실과 선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그 선하고 아름답고 의로운 모습을 보면서 주님품으로 오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결정적으로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게 하고 예수님 믿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목적이요 이것이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유익과 기쁨과 은혜를 주는 일이요. 이것이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해드리는 길이요, 이것이 우리가 생명의 은총을 가장 풍성하게 누리는 길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공부하고 일하고 힘쓰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시기 바랍니다. 남을 기쁘게 하고, 남의 유익을 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열심히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려 드리는 가운데 여러분도 더욱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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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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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주일낮설교/사랑의 십자가 ( August Sunday Sermon)

제목 : 사랑의 십자가

말씀 : 마27:38-44

 


1.우리의 저주를 대신한 주님의 십자가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사실은 저주의 상징입니다. 끔찍한 고난의 상징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저주받은 십자가가 교회의 상징이 되었습니까? 말할나위없이 우리의 저주를 대신한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지옥의 저주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고전1:18에서는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 즉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시는 것만이 우리를 모든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주는 유일한 능력이요 힘이요 지혜라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무슨 다른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다른 방법이 있다면 예수님인들 왜 십자가를 지고 싶으셨겠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기에 그 저주받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다른 무슨 방법으로 인류의 죄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돈으로 할까요? 지식으로 할까요? 과학으로 할까요? 윤리도덕으로 할까요? 다른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오직 죄없고 흠 없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만 죄를 용서 받을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모릅니다. 아니 자신들이 죄가운데 있다는 사실 조차 모릅니다. 다 자기가 잘나고 똑똑하다고 옳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죄와 무지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새까맣게 모르고 천국이 있네 없네, 아무거나 믿으면 좋은 데 가네 마네하며 떠듭니다. 누구 맘대로 그럽니까? 참 안타깝고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그러니 반대로 이 놀라운 생명의 비밀을 알고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된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다행이고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나같은 죄인을 위하여 그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며 겸손히 동행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주님의 영광 나타내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이 놀라운 은총을 입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2.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은 우리는 죽을 때까지 감사하고 영광돌리고 찬양해야 하는 것을 말할 것도 없고 동시에 죄를 미워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놈의 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까? 그 놈의 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아픔과 상처를 받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 놈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참혹한 죽음을 당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죄를 가까이 할 수 있습니까? 얼마나 죄를 혐오하고 멀리해야 되겠습니까? 정말 그렇잖아요? 그 놈의 죄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지옥가게 되고 지금 여기서도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받게 되고 그래서 주님이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 받으시려고 그 끔찍하고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 흉악하기 짝이 없는 죄를 가까이 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닌지 하면서 좀 걱정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끔찍한 죽음을 당하심으로 생명을 얻었는지를 망각하고 마치 구원이 거저 얻어진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지 못하니까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죄에 대하여 무감각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거저 얻어진 것은 귀한 줄을 모릅니다. 귀한 줄을 모르면 감사할 줄도 모르고 또 가치 없이 막 써버립니다. 그래서 부자집 자녀들은 돈 귀한 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르고 흔전만전 써버리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우리가 얻은 이 영원한 생명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주어진 것인지를 알면 절대로 우리가 얻은 구원을 조금이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거나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여 죄를 가까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짜 안 그래요? 여러분, 여러분은 온갖 썩은 냄새와 똥냄새가 풀풀나고 구더기가 들끓는 그런 더럽고 추하고 혐오스러운 곳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또는 사자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리며 대드는데 그곳으로 가까이 가겠습니까?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도망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죄는 이보다 더 더럽고 악하고 사납고 흉악한 것인데 어찌 그것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그래서 약4: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사순절 특별히 오늘 고난 주일을 맞이하여 먼저 그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주님께 정말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며 동시에 정말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고 오직 주님을 가까이 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쳐나는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은총을 기억할 때에 우리가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기 위하여 온갖 저주와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고난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주님이 그토록 원하셨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 온갖 저주와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고난과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 사실을 몰랐으면 몰라도 죄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그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주님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당하셨는지, 그리고 처절한 고통을 통해서 주신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 줄 안다면 우리가 어찌 생명의 역사를 위한 일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너무나 끔찍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로마의 병정들이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는 채찍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넘어지고 쓰러지면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에 손과 발에 대못이 박혀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 육체적 고난 뿐 아니라 주님은 온갖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당했습니다. ①로마 병정들은 사정없이 때린 후에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히고, 침을 뱉으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하면서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②유대종교지도자들은 눈을 가리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뺨을 치며 너를 친 자가 누구인지 알아맞혀 보라면서 조롱했습니다. ③불과 며칠전만 해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환호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④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있을 때는 지나가는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⑤심지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는 강도들도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며 모욕했습니다. 이런 참혹하고 끔찍하고 처절한 고통을 통하여 우리 죄가 용서되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 놀라운 은혜를 입은 우리는 백번 천번 만번 죽어도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하지 않습니까? 또 그냥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면서 그 은혜만을 누리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래서 주님이 그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얼마나 처절한 고통을 당하신 것을 안다면 어찌 그냥 편히 앉아 은혜만 누리고 있을 수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16:24절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정말 백번 죽고 또 죽어도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도 주님의 그 거룩한 생명의 역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게 주님의 은혜를 덧입은 자의 마땅한 의무이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일이고 우리 자신이 더욱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길입니다.

물론 주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마귀사탄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죄와 무지 가운데서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인본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라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참여하려면 이러한 모든 마귀사탄의 역사와 세상의 물결을 거슬러 올러가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며 육신의 안일함과 평안함과 즐거움만을 향하여 가던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세와 세상 즐거움보다는 선과 진리와 의를 따르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위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정열을 받쳐야 합니다. 열심히 모여 깨어 기도하고 말씀 묵상함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을 베풀어야 하고 전도도 해야 하고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역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덧입은 자들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복되고 고귀하고 영화로운 삶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자신도 정말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된 기쁨과 은혜와 가치를 누리며 살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정말 복되고 아름답고 고귀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또 오늘 성찬식을 행하면서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며 주님이 당하신 그 처절한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며 주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려드리시기 바랍니다. 정말 죄를 멀리하고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며 우리 각자에게 주신 십자가를 기쁨으로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위에 생명의 역사를 아름답게 이루어가며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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