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고대사 개관

 

목차

 

◎서양고대문명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고대 문명의 발전과정/ 고전고대란? 1. 첫째-지역, 공간적인 물음/지중해 세계의 개념2. 시간적인 구분

 

◎그리스-로마사 시대구분

그리스사 시대구분/ 로마사 시대구분 (BC 8세기-AD 5세기) a. 로마공동체CIVITAS의 탄생과 왕정기(BC753-509) b. 공화정 초기와 중기(509-2세기초) c. 공화정후기 (B.C 2세기-1세기) d. 로마제정 BC 1-A.D 2세기(제정전기) e. 제정후기(3-5세기)/ 중세와의 경계

 

◎그리스의 문화

문화창조의 원동력/ 그리스 문화의 특징/그리스문명의 세계사적 의미와 교훈/ 그리스-로마문화의 차이점

 

◎로마제국의 세계사적 의미

로마발전의 배경 1. 로마정신2. 로마의 외형적 발전요인/ 로마문화의 특징

 

◎로마제국의 문화사적 역할

로마제국이 문화에 끼친 영향 1. 로마가 헬레니즘사상에 끼친 직접적인 영향 2. 그리스와 오리엔트가 로마에 끼친 영향 3. 정치와 문화의 융합

* 헬레니즘의 매개자로써 마호멧트 교도(아랍인)

 

◎그리스문명의 성립과 발전

1.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의 문명개요 2. 크레타문명 개요 3. 미케네문명 개요

 

◎그리스문명의 성립

1.그리스인의 이주  2. 폴리스의 성립 (B.C.8-6세기) 그리스의 사회  3. 폴리스의 구조  4. 아테네와 스파르타ㄱ. 아테네  ㄴ. 스파르타

 

◎그리스 세계의 발전

1. 페르시아 전쟁(B.C. 492-479: 3차)과 아테네의 발전 2. 아테네의 황금기 3. 펠로폰네소스전쟁( B.C. 451-405)  4. 폴리스의 쇠퇴와 종말 *그리스 도시국가의 몰락원인 

 

◎그리스 문화

그리스의 문화의 특징 *신화와 종교 /그리스 신화/ 그리스종교 /그리스 철학과 정치사상/ 관념론의 발전/ Socrates (470-399)/ Platon(427-347)/Aristoteles(384-322)/ 문학 및 연극과 예술 /그리스문학/ 그리스 연극 /그리스 미술 및  건축과 조각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

1. 알렉산더 대왕의 업적과 제국의 분열  2. 헬레니즘시대의 사회와 문화 정치, 경제/ 문화/ 현실주의사조

* 로마의 지중해대국 발전과정/로마의 대외정책

 

◎로마제국의 흥망사

1.  로마공화정의 발전 a. 로마공동체CIVITAS의 탄생과 왕정기(753-509) b. 공화정 초기와 중기(509-2세기초) 2. 로마공화정의 성립 3. 로마의 반도 통일 4. 로마의 발전/ 로마 시민공동체의 해체(공화정후기 B.C2세기-A.D. 1세기) *지중해의 세계 개관/ 로마의 대외정책/포에니 전쟁(Punic War 264-146 B.C) 5. 로마공화정의 변질/로마사회의 변질 6. 로마의 새로운 질서/ 3두정치/제1회 삼두정치/ 케사르의 개혁/제 2차 삼두정치/악티움해전 7. 로마제정의 발전  * 로마의 평화 Pax Romana 8. 제정시대의 사회  9. 로마문화와 기독교

 

◎로마법의 기원과 발전

로마법/ 만민법/시민법과 명예법/공화정시대/고전시대/제정후기/ 동로마 법률학교와 고전주의의 부활/중세의 로마법(주석학파)/로마법계수운동

 

◎로마제국의 붕괴원인

정치적 원인/황제의 계승문제/ 군대의 조직력약화/군대의 질적 변화/ 정치적 변화/게르만의 이동/ 게르만의 침입/게르만의 이동에 따른 정치경제적 변화/ 경제적원인 (근본적 원인)/로마의 경제제도/정신문화적원인/기독교의 성장/ 기독교박해/기독교의 성장과정/사도 바울의 등장/ 유태교의 쇠퇴/교부시대

 

◎이슬람제국과 비잔티움의 발전

  

◎서양고대문명

 

서양 고대문명? 3가지 문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리스문명, 헬레니즘 시대의 문명, 로마문명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서구 문명의 양대 기본적 토양

그리스-로마적 전통/ 유대-기독교적 전통; 현세주의 물질문명/ 초현실주의 정신문명; 인간주의/신본주의; 낮과 밤의 이질적, 대조적이지만 상호보완적 관계

  

고대 문명의 발전과정

1.에집트-메소포타미아, 오리엔트문명에 세례를 받고 2. 고유한 독자문명 (그리스 문화를 중심)을 창조: 오리엔트의 지나친 종교와 신화적인 면에서 탈피.  인간의 자유와 의지를 중시, 자연과의 조화의 세계를 추구. 3. 그리스 문명은 다시 오리엔트문화와 재접목(헬레니즘의 문화로 계승)  4. 로마문명으로 계승 발전 (헬네니즘+기독교문명)

  

고전고대란?

-18세기 말 독일 낭만파운동의 신조어: 그리스-로마시대와 동일-르네상스 이후의 가치관과 역사의식의 소산: 그리스-로마세계= 고대사회-19세기부터 그리스-로마 역사를 총칭하는 말 (문화, 문명사적 의미의 확대해석)-특히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음: 고대-중세-근대의 구분(서구 보편문명사적 관점)사회경제적인 요인, 소유형태, 생산방식, 사회구조에 주목한 사회경제사적 관점 

  

1. 첫째-지역, 공간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서양 고대를 개관할 수 있다.

 

서양고대사? 

지중해의 역사와 그 주변지역과의 정치적, 문화적 관계로 생성 발전된 역사를 말한다.  *즉 서양고대사는 지중해 세계의 형성과정이 씨줄역할을 하며,  그리스로마사회의 내적 발전이  날줄역할을 하면서 짜여진 역사와 문화를  뜻한다.

  

*지중해 세계의 개념

특징 -그리스-로마사의 동질성과 연속성을 포괄하는  하나의 역사단위-지중해의 세계는 작은 문명으로부터 출발 지중해 전체를 포괄하는 세계제국으로 확대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며, 주변부의 다른 문명과의 관련 속에서 고유한 전형적인 제도와 이념을 발전시켰다. 예) 시민공동체, 민주주의와 노예제, 자유와 정의의 이념  -이지역의 내적 통일은 제 민족적인 특성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많은 문화교류를 통해 이루어 졌다. 

  

*고대세계의 통일사상은 정치적, 군사적 통일이념이 아니라, 항상 문화적 영역 안에서 가능하였다.  *고대세계란?   역사적인 통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직,간접의 바다와 국경을 넘어서는 일종의 정치적 문화적 교류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특히 -지중해의 해양적 지리적 특수성이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스-로마가 지리적으로 오리엔트와 다른 면 (자연적 조건: 지중해식 기후 여름에 고온건조, 겨울: 온난다습. 해상을 통한 교통수단이 발달* 공간적으로 엄청난 동서팽창:  스페인부터 (지불롤터해협) 프랑스연안-베네룩스-영국본토-북부아프리카(이집트포함)-다다넬스- 소아시아(터키) 흑해, 시리아, 팔레스티나-페니키아-바빌로니아(메소포타미아:이라크) 페르샤(이란), 서파키스탄, 카자흐스탄, 아프카니스탄, 간지스강유역 까지

  

*알레산더대왕과 카이사르의  세계제국의 이념을 달성키 위한 공간으로서의 지중해의 세계를 연상하라. 알렉산더대왕: “내가 만약 더 젊었더라면 인도까지 제패하였을 터인데...” 그의 이름에 따른 수많은 도시( 알렉산드리아)가 오늘까지 존재한다. 그의 제국: 나일지역부터-겐지스 지역까지 확대-중세이후  인도제국 및 중국의 영향권인 카시미르-타슈켄트지역이 아랍, 모슬렘세력에 대항한 점을 주목하라. 로마와  카시미르에서의 예술의 상호관련성을 생각해 보라. 

 

2. 시간적인 구분

 

고대 연구의 문제점: 초기 소아시아와 이집트 문명과 깊은 연관시켜 파악해야 한다.

 

중세와의 경계

-3가지 모두 정치적, 교회사적인 의미-니케아 종교회의 325, 훈족의 침임(375), 서로마제국의 멸망(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한 로물루스 아우구수툴루스의 폐위 476):  495년*중세란? 고대문명의 단절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 고대문화, 고대국가, 고대사상의 종말  -정치세력의 새로운 그룹화(지방 세력의 등장), 새로운 사상과 가치관이 형성(기독교),   새로운 경제시스템(봉건제도)

 

6세기 말/ 7세기 초 중세적인 요인들이 결정적으로 나타남-572년 랑고바르덴족에 의한 파비아점령-634 아랍인에 의한 서구침입 (마호메트 사후 2년 동유럽을 넘어). 이에 따른 영향: 오리엔트의 커다란 세력에 대항하는 서구적인 헬레니즘문화-칼 마르텔: 칼 대제의 할아버지: 732년 투르와 프와티에 (파리근교)에서 아랍세력을 격퇴-칼 대제는 새로운 서구에서의 황제등극 800년*중세의 정치적 역사: 비잔티움, 로마교황, 황제의 3파전의 양상으로 발전 

 

◎그리스-로마사 시대구분

 

그리스사 시대구분 (언어적)


1. 그리스 자유국가시대 (BC 8-4세기)

해외식민시대:(도시국가의 형성-정치제도가 급속히 완비되는 시기)  폴리스(정치적 단위): 도시국가( 시민의 다수는 농민): 근대적 읍수준 100-200개 정도수준.  암흑시대 (BC 10-8세기) 이후 생성. 2. BC 6-4세기: 페이시스트라투스-클레이테내스, 펠리클레스 전성기: 황금기(그리스 문명)알렉산더에 의한 멸망

 

II.마케도니아시대: B.C. 338-146

BC4-3세기: 정치적 쇠퇴기: 문화적 반전기(헬레니즘의 영향) 마케도니아의 통치시대: 클레오파트라의 사후 로마에 의한 이집트 병합까지 (악티움해전 BC 27년)


II. 로마제국의 시대에 포함 (BC 146 이후)

  

로마사 시대구분 (BC 8세기-AD 5세기)

  

a. 로마공동체CIVITAS의 탄생과 왕정기(BC753-509)

귀족이지배한 도시공동체-3000년경 인도-게르만의 일파: 이탈리아인이 정주시작-기원전 8세기 티베르강 유역 라틴의 작은 촌락 로마가 건설(라틴인)-초기 에트루리아Etrurians에 지배이후 독립도시국가의 형태를 유지 510년경부터:  이후 1000년의 세계제국의 수도로 변모-그리스문명의 영향(종교,  제도, 건축, 도로건설, 도예)-부족국가: 씨족Gens, 종족Curia 부족Tribus으로 구성  사회적 신분: 혈통귀족Patricii 평민Plebs 예민Clientes 노예Servus

 

b. 공화정 초기와 중기(509-2세기초)

로마시민공동체의 성장  -초기로마: 로마공화정은 6세기이후-귀족(대토지소유)이 실권장악-통치와 군사권은 임기 1년의 2명의 통령Consul-전권은 귀족대표기관인 원로원Senatus이 장악-평민: 중소농민이 주축, 참정권이 박탈

 

c. 공화정후기 (B.C 2세기-1세기)

로마시민공동체의 발전 및 쇠태-포에니전쟁: 반도통일이후 (지중해진출모색) 1차-3차: B.C 3-2세기-지중해의 세계는 당시 군웅활거시대  알렉산더사후 중동, 이집트,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페니키아의 카르타고로 분열   로마의 지중해 진출의 결정적 방해요인 1-2차 3두정치: 케사르, 케사르 사후 BC 1세기

  

d. 로마제정: BC 1-A.D 2세기(제정전기)

Pax Romana시대(1-2세기)  시민공동체적 요인이 해체기*아우구스투스 시대(옥타비아누스)BC 27년  -내란과 무정부적 혼란방지를 위한 Princeps(원수정)수립

Princepatus: 19세기 몸젠이 명명한 정치체제  Augustinus: 혼합정부체제(원수정) -원로원과의 타협  대권장악: imperator: 군통수권자. Augustus(존엄,지존)의 칭호: 로마  황제에 등극-그는 독재자가 아닌 로마시민의 원수  -Principatum(지배체제): 로마공화정의 변질. 귀족정이 아닌 일인지배 (원로원의 기능쇠퇴)속주의 총독의 사병화 금지(연금제실시, 감독관파견) 상비군과 친위대창설: 국내질서유지. 도시정비: 상수, 신전, 목욕탕, 도로 정비-45년간의 치세: 혼란과 무질서를 추방한 로마의 평화시대가 열림 A.D 1-2세기: 네로이후 4황제 마르셀리우스황제까지

  

e. 제정후기(3-5세기)

3세기 군인황제시대: 235-285 군대가 개입하는 황제옹립과정에서 내분과 대립-제국의 통합과 황제권에 치명적결과*전제주의 정부형태: 3세기: 부패와 타락(금권정치): 군부의 등장: 황제의 등극을 좌우:   동서의 야만인의 침입, 혼란: 군사비의 증가, 질병이 만연*정치적 변화두황제의 노력: Diocletianus 284-305, Constantinus 306-337   Augustinus: 혼합정부체제(원수정)를 마감, 절대권력체제로 전환.  제국의 통합유지를 위한 중앙집권적 권력국가(관료제적 통제강화)-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84-305) 제국개편  -강력한 황제권력을 유지: 관료제, 군제를 강화 공화정적인 요인을 일소, 통일적 군현재도를 개편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에서 전제적 군주정(Dominatum)으로 변질

  

◎그리스의 문화

 

문화창조의 원동력

 

ㄱ. 폴리스체제와 민족주의적 융합-엄연한 정치적 독립국가, 종교공동체이며 혈연적 전사공동체ㄴ. 진취성과 개방성 (그리스인의 지중해 진출과 정복사업) ㄷ.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ㄹ. 조화와 균형의 미덕(학문과 예술에 반영)

  

그리스 문화의 특징

도시국가의 자유민 중심의 문화( 다른 문명의 군주의 지배와는 무관) - 개인의 창의성 존중 (독창적인 개성을 중시하는  문화업적은 지속적으로 서양문명에 큰 영향)

(한계: 폴리스의 생활은 문화와 사상을 제약,  폴리스적 한계성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아테네/스파르타 (개방/패쇄)-마케도니아시대에 보다 세계적인 그리스문화로 발전 (헬레니즘)

 

인간이 만물의 척도, 우주의 중심(인문주의,) 인간중심주의/합리주의(계몽사상)/개인주의/자유주의/민주주의등 로 발전해 나갔다.-그리스인의 종교: 초월적인 신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한 신(인간과 공존)-신화의 시대에서 이성의시대로 전환 (B.C, 6세기이후)-인간중심주의: 합리주의 정신의 터전으로 발전  -대립과 투쟁이 아닌 균형과 조화  (그리스 예술문화양식: 미적개념 서양의 전통)-개인중심주의, 이성에 바탕을 준 계몽사상: 미신, 관습, 권위로부터 인간해방(인본사상)

 

그리스문명의 세계사적 의미와 교훈

 

1.  최고의 인간주의 역사와  공동체주의의 흥망의 역사: 비판점:군사적, 물리적 힘에 의한 끝없는 침략과 정복사업을 추진한점.  그리스 폴리스문화(공동체문화)는 외부와 내부의 적대투쟁관계에서 형성, 발전, 몰락.  침략과 정복의 민족역사는 또 다른 침략과 정복으로 멸망하는 실례

 

2. 폴리스체제의 교훈:  노예제도, 시민계급의 폐쇄적 특권의식, 빈부격차, 퇴폐타락의 향락문화:  폴리스체제를 유지, 강화한 반면, 약화와 유지불능 상태를 연출3. 그리스적 한계:  공동체의식의 쇠퇴와 민주정치의 폐단 (중우정치):도덕성과 질서파괴는 자멸한다는 교훈: 민중주의, 다수의 횡포, 무절제와 권력남용,소수계층에 대한 추방 

 

그리스-로마문화의 차이점

그리스-로마: 자유-질서, 주지주의-주의주의, 서양의 동방과 서방(헬레니즙의 2대기조). 그리스-폴리스적 한계(민족통일 실패)/로마-세계제국의 건설: 배타적 폐쇄적/호의적  개방적. 그리스 (유럽문명의 기본적 개념을 착안)/로마인의 정신; 제국창조의 원동력(국가질서)

 

◎로마제국의 세계사적 의미

 

“로마는 하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1. 유구한 역사발전 속에서 세계제국을 건설하고 장기간 지속시킴 2. 그리스문화를 다음세대 또한 여러 다른 세계에 전달시킴. 특히 지중해의 세계라는 역사단위를 창출하고 발전시킴. (지중해의 특유한 문화가 공유하는 세계라는 의미보다는 로마인의  역사적 과업에 해당되는 개념으로 해석됨.)  제국은 로마의 평화에 의해 유지된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세계였던 로마제국:  로마가 멸망한 이후 로마와 같은 통일된 세계로 다시 정치적 통합을 유래는 역사상 찾을 수 없다.

  

로마발전의 배경

 

1. 로마정신

로마인의 사고는 로마정신에 깃들어있다.  그리스인은 폴리스 개념(민족공동체내의 자유와 분립주의)에 집착한 반면, 로마인은 “세계는 오직 하나의 폴리스”라는 입장을 고수하고자 하였다. 즉 로마제국내의 각 민족의 조국들이 있었다. 따라서 로마정신은 출생과 인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심도시로서의 로마의 역할을 중시하였다. 거대한 영토를 하나의 폴리스로 만든 것이 바로 로마제국의 의미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경제, 하나의 행정만이 존재하며,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법률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리스인(Hellas)는 자신이외의 모든 이민족을 야만인 (babarlos)으로 취급하였다. 하지만 로마인은 비로마인과의 관계(특히 법률체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중시하였다. 즉   로마인은 그리스인과 다르게 배타적, 폐쇄적인 면을 금기시하여 로마의 울타리는 개방적이었다.

 

2. 로마의 외형적 발전요인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의미로 상징된다.

1. 도로망의 정비는 거대한 제국을 지배하는 최대의 비밀무기인 셈이다. 이는 초기부터 정치적 군사적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개인의 상업적 목적은 결코 아니다)

2. 도시의 정비는 라틴화된 로마도시의 건설을 뜻한다. (경기장, 신전, 목욕탕, 학교 및 공공시설, 하천, 교량 등). 로마인에게는 도시문명의 외향적 확대를 찬양하는 정신적 사고가 두드러진다.

3. 농업의 중요성(농민생활의 실체). 로마제국의 경제적 기초는 농업에 있었다. 평균적 도시의 주요산업도 농업 및 상공업이다. 당시 상공업을 통한 과학기술혁신보다는 농업의 중요성이 도시경제의 기본으로 자리잡고 있다. 로마인의 제국주의적 착취와 약탈, 즉 전쟁과 정복사업을 통한 노예제에 의존한 농업중심의 경제체제가 바로 로마제국의 원동력이었다. 즉 정복과 전쟁이 종료될 때 농민에게는 치명적 손상을 끼치면서 경제대국의 한계성을 경험하여야만 하였다. 결국 로마의 대토지소유제는 소작제를 취함으로써 농민의 불만과 고통은 증가되었고, 제국 말기에는 이미 봉건제적인 요인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로마문화의 특징

로마의 그리스 정복은 무력적, 정치적으로 이루어진 반면,   문화적으로 로마는 그리스에 정복을 당한셈이다. 그리스인은 로마인에게 학술과 예술분야의 스승이며, 로마인은 그리스문화의 충실한 모방자였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실천적, 실용적인 사고로 무장하여 현실적인 분야에서 대단히 독창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예: 조직적인 대단위 토목, 건축사업)

 

1. 로마공화정, 로마제정의 성립과 발전을 통해 정치와 문화의 통합에 의한 세계통치 즉 세계제국의 건설을 성사시킴. 따라서 로마 최대의 문화사적 업적을 달성하였다. 이는 진리탐구, 예술적 창조 보다는 현실문제 해결을 중시한 로마문화를 대변한다.

2. 그리스문화를 계승하여 서유럽에 전달함. 또한 기독교를 보급하여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유럽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침

3.  인간성(humanitas)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광범위하게 적용함. 그리스인은 보편적 인간사상을  창제하였다지만,  한계는 자신과 동포만을 포함시킴(그리스적)-로마인: 인종, 종교, 민족, 인습에 차등화정책을 인정하면서도, 공통적, 보편적 인간성을 인정. 평등, 인도주의, 박애주의(알렉산더대왕이후 뿌리내림). 이를 조직적으로  법제화한 것은 로마 인간성의 특징이다.

4. 로마법은 가장 뚜렷한 문화적 특징을 대변한다. 최대의 문화유산으로 로마인의 유구한 정치활동 및 체계를 상징하며 거대한 제국의 통치와 질서를 유지하는 골격이었다. 현제까지 영속한 공헌을 주목하라. (한국의 법질서도 로마법에 기인한다.) 로마인의 국가생성의 힘으로써 로마정신은 로마법에 고스라니 담겨있다. 로마법은 서구의 정치적인 생성의 초석이었다. 로마정신은 서양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정치적, 문화적 요인으로 제시하였다.

 

◎ 로마제국의 문화사적 역할


1. 초기 로마는 헬레니즘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그 정도는 미비하였다. 2. 로마제국이 헬레니즘세계( 그리스와 동양의 서반부)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고, 지속적이었다. 3. 로마의 평화시대는 문화를 보급하는데 큰 의미를 갖고 있으며,  로마인은 제국의 통합적 문화 이념에 익숙하였다.  4. 로마는 라틴화한 헬레니즘문명을 마호메트교에 전달되었다. 이후 이슬람세력은 그리스-로마의 지적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다시금 유럽문명의 성장과정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로마제국이 문화에 끼친 영향

 

1. 로마가 헬레니즘사상에 끼친 직접적인 영향

BC 2세기 그리스출신 역사학자인 Polybius는 로마의 대장군 小스키피오의 보호하에 포에니 전쟁사를 저술하였다. 그리스가 로마에 병합되자 다수의 그리스 지성인들은 점진적으로 로마화되었다. 그들은 로마의 정치적 현실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면서 그리스 문화를 로마에 전수시키는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였다.

풀타크 (A.D. 46-120)는 <고귀한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전기>를 통한 영웅을 비교하여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융화에 공헌하였다. 로마는 황금시대에 그리스어를 사용한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시대 이후 그리스의 예술, 사상, 철학적 전통은 점차 쇠퇴되었다.  

 

2. 그리스와 오리엔트가 로마에 끼친 영향

ㄱ. 헬레니즘 예술과 문학

로마인은 대체적으로 수송, 농업기술, 교양 등 우수한 그리스의 문화를 인정하였다. 포에니 전쟁이후 그리스어를 로마지성인이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리스 건축 및 조각 등 예술을 모방하였다. 로마인들은 로마 신과 그리스 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이는 로마인의 기원을 트로이에 둔 이유로 호머의 신화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에서 잘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로마의 철학적 토대는 물론 그리스 철학에 기인한다. 종합적으로 로마문화는 그리스문화에 기생체에 불과하며 독창성이 결여되고 새로운 과학의 발견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로마인의 실용전신은 무척 우수하여 도로, 조직적인 법전, 유능한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다. 로마는 헬레니즘문화에 깊게 융화되므로서 야성에서 지성으로 강건에서 유약으로 우둔에서 현명으로 전환하였다.

 

ㄴ. 반헬레니즘적인 종교와 미신

3세기이후 서로마제국에 대한 그리스의 영향은 급격히 감퇴되었다. 당시 로마의 지성인은 무사안일주의에 빠지게 되고 로마문화는 크게 퇴폐적 성향으로 나타났다. 특히 군벌독재에 따라 문화적 가치는 크게 격하되었다. 군인황제의 시대 로마제국은 반헬레니즘적인 종교와 미신이 확고한 지지기반을 형성해 나갔다. (예: 알렉산더 대왕시대에 수입된 것과 유사한 종교인 페르시아의 미트라스교(조로아스터교의 토대)와 이교도의 미신 따위가 특히 군대계층에 널리 보급되었다.) 당시 유태교 및 기독교의 교리가 급속히 로마에 퍼져나갔다. 이후 콘스탄틴 황제는 군대의 대다수가 신봉한 기독교를 공인하는 고도의 정치적 수완을 보였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자리 잡는 과정에서 그리스적인 요인을 흡수하고 유태적인 요인과 융합된 점을 주목하여야한다.


3. 정치와 문화의 융합

로마의 정치와 문화는 그리스적인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특히 알렉산더 대왕과 로마인은 정복자로 그리스문화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였다. 특히 정복자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은 그리스의 문화적 요인을 더욱 발전시켜나갔다. 로마제국은 보다 세계화된 Universality을 추구하고 있다. 로마는 군대에 의한 강압적 정복사업을 통해 서유럽의 라인강-도나우강 지역을 개화시키는 문화의 보급자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로마인은 문명의 질보다 양을 보다 중시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4. 헬레니즘의 매개자로써 이슬람교도

7세기 예언자 마호메트의 후예들은 시리아, 이집트 및 북 아프리카지역과 8세기에는 스페인지역을 정복하면서 로마제국의 문명과 접하게 되었다. 특히 아랍의 지성인들은 그리스 문화에 심취하게 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등을 응용적 분석적인 방법으로 연구하였다. 대수(Algebra), Alcohol, Alchemy(연금술), Alkali 등 응용과학의 분야를 살펴보면 아랍인들의 유산은 그리스 것에 기인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의 자연과학을 응용하면서 천문학, 점성술이 발달되었다. 따라서 아랍인은 창조적 이라기 보다 응용적이며, 해설적이다. 11세기에 이르러 서유럽은 이러한 아랍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13세기 스콜라 철학의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바탕을 둔 이슬람철학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서양고대사 개관 2

 

◎그리스문명의 성립과 발전


그리스 문명은 서구문명의 근원적 발전적 토대이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커다란 영향을 받고, 특히 예술, 문학, 자연과학, 철학, 역사학 등의 학문적 기초를 제공하엿다. (탈레스) 철학과 과학은 동시에 발생하였다.

 

*문자는 이집트에서 B.C. 4000년 경 처음으로 나타났고 이후 바빌론에서도 발생하였다. 초기에 문자는 그림으로 유형화된 표의문자(오늘날 중국문자)로 사용되었다. 이는 수천년 후 알파베트 문자의 초석이 되었다.

 

1. 이집트- 메소포타미아문명 개요

*양대문명은 유목민의 정착에 의한 농업문명.  이후 해상을 통한 상업활동, 철에 대한 약탈과 독점 등이 이루어졌다. 나일, 유프라테스, 티그리스강 유역에 농경을 통한 정주가 시작되고 신과 같은 동격의 왕이 군림하게 되었다.

 

에집트의 종교는 다신교이며, 최고의 신은 왕과 친교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사제계급과 귀족계급이 상류층이다. 죽은자의 영혼은 육신으로 되 돌아온다는 사상를 굳게 믿고 있다. 따라서 시체를 미이라로 보존한다. 기원전 4000-3000초 셈족에 의한 정복의 역사. BC 1800년 팔레스타인 시리아지역으로  에집트문명이 전파되었다.

 

바빌론은 호전적 민족으로 설형문자를 사용하고 셈족에 의해 계승되었다. 종교는 풍년을 기원하는 사상에 기인하며 땅과 태양(여,남)등의 다신교 형태로 나타났다. BC 2100년 경 함무라비법전은 왕이 마르덕(신)에게서 받은 것으로 고대종교는 도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바빌로니아는 이집트와는 다른 내세보다는 현세의 행복에 초점을 두어 점성술, 마술, 점술은 물론 과학이 발달되었다. (1일=24시간, 원=360도 분할, 일식과 월식의 주기성을 발견 함) 후에 탈레스의 일식예언에 근거를 제공( BC. 585년)

 

2. 크레타 (미노아)문명 개요

서양최초의 문명인 미노아문명은  BC 2500년부터 1400년까지 11세기동안 독자적 예술을 만개하였다. 에게문명의 발견은 19세기 고고학의 성과로 혁명적인 결과이다.

 

Schliessmann(1822-1890)

슐리히만이전 그리스 고전문명은 완전히 베일에 가려졌다. 그는 청소년기 호메로스에 심취하여 트로이전쟁의 실체파악에 관심을 두었다. 그의 트로이 유작지 발굴로 B.C 14세기 그리스인의 크레타침공이 시적허구가 아님이 증명되었다. 1873년 트로이에 원정한 그리스인의 발자취를 추적하여 금은보화가 가득한 유적지 발굴한 이래 계속적인 미케네문명을 추적하고 펠로포네수스 반도의 유적지를 탐사함. 미노아문명은 BC. 14세기 그리스인의 침입으로 멸망함.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크레타의 유물은 에집트에 영향을 받았음이 입증됨.  크레타의 종교는 동물의 여신을 숭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문자 판독에는 다양한 이론이 많다. 성은 성벽이 없어 해상방위의 문제점이 제기된다.

 

이반스 경

크노소스 궁전의 유적탐사를 통해 왕국의 규모(부와 권력)를 짐작하였다. B.C. 1500-900년까지 미노아문명의 전통은 그리스에 남아 있었다고 판단됨. 궁전은 지진에 의한 3차례 파괴되고 재차 중건되었다. 미노아 문명은 BC. 1500년 최고조에 달함. 크노소스(Knosos) 궁전는 미노아 문명의 중심지로 파악됨. 고대 그리스의 전통은 화려하였다. 이는 오리엔트 선진문명의 세례를 받은 해상문명이었다. 초기에는 오리엔트와 유사한 청동기 문명의 증거가 나타난다. 인종 문화면에서 아시아적 특징이 두드러진다. 예술, 특히 미술은 이집트적인 독창성이 강조되었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사실성과 역동성은 해상문화와 상업적 감각을 잘 표현하고 있다.

 

벤트리스

영국건축가 1952년 미노아문명 및 미케네의 최대유적지 크노소스궁전의 선상문자 B의 암호해독 (미케네문명 연구에 박차). 그리스어의 초기형태는 상형문자와 표음문자의 중간형태였음을 입증하게 되었다.

 

3. 미케네문명 개요

 

미노아문명의 쇠퇴는 BC 1400년 경부터.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인(도리아계통)이  크노소스 궁전을 점령한 이후 미노아 문명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특징

미케네문명은 미노아문명울 계승하여 독창적 그리스문화의 성격을 완성하였다. 경고한 거석의 성벽문화는 군주권을 상징하며 벽화와 도기는 크레타문명보다 뒤지나 문화의 양상은 상무적이고 역동적이다. 왕의 무덤, 요새, 성곽을 통해 미케네 문명은 크레타에 영향을 받았고 개방보다는 폐쇄적인 특징이 나타난다. 그들은 이방인의 침입에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호모의 서사시를 통해 알려졌다. 그리스어 사용은 점토판의 선상 B문자의 해독으로 오리엔트문명의 세례를 확인케 함.

 

미케네인은 그리스어를 최초로 사용한 주민으로 확인됨. 추측컨대 피라밋 구조의 사회였을 가능성이 있고 공납제(동의 공납)가 쇠퇴한 암흑시대가 도래하였다. BC 1100경부터 8세기까지 내란과 대외전쟁으로 그리스문화의 쇠퇴기를 맞는다. 이시기는 철이 동보다 더 중요하게 사용된 철기시대였다. 당시 지중해의 재해권은 미케네인과 페니키아인과 양분하였던 점에 주목하라.

 

미케네인은 말기 농경정착을 벗어나 지중해의 도서로 이탈리아의 연안으로 해상활동을 시작하고 약탈과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이집트, 페니키아해안, 시칠리아, 남부이탈리아등과 교역활동) 당시 국왕은 군사권, 사법권을 장악하였고 성직자는 제사장 역할을 담당함. 자유민은 농민 목축민, 수공업자 등이며 노예는 전쟁포로 하층계급이었다.

 

과연 미케네인이 최초의 희랍인인가?  BC. 2000년 경부터 남하하여 3차례에 걸친 침입으로 그리스에 정착함. 그리스인의 해상활동을 통한 결과는 우선 문자의 습득에 있다. B.C 1000까지 문자 사용이 미확인되었다. 페니키아인(시리아인과 마찬가지)은 이집트와 바빌론에 영향 받았고 해상무역의 주도권(지중해의 도시국가이전)을 장악하였다. BC 969-936 투르의 그리스인은 알파벳문자를 사용함.(이집트와 페니키아 문자에서 발달) 그리스 문자는 페니키아문자를 개발한 것으로 판명됨.

 
◎ 그리스문명의 성립


1.그리스인의 이주

미케네시대의 도리아인은 인도 게르만의 일파로 BC 1200-900년 미케네문명을 파괴하고 이오니아인과 대치함. 양대세력의 대치로 지중해 교역은 중단되고 문화의 쇠퇴기(암흑시대)를 맞는다. 그러나 그리스인은 상업을 통해 오리엔트문화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감. (예; 페니키아인으로부터 알파벳 전수받음)

 

2. 폴리스의 성립 (B.C.8-6세기) 

BC. 800년 경 그리스에는 지역마다 소규모의 정치조직이 형성되면서 그리스적인 국가, 사회, 종교의 기본적인 윤곽이 나타났다. 집주의 형성(Synoikismos)은 군사적 공동체 역할을 통해 외적에 침입에 공동대처하는 목적에 기인함. 따라서 집주에 의한 그리스적 정치조직은 그리스 전역으로 확대되고 200여개의 도시국가(Polis)가 생성됨.

 

그리스의 지리적 조건: 험준한 산악과 해안선의 발달하여 영토국가보다는 소규모의 정치공동체가 용이함. 자연적조건: 산악보다 바다로의 진출이 용이하여 해상국가의 면모가 강화됨. 폴리스는 골짜기마다 작은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농경을 통한 정착문화가 형성되었고 식민지 확보를 위한 해상활동이 강화됨.

 

그리스의 사회

폴리스의 사회구성: 자유민, 외국거류민, 노예로 구성. 시민권은 성년의 남녀 자유민에게 부여 (부녀자 제외). 그리스의 대외팽창의 결과로 외국 거류민이 증가(병역에 종사). 피정복지의 노예제가 정착되었지만 인권, 재산권 모두 박탈됨. 사회제도와 계층은 공동체마다 다양하게 나타남. 일반적으로 노예제 도입, 자영농, 자유민이 등장함. 이오니아인의 정복을 통한 전쟁포로로 노예제가 정착됨. 인구증가, 생산력증대, 토지부족현상으로 폴리스 체제가 강화됨.

 

그리스 초기: 원시사회이며 혈연중심의 씨족사회는 다수씨족이 모여 대씨족(형제단)사회를 구성. 후기: 부족사회이며 인구의 증가와 농축기술이 발달됨. 토지의 사유화는 대토지 소유제로 변질됨. 부족계급의 구성: 사회적 양상이 복잡하여 부족간의 교류가 활발해 짐.

 

3. 폴리스의 구조 

도시중심 및 농촌과의 결합이 필수적.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폴리스의 당위적 목표는 “농업생산을 통한 자급자족”이라 주장함. 인구 1만의 독립된 정치기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성벽의 중심지와 성외곽의 농경지로 구분됨. 폴리스의 성내 중심부의 언덕은 아크로폴리스(Akorpolis)로 수호신을 모시는 신전. 그 아래에는 아고라 (Agora: 광장)로 시민생활의 중심무대이며 정치적, 종교적 행사 및 물건교환의 시장 역할을 함.

 

폴리스의 구성원: 성년시민들이 민회를 구성하여 정치적 권리를 행사함. 부녀자, 외국인, 노예는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박탈됨. Hellenes는 그리스인(Hellas: 그리스 땅)이며 Barbaros(이웃)와 철저히 구별됨. 그리스인은 여럿의 폴리스로 분열되었으나 공통의 언어와 문화유산을 통해 공동체의 민족유대의식이 강화되었고 올림픽경기나 동맹을 통해 잘 나타남. 새로운 해외 폴리스의 건설: 시칠리아, 소아시아, 흑해연안, 에게 일대로 팽창됨. 식민도시는 오리엔트문화의 영향을 받아 본토보다 더 자유로운 활동이 전개됨. 따라서 오리엔트지역과의 상업 및 문화교류가 활발해짐. BC. 8세기 중엽이후 귀족과 성장한 시민계급간의 갈등대립에서 시민세력은 경제적, 조직력을 갖고 해외로 진출함.

 

4. 아테네와 스파르타

ㄱ. 아테네

이오니아계 그리스인의 폴리스. 초기: 자연적으로 비옥하지 못함, 원시적인 왕정의 형태. 폴리스의 성립이후 토지소유의 귀족에 의한 귀족회의가 구성됨. Areopagos는 최고의 사법기관이며 (국가를 대표하는 민회는 의결 및 입법기관) 임기 1년의 9명의 집정관도 선출한다. (귀족만으로 구성) BC 7세기 이후 해상무역을 통해 눈부신 성장을 하여 황금기를 맞는다. 이오니아인은 BC 7세기경 리디아로부터 화폐가 도입되면서 경제가 활성화됨.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함. 모국과 식민지역간의 교역은 아테네의 은화가 국제적 통화로 자리잡음. 금은광산업을 통한 은의 축적은 화폐제도의 정착에 크게 기여함. 귀족 외에 상공인(자유인)의 정치, 사회적 발언권이 점진적으로 크게 향상됨.

 

적극적 식민 활동의 전개와 성패는 신분상승 및 몰락(노예화)을 유발함. 귀족에 대한 시민의 반항은 커져감. 농촌의 위기와 군대의 전술 변화로 BC 6세기이후 폴리스는 중무장보병의 밀집대형을 새로운 전술로 채택함. 애국심은 새로운 의식의 자각. (귀족정에서 참주정으로 변화) 즉 중소농민=중무장보병=능동적 시민의식이 강화됨. 폴리스의 정체: 군주정에서 귀족정, 폭군참주정, 민주정의 순서로 발전됨. 국왕은 이집트와 바빌론과 달리 절대권력자가 아닌 원로원의 자문을 중시함 (관례를 존중).  당시 폭군은 상속받지 않은 통치자를 의미함.

  

Drakon, Solon 집정관의 입법개혁: BC 621, 594-공동체의 분열에 대비함. (내란)  재산에 따른 시민을 4계급으로 등분하여 권리와 의무를 구분함. 부유한 시민층은 귀족과 동등한 지위를 보장. 금권정치(Tomocarcy) 실시이후 내분은 극심하여 솔론의 개혁은 실패함.

 

BC 561년 Peisistratos 의 참주정치(Tyranny):  대중의 지지로 귀족의 재산몰수와 토지분배가 성사됨. '비합법적인 권력 장악' 이었지만 아테네의 정치 및 문화안정에 크게 이바지함.

  

BC 508년 Cleithenes (클레이테네스: 반참주운동의 선봉장)는 아테네 민주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여 참주정치는 종말을 고함. (계층간의 분열이 원인) 평민과 연계하여 귀족의 권력기반을 약화시키고 민주혁명적인 개혁을 단행함. 행정구역 10개로 개편(10부족제), 500인 협의회를 창설하고 종래의 공동체적 혈연적 규제를 해체함. 170여개의 demos(행정구)가 성립됨. Democracy (민중: 시민에 의한 지배): 502년의 민주개혁. 당시 노예제는 민주정의 필수요인. 능동적인 정치참여를 제약하는 제도.

  

페리클레스의 전성시대: 정치적, 경제적, 정신문화적 전성기, 황금기. BC 492년에 귀족회의는 정치적 권한 상실.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의 실시(민회는 1년에 40회 집회: 전쟁의 포고, 조약의 비준, 세출 등 국정을 논의). 시민적 애국주의가 발전하여 동질사회의 성격이 강화됨. 그러나 부녀자, 노예, 비자유인은 정치참여를 배제됨. 중우정치의 폐단도 노출: 서민대중을 통한 직접정치의 한계. 펠리클레스 시민권법: 수당제의 재원은 제국주의와 구조적 결합됨. 비 그리스계 주민들(Barboroi: 스키타이인, 트라키아인, 프리기아인). 포로, 유괴, 매매가 성행함. 노예의 수는 전인구의 3분의 1로 상품화됨. -500명의 평의회(Boule: 행정을 감독하는 민회의 대행기관). 모든 관직은 추첨하여 결정함.

 

ㄴ. 스파르타

BC 8세기 메네시아 평원을 정복한 도리아인의 폴리스 (발칸남부에 침입). 선주민 아케아인을 정벌하고 이웃도시까지 세력 확장함. 7세기 초 스파르타시민단의 체제변화: 리쿠르코스(Lykurgos)법은 정치적 목적으로 지배를 강화함. 스파르타인 상호간의 토지소유의 평등을 유지함. *군사적 귀족정치: 정복민과 도리아인간의 불평등원칙. 지배계급에게는 엄격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실시. 피정복민을 다루기 위한 국가정책은 쇄국주의와 보수주의. 후에 스파르타 폴리스는 보다 민주화되지만 폐쇄적인 면은 강화됨.

 

 스파르타체제의 핵심요인인 homoioi (호모이오이:동등자들): 민회 구성원의 동등권, 균등한 경제권 토지의 할당을 보장함. agoge( 아고게:훈련제도): 직업적 전사를 위한 훈련제도. 출생 시 적격심사이후 60평생의 군사적, 사회적 교육을 12-20세에 받음. 명령복종의 예비 군사훈련 (20-30세에 받음). 병영생활은 30세 이상에 해당됨. 15인 이상의 공동식사제(시민자격요건): 동등의식의 강화목적. 헤일로타이제도는 아테네의 노예제와 유사하지만 스파르타체제의 필수적 요소이다. (아테네의 노예는 사유재산: 헤일로타이는 시민에게 할당된 국가의 재산) 노예와 자유민 사이의 집단: 2명의 국왕(군 최고사령관),  보좌기구인 장로회의(Gerusia): 60세 이상의 장로로 구성된 원로원의 기능. 민회는 입법기관으로 30세 이상의 남자로 구성됨. 감독관은 5인의 민회에서 선출되고 정사를 담당함.

 

◎ 그리스 세계의 발전

  

1. 페르시아 전쟁(BC 492-479)과 아테네의 발전

( 국제적질서의 개편무대) BC 6세기 중엽: 그리스인의 대외팽창기에 페르시아에 의한 오리엔트세계의 통일로 지중해의 페니키아세력을 제압함. 페르샤왕 다리우스는 해상권 장악 이후 소아시아, 이오니아 식민지(밀레토스)에 압력을 행사함.(세금을 요구) 이는 밀레토스 반란 원인, 그러나 실패함. 아테네의 후원하에 소아시아의 그리스계가 결속하자다리우스는 아테네를 응징코자 원정군 파견함. 페르시아 전쟁의 발발-1차 원정(492) 폭풍우로 실패, 2차 원정(490) 에게해를 넘어 마라톤에 상륙후 아테네군에 패배함. 3차 원정(480-479)은 다리우스의 후계자 Xerxes(크세르크세스)가 감행함.

 

결과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결속으로 스파르타군 격파하여 그리스 중부지역을 석권함. 그리스연합군은 스파르타의 지휘하에 페르시아 육해군을 패퇴시킴. 그리스인의 결속: 외국의 지배에서 해방 후에 자유와 번영의 기반을 조성함. 전쟁으로 농민출신의 중방보병과 하층민의 수병 역할로 신분적 상승되고 시민대중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화됨.


2. 아테네의 황금기

3대 특징-제국주의, 노예제, 민주주의.

 

당시 노예제는 보편적 현상. 민주정은 급진화됨. 해군력의 성장을 통한 하층시민의 군사화는 제국주의적 경향이 지배적. 페르시아 전쟁 후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해군동맹(Delos동맹)체결함. 참가국에 할당량이 정해짐: 군함, 자금, 인원 등. 아테네의 압력으로 동맹은 델로스 섬에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 본부를 옮김. 이후 아테네의 독주는 동맹국의 반감을 삼. 아테네의 경제적 번영으로 문화와 예술의 발전(도자기, 공예품에서 확인).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페리클레스의 전성시대가 열림.

 

3. 펠로폰네소스전쟁( BC 451-405)

결과는 그리스 폴리스체제의 종말원인을 제공함, 전쟁 원인: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그리스세계를 재패하기 위한 쟁탈전. 스파르타의 승리에 따른 아테네의 해체. 델로스 동맹이후 아테네의 번영은 다른 도시국가와 반목케한 직접적 요인. 아테네의 다른 폴리스에 대한 강압적, 제국주의적인 면이 반영됨. 스파르타는 인근지역의 직접지배를 통해 시민단의 군사화를 통한 경제적 기초가 마련된 반면 아테네는 해외의 다른 폴리스에 대한 간접지배와 착취를 통한 시민단을 군사력으로 이용함.

 

폴리스내부에서 진행된 민주화의 수준과 범위의 차이점: 아테네는 정치적 법적 평등, 스파르타는 경제적 평준화에 성공함.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델로스 동맹의 반목이 전쟁의 직접적 원인. 코린트(펠로폰네소스 소속: 아테네의 경제침투에 위기감을 느김). 459년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교전상태: 페리클레스에 의한 화해. 431년 스파르타의 전쟁 재개: 아테네의 해군에 의한 스파르타 포위에 성공하지만 피해는 극심. 아테네 인구의 3분의 1이 페스트에 감염되고 병사, 펠리클레스도 희생. 이는 아테네의 몰락원인이 됨. 405년 아테네의 패배와 함락, 댈로스동맹의 해체, 스파르타의 패권이 확립됨.

 

4. 폴리스의 쇠퇴와 종말

스파르타의 불안정: 그리스 주도권은 Thebes로 이행되면서 무정부 상태에 빠짐. 스파르타에 의한 각 도시국가 통제: 감독관파견, 군대진주. 전쟁시 페르시아는 스파르타를 지원, 후에 테베 Thebes (반스파르타전선:코린트동맹)를 지원함. 371년 페르시아의 반격으로 스파르타는 패배함. 테베는 아테네, 스파르타에 이어 그리스를 재패하지만 국력은 쇠퇴되고 마케도니아 전제군주에 패배함. ( BC. 338년) 

 

그리스 도시국가의 몰락원인

ㄱ. 정치적 원인  -그리스 도시국가는 폴리스간의 투쟁대립의 연속 정치체계는 붕괴-그리스 문화권 밖의 마케도니아세력에 의해 몰락-그리스 세계는 분립주의와 패권주의: 폴리스의 자치와 그리스의 통일의 2대원리에서 힘을 소모

 

ㄴ. 그리스몰락의 경제적 원인(정복과 제국주의적인 요인의 감소)-자급자족은 불가: 지역의 80%가 산악: 식량은 수입(소아시아, 이집트등으로부터): 곡물, 광물, 노예-수출품: 과실:포도, 올리브  수공업제품: 모직물, 도자기, 금속세공품, 유리제조-수공업의 발달: 해상 상업활동의 활기. 금융업, 은행(예금과 어음교환)이 발달-경제적활동은 그리스 문화에 결정적 역할-그리스 경제는 노예제도에 기초(전쟁포로는 모든 경제활동에 주역)-B.C 4세기 이후 폴리스간의 내분으로 노예제도는 쇠퇴

 

5. 그리스의 문화

고대세계의 통일사상은 정치적, 군사적 통일이념이 아니라, 항상 문화적 영역내에서 가능하였다. 헬레니즘은 실질적으로 기독교문화의 정신적인 길라잡이 역할을 함. 유럽문명의 개념들은 처음으로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착안된 점을 주목하라. 예술, 특히 미술, 건축, 도예분야, 문학(희극과 비극의 드라마), 역사서술, 이오니아인들에 의한 초기 서양 철학 등. 그리스 문화창조의 원동력인 폴리스체제와 민족주의적 융합: 엄연한 정치적 독립국가, 종교공동체이며 혈연적 전사공동체-진취성과 개방성-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조화와 균형의 덕(예술에 반영)

  

그리스 문화의 특징

도시국가의 자유민 중심의 문화(다른 문명의 군주의 지배와는 무관). 창의성존중(독창적인 개성의 발휘의 문화업적은 지속적으로 서양문명에 큰 영향). 한계: 폴리스의 생활은 문화와 사상을 제약하여 폴리스적 한계성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마케도니아시대에 보다 세계적인 그리스문화로 발전함. (헬레니즘) 인간이 만물의 척도, 우주의 중심(인문주의를 중시함). 그리스인의 종교: 초월적인 신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한 신(인간과 공존). 신화의 시대에서 이성의시대로 전환함 (BC, 6세기이후). 인간중심주의: 합리주의 정신의 터전으로 발전됨. ( 대립과 투쟁이 아닌 균형과 조화).  그리스 예술문화양식은 바로 서양문명의 미적 전통이다. 개인중심주의, 이성에 바탕을 준 계몽사상을 보라. 미신, 관습, 권위로부터 인간해방을 모색한 인본사상이 그 중심이다.

 
신화와 종교 


그리스 신화

11-12세기 이후 그리스 반도에 거주한 이오니아, 도리아인등과 그 자손이 소유한 신화.

특징 

미노아문명의 영향을 받아 모계적 색조가 강함 (여신, 모신의 숭배). 신화는 종교와의 융합을 뜻함. 예: 아테네 여신-지리적인 영향으로 인한 이민족의 신화를 수용(셈, 힛타이드인등): 아프로디테, 아도니스신화-종합적인 국민적 신화체계를 이룸(예: 올림프스신)-종류: 우주창성신화(카오스-에로스의 원리), 신통신화(다신교적 영향)   인류창생신화, 홍수신화(제우스신등)

  

그리스종교

모든 문화예술의 상징적인 면을 포괄적으로 수용ㅎ마. 일반적 의미의 종교가 아닌 인간적인 것을 중시함. 그리스 비극은 종교와 깊은 연관을 맺음.(문학과 연극)-초기 그리스 종교: 자연숭배의 다신교(지중해 고대문명의 영향) 후에 점차적으로 신의 계보가 형성되면서 Olympus의 12신으로 확정됨 (호메로스의 서사시 Illias, Odysseia(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 Hesiodos의 신통기에 나타남.

  

그리스문명의 첫 열매 호머의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

 

호머는 개인이 아닌 당시의 시인들이란 견해도 있다. 눈먼 시인 또는 다수의 시인으로 해석된다. 작품은 200년간에 걸쳐 완성됐을 가능성이 크다.( BC 750-550-서사시의 저자 연대 소재는 논란 ). 현존하는 호머의 시는 페이시스트라투스가 아테네 및 그리스전역에 확산시켜 사용함. (통치기간: B.C. 560-527). 미케네인의 트로이전쟁 에피소드: 일리아스-아킬레스와 트로이왕가의 싸움: 영웅의 분노와 사랑, 헥토르의 죽음을 묘사

  

오딧세이아-희랍전사 오딧세이아의 공상적 무용담, 모험(10년간 트로이 함락지를 유랑하다 고향의 아내 곁으로 돌아간 이야기)  무대: 올림프스 산의 신을 배경으로 한 신의 이야기: 신= 초인적 도덕적 인간상( 종교적인 면 약함)  -종교를 대표하는 올림프스 신에 대한 주제가 당시에 통용된 것은 아님. 등장인물: 포세이돈, 제우스: 신과 인간의 반반요소를 접목

 

호머의 종교는 일반적 의미의 종교가 아닌 인간적인 것. 그에게서 신은 귀족계급의 신이다. 농부를 위한 신은 아니다. 상류사회의 합리적 인간상을 그림.


그리스 철학과 정치사상 

 

BC 6 세기경의 이오니아인의 문화: 철학, 과학, 수학, 역사학 등이 생성되는 시기. 소아시아의 서안지역 이오니아 식민지에 밀레토스학파가 성립됨/ 자연철학적 바탕). 오리엔트의 문물을 전수받음. 그리스 정치사상에 영향을 끼침. 신화적, 시정적인 면에서 결정적으로 탈피한 철학자의 노력의 결정체. Thales: 신화적인 세계관탈피, 우주만물의 근본원리를 과학화에 시도.  만물의 근원은 물 Anaximandros: 아낙시만드로스: 원소Herakleitos 헤라클레이토스  불.Empedokles 엠페도클레스 4원소: 지.수.화.풍Demokritos 원소 및 원자의 기계적 결합 .Pytagoras 수와 수를 통한  조화

  

Sophist: BC. 5세기 중엽 아테네 민주정치의 번성기에 성행. 새로운 교양인이 요청됨. 정치, 사회적인 처세술: 수사학, 변론, 웅변술등이 성행함. 프로타고라스 (BC 481-411) : 주관적 절대성, 단순한 회의론자:  인간은 만물의 척도.  Hippias는 상대주의자

 

관념론의 발전 

Socrates(470-399)

회의론적 상대주의의 극복함(대화법). 인간의 독자적 절대가치를 기준으로 절대적 진리를 인식함. 도덕적 선의 개념을 파악함: 지덕합일설을 주장하여 인간과 우주의 원리를 밝힘. 개인과 도덕의 각성을 강조하여 정치와 윤리에 큰 영향을 미침. 

  

Platon(427-347)

아카데미아를 창설함. 참다운 실제는관념(idea), 현상은 관념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관념론을 수립함. 정치사상의 확립은 플라톤의 노력의 성과. 펠로폰네수스전쟁과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목격.  아테네정치와 도덕의 타락을 경고함. Republic 정의로운 국가란? 인습과 전통이나, 권력의 논리로 성립될 수 없다. 보편타당한 개인의 도덕적 토대위에서만 존제한다고 역설.  중우정치의 폐단을 지적, 철학자에 의한 도덕정치를 강조함.

 

Aristoteles(384-322)

알렉산더대왕의 스승. 이데아는 개개의 사물에 존재함. 경험주의의 창시자-논리학, 형이상학, 예술론, 정치학, 윤리학, 자연과학의 철학적 체계를 수립함. 만학의 아버지-개인의 올바른 삶은 개인의 정치적 공동체의 일원으로 행동할 때만 성사된다는 판단. 법률에 의한 통치를 강조: 철저한 준법정신만이 혁명과 변란을 방지한다고 역설함. *Anaxagoras: 자연철학, 자연의 탐구: 천문학Hippokrates: 의학*미술가는 과학자( 해부학적 지식, 기하학, 물리학 등 응용)

 

역사학

Herodotos(484-425): 페르시아 전쟁사(사료비판의 영역을 개발)-Thucydides(460-400):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인과관계)-Xenophon 그리스사, 소크라테스의 변명

 

그리스문학

신화와 결부된 서사시가 시초. Homer: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그리스인의 생활과 전설을 묘사: 유럽문학에 시초). 헤이오도스의 <신통기>는  올림프스 신의 계보를 정리. <노동의 나날>을 통해 노동의 신성함과 귀족의 부정을 고발함. Sappho는 여류시인으로 인간의 내면세계의 서사시(연애고백)을 그림. 호메로스의 서사문학는 종교,윤리적 철학적 교훈시가 성행 (비극, 희극시인)-펠로폰네수스전쟁이후-미카도니아시대-헬레니즘시대는 산문의 전성시대: 소크라테스-플라톤시대: 수사학과 시학 등 문학이론 및 역사학이 발전 

  

그리스 연극

 

페르시아 전쟁 후 아테네의 민중적 기반의 연극이 성행함. 연극의 기원: 534년 페이시스트라투스: 디오니소스 제전을 위한 연극제의 입상자들은 찬양, 노래와 춤, 인물에 대한 이야기 등을 묘사함. 酒신: 포도와 샘물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를 찬양함. 3대 비극시인인 Aischylos(아이스킬로스)는 기원전 5세기 말 합창대를  배경으로 합창대장외 2명의 배우를 등장시켜 그 역할을 강조하였다는 설. Sophokles <안티고네>에서 호언장당하는 자는 천벌을 받으리라! Euripides 전설속의 인간과 신의 모습을 연극을 통해 형상화시킴.

 

주제와 연출방식 및 목적은 종교적성격: 반사실주의적, 상징적인 면을 강조.  예; 높은 구두신고, 가면 쓰고 장업시 낭송, 무용가을 곁들인 노래와 춤. 비극은 형식적이며, 종교제식적 (연극과 서사시는 발전).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에 관한 정의:“동정과 공포를 통한 카타르시스”*희극시인-Aristophanes 기사, 구름, 벌의 연극작품-희극도 종교적 축제에서 발생: 관객의 감성자극하는 해설형태의 연극

  

그리스 미술/ 건축과 조각

진선미의 균형과 조화의 사상을 추구함. 전체적으로 중용과 고요의 안정감, 즉 지성과 감성이 적절히 융합됨. 주제: 신화 및 종교 또는 시민의 일상생활. 폴리스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존경이 어우러짐. 전성기는 기원전 5세기 아테네 황금시대. 6세기 이오니아 밀레토스지역의 석제건축양식이 페르시아전쟁 이후 아테네로 중심지 이동.

 

파르테논신전: 대리석이용, 열주에 꾸며진 장식. Doria 도리아식: 남성적 장중하고, 실용적. 가장 오래되고 단순함. 기둥받침과 머리가 없음, 파르테논신전의 원형는 아테네 아클로폴리스 언덕에 있는 아테네의 여신의 신전. 파아디스의 지휘하에 신전 안팎의 조각품을 장식하여 그리스 조각건축의 정수로 평가됨. Ionia 이오니아식: 여성적, 우아한 장식미: 소용돌이 머리의 기둥양식으로 날씬함. 에레크테리온 신전. Corinth 코린트식; 화려함. 아테네에서 채택되지 않음 후에 로마인이 즐겨 사용함. 이오니아식의 연장(화사, 복잡함). 로마의 판테온신전

  

조각건축의 재료: 대리석, 청동 등. 조각의 기본특성은 이상주의로 미의 영원함을 상징함. 여인상등 신상이나 경기의 승리자의 상에서 균형과 조화의 인간의 육체가 소재로 채택됨. 나체의 사실주의적 아름다움을 찬양함. 조각의 주제는 제우신 등 존엄한 신에서 아프로디테, 에로스 등 청춘미의 신으로 옮겨감. 신적인 것에서 인간적인 주제로 이동( 에토시적에서 파토시적인 것으로 이동). 인체묘사에 최대한 관심을 둠. 해부학적지식과 원근법, 명암법을 이용함(물리학적 이론을 활용). 조각가:  Myron의 원반던지기. Phiadis(피아디스)의 제우스상. 회화: 현존하는 유물은 거의 없고, 다만 병, 항아리, 접시에 그린 것으로 추측.  프레스코화, 초상화가 성행했다는 기록이 전해짐.

  

◎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


헬레니즘이란?

헬레니즘이란 그리스적인 것 (공동체와 도시적 제도와 문화)이 오리엔트세계로 이식되고 보급되며  오리엔트문화와  융합되는 현상 *드로이젠 `1830“-민족적 융합(그리스와 오리엔트)으로 처음사용-구조적으로 지배종속관계(정치. 사회적). 도시와 토착농촌과의 구조적 결합-이원적 구조: 그리스적 도시의 건설: 그리스 지배층과 정복지 상층지배층의 공통언어: 그리스어를 통한 문화적 국제주의의 확산. 피지배층은 토착문화에 강하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적 융합을 시도( 희랍문화의 사도를 자청): 종교적 편견을 존중: 희랍신과 정복민의 신들과 동격인 대우. 정신적인 우월성을 믿음*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복민이 노예화를 정당화. 반면 알렉산더는 유화책(혼인, 결혼정책: 정복지의 두 공주와 결혼). 다른 그리스 귀족들에게 모범-절대지배 복종관계는 무의미(세계주의적 견해): 스토아학파의 영향

 

1. 알렉산더 대왕의 업적과 제국의 분열

(로마제국 건설의 원동력 및 토대)-그리스 도시국가의 내분을 틈타 마케도니아의 남진(경제적, 문화적으로 미개)-필립2세: 국가제도의 정비, 군사적 남진정책의 성공: 그리스의 위기.마케도니아-그리스 연합군을 창설 :페르시아 원정계획( 필립2세의 돌연사로 실패)-후계자 알렉산더: 그리스 도시국가의 부활을 억제책:  페르시아 원정을 감행-시리아, 페니키나, 이집트를 격파 B.C.323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시 건설-메소포타미아 진격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 B.C 330-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중앙아시아(사마르칸트), 인더스강(박트리아Bactria)유역에 진출-수도 바빌론(323) 대제국을 건설.

 

정치적으로 총독정치를 통한 통합: 지역통치에 대한 중앙의 간섭을 최소화-문화정책: 정복지의 종교, 문화, 제도 및 관습을 유지허용.  각지역의 그리스의 도시를 건설(알렉산드리아):  지식인, 상인, 정치가를 이주시킴: 그리스 문화를 이식* 간다라미술(불상 및 동전)에 큰 영향: 대승불교를 통한 한국에도 영향-그는 신격의 아시아의 대왕: 유럽과 아시아의 융합을 통한 세계 정복에 성공 .정복지의 호족의 딸과 결혼: 혼인정책 (인종적 융합): 그리스인과 동방계 


대왕의 돌연사는 후계자문제에 대한 군부의 대립관계를 연출함 *결과: 이집트. 시리아, 마케도니아의 3왕국으로 분열  -안티고노스가(마케도니아)가 명분을 유지 로마에 복속: B.C.146-셀레우코스왕가(시리아): 안티오키아, 다마스코스에 도시건설 로마에 복속B.C. 64-프톨레미왕가(이집트): 지중해 그리스 도시국가를 복속 절대군주제를 유지:   악티움해전:  로마에 복속 B.C. 31 * 순차적으로 로마에 복속-로마제국이후 실질적으로 기독교문화의 정신적인 길라잡이:(고대: 기독교도은 지금의 아일랜드부터 인디아까지 확산)


2. 헬레니즘시대의 사회와 문화 

  

정치와 경제

절대군주제: 국왕이 절대적 권력을 독점, 국가독점하에서의 경제생활-그리스 도시국가 중심의 경제는 동방원정으로 중심지를 오리엔트로 이동(동서문화 교류정책의 일원)-오리엔트지역의 지리적 자연적조건(천연자원이 풍부, 조밀한 인구밀도, 영토의 광활함)-이집트지역: 절대왕정, 대토지소유제(노예제)를 통한 곡물의 대량수출-알렉산드리아: 저렴한 노동력에 의한 대규모 수공업생산(유리, 종이(파피루스)아마포, 주단 및 직물): 왕실과 승려계급이 주도-오리엔트지역의 정치적통일: 동서의 무역이 증대: 상공인의 부의 축척(왕실경비충당)지중해, 홍해, 흑해, 인도에 걸친 무역권형성


문화

-대왕은 그리스문화를 통합수용, 동방문화와 융합: 세계사적인 성격과 의미-특징: 그리스의 도시국가적 애국주의는 쇠퇴:개인주의, 세계주의, 현실주의로 전환-철학: Stoa(Zenon)학파, Epikuros학파, 견유학파Cynicism-3학파는 폴리스의 해체 이후 모두 도시국가에 대한 부정적 태도와 은둔의 가치를 공통적 전제조건으로 함. 회의주의적 -Stoa: 이성중시, 도덕적 철학에 의한 행복추구를 목표로 한 금욕주의. 보편적인 이성에 근거한 세계시민사상Cosmopolitanism (계몽사상)-에피큐로스: 정신적 쾌락에 의한 행복추구만이 인간의 목표(개인주의의적 입장).이후 3세기까지 신플라톤학파의 등장까지 철학의 새로운 것은 생성되지 못함 

 

현실주의사조

자연과학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과학과 수학은 최고조에 이름)-중심지: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Museion. 국왕의 적극적인 문화, 학문의 중심-아르키메데스Archimedes; 원주율을 통한 미적분연구-유클리드Euclid: 유클리드 기하학-에라토스테네스: Eratosthenes지구 구체설(지구둘레를 측정)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 태양중심설 (코페르니쿠스 보다 앞선 주장)-Polybius: 로마사(로마제국의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건축: 신전, 궁전, 극장, 목욕탕-그리스식 코린트양식의 화려한 조형미 .조각: 개인주의 및 사실주의 사상이 반영. 육체와 감성을 주제로 한 조각: 여인상(밀로섬의 비너스)

 

*로마제국은 2원적 구조

-정치적 통일-문화적 2원구조: 헬레니즘세계는 상층은 국제적 그리스화 .하층은 다양한 지방문화

  

서양고대사 개관 3

   

◎ 로마제국의 흥망사


1.  로마공화정의 발전


a. 로마공동체CIVITAS의 탄생과 왕정기(753-509):

귀족이지배한 도시공동체-3000년경 인도-게르만의 일파: 이탈리아인이 정주시작-기원전 8세기 티베르강 유역 라틴의 작은 촌락 로마가 건설(라틴인)-초기 에트루리아Etrurians에 지배이후 독립도시국가의 형태를 유지 510년경부터:  이후 1000년의 세계제국의 수도로 변모-그리스문명의 영향(종교, 제도, 건축, 도로건설, 도예)-부족국가: 씨족Gens, 종족Curia 부족Tribus으로 구성.  사회적 신분: 혈통귀족Patricii 평민Plebs 예민Clientes 노예Servus


b. 공화정 초기와 중기(509-2세기초) 

-초기로마: 로마공화정은 6세기이후-귀족(대토지소유)이 실권장악-통치와 군사권은 임기 1년의 2명의 통령Consul-전권은 귀족대표기관인 원로원Senatus이 장악-평민: 중소농민이 주축, 참정권이 박탈


2. 로마공화정의 성립


-상공업을 통한 평민계층의 부의 축척(귀족수준을 능가) 및 일부는 군대(중장보병)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  -신분상승을 통한 귀족정의 변질-B.C. 5세기 귀족과 평민간의 신분투쟁(평민의 새로운 도시건설을 통한 이주문제: 성산사건)-원로원의 타협안: 2명의 평민대표에게 호민관 Tribunus Plebis 권한 허용-평민대표기관 평민회구성 Concilium Plebis-평민의 권리신장에 크게 기여:  451년 12표법의 제정: 관습법에 의한 귀족의 폐단을 방지 및 평민보호책 .367년 Licinius(리키니우스법): 토지소유의 상한을 정함(125만 평방m)2명의 통령 중 1명은 평민대표. 평민과 귀족의 실질적 신분차이가 거의 폐지-287 Hortensius(호르텐시우스법): 평민회의 결의가 원로원을 거치지 않아도 효력발생.  로마 공화정의 신분제 문제는 완전 해소


3. 로마의 반도 통일

초기 로마의 정복사업이후 정복지주민은 로마 시민화(평민과 동맹관계에 편입)-로마 주변의 라틴도시국가의 라틴동맹(396)  -주변부:에트루리아인, 갈리아인을 완전 복속-280년경 거의 반도를 통일: 남부경략 삼니움족Samnium: 중부석권 이후, 남부 그리스식민지공략*모든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와 각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망 건설(군사, 수송도로)-각 지역의 로마화작업(군사, 상업, 문화교류에 영향)-이탈리아에 대한 로마의 통치: 지방자치제를 통한 협력관계를 구축(군대진주를 위한 요새구축)-이후 지중해 및 해외 진출을 통한 대제국 건설의 원동력* 로마시민권의 확대과정: 로마지배하의 이탈리아인 로마군사력의 절반이상차지


4. 로마의 발전 

로마시민공동체의 해체(공화정후기: B.C2세기-A.D. 1세기)

포에니전쟁: 반도통일이후 (지중해진출모색)-지중해의 세계는 당시 군웅활거시대 .알렉산더사후 중동, 이집트,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페니키아의 카르타고로 분열 

카르타고: 서지중해의 맹주(강대한 해군력과 경제력):   로마의 지중해 진출의 결정적 방해요인

  

지중해의 세계 개관

-지중해 동쪽: 알렉산더의 정복사업에 따른 변화 . 서쪽: 제해권 장악한 북아프리카의 해양대국 카르타고와 이탈리아반도를 석권한 육상국가 로마와의 대결(포에니 전쟁: 이는 그리스세계와 오리엔트 대결의 연장)-카르타고: 기원전 6-8세기 해상왕국 페니키아인 (라틴말 새로운 도시)-포에니: 로마인이 페니키아인을 일컫는 말*기원전 3세기 한니발전쟁의 승리는 로마가 해상왕국으로 급부상  -동지중해의 헬레니즘 강대국과의 긴장, 갈등관계로 발전-기원전 146 로마가 지중해 대국을 건설하는 과정의 분수령-카르타고 격파, 그를 속주로 편입(서지중해에서의 승리)-마케도니아 병합 (196년 2차 마케도니아전쟁이후 속주화) 그리스 자유정신을 존중

 

로마의 대외정책

헬레니즘왕국에 대한 기본전략-직접적인 지배: 로마의 지배(imperium romanorum)과정-기원전 31-30 악티움해전에서 마지막 왕국(헬레니즘) 이집트 격파: 속령화거의 모든 지중해지역을 통일-기원전 27년 로마제정: 황제에 의한 제국통치체제의 수립이후 200년 팽창: 북부 갈리아, 라인-다뉴브강, 영국의 일부등 영토편입-평화의 시대(정복보다는) Pax Romana: 경제적 번영(해운업, 무역, 도시건설)최고의 고대문명의 절정기: 물질문명을 기반

 

*포에니 전쟁(Punic War 264-146 B.C)

-페르시아전쟁이후 최대의 동.서충돌(유럽대 오리엔트)

 

1차 포에니전쟁: 264-241B.C. 

원인: 시칠리아의 내란에 양측이 간섭 군대파견-경과: 로마의 육군과 해군력 총집결로 승리: 시칠리아의 지배권확보(배상금 요구) 이후 Sardinia, Corsica를 확보: 로마제국의 형성에 초석을 마련

 

2차 포에니 전쟁: 218-201B.C

원인: 카르카고의 에스파니아 개발문제에 주력. 한니발Hannibla 에스파니아의 개발을 통한 부의 축척과 군대를 동원  .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원정 216년. 8만의 로마대군을 격파(Canne전투: 이태리 중부)로마의 함락위기: 이탈리아 동맹군의 일부(남부지역)이 카르타고와 동맹. 로마의 재기: Scipio를 중심으로한 신규평성로마군의 카르타고 본토공략. 한니발의 철수: 북아프리카의 전투에서 카르타고의 패배, 휴전이 성사: 201 B.C.-결과: 로마의 스페인 지배, 카르타고 50년 상환의 배상금, 카르타고의 군선인도서지중해의 재해권확보

  

3차 포에니전쟁: 149-146B.C.

원인: 카르타고의 재기방지책(카르타고 자체분쟁에 개입)  -목표와 결과: 카르타고의 초토화, 주민을 노예화: 로마속주에 편입* 지중해의 재해권문제-2차 포에니 전쟁이후: 마케도니아정벌작업-목표: 카르타고와 그리스세력의 동맹할 가능성을 사전봉쇄. 4차에 걸친 로마의 마케도니아 간섭: 군대파견을 통한 군사적 개입-소아시아, 이집트, 중동지역으로 확대(로마의 군사적 절대 우위): 속주에 편입


5. 로마공화정의 변질

 

로마사회의 변질

대외적 팽창의 결과: 평민출신의 기사계급(Equites)의 성장(공헌)-군수품조달, 공공건물 건설, 속주의 세금관리 과정에서 경제적 부의 축척*새로운 관료제도의 요구: 토지제도 및 사회적 신분지위. 로마는 부의 집중을 통한 사치와 향락문화 풍조가 확대-건축, 장식, 요리, 사교, 의상 등 전통사회의 가치 및 소비문화가 변질

 

전쟁의 결과: 정복지 주민의 로마노예화.  하층평민 및 자영농의 신분하락. 전쟁을 통한 생산저하 및 부체의 상승. 대토지소유의 농장경영(노예를 통한): 속주를 통한 값싼 농산물 유입

  

Latifundium  라티푼디움의 실시: 곡물재배가 아닌 올리브, 포도의 상품생산의 대토지소유제로 전환  -결과: 중소농민의 무산자로 전락, 새로운 귀족층이 정착 (사회의 양극화 현상)*사회적 모순: 무산자와 유산자계급의 갈등이 심화-유산자: 전통귀족, 신흥귀족: 관직 및 경제력을 독점.  원로원의원: 대토지 소유자-무산자: 가혹한 대우: 특히 노예의 반란이 반복. Spartacus 73-71B.C.의 반란은 대규모-결과: 로마 내부적인 혼란이 가중은 내란의 수렁에 빠트림. 로마공동체의 시민의식의 사라지고 개인 및 물질주의가 팽배-로마는 무력에 의한 헬레니즘세계를 재패, 반면 헬레니즘의 개인, 물질주의에 패배

  

개혁과 군벌의 대두(평민파의 개혁요구)Tiberius Graccus 163-133 B.C. 형제  -133 형 그락쿠스의 호민관: 자유농민의 몰락: 귀족의 사병화에 반대. 토지개혁를 주장 (니키니우스법을 부활: 귀족의 토지소유제한)반대파로부터 살해-123 동생 Gaius Graccus의 로마하층민의 지지로 호민관 선출: 형의 계획을 계승. 로마시민권의 확대, 토지분배문제로 원로원과 대립.  내란으로 확대될 위기에 그는 자살로 마감, 실패-이후 혼란이 가중 내란의 유혈사태가 속출-로마의 공화정체제는 대제국의 통치체계를 대신할 수 없었다 .속주의 반란과 이민족의 침입이 결과적으로 나타남

 

*군벌의 등장-혼란속에서 시민군은 귀족의 사병화(용병화)-귀족(속주지사)은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군벌독재화.  원로원과 정치적 대립 -대표인물: Marius (마리우스: 평민출신 원로원을 대변)   Sulla (술라:귀족출신 평민회를 지지)-대립 후 술라의 승리: 원로원의 과두제를 개혁함

 

6. 로마의 새로운 질서

 

3두정치

군벌간의 정치적, 군사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 원로원이 기능상실이 원인-술라의 사후 그의 참모장 Pompeius106-48B.C와 Carccus 114-54B.C. 의 등장-원로원의 요청으로 이베리아반도에 남은 마리우스파를  완전 분쇄-크락쿠스는 스파르타쿠스의난을 평정 후 대부호로 정치적 야심-케사르 Caesar 100-44B.C.의 등장: 평민의 지지 

  

제1회 삼두정치

원로원과 대립 (케사르가 최고 실력자로 부상)-케사르: B.C. 59년 갈리아군단의 사령관(군사적 지위의 중요성을 의식)8년간의 갈리아지방 정복사업에 몰두(라인이서지방평정)라틴문화의 프랑스, 독일지역 전수자-크락크스: 시리아 총독부임후 파르티아전투에서 사망

 

폼페이우스와 시저의 대결구도-원로원은 시저의 군사적 성공에 경계: 정치적 대권과 직결. 시저를 군사령관직에서 파면: 그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넘었다-결과: 이탈리아와 속주는 전쟁상태, 강력한 군대의 승리는 예고. 봄페이우스는 원로원의 지지자와 동방으로 피신.  케사르의 에스파니아 점령이후 B.C. 48년 봄페이우스군을 격파, 살해.  그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여왕에 임용한뒤ㅡ B.C. 45년 로마에 귀환. 그는 원로원의 추천으로 10년 임기의 통령이 됨

  

케사르의 개혁

새로운 질서의 모색-행정개혁:혼란, 무질서, 부패방지의 원인: 세제를 개혁, 중앙집권제 (속주의 총독을 중앙에서 통제)시민권의 확대, 빈민층구제사업(도로, 항만 등 공공사업), 토지재분배(하층민대상)  -문화사업: 46년B.C. 율리우스력(태양력의 기초)의 제정. 44년 B.C. 종신통령(원로원은 로마공화정의 종말로 간주: 그를 암살)

 

제 2차 삼두정치

안토니우스(Antonius: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케사르의 암살: 로마공화정의 혼란을 재현양자: 옥타비아누스와 케사르의 참모 안토니우스와 레피투스(Sepitus)* 3두체제는 부루투스 Brutus(시저의 암살자)의 군대를 마케도니아에서 격파.  반대파의 재산몰수와 숙청 *로마제국의 영토분할-레피투스: 아프리카 (후에 탈락 로마는 동서로 양분)  -안토니우스: 이탈리아 이서지역  -옥타비아누스: 그리스 이동지역 

 

악티움해전 Actium 31 B.C 

로마 실권장악을 위한 분할통치를 둘러싼 내분.옥타비아누스의 승리: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연합함대를 격파.  이집트왕국의 멸망(프톨레미왕조): 로마의 영토에 편입. 일인지배체제(제국영토의 효율적지배)가 필요: 제정이 요구. 공화정은 로마제정으로 전환하는 계기 

 

7. 로마제정의 발전

서기 1-2세기(제정전기): 시민공동체적 요인이 쇠퇴

 

*아우구스투스 시대(옥타비아누스)

내란과 무정부적 혼란방지를 위한 Princeps(원수정)수립Princepatus: 19세기 몸젠이 명명한 정치체제-원로원과의 타협  대권장악: imperator: 군통수권자. Augustus(존엄,지존)의 칭호: 로마   황제에 등극-그는 독재자가 아닌 로마시민의 원수 

 

Principatum(지배체제): 로마공화정의 변질. 귀족정이 아닌 일인지배 (원로원의 기능쇠퇴)속주의 총독의 사병화 금지(연금제실시, 감독관파견)상비군과 친위대창설: 국내질서유지. 도시정비: 상수, 신전, 목욕탕, 도로 정비-45년간의 치세: 혼란과 무질서를 추방한 로마의 평화시대가 열림-아우구스투스는 고대신앙을 복구하는 노력: 진리탐구에는 등한시-로마의 세계는 점점 더 판에 박힌 틀만 유지-그는 정치적 도전자에 냉혹(원로원등)-A.D. 180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죽음까지 같은 시기

  

*로마의 평화 (Pax Romana)

아우구스투스이후 4황제시대: 정치체제의 제도적 정비와 전문화작업이 확대-Nero의 기독교박해, 로마방화, 화산폭발(봄베이)에도 불구: 평화와 안정은 유지됨-원로원과의 타협: 군벌의 대립으로 인한 내란위협 방지 :황제권한의 강화-네로이후 5현재시대(96-180): 로마의 전성시대 로마제국의 영토 확장, 내치정비-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Marcus Aurelius(121-180): 원로원을 통해 선출  -빈민구제사업: 대규모의 토목공사  -대외정책: 무력으로 루마니아, 헝가리지방 아르메니아 진출, 속주의 반란진압. 소아시아, 유럽(이베리아반도, 베네룩스, 영국 서유럽라인좌변)   아프리카에 광할한 영토를 넓힘-철인황제: 아우렐리우스(외침과 내분의 연속: 전쟁으로 인한 인구감소 및 게르만의 이동-비단길: 중국 후한에 사신파견 (로마제국을 대태국으로 명명)

  

8. 제정시대의 사회

라인,도나우강의 국경유지: 법에 의한 통치, 경제력을 강화-도로, 항만, 습지개발: 무역의 증대(각국의 특산물 교역: 식민지)중국, 인도까지-교역을 통한 도시의 발달: 헬레니즘문화의 계승: 그리스-로마문명의 열매를 맺음-정복지에 지중해 고전문화을 전수시킴(프랑스, 영국,남독일, 스페인 포함)-로마시민권의 확대: 신분제사회, 귀족과 기사계급, 일반평민, 노예-노예제를 통한 경제력 증가: 신분유지를  위한 연속적 대외원정 : 막대한 군사비지출-상업의 발전을 통한 화폐경제의 일상화-대외팽창만이 새로운 재원을 창출한다는 정책: 로마사회의 내부붕괴는 팽창의 중지를 의미


9. 로마문화와 기독교

-지중해 그리스의 도시문명을 인수-로마제국의 발전과정에서 이민족의 문화를 융합하고 그리스-로마적 전통을 전수함-고전고대를 유럽중세세계에 전달하는 역할

-헬레니즘화된 그리스문화를 계승: 그리스의 독창적인 면을 수용  -로마인은 실용적인 정신으로 계승 발전-로마문명은 그리스문화의 모방에 충실: 조성이 부족: 학문, 예술분야:   건축, 도로, 수도 등 토목공사: 웅장함.  제국의 창조력의 원동력: 정치, 군사, 행정, 법률제도의 우수성확인

  

◎로마법의 기원과 벌전

 

로마법

-로마제국의 최고의 문화유산-그리스: 예술, 철학  로마: 법-초기: 기원전 8세기 도시국가 civitas- 6세기말 유스티아누스 법전의 집대성-최초의 성문법: B.C 450년 12표법(귀족과 평민의 대립이후 평등을 보장):-시민의 권리와 관습을 법으로 제정(시민법)-농촌사회를 규율하는 법 (엄격한 형식주의)-가부장권을 인정   -자유민, 반자유민, 노예, 가축, 물품에 대한 소송의 당사자: 가장만 인정-정복지 이민족과의 통제 및 교섭을 위한 만민법의 체계

  

만민법은 스토아철학의 자연법과 동일시:(제정초기 2-3세기 통용)법은 자연의 합리적인 원칙과 일치되어야 한다: 세계성, 보편타당성.-자연법: 개별성과 특수성을 초월한 자연계의 이치처럼 영혼불멸하고 보편적인 법-보편적 규범, 인간의 공통된 합리성을 강조하는 스토아의 자연법사상을 토대로  세계제패를 위한 법, 행정체계를 유지하고자 함

  

*정복사업-만민법과 시민법: 기원 전 3세기 포에니전쟁이후 로마가 헬레니즘세계와의 접촉. 로마시민법: 로마시민에게만 적용하는 관습 및 12표법(민회의 법률) 엄격한 형식주의(법률소송제도를 채택)로마 시민의 거래법(시민법)거래행위: 매매, 금전소비대차, 조합, 저당 등에 대한 법적 보호책-자유로운 거래법은 외국인에도 통용되는 원칙을 채택(만민법으로 통용):(외국과의 소송문제에 외국인 법무관 1명)

 

시민법과 명예법: 민회에 의한 고유한 시민법과 법무관에 의한 명예법(만민법)으로 구별. 법무관은 공화정의 명예로운 관직이라는 의미-귀족의 법률학자:원로원의 구성원들: 1년 임기의 법무관임용에 자문기관 역할.  법무관 임용에 따른 승인방식서, 소송진행표를 재편집한 법전형태가 성장(영구 고시록: 변경이 금지 ) 법률의 체계화: 

  

공화정시대

법무관과 명예법시대-원수정시대: 황제의 칙령(제정시대)*pax romana 고전시대:(A.D. 1-2세기)-그리스 철학의 영향 (로마 법률학이 소제, 추상, 귀납의 개념을 체계화)-가이우스: 법학제요: (사람의 법, 물건의 법, 소송의 법) 시민법을 3부분으로 분류. 나폴레옹의 프랑스 민법전의 초석, 법학입문서의 역할  -해설서 저작( 해답집, 문제집, 서간집): 개별적 문제해결에 초점-사법고시의 주해역할, 법제도와 법학의 기초학설을 마련-유스티아누스의 학설집에 40명중 35인이 고전시대의 저자가 해당-지금 5%만 현존: 920페이지상당(법률 해석집)

  

고전시대

원수정시대(관료제도의 정비)-법학이 발전 성장하는 이유: 관료제 내에서의 법학자의 위치 지대한 것(모든 공직분야에 진출: praefectus 속주의 총독)-Princeps에 의해 위임된 재판관으로서의 법학자의 권위: 그의 해답만 인정-법무관에 자문하던 때와 다른 공인(월급)*황제의 칙령칙법(칙령)-카라칼라황제 212 로마시민권을 제국의 모든 주민에게 준 칙령-최상급심으로서의 재심원칙-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재판제도(상소제도):  -황제의 재판권은 많은 새로운 법을 발전-황제의 법률해답의 발령( 실질적으로 법학자가 기초한 것)  -법학자의 자유로운 법해석은 많은 제약을 받음-이후 모든 법의 체계는 황제의 이름으로 제도화(고전법학의 쇠퇴)

 

제정후기

3세기말 4세기 초 이후-서로마제국의 멸망   -법학의 체계화에 성공(서책)-법률학교를 통한 법학서적이 다량으로 복제됨( 개념이 일반화)-법학의 비속화: 라틴화하는 경향-콘스탄틴대제 이후의 법률은 비속법이라 함예: 테오도시우스 법전: 438 소유와 점유의 구별이 애매하고 혼동됨-서로마제국의 멸망이후 로마의 비속법은 게르만족의 관습법과 혼제하는 현상-중세에 다시 재발견

  

동로마 법률학교와 고전주의의 부활

서로마제국의 해체과정에서 로마법은 더욱 비속해짐-5세기 동로마는 고전주의적 입장에서 법률학교를 신규개편함 (5년 과정)고전법학자의 저술이 수집되고 해석됨-텍스트의 주해, 색인 등의 연구가 강화: 주석적 연구방법-이후 중세의 주석학파와, 현재 법해석학의 기초*유스티니아누스황제의 법전:-로마볍의 집대성-로마법은 동로마황제 Justianus 527-565 (유스티아누스)에 의해 집대성-동로마 법률학교의 연구덕택으로 단시일에 완성-학설집의 자료는 방대하지만 3년만에 533완성-고대로마법과 다르게 가부장제에 따른 엄격한 형식주의는 완화됨-즉 시민법과 명예법이 통합된 보다 일반화된 로마법체계-고전주의적 입장이 반영: 이후 동로마세계에서 비속적으로 적용됨-11세기 까지 서유럽에서는 로마법이 자취를 감춤

  

중세의 로마법 (주석학파)

십자군원정 콘스탄티노플과의 교역하던 피사에서 학설집의 사본발견-이후 12-13세기 볼로냐의 주석학파에 의한 법전연구가 활발-주석학파의 업적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1000년의 신.구법제도를 정리통합)의 역사적 기원 및 모순점 해결  -해석학을 통한 실제 생활에 적용시키면서 볼냐대학은 전유럽에서 몰려는 법학도를  위한 로마법 강의와 연구를 활발이 전개함  -영국은 전통적 법률전통에 따라 이를 배척함(영미법)-후기 주석학파: 주석서에 봉건법, 교회법, 도시행정법를 추가로 소재화함

 

로마법계수운동

나폴레옹법전과 19세기 독일법학이 로마법을 전승-1900년 민법전이 성립: 유스티니아누스계통의 로마법이 현행법-나폴레옹의 법전: 로마법에 강력한 영향-제국주의와 양차대전을 통해 전세계에 로마법 대륙법이 전수됨(독일-일본-한국)

 

◎ 로마제국의 붕괴원인

Spengler, Toynbee 문명사적 흥망고찰의 기본적 틀: 그리스-로마문화 /Gibbon: 로마제국의 몰락의 주요원인-( 야만족의 침입과 기독교의 승리: 대중화, 국교화)

 

정치적 원인/황제의 계승문제 

황제권을 둘러쌓은 궁정음모는 고질적 병폐(5현재시대는 제외)-3세기 군인황제시대: 군대가 개입하는 황제옹립과정에서 내분과 대립-제국의 통합과 황제권에 치명적결과-디오틀레티아누스의 수습책: 전제군주정를 도입 -콘스탄틴누스 이후 악화  -로마의 황제권: 제국통합의 핵심-오랜전통의 기능적 제도가 뒷받침되지 못한, 공화정에 접목된 타협의 산물-황제의 칙법과 강력한 군대의 장악-황제의 계승권문제가 애매: 황제의 신격화 작업은 지배층세력에 역효과로 나타남-군인황제시대: 5현재시대이후 (3세기): 로마의 내분과 이민족의 이동

  

군대의 조직력약화  

235-285: 군사반란과 내란이 연속적으로 일어남.군인황제: 속주의 군대를 배경(26명의 군인황제 Barrack Emperor)가 교체:   자연사는 2명뿐: 모두 권력투쟁의 희생물: 군대의 동요

 

군대의 질적 변화

초기: 자유로운 중산적인 시민으로 구성된 국민병의 성격. 공화정말기: 3두정치시부터 용병대의 성격이 첨가되고 사병화함.  제정후기-말기: 속주민과 야만족 출신의 비중이 커짐: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약화. 제정후기(3-5세기)전제주의 정부형태: 3세기: 부패와 타락(금권정치): 군부의 등장: 황제의 등극을 좌우:  동서의 야만인의 침입, 혼란: 군사비의 증가, 질병이 만연

  

정치적 변화

두황제의 노력: Diocletianus 284-305, Constantinus 306-337/ Augustinus: 혼합정부체제(원수정)를 마감, 절대권력체제:   제국의 통합유지를 위한 중앙집권적 권력국가(관료제적 통제강화)-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84-305) 제국개편-강력한 황제권력을 유지: 관료제, 군제를 강화. 공화정적인 요인을 일소, 통일적 군현재도를 개편.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에서 전제적 군주정(Dominatum)으로 변질  -그는 소아시아에 군대와 함께 체류: 시리아, 이집트를 직접통치  -공동황제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밀라노에 체류: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북아프리카지역 통치  -2명의 황제 2명의 부황제: 제국은 4분 분할통치

  

콘스탄티누스Constantiuns 306-337:-비잔티움으로 수도이전: 콘스탄티노플으로 명명.  4개의 대관구 Presfectura 14개의 관구 Doicesis 117개의 주 Provincia로 분류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를 정비: 175군단으로 개편-그리스도교를 공인(민간신앙의 확대를 피할 수 없었다)-테오도시우스Theodosius 379-395 동서로 제국이 분열. 서로마제국: Odoacer 476멸망(게르만 용병대장)


게르만의 이동

-외몽골의 훈족이 유럽 침임: 이에 따른 유럽, 인도어족의 3차례 민족 이동-1차 이동: 4말-5세기 초-375년 다뉴브강을 넘은 서고트족,   -406년 라인강을 넘어선 반달, 알란, 수예브족. 이후 슬라브, 동고트, 프랑크족의 민족이동. 이에 따른 로마제국의 국경과 정치조직의 붕괴-2차이동: 유스티아누스대제 527-565의 타계이후(비잔틴 내부의 동요)-아바르족의 발칸침입, 롬바르족의 북부이탈리아 정복,   앙글로섹슨족의 잉글랜드정복, 프랑크족의 지배지역 확대(라인지방)

 

3차 민족이동: 카로링왕조의 종말-9세기 초~10세기 초: 노르만족의 프랑스와 잉글란드 및 전유럽지역에 대한 침입  -이시기: 이슬람세력의 지중해장악: 에스파니아, 사르디니아, 코르시카, 시칠리, 남부이태리(비잔틴제국이 쇠퇴)-서유럽지역: 두 세력의 침입에서 분열되고, 황폐화-카롤링조: 독일 911년까지, 프랑스, 987까지 명맥이 유지-훈족의 침입: 이에 따른 고트족이 도나우강을 넘음: 4세기. 로마황제는 군대를 동원 전투에서 패배, Valens황제

  

게르만의 침입

게르만의 일부는 로마의 용병화-국고의 고갈 , 신분제의 동요(군제, 조세, 토지제도)-로마인의 정신적, 도덕적 무기력이 원인-게르만의 이동(라인-도나우 지역에서 월경)동: 고트족 (소아시아와 그리스지역 침입)   서북부: 게르만(갈리아, 에스파니아, 이탈리아에 깊게 침투)동부국경: 사산조 페르시아의 흥기로 크게 위협*결과:-국경을 넘어 도시는 약탈, 방화, 파괴되기 시작,  -군사적으로 물, 인적 동원이 어려움: 강제 징병, 징세, 노동의 악순환

  

게르만의 이동에 따른 정치경제적 변화

로마가 그리스 도시국가의 제도를 흡수한 면도 원인: 제국의 발전은 시민공동체의식이 무력해짐 (공화정의 변질: 제정)-로마의 평등이념은 경제, 사회 구조적으로 비현실적인 면에서 나타남.-중앙집권적 관료제의 붕괴는 지방분권적 귀족정치로 이동(고대세계의 종말)-중세사회로의 과도기에 접어듬; 경제의 중심은 도시에서 농촌으로, 행정의 중심은  중앙집권에서 지방의 유력귀족으로

  

경제적원인 (근본적 원인)

로마의 번영은 바로 제국의 영토확장과 전리품 및 공납의 산물을 의미한다 -기술개발이나 혁신이 수반된 생산적인 경제발전의 혜택이 아님-정복의 한계=경제적 쇠퇴=황제권이 동요=제국의 해체과정을 겪음

 

로마의 경제제도

그리스와 유사한 노예제를 기반.  대토지소유제가 확대(공화정이후)노예의 인신매매가 성행,   정복사업이 둔화되면서 노예의 감소현상.  대토지경영의 어려움, 생산력저하: 토지제도의 붕괴위기-로마의 경제가 노예제에 의한 생산방식에 의존, 기술개선에 소홀한 면-기술개량에 등한시: 고용창출, 대중의 구매력 자극에 실패

 

*정복전쟁의 종식-값싼 대량의 노예공급원의 소멸을 의미-대토지소유제(라티푼디움)-콜로누스(소작제)로 변질-콜로누스: 소작제의 도입(대토지분할): 노예제도는 로마경제의 한계. 화폐경제가 흔들리면서 급여가 현물화(자연경제)-제정말기: 제국의 분할에 따른 경제적 상황의 악화: 도시의 역할이 감소(대토지소유제는  유지하는 모순)재정의 어려움은 지방화,자급자족화, 현물화의 결과를 초래-166년 이후 페스트의 창궐과 질병, 기아로 인한 소작인인 점차 부자유적인 농노화-지배계층의 면세특권이 강화: 제정말기에는 자유민이 소작인으로 전락-유산자와 무산자 계층의 대립이 뚜렷해짐

  

경제, 사회적 동요-속주의 로마시장경제로의 편입문제의 어려움. 도로(군사적 목적): 수송과 통신의 어려움: 자본의 재투자가 비효율적(비생산적),   기술투자의 어려움-과대한 군사비지출: 재정악화, 만성인플레, 화폐경제의 쇠퇴(중국, 동방으로부터 곡물, 향료, 보석수입: 막대한 금, 은을 지출

 

정신문화적원인

기독교의 성장

현실적이 아닌 내세의 신비사상에 사로잡힘-로마말기의 기독교수용: 로마정신과는 배치(원래정신의 토대를 상실)-헬레니즘-로마적 전통문화에 동화된 게르만 야만문화를 배경-로마적 게르만적 요인을 기독교정신으로 계승해나감-이는 중세유럽의 정신적 기반

 

기독교박해

로마황제의 상징적 신성성에 대한 공식적 참배요구  -속주의 군대조직은 대부분 기독교신자가 확산  -이교도적 제의를 거부, 황제의 신성성 요구에 불응이 원인-네로황제 54-68이후 9차례 그리스도교 박해  -4세기 초: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제국 최대 최후의 박해*콘스탄틴 대제: 313 기독교 공인, 관용과 호의 정책적 전환  -기독교는 사적 신조 공동체(sect)가 아니라, 사회적 종교(cicil Religion)-기독교도들도 황제를 정치적 수장으로 인정-기독교는 로마황제 중심적 제국통치에 필요하고 유용한 집단

  

-392년 기독교의 국교화를 통한 제국의 통합(로마적인 것과 기독교적인 것의 일치)-395년 테오도시우스 379-395: 마지막 황제의 타계이후 동-서로마의 분열.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로 대립-서유럽은 다수의 다양한 후계자 역할: 5세기 말 정치조직으로서의 로마제국은 붕괴.-동부는 새로운 로마: 비잔티움의 강력한 제국이 유지-서로마제국의 해체과정(서유럽 지역)이 진행될수록, 로마교회는 모든 로마적인 것, 즉 그리스-라틴문명의 유일한 통로의 역할 -서로마제국의 몰락이후 서유럽은 제국통합을 위한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더욱더 새로운 민족이동 양상으로 변화되고, 이는 서유럽의 분열을 가속화 함.

 

기독교의 성장과정

사도 바울의 등장

A.D. 1-64-기독교를 세계종교로 발전시킨 율법학자이며 전도사:  -전도여행: 소아시아, 그리스, 마케도니아-로마에서 순교-바울의 기독교 세계주의: “각 교회에 보낸 서한”에 명시됨-“기독교는 율법의 마지막이라고 선언: 기독교를 유태교에서 해방시킴-기독교와 유태교의 통합을 역설하면서 기독교를 헬레니즘-로마문화 세계에 전파시켜 기독교신학의 터전을 마련

 

유태교의 쇠퇴

-로마에 대한 독립반란 66년: 1차 유대전쟁 때 기독교도는 불참)-70년 예루살렘이 함락  -제2차 유태전쟁(132-135): 유태교의 철저한 파괴*기독교의 로마전파: 로마교회의 기원은 불투명:  -58년 바울의 로마인에 보낸 서한에 근거이방인을 주체로 한 기독교는 세계종교로 발전: 수도 로마에 신자수 증가-주로 공인종교였던 유태교와 다른 면을 강조하고 로마사회의 관심사가 됨-네로의 박해(64년): 로마 시장거리의 화재사건에 소문으로 연루된 네로는 기독교인의 소행으로 협의를 덮고 박해하기 시작함-도미티아누스의 박해; 81-96년 기독교인을 공적으로 규정하고 박해. 요한묵시록에 순교한 신자들의 이야기가 나타남

  

교부시대

사도시대 1세기 말 -2세기 시대)이후  -교부란 신틀라톤학파나 스토아학파에 비해 지식과 학문수준이 덜함-기독교 교회의 건설과 교의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자

-대체로 6세기까지 교회의 조직화에 노력:  -사도, 예언자라기보다 주교, 사제 등 교회를 대표-2세기 말부터 교회조직은 정비되고 독립적인 주교제가 확립*신약성서가 탄생: 2세기 말-3세기:  -현재의 성서 27서는 4세기에 공적인 인정

 

이슬람제국과 비잔티움의 발전

모하메드Mohammed 570-632이후  -지중해세계는 특히 동로마제국의 영향권(아랍지역 및 동지중해지역)은  이슬람의 권력팽창과정에 흡수됨.-8세기: 이집트, 북아프리카, 에스파냐, 서고트왕국을 정복:  이후: 남프랑스 지중해연안에서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바그다드: 비잔틴제국과 힘을 겨루고 있었지만 8세기는 지중해세계의 실질적인 지배자   -이슬람제국은 중세 내내 독자적인 종교로 통합된 세력이며,  -그리스-라틴문명을 보존, 성장시킨 강력한 지중해의 세력으로 유지됨-비잔티움과 더불어 서유럽보다는 높은 수준의 문명을 보존, 성장시키며, 보다 통합된 사회이다.

  

-양대세력(비잔틴과 이슬람): 로마제국의 직접적 후예들: 세계문명사적 의의와 중요성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유럽서구문명에 대한 특징과 구조에 대한 분석은 고전문명만으로 해명이 불가능:-로마제국은 3등분의 유산: 비잔티움, 이슬람제국, 분열된 서유럽의 형태  -기독교는 서유럽에 로마 구제국의 전통과 문명을 전달하는 유일한 통로의 역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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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어원과 역사 (islamic history)

 

<어원>

 

이슬람의 어원은 아랍어 어근싸리마인데, 이 말은 특히 평화, 청결, 순종, 복종을 뜻한다. 종교적 의미에서의 이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법에 복종을 뜻한다. 이 말의 원래 의미와 종교적 의미 사이의 관계는 깊고 명백하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분의 법에 복종하므로써만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고 청결을 지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에서 알라라는 말은 간단하나 지극히 단호하게, 온 세계의 창조자, 주중의 주, 왕 중의 왕이신 유일무이하고 영원한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슬람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유일한 죄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믿는 것이다. 무슬림들이 일상예배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을 다음에 들어둔다: “참으로 자비로우시고 참으로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역사>

 

이슬람은 서기 610년 무함맏(마호멧)40세에 최초로 알라(유일신,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이래 약 23년간에 걸쳐 계시 받은 꾸란(코란)이 그 경전이다.

 

초기 이슬람은 무함맏이 그의 출생지이며 최초 계시를 받은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그와 몇몇 소수의 교우들에 의해 포교되기 시작했으나 다신교적 분의기의 지역 부족들이 그들의 정치, 종교, 경제적 기득권 유지를 위해 박해한다.

 

이 박해를 피해 서기 622년 메디나라는 도시로 근거지를 옮기는데 이를 "히즈라" (성천,聖遷)이라고 합니다. 이를 기준으로 이슬람력 (히즈라력)이 생겼습니다.히즈라 이후 메디나에서 교세를 확장한 이슬람은 다시 메카로 진격하고 사우디 반도를 통일한다.

 

무함맏은 그의 나이 63세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계승한 칼리프 (계승자) 시대가 시작된다. 칼리프는 실제로 신정일치의 이슬람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로 만장일치에 의해 선출되며 세습되지 않았다. 선출에 의한 칼리프가 나라를 다스린 시기를 4대 칼리프 시대라 한다. 이후 칼리프의 구가는 동서 칼리프로 나누어지며 세습에 의한 왕조의 형태로 변질된다.

 

이 시기에 이슬람은 북으로 시리아를, 서로는 마그립(지금의 모로코)까지 진출하며 다시 바다를 건너 스페인으로 영역을 넓힙니다. 동으로는 이라크 지역과 페르시아, 다시 중앙 아시아를 거쳐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이슬람의 급격한 확장에 자극받은 중세 유럽은 10961차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이후 1365년까지 아홉 차례, 25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며 이슬람에 일격을 가한다.

 

이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이슬람은 그 확장세가 뚜렷이 둔화됨은 물론 과학과 철학, 동서 교역 등등 찬란히 발달했던 그들의 문화도 사그라진다. 물론 이슬람 문명은 암흑기 중세 유럽에 인본적 사상과 과학문명을 전하여 르네상스를 촉발 시키고 유럽 시민 문화와 산업 발달의 단초를 제공했다.

 

14세기 이후 이슬람 제국은 소아시아(터키) 지역에서 일어난 오스만 제국으로 그 중심이 옮겨간다.

오스만 제국은 비잔틴을 정복하고 그 세력을 확장하여 16세기에는 파키스탄과 이집트까지 확대되어 실질적인 이슬람 제국을 형성한다. 이집트를 근거로 했던 압바스 왕조로부터 칼리프의 칭호를 이양받은 오스만은 모로코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전역과 흑해 연안까지 점령하고 지중해 해상권까지도 획득한다.

 

오스만 제국은 17세기를 지나 18세기에 이르러 쇠퇴의 길에 접어드는데 유럽 국가의 남진 정책과 프랑스의 이집트 점령, 아랍 각 지역의 반 오스만 운동과 이슬람 부흥 운동, 이란 페르시아의 새로운 왕조 성립등이 그 이유였다.

 

19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점령과 식민 정책 이후 오스만은 현저히 쇠퇴 하였으며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고 오스만은 패전국이 되어 영국과 프랑스의 아랍 지역에 대한 분할 통치가 실시된다.

 

20세기 이슬람은 2차 대전 후 각 아랍국의 독립과 이스라엘의 건국 등으로 아랍.이슬람 세력과 이스라엘.서구의 세력 대결 구도로 편성되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영토 분쟁, 석유 개발에 따른 미국과 유럽, 옛소련의 대결로 세계의 전장이 되었다.

 

이스라엘을 앞세운 미국과 아랍국 간의 수차에 걸친 중동 전쟁, 그로 인한 석유 무기화, 1,2차 석유 파동 등 이슬람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전쟁 지역이 되고 만다. 결국 석유를 둘러싼 아랍 이슬람 지역에서의 우위 확보를 위해 미국의 대 아랍. 이슬람 정책이 이슬람 세력의 반발을 불러 오면서 미국에 대한 저항의 결과가 과격 테러로 이어지며 걸프 전쟁, 911 사건, 이라크 침공 등 분쟁이 계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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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역사

(1) 선사시대: 민족의 유래   (2) 힌두-불교시대 (BC 1-14세기)  (3) 이슬람의 전래와 말라카왕국

(4) 포르투갈의 말라카 점령  (5) 네덜란드의 진출  (6) 영국의 진출과 식민화 과정

 (7) 일본 점령기 (1942-1945)  (8) 전후 영국의 복귀와 독립과정 (1945-1957)

 (9) 말라야 공산당의 준동과 비상사태 선포  (10) 말레이시아 연방 (Federation of Malaysia)의 탄생 

(11) 복합민족 사회의 형성과 1969년 인종폭동 사태
 

1. 선사시대: 민족의 유래

 

동남아는 현대의 중요한 4대 문명, 즉 중국, 인도, 이슬람 그리고 서구문명 등 모든 문화가 공존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지역이다. 이러한 문화적 패턴은 동남아의 고유전통에 다양성을 더해 주었다. 정도는 다르지만 이러한 유입문화는 토착생활에 접목되어지거나 또는 흡수되어서 동남아시아 특유의 문화적 다양성을 연출하였다.

 

동남아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 가운데 하나이다. 이 지역에서는 BC 약 100만년전의 사람 두개골 (피테칸트로푸스)이 중부 자바지역에서 발견되었다. 동남아 지역에 가장 먼저 정착한 사람들은 기원전 약 2만년전 빙하기 말에 이 지역에서 살았던 구석기 시대인들로 오늘날 필리핀의 네그리토스(Negritos)인과, 사라와크의 뻬난 (Penan), 사바의 룽우스(Rungus)족, 말레이 반도의 산간부족인 오스트라로이드 베도이드 (Australoid Veddoid) 또는 오랑 아슬리인들의 조상들이다. 이들은 키가 작고 곱슬머리로 짐승을 사냥하거나 물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최초의 말레이인들이 북으로부터 말레이 반도 지역으로 이주한 것은 기원전 약 2500-1000년 사이의 신석기시대로 추정되는데 Proto-Malays라 불리우는 이들은 오늘날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 그리고 버마인의 조상이 되었다. 이 당시의 민족이동은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이후 약 2-3세기에 걸쳐 또다른 일단의 말레이인들이 중국과 티벳으로부터 말레이 반도를 포함하여 동남아시아를 관통, 인도네시아 제도 등지로 퍼져나갔는데 이들 후기 말레이인(Deutro-Malays)은 이전의 이주민들보다 앞선 영농기술과 새로운 금속기술을 가져왔다. 이 청동기와 철기문화는 맨처음 청동기가 제조된 흔적이 발견된 베트남의 마을 이름을 따서 동선(Dongson) 문화라고 칭하게 되었다. 그 예술형태는 중국의 것과 연관된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또한 동선문화기가 시작되면서 동남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인도문화의 특징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중국과 인도문화가 전래하기까지 토착적인 동남아의 문화적 특징은 이미 구체화되어 있었다. 기술면에서 이들 주민은 논에 물을 댈 줄 알았고, 짐승을 길들였으며, 야금술을 터득했고, 계절풍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항해술을 익혔다. 사회적인 면에서는 모계중심의 전통에 따라 자손의 혈통과 상속을 책임지는 여성이 사회에서 우월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촌락들을 이루었다. 오늘날의 말레이시아 원주민은 이들 프로토 말레이와 듀트로 말레이인의 후손, 오랑 아슬리 등을 통칭하여 부미뿌뜨라(Bumi Putera)라 칭하고 있다.

 

2. 힌두-불교시대 (BC 1 - 14세기)

 

말레이시아 지역에 있어서의 새로운 역사발전은 BC 1세기경 이 지역과 중국 및 인도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와의 정규적 교역활동이 개시되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말레이 반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은 중국과 인도 사이에 위치하여 해상무역의 교차로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세력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관심을 기울여서 힌두교와 불교, 이슬람이 서로 경쟁하였다. 이때 이 지역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였다. 동서교역이 활발하던 이 시기에 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 지역에서 일부 항구도시를 중심으로한 정치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지만 서기 7세기 이전까지는 이 지역에서 말레이족을 중심으로한 본격적인 정치세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가) 불교왕국 스리비자야의 등장

 

말레이족에 의한 본격적인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은 7세기부터로 중국의 역사기록과 이 지역에서 나오는 비문 등의 자료에 의하면, 수마트라 남부지역에서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무역을 주요 기반으로 하는 스리비자야 (Srivijaya)가 7세기에 가장 영향력있는 고대국가로 등장하였다. 스리비자야 왕국은 7세기 말부터 약 600년 동안 말라카 해협을 중심으로 전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 그리고 서부 쟈바와 서부 칼리만탄 일부에 걸쳐서 크게 발흥했던 불교왕국이었다. 전략요충인 순다와 말라카 해협을 지배한 스리비자야는 상업상의 우월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항구들을 건설하였으며 이곳을 지나는 무역선들로부터 통행세를 거두었다. 한편 스리비자야는 중국에 대해서는 조공을 바치면서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중국 문헌에 의하면 서기 670년 처음으로 당나라에 사절을 보냈으며 이같은 사절의 파견은 그후 76년간 계속되었다.

스리비자야는 대승불교 왕국이었다. 중국의 불교도 이칭 (Iching)이 672년 한 페르시아의 배를 타고 Palembang에 도착하였다. 그는 인도로 가기 전에 범어를 공부하기 위하여 6개월을 머무는 동안 스리비자야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에 의하면 스리비자야에는 천명의 대승불교 승려들이 있었다고 한다. 말레이 반도 북부의 Ligor에 775년 범어로 세워진 비문에는 대승불교 사원을 세운 스리비자야 왕을 찬양하는 글이 새겨져 있어 스리비자야가 불교왕국이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한편, 서기 750년경 대승불교는 자바에 나타난 사일렌드라 (Silendra) 왕조의 보호아래 한동안 중부 자바에 전파되었으나 곧 힌두교로 대체되고 말았다. 당시 열렬한 불교사찰 건설자인 사일렌드라 왕에 의해 772년 세워진 것이 Borobudur 사원이다. 보로부드르란 발음하기 힘든 부미삼바라부다하라 (Bhumisambarabhudhara)라는 말을 줄인 것으로 보살의 10계단 위에 선을 쌓은 산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산위에 만든 9단의 거대한 사리탑으로 둘레가 3마일이나 되는 원형 회랑과 4백개의 불상을 가지고 있다. 엷게 양각된 조각들은 신성한 대승불교의 경전내용과 세속 자바인들의 생활, 관습 등을 설명해주고 있다. 공격적 성향의 사일렌드라인들은 앙코르, 안남 등과 싸웠으며 850년경 결혼동맹을 통하여 스리비자야와 통합하였다.

 

(나) 스리비자야의 쇠퇴: 스리비자야는 11세기 초, 동남아시아 및 중국과의 무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남인도의 촐라(Chola)국으로부터 침략을 받게 되었다. 촐라국은 1011년 스리비자야 지배하에 있던 주요 무역항을 공격하였고 스리비자야의 가신국들도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이에 13세기 들어 스리비자야가 크게 쇠퇴하면서 당시까지 스리비자야의 영향권하에 있던 말레이 반도는 태국의 소승불교 왕국 영향권하로 편입되었으며 보르네오는 자바의 힌두왕국인 Majapahit에 의해 지배되었다. 스리비자야는 1377년 마자빠힛 왕국에 의해 멸망된다. 스리비자야는 끝까지 수마트라에 거점을 두었으며, 이때까지 말레이 반도에 거점을 둔 왕국은 없었다. 즉, 힌두-불교시대 (스리비자야 왕국부터 15세기 초 이슬람 왕국 설립전까지)의 대부분 기간동안 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 거주민들은 자바나 수마트라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다) 힌두-불교문화의 마자빠힛(Majapahit) 왕조

 

자바국가들 가운데 가장 큰 고대왕국인 Majapahit 왕국은 1294년부터 포르투갈이 향료섬에 들어온 1520년까지 2세기 이상 존속되었다. 마자빠힛 왕국은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 전 지역, 칼리만탄의 거의 대부분과 동부 쟈바에 걸쳐 거대한 속국을 거느린 대왕국이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는 1330-1364년 사이 재임했던 가자마다(Gaja Mada) 재상으로 인도네시아 최초의 제국건설자로 일컬어진다. 그는 당시 하얌 울룩(Hayam Wuluk) 왕과 함께 해양 동남아의 대부분에 대해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당시 마자빠힛의 영토는 말레이 반도와 1377년 멸망한 스리비자야를 포함한 수마트라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이 죽은후 왕국이 분열하기 시작, 15세기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영토가 줄고 국력이 약화되었다.

 

이때 새로운 정치와 종교세력들이 나타났다. 아유타야 (Ayuthia)는 남쪽으로 세력을 뻗어오고 중국인들은 교역권을 확대시키고 있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슬람의 출현이었다. 이후 오랜 기간동안에 걸쳐 인도네시아와 말레이 반도 지역은 이슬람 세력권으로 편입되었으며 마자빠힛 왕국은 힌두의 생활방식뿐만 아니라 교역권도 상실하게 되었다. 정치의 중심은 다시 말라카 해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수마트라쪽이 아니라 말레이 반도의 서쪽 해안지역으로 향하게 되었다.


 

3. 이슬람의 전래와 말라카 왕국

 

이슬람인들은 인도에서 북부 수마트라를 경유해서 말라야에 왔다. 1292년 중국에서 이탈리아로 돌아가던 마르코폴로는 북부 수마트라에서 2개의 이슬람 공동체를 발견했다고 한다. 말라야 지역에 대한 이슬람의 영향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트렝가누(Trengganu) 강의 동북쪽 해안에서 발견된 돌조각에서이다. 아랍어로 새겨져 있는 이 돌은 1326년-1386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자바섬 전체가 훗날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은 자바 지역에 광범한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말라카 왕국을 통해서였는데 말라카 왕국은 말레이 반도에 거주하는 말레이인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통일국가로서 15세기 중엽까지 말레이 반도의 대부분 소국가들과 수마트라 동부 연안의 전역을 그 세력권 하에 두었다.


 

(가) 말라카 왕국의 건설

 

스리비자야가 마자빠힛 왕국에 속국으로 전락한 후 스리비자야 왕국의 한 왕자였던 빠라메스와라 (Parameswara)가 빨렘방으로부터 말라카로 건너와서 1403년 이 지역을 근거지로 도시국가를 세웠다. 이를 계기로 말레이 반도에의 역사시대가 개시되는데 빠라메스와라의 이복동생인 무자파르 샤(Muzaffar Shah)는 이슬람을 국교화하여 서아시아 및 인도 방면의 부유한 이슬람 상인을 끌어들여 말라카 항의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 한편 빠라메스와라는 말라카 해협을 경유하는 모든 선박이 말라카를 거쳐갈 수 있도록 동 지역을 국제 항구도시로 육성해 나갔다. 말라카국은 동서 해상교통로의 요충인 말라카 해협 중심지를 독점지배하고 말라카 항을 적극 활용하여 인도와 페르시아, 시리아를 거쳐 동 아프리카 연안과 지중해까지에 이르는 광대한 통상범위를 확보하였으며 이 무역망을 통하여 각종 생산품들을 세계 전역으로 교역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말라카는 세계통상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스리비자야의 유산을 계승하게 되었다. 말라카 왕국은 15, 16세기에 번영기를 맞았으며 당시 인근 지역을 직할지, 속령, 조공국으로 나누어 지배하였다. 초기부터 말라카 왕국의 주요 위협세력은 씨얌(Siam)족이었다. 그러나 말라카는 1405년 이래로 명나라의 보호를 받았고, 자주 명군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건국이래 말라카 왕국은 계속해서 각종 사절단을 북경에 보냈다.

 

말라카 왕국의 번영은 현명한 통치자들이 천연의 지리적 이점을 극대화하여 국제무역의 공동체를 창출해냄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말라카의 번영은 멀리 동방의 나라로부터 간접무역에 의해 수입되는 고급향료와 양질의 열대작물에 매료되어 있던 유럽열강들로 하여금 말라카와 직접 접촉에 나서도록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포르투갈의 식민통치자들은 이로써 말라카 왕국의 정복이 새로운 국제무역망을 창출해내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울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15세기 초반부터 서구열강은 앞을 다투어 커피, 차, 담배, 사탕수수 등 양질의 열대작물의 보고인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 제도를 정복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이곳의 각종 향료와 열대작물은 말라카 왕국이 장악하고 있던 아시아 무역망을 통해 서구의 여러나라로 흘러들어갔다.

 

향료는 유럽인들에게 대단히 필요한 상품이었다. 유럽에서는 겨울 동안 많은 수의 가축을 생존시킬 대책이 없었다. 그래서 많은 가축이 도살되었고 그 고기의 선도를 유지할 방법을 찾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 소금과 향료가 이용되었고, 수입한 향료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동북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되는 정향과 후추였다. 오랫동안 맛없는 음식에 길들여져 온 유럽인들에게 말루꾸(Maluku) 군도에서 생산되는 정향과 육두구는 실로 훌륭한 향취와 음식의 맛을 일깨워 주었다. 더구나 정향과 육두구가 향료의 역할뿐만 아니라 탁월한 약재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유럽인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육두구는 특히 두뇌를 강화시키고 기억을 명료하게 하며 위장을 튼튼하게 하고 동시에 몸을 따뜻하게 보해주는 다용도의 신비한 향료였다.

 

각종 향료와 양질의 열대작물은 초기에 아랍의 무슬림 상인들에 의해서 서구로 운반되었다. 일찍이 카이로에서 말루꾸까지 해로를 개척했던 이들은 말루꾸에서 정향과 육두구를 구입하고, 쟈바 서북부의 반땀(Bantam)에서 후추를 샀으며, 기타의 열대작물은 주로 이방인인 중개상들로부터 구입하는 절차를 거쳤다. 아랍상인들은 향료제도에서 사들인 향료와 열대작물을 지중해를 거쳐 베네치아까지 운반하였다. 무슬림들이 지배하고 있던 아시아 무역망을 손에 넣음으로써 막대한 동양의 부를 한꺼번에 장악할 목적으로 무력을 앞세운 포르투갈이 서구 열강중 가장 먼저 인도네시아 군도로 내도하게 된다.

 

(나) 이슬람 시대의 개막과 말라카의 쇠망

 

말라카 왕국은 이 지역에서 힌두-불교 시대의 막을 내리고 이슬람 시대의 시작을 가져왔다. 이슬람은 아랍 및 인도상인과의 교역과정에서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말라카 왕국은 동남아시아에 이슬람을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무역을 통해 말레이어를 상업용어로 각지에 전해 오늘날의 말레이어와 인도네시아어의 모태가 되도록 하였다. 이슬람교는 말라카로부터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말레이 소국가들로 전파되었고, 교역로를 따라 인도네시아 군도로까지 전해졌다. 이슬람교는 말레이인의 주요 종교로 자리잡으면서 그들의 생활양식과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러나 말라카 왕국은 말레이 술탄 상속체계의 미확립, 식량 등 생필품의 대 자바의존, 지배계급과 민중사이를 연결하는 완충계급 부재 등의 문제로 갈등을 겪다가 1511년 포르투갈의 공격을 당함으로써 몰락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침공하여 말라카시를 점령하면서 말라야는 포르투갈과, 그때까지 말라카 왕국의 지배하에 있던 아체왕국, 부기스, 미낭까바우족의 활동무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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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6세기의 오스만  제국군

 

13세기 말 몽골에 위협을 피해 소아시아에 정착한 투르코만 족은 오스만 1세가 비잔틴 국경지대의 8개의 성과 에스키세히르, 예니세히르를 점령하면서 오스만 공국을 건국했다.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세르비아, 불가리아, 타타르 족의 침공, 대 카탈로니아 용병단의 반란으로 쇠약해진 비잔틴 제국을 약탈, 점령하면서 성장한 오스만 공국은 바야지드 1세(1389~1402년)가 1389년 세르비아 동맹국을 결정적으로 패배시켜 세르비아와 보스니아를 속국으로 만듦과 동시에 술탄 자리에 올라 제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전의 오스만의 군주들은 대공(Emir)의 칭호를 사용했다.) 이후 바야자드 1세 아래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헝가리와 부르고뉴의 연합군을 제압하고(1396년) 콘스탄티노플 코앞까지 진군했으나, 1402년 14만의 병력을 이끌고 서진해 온 몽골의 후예 티무르에게 바야자드 1세가 이끄는 8만 5천명의 오스만 투르크 군이 앙카라에서 패배하고, 이어 바야자드 1세가 티무르 군에 사로잡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혼란기에 빠져들었다.

1413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술탄이 된 마호멧 1세(1413~1421년)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재건했고 무라드 2세(1421~1451년)는 정복전쟁을 다시 재개해 1444년 코소보에서 그가 이끄는 5~6만 명의 오스만 군이 2만 4천명의 유럽연합군을 철저하게 패배시켜 콘스탄티노플을 고립시켰다. 정복자 메멧 2세(1451~1481년)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전성기를 열었다. 이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683년 비에나 공성전이 패배로 끝날 때까지 유럽의 최대위협세력으로 남는다.

전성기의 오스만 군대는 둔전병인 지방 기병대 시파히와 예나체리를 포함하는 술탄의 군대 카피쿨루 군단이 핵심을 이루었다. 이 외에 지원병인 아자프가 전쟁 중 보병으로 참전하고, 여러 속국에서 병력을 지원했다. 전통적인 오스만 투르크 군의 전술은 경기병인 아키닉스가 전초부대로써 정찰, 기습, 유인 등의 임무를 맡고, 아자프는 그 뒤에서 화살로 적군을 약화시키는 임무를, 예나체리는 중앙에 배치돼 참호와 목책, 낙타, 포병대의 도움을 받으면서 아군의 중앙과 술탄을 보호하는 임무를, 지방 기병대인 시파히는 양쪽 날개에 배치돼 적군이 아군의 중앙으로 돌파를 시도하면 적군의 측면과 후방을 강습해 적군을 괴멸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술탄의 친위 기병대인 카푸쿨루 수바릴레이는 시파이의 뒤에 배치돼 필요하면 전장에 투입됐고, 타타르와 세르비아의 기병대를 진영 뒤에 숨겨 갑자기 적군을 기습하는 임무를 맡기기도 했다. 15~16세기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대부분의 전쟁에는 2만~4만 명의 전투병을, 대규모 원정에는 6~8만 명의 병력을 투입했고, 최대 16만 명 정도의 병력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었다.


1.술탄의 군대. 카피쿨루 군단:


원래 술탄의 노예로 이루어진 술탄의 친위대였던 카피쿨루는 보병대인 예나체리를 추가시켜 술탄의 군대로 편성되었다. 카피쿨루 군단은 술탄의 기병대인 카푸쿨루 수바릴레이(Qapukulu Suvarilei, 궁정 기병대)와 정예 보병대인 예나체리를 주력으로 하고, 귀족 및 지방 유력자의 자제들로 구성된 술탄의 호위기병대 무테페리카, 포병대와 공병대가 포함돼 있었다. 15세기 초반까지는 그리스도 교 출신의 전쟁포로들이 카피쿨루의 핵심을 이루었지만 1438년부터는 그리스도 교인의 자식들을 강제징집하는 데브시르메 제도가 정착됐다. 데브시르베 제도는 그리스도 교 40가구 중 1명의 아이를 강제 징집시켜 1년에 1000~3000명을 뽑았는데 주로 농촌지역의 그리스도 교 가정에서 8~15세의 아이들이 징집됐으며, 도시지역이나 해안가, 아들이 1명만 있는 가정, 유태인, 광부, 전략적 요충지의 주민 등은 강제 징집대상에서 제외됐다. 14~18세기 동안 술탄들은 지방군을 견제하기 위해서 점차 카피쿨루 군단의 병력을 늘였다. 메멧 2세(1451~1481년) 치하에서는 카피쿨루 군단 내의 예나체리 병력을 1만 2천명 선으로 늘리고(메멧 2세 초기에는 3000명의 카푸쿨루 슈발레이와 6000명의 예나체리가 존재) 술래이만 1세(1520~1566년)은 카피쿨루 군단의 병력을 4만 8천명으로 증가시켰다. 16세기 중반에 이르면 술탄은 광대해진 제국을 통제하기 위해 예나체리를 주요지역에 주둔시켰는데, 지방에 정착한 예나체리들은 술탄에게 충성을 바치는 대신 그 지방의 유지들과 유착하게 되는 폐해를 낳게 된다.


가. 술탄의 엘리트 기병대. 카푸쿨루 수바릴레이(Qapukulu Suvarilei, 궁정기병대)

카푸쿨루 수바릴레이는 술탄의 친위 기병대로 중무장을 한 기병대였다. 카푸쿨루 수바릴레이는 술탄의 보병대인 예나체리 보다 군사적으로 더 중요한 위치를 담당했으며, 예나체리보다 높은 대우를 받았다.

강제 징집된 그리스도 교 아이들 중 재능이 뛰어난 이들은 시동(ic oglani)으로 뽑혀 토프카프 궁전에서 교육을 받게 하고 나머지는 시파히(지방 기병대)의 집으로 보내져 터키어와 이슬람교를 배우면서 예나체리로 키워졌다. 시동으로 뽑힌 아이들은 궁전학교에서 2~7년 동안 백인 환관장(Kapi Agasi)의 관할 하에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궁전학교에 들어온 시동은 먼저 이슬람교에 관해 배우고 교수(Hocas) 아래서 일반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재능에 따라서 정치, 종교, 혹은 군사에 대해 교육받았다. 이들은 터키어, 페르시아어, 아랍문학, 마상술, 창술, 궁술, 레슬링, 체육, 음악 등을 배웠다. 궁전학교에서는 시동들을 정직하고 충성스럽고, 예절이 바르며,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인재로 키웠다. 교육이 끝나면 시험을 쳐 시동들 중 가장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술탄의 궁전에 들어가 관리로써의 길을 걷고 나머지는 카푸쿨루 수바릴레이의 장교나 일반기병이 됐다.

카푸쿨루 수바릴레이는 6개의 연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가장 먼저 창설된 연대는 좌 용병연대(Ulufeciyan-i yesar), 우 용병연대(Ulifeciyan-i yemin), 좌 외인연대(Guerba-i yemin), 우 외인연대(Guerba-o yesar)로 이 4개의 연대가 궁정기병대의 핵심을 이루었다. 나머지 2개의 연대는 무사연대(silahtar), 와 종자연대(sipahi oglan)로 이들은 카푸쿨루 수바릴레이 내에서도 엘리트로 여겨지는 연대였다. 콘스탄티노플 점령 당시에는 2500명가량의 카푸쿨루 수바릴레이가 있었으나, 16세기 말에는 그 수가 6000명 남짓으로 늘어났다.
각 연대는 ‘케투다 예리’가 지휘했다. 카푸쿨루 수바릴레이에는 전장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전 예나체리, 아랍인, 페르시아인, 쿠르드 이슬람교인 이 편입되기도 했다.


나. 예나체리:

술탄의 정예 보병대. 14세기 중반 무라드 1세가 오스만 투르크 최초의 정규보병대인 예나체리를 창설했다. 예나체리가 창설될 무렵에는 1000명 남짓의 예나체리가 있었으나, 점차 그 숫자가 늘어 15세기 중반에는 1만 여명 술래이만 1세(1520~1566년)치하에서는 2만 명의 예나체리가 있었다. 예나체리는 공성부대만이 철갑옷을 걸치고, 대부분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 15~16세기의 예나체리는 합성궁을 주 무장으로 애용했으나, 15세기 중반부터 총을 도입하기 시작해서 16세기 말에 이르면 대부분의 예나체리가 머스켓 총으로 무장했다. 예나체리는 거의 모든 무기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훈련받았으며, 서유럽의 집단사격전술과는 달리 예나체리는 개개인의 사격능력에 의존하는 전술을 썼다. 예나체리는 능숙한 사수로 이름이 높아서 달이 뜬 밤에도 총으로 목표물을 명중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강제 징집돼온 그리스도교 아이들 중 시동이 되지 못한 아이들은 외국인아이(Acemi Oglan)로 분류돼 예나체리로 키워졌다. 이들은 맨 처음 시파히의 가정이나, 귀족의 가정, 항구, 궁전주방에서 5~7년간 하인으로 일하면서 이슬람교와 터키어를 배우고, 기본적인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후 대부분은 훈련대(Acemi Oack)에 입대해 수학교육과 군사훈련을 받았다. 재능이 뛰어난 이들은 예나체리의 엘리트 사단인 보스탄시(Bostanci, 정원사)사단에 바로 입대하거나, 제독부에 입대했다. 혹은 지원부대인 병기부(Ortas Cebeci), 포병대(Topcu), 대포 수송대(Top Arabaci)에 편입되기도 했다. 16세기 말부터 예나체리의 아들이나 이슬람교 자유민 이 예나체리에 지원할 수 있게 되었고, 17세기 중반에는 그리스도교 아이들을 강제징집하는 데브시르메 제도가 붕괴됐다.

예나체리는 3개 사단 196개 연대로 편성돼 있었다. 예나체리의 주요 3개 사단은 세마아트(Cemaat, 집회)사단, 볼루크(boluk, )사단, 세그멘(Segmen, 사냥꾼)사단이었다. 세마아트 사단은 예나체리 사단 중 가장 규모가 큰 사단으로 101개의 연대로 구성되었는데, 술탄의 호위대인 왼손잡이 연대(Solak ortas)와 술탄의 70개의 영지와 이스탄불의 해안방어를 담당하는 엘리트 사단인 정원사 사단(Bostanci)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세마아트 사단의 예나체리는 새로 점령한 지역에 주둔하기도 했다. 볼루크 사단은 예나체리 사단 중 두 번째로 큰 사단으로 61개의 연대로 구성돼 있었다. 볼루크 사단에는 예나체리 사령관의 호위대 및 이스탄불의 성문을 지키는 주둔군이 포함돼 있었다. 세그멘 사단은 34개의 연대로 구성돼 있었다.

예나체리 총사령관(Yeniceri Agas)은 예나체리 출신으로 궁전학교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 중에 선발됐다. 예나체리 총사령관의 권한은 막강해서 술탄이나 술탄이 임명한 전군 총사령관만이 예나체리 총사령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예나체리 총사령관 이외에 예나체리의 사령부에 속한 장군들은: 세마아트 사단 사령관(Kul Kahyast)과 세크멘 사단 사령관(Sekbanbasi), 이스탄불의 주둔군과 예나체리 훈련대를 관할하는 이스탄불 사령관(Istanbul Agasi), 수석 시종장(Ocak Imami), 재무장(Beythulmalci), 징집장(Muhzir Aga), 술탄의 궁전에서 예나체리 총사령관을 대표한 사령관대리(Kahya Yeri), 예나체리의 훈련을 총괄한 훈련대장(Talimhanecibasi), 예나체리의 처벌과 사형을 담당한 감옥소장(Azar Basi), 예나체리의 행정업무를 총괄한 서기관(Yeniceri Katibi) 등이 있었다.

예나체리의 기본부대 단위는 100~3000명으로 구성된 연대(Orta)로 코르바시(Corbaci, 국 만드는 사람)가 연대를 지휘하고, 아스시 우스타(Asci Usta, 주방장)가 부연대장을, 아스시(Asci, 요리사)여러 명이 아스시 우스타를 보조했다. 그 아래로는 하사관을 맡은 전령(Cavus)과 기수(Bayraktar)가 병사들을 지휘했다. 병사들은 경력에 따라서 3등급으로 나뉘었는데 신입병(Eskinci)이 가장 아래계급이고, 전공을 세운 병사는 고참병(Eskinci)으로 승진했다. 병사들 중 가장 높은 계급은 연금병(Oturak)으로 이 계급에 오르면 결혼이 허가되고, 민간인 직업을 병행할 수 있었다. 연금병은 대게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다. 포병대와 지원부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4세기 말 대포를 도입해, 메메드 1세와 무라드 2세 치하에서 상당한 규모의 포병대를 보유했다. 1440년에는 오스만 군도 서서히 야전포를 갖추기 시작했다. 오스만의 거대한 공성포는 1422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나타나기 시작해 15세기 중반에는 450kg 의 포탄을 1마일 가량 날릴 수 있는 대포가 등장했다. 15세기 중반의 오스만 군이 보유한 대포는 200~300문 정도였다. 15세기 중반의 공성포는 하루에 10발 정도의 포탄을 발사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오스만의 포병대는 서유럽의 검은색 연기가 나는 화약보다 우수한 흰색 연기가 나는 화약을 사용했다. 오스만 군의 포병대는 공격하기 바로 전에 다수의 대포가 차례대로 대포를 쏘고, 대포를 장전할 때는 엄폐물 뒤에 숨어 자신을 보호했다. 그 다음에는 중간 크기의 대포가 적군의 요새를 약화시키고, 마지막으로 거대한 공성포가 적의 요새에 결정타를 가하는 방식으로 포격을 가했다. 오스만의 대포는 나무로 만든 지지대를 높이거나 낮추어서 대포의 사정거리를 조정했다. 17세기에 이르면 오스만 군은 포도탄(일종의 산탄)과 폭죽 등을 대포에 쓰기 시작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군의 포병은 대부분 중앙군 카피쿨루 군단에 속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점령 이후 메멧 1세는 카피쿨루 군단의 포병대를 포병연대(topcu ocagi)와 대포의 수송임무를 맡는 수송연대(top arabacilari)로 나누었다. 1575년 카피쿨루 군단의 포병연대의 포수는 1000명 정도였고, 17세기 말에 이르면 포수의 숫자는 5000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포병대를 보조하는 부대는 구포부대 , 수류탄부대, 땅굴부대, 폭탄부대를 포함하고 있었던 야전공병연대(humbaracilar), 와 공성공병연대(lagimcilar)가 있었다. 이 중 야전공병연대는 구포(곡사포)와 유리나 쇠로 만든 폭탄, 유리나 청동으로 만든 수류탄을 주 무기로 사용했다. 공성공병연대는 군대 내의 노동자들을 통제했고, 공성 시에는 땅굴을 파고 폭약을 성벽이나 성문에 폭약을 설치하거나, 참호를 만드는 등의 임무를 맡았다.

이 밖에 카피쿨루 군단에 속한 지원부대는 병기부대(Cebecis), 물 배급부대(Saka), 장인부대(Karhane)가 있었다. 병기부대는 600여명의 기술자가 무기의 수리, 무기의 보급 등의 임무를 맡았다. 물 배급부대는 카피쿨루 군단의 의무병으로 전투 중 부상당한 병사를 후방으로 옮기거나, 부상자를 돌보는 일을 했다. 장인부대는 34개의 중대로 이루어진 기술자 부대로 검 제작공, 양털 제작자, 초장이, 화살 제작자, 포목상, 편자 제작공, 비단공, 약사, 구리 제작자, 주석 제작공, 빵 만드는 사람, 약사, 신발공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2.봉건기병 시파히: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봉건기병. 오스만 군에서는 봉건기병 시파히가 군의 주력병력이었다. 15~16세기에는 4만 명 안팎의 시파히가 전쟁에 참가했다. 시파히는 보통 중무장을 했으나, 중앙군의 기병대 카푸쿨루 수바릴레이에 비하면 가벼운 무장을 했다. 시파히는 보통 체인메일에 주요부분을 철판으로 덧댄 메일 플레이트 갑옷, 화살, 창, 방패, 칼 등으로 무장했고, 보조 무기로는 메이스를 애용했다. 서유럽의 기사처럼 영지 티마르(timar)가 내려져 기병으로써의 무장을 갖추게 했으나, 서유럽의 기사와는 달리 시파히에게는 자신의 영지에 제한된 권리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시파히는 자신의 땅을 직접 경작해야 했고, 자기 영지 주변의 주민들에게 돈을 주고 물건을 사야했으며, 국가에서는 시파히에게 봉급을 주지 않았다.

시파히는 소아시아 혹은 유럽지역에 정착했는데, 시파히가 하사받은 영지는 연간 수입 750에스퍼(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은화)에서 2만 에스퍼 사이의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시파히는 영지에서 나오는 세금의 일부와 영지에서 나오는 농산물 중 5분의 1~3분의 1 정도를 받았다. 영지의 규모에 따라 각 시파히는 일정한 숫자의 기병을 데리고 참전해야 했는데 연간수입 1500~3000에스퍼(소아시아 지역) 혹은 6000 에스퍼 (유럽지방)이상의 영지를 가지고 있는 시파히는 잘 무장한 기병인 종자와 경무장을 한 노예기병 한 명씩을 거느리고 참전할 의무가 있었다. 부유한 영지를 가진 시파히는 15명의 기병을 이끌고 참전했고, 최대 50명의 기병을 이끌고 참전하는 시파히도 있었다.

전쟁에 참가하는 시파히는 1000명의 기병을 지휘하는 점호장(alay bey)밑에 편입됐다. 점호장은 시파히 중 가장 높은 계급으로 각 속주의 기병을 소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점호장 밑에는 기수(beyrak-dar)와 수위장(cavus) 점호장을 보좌했다. 한 속주에서는 보통 1000~3000명의 시파히를 소집할 수 있었는데 각 속주의 총독(sancak bey)은 휘하에 1~3명의 점호장을 거느리고 있었다. 총독은 20명 이상의 시파히로 구성된 친위대를 데리고 다녔으며, 속주의 행정업무와 군사를 총괄했다. 이와 더불어 총독은 각 주요도시에 경찰총장(subashis)을 임명했다. 경찰총장은 전시에는 100~수백명의 병력을 지휘했다. 100명을 지휘하는 사람은 중대장(ceri-bashi)로 주로 부유한 영지를 가진 시파히가 중대장을 맡았다. 중대장 아래로는 10명을 지휘하는 십장(ceri-surucus)이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시파히 10명 중 1명이 후방에 남아 세금징수를 하고 영지의 방어를 맡았다.


3. 속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속국들은 오스만 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의 초기인 14~15세기에는 오스만 군중 속국의 병사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다. 오스만 제국 의 속국 대부분은 주요도시가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한 다음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속국 귀족의 자제들이나 터키 귀족의 자제들은 술탄의 호위 기병대인 무테페리카(Muteferrika)에 소속돼 오스만 제국식의 교육을 받으면서 인질의 역할을 했다. 발칸 반도의 여러 기독교 속국들은 그리스도 교 5~10가구에 1명의 기독교 중장보병 보이누크(voynuk)를 제공했다. 속국의 중장기병은 기독교 군주가 자신의 직할부대를 제공하거나, 오스만 제국에서 면세를 받거나 영지를 하사받은 이들이 중장기병으로 참전했다. 기독교 속국에서는 최대 5만 명의 병력차출이 가능했다.

크림 칸국의 타타르 족은 궁기병을 오스만 제국에 제공했다. 대부분의 타타르 부족민은 가난했기 때문에 대게 보병으로 참전했다. 타타르 족의 칸은 칸의 직할지에서 뽑은 20개 중대의 말탄 총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칸의 직할부대 이외에 타타르 족 귀족들의 병력이 타타르 군의 다수를 차지했다. 코사크 인은 4개의 바퀴가 달린 무거운 마차를 연결해 요새를 만들고 그 위에 가벼운 대포와 총병을 배치하는 야전요새를 애용했다. 코사크 인은 전투용 카누를 이용해서 우크라이나 의 강을 지배했다. 동부 소아시아의 쿠르드 족은 1514년 오스만 제국의 속국으로 편입돼 기병을 제공했다.

중동의 속국들은 대부분 자국의 방위목적 이외에는 오스만 제국에 병력을 파견하지 않았다. 대부분 중동의 속국들은 반독립 상태를 유지해 소수의 예나체리를 제외하고는 오스만 제국군이 주둔하지 않았다.

속국은 또한 무기를 만드는 자원을 제공했다. 세르비아에서는 대포를 제작해 오스만 제국에 상납하고, 몰도비아, 트란실바니아, 왈라키아에서는 머스켓 총을 만드는 나무, 짐말, 주석, 초석, 밧줄등을 오스만 제국군에 상납했고, 쿠르드 족, 이라크, 레바논에서는 심지, 유황, 초석 등을 오스만 제국군에 상납했다.


4.비정규군:

오스만 군의 비정규군은 크게 보병 지원병인 아자브(azab, 젊은 남자), 적군 영토를 약탈하는 목적으로 쓰인 경기병 아킨지스(akinjis, 약탈자), 각 지방의 방위를 책임지는 각종 경비대 등으로 나뉘었다.

아자브는 전쟁기간 동안 보병으로 지원한 병사들로, 전쟁이 끝나면 언제든지 군대를 떠날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최대 4만 명의 아자브를 동원할 수 있었다. 아자브는 주로 활로 무장을 했고, 칼을 갖고 있거나 막대기로 무장한 아자브도 있었다. 아자브는 아군이 전투 진형을 짜기까지 화살로 적군을 묶어두는 임무를 맡았다. 원래 아자브는 전쟁중에만 봉급을 받았으나, 14세기말에는 항상 봉급을 받으면서 요새에 주둔하는 아자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16세기부터는 국경지방의 속주에 사는 모든 이슬람교인이 주둔군 아자브나 해군 아자브로 징집될 수 있었다. 베야지드 2세 치하에서 국경지방의 20~30가구의 주민들이 한 명의 아자브를 지원하는 제도가 정착됐다.

아킨지스는 원래 투르크 족의 전사 출신으로 이루어졌던 궁기병 부대로 1362년부터 국경지방의 주요 전략 요충지에 배치돼 적국의 영토를 약탈하는 임무를 맡았다. 전쟁 중에 아킨지스는 본대보다 먼저 적군의 영토에 진출해 적국 영토의 약탈, 적군의 통신망 교란, 정찰, 주요도로 확보 의 임무를 맡았다. 평상시에는 적국의 약탈로부터 국경지방을 방위했다. 아킨지스는 점령이 어려운 산악지대에 투입되거나, 점령이 어려울 경우, 반란군이나 적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다. 아킨지스는 투르크의 족장들이 지휘했고, 아킨지스는 족장에게 봉급을 받거나, 약탈로 생계를 이어갔다. 오스만 제국은 최대 3만 명가량의 아킨지스를 동원할 수 있었다. 아킨지스는 10단위로 구성돼 있었고(10명, 100명, 1000명),보통 2마리의 말을 끌고 다녔다. 아킨지스는 창과 활, 세이버로 무장했다.

오스만 제국에는 아자브와 아킨지스 외에 각 지역을 방위하는 비정규군이 존재했다. 고눌루얀(gonulluyan, 지원병)은 각 지방에서 주요도로의 순찰과 요새의 방위를 맡은 지원병으로 기병과 보병을 소유하고 있었다. 마르톨로(martolo)는 발칸 반도에서 세금을 면제받으면서 지방군으로 주둔한 부대였다. 고눌루얀과 마르톨로는 대게 소규모로 수백명 이하의 병사들이 지방의 경비 군으로 활약했다. 마르콜로와 고눌루얀 중 일부분은 갑옷을 착용했으며, 창, 칼, 방패, 총 등의 무기로 무장했다.


5. 해군:

오스만의 해군은 동지중해의 사라센과 비잔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수백 년간 오스만은 이탈리아 및 서지중해 국가들과 비슷한 형태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오스만 해군의 주요임무는 육군을 수송하고 가능하면 해안포격으로 육군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또한 오스만 해군은 제국의 방대한 해안선을 방어하고, 기독교 해적의 안식처였던 지중해 여러 섬을 장악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4세기 초반 카라시 공국과 다르나넬 공국을 점령하면서 비잔틴 제국 출신의 선원과 투르크 전사들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해군을 창설했다. 15세기 중반부터 오스만 제국은 동지중해에서 베네치아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해군을 건설했다. 1470년 오스만 해군은 92척의 겔리 선을 보유해 흑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15세기 말에 이르면 오스만 해군에 소속된 배는 500척에 육박했다. 1499~1502년 베네치아와의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은 60척의 3단 겔리 선, 30척의 푸스타에 선, 3척의 대형 겔리선, 2척의 대형 카락선, 18척의 소형범선, 보급선 127척에 총 선원 수 3만 7천명을 동원했다. 오스만이 베네치아와의 전쟁에 참가시킨 2척의 대형 카락은 1080톤에, 2층 갑판, 탑승인원 1000명의 대형선이었다.

오스만은 1421~1430년 경 해전에 대포를 도입해 15세기 베네치아 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배들이 그들의 배보다 더 낳은 대포로 무장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15세기 오스만 제국의 겔리 선은 대형포로 무장하고 소형 노선인 푸스타에 선은 다수의 소형포를 장착했다. 오스만 해군은 화약무기를 도입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함선으로 홍해와 아라비아 만, 인도양의 재해 권을 장악하고, 포루투갈와 에디오피아의 해군을 견제할 수 있었다. 1511년 오스만 제국은 홍해함대를 현대화했고, 1525년에는 수에즈에 1530년에는 아라비아 만의 바르사에 해군기지와 조선소를 건설했다. 이어 알제리와 튀니스를 합병해 오스만의 해군은 서유럽을 위협했다. 17세기에 이르면 오스만의 지중해 함대는 북 아프리카 함대, 이집트 함대, 에개해 함대가 포함돼 있었다.

오스만의 해군은 오스만의 해양 속주에서 지원했다. 겔리 선의 선원들은 그리스, 알바니아, 북아프리카, 달마티아, 터키 해안가에서 징병됐다. 겔리 선의 노 젓는 사람들은 전쟁포로나 범죄자가 주를 이루었다. 이외에도 범선을 전문으로 하는 선원들은 칼욘실러(kalyonciler, 갈레온 선원)라고 불렸다. 15세기의 오스만 해군은 선박 수에서 서유럽을 압도했고, 강력한 함선과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선원의 질이 서유럽보다 떨어졌다.

오스만 제국은 강에서 활약하는 함대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중 다뉴브 함대는 60~200척의 소형선을 보유하고 다뷰브 강에서 병력수송, 대포운반, 육군의 지원 등의 임무를 맡았다. 모라바 함대는 80~100척의 겔리선, 겔리엇, 보트로 기병과 보병을 수송했다. 300명의 상비군이 항상 모라바 함대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6. 전략, 전술:

오스만 제국은 많은 정복전쟁을 치루면서 점차 계획적이고, 유연한 전략을 수립해갔다. 전쟁은 그 전 해의 10월~11월에 계획을 시작해서 다음 해 8~9월에 전쟁을 시작했다. 군 사령부는 이전 전투의 기록과 옛 군인들의 목격담을 조사하고, 막대한 양의 보급품을 준비했다. 지방군의 동원령은 12월에 내려져 동원령을 받은 지방군은 이스탄불, 베오그라드, 코르틴 등의 도시에 집결했다.

전쟁이 시작되면 술탄의 깃발이나 재상의 깃발이 토프카피 궁전에 세워졌다. 진군로에 있는 도로와 다리는 수리되고 다리가 없는 강에는 다수의 거룻배를 띄워 다리를 대신했다. 오스만 군은 해질 때 행군을 시작해 정오에 야영지를 세웠다. 행군 중에는 먼저 경기병대가 정찰을 하고 중무장한 엘리트 기병대가 그 뒤를 따랐다. 기병대의 뒤로 보병대와 기술자 부대가 따르고 부대의 측면과 후위는 기병대가 보호했다.

오스만 군은 보병이 중앙을 방어하는 동안 기병이 적군의 측면이나 후방을 강습해 섬멸하는 방어적인 전술을 애용했다. 16세기 초 오스만 군은 경기병대가 적군을 아군의 보병대 앞으로 유인해 오면 아자프와 예나체리, 포병대가 적군을 사격하고 기병대가 적군의 측면을 돌파하는 전술을 썼다. 예나체리의 전술은 일단 적군을 사격하고 쐐기꼴의 진형을 이루어 적군에게 돌격하는 방식을 썼는데, 당시 예나체리의 돌격은 무적으로 알려졌다.

오스만 군은 전투마차를 야전요새로 애용했는데, 각 마차는 2마리의 노새가 끌고 각 마차에는 총병과 작은 대포가 배치됐다. 마차의 밑에는 탄약상자를 넣고 필요하면 마차 여러 대를 체인으로 연결해 야전요새를 만들 수 있었다.

오스만 군이 공성전을 치룰 때는 궁병과 총병이 성을 향해 사격을 가해 적군이 성 뒤에 숨게 함과 동시에 사다리 부대가 성벽으로 접근했다. 장기간의 공성전을 치룰 때는 깊은 참호를 파 계속 성벽 쪽으로 서서히 전진하고 30~100명의 지원자로 이루어진 각 공성부대가 제한된 임무(가령, 성문 밑에 폭약을 설치한다던가)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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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지역 베두윈(유목민)의 생활과 문화

 

우리가 중동하면 떠올리는 친근한 풍경은 양이나 염소를 몰며 사막을 오가는 유목민 무리의 모습이다. 현대에 들어와 그 비율이 감소하고는 있지만 유목은 전통적으로 중동 지역의 대표적인 삶의 방식이며 이 지역 문화의 모태였다. 건조한 사막 기후라는 자연 환경의 여건상 중동인들은 옛부터 유목을 생업의 하나로 삼아 왔으며 이에 따라 오늘날 그들, 특히 아랍인들의 사고와 삶의 방식은 유목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중동인들의 삶과 문화에 대한 관찰은 국제정치·경제 등 각 방면에서 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 지역 주민들의 의식구조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수세기 동안 중동 사회는 세가지 유형의 공동체 즉 베두윈, 정착 농경민, 도시 주민으로 구분되어 왔다. 현재 이곳 주민의 50%가 농업에 종사하고, 45% 이상이 도시거주자이며 5% 미만이 유목민이다. 이들 세 부류의 생활방식에서 특히 베두윈이 도시 문명의 영향에 동화되지 않은 채 자체의 전통적인 생활형태를 지속해 왔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유목민들 중에는 매년 농업 종사자로 정착하거나 도시 직업을 구하는 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유목민들이 정착민으로 변화하는 과정에는 강력하게 중앙집권화된 정부의 성장과 서구 기술의 영향이 크다.

 

끊임없이 이동하는 필연적인 삶의 방식에 따라 베두윈의 물질 문화는 빈약하다. 이들의 주요 재산은 자신이 기르는 동물과 거처인 천막에 불과하다. 천막 기둥의 수가 보여주는 천막의 크기는 그 소유자의 부와 사회적 지위의 표시가 된다. 그들은 빈번한 이동으로 인해 적은 양의 생활 필수품만을 갖고 다닌다. 의복 또한 거친 재료로 된 긴 겉옷이 주 복장이며 겨울에는 낙타털로 짠 천으로 만들어진 외투가 고작이다. 양이나 염소, 낙타, 말을 기르고 그 부산물인 우유, 버터, 치즈 및 양모를 팔아 생계를 해결한다. 특히 낙타는 젖과 고기, 의복과 천막 재료를 제공하고 운송 수단으로 매우 중요하다.

 

중동에서 석유가 발견되고 수자원이 개발되기 이전에 사막은 유목민에게 근근히 생계를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부족만이 있었으며 보다 큰 규모의 정치 구조는 존립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대규모 사회는 행정·군사 및 비생산적인 부문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잉여 식량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부족이 감당하는 주요 임무는 구성원 개개인을 타집단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부족은 혈족 간의 단결을 강조하고 집단 유대와 상호 책임을 최상의 가치로 내세움으로써 유지되었다. 이러한 소규모 사회에서는 집단 의식이 우선시되며 개인은 집단의 도덕률을 준수하며 살아야 하는 부담을 져야 했다. 개인은 집단의 규율을 따르며 자신의 이익을 집단의 이익과 일치시킴으로써 집단이 개별 성원에게 제공하는 지원에 보답해야 했다. 따라서 유목 집단에서는 중앙정부에 대한 충성보다는 소속 부족에 대한 충성이 더욱 중요시 된다. 부족민은 자신들만의 법을 가지고 있으며 중앙정부의 정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들은 세금 납부나 의회법률의 인정, 군복무, 국경 준수를 거부하기도 한다.

 

오늘날 아랍세계에서 시골과 도시의 많은 주민들은 자신들의 근본이 베두윈이라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주목을 끄는 점은 많은 정착민들이 베두윈 기풍을 행동양식의 이상적인 귀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상 서구화에 탐닉한 일부 아랍인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아랍인들은 베두윈을 과거의 영광된 아랍 영웅시대의 계승자이며 살아있는 증인으로 우러러 보고 있다. 다마스커스를 비롯한 도시의 명문가에서는 자식을 한두해 동안 사막 유목민에게 보내 예절과 가치관을 배우도록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아랍 베두윈이 전통적으로 중시하는 대표적인 도덕적 가치는 환대에서 나타나는 관대함이다. 손님에 대한 환대는 가난한 베두윈들도 행하는 숭고한 덕목으로 오늘날에도 아랍 도시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인상적인 관습이다. 극진한 환대를 베푼 자는 이를 통해 자신의 위신을 높인다는 것 외에 잠재적인 고객과, 부족 분쟁시의 정치적 협력자를 확보하게 된다. 결국 환대는 궁극적으로 베두윈 최상의 목표인 집단 강화를 위해 활용된다. 환대의 관습은 사막이라는 절박한 환경에서 생겨났다. 사막에서 집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개인은 그 생명을 보전할 수가 없다. 사막이 그를 죽이든지 그와 마주치는 사람들 무리가 그를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길잃은 개인을 맞아주고 보호하는 것은 서로의 생존을 위해 당연한 일이 되었다. 환대의 규율에 따라 도망자도 손님이 되며 주인은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그를 지켜주어야 한다. 이러한 환대의 관습은 오늘날 촌락과 도시 생활에서도 변형된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즉 결혼, 장례, 할례, 건물 완공, 라마단(이슬람교 금식의 달) 기간 등의 행사를 맞이해 주인은 주민들, 특히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타인에게 물질을 베푸는 관대함의 관습은 전통적인 아랍사회에서 빈부 격차가 존재하며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고 있음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아랍인들에게 남아있는 베두윈 문화의 잔재 중 대표적인 것은 그들의 육체노동에 대한 멸시에 가까운 기피의 태도이다. 오늘날까지 아랍 유목민들과 일반인들 중에는 농사나 기능직에 종사하는 것을 불명예스런 일로 생각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편안한 생활을 선호하며 근육을 사용하지 않는 일을 좋아하는 아랍인들의 성향은 아랍문화의 서구화 과정에 있어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이집트 사회에서 육체노동의 낮은 위치는 계급 의식을 조장하고 협동과 대화, 발전의 기회를 가로막고 있다는 전문가의 지적이 제기된 바도 있다. ‘인간은 이마의 땀을 흘리고서야 빵을 먹을 것’이라는, 성경 창세기에 반영된 중동 지역의 신화는 아랍 베두윈들의 노동관을 보여준다. 곧 그들에게 있어 노동은 신이 인간에 내린 징벌과 저주의 결과이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르는 기간 중 중동지역의 행위 규범에서 이상적인 것은 가능한 한 육체노동을 피하고, 요행이나 상업 활동에 의해 부를 얻는 것이었다. 중세 아랍의 생활과 가치관, 신앙 등을 반영한 아랍의 고전 『천일야화』에는 힘든 노동으로 살아가는 것은 인간에게 닥치는 최악의 운명임을 암시하는 내용들이 산재해 있다.

 

일부 학자들은 베두윈의 자유로운 삶과 용맹, 남성다움, 명예를 중시하는 그들의 가치관을 강조하며 그들의 생활을 낭만적으로 기술하기도 한다. 아랍 베두윈의 사회적 관습은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이 지켰던 관습과 매우 유사하고 베두윈의 언어는 가장 순수한 아랍어라는 점이 부각되기도 한다.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 베두윈 사회가 위축되고 그 낭만적인 모습도 점차 사라져 가겠지만 베두윈 문화는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순수와 이상의 상징으로서 이 지역 주민들의 삶 속에서 계속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김능우·한국외대 아랍어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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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경 아라비아반도는 비잔티움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세력다툼으로 전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파르티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로마와 파르티아, 파르티아를 무너뜨리고 그들을 대신한 사산조 페르시아는 전쟁상태에 있었는데 이들 세력들 사이에서 아라비아 사막지대에 거주하던 아랍부족들은 양측간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자본을 축적했습니다. 당시 아라비아반도는 로마인들이나 페르시아인들로부터 별볼일 없는 땅으로 여겨졌습니다. 이곳에는 로마인들의 눈으로 보기에 여전히 미개한 풍습들이 남아있었으며, 가증스러운 수백개의 우상을 세워놓고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메카는 많은 오아시스 도시들 가운데서 가장 큰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570년경에 예언자 무함마드(محمد = 마호메트)가 태어납니다. 그는 어린시절에 고아가되어 상인이었던 삼촌의 손으로 자라게 되는데, 이후 삼촌의 직업을 물려받아 상인이 된 그는 26세때 가게주인인 15세 연상의 카디자와 결혼해서 가족을 이룹니다. 그러다 40세 무렵 그는 영적인 명상을 위해 메카 외곽의 히라 동굴에 들어갑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번쩍거리는 광채와 함께 천사 가브리엘을 만나, 그로부터 신의 계시를 받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완전 딴사람이 되어 메카의 시민들에게 예언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이미 돈맛을 볼때로 본 메카 귀족들은 무함마드와 추종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으며, 박해에 이기다못한 그들은 622년,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피신합니다. 이를 히지라 (هجرة) 라고 부르며 이슬람력의 기원 원년으로 삼습니다. 무함마드는 스스로를 하느님(아랍어: 알라)이 보낸 최후의 예언자라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그의 사상이나 이슬람 경전 꾸란(القرآن)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나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과 일치합니다.

 

꾸란의 첫장인 개경장(Al-Fatiha - الفاتحة). 개경장에는 이슬람신앙의 핵심이 들어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나이다. / 그 분은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분이며 / 심판의 날을 주관하시도다 / 우리는 당신만을 경배하며 당신께만 구원을 청하노니 / 저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 그 길은 당신께서 축복하신 길이며, 노여움을 받은 자나 방황하는 자가 걷지 않은 길이나이다. /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는 포교활동과 부족간의 분쟁조절, 그리스도교국인 에티오피아왕의 보호를 통해 세력을 이룹니다. 그는 메디나의 대표자가 되었으며 이윽고 메카와의 전투를 시작합니다. 624년 5월 17일, 메디나군과 메카군은 바드르에서 전투를 벌입니다. (غزوة بدر) 이 전투에서 메카군은 무함마드 군의 일방적인 돌격에 큰 피해를 입어 전승에 의하면 '70명이 전사하고, 70명이 사로잡히는 큰 피해'를 입었다고 전합니다. - 이슬람학자들은 이는 메카 총전력의 15~16%정도로 추측합니다 - 바드르전투는 꾸란에도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대가 한심하리만큼 적은 병력을 갖고 있었을때 그대를 바드르에서 도왔다. 그 분은 그대가 감사해하는 것을 보고 그대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대가 믿음에 대해 말하였던것을 기억하라. "하느님께서 3000명의 천사를 보내어 그대들을 도와줘도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그대가 굳건하게 믿음을 갖고, 올바르게 행한다면 적이 그대를 향해 빠른속도로 밀려 올지라도, 그대의 주님은 무시무시한 5000명의 천사를 보내어 그대를 도울것이다." - 이므란(가족장) 3:123~125

 

무함마드 시대 아랍인들은 동시대 비잔티움인이나 페르시아인에 비해 지극히 가벼운 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위 그림은 무함마드시대 무슬림 전사들의 모습을 고증한 그림으로, 왼쪽부터 지휘관, 복합궁을 들고 있는 아랍인 궁사, 무슬림에게 우호적인 베두인 족장의 모습입니다. 이슬람하면 떠오르는 언월도는 아직 없었고, 체인메일을 착용한 경우가 일부 보이지만 돈이 많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전사들만 국한되었습니다. 흥미있는 점은 그림 뒤의 낙타안장에 가죽으로 된 등자가 달려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아랍인들에게 등자가 알려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썩어서 남아있지 않는 가죽등자는 사용했을 법 합니다. 메카와 메디나 사이의 분쟁은 시간이 흐를수록 뛰어난 전략전술을 구사하는 동시에 많은 부족들과 연합한 무함마드에게 유리하게 돌아갔고 결국 630년 무함마드의 군대는 메카를 정복하고, 까바 신전에 모셔져 있던 수백개의 우상을 모조리 때려부수고 난 다음, "하느님 외의 신은 없다!" 를 선언합니다. 이 선언은 세계사의 구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으며, 새로운 문화권의 탄생을 선언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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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2년, 예언자 무함마드는 메카를 정복하고 얼마 되지 않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이때 무슬림공동체는 아라비아반도 전체에 확대되어 있었지만 구심점을 잃은 무슬림공동체는 곧 분열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무함마드의 장인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인 아부 바크르(573 ~ 634.8.23 - ابو بكر الصديق)는 무슬림들에게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합니다. "무함마드만이 사도는 아니며. 많은 사도들이 그 이전에 존재했다. 만일 그가 사망하거나 살해당했다면, 그대들은 발길을 돌려버릴 것인가? 누구든 그의 발꿈치를 돌린다 한들 하느님께 해를 끼치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감사해하는 이에게는 그분께서 즉시 상을 내려 보상하시리라." - 이므람 3:144

 

17세기에 필사된 화려한 장식을 한 <코란>의 모습. 코란은 아부 바크르의 시대에 최초로 수집되기 시작해서 우스만 시대에 완성되었는데, 이시기의 코란 필사본과 오늘날의 것을 비교해 봤을때 전혀 차이가 없다고 한다.

 

이후 이슬람공동체는 그를 '공동체의 봉사자'(خليفة 할리파=칼리프)로 선출하고, 그를 중심으로 다시 단결하기 시작합니다. 아부 바크르 사후 이슬람공동체는 오마르, 우스만, 알리까지 3명의 할리파를 선출하게 되는데, 이 시대를 일컫어 '정통칼리프 시대'(632~661 - الخلفاء الراشدون)라고 부릅니다. 당시 중동의 구도를 비유하면, 두마리의 사자와 호랑이가 - 비잔티움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 피터지게 싸우다가 둘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는데 갑자기 웬 하이애나가 - 이슬람제국 - 나타나 기지개 켜고 일어나는 형국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이애나는 사자와 호랑이를 모두 건드려 손쉽게 승리를 거둡니다. 위의 그림은 정통 칼리프시대의 이슬람군대의 모습으로, 1번 인물은 '후원자,지지자'라는 의미의 안사르 전사(الأنصار)이고, 2번 인물은 무슬림군대와 싸우던 페르시아 기마궁사의 모습인데, 그의 말에는 목재 등자가 달려있습니다. 오늘날 남아있는 유물은 없지만, 등자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있어보입니다. 3번 인물은 북아프리카의 유목민족인 베르베르족 전사로 갑옷은 입지 않고 있으며 창과 투석기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9세기경 필사본에 등장하는 비잔티움군대와 이슬람군대의 모습

 

아부 바크르가 이끄는 이슬람군대는 동시대 비잔티움군이나 페르시아군과 비교해 보았을때, 지극히 빈약한 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군대는 거의 대부분이 말과 낙타를 탐으로써 그들의 적이 가지고 있지 않은 뛰어난 기동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비잔티움군이나 페르시아군이나 사막지형에는 익숙하지 않았고, 또한 양측군대가 대부분 전방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남쪽의 방어는 취약한 상태였습니다. 아부 바크르의 군대는 이라크 남부를 통해 먼저 사산조 페르시아를 공격하고, 634년 유능한 족장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592~642 - خالد بن الوليد)의 군대가 비잔티움,페르시아 연합군을 피라즈에서 대파함에 따라 이라크 정복을 완료합니다. - 오마르의 통치시기인 651년에는 페르시아 제국 전체를 병합하기에 이릅니다. - 이윽고 말머리를 비잔티움제국으로 돌려 634년 9월에는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를 함락시키고, 637년 10월에는 알레포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시리아 전체를 정복한 뒤, 이어서 654년에는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시칠리아까지 진출하기에 이릅니다.

 

이슬람제국의 무한확장 - 자주색 영역은 무함마드 시대의 영역, 짙은 핑크색 영역은 정통 칼리프시대에 확대된 영토이며 상아색으로 칠해진 영역은 우마이야 왕조시대에 확대된 영역을 나타낸다.

 

세례자 요한의 유골이 안치되어있고, 로마 교황으로써는 최초로 2001년 이슬람사원을 방문한것으로 유명한 시리아 우마이야 모스크의 모습. 715년에 현재 모습으로 완성되었지만 이곳은 그 이전부터 그리스도교도와 무슬림이 함께 공유하던 장소였다.

 

이집트를 정복한 무슬림들이 세운 군사도시 알 푸스타트(الفسطاط)의 유적. 이 도시는 한때 20만명이 거주했던 이집트의 수도였으나 1168년, 십자군의 침공을 우려한 파티마왕조의 재상 샤와르(شاور بن مجير السعدي)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슬람공동체가 그토록 빠른시기에 중동전역에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비잔티움과 페르시아가 긴 소모전으로 국력을 소모한 탓도 있지만, 비잔티움제국의 경우 이집트와 시리아 일대에 퍼져있던 아리우스파와 콥트교등 단성론파를 이단으로 여기며 탄압한 탓도 있었습니다. 단성론파 그리스도교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인정하는 삼위일체론과 예수의 신성성을 부정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비잔티움황제가 예수의 대리인임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와 정면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탄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교의 유일신 사상은 이들 단성론파가 주장하는 바와도 상통하는 바가 있었으며, 또한 무슬림들은 세금만 꼬박꼬박 내는 한 어떤 종교도 믿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으므로 오히려 그들의 정복을 환영하고 협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초기의 민주주의적인 성격을 띄었던 이슬람공통체는 661년, 무와이야(602~680 - معاوية بن أبي سفيان) 가 쿠데타를 일으켜 마지막 정통칼리프 알리를 암살하고 우마이야 왕조를 개창함으로써 비잔티움제국과 같은 신성제국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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