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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국내에서의 성경번역 / 구약

 

 

창세기말라기 완역, 10년 땀이 필요했다

 

국내에서 최초의 신약 번역본인 신약젼셔1900년 출판된 후 자연스럽게 구약성경 번역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구약 시편이 번역되기 시작했는데, 그 첫 책이 1898년 삼문출판사가 펴낸 피터스(Alexander A Pieters·彼得·18721958)의 사역본 시편촬요였다. ‘촬요(撮要)’라는 말이 암시하듯이 이 책은 시편 전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저주시편을 제외한 62편만을 번역한 역본이지만 한국에서의 구약번역의 효시가 된다. 시편은 구약 일부가 역간되기까지 8년간 유일한 구약역본으로 사용됐다. 피터스는 한국에 온 유일한 유대인 선교사로서 시편을 번역하기에 적절한 인물이었다. 그는 후에도 구약성경 번역위원, 혹은 수정위원으로 활동했다.

   

구약성경 번역 착수

 

1900년 이후 구약성경도 분담하여 번역하기 시작했는데 아펜젤러는 창세기를, 언더우드는 시편을, 게일은 잠언과 사무엘서를, 스크랜튼은 이사야서를, 레이놀즈는 여호수아서를 맡았다. 그러나 번역작업은 지체되거나 번역자들이 교체되기도 했다. 또 하디(R A Hardie) 마펫(S A Moffett) 노블(W A Noble) 등의 선교사들이 번역위원으로 선임되었으나 단기간 일하고 사임했다. 이런 상황에서 구약성경 번역을 신속히 추진하기 위해 레이놀즈와 두 사람의 한국인 김정삼과 이승두에게 구약성경 번역 책임을 일임했다. 두 한국인이 공식적인 성경번역 위원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레이놀즈가 거주하던 전주에서 번역작업에 몰두했다.

 

구약번역 작업은 10여년이 소요돼 191042일 드디어 번역을 완료했다. 그 결과 1911년에 이미 출판된 신약성경과 구약이 묶어져 셩경젼셔라는 이름으로 빛을 보게 됐다. 물론 구약젼셔가 출판되기 이전 낱권으로 창세기, 시편(1906), 잠언, 출애굽기, 사무엘전후서, 말라기(1907), 열왕기상하, 이사야서 번역본(1908)이 출판됐으나 이제 이 모든 책들이 한권으로 묶어 구약젼서로 간행된 것이다. 미국성서공회는 이 책을 상(창세기역대하), (에스라말라기) 두 권으로 출판했다. 이것이 한국에서 출간된 최초의 성경전서다. 그래서 올해는 한글성경 완역 100주년이 된다. 이 번역본은 성경원문을 참고했지만 1901년 미국에서 출판된 미국표준역(ASV)을 주로 참고했고, 한문성경을 참고한 흔적도 짙다. 이 번역이 이루어지기까지 언더우드, 게일, 레이놀즈, 그리고 한국인 김정삼, 이승두의 노고가 컸다.

 

구약성경 개역 착수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성경도 완전한 것은 없다. 어떤 이들은 흠정역 성경은 완전한 것처럼 말하지만 이 책에도 여러 가지 오류가 있었고 계속적인 수정 작업이 필요했다. 최초의 한글성경 완역본 성경젼서가 출간되자마자 수정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특히 구약개역이 시급했으므로 1911구약 개역자회(The Board of Revisers)’를 구성했다. 개역작업은 긴즈버그(C D Ginsburg·1908)가 편집한 대영성서공회 발행의 히브리어 성경이 사용됐다. 이 작업에 헌신한 이들이 언더우드와 게일 그리고 레이놀즈였다. 성경언어에 해박했던 레이놀즈는 성경번역 작업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는 이유에서 사임했다. 언더우드는 1916년 일본에서 세상을 떠남으로써 개역작업도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1924년 이후 레이놀즈가 다시 개역위원으로 동참했고, 후에는 감리교의 케이블(E M Cable), 하디, 북장로교의 베어드(W M Baird), 호주장로교의 엥겔(G Engel) 등이 위원으로 활동했다.

 

언더우드 사후 개역자회 회장이었던 게일은 조선어풍 번역을 지향했으나 자유역을 지향한다는 오해와 반발로 개역위원직을 사임하고 독자적인 구약성경 번역에 몰두했다. 그 결과 1925년 기독교창문사를 통해 신역신구약전서(新譯新舊約全書)’를 펴냈다. 한국인 조력자 이원모(李源謨), 이창직(李昌稙), 이교승(李敎承)의 도움이 컸다. 이 책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역(私譯) 성경전서다. 비록 게일은 개역위원직을 사임했으나 한국성경 번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성경개역 출간

 

구약성경 개역작업은 지체됐으나 피터스, 베어드, 한국인 남궁혁, 김관식, 김인준, 이원모 등이 가담해 이 일을 추진, 무려 26년에 걸친 작업을 완료하고 마침내 1936구약젼셔 개역본이 간행됐다. 이 개역본을 일부 수정해 1938년에는 보다 완전한 번역본을 출판했다. 신약개역작업은 1926신약개역자회가 조직되면서 시작됐는데, 스톡스(M B Stokes), (S D Winn), 로스(C Ross), 커닝햄(F W Cunningham), 크레인(J C Crane), 레이놀즈 등에 의해 추진됐다. 대본으로는 네슬레의 1898년판 희랍어 성경이 사용됐다. 1937년 개정을 완료했고 1938신약개역이란 이름으로 발간됐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이 합본돼 성경개역1938년에 출간됐다.

 

이 공인역 개정 성경이 1952년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의거해 수정을 거친 뒤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이란 이름으로 간행됐다. 1956년 다시 새로운 맞춤법에 따라 일부 수정됐고, 1961년에는 815개소의 자구수정을 거쳤다. 성경전서 개역한글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가 가장 오랫동안 사용하는 성경이 된 것이다.

 

(고신대· 이상규 /역사신학)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5246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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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국내에서의 성경번역 신약

 

언더우드·아펜젤러, 성경번역 첫 단추 끼우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경이 전래된 때는 1816(순조 16) 95일로 알려져 있다. 영국 정부로부터 조선 서해안 해도(海圖) 작성 명령을 받은 해안 탐사선 알레스트호와 리라호가 충남 서천군 서면의 마량진(갈곶)에 상륙했는데, 함장 머레이 맥스웰과 바질 홀 대령이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현감 이승렬에게 화려한 장정의 책 한 권을 선물했다. 이것이 한반도에 전해진 최초의 성경인데, 흠정역(KJV) 성경이었을 것이다.

 

 

그 후 18327월 귀츨라프와 186566년 토마스에 의해 중국어 성경이 조선에 소개됐다. 성경의 도래와 함께 1880년대 만주와 일본에서는 은밀하게 성경이 번역되기 시작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 성경이 번역되었고 오늘 우리 손에 들려지게 되었을까?

 

국내 첫 번역성경은?

 

내한한 선교사들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과제는 성경 번역이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던 5명의 선교사들, 곧 언더우드 아펜젤러 알렌 스트랜톤, 그리고 헤론은 188727일 성서번역위원회를 구성하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번역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들이 펴낸 첫 성경이 1887년 간행된 마가의 젼한복음셔 언해였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책은 이수정의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해’(1885)의 개역본이었다. 한글성경이 없는 상태에서 이 책을 잠정적으로 이용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위원회 차원에서 역간 작업은 더 이상 추진되지 못했으나 아펜젤러의 보라달로마인셔(保羅達羅馬人書)’(1890), ‘마태복음젼’(1892), 게일의 사도행젼’(1892), 펜윅(M C Fenwick)요한복음젼등 사역본(私譯本)이 발행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성서공회는 한국성서위원회에 로스역 성경의 수정을 요청했다. 번역보다는 수정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이 요청에 부응해 아펜젤러가 로스역 누가복음을 수정했는데, 이것이 1890년에 나온 누가복음전이다. 수정본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되자 성서번역위원회는 국내에서 완전한 새로운 성경을 번역하기로 결정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게 이 일이 위임되었다. 그러나 작업은 지연되었고 후에는 언더우드 대신 게일이, 아펜젤러 대신 스크랜톤이 이 일을 추진해 1892120마태복음전이 나왔다. 이 책은 기존 성경의 수정본이 아니라 국내에서 번역된 첫 한국어 성경이었다. 이 성경은 30만부 간행됐다.

 

성경번역자회의 조직과 열매

 

한국어 성경번역사에 있어 중요한 변화는 18935상임성서실행위원회가 조직되고 그 휘하에 성경번역자회를 설립한 일이다. 언더우드 게일 아펜젤러 스크랜톤이 번역위원이었고, 1895년에는 레이놀즈가 추가됐다. 1895년 성서공회가 설립된 일 또한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번역위원들은 분배된 신약 책들을 그리스어 성경과 영어개역성경(RV)을 대본으로 번역하되 한국인 조사들은 한문 및 일본어 성경 대본을 참고해 선교사들을 돕고, 번역을 완성하면 다른 번역자들에게 보내 의견을 청취하고, 이를 다시 원번역자들에게 보내 검토하게 한 뒤 전체 번역자들이 참가하는 번역자회에서 토론과 표결을 거쳐 번역자회에서 통과된 대본을 시안본으로 채택하기로 했다.

 

이런 번역 과정이 충실하게 지켜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노력의 결과로 1895년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이 간행됐다. 마태복음은 아펜젤러가 1892년 번역한 마태복음젼을 번역자회가 시안본으로 승인한 것이지만 마가복음(아펜젤러), 요한복음(게일), 사도행전(게일)은 개인 역본이었다. 곧 누가복음(1896), 갈라디아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이상 1897),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요한1, 2, 3서와 유다서(이상 1898), 에베소서(1899), 그리고 요한계시록(1900)이 번역됐다. 신약의 모든 책이 번역되자 낱권을 묶어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됐다. 이것이 국내에서 번역된 최초의 신약전서인 신약젼셔’(1900). 마태복음부터 로마서까지는 번역자회의 공식적인 의결을 거친 시안본이었으나 그 이후의 책들은 개인 역본들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최초로 신약을 완역한 일은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이를 기념해 190099일 서울 정동감리교회에서 신약성경 봉헌감사예배가 드려졌다.

 

성경 번역 헌신했던 아펜젤러, 결국 순직

 

비록 신약전서가 출판되었으나 고린도전서 이후의 책들은 번역위원회의 수정이나 독회를 거치지 않은 개인역에 불과했으므로 출판과 함께 수정 작업이 시작됐다. 이 일은 아펜젤러, 레이놀즈, 그리고 게일에게 위임됐다. 이 작업을 위해 아펜젤러는 인천을 출발해 번역자회가 모이는 목포로 가던 중 조난 사고로 한국인 조사 조성규(趙成奎, 趙漢奎라고도 불림)와 함께 순직했다. 1902611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장로교 선교부는 게일과 언더우드를, 남장로교는 레이놀즈를 성경번역 사업에 전념토록 배려했다. 결국 이 세 사람의 노고로 수정 작업이 추진돼 1906년에는 성경번역자회가 공인한 공인역본 신약젼서가 출판됐다. 이 성경이 1938개역신약성서가 출판되기까지 한국교회 강단과 성도들이 사용했던 공인본 신약성경이다. 성경번역 사업은 선교사들만이 아니라 한국인 조력자의 수고 또한 적지 않았다. 아펜젤러의 어학선생이자 조사였던 조성규, 게일의 일생 동안의 동료였던 이창직(李昌稙) 정동명(鄭東鳴), 언더우드의 조사였던 송덕조(宋德祚), 레이놀드의 조사였던 김정삼(金鼎三) 이승두(李承斗) 등이 바로 그들이다.

 

(고신대· 이상규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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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선교학교와 기독교교육

 

 

미션스쿨 활짝… 1909년 전국에 950여개

 

19세기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수행된 선교운동은 복음 전파만이 아니라 서구문화의 이기(利器)들, 곧 교육, 의료 혹은 서양 과학을 이용했다. 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에서의 선교는 기독교 복음 전파와 함께 서구문화 전파라는 성격을 띤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서구문화의 전파자로서 역할을 했다.


당시 한국사회의 현실적 필요와 요청 때문에 학교교육이나 의료활동은 각광을 받았고, 이를 통해 선교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개화와 계몽, 사회변화, 민주의식, 구습 타파, 여권 신장 등 다양한 영역에 있어서 변화와 개혁을 가져왔다. 말하자면 기독교는 한국사회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다.

선교지에서 최초로 선교학교, 곧 미션스쿨을 설립했던 인물은 스코틀랜드의 첫 해외선교사였던 알렉산더 더프(Alexander Duff·1806∼1878)였다. 1830년 23세의 나이로 인도 캘커타로 파송된 그는 선교 사역에 있어서 기독교 교육의 중요성을 입증해준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교육은 복음을 전하는 최상의 수단이었다. 19세기 말 우리나라에 입국한 이들도 의료활동과 함께 교육활동을 복음 전도를 위한 중요한 방편으로 인식했다. 이것은 ‘개화’(開化)라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당면과제와도 부합되는 일이다. 그러기에 조선 정부도 신교육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국내 최초의 기독교학교 배재학당

 

이런 상황에서 1884년 6월 24일부터 7월 4일까지 선교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내한했던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는 조선 정부와 접촉을 시도했고, 고종으로부터 미국 북감리회가 국내에서 교육과 의료사업을 실시해도 좋다는 최초의 윤허를 받았다. 그래서 입국한 선교사들은 학교 설립을 우선 과제로 여겼다.

그 결과

1885년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학교인 배재학당이 아펜젤러에 의해 설립되었다.

1886년에는 언더우드에 의해 경신학교와 감리교의 스크랜턴 여사에 의해 최초의 여자 학교인 이화학당이 설립됐다.

이화학당은 1887년 2월 고종황제가 하사한 이름이었다. 경신학교는 예수교학당, 민로아학당, 구세학당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경신학교라는 이름으로 현존하고 있다.

1887년에는 여선교사 엘러스(A J Ellers)에 의해 정신여학교가, 캠벨(J P Campbell)에 의해

1898년에는 배화여학교가 각각 서울에 설립되었다.

1886년부터 시작된 세브란스에서의 의학 교육은 한국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899년 정식 의학교로 출범했고, 1901년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가 되었는데, 1908년에 최초로 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였다. 이 학교는 1915년 설립된 연희전문학교와 1957년 병합되어 연세대학교로 발전했다.

 

한반도 전역에 세워진 기독교학교

 

또 평양에서는 1897년 베어드(W Baird)에 의해 숭실학교가, 1894년에는 모펫(S Moffett)에 의해 숭인상업학교가, 1899년에는 감리교의 노블(W A Noble)에 의해 정의여학교가, 1903년에는 모펫에 의해 숭의여학교가 각각 설립되었다. 대구에서는 1903년 브루엔(H M Bruen)에 의해 신명여학교가, 1906년 아담스(J E Adams)에 의해 계성학교가 설립됐다. 그 외에도 선천, 강계, 재령 등지에 여러 기독교 학교가 설립되었다. 부산의 경우 1895년 멘지스에 의해 일신여학교가, 1906년에는 마산에 아담스와 이승규에 의해 창신학교가 세워졌다. 남장로교 선교부가 일한 호남 지방의 경우 전주에는 신흥학교(1900) 기전여학교(1902)가, 광주에는 숭일학교(1907) 수피아여학교(1908)가, 목포에서는 정명여학교(1902) 영흥학교(1903)가, 순천에는 매산학교(1913)가 각각 설립됐다. 캐나다선교부는 함흥에 영생여학교(1903) 영생남학교(1907)를, 간도에는 은진중학교 명신여자중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 외에 감리교회는 서울 외에도 인천 수원 공주 등지에 기독교 학교를 설립했다.

 

청일전쟁 후 한국에서의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그후 사립학교가 급증했는데 1909년에는 전국에 950여개의 기독교계 학교가 설립됐다. 그 가운데 장로교계가 605개교, 감리교계 학교는 200개교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설립된 선교학교는 한국에서의 사립학교 교육을 주도하게 된다. 통계의 차이가 있지만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탄할 당시 조선총독부는 전국에 300여개 기독교 학교, 약 3만명을 헤아리는 학생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기독교 학교에 의해 변화된 사회상

한국에서 기독교 학교는 세 가지 점에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교육은 특수한 계층의 일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것임을 일깨워 주었다. 공교육(公敎育·public education) 개념을 심어준 것이다.

둘째, 교육은 남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성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선교부가 여자 학교를 설립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자에게 있어서 무식은 덕이니라”는 고루한 의식은 여자 학교 설립과 함께 불식되었다.

셋째, 서구적 개념의 교육과정의 다양화였다. 과거 우리의 교육은 생의 가치나 삶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과거(科擧)라는 국가고시를 위한 것으로서 관직에 나가는 방편에 불과했다.

그러나 선교학교를 통해 교육은 건실한 민주시민을 양성하고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교육임을, 그리고 다양한 교육과정을 통해 사회 여러 영역의 인재를 양성하는 것임을 일깨워 주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교육은 한국사회 변화를 주도했다.

(고신대 교수·이상규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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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주한 외국선교부 선교정책

 

매서(賣書, 勸書人) 전도인이 한 농촌 가정을 방문하여 전도하고 있다

   

 

한국에 자리를 잡은 각국의 외국 선교부는 어떤 방식으로 선교활동을 펼쳐갔을까? 오늘의 한국교회 현상의 근원으로서 대단이 의미 있고 흥미로운 문제이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의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순회 전도였다. 순행(巡行) 전도라고도 불리는 이 방식은 허드슨 테일러(J. H. Tayler, 1832-1905)와 중국 내지선교회(CIM)가 중국에서 시행했던 방식이었다. 순회전도는 선교지역을 답사하고, 개인전도 문서보급을 통해 신자들의 모임을 형성하여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1. 한국교회 자립 땐 지도권 넘기고 조용히 퇴진

 

선교사들은 한국어 선생이나 통역관, 안내자 등과 함께 필요한 행장과 기독교 문서, 의약품을 배부하고 전도의 기회로 삼았다. 또 선교부는

 

중국에서 순회전도를 한 허드슨 테일러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창안한 헨리 벤 영국교회 선교회 총무

   

한국인 전도자를 채용하여 성경이나 기독교 문서를 보급하게 했는데, 이를 매서(賣書) 전도라고 하고, 이 일에 종사하는 이들을 매서인(賣書人) 혹은 권서인(勸書人)이라고 불렀다. 이런 활동을 통해 신자가 생겨나면 집회를 시작하고 교회가 설립되도록 후원하였다.

 

선교사들의 순회전도는 공개적전도가 가능해진 1887년 언더우드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서울에서 개성, 황해도 장연군, 평양, 의주 등을 순회한 일이 있다. 그 후의 게일, 베어드 등도 동일한 방식을 취했다. 매서 혹은 권서활동은 주한 선교부 외에도 대영성서공회, 스코틀랜드성서공회 그리고 미국성공회에 의해서도 추진되었고, 지역교회 설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2. 네비우스 선교회의 3(三自) 원리

 

 

John L. Nevius

   

선교사들이 입국한 지 5년여 지났을 때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정책 수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내한 선교사들은 거의 전부가 20대 청년들로 선교 경험이나 목회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일 선교의 풍성한 결실을 얻게 된 것은 선교사들의 열정이 미숙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선교 경험과 동양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주한 선교사들은 18906, 중국 산 둥성 지푸에서 일하던 네비우스(John L Nevius, 1829-1893)를 초빙하여 10일간 선교정책 세 미나를 열었다.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로서 1854년 이래로 중국에서 일했던 네비우스가 제시한 선교방법을 네비우스 정책이라고 부 른다. 이 정책은 첫째, 자치적이고(Self-governing) 둘째, 자립적이며(Self-supporting) 셋째, 자전하는(Self-propagating) 토착교회 설립의 원리, 곧 삼자(三自, 3S) 원리를 기본골격으로 하고 있다. 한 마디로 외국선교부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한국인 스스로 교회를 세워갈 수 있는 자생력을 갖게 해야 한다는 정책이었다.

 

사실 이 정책은 네비우스의 독자적인 제안이 아니었다. 이런 선교정책을 제안한 첫 인물은 영국교회선교회(CMS)의 총무이자 선교 정책가였던 헨리 벤(Henry Venn, 1796-1873)이었다. 벤은 1841년부터 CMS 총무로 1872년까지 31년간 일했는데, 이미 1854년에 이 정책을 입안하고 토착교회 지도자 훈련을 강조했다. 그는 선교회의 임무는 목회가 아니라 개척이라고 했고, 토착교회가 선교부를 의존하기보다는 자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선교의 임무는 궁극적으로 토착교회를 설립하고 토착교회가 지도력을 행사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에서 3자 원리를 제창했던 것이다.

 

현지교회가 세워지고 어느 정도 자치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선교부는 모든 지도력을 현지교회에 이양하고 조용히 물러나야 한다고 보았는데, 이를 벤은 선교부의 안락사’(the euthanasia of a mission)라고 불렀다.

 

19세기 중엽 서구인들의 우월의식이나 식민주의 의식(colonial complex)을 고려해 볼 때 벤의 정책은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구미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가능한 한 오래 지도력과 주도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그들은 아직 개화되지 못했고, 자치능력이나 자립여건도 갖추지 않았다고 본 때문이다. 적어도 1910년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협의회(IMC) 이전까지는 대부분 서양 선교단체가 아시아나 아프리카 지역 선교를 해외선교’(foreign mission)라고 하지 않고 이교국 선교’(Heathen mission)라고 불렀던 점은 이런 인식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벤의 주장은 상당한 비판을 받았으나 되돌아보면 그는 매우 탁월한 정책 가였다.

 

3. 네비우스의 정신이 사경회로 이어지다.

 

19세기 말엽부터 벤의 정책은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일했던 네비우스는 한국 교회에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아 이 정책을 제안한 것이다. 네비우스가 특별한 점은 위의 3자 원리와 함께 성경공부를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찰스 클라크(C. A. Clark)네비우스 정책은 자립교회를 목표하는 것으로, 자력전도와 자치제도 및 자급운영으로 요약할 수 있지만 이 선교정책의 진정한 강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연구하고 거기서 터득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성경공부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정책이 사경회와 같은 방식으로 널리 적용되었고 한국 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사무엘 모펫은 1910년 한국선교 25주년을 회고하면서 네비우스로부터 자립정신과 사경회라는 두 가지 원리가 배태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네비우스를 초청한 선교정책 세미나에 참석했던 선교사들은 장로교 중심의 10여명에 불과했으나 이 정책은 1891년 북장로교 선교부 제1차 연례대회에서 공식 채택되었고, 18931월 주한 장로교 공의회 제1차 회의에서는 네비우스 원리를 바탕으로 10개 항의 보다 구체화된 선교정책을 수립했다. 이후 주한 외국선교부의 가장 대표적인 정책으로 채용되었다. 이 정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없지 않으나 한국교회 형성에 끼친 지대한 영향은 부인하지 못한다.

 

4. 네비우스 선교전략(Nevius Plan)

 

(1) 한국교회 삼자원칙(Three-Self of Church)

 

자립(Self-Supporting) / 신자들이 스스로 마련한 예배당을 소유하고, 개 교회 목사에게 외국의 자금으로 사례를 지불하지 않는다.

자치(Self-Governing) / 문화권 내에서 실제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 들은 현지인 이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순회 집회 시에는 교인들을 훈 련을 시켜 훗날 구역, 지방, 전국의 지도자가 되게 한다. 스스로의 치리 권을 사용한다.

 

자전(Self-Propagating) / 먼저 믿는 자들이 교회를 조직하고 이들이 나아가 전도하여 지 교회를 세운다. 모든 신자들은 성경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가 되며, 동시에 자기보다 나은 다른 사람으로 부터 성경을 배우는 자가 된다.

 

(2) 개인 순회전도 원칙

 

먼저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널리 순회하며 전도한다. 게일(J. S. Gale) 선교사는 1889년부터 1897년까지 8년 동안 계절을 불문하고 매번 다른 길로 한반도를 12번이나 돌았다.

 

(3) 성경중심의 원칙

 

사역의 모든 분야에서 성경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4) 전 교인 성경공부 원칙

 

모든 신자는 그룹 영수와 순회 조사(Helper) 아래서 조직적인 성경 공부를 해야 한다.(자연히 교회 지도자는 성경을 통달해야만 했다.)

 

(5) 상호협력의 원칙

 

선교사간의 협력과 다른 선교 단체와 협력하고 연합한다.

 

(6) 성령 의존의 원칙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믿음: 주님은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주셔서 선지자들, 교사들, 능력자들, 돕는 자들, 다스리는 자들을 필요한 대로 주실 것을 믿는다.

장날 장터 길목에서 복음을 외치고 있는 미국 선교사(1891?)

  

 

(7) 언어훈련의 원칙

 

현지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현지어 습득훈련을 강조 했다.

 

(8) 법적인 문제 불간섭의 원칙

 

선교사는 현지 교회나 성도의 현지법에 의한 법적인 문제에 대하여는 불간섭의 원칙을 지킨다.

 

(9) 경제문제의 원칙

 

민중의 경제문제는 가능할 경우에 한하여 자립정신을 해하지 않는 범위의 일반적인 도움을 준다.

 

이처럼 네비우스 선교전략의 핵심은 자립, 자치, 자전의 3자 원칙을 통한 토착교회의 설립이며,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철저한 성경공부를 통한 변혁이 일어나야 하며, 선교사들은 이 변혁의 조력자들로서 이를 섬기기 위해 현지 언어습득, 문화이해를 해야 하고(언어 훈련 강조), 궁극적인 변혁의 주체들은 현지인 지도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지인 지도자들을 세우기 위해서는 토착적인 교육 방법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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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으로 세워지는 교회들

 

1884년 매서인 서상륜에 의해 순수하게 한국인에 의한 한국 최초로 세워진 교회로 알려진 황해도 소래교회, 후에 한옥으로 신축되었다.

 

 

  화란의 칼뱅주의 신학자인 보에티우스(Gisbertus Voetius, 1588-1676)교회의 정치’(Politica Ecclesiastica)에서 선교의 목적을 이방인의 회심(conversio gentium)과 교회의 설립(plantatio ecclesiae) 그리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확증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선교 개념은 오늘 우리가 이해하는 것보다 광범위한 것이었다. 선교란 기독교 복음운동 전반을 의미했다. 결국 선교란 구도자를 회심하게 하고 교회를 설립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보에티우스가 말하는 선교의 목적은 고전적인 가르침으로 인식돼 왔다.

 

1. 한국 최초교회, 황해도 소래교회

 

한국에서도 한국인의 구도적 활동과 함께 선교사의 내한으로 복음이 전파되자 차츰 회심자가 생겨나게 되었고, 여러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기

 

1887년 세워진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 서울 새문안교회

 

   

시작했다. 이미 만주의 한인촌에서 회심자가 생겨나고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주장이 없지 않으나, 한국에서 최초의 교회는 1884년에 설립된 소래교회였다.

 

만주에서 존 로스에게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개신교 신자가 된 서상륜(徐相崙, 1848-1926)은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의 성경 번역 작업에 깊이 관여하였고, 1882년에 역간된 예수셩교 누가복음 젼셔예수셩교 요안 복음젼셔를 가지고 압록강변에서 전도활동을 전개한 바 있다. 1883년에는 이 복음서를 가지고 의주(義州)로 돌아왔으나, 위험을 느낀 그는 동생 서경조(徐景祚, 1852-1938)와 함께 외가가 있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으로 이주해 복음서를 반포하였다. 그 결과 이곳에 한국에서의 최초 교회인 송천교회(松川敎會) 곧 소래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이 교회 설립연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 않으나 한국의 최초 교회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서상륜과 동생 서경조는 소래교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소래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을 때 언더우드는 선교부에서 건축기금을 후원하고자 했으나 소래교회 신자들은 우리가 우리의 예배당을 세우면서 외국인의 원조를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후세에도 떳떳하지 못하다.”고 정중히 사양했다. 언더우드는 그 뜻을 존중하면서 서양의 등인 램프 5개를 교회에 기증하였는데, 그 불빛이 얼마나 밝았는지 온 동리를 밝혔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소래교회가 설립된 후 의주, 정주, 강계 등 북한 지역으로도 기독교가 전파되고 교회가 설립되기 시작했다.

소래 교회의 서상륜 장로와 가족들 , 동생인 서경조 목사( 한국 최초의 목사 중 1)

 

 

 

2. 한국 교회 최초의 세례, 장로 피택, 성찬식

 

서울에서도 회심자들이 생겨났다. 1886711일 알렌의 어학선생이었던 노춘경(盧春京)은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이것이 국내에서의 첫 세례였다. 그로부터 6개월 후인 1887123일에는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 등 세 사람이 서울에서 세례를 받았다. 또 송천에 있던 서상륜이 서울로 옮겨와 전도한 결과로 신자들이 생겨나게 되자 1887927일 서울에서 첫 교회가 설립됐다. 이것이 한국에서의 두 번째 개신교회인 새문안교회였다. 당시 신자는 14명이었는데, 다수가 서상륜의 전도로 신자가 된 이들이었다. 그 다음 주일 서상륜과 백홍준은 한국 최초로 장로로 피택되었다.

 

그해 1223일에는 7명의 세례교인이 참석한 가운데 성찬식이 거행됐는데, 이것이 첫 장로교 성찬식이었다. 곧이어 남대문교회(1887), 승동교회(1893), 연동교회(1894) 등 장로교회가 설립됐다.

1887년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서울 정동제일교회

   

 

 

3. 기도처로 시작한 정동제일교회

 

서울 정동에 정주한 아펜젤러는 1887724일 배재학당의 박중상에게, 102일에는 배재학당의 한용경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처럼 회심자들이 생겨나게 되자 공식적으로 교회를 설립하게 됐다. 그 이전에 이미 자신의 집에서 집회를 해왔으나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인원이 증가하자 1887109베델 기도소로 개칭하였는데, 이것이 정동제일교회의 시작이었다. 이것은 한국에서의 세 번째 개신교회이자 첫 감리교회였다.

 

아펜젤러는 1016일에는 만주에서 온 매서(賣書) 전도자 최성균(崔成均)의 아내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 여성은 한국에서의 첫 여성 수세자로 알려져 있다. 1023일에는 성명 미상의 강씨, 장점화, 한용경, 그리고 최성균 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감리교 첫 성찬식이 거행됐다. 정동교회에 이어 아현교회의 전신인 서문 밖 애오개교회와 상동교회(1888. 12), 동대문교회와 중앙교회(1890) 등의 감리교회가 서울에 설립됐다.

1893년에 세워진 북한의 모 교회 장대현교회(널다리골교회)

   

 

4. 북한의 모()교회, 장대현교회

 

평양에는 18936월 장대현교회가 설립됐다.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평양지부 개척자로 임명된 마펫(Samuel Moffett)은 한석진, 최치량 등 7명의 신자들과 평양 널다리골의 한옥에서 첫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널다리골교회로 불렸다. 1896년에는 300여명의 교인으로 증가했고, 19006월에는 새 예배당을 건축하고 장대현교회로 개명했다. 이 교회를 선교사들은 평양중앙교회라고 불렀다. 평양과 평안도지방 첫 교회였다.

 

이 교회를 모체로 평양의 남문밖교회(1903), 창동 교회(1905), 산정현교회(1906), 서문밖교회(1909) 그 리고 외성교회(1911)가 설립되었다. 그 후 부산에서 는 부산진교회(1892), 초량교회(1893), 제일영도교회 (1894)가 세워졌고, 대구에서는 대구제일교회(1893) 가 설립됐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우후죽순처럼 한국 땅에 교회가 세워졌다. 이러한 교회설립은 곧 한국 사회변화의 시작이었다. 세워진 교회들을 통해 학교와 병원과 양로원 등의 사회사업이 시작되었다.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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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각 교단, 한국에 선교사 파송

 

18849월 알렌의 입국을 시작으로 외국의 한국 파송이 시작된다. 첫 선교부는 1789년 조직된 미국 북장로교회(PCUSA,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로서 중국 일본에 이어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미국 북장로교는 알렌에 이어 언더우드 선교사를 파송했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于, 1859-1916)188545일 미국 북감리회의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와 함께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했다. 당시 국내 정세가 불안해 미국 대리공사 폴크(Foulk)의 만류로 아펜젤러 부부는 곧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2개월 후 다시 입국하게 된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비록 교파는 달랐으나 일생을 통해 가장 친근한 선교의 반려자로서 상호 협력했다. 영국 런던 출생인 언더우드는 13세세 때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뉴저지 주에 있는 화란개혁교회의 뉴브런즈윅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과 호주 각 교단이 파송한 최초의 한국 선교사들(우로부터 좌로) : 미국 북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 미국 북감리회 아펜젤러 선교사, 미국 남장로교 레이놀즈 선교사, 호주 장로교 데이비스 선교사

 

한국에 파송 된 첫 목사요 선교사였다. 그해 6월에는 의사 헤론(Dr. John Heron)이 내한했고, 북장로교 한국선교부가 조직됐다. 이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개척전도, 의료,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그 후 마포삼열(Rev. S. A. Moffett, 1890), 배위량(Rev. W. M. Baird, 1891), 소안론(Rev. W. L. Swallen, 1892), 이길함(Rev. Graham Lee, 1892) 선교사 등이 내한하여 평양과 부산에 선교지부를 개설하고 선교지역을 확대해 갔다. 또 애덤스(Rev. J. E. Adams·1895) 목사 부부는 대구에, 밀러(Rev. F. S. Miller, 1892) 목사는 청주에 각각 선교지부를 개설했다. 그 후 계속하여 선천(1901), 안동(1909) 등지에 선교지부가 설립됐다.

 

2. 호주 장로교 한국에 선교사 파송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두 번째 장로교 선교부는 호주 장로교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호주의 빅토리아주 장로교회(PCV,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인데 한국 선교는 188910월 데이비스(Rev. Joseph Henry Davies) 목사와 그의 누이 데이비스(Mary T. Davies)에 의해 시작됐다.

 

데이비스는 한때 인도 선교사였으나 건강이 좋지 못해 귀국 후 멜버른대학교를 졸업하고 카오필드 문법학교를 설립, 교장으로 일했다. 그는 다시 인도로 가고자 했으나 한국 선교의 긴박성을 알리는 북중국 주재 영국교회 선교사 월프(John R Wolfe) 주교의 편지를 읽고 한국 선교를 자원하게 됐다. 성공회에 속해 있던 그는 장로교로 이적한 후 에든버러 뉴칼리지에서 신학수업을 받고 18898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빅토리아주

교파별 한국선교 구역분할

1차 합의 : 1892, 미국 북장, 남장

2차 합의 : 1909, 미국 북장, 남장, 남감, 북감

 

미국 남 감리교

강원도 2/3, 연안, 해주, 원산 이남지역

 

미국 북 감리교

평북, 대천, 박천, 연변, 강원도 1/3, 서울 남부, 충남지역

기타 / 5천 명 이상의 읍 지역은 장, 감 두 교파가 함께 전도하여 교회를 세울 수 있게 했고, 1936년까지 지켜졌다.

 

청년연합회(Young Men’s Fellowship Union) 지원으로 그는 102일 부산을 거쳐 104일 그의 누이와 함께 제물포로 입국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데이비스는 언더우드, 헤론 등과 함께 5개월간 지내며 한국어를 습득했다.

 

선교사가 없는 지방으로 가서 일하기로 작정한 데이비스는 1890314일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20일간 500에 이르는 여행을 마치고 44일 부산에 도착했으나 천연두와 폐렴에 감염돼 부산에 도착한 다음날인 45일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호주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를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빅토리아주 장로교 청년연합회와 여전도회연합회(PWMU)는 한국 선교를 계속 지원했다. 그 결과 189110월에는 매카이(Rev. J Mackay) 목사 부부와 세 사람의 미혼 여선교사, 곧 멘지스(B. Menzies), 페리(J. Perry), 퍼셋(M. Fawcett) 5명이 한국에 파송되었다. 이들은 부산을 거점으로 경남지역에서 활동했다. 후일 호주 장로교는

1890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순회전도 일행

 

부산, 마산, 진주, 거창, 통영 등 5개 지역에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전도, 교육, 자선, 의료 활동을 전개했다.

 

3. 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

 

1864년 조직된 미국 남장로교회(PCUS·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는 북장로교 보다 8년 늦게 한국 선교에 동참했다. 189110월 언더우드가 첫 안식년으로 귀국해 내슈빌에서 모인 외국 선교를 위한 신학교협의회(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 연차대회에서 한국 선교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미국 벤더빌트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윤치호도 한국 선교를 호소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당시 매코믹신학교 학생이었던 테이트(Lewis Boyd Tate)와 리치몬드의 유니온신학교 출신 정킨(William M Junkin),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등이 한국 선교를 자원했다. 처음 남장로교 선교부는 한국 선교 계획이 없었으나 이들의 자원과 선교기금의 후원으로 이들을 한국 선교사로 임명했다. 이들은 테이트(Miss Mattie Tate), 데이비스(Miss Linnie Davis), 볼링(Miss Pasty Bolling) 등 미혼 여선교사들과 함께 1892113일 입국했다. 이들은 서울에서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 후 전주에 첫 선교부를 설치했다. 이후 광주, 군산, 목포, 순천 등지에도 선교지부를 설치하고 전도, 교육, 의료, 자선사업 등을 전개했다.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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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전과 응전의 시대

 

한국교회협의회의 조직과 변천을 살펴보려면 1912년 한국개신교 복음주의연합공의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출발할 때에는 장감의 신앙은 어느 정도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연합할 수 있었던 것은 한반도에 개신교 전체를 대변하는 연합운동의 협의체 구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또 선교의 목적이 같았던 블레어와 하디 선교사의 제의가 채택되었고 캐나다 장로교선교회의 윌리엄 스캇이 적극적인 추진으로 교회협의회(FCC)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이 협의회가 공헌 한 것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복음운동에 한국의 각 교단의 교회들과 협력하는 일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일본에 있는 40만의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본연합공의회, 입본의 캐나다장로교회와 협력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1927년을 기점으로 북장로교선교회는 한국교회연합을 통한 장감의 연합운동에 깊은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고 결국 탈퇴하기로 결정하여 연합체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서 한국의 교회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어 나가기 시작한다. 1930년대에는 그동안 한국교회를 주도하는 중심세력이었던 장로교와 감리교에 이어서 성결교가 한국교회의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이는 복음주의에 입각한 회개 운동과 부흥운동에 혼연일체가 되어 부흥운동에 전력투구하였기 때문이다. 성결교회의 복음전파 방식은 그들이 소중하게 간직하는 중생과 성결의 체험 교리인 그리스도의 보혈로 원죄의 씻음과 신유와 부활과 재림과 영생을 전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들이 중점을 둔 것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은 놀라운 부흥운동을 경험한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어렵지 않게 수용될 수 있는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더욱 호소력이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과 죄에서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강조하는 성결교회의 가르침은 대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역동적인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도전을 주었다.

 

이 시대 한국교회가 만나 또 하나의 움직임은 신학적 변천이다. 한국교회는 1930년에 접어들어 이단, 신흥종교, 자유주의, 신비주의 부흥운동, 그리고 무교회주의의 등장으로 그 동안 견지해 왔던 신학적 통일성이 깨지고 다양한 신학사상들이 발흥하기 시작했다. 1934년 한국 북장로교 선교 희년을 맞으면서 블레어가 신학적 변천에 깊은 우려를 표명했던 것처럼 수많은 이단들이 등장, 이 시대의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상적 변천은 리더십의 전환과 별도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상호 깊은 연계성을 지니고 진행되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장로교의 남궁혁, 백낙준, 박형룡, 이서휘,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 윤인구, 김치선과 감리교의 전영택, 임영빈, 변홍규, 정경옥, 류형기, 그리고 갈홍기는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1955년, 전성천 박사는 “한국개신교의 분열과 일치”라는 예일대학의 박사학위논문에서 한국에는 언더우드, 알렌, 헤론, 앨러스 등 4명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있었으며, 이 4명의 선교사들 주에서 전통적인 장로교 신학에 동의했던 사람들은 언더우드 한 사람밖에 없었다고 했다. 언더우드 외에 다른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이 북장로교 내의 주류 곧 구학파의 전통, 성경의 무오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들의 4명의 선교사들 가운데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은 선교사는 언더우드 밖에 없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의사나 간호사였기 때문에 좀 더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신학교육을 받은 이들이기는 하지만 다수의 개척 선교사들이 그 같은 입장을 가졌다는 것은 선교 초기 신학적 분위기를 꼭 보수적인 것 많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1889년 마포삼열을 비롯한 보수적인 맥코믹 출신 북장로교선교사들과 1892년 이눌서를 비롯한 남부의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남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이 국내에 대거 입국하면서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반적인 장로교 선교회의 신학적 성향은 보수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는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였고 한국교회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유주의 도전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은 1930년대 들어 지금까지 정통신학의 토대 위에 확고하게 서 있던 한국교회에 진보적인 신학이 하나의 세력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진보적인 세력은 얼마 후 신사참배문제로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자 조선신학교 설립을 통해 한국교회에 깊숙이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까지 한 목소리를 내던 장로교와 감리교의 신학적 통일성이 서서히 깨어지고 다양한 신학이 역사에 부상하기 시작했다. 정경옥의 자유주의, 김재준의 진보주의, 박형룡의 정통주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그리고 이용도의 신비주의가 그것이다.

 

감리교 신학자 정경옥이 한국교회에 자유주의를 정착시킨 주인공라면 김재준은 한국교회에 진보주의를 정착시킨 인물이었다. 김양선의 말을 빌린다면 “그는 파괴적인 성경비판을 감행하는 극단의 자유주의 신학자”는 아니었으나 성경의 축자적 영감과 성경의 완전무오를 거부하고 그 같은 사상과 “대결하여 싸우려는 철저한 자유주의 신학자”였다. 그는 정경옥의 자유주의와 박형룡의 정통주의 사이에 진보주의라는 중도적 입장을 개척하는데 성공했다.

 

박형룡 박사는 신학적인 색깔뿐만 아니라 삶의 스타일이나 사고방식에 있어서 김재준 목사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김재준 목사가 개방적이었다면 박형룡 박사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절제하고 철저하게 칼빈주의 입장에서 정통주의를 변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김재준에게 정통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은 바로 신학을 사변적이고 객관적인 굴레 속에 가두어 두고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연계시키지 않는 데 있었다. 반면에 박형룡에게 진보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고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성경과 기독교의 전통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결국 기독교 유일성마저 흔들어 놓는다는 점이었다.

 

1930년대 박형룡은 정통주의 대변자로 주로 교단 장로교회에서 만인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화려한 학력, 탁월한 근면성, 한국에서의 선교사 1세대와의 두터운 교분,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강력한 의지는 그를 일약 한국교회 정통의 대변자로 부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귀국 후 한국교회 안에 일고 있던 정경오류로 대변되는 자유주의 신학과 김재준으로 대변되는 진보주의 신학,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와 이용도의 신비주의 부흥운동의 발흥은 기왕에 한국교회에 바른 신앙과 바른 신학을 구축하는 일에 자신의 생애를 바치기로 다짐했던 박형룡의 신학적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신학 논쟁과 교회의 응전이 1930년부터 1935년까지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사건이었다면, 1935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사건은 신사참배 논쟁이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앞에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하느냐 반대하느냐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처했다. 호주장로교선교회가 보고한 것처럼“신사참배문제는 한국의 교회가 직면하였던 가장 중대한 문제였다.”

 

신사참배는 1911년의 105인 사건이나 1919년의 3.1운동 탄압보다도 더 크고 직접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위협을 가했던 문제이다. 그것은 105인 사건이나 3·1운동으로 인한 탄압이 민족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제의 탄압이었다면, 신사참배 강요는 “신앙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신앙 양심을 유린당하는 본격적인 종교박해였고, 교회 전체가 당한 대 박해였고, 전 민족이 당한 일대 수난”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사참배 문제는 “세속권력을 절대화하고 인간을 신격화하는 일제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것으로 저이, 종교, 교육, 문화 등 여러 부분에 걸친 복합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순응 또는 타협함으로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신상참배의 강요에 맞서 신앙을 지키느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문제는 신앙의 본질과 그 해석, 더 나아가 그 적용과 실천에 관한 문제와 깊숙이 연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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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1884 - 1900)

 

1884년 들어서 한국선교를 위한 미국에서의 준비는 가속화 되었다. 감리교는 아편젤러와 스크렌톤을 한국 선교사로 내정하였고, 장로교는 언더우드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알렌을을 한국 선교사로 전임시켰다. 그리하여 1884년 9월 20일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소속 호레이스 알렌이 가장 먼저 한국에 입국하였고, 이어 1885년 4월 5일 북장로교 선교회 언더우드와 미 감리교 선교회 아편젤러가, 5월 1일에는 미 감리교 선교회 스크랜톤이, 그리고 6월 21일에는 북장로교 선교회 헤론이 입국하여 북장로교 선교회와 미 감리교 선교회가 가장 먼저 한국선교를 개시했다.

 

그 후 ·1889년에 호주 장로교가, 1890년 성공회가, 1892년에는 남장로교가 1896년에는 남감리교와 침례교의 전신 동아 기독교가, 그리고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 러시아 정교회, 플리머스 형제단이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1904년에는 안식교가, 1907년에는 성결교의 전신 동양선교회가, 그리고 그 이듬해 1908년에는 구세군이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이리하여 한국은 알렌이 입국하던 1884년부터 구세군이 한국선교를 개시하던 1908년까지 짧은 기간 동안 개신교을 대표하는 장,감,성을 비롯한 수많은 개신교 교단들이 한국선교를 동시에 착수하는 특별한 나라가 되었다.

 

1884년에 입국한 알렌이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면 그 이듬해 입국한 언더우드는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더불어 개신교를 대표할 수 있는 선교사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해리로즈가 표현한 것처럼, 언더우드는 “한국선교의 아버지이자 많은 개별 선교사들을 한국에 오개 한 지도자 ”였으며, 스피어 박사가 그를 가리켜 언급한 것처럼 “매번 그가 미국에 올 때 선교의 횃불을 드높이 불태웠고,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참을성 있는, 불굴의 사람이었다.” 그는 실로 한국선교를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예비하신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 한국의 근대선교의 아버지였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아편젤러, 한국을 시찰하기 위해 입국한 일본 장로교 선교회의 스쿠터박사, 테일러 박사와 나란히 전선에 입국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처음 얼마간은 알렌의 노력으로 개원된 제중원에서 화학을 가르치면서 한국선교를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이 보내 주신 위대한 선교사였다. 한국선교 반세기를 정리하는 1934년, 희년기념식에서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지적한 것처럼 “한국선교 초기 언더우드는 모든 면에서 끈기 있는 지도자였다.

 

1884년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 알렌이 입국하고 그 이금해 같은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미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입국한 후 세계 각국의 선교사들이 은둔의 나라 조선에 속속 입국했다. 언더우드가 입국한 얼마 후 1885년 6월 의하 헤론부처가 입국했고, 1887년 7월 4일에는 후에 벙커의 아내가 된 앨러스가 입국해 한국에 이북구한 북장로교 선교사는 7명으로 늘어났다. 1887년 앨러스가 입국할 때, 뉴욕 유니온 신학교 출신 세 사람, 헐버트, 벙커, 그리고 길모어도 입국했는데 이들은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미국 정부가 파송한 선교사들로 후에 한국선교에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개혁파 복음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맥코믹신학교, 프린스톤신학교, 리치몬드 유니온신학교, 토론토대학, 그리고 호주의 신학교 출신 장로교 선교사들은 물론이고 드루신학교를 비롯해 웨슬리안 복음주의 전통에서 카우만이나 길보른 모두 성경의 권위를 철저하게 확신하면서도 복음의 열정에 투철한 복음주의자들었다. 이들은 19세기 “복음주의 전통”속에서 교육을 받았고, 당시 영미를 지배했던 복음주의 이상을 공유했으며, 그리고 그런 방향에서 한국선교를 이끌었다. 1905년 복음주의 연합공의회를 조직 이들이 교파를 초월해 한국개신교 복음주의 연대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의 선교 정책은 한국인에게 개인 구원의 영역을 넘어 사회, 문화전반에 영향을 미쳐 복음을 통한 문화 변혁의 한 모델을 보여 주었다. 매켄지가 한국의 독립운동에서 한국에서 선교사들은 “기독교 개척자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문명의 개척자들이었다.”고 말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일본은 한국 내의 개화파들을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려고 하였고, 중국은 한국내의 보수주의자들을 지원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오랫동안 은둔의 나라로 알려진 한국을 자신들의 소유로 삼으려는 열국에 의해 한반도는 전에 없이 동요되기 시작했다. 한반도가 강대국들 사이의 전략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과 한반도가 스스로를 방어하기에는 너무도 작다는 것은 불행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은 더 강력한 이웃 국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침략을 당했고 강대국의 국제적인 권력 투쟁에서 힘없이 볼모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한국을 둘러싼 열국의 한국 쟁탈전은 19세기 중엽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반강제적으로 체결된 강화도 조약은 그와 같은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이 열국에 의해 침략을 당하기 시작한 출발이었다. 제임스 게일이 전환기의 한국에서 언급한 대로 한국은 개항과 더불어 정치, 경제적으로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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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대한감리회(Korean Methodist Church)는 1884년 6월에, 미국 감리교선교사 R.S. 매클레이가 서울에 와서 1884년 7월 3일 고종으로부터 선교 개시의 허가를 받고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통해 선교를 시작하였다. 공식적인 미감리회 국외선교부는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부부와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부부, 국외여선교부는 스크랜턴 대부인(Mary F. Scranton)을 초대하여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였고, 이들 중 아펜젤러 부부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장로교 언더우드 목사와 함께 내한하였다.

 

그 해 6월에는 아펜젤러가 학생 6명을 데리고 배재학당()을 개교하였으며 스크랜턴은 같은 해 9월 처음으로 서울 정동()에 교회와 병원을 열고, 그의 부인은 단 1명의 여학생으로써 1886년에 이화학당()을 개설하였다. 1887년 1월 정동교회에 처음 한국에서 주일학교()를 열었고, 12월에는 북감리회를 조직하였다. 한편 남감리회도 독자적으로 한국에 선교를 시작하였다.

 

감리교회의 신앙은 1930년 발표한 기독교 조선감리회의 교리적 선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1997년 새롭게 신앙고백을 하고, 이 사회에 대한 봉사와 책임의지를 발표한 사회신경 역시 현대적 의의를 담아 발표하였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WCC)에 가입되어 있다.

 

현재의 한국 감리교는 4년에 한 번 열리는 총회와, 총회 밑에 5개 연회(서울·중부·동부·남부·삼남)가 있고 연회 밑에 100여 개 지방회가 있는데 평균 한 지방회에 30여 개의 교회가 소속되어 있다(1983).

현재 총회는 100-101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64-8 감리회관(광화문빌딩) 16층에 두고 있다. 감리교는 장로교와 함께 역사가 제일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일 많은 교회를 가지고 있다.

 

 

    ○ 요한웨슬리

    ○ 아펜젤러

    ○ 프란시스 애즈버리

 

    ○ 감리교

 

    ○ 기독교대한감리회 약사

    ○ 감리교회 조직

    ○ 교리적 선언

    ○ 사회신경

 

    ○ 엡윗청년회

 

    ○ 기독교대한감리회 본부선교국

    ○ 기독교타임즈

 

   ○ 학교

       감리교신학대학교 

         목원대학교

 

   ○ 교회

          내리교회(1885. 7.25)  

          정동제일교회(1885.10.11)

          상동교회(1888.10. 9)

          강화교산교회(1893)

          부천제일교회(소사교회, 1930. 11. 1)

 

출처 : http://kcm.kr/dic_view.php?nid=39429&page=1&kword=&k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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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선교 현상과 접근 전략                                    
 

▲저는 대학교 다닐 때부터 이슬람 선교에 헌신했고, 이슬람 중동 연구를 했습니다.

거의 40년째 이슬람을 연구하고 있는데, 특별히 저희 단체 인터콥은 이슬람을 선교하는 단체입니다.

 

저희 선교사가 1,050명 정도 나가 계신데, 거의 다 이슬람권이죠.

그것도 중동 중심의 프런티어(최전방) 이슬람 선교를 하고 있는데요,

 

저희는 처음부터 청년들을 내보냈습니다. 왜냐면 언어가 안 되면, 아무 것도 안 되니까요.

우리 한국에 들어온 언더우드, 토마스, 아펜젤러 등의 선교사들도 다 20대 청년들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이제 아무래도 프론티어 선교니까, 청년들을 보내서, 언어가 되어야 뭘 하죠.

그래서 신학적인 소양이 필요하면, 5년 선교한 다음에 불러들여서, 신학공부를 일부 시킵니다.

 

저희들은 신학공부를 다 한 후에 선교하기 보다는, 역순으로 먼저 선교지로 보냅니다.

왜냐면 그동안 교회에서 잘 양육 받았고, 성경공부 하면서 훈련받은 게 있으니까요,

또한 이슬람 선교지 현장은 ‘목회’라기보다 ‘전도’니까요.

 

그렇게 하다보니까 저희들도, 정보가, 아무래도 바닥 현장 정보가 저희에게 좀 많은 편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이슬람에 대해 좀 나눌 때,

기존의 여러분의 생각과 혹시 다른 점이 일부 있더라도, 이해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 1천여 명의 선교사들이 보내오는 생생한 현장 정보가 있으니까요.

 

 

◑이슬람을 우리가 생각하고 접근할 때는, 일단 몇 가지 고려해야 될 사항이 있습니다.

  <이슬람의 독특성>을 알아야 됩니다.

 

▲1. 이슬람은 <배교자를 살해>합니다.

배교자를 살해하는 종교는, 세상에 이슬람 말고는 없습니다.

불교, 기독교, 심지어 사이비들도 배교했다고 일률적으로 처단하는, 참수하는 종교는 세상에 없습니다.

교리에 위배된다고, 그렇게 참수를 명하지는 않습니다.

 

또 이슬람교의 설립자 무함마드를 비난해도 살해합니다.

풍자하는 만화만 게제해도 폭탄 던지는 데는, 다른 종교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이나 석가모니 비난한다고 죽입니까? 그렇지 않죠.

또 경전 코란을 비난하면, 목을 쳐서 죽입니다.

 

그래서 배교자 살해, 그리고 설립자 비난하면 죽이고, 자기들의 경전을 모욕하면 죽이고..

정말 세계가 감당할 수 없는 컨텐츠를 가지고 있는 이런 종교가,

지금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 우려할만한 일입니다.

 

지금 이슬람은 자기들이 20억이라 그러는데, 저희들이 봐도 16~17억은 됩니다.

기독교는, 가톨릭을 빼고, 몰몬교 같은 이단 다 빼고

순수 복음주의 기독교인은 8.5~9억입니다.

이슬람이 복음주의보다 2배가 많습니다.

 

국가로는 58개가 이슬람 국가입니다. (팔레스타인 포함)

그들 나라가 통째로 다 이슬람입니다.

 

유럽에서도 4~5%, 가톨릭 4%, 복음주의 4%

그러니까, 유럽에서도 이슬람이 최대종교가 된 것입니다.

 

또한 무서운 것은, 이슬람이 지금 무섭게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2. 이슬람의 두 번째 독특성은 이슬람은 <정교일치 종교>입니다.

지금 세계에서 어설픈 정교일치는 다 없어졌습니다. 바티칸 빼고요,

실질적으로 세계적 종교에서, 정교일치 종교는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슬람은 정교일치, 국가종교입니다.

그래서 포교를 국가 차원에서, 국가 예산으로 합니다.

모든 이슬람 국가에는 종교성이 있습니다.

거기서 국가 예산으로 포교하기 때문에, 포교활동이 엄청납니다.

 

지금 사우디가 경제가 좀 어려워져서 몇 년동안 헤매고 있습니다만

수년 전만 해도 사우디가 1주일 쓰는 선교비를 다 합하면,

우리 세계 복음주의 교회가 1년 쓰는 예산과 똑같다고 그럽니다.

 

그리고 사우디가 포교에 하루에 쓰는 예산을 합하면,

제일 많이 선교비를 쓰는 미국의 남침례교단의 (1년예산?) 보다 많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물량 예산으로 국가가 포교하니까요. 뭐 그 힘이라는 게 엄청나죠.

그래서 이슬람을 이렇게 국가종교로 봐야지요,

 

그래서 사우디가 너무 포교에 예산을 많이 쓰다가

현재 경제가 어려워진 점도 좀 있습니다.

 

그들이 포교를 열심히 하는 이유는, 리더십 경쟁이라는 이유도 있습니다.

시아파, 수니파, 자기가 리더라고 경쟁하다가 너무 무리해서..

 

어쨌든 이런 국가 종교라는 점.

그래서 사우디나 중동의 어느 국가든지, 해외에 자기 나라 국가가 진출하면,

회사 펀드가 진출하면, 그걸 다 포교로 일부를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허가를 안 내줍니다.

그러니까 미국에 와 있는 모든 이슬람 펀드들이나, 이슬람 회사들도 전부 수입의 일정 부분을

North American Islamic Society 북미이슬람협회로 기부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교단분열, 교회분열로 개체화되어 있는데,

그들은 그쪽으로 모든 예산을 집중해서, 그 예산으로

미디어, 심지어 국가까지 기관에 투자해서 움직입니다.

 

미국은 좀 크니까 자기들이 움직이기가 좀 힘들지요.

한국에 이슬람 비판 안 나옵니다. 아프간 피랍 때 보셨지만,

국민 21명이 한 달 동안 피랍되었는데,

한국의 모든 언론들이 이슬람에 호의적이었습니다.

 

이슬람이 좋은 종교, 평화의 종교라는 프로그램을 계속 방영하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펀드 자체가 이런 미디어, TV, 방송, 신문에 주식을 삽니다.

투자를 그 쪽으로 해 버리니까, 메이저 언론 중에 하나가 되버리는 거죠.

 

또 이슬람을 비판해서, 중동에 진출해서 뭘 할 수 있겠어요. 아무 것도 못 하는 거죠.

우리 한국에 최초로 세워진 이태원 이슬람 사원,

한국 정부가 70년 때 중동 진출 할 때, '하나 짓고 오셔야지..'

그래서 국가가 땅을 내서, 지은 겁니다.

 

두 번째 삼성이 진출하려고 하니까, '하나 짓고 오셔야지' 해서,

그때 부산에 두 번째 이슬람 사원을, 삼성이 지은 겁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 이슬람 금융법을 독특하게 인정받으려고 하다가,

수쿠크 법, 당시 우리 기독교가 쎄게 반대해서 일단 포기되었는데,

그런데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할랄법, 이슬람 음식법을 독특하게 적용받고, 국가 지원을 받기 위해서

지금 엄청난 프로젝트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래서 한국 기독교가 이슬람 선교를 할 때,

우리 정부는 뭐 엄청나게 비판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석유가 나는 곳이 주로 이슬람 지역인데,

한국 기독교가 그쪽에 선교하면, 결국 이슬람을 자극함으로써,

한국과 이슬람과 관계가 언젠가는 안 좋아져서,

석유자원 공급에 만약 차질이 생긴다면.. 그러니 이슬람권 선교를 자제하라..는 분위기로 흐르죠.

 

그래서 이슬람 선교를 하던 저희 인터콥은 지난 15년동안 엄청나게..

언론사들 다 움직여서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슬람 선교를 왜 하느냐'는 겁니다.

 

지금 세계가 자원외교, 자원전쟁인데.. 그래서 중국도 아프리카로 몰려가잖아요.

미국이 아직 남겨둔 아프리카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미국에게 중동을 빼앗겼으니, 중국은 아프리카로 엄청나게 진출하고 있습니다.

 

과거 우리 정부도 자원외교가 핵심인데, 정부의 부처도 긴장하게 되죠.

혹시 정부시책에 방해가 될까봐요. 아프간 피랍 사태 때, 왜 그렇게 몰아갔겠어요?

 

‘위험한 데 왜 가느냐?’는 논리로 아예 접근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그때 한국 청와대에 탄원서를 썼습니다.

폰트 12로 글씨 크게 해서 눈에 잘 보이도록, 3장으로 요약해서 썼습니다. 약 5년 전에 일입니다.

 

‘우리가 이슬람 선교 한다고 해서 자원외교에 장애 받지 않습니다.

장기적으로 대민관계에 오히려 더 좋습니다.’ 그 이유를 하나씩 다 썼습니다.

 

그래서 어느 전문가를 불러서라도, 그 점에 대해서, 우리는 공개 토의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비공개 토론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 토의하자고 했습니다.

그 후로부터 조금 공격이 약해졌는데, 여전히 부담스럽죠.

 

우리가 이슬람 선교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게 자원외교나 국가관계에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이슬람 교리적으로, 이슬람 율법적으로도요.

 

또 이슬람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계관,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얘기했죠.

그런데 상식적으로는 ‘한국 기독교가 이슬람에서 설치고 다니면, 당연히 안 좋지 않냐?’

그건 상식(사회적 통념)이죠.

그러나 이슬람을 깊이 알면, 절대 그렇게 말 안 합니다.

 

그러니까 사회 통념 말고, 이슬람의 세계관을 깊이 알면, 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슬람을 접근할 때는,

그 독특성 속에서 이슬람의 세계관과 메카니즘을 생각해야지,

일반 상식으로 접근하면 절대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저희들이 2004년에 팔레스타인에서 2천5백명이 모인 공개집회를 했습니다.

또 2000년에 카자흐스탄에서 이슬람 국가 최초로 공개집회를 해서 2만5천명이 모였습니다.

또 아프간에서 했는데, 우리 정부가 너무 걱정해서, 그때 논란이 많았죠.

 

어떤 사람이 제게 ‘아니 어떻게 팔레스타인에서, 카자흐스탄에서 공개집회를 합니까?’

제가 ‘그 나라 정부의 장관도 참석하는 행사입니다.’

 

‘당신들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속였지요?’

‘아닙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카자흐스탄에서, 아프간 카불 공설운동장에서 집회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입니다. 알리고 그 나라 장관들과 다 협의합니다. 프로그램을요.’

 

이슬람 선교는 열심히 하지만, 이슬람 연구 분석은 안 합니다.

선교사역에 헌신하다 보면, 시간이 없어서 연구를 못 합니다.

그러니까 이슬람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슬람은 우리가 선교할 때는, 이슬람에 대해서 깊게 안 알아도 됩니다.

복음이 능력이니까요. 그러나 정책을 장기적으로 수립할 때는, 이슬람을 알아야 됩니다.

 

 

▲3. 이슬람의 또 하나의 독특성은, <이슬람 해외 이주>가 엄청납니다. 아시죠?

지금 세계 자체가 글로벌 유동성이 엄청 심화되어서,

세계가 시장이 지배하는 세계 체제, 원 글로벌 마케팅이 되면서, 이주 현상이 보편화 되어 있습니다.

 

글로벌 커뮤니티가 된 거죠. 그러다 보니까 특별히 이슬람 인구가 폭증하니까,

이슬람에는 젊은이가 많으니까요.

 

한국, 일본은 고령화되니까, 많이 이주 못 합니다. 점점 육아도 줄잖아요.

그런데 이슬람은 젊은이 인구가 폭증하니까, 막 이주자들이 전 세계로 몰려가는 거죠.

 

그리고 금요일 이슬람 예배는, 당당하게 이슬람 성직자들이 포교설교를 합니다.

‘당신들은 전 세계로 나가라.’

 

그래서 아이를 엄청나게 많이 낳습니다. 그리고 이슬람 청년 중동 멋있잖아요.

덩치 크고 약간 까무잡잡하고, 또 엄청하게 육체적인 힘이 강해요.

그래서 한국 자매들도, 무슬림 선교사들과 수 천 명 (추산) 엄청나게 결혼했습니다.

 

그 무슬림 청년에게 ‘당신 예수 믿냐?’

‘아, 당연히 믿죠.’

 

뭘로 믿느냐고 물어야죠. '선지자냐, 메시아냐?'로 물어야지요.

그러나 믿음이 훈련이 안 된 자매들은, 그런 거 잘 모르죠.

 

또 무슬림 청년이 찬양도 따라 부릅니다. 아, 예수 찬양하죠, 왜 못해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대목만 없으면, 안심하고 찬양하죠.

어차피 예수가 오셔서 심판할 재림자인데, (코란에 예수님이 그런 선지자로 나옵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는 안 믿는 거죠.

 

이슬람에 의하면,

그래서 이번에 지난 라마단 때, 이슬람 IS 사이비 국가지만 창설한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

소위 캘리프 라고 선언한 사람이, 라마단 특별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파했는데,

그 7~8개 항목 중에,

 

‘우리는 예수의 재림을 믿으며, 그가 심판하실 것을 믿는다.’ 코란 3장55절.

‘알라가 가라사대, 내가 예수를 지극히 영광스럽게 하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영화롭게 하리라’

예수를 (선지자로, 사람으로) 따른다니, 크리스천도 미혹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슬람을 모르니, 막 헷갈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터콥이 이슬람에 가면, 가자마자 얘기합니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공격당합니다.

 

처음부터 크리스천이라 말 해야 사는 거죠. 그러면 손 안 대요.

‘말 안 했어? 나중에 알게 되었어? 이 친구 봐라.’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자신을 밝혀야 되는 겁니다. 정직하게 해야 됩니다

괜히 작전하다가 자기가 터지는 겁니다.

그렇게 처음에 작전한 이유가, 이슬람을 몰라서 그러는 거죠.

 

제가 터키에서 쫓겨날 때, 그 날 우리 마을 사람들이 막 떼거지로 몰려와서

‘우리가 정부에게 항의하겠다. 우리가 너를 처음부터 아는데, 왜 정부가 너를 쫓아내느냐?’

제가 데모하지 말라고 그랬죠. 그러면 다음 후배들을 어떻게 보내겠습니까.

시끄럽게 신문에 나고 그러면요.

 

그러니까 이슬람을 알아야 되는데, 모르면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이슬람의 메카니즘을 알아야 되는데, 별로 크게 어려운 것은 아닌데,

아무래도 체계적으로 해야, 핵심을 알게 되잖아요.

 

그냥 교리, 금식, 맨날 종교적 행위 책만 보니까, 그건 사실 몰라도 됩니다.

모든 종교에 있는 종교행위를.. 어차피 모든 종교에 다 있는 것인데요.

 

 

▲4. 그 다음에 <이슬람 글로벌 현상>이 아주 독특합니다.

그래서 이주자들이 가고, 우리 한인들이 여기 미국 땅에 왔습니다.

보세요. 1.5세, 1.7세, 2세 이렇게 나누는데요.

 

우리 한국인은 2세대가 되면 아주 민족성 자체가 바뀌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슬람은 3세대, 5세대가 되어도 안 바뀝니다.

보세요, 뉴욕의 아랍인들, 터키인들. 3세 4세 5세대에 가도 똑 같습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2세만 되어도, 완전 서구화로 개종되어서, 부모와도 대화도 안 됩니다.

급속하게 변화됩니다.

 

한국인은 출세하기 위해서 몸부림 치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사회에 일찍 동화되려고 합니다.

 

그들 무슬림들은 자기 이슬람 세계관이 지배하기 때문에, 출세하기 위해서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막 생존, 2천년 동안 고난 받으며 살다 보니까,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그냥 생존을 위해서 몸부림치니까,

생존을 위해서 자기자체를 개조시키고 민족성을 바꿔버립니다.

 

미국만 아니라, 옛날 블라디보스톡(연해주), 중앙아시아에 갔던 한인들도

미국 교포들과 비슷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도 일부 있지만요.

 

소비에트 150개 국가중에서, 이렇게 개종된 2세 3세 때 종족 자체가 달라져 버린 건

우리 민족이 톡특합니다.

우리 들은 어디 가든지, 쉽게 그 나라에 적응을 잘 합니다.

 

상황화 contextualization 라는 말은, 한국인들에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상황화가 안 되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말인데,

우리는 상황화를 안 가르쳐 줘도, 스스로 알아서 너무 잘 합니다.

어딜 가든지 현지인처럼 금방 동화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절대 바꾸지 않습니다.

오히려 팀을 이뤄서 보이지 않는 가상의 무슬림 공동체를 도시마다 이루어서,

그 나라를 바꾸려 합니다. 절대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한국으로 엄청나게 몰려오니까, 이주자들 잘 해주자.’ 막 국가가 켐페인을 했습니다.

이슬람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아무리 잘 해 주어도, 바뀌지 않습니다.

복음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정책이 잘못된 거죠.

 

아예 노동자를 다른 데서 불러오거나, 캄보디아, 미얀마 등 비이슬람 권에서요.

‘불러다놓고 잘 해주자?’ .. 절대 되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이 급속 개종되니까, 저네(무슬림)들도 그렇게 될 줄 아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무슬림은 절대로 안 변하는 종족이고,

이 두 가지를 비교연구하면, 거의 박사학위 논문이 나올 것입니다.

 

 

▲5. 글로벌 지하드

와하비 사우디에서 시작했는데,

어쨌든 처음부터 사우디 왕가와 종교와 정치가 통합한 메카니즘에서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원형이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서구 식민지 통치를 받다 보니까, 막 서구에 대한 저항의식이 있는데,

열등의식 속에서 헤매다가 1차세계대전이 터지고, 서구가 세계대전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면서 서구세계에서 자체 자기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지적 사회의 담론을 자기(이슬람 지식층)들이 듣죠.

그러면서 1920년 대에 ‘이제 서구는 안 되겠다’

 

그러다 2차세계대전이 또 터졌습니다.

자신감을 갖고서 이슬람이 더 확신했습니다. ‘이제 서구는 안 된다.’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면서 권력투쟁하고 헤게모니 투쟁하는 서구는 안 된다.

그 이유는 문명이 다 타락해서 그렇다.'

 

그러면서 <이슬람 형제단>이 등장하는데,

하산 알 바나 Hasan al-Bannā 가 이집트에서 무슬림 형제단을 시작합니다.  주1)

서구문명에 대한 저항운동이 싹트기 시작했죠.

 

그런데 서구의 세계를 민족주의 체제 프로젝트, 민족주의 시대의 도래,

이게 전세계로 퍼져나가다가

아랍세계도 이슬람인데 민족국가, 이집트 민족주의, 터키 민족주의가 막 나온 겁니다.

 

이걸 막 저항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이슬람이다. 왜 민족으로 이슬람 세계를 나누느냐’

그러면서 저항운동을 했는데, 팔 바너

그 다음에 싸이드 쿠틉 Sayyid Qutb 이 사람이 미국 버클리에서 공부했는데,   주2)

그때 하필 60년대에 유학왔습니다. 히피들이 난리칠 때,

 

그걸 보면서 타락한 미국이라는 확신을 갖고 돌아가서,

‘이것은 지금 유럽이 아니고, 모든 서구세계가 심각한데,

이들이 세계를 타락시킨다. 그래서 타락한 서구의 리더십을 해체시켜라. 인류 미래를 위하여.’

그러면서 글로벌 지하드를 이론화 시킵니다. 글로벌 지하드!

 

그래서 그들이 글로벌 지하드를 전개하게 된게 2가지 이유입니다.

1) 서구는 힘으로 세계를 지배한다. 문제는 그들은 타락한 인생들이다.

그래서 글로벌 지하드를 해야 한다.

 

이게 나중에 알 카에다, IS로 발전하게 되는데요.

 

제가 1980년대부터 이런 사람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다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대학의 젊은 강사로 뛰는 사람들입니다.

동네에서 그냥 사는 무슬림하고는 다릅니다.

 

다 똑똑한 사람들. 알 카에다, IS에 들어와 있잖아요.

유럽, 미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중심멤버 들입니다.

유럽, 영국, 독일, 프랑스, 호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다 대학을 졸업한 이슬람 청년들입니다.

 

무식해서, 종교적으로 세뇌되어서 ‘내 몸 던지고 죽는다’는

그런 사회 부적응자도 IS에 일부 있겠지만,

그들을 움직이는 수뇌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계관을 정치화 시켜서, political Islam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막 정치 투쟁을 합니다.

 

그런데 그 타깃을 보십시오.

911때 세계무역센타와 펜타곤

-세계무역센터는 세계 경제력의 상징입니다.

-펜타곤은 세계 군사력의 상징입니다.

 

서구가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면서, 세계를 타락시킨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두 심벌을 공격한 것입니다.

공격할 대상이 많은데, 하필 왜 거기를 공격했을까요?

 

제가 1980년대부터 무슬림들을 만날 때마다

‘저항하면 안 됩니다. 물리적 투쟁으로 세계는 절대로 좋게 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방법, 풀뿌리 운동, 한 사람씩 변해야 한다고 얘길 하죠.

‘그게 더딜 것 같지만, 세계를 바꾸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투쟁하고 저항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무슬림들이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무슨 얘기를 하시는 것입니까? 당신들 기독교인들은 유럽을 1천~1천5백년 동안 지배해 오면서,

이렇게 타락시켜놓고, 왜 실패한 모델을 얘기하십니까?’

 

당신들에게는 충분한 기회를 주었지만, 다 타락시켰다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도 타락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왜 실패한 모델을 거론하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자기들의 방법 밖에 안 남았다고 합니다.

 

'전 세계가 타락했고, 우리 이슬람권만 남았는데, 여기도 지금 타락해 가고 있다.'

개인주의, 알코올 문화, 성적 타락, 물질주의

돈만 있으면 엄청난 권세를 휘두르고..

돈 없으면 비굴하게 돈 앞에 무릎 꿇고.. 이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항해서

계속해서 ‘글로벌 저항운동’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 막스가 ‘사회적 분배 정의 justice’를 내세워서 세계의 반쪽을 지난 1백년간 지배했는데,

지금 이슬람 극단주의는 ‘도덕성 morality’을 들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방식은, 이슬람 국가의 엄격한 율법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가 정치와 통합해서,

이슬람법에 배치되는 사악한 모든 것을 제거하려 드는 것입니다.

 

그 동기 모티베이션은, ‘타락한 서구 문명에 대한 저항의식’입니다.

 

그래서 왜 911사태와 같은 극단적 테러를 저질렀느냐?

세계에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랍니다.

‘우리는 타락한 서구 문명에 도전한다. 서구문명의 리더십은 해체되어야 한다. 인류 미래를 위해서!’

 

타락한 서구문명이 세계를 리드하면, 인류 전체가 타락한다는,

자기들만의 편협된 논리를 들고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톱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메시지를 미국도, 유럽도 받지 못했습니다.

한국, 일본도 못 받았습니다.

 

그런데 남미가 받았습니다. 중국, 러시아도 받았다고 봅니다.

그들 국민들 가운데 일부가 빈 라덴을 칭송하고 나섰습니다.

아프리카 국민들 가운데 일부도 빈 라덴을 칭송했습니다.

이슬람국가들의 국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빈 라덴을 지지한 것은, 당연하고요.

 

무슬림들은 ‘너희 기독교인들이 세계를 다 전반적으로 타락시키지 않았느냐’

그때 우리 기독교는 ‘이 땅에 죄가 있어서 그렇다. 우리는 천국을 소망하고 지향한다.

물론 우리가 이 땅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되,

그러나 궁극적으로 천국을 소망한다.

우리는 이 세상을 다스리되, 사랑으로, 섬김과 봉사로 다스린다. 군사, 경제적 파워가 아니라!’

 

이것이 바로 천국 복음 kingdom gospel입니다.

이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될 때,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우리는 기다립니다.

 

우리는 social gospel 이 아니라, kingdom gospel입니다.

세상에 social gospel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극단적 이슬람 저항운동도, 이 계열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불 수 있겠죠.)

그런데 kingdom gospel 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회개의 메시지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는

회개의 복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죄로부터 회개가 없는 메시지가 무슨 킹덤 가스펠입니까.

 

911사태는 어떻게 보면, 서구물질 문명과 이슬람 종교문명의 지구적 충돌인데요,

사무엘 헌팅턴은, 세계를 몇 개의 큰 문명권으로 나누고, ‘문명간의 충돌’을 예견했지요.

그러나 더 엄격히 말하면 ‘물질문명’과 ‘정신/종교문명’의 지구적 충돌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국제화이죠.

 

고통하는 무슬림, 고통하는 세계

심리적 프롤레타리아(빈자들)들을 서구의 지배하에서 해방시키려는

국제적인 운동으로.. 그렇게 이슬람극단주의를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련이 해체되고 공산주의가 역사에서 막을 내리자

그것의 대안운동이, 이슬람 쪽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알카에다나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은,

다 유럽에서 시작했습니다. 중동에서 시작한 게 아니에요.

 

그 원형은 아하비, 중동에서 시작했지만

그게 운동 movement 로 성장해서 발원한 곳은, 유럽입니다.

그게 지금 글로벌 운동으로 퍼지고 있는데, 역시 유럽이 진원지입니다.

 

유럽으로 이민 갔던 무슬림들의 자녀 세대들에게서,

또한 유럽으로 유학갔던 중동 무슬림 청년들에게서,

타락한 서구의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운동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그들이 독일에서 사회주의 철학을 공부하고,

결국은 사회주의 운동을 이론적으로 배우고,

그것을 이슬람 신앙과 접합시켜서, 글로벌 운동으로 확산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감당을 못해서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60개국가와 군사동맹을 맺었습니다.

 

저 IS의 핵심멤버들은 2~3만명입니다.

그 2~3만명을 감당 못해서, 60개국과 군사동맹을 맺었습니다.

한국 일본 다 포함해서, 2015년 1월에 결성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세요, 우리나라 625때

미국이 한국을 돕기 위해서 16개국의 군사동맹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때 소련과 중공이라는 엄청난 대국이 개입했는데, 자유진영에서 고작 16개국 참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저 IS 2~3만명 감당 못해서, 60개국이 군사동맹을 맺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영적인 세력이 배후에서 역사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4천년 전에 시작된, 이삭과 이스마엘의 갈등이

이제 지구적으로 팽창된 거죠.

 

4천년 동안 지속적으로 팽창되어온 구조적 갈등이

이제 지구적으로 세계를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4천년의 뿌리를 가진 갈등이 지구를 흔드니까,

세계의 국가들이 지금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요.

 

그런데 쉽게 감당하지 못하리라 내다봅니다.

왜냐하면 단순한 표면적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이니까요.

어떻게 보면, 이것은 세계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책임이고,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세계 교회는, 지금 대개 방관하고 있고, 방관하니까

세계 국가들이 이것을 해결하겠다고 난리 치면서

지금 이라크, 시리아에서 지난 수년 동안, 5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110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50만명이나 죽이고, 그 땅에 평화를 갖고 오겠다는 것은..

이건 마귀나 하는 일입니다.

 

우리 세계 교회가 방관하는 사이에, 세계 정부가 문제 해결하겠다고 나서는데,

난장판이 될 가능성도 큽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 1명 죽이면, 자기 집안 친척 중심으로 10명의 테러리스트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에 또 1명 죽이면, 또 그 주위 가족, 친척 가운데서 테러리스트가 10명이 자원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군사적 해결은, 방법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우리의 방법으로 기도하고, 복음전하고, 천국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복음을 전할까요?

내부자 운동 좋습니다. 잘 지혜롭게 하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spiritual innovation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자기들이 은과 금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거기에 반발하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 외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자꾸 다른 전략 세워봐야, 별로 소용없습니다.

은과 금이 아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의 능력으로!

 

그래서 하여간 중동 전체 아랍 세계는 둘로 나눠져 있습니다.

하나는 왕정국가 – 사우디, 쿠웨이트, UAE, 요르단

하나는 대통령제 국가 – 선거를 통해서 대통령을 뽑습니다.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그런데 소위 아랍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서, 지금 대통령제 국가들이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대신에 왕정 국가들은 다 살아남았습니다.

 

누가 더 독재입니까? 왕정국가 철권 통치가 지배하는 게 더 독재죠.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민주화 아랍의 봄 운동이 일어나더니,

진짜 독재 왕정국가들은 건재하고, 대통령제 국가들이 다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시리아 하나 대통령제가 남았는데, 저거 하나 제거하자고 소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거한 나라마다 이슬람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민주화가 된 게 아니고, 극단주의 이슬람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하여간 주님은 그래도 역사하십니다.

IS가 3천개 웹사이트를 만들어서, 전 세계 3천곳에서 리쿠르트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말씀드린 논리를 계속 전개하면서, 서구사회를 비판했습니다.

 

그럼 관심 있는 사람들도 생겨나게 되겠지요.

그러면 파리, 런던, 시드니 이런 곳에서, 접촉자들을 만나서, 시리아로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이런 IS의 만행에 대해, 자체적으로 대항하는 세력도 일어났습니다.

   ‘야, 너희들이 참수해서 죽이니까, 세계가 이슬람이 나쁜 종교라고 욕하고 있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 너희는 가짜 이슬람이다.’

   이렇게 순진한 무슬림들이 거기에 댓글을 달아서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IS는 코란의 경전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코란 몇 장 몇 절에

   ‘변절자들은 참수하라고 되어있다.’며 자기들은 코란대로 따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평소에 코란을 전혀 읽지 않던 무슬림들이 혼란에 빠집니다.

   IS의 극단주의 이슬람 운동에 합류할 것인가,

   아니면 ‘이게 이슬람이었어? 세계가 이슬람화 될 때까지 전쟁을 계속 한다고?’

 

   그래서 막 이슬람에서 이탈하는 세력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엄청난 이탈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말도 못합니다.

 

제가 최근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젊은 목회자를 만났는데,

그 분이 제게 하는 말이 ‘지난 수 년 동안에, 2백만명의 무슬림이 기독교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7월에 사우디에 갔는데요, 거기서 목격한 엄청난 변화는 말도 못합니다.

 

지금 이란은요, 1992년에 2천5백명의 크리스천, 지금은 3백만명이 되었습니다.

막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엄청납니다.

 

이런 혼란과 소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관계없습니다.

할렐루야! 

 

..................................

 

주1)  하산 알 반나  Hasan al-Banna  1906∼1949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의 초대 단장(mur-shid). 나일 델타농촌 출신.

다르 알 울름(‘학문의 집’)에서 학문을 배우고, 도시생활의 허식에 반발해,

1929년 중학교교원으로서 부임한 이스마일리야에서 형제단을 비밀결사로 창설했다.

1940년대에는 이집트 최대의 대중정치단체가 되었다. 그의 성향은 보수적이었다.

그는 이 조직을 신비적 권위로서 통할했다. 팔레스타인 분규 때는 대중을 선동하고,

비밀군사기관에 의한 요인암살 등의 테러를 조직했는데, 역으로 비밀경찰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슬람사전, 2002. 11. 15., 학문사)

 

 

주2) 사이드 쿠틉   Sayyid Qutb     1906~1966

그는 이슬람 원리주의 이론과 행동철학을 다듬고 체계화하여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이슬람 이데올로기화’와 ‘이슬람 혁명’이론의 주창자이다.

오늘날 이집트를 비롯한 무슬림 세계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에 있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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