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시며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은혜를 주시니 감사하옵나이다.
오늘 나의 모든 삶이 하나님을 바라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나의 모든 생각과 나의 모든 말고 나의 모든 행동이 주님께 열납되게 하옵소서.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시여.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말을 하며 많은 생각들을 오늘도 하오니, 주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주님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사단 마귀는 할 수만 있으면 나로 죄 짓도록 미혹하는 때에
 아버지! 이 미혹에 넘어가지 않게 하옵소서.

늘 말씀으로 무장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기도로 승리 하게 하옵소서.
오늘 하루가 다 지난 후에 나의 하루의 삶을 돌아 보면서 후회 없도록 살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린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시여
 부족한 나를 붙드시사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게 하시고 주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나로 하여금 주여!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항상 바르고 진실하고 용서와 사랑과 너그러움이 있게 하옵소서.
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사랑을 전염시킬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시여
나로 하여금 천국의 소망을 갖게 하옵소서
이 세상 바라보고 세상에 취해서 살다가 실망하고 낙담케 마시고
하나님 나라 저 천국을 바라보며 살게 하시사 어떤 환경속에서도 주님을 찬양케 하옵소서.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시여.
늘 푸른 소나무와 같이 나의 믿음이 그러하게 하옵소서
늘 변함없는 믿음을 주시사 주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승리하게 하여 주실 줄 믿사옵고

거룩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은혜스런 찬양과 설교를 원하시면
유튜브 미션스쿨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션스쿨 바로가기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10월 주일예배설교 /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October,Sunday Sermon)

 

제목 :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 

말씀 : 2:42-47 

 

1.올바른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스위스 영성가 프란시스 쉐퍼가 한번은 미국교회를 방문하고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미국교회는 모두 자기 행복, 자기 만족에 빠져 있다. 미국교회의 불행은 여기에 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이나 거룩한 삶이나 사명이나 헌신이나 하나님의 뜻이나 이런 것들은 별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세상에서 누릴 만족이나 기쁨이나 뭐 이런 것들만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신앙의 목적이 지극히 이기적이고 육체적이고 세상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런 교인을 소비자교인이라고 불렀고, 그런 교회를 상품가게라고 하였습니다. 소비자 교인이란 사람들이 자기 구미에 맞는 음식이나 상품을 찾아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원하는 것을 얻고 만족하는 것처럼 교인들도 자기 구미에 맞는 것을 찾아다니는 소비자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어떻게든지 신자들의 구미에 맞는 상품을 열심히 개발하여 사람들을 끌이들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예배자로 교회에 오는 게 아니라 자기 구미에 맞는 것을 얻기 위해 찾아온 소비자요, 교회는 교인들의 원하는 상품을 판매하는 상점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 미국 교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미국 국민의 55% 주일에 교회에 나가는데 왜 나가느냐고 물었더니 45%는 삶에 유익한 말씀이나 교인들과의 친교를 통하여 뭔가 삶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답했고, 26%는 마음의 평화와 정신적인 안정을 얻기 위해서라고 응답했고, 20% 정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나머지 9%는 기타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출석하는 55% 중에 20%만이 올바른 목적으로 왔으니 결국 고작 약11%만이 제대로 된 교인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교회에 와서 친교나 유익한 이야기나 인간적 만족을 구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자에게 만족과 기쁨과 정신적 안정과 안식을 주십니다. 이것도 신자가 누릴 수 있는 복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그런 인간적 만족과 행복이 교회의 존재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 캠브리지대학교 교수를 지내면서 하나님을 부정하다가 중년 이후에 주님 품으로 돌아와 순전한 기독교, 나니아 나라 이야기 등 수많은 기독교 저술을 남긴 C.S 루이스라는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행복해지려고 교회를 찾은 것이 아니다. 그런 행복은 와인 한 병으로 얻을 수 있다.”

 

교회에 와야할 진정한 목적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단순히 우리가 인간적으로 원하는 만족이나 행복을 찾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와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크고 아름답고 진정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뭡니까? 그건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와 무지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것입니다. 2차적으로는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림으로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인생의 목적을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올바르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고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는 가운데 바르게 아름답게 정직하게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을 주며 자신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가치와 의미가 넘치는 삶을 살다가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6:33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는 하나님을 알고 믿음으로 구원의 은총을 누리고 그 뜻대로 삶으로써 이 땅에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이 분명한 의미를 바르게 알고 올바른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주님의 역사이루어가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주님께 대한 온전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올바른 믿음위에 서서 생명력있는 삶을 살려면 가장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올바르고도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로써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구세주라는 사실에 대한 올바르고 분명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확고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뭡니까? 교회는 단순히 인간적 교제를 위한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단순히 세상에서 인간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소망을 두고 위로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은 고상한 인격과 정신적 수양을 하는 곳도 아닙니다. 교회는 단순히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곳도 압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단순히 이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어나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생명의 공동체요, 진리의 공동체요, 이 땅위에서 천국을 건설하는 공동체 인 것입니다.

 

여러분, 16장에 보면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 주님,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 어떤 사람은 엘리야, 또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중의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16:16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너는 복된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16:18절을 같이 읽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러분, 이 대화의 요지가 뭡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너희는 나를 무엇으로 알고 따라 다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선지자나 선생으로 알고 있는데 너는 어떠냐? 나를 메시야로 알고 따르느냐 아니면 너희들도 그냥 선지자중의 한사람으로 아느냐, 아니면 나를 통해서 무슨 부귀영화라도 얻으려고 따라 다느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시오, 메시아라고 고백을 하였고, 그런 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며 바로 그런 너의 그러한 신앙고백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와 같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고 믿고 고백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의 터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신앙고백이 없으면 교회의 겉모양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교인들이 아무리 인격적으로 훌륭해도 그냥 멋있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는 있어도 진정 생명력이 넘치는 성도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세상의 위대한 성인이나 영웅이나 선생이 아니라 그리스도 주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나에게 평안이나 위로나 기타 여러 가지 복이나 주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분명히 알고 오직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나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분명한 신앙고백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와 부활을 통하여 이루신 새생명의 은총이 내 안에 온전히 역사함으로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가 주님께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가운데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는데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믿음은 영에 속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 속에 오셔서 우리의 죽었던 영을 살려 주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가르쳐주시고 믿게 하실 때만이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가 어떻게 설립되었습니까? 1:13,14절을 보겠습니다.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무슨 말씀이냐하면 열두제자를 비롯한 120여명이 감람산에서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보내드리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분부를 따라 마가의 다락방으로 돌아와 오로지 기도하는데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기를 힘쓸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것이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인 것입니다. 좀 길지만 같이 보겠습니다. 2:1~4절입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러니까 120여명의 문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오로지 기도에 힘 쓴지 열흘만에 강한 바람소리 같은 것이 방안에 가득하고, 마치 혀가 날름거리는 듯한 불길이 임하더니 거기 있는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자들은 온전히 주님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그래서 과감히 밖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게 되고, 하루에 삼천명 오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며 초대교회는 폭발적으로 부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이 창립52주년 기념주일이면서 성령강림주일인데 바로 이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였던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초대교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날을 기념하여 오늘 우리와 우리 교회도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바르게 신앙을 고백하고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우리 자신이 먼저 풍성하게 누리고 나아가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가기를 다짐하고 힘쓰자는 취지에서 지키고 있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죄와 무지를 알게 됩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게 됩니다. 능력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와 기쁨으로 주를 섬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온갖 왜곡되고 죄되고 무지한 것들을 분별하게 되고, 모든 연약하고 부족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교회창립기념주일과 성령강림주일을 보내며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정말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 들을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가운데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가운데 모든 도전 세력들을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주님이 주시는 모든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사랑과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가 되려면 사랑과 은혜가 가득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이 충만함으로 바로 이런 사랑과 은혜가 충만함으로 더더욱 힘있게 발전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얼마나 사랑과 은혜가 충만했던지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44,45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자기 재산과 소유를 다 팔아 교회에 바치고 니꺼 내꺼 따로 없이 각각 필요한 만큼 가져다 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과 은혜가 가득한 모습입니까? 이것은 사랑과 은혜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랑과 은혜가 없으면 이런 일은 시작도 못하고 만에 하나 어떻게 시작을 했다 해도 날마다 온갖 시비와 갈등과 다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과 은혜가 충만했기에 자신의 것을 다 드려서 함께 사용했습니다. 날마다 함께 모여였습니다. 음식을 함께 나누며, 말씀 듣고 기도하고 찬양하였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사랑과 은혜가 충만했고,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니 믿는 자의 숫자는 날마다 더해갔고, 더욱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가정이든 교회이든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다른 어떤 공동체라도 사랑과 은혜가 있으면 반드시 흥합니다. 망할래야 망할 수가 없고, 흥하지 않을래야 흥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요, 잘나고 못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배우고 못배우고의 문제도 아닙니다. 문제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번영과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면 서로 귀히 여깁니다. 서로 이해하고 용납합니다. 서로에 대하여 성실합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합니다. 원망 불평 시기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런 공동체가 어찌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공동체에 하나님이 어찌 복을 주지 않겠습니까? 그런 공동체가 어찌 사람에겐들 인정받지 못하겠습니까? 그런 공동체가 어찌 든든히 세워지지 않겠습니까? 그런 공동체 안에 사는 사람들이 어찌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더욱 깨어 기도하고 말씀을 들음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라니다. 그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에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어 서로 사랑하며 은혜를 끼치며 도우며 기쁨과 은혜와 위로와 소망과 평안을 주고 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렇게 성령과 사랑이 충만하여 생명력있는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열심히 모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선은 그들은 열흘동안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그러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니까 더더욱 기쁨이 충만해서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게 되었습니다. 오늘 46절을 보겠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여러분, 보십시오. 날마다 모이기를 힘썼다는 것입니다. 주일이나 수요일만 아니라 매일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은 늘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초대교회는 정말 아름답고 바람직한 순환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전혀 기도하기를 힘쓸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니 사랑과 은혜가 넘쳤고, 그러니까 더욱 모이기를 힘쓰게 되었습니다. 모이기를 힘쓰니 더더욱 은혜와 사랑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성령충만함을 받고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삶을 살려면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들을 때에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사랑과 기쁨이 충만해 집니다. 그러면 더 교회가 오고 싶습니다. 말씀이 그리워집니다. 그래서 더욱 교회를 찾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충만한 성도의 선순환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모이지 않으면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기도와 말씀과 찬양하는 일을 게을리 하면 은혜는 멀어져 갑니다. 은혜가 멀어지면 교회는 더 멀어집니다. 교회가 멀어지니 은혜는 더 다운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활력이 충만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10:25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모이기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대가 갈수록 사람들이 점점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영광돌리고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일을 멀리하고 그저 먹고 입고 자고 놀고 하는 세상 일에 바빠지는데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서는 성령으로 말씀으로 은혜로 사랑으로 충만함을 입고 은혜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교회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양하지 않으면 우리가 맨 날 하는 일이 뭡니까? 그저 맨날 보고 듣고 생각하고 행하는 것들이 먹고 입고 자고 돈벌고 일하고 뭐 그런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맨날 그런 거만 생각하는데 어찌 영성이 풍요로워 지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교회창립52주년 기념주일과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곳에 너무나 귀한 교회를 세워주셔서 생명 주심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기초이신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위하여 모이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도간에 더욱 사랑과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성령 충만함을 받아 더욱 사랑과 은혜와 기쁨이 충만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갈 수 있는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스런 찬양과 설교를 원하시면
유튜브 미션스쿨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션스쿨 바로가기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대속 사역에서는 주님 홀로 높임을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음은

 

돌로 쌓지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

 

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20;25)

 

 

 

 

 

 

 

구약에서 하나님의 제단은 인간의 기술이나 수고의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못하도록 다듬지 않은 돌로 세워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지혜는 십자가의 교리를 타락한 본성의

 

 

 

 

사악한 취향에 맞도록 보다 인위적인 시스템으로 다듬고 짜맞추길 좋아합니다.

 

 

 

 

육신의 지혜는 복음을 향상시키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게 만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수정하고 변경하는 것은

 

 

 

 

곧 그 말씀을 더럽히고 오염시키는것입니다.

 

 

 

 

인간의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영혼의 의롭다 하심을 얻는 데

 

 

 

 

자기도 한몫 거들고 싶어하며,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가 준비해 줘야 한다고

 

 

 

 

꿈꾸고, 어떻게 해서든지 인간의 연장들을 하나님 제단 위에

 

 

 

 

올려 놓으려 애씁니다.

 

 

 

 

그러나 단언컨대 육신적인 자신감은 구세주의 사역을

 

 

 

 

완전케 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고 불명예스럽게 만들 뿐입니다.

 

 

 

 

대속 사역에서는 주님 홀로 높임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돌아가시는 순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무엇을 보태려 애쓰거나주 여호와께서 흡족해

 

 

 

 

하신 것을 더 낫게 만들려고 애쓰는 일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연장들을 저리 치우고 겸손히 무릎 꿇고 간청하십시오.

 

 

 

 

주 에수꼐서 당신의 대속 제단이 되신 것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만

 

 

 

 

안식을 누리십시오.

 

 

 

 

우리가 발견한 그대로의 진리를 받드십시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제목 : 복음이 변화시킨다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시카고에 멜 트라더라는 심각한 알코올의존증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술을 마시느라 키우던 어린 딸에게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린 나이에 혼자 방치되어 있던 딸은 세 살이 되던 해에 안타깝게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멜은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삶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딸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동안에도 그는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욕을 했고, 그 어떤 사람도 그의 비참한 상황에 도움을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매일 술에 취해 있던 그에게 어떤 사람이 다가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통해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자신과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생기지 않게 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알코올의존증 치료 전문가이자 복음 전도자로써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병원도 포기한 천여 명의 환자들을 모두 치료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시카고에서 가장 유명한 전도자이자 갱생 치료자가 되었습니다.

누가 봐도 회복이 불가능해 보이던 멜을 새로 태어나게 만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십자가의 복음이였습니다.

 

세상이 포기한 사람에게도 복음이 들어가면 하나님의 가능성이 펼쳐집니다.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십자가의 복음임을 잊지 말고 전하기를 힘쓰십시오. 반드시 창대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저의 짧은 생각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게 하소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소홀히 마십시오.

큐티/김장환목사

 

 

직장을 다니면서 투잡으로 월급만큼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곳을 소개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제목 : 죄의 무게


♡요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한 성도가 목사님의 죄에 대한 설교를 듣고는 큰 불만을 가졌습니다.
“목사님, 죄에 대한 설교는 제발 그만하셨으면 합니다. 죄와 지옥 같은 부정적인 말씀만 하지 말고 힘이 되는 말씀을 주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지금까지 죄 때문에 마음에 가책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성도님, 정말로 죄에 대해서 아무런 마음이 없으십니까? 본인은 정말 죄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성도는 혹시 있을지도 모르지만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주 가볍다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이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시체에는 아무리 무거운 물건을 올려놔도 무거운 것을 모릅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죄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죄가 없다면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실 이유도 없었습니다. 나의 죄가 너무 중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야 했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에겐 모든 죄가 용서 됐지만 죄를 잊으면 은혜도 잊게 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풍성한 은혜를 주신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반드시 창대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죄인을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늘 잊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깊이 묵상 하십시오.
큐티/김장환목사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

성경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마가복음 16:15)입니다. 이는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 (사도행전4:12)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세상에 살았던 사람 중에 가장 유명한 분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그의 생애와 교훈은 누구보다도 인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세계는 그의 탄생으로 년도를 기록합니다. 그의 교훈은 인종, 문화, 국가의 장벽을 넘어 호소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누구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는 교훈을 구분에게서 발견했습니다.

아무도 예수처럼 사람을 가르친 일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와 같은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그와 같은 사랑을 한 일이 없습니다. 세계사에  예수와 비길 만한 인물은 없습니다. 그와 비교할 대상은 없습니다.

 

그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한번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이 대답은 모두 틀린 것 입니다. 예수는 계속하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16:13-18을 보시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셨습니다. 그가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신문을 받을 때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예수는 “네가 말하였느니라(네가 말한대로니라)”고 대답하셨다. 주님은 신성모독의 죄목으로 죽음의 형벌을 받아 마땅했다. 마태복음 26:63-68

예수님은 자주 자신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비유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긴다고 송사했다. 예수 외에 누가 감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요한복음 5:21-23)할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사도요한은 그이 복음서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1:1) 고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요한복음1:14)한 분이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신 정도 밖에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만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한복음14:9)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군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로새서1:15-17)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로새서2:9), 그는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십니다. 예수는 성육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무엇을 하셨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인간은 모두 공통된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3:22,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로마서3:10). 죄란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문제입니다.

죄를 지으면 결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로마서5:12). “죄의 삯은 사망이요”(로마서6:23.)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음을 맞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브리서9:27). 아무도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자신의 선행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분명히 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갈라디아2:16)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구원하셨나니”(디도서3:5). 그대가 스스로의 선행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왜 예수께서 십자가로 가셔야 했을까요?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라디아2:21)” 라고 답합니다.

그대는 구주가 필요합니다. 당신을 위하여, 당신 대신 죽으신 예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5:6-8). 예수는 우리가 연약하고, 경건치 않고,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만 하신 것이 아니라, 이를 행위로 보이셨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오한1서4:10). 이 사랑의 하나님이 인간의 죄와 구원에 자신을 던지셨다.

십자가의 도는 사도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제목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린도전서15:3)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십자가는 전도의 절반이고, 부활이 있어야 완성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장사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린도전서15:4).

예수는 요한복음10:17, 18에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한복음10:17,18). 아무도 이런 선언을 할 수 없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환전상과 동물을 쫓아 내실 때, 자신의 부활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했습니다. 그들은 이 말이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르켜 말씀하신 것”을 몰랐습니다(요한복음2:19, 21). 나중에 그는 표적을 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땅 속에 있으리라”(마태복음12:39,40)라고 말씀하시며 이적을 언급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사흘 후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그리고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12제자에게와  그 후에 5백여 형제에게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린도전서15:5-8). 이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눈으로 본 증인들이다.

사도들은 이 도를 전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복음 전파가 금지되었지만, 그들은 사람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명을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전하고 부활을 선포하다가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가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친히 보았고, 개인적인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구언하는 그리스도의 지식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부활의 거짓 증인이라면, 죽음을 무릅쓰고 거짓을 전했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전시할 수만 있다면, 부활을 전하는 입을 막을 수 있었겠지만, 예수의 시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무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나셨습니다. 그는 구주시고, “나는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으리라”(계시록1:18)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어찌하려는가

예수는 당신의 구주신가? 당신은 그를 아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메시지는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로마서1:16)는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전도하다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때 지진이 나고, 간수는 죄수들이 탈옥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처벌이 두려운 간수는 주의 종에게 나아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고, 그들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답한다(사도행전16:31).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에게 영생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3:16). 예수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라 말씀하신다(요한복음 6:47).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한복음1:10-13).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단지 생각으로 동의한다는 것일 것입니다. 마치 죠지 와싱튼이나 어떤 역사적 인물을 믿는 것 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복음의 기본 진리를 알고, 그리스도인이라 시인합니다. 그들의 이론은 옳고, 교리적으로 맞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개인의 구주로 의지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구원받아야 합니다, 당신은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10:9,10)라고 말 합니다.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적이 없다면, 오늘 그를 부르시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로마서10:11-13)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절기예배/십자가


어떤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까?

(막15:16-32)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마 16:24).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배의 주제입니다. 모든 정상적인 목회자들은 모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릅니다. 그러나 목회자마다 십자가를 지는 느낌은 다릅니다. 십자가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1. 억지로 지는 십자가(막15:16-25).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에 이르러”(막15:21-22).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를 대신하여 얼마동안 십자가를 "억지로" 짊어져야 했습니다. 군인들의 창과 칼 앞에 자존심을 다 구기고 마지못해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날은 시몬에게 "개 같은 날의 오후"며 재수 없는 날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시몬에게 원치 않았던 굴욕이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며, 빨리 던져버려야 속이 시원한 불편한 짐이었으며 그가 비방하고 조롱한 형벌에 불과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위협에 시달리다 더 버티면 어쩐지 뒤끝이 좋을 것 같지 않다는 느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아닐까요? “이보게나, 내가 피 흘려 산 교회를 위해 그렇게 불평과 원망의 느낌을 가지고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면 이제 그만 내려놓게나. 내 마음이 편치 않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마16:24). 십자가의 감격을 회복하도록 주님, 도우소서! 십자가를 하나 더 얹어주실지라도 기꺼이 지고 갈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십자가의 은혜로 채워주소서!


  2. 마취제를 거절한 십자가(막15:22-25).


  “내가 목마르다!” 예수의 외침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를 지는 삶에는 목마름과 고통이 있습니다. 갈증이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고통과 갈증을 면하기 위해 마취제 같은 쓸개 탄 즙은 거절하셨습니다. 우리들이 목회자가 되어 한 없이 양보하고,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려 할 때 고통과 목마름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피곤해지는 순간이 있으며, 좌절을 겪기도 합니다. 하나님, 십자가의 목마름을 성스러운 목마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우소서! 이런 저런 목마름을 환영하는 모습으로 살 수 있도록 도우소서!  

  예수님께는 십자가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있으나 쓸개 탄 마취제를 거절하심으로 온 몸 그대로 고통을 느꼈습니다. 비통한 희롱과 조롱, 외면이 주는 정신적 고통도 감수했고 무서운 저주도 온 몸과 영으로 받았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로 향하는 가파르게 보이는 해골의 언덕을 오를 때 사람들이 제공할 고마운 마취제를 고대하며 십자가를 등에 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위로인 마취제가 필요 없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 하나님, 사람들의 비난과 비평에 몸서리치고 있는 저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자들이나 죽을 준비가 되었다고 큰소리치고는 잽싸게 달아나 버린 제자들을 향한 원망의 느낌, 버림받았다는 서러움의 느낌을 못 박아 버렸기에 마취제를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자기 연민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기 때문에 마취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길 원했습니다. 십자가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여, 우리들을 축복하소서! 십자가를 하나님의 위로며 영광으로 들어가는 감격으로 받을 수 있도록 도우소서! 


3. 죽어야 사는 십자가(막15:30-32).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다”고 했으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할 때까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도록 막고 있던 휘장을 하나님께서 친히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버리심으로 구원의 새롭고 산 길 을 열어 놓으시기까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죽어서야 십자가에서 내려 왔습니다. 저주를 받은 뒤에야 내려 왔습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완성한 뒤에 내려 오셨습니다!

“주님 오늘도 제 몸은 당신께 드리는 희생제물입니다. 명령을 기다립니다.”

  서 아프리카 선교사로 사역했던 테일러 스미스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교회 사임을 생각하고 있을 지 모릅니다. 우리들은 교회사역을 그만 둘 적절한 타이밍을 찾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린 애써 기도하며 개척했던 사역지를 떠나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왜 우리들은 사명을 중단하려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더 이상 헌신을 하지 않으려는 것일까요? 죽기살기로 헌신하더니 10년도 못 채우고 사역지를 떠나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성령님께서 나에게 물으십니다. "육신적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세상에 대해 죽었는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길 원하는가?"(고후 4:10)  "아닙니다. 성령님, 내 자존심 때문에 더 이상 목회 못하겠습니다." 성령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나타난다네. 네 자존심이 죽고, 네 욕심이 죽어야 교회가 살지 않겠나!"

   

  지금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있다면?  ‘사람들의 칭찬, 명예, 자존심, 대우’에 대해서 전보다는 더 적게 관심을 기울일 것입니다. 우리는 욕심에 대해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좋게 말하느냐 아니냐가 우리들의 헌신의 질을 결정할 만큼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죽는 순간에 이르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열심히 추구하던 것이 별 의미가 없게 됩니다. 죽음의 자리에선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혹독한 비판에 대해 죽은 자입니까? 사람들의 불친절에 대해 죽은 자입니까? 오늘도 나 자신을 향해 죽고 하나님의 영광과 목적을 위해 살려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인준하지 않으신 욕심에 대해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열매 맺기 위함입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십자가에서 자아를 단호히 처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진가(眞價)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게 함이니”(빌3:8-9). 오늘도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4:10).  하나님,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내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실망해도 분노가 치밀고, 조금만 나의 지도력이 손상 당해도 견딜 수 없어하는 나를 철저히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주십시오! 내 눈물은 주님을 위한 눈물이 아니라 서러워서, 속상해서,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 뿐이니, 주여 이 상한 마음마저도 십자가를 못 박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4. 당돌한 십자가(막 15:42-47; 요 19:38-42)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taking courage)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막15:42-47)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제자들은 모두 달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실패자처럼 보입니다. 아무도 예수님 편에 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십자가 주변에는 그 당시에 아무런 사회적 권리나 힘이 없는 여성들만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요, 실패자의 자리에 나서서 자신이 예수의 제자라며 밝히며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해 가겠다고 한 사람이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그는 주변에 믿는 사람처럼 보이는 이들이 없고, 믿는 사람들이 다 넘어진 것 같을 때 실망하지 않고 나서서 당돌히 십자가를 졌습니다. 억지로가 아닙니다. 마지못하여 십자가를 찾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용기있는 태도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요셉을 당돌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가 한 행동은 홀로 죄악에 맞서는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반역자의 신분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반역자의 시신은 가족들도 가져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한 것은 스스로 반역자의 제자라고 공개하는 일이므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예수의 제자임을 밝힌 신앙이 바로 빌라도와 세상이 볼 때 당돌한 신앙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 용기 있는 신앙입니다.  “반역자로 몰아가도 좋다. 아니 예수는 반역자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죄 없는 아들이심을 내가 믿는다. 빌라도 당신도 예수가 무죄라는 것을 알지 않는가!”라는 담대함이 이 시신을 달라는 요구에 담겨있었습니다.

 

  요셉이 용기있게 십자가를 지는 태도는 다른 사람에게 거룩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요 19:39). 자신의 신분 노출을 두려워해서 밤중에 찾아왔던 니고데모, 예수님이 비난당할 때 드러내 놓고 변호하지 못했던 니고데모, 드디어 그도 요셉을 보고 힘을 얻었습니다. 당당히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예수를 사랑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동료를 보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장례를 치르기 위해 100근이나 되는 값비싼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왔는데 이 양은 왕족의 장례를 치를 때에 사용하는 만큼의 많은 분량입니다. 내가 용기있게 십자가를 지고가는 삶이 어둠 속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감추고 살아가는 수많은 니고데모들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당당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게 되도록 도와주소서! 

 

  5. 자랑의 십자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6:1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고 사신 분 중에 최초의 미국 침레교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이 있습니다. 그는 미얀마에서 7년 동안 열심히 사역했지만 7년이 지나도록 예수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주변의 냉대 속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마저 병으로 잃었습니다. 자기 아내를 묻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친한 친구가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여보게 저드슨 형제, 너무 낙심치 말게나.”

그러자 저드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낙심이라고? 예수 안에서 소망은 태양처럼 빛나고 있다네!”  

  25년의 세월이 흘러 저드슨은 미국으로 돌아 왔습니다. 지금까지는 선교하면 영국이 대표였습니다. 미국이 아직 선교에 미약할 때였는데 위대한 사역을 마친 저드슨이 돌아오자 전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환영하고 그의 보고하는 자리에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선교사의 입에서 나올 흥미진진한 선교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저드슨 선교사는 첫째 날 우리 죄인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설교했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사람이구나”하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둘째 날은 저드슨이 번역한 미얀마-영어 사전과 미얀마 번역성경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어했습니다. 또 7년 동안 열매가 없다가 그 후 20여 년 동안 3,000명이 넘는 미얀마 원주민들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고 침례를 베푼 영웅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습니다. 또 감옥에 끌려가서 죽을 뻔한 고비를 수없이 넘긴 일화도 자세히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둘째 날도 예수 그리스도만 이야기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 53:5). 사람들은 셋째 날엔 틀림없이 선교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셋째 날에는 죄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오늘도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사회를 보던 목사님이 기다리다 못해 안타까워서 말했습니다.

“저드슨 선교사님, 성도들은 오늘 다른 설교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야기 말고 선교사님이 겪으신 재미있고 극적인 이야기를 좀 해주십시오. 또 선교사님이 회중교회 선교사의 신분으로 출발했다가 배를 타고 가면서 성경공부를 하는 중에 왜 침례교회 선교사로 바뀌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길 들려주십쇼”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에게는 저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나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우리 주님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고 더 감격스러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저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세상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우리 주님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감격스럽습니까? 자랑의 십자가가 우리 마음을 꽉 채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십시다. 하늘에서 드리는 예배의 중심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아멘!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합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합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고전2:2). 아멘.

 

  어떤 십자가를 지고 부활의 주님에게 나아가겠습니까?   (김택수 목사)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제 목 부활은 우리의 믿음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전서 15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복된 소식이요, 듣는 자로 하여금 기뻐 뛰게 하는 요점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육에 속한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고 또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신령한 비밀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3~14). 육에 속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이들,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1970여년, 거의 이천년 전에 일어난 일, 그 일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라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사람을 개선하고 사람을 개조하여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개조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행동 양식과 법칙들을 만들어서 시행하곤 합니다. 요즈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는 사람들을 개조하여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아주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그러한 행동개발을 위한 여러 원칙들을 제시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사람이 그냥 그대로는 못쓴다, 사람 그대로는 합당치 못하다, 많은 난제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이상적인 인간상(人間像)을 설정하여 놓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여러 가지의 정책과 실행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갑니다.

동서양이나, 예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남들 보다 앞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 인간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종교가들이 있었습니다. 도덕가들이 있었습니다. 윤리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우리나라의 이퇴계나 이율곡 선생 같은 이 등은 그러한 면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난제를 개선하고 고치기 위해 사람 자체를 손대었습니다. 인간 자체, 인간성 자체, 인간의 윤리의식,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식 등 자체를 개선시키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여도 전혀 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 나름대로의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정서에 효과를 낸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사람이기에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겠지요. 개나 원숭이가 그러한 시도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그런 시도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교육이나 도덕성의 고양이나 종교성의 계발이나 어떤 극기 훈련이나 어떤 행동 규례들을 세워놓고 자기를 통제하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의 근본은 인간 자체 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그에 수반되는 인격적인 제반 문제는 인간 자체를 길들임으로써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난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단순하게 사람이 마음을 잘못 쓰는 것, 행동이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교양적이지 못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의 우발적인 사고를 내어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못 쓰는 이들을 잘 쓰게 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이들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다듬고, 교양적이지 못한 이들을 교양적으로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을 잘 쓰지 못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고 교양적이지 못한 것은 하나의 증상(症狀)에 불과하지 그 근본은 아닙니다. 근본은 바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만을 가지고 아무리 집중적이고 주밀하게 연구한다 해도 온전하게 설명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은 제대로 설명이 되고, 인간의 난제들에 대한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 인간 자체를 다루고 개선시키고 세련되게 연마하여 거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인간상을 도출하여 내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집에서 아주 큰 무를 사왔습니다. 시커먼 흙이 묻고 싱싱하였습니다.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탐스럽고 크고 퉁퉁하고 살이 많은 일등품 무였습니다. 굵은 부분은 직경 8, 9cm는 족히 될만하였고 무 길이도 약 20cm는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지난 겨우내 아주 잘 보관한 무였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기대감이 가게 하는 무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무를 손질하려는 것을 보면서 기대감에 찼습니다. 이제 흙을 털어내고 잘 씻고 칼을 대어 여러 쪽을 내면 아주 쓸모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칼을 대어 그 무의 속을 다 드러내게 잘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겉으로부터 약 1.5cm 정도의 깊이까지는 가락지 모양으로 싱싱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바람이 들어서 말 그대로 시꺼멓게 썩어 딱딱하게 덩어리져 있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 무는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가 가지고 있는 부패의 요소를 다 긁어내고 거기에 대신 새로운 생명의 풍성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전혀 없으니 버릴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자체가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근사하게 꾸미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듬어도 속이 부패하여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17: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대어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썩은 것 자체를 가지고 아무리 해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죽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썩어 문드러진 것을 살리게 하시기는 하십니다.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로의 썩은 몸 자체에서 생명을 뽑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밖에서 그에게로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점에서 분명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을 찾아 내지 않으십니다. 죽은 것 자체를 가지고 생명을 창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에 손을 대어 개선시켜 새롭게 하시는 방식을 취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개선시키려는 여러 가지의 행동법칙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를 개선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의지로 여러분을 개선시키고 더 착하게 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영혼 자체를 가루로 만들어서 새롭게 빚는 방식을 쓰지 않으시고, 우리는 내버려두고 대신 우리 인격 밖에서 먼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곧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아니 우리 부모들이 서로 만나서 애정을 느끼고 결혼할 마음을 가지기 전에, 아니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의 증조부, 증조모가 태어나기 전에, 바다와 산과 별과 달과 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곧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지으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 속에서 그 뜻을 성취하여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셨고, 고난을 받아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고, 다시 사셨다 라는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 우리가 아직 태어나려면 아직도 1900여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화해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4:18).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우리가 알지도 생각하지도 꿈꾸지도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 인격 밖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께서 본래 죄로 부패하여 죽어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창출하고 계셨습니다.(5:24; 10:28~30).

그러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저와 여러분의 문제, 곧 죄의 문제를 영원히 부수어 다시는 그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지 못하게 법정적인 조치를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용서하실 공의롭고 정당한 근거를 마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8:1)라고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죄가 왕노릇하는 옛 사람을 또한 죽여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6)라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죽이는 일만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속에서 행하신 대속의 의미가 부활을 통해 확증되고 광포되고 사실적으로 입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도 무색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다시 사시는 것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지신 것이니 죽음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과정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더 이상 죽으심에 묶어 놓으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마치 예전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년에 한 차례씩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 대신 죽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의 속죄소에 뿌리고 나온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 제사가 열납이 되지 못하면 거기 들어간 제사장은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한 속죄희생의 피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에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고 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나오게 되면 환호하며 찬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는 염소의 피를 받으셨고 그 대제사장의 드리는 제사를 열납하시고 만족하셨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들어간 대제사장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면 백성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자기들의 죄에 대해 자기들에게 직접 물으실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그 증표로 당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흡족하게 여기시고 우리 죄에 대한 공의의 요구를 만족하게 여기셨으면 반드시 우리의 대제사장은 다시 살아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시지 않으시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주님의 속죄사역이 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셨음을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옛 생명의 체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관계, 체계를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되어진 그 모든 효력을 믿음을 통해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수지 공사를 하고 나서 그 밑에 있는 논에다 수로를 따라서 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성령께서 오시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증거자들인 사도들을 감동하셨고 사도들의 증거를 따라서 믿게 하셨고, 그들이 또한 전도자들이 되어 다시 증거하였고, 그 증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 안에서 구원하여 놓으시고 당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 그 효력을 누리고 차지하라고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부활하는 일이 있겠느냐고 믿지 않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하는 관점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면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부인하는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사도가 말하는 대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겠느냐, 썩은 자가 다시 살겠느냐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심정 속에는 과학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고상한 지식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자연질서에 속한 진리와 이치를 발견하여 세운 학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에 세운 진리와 이치에 속한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을 과학 운운하면서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의 깊이를 잘 모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서만 아는 옅은 지식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의 다국면적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물리적인, 우주 천체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심미적인 세계, 소리와 시각과 색조의 세계,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여 그 원리를 적용하여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달고 맛있는 과실이 크게 열리는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과학적으로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주어진 현상의 질서를 연구하고 관찰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의 인체의 신비에 대해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영적인 원리,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 사이에 세우신 영적인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영적인 원리에 대해 무식한 자들입니다(고전 15:13~14).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데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것은 도덕적인 착함과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구원받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사실,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의 구주로서 그 일을 하셨다,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았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구속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6:23).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저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나 어떤 성현의 말을 배우고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고취하여 자신을 세우려는 것이나 하등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효력을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선의 개념이나 이상(理想)의 관념이나 높은 도덕, 또는 윤리 의식을 우리에게 고취시켜 우리를 도덕적으로 개선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사신 그 사실에 기초하여 그 사실의 효력을 누리며 산 소망을 가지고 참된 기쁨을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산 소망의 충분하고 완전한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 아니 성경 전체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케케묵은 골동품 서적의 가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그 모든 행사에 대한 것은 거짓 것으로 드러날 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의 사실성과 필연성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고전 15:16~19).

모든 사도들은 모든 이들에게 바로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그 사실을 기초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역설하였습니다. 어느 사도도 그 사실을 빼놓고 자기의 강론을 시작하거나 진행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모든 사실들의 증인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닐진대 자기들은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15:15).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터를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하심의 확실성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산 소망을 가진 자답게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며,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주님께서 행하신 그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키시고 그 속에서 늘 가르쳐주시고 양육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1:3~6).

아멘.

반응형

'추천설교 > 절기별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절기예배] 예수부활  (0) 2017.06.12
[절기예배] 어린이 주일  (0) 2017.06.12
추수감사절 설교  (0) 2017.05.18
어버이 주일설교  (0) 2017.05.18
부활의 첫 열매  (0) 2017.04.14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나 주님만 따라 가리라

 

설교 : 박한응목사

본 문 : 마태복음 4 : 18 - 22

제 목 : 나 주님만 따라 가리라

찬 송 : 216, 321, 370, 408.

복음송 : 비바람이 앞길을 막아도

 

할렐루야!!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평강이 이 시간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다 같이 찬송가 455장을 부르겠습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이 찬송에서 나 주님만 따라 가리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으로 오늘밤 함께 은혜 받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년에는 오직 주님만 따라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 멘>

사람은 누구를 따라가느냐에 따라서 그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장사꾼을 따라가면 장사꾼이 되고, 과학자를 따라가면 과학자가 됩니다. 도둑놈을 따라가면 도둑놈이 되고, 마귀 따라가면 지옥 가게 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 선지자를 끝까지 따라가서 갑절의 능력을 받은 능력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제자의 길을 버리고 물질과 명예를 따라갔다가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시몬과 그의 아우 안드레가 바다에서 고기를 잡기 위하여 열심히 그물질을 하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실 때에 저들은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으며, 또한 야고보와 요한도 그물을 깁고 있다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따라 나섰습니다.

또 막2:14절에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쫓으라하시니 일어나 예수님을 좇았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년에는 오직 예수만 따라가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세상에는 우리들을 유혹하는 곳도 많이 있고 또 우리가 가야 할 곳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예수 따라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모든 생활이 예수 중심의 생활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 중심의 생활, 교회 중심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절대로 부귀와 명예와 평안의 길이 아닙니다. 좁고 험한 가시밭길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의 길입니다. 그래도 가야할 길이 바로 예수님 따라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에는 장애물도 많이 있습니다. 온갖 것들이 우리를 방해합니다. 때로는 눈보라와 같은 매서운 환난의 바람이 불어 올 때도 있고, 비바람이 우리의 갈 길을 막을 때도 있습니다.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 넘을 수 없는 태산과 같은 시험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야 합니다. 앞서가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할렐루야!!>

 

  <G.S> 비바람이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눈보라가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이 길은 영광의길 이 길은 승리의길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신 길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아 멘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예수님이 부르셔서 제자를 삼으신 것처럼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의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 따라가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1.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자기를 부인하라 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초대 왕 사울은 처음 왕으로 세움 받았을 때는 성령이 충만하였지만 그 후 교만하여 악신이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내 육성과 나의 혈기와 고집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자기 자신을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2)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자기가 져야 합니다. 누구에게든지 자신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무겁다고 벗어버린다든지 사명 감당을 하지 않을 때에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최선을 다하여 잘 감당할 때에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적은 일에 충성을 하니까 많은 것을 맡긴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선 여러분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을 하십시오. 그래야 더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현재의 직분에도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서 더 큰 것을 바란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년에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만 따라가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도 말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의 십자가만을 지고 사명 감당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2. 예수님의 제자의 길은 모든 것을 다 버리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시몬과 안드레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하였고, 야고보와 요한은 그의 부친과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하였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베냐민 지파요 가말리엘 문하생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리고(3:8) 예수님을 따라서 이방 민족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여 온 세계를 복음화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하란을 떠났을 때에 가나안 땅을 주셨고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왕상19;19절에는 엘리사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 열 두 겨리 소로 밭을 갈다가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엘리야를 따랐습니다. 또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는 것입니다.

(10:29-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17: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그의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주님을 위해서라면 우리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3. 예수 따라가는 길은 멸시와 천대를 받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는 곳에는 환영하는 사람들보다는 어떻게든지 예수님을 힐난하고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여도 그들은 병이나 고치려고 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받으신 수치와 천대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멸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성령 세례를 받고 나가서 부활의 예수를 증거할 때에도 제자들을 술이 취하였다고 조롱을 하였고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저들이 배우지 못한 어부들인데 어찌 이와 같이 말을 잘하느냐고 조롱을 하였습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역사 2천년 동안 우리 기독교인들은 남들에게 환영받고 영광 받은 것이 아니라 멸시받고 천대를 받았습니다. 아무 상관도 없이 예수 소리만 들어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세상에서 핍박을 받을 때에 하늘에서 상이 크다고 하십니다.

(5: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오늘도 가야하고 내일도 가야 합니다.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우리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 길이 아무리 험하고 고통스러워도,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서 가야합니다. 포기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산상에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우리 인간의 구원을 다 이루시고 다 이루었다”(19:30) 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달려갈 길을 마칠 때까지 믿음을 굳게 지켜 주님 따라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 멘>

   

4.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백배의 상급을 받는 길입니다.

   

(10:29-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작은 충성도 결코 헛되지 않고 큰 것으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6:7),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16:27)

이제는 2017년 새해를 맞이하여 앞서가신 예수님을 따라서 부지런히 가야 합니다. 뒤도 돌아보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뒤돌아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9:62) 좌우 옆으로 치우치거나 보아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앞만 보고 가야 합니다.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등산을 좋아하는 박 집사는 주일날 교회를 가야 하는데 등산을 좋아해서 산으로 갔습니다. 되돌아 올 때는 이미 날은 저물었고 산을 거의 내려올 지경에는 캄캄한 밤이라 그만 잘못하여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순간적으로 생각하기를 이제 죽었구나. 집사가 주일을 범하고 등산을 왔으니 이젠 죽었구나하는 생각과 동시에 한 소나무 가지를 간신히 잡게 되었습니다. 주위가 캄캄한데 위를 보아도 도무지 올라갈 수가 없고 손을 놓으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박살이 날 것 같아서 더욱 소나무 가지를 움켜잡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위에 아무도 없소 사람 살려 주세요그러나 아무런 소리가 없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여 옵니다. 그 때 절벽 위에서 바로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났습니다. “○○○ 집사야!”

이 사람은 너무도 기뻐서 소리쳤습니다.“, 여깁니다. 빨리 살려주세요그러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상했습니다. 이 캄캄한 밤중에 또 이 산중에서 자기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 때 절벽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나는 네가 믿는 하나님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얼마나 기쁜지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만 게신 줄 알았는데 이 산중 절벽에도 계셨군요. 그런데 괜히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하나님 빨리 올려 주세요 팔이 아파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라고 안달입니다.

그 때 다시 절벽 위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네가 진정 나를 믿느냐? 내가 진정 너를 구할 수 있다고 믿느냐?” 그 사람은 대답하기를 하나님!, 이럴 때 하나님 안 믿으면 어느 때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빨리 올려 주세요. 이제 팔의 힘이 다 빠졌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습니다. 오늘은 비록 교회를 빠졌어도 내가 집사가 아닙니까? 집사가 하나님 안 믿으면 누가 믿습니까?”

위에서 다시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네가 진정 나를 믿는다면 내가 너를 구해 줄 테니 그 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놓아라

그 사람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이 캄캄한 밤중에 내가 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놓았을 때 만의 하나라도 실수를 하신다면 나는 박살이 날 텐데 하고 고민을 하다가 하나님을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나님 이 손을 놓으면 절벽으로 떨어져 박살이 나서 죽습니다. 그 위에 하나님 말고 다른 사람 있으면 나 좀 살려 주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 말씀이 없습니다. 박 집사는 소나무를 잡고 있는 팔에 시간이 갈수록 힘이 빠져 결국 나뭇가지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젠 죽었구나 하는 순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불과 한 뼘도 안 되는 발밑에 땅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생의 모습입니다. 아니 오늘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진실 된 믿음이 없이 시시 때때로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길로 간 것이 바로 우리들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교회에서는 집사요 권사요 속장이요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오지 못하고 주일성수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여 준다고 하시는데도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내 생각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은 이제는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2017년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종하면서 예수님만을 따라가는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