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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기독교 전파와 초기 수용자들

 

 

·하층 중심 전도가 기독교 대중화 이끌어

 

한국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었을까? 한국의 천주교는 양반중심의 공동체로 출발하였으나 조상제사 금지와 신해박해(1791)를 거치면서 차츰 중인층 중심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문규현에 따르면 1784년부터 1791년에 이르는 기간 활동했던 권일신을 비롯한 12명의 지도층 인사 가운데 3분의 2가 양반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791년부터 1801년 사이 활동했던 38명의 지도층 인사들 중 중인계급이 21명으로 55%에 달했으나 양반은 9명으로 24%에 지나지 않았다. 양반 중심의 구성이 점차 중인계급으로 이동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개신교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기독교(개신교)는 천주교와는 달리 주로 중산층과 하층민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 점은 일본과도 대조를 이룬다. 일본에서는 기독교가 지식층이라 할 수 있는 무사(武士) 계급으로 유입돼 주지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기독교는 중·하층민으로 유입돼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점차 상승운동을 통해 상류층으로 확산됐다. 물론 소수 엘리트 그룹의 기독교 영입운동이 없지 않았고, 이들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상류층보다 중·하층민이 타깃

 

이런 점은 당시 선교정책에서도 암시되고 있다. 장로교선교공의회는 1893년에 모인 첫 회합에서 네비우스 정책에 기초한 10가지 선교정책을 채택했다. 이 문서는 한국에서의 기독교 전수통로(transmission)에 대한 선교사들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 중심 사상은 제1항에서 명시하듯이 상류층보다 하류층을 일차적인 전도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모든 종교서적은 한글로 출판한다는 점이었다. 성경번역도 그러했다. 천주교는 처음부터 국·한문 혼용 성경을 발간했으나 개신교는 처음부터 순한글로 성경을 번역해 한문을 알지 못하는 이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물론 점차적으로 상류층의 입교자가 생겨났지만 처음부터 중·하층민이 선교의 주된 대상이었다.

 

언더우드를 비롯한 초기 선교사들도 양반층보다는 전도가 비교적 용이한 중·하층민에 우선권을 두었다. 이것은 당시 보편화된 유가적(儒家的) 가치체계에서 불가피한 모색이었을 것이다. 초기 한국교회의 설교도 제목 중심의 간명한 설교가 중심을 이루고, 많은 예화가 사용되었던 것은 교회 구성원의 사회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구스타프 바르넥은 특정 계층을 주된 선교 대상으로 하는 것은 건전한 국민층(die gesunden Volkselemente)’ 교회를 설립할 수 없다 하여 이상적인 정책일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으나 한국에서의 경우 중·하층민 중심의 교회가 상당한 성장을 가져왔다. 이는 한국에서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1세기 기독교에서도 동일한 상황이었다(고전 1:2629 참고). 독일의 파피루스 학자인 아돌프 다이스만(Adolf Deissmann)은 초기 기독교는 절대 다수의 하층민들로 구성된 교회였다는 점을 지적했다. 막스 베버(Max Weber·18641920)에 따르면 어떤 집단의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은 그 집단의 종교적 성향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는 하층 계급의 집단일수록 새로운 사상, 이념, 종교에 보다 수용적이라고 분석했다. 그것은 새로운 이념이나 가치를 통해 신분 상승을 의도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기독교 신앙은 사회적 신분 상승을 추구하는 하층민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평양을 비롯한 관서지방이 서울·경기 등 중부지방보다, 서울·중부지방이 경상도나 전라도보다 복음에 대해 더 수용적이었던 것은 그 지역의 사회적 신분집단과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 근대화와 자주독립의 도구

 

초기 한국에서의 기독교 수용은 중·하위 계층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소수 엘리트 계층의 기독교 영입운동이 없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이들이 주로 개화지향적 민족자강론자들이었다. 급진 개화론 혹은 온건 개화론(東道西器論)의 전통을 잇는 이들은 기독교를 서구문화에 대한 도관으로 보아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고자 했다. 이런 인식은 청일전쟁(189495) 이후 분명하게 나타났는데, 기독교를 근대성(modernity) 혹은 문명의 기호(a sign of civilization)로 인식했다. 이런 인물이 서재필 윤치호 박영효 등과 같은 엘리트들이었다.

 

기독교를 통해 입헌민주국가를 건설하고, 일제의 침탈이 노골화된 이후에는 자주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보았던 이들도 기독교를 도구로 인식했다.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을 중심으로 설립된 독립협회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 독립협회는 다수가 기독교인들로 구성되었고 안창호, 길선주 등은 평양지부에 속한 인물이었다. 189811월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중심인물이 투옥되었는데, 이들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승만 이상재 이원긍 신흥우 김정식 등은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들 외에도 개화지향적인 혹은 민족자립과 독립을 추구하던 조만식 김구 등 다수의 지도자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한국에서 기독교를 수용한 대표적인 두 집단은 다수의 중·하위 계층과 개화지향의 민족자강을 추구하는 엘리트 그룹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신대 이상규교수·역사신학)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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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통해 기독교 수용에 힘쓴 이수정(李樹廷) 
 

 

    1842년 전라도 곡성군 옥라면에서 이병규의 이들로 출생했다. 전주를 본관으로 이해되지만 일설에는 평창이씨로 천주교인 이었던 이승훈의 후손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고종의 친정 후 실력자 민영익과의 두터운 교분으로 1882년 임오군란때 명성황후를 충주까지 무사히 피신시킨 공으로 황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동행한 농학자 안종수(安宗洙)와의 우의가 돈독했다. 그가 귀국하여 일본의 농학자요 기독교인 이었던 쓰다센(津田仙)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이수정에게 전하였고, 이수정은 일본에 가기를 열망하였다. 1882년 9월 일본에 갈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고종의 특별한 배려 때문이었다. 그는 도쿄(東京) 외국어 대학의 교수직을 맡아 일본에 체류함으로 정부의 공식적 임무 없이 서구문물을 연구할 수 있었다.


   수신사 박영효 일행과 함께 도일한 이수정은 쓰다센을 만나 농사법, 법률, 우편등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고 기독교 교리와 가치를 설명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쓰다센의 안내로 한문성서를 탐독하던 중 성탄절 예배를 참석하기에 이르렀고, 1883년 4월 29일 주일 미국 장로교 선교사 녹스(G.W.Knox)의 입회아래 노월정 교회(露月町敎會)에서 야스가와 (安川亭)의 집례로 세례를 받아 일본에서 최초의 한국 기독교인으로 인정되었으며 그해 5월 도쿄에서 모인 제 3회 전국 기독교도 대 친목회에 참석, 한국어로 특별기도 순서를 맡았다. 또한 요한복음 13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신앙고백서’를 발표함으로써 윤치호의 ‘신앙고백서’와 함께 한국 기독교 초기 신자의 신앙 양태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일이 있은 후 한글성서 번역사업을 시작했다. 제일 미국 성서 공회 총무였던 루미스(H. Loomis)와 협력하여 한문 성서에 토를 달아 현토한한 신약전서 복음(懸吐韓漢新約全書)를 간행하였으며 곧이어 순한문 성서인 ‘신약 마가젼’을 번역하게 되었고 이 쪽복음은 1885년 4월에 기독교 교역자로서 처음 입국한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감리교 아펜젤러(H. G. Appenzeller)가 휴대한 성서가 되었다.


   또한 그해 12월 13일에는 미국에서 발간되고 있던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한국 선교를 요청하는 감동의 글을 기고함으로써 미국을 위시한 여러 선교국가들이 한국에 선교사 파견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1884년 7월에는 멕클레이(R. S. Maclay)를 김옥균과 접촉시켜 한국에 교육과 의료선교 사업을 하도록 고종께 권유하도록 하여 입국하게 하였고 1885년 1월에는 일본에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만나 한국어를 가르쳐 한국에 입국 하도록 교량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또한 그해 7명으로 구성된 유학생 교회를 창설, 지도 하였으며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에게도 복음을 전해 개화파 지식층에게 시대적 각성을 시켰으나, 갑신정변 실패 후 구 한국 정부의 노여움을 사 거리가 멀어졌고, 교분이 두터웠던 김옥균과도 소원해져 그의 애국 충정이 오해되어 1886년 귀국후 곧 처형되고 말았다. 그의 성서 번역 사업은 소명감에 의해 추진 되었으며 현토한한 신약전서와 본격적 성서번역 시작인 신약 마가전 복음셔언해를 요쿄하마에서 출판한 것은 그의 업적중 가장 빛나는 사업이었다.(2004. 2. 21. 한국장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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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특집다큐 한국 기독교 선교의 개척자 이수정 [영상보기]

선교사들의 입국과 이수정

 

 1882년 미국과 영국에 이어 1886년에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여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1884년 알렌이 그 이듬해에 언더우드와 아펜질러, 스크렌톤이 입국하여 선교활동르 한다.

 1, 조선의 첫 선교사 알렌

 알렌은 마이애미 의대를 졸업하고 중국선교를 하다가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이며 공식적으로는 미국 공관의로 조선에 입국한다. 선교사로 입국한 것도 아니고 공개적으로 선교가 허용된 것이 아니므로 조용히 가정에서 가족들과 예배를 드리던 중 1884년 갑신정변이(급진적인 개화파인 김옥규느 서재필, 박영효 등이 일본을 등에 업고 쇄국정책을 내세우는 보수파이며 지권당을 제거하려다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고 살아남은 박영효와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보수파인 민영익과 친분이 있는 이수정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죽이려고 이수정이 조선으로 귀국하는데 한 요인이 된다.)  일어나고 이 때 민비(명성황후)의 친척이며 보수파인 민영익도 자객의 칼에 7군데 맞아 혈관이 끊기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칼에 맞아 찢어진 상처와 끊긴 혈관은 한의들이 할 수가 없었다. 뮐렌도르프의 소개로 알렌은 민영익을 명주실로 꿰매고 약을 발라 외상을 석달이나 성심껏 치료해 주었다. 이 일로 민영익 뿐 아니라 고종과도 원만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엇고 그 결과 광혜원(은헤를 널리 베푸는 집이라는 뜻으로 고종이 지어줌. 후에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뀜, 광혜원자리는 갑신정변 떄 죽은 홍영식의 집이었다) 이라는 한국 최초의 근대병원을 설립하게 된다.

 

언더우드(광혜원에서 화학을 가르침), 스크렌톤, 앨러스(의료 선교사)모두 광혜원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알렌 선교사는 선교본부와 관계를 끊고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의 서기관이 되어 달은 유럽나라들처럼 제국주의의 일환으로 와서 조선의 잇권을 빼앗기 위해 열을 올리는 미국의 손, 발이 되어 일을 함으로 지금도 믿지 않는 역사학자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2, 한국 선교의 개척자 언더우드

 알렌이 1884년에 입국한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면 그 이들해 입국한 언더우드는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함께 개신교를 대표하는 선교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언더우드는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아버지와 신앙심 깊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10살이 되었을 때 언더우드는 형과 함께 카톨릭에서 운영하는 남자 기숙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신앙이 남달랐던 형제는 자기전에 늘 기도했다. 다른 학생들이 놀림에도 굴하지 않고 기도하던 형제를 따라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릉 학생들도 기도하는 습관이 기숫사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후 언더우드의가족은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며 우여곡절 끝에 신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이미 신학교 재학 중 인도선교 준비를 하였으나 아펜젤러를 만남으로 한국선교에 대한 열망에 불탔고 '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라는 음성을 듣고 1885년 일본에서 이수정을 만나 한국어을 배우고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 마가복음을 들고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와 신혼여행도(명성황후 시의였던 의료 선교사 릴리아스 호톤양과 결혼함) 전도여행으로 떠날 만큼 복음의 열정으로 살았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선교사로서, 학자로서, 교육가로서, 성경번역자로, 편집가, 여행가. 정치가로 평화의 사도로서 일생을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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