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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절,대속죄일,초막절,사순절,부활절

구약과 신약에서 나팔절,대속죄일,초막절,사순절,부활절

나팔절,대속죄일,초막절,사순절,부활절

(레23:24)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출애굽이후의 칠월,즉 종교력으로 7월) 곧 그 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레 23:27)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종교력7월10,대속죄일)이니 너희는 성회를 열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레 23:32) 이는 너희가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종교력7월) 아흐렛날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

(레 23:34)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종교력7월) 열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총8일) 지킬 것이라

(레 23:39)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 날에도 안식하고 여덟째 날에도 안식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세가지 달력♣

야곱가족이 애굽으로 넘어오기 전,농경사회에서 사용하던 “농경력(=민간력)”

애굽(=이집트)에서 사용하던 “태양력(=양력)”

400년간의 애굽의 종살이에서 탈출하던 때,새로운 달력 “종교력(=유대력)”

종교력을 기준으로....태양력과는 3개월정도 차이.....민간력과는 6개월 정도 차이★

ex)

종교력 1월(닛산월) / 태양력 3월~4월 / 민간력 7월 - 유월절,해의 첫달(=신년),

보리추수(아빕월)

-닛산월과 아빕월의 차이는 “윤달 추가여부”에 따라 다른데,그것까지 연구하려고 하면,더욱 더 깊이 들어가야 하니...일단 여기서 Stop!!!-일단은 “닛산월이면서 아빕월”인 것으로 아는 걸로~~~~
  
종교력 7월(디스리월) / 태양력 9월~10월 / 민간력 1월-신년절(=나팔절),대속죄일,초막절

-위의 성경본문 참조
  
유월절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

예수님=유월절 어린양 So 예수님의 피=유월절 어린양의 피

(막 15:1) 새벽에(1월(=닛산월)14일 새벽)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요 18:39) 유월절이면(1월(=닛산월)14일 저녁부터 시작)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요 18:40)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마 27:15) 명절(=유월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예수님은 유월절에 우리를 위한 대속의 피를 십자가에서 쏟으셨으므로....

 “유월절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구속의 언약 성취

단 한 번의 대속으로 인한 영원한 죄사함

(히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히 9: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히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사순절과 부활절 

사순절이 시작되는재의 수요일은 3월 6일

부활절은 4월 21일고난주간은 4월15일-20일

3월 21일 춘분이후 첫번째 만월은 4월 19일(음력3.15)이므로

2019년 부활절은 4월 21일입니다.

또한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수요일은  

부활절전 40일(주일은 제외)인 3월 6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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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주일예배 설교 <부활의 생명으로 >누가복음  눅24:30-35

 

 

 

제목 : 부활의 생명으로

말씀 : 눅24:30-35

할렐루야! 오늘은 정말 감격스러운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다가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준 날입니다. 진정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이상 어찌 할수 없을만큼 참혹하고 처절하고 끔찍한 고통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그러나 그 어둡고 절망적인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주신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세상의 그 어떤 날보다도 기쁜 날이고 축복의 날이고 은혜의 날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탄생한 날과도, 세상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더 얻은 날과도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엄청난 은혜의 날이요, 큰 축복의 날입니다.

여러분, 이 부활절을 맞이하여 이러한 부활의 의미를 다시한번 깊이 되새기며 정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정말 이 부활절에는 모든 어둠과 절망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더욱 온전히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속에 모시고 살아갈때에 더욱 부활의 생명이 충만한 삶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이나 인간의 부활에 대해서도 이러킁 저러쿵 말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끊어졌던 생명이 다시 살아난단 말인가? 어떻게 죽어서 썩어 흙이 된 인간이 다시 살 수 있단 말인가하면서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에 대하여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들이 이해하거나 말거나, 믿거나 말거나,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든지 말든지 그것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인간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살이 찢기시고 뼈가 부서지는 고통을 당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군병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창으로 찌름으로 온 피를 다 쏟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의 묘지에 장사지내었습니다.

그러나 3일후에 가보니 그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안식후 첫날에 무덤을 찾아간 마리아와 살로메에게 천사가 분명히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노라고.... 그리고 베드로에게, 제자들에게,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500여 문도에게 여러번 나타나셔서 함께 말씀도 하시고 함께 잡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감람산에서 사도들과 제자들이 함께 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고 당신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처럼 장차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 영광의 나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산 것이 아니라 잠시 기절했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팔목과 발목에 대못이 박혀서 십자가에 6시간 동안 못박혀 있었는데, 더구나 군병들이 죽은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가 다 쏟아져 내렸는데 죽지 않고 살아 있을 수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다 감추어 놓고 부활했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신격화시키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I.Q.가 두자리 숫자도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가 그리스도다. 예수는 부활하셨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다.」라고 하는 복음을 전하다가 11명 모두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어떤 이는 사자의 밥이 되어, 어떤 사람은 칼에 맞아, 어떤 이는 돌에 맞아,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다 놓고 부활을 했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아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바보가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를 위하여 목숨을 내 놓겠습니까?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를 위하여 온갖 모욕과 핍박과 죽음을 당하는 그런 바보같은 짓을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이기에, 그들의 귀로 들었고, 눈으로는 보았고, 손으로 만져보았기에 그래서 그 예수를 믿는 것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이였기 때문에 그들은 목숨을 내걸고, 속된 말로 때려죽인다해도 「예수는 부활하셨다.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런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기독교는 부활이 없으면 말짱 헛일입니다. 사랑도 좋고, 선고 좋고, 거룩도 좋지만 그러나 부활이 없으면 그거 다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사랑이니 선이니 의니 거룩이니 이런 것들은 다른 종교나 철학이 윤리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것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하나님의 아들이셨기에 사망권세 억눌려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유일한 생명의 주가 되심을 명백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여러분께서는 이러한 부활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갈 때 부활하신 주님의 새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오늘날 기독교가 많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가치관이 혼돈되고 말세가 가까워오면 올수록 진리는 비진리에 의하여 더 많은 도전과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앞으로가면 갈수록 더욱 심해 질 것입니다.

요즈음 무슨 다빈치 코든지 뭔지 때문에 교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그래서 한기총에서는 법원에 이 영화의 상영금지 가처분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 소설과 영화에서는 예수님과 마리아가 결혼을 했고 그 후손들이 지금 살고 있다느니 뭐 이따위 허튼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이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그린 그림 속에 암호처럼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시온수도회에서 그런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기독교가 이런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그들을 핍박하고 죽였지만 아직 그들중 일부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소설과 영화 속에 무슨 역사를 들먹이며 교묘하게 역사성이 있는 것처럼 위장해서 말하고 있으나 다 허구입니다. 교묘하게 자신들의 논리를 역사에 대입시켜 우리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시키려는 마귀의 장난인 것입니다.

또 며칠전에 뉴스에 보니까 유다복음서가 공개되었는데 이 복음서는 성경에 있는 복음서의 내용과 다르게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은 예수님의 지시에 의하여 그렇게 했다고 해서 교계에 논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허튼소리입니다. 정통 신학자들이 연구해보니 그것은 영지주의 이단자들이 쓴 책입니다. 영지주의란 신비한 영적지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자들로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합니다. 물론 당연히 십자가의 죽음이나 부활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절대자의 신령한 영으로 오신 분으로 그 예수님과의 신비한 영적인 교통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다 이단사설에 불과합니다. 그저 인간의 철학일뿐이지요.

여러분, 복음서가 성경에 있는 사복음서만 있는게 아닙니다. 도마복음, 베드로복음, 마리아복음, 요셉복음등 등 성경외의 많은 복음서와 많은 서신서가 있습니다. 물론 구약시대에도 구약성경외에 많은 성경과 비슷한 문서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어떤 것은 가짜이고, 어떤 것은 이단자들이 쓴 것이고, 어떤 것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읽어도 별 문제는 없으나 성경에는 미치지 못하는 문서들입니다. 이러한 문서들은 거의 성경과 동시대에 쓰여졌기 때문에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가치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진리와는 무관한 것들입니다.

여하튼 여러분, 세상의 누가 뭐라고 해도 어떤 소리에도 현혹되지 마세요. 세상의 다른 어떤 소리에도 귀 기울지말 고, 여러분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에도 맡기지 말고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누가 뭐라고 현혹한다해도 오늘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할때에 정녕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여러분의 삶이 생명과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한 삶이 되기를 다시한번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바로 그런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처음에 부활의 주님을 믿지 못하고 낙심중에 낙향하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새로운 희망과 소망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된 두사람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시던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제자 즉 글로바라는 사람과 이름을 알수 없는 다른 한 사람의 제자가 예수님을 참혹한 죽음속으로 보낸 뒤에 좌절과 실의속에서 터덜터덜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대한 아주 각별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능력 많으신 스승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와 가난과 다른 모든 고통에서 구원해 줄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고, 눈먼 자를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심지어는 죽었던 사람까지도 살리는 이분이라면 능히 모든 대적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실 것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들의 기대는 십자가 앞에서 그만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도 권능 있으셨던 주님이 그만 로마 병정들에게 온갖 조롱과 희롱을 당하시면서도 저항한번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침을 뱉아도, 채찍으로 내리쳐도, 가시면류관을 씌워도 가만히 계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그 참을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아무런 힘도 못쓰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온갖 희롱과 조롱을 퍼부어대도 주님은 그저 무기력하게 매달려 있을 뿐이엇습니다. “어이, 자네가 성전을 헐어버리고 사흘만에 지을 수 있다면서. 한번 지금 그 힘을 발휘해 보시지. 아니, 자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그럼 한번 너 자신을 먼저 구원해 보시지 그래. 자기도 못 구하는 주제에 남을 구하겠다고. 정말 웃기는구먼.”

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희롱하며 말했습니다. “이봐, 남은 구원해 주었다며 자네는 구원하지 못하는가? 뭐,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럼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보시지 그래. 그럼 좋아, 지금이라도 한번 내려와 보시지. 그럼 우리가 믿어주지.” 그러나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그냥 매달려 계셨고, 끝내는 그 십자가위에서 온갖 고초를 당하시고 참혹하게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실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메시야라고 여겼던 예수, 이스라엘의 구원자라고 여겼던 예수, 이 가난과 압제에서 건져주실 분이라고 믿었던 예수, 그가 그렇게 무기력하게 죽으시는 것을 보고 그들은 이제 예수님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실망과 좌절속에서 힘없이 낙향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실망과 좌절 속에서 낙향하고 있을 바로 그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찾아가셔서 예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말을 겁니다. 「너희가 길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그러자 글로바는 기가 막혀서 말했습니다. 「아니 당신이 보아하니 예루살렘에서 오는 것 같은데, 근일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을 모른단 말이요?」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러느냐?」

글로바가 다시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의 일이오. 그는 권세있는 말로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했고, 엄청난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병과 죽음에서 구해주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었다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것으로 믿고 따르고 있었다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가 엊그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고 말았소. 그런데 이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있긴 하지만 어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그러자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더디 믿는 자들아,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는 줄 너희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더냐?」라고 하시면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자신에 관한 말씀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들의 심령속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절망과 불신으로 얼어붙어 있던 그들의 마음속에 어디선가 한줄이 빛이 찾아들었습니다. 그러자 어둠이 물러갔습니다. 의심의 안개도 걷혔습니다. 내가 너희위하여 죽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도 기억났습니다. 결국 바로 자신들과 이야기하는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발걸음을 예루살렘으로 돌이키게 됩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소,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단 말이오, 우리가 엠마오로 가다가 그분을 보았소, 그분께서 말씀하셨소,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다시 살아나야 인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하셨소. 그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다가 다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소.」 그리하여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은 결국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때 새생명의 은총을 누리면서 주님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를 감당해 나갈 수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형벌과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이기시고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형벌과 저주와 고통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다가 그 저주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살아나신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무덤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모든 어둠과 실의와 좌절과 불안과 공포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모든 어둠과 절망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이 날, 다시금 부활의 주님을 새롭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변함없이 찾아오시는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영접하고 그분과 동행하심으로써 모든 죄의 권세를 벗어던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현혹에도 흔들리지 말고 오직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주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보혈로 온전히 죄사함의 은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사망 권세를 보기좋게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온전히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 안에 그 부활의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부활의 주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으로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좌절하게 하던 모든 어둠과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영원한 승리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은혜스런 찬양, 기도, 설교를 듣고자 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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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부활절, 고난주간, 사순절, 사육제란
 

 

 


A. 부활절(復活節)(Easter)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독교 최대의 축일이다. 초창기에는 유월절을 따라 유대력 니산월(태양력 3-4월) 14일을 부활절로 기념하였다. 그러나 유대인의 유월절을 그리스도인의 부활절로 지킬 수 없다는 로마 교회의 판단에 따라 니케아공회(325년)부터는 춘분(3월21일) 이후 최초의 만월(彎月)이 지난 첫 번째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키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결코 부활절이 유월절보다 먼저 오는 일은 피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부활절의 날자는 매년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대체로 3월22일과 4월26일 사이에 떨어지게 된다.
● 2017년= 4월 16일
● 2018년= 4월 1일
● 2019년= 4월 21일
● 2020년= 4월 12일

부활절 풍습으로는 ①흰옷(기쁨) ②백합(순결) ③양고기(예수님) ④달걀(새 생명) 등이 있다. 

 
B. 고난주간(苦難週間)(Passion Week)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종료주일 다음날(월)부터 부활하시기 전날(토)까지 일주일을 말한다. 수난주간이라고도 하는 이 일 주일은 예수님의 행적을 생각하며 경건하게 지내는 주간으로 특히 최후의 만찬이 열렸던 목요일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계셨던 금요일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심정으로 금식하는 성도들이 많다.  

 
C. 사순절(四旬節)(Lent)
부활절 전까지 6번의 주일을 제외한 40일동안의 기간을 말한다. 40일의 시작일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 부른다. 교회는 이 기간 동안에 십자가를 생각하며 회개, 금식, 기도, 묵상 등의 경건생활을 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음식을 먹는 경우 고기를 제외한 채식 위주의 식단을 꾸리는 것이 원칙이다.
● 성경에서 40일은 고난과 인내의 기간을 상징한다. 노아의 홍수 때 밤낮으로 비가 40일간 내렸고(창 7:4),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으며(민 14:33), 예수님께서는 40일동안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마 4:1). 

 
D. 사육제(謝肉祭)(Carnival)
카니발의 어원은 ‘고기여 안녕’이라는 뜻이다. 즉 원래 사육제는 사순절 기간 동안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될 것을 대비하여 미리 실컷 고기를 먹어두는 3-7일 정도의 행사 기간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본질은 사라지고 자유와 방종이 과도하게 허용되는 축제로 변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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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교회절기 - 나팔절,대속죄일,초막절,사순절,부활절

 

 

 

 

나팔절,대속죄일,초막절,사순절,부활절

 

(레23:24)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출애굽이후의 칠월,즉 종교력으로 7월) 곧 그 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레 23:27)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종교력7월10,대속죄일)이니 너희는 성회를 열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레 23:32) 이는 너희가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종교력7월) 아흐렛날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

 

(레 23:34)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종교력7월) 열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총8일) 지킬 것이라

 

(레 23:39)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 날에도 안식하고 여덟째 날에도 안식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세가지 달력♣

☛야곱가족이 애굽으로 넘어오기 전,농경사회에서 사용하던 “농경력(=민간력)”

☛애굽(=이집트)에서 사용하던 “태양력(=양력)”

☛400년간의 애굽의 종살이에서 탈출하던 때,새로운 달력 “종교력(=유대력)”

 

종교력을 기준으로....태양력과는 3개월정도 차이.....민간력과는 6개월 정도 차이★

ex)

종교력 1월(닛산월) / 태양력 3월~4월 / 민간력 7월 - 유월절,해의 첫달(=신년),

보리추수(아빕월)

-닛산월과 아빕월의 차이는 “윤달 추가여부”에 따라 다른데,그것까지 연구하려고 하면,더욱 더 깊이 들어가야 하니...일단 여기서 Stop!!!-일단은 “닛산월이면서 아빕월”인 것으로 아는 걸로~~~~

 

종교력 7월(디스리월) / 태양력 9월~10월 / 민간력 1월-신년절(=나팔절),대속죄일,초막절

-위의 성경본문 참조

 

유월절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

 

예수님=유월절 어린양 So 예수님의 피=유월절 어린양의 피

(막 15:1) 새벽에(1월(=닛산월)14일 새벽)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요 18:39) 유월절이면(1월(=닛산월)14일 저녁부터 시작)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요 18:40)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마 27:15) 명절(=유월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예수님은 유월절에 우리를 위한 대속의 피를 십자가에서 쏟으셨으므로....

 “유월절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구속의 언약 성취

단 한 번의 대속으로 인한 영원한 죄사함

 

(히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히 9: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히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사순절과 부활절

사순절이 시작되는재의 수요일은 3월 6일

부활절은 4월 21일고난주간은 4월15일-20일

3월 21일 춘분이후 첫번째 만월은 4월 19일(음력3.15)이므로

2019년 부활절은 4월 21일입니다.

또한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수요일은 

부활절전 40일(주일은 제외)인 3월 6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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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과 부활절 전 한 주 동안  십자가의 길을 생각하며

 

 

 

 

 고난주간은 부활절 전 한 주간으로, 이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어떻게 신앙적으로 살 것인가를 생각하며 지냅니다.

 

첫째날 ;

 
 예루살렘 입성 ;

 
"..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 마가복음 11 ; 1 -11


 예수께서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성으로 공공연히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셨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지켜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셔 모든 것을 둘러보셨습니다.

그리고 웅장하고 아름답게 장식된 성전 속에서 인간의 위선, 탐욕, 가증스러움, 이기주의 등의

죄악이 가득 차 있음을 보셨습니다.

다음 날 예수께서는 이처럼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케 하기 위해 채찍을 드셔야 했습니다.

 

묵상 ; 1.고난과 죽음을 미리 아시면서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용기를 생각해 봅시다.

         2.오늘 내 마음 속을, 우리 교회를 예수님께서 오셔서 둘러 보신다면 무엇을 느끼실까요?

  

둘째날 ;

 
성전을 청결케 하심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 마가복음 11 ; 15 - 19

 

 

당시 성전 안에서는 명절 때 희생의 제물로 쓸 짐승과 향유, 그밖에 필요한 물품을 매매하였고, 성전안에서만 쓰는 유대 화폐를 교환하여 주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인들, 돈 바꾸는 자들과 결탁한 제사장들은 막대한 부당이득을 취하였으며, 이로 인해 성전은 완전히 시장과 같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그들을 내어 쫓으시며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17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참 제사장의 자격으로 더러워진 성전에 대해 벽분하시고 이를 깨끗케 하신 것입니다.이것은 성전 뿐아니라 온세계를 성결케 하시려는 하나의 표징이 됩니다.

 

묵상 ; 1. 나의 신앙은 혹시 이기주의, 상업주의에 젖어 있지 않나요?

         2. 하나님의 성전을 참으로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어떤 신앙의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셋째날 ;

 
과부의 두 렙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 마가복음 12 ; 41 - 44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지켜보셨습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평범한 것 같은 이야기에서 실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강조되어 있는 점에 주의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양보다는 질을, 형식보다는 중심을 중요시 하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아 주실 만한 것입니까?

 
묵상 ; 1 ;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헌금은 어떤 것일까요?(고후9;7. 8;12)

         2. 다음의 말씀을 명상합시다.
 

"많은 사람들은 지갑으로만 바쳤지만 그녀는 마음으로부터 바쳤습니다.

이는 습관을 좇아 드리는 것과 사랑으로 드리는 것의 차이입니다.

 
 넷째날 ;

 

한 여인의 헌신

 

"..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 마가복음 14 ; 3 - 9

예수께서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비싼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와 그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향유는 300데나리온에 팔 수 있다고 하는데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보통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이 향유는 무척 비싼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여인에게서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의 충동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불평과 비난속에서도 예수께 향한 그녀의 사랑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이 일을 주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묵상 ; 1.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주님을 위하는 데 따라야 할 자기 희생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2.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함"과 같이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의 말씀에서 '봉사의 기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봉사해야 할 일에 어떤 것이 있을까요?

 

다섯째날 ;

 
최후의 만찬 ;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가복음 14;22-25


예수께서는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드셨습니다.

이는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을 희생해 제자들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실 것을 말씀으로만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찢기실 자신의 몸과 흘리실 피로 속죄를 이루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만찬 때 예수께서는 한 사람의 제자장으로서 그의 영원한 영혼을 흠 없이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묵상 ; 1. 최후의 만찬에 참여한 제자들의 심정을 생각해 봅시다.

         2.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음으로 속죄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여셧째날 ;
 

십자가에 달리시고 운명하시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 마가복음 15;16-41

 

1.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사랑은 한이 없으십니다.

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회개하는 죄인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희망을 주십니다.

3. "어머니 보소서. 아들입니다."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돌봄과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대신 지신 죄 때문에 고통당하시고 버림 받으시는 예수의 거룩한 절규를 보게 됩니다.

5. "내가 목마르다."

               인간들의 사랑과 헌신과 충성을 요청하시는 갈증입니다.

6.:다 이루었다."

              거룩한 희생으로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는 하나님 어린 양의 승리의 외침입니다.

7. "아버지, 내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오신 예수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을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위대하신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묵상 ; 1. 용서함 받은 우리는 역시 남을 용서하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2. 훗날 우리가 남길 유언을 생각해 봅니다.

 

일곱째날 ;

 
무덤 속의 예수 ;
 

"..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 마가복음 15;42-47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청하여 자기를 위하여 새로 만들어 둔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제자였지만 이제는 관헌의 박해와 친지들의 차가운 눈총을 무릎 쓰고 용기 있게 행동했습니다.

그는 당당히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 인도를 요구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자신이 무덤에 들어가심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악의 권세를 물리치게 되셨습니다.

그는 무덤의 어두움을 제거하셨으며 그 공포를 영원히 쫓아버리셨습니다.

죽음이 그 쏘는 살로 그리스도를 상하게 했지만 부활하심으로 이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그 위력을 끼치지 못하게 만드셨습니다.

 
묵상 ; 1.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2. 기독교인은 죽음을 어떻게 맞아야 할까요? 

 

 

 여덟째 날 ;
 

부활의 주를 만난 삶 ;
 

금요일에 장사지낸 바된 예수님께서는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본문은 에수 부활 사건이 전해진 그날 오후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고,

실의에 빠진 그들이 부활의 주를 만나 용기를 얻었다는 기록입니다.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는 그날 아침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하고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주께서 그들 사이에 동행하시면서 구약성서를 풀어주셨습니다.

메시아가 고난받으셔야 할 것과, 고난 후 영광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니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누가복음 24;25-35
 

그후 그들의 목적지까지 도달하여 떡을 떼실 때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고

, 용기를 얻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부활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동행하셨는데 왜 그들은 깨닫지 못했을까요?

마가복음 16장12절에는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에는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24;16)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말씀을 풀어 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졌고, 떡을 가지고 축사하사 저희에게 떼어주실 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아라" 보게 되었습니다.

 

묵상 ; 1. 예수의 부활의 사실을 의심할 때가 있나요?

         2. 부활 신앙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생동감 있게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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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부활절(Easter)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독교 최대의 축일이다. 초창기에는 유월절을 따라 유대력 니산월(태양력 3-4월) 14일을 부활절로 기념하였다. 그러나 유대인의 유월절을 그리스도인의 부활절로 지킬 수 없다는 로마 교회의 판단에 따라 니케아공회(325년)부터는 춘분(3월21일) 이후 최초의 만월(彎月)이 지난 첫 번째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키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결코 부활절이 유월절보다 먼저 오는 일은 피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부활절의 날자는 매년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대체로 3월22일과 4월26일 사이에 떨어지게 된다.
● 2017년= 4월 16일
● 2018년= 4월 1일
● 2019년= 4월 21일
● 2020년= 4월 12일

부활절 풍습으로는 ①흰옷(기쁨) ②백합(순결) ③양고기(예수님) ④달걀(새 생명) 등이 있다.
 

B. 고난주간(Passion Week)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종료주일 다음날(월)부터 부활하시기 전날(토)까지 일주일을 말한다. 수난주간이라고도 하는 이 일 주일은 예수님의 행적을 생각하며 경건하게 지내는 주간으로 특히 최후의 만찬이 열렸던 목요일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계셨던 금요일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심정으로 금식하는 성도들이 많다.
 
 
C. 사순절(Lent)
부활절 전까지 6번의 주일을 제외한 40일동안의 기간을 말한다. 40일의 시작일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라 부른다. 교회는 이 기간 동안에 십자가를 생각하며 회개, 금식, 기도, 묵상 등의 경건생활을 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음식을 먹는 경우 고기를 제외한 채식 위주의 식단을 꾸리는 것이 원칙이다.
● 성경에서 40일은 고난과 인내의 기간을 상징한다. 노아의 홍수 때 밤낮으로 비가 40일간 내렸고(창 7:4),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으며(민 14:33), 예수님께서는 40일동안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마 4:1).
 
 
D. 사육제)(Carnival)
카니발의 어원은 ‘고기여 안녕’이라는 뜻이다. 즉 원래 사육제는 사순절 기간 동안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될 것을 대비하여 미리 실컷 고기를 먹어두는 3-7일 정도의 행사 기간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본질은 사라지고 자유와 방종이 과도하게 허용되는 축제로 변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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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부활절
  성경 ; 시118:14-25, 고전15:1-11, 요20:1-18
  제목 ;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할렐루야, 부활의 영광과 기쁨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성도 여러분에
게 언제나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이번 부활절을 맞이해서, 저와 여
러분이 부활의 진리를 좀 더 깊이 깨닫고 확실하게 믿음으로써, 지금보다 훨씬
더 활발하게 부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주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우리가 전파한
복음도 헛되며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이다(고전15:14)’라고 했습니다. 바울
은 다시금 강조하기를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여러분의 믿음도
헛되고, 여러분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
들도 망했을 것이다(고전15:17)’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만일 기독교
인이 된다는 것이 지금 이 세상에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피
조물 중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일 것이다(고전15:19)’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실하
게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하게 믿을 경우, 믿음생활을
온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지 아니 믿는지 알 수가 없는, 그처럼
흐릿하고 불분명한 신앙이 아니라, 그야말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확
실한 믿음을 갖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부활신앙은 살아있는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죽은 나무는 날이 갈수록 썩어문드러지
지만, 살아있는 나무는 날이 갈수록 무럭무럭 성장하고 새롭게 변화하는 모습
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날이 갈수록 그 믿음이
더욱 성장하고, 그 생활하는 모습이 날마다 새롭게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습
니다.
    그리고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밝은 소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지금 사는
것이 많이 고달프고 괴로울지라도 밝은 미래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습니다. 예
수께서는 그 누구도 이겨내지 못한 죄와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부활을 승
리를 거두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하신 그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결코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절대로
굴복하지 않고 기어코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를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반드시 승리하도록 자비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몇 해 전, 조선일보 인터넷 판에는 ‘두 손이 없는 소금장수, 강경환 씨의
장엄한 인생’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
습니다.
    해마다 명절이 되면, 충남 서산 일대에 사는 독거노인들 집 앞에는 맑은
천일염 30킬로그램들이 한 포대씩 놓여 있곤 했다는 것입니다. 13년째나 계속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지난해에 그 주인공을 알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강경환 씨입니다.
그런데, 그는 두 손이 없는 장애인입니다. 두 손이 없는 그가 염전을 운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7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기초생활수급자였습니다. 그야말로,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쁜 사람이 남을 돕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두 손을 잃게 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습니다. 해변에서 깡통
하나를 발견해서 갖고 놀다가 돌로 그 깡통을 두드려댔는데, 그 순간 그 깡통
이 터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깡통은 6&#8228;25 동란 때에 묻어놓은 대인지뢰였습
니다. 이때, 그는 그만 두 손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남 보기가 부끄러워서 중학교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 그
는 아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밥을 먹여주고, 소변까지 뉘
어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외갓집에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다가 너무나 배가 고픈
나머지, 그가 스스로 수저질을 해서 밥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소변보는 일도
스스로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모든 것이 다 귀찮고 힘들어서 농약 먹을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누군가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
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주막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밤 12시에 퇴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술을 먹고 집에 왔는데, 책상에 유인물이 하나 있
었습니다. 그는 무심코 그걸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그 유인물에는 팔 둘과 다
리 하나가 없는 ‘정근자’라는 사람이 교회에서 간증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
니다. 그는 그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때, 그는 그 간증을 듣고 생각했습니다. ‘저런 사람도 사는데, 나는 그
절반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얼마든지 사람구실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그 정근자 씨에게 편지했습니다. “나도 당신처럼 잘 살 수 있는가”하고
말입니다. 답장이 즉시 왔습니다. “너도 나처럼 잘 살 수 있다”고.
    강경환 씨는 기자에게 “나에게 손이 있었다면, 나는 그 손으로 나쁜 짓을
하고 살았을 거 같다”고 말했습니다. “손이 없는 대신에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마음의 변화를 갖게 되었으며, 그 결과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정근자 씨로부터 편지를 받은 이후, 술을 끊고 일을 배우기 시작했습
니다. 삽질도 익혔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손목에 낫을 테이프로 감고서 낫질을
하면서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다니던 교회에서 배우자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친구가 그에게 염전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피눈물
나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농사짓는 삽보다 훨씬 더 무겁고 큰 삽을 두 손
없이 사용해야 했습니다. 정상인만큼 일하기 위해서, 그는 하루 2시간만 잠을
잤습니다.
    그 와중에, 그는 남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손을 잃어버
린 대신에 얻게 된 귀중한 사랑이기 때문에, 그는 그 사랑을 직접 이웃에게 실
천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소금 한 포대에 만 원을 받으면, 거기서
1000원을 떼어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기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에게
소금을 나눠주었던 것입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올해까지 14년째를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는 소록도에도 해마다 김장용 소금을 30포대씩 보냈다고 합니
다.
    그는 2001년에 시청에 자발적으로 가서 기초생활수급자 신분을 포기했습
니다. 그리고 그는 작지만 아파트도 하나 장만했습니다. 그는 또한 “나는 살
수 있는 길이 어느 정도 닦아졌으니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주라”고 하
면서, 한 달에 6만원씩 받는 장애인 수당도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염전이 자기 것이 아니고 남의 염전을 소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사랑의 실천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가
사춘기 때에 손을 잃어버리고 청년시절까지 방황하다가 얻게 된 그 소중한 믿
음이 그로 하여금 계속 어려운 사람 돕는 일을 하게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강경환 씨는 지금 부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에, 그는 손만 잃
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의 생명까지 잃어버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살았으
나 죽은 자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정근자 씨를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
를 믿게 됨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부활의 삶을 얼마나 제대로 살고 있는지요? 진정
부활의 진리를 바로 잘 깨닫고 그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두
손이 없는 강경환 씨보다는 좀 더 나은 생활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스스로 그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부끄러워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겠지요. 쓸모없는 우리 인생을 존귀케 하
시려고 부활신앙을 허락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오늘 우
리는 지금보다 좀 더 성숙한 부활신앙을 갖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1.부활의 진리를 잘 깨닫고 그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고린도전서 15장 9절 이하에서 ‘나는 사도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나는 교회를 박해했던 인물이니, 사도라고 불
릴 자격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오
직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덕분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열
심히 일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그런 일을 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이 아
니라, 그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아무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사람이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를 뵙고 난 후에, 그는 부활예수를 증거하는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
러니까, 예수님 편에서 볼 때에, 바울은 과거에 아무 쓸모가 없는 정도가 아니
라, 복음전도의 방해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뵌 후에
는, 복음전도의 방해자가 아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새 인생을 살았던 것
입니다.

    프랑스 황제 루이 14세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
가다.' 라고 외치면서 베르사이유 궁전을 완성하고 프랑스의 권위를 세계만방
에 떨쳤던 아주 유명한 황제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 교인으로서 기독교를 방해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
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박해의 손을 뻗쳐 칙령 거역 죄로 ‘세오졸프’
라는 사람을 체포해서 파리 탑의 감옥에 감금했습니다.
    때마침, 부활절이 되어서 루이 14세는 황제의 복장을 갖추고 호화찬란한
부활절 행렬 대를 거느리고 파리 시가를 행진했습니다. 높은 감옥의 탑 위에서
이 행렬을 바라본 ‘세오졸프’는 하늘의 영감을 받아 부활절 찬송을 힘차게 부
르기 시작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부활 승천하셨다. 세상사람 찬양하니, 천사 화답하도
다.’ 이렇게 찬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황제는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그 찬송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찬송 소리는 의기양양하게 행진하던 루이 14세
의 양심을 때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왕 중의 왕' 이 되신다는 사실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황제는 부활 축제 행렬을 멈추게 한 후에 감옥으로 들어가서 ‘세오졸프’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빌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석방해서 자
유인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시편 118편 15절에서, 시인은 ‘바르게 사는 사람들의 집집마다에서 들려
오는 저 소리, 기뻐서 소리 지르는 저 환호성을 들어보아라. 여호와께서 힘쓰
시어 엄청난 일, 곧 승리를 거두게 하셨다.’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23절 이하
에서 ‘여호와께서 이루신 이 일, 그저 놀랍기만 하여라. 이 날은 여호와께서 승
리를 안겨주신 날, 다같이 기뻐하며 함께 잔치 벌이자!’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최대의 적인 죄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망과 기쁨을
안겨주셨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든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따를 경우, 새로
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우리 모두 부활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이 묻히신 무
덤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그 무덤에는 예수님의 시신은 사라지고 빈 무덤뿐
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무덤 안에
예수님이 입으셨던 고운 베옷만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무덤 안으
로 들어가지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그때까지도 예수
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으로 다시 돌아와서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때, 무덤 안에는
흰옷을 입은 천사 두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 마리아가 대답했습니다. “누가 내 주님을 모셔갔는데, 그분
을 어디다 모셔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마리아는 그 등 뒤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
은 예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가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 너는 누구를
찾느냐?”마리아가 예수님께 “당신이 그분을 옮겨가셨다면 어디다 모셨는지 알
려주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마리아야!”하고 부르셨습니다. 그 순간, 마리아도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마리아는 얼떨결에 주님을 붙잡고 “선생님!”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를 계속 붙잡고 있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
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이제 너는 내 형제들을 찾아가서 내가 하나님께 올라
간다고 말하라.”고 일러주셨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만나 뵌 일과, 주님이 일러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그대로 전했습
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께
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은,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어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그를 살려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인간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모든 지혜와 능력을 다 동원해도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 인간을 감싸고 있기 때문입
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곧, 죽게 될 사람이 어찌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겠습
니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고 호화로운 집에서 살게 된다 할지라도 죽음
을 앞둔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진정 평안을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은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
렇게나 살지만, 부활을 믿는 사람은 함부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야 참으로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
이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 사
람이라야 천국에 들어가게 되어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감으로써, 오늘의
저와 여러분이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면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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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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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er Prayer (부활절기도문)

 

Heavenly Father God, thank you for sending Your Son to earth so many years ago.

Thank You that, by dying on the cross He paid the punishment for our sins.

By raising Jesus Christ, You conquered the power of death and showed us the way to eternal life.

By the power of the resurrection, renew our lives and help us to become new creations.

Guide us through the dark times of our lives, and gives us courage to live for You.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오래전 이 땅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갚게 하신 것 또한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킴으로써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고 우리를 위해

영생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삶의 어두운 시기마다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고 아버지를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Prayers for Easter Sunday ( 부활절 주일 예배 )

  

Christ our Lord, who in his love for us died for us that we might live,

we pray for all people in all places and in all kinds of need. Christ is risen!

He is risen indeed, alleluia!

 

Lord our Father, we pray for all people who make up the church, both leaders and congregations.

We pray for unity among all people of faith throughout the world

that they may respect one another and celebrate what they have in common. Christ is risen!

He is risen indeed, alleluia!

 

Risen Lord, we pray for people who are suffering as a result of all kinds of disaster,

whose lives have been torn apart by the earthquake,

and who have lost relatives, friends, their homes, their town and their livelihoods.

May the risen Christ lead them from despair into hope. Christ is risen!

He is risen indeed, alleluia!

 

Lord of love, we pray for all who suffer in mind or body and for those who care for them.

We pray for the sick; for those who mourn; for those without faith, hope or love.

We pray for any known to us who are in special need of our prayers at this time, especially those known personally to us.

We remember them now in a moment of silence . Christ is risen!

He is risen indeed, alleluia!

 

The risen Christ is the light of the world, a light which no darkness can quench.

We remember before God those who have died and light a candle to symbolise the light of Christ,

which eternally shines and brings hope.

We remember You turn our darkness into light: in your light shall we see light.

Merciful Father, accept these prayers for the sake of your Son, our Saviour Jesus Christ.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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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부활은 우리의 믿음

 

사도 바울은 본문 고린도전서 15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것이 복된 소식이요, 듣는 자로 하여금 기뻐 뛰게 하는 요점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말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육에 속한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고 또 어리석게 들릴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신령한 비밀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3~14). 육에 속한 사람들, 세상에 속한 이들,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1970여년, 거의 이천년 전에 일어난 일, 그 일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라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사람을 개선하고 사람을 개조하여 전혀 딴판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그 자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개조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행동 양식과 법칙들을 만들어서 시행하곤 합니다. 요즈음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 중에는 사람들을 개조하여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아주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그러한 행동개발을 위한 여러 원칙들을 제시한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들은 사람이 그냥 그대로는 못쓴다, 사람 그대로는 합당치 못하다, 많은 난제와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이상적인 인간상(人間像)을 설정하여 놓고 거기에 이르기 위해 여러 가지의 정책과 실행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갑니다.

동서양이나, 예나 지금이나를 막론하고 남들 보다 앞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그 인간의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수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종교가들이 있었습니다. 도덕가들이 있었습니다. 윤리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우리나라의 이퇴계나 이율곡 선생 같은 이 등은 그러한 면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인간의 난제를 개선하고 고치기 위해 사람 자체를 손대었습니다. 인간 자체, 인간성 자체, 인간의 윤리의식,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의식 등 자체를 개선시키려고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여도 전혀 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 나름대로의 영향을 끼쳐서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과 정서에 효과를 낸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사람이기에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이겠지요. 개나 원숭이가 그러한 시도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그런 시도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교육이나 도덕성의 고양이나 종교성의 계발이나 어떤 극기 훈련이나 어떤 행동 규례들을 세워놓고 자기를 통제하는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의 근본은 인간 자체 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그에 수반되는 인격적인 제반 문제는 인간 자체를 길들임으로써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간의 난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단순하게 사람이 마음을 잘못 쓰는 것, 행동이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교양적이지 못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의 우발적인 사고를 내어 자신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잘못 쓰는 이들을 잘 쓰게 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이들을 세련되고 우아하게 다듬고, 교양적이지 못한 이들을 교양적으로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마음을 잘 쓰지 못하고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거칠고 교양적이지 못한 것은 하나의 증상(症狀)에 불과하지 그 근본은 아닙니다. 근본은 바로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 자체만을 가지고 아무리 집중적이고 주밀하게 연구한다 해도 온전하게 설명이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은 제대로 설명이 되고, 인간의 난제들에 대한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그 인간 자체를 다루고 개선시키고 세련되게 연마하여 거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인간상을 도출하여 내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집에서 아주 큰 무를 사왔습니다. 시커먼 흙이 묻고 싱싱하였습니다.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탐스럽고 크고 퉁퉁하고 살이 많은 일등품 무였습니다. 굵은 부분은 직경 8, 9cm는 족히 될만하였고 무 길이도 약 20cm는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지난 겨우내 아주 잘 보관한 무였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기대감이 가게 하는 무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 무를 손질하려는 것을 보면서 기대감에 찼습니다. 이제 흙을 털어내고 잘 씻고 칼을 대어 여러 쪽을 내면 아주 쓸모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칼을 대어 그 무의 속을 다 드러내게 잘랐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겉으로부터 약 1.5cm 정도의 깊이까지는 가락지 모양으로 싱싱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바람이 들어서 말 그대로 시꺼멓게 썩어 딱딱하게 덩어리져 있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 무는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가 가지고 있는 부패의 요소를 다 긁어내고 거기에 대신 새로운 생명의 풍성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전혀 없으니 버릴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자체가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근사하게 꾸미고 우아하고 세련되게 다듬어도 속이 부패하여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17:9).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대어 변화시키고 개선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썩은 것 자체를 가지고 아무리 해도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죽은 것 자체에서 생명이 나오게 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썩어 문드러진 것을 살리게 하시기는 하십니다.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사로의 썩은 몸 자체에서 생명을 뽑아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밖에서 그에게로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점에서 분명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썩은 것 자체에서 생명을 찾아 내지 않으십니다. 죽은 것 자체를 가지고 생명을 창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인간 자체에 손을 대어 개선시켜 새롭게 하시는 방식을 취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개선시키려는 여러 가지의 행동법칙 자체만 가지고는 우리를 개선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의지로 여러분을 개선시키고 더 착하게 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밖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 영혼 자체를 가루로 만들어서 새롭게 빚는 방식을 쓰지 않으시고, 우리는 내버려두고 대신 우리 인격 밖에서 먼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곧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 아니 우리 부모들이 서로 만나서 애정을 느끼고 결혼할 마음을 가지기 전에, 아니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의 증조부, 증조모가 태어나기 전에, 바다와 산과 별과 달과 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곧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지으실 뜻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세계 속에서 그 뜻을 성취하여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로 죽은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사셨고, 고난을 받아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고, 다시 사셨다 라는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 우리가 아직 태어나려면 아직도 1900여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화해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4:18).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우리가 알지도 생각하지도 꿈꾸지도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 인격 밖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던 때에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안에서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께서 본래 죄로 부패하여 죽어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창출하고 계셨습니다.(5:24; 10:28~30).

그러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저와 여러분의 문제, 곧 죄의 문제를 영원히 부수어 다시는 그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지 못하게 법정적인 조치를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용서하실 공의롭고 정당한 근거를 마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8:1)라고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죄가 왕노릇하는 옛 사람을 또한 죽여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6:6)라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죽이는 일만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넣어주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속에서 행하신 대속의 의미가 부활을 통해 확증되고 광포되고 사실적으로 입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도 무색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다시 사시는 것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죄를 지신 것이니 죽음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의 과정을 통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하셨으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더 이상 죽으심에 묶어 놓으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마치 예전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년에 한 차례씩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 대신 죽은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의 속죄소에 뿌리고 나온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 제사가 열납이 되지 못하면 거기 들어간 제사장은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거기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한 속죄희생의 피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에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고 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나오게 되면 환호하며 찬미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대신하는 염소의 피를 받으셨고 그 대제사장의 드리는 제사를 열납하시고 만족하셨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들어간 대제사장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면 백성들은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자기들의 죄에 대해 자기들에게 직접 물으실 터이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그 증표로 당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흡족하게 여기시고 우리 죄에 대한 공의의 요구를 만족하게 여기셨으면 반드시 우리의 대제사장은 다시 살아나오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시지 않으시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우리 주님의 속죄사역이 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되셨음을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옛 생명의 체계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관계, 체계를 광포하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되어진 그 모든 효력을 믿음을 통해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수지 공사를 하고 나서 그 밑에 있는 논에다 수로를 따라서 물을 나누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는 그 효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성령께서 오시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증거자들인 사도들을 감동하셨고 사도들의 증거를 따라서 믿게 하셨고, 그들이 또한 전도자들이 되어 다시 증거하였고, 그 증거를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전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들 안에서 구원하여 놓으시고 당신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 그 효력을 누리고 차지하라고 알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어떻게 부활하는 일이 있겠느냐고 믿지 않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였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하는 관점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면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부인하는 행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그들 자신이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사도가 말하는 대로 믿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겠느냐, 썩은 자가 다시 살겠느냐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의 심정 속에는 과학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는 물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이들은 그들의 과학적인 고상한 지식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자연질서에 속한 진리와 이치를 발견하여 세운 학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세계에 세운 진리와 이치에 속한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영적인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일을 과학 운운하면서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의 깊이를 잘 모르고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에 대해서만 아는 옅은 지식의 소유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의 다국면적인 방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물리적인, 우주 천체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심미적인 세계, 소리와 시각과 색조의 세계,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여 그 원리를 적용하여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 세우신 질서가 있습니다. 나무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달고 맛있는 과실이 크게 열리는 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과학적으로 열매를 낼 수 있습니까? 주어진 현상의 질서를 연구하고 관찰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의 인체의 신비에 대해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영적인 원리,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 사이에 세우신 영적인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영적인 원리에 대해 무식한 자들입니다(고전 15:13~14).

복음의 진수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데 그 핵심적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것은 도덕적인 착함과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구원받는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 사실,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로 자기의 구주로서 그 일을 하셨다, 나를 위해 죽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았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 구속의 효력이 미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6:23).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이 없었다면, 그저 공자와 석가와 소크라테스나 어떤 성현의 말을 배우고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고취하여 자신을 세우려는 것이나 하등의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 효력을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선의 개념이나 이상(理想)의 관념이나 높은 도덕, 또는 윤리 의식을 우리에게 고취시켜 우리를 도덕적으로 개선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님께서 다시 사신 그 사실에 기초하여 그 사실의 효력을 누리며 산 소망을 가지고 참된 기쁨을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의 산 소망의 충분하고 완전한 근거를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없었다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 아니 성경 전체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케케묵은 골동품 서적의 가치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그 모든 행사에 대한 것은 거짓 것으로 드러날 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의 사실성과 필연성을 강력하게 역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고전 15:16~19).

모든 사도들은 모든 이들에게 바로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증거하고 그 사실을 기초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역설하였습니다. 어느 사도도 그 사실을 빼놓고 자기의 강론을 시작하거나 진행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모든 사실들의 증인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닐진대 자기들은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15:15).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터를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하심의 확실성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산 소망을 가진 자답게 죄와 세상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며,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주님께서 행하신 그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항상 상기시키시고 그 속에서 늘 가르쳐주시고 양육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1: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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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력의 중요성 및 각 절기의 기원과 의미 

 

I. 교회력의 중요성

 

기독교는 시간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기독교에서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시간을 벗어나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하늘에서 떨어진 어떤 특별한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구체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이 살아가는 그 시간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역사적인 시간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일반적인 구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났던 하나님의 특별한 행동에 의해 성취된 구원을 증거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체적인 시간에,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바로 그 시간 안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시간을 중시하는 기독교의 태도는 예배에도 반영된다. 예배의 구조는 하루, 한 주, 혹은 한 해 동안의 리듬을 갖는다. 기독교 예배는 시간으로부터의 회피가 아니라 시간을 자신의 기본 구조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현재는 과거에 일어났던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의 행위와 만남의 장이 된다. 우리가 예배에서 경험하는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시간적 사건들에 근거된 실재이다. 시간을 구성하는 방식은 구원의 근거가 되는 행위들을 상기하고 다시 경험할 수 있게 해 준다. 한마디로 기독교 예배는 시간 위에서 설립된다.

 

교회력은 이처럼 시간을 중시하는 기독교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즉 교회력은 특정한 시간 안에서 발생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일정한 주기에 따라 반복함으로써 그 구원사건을 회상1)할 뿐 아니라 다시금 새롭게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력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영위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교회력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II. 각 절기의 기원과 의미 

 

절기는 교회력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회상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 그러므로 각 절기들이 어떻게 만들어 졌으며, 또한 그것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면, 교회력의 중요성을 더욱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1. 주의 날

   

교회력은 주의 날(the Lord's day; 1:10)부터 시작된다.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이 6일간 창조하시고 7 일째 날 안식하셨다는 것에 근거하여 율법이 제시하는 안식일을 지킨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한 주의 첫 째 날을 예배를 위한 특별한 날로 제시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주의 첫날을 연보를 위한 날로 성별 시키라고 말했다 (고전 16:2). 바울은 또한 트로아에서 토요일 자정까지 설교한 뒤에 일요일 새벽까지 기독교인들과 대화하였다(20:7, 11). 계시록의 저자도 자신이 성령에 의해서 사로잡힌 날이 주의 날이라고 말한다(1:10). “주의 날1세기 말엽 한 주의 첫째 날로 이미 기독교인들에게 친숙해 져 있었다. “주의 날을 지키는 것은 초대교회가 자신의 신앙을 증거 하는 방식이었다. 복음서는 모두 빈 무덤이 발견된 날이 안식 후 첫날 아침이라고 증언한다(28:1-6, 16:2-6, 24:1-3, 20:1-8). 안식 후 첫날은 창조의 첫째 날로써 하나님이 어두움과 빛을 갈랐던 바로 바로 그 날이다.2) 복음서는 또한 부활한 그리스도가 한 주가 시작되는 첫째 날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고 증언한다(28:9이하, 24:13이하, 20:14이하).

 

AD 115년경 익냐시우스(Ignatius)는 매그네시아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식일을 금하고 주의 날을 기준으로 사는사람들에 관하여 언급한다. 2세기 초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디다케(the Didache) 역시 기독교인들에게 주의 날에 함께 모여서 떡을 떼며 성만찬을 행하라고 권고한다. 심지어 이교도들도 기독교인들은 특별한 날(주의 날) 동트기 전에 성만찬을 위해 모이는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또 주의 날의 다른 용어인 “Sunday"(태양의 날)2세기 중엽 등장했다. 순교자 저스틴은 155년 경 이교도 청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Sunday에 함께 모인다. 그 날은 하나님이 어두움을 물리치고 우주를 창조한 첫 날이며,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일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곧 이교도 용어이지만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로 해석하여 Sunday를 받아들였다. 바나바 서신은 Sunday8, 즉 그리스도가 죽은 자 들에게서 부활한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 날이라고 불렀다. 초대 교인들은 Sunday를 창조의 제 8일로 생각했다. 8일은 하나님이 안식하신 뒤 새로운 창조를 시작한 날이란 의미를 갖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의미가 여기에 들어 있다 (고후 5:17). Sunday는 휴식의 날이 아니라 예배의 날이었다.

 

Sunday는 다른 날들보다 상위의 개념을 지녔다. 그 날은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에서 Sunday는 주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회상하는 날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구세주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터툴리안은 기독교인들은 Sunday, “주께서 부활한 날에 무릎 꿇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Sunday는 부활의 신앙을 입증한다. 따라서 Sunday는 매주 지키는 부활절이라고 볼 수 있으며, 부활절은 한해의 가장 큰 Sunday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부활절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는 그가 유월절에 십자가형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을 에집트에서 구하여 안전하게 홍해를 건너게 하고 자유로운 백성으로 만들어 준 사실을 기억(historical anamnesis)하는 절기였기 때문이다. 초대 교인들은 자신들 역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으며, 따라서 더 이상 죄와 죽음의 노예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자유로운 백성이 되었다고 확신했다. 유월절에 잡는 어린양을 가리키면서, 바울은 다음과 말한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으로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고전 5:7-8). 이 말씀은 옛날 유대인의 구원 사건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노예와 구원의 도식은 같지만,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사역에 의해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대 교인들이 매 주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기념했지만, 연중 최고의 주의 날을 기념하는 것은 유월절3) 때가 적절했다. 한 주의 초점이 주의 날에 맞추어진 것처럼, 한해의 초점은 파스카(유월절)에 맞추어 졌다. 기독교인들은 적어도 2세기까지 이 파스카를 지켰다.

 

2-3세기 교회 역시 이 파스카를 준수했는데, 이때 세례와 안수 그리고 첫 성찬을 통해서 새롭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예배를 드렸다. 파스카가 홍해를 건넘으로써 노예로부터 해방된 것을 회상하는 절기였던 것처럼, 교회 역시 세례를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4-5). 처음 3세기 동안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은 파스카때 함께 회상되었다. 터툴리안은 유월절은 세례예식이 행해지는 날 보다 훨씬 더 엄숙하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우리의 세례의 근거가 되는 주의 수난이 이루어진 때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초대 교인들 사이에서는 기독교의 파스카가 유월절에 대한 유대력을 좇아야 하는가에 대한 긴 토론이 있었다.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은 유대력으로 닛산월 14일에 일어났는데, 유대력은 음력이기 때문에, 유월절은 보름날 시작되었다.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교회는 결국 유대의 유월절과 달리 교회의 파스카는 항상 Sunday에 지킬 것을 결의하였다. 이는 Sunday의 상징적 의미를 인식한 결정이었다. 나중에 서 유럽에서는 파스카가 보름 이후 혹은 춘분인 321일 이후의 Sunday로 고착되었고, 로만 캐톨릭과 개신교회는 부활절을 이 방식으로 설정하였다.4) 이것이 부활절이 매년 다른 날(322일부터 425일 사이)로 된 이유이다.5)

 

4세기 무렵, 예루살렘에서 지낸 예수의 마지막 사건들 전체를 회상했던 파스카는 몇 개로 구분되었다. 이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을 배려하기 위해 각각의 거룩한 장소들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분리해서 예배할 필요 때문이었다. 유게리아(Eugeria, 스페인여성으로 384년 순례자중 한 명)의 노트가 한 예로 제시될 수 있다. 그녀의 순례 노트에는 다음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수난/종려 주일, 혹은 수난 주간(Holy Week, Great Week으로 불려지기도 함)의 시작은 부활절의 시작이었다. 이 주일에 모든 사람들은 시편과 교창 성가집(antiphone)을 들고 감독 앞에 가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축복 있으라라는 말을 계속 반복했다.” 다음 3일 간은 작은 예배들이 있었는데, 수요일은 예외적으로 장로(평신도가 아닌 목회자를 가리킴)가 예수를 배반한 유다의 음모에 관해서 읽을 때, 사람들은 신음하며 한탄했다. 목요일은 성만찬을 행한 후 모두가 감독을 겟세마네로 이끌어 갔다. 금요일에는 골고다에서 예배가 이루어 졌는데, 거기서 모든 이들이 행진하면서 나무 십자가에 입 맞추었다.

 

그러나 4세기 말에 와서 이런 방식의 수난주간 행사는 중단되었다. 어거스틴은 예수가 어느 날 십자가에 달렸고 어느 날 묻혔는지 그리고 어느 날 부활했는지 복음서에 분명하게 나온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날들을 지켜야 한다라고 말했고, 이때부터 고대의 파스카는 다음과 같이 분리되어 지키게 되었다: 성 목요일(Holy Thursday), 성 금요일(Good Friday), 성 토요일(Holy Saturday), 그리고 부활주일(Easter eve and Day), 또한 수난주간에 앞선 수난/종려 주일과 수난주간의 작은 날들.

 

  

3. 성령강림절(오순절)

 

 

파스카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절기는 오순절이다. 오순절은 레위기 23:15-16에 나오는 유대교의 추수 절기였다: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일곱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 일을 계수 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러나 1세기에는 때때로 오순절이 시내 산에서 토라를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되기도 했다. 기독교인들에게 오순절은 성령이 강림하여 교회가 탄생된 기념일로 여겨졌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성령이 유대절기인 오순절날 강림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토라를 받은 것과 성령 받은 것이 대비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의 계약을 시내 산에서 완성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오순절날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계약을 맺었다고 그들은 믿었다. 적어도 2세기까지는 오순절이 세례를 위해 적절한 날로 여겨졌다. 미쳐 준비를 못해 부활절날 세례 받지 못한 자들은 오순절날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교회의 탄생 기념일인 오순절날 새 기독교인들의 영적인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4세기까지는 오순절이 성령의 강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천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했다. 터툴리안은 그리스도가 오순절날 승천하셨다고 말했다. 그러나 4세기 말에 이르러 성령강림과 그리스도의 승천은 분리되어 기념되었다. “사도헌장”(Apostolic Constitution)에는 그리스도의 승천 기념일이 부활절 후 40일째 되는 날이 적절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을 40일간 가르쳤다는 사도행전 1:3에 근거한 것이다.

 

파스카(수난절/부활절)와 오순절(성령강림절)은 교회력에서 가장 오래되고 최고로 중요한 절기의 시작이며 마지막이다. 오순절은 부활주일부터 50번째 날을 지칭할 뿐 아니라 부활주일부터 시작하는 50일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유대력에서는 오순절, 첫 열매의 날”(the Day of First Fruits)을 유월절부터 시작된 한 주기의 결론으로 여겼다. 이 주기 동안 출애굽 자체와 그것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들이 기념되었다. 오순절은 추수의 성별에서 시작되는 추수시즌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오순절이란 용어는 50일 주기의 마지막날과 50일 주기 전체를 지칭했다.

 

기독교인들 역시 오순절을 오순절의 날 하루 뿐 아니라 부활절에서 시작된 50일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 즉 오순절은 예수의 부활에서 시작하여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교회가 탄생된 때까지의 50일을 가리켰다. 어거스틴은 주의 부활후 이 날들은 평화와 기쁨의 기간이다. 그러므로 금식해서는 안되고 부활을 상징하여 서서 기도해야한다. 이는 매 주일 지켜져야 하고, 알렐루야 송을 불러야 한다. 알렐루야 송은 장차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위치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오순절은 부활절기의 일환으로 지켜졌고, 성령강림과 교회의 탄생은 부활절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니케아 공의회(AD 325)Lent(사순절)“40로 정했다. “40은 금식하고 사역을 준비했던 예수의 광야 40일과 비교될 수 있다. 어거스틴의 시대에 사순절은 세례를 위한 준비 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주의 수난에 동참할 준비를 하는 기간이었다. 사순절은 회개의 기간이었고, 영적인 훈련의 수단인 금식은 사순절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에도 매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했다. 주의 날은 사순절 기간보다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순절 기간 중 6번의 주일은 40일에 포함되지 않았다. 사순절은 따라서 재의 수요일(부활주일 전 7번째 수요일)에서 시작되어 부활절 바로 전날까지 총 46일이 되었다.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사순절, 부활절, 그리고 오순절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일러서 부활절 기간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교회력의 중심이다. 이 기간은 교인들이 재로부터 정화에 이르는 순례의 행진을 하는 동안 도전 받고 갱신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4. 성탄절과 주현절

   

 

또 하나의 중요한 절기는 성탄절이다. 성탄절은 부활절보다 오래되지 않았고, 또한 구약의 절기에서 유래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성탄절은 부활절과 함께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주현절(epiphany, 16)은 오늘날 성탄절만큼 중요하게 취급되지는 않지만, 성탄절보다 오래되었고, 초대 교회력에서는 주현절이 부활절과 오순절 다음으로 중요한 절기였다. 주현절의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2세기 후반 에집트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piphany"현현”(manifestation)을 의미하는데,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현현한 것을 지칭한다. 주현절은 예수의 탄생, 그의 세례, 그리고 갈릴리의 가나에서 행한 첫 기적 등을 기념하는데, 이 모든 사건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초대 교회는 종종 이날을 “The Theophany"(하나님의 현현)라고 명명했는데, 이 명칭은 지금도 동방 정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부활절과 마찬가지로, 주현절은 4세기에 몇 개로 나뉘어 졌다. AD 354년부터 그리스도가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날이 1225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날짜가 인정된 것은 아프리카에서는 312년 보다 앞서고, 로마에서는 336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점진적으로 크리스마스가 주현절의 일부로 지켜지게 되었다. 386년 크리소스톰은 안디옥에서 성탄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날은 최근 빠른 시간 내에 발전되어 절기로 지켜지게 되었다.” 뒤에 오는 주현절에 관하여 그는 왜 이날을 주현절이라고 부르는가? 예수가 모두에게 알려진 것은 탄생된 때가 아니라 세례 받은 때이기 때문이다. 세례 받기 전까지 그는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16일 지켜지는 주현절이 동방전통에서는 예수의 세례를 기념하는 날로, 서 유럽에서는 동방박사들이 예수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날로 각각 지켜지고 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이 현현 하셨다는 사실을 이방에 알렸기 때문이다. 주현절과 성탄절을 분리해서 기념하게 된 이유는 예수의 생애 동안 발생한 사건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기념하려는 초대교인들의 열망 때문이었다. 성경에는 예수가 언제 태어났고, 어느 날 세례 받았는지, 또 동방박사들이 어느 날 방문했는지 등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16일과 1225일은 고대 이집트와 줄리안(로마) 달력에 따라 동지를 기념하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됨에 따라, 성탄절은 동지를 표시했던 이교도의 정복되지 않는 태양의 축제를 대신하게 되었다. 어두움을 정복하는 빛이라는 주제는 항상 주현절과 성탄절의 주된 개념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날들은 예수가 죽은 날과 그가 잉태된 날을 일치시키는 전통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부활절 준비를 위해서 사순절이 필요 했던 것처럼, 성탄절과 주현절 역시 준비기간을 필요로 했다. 스페인의 한 공의회는 1217일부터 주현절(16)까지 교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치 않았는데, 이는 대강절(Advent)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다. 5세기에 가울(Gaul) 에서는 주현절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40일을 두었는데, 이것은 Lent 기간이 40일이라는 점에 착안한 것이었고, 그 시작은 지금의 대강절 즈음이었다. 결국 로마는 1225일 보다 4주 앞선 주일부터 대강절로 정했다.

 

대부분의 중요한 기독교 절기들은 4세기에 마무리되었다. 존 크리소스톰은 386년 행한 설교에서 예배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리스도가 육체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세례를 받지 않았을 것이고 (주현절), 그는 십자가에서 죽고 또한 부활하지도 않았을 것이고(파스카), 성령을 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오순절).” 4세기에 세 개의 중요한 초대 절기들-주현절, 부활절, 오순절-은 다시 다음과 같이 나뉘어 졌다: 성탄절, 성금요일, 승천일, 그리고 대강절, 사순절 같은 절기들. 4세기 이후 생긴 중요한 절기 가운데 하나는 삼위일체 주일(Trinity Sunday)이다. 삼위일체 주일은 오순절 후의 주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약 1000년 경 도입되었다. 여타의 절기들과 달리, 이 절기는 역사적 사건과는 무관한 신학적인 교리를 나타낸다

 

III. 성서일과 (Lectionary)

 

  

성서일과는 교회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lectionary” 란 말은 넓은 의미에서 교회력에 있는 특별한 절기의 예배를 위해 선택된 본문들의 체계를 지칭한다. 이러한 성서일과에는 lectio continualectio selecta의 두 원리가 있다. 전자는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 까지 읽든지, 성서의 어느 특정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가는 방법을 가리키고, 후자는 절기에 따라 선택해서 읽는 것을 말한다. 유대교의 회당에서는 각 절기에 해당하는 성서의 본문들을 규정해 놓고 일상적인 안식일에 lectio continua의 원리에 따라 선택된 성서 본문을 읽는다. 이 원리는 개인적으로 성서를 꾸준히 읽을 때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성경의 각 구절들의 맥을 찾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더욱이 교회력에 따라 성서의 본문을 찾을 때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에 반하여 lectio selecta는 성서의 본문을 선택하여 읽는 방법이므로 교회력과 관련해 볼 때 유용한 원리라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의 성서일과에 대한 기원은 분명치 않지만, 유대교의 유월절에 읽었던 출애굽기 12장은 로마에서 200년 경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325년 이전에 이미 기독교의 주요 절기들을 위해 특별히 지정된 성서 본문이 있었고, 일반적인 주일에는 lectio continua의 원리에 의해 성서의 본문을 읽었다. 서 유럽에서는 다양한 성서일과들이 발달되었다. 9세기 초 성서일과들이 표준화되어 최근까지도 로만 캐톨릭, 성공회, 루터 교회 등에서 사용되었다.

 

   

성서일과는 3년 주기로 되어 있으며 그 본문의 예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강절

 

1) 첫주: 122 (1, 4, 7), 80:1-7 (2, 5, 8), 25:1-10 (3, 6, 9)

 

둘째주: 72:1-8 (1, 4, 7), 85:8-13(2, 5, 8), 126 (3, 6, 9)

 

셋째주: 146:5-6 (1, 4, 7), 1:46b-55 (2, 5, 8), 12:2-6 (3, 6, 9)

 

넷째주: 24 (1, 4, 7), 시편 89:1-4, 19-24 (2, 5, 8), 80:1-7 (3, 6, 9)

 

2) 첫주: 24:36-44 (1, 4, 7), 13:32-37 (2, 5, 8), 21:25-36 (3, 6, 9)

 

둘째주: 3:1-12 (1, 4, 7), 1:1-8 (2, 5, 8), 3:1-6 (3, 6, 9)

 

셋째주: 11:2-22 (1, 4, 7), 1:6-8, 19-28 (2, 5, 8), 3:7-18 (3, 6, 9)

 

넷째주: 1:18-25 (1, 4, 7), 1:26-38 (2, 5, 8), 1:39-55 (3, 6, 9)

 

2. 성탄절

 

1) 9:2-7 (매년), 시편 96 (매년), 디도서 2:11-14 (매년), 2:1-10 (매년)

 

2) 62:6-7 (매년), 시편 97 (매년), 디도서 3:4-7 (매년), 2:8-20 (매년)

 

3) 52:7-10 (매년), 시편 98 (매년), 1:1-12 (매년), 1:1-14 (매년)

 

3. 주현절

 

구약: 42:1-9 (1, 4, 7), 1:1-5 (2, 5, 8), 61:1-4(3, 6, 9)

 

복음서: 3:13-17 (1, 4, 7), 1:4-11 (2, 5, 8), 3:15-17 (3, 6, 9)

 

4. 재의 수요일

 

시편 51:1-12, 고후 5:20b-6:2, 6:1-6, 16-21 (매년)

 

5. 사순절

 

1) 첫 번 주일: 2:4b-9, 15-17, 3:1-7; 5:12-19; 4:1-11 (1, 4, 7)

 

9:8-17, 25:1-10, 벧전 3:18-22, 1:9-15 (2, 5, 8)

 

26:1-11, 91:9-16, 10:8b-13, 4:1-13 (3, 6, 9)

 

2) 두 번째 주일: 12:1-4b(4b-8), 33:18-22, 4:1-5(6-12), 13-17, 3:1-17 혹은 마 17:1-9 (1, 4, 7)

 

17:1-10, 15-19, 105:1-11, 4:16-25, 8:31-38 혹은 막 9:1-9 (2, 5, 8)

 

15:1-12, 17-18, 127, 빌립보서 3:17-4:1, 13-31-35 혹은 9:28-36 (3, 6, 9)

 

3) 세 번째 주일: 17:3-7, 95, 5:1-11, 4:5-26[27-42] (1, 4, 7)

 

20:1-17, 19:7-14, 고전 1:22-25, 2:13-22 (2, 5, 8) 3:1-15, 103:1-13, 고전 10:1-13, 13:1-9 (3, 6, 9)

 

4) 네 번째 주일: 삼상 16:1-13, 23, 5:8-14, 9:1-41 (1, 4, 7)

 

역대하 36:14-23, 137:1-6, 2:4-10, 3:14-21 (2, 5, 8)

 

5:9-12, 34:1-8, 역대하 5:16-21, 15:1-3, 11-32 (3, 6, 9)

 

6. 종려주일

 

50:4-9b, 31:9-16, 빌립보 2:5-11 (매년)

 

수난 이야기: 26:14-27:66 (1, 4, 7); 14:1-15:47 (2, 5, 8); 22:14-23:56 (3, 6, 9)

 

7. 성금요일

 

52:13-53:12 (매년), 4:14-16, 5:7-9 (매년)

 

8. 부활절

 

28:1-10 (매년), 16:1-8 (매년), 24:1-12 (매년)

 

9. 성령강림절

 

2:1-21 (매년), 고전 12:3b-13 (1, 4, 7), 8:22-27 (2, 5, 8), 8:14-17 (3, 6, 9)

 

20:19-23 혹은 7:37-39 (1, 4, 7), 15:26-27, 16:4b-15(2, 5, 8),

 

14:8-17, 25-27 (3, 6, 9)

 

10. 삼위일체 주일

 

4:32-40 (1, 4, 7), 6:1-8 (2, 5, 8), 8:22-31 (3, 6, 9)

 

33:1-12 (1, 4, 7), 29 (2, 5, 8), 8 (3, 6, 9)

 

고후 13:5-14 (1, 4, 7), 8:12-17 (2, 5 8), 5:1-5 (3, 6 9)

 

28:16-20 (1, 4, 7), 3:1-17 (2, 5, 8), 16:12-15 (3, 6, 9)

   

이상과 같이 살펴본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는 무엇보다도 설교와 예배를 준비하고 주관해야하는 목회자에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교회력에 따르는 성서일과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일정한 기준 없이 설교자의 주관에 따라 본문이 선택되므로, 설교자 자신의 편견과 선입관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 이런 경우 일관된 말씀의 진수를 맛보고 싶어하는 교인들의 불만을 살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예배의 경우에도 찬송가, 교독문 등을 임의로 선택하지 않고 교회력에 맞추어서 선택함으로써, 교인들이 미리 준비하여 생동감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성서일과에 따라서 설교하고 예배할 경우, 정장복 교수는 그 장점을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첫째, 설교자의 개인적인 의도보다는 말씀 중심의 사역이 가능해 진다. 설교자 개인의 편견과 선입관을 배제하고, 일관된 말씀의 사역을 할 수 있다. 따라서 교인들이 말씀의 맥을 짚을 수 있게 된다. 둘째, 교회력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 중심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그분의 구속의 은총을 실감하는 효과를 경험할 수 있다. 신앙생활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바, 교회력에 따라 설교할 경우, 그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갖는 깊은 의미를 새기게 되어, 자신들의 삶 속에서 재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셋째, 모든 교회가 성서일과를 사용할 경우, 동일한 말씀을 들을 수 있음으로써 교회 일치에 많은 도움이 된다. “모든 교회는 하나이다라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모토인데, 어디서나 같은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교인들 스스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넷째, 설교자들이 일정한 주기로 말씀을 연구할 수 있어서 말씀에 질서가 형성될 수 있다. 사실 설교자들의 최대의 고민은 이번 주에는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하는 가라는 것이다.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서 성서의 여기저기를 살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교회력에 따라 설교하게 되면, 이런 고민이 해소될 수 있다. 다섯째, 설교 뿐 아니라 목회의 전반적인 계획 수립에 도움이 된다. 교회력이란 일정한 기준이 주어지기 때문에, 임의로 목회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섯째, 교인들이 설교의 방향을 미리 알 수 있게 되어 준비할 수 있다.

 

교회력에 따라 목회계획을 세우고 설교하게 되면, 현장성이 약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할 수도 있다. 이는 목회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따라서 말씀을 준비하기가 어렵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탄절, 수난절, 부활절, 오순절 등 중요한 절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목회자가 현장에 맞게 설교의 주제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력은 결코 교회가 서 있는 자리, 즉 문화, 사회, 환경을 제한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력은 목회자가 목회 환경에 맞게 자유로이 목회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이점에서 성서일과와 목회현장의 갈등은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력에 따라 예배하고 목회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목회와 설교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최승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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