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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글 /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오늘 본문은 세상 권력자들의 홈그라운드인 예루살렘에 들어온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는 과정을 추적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지만 창조주를 영접하지 않는 자기 폐쇄적 인간세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하나님에게 있어 사랑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극복의 대상입니다. 이런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세상의 신이 왕성하게 활동합니다(요 14:30, 요 15:19, 고후 4:4, 엡 2:2∼4; 6:10∼17). 세상 신에게는 죄인을 들뜨게 만드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제국의 신들은 가장 현세적이고 욕망 분출적인 신이었습니다. 이를 믿는 그리스와 로마는 정복욕과 음란, 권력욕과 호전성을 충족시키는 데 열정을 다 바치는 세상이 돼 버렸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 1∼10권이 잘 보여주듯 로마는 지극히 호전적이고 음란했으면서도 신을 경배하는 종교적 열기로 가득 찬 세상이었습니다.

 

세상 신은 죽음의 권세와 부귀영화를 무기로 휘두르며 사람을 지배합니다. 일찍이 광야에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을 다스리는 절대 권력과 부귀영화를 주겠다고 약속한 사탄을 책망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로마제국의 군사력을 무력화할 강한 하늘군대를 동원할 생각도 해보셨습니다. 강한 메시아가 되고 싶은 열망을 잠시나마 느낀 것입니다. 그러나 무기력하고 연약한 사람들의 구원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무능한 메시아로 죽임당하는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절대 갑’ 로마제국의 통치를 거부하는 ‘절대 을’ 유대인이 강요하는 십자가 처형을 받아들여 절대 갑을 이기는 연약한 메시아가 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죽음의 공포와 혈투를 벌였고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이로써 로마제국과 이기기 위해 그보다 더 강한 제국의 군주가 되겠다는 열망을 극복했습니다. 절대적 고독감과 무기력감 속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득 채운 하나님의 인격적 현존을 맛보았습니다. 연약한 이들의 메시아가 돼 십자가를 메기로 결단함으로써 힘으로 세상을 이기는 ‘강력한 메시아’의 욕망을 이겼습니다.

세상의 환란은 우리에게 이해타산적인 사람이 되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기보다 당장 자가 구원의 방책을 강구하라 다그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것은 심지어 하나님께도 버림받는 길이라며 그런 고독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겁줍니다. 다소 불의하더라도 든든한 인맥 안에 머물러야 잘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혼자 버려진 그 순간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가득 채운 시간임을 확신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긴 방법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인 것도 신앙의 승리라 볼 수 있지만 절정은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홀로 버려진 것처럼 보였지만 3일 만에 부활하면서 자신을 죽인 세상 권력자들을 영구적으로 패배케 하셨습니다.

 

혹시 세상에 혼자 내버려진 것 같습니까? 흔들리지 않는 신적 평안을 누릴 때 우리는 세상을 이깁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버림을 받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깨닫는 자, 그가 바로 세상을 이긴 자입니다.

김회권 목사(숭실대 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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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박해의 역사. (10대 박해)

 

로마제국의 기독교박해는 주로 황제들의 주도 하에 일어났는바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을 요약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네로<Lucius Domitius Ahenobar-37-68.>의 박해.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박해 서곡은 네로황제<54-68재위>에 의하여 울려 퍼졌다.

 

네로의 본명은 루키우스도미티우스아헤노바르부스<Lucius Domitius Ahenobar-37-68>로서 클라우디우스황제의 양자였다. 클라우디우스황제는 가이우스도미티우스아헤노바루스의 부인이었던 아그리피나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 들였는데 네로는 가이우스도미티우스아헤노바루스와 아그리피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네로의 어머니인 그리피나는 황제의 근위병들을 매수하여 남편인 클라우디우스황제를 독살하고 17세의 네로를 황제로 추대했다. 네로는 즉위 후 초기5년 동안은 근위대 장관이었던 브루루스와 철학자이며 스승이었던 세네카의 후원을 받아 훌륭하게 황제의 직무를 행사했다. 그는 해방된 노예들을 정부 기관에 등용했고 세금을 감면했으며 매관매직을 근절시키고 원로원의 의견을 존중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네로는 여자를 좋아하고 술과 가무를 즐겨하게 되면서 타락하기 시작했다. 네로는 점점 잔인하고 폭력적인 사람이 되어가면서 재위 5년째인 58년부터는 국정을 돌보지 않고 문란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네로는 포페아사바나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하여 의붓 동생인 브리타니쿠스와 황후인 옥타비아와 어머니까지 살해했고 나중에는 포페아사바나마져 살해했다. 네로는 특히 근위대장관인 브루루스가 병사<病死>하고 세네카마저 은퇴하자 거의 반미치광이가 되어갔다. 네로는 헬라문화에 크게 심취하여 헬라의 체육, 예술을 로마에 도입했고 스스로 예술가를 자처하여 직접 무대에 섰다. 그는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4대제전<四大祭典>을 개최하고 직접 경기에 출전했다. 네로는 당시의 로마시를 없애고 헬라니즘적인 예술적 로마시를 건축하겠다는 야심에 불타 64년에 로마시 전체에 불을 질렀다. 이때에 네로는 로마로부터 수마일 떨어진 안티움궁전의 옥상에서 시인의 복장을 하고 칠현금을 뜯으며<트로이의 파괴>를 노래했다. 로마의 화재는 무려7일간이나 계속되었고 불길이 잡힌 뒤에도 3일간이나 계속되었다. 이때에 로마시의 14구역 중 10구역이 화재로인 하여 소실되었다. 로마의 화재가 진압되는 과정에서 네로가 헬라니즘적인 새로운 로마시를 건설하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방화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그가 시적 감흥을 얻기 위하여 방화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로마 시민들은 분노하였고 네로의 궁전으로 달려갔다. 범시민적 폭동이 일어나게 되자 네로는 당황하여 그것을 부인했으나 시민들은 납득하지 않았다. 이때에 네로의 측근들 중에 기독교인들을 증오하는 자들이 계책을 내 놓았다. 그것은 방화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씌우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네로는 로마의 화재가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각종 우상숭배를 증오하여 방화한 것이라고 선포하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렸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체포되었고 그들은 네로의 잔학한 방법들에 의하여 죽어갔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때로는 짐승들에게 찢기워 죽게 했고 때로는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거나 또는 화형에 처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정원에 나무를 세워 그들을 묶어놓은 후 기름을 발라 화형에 처함으로서 그들이 인간봉화가 되게 하였다.

 

당시에 로마화재의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가 타키투스는 당시의 상황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황제의 거듭된 부인과 신들에게 바쳐진 희생제사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화재를 명령했다는 의심은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네로는 이 소문을 없애기 위하여 이미 배덕적 행위로 인하여 시민들의 증오를 받고 있던 기독교 신자들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이들을 잔혹하게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네로가 희생양으로 삼고자한 그리스도인들은 티베리우스<디베료>재위 기간 중에 폰티우스필라티우스<본디오빌라도>에 의해 처형된 인물을 추종하는 자들이다. 이 악한 미신은 한동안 주춤했으나 곧 유대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사교들이 모여들었던 로마에 다시 출현하였다. 그리하여 우선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했던 자들이 체포되었고 이들의 증언에 의하여 더 많은 숫자가 정죄 받게 되었다. 그 이유는 화재 자체라기보다는 이들이 인류를 증오했기 때문이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죽이기 전에 시민들을 위한 오락에 이용했다. 신자들 중 일부는 털옷을 덮어씌워 개들이 찢어 죽이게 하였고 또 다른 자들은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또 다른 이들은 몸에 불을 질러서 밤에 등불처럼 밝히게 하였다. 네로는 자기의 정원을 열어 이러한 쇼를 연출하였고 그는 마치 전차경주자처럼 옷을 입고 전차를 타고 돌아다님으로서 원형경기장에서 비참한 광경을 연출하였다. 이 때문에 시민들은 벌을 받아 마땅한 이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느끼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일반인들의 분노를 가라 않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잔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죽어갔기 때문이다.>

 

타키투스는 친 로마적인 역사가였으나 대체적으로 공평한 역사가로 정평이 나 있다. 그는 비록 기독교인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은 아니었으나 네로에 의한 기독교의 박해가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만행이었음을 증언했다. 그러나 네로에 의한 기독교 박해는 로마시로 한정되었다. 로마시 외의 기독교인들은 네로의 박해로부터 면제되었다. 그러나 로마시 외의 기독교인들이 네로의 박해에서 면제되었던 것은 네로의 칙령이 로마시내로 한정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네로의 칙령은 당연히 전 로마적인 칙령이었다. 그러나 화재가 로마 전역의 화재가 아니라 로마시 만의 화재였기 때문에 로마시 외의 기독교인들이 로마시의 화재에 대한 책임을 질 이유도 없었지만 네로의 통치권은 이미 로마시내를 벋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로마의 원로원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드디어 네로를 불신하였고 따라서 네로를 더 이상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와중에서 68년에 갈리아에서 네로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고 그 반란 이전 로마지역으로 확산되어 갈 때에 히스파니아<스페인>총독이었던 갈바가 로마로 진격했다. 이때에 원로원을 비롯한 각계각층이 갈바를 지원했고 심지어는 황제의 근위병들까지도 이에 합세했다. 네로는 측근 몇 명의 도움을 받아 시골로 달아나 어느 지하실에 숨어 있다가 군대가 몰려오자<세상이 나 같은 예술가를 잃는 구나>하고 비통해 하면서 부하의 칼에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2)도미티아누스<Domitianus, 81-96 재위>의 박해.

 

네로가 퇴위된 후 정치적인 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 69년 한 해에 네 명의 황제가 교체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은 베스파시안<Vespasian>황제에 의하여 종식되었고 로마는 안정을 되찾았다. 네로의 기독교탄압에 대한 칙령이 철회된 것은 아니었으나 베스파시안황제는 더 이상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베스파시안황제 치하에서 평안을 누렸으며 이 평안은 그의 아들 티투스<Titus>의 치하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티투스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가 황제에 등극하였을 때 상황이 달라졌다. 도미티아누스는 처음에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무관심했다. 그러나 그가 로마의 종교적 전통을 고집하면서 자신을 신격화 했을 때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도미티아누스는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를 자신의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리하여 로마 시민들에게 로마의 전통적 신들을 특별히 섬기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신으로 선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는 우선적으로 로마의 시민들이 로마의 전통적 신들을 특별히 섬기게 한 후 황제가 신들의 신이라고 선포하여 황제숭배를 강요했다. 로마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각종 서약서들에는<황제의 천재성에 걸고>라는 문구가 관습적으로 사용되었는데 도미티아누스는 그 문구를 황제의 공문서에 의무적으로 적용했다. 역사가들 중에는 도미티아누스의<황제->발상이 유대교인들이 예루살렘에 보내던 헌금을 황제에게 드리게 하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역사학자들은 고대 애굽왕 바로의 신격화를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유지를 위하여 매년 또는 수시로 예루살렘에 헌금을 보냈는데 기원70년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자 도미티아누스는 유대인들에게 그 헌금을 황제에게 바치라고 명령했다. 황제의 강압에 의하여 일부 유대인들이 황제에게 헌금했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것을 거절했다. 황제는 유대인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자신을 신으로 선포하고 황제 즉 신에게 헌금을 바치지 않는 자들을 가차 없이 처형하겠다고 선포했다. 황제는 자신의 명령의 지엄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자신의 인척 중에 기독교인이었던 플라비우스 클레멘스<Flavius Clemens>와 그의 아내 플라비아도미틸라<Flavis Domitilla>를 처형했다. 이때에 로마에 다시금 기독교 박해의 열풍이 불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했는데 유대교도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에 함께 탄압받았다. 기독교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로마를 떠나거나 또는 지하로 은둔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도미티아누스의 박해를 통하여 또 하나의 특별한 역사를 이루시었다. 그것은 황제의 박해에 의하여 밧모섬에 유배된 요한을 통하여<요한계시록>을 집필하신 것이다.

 

3)트라야누스<Trajanus-97-117.재위>의 박해.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트라야누스황제 때에 이르러 더욱 극심했다. 이때에 새로운 법령이 발표되었는데 기독교인만 아니면 아무리 극악무도한 흉악범이나 살인범이라 할지라도 극형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순교자 저스틴<Justin>은 자신의 저서인 변명론<apologia>에서<기독교인이라는 단어는 곧 죽음이라는 단어의 대명사가 되었다.>라고 증언했다. 기독교인들에게 가해진 박해는 점점 극심해져서 심지어는 그들을 산채로 소금에 절인 때도 있었고 길가의 높은 나무에 매달아 밤새도록 불로 태워 죽인 일도 있었다. 그러나 트라야누스황제의 기독교박해는 비시니아지방 총독의 기독교박해에 대한 사건으로 인하여 크게 완화되었다. 기원112년 소아시아의 비시니아<Bithynia-비두니아-현재의 터키북부지방의 해안도시>지방 총독이던 소<>플리니<Pliny the Younger>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처벌을 시행하는 와중에서 로마의 법치주의와 종교적 현실이 대립하게 됨에 따라 갈등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트라야누스황제에게 기독인들에 대한 처벌문제를 문의하는 공문을 보냈다.

 

전승에 의하면 플리니는 전형적인 로마인으로서 로마의 법과 전통을 존중하였던 공의로운 귀족이었다. 그가 비시니아지방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비시니아 지역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었고 기독교 이외의 이교도들은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교도들의 신전이 남아 있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가 부임했을 때 기독교를 증오하는 어떤 자가 새로운 총독에게 환심을 사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의 명단을 고발했다. 총독은 기독교가 불법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사에 들어갔다. 이때에 소환된 자들은 자신들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또는 과거에는 기독교신자였으나 현재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총독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황제의 신상에게 향불을 피운 후 절하고 그리스도를 저주하라고 했다. 총독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그와같은 배교 행위는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때에 소환된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 자들은 총독이 하라는 대로 한 후에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자들은 목숨을 버릴지언정 배교행위를 하지 않았다. 총독은 그들에게 세 번의 구명 기회를 주었으나 그들은 끝까지 배교를 하지 않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총독은 그러한 자들을 처형했고 그 중에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들은 로마법에 따라 처결하기 위하여 로마법정으로 이송했다. 당시에 로마시민은 오직 로마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어있었다. 이때에 총독은 두 가지의 의문을 갖게 되었다. 하나는 과연 기독교인들의 범죄 한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과 다른 또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자신들의 신앙을 고수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총독은 기독교인들의 신조와 신앙생활을 자세하게 추적했다. 그러나 총독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은 범죄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소문대로 인육을 먹거나 영아를 살해하여 제물로 바치거나 하지 않았으며 근친상간을 비롯한 부도덕한 성행위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동이트기 전에 함께 모여서 그리스도라는 사람을 찬양하고 그에게 기도하며 절도와 간음과 폭력 등등의 부도덕한 범죄들을 저지르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며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 것을 피차에 맹세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또한 과거에는 공동식사를 하기 위하여 함께 모였었으나 로마당국이 비밀집회를 금지한 후로는 그 모임도 중지했다. 총독은 조사결과에 만족할 수 없었다. 소문과 조사결과가 너무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총독은 진실을 알아내기 위하여 두 명의 여신도들을 심하게 고문해 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총독은 매우 당황했다. 아무런 범죄도 저지르지 않고 오히려 사회에 유익한 모범적 삶을 사는 자들을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처벌한다는 것은 로마의 법 정신에 위배되는 일이 거니와 로마의 정의로움에 크게 위배된다는 것이 그의 개념이었다. 총독은 기독인들에 대한 처벌문제를 일단 중지시킨 후 황제의 의견을 알아보기 위해 트라야누스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린 소년소녀들도 어른들처럼 가혹하게 처벌해야 합니까? 누구든지 기독교도가 되면 꼭 그렇게 처형되어야만 합니까? 그들은 실제로 무슨 나쁜 일을 한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까? 만일 피고 스스로 기독교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를 놓아 주어도 되겠습니까?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시인하는 자들에 대해 저는 그들이 로마시민일 때에는 로마로 보내도록 하고 로마시민이 아닐 경우에는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허나 저는 그들은 고집이 너무 세기 때문에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바 입니다. 저는 그들이 폐하의 제단에 분향하고 그리스도를 욕하면 살려주려고 세 번이나 기회를 주었습니다. 저는 진짜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들어 왔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어떤 특정한날 동이트기 전에 서로 만나서 그리스도에게 찬송을 드리는 것 외에는 결코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남의 것을 훔치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제가 비밀집회를 금지한 후 그들이 그것을 포기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공동식사를 하기 위하여 계속 모입니다. 제게는 집사라고 불리 우는 여자 노예들이 몇 명 있는데 저는 그들을 고문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서 몇 가지 미친 생각들 이외에는 나쁜 것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어리석은 것에 감염되어 우리의 신전은 거의 텅 비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비시니아총독의 질의 공문에 대하여 트라야누스황제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황제의 답변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로마통치 영역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은 로마의 법령에 따라야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처벌에 관해서는 별도로 규정한 법이 아직은 없다. 따라서 그들이 특별한 죄를 범하지 않는 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색출해 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시간과 국력을 낭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고발된 자들은 로마법대로 처벌하라. 황제 신상에 분향하고 예를 올리는 자는 방면하되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처벌하라. 그러나 익명으로 고발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은 로마의 법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트라야누스황제의 칙령은 고도의 정치적인 방책이었다. 황제는 정치적 차원에서 로마의 법을 세워 로마제국과 황제의 위신과 자존심을 세우는 한편 불필요한 학정을 시행한다는 논란의 여지를 제거하였고 동시에 계속되는 기독교인들과의 마찰을 피했다. 황제신상에 예를 갖추지 않는 자들을 처벌해야 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절대 필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비록 그것이 황제들의 욕심에 의해서 세워진 비진리적인 법령이라 할지라도 일단 세워진 이상에는 지켜져야 로마제국의 권위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황제는 로마제국과 황제의 권위를 위하여 그것을 여전히 고수하게 하는 반면에 특별한 죄를 범하지 않는 한 기독교인들을 고의적으로 색출하여 탄압하지 않게 함으로서 정치적인 안정을 도모하였다. 트라야누스황제의 칙령은 비시니아총독에게만 전달되었을 뿐이었고 다른 지역에는 전달되지 않았으나 그것은 비시니아에만 적용되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도 확산 적용되었다. 이로서 로마사회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의 신앙이나 그들의 신앙적 삶이 국가나 사회에 어떤 위험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때문에 기독교를 적대시하던 자들이 오히려 기독교에 입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울러 기독교에 대한 박해도 당분간은 주춤했다.

 

4)하드리아누스<Hadrianus-117-138.재위>의 박해.

 

기독교에 대한 트라야누스의 칙령은 트라야누스의 양자인 하드리아누스가 황제에 등극했을 때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는 로마의 전통적인 다신론주의 자였고 특히 황제신격화에 주력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고집하면서 하나님 이외의 어떤 신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기독교를 심히 증오했다. 그는 소아시아의 총독 미누키우스폰다누스<Minucius Fundanus>에게 칙령을 내려 기독교인으로 고발되는 자들을 반드시 처형하라고 할 정도로 기독교를 박해했다. 그는 로마통치 하의 전역에 황제 신상을 비롯한 신상들을 세우고 그것들에게 경배하라고 명령했으며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을 가차 없이 처형했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의 기독교 박해는 황제가 직접적으로 주도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지방 총독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것은 비시니아총독의 질의를 받은 트라야누스황제 때부터 이미 시작된 현상이었는데 이때에 황제들은 명분 없이 무고하고 모범적인 기독교인들을 탄압하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어렵게 한다는 판단 하에 기독교에 대한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지방의 총독들에게 일임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지방총독들의 통치 개념과 방법에 따라 기독교탄압의 양상이 달랐다. 어떤 지방의 총독은 무조건 기독교를 증오하고 탄압하는가 하면 또 어떤 지방의 총독은 기독교도들에게 뇌물을 받으면서 적당히 그 문제를 조율하였고 어떤 지방의 총독들은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여 기독교도들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이때에 심지어는 남몰래 기독교를 받아들인 총독도 있었으나 정치적인 이유에서 그것을 철저하게 은폐했다.

 

5)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161-180.재위>의박해

 

하드리아누스의 통치가 끝나고 안토니우스피우스<Antonius Pius-138-161.재위>통치시대에 이르러 기독교는 일시적이나마 자유를 누렸다. 안토니우스황제는 기독교에 대하여 관대한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의 치세 하에서 기독교박해가 재현되었다.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는 오랜 전쟁을 종식시킨 후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하여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적 관습을 회복했다. 이러한 그의 정책에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은 역시 기독교였다. 그는 황제에 의한 군주정치를 종식시키고 원로원에 의한 민주적, 공화적 정치체제를 구축했다. 그의 기독교 박해는 기독교인들이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로마의 전통적 종교관습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의 기독교박해는 처참할 정도로 잔인하고 공격적이었다. 그는 론<Rhone>계곡의 리용<Lyons>과 비엔나<Vienna>에 거주하던 기독교인들을 모두 고문하고 죽이라고 명령했으며 로마시민권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목을 베어 죽였고 로마시민이 아닌 기독교도들은 짐승들의 밥이 되게 했다. 심지어는 감옥에서 죽은 기독교인들의 시체를 굶주린 개들에게 던져주어서 장례조차 지내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마르쿠스아울렐리우스 치세 때에는 역병이 극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흉년과 가뭄으로 인하여 기근이 극심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기독교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가중시켰다.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유일신 신앙인들로 보지 않고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들로 보았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신들을 무시하고 섬기지 않음으로 신들이 진노하여 역병과 흉년 가믐 등등의 재난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기독교박해에는 유대교인들도 한 몫 거들었다. 유대교인들은 기독교와는 달리 로마당국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독교탄압에 일조했다. 유대교인들이 기독교탄압에 동조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기독교가 유대교의 모든 전통들과 특히 율법을 무시하고 모독하여 훼파했기 때문이었고, 다른 또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을 메시야 처형의 주범들로 몰아세우면서 유대인들의 국가적, 민족적, 종교적, 멸망과 붕괴의 비극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메시야를 처형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조치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6)셉티미우스세베루스<Septimius Serverus.191-211.재위>의 박해.

 

로마제국은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황제가 사망한 뒤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나약하고 변변치 못한 반면에 허황되고 욕심 많은 황제들이 연이어 등극하여 정치체계 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황제들이 무능하여 정치체계가 혼란하고 무질서하자 각 지역 원주민들의 반란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로마제국은 그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전쟁을 계속했으나 황제들은 환락과 사치에 빠져 쾌락추구에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격감되었고 기독교인들은 한동안 자유와 평안을 누렸다. 이 무렵에 기독교는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고 확장되어 로마 전역이 기독교의 물결로 출렁대었다. 그러나 셉티미우스세베루스가 황제에 올랐을 때 기독교박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셉티미우스황제는 아프리카의 군인 출신으로서 종교에 대하여 무관심하였으므로 기독교에 대해서도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셉티미우스황제가 기독교를 탄압하게 된 동기는 당시의 로마제국 정세와 그의 왕비 돔나<Domna>때문이다. 셉티미우스황제는 황제에 등극한 후 그동안의 군인적 경륜을 살려 지역들의 반란들을 제압했다. 그러나 황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역적 반란들이 완전히 평정되지 않았다. 특히 라인강과 다뉴브강 건너에 살고 있던 민족들이 계속하여 로마제국에 저항했다. 반란세력은 제국의 내부에도 존재했다. 특히 기존의 군부세력은 아프리카출신의 황제를 불신했다. 언제 군부가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고 자신을 축출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에 왕후가 황제에게 방법을 제시했다. 왕후 돔나는 에메사<Emesa>출신으로서 태양신을 섬기는 엘가발<El Gabal>사원의 대제사장 딸이었다. 그녀는 황제에게 로마의 전통적 종교들을 부활시켜 로마의 정치체제를 종교적, 정치적 통일체제로 만들어 반란세력을 와해시키라고 했다. 황제는 왕후의 조언을 받아들여 우선적으로 로마의 전통 종교들을 부활시켰다. 그는 로마 전지역에<솔인빅투스-Sol inbictus-정복되지 않은 태양>을 예배하도록 명령했다. 황제는 태양신을 지존의 신으로 세운 후에 다른 모든 신들을 그 아래 두어 섬기게 함으로서 종교적 통일을 이루었다. 그것은 친정에서부터 태양신을 섬겨온 왕후의 계략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명령은 기존의 종교인들로부터 불신을 받았고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로부터 거부되었다. 황제는 종교인들을 힘으로 제압했고 그 중에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인 유대교와 기독교를 혹독하게 탄압했다. 황제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말살시키기 위하여 두 종교들이 더 이상의 신자를 받아들일 수 없는 법령을 공포했다. 누구든지 유대교와 기독교에 가입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공포한 것이다. 이 법령은 트라야누스황제의 칙령과 병행하여 적용되었기 때문에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함께 무차별적 탄압을 감수해야 했다. 이때에 로마통치 하의 전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이 시작되었는데 특히 애굽과 북아프리카에서 극심한 탄압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신학자였던 오리겐의 부친 레오니다스가 참수되었으며, 카르타고에서는 귀부인이었던 퍼폐튜아가 충직한 몸종 펠리시타스를 비롯한 5명의 시종들과 함께 짐승에게 던져져 순교했다.

 

7)막시미누스<Maximinus.235-238.재위>의 박해.

 

셉티미우스세베루스의 치세 말년에 이르러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중단되었다. 이때에 왜 박해가 중단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기록이 없다. 그러나 전설에 의하면 황제가 기독교를 박해한 것을 몹시 후회했다는 이야기와 왕후인 돔나에게 어떤 불행한 일이 발생하여 그것이 기독교박해 때문인 것으로 여겨져서 박해를 중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로마에서의 박해는 중단되었으나 유럽일대에서는 산발적인 박해가 계속되었다. 셉티미우스세베루스가 사망한 후 카라칼라<Caracalla-211-218.재위>가 황제로 등극했다. 이때에도 박해는 중단되었으나 북아프리카지역에서는 산발적인 박해가 계속되었다. 그 뒤에 엘라가바루스<Elagabalus.218-222.재위>황제와 알렉산더세베루스<Alexander Severus.222-235.재위>황제는 셉티미우스세베루스황제의 정책을 답습하여 종교 혼합정책을 추구했으나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았음으로 기독교박해는 거의 중단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알렉산더 세베루스황제는 자신의 개인적인 신전에 수많은 신들과 함께 그리스도와 아브라함의 신상들을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실제로 황제의 모친인 줄리아맘메아<Julia Mammea>는 오리겐의 강의를 듣기 위하여 알렉산드리아까지 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막시미누스<Maximinus>황제 치하에서 다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 당시에 로마교회는 두 사람의 감독들-폰티아누스<Pontianus>와 히폴리투스<Hippolytus>에 의하여 분열되어 있었는데 황제는 그들을 모두 사르디니아<Sardinia>의 금광광산으로 유배시켰다. 그러나 막시미누스황제 치하의 박해는 간헐적이었으며 기독교인들을 처형하지 않고 유배형에 처했기 때문에 순교역사는 거의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기독교에 대한 오해들이 거의 풀렸고 기독교가 참 진리의 종교라는 인식이 퍼져 나가면서 오히려 많은 귀족들이 기독교에 입문했다.

 

8)디키우스<Dicius.249-251.재위>의 박해.

 

막시미누스황제 치하에서 안정을 누렸던 기독교에 다시 무서운 폭풍이 불어 닥쳤다. 기원 249년에 데시우스가 황제에 올랐을 때에 로마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국경 넘어 사는 민족들은 호심탐탐 제국을 넘보고 있었고 수시로 국경을 침범하여 제국을 위협했다. 로마 식민통치 하의 각 지방에서도 독립을 원하는 반란과 폭동들이 수시로 일어났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경제도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황제는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하여 고심했다. 황제는 로마가 영광을 상실하게 된 동기를 종교적 차원에서 찾았다. 그는 로마가 전통적인 신들을 배신했기 때문에 신들 또한 로마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국민들이 신들을 극진하게 섬길 때에는 신들이 로마를 절대적으로 보호하고 도와주었기 때문에 로마가 번영과 영광을 누렸던 반면에 국민들이 신들을 배반하고 섬기지 않게 되자 신들이 진노하여 로마를 돌보지 않음으로 로마에 위기가 닥쳐왔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따라서 황제는 로마가 전통적인 신들을 다시 극진하게 섬기면 신들이 마음을 돌려 로마를 보호하고 지켜줌으로서 로마의 영광이 재현될 것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신들의 형상들을 다시 정비하여 세우고 황제의 신상도 재정비하여 세웠다. 데키우스황제의 의지는 매우 단호하고 결연했다. 신들 앞에 제물을 드리지 않거나 황제의 신상 앞에 분향하지 않는 자들은 체포되었다. 황제는 신들 앞에 제물을 바치고 황제의 신상에게 분향하는 자들에게는 증명서를 발급했다. 증명서가 없는 자들은 황제의 칙령을 거부한 죄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죄인들을 처형하지 않고 그들을 회유하는데 주력했다. 황제는 불순종하는 자들을 체포한 후 무서운 고문과 회유정책을 통하여 그들을 개종시켰다. 당시에 많은 자들이 체포되었으나 황제의 회유정책에 의하여 마음을 바꾸어 풀려나는 자들이 속출했다. 이때의 양상은 다양했다. 어떤 자들은 아예 일찌감치 마음을 바꾸어 황제의 명령에 따르는가 하면 어떤 자들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어 보다가 체포되면 할 수 없이 명령에 순종했고 또 어떤 자들은 관리들을 매수하여 돈을 주고 증명서를 구입하여 순종을 위장했다. 때문에 순교자들은 별로 많지 않았으나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킨 자들도 많았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두 가지의 신조어가 생겼다. 하나는 끝까지 신앙을 지킨 자들로서<고백자>라는 칭호를 얻었고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여 신앙을 버린 자들은<배교자-Apostat>라고 호칭되었다.

 

9)발레리아누스<Varerianus.257-259.재위>의 박해.

 

디키우스의 뒤를 이어 갈루스<Gallus.251-257.재위>가 황제가 되었을 때 그는 기독교박해를 중지 시켰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발레리아누스황제에 의해서 다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의 박해는 불과 3년 정도 밖에 안 되었지만 기독교에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 당시에 질병과 흉년이 발생하자 황제는 그 책임을 기독교에 돌렸다. 기독교가 로마의 전통적인 신들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신들이 노여워서 그러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황제는 기독교인들의 집회를 금지했고 그들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했으며 감독, 목사, 장로, 집사 등등의 지도자들을 처형하거나 유배시켰다.

 

10)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ctianus.284-305.재위>의 박해.

 

발레리아누스황제의 박해는 그가 페르시아인 들에게 포로 되었음으로 종료되었고 향후 40여년간 더 이상의 박해는 없었다. 그러나 4세기 초 마지막이 가장 조직적이고 가혹적인 박해가 발생했다. 기원284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에 등극하였는데 그는 로마제국을 재정비했다. 그는 로마제국에 새로운 황제제도를 수립했다. 그는 황제를 두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아우구스투스<Augutustus>황제이고 다른 또 하나는 시저<Caesar>황제이다. 아우구스투스황제는 로마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통치하는 최고의 황제이며 시저황제는 아우구스투스황제들의 휘하에서 그들의 명령을 받는 휘하 황제 이다.이때에 로마 전체에 대한 최고의 통치권은 동로마를 통치하는 황제에게 있었다. 아우구스투스황제는 오직 시저황제들이 계승하게 되며 시저황제들이 아우구스투스황제를 계승하여 황제 자리가 결원되면 새로운 시저황제를 선출하여 보강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가 이러한 정책을 시행한 것은 거대한 제국이 분열되지 않고 질서 있게 통치되게 하기 위함 이었다. 로마제국은 황제계승 문제로 인한 암투 때문에 끊임없는 내란과 부란을 겪어왔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이러한 황제 계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2중적인 황제제도를 세워 황제 계승을 법통대로 이어가는 동시에 황제계승을 둘러싼 암투와 내란을 종식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은 처음에는 잘 지켜졌으나 나중에는 권력 쟁취를 위한 황제들 간의 암투로 인하여 더욱 혼란이 가중되는 결과를 이루었다. 이때에 아우구스투스<Augutustus>황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ctianus>와 막시미아누스<Maximianus>로 서디오클레티아누스는제국의 동방을 맡았고 막시미아누스는 제국의 서방을 맡았다. 시저황제<Caesar>는 갈레리우스<Galerius>와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Constantius Chlorus>로 서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휘하의 황제였고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는 막시미아누스 휘하의 황제였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최고황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였고 나머지 세 명의 황제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 휘하의 황제들이었다. 세 명의 휘하 황제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의 탁월한 권위적 지도 하에 맡은 지역을 질서 있게 다스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가 건재 하는 동안에 로마제국은 권력문제로 인한 암투가 없었고 제국은 비교적 평안했다. 다만 갈레리우스가 다뉴브강 유역의 내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정했고 페르시아 원정을 위해 또 한번 출정한 것 외에는 별다른 사건도 없었다. 4명의 황제 치하 초기에 기독교는 평안함을 누렸다. 황제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별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아내인 프리스카<Prisca>와 그의 딸인 발레리아<Valeria>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엄청난 박해가 군대 문제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에 기독교 성도들 중에는 자원하여 군대에 입대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도들의 군 입대를 반대했다. 때문에 군 입대한 성도들 중에 군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들이 있었다. A.D.296년경, 군대에서 병영을 이탈한 기독교 신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형당했다. 갈레리우스황제는 기독교인들의 병영 이탈 문제를 좌시하지 않았다. 그는 결정적인 시기에 기독교 신자들이 병영을 이탈하여 군대의 사기가 와해될 것을 크게 염려했다. 때문에 그는 군대에서 모든 기독교 신자들을 축출할 것을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건의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그 건의를 받아들여 모든 기독교 신자들을 군부로부터 축출하는 칙령을 내렸다. 이때에 다뉴브강 주둔군의 현지 지휘관들 중에서 황제의 칙령대로 행하지 않고 기독교 신자들에게 신앙을 거부하도록 강요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로인하여 기독교 신자들이 반발하자 다뉴브강 주둔군 사령관이 기독교신자들을 명령 불복종 죄로 처형하였다. 이 사건 이후로 갈레리우스는 기독교인들을 더욱 불신했다. 그는 303년에 이르러 로마제국내의 모든 관직에서 기독교인들을 축출하게 해달라는 건의서를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에게 올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그 건의를 받아 들였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자들을 모든 관직에서 파면할 것과 기독교 건물들을 모두 파괴하고 기독교에 관한 문서들도 모두 파괴하라는 칙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처음에는 황제의 칙령이 단호하게 시행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우호적이었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제국의 관직에 있었으며 그 중에는 고위관직에 있는 자들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성스러운 경전 문서들이 파기되는 것을 결사반대하여 정부의 탄압에 맞서자 상황이 악화되어 도처에서 고문과 처형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황궁에 두 차례에 걸친 화재가 발생했는데 갈레리우스는 그것이 기독교 신자들이 박해에 대하여 복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갈레리우스가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화재를 일으켰다고 증언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크게 진노하여 황실에 근무하는 모든 기독교 신자들로 하여금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올리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때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아내인 프리스카와 그의 딸인 발레리아는 황제의 명령에 순종하였으나 당시의 로마 수상이었던 도로테우스<Dorotheus>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길을 택했다. 로마제국 전체에 걸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었다. 수많은 교회들과 기독교 문서들이 파괴되고 불탔으며 기독교를 증오하던 관리들은 이때다 싶어 기독교인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이러한 박해의 와중에서 제국 내에 내란이 일어나자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황제는 그것이 기독교 신자들에 의한 반란이라고 의심하여 더욱 혹독하게 기독교를 탄압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체포되어 고문 당하거나 처형되었다. 신앙을 거부하고 황제를 숭배하는 자는 방면하기로 되어 있었고 그것을 거부하는 자는 로마의 시민권과 모든 법적인 권리를 박탈하는 차원에서 방면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러한 법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기독교를 증오하는 관리자들은 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기독교인들을 무조건 고문하고 처형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과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다시 지하로 숨었고 일부는 국경을 넘어 페르시아로 탈출했다. 이에 황제는 더욱 분노했고 탄압은 더욱 극심하게 자행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갈레리우스의 권위는 최고에 올라 로마제국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다. 304년에 이르러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중병에 걸려 허약해지자 그의 황제로서의 권위도 따라서 약화되었다. 갈레리우스는 기원305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를 협박과 회유로 설득하여 황제의 자리에서 퇴진시켰다. 이때에 아우구스투스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하고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가 아우구스투스황제자리에 올랐다. 갈레리우스가 동로마를 다스리는 황제로서 로마의 최고황제가 된 것은 당연하다. 시저황제의 자리에는 세베루스<Severus>와 막시미누스다이어<Maximinus Daia>가 등극했는데 그들은 실권이 전혀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갈레리우스의 계략적인 황제 등극에 대하여 군부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때에 로마군부의 차기 실세 자는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의 아들인 콘스탄틴<Constantine>과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Maxentius>였다. 그들 중에 특히 콘스탄틴을 지지하는 세력이 막강하였다. 이때에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틴을 황궁에 머물게 했다. 갈레리우스가 콘스탄틴을 황궁에 머물게 한 외적 명분은 황제의 정치적, 군사적 보좌였지만 내용은 콘스탄틴의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와 콘스탄틴을 지지하는 군부세력의 반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콘스탄틴은 사실상 볼모로 연금된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지지 세력의 도움을 받아 황궁을 탈출하여 부친과 합류했다. 콘스탄틴을 지지하는 군부세력은 기원306년에 콘스탄티우스클로우스가 사망하자 갈레리우스를 거부하고 콘스탄틴을 아우구스투스황제로 추대했다. 한편 막센티우스는 자신의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로마로 진격해 세베루스황제를 폐위시켰다. 세베루스는 자살하였고 갈레리우스는 막센티우스를 제거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휘하 장군들이 오히려 막센티우스편에 합류하므로 실패했다. 궁지에 몰린 갈레리우스는 이미 은퇴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로마제국은 매우 혼란스러운 정치적 공백을 맞이했다. 로마 속령의 지방에서는 야심찬 군부세력들이 힘을 비축하며 틈을 노리고 있었고 서방지역에서는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 두 황제가 각각 황제를 자처하면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계속 되었다. 갈레리우스와 막시미누스다이어는 계속하여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했다. 특히 막시미누스다이어는 기독교 신자들의 신체를 절단하고 그들을 채석장에 보내어 강제노역을 시키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이에 맞서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채석장의 강제노역 현장에 교회를 세우고 신앙적 삶을 고수했다. 진노한 막시미아누스는 그들을 가차 없이 처형했으나 기독교 신앙의 불길은 그럴수록 더욱 거세게 타 올랐다. 어쩌면 로마의 기독교가 완전히 종료될지도 모른다는 절망적인 우려 속에서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갈레리우스가 갑자기 급환으로 쓰러진 것이다. 황제는 외음부에서 화농증이 발발하여 점점 발진하면서 창자의 내부로 퍼져들어 갔기 때문에 치료가 불가능했다. 상처에는 벌레가 들끓었고 냄새가 지독하여 곁에 서 있기가 역겨울 정도였다. 고통 중에 신음하는 그에게 측근이 조언했다. 그의 조언은 황제의 급병이 기독교인들을 탄압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으로 빨리 기독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멈추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황제는 자신의 악행에 대하여 크게 후회했다. 황제는 서둘러서 기독교에 대한 관용령을 발표했다. A.D.311430일의 일이었다. 다음은 갈레리우스가 발표한 라틴어 칙령의 헬라어 번역문을 요약한 것이다.

 

<우리들은 이제까지 제국과 백성들의 공익을 위해 여러 가지 조처를 강구했다. 먼저 우리는 모든 일들을 로마인들의 전통과 공적인 제도에 따라 질서를 복구하고자 하였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들은 특별히 자기 선조들의 종교와 신앙을 저버린 기독교 신자들이 진리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자신들의 뜻과 의지에 따라 법률을 만들어 쫒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다른 의견들을 가진 여러 계열의 분파들이 생기게 되었다. 때문에 우리가 황제의 칙령을 통하여 그들에게 옛 조상들이 세워놓은 관습으로 되돌아가라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이에 복종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위협을 받고 여러 가지 형태의 죽음을 택했다. 그러나 아직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자기들의 고집을 꺾지 않으며 이들은 불멸의 신들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도 않고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에게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우리는 저들이 여전히 우리가 만백성에게 용서를 베풀어 온 자비함과 변함없는 관습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으나 우리는 이일에 있어서도 모든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만인들을 향한 자비의 눈으로 볼 때에 이들을 사면하고 이들이 공공질서를 해치지 않는 한 자기들끼리 집회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옳을듯하다.

 

그럼으로 기독교인들은 다시 자신들의 모이는 장소를 재건하며 자신들의 신앙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아도 좋다. 우리는 또 다른 칙령을 통해 공직자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를 지시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양보하였음으로 이러한 은혜에 보답하여 기독교 신자들은 제국이 번영을 누리고 자기들 스스로가 평안하게 그 생명을 보존할 수 있도록 우리들과 공공복리와 자기 자신들을 위해 자기들의 신에게 기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사방에서 공공의 복지가 보존되며 그들이 각기 자기 집에서 무사하게 살게 되기를 기원해야 한다.>

 

갈레리우스황제는 칙령을 발표한 후 5일 후에 사망했는데 그는 운명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나는 참으로 미친 짓을 했다....물론 공포에 질린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저버린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반면에 또 다른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은 의연한 모습으로 그들의 신앙을 피로서 입증했다.>

 

갈레리우스의 칙령으로 인하여 로마 전역에서 시행되어 졌던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공식적으로 해제되었다. 모든 지역의 감옥 문이 열리고 감금되어 있던 모든 기독교인들이 석방되었으며 몰수 되었던 교회 및 개인들의 재산이 환수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기독교 박해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른 황제들은 박해를 종식시킨 반면에 막시미누스다이어황제는 여전히 박해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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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해의 원인.

 

1)정치적 원인.

 

이스라엘 남북왕조 멸망 후 세계 각지로 계속하여 흩어져 이주해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로마에도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었다. 기원 후 1세기경의 로마정부 기록을 보면 로마시내에 12개정도의 유대교회당들이 있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로마통치 하의 전 지역에서 매우 뜨거운 감자였다. 유대인들은 유일신앙을 고수하여 로마의 종교정책에 정면으로 항거했다. 그들은 특히 자신들의 예루살렘 성전을 시온성전이라고 불렀고 자신들의 종교적 사상을 시오니즘이라고 주장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거나 성전 보수에 사용될 헌금을 보냈는데 그 헌금 액수가 과다 하여 때로는 한 지방의 경제사정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때문에 로마통치 하에 있는 각 지방의 통치자들은 유대인들을 미워했고 때때로 그와같은 사정을 로마정부에 보고하여 어떤 특별조치를 내려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로마정부로서는 유대인들을 함부로 홀대할 수가 없었다. 유대인들은 탁월한 상술을 통하여 각 지방의 경제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함부로 대했다가는 경제가 악화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황제숭배라던가 만신전 봉례행사 같은 종교적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러한 행사에 소용되는 막대한 비용들을 헌금하는 것은 거절하지 않았으며 각종 빈민구제와 병자 치료 및 장례에 부조하는 등등의 사회적 봉사를 많이 했다. 때문에 로마정부로서는 그들을 탄압하기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로마정부는 그들이 특별한 반란적 행위를 하지 않는 한 그들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 오히려 그들을 다스리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유대인들의 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해 주었다. 따라서 기독교도 유대교의 그늘 아래에서 어느정도의 편의가 제공되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간 초창기에 로마는 기독교와 유대교를 같은 종교의 분파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한 구분이 이루어지고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첨예화되면서 심지어는 폭력이 수반된 충돌이 계속되자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를 탄압하게 되었다. 특히 유대 본토의 마카비우스가<家>에 의한 폭동에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이 독립자금을 보내거나 반란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게 됨에 따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2)종교적 원인.

 

로마제국 정부는 로마의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종교를 이용했다. 로마정부는 식민통치 하에 있는 여러 지방에서 유입되어지는 민족들의 종교들을 모두 인정하고 연합시키는 정책을 펴 나갔다. 로마정부가 종교 다원화 정책을 세운 것은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로마의 종교적 자존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로마는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했다. 로마는 그 어 떤 신도 배타하지 않고 섬기는 다신론적 종교 국가였다. 원래 로마는 전통적으로<쥬피터><마르스><퀴리노스><다이아나><넵튠><쥬노><플라멘다알리스>등등의 신을 최고의 신으로 받들어 섬겼다. 로마정부는 정부 산하에 승원이라는 종교기관을 신설하고 승려제도를 만들어 종교를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로마가 세계정복에 나섰을 때 그들은 대부분의 국가들이 일정한 소수의 신들만을 구별하여 섬겼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한 반면에 자신들은 신들을 구별하여 섬기지 않고 모든 신들을 다 함께 섬겼기 때문에 그 많은 신들이 자신들을 승리하게 도와주었다고 믿었다. 따라서 로마정부는 정복지 주민들이 로마에 이주해 살면서 들여온 그들의 신들을 배타하지 않고 모두 수용하였다. 로마정부는 모든 신들이 결국은 하나의 최고적 신들 밑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들이라는 논리를 세웠다. 그리하여 만신 전을 만들어 모든 신들을 그곳에 모신 후 사람들이 자유롭게 신들을 선택하여 섬기게 했다. 그러나 이때에 유대교와 기독교는 그러한 로마정부의 종교정책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하 나님만을 섬기었으며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았고 신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로마정부 당국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다 함께 불순종하는 무리로 간주했다. 그러나 로마정부는 아직은 그것 때문에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았다. 앞장에서 이미 논증한바 있듯이 아직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분파로 인식하 고있 었던 반면에 유대교를 함부로 다스리는 것보다는 그들의 종교를 인정해 주는 것이 오히려 로마의 이익이 된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로마정부가 기독교를 탄압하게 된 것은 기독교와 유대교가 완전히 구분되어진 후에 발생 한기독교에 대한 부도덕한 소문들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이 기독교 유대인과 유대교 유대인으로 구분되어진 후에 기독교에 대한 아름답지 못한 소문이 로마에 퍼지기 시작했다.

 

로마의 탄압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로마정부의 눈길을 피하여 주로 새벽이나 깊은 밤에 지하 동굴이나 카타콤<Catacombs-지하묘지>등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그것이 새로운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 로마정부는 기독교의 비밀집회를 정치적 차원에서 우려했다. 유대인들이 비밀지하결사대를 만들어 폭동을 일으키려는 것으로 의심한 것이다.

 

3)사회적 원인.

 

로마인들은 로마제국에 대한 특별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로마는 곧 자신이었으며 종교였다. 그들의 로마사랑은 애국차원을 넘어서 신앙이었다. 그러한 로마인들에게 오직 하나님만을 고집하며 군대복무를 거부하고 때로는 로마제국과 황제까지도 거부하는 기독교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로마인들은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기독교인들의 불충성에 대한 신의 노여움이라고 믿었다.

 

한편 로마인들이 기독교를 증오한 이유 중에는 기독교인들의 특별한 사생활도 포함되었다. 당시의 로마인들은 향락과 사치를 추구했으며 노예제도를 실시했고 특히 노예들을 검투사로 양성하여 검투사 시합을 즐겼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노예제도에 반대했고 특히 노예들이 검투시합을 통하여 속절없이 죽어가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기독교인들은 또한 성적으로 부도덕한 로마인들의 삶을 거부했으며 절대적 가부장제도 하에서 실시되는 각종 부도덕한 악행<예를 들면 여자아이를 낳았을 때 가장이 그를 싫어하여 내다 버리는 관습이나 아내를 마음대로 버릴 수 있는 관습>들을 거부했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차원 높은 윤리적, 도덕적 삶은 로마인들의 자존심을 무너뜨렸고 그것이 기독교를 증오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4)황제들의 음모.

 

로마정부가 처음에 종교 다원화정책을 세운 것은 로마 거주민들이 종교적인 문제로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지 않게 하려는 정치적인 책략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이 나중에는 종교들을 하나로 묶는 정책으로 바뀌었다. 로마정부는 만신전의 신들 위에 로마황제를 좌정시켰다. 즉 로마황제가 신들 중의 신으로서 최고의 신이며 따라서 모든 신들은 로마황제의 통치 하에 있는 하급신이라는 종교체계를 세운 것이다. 로마가 이러한 종교적 체계를 세운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로 전해진다. 하나는 고대 애굽의 바로 왕조가 시행했던 정치체제를 모방한 것으로서 황제를 신격화 하여 신정치 체제의 제국을 건설하려한 것이고, 두 번째는 모든 신들 위에 황제를 좌정시킴으로서 로마제국의 종교적인 통합을 이루려 한 것이다. 그러나 로마정부의 종교정책은 로마집권자들의 정치적 계략에서 산출된 것이었다. 당시의 로마는 황제에 의한 군주정치를 옹호하는 정치세력과 원로원 위주의 공화정치를 옹호하는 정치세력간에 보이지 않는 암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원로원 위주의 공화정치 체제를 원하는 정치세력들은 황제의 군주정치가 독재적일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결국은 로마제국을 붕괴시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황제에 의한 군주 정치체제를 막으려고 노력했다. 이에 반하여 사사건건 황제의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는 원로원들에 대한 불만이 있는 황제와 황제의 측근들은 원로원의 힘을 약화시키거나 또는 아예 원로원 자체를 붕괴시키고 황제에 의한 군주정치 체제를 세우려고 했다. 황제와 황제의 측근들은 이러한 계략 하에서 황제의 신격화를 주장했고 드디어는 황제의 신적 지위를 만신전 위에 둠으로서 로마 전역에 대한 황제숭배를 강요했다. 원로원은 처음에 황제의 신격화를 단호하게 반대했으나 황제의 강압적인 권위에 눌려 그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그 대신에 황제가 신으로 추대되는 것은 황제 생존시에는 불가하고 황제가 죽은 후 원로원의 결의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그것을 받아들여 원로원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황제들은 계속하여 원로원을 몰아 부치어서 황제들이 생존시에 신으로 추대하게 하였고 황제들의 무력적 권위 앞에 원로원은 어쩔 수없이 굴복했다. 로마시내 전역은 물론이고 로마통치 하의 모든 지역에는 수많은 황제<신>들의 동상들이 건립되었으며 사람들은 그 앞에서 분향하고 경배해야 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황제숭배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차라리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결코 황제를 신으로 받들어 섬기거나 경배하지 않았다. 때문에 황제는 그러한 기독교도들에 대하여 크게 분노하였고 그것이 기독교를 탄압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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