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예배설교  / Special Worship Preaching

 

 

 

제 목 : 내 영혼이 주를 찬양

말 씀 : 눅1:46-50

1.은혜의 포로가 된 사람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중의 하나인 찬송가 28장 ‘복의 근원강림하사’ 3절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다.

주의 귀한 은혜 받고 일생 빚진 자 되네

주의 은혜 사슬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

여기서 사슬이란 쇠줄 즉 체인(Chain)을 말한다. 즉 주님의 은혜의 쇠사슬로 나를 주님께 꽁꽁 묶어서 완전히 주님의 은혜의 포로가 되어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며 살게 해달라는 고백이다. 얼마나 은혜로운 고백인가?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면 주님의 은혜의 쇠사슬에 꽁꽁 묶여 완전히 주님의 포로가 되어 살기를 노래했겠는가?

또 사실 세상의 그 무엇이 우리가 완전히 포로가 될 만한 것이 있겠는가? 돈의 포로, 권력의 포로, 지식의 포로, 세상 향락의 포로 그 어떤 포로가 행복을 노래 할 수 있을까? 그 어떤 포로가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우리는 정말 주님의 은혜의 포로가 되어야 한다. 돈이든 명예이든 권력이든 세상 즐거움이든 세상적 사랑이든 다른 어떤 것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된다. 오직 주님의 은혜의 포로가 되는 사람이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은혜의 포로가 된 자의 찬양이다. 그는 바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다. 마리아는 예수님 수태고지를 받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이때 마리아는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눅1:38절을 보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나는 주의 여종입니다. 포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될 종입니다. 영광의 나라를 위한 종입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드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찌 황송한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받지 않겠습니까? 그런 고백인 것이다.

이것은 마리아로서는 엄청난 모험이다. 그냥 평범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알콩달콩 사느냐 아니면 파혼을 당하든지 파혼이 아니더라도 예수님으로 인하여 칼로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경험해야 하는 중대 기로에 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일을 통해서 이룰 구원의 역사가 얼마나 더 크고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알았기에, 주님의 은혜의 사슬에 묶여 순종했고, 그래서 드디어 영광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도 주님의 은혜의 포로가 되어야 한다. 주님의 은혜의 사슬로 나를 주님께 묶어 버려야 한다. 그러면 우리를 통해 큰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주님 안에 있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이다.

2.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양함.

마리아는 먼저 자신을 돌보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48절 말씀을 보라.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돌아보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인도하시고 지키시고 필요한 것들로 공급해 주셨다는 말이다. 잘나지도 거룩하지도 아름답지도 대단하지도 못한 우리를 인도하셔서 이렇게 귀한 인생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말이다.

사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이 될 만큼 대단한 존재는 아니었다. 물론 신실한 믿음과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감히 주님의 모친이 된다는 것은 인간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강권적인 은혜로 마리아를 택하여 주님의 모친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우리가 이렇게 구원받고 찬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가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돌보심이라는 사실이다. 주님이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그 사역을 감당케 하셔서 우리가 누릴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우리가 살아 숨쉬는 모든 하나님의 돌보심 때문인 것이다. 안 그런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어떻게 믿겠는가? 어떻게 주신 사명 감당하겠는가?

그래서 마리아는 오늘 46,47절에서 고백한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나같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돌아보셔서 이 엄청난 은혜를 주셨는지 도무지 그 은혜를 감당할 수 없어서 그저 기뻐 찬양하노라며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해주셨고, 죄의 사슬에서 풀어 주셨고, 구원을 주셨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없는 엄청난 축복이고 은혜이고 영광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우리를 돌보신 하나님, 은혜를 주신 하나님,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자. 그 은혜의 포로가 되어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3.크신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함.

또한 마리아는 49절에서 크신 일을 행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여기서 큰일은 무엇인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다. 이 엄청난 일을 자신을 통해서 행하심에 영광과 찬양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말하면 뭐 하겠는가? 이런 엄청난 일이 어디에 있는가? 누군가가 전 세계 만국을 다 통일하여 전쟁이나 기근이나 싸움이나 기아나 미움이나 갈등이 전혀 없는 완전한 평화의 왕국을 건설해 준다해도 주님께서 하신 일보다 클 수는 없다. 모든 질병이 낫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해도 이보다 더 큰 일일 수는 없다. 만분의 일, 억분의 일도 안된다. 그래봤자 천국까지는 못간다. 또 죽는다.

그러나 주님은 마귀 사탄의 권세에서 인간을 해방시킨 것이다.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먼저 내가 그 반열에 들어왔음에 감사해야 한다. 그 은혜를 찬양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이 곳에 있음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역사로 인하여 찬양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50년 이룬 역사를 인하여 감사해야 한다.

나는 솔직히 50주년 행사를 끝내고 아쉬운 게 있다. 물론 여러분들이 많이 수고하셨고 여러모로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신 것 감사드린다. 그러나 좀 아쉬운 것은 이 귀한 행사를 하는데 감사헌금 한 사람이 불과 몇 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 교회가 50년 전 이곳에 세워져 이룬 복음의 역사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것이라면, 내가 이 교회를 통하여 얻은 은혜가 너무나 큰 것이라면, 이 일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감사한 일이라면 감사헌금은 했어야 되지 않았을까? 우리 육신의 부모님의 회갑이나 칠순행사를 한다면 어땠을까? 교회는 내 아버지집이 아니던가? 내 아버지집에 이런 경사스런 일이 있는데 어찌 그냥 지나가겠는가?

이건 결코 헌금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과 마음의 문제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 대한 사랑과 생명의 역사가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의식의 문제이다.

여러분, 크신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크신 일을 인하여 내가 은혜 받고 구원받았음에 감사하고 그 은혜를 찬양하기 바란다. 하나님께 이 어둡고 완고한 땅에 이루신 이 큰 역사를 인하여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고 그 은혜를 누리며 살기를 바란다.

4.약속을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함

다음에 마리아는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셔서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오늘 다 읽어드리지 못했지만 55절의 말씀이다.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여기서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무엇인가? 물론 아브라함에게 하신 많은 약속이 있지만 특별히 창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그 말씀이다. 그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메시아를 보내주시고 그 메시야를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들이 구원받고 복을 받게 된 것을 생각할 때에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오심을 이미 약속하신 대로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구원의 약속대로 메시야를 보내셨고 그 메시야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것이다. 그 약속 안에서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들에게 구원의 은총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까지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런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대로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그 약속대로 영광의 나라가 완전히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로 인하여 소망가운데 즐거워하며 그 은혜를 누리며 마음껏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 그런가? 우리에게 이 기쁨이 있는데, 이 소망이 있는데, 이 영광의 나라가 기다리고 있는데, 이 엄청만 축복을 받았는데 어찌 찬양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이것을 제쳐두고 세상의 무슨 다른 은혜를 구하겠는가? 다른 무엇 때문에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이 은혜의 사슬에 묶여 살자.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자인지,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영원한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과 자부심으로 주님의 역사에 참여하며 마음껏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양하여 영광 돌리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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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꽃에는 향기가

 

(벧전1:24-25)

 

풀들이 봄에 났다가 여름에 무성했다가 가을에 쇠하여지고 겨울에는 다 말라죽는 것처럼 인생도 그러한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풀이 무성 할 때는 꽃을 피우고 씨를 만듭니다. 쇠하여지면 종자만 남기고 죽듯이, 우리 인간도 풀과 다름이 없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지는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마르고 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므로, 창세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영원까지도 변하지 않는 세세토록 있는 말씀입니다.

 

첫째, 아름다운 꽃에는 향기가 있습니다. (고후2: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에게나 멸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2:15) 아름답지 않은 꽃은 하나도 없으며 향기 없는 꽃은 하나도 없습니다. 호박꽃도 길가 흙먼지 속에 핀 꽃도 아름답고 향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 꽃향기를 선물하여야 합니다. 향기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합니다. 웃음과 기쁨을 불러옵니다.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향기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꽃이 되어 웃음과 기쁨이 넘치도록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는 예수향기를 날려야 합니다. 마귀를 꼬여들게 하는 썩은 냄새를 풍기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이웃을 행복하게,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꽃에는 꿀이 있습니다.(24:13)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 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24:13) 꿀은 우리 몸에 유익한 영양소를 공급해 줍니다. 아주 달고 맛이 있습니다. 솔로몬 왕도 꿀을 만나면 족 하리 만큼 먹으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꿀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삶에 꿀이 있어야 합니다. 이 꿀은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달콤하게 하는 희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유익하게 하는 삶이 있어야 이것이 바로 꿀을 내는 삶입니다. 우리 인생의 풀이 마르기 전에, 황금기가 지나가기 전에, 꽃을 피우고 꿀을 냅시다. 꿀 같이 단사람, 꿀처럼 맛있는 성도가 되어 희생하고 봉사하여 모두에게 기쁨을 줍시다.

 

셋째, 꽃이 지면 열매를 맺으니 아름답습니다. (13:23)

 

하나님의 피조물중에 인생보다 아름다운 꽃은 없습니다. 아름다움이란 것은 다른 사람을 감복시키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열매를 맺기 위하여 꽂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름다움도 열매를 맺을 때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는 아름다움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행함의 열매가 아름다워야 하고, 마음의 열매가 아름다워야 하고, 영의 열매도 아름답게 열려야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름다운 열매가 없는 나무는 찍어서 불에다 던진다는 말씀과 같이 인생도 아름다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결언/ 예수향기로 살고, 희생의 꿀도 내고, 열매도 맺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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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제목:마음의 눈을 밝히소서.

성경:엡1:17-19


1.천국을 확실히 보아야 합니다.


부산의 한 변두리 달동네에 신실한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권사님은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시장 한 모퉁이 좌판에서 장사를 하며 오직 하나님과 두 아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육체적으로 고달픈 삶을 살았지만 그는 감사하며 자녀들을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였습니다. 이런 권사님의 신실한 믿음을 보셨는지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복을 주셔서 자녀들이 훌륭하게 성장하여 큰 아들은 중소기업 대표가 되었고, 둘째 아들은 대기업 이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그렇게 희생하신 어머니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커다란 아파트를 드리려고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그 달동네의 낡고 작은 집을 고집하며 한사코 만류했습니다.

그러자 두 아들은 정 다른 데로 이사 가시는 게 싫으면 어머니께서 사시던 이 동네에다 새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 웬일인지 쉽게 허락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단 몇가지 조건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들이 뭐든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해드리겠다고 하자 권사님이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내 집을 지어주고 싶으면 이렇게 해라. 먼저 주춧돌은 열 두개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짓되 주춧돌은 모두 다른 보석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둥은 다이아몬드로 하고 벽은 황금으로 하라. 마루에는 자수정으로 깔고, 담장도 황금으로 할 것이며, 대문도 열두개로 하되 모두 진주로 해야 하고, 담장 밖에는 유리알 같은 시냇물이 흐르고, 그 강가에는 다달이 실과가 맻히게 할 것이며, 집으로 들어오는 도로도 모두 황금으로 포장을 하거라.”

그러자 두 아들은 깜짝 놀라며 ‘에이 어머님,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런 집을 어떻게 짓습니까?’ 그랬더니 권사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래, 너희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그런 집을 준비해 두셨단다. 나는 머잖아 그곳으로 이사를 갈 것이다. 그러니 그런 집을 지어주지 못할 바에야 그만 두고 그 돈으로 정말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나 더 도와 주거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크리스천이라면 적어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이루어질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누구도 해 줄 수 없는 이런 영광스러운 저택을 준비해 두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장차 반드시 이런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런 영광을 누릴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그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까짓 세상 것 때문에 염려 근심 질투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얽매어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보십시오. 마음의 눈을 밝히 떠서 무엇을 보라고 하였습니까?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은 무엇이고,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입니까? 물론 영원한 영광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이런 영광의 나라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서도 소망가운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은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저 천국의 한량없이 풍성한 영광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영광의 기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영광의 기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영광은 한량이 없습니다. 영원무궁합니다. 조금치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도 이 영광의 기업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소망가운데 살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천국의 그 아름다움과 영광을 알지 못해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무슨 철학적 신학적 과학적 이성적하면서 쩍쩍하면 유식한 줄 알고, 천국이나 지옥 이야기를 하면 유치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공자가 어떻고 맹자가 어떻고 소크라테스가 어떻고 하면 그럴듯하게 여기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하면 시큰둥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거 큰일 날 징조입니다. 세상이 그만큼 인본주의에 흠뻑 빠져 들어있다는 증거입니다. 눈이 어두워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철학이나 과학이나 정치나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신학조차도 관심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심오한 철학을 가르치려고 오신 것도 아니고, 그저 윤리적 도덕적으로 조금 고상한 삶을 살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원하여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눅19:10절에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이상향이 아니라 실재의 장소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고라도 반드시 사 들여야할 가장 소중한 보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 사실을 기억하며 정말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가운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덧입어 영의 눈을 활짝뜨고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저 영광스러운 천국을 확실히 보는 가운데 세상의 작은 것들에게 얽매이지도 말고, 그것 때문에 낙심이나 좌절이나 원망이나 불평도 말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소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확실히 선명하게 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영적인 밝고 환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가 밝히 보이고 천국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어떤 길거리에 매일 더럽고 해어진 옷을 입고 다 낡아빠진 검은 안경을 쓰고 지팡이를 더듬거리면서 나와서 깡통을 앞에 놓고 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구걸을 하며 먹고사는 맹인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불쌍하고 초라한 행색으로 길거리에 앉아 구걸을 하는데 그날따라 많은 사람들이 동정을 베풀어 제법 많은 천원짜리 지폐들이 깡통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한 소년이 걸인의 곁에서 서성거리더니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걸인 앞에 놓여 있는 깡통을 들고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맹인 거지가 벌떡 일어나더니만 소년을 향해 날쌔게 쫓아가더니 금방 붙잡고는 숨을 헐떡이며 ‘이런 고얀 녀석 같으니라구, 앞길이 창창한 녀석이 어디가서 일을 도와주고 살든지 할 것이지 할 짓이 없어 남의 것을 훔쳐 먹고 사느냐 이 놈아,’하면서 발길로 막 차고 두들겨 패고는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걸인은 맹인 행세를 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두 눈이 멀쩡한데 일하기가 싫어서 맹인 행세를 하며 빌어먹고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이 진짜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의 눈은 뜨고 있지만 인생의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과 목적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마음의 맹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육신의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은 떴으나 진짜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보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저 돈만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도 있고 세상의 나쁜 것만 보면서 원망과 불평과 투기와 향락과 죄악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해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보지 못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밝은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도 눈이 밝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의 눈, 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인간과 이 아름다운 세상과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감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우리가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밝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보고 천국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보며 감사와 기쁨과 소망으로 빛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6:22,2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하겠느냐? 네 눈이 감겨져 진리를 보지 못하고,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한다면 네 인생이 얼마나 어두운 인생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밝은 눈, 아름다운 눈, 깨끗한 눈, 믿음의 눈을 가지고 진리의 빛, 생명의 빛, 은혜의 빛을 듬뿍 받아들이면 우리 인생이 해와 같이 빛나는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물론 육신의 눈도 밝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의 눈, 영적인 눈을 크게 뜨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지식이나 물질에도 밝아야 하겠지만 하나님 나라에 더 밝은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지식의 눈, 과학의 눈도 밝아야 하겠지만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이 더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진장으로 제공해 주시는 생명의 빛을 듬뿍 받아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3.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올바른 눈을 가지려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때만이 우리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밝아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달려가 그 안에 있는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진리이신데, 생명이신데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어떻게 진리를 알겠으며, 생명을 알겠습니까?

오늘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보십시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뭡니까? 물론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지혜를 얻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눈이 활짝 열려 그 나라를 바라보며 누리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복되고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대통령을 아는 것도 좋고, 국회의원을 아는 것도 좋습니다. 과학을 알고, 문화를 알고, 윤리도덕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고 더 시급한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우리가 진정한 인생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와 거룩을 알게 되고 그래서 세상에서도 평안을 누리고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진정 복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17: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을 때에 영생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박근혜대통령이 18대 대한민국대통령에 취임하며 취임사에서 경제 민주화를 이루고 제2의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국민 행복시대를 열겠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대통령으로서 정말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헌신함으로 어느 정도 국민 행복시대를 열어 갈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사실은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책임질 수도 없고,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고,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고, 아무리 과학이나 문화가 눈부시게 발달해도 참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지 못하고, 인생의 진정한 목적과 가치와 의미를 알지 못해서 그래서 죄와 무지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내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래서 진정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국민행복시대는 요원한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성실하게 진실하게 열심히 살아갈 때에 거기에 행복이 있고 나아가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주의 은혜를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방법과 목적을 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참된 목적과 방법과 방향을 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사람을 사랑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실하게 열심히 진실하게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죄를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면 죄에 대해서도 밝은 눈을 갖게 됩니다. 죄가 무엇인지,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걸 바르게 알고 그래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 때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 사회는 죄에 대하여 점점 눈이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죄 가운데 머물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가 만연되어 있어서 죄에 대한 경계심도 두려움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죄가 양심을 마비시켜 더욱 죄악 속에 빠져 들어가게 하고 그래서 죄에 대한 양심은 더욱 마비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13:1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전해도 알지 못하고, 죄를 깨우쳐 주어도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무지속에서 자행자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는 입에 담기도 그렇지만 요즘 뉴스에 보면 이 땅에 성적인 타락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모릅니다. 성폭행 문제 너무 자주 나오고, 나아가 불륜의 관계도 너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강제성이 없으면 다시 말해 서로 좋아서 하면 뭔 짓을 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아름답게 하나 되어 아름답고 복되고 경건한 가정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하며 그 안에서 사랑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서로 돕고 의지하고 존중하며 귀히 여기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서로 좋아서 엉뚱한 짓을 하면 결혼을 했건 안했건 법적으로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얼마나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얼마나 죄와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예민한 감각으로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세속주의, 물질주의, 개인주의, 인본주의, 이기주의, 외모지상주의, 편의주의, 향락주의, 종교다원주의 등 온갖 왜곡된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세상 속에서 정말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무엇이 진정 우리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가치있게 하고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하는지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며 영적인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정말 영적인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을 갖게 됩니다. 그래야 그런 것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나아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기에 세상의 것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들 때문에 원망 불평 좌절 분노하지 않게 됩니다. 죄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밝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소망가운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하나님과 천국과 세상에 대하여 활짝 열려진 밟은 눈을 가지고 사랑과 기쁨과 은혜와 소망과 평강과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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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봉헌식(섬김관봉헌, 느12:27-30)

 


제목 : 기쁨의 봉헌식

말씀 : 느12:27~30

1.섬김관 건축의 의미

오늘 우리는 우리 교회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섬김관을 건축하고 기쁨으로 입당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봉헌예배는 50주년 기념행사때에 별도로 드리겠지만 오늘 이렇게 섬김관을 건축하고 예배를 드리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또한 이 일을 위하여 수고해 주신 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리고 특별히 이석금 집사님 몸이 성치 못한데도 불구하고 너무 수고 많이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이 일이 작게 보일 수도 있고, 또 실제로 대지의 한계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만큼 흡족한 규모로 짓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50명 교회에서 21평은 500명 교회에서 210평과 동일합니다. 5000명 교회에서 2100평과 동일합니다. 50명 교회에서 2500만원은 500명 교회에서 2억5천만원과 동일합니다. 5,000명교회에서 25억원과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해 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로서는 힘과 뜻을 다해서 지었습니다. 또한 이 건물은 교우들과 이웃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아름다운 목적으로 지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섬김관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건물은 분명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물이 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될 것임을 믿습니다. 섬김관, 말 그대로 성도를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지역사회를 섬기는 용도로 사용할때에 정말 주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 건물은 성도들이 식사를 하고 교제하는 일에 좋은 도구가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앞으로 안마기나 찜질기 등 간단한 헬쓰기구도 들여 놓으면 성도들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장으로도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나아가서 지역주민들을 초청하여 봉사활동을 한다든지 경로잔치를 한다든지 주민들을 섬기는 용도로 사용될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다른 행사나 시찰회의 모임에도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건물을 섬김관이라 명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건물은 분명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큰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20:28절에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러니 이 건물이 성도를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에 사용되는데 주님이 왜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귀한 섬김관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더욱 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 귀한 섬김관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나가는 복음의 귀한 도구로 사용될 것을 믿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섬김관 건축의 의미를 기억하며 앞으로 정말 이 섬김관이 이름 그대로 성도와 교회와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에 귀한 도구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며 힘쓰며 합력함으로 이 귀한 섬김관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고 복음의 역사도 일어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희생과 헌신으로 지어진 성벽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언제나 성도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습니다. 물론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저절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자녀를 낳아 양육하려면 부모님들의 얼마나 많은 희생과 헌신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도 동일합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더 많은 헌신과 희생과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죽지 않으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많은 난관속에서도 총독 느헤미야의 지도하에 예루살렘 성벽 쌓는 일을 마치고 하나님께 봉헌식을 하고 있는 장면 중 일부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성을 쌓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하는 동안 그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느4:3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야 니들이 이제 뭘 하려느냐. 니들이 포로에서 돌아와서 무슨 힘이 있다고 그 일을 하겠느냐, 해봤자 오죽하겠느냐,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거라며 비웃었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느6장에 보면 느헤미야에게 온갖 협박을 하고 더 암살할 음모도 꾸몄습니다. 느6:2절입니다.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그뿐 아니라 내적인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느5:2을 보세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우리 먹고 살기도 힘든데 성벽은 무슨 성벽이냐고 원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얼마나 어렵게 성벽공사를 했는지는 느4:16,17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때로부터 내 수하 사람들의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외부의 적대세력과 싸우기 위하여 한손에는 연장을 한손에는 칼를 들고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숱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거기에 지지 않고 열심히 성벽을 건축하여 기어이 완공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일도 마찬가지만 교회의 일도 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방해꾼들이 있습니다. 우리 섬김관도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힘든 일도 있었습니다. 장소의 문제도 있었고 행정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물론 재정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이석금집사님이 어찌하면 조금이라도 경비를 덜 드려서 잘 이을 수 있을꼬 하는 마음으로 참으로 힘을 다해서 지었습니다. 심지어 몸이 담석이 있어서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병원에 가는 것도 미루고, 하루종일 식사도 못하고 일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섬김관이 아름답게 잘 지어졌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우리의 헌신과 섬김을 통하여 결국 이루어졌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다음 주에 있을 50주년 행사나 앞으로 어떤 일이든지 우리가 같이 힘을 합하여 하면 잘 될 것입니다. 주님이 도우시고 인도하셔서 하게 할 것입니다. 물론 천국에 가기 전까지 문제는 계속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앞으로도 게속해서 마음과 뜻과 힘을 합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겨나가면 반드시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 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계속해서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위하여 조금 어려움이 있더라도 함께 참여해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그 험한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생명의 역사는 결코 우리의 헌신이 없이는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더욱 몸과 마음과 뜻을 합하여 참여해 주 실때에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를 더욱 힘있게 이루어갈 수 있게 되기를 건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찬양과 감사와 기쁨의 봉헌식

여러분, 오늘 섬김관 입당예배를 드리며 우리가 또 기억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섬김관을 감사와 찬양과 기쁨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을 짓고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기뻐하고 얼마나 찬양했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오늘 27절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그러니까 많은 악기를 동원해서 감사와 기쁨으로 찬양하며 봉헌식을 거행하였다는 것입니다.

또 오늘 다 읽어드리지는 못했지만 31절을 보십시오.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을 성벽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둘로 나누어 성벽 위로 대오를 지어 가게 하였는데 한 무리는 오른쪽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간단히 말씀드리면 느헤미야와 유다의 방백들과 찬송하는 사람들이 성벽위로 올라가 양쪽으로 나누어 감사찬송을 하면서 행진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포로에서 돌아와 여러 가지 어려움속에서 심지어 살해의 위협도 받고, 조롱당하고, 그래서 한손에는 병기를 들고 일을 하여 성벽공사를 마쳤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격이 되겠습니까? 그로 인하여 성안에서 안전하게 생활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을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기쁘겠습니까? 그러니 어찌 찬양 안하겠습니까?

우리도 동일합니다. 이 섬김관이 얼마나 기다리던 섬김관입니까? 저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섬김관 정말 다시 짓고 싶었습니다. 겉보기에도 너무 초라하고 협소하고 섬기는 일에 사용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이 일을 주장하였습니다. 과정에서 어떤 분들을 그 필요성을 별로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같이 이렇게 이루어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더 아름답고 효율적으로 섬기는 일과 교제하는 일과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사용 될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와 섬김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복음의 역사도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귀한 섬김관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정말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섬김관을 짓는 일에 헌신적인 수고를 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교회를 섬기고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에 더욱 한마음이 한뜻이 되어 참여 해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귀한 섬김관을 도구로 잘 활용하여 성도와 교회와 지역사회를 잘 섬겨나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 가기를 바랍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더욱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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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예배 ] 늘 섬기는 자세로 살자

 

 

 

 제  목 : 늘 섬기는 자세로 살자

 구  절 : 막 10:45

 찬송 : 512장

 묵상 : 잠언 10장29-30절(구약 920쪽)

 사도신경고백

 찬송 : 3484장

 기도 : 가족중

 

 본문: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장45절 말씀)


 말씀:성도의 삶은 섬기는 삶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의 삶을

본받고 생활에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
 

야 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깁니다. 또한 십일조와 물질

을 드려서 하나님을 섬기고  온갖 봉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

는 자도 거기 있으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

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육체를 섬기고 이 세상 쾌락을 섬기고 돈을 섬기고 권력을 섬기

고 마귀를 섬깁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을 삶의 중

심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가복음9장35 절은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0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

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23장11절에서 12절은 [너희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

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교회에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는 장로 와

그 외에 모든  성도들을 섬겨야 되고 장로는 권사  안수집사 서리 집사 등

모든 성도들을 섬겨야 됩니다.  교회에서 직분이 높으면 높을 수록 낮아져

서 남을 섬기는 것이 참된 우리의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깁니다. 오

 세계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인류를 섬긴 사람의 이름이 위대하게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

고 이 땅에 살면서 이웃을 뜨겁게 섬긴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서 그

이름이 영원히 빛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과 교회와 직장및 사회생활에

서 섬기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말

고 아내를 섬기고 아내도 남편을 섬기고, 자식은 부모를 섬기고 부모는 자

식을 섬겨야  합니다. 회사에서 사장은 사원들을  섬기고 사원들은 사장을

섬기는, 서로서로 섬기는 삶을 살 때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행복한 공동체

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 : 섬기러 오신 주님.  저희도 주님을 본받아 섬기는 삶을 살고 이를

통해 하늘나라를 확장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

멘.


 통성기도 : 나라와 민족을 위해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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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 설교 (Sunday sermon)

 

 

 

 

제목:마음의 눈을 밝히소서.

성경:엡1:17-19

 


1.천국을 확실히 보아야 합니다.

 

부산의 한 변두리 달동네에 신실한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권사님은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시장 한 모퉁이 좌판에서 장사를 하며 오직 하나님과 두 아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고 육체적으로 고달픈 삶을 살았지만 그는 감사하며 자녀들을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였습니다. 이런 권사님의 신실한 믿음을 보셨는지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복을 주셔서 자녀들이 훌륭하게 성장하여 큰 아들은 중소기업 대표가 되었고, 둘째 아들은 대기업 이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그렇게 희생하신 어머니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커다란 아파트를 드리려고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그 달동네의 낡고 작은 집을 고집하며 한사코 만류했습니다.

그러자 두 아들은 정 다른 데로 이사 가시는 게 싫으면 어머니께서 사시던 이 동네에다 새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 웬일인지 쉽게 허락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단 몇가지 조건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들이 뭐든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해드리겠다고 하자 권사님이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내 집을 지어주고 싶으면 이렇게 해라. 먼저 주춧돌은 열 두개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짓되 주춧돌은 모두 다른 보석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둥은 다이아몬드로 하고 벽은 황금으로 하라. 마루에는 자수정으로 깔고, 담장도 황금으로 할 것이며, 대문도 열두개로 하되 모두 진주로 해야 하고, 담장 밖에는 유리알 같은 시냇물이 흐르고, 그 강가에는 다달이 실과가 맻히게 할 것이며, 집으로 들어오는 도로도 모두 황금으로 포장을 하거라.”

그러자 두 아들은 깜짝 놀라며 ‘에이 어머님,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런 집을 어떻게 짓습니까?’ 그랬더니 권사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래, 너희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그런 집을 준비해 두셨단다. 나는 머잖아 그곳으로 이사를 갈 것이다. 그러니 그런 집을 지어주지 못할 바에야 그만 두고 그 돈으로 정말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나 더 도와 주거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크리스천이라면 적어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이루어질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누구도 해 줄 수 없는 이런 영광스러운 저택을 준비해 두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장차 반드시 이런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런 영광을 누릴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그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까짓 세상 것 때문에 염려 근심 질투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얽매어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보십시오. 마음의 눈을 밝히 떠서 무엇을 보라고 하였습니까?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은 무엇이고,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입니까? 물론 영원한 영광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이런 영광의 나라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서도 소망가운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은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저 천국의 한량없이 풍성한 영광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영광의 기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영광의 기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영광은 한량이 없습니다. 영원무궁합니다. 조금치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도 이 영광의 기업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소망가운데 살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천국의 그 아름다움과 영광을 알지 못해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무슨 철학적 신학적 과학적 이성적하면서 쩍쩍하면 유식한 줄 알고, 천국이나 지옥 이야기를 하면 유치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공자가 어떻고 맹자가 어떻고 소크라테스가 어떻고 하면 그럴듯하게 여기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하면 시큰둥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거 큰일 날 징조입니다. 세상이 그만큼 인본주의에 흠뻑 빠져 들어있다는 증거입니다. 눈이 어두워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철학이나 과학이나 정치나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신학조차도 관심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심오한 철학을 가르치려고 오신 것도 아니고, 그저 윤리적 도덕적으로 조금 고상한 삶을 살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원하여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눅19:10절에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이상향이 아니라 실재의 장소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고라도 반드시 사 들여야할 가장 소중한 보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이 사실을 기억하며 정말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가운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덧입어 영의 눈을 활짝뜨고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저 영광스러운 천국을 확실히 보는 가운데 세상의 작은 것들에게 얽매이지도 말고, 그것 때문에 낙심이나 좌절이나 원망이나 불평도 말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소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확실히 선명하게 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영적인 밝고 환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가 밝히 보이고 천국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어떤 길거리에 매일 더럽고 해어진 옷을 입고 다 낡아빠진 검은 안경을 쓰고 지팡이를 더듬거리면서 나와서 깡통을 앞에 놓고 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구걸을 하며 먹고사는 맹인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불쌍하고 초라한 행색으로 길거리에 앉아 구걸을 하는데 그날따라 많은 사람들이 동정을 베풀어 제법 많은 천원짜리 지폐들이 깡통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한 소년이 걸인의 곁에서 서성거리더니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걸인 앞에 놓여 있는 깡통을 들고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맹인 거지가 벌떡 일어나더니만 소년을 향해 날쌔게 쫓아가더니 금방 붙잡고는 숨을 헐떡이며 ‘이런 고얀 녀석 같으니라구, 앞길이 창창한 녀석이 어디가서 일을 도와주고 살든지 할 것이지 할 짓이 없어 남의 것을 훔쳐 먹고 사느냐 이 놈아,’하면서 발길로 막 차고 두들겨 패고는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걸인은 맹인 행세를 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두 눈이 멀쩡한데 일하기가 싫어서 맹인 행세를 하며 빌어먹고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이 진짜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의 눈은 뜨고 있지만 인생의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과 목적을 알지 못하는 불쌍한 마음의 맹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육신의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은 떴으나 진짜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보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저 돈만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도 있고 세상의 나쁜 것만 보면서 원망과 불평과 투기와 향락과 죄악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해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보지 못하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밝은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도 눈이 밝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의 눈, 영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인간과 이 아름다운 세상과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감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은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18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우리가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밝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보고 천국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보며 감사와 기쁨과 소망으로 빛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마6:22,2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하겠느냐? 네 눈이 감겨져 진리를 보지 못하고,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한다면 네 인생이 얼마나 어두운 인생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밝은 눈, 아름다운 눈, 깨끗한 눈, 믿음의 눈을 가지고 진리의 빛, 생명의 빛, 은혜의 빛을 듬뿍 받아들이면 우리 인생이 해와 같이 빛나는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물론 육신의 눈도 밝아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의 눈, 영적인 눈을 크게 뜨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지식이나 물질에도 밝아야 하겠지만 하나님 나라에 더 밝은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지식의 눈, 과학의 눈도 밝아야 하겠지만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이 더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진장으로 제공해 주시는 생명의 빛을 듬뿍 받아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3.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올바른 눈을 가지려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때만이 우리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 밝아져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달려가 그 안에 있는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진리이신데, 생명이신데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어떻게 진리를 알겠으며, 생명을 알겠습니까?

오늘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보십시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뭡니까? 물론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지혜를 얻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눈이 활짝 열려 그 나라를 바라보며 누리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복되고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대통령을 아는 것도 좋고, 국회의원을 아는 것도 좋습니다. 과학을 알고, 문화를 알고, 윤리도덕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고 더 시급한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우리가 진정한 인생의 목적과 의미와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선과 진리와 거룩을 알게 되고 그래서 세상에서도 평안을 누리고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진정 복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17:3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을 때에 영생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박근혜대통령이 18대 대한민국대통령에 취임하며 취임사에서 경제 민주화를 이루고 제2의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국민 행복시대를 열겠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대통령으로서 정말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헌신함으로 어느 정도 국민 행복시대를 열어 갈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사실은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책임질 수도 없고,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고,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고, 아무리 과학이나 문화가 눈부시게 발달해도 참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지 못하고, 인생의 진정한 목적과 가치와 의미를 알지 못해서 그래서 죄와 무지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내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래서 진정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국민행복시대는 요원한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성실하게 진실하게 열심히 살아갈 때에 거기에 행복이 있고 나아가서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주의 은혜를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방법과 목적을 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참된 목적과 방법과 방향을 바르게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사람을 사랑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실하게 열심히 진실하게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죄를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면 죄에 대해서도 밝은 눈을 갖게 됩니다. 죄가 무엇인지,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걸 바르게 알고 그래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 때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 사회는 죄에 대하여 점점 눈이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죄 가운데 머물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가 만연되어 있어서 죄에 대한 경계심도 두려움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죄가 양심을 마비시켜 더욱 죄악 속에 빠져 들어가게 하고 그래서 죄에 대한 양심은 더욱 마비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13:1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전해도 알지 못하고, 죄를 깨우쳐 주어도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무지속에서 자행자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는 입에 담기도 그렇지만 요즘 뉴스에 보면 이 땅에 성적인 타락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모릅니다. 성폭행 문제 너무 자주 나오고, 나아가 불륜의 관계도 너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강제성이 없으면 다시 말해 서로 좋아서 하면 뭔 짓을 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몸과 마음과 영혼이 아름답게 하나 되어 아름답고 복되고 경건한 가정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하며 그 안에서 사랑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서로 돕고 의지하고 존중하며 귀히 여기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서로 좋아서 엉뚱한 짓을 하면 결혼을 했건 안했건 법적으로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얼마나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얼마나 죄와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예민한 감각으로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세속주의, 물질주의, 개인주의, 인본주의, 이기주의, 외모지상주의, 편의주의, 향락주의, 종교다원주의 등 온갖 왜곡된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세상 속에서 정말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무엇이 진정 우리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가치있게 하고 진정한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하는지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며 영적인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정말 영적인 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분별력과 판단력을 갖게 됩니다. 그래야 그런 것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나아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기에 세상의 것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들 때문에 원망 불평 좌절 분노하지 않게 됩니다. 죄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밝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소망가운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하나님과 천국과 세상에 대하여 활짝 열려진 밟은 눈을 가지고 사랑과 기쁨과 은혜와 소망과 평강과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조학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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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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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예배설교]인생의 완전한 보험

 

 


제목 : 인생의 완전한 보험

 

말씀 : 잠3:5~8

 

1.하나님만이 완전하고 영원한 보호자이시다.

사람이란 어차피 무엇인가를 의지하여 살 수 밖에 없다. 돈이나 권력이나 건강이나 능력이나 지식이나 사람이나 여하튼 무엇인가를 의지하여 산다. 이런 것들과 관계없이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을 찾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의지해서 산다. 돈만 있으면 아무 걱정없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나 믿고 산다. 몸만 건강하면 문제없다고 여긴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믿고 산다. 그래서 권력을 추구하며 권력자를 가까이하며 그것을 든든한 백으로 여기고 산다. 어떤 사람은 지식을 의지해서 산다. 지식이 많으면 인생이 풍요로워 질 것이라고 여기며 죽자사자 지식을 추구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그런 것들이 우리를 얼마나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을까? 얼마나 확실한 보험이 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 그런 것들은 결코 완전한 보험이 될 수 없다. 우리를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다. 길어봐야 100년이다. 그나마 그 100년 동안도 우리를 완전하게 지켜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까? 물어 보나마나 하나님이시다. 완전한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생명이신 하나님만이 우리를 완전하게 지켜줄 수 있다. 완전하고 영원한 보험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오늘 5절에서는 말씀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인간의 명철 즉 인간의 지혜, 지식, 능력, 과학, 돈 그 어떤 것이든 인간에게 속한 것은 온전치 못하다는 것이다. 그런 온전치 못한 것을 의지하고 살면 그 온전치 못한 것과 함께 망한다는 것이다. 완전한 능력과 지혜와 구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 때 영원한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을 바라보며 그것을 의지하며 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말라. 진정한 생명과 길과 진리와 능력과 은혜와 구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인도하심을 따라 살라. 그리하여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

2.마음을 다하여 의지해야 한다.

앞서 말씀드린 5절을 다시보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데 어떻게 의지하느냐하면 마음을 다해서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마음은 「마음, 정신, 이해력, 의지, 중심」등의 의미이다. 또한 다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총동원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마음과 정신과 의지와 지식과 이성과 육체의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맡기고 의지한다는 것은 우리의 전 인격을 드리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부부간에 서로 믿고 의지한다면 모든 영역을 믿고 신뢰해야 한다. 만약 돈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몸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시간을 맡기지 않는다면 온전한 믿음의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동일하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영혼도 감정도 육신도 물질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이것이 마음을 다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그렇지를 못하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감정과 지식과 이성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할 때가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의 지식과 이성과 감정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물질적인 것은 맡기지 못하여 하나님께 올바르게 드리지 못할 때가 있다. 또 시간적으로도 온전히 맡기지 못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시간을 드리지 못할 때가 있다.

사실 이런 모습들은 어불성설이다.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이성과 지식과 상황과 조건과 세상풍조와 물질과 권세와 명예를 더 신뢰하며 그것을 따라 살겠는가? 정말로 믿는다면 그런 것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신뢰이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전적으로 책임져 주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맛보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인생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을 믿고 따라감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풍성하게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3.오직 하나님 편을 택해야 한다.

또 이 말씀 5절에서는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 아닌가? 우리는 결국 더 지혜롭고 더 유익이 되고 더 기쁨이 된다고 여기는 것을 따라가게 되어 있다. 그런데 만약 내 명철을 의지한다면 내 명철이 하나님보다 더 현명하고 지혜롭고 생명의 기쁨을 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닌가? 그래가지고서야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따르겠는가?

마6:24절을 보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만약 내 명철을 의지하여 산다면 내가 주인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내 명철을 따라산다면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경히 여기는 행위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의지해야 한다. 자기 자신이냐 하나님이냐, 돈이냐 하나님이냐, 권력이냐 하나님이냐, 과학이냐 하나님이냐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다. 너무 극단적인 흑백 논리가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실제로도 만약 세상의 것을 더 섬긴다면 그건 분명히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자기 자신보다 하나님 편을 택해야 한다. 이유는 당연하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인간은 무능하며, 하나님은 전지하시지만 인간은 한계가 있고, 하나님은 영화로우시지만 인간은 비천하며, 하나님은 지혜로우시지만 인간은 미련하고, 하나님은 거룩하시지만 인간은 죄로 오염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이시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하며, 하나님은 영원하시지만 세상의 것은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자기 지식과 자기 경험과 자기 능력과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온전히 하나님께 매달리자. 그렇게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님과 동행할 때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이 되자.

4.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

본문 6절에 보면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했다. 범사라는 말이 우리말 성경에는 한단어로 되어 있지만 원문성경에는 범과 사가 각각 다른 단어로 되어있다. ‘범’은 ‘모두, 전체, 완전함’을 의미하며, ‘사’는 ‘길, 도로, 여행, 태도, 습관, 인생행로, 행위, 일, 일의 방식’ 등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범사란 영적, 물질적, 정신적, 육체적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삶 전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을 말하는 것이다. 또 인정한다는 것은 ‘알다, 이해하다’라는 뜻으로 경험해서 이해하여 완전히 수긍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완전히 경험을 해서 아, 정말 그렇구나. 확실하구나 하고 온전히 수긍하고 그래서 그것을 따라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을 경험해서 안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모든 것이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월등하신 하나님, 세상의 돈이나 명예와나 권력과도 비교 할 수 없는 완전한 능력이신 하나님, 모든 영역에서 완전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나의 생명과 영원을 책임져 주실 하나님, 이 하나님을 안다면 어찌 그 하나님을 따르지 않겠나?

그러므로 정말 하나님을 경험하여 알라. 그 앞에 진실로 엎드리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그래서 그 완전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 진리이신 하나님, 영원한 승리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만나 경험하여 알라. 그래서 모든 영역에서 온전히 하나님을 인정하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 그 안에 생명과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라. 그 방법이 옳음을 인정하라. 그리하여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가치기준이 어떻게 달라져도, 상황이 어떻게 변해도, 심지어는 교회가 어떻게 변해간다해도 오직 하나님만을 유일한 잣대로 삼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생명을 온전히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자.

5.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받는 복

오늘 본문 6절 하반절에 보면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하셨다. 인간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바로 알아,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범사에 그를 인정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은혜로 우리의 길을 이끌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하고 그래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8절에서는 말씀한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 편을 택하여 주님과 동행할 때에 골수가 윤택해지는 즉 몸과 마음과 영혼이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즉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복된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당연하지 않는가? 하나님 앞에 생명이 있는데, 하나님이 길이요 진리인데, 하나님의 모든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의 근원이신데 그를 따르는 자에게 어찌 이런 은총이 없겠는가?

그렇다. 오직 하나님만이 전능하시며 전지하시며 생명과 사랑과 능력의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그분만이 우리의 완전한 목자요, 선한 목자이시다. 우리의 명철이나 경험이나 지식이나 물질이나 과학이나 이런 것들은 다 불완전한 것들이다. 다 연약하고 부족하고 한계가 있고 곧 사라질 것들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의지하라. 전인격을 동원하여 의지하라. 부분적으로 하지 말고, 취사선택해서 하지 말고, 어느 한 영역만을 맡기지 말고 전영역을 다 맡겨라.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정하라. 그리고 그를 따르라. 그리하여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의 지도하심가운데 인생의 발걸음을 옮겨 놓을 때에 하나님 안에서 풍성한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은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출처] 인생의 완전한 보험(잠3:5-8)|작성자 학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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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성도는 최고의 신사 (Sunday preaching)

 

 

 

 


말씀 : 행17:10-15

제목 : 신사적인 그리스도인

 

1.성도는 최고의 신사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지상 최고의 신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슨 몇백만원 몇천만원하는 명품 옷이나 시계나 구두를 신고 번쩍번쩍 빛나는 고급 세단차를 몰고 다니는 그런 신사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영혼과 인격과 정신과 생각과 가치관이 신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원래 신사 즉 gentleman은 ‘가문이 좋은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문으로도 큰 띠 紳, 선비 士자를 써서 옛날 중국에서 예복을 입고 큰 띠를 맨 고위직에 있는 선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사란 본래 높은 지식과 인격과 품위를 가지고 있는 높은 신분의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누굽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보다 고귀한 신분이 어디 있습니까? 또한 우리는 하나님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사람들입니다. 이 보다 높고 고상한 지식이 어디 있습니까? 또한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원수조차 사랑하라는 최고의 윤리 강령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세상의 그 어떤 사람들보다 높고 고상하고 영광스러운 신분과 지식과 윤리강령을 가진 사람이므로 마땅히 최고의 신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벧전2: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인데 거지같은 인생을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거룩한 나라의 백성인데 속되고 추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니 그 고귀한 신분에 걸맞게 고상하고 품위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얼마나 존귀하고 거룩한 존재인지 기억하며 몸과 마음과 말과 행동과 영혼이 거룩하고 깨끗하고 품위 있고 단정한 참 신사다운 삶의 모습으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존중받으며 주의 은총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신사다운 면모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1절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너그러워서’라는 말씀은 본래 ‘고귀한 혈통의, 마음이 고상한’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에 쓰던 개역성경에서는 이 말씀을 ‘신사적이어서’라고 번역하였는데 이 말이 원어의 뜻에 훨씬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기에 신사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2.고상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들을 신사적이라고 평가한 것은 우선 그들은 고상한 인격을 가지고 있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앞에서 본 11절 말씀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들은 너그러워 즉 고상하여 말씀을 잘 받아들였다. 그리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속되고 추하고 더러운 것들에는 관심이 없고, 고상한 진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순전하고 고상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베뢰아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신사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상한 마음, 신사적인 마음,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의 돈이나 일이나 향락이나 이런 세속적인 것들로 가득차 있으면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받지도 않고 설령 받는다해도 결코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13장에서 사람의 마음을 네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길가와 같은 마음인데 이런 마음은 완고하고 강퍅하여 죽어도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제 고집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씨알머리도 먹히지 않습니다. 다음에는 돌밭과 같은 마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마음은 말씀을 받기는 받는데 건성으로 받아 말씀이 심비에 새겨지지 않음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면 실족해 버리는 마음입니다. 다음에는 가시떨기 밭과 같은 마음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 마음은 말씀을 받기는 한 것 같은데 마음속에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욕심이나 향락이나 이런 온갖 잡동사니들로 가득차 있어서 말씀의 씨앗이 싹이 터서 조금 자라다가 세상 것에 묻혀서 결실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마치 곡식이 잡초 속에 떨어져 겨우 싹을 내긴 했으나 잡초에 묻혀 아무런 결실도 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마음이 고상하여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씨앗이 잘 싹이 트고 자라나 30배, 60배, 100백의 결실을 맺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바로 신사적인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네 종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애굽왕 바로는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끝까지 완고하고 강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다가 끝내 열가지 재앙을 당하고 전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는 비극을 만났습니다. 가룟 유다는 가시떨기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재물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까지 팔아 넘겼고,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사람으로서 듣지 못할 소리를 들었고, 결국 비참한 자살로 최후를 마치고 말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가시떨기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재물을 탐을 내다가 부부가 함께 죽는 비참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데마라는 사람은 처음에는 바울을 따라 다니며 열심히 믿음 생활하는 것 같았으나 믿음의 뿌리가 없어 바울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 결국 천국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반면에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지난 시간에 함께 보았던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는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하여 베드로사도를 초청한 다음에 온 가족과 친척과 친구까지 초청해서 모아 놓고 기다리다가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러 오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모셔 들여 겸손히 말씀을 받음으로 온가족과 친척과 친구까지 구원받게 하였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도록 그물질을 하였으나 피라미 새끼 한 마리 잡지 못하고 지치고 곤한 몸으로 돌아와 항구에 배를 대고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오셔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어부인 베드로의 지식이나 경험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말씀이었습니다. 고기는 주로 호수의 가장자리 근방에서 잡히지 가운데 깊은 곳에서는 잘 잡히지 않습니다. 게다가 해가 중천에 떠오른 지금은 고기가 잡히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헛그물질을 했기에 지칠대로 지쳐 이제는 그물질 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까지 별거 아닌 자신의 경험과 이성과 지식을 다 내려놓고 ‘주여,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했으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여러분, 저는 농사도 잘 모르고, 여러분의 직장이나 경영하는 사업장의 상황이 어떤지 솔직히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농사를 짓는 일이나 직장생활하는 일이나 사업장을 경영하는 일에도 제 말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언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각론에 들어가서는 여러분의 경험과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되 근본적인 원칙은 반드시 제말대로 하십시오. 겸손히 저의 말을 받아들이십시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배격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겸손히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의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방법은 여러분들보다 만배 억배 수백 수천억배 더 좋고 더 크십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안에 성공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 안에 풍성함이 있습니다. 오직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그 방법을 따르는 자들에게 인생의 배가 가득 차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강퍅하고 완고하고 가시덤불같은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그 알량한 지식과 이성과 경험만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밤새도록 아니 죽을 때까지 수고해봐야 결국은 헛그물질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오늘 베뢰아 사람들처럼 옥토와 같은 마음, 고상한 마음, 신사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여러분 인생의 배가 만선을 이루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여러분, 베뢰아 사람들은 이렇게 고상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또 어떻게 하였다고 하였습니까? 앞에서 본 11절 다시 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러한가하여’라는 말씀은 성경이 정말 그런지 아닌지 의심하며 읽었다는 뜻이 아니라 정말 예수님이 누구신지, 참된 진리와 생명이 무엇인지, 진정 인생이 나아갈 방향이 어디인지 알기 위하여 성경을 날마다 상고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2절입니다.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그렇게 성경을 상고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처음에 바울에게 들었을 때는 겸손하고 고상한 마음으로 그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 다음에는 이 고상한 진리의 말씀을 더욱 바르게 자세히 확실하게 알기 위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바르게 깨닫고, 주님의 음성을 분명히 듣게 되었고,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분명히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일단은 겸손하고 순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다음에는 열심히 말씀을 상고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재림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분명하게 알려주시고 믿게 하시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정말 어디에 생명이 있는지, 무엇이 복을 받는 길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히 알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최고의 신사다운 면모를 가지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말씀을 받지도 않고, 설령 받았다해도 간절하 마음으로 상고도 하지 않으면 길가와 같은 마음, 돌밭과 같은 마음,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과 고집과 이성과 경험을 따라 살게 되고, 그러면 결코 신사와 같은 인생도, 성공한 인생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초라하고 추하고 자부심도 긍지심도 가치도 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열심히 상고하면 진실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가운데 살게 됩니다. 성공한 인생, 멋있는 인생, 신사중의 신사와 같은 인생, 주께 영광 돌리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겸손히 말씀을 받고 열심히 상고함으로 주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며 신사다운 신사의 삶을 살아감으로 빛과 같이 빛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믿음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짜 신사는 진리를 끝까지 지키는 사람입니다. 죄와 악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쉽게 불의에 굴복하고 죄와 야합하고, 세상과 짝하며 추하고 아름답지 못한 것들과 벗하며 지내면 신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도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짧은 신앙경륜에도 불구하고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믿음을 지킬뿐더러 바울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14,15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무슨 말씀이냐하면 바울은 베뢰아에 오기 전에 데살로니가에 있었는데 유대인들이 불량배들을 시켜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을 모함하여 체포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간신히 보석금을 주고 풀려나긴 했지만 더 이상 그곳에서 전도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 이곳 베뢰아로 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와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이 전도는커녕 도리어 신변이 위험해지자 예수님을 영접한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일행을 아덴까지 안전하게 피신시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믿게 된지 불과 한 두달내지는 몇 달 밖에 안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많은 군중을 선동하여 바울을 무슨 이단자나 사이비 집단으로 몰아간다면 혼란에 빠지고 미혹당하기 쉬운 때였습니다.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이런 위협과 유혹과 핍박이 있으면 교회를 떠나거나 아니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숨어있기 십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베뢰아 사람들은 그 짧은 신앙연륜에도 불구하고 그런 위협과 공갈과 유혹과 핍박 앞에 무릎 꿇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들은 겸손하고 고상한 마음으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였기 때문에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킬 뿐만 아니라 위험을 무릎쓰고 바울일행을 안전하게 아덴까지 피신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신사적인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났을 때 부인하고 도망가고 숨는다면 그게 무슨 신사이겠습니까? 조금 손해볼 것 같으면 진리를 팔아버린다면 그게 무슨 신사겠습니까? 베뢰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짧은 신앙연륜에도 자신들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키는 것은 물론 바울일행까지 안전하게 피신시켜주는 신사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신사다운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고귀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그런데 조금 힘들다고 진리를 버리겠습니까? 어떻게 조그마한 물질적 이익을 위하여 신앙양심을 팔아먹겠습니까? 어떻게 죄의 세력에 굴복하고 더럽고 추하고 거룩하지 못한 것들과 야합하며 친구가 되겠습니까? 그래가지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영화로우시고 거룩하신 주님의 자녀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저와 여러분은 진정 신사다운 크리스천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고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열심히 상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의 온전한 관계속에서 내 생각, 고집, 이성, 경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세상의 모든 죄나 악이나 더럽고 추하고 속된 것들에게 지지 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오직 믿음안에서 예수님을 따라 거룩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귀한 신분에 어울리는 신사 중의 신사적인 모습으로 주의 영광 나타내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받고 존경받고 인정받으며 주님의 은총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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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윤택한 영혼을 위하여

 

 

 

말씀 : 갈2:19~21

제목 : 영혼을 윤택함을 위하여

 

1.진리 안에서의 갈등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마음이 무겁고 갈등과 고민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초신자들은 공연히 교회에 나와서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차라리 아예 하나님도 모르고 말씀도 듣지 않았더라면 부담없이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텐데 공연히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말씀 듣고 보니까 부담만 되고, 걱정이 되고, 갈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일을 잘 하지 못하는 것도 부담이 되고, 이웃을 섬기지 못해서 마음이 무겁고, 때로는 주일날도 가족들하고 어디 나들이나 다녀오고 싶은데 그것도 맘대로 못하고, 헌금생활 제대로 못하는 것도 마음이 무겁고 그렇다고 또 하자니 돈이 아깝고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과 고민이 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 여러분에게 이런 고민과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의 감각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고민과 갈등이 없다면 그 영혼은 완전히 죽어서 감각이 없는 영혼인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은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육신이 시키는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놀고 싶으면 놀고, 아무거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도 고민도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도덕적 감각이 완전히 죽어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도적질을 하고도 오늘 한건 했다며 먹고 마시고 즐깁니다. 사기꾼들은 사기 쳐서 돈을 빼앗고는 기분이 좋아서 낄낄 거립니다. 마약에 취한 사람은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좋다고 희희낙락합니다. 술에 취하면 죄를 짓는데 용감해 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덕성이 마비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양심이 죽어서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때리고 차고 꼬집고 별짓을 다해도 아픈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죄짓고 제멋대로 살아가면서도 고민이 없습니다. 희희낙락합니다. 제 마음대로 살아가면서 나는 자유하다, 평안하다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아픔이 있습니다.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은 죄를 지으면 아픕니다. 조그마한 죄에도 통증을 느낍니다. 그러나 죽은 것은 아픔이 없습니다. 죄를 짓고도 뻔뻔합니다. 그래서 영혼과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저 육의 욕구를 따라 살면 되었지만 예수님 믿고 영혼이 살아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한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도 옛 자아가 남아서 자꾸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도록 충동질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주인이었기 때문에 내 맘대로 살면서 아무 갈등과 고민 없이 마음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새주인이신 예수님을 모셔들이고 예수님이 이끄시는대로 살아가려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내가 주인 노릇하던 그 행세가 남아 있어서 자꾸만 육의 욕망을 따라 가려고 할 때가 많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진리 때문에 겪는 고민과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요, 진리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갈등과 고민이 우리를 더욱 하나님 앞에 세움으로 성화의 길을 가게 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좀 더 풍성하게 누리게 하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후7:10절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지만 그 죄인중에 괴수라는 인식이 자신을 더욱 하나님 앞에 가까이 세우게 함으로써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던 신앙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신앙생활하면서 진리 때문에 겪는 갈등과 고민이 있을 때, 내가 정말 너무 부족하고 미련하고 죄많은 인생이라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 너무 죄송스럽고 마음에 부담이 되고 갈등이 생길 때 너무 낙심하고 탄식하고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책하고 탄식하고 낙심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더 주저앉힐 뿐입니다. 힘을 빼놓고 무기력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은 하납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래서 갈등과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으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은혜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점점 성화되어가고 그러면 점차 그런 갈등과 고민도 최소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고민과 갈등보다는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훨씬 크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과 참 자유가운데 할렐루야 찬양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하면 좀 더 성화되어 주님과의 갈등을 최소화시켜 주님의 은혜들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을까요?

2.속사람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갈등과 고민을 이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우리를 그렇게 고민과 갈등과 죄속으로 몰아가는 옛자아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자아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속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자아보다 새 자아가 힘이 훨씬 세면 우리는 옛자아에게 질질 끌려다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자아보다 옛자아가 힘이 세면 옛자아에게 질질 끌려다니니까 우리의 삶이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한 인디언 노인이 손자에게 말했었습니다. “얘야, 사람의 마음속에는 늘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단다. 한 마리는 악마 같은 놈으로 늘 거짓과 미움과 도적질과 향락과 음란과 분노와 질투와 탐욕과 교만 등의 악한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나쁜 길로 내몰려고 하고, 다른 한 마리는 착한 늑대로써 믿음과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희망과 친절과 선함과 겸손과 진실과 용서 쪽으로 우리를 끌고 가려고 하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와 같이 나쁜 늑대와 좋은 늑대가 들어 있어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단다.”

그러자 손자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그러면 좋은 늑대와 나쁜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기나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그야 사람이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기지!” 그러니까 나쁜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나쁜 늑대가 힘이 세져서 이기고, 좋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좋은 늑대가 힘을 얻어서 나쁜 늑대를 굴복시킨다는 것이지요. 힘이 센 놈이 이기는 것은 당연한 거지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 믿고 예수님을 새 주인으로 모셔들이더라도 지금까지 우리를 완전히 지배해왔던 이 나쁜 늑대인 옛자아가 완전히 물러가지 않아서 자꾸만 새자아에게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나쁜 늑대인 옛자아를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 나쁜 옛자아를 이기려면 새자아를 강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3:16절에서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속 사람을 강건케 하라. 그래야 너희가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왜곡된 사상들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쁜 늑대의 힘을 약하게 만들고, 좋은 늑대를 힘이 강하게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육체를 강건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육신에 필요한 영양분을 듬뿍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하면 됩니다.

영혼의 강건함도 동일합니다. 영적인 좋은 양식을 충분히 섭취하고 영적으로 열심히 훈련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쁜 늑대인 옛 자아에게는 먹이를 주지 말고, 좋은 늑대에게만 먹이를 주고 그 좋은 늑대가 열심히 움직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쁜 늑대는 점점 힘을 못쓰게 되고, 완전히 먹이를 끊어 버리면 굶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좋은 늑대인 새자아에게는 영양가 있는 풍성한 양식을 충분하게 공급해 주면 살이찌고 생명력이 풍성해지고 힘이 세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양식만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영양가 있는 양식을 듬뿍주고 열심히 운동을 시켜야 근육이 튼튼해져 힘이 세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자아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듬뿍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시키면 힘이 세져 바짝 말라서 힘없는 옛자아 따위는 단숨에 때려 눕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쁜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무엇이고, 좋은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무엇입니까? 물론 영적, 정신적 양식입니다. 나쁜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이런 것들입니다. 맨날 싸우고 죽이고 빼앗는 폭력적인 오락을 즐기거나 그런 폭력적이고 음란한 영화를 보고, 술집이나 도박장을 기웃거리고, 거짓되고 속되고 우상숭배와 저속하고 더러운 말을 일삼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등이 모두 못된 늑대가 좋아하는 먹이인 것입니다.

반대로 책을 읽어도 건전한 교양도서를 읽고, 아름다운 사랑과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줄수 있는 영화를 보고, 믿음의 사람들, 선한 사람들, 진실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좋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확실한 영혼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것은 우리 영혼을 살리는 확실한 양식입니다. 기도하며 찬양하며 믿음 안에서 아름답게 교제하는 것도 우리 영혼을 살찌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생명력이 넘치게 하는 귀한 양식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전도를 하고 이웃을 돕고 선을 행하는 것은 좋은 늑대를 열심히 운동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의 양식을 먹고, 세상에서도 아름답고 선한 것들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며 선을 행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좋은 늑대에 양식을 풍성하게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시키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100%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아가 옛자아를 이겨 거룩하고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꾸만 옛자아에게 먹이를 주고 새자아는 거의 굶다시피 한다면 보나마나 옛자아가 새자아보다 힘이 세니까 옛자아에게 져서 질질 끌려다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6:55절에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생수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우리 심령에 모셔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잘 안하니까 영양실조에 걸려 새자아가 맥을 못추는 것입니다. 자꾸만 세상의 헛된 양식만을 사모하며 그것만을 쫓아다니니까 옛자아는 기세등등하고, 새자아는 빈약하기 짝이 없어 옛자아 앞에서 기도 못펴고 초라한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시편1:1-3절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양식을 잡수시기 바랍니다. 억지로라도 잡수시기 바랍니다. 살기 위해서 잡수시기 바랍니다. 밥맛이 없을 때 살기 위해서라도, 힘을 내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억지로라도 먹고 영적인 운동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몸을 안 움직이면 몸이 자꾸 약해집니다. 아예 안 움직이면 온 몸이 굳어서 꼼짝도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움직이기 싫어도 자꾸 움직여야 합니다. 운동하기 힘들고 귀찮아도 자꾸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몸이 힘을 쓰는 것입니다.

새 자아도 그렇습니다. 억지로라도 먹어야 합니다. 귀찮아도 먹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영적인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자아가 강해집니다. 힘이 세집니다. 그래서 옛자아를 이깁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양식, 생명의 양식을 열심히 먹고, 열심히 영적인 활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속에 있는 새 자아, 영혼, 좋은 늑대가 토실토실 살이찌고 강건해지고 생명력이 넘침으로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전해오는 옛자아를 단숨에 눕혀 버리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예수님을 완전한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속사람을 강건케하여 옛자아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듣고 선하고 좋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열심히 참여해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변화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런 과정에서 예수님이 내안에 온전히 들어오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런 지혜와 능력과 은혜를 달라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세울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드디어 예수님이 완전히 우리 가운데 들어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진리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자아란 놈이 감히 준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악바리 같은 옛자아가 대들긴 하겠지만 그러나 한방에 K.O. 시켜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옛자아가 우리 가운데 온갖 유혹과 정욕과 탐심을 불러 일으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고 협박도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면 옛자아는 이빨도 빠지고 발톱도 빠지고 힘도 다 빠져버린 호랑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빨도 발톱고 힘도 다 빠져 버린 호랑이는 무늬만 호랑이지 실상은 호랑이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런 나쁜 늑대, 나쁜 호랑이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그런 것들을 물리쳐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기에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그의 심령속에 모셔 들여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을 때에 모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도전과 유혹과 핍박과 환난과 고난을 이기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0절에서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죽었다.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있는 것은 오직 믿음 안에서 즉 믿음을 따라서, 말씀을 따라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이 되셔서 완전히 그를 사로 잡았기 때문에 주인이신 주님만을 위해서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에게는 옛자아가 더 이상 준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모든 역경속에서도 주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고 하면서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며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에게 신앙적 갈등과 고민이 있습니까?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습니까? 희망적 징조입니다. 무언가 영혼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거기에 안주하지도 마십시오. 주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조금 더 힘을 내어 여러분의 거듭난 자아에게 양식을 듬뿍 공급하십시오. 영적인 활동을 조금 더 활발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힘 주시고 은혜 주시고 능력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새자아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생명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새자아가 옛자아를 확실히 제압하고 예수님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과 평안과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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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 은총의 좁은 문

 

 

 

 

 구  절 : 눅 13:24  / 찬송 : 318장

 묵상 : 잠언 16:1-3(구약926쪽)

 사도신경고백  / 찬송 : 270장

 기도 : 가족중


 본문: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누가복음 13:24)


 말씀:넓은 문을 지나 넓은 길을  가는 인생은 마침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지만 좁은 길을 따라 좁은 문을 지나는 사람은 그문을 지날 때

마다 천국의 세계가 환하게 다가옵니다.


 그 첫째 문은 그리스도의 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습

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사도행전 4장12절은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

라]고 단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좁은문을 어떻게 들어갈 수 있

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생의  목표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두며 예수님 중심으로 나갈 때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

다.


 둘째 문은 성령의 문입니다.  성령의 문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

신 성령세례를 받고 마음 속에  성령충만하여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

게 하는 것입니다. 이 문을  지나면 하늘나라 영광 길은 더 넓어지고 천국

의 광채는 더  환해지며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 마음 속에

넘치는 것입니다.


 셋째 문은 성결주의의 문입니다.  성령충만하여 나아가면 그 다음에는 성

결하게 하는 문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8절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성결의 문을 지나

는 사람은 추하고 음란하고 더러운 자리에 같이 앉 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해서 성결케 함으로 하나 님과 대화하고 주 안에 깊이

들어가려고 합니다. 성령충만함으로 용기  를 얻어 이 문을 들어선 사람에

게는 전에 체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계시와 권능을  받아 은혜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좁은 길의 마지막 문은  (그 발 앞에 엎드리는 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전적으로 의뢰하고 순종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세상적으로 보

기에는 바보스럽고 미련하고  아무것도 없는 생활 같지만  그 마음 속에는

하늘나라의 화평이 넘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소유한 사람

에게 천국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좁은문을 지나 좁은 길로

가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살

게 되는 은총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 : 사랑의 주님, 저희가 고통스럽고 어려워도 오직 주님만 좇3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시고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

멘.

 통성기도 : 교회와 목회자를 위하여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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