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설립된 인천LMTC는 매년 두 차례 훈련과정을 개설, 지금까지 총 265명이 수료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수료자 중 실제 선교사로 파송된 수료자가 26명으로,

수료 대비 파송률이 약 10%에 달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LMTC 파송률이 한 자리 숫자에 머무는 상황에서 이례적이다.

 

인천LMTC는 인천 지역 내 선교훈련소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사진은 LMTC 강의 장면.

인천LMTC가 이러한 성과를 거둔 데는 이사장 이용범 목사를 비롯한 이사회의 후원과 함께

 원장 박인기 헌신이 밑거름이 됐다.

선교학을 전공한 박 목사는 12년 동안 사례 없이 자비량으로 인천LMTC를 섬기고 있다.

박 목사가 시대 상황에 맞게 교육 커리큘럼을 짜고 수준급 전문가들로 강사를 섭외하는 등

전적으로 LMTC를 맡아 전문성과 연속성을 확보한 것이다.

박인기 목사는 부평갈보리교회와 산곡제일교회 등 후원이사 교회들의 헌신 덕분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인천LMTC를 통해 인천 지역 교회들에 선교 열기가 더욱 확대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출처 : 조준영 기자  joshua@kidok.com / 기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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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역사] 존 네비우스(John L. Nevius)의 선교방법과 자립선교의 원리

 

 

1. 존 네비우스는 누구인가?

존 네비우스는 182934일 미국 뉴저지(New Jersey)에서 태어났다.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수업을 한 후 1853년에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 해외선교사로 지원하였고, 중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는 양자강(揚子江)과 산동성(山東省)을 중심으로 40년 동안 선교사역을 하다가 18931019일 사망했다.

그는 선교사역 중 선교 이론에 대한 연구논문을 1885년부터 상해(上海)에서 발행되던 차이니즈 레코더(The Chinese Recorder)에 연재했는데 1886년에 그 논문들이 선교 사역 방법(Method of Mission Work)이라는 책으로 재판되었다. 이 책은 1899년에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선교지 교회의 개척과 발전(Planting and Development of Missionary Churches)라는 이름으로 재판되었다.

네비우스의 선교이론은 루푸스 앤더슨(Rufus Anderson)과 헨리 벤(Henry Venn)의 자립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앤더슨과 벤은 선교지의 교회들이 어떻게 해야 자립하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연구했다. 이러한 의식은 네비우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2. 네비우스의 선교방법

1) 미국 북 장로교회의 옛 선교방법

네비우스의 이론은 현지 교회의 자립에 강조점을 둔 것이다. 그의 방법은 중국에서 시도했던 옛 방법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 처음 중국에 왔던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돈을 주고 원주민 사역자를 고용하여 전도를 하게 했고 선교사는 그들로부터 보고만 받았다. 40년간 시행된 이 방법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새신자를 유급 전도자로 고용하는 것은 선교사와 선교지 본부에 악영향을 준다.

새신자를 유급 전도자로 고용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그 사람에게 해롭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 방법으로는 참 신자와 거짓 신자를 구별하기 어렵다.

이 방법은 돈을 바라는 마음을 자극하기 쉬우며 보수를 바라는 그리스도인의 수를 증가시킬 위험이 있다.

선교지의 신자들이 돈을 지급하는 선교사에게 자신을 맡기려고 한다.

선교사업 자체의 성격을 저하시킬 위험이 있다.

네비우스는 옛 방법이 원주민을 기회주의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는 중국선교의 실패원인이 이에 있음을 지적하고 옛 방법을 반대했다.

2) 네비우스의 선교방법

그는 다음과 같은 새 방법을 제시했다.

부르심을 받은 그 자리에 머물라.

- 이는 자신이 있는 그곳에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선례를 남기라.

- 선교지 교회를 의존적인 교회로 만들지 않기 위해 처음부터 보수를 받는 사역자에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끝까지 견지해야 한다.

지나친 간섭과 돌봄은 피하라.

- 과도하거나 불필요한 도움은 교회가 잘 자라는데 있어 치명적이다. 적당하고 바른 돌봄이 필요하다.

일을 맡기기 전에 시험하라.

- 디모데전서 3장이 요구하는 자격을 기준으로 하여 한 사람을 전도자로 세우기 전에 반드시 시험하여 검증해야 한다.

훈련하라.

-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성장할 수 있다.

주님께 맡겨라.

-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새신자들을 주님께 맡길 때 그들이 참 신자로 성장할 수 있다.

 

  

3.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적용 - 곽안련(Charles Allen Clark)

곽안련은 네비우스의 방법을 한국교회에 적용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널리 순회하며 전도한다.

사역의 모든 분야에서 성경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자전(自傳)

: 모든 신자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가 되는 동시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워야 함.

자치(自治)

: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선임된 무보수 영수(領袖)의 관할을 받는다.

순회교구는 나중에 목사가 될 유급 조사(助事)들의 관할을 받는다.

순회집회가 있을 때 교인들을 훈련시켜 훗날 구역, 지방, 전국의 지도자들이 되게 한다.

자립(自立)

: 신자들이 스스로 마련한 예배당을 소유한다.

개교회의 목사에게 외국의 자금으로 사례를 지불하지 않는다.

모든 신자는 영수와 순회 조사 아래서 조직적인 성경공부를 한다. 모든 영수와 조사도 성경연구모임을 통해 조직적으로 성경을 공부한다.

성경적 형벌을 통해 엄격한 징계를 실시한다.

다른 선교단체와 협력하고 연합한다. 아니면 최소한, 영역이라도 분리한다.

법정 소송사건이나 그와 유사한 문제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다.

민중의 경제 문제에서 가능할 경우 일반적인 도움을 준다.

   

 

4. 자립선교의 원리

1) 무엇보다도 성경이 자립선교의 유일한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일이 잘못되었을 때 성경을 통해 문제를 정확히 인지하고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선교지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知彼知己 百戰不殆

3) 선교지 정부와 되도록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성경이 가르치는 국가와 정부의 의무와 관계에 대해 잘 인식해야 한다.

너무 가까워지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4) 선교는 사회사업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마태복음 2818~20절을 참고하라.

 

5) 현지인 사역자를 발굴하고 양육하고 후원해야 한다.

이는 선교지 교회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일이다.

 

6) 현지인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

 

7) 언제 어디서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어떤 경우에는 실망하지 않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된다.

이것은 항상 강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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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년을 맞아 국내에 들어오신 선교사님들이 가끔 저에게 질문을 하셨는데

오늘 우연히 안식년선교사님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래전에 국민일보에서 장로님이 하시는 여관식 게스트하우스가 있다는 기사는 읽었습니다만...

오늘은 여러 곳 알려 드릴 수 있어 기쁩니다. (선교사홈스테이)

 

 

 

 

더 자세히 보시려면 여기를 클리하세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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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의 영적전쟁(1)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화,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의 대화는 가능할까?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하기에 앞서 우리는 이미 모든 무슬림들이 선지자로 추종하고 있는 무함맏과 그가 대화했던 무수히 많은 무함맏과 동시대의 아랍인들, 유대인 및 기독교인들 사이에 있었던 관계를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행스럽게도 꾸란에는 무함맏이 아랍인들과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과 논쟁했던 핵심적인 주제들과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꾸란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진짜 유일신이 누구인가, 무함맏이 진짜 선지자인가 아니면 거짓말쟁이이며 가짜 선지자인가, 무함맏은 성경의 선지자들의 전통을 물려 받았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참 종교는 어떤 종교인가에 관한 것들이다. 이러한 토론을 했던 당사자들 자신들을 살펴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무함맏 당시의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꾸란에서 말하는 것처럼 책의 사람들이었다. 즉 그들은 항상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무함맏은 꾸란과 모든 무슬림들이 말하는 대로라면 문맹이었다.

 

따라서 무함맏은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한 번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였던 타우랏, 자부르, 인질을 자기 눈으로 직접 읽은 적이 없었고,읽을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무함맏 당시에는 아직 성경이 아랍어로 번역되기 전이었다. 꾸란에는 성경에서 다루는 수 많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은 틀림 없지만,꾸란의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읽어보고 성경과 대조해 보면 무함맏이 성경의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해 말한 것들은 거의 하나도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무함맏은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자기가 주워들은 선지자들과 성경 이야기들을 자기 멋대로 꾸며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무함맏이 꾸란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가 바로 ‘무함맏 자신이 꾸란을 스스로 지어냈느냐 아니냐’에 관한 문제였다는 것을 꾸란을 한 번 만이라도 주의깊에 읽어본 사람이라면 쉽게 알아낼 수 있다.

 

그런데 꾸란에서는 누가 거짓말쟁이가 되었을까? 성경을 항상 읽었던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문맹이어서 그것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던 무함맏 앞에서는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성경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 사람이 항상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내용이 무엇이고, 어떻게 되어 있는가에 상관없이 자기 식대로 우겨댔는데도, 모든 무슬림들은 오늘날까지도 성경을 직접 읽었던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왜곡하여 무함맏에게 거짓말을 했고, 성경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무함맏이 성경과 선지자들에 대해 진리를 말했다고 믿는다. 오늘날 이슬람 지역들이나 무슬림들이 사는 곳에서 우리가 무슬림들과 대화를 나눌 때 겪게 되는 문제가 정확히 이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거의 모든 무슬림들도 전혀 성경을 읽지도 않으면서 성경의 내용들을 자기 방식대로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무슬림들은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하고자 할 때, 항상 근본적인 내용을 가지고 해답을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주로 상황(context)이나 인물이나 신학적인 주제를 가지고 대화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세상에서 유명한 어떤 학자가 무슬림이 되었다. 어떤 스타가 무슬림이 되었다. 무슬림의 인구가 세상에서 몇 퍼센티지이다. 한편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의 관점에서 신학적인 주제를 열심히 설명하려고 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무슬림들과 대화를 하고, 그들에게 해답을 주려는 시도는 지나치게 기독교적인 관점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무슬림들과 토론을 할 때 상황에 관한 문제를 놓고 서로 옳다고 주장하려 할 때에는 결코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논쟁은 끝없는 나락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문제의 발단이 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먼저 규명해야 한다.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리이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누가 진리를 대변해 줄 수 있느냐에 관한 문제이다.

이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답변은 무슬림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신학적인 해명을 하는 식이다. 우리는 먼저 세상에 그 어떤 누구도 진리를 대변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켜 주어야 한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고 선언한다.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고 단지 선한 선생으로만 알았던 젊은이에게 “네가 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진리란 모든 것의 옳고 그름을 보여줄 수 있는 표준일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된 사실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과 그의 말씀 밖에 없음을 알려 주어야 한다.

 

만일 어떤 것이 항상 변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도, 믿고 의지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진리가 무엇이냐는 문제를 가지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것은 무수히 많은 거짓에 속고 살아가고 있는 무슬림들에게 가장 잘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진리이냐는 문제를 먼저 해결하도록 도와야 한다. 즉 꾸란이 참된 진리이냐 아니냐, 성경이 참된 진리이냐 아니냐에 관한 문제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 하고, 무슬림들의 관심도 이 문제에 집중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다행히 오늘날 우리는 문맹이었던 무함맏과는 달리 대부분 글을 읽을 줄 아는 무슬림들을 상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억지로 서로 자기 주장을 할 필요 없이 그 논쟁의 핵심이 되고 있는 꾸란과 성경을 읽어가면서 비교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감히 이슬람과 무슬림들의 근본이 되고 있는 꾸란을 성경과 대조해 가며 꾸란의 허구성을 송두리째 드러내어, 꾸란 자체를 통해 무슬림들을 거짓에서 진리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구원할 방법을 모색해 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도전적인 방법을 나라에 따라서는 적용할 수 없는 지역도 있을 수 있겠지만, 성경과 꾸란의 본질에 관한 문제는 전도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국면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각국 각처에서 이슬람의 전면적인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서 꾸란의 허구성을 만방에 알려 사람들을 거짓 종교에 속지 않도록 미리 경계해야 할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다. 사실상 무슬림 선교에 있어서 토론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인 만큼 토론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논쟁의 발단이 되고 있는 꾸란을 파헤치고 분석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느꼈다. 이러한 작업은 무슬림들의 세계관과 사고 구조를 깊이 있게 아는 데에도 도움이 되고, 그들과 효과적으로 대화하는데에도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내가 읽어본 대부분의 이슬람에 대한 책들은 이슬람의 허구성과 모순들을 드러내는 일에 조심하고 있다. 무슬림들을 가능한 한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 종교에 대한 비판에 대해 무슬림들의 반응을 고려해 볼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신학적인 주제들을 생각해 보았을 때, 기독교와 거의 대부분의 주제들을 공유하는 이슬람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속을 위험성이 있다. 비록 신학적인 주제들은 공통 분모를 갖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이슬람과 기독교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여기에는 심지어는 기독교인 선교사도 함정에 빠뜨리는 수 많은 사탄의 간계들이 존재한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혹자는 영적 전쟁을 단순히 불신자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어두운 영들의 세력과 신자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대립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로 작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이다. 절대로 영적인 전쟁에서 이와 같은 면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불신자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어두움의 영들을 대적하는 것만으로는 불신자들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변화시킬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영적인 전쟁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와 사탄의 악과 불의의 통치, 천사들과 타락한 영들,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순복하는 자들과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순복치 않고 고집스럽게 거부하고 대적하는 세상 사람들, 사람들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와 영혼을 지배하는 두 세계라고 하는 매우 복잡하고 전면적인 전쟁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기독교인들은 다양하고 복잡한 세상의 세계관들과 부득이 하게 맞부딪히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회복해 가고, 멸망해 가는 세상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일이다.

 

이러한 영적인 싸움의 가장 큰 원인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세계관의 현저한 차이점 때문에 발생한다.

특히 이슬람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은 서로 유사한 점들이 많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보면 거의 하나도 닮은 것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언뜻 보기에 비슷하게 보이는 많은 신학적인 주제들도, 그 내용에 들어가보면 철저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유사성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탄의 음흉한 계략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이슬람이 신, 구약 성경과 그 안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선지자들 또는 인물들을 언급할 때, 우리는 피상적으로 그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기 보다는 그들이 왜 그렇게 말하고, 어떠한 의미와 목적으로 선지자들과 성경의 말씀들을 인용하는 것인지를 잘 분석하고 있어야 한다.

 

무함맏은 왜, 어떠한 목적으로 꾸란에서 선지자들의 이름과 행적들을 거론하는가?

무함맏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했으며, 선지자들을 어떻게 평가하였는가?

무함맏이 사용한 신학적인 용어들은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이슬람의 용어들이 우리의 용어들과는 어떻게 다른가? 어떤 식으로 무함맏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는가?

왜 모든 무슬림들은 무함맏을 본받고 따르고 있는가? 이들이 근본적으로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함맏이 다루고 있는 신학적인 주제들의 논리적인 상관성은 무엇인가?

이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효과적으로 복음 진리를 설명할 수 있는가?

이들의 배후에는 어떤 영적인 존재들이 역사하고 있는가? 등 많은 질문을 해 보고,관찰하고 연구해야 진짜 무슬림들의 필요를 볼 수 있고, 또한 채워줄 수 있다

 

우리는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들, 즉 성령, 그리스도(메시야),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말씀, 선지자의 사역과 역할, 죄, 정결과 부정함,회개, 믿음, 기도, 구원, 천국, 지옥, 종말, 심판 등 많은 단어들 사이에 존재하는 의미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슬림들의 생각과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다.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면서도 의미를 전혀 다르게 사용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자칫 잘못하면 무슬림들이 사용하는 단어들 때문에 그들이 이미 그 용어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고 오해할 수 있으며, 이러한 오해 때문에 그들을 효과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 반대로 그 단어들이 사용되는 의미의 차이점들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 그 모든 단어들이 정말로 중요한 전도의 접촉점으로 사용할 수 있다. 단순히 그러한 단어들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많은 복음의 핵심들을 전하는 것이다.

 

이슬람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의 영적전쟁(2)

 

 

무슬림들이 말하는 선지자들에 관한 사상이나 사용하는 용어들의 의미와 차이점들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반대로 우리가 전하는 성경 이야기나 용어들이 무슬림들에게 어떻게 이해가 되어지는 가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무슬림들이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들의 마음속에 그려지는 하나님의 형상은 어떠한 존재일까를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언급할 때, 또는 삼위일체에 대해 우리가 언급할 때,무슬림들의 마음속에는 무함맏과 꾸란이 계시하고 있는 단일신 알라와 그들이 강력하게 배척했던 메카의 다신교 우상들, 즉 다신교 사상을 우선적으로 떠오를 것이다.

 

무슬림들이 기독교인들의 신을 상상할 때, 꾸란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은 쉬르크, 즉 알라에게 동료를 초래시키는 이슬람의 가장 큰 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무엇인가?

세 인격으로 존재하시는 한 분 하나님을 그들에게 소개해 주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를 하나님 외의 또 다른 신이라고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하게 하는 원인은 하나는 우상숭배자들 때문이고, 하나는 그들 자신이 하나님 자신을 영으로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게 육체적이고도 기계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요한복음 1장과 창세기 1장, 그리고 잠언 8장, 시편의 메시야 예언들 중에 특히 2편과 89편 등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와 능력의 말씀이 왜 메시야로 세움을 받고, 왜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지어야 했는지, 왜 인자가 되셔야 했는지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논리 능력과 설명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성령의 조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영적인 전쟁은 세계관의 전쟁이다.

 

또 성령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 무슬림들은 가브리엘 천사나 무함맏과 같은 영적 존재나 꾸란과 같은 특별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언급하는 성령이 곧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구별하여 말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와 능력의 말씀을 인격적인 창조주로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단지 그들은 인간의 말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단순한 의미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한다.

 

무함맏과 꾸란이 메시야라는 단어를 여러 번 언급하였지만, 꾸란 어디에도 메시야의 의미와 성격 또는 사역에 대해 설명을 해 놓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언급할 때 무슬림들은 이것을 결코 육체적인 의미의 출생 이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 부분, 즉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로 기름부음을 받고 임명되어 세워지는 면을 시편을 통해 설명해 줄 수 있다. 동일하게 죄에 대해서 말할 때에 무슬림들은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 깊이있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죄의 심각성을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담이 단 한 가지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면전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는 존재와 영원한 낙원과 천국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설명해 줄 수 있으며, 또한 인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죄성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회개에 대해서 말하지만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회개, 단지 “회개한다” 라고 입과 마음으로 고백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그들에게 참된 회개란 자신의 타락한 본성대로 살아가는 삶 전체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율법적인 정결과 부정에 대해 저들이 언급할 때, 우리는 의와 불의, 거룩과 죄,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사이의 관계를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꾸란에 무함맏은 죄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전혀 지적하지도 않았다.

 

꾸란에서 알라는 아담이 회개를 하지 않았는데도 그를 용서해 주었다. 꾸란에서 나오는 용서와 구원은 사실상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합법적인 근거나 절차가 거의 필요 없다.

 

천국을 정욕적이고 세속적으로 소망하는 저들의 소망이 거짓됨을 지적해 주고, 천사와 같은 거룩한 삶과 부활체로서의 영광스럽고도 질적으로 전혀 다른 삶을 영원토록 유지하는 영생에 대해 가르쳐 주어야 한다.

 

지옥을 말할 때 저들은 모든 사람들이 일단 지옥에 가서 형벌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헛된 소망을 버리도록, 지옥에서 천국으로 전혀 옮겨갈 수 없다는 무서운 사실을 경고해야 한다.

 

또한 인간의 헛된 노력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야 한다.이 외에도 구체적으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무슬림들이 동일하게 사용하는 것들이 대단히 많은 사실을 알면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단어의 의미상의 차이에도 무슬림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착각하도록 하게 하려는 사탄의 계략이 숨겨져 있다.

 

지금까지 나 자신도 무슬림들과 상당히 많은 부분을 서로 공감하지 못하는 가운데 대화를 많이 했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사역자들을 살펴보아도 무슬림들의 세계관에 대해, 즉 그들의 세계관을 형성시키는 꾸란과 하디스와 기타 이슬람의 의식 및 신념들에 대해 일반적인 것 외에는 꽤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이슬람의 다섯 기둥과 같은 것들을 주제로 삼아서 그들과 대화할 수 있을까? 그럴 경우 그들의 무엇을 변화시켜 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기독교인 사역자들이 이슬람의 일반적인 교리들을 아무리 잘 알고 있어도 그것들을 사용하여 무슬림들을 진리로 인도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상 이슬람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것은 그들이 체계적으로 세워 놓은 교리들이 아니라, 꾸란 자체에 관한 문제로 귀결된다. 무슬림들의 교리들과 종교 의무들은 꾸란의 허구성을 감추기 위해 치장해 놓은 장식품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은 그런 것들을 알 필요는 있어도, 결코 다룰 필요가 없다.

 

꾸란을 연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결코 흥미로운 작업이 아니다.

꾸란을 읽는 것은 심지어는 무슬림들에게도 어려운 중노동이다.

 

꾸란을 읽는데 가장 큰 어려운 점은 꾸란 자체 내에 있는 논리적인 모순들과 비약,무의미한 반복들, 심지어는 어두움의 영들의 세계에 대한 무수한 언급들 때문이다.

 

오늘날만 해도 수억의 인구가, 역사상 수도 헤아릴 수 없는 무슬림들이 자기들의 무지 때문에 지옥에 가고 있다면, 그들 모두가 우리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뭐든 해야 한다.

 

따라서 꾸란 자체에 대한 연구는 지옥으로 가는 무수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그들이 어떤 것들에 속고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그들을 그 속에서부터 끌어내 구원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경고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또 의인이 그 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 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라 그가 그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치 않게 하므로 그가 범죄치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위의 본문을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자기 자신에게 적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이 말씀은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하시는 말씀이다. 본문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인간의 구원과 멸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작정,그리고 인간의 자유 의지와 의무와 책임 등에 관계된 것들이지만,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을 깨우치기 위하여 얼마나 다양하고 창조적인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모든 생명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구원과 멸망을 마치 우리들의 손에 모두 맡겨 놓으신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 우리의 사역이 얼마나 의미있고, 위대한 것인가를 알게 해 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무슬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이 앓고 있는 영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슬람 지역에서 사역하는 사람들은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가능하다면 꾸란을 직접 읽어보고, 꾸란과 성경의 내용상 차이점들을 논리적으로 숙지하고 있으면 전도의 접촉점으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무슬림들이 어떤 말을 어떤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단순히‘말도 안되는 엉뚱한 이야기, 비성경적인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다’고 간주해 버리고 만다면 깊이 있는 대화를 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복음 전도의 접촉점을 스스로 포기하고 마는 것이나 다름 없다.

 

무슬림들의 세계관을 주로 형성하는 것으로는 꾸란, 하디스, 순나, 세속적인 가치관 등이다. 무슬림들이 지극히 종교적인 사람들인 것은 틀림없지만, 동시에 극도로 세속적인 욕망을 추구하며 살고 있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된다.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영적 전쟁이 치열한 장소는 각 사람의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는 자리이다. 세계관의 변화와 영적 전쟁 사이의 상관 관계를 별도의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영적 전쟁을 단지 기도와 성령의 능력의 대결만은 아니다. 그것들도 매우 중요하지만 더 심각한 영적 전쟁의 현장은 사람의 지식과 성품과 가치관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다.

 

(고후 10:3-6)“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세계관의 배후에는 그 세계관을 지배하고 형성시키는 보다 근본적인 영적인 세력이 항상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영적 세력은 추종자의 전인격, 즉 지, 정, 의 모두를 통제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감동과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과 유사하게,무슬림들도 전인적으로 어두움의 영들의 지배와 통치를 받고 살아간다.

 

이슬람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의 영적전쟁(3)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원하는 것처럼 무슬림들도 전인격적으로 자신들의 종교에 충실한다. 무슬림들도 나름대로 지적인 면 뿐만 아니라 의지적인 면과 감정적인 면에서 그들을 어느 정도는 만족시켜 주는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보기에는 말도 안되는 사탄적인 종교나 이단 종파를 사람들이 왜 그토록 열정적으로 믿고 있는가 의아해 할 수 있지만 그들에게도 매우 강렬한 그 무엇이 있다.

따라서 영적인 감동과 같은 것이 단지 기독교 안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 영역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지만, 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도 스스로는 매우 강렬한 영적인 현상을 체험하고 있다. 때로는 그러한 체험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보다 더 강력하게 나타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매우 온유하고 친절하게 자기 백성들을 권면하시고 인도하시는 반면, 사탄은 매우 강력한 독재와 위협으로 자기 세력 안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읽을 때, 기도를 드릴 때, 찬양을 할 때, 기타 종교적인 일들이나 선행을 할 때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을 통한 감동을 자주 체험한다. 동일하게 무슬림들도 꾸란을 읽을 때, 사원에서 예배를 드릴 때, 종교적인 의무를 지키고, 선행을 할 때 악한 영으로부터 감동을 체험한다.

 

따라서 무슬림들이 아무런 영적인 감동도 없이 단순한 인간적 열심에 의해 그들의 종교에 깊이 심취해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체험들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동의 경험일 수 있지만, 근원이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요일 4:1-6; 딤전 4:1), 때로는 대단히 강렬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자기 신념을 위해 생명도 아깝지 않게 희생하기도 한다. 우리는 비슷한 현상들을 사회 전반에서 많이 경험한다. 때로는 전혀 종교적이 아닌 심지어는 악한 일들 가운데서도 감동을 받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되며, 이러한 광경은 스포츠 활동이나 영화와 같은 매스 미이디어나 독서, 테러리즘, 기타 열광주의에서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세계관으로 빠져 들어갈 때, 그들이 그 속으로 깊이 몰입되는 그럴듯한 계기가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때로 이러한 감동은 무함맏에게서 알 수 있듯이, 또는 사탄 숭배자들에게서 알 수 있듯이 두려움과 공포를 동반한다.

 

이슬람 교리와 의식에 깊이 감동되어 있는 무슬림들을 구원하는 것은 덜 감동되어 있는 무슬림들을 구원해 내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다. 이슬람에 헌신되어 있는 무슬림을 구원하는 것은, 이슬람에 실망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보다 훨씬 힘들 것이다. 이슬람 지역에서 무슬림들과 함께 살고 있다면 우리는 영적 전쟁의 최전방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단순히 지적인 논리 싸움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적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영적 싸움은 하나님과 마귀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아무리 강한 무슬림일지라도 하나님의 계시를 체험하고 능력을 체험하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다. 그렇다고 불신자가 꿈에 예수님을 보고,그분의 음성을 듣고 기적을 체험했다고 해서 그 순간부터 과거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부정해 버리고 성경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즉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꿈의 계시나 치료나 귀신 축사를 통해 회개하고 기독교인이 된 사람일지라도 지식과 신념과 삶의 태도와 방식이 변화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일반적이며 집중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떤 한 가지의 전도 방법만을 가지고 모든 무슬림들을 구원해 낼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전도 방법은 다른 방법에 비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역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어찌되었든 우리가 무슬림들을 상대한다면, 우리는 무슬림들의 영적인 세계를 송두리째 파악하고 있어야 영적인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세계관의 변화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통해 발생한다.

 

먼저 부정적인 측면은 자신이 기존에 옳다고 믿었던 것의 거짓됨을 발견하고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긍정적인 측면은 새로운 세계관이 전적으로 옳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쉽게 표현하자면, 무엇이 거짓인 줄 알게 되면 무엇이 진리인지도 쉽게 알 수 있게 되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게 되면 무엇이 거짓인지도 쉽게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무슬림들이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이 거짓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버리기를 원한다면,그들이 믿고 있는 신념이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는지를 그들보다 더 명확하게 알아서 그들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깨우쳐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꾸란이 거짓인 것을 발견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결코 꾸란을 손에서 던져 버릴 수 없다.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면 적어도 꾸란의 어떠한 점이 잘못되었는지, 무함맏이 누구인지, 이슬람의 역사적, 종교적 배경은 어떠한 것인지 등 기본적인 상식들을 알고 있어야 하며 계속해서 그들을 연구해야 한다.

또한 복음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으로의 변화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경험이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세계관의 변화에 있어서 긍정적인 측면이다. 즉 진리를 발견하게 되면 진리를 소유하기 위하여 거짓을 버릴 수 있게 된다.

 

설령 다양한 기적적인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계속 진리의 말씀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결과는 이단에 빠지든지 거의 성장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진리의 말씀에 믿음의 뿌리를 넓고 깊고 강하게 내릴수록 그리스도를 더 많이 닮아가게 된다. 물론 이것은 기도와 성령의 역사를 배제하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슬림들이 꾸란과 이슬람의 거짓됨을 인정하지 않고 온전한 계시를 통해 참된 하나님과 만난 후 그 분께 돌아오는 결단이 없다면 결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격적으로 그리스도와 조우(만남)를 경험하고, 그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려는 열망에 가득차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생각하며 살아가려는 거룩한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초대해야 한다.

 

우리는 무슬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철저하게 이슬람 신념으로 세뇌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몸 속에는 이슬람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할 만큼 철저하게 이슬람 세계관으로 세뇌되어 있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과 말씀의 능력은 그 어떠한 것보다 위대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운명에 맡겨 살던 무슬림들은 하나님을 올바로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무슬림이 일단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운명에 맞서 싸우고,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고, 하나님을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사랑하며 충성하는 삶을 살도록 지도해야 한다.

무슬림 중에 혹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이전에 믿던 여러 선지자들 중의 하나로서 영접하는 수준이거나, 혹은 무함맏과 동일한 수준으로 놓기도 한다.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시키는 기도를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한 사람을 완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드는 일에 비하면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주 체험한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과정을 ‘해산의 고통’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해산의 고통은 단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일시적으로 체험한 사람이 전적으로 변화되기까지의 전 돌봄의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다. 끝임 없는 관심과 사랑과 모범과 기도와 가르침을 통해 한 사람이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서 가는 것을 보았을 때, 즉 완전한 성경의 세계관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한 사람을 해산했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이 영광스러운 해산의 기쁨인 것이다.

 

꾸란의 내용 전체를 다룬 이 글의 목적은 이슬람과 무슬림의 세계관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며, 또 그것을 통해 복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하는 접근방법을 스스로 발견해 나가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어두움 가운데서 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빛을 볼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비진리의 어두움 가운데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이 진리인지, 거짓인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영적 소경으로서 어두움의 영이 이끄는 대로 이끌리며 살아간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대로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자기에게 없기 때문이다.심지어는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단순히 말해 주었을 때에도 일반적인 무슬림들은 그것이 단지 꾸란의 이야기로만 이해를 하지 실제적인 차이점을 구별해 내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가 무슬림들에게 선지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거나 꾸란에 있는 내용들을 이야기 할 때, 반드시 성경과 꾸란의 차이점을 명료하게 드러내 주는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대단히 조심스러운 일이고 많은 지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진리의 빛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 즉 세상의 빛으로 세움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에게 참된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면, 다시 말해 참된 진리를 설명해 주면 그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흑암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나갈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인지에 대해 반응을 시작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이 믿고 있는 내용들이 거짓이고 어두움이라는 사실을 진리를 통해 조명해 주고 그들이 깨닫도록 하기 위해 꾸란의 주제를 통해서 복음의 내용을 전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꾸란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사실상 꾸란에는 복음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꾸란은 복음의 핵심이 되는 내용들을 모두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꾸란을 이용하면 복음을 전할 접촉점이 많다.그 이유는 무슬림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세계관의 유사성 때문이다. 즉 무슬림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을 모방한 옷을 입고 있는데, 우리는 그 진짜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꾸란과 성경을 동시에 사용해야 되는 이유이다. 따라서 꾸란과 성경은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도구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약성경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많은 무슬림들 가운데는 복음 자체를 듣고 싶어하고, 또 복음을 들으면 의외로 좋은 반응을 보인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편 많은 무슬림들이 현지인 그리스도인이나 외국인 사역자들에게 꾸란에 대해 질문을 해 온다. 그런데 과거 무슬림이었다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지라도 꾸란을 어떻게 사용할 줄 모르고, 무슬림들에게 어떻게 답변을 해 주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출처 : 바울선교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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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종결자라는 단어가 유행인 것 같다. 낯선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분명 신조어는 아니다. 외래어긴 하지만 terminator라는 단어가 더 친숙하다. 굳이 다른 한국말로 번역하자면 ‘끈질긴 자’, ‘끝을 보고야 마는 자’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선교에도 이런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선교의 종결자’. 좀 더 문학적인 표현으로 ‘선교의 마침표’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 시대에 선교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선교의 종결자가 있다면 누구일까?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럼 왜 예수님께서 선교를 유언으로 명령하시고 2천 년이 훨씬 넘어선 지금에도 선교는 미완성 과업으로 남아 종결되지 않을까? ‘선교는 하나님이 종결자다’라는 말은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는 정답 같은 오답이다. 선교의 종결자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선교의 마침표를 찍어야 할 자는 바로 교회다. 선교사도 아니고 선교단체도 아니다. 교회다. 예수님께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대상은 바로 제자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인 교회가 바로 그분의 명령을 받들어 사명을 성취해야 한다. 선교라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기차가 하나님이라면 교회가 철로이기 때문이다. 철로 없이 기차는 달릴 수 없다. 그렇다면 선교의 종결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인 것이다. 머리의 명령을 받아 그것을 성취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선교의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1 개정개역)

 

 선교의 목적(종결)은 무엇인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개정개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온 땅의 사람들이 승리와 기쁨의 상징인 '종려 가지'를 들고 순결을 의미하는 '흰 옷'을 입고 하나님과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찬양하는 모습이다. 얼마나 장엄한 모습인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지만 온전한 화음은 아니다. 사람들과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고통의 소리를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8:22). 구원받은 모든 족속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어린 양의 희생의 사랑을 노래해야만 하는 합창제가 남아 있다. 그 장엄한 노래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울려 퍼지는 그날 드디어 선교의 마침표가 찍히는 것이다. “항해하는 자와 바다 가운데 만물과 섬들과 그 거민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사 42:10) 그 때 역사의 막은 내려진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이것을 말씀하시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 개정개역)

 

1) 창조의 목적

하나님께서는 바벨탑 너머로 흩어지는 사람들을 보셨다. 눈에는 촉촉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사람들이 온 땅에 충만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그들이 나아간 것이 아니라 흩어진 것이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맞서다가 강제로 흩어지게 되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프셨다. 원래 하나님의 의도는 인류가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종족마다 제각기 독특한 컬러를 가지고 서로서로 조화롭게 사는 것이었다. 이것이 샬롬이다. 하나님은 획일적인 것을 싫어하신다.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다양성 가운데 통일과 조화를 이룬 샬롬공동체를 꿈꾸신다. 이것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라”하신 진정한 의미인 것이다.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창 10:5 개정개역)

 

2) 예수님의 첫 사역지

예수님께서 첫 사역지로 정하신 곳은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 예루살렘이 아니었다.고향 나사렛도 아니고 태어나신 곳이요 다윗 왕의 고향인 베들레헴도 아니었다. 이방의 갈릴리였다.(마 4:12-16)

 

왜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메시아로 선포된 이후의 첫 사역지로 정하셨을까? 단지 다른 지방보다 더 멸시 받고, 영적으로 가장 비참한 상태에 놓인 갈릴리 사람들이 불쌍해서일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과 같다.

 

3) 예수님의 오신 목적

구약에서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선민의식 때문에 원심적 선교가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요나 선지자가 이방인을 향해 나아갔지만 어디까지나 떠밀려 억지로 나아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심적선교를 스스로 펼치셨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을 듣고 이스라엘의 언약 속으로 들어왔다(수2:9-10). 이방 여인 룻도 인애의 사랑으로 이스라엘의 한 사람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의 언약 아래 들어왔다. 모두 하나님께서 스스로 행하신 구심적인 선교였다.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주어진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출 19:6). 그러나 하나님은 열방을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꿈을 포기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역으로 선교의 도구로 이용하셨다. 그들을 바벨론 포로와 앗수르의 포로가 되게 하심으로 당시 세상의 중심이 되는 나라에 당신의 백성을 심으셨다.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로 그들과 함께 거기 머물면서 스스로 당신을 이방인들 가운데 나타내셨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통해 그리고 에스더를 통해 스스로 나태내시고 당신의 구원을 보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취하시고 세상에 오시었다. 예수, 그이름은 여호와 삼마의 신약적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개정개역)

 

이 말씀은 어떤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 명절을 지키기 위해 왔다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하는 성경구절이요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죽기 위해서 오셨다.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는 누구를 위한 십자가인가? 유대인만의 전유물인가? 죽기로 예정된 하나의 밀알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죽음으로 맺게 될 많은 열매는 바로 유대인 뿐만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이다.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선민 의식에 절어 있던 유대 제자들에게 이것을 깨닫게 해주고 싶으셨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제자들을 향하여 뜬금없이 밀알(죽음과 열매) 이야기를 하신 것이다. 유대인이라고 하는 한 종족만이 아니라 온 땅의 모든 족속이라는 많은 열매를 맺는 바로 그 때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이다.” (요 12:23)

 

이것이 복음의 특징이다. 모든 죄인, 모든 인류에게 기쁨의 큰 소식 말 그대로 복음인 것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개정개역) 이것을 깨닫는 것이 곧 성경을 바로 깨닫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를 분명히 아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는 것이 참된 헌신이다.

 

4) 교회의 태동 목적

지상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성령을 보내 주시었다. 이제는 또 다른 보혜사를 통해서 천상사역이 시작되었다. 살려주는 영으로 오신 성령은 교회를 태동하게 하였다. 갓 태어난 교회의 울음소리는 함께한 모든 이방인들이 들을 수 있는 각기 다른 방언으로 울려 펴졌다. 교회가 무엇을 위해 태동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는 사건이다. 교회는 모든 방언으로 복음의 나팔을 불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4 개정개역)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단어

 

왜 그럼 이토록 중요한 개념을 교회는 오랫동안 몰랐을까? 우리의 성경해석이 너무 이기적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전후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내게 유익이 되는 한 구절만 쏙 뽑아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빌 4:13의 말씀을 우리는 좋아한다. 그러나 그 참 의미는 헤아려 보지 못하고 무작정 좋아하는 것 같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개정개역)

 

이 말씀은 11절과 12절의 연속성 속에서 해석이 되어야 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1-12 개정개역)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은 가난, 궁핍, 핍박, 환란, 죽음을 다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이런 것들은 모두 뺀 우리가 좋다고 여기는 것들만이다. 그는 가난해도 비참하거나 비굴하지 않으며 부해도 교만하지 않는다. 그는 주님 때문에 핍박을 받아도 항상 기뻐할 수 있다. 환란과 죽음이 그를 대면하여서도 그는 감사할 수 있다. 그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태복음 28:18-20 이러한 우를 범하는 예라고 생각한다.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 종족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교회는 오랫동안 이 말씀을 잊었다. 오직 ‘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겠다’라는 말씀만을 기억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족속으로 가라’는 선교의 명령에는 관심도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평범했던 한 사람, 구두 수선공이었던 ‘윌리암 케리’에게 세계를 바라보게 하셨다. 개신교선교는 그렇게 무명의 한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어렵게 불씨를 지필 수 있었다(William Carrey, Pere des missions moderns, 1761~1834).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어렵게 시작된 근대선교도 한동안 이 ‘종족’이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했다. 교회가 보지 못하던 이 ‘종족’이라는 단어를 보게 한 사람이 바로 도날드 맥가브란이라는 선교사이다.

 

도날드 맥가브란 (Donald McGvran, 1897)은 인도의 하다에서 선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콜롬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은 후 다시 20년 정도 더 인도에서 사역하면서 대중운동(Mass Movements)에 대해 연구하였다. 오래전부터 그는 현재와 같은 선교사들의 사역을 통해서는 세계복음화라는 목표의 달성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전략이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때부터 여러 기독교학교들에서 선교학에 대해 강의하였고 1961년에는 기독교 역사상 선교방법론에 대한 연구가 가장 활발했던 것으로 유명한 교회성장연구소(Institute of Church Growth)를 세웠다. 그에게 있어 개선책은 대중운동이었다. 즉 부족 전체나 혹은 동질성집단(Homogeneous Units) 전체를 기독교로 이끄는 것이다. 그런 집단-개인의 개종은 개별적인 회심보다 훨씬 더 안정되고 교회성장을 지속하게 해준다. 동질성집단의 원리라고 명명한 맥가브란의 대중운동 개념은 1974년 로잔회의에서 발표된 후 세계에 널리 퍼졌다. 그는 1955년 이전까지 모든 선교회를 지배하고 있던 전통적이고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선교방법을 뒤흔들어 놓았다. 맥가브란이 그처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몇몇 신학교에서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렀던 선교학을 전문적 연구 차원으로 부상시켰다는 데 있다. 그 이후 교회는 종족이라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단어를 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들을 향해 가는 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종족이란 공통의 역사와 한 언어와 문화로 연결된 사람들의 그룹을 의미한다.) 오늘날 세계 선교사들의 3%만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 사역한다는 통계는 이것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단면이라 하겠다.

 

 

목적(목표)과 전략의 혼돈

 

종결해야 할 목표는 무엇인가? 선교의 최종목적은 무엇인가?

목적은 한 가지이다. 그러나 전략은 여러 가지이다. 목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략은 변한다. 목적은 전략에 선행한다. 목적이 없는 전략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우리는 목적과 전략을 혼동해 왔다. 선교의 목적과 전략을 혼동했던 것 같다. Peter Wagner, 풀러신학교 교수는 전략을 이렇게 정의했다. “전략이란 하나의 분명한 목표(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다. 선교전략이란 그리스도의 몸(교회)이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 그리고 그분이 맡기신 일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는 방법이다.”

목적과 전략의 혼동이 선교사역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퍼즐의 한 조각만을 가지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전체를 보아야 한다.모든 종족을 보아야 한다.

 

 

미전도종족 선교의 역사

 

1970년대에 전세계인구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바로 미전도종족들 가운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어떤 선교학자들은 믿었다. 만약에 그들을 겨냥한 어떤 효과적인 선교운동이 전개되었다면 2000년 말에는 선교의 사역이 종결될 것이다.

1974년 로잔대회에서 랄프 윈터박사는 참가자들에게 도전을 주었다. 16,750 종족의 알려지지 않은 혹은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말했다. 세계선교의 새로운 도전을 주었다. 사람들이 그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물었지만 그도 알지 못했다. 아직은 자세한 자료도 없는 실정이다.

1980년 영국의 에딘버러 선교대회에서 랄프 윈터는 다시 지구상의 미전도종족에 대한 도전을 하였다. 그때 스칸디나비아 출신 그린랜드에서 사역하고 있던 한 선교사가 강단에 올라와 “2000년까지 모든 사람에게 교회를!”라고 외쳤고 함께 자리한 수천 명의 전세계의 교회 선교 지도자들이 함께 구호를 외쳤다. 예정에 없던 돌발적인 상황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외침을 따라 했지만 그다지 심각하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십 년 후에 AD2000운동이 출발하였다.

Patrick Johnstone(Operation World 편집자이며 WEC선교회)의 선교사는 그간의 십 년간의 노력의 결과를 발표한다. 이른바 ‘세계 복음화의 현재와 미래’라는 보고서이다.

처음 이 운동을 시작하면서 13,000여 종족에 대한 리서치를 하였다. 그들은 인구가1만 명 이상 되는 종족중에 2% 미만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혹은 5%미만의 신자를 가진 종족을 교회개척이 시급하게 필요한 종족으로 규정했다.

두 번째 성과로는 이 연합운동의 결과 1900년 5개 단체에서 2000년에는 73개의 단체가 주로 종족을 중심으로한 연합사역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도표가 그다지 의미가 없는 이유가 있다. 엄청난 인구가 사는 사람들 속에 단지 하나 교회는 그리 효과적이지 못하다. 반딧불 하나로 넓은 홀을 다 밝힐 수는 없다. 소금 농도는 3.5%이다. 바닷물이 썩지 않는 이유는 바로 3.5%의 소금의 힘이다. 100미리 리터의 물에 3.5그램의 소금만 있으면 그 물은 웬만해서 썩지 않는다.티스푼 하나가 5그램이라고 한다. 3.5그램은 스푼의 위를 깎아낸 정도의 분량이 아닐까? 적어도 한 종족에 3.5%의 소금 같은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 'FTT 운동이란' 639개 종족 복음화 추진

빌리그레이엄 전도협회가 암스텔담 2000 선교대회를 주최하면서 대회에 참여한 한 소그룹 지도자들이 모든 종족에게 교회 개척을 목적으로 하는 전략적 관계를 형성했다. 이 그룹은 ‘테이블 71’이라고 칭했다(그분들이 자리했던 테이블 번호). 2004년 가을에 이들은 다시 모여 남은 비접촉 미전도종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남은 과업 완수’(Finishing The Task) 운동을 시작했다. FTT운동의 목표는 3400여 미전도종족 중 10만 이상의 인구를 가진 639개의 미개척 종족을 우선 복음화시키는 데 있다.또 미전도종족 입양뿐만 아니라 현지에 교회를 세우고, 이 교회가 자립 및 재생산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이를 위해 지역교회와 현장 선교사, 선교단체의 유기적인 네트워크 구성이 필수요건이다. 특히 지역교회가 선교에 주체가 되고 선교단체는 정보와 전략을 제시하는 협력기관으로 활동한다.

 

* Target 2020

예수전도단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모든 나라, 모든 도시, 모든 족속에 복음 전도하여 교회를 세우고 제자화하기 위하여 서기 2020년까지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을 우리는“Target 2020”이라고 부른다.

‘Target2020’은 최소복음화된 국가와 인구 백만 이상이나 관문되는 대도시, 미전도종족 내에 토착적인 교회를 개척, 제자화하고 스스로 배가 되게 하여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완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목표를 갖는다.

1. 2020년까지 최소복음화 나라 50개 국을 개척한다.

2. 2020년까지 최소복음화된 인구 백만 이상의 대도시와 관문도시 130개를 개척 혹은 참여한다.

3. 2020년까지 최소복음화된 인구 백만 이상의 미전도종족과 관문종족 170개를 개척 혹은 참여한다.

 

넘어야 할 장벽

 

오늘날 선교의 완성이라는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넘어야 할 장벽도 많고 싸워 이겨야 할 적들도 많다. 가장 큰 적이 무엇일까?

전년도(2010년) 통계에 따르면 전세계 20억의 인구가 아직도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미전도종족이라고 한다(크리스챤 투데이 2011.10. 23). 2010년 10월 3차 로잔대회에서 20일 ‘세계의 종교’(World Faith)란 주제하에 열린 미싱피플 : 복음을 듣지 못한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란 세미나에서 미전도종족 네트워크인 ‘에슨 투 에슨’(Ethne To Ethne)의 선교 지도자들이 한 발표이다. 수많은 세계 교회와 선교단체들이 세계 선교에 열정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1만 6천여 가량의 미전도종족 중 3천7백여 종족이 복음을 접하지도 못한 채로 남아 있다고 말하고 그 이유를 교회들의 주저함이 영향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교회, 선교회, 선교사들이 주저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현재 전 세계로 파송되는 선교사들 가운데 단지 3%만이 미전도 종족에게로 파송되고 있다는 것을 미국 언리치드피를즈 대표 켄트 박사는 말했다. 그는 말하기를 교회가 미전도종족 선교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실패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되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이 그 바탕에 깔려 있을 때가 많다고 말했다. ‘그들을 변화시킬 수 없을 것’ 이라는 생각 때문에 투자하길 원치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스도인 리더들이 갈렙의 정신이 아닌 메뚜기의 정신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수 14:12개정개역)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 13:33 개정개역)

 

또 하나의 주저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와 너무나 다르다는 편견도 작용한다. 이 편견에 대해 15년간 미전도종족을 대상으로 사역을 해온 에디오피아 출신의 아리킬룸 베예네선교사는 소말리아에서 복음을 듣고 신실한 기독교인이 된 미전도종족 출신 청년의 이야기를 전한다. ‘우리는 겉으로 보면 달라 보이고 무서워 보이기까지 한다.그러나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겉으로는 무서워 보일지 몰라도 안으로는 진리를 갈급하게 찾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 개정개역)

이 고백은 하나님을 아는 자만의 고백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으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개정개역)

 

미전도종족선교의 목표

 

미전도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끔 인도하는 일이다. ‘에슨 투 에슨’의 남아공 디렉터 피터 탄탈 선교사는 아프리카 교회의 기독교인들이 배우는 것과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는 거리가 있다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프리카는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기독교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1900년에 아프리카에는 8백만여의 기독교 인구가 있었지만 지금은 5억이 기독교인이다.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은 기독교인구가 90%를 넘는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또한 가장 높은 에이즈 감염률과 빈곤, 부정부패와 같은 문제를 경험하고 있다. 우리가 미전도종족 선교를 행함에 있어서 이겨야 할 도전은 교회가 이렇게 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성경적인 가르침으로 바르게 인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 가르치고 또한 보여줘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19 개정개역)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개정개역])

 

본문에서 본 동사는 ‘제자를 삼아라’이다. ‘세례를 주다’와 ‘가르치라’는 분사형으로 사용되었다. 세례를 베풀면서 그리고 가르치면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이다. 이 분사형 단어들은 제자를 삼는 방법(전략)과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세례는 예수님과 더불어 죽고 살았음을 선포하는 의식이다. 종교인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한 새생명의 사람을 낳아야 한다. 참된 제자가 되는 첫 걸음이다. 가르치되 머리에 지식만을 넣어주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가르침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손과 발로 내려 가야 한다. 삶으로 실천된 지식이 아니면 율법처럼 죽이는 의문이 될 수 있다. 진리가 실생활에 적용되도록 해야만 한다. 아비의 심정으로 가르치고 모범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가르치시지 않으셨다. '행하시고 가르치셨다'. 순서에 주목해 보자. '가르치고 행하신 것'이 아니라, '행하시고 가르치셨다'(행1:1). 성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지 않으면 생명 없는 종교로만 남게 된다.

 

나가는 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개정개역)

 

그 동안 우리는 선교의 쉼표는 찍었다. 많은 선교 전략들이 유행처럼 등장하고 사라졌다. 느낌표도 찍었다. 선교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가슴 절절히 외쳤고 그 결과 선교사 이만 명 시대를 열었다. 선교의 말 줄임표도 찍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땅끝으로 남아있는 많은 종족들을 바라보며 어떻게 행진해야 할지 머뭇거렸다.이제는 유행에 휩쓸리지 말자. 이제는 전략과 목적에 혼란을 갖지도 말자.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께 부를 그 영광과 환희의 송가를 부를 그날을 향해 믿음의 행진을 계속하자. 3%는 부끄럽다. 적어도 십일조, 1/10 선교사는 미전도 종족, 복음이 시급한 사람들에게 나아가 제자를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실 것이다. 임마누엘 주님의 마라나타를 꿈꾼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출처 : 조승호 선교사(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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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의 훈련, 인성, 영성(1)

 

선교사 훈련에 있어서 2가지의 중요한 면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하나는, 선교사의 양적인 면이다. 요즈음 선교단체에서는 선교훈련 지원자가 점점 감소하고 있음을 크게 염려하고 있다. 한국선교연구원(원장:문상철목사)은 “선교사 증가 추이가 빠른 속도로 둔화되고 있다. 선교단체 대표들을 인터뷰해 봐도 2007년 이후로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는데 공감하고 있으며 이런 추세라면 3만 명 파송은 어렵지 않겠는가. 생각보다 정체 현상이 빨리 올 것으로 보고 있다. 이제 수직상승기는 지났다. 질적 성숙을 꾀해야 할 시기”라고 진단했다. 지난 11월 14, 15일 광림세미나하우스에서 개최된 한국선교지도자포럼 모임에서 KWMA 사무총장인 한정국 목사는 다음과 같이 한국 선교계에 긴급히 드리는 제안을 내놓았다. “한국교회가 어렵다고 합니다. 교세도 많이 줄어가고 있고, 개혁하자는 말은 많아도 정작 개혁되기 힘든 상황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교세가 줄어가니 헌금도 비상이고, 일부 교회는 선교비를 재조정하겠다고 합니다. 선교에 그렇게 너그럽던 한국교회가 몸살을 심히 앓고 있는데, 선교지를 방문해 보면 한국선교사님들은 이런 본국의 추세에 다소 무딘 반응을 보입니다. 막연한 낙관주의가 한국 선교계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2013년 가을을 보내는 요즈음, KWMA는 한국교회의 어려움을 예사롭게 보지 않습니다. 강 건너 불이 우리에게도 붙을 가능성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선교훈련의 질적인 면이다. 우리 한국 선교는 선교사 파송 숫자에 비하면 선교훈련의 질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에 한정국 KWMA 사무총장은 “한국 선교계에 긴급히 드리는 제안”을 통해서 위기를 만난 한국선교의 자구책 노력으로서 “양적성장을 배제할 순 없으나 질적 성숙을 가속화 시켜야 한국선교의 미래가 보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선교사로서의 부르심의 확신과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만 가지고 있다고 하여 선교지의 문화, 언어, 종교에 대한 단편적 지식만 제공하여 파송하는 것은 마치 전선의 긴급한 요구에 이끌려 소총사격하는 방법만 가르쳐 장교들을 전쟁터에 보내는 것과 같다. 선교사 훈련의 중요성을 백번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것은 바르고 철저하게 훈련하는 것이 사역의 극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교지에서 발생되고 있는 많은 문제의 주 원인은 선교 훈련에서 기인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또한 선교훈련 기간과도 무관하지 않다. 주요 선교사 파송단체별 장기선교사 훈련 기간을 보면, 교단은 길게는 7개월, 짧게는 5주간이며 선교단체는 대체로 교단보다 길어 길게는 2년, 짧게는 3개월이다. 훈련기간이 제일 긴 선교단체는WEC(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국제선교회로서 선교사훈련대학(MTC)과정이 6개월~2년이다. 다음은 우리 바울선교회로서 국내훈련 6개월, 해외훈련 8개월 합 14개월이다. 우리 바우리 중에는 드물게 훈련기간이 너무 길다는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거의가 기간에 대해서는 만족해 하고 있다. 우리 바우리가 바우리되게 하면서 바우리로서의 긍지를 잃어버리지 않은 이유는 바로 선교훈련의 기간이라고 본다.

선교훈련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선교 훈련 내용 또한 중요하다. 케냐의 임종표 선교사는 선교훈련을 내용에 따라 선교현지의 진입을 위한 “현지 진입 전 훈련(Pre-field orientation)”과 현지에 도착해서 받는 “현지훈련(On-field orientation)” 그리고 “선교사 계속훈련(On-going orientation)”의 3종류로 분류하였다.

 

우리 바우리의 “현지 진입 전 훈련(PFO)”은 총 14개월이다. 6개월의 국내훈련은 선교사 기본훈련 1차 과정이며 영성훈련과 선교학을 중점적으로 훈련한다. 나머지 8개월의 해외훈련은 선교사 기본 훈련 2차 과정으로 타문화 적응 훈련과 언어훈련 및 공동체훈련을 중점적으로 훈련한다. 그리고 바우리의 “현지훈련”(OFO)은 1~2년간으로 견습 선교사가 선교지로 부임하여 오리엔테이션과 언어 및 적응훈련을 받는다. “현지훈련”은 “현지 진입 전 훈련”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 기간 동안 해당 지부장과 총무, 지부원들은 깊은 관심을 갖고 성실하게 지도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견습선교사가 현지에 도착하면 적어도 2~3일간은 지부원들이 견습선교사와 함께 숙식하면서 그 나라의 문화, 종교, 관습, 교회, 언어 등을 강의하고 가능하다면 지부원들의 선교지를 순회하거나 그 일이 불가능할 경우는 지부원들의 사역 현장을 영상으로 소개한다면 견습선교사의 현지훈련에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지부원들과의 친밀한 관계형성에 있어서도 효과있는 일이라고 본다. 물론 필리핀지부, 일본지부, 대만지부 등 몇 개의 지부 외에 사역자들이 분산되어 있는 지부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선교사 계속훈련”(OGT)은 대개의 경우, 선교사 자신의 재충전을 위한 훈련으로서 선교사 자신들의 발전을 위하여 안식년을 이용하기도 한다. 이때는 학위를 위해 연구의 기간으로 혹은 각종 세미나를 통하여 재훈련기간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이 기간에는 자신의 지금까지의 사역을 돌아보고 재조명을 통하여 정리하면서 앞으로의 발전적 선교를 위해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우리 바우리에는 아직 실시되지 않고 있지만 안식년 중인 선교사들을 위해 본부에서 재교육 혹은 가족 캠프 등의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경우도 있는데 우리 바우리는 정책적으로도 선교사 계속훈련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두나미스선교관이라는 좋은 시설이 있지 않은가.

선교훈련의 질을 높이기 위한 과제의 해결은 선교사의 인성과 영성의 조화있는 훈련에 있다. 여기에 대하여 박기호 선교사는 “선교사가 인성과 영성을 모두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될 수 있다. 서양, 동양을 막론하고 선교사의 인간성보다는 영성을 계발시키는 데 치중해 왔다. 기도와 성경 말씀을 강조하다 보니 사람과의 관계성이 부드럽지 않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유능하고 누구보다 헌신도 많이 하지만 영성과 인간성을 구분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바나바를 성령이 충만한 자요 착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성은 영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성령의 열매가 삶으로 드러나고, 그것이 좋은 인성으로까지 발전하면 풍성한 결실이 열릴 것이다”라고 인성과 영성의 조화있는 선교사 훈련을 강조하였다.

 

최근에 바우리를 지원한 헌신자들의 지원동기를 들어 보면 아직도 우리 바우리는 선교단체로서의 신뢰를 잃지 않고 의외로 바우리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우리 바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누리고 있다. 우리가 이 축복을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이사회와 본부, 전주안디옥교회를 비롯한 1000개의 후원교회들 그리고 세계의 선교 현장에서 사역하고 있는 바우리 모두가 함께 적극 협력해야 한다. ♣

 

 선교사의 훈련, 인성, 영성(2)

 

2013년 경희대와 중앙일보 취재팀이 도시와 농촌의 중학생 2,171명을 골고루 섞어 설문을 통해 중학생의 인성을 조사한 적이 있다. 인성의 세 영역 ‘도덕성, 사회성, 정직성’을 구성하여 10개 지표별로 점수를 매긴 결과 인성이 좋은 학생은 5명 중 1명꼴, 학생 중 절반가량의 인성이 기준미달로 나온 점에서 중학생들의 인성론은 위기라고 보았다. 이 조사에서 정직(61.7)은 10개 지표 중 가장 낮았다. 만일 인성에서 낙제점을 받은 중학생들이 인성이 바뀌지 않은 채 사회에 진출한다면 그들이 있는 공동체, 가정, 심지어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심히 우려가 된다.

 

인성위기의 중학생, 왜 그럴까. 아이들의 인성 수준이 낮은 것을 아이들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과연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좋은 인성으로 몸소 본을 보였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남을 밟고 이겨야 성공한다는 그릇된 가치관, 온갖 불법과 비리,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는 도덕 불감증, 지나친 자식 과잉보호, 지나친 입시위주 교육 등 소위 사회 지도층이나 어른들의 잘못된 사고방식과 행태를 청소년들에게 보여주지는 않았는가. 어른들의 이런 잘못된 심성과 행동 양식이 청소년들에게 그대로 이식된 결과가 이렇게 낮은 인성 수준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최근에 발생한 세월호의 침몰 사건에서 선장과 다른 어른들의 행태에 대하여 한양대 정진곤(교육학) 교수는 “가장 신뢰받아야 할 어른들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데 대한 실망과 분노가 큰 상황”이라고 말하였다. 아이들이 앞으로 어른 말을 믿겠는지 심히 염려스럽다.

 

한일장신대 총장 취임 100일을 맞이하여 “인성교육은 올바른 신앙생활의 토대”라는 주제의 취임사를 발표한 오덕호 총장에게 “대학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는 무엇을 꼽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대학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인성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사람들의 학식과 기술이 부족한 게 문제가 아니라 부정 부패와 인격 미숙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성교육이 가장 시급합니다” 라고 답변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론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는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목회자나 성도의 영성인가? 아니면 인성인가? 또한 선교지에서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많은 문제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선교사들의 영성인가? 아니면 인성인가?

 

오늘날 선교사의 영성훈련에는 집중하고 있지만 과연 인성훈련에는 얼마나 관심을 두고 있는가. 선교사의 인성훈련의 중요성에 대하여 박기호 선교사는 “서양, 동양을 막론하고 선교사의 인성보다는 영성을 계발시키는 데 치중해 왔다. 기도와 성경 말씀을 강조하다 보니 사람과의 관계성이 부드럽지 않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유능하고 누구보다 헌신도 많이 하지만 영성과 인성을 구분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바나바를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행 11:24)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성은 영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성령의 열매가 삶으로 드러나고, 그것이 좋은 인성으로까지 발전하면 풍성한 결실이 열릴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해외선교사에게 영성만큼 중요한 것은 인성이다. 한기총 총무인 최희범 목사는 “선교사들에 대한 훈련으로 놓치기 쉬운 것 중 하나가 인성 훈련이며 선교마인드는 충분한 반면 인성에 대한 의식의 부재가 문제를 일으키는 주요 요인이 되기도 한다”라고 설명했다.

 

한국 선교사는 믿음도 훌륭하고 기도도 많이 하여 개인의 사역 결과는 뛰어난 데 비하여 팀 사역의 열매가 신통치 않거나 실패하는 경우, 혹은 현지인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의 주요한 원인에 대하여 직접 선교사로 활동했던 이들은 “선교사의 인성의 문제”라고 꼽았다.

 

2008년 7월 28일부터 시카고 휘튼대학에서 개최된 제6차 한인세계선교대회(KWMC) 둘째 날에는 “선교사와 선교사의 인성”이라는 제목으로 패널토의가 진행되었다. 먼저 선교사의 “인성의 정의”에 대하여 박기호 선교사(전 필리핀 선교사, 풀러신학교 교수)는 “인성은 인간됨의 실제와 자질”, 조동진 목사(GMS)는 “선교사의 인성은 선교사로서 영성과 지성, 심성을 모두 포함한 성품, 성격”이라고 정의했다. 이어서 “선교사의 인성의 중요성의 이유”에 대하여 김영관 선교사(브라질, 베트남 선교사)는 “우리를 통해 복음이 증거된다. 복음은 좋은 인간 관계를 맺어가는 가운데 전해진다. 선교사에게는 인성, 영성, 전문성이 필요하다. 이 중에 인성은 가장 기본이 되는 덕목이다”. 김정웅 선교사(태국 선교사)는 “인성과 인격을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놀랄만한 속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인격을 성장시키는 데만 신경 쓰다 보니 인성의 성장은 이루지 못했다” 라고 설명했다.

 

또한 “선교사가 갖춰야 할 이상적인 인성”에 대하여 강성일 선교사(브라질 선교사)는 “성품은 선교사로서 갖춰야 할 자격 중 하나다. 선교사나 교회 모두 인격을 계발시키는 사역은 많이 실시하고 있다. 훈련 받는 현지인도 선교사의 인격을 닮기도 한다. 그러나 선교사는 전도 대상자에게 선교사 개개인의 인격이 아닌 그리스도의 인성을 심어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인성, 이것은 인격보다 우선돼야 한다. 인격은 학문과 이성, 사회적 지위, 소명 등을 말한다면 인성은 용서, 사랑, 희생, 배려와 같은 항목이다. 그리스도의 인성, 이 이상적인 성품을 전도 대상자에게 심어주는 선교사역을 펼쳐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한국인의 인성적인 특징이 선교활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박기호 선교사는 “한국인은 사랑과 헌신, 희생, 말씀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하다. 영성 계발 사역은 강하지만 인성 계발 사역은 약하다. 보수주의자들은 영성을 강조하지만 인성은 약한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인성을 강조하는데 영성은 덜 강조한다는 장단점을 갖고 있다. 하비칸 교수는 영성과 인성의 겸비를 강조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서 “목사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무리 영성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삶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영성은 보이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인성이 반영된 영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영성뿐만 아니라 인성을 겸비하지 않으면 결핍된 인성 때문에 복음전파에 방해가 된다” 라고 설명했다.

 

이영숙 박사는 저서 “한국형 12성품 교육론”에서 성품이 실제 삶에서 드러내는 구체적 모습을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 성품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 나타난다. 성품은 삶의 위기와 갈등, 어려운 상황이나 삶의 압박에 대해 반응하는 모습이 바로 그 사람의 성품이다. 성품은 평상시의 말과 생각, 표현하는 방법과 태도를 통해 그대로 나타난다.

둘째, 성품은 사람들 사이에서의 여러 가지 관계로 나타난다.

셋째, 성품은 습관을 통해서 나타난다.

넷째, 성품은 예의 바름을 통해서 나타난다.

다섯째, 성품은 말을 통해서 나타난다.

 

한국선교의 위기는 양적인 면에만 치중한 나머지 질적인 면에 소홀한 점에서 찾고 있다. 여기에서 질적인 소홀함이란 영성과 인성의 훈련의 부조화를 말한다. 한국인은 이신득의만 강조해서 인성교육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우리 바우리의 인성의 수준은 어떠한가 각자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아울러 우리 바우리는 영성에서 흘러 나오는 인성을 강조하되 이젠 말이 아닌 실천하는 것을 가르쳐 ‘영성과 인성을 겸비한 선교사’로 훈련해야 한다.

 

전형구 선교사(바울선교회 국제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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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선교행적을 통한 무슬림 선교

 

하나님께서는 세계적이시고 우주적이시지만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이고 인종적이고 민족적이고 국가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고 말씀하셨고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고 말씀하셨으며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욘 1:2)고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이방을 멸시하고 정죄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사마리아의 수가성으로 가셨지만 제자들은 가기를 싫어했고, 베드로에게 가이사랴로 가라고 했지만 베드로도 처음에는 가기를 싫어했습니다. 나중에는 할 수 없이 가기는 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가기 싫다고 하는 요나를 니느웨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베드로와 바울을 반기독교 세력의 중심부인 로마로 가게 하셨습니다.

오늘의 현실에서 한국교회와 세계 교회의 선교의 시급한 대상은 공산권과 모슬렘권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지칭한 두 “악의 축”이 오늘의 선교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시급한 선교의 대상은 북한과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라고 생각합니다. 니느웨와 로마가 정복의 대상이 아닌 선교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북한과 아프가니스탄은 정복의 대상이 아닌 선교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기적이고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저에게 이와 같은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하나님의 관심과 비전을 깨우쳐주신 분들이 고 랄프 윈터 박사님을 비롯한 풀러 신학교의 선교학 교수님들이었습니다.

제가 랄프 윈터 박사님의 역사적 및 선교적 안목에 접하게 된 것은 조동진 목사님의 권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11년 동안의 유학을 마칠 무렵인 1973년 조동진 목사님이 저를 만나자고 했습니다. 후암교회의 교육목사로 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즉시 그러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풀러신학교에 가서 1년 동안 선교학을 연구하고 나서 후암교회로 오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즉시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1974년 초 풀러신학교에 가서 Research Associate의 자격으로 8개월 동안 선교학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신학과 선교신학을 접목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기간이었습니다. 미국 교회사의 아버지 라토렛 교수님이 교회사와 선교학을 겸해서 연구했고, 랄프 윈터 박사님이 교회사와 선교학을 겸해서 연구했는데 저도 교회사 연구에다 선교학 연구를 접목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풀러신학교 선교신학원에서 윈터 교수님을 비롯한 그 당시 유명한 선교학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저의 안목을 넓혀갈 수가 있었습니다. 윈터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저는 그 분의 진취적인 입장을 다소 비판하며 질문도 했지만 많은 깨달음과 도전도 받았습니다. 한 평생을 교회 역사 연구와 선교 전략 개발에 모든 정열을 쏟아 바치면서 즐겁고 멋지게 살다가 주님 품으로 돌아가신 랄프 원터 박사님에게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하지 않을 수 밖에 없습니다.

랄프 원터 박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 가지 더 하겠습니다. 참고가 될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2008년 5월 한국을 방문한 랄프 윈터 박사님을 반갑게 만났습니다. 강의도 같이 했고 대담도 같이 하며 오랫만에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1976년에 랄프 윈터 박사님이 한국에 와서 며칠 동안 강의를 했는데 그 때도 제가 그 분의 통역을 맡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8년 5월 랄프 윈터 박사님이 강의와 대담을 하면서 미국 복음주의교회의 잘못들을 진솔하게 지적하는 것을 보고 들으면서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1) ‘구원’을 단순히 몇 마디 말을 감성적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얻어진다고 간주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지적했습니다. 2) 단기 선교 여행만큼 선교에 해를 끼치는 것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3) 북 치고 시끄럽게 노래하는 것은 예배를 해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사실 요사이 한국교회는 북치고 장구치고 시끄럽게 음악을 연주하므로 예배를 해치고 영성을 죽이는 것같이 보입니다. 4) 신앙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의미가 변질되어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교회는 본래 가족 중심의 신앙공동체였는데 오늘날 서구화와 개인주의화와 대형화 때문에 가족공동체의 특성이 해체하기에 이르렀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와 같은 미국 복음주의교회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 충고했는데 너무너무 진솔하고 귀중한 충고였습니다.

저는 2008년 5월 10일 윈터 박사님과 마지막 대담을 했는데 윈터 박사님은 한국교회가 미국과 서구교회의 실수들을 반복하지 말 것을 재차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했습니다. 윈터 박사님은 단기선교에 대해 “다른 나라를 배우는 것은 좋지만 선교적 관점에서 도움이 안 된다”고 부정적인 입장을 다시 나타내 보였습니다. “선교에 공헌을 못할 뿐만 아니라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을 볼 때가 있다.오히려 방해꾼이 되거나 소란을 일으키는 일도 있다. 그럴 경우 선교사는 여행안내자일 뿐이다. 또 다른 문제는 장기 선교사가 쓸 돈을 단기 선교여행자가 쓰는 것이다. 전쟁할 때 군인들을 전쟁터에 보내는데 일반 시민도 전쟁터가 보고 싶다고 해서 다 태워 보내는 것은 낭비고 방해다. 군인만 보내야지 무장되지 않은 일반 시민을 보낼 필요는 없다.”

문화와 복음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선교는 문화와 복음을 엮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모든 문화 안에는 결점이 있기 마련이다. 다른 문화가 나쁘다고 하기 전에 미국의 문화도 가장 나쁜 문화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그러나 문화 안에 좋은 면이나 배워야 할 면 도움이 되는 면도 있다. 결점이 있는 문화권 속에서도 신앙이 자리잡게 될 수 있고 문화도 변할 수 있다. 모든 문화는 질그릇에 비유할 수 있다. 복음은 보배다. 어느 한 질그릇의 보배를 다른 문화권의 질그릇에 집어넣는 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보배가 한 질그릇에 담겨졌을 때 그 보배가 문화권 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보배가 문화라는 질그릇에 스며들면서 그 질그릇의 결점들이 조금씩 변화되는 것을 경험했다. 인도에는 힌두권에 속하면서도 예수를 따르는 자들 2천 4백만 명이 있다. 그들은 예수라는 보배를 가지고 있지만 힌두권이라는 질그릇 안에서 계속 사역하고 있는 것이다. 모슬렘권에서 예수를 따르는 자와 예수를 따르지 않는 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언어를 쓰지만 보배가 있고 없고가 차이 나는 것이다. 매우 중요한 차이지만 드러나는 문화적 행위에서는 크게 차이가 안 난다.”

윈터 박사님은 미국 복음주의의 오류들을 지적하면서 미국의 복음주의를 성경과 동일시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가 참되지 복음주의에 근거한 기독교를 성경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미국의 복음주의는 결점도 많고 완전한 해석이 아니다. 미국의 복음주의는 하나의 종교다. 복음주의의 못된 이단 중에서도 가장 큰 이단은 아주 짧은 시간에 ‘구원’을 단순이 몇 마디 말을 감성적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얻어진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구원 받는 것, 이런 가르침은 아주 못된 것이다. 구원은 감정적으로 순간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과정이다.” 제가 윈터 박사님에게 “한국교회에 더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복음으로 돌아가라고 조언하고 싶다.믿음은 순종하는 것이다. 외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에 항복하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왕국이 이뤄지는 곳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도래했는데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온 것에 완전 복종하는 것이다. 그냥 믿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복종해야 한다. 믿는 것은 마귀도 한다. 그러나 마귀는 가슴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귀 담아 들어야 할 너무너무 귀중한 조언과 충고였습니다. 랄프 윈터 박사님은 존 스토트 박사님,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과 함께 현대 선교 신학계의 대표적인 선구자였습니다. 랄프 윈터 박사님은 지식이 풍부한 분이었고 안목이 균형 잡힌 분이었고 판단이 명석한 분이었고 표현이 진솔한 분이었고 가슴이 따뜻한 분이었고 시간에 충실한 분이었습니다. 저로 하여금 랄프 윈터 박사님, 존 스토트 박사님,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과 가까이 지내며 그 분들로부터 귀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예수님의 선교행적과 모슬렘 선교”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목회자이든지 선교사이든지 어떤 종류의 목회나 선교를 하든지 평생토록 힘써야 할 일은 우리들의 사도이시고 대제사장이시고 목자이시고 선교사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본 받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목회와 선교의 모델이신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가장 분명하게 나타내 보여주는 말씀이 요한복음 1:14과 마가복음 10:45이라고 생각합니다. 존 스토트 박사님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마가복음 10:45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선교행적”을 살펴보면서 선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선교를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선교는 ‘떠나는’ 것이고 ‘찾아가는’ 것이고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 집을 떠나 세상을 찾아오셔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실 아브라함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떠남’과 ‘찾아감’과 ‘됨’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선교는 ‘becoming’ 입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본래 말씀이셨고 하나님이셨는데 하늘을 떠나 세상에 오셔서 육신을 가진 사람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The Word became flesh.” 선교는 되는 것입니다. 선교는 becoming 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육’ 즉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본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살과 피를 가진 사람이 되신 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는 놀라운 일이고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물론 헬라인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셔서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죽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미련한 일이며 약한 일이며 멸시를 받을만한 일이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나 선교는 ‘되는’ 일입니다. 선교는 ‘성육’의 사건을 본받아서 백인이 흑인이 되는 일이고, 미국 사람이 한국 사람이 되는 일이고, 한국 사람이 태국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본래 앗씨시의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일부러 가난한 거지가 되었고 일부러 병든 환자가 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한센병자가 되기를 그렇게도 소원했습니다. 선교는 나 자신을 포기하고 나와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그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선교사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삶에 지친 그래서 목이 마른 수가성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 그 여인과 비슷한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여인처럼 행로에 피곤하여 주저 앉으셨다고 했고 여인처럼 목이 말랐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요 4:6, 7). 그 여자가 알아 들을 수 있는 평범하고 쉬운 말로 소통을 시도했습니다. 너무너무 황송한 일이지만 그것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고 죄인들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예수님께서 취하신 선교적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선교는 ‘떠나는’ 것이고 ‘찾아가는’ 것이고 ‘되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조동진 목사님께서 최근에 선교사 중에서 누구를 가장 존경하냐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한국에 와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던 존 로스 목사를 가장 존경한다. 그는 한국에 도착해 4?5년은 공부만 했다. 사서삼경을 비롯한 유교를 공부했고 도교와 불교를 배웠다. 유불선의 영향 속에 있던 한국인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했던 것이다. 존 로스 선교사는 한국 사람이 되는데 최선을 다한 훌륭한 선교사였다.”

 

둘째로,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천군 천사들과 함께 영광 중에서 사셨지만 하늘 영광을 떠나 세상에 오셔서 세상의 사람들과 함께 가난과 고난의 삶을 사셨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선교는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선교는 ‘성육’의 사건을 본받아서 리빙스톤이나 슈바이처처럼 백인이 아프리카의 흑인들과 함께 사는 것이고, 언더우드 선교사 4대 손처럼 미국 사람이 한국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고, 신홍식 선교사처럼 한국 사람이 태국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은 한센병자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선교는 나 자신의 평안한 삶을 포기하고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그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선교사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시자마자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과 함께 사셨고 나중에는 제자들과 함께 사셨고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0-13).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기와 병자들과 죄인들을 찾아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고 대화를 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너무너무 황송한 일이지만 그것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고 죄인들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예수님께서 취하신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조동진 목사님은 선교의 ABC 중의 하나는 선교지에 가서 무슨 음식을 주든지 그대로 받아서 먹으면서 함께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교는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선교는 선교지에 가서 대형 집회를 잠깐 하고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나라가 아닌 다른 곳에 가서 나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오래 사는 것입니다.

독일의 저명한 선교신학자 준더마이어(Sundermeier) 박사는 올바른 선교는 ‘콘비벤츠’(Konvivenz) 즉 ‘함께 사는 삶’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콘비벤츠는 브라질의 도시나 농촌에 있는 소집단들이 이웃 돕기 운동에서 유래한 것으로, ‘서로 돕고, 서로 배우며, 함께 축하’하는 공동체적 삶의 형태를 갖는다고 지적했습니다. 준더마이어 박사는 서로 돕고, 배우고 함께 축제를 경험하는 콘비벤츠의 원리를 무엇보다 복음서에 기록한 예수님의 삶에서 입증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사람들 가운데 살았으며 그들과 함께 동고 동락 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하여’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았다. 특히 예수님은 사람들과 자주 함께 식사를 나누었는데 이러한 식탁 공동체야 말로 예수님의 선교에 중심이 된다. 왜냐하면 함께 하는 식탁은 ‘공동체’와 ‘잔치’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교적 교회는 타자와 함께 사는 교회이다.” 선교는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셋째로,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섬기는’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 10:45).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몸을 어루만져 주시면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셨고, 열병환자의 손과 소경의 눈을 어루만져 주시면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모든 병자들과 모든 죄인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원수들에게까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했습니다(마 5:44). 주님께서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과 그리고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강도에게도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폈습니다. 그리고 원수에게까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했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선교는 함께 사는 것이고 모두를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 선교적인 삶을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이 사셨다고 생각합니다.저는 지난 주 토요일인 11월 12일 UBF 가을 수양회에 가서 “사랑과 선교”라는 제목으로 강의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몸으로 나타내면서 말이 아닌 삶과 죽음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증언하신 사랑의 선교사요 사랑의 순교자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선교의 깃발을 높이 그리고 강하게 휘두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만큼 십자가의 사랑과 구원을 온 세상에 강력하게 전파한 복음의 증인과 복음의 선교사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사랑과 섬김의 삶을 아주 조금이라도 흉내를 내곤 했습니다. 2005년 12월 16일 1,400만 원 상당의 선물 보따리를 가지고 강변교회가 아프간 무라취드에 세워준 학교 준공식에 참석했습니다. 그 지역의 모슬렘 지도자들과 군인들과 경찰 지도자들이 참석했고 400여 명의 어린 학생들이 참석했습니다. 저는 아프간에 두 번 방문했지만 공식적으로 설교나 전도나 기도나 강의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학교 준공식 행사를 하는 중에 아프간 어린이들이 나와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분명한 한국말 발음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저는 너무너무 놀랐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보통 때 그런 노래를 하면 테러를 당할 것입니다. 선교의 길은 반드시 설교나 전도나 강의를 하는 길이 아니고 다양한 행사나 프로그램에 치중하는 길이 아니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는 삶의 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놀라운 사실을 북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에서도 방글라데시에서도 중국 연변지역에서도 발견했습니다.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조용히 펼 때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과 가슴이 녹아지는 선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넷째로,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유에 탄생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목적이 우리 죄인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심에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증오와 분노와 분쟁으로 가득한 세상과 우주에 ‘화해’와 ‘평화’를 가져오는데 있었다고 누가와 사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화해)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6).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화해’와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그리고 사람이 죄를 짓고 과실을 범하면 그 사람의 죄와 과실을 용서하고 그 사람과 화해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5).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며 그 형제와 화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22).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죄와 사망과 저주에서 구원하시는 구세주로 세상에 오셨지만 동시에 ‘화해’와 ‘평화’의 주님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세상을 등지고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에게 화해와 평화의 주님으로 찾아가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을 찾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낮아진 모습이었고 따뜻한 모습이었습니다. 말하기 싫어하는 수가성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넸습니다. 소통을 먼저 시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사실 소통이야말로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중요한 방편입니다. 마음과 말을 주고 받는 소통이 없이 화해와 평화는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낮아진 모습으로 그리고 따뜻한 모습으로 수가성 여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여인이여, 내가 목이 마른 데 내게 물 한 모금 마시게 해 줄 수가 있소?” 그 여인은 아주 퉁명스러웠습니다. “별 사람 다 봤네. 점잖은 유대 양반이 개 같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건네며 물 한 모금까지 달라고 하시네.” 아주 무례하고 퉁명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낮은 자세로 따뜻한 모습으로 말을 건넸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 14). 결국 소통이 이루어졌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 수가성 여인은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했고 예수님을 향해서 “선지자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수가성 여인과 주님 사이에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수가성 사람들과의 화해와 평화도 이루어졌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물동이를 내 버려두고 수가성으로 달려가서 만나기 싫어하던 수가성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만난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그 결과 수가성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 4:28-30). 저는 예수님의 삶과 사역과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평화를 가장 생생하게 나타내 보이신 분이 평화의 사도 프랜시스요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이요 한국교회와 사회가 존경하던 한경직 목사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은 모든 사람들을 찾아가서 낮은 자세와 따뜻한 자세로 말을 건네고 소통하면서 화해와 평회를 이루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사람들은 물론 동물들과 식물과도 친밀한 소통을 하면서 화해와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선교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길 때 그곳에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사마리아와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가이사랴와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로마와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일본과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북한과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아프가니스탄과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사실 화해와 평화는 성경의 목표이며 역사의 완성점입니다. 선교는 화해와 평화를 이루어가는 방편이고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함께 모슬렘과의 화해와 평화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적인 일이 아닙니다. 남북의 화해와 평화는 한국교회와 한국 민족이 반드시 이룩하여야 할 필수적인 일이고 민족적인 과제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겔 37:17). 에베소서 1:10과 계시록 7:9-12은 앞으로 이루어질 우주적인 화해와 평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화해와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정치적인 방법이나 군사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진리의 깃발만을 휘두르는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씻음을 받는 일과 온유와 겸손과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가슴과 몸에 지닌 하나님의 사람들과 민족의 지도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악을 선으로 갚으며 악을 행한 상대방을 존중하고 포용하고 품었던 야곱과 같은 그리고 요셉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민족의 지도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 앞에서 일곱 번 땅에 허리를 굽히고 절하며 예물을 드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주여,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창 33:10).

남한 교회가 북에 대해서 이와 같은 겸손과 존경과 사랑의 자세를 취하여야 남북의 화해와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2007년 10월 12일 신촌 성결교회에서 림인식 목사님께서 지적한 일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기에게 악을 행한 형들을 만나자 방성대곡하며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 45:5, 7, 8). 모슬렘과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쟁과 분열로 치닫고 있는 한국과 세계 안에 지금이야말로 화해와 평화의 도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세계가 필요로 하는 선교사야말로 분노와 증오 그리고 분쟁과 분열로 치닫고 있는 세계 곳곳을 찾아가서 화해와 평화를 이룰 수 있는 화해와 평화의 도구로서의 선교사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씻음을 받는 일과 온유와 겸손과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가슴과 몸에 지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본래 일본 사람을 싫어했고 북한 사람을 싫어했고 중국 사람을 싫어했고 모슬렘을 싫어했고 타 종교인들을 싫어했었습니다. 자유주의자도 싫어했고 순복음주의자도 싫어했었습니다. 그러나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므로 조금씩, 조금씩 저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어졌습니다. 일본 사람을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고 일본 교회와 교류하는데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북한 사람을 사랑하며 북한 사람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중국 사람을 사랑하며 중국에 있는 조선족 어린이들 170여 명을 지난 10여 년 이상 돕게 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학교 하나를 지어주고 아프간 어린이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기도 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도 조용기 목사님도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고 가까이 소통하며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5개 종단의 지도자들과 친하게 교제하면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을 만들기도 했고 작년 8월 27일에는 5개 종단 지도자들 9명과 함께 밀가루 300톤을 가지고 북한 개성에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오기도 했습니다. 동물들과 식물들과도 친밀하게 소통하는 흉내를 내기도 합니다. 개들도 고양이들도 새들도 물고기들도 식물들도 친밀하게 다가가면 반갑게 반응하는 것을 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일이고 조금씩, 조금씩 흉내를 내고 배워서 되어진 일입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이 물려주신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평화의 귀한 영적인 유산들을 조금씩 조금씩 물려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선교가 힘써야 할 일은 무엇보다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설교만 하고 강의만 하고 가르치기만 하고 함께 놀아주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선교는 설교만 하고 강의만 하고 가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놀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가 만들어낸 말이지만 틀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셨고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도 하시고 대화도 하시면서 함께 놀아주셨다고 생각합니다. 2005년 11월 12일자 기독교개혁신보에 실렸던 저의 글을 여기 그대로 소개합니다.

“나는 선교지를 여행하면서 현지인들과 선교사들과 자녀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사랑과 힘과 기쁨이 되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내가 지난 10여 년 동안에 발견한 한 가지 사실은 설교나 강의가 반드시 저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때로는 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놀아주는 것이 위로와 기쁨이 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2년 전 브라질을 방문한 일이 있다. 이틀 동안 밤마다 강성철 선교사와 총신 제자 한 사람과 젊은 초년생 선교사 한 사람과 밤 늦게까지 볼링을 친 일이 있다. 아주 재미가 있었다. 물론 내가 모두 이겼다. 그런데 내가 생각지도 못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강성철 선교사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이다.그 젊은 초년생 선교사가 많은 스트레스와 좌절을 경험하고 있었는데 스승인 나하고 이틀 동안 볼링을 치고 나서 위로와 격려와 힘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선교에 임하게 되었다는 반가운 말을 들었다.” “내가 5년 전에 불라디보스톡에 간 일이 있었다. 어느 날 20여 명의 선교사 자녀들과 서너 시간 동안 열심히 논 일이 있었다. 게임도 하고 선물도 나누어주고 농구도 같이 하고 그네도 같이 타고 시이소도 같이 타며 신나게 놀았다. 어린이들이 나를 너무 좋아했고 모두 기뻐했다.유치부 어린아이 하나는 내가 떠날 때 예쁜 상자를 선물로 주었다. 그네를 함께 탄 아이였다. 그 상자 속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또 오세요. 정예찬 2000. 6. 10’ 하루 오후에 선교사 사모들 대 여섯 명을 데리고 바닷가에 가서 놀다가 왔다. 맛있는 바다 가재도 사 주었다. 너무너무 좋아했다.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가 스승이 되는 내가 그들을 데리고 바닷가에 가서 함께 놀아준 것이 그들에게 많은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 “나는 두 주 전에 한 주간 동안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을 다녀왔다. 러시아 목회자 50여 명과 한인 선교사 20여 명이 한데 모여 연해주 목회자 수련회를 가졌다. 내가 저들에게 강의도 하고 설교도 했지만 내가 주력한 것은 저들과 함께 교제하고 음식을 먹고 놀아준 것이었다. 도착하던 날 저녁 46명의 한인 선교사 가족들과 한국식당에서 음식을 나누었다 고등학생이 된 은덕이라는 여학생이 나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5년 전 내가 블라디를 방문했을 때 어린 아이들 20여명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 때 은덕이는 초등학생이었다. 은덕이는 그 사진을 고이 간직하였다가 다시 자기들을 찾아온 나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나는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함께 놀아줄 때 선교사들은 물론 현지인들의 마음이 열립니다. 그들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들의 마음에 사랑이 들어가고 복음이 들어가고 예수님이 들어 가십니다.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선교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제물 되는 삶을 사시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2005년 12월 31일 강변교회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서 2006년도 새해의 기도 제목을 다음과 같이 정한 일이 있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예수님의 마음과 생각과 눈물을 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저는 2010년 1월 1일 새해의 소원과 기도 제목을 다음과 같이 정한 일이 있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눈물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온유와 겸손과 착함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수고와 고난과 희생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기독교는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으로 이루어진 종교입니다.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없이 선교가 이루어진 일은 거의 없습니다. 1866년 9월 5일 대동강 변에서 27살의 젊은 나이에 순교의 제물이 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의 제물 되는 죽음이 없었다면 1885년 조선땅에 선교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제물 되는 죽음이 16년 후인 1882년에는 조미 수호 통상조약이 체결되게 했고, 그 2년 후인 1884년에는 알렌 의사가 조선에 들어오게 했고, 그 다음 해인 1885년에는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 땅에 들어오게 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한 사람의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흐름’에 얼마나 길고도 깊은 고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놀라움과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헨리 아펜젤러와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에 와서 ‘희생적인 삶’ 즉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교회와 조선의 교육과 조선의 의료 사역의 기초가 놓여졌습니다. 저는 언더우드 가의 3대가 조선 구원의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여 조선 사람들에게 끝이 없는 사랑을 쏟아 부으면서 희생적인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희생적인 제물 되는 죽음을 죽어 지금 양화진에 모두 함께 묻혀 있다는 사실 앞에서 지극한 경외감과 존경과 사랑을 느끼면서 한 없이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선교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구원의 역사와 선교의 역사를 만듭니다. 토마스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조선땅에 구원의 역사와 선교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모슬렘 선교도 북한 선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지적한 여섯 가지 선교의 모습을 몸과 마음과 삶과 사역에 지니고 찾아가면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구원과 화해의 선교가 아름답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한 가지 추가해사 말씀을 드리면 모든 선교에는 필수적인 파트너십 즉 협력이 절대로 필요한데 모슬렘 선교와 북한 선교야말로 파트너십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쟁은 불신과 반발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들간의 파트너십과 현지인들과의 파트너십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파트너십이 이루어지려면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온유 겸손 섬김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선교가 무엇이며 선교사가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았습니다. 선교가 무엇이고 선교사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선교사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로, 선교는 떠나는 것이고 찾아가는 것이고 되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선교는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셋째로, 선교는 함께 살면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넷째로, 선교는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선교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파트너십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우리 주님께서 사시고 보여주신 삶과 사역의 모습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는 너무 이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 유행에 치우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교도 그런 경향에 치우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최근에 자신이 복음 사역을 다시 시작한다면 정치와는 무관한 사역을 하고 싶다는 고백을 한 일이 있습니다. 목회 사역은 물론 선교 사역도 좀 단순해지고 좀 바보스러워지고 좀 어리석어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에 대한 순수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가슴과 몸과 손발에 지니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를 온유와 겸손과 따뜻함으로 품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몸에 지니고 약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삶을 살면서 사역을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우리들도 조금씩, 조금씩 주님 닮은 선교적인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들도 주님 닮은 선교적인 삶을 조금씩, 조금씩 살아갈 수 있게 하시고 선교적인 죽음을 죽을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우리들에게 십자가의 피를 부어주셔서 십자가의 사랑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랑과 구원과 화해와 평화의 도구들과 제물들로 삼아주시옵소서!

출처 :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선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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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에게 각국 현지언어를 교육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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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현지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블러그 소개 / 폴리아카데미 http://poly-academy.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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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진한 선교사, 자기성장 기회 얻고 싶다”

필요성 절실하지만 교육 경험은 적어 … ‘개인영성관리’ 최우선 과제로 뽑아

선교사로 나가기 전 훈련만으로 은퇴할 때까지 선교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시대가 급변하고 있고, 현지 선교 환경, 선교 전략 또한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이 제대로 재충전을 하지 못해 탈진하고 중도탈락하는 사례도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선교사 계속교육(재교육)은 한국 선교계의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지만, 실제 제대로 계속교육을 실시하는 곳은 많지 않다. 이에 세 차례에 걸쳐 선교사 계속교육의 필요성과 현황, 과제 등을 진단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 선교사 계속교육은 한국 선교의 질적 성장을 위한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사진은 GMS 선교사 계속교육에서 참석자들이 기도하는 장면

 

“한 선배 선교사의 말이 기억난다. 우리는 다 사병 선교사라는 것이다. 군대에는 연차에 따라 위관급 훈련이 있고, 영관급 훈련이 따로 있지만, 우리는 다 논산훈련소 신병 훈련으로 그친다는 것이다.”

이대학 선교사(동서선교연구개발원 한국대표)의 말이다. 이 선교사는 최근 발간된 한 선교잡지에서 선교사 계속교육의 필요성을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선교사 계속교육이 △선교사들을 영적·육체적·사역적·가정적·관계적으로 건강하게 하고, △효과적인 사역이 되도록 돕고, △변화하는 시대환경에 잘 적응하도록 돕고, △선교사의 탈진과 중도탈락을 예방하고, △선교사의 경력전환을 준비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 선교사는 선교사 계속교육과 관련해 지난해 말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도 소개했다. 설문조사는 5년 이상 선교 경험이 있고 현재 선교사로 활동 중인 선교사 42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설문 결과 선교사들은 선교사 계속교육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먼저 ‘선교사 계속교육을 받아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없다’(18명)이라는 대답이 가장 많았다. 이어 ‘한두 번’(15명), ‘여러 번’(6명), ‘기타(학위과정)’(1명) 순이었다. 이 선교사는 “계속교육을 받아본 경험이 전혀 없다고 응답한 선교사들 가운데는 선교 경력이 15년이나 20년 이상 된 선교사들도 적지 않았다”며 “그동안 선교사 계속교육이 얼마나 이루어지지 않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결과”라고 해석했다.

 

선교사 계속교육의 필요성을 묻는 질문에는 응답자의 70% 가량인 27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이어 선교사 계속교육이 필요한 중요한 이유를 2가지 선택하라는 질문에는, ‘선교사의 자기성장’이라는 응답이 27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선교사의 탈진 예방’(17명), ‘선교사의 사역 개발’(14명), ‘선교사의 장래 진로 설정에 도움’(11명), ‘파송교회와 기관과의 효과적인 연합’(7명) 순이었다. 이 선교사는 “계속교육을 통해 선교사가 전인적으로 성장해 탈진을 예방하고 효과적이고 열매 맺는 선교 사역을 감당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설문 결과를 설명했다.

계속교육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 내용을 묻는 질문(중복응답)에는 ‘성경연구과 개인영성’(18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선교 사역 관련’(17명)과 ‘리더십과 자기개발’(11명)에 대한 요구도 컸다. 이어 ‘상담’(8명), ‘건강 및 장래 진로’(7명), ‘가정 및 자녀교육’(2명) 순이었다.

교육 내용과 관련해 이 선교사는 “선교사들이 가장 필요한 내용으로 선교사의 개인영성 관리를 최우선적으로 꼽은 것은 선교사 계속교육의 필요를 묻는 이유로 선교사의 자기성장, 선교사 탈진 예방을 가장 크게 본 것과 무관하지 않다”며 “선교사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영성 관리를 잘 할 때 선교지의 어려운 환경적 문제나 인간관계의 문제를 잘 극복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고 해석했다.

선교사 계속교육의 시기를 묻는 질문에는 ‘2∼3년에 한 번씩’ 계속교육을 하면 좋겠다는 응답이 전체 응답자의 절반에 가까운 19명으로 가장 많았고, ‘안식년’(12명)에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응답도 많았다. 계속교육이 이뤄지는 장소로는 ‘한국’이 16명, ‘선교지’가 9명, ‘사역지가 아닌 제3국’이 5명 순이었다. 이 선교사는 “선교사들은 적어도 선교사역 주기 한 텀(Term)에 한 번씩은 선교사 계속교육이 이뤄지기를 원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계속교육이 이뤄지는 것이 좋지만 장소보다는 교육 내용과 프로그램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설문 조사에서 알 수 있듯 선교사 계속교육은 한국 선교계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특별히 한국 선교계의 질적 성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큰 상황에서 선교사 계속교육은 선교사의 질적 성장에도 중요한 요소가 될 전망이다.

이 선교사는 “선교사 계속교육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며, 선교 사역의 열매와 미래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며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과 아울러 파송된 선교사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효과적이고 열매 맺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선교사, 파송교회, 파송기관이 함께 선교사 계속교육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출처 : 기독신문 /조준영 기자  joshua@kidok.com

선교사 언어 교육원에서는 선교사들에게 각국언어 현지어를 교육하고 있다

전화 02-749-0316 /080-7597-7212  / 강사 : 폴리목사,

인터넷 주소 : http://www.ind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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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탄핵 사태에 주요 교계 인사가 보내는 메시지 

 

  이영훈 한기총 대표회장, 김영주 NCCK 총무, 전명구 기감 감독회장, 채의숭 국가조찬기도회장,

이성희 예장 통합 총회장, 김선규 예장 합동 총회장(위에서 시계방향으로).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건 앞에 한국교회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보수와 진보를 넘어 교계 지도자들은 이번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고 갈라진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수행하자는 데는 같은 입장이었다. 또한 현재의 위기를 기도로 극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도자를 세우자며 한목소리를 냈다.

 

이영훈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인용 결정에 대해선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 이번 헌재 결정의 요지는 법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이다. 특별히 권력자들은 겸허한 마음으로 국민을 섬겨야 한다. 절대 권력을 남용하면 안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법 앞에 겸손해져야 하며, 헌재의 결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사회는 국민 대통합을 이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있다. 모든 교회지도자들이 마음을 합해 갈등 대립을 치유하고 힘을 모으자. 다음 국가지도자는 국민을 겸허히 섬기는 지도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도자를 세워야 한다.

 

김영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한국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133일 동안 광화문 광장을 촛불로 밝혔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탄핵 심판이 인용된 것을 환영한다. 조기 대선이 치러질 텐데 정치권은 성숙한 시민정신의 뜻을 잘 헤아려 좋은 정치를 펼쳐나가야 한다. 탄핵심판이 진행되는 중 한국사회가 찬반 두 진영으로 나뉘어 극심한 갈등을 빚어왔다. 이제는 모든 갈등을 종식하고 대한민국의 미래만을 생각하며 함께 나아가야 한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갈등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함께 기도해야 한다.

 

전명구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 이번 판결의 의의는 선거 절차를 통해 통치권을 위임받은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권한을 잘못 사용한다면 엄중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온 국민은 헌재 판결을 존중하여 더 밝고 공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동안 촛불과 태극기로 나뉘어 극심한 갈등과 분열을 겪었다. 이제는 모두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국회는 분열과 반목이 없는 다시 하나 되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 1000만 기독교인들은 국가안정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사랑과 용서로 하나 되기 위해 앞장서야 한다.

 

김선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장=이 정도에서 혼란이 마무리되게 된 데 대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국민 모두가 하나 돼 이 혼란을 빨리 수습하고 새롭게 도약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이를 위해 대선 후보들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국민통합을 위한 행보에 앞장서 주기 바란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더욱 기도해 주기 바란다.

 

이성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장=이제부터 사회는 안정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탄핵을 찬성했든 반대했든 국민 모두가 헌재 판결을 인정해야 한다. 의견이 달랐더라도 서로를 품고 위로하며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힘써 노력하자. 이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은 주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불행한 역사적 사실이 국가발전의 자양분이 될 수 있도록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됨이다. 화합을 통해 국가 위상을 높여야 할 것이다.

 

채의숭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회장=시편 127편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게 돼 있다. 대통령 탄핵과 사드 논란, 경제적 어려움 등 각종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데 이때일수록 하나님께 물어봐야 한다. 현재의 난국은 인간의 힘으론 절대 해결이 불가능하다. 인간적인 생각에는 조바심이 생기기도 하고 두렵고 떨리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고난 앞에서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께선 지혜를 주시고 문제 해결의 길을 보여주실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국민이 위대한 국민이다. 이런 때일수록 하나님께 물어보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해 주실 것이다.

 

출처 : 국민일보 / 신상목 백상현 장창일 최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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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선교사 파송에 공헌하겠다”

선교사언어교육원 서윤석 목사

 

 

 

해외에 선교를 나갈 때 마다 꼭 해결해야하고 부딪혀야 하는 것이 해당 나라의 언어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영어권이 아닌 나라(영어권이라 해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의 언어들은 간단한 회화나 인사말 정도를 배워 나가거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그 나라 원주민들과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배워야만 한다.

그러면 국내에는 전 세계 미전도 종족 선교를 위해 그 현지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없는 것일까? 최근 1여년 전부터 서윤석 목사는 선교사언어교육원을 설립하고 선교사로 나가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신학을 공부하기 전 다국어 연구소를 운영했던 서 목사는 이 곳에서 각 나라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 등을 가르치고 해당 나라의 성경과 찬양도 학습하고 있다. 또한 각 나라 언어의 컴퓨터 학습과 교회주보 작성 그리고 홈페이지 및 동영상 제작까지 선교사님들이 필요한 것들을 알려 준다.

서 목사는 “현지인의 관점에서 그들의 언어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진정한 선교사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장단기선교 사역에 있어 정말로 준비된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세계 각국 언어를 가르치는 선교사언어교육원이 선교사 언어 교육기관으로서 큰 역할을 할 수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란다”며 많은 교회들과 선교사들의 참여를 요청했다.

아울러 서 목사는 “저희는 파송되는 선교사들의 언어분야에서 공헌하고 싶다. 작년에도 미전도 종족 언어를 중심으로 강의가 이루어 졌지만 올해에도 기독교 박해지역 언어를 중점으로 강의를 할 예정이다”면서 “선교사 언어 교육 뿐만 아니라 장단기 선교사역 팀을 전문적으로 교육시키고 선교사 재교육과 쉼터도 마련할 계획이다” 선교사언어교육원의 교육 내용과 비전도 밝혔다.

 



현재 선교사언어교육원은 전국 어디에서나 편하게 와서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했으며 진행 중인 외국어 교육은 30개 가량이다. 설립 초기에는 서 목사 홀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여러 외국어 전문가 들이 도움을 주면서 더욱 교육이 활성화 되고 있다. 앞으로 미전도 종족과 기독교박해지역으로 더 많이 나가야 할 필요성이 점차 대두되고 있는 선교 현실에 맞춰 선교사 언어교육원의 사역과 활동이 계속 기대되는 이유다.

 

홈페이지 : http://www.indo.co.kr 

위치: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626-1

전화 : 02-749-0316 / 080-7579-7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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