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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있는 자는 들어라


세례 받으러 나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종교 전문가들에게 요한은 지체 없이 폭언을 퍼 붓는다. 독사의 족속들아!(마 3:7) 질책을 한다. 화인(火印)맞은 얌체 양심으로 뻔뻔하게 몰려온 저들의 외식을 갈기갈기 찢은 것이다. 거룩하신 성자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을 향하여 인자하시고 온유하신 품위와는 달리 독사의 새끼들아! 뱀 같은 자들이라 하시며(마 12:34) 회개할 여유까지 이미 포기한 저들에게 천둥소리로 심판을 선언하셨다. 섞인 것이 없는 진품 후레자식(토끼가 여우를 비꼬는 말: 두껍전)들일 것이다. 친히 그의 피로 세워진 소중한 일곱 교회를 상세히 진단하신 우리 주님은 마지막 결론을 어김없이,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계 2:7)로 끝을 막음하신다. 이기는 자가 받는, 귀 듣는 그대로 실천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진귀한 천국상품을 나열하시면서 꼭~들으라는 한 품으신 말씀으로 마무리하셨다. 귀를 지으신 하나님(시 94:9), 창조자의 말씀을 피조물은 정녕히 경청하는 순리로 따라야함에도 불구하고 슬프게도 그의 택함 받은 자녀들까지 정로를 빗나가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어지는 가슴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전달한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사 1:2) "내 종과 같은 소경이 또 있으랴? 내가 보낸 심부름꾼과 같은 귀머거리가 또 있으랴? 나의 사명을 띠고 가는 자와 같은 소경이 또 있으랴? 야훼의 종과 같은 귀머거리가 또 어디 있으랴?"(사 42:18) 아침마다 경건하신 자의 경고를 들으면서도 배짱 내밀고 불쾌한 싸움을 지속하는 으뜸 귀머거리가 자기 종들이란 지적이시다. 버나드 쇼가 생전 자기 묘비명(墓碑銘)으로 말한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를 같이 써야 할 사람들이다. 허탄한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세속적인 귀(딤후 4:4), 옛 삶에서 도무지 빠져나오지 못하여 육정에 묶인 할례 받지 못한 귀(렘 6:10), 영성을 키우는 말씀에는 느리고도 둔한 귀(마 13:15), "주께 등을 돌리고, 뻣뻣하여 고집을 버리지 못하였으며, 복종하지 않았습니다."(느 9:29) 성경 곳곳에 주님의 탄식이 장엄한 추수의 날까지 지속될 것만 같다. 하나님께서 닦달하시는 데도 꼼짝 않기로 맹세한 것 같다.

아담아! 탈선했구나!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음성을 똑똑히 들었으면서도,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속삭이며 회복할 기회를 주셨음에도, 아담과 그의 핏줄 가인 모두가 잡아떼기로 일관한, 살벌한 대가를 우리는 잊을 수가 없다.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님은, 만일 돌이키지 않으면 내 입에서 너를 뱉어 버리겠노라 하셨다. 땅에 뱉어버린 더러운 침! 맛 잃은 소금을 길가에 흩어버려 사람들에게 밟히며 창피스럽게 살아야 하는 기구한 신세! 그러나 이것까지는 참을 수 있을 것이다. 최후의 날에, 내가 너를 알지 못하노라는 준엄한 심판주의 말 한마디에, 하염없이 문 밖에 서서 이를 갈고, 가슴 치며 통곡할 무궁한 그날을 감히 상상해 보았는가. 당신의 진짜 하나님은 누구신가 묻고 싶다.

"귀를 기울여 내 소리를 들어라. 정신 차려 내 말을 들어라."(사 28:23) 하신다. 주님의 음성이 지금 우리 귀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스스로 농아가 되지 말라. 중요한 것은 복음의 진보이지 영웅적 행동이 아니다. 순종이 제사(예배)보다 급선무란 원칙을 잊으면 ‘지옥불’만이 대기될 뿐이다. 귀 달렸거든, 지금 바로 듣고 돌이켜야 한다는 주님의 애원을 묵살치 말아야 한다. 할렐루야!


/이동휘 목사(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바울선교회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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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몇 살 나이로 사는가?

 

우리 조상 야곱에게 이집트 왕 바로는 상면하자마자 나이를 물었다. 야곱도 꺼림이 없이 “백삼십 입니다. 그러나 험한 세월을 살았노라”고 덧붙인다(창 47:9). 고달픈 여정이었으나 이스라엘을 탄생시킨 묵직한 생애였다.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의 나이가 있다고 한다. 시간과 함께 먹는 달력의 나이, 건강수준을 재는 생물학적 나이(세포나이), 지위와 서열의 나이, 대화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정신적 나이, 마지막으로 지력을 재는 지성의 나이란다. 그러나 제 육의 나이가 있음도 알아야 한다. 솔로몬은 겨우 열여섯 소년인데도 천하의 왕과 모사들이 그의 지혜를 들으려고 선물을 싸들고 몰려온 것을 보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흔한 명언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반면 누구보다 꽤 많은 경험을 쌓고 인생의 슬기를 배웠어야 할 노인에 대한 진노를 냉혹한 질책으로 선포한 것을 보면 나이 헛먹었다는 탄식도 실감나는 현실이다. “너희는 이제 내 성소에서부터 시작하여라. 그러자 그들은 성전 앞에 서있던 장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하였다”(겔 9:6 표준새성경) 이마에 표 없는 가짜 종교인에 대한 무서운 심판장면이다. 길게만 살았을 뿐 값진 보배인 제 생명 하나도 간수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성공 자들이었다. 명예를 빼앗기 위해, 재물을 훔치기 위해 초심을 잃고 성령의 경고를 당돌하게 저버린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들일 수도 있다”(왕상 13;26) 오히려 젊었을 때는 영성과 마음 밭이 정갈했던 존귀한 자들이, 사울 왕을 비롯해 다윗, 솔로몬, 히스기야, 요시야 같은 쟁쟁한 성군들이 나이 들어 늙을수록 점점 나빠진 것을 보면 신선함을 아예 팔아먹은 것 같다. 남의 가슴에 어혈 짓게 한 지능적인 교활함과 욕망을 부추기면서 어둔 함정 속에 빠져 들어가는데도, 연륜이 더할수록 분별력은 무디어지는 것 같다. 명함과 이력서 속에 박힌 거짓 것들이 나풀거리며 고발하는데도 비죽거리며 자기도취에 푹 빠진 처량한 모습이다.

앞길 가로 막는 살벌한 절벽, 성한 죽지를 마구 부러뜨려 되찾을 수 없는 엄청난 손실 위기, 무자비한 일방적 침략 앞에, 어쩔 수 없었노라 감히 최후의 큰 날에 변명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 빌려서 살았던 우리 생애가 이 땅에서 끝이 나고 재판장 앞에 서게 되는 날이 필연코 오고야 말 것이다. “매 순간을 예배로 살았습니다. 일 분 일 초 마다 하나님 나라가 들어가 있었으며 하찮은 순간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코사드)라고 고백하는 자의 뿌듯함은 얼마나 황홀할까. 창창한 젊은 나이로, 단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미움 받고 돌에 맞아 절명한 순교자 스데반의 후손들이 “ 죽음이여 자만하지 말거라! 한줌 자고 나면 죽음아! 네가 죽으리라” 바로 어제 밤 속삭인 밀담 같은데 그렇게도 빨리 승리의 부활 새벽을 주셨습니까! 외치며 춤추는 그 영광에 참예한다면 얼마나 벅찬 감동일까.

우리는 제6의 나이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에게 시집가 예수님 가문에서 눌러 사는 신접살이다. 옛사람은 옹골지게 죽고 거듭난 날을 진짜 생일로 셈하는 천국시민으로 사는 별난 생활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육체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 2:20)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창 6:2) 대혼란이 왔던 그 어설픈 꿈을 과감하게 밀쳐내고 조용히 천국 계단을 밟는 순례길이다. 파장의 끝물을 축제의 잔치로 바꿔놓은 가나 혼인파티를 다시 여는 기쁨이다. 오늘은, 내 남은 인생의 처음 시작하는 날이라 선언하며 춤추며 새벽을 여는 ?라(사 62:4) 인생이다. 사도행전에서 갓 튀어나온 영성 넘치는 신랑이요, 연인 품에서 금방 빠져나와 예수님 사랑에 침몰된 앳된 소녀의 얼굴이다.

성전에 올라 가셨던 열두 살의 예수님의 때 묻지 않은 청순한 자태, 서른세 살만 기억하도록 사셨던 영원한 청년 예수님처럼! 그 나이로 깔끔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할렐루야!

 

/이동휘 목사(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사단법인 바울선교회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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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체 말고 진리 편에 서라


갈멜산 중턱에서 어느 날 희한한 전투가 벌어졌다. 사백오십 명과 맨발의 시골 청년과의 능력대결이다. 한쪽은 왕비의 지원을 받는 위세등등한 바알신 제사장들이고 야인 엘리야는 디셉의 시골 선지자다. 엘리야의 야무진 절규가 내린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 서서 머뭇머뭇 하느냐. 하나님이냐, 바알이냐를 택하라"(왕상 18:21) 더펄머리에다가 가죽 띠를 두룬 자의 당돌한 외침은 광야에서 다져진 영성의 위엄이다. 드디어 참신을 가리는 시합에서 하나님의 승리로 끝나자 사악한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은 기손강에 수장 당하는 혁명으로 이어졌다. 약속의 땅을 분배받은 지가 오래인데도 철병거가 무서워서 주저만 하는 일곱 족속에게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수 18:3) 긴급한 출동을 명했다. 임종을 앞둔 여호수아는 변덕스러운 그 백성의 갸우뚱거림에 일침을 놓는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더듬거리는 롯의 처와 딸들에게는 팔목까지 끌고 가시는 하나님이시다. 지체하면 죽기 때문이다(창 19:16) 세상은 사탄의 종자들과 하나님의 군사가 휴전 없는 길고 긴 영적 전쟁을 치르는 현장이다. 예수님께서는 넓은 길 사망의 길과, 좁은 길 영생의 길(마 7:13) 두 갈래 길이 있음을 가르치시며 필수적인 선택을 호소하셨다. 천국창고에 쌓이는 곡식과 풀무 불에 소멸되는 가라지의 최후로 모든 것이 결판나기 때문이다. 화초인가 잡초인가, 지금 바로 자기가 설 자리를 잡아야 한다.

일단 부름 받은 하나님의 군대 가운데도 뚜렷한 차이가 있음을 경고하셨다. 같은 곡식인데도 알곡과 쭉정이가 있다. 충성하는 선한 목자가 있고 삯군에 속한 자가 있다. 고통 속에 처한 병든 자를 돌보는 양과에 속한 자가 있는가 하면 무정한 염소 떼에 소속된 자가 있다. 등에 기름을 가진 지혜로운 처녀가 있는 반면 기름을 준비 못한 어리석은 가짜가 있다(마 25:). 비웃음이 아닌 웃음에 익숙한 자로, 아첨 아닌 칭찬에 능숙한 자로, 외면보다 내면이 알찬자로, 조소가 아닌 미소의 입술 가진 자로 처신을 바꿔야 하리라.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은 충성된 자(잠 25:13)와 눈에 연기 같은 게으른 자(잠 10:26) 사이에서 선택은 제각기 몫이다. 허술남 보다 완벽남이 좋은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여호수아 같은 최상의 강자를 기뻐 쓰심도 알아야 한다. 당시 원수들 중에 이스라엘 군대와 감히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다(수 21:44). 직면한 무서운 시련도 훌쩍 넘길 용사가 될 대비를 해야 한다. 길에 놓인 걸림돌을 타박하는 대신 디딤돌로 삼는 슬기로운 자로 변신하라. 위기 앞에 떨기 보다는 이 시험을 비켜 가면 대로가 열릴 고비라고 생각하라. 되씹고 겹씹으며 고질적으로 괴롭히는 그 작자(?)나 환경을 내게 부과된 천형(天刑)이라고 원망하는 대신 천혜(天惠)라고 해석하라. 답답함을 담대로 바꿔 맞서라. 분노에 치우치기 보다는 그를 조종하는 사탄에 대해 의분을 가져라.

 

어떤 길목에 섰든지 생각을 춤추게 하라. 우리는 주님의 섭리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셨다. 나는 불행하다 생각하면 어두운 가난이 될 것이고 행복하다 생각하면 화려한 가난이 될 것이다. 불평은 인생감옥을 만들 것이고 감사는 인생감탄을 만들 것이다(소천). 행운과 대박에 기대는 막연한 자가 아니라 아예 행복한 자의 명단에 등록하라. 요동을 모르는 진리의 사람, 반석의 사람이 되어라. 할렐루야!

 

이동휘 목사(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사단법인 바울선교회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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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란 무엇인가?

 

이번에는 선교사로서 살아가면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잘 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선교사로 일해 오면서 선교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서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를 해 보았습니다.


선교란, 첫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것이고 둘째는 다른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그리고 셋째는 주를 위해 순교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선교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것이다.

선교사가 하나님을 살아 계신다고 믿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마는 자주 우리는 선교를 자기가 할 때가 있음을 느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면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고 철저하게 그 분의 동역자로서 충성을 다 해야 할 터인데 자기가 계획하고 자기 지식과 경험과 이성에 의존해서 일하려 할 때가 많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 결과 모든 일에 조급하게 되고 선교사 본인의 욕망에 따라 선교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이신데 그 분을 바라보면서 오래 기다리는 것이 잘 안됩니다. 무엇이든지 빨리 빨리 해결해야 속이 시원한 것 같고 내가 세운 계획대로 되어 져야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기다리게 하시는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는데 자기 스스로 앞서 나가면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사울 왕이 전쟁에 나가면서 하나님께 제사드리고 나가기를 원하여 하나님의 제사장인 사무엘을 기다리다가 빨리 오지 않자 급한 마음에 자기 스스로 번제를 드리게 되고 결국 그 나라를 잃고 말았듯이 말입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고 그 분이 인도하심을 믿기에 우리는 끝가지 기다릴 줄 아는 동역자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기도가 선교이다.

사탄의 전략은 선교사들이 절대 하나 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선교사 사이를 이간시키고 불화를 일으키며 시기하며 사랑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 사회에 하나됨과 일치를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선교사를 위해서 기도하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 지 말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또한 선교를 하면서 잘 안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다가 하나님께 받은 마음은 다른 동료 선교사, 선배 선교사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너의 선교 사역이라고 하셨습니다. 생각해보면 선교 현지의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병든 사람을 위해서는 열심히 기도하지만 또 무슨 사역 프로젝트를 위한 기도는 하지만 동료 선교사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그리 열심이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기도할 때마다 같은 지역에서 일하고 계시는 선교사님들의 이름을 일일이 들어 가면서 기도했더니 성령의 하나되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선교사님들을 만나도 감정의 벽을 넘어 가까이 하고 싶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싶고 협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순교가 선교다.

우리 모두 다 죽습니다. 그러나 주를 위해 온전히 살다 죽으면 그것보다 더 값진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를 위해 온전히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순교라고 믿습니다. 매일 매일의 삶이 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주를 위해 드려진다면 그것이 순교하는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주를 위해 매일 매일 삶을 드리는 선교를 한다면 그는 순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순교를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선교사로 불러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선교사로 지원하는 자는 다 순교하기 위해 지원하는 자라고 믿습니다. 이런 자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이고 무시무시한 일이 되겠습니까? 사는 것을 잘 살아야 하지만 죽을 때는 더 잘 죽어야 합니다. 주를 위해 죽을 수 있으면 가장 잘 죽는 것이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순교를 각오하고 선교사로 입문하였는데 시간이 갈수록 자기를 위해 살고 죽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자리를 잡아 간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순교가 잘 안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순교한 형제들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의 마지막을 보는 듯 했습니다. 그들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 모두는 얼마나 뜨겁게 기도했었습니까? 왜? 그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선교사들이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함께 사역하고 있는 동료 선교사들이 그렇게 죽음가운데 놓여 있다면 그들을 위해 어찌 기도하지 않을 수 있으며 그들을 살아서 다시 만나는 일에 어찌 감사의 눈물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예수님도 죄없이 죽임을 당하셨고 그의 제자들 거의 모두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를 따르는 우리 모두 다 순교하는 선교사인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바보 같습니다. 바울선교사는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다고 선포하고 사는 자들입니다.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자들입니까?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해해 웃습니다. 자기 밥그릇 찾아 먹자고 싸움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을 만나면 좀 웃음이 나옵니다. 그러나 깊은 존경심이 동시에 생겨납니다.


바울선교회에 불러 주신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선포하며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게 하시고 다른 동료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는 선교를 펼치게 하시며 권리는 포기하고 의무만 있다고 말하며 순교하기를 작정하는 바보들의 행진에 동참시켜 주신 것 감사합니다. 어디에 있어도 바울 선교회 선교사가 그립습니다. 보고 싶고 만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을 함께 나누는 선교사요 바울의 동역자들이기에 그렇습니다. 바울선교회 선교사님들 승리합시다. 바울의 후예들이여 우리 모두 다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구원을 얻으며 진리를 알기를 소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열심히 선교하십시다.

 
 /장병조 국제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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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는 섬기러 간다

/장병조 선교사(바울선교회 국제본부장)

 

예수님은 이 땅에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고 섬기러 오셨다고 성경은 말한다.예수님의 제자들인 선교사도 선교지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러 가는 것이지 선교지 사람들에게 섬김을 강요하러 가는 것이 아니다.

 

태국이란 나라는 왕이 존재하는 나라이다. 국왕은 백성들의 어려움을 잘 돌아보고 백성들을 사랑하고 백성들을 위해서 늘 연구하는 왕이라고 알려져 있고, 태국 국민으로부터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즉위한 지 61년이 지난 지금도 통치하고 있는 장수하는 왕이다. 이 나라의 특징은 왕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왕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보답하려는 삶을 살도록 가르친다. 만약 그 누군가가 자기 나라 왕에 대해 불충하게 행동하고 은혜를 모르고 행동한다면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 은혜에 보답하지 않는 자는 그 나라 국민이 아니라고 말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낙인을 찍을 정도이다.

 

그래서 태국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어 독생자 예수를 아낌없이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도록 내어 주신 은혜로운 분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게만 해준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고자 하는 태국인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태국이 복음화 되는데 그 기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미약한 것은 선교사인 나의 삶에, 혹은 태도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를 스스로 반성해 보게 한다.

   

어느 나라이든지 그 나라에 선교하러 들어간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현지인들을 섬길 때 현지인들은 깊이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외국인이고 당신은 우리보다 가진 것도 많고 배운 것도 많은 사람이며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인데 왜 우리 나라에 와서 우리와 같이 비천한 사람들을 이렇게 섬기는가? 왜 우리 나라에 와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저들이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를 섬기러 왔고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우리에게 은혜를 끼치고 있는 것이다”라는 답이 내려진다면 그들 또한 자기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풀려는 자들에게 최선을 다해 보답하고자 할 것이라고 믿는다.

   

선교는 이렇게 선교사들이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을 살아 그 현지인들로 하여금 감동받게 하여 그들 스스로 은혜에 보답하려는 자세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선교하러 나간 사람들의 입술에서 선교현지 사람들을 무시하고 폄하하는 말을 하거나 그들을 부를때 ‘걔들, 그 아이’ 이런 식으로 부른다고 한다면 그들이 우리에게 돌려줄 수 있는 것은 무시받은 만큼의 서러움과 멸시가 될 것이다. 현지인들을 마음에서부터 존경하여 대한다면 그런 말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평소에 생각하는 대로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한다면 그들을 부를 때도 ‘그분들’이라고 자동으로 존칭이 나오지 않겠는가? 예수님처럼 우리 선교사가 온것은 당신들을 섬기고 당신들을 위해 죽으러 왔다고 할 때 누가 싫어 하겠는가? 우리가 그들의 발 밑에서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길 때 언젠가 그들 또한 우리를 그렇게 섬기려 하는 것을 보게 되지 않을까?

 

바울 선교사들이여 선교 현지인들을 어른으로, 상전으로 섬길 준비를 하고 공손히 깍듯이 대하라. 그들을 예수님 섬기듯이 섬기라. 그들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면 그들을 잘 받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잘 되게 하기 위해 우리가 왔다는 것을 보여 주라. 그러면 그들 또한 예수님처럼 남들을 섬기며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날이 올 것이다.

 

나는 현지인 기독교 지도자가 그 부하 직원에게 대하는 것을 보면서 감동한 적이 있었다. 상사가 그 부하 직원에게 서류를 만들어 올 것을 지시했다. 얼마의 시간이 걸려 그 서류를 만들어 왔다. 그러나 그 서류에는 오타가 있었고 다시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두 번이나 다시 작성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상사로서 짜증이 날만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그 상사가 취하는 모습을 보면서 현지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다. “어, 여기 오타가 있네 다시 쳐야 되겠군. 다시 쳐 주시겠소.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뭐야,이렇게 치고도 사무원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거야? 도대체 밥 먹고 뭘 하는 거야’ 등등의 야유와 핀잔을 주거나 나무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중에 ‘감사하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사하다’는 말을 2번, 3번 반복하며 지시를 마무리하는 것을 보면서 ‘바로 이거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절대 나무라지 않고 인격적으로 대하며 나중에는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고 표현하는 상사의 지시 방법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현지인들을 대할 수 없을까? 반문해 본 적이 있다. 그 후 나도 그렇게 현지인들을 대했을 때 그 현지인들로부터 들려오는 이야기는 “저 선교사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 준다”는 것이었고,우리를 섬기기 위해 애쓰는 자라는 것이었다.

 

바울 선교사들이여 그 현지인들 앞에 더 엎드리자. 우리의 자세를 더 낮추자. 그들이 주인이고 우리는 그들을 섬기러 왔다는 것을 분명히 보이며 살자. 언젠가 그들도 우리처럼 남 섬기는 종의 도를 준행하는 자들이 될 것을 소망하며 말이다. 우리의 목표는 ‘재생산’하는 사람들을 키우는 것이 아닌가? 그들도 나가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전도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주어야 할 사람들이 아닌가? 우리가 먼저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들이 어떻게 그러한 일을 행할 수 있겠는가?

조심하고 또 조심하자. 말조심 몸조심 행동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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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선교전략


꾸란 1장과 파티하를 중심으로


/다니엘 선교사(중동)


1. 서론

 

이슬람 국가에 처음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슬람 사원에서 들려오는 매일 5회의 아잔(adhan: 기도에의 부름) 소리에 전혀 다른 세상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경건한 무슬림들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기도시간마다 쉼 없이 사원을 찾는다. 그들과 더불어 오래 살아가면서 친구를 사귀고 교제를 나누면서 이들의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거짓말, 절도, 부도덕한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정작 이들은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나누며 대화를 하면 할수록 복음과 예수에 대한 이들의 무지와 맹목적인 불신, 거부감, 세뇌에 가깝게 되풀이되는 꾸란과 모하메드 찬양, 원죄 개념의 부재에 따른 무딘 죄의식을 경험하게 된다.

 

이슬람교는 기독교 불교 힌두교와 더불어 세계 4대 종교 중 하나이다. 전 세계 이슬람 국가 수는 약 58개국이며 인구는 약 13억이다. 이들 중 아랍어권은 23개 국 약 3억 정도이며, 비 아랍어권은 35개 국 약 10억 정도로 추산된다. 이슬람교는 610년 9월 무하마드가 첫 계시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무슬림들은 예언자 모하메드가 약20년 동안 천사 가브리엘이 전해 준 계시를 받아 꾸란을 완성했다고 믿는다.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을 무슬림이라 부른다. 무슬림은 꾸란과 하디스를 경전으로 믿으며,하루 다섯 번씩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드린다. 무슬림들의 세계관, 사고 체계는 꾸란에 기초한다. 꾸란은 이들의 정치, 경제, 교육, 종교, 사회, 문화, 가정 등 모든 영역을 지배하며, 이슬람의 모든 사상을 담고 있다. 무슬림들은 알라, 천사, 예언자, 거룩한 경전(토라, 시편, 복음서, 꾸란), 최후 심판과 부활을 믿는다. 무슬림은 이슬람의 다섯 기둥을 신앙 근간으로 여긴다. 이슬람을 지탱하는 다섯 기둥들은 신앙 고백, 기도,구제, 금식, 순례이다. 이슬람의 첫째 기둥인 ‘알라 외에는 신이 없고, 무하마드는 알라의 예언자이다’ 라는 신조를 두세 증인과 더불어 아랍어로 암송하면 무슬림이 된다. 기도는 하루 5회 정해진 시간에 일련의 몸동작과 암송을 반복한다. 구제금으로 부자들은 수입의 2.5퍼센트(1/40)를 가난한 자들에게 기부한다. 매년 라마단 한 달 동안 전 세계 무슬림들은 해 뜨기 전부터 해질 때까지 금식한다. 메카 순례는 일생동안 한 번만 하면 효력을 발생한다.

 

무슬림들의 세계관, 정체성, 사고 체계는 크리스찬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무슬림들이 매일 드리는 예배, 기도, 꾸란의 가르침은 크리스찬의 예배, 기도, 성경의 가르침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이슬람에 대한 이러한 기본적인 질문들이 본고의 출발점이다. 본고에서는 먼저 무슬림 예배를 살펴보고, 꾸란 1장 파티하의 본문을 소개하고 주해를 한 후에 무슬림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서 파티하를 중심으로 무슬림들의 신론, 인간론, 구원론, 종말론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파티하를 어떻게 이슬람 선교에 적용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언급한 후, 본고의 결론을 맺을 것이다.

 

2. 무슬림 예배


무슬림 예배는 이슬람의 다섯기둥들로 구성된다. 신앙 고백, 기도, 구제, 라마단, 성지순례. 결국 이들의 예배는 온 생애 동안 이루어지는 자신의 모든 삶으로 확장된다.이들의 예배를 좁은 의미로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면 매일 드리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일정한 형식과 순서에 따라서 몸동작을 취하며 구절을 암송하며 드리는 기도가 곧 이들의 예배다. 이들의 기도 형식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암송되는 기도문이 꾸란1장 즉 파티하이다. 이들은 기도를 통해서 매일 적어도 17회씩 파티하를 암송한다.파티하는 이슬람 신앙의 모든 원리들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파티하는 짧은 일곱 절로 구성되는데, 이것이 전체 꾸란의 1/3에 해당한다고 할 만큼 중요하다. 이바다 이븐 사미트는 ‘파티하를 암송하지 않는 예배는 무효’라고 주장했다.

 

3. 무슬림과 파티하

 

성경이 총1,189장으로 구성된 반면, 꾸란은 총 114장 6,616절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114장 중에서86장이 메카에서, 28장은 메디나에서 계시된 것으로 믿는다. 무슬림들은 꾸란이 ‘책들의 어머니’이며, 꾸란의 축어적 계시를 믿는다. 무슬림들은 또한 꾸란을 알라의 마지막 계시라고 믿는다.

 

꾸란 1장은 꾸란의 핵심 내용을 요약하고 있으며 개경장으로 불린다. 꾸란 1장을 아랍어로 ‘파티하’라고 부르며 개경장, 즉 문자적으로 ‘책(꾸란)을 여는 장’이란 의미이다. 파티하는 일곱 절, 29단어의 아주 짧은 장이지만, 무슬림들은 이슬람 사상의 진수를 담고 있다고 믿는다. 무슬림들은 매일 5회 기도 시간을 통해 최소한 17회씩 암송하고 있다. 곧 새벽 기도에서 2회, 해질녘 기도에서 3회 그리고 정오기도, 오후기도, 저녁기도에서 각각 4회씩 반복한다. 따라서 파티하는 무슬림들에게 이슬람 신앙의 전부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 파티하는 알라의 성품과 속성을 말하며, 인간의 의무로 알라를 예배하며 바른 길로의 인도를 요청하고 있다. 파티하는 종종 기독교의 주기도문에 비유되지만, 주기도문과는 달리 윤리적인 요구나 실천을 요구하진 않는다.

 

파티하는 메카에서 계시된 7절로 자주 낭송되는 코란의 진수다. 꾸란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을 일곱 절’이라고 언급한다. 파티하는 이슬람의 기본 원리를 비롯하여,우주 만물의 운행 질서를 주관하는 알라에 대한 인간의 태도, 내세관, 경배와 구원의 유일한 대상인 알라, 인류가 걸어야 할 바른 길,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수여자인 알라의 속성, 알라의 노여움을 받았던 민족과 방황했던 민족에 대한 역사적 사건 등을 언급한다. 꾸란1장의 명칭은 ‘알 파티하’ 외에도 ‘책 중의 책’, ‘찬양’, ‘질병의 치료’, ‘무궁 무진한 지식의 창고’ 등 여러 이름을 갖고 있다.

 

모든 예배는 파티하가 제일 먼저 암송됨으로써 시작되고 예배의 효력이 발생한다.즉 파티하가 암송됨으로써 신앙의 문이 열린다는 의미에서 ‘개경 장’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본 장이 서두에 있지만 그것은 계시된 순서가 아니라 편집상의 순서일 뿐이다.

 

1) 파티하 본문과 구조

먼저 파티하의 본문을 우리말 번역, 영어 번역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⑴ 알라의 이름으로

In the Name of God,

자비롭고 긍휼하신 분

the Compassionate, the Merciful

⑵ 찬양은 알라에게 있도다.

Praise be to God,

온 세계의 주

Lord of the Universe.

⑶ 자비롭고 긍휼하신 분

The Compassionate, the Merciful,

⑷ 최후 심판 날의 주인

Sovereign of the Day of Judgement

⑸ 우리는 당신만을 예배하며

You alone we worship,

당신에게만 도움을 구합니다.

we turn for help.

⑹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소서

Guide us to the straight path,

⑺ 당신께서 축복하신 자들의 길로

The path of those whom You have favoured,

당신의 분노를 초래하는 자들의 길이 아닌

Not of those who have incurred Your wrath,

길 잃어버린 자들의 길도 아닌

Nor of those who have gone astray.

 


파티하는 아래와 같이 기원, 고백, 간구의 3중 구조로 되어 있다.

① 기원 (1a-4절)

ⓐ 호칭 (1b)

ⓑ 찬양 (2a)

˙ 신의 섭리 (2b)

˙ 신의 자비 (3절)

˙ 신의 정의 (4절)

② 고백 (5절)

ⓐ 예배 (5a)

ⓑ 신의 도움 (5b)

③ 간구 (6-7절)

ⓐ 신의 안내 (6절)

ⓑ 세 그룹 (7절)

 

2) 파티하 주해

1a절의 ‘비스밀라’(알라의 이름으로)는 무슬림들의 일상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해서 주문처럼 선언되는 공식들이다. 사업상 거래를 시작할 때, 방문해서 집에 들어갈 때, 음식을 먹기 시작할 때, 부부관계를 시작할 때, 책을 읽기 시작할 때 등 ‘비스밀라’ 는 반드시 선언해야 하는 무슬림들의 관행적인 공식 구절이다.

 

1절의 ‘비스밀라 알 라흐만 알 라힘’ (알라의 이름으로, 자비롭고 긍휼하신 분)은 코란 114장 중 9장을 제외한 모든 장들 첫 머리에 후렴처럼 등장하는 구절이다. 이슬람의 상표처럼 여겨지는 어구들이다.

 

1b와 3절에서 두 번 반복되고 있는 ‘알 라흐만 알 라힘’ 즉 ‘자비롭고 긍휼하신 분’에서 알라의 자비와 긍휼은 꾸란에서 자주 언급되는 알라의 핵심 성품들이다. 일반적으로 비 무슬림들에겐 이슬람의 알라는 무섭고 이신론적이며 초월적인 존재로 이 세상 역사엔 무관심하고 인간들에게도 비인격적인 존재로 알려진 반면, 무슬림들에겐 알라의 자비가 최고의 핵심 덕목으로 믿어지고 있다.

2절의 ‘함둘릴라’는 1a절의 ‘비스밀라’처럼 자주 사용되는 관행 구절로. 크리스찬의‘할렐루야’에 해당되는 뜻이지만, 일상 생활에선 ‘Thank God’의 의미로 사용된다.온 세상의 주(2b), 자비롭고 긍휼하신 분(3절), 최후 심판날의 주인(4절)이기 때문에 알라에게 찬양을 돌림이 마땅하다.

 

5절에서 유일신 알라에 대한 예배를 고백하고, 6절에서 이슬람의 길을 바른길로 규정하며, 7절에서 알라의 축복을 받은 자들을 길 잃어버린 자들, 알라의 분노를 초래한 자들과 대비하고 있는데, 각각 무슬림들, 크리스찬들,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4. 무슬림 신학

 

1) 신론

이슬람의 신론은 기독교의 삼위일체적 유일신론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단일(Unitarian) 유일신론(Oneness, Unity)이다. 꾸란 112장은 이슬람 신론의 핵심을 담고 있다.

알라의 이름으로, 자비롭고 긍휼하신분,

In the Name of god, the Compassionate, the Merciful

① 한 분 하나님이며,

God is one,

② 영원한 하나님이다.

the Eternal God.

③ 그 분은 태어나지 않았고 낳지도 않았다.

He begot none, nor was He begotten.

④ 그 분과 같은 자가 없다.

None is equal to Him.

 

2) 인간론

이슬람의 인간 창조는 기독교의 창조론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창세기에서 인간은 흙으로 창조되었지만, 꾸란에서 인간은 흙 정액 자궁의 체세포 등으로 창조되었다고 언급한다. 꾸란에서 인간은 불완전한 약한 존재로 지음받았고, 악에 빠지기 쉬운 존재이지만, 알라의 대리자로 묘사된다. 꾸란은 아담이 타락 후 회개했고, 알라는 그의 회개를 받아들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무슬림들은 원죄를 부정한다.

 

 

3) 구원론

무슬림들은 원죄를 부정하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부정한다. 꾸란에도 예수님의 출생과 생애, 기적이 등장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꾸란엔 성령도 언급되지 않는다. 무슬림들도 꾸란에 기록된 최후 심판을 믿지만, 구원의 방법이 기독교와 다르고 구원의 확신도 없다. 선행을 통해서 마지막까지 알라의 뜻에 따라 낙원에 갈 수 있을 뿐이다.

 

4) 종말론

이슬람의 종말론은 기독교의 종말론과 유사하다. 꾸란은 성경처럼 종말의 징조들,트럼펫 소리, 예수의 재림을 언급한다. 그러나 마흐디(Mahdi)라는 또 한 인물이 종말에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최후 심판 때에, 책에 기록된대로 사람들의 선행과 악행이 저울에 달리게 된다. 천국과 지옥의 존재도 유사하다. 다만 꾸란은 기독교의 천국(Heaven) 보다는 낙원(Paradise, Gardens)을 선호하며, 낙원의 보상 중에 숫 처녀의 시중등 물질적인 차원의 보상이 강조된다.

 

5. 이슬람 선교전략


이슬람 선교는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피뿌림을 전제로 한다. 성령의 사역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완악하고 강팍한 무슬림들의 영혼을 예수의 십자가 사랑과 성령의 기적 없이 그 누가 만질 수 있겠는가? 이슬람 선교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영역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이슬람 지역에서 여러 다양한 사역들이 펼쳐지고 있다. 예를 들면, 고아원, 장애인 센터 등 국가 시설들을 통한 긍휼과 구제 사역, 의료 사역, 개발 사역, 여행사, 섬유 직물, 학원, 태권도장 등의 비즈니스 사역, 교회개척 사역, 친구 삼기등 우정과 교제를 통한 개인전도, 제자 삼는 사역, 단기팀을 활용한 문서전도, 땅 밟기 사역, 중보기도 사역 등, 가능한 모든 방법들이 동원되고 있다.

 

이 모든 사역들의 출발점은 무슬림들을 만나는 일에서 시작된다. 이들과의 접촉점을 만드는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 학원, 클럽 등에서 동일한 관심사, 취미 등을 나누며 친구를 만들 수 있다. 파티하는 이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고 관심을 단숨에 사로잡을 수 있는 아주 탁월한 매개체가 될 수 있다. 무슬림은 아니지만, 무슬림들을 이해하는 사람 혹은 무슬림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여겨져서 그들에게 좋은 호감을 줄 수 있다. 파티하는 복음을 나눌 수 있는 우정의 친밀한 단계로 넘어가도록 돕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고, 이들과의 토론에서 이슬람 신앙의 오류를 잡아줄 수 있는 강력한 무기로 이용할 수 있다.


6. 결론


이슬람은 분명히 강한 사탄의 요새이며 진지임에 틀림없지만, 반드시 성령의 권세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모래성일 뿐이다. 이슬람 영의 특징은 거짓과 불신과 음란과 분리와 두려움의 영으로 알려져 있지만, 성령과 보혈의 역사로 정결케 될 수 있다. 무슬림들은 이슬람 영에 붙들린 불쌍한 영혼들로 우리의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다(마 9:35-38).

 

 /바울선교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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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선교전략 / 코란의 주제6

무함마드 종교에 대한 가르침

ㅇㄱㄷ 선교사

무함맏은 새로운 종교 이슬람의 고안자이다.

이슬람 종교는 무함맏 이전에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었다. AD 600년 이전에 󰡐알라󰡑, 󰡐이슬람󰡑, 󰡐무슬림󰡑 이러한 단어들은 세상 그 어디에도, 그 어떤 문서에도 없었던 것이다. 이슬람 종교는 하심 계통의 꾸라이쉬 부족의 아둡라의 아들 무함맏에 의해 아라비아의 메카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무함맏은 40세가 되었을 때, 가브리엘이라고 주장하는 천사에 의해 알라에 관한 계시가 아닌, 알라의 뜻에 관한 계시를 시리즈로 받았다.

무함맏은 아담과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모세와 심지어는 예수까지 참 무슬림이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무지한 자힐리야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성경의 선지자들을 믿고 따르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자기의 종교로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유일신 여호와가 있었다면, 무슬림들에게는 무함맏에 의해 유일신이 되어버린 알라가 있다. 무슬림이란 단어는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을 모방하여 󰡐이슬람과 무슬림󰡑, 즉 󰡐복종과 복종하는 자󰡑의 구조를 만든 것이다.

기독교에는 그리스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면, 무함맏은 자기가 스스로 고안해 낸 이슬람 종교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신앙의 대상이라면, 무슬림들의 신앙의 대상은 알라이고, 이 알라는 그 이전의 그 어떤 신보다도 위대한 위치를 찬탈해 버렸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 이삭, 다윗의 후손으로 왔다면, 자신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혈통으로 왔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한 아브라함 ? 이스마엘 ? 무함맏 신화를 만들어 냈다. 유대인들에게는 토우랏과 자부르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경이, 이제 무슬림들에게는 꾸란과 하디스가 경전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며, 그것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과 종교의 기준이 되었으며 세계관이 되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여 닮으려 한다면, 무슬림들은 무함맏을 모방하여 닮으려 한다. 사람들의 삶은 그들이 따르는 자를 닮게 마련이고, 실제로 그리스도인과 무슬림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교회라면, 무슬림들을 위한 공동체는 움마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안에 있는 모든 영역을 무함맏과 그의 종교 이슬람은 모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꾸란에서도 충분히 간파할 수 있다.

수라 2:135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이 되라! 올바른 교훈을 찾자!󰡑 라고 그들은 말한다. (즉 유대인들은 유대인이 되라! 말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라! 라고 말한다. 너는 말하라! 오 무함맏이여!) 오직 우리는 참 길에서 떠나지 않은 자, 우상숭배자들이 되지 않은 아브라함의 종족에-그의 종교에 (따르고 있는 자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라고 해서 무함맏이 천재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상 무함맏은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이었으며 전해지는 바로는 문맹이었으며, 꾸란을 읽어서 알 수 있듯이 말에는 모순이 많으며 거짓말쟁이였다. 그가 기록한 꾸란의 거의 대부분의 내용들이 꾸며낸 거짓말들이다.

무함맏은 수라 2:256에서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고 말한다. 󰡒종교에 강요하여 들어가게 하는 것은 없다.󰡓 하지만 사탄과 무함맏은 무슬림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그 길을 막고 있다. 무슬림들은 이슬람과 꾸란에 대해 그 어떠한 질문도 의문도 가져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무함맏의 거짓말들에 속고 있는 무슬림들에게 진리의 빛으로 비추어 주고, 어두움 가운데서 어두움의 영이 이끄는대로 무력하게 이끌려 가는 불쌍한 무슬림들을 구원해 내야 한다.

사실상 무슬림들도 꾸란의 가장 중요하고 전체적인 주제가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무슬림들이 꾸란의 모든 내용을 알고 믿고 있는 것도 아니다. 거의 모든 무슬림들은 꾸란의 모든 수라들 중에서 개경장(첫번째 수라)와 이슬람 종교를 가르치고 기독교를 대적하기 위한 것과 같은 극히 일부분의 내용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사실상 이슬람의 교리나 개경장과 같은 것은 이슬람 종교를 잘 포장해서 이슬람이 진정한 종교라고 선전하여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것들에 불과하며, 그러한 것들은 꾸란의 전체의 내용과 잘 조화되지 않는다.

사역자들은 이슬람을 포장한 것들에 지나치게 주목해서는 안된다. 또한 그러한 것들에 현혹되어서도 안된다. 포장된 겉모습 내면에 있는 이슬람의 진정한 모습은 이슬람의 배경이 되고 있는 역사와 이슬람의 기초가 되고 있는 꾸란의 진정한 주제에 관한 것이다.

무슬림들은 꾸란의 진정한 주제가 종교 토론에 불과한 것을 모른 채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단순히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그리스도인 학자들이나 사역자들 조차도 이 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슬람을 다루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우리는 무슬림들에게 꾸란의 진정한 주제가 하나님 자신과 그의 계획에 대한 계시나 인간을 죄와 멸망에서 구원함으로써 하나님을 알며, 사랑하고, 찬양하게 하고,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맛보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꾸란의 허구성을 그들도 깨닫도록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이나 맹목적인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두움에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에 꾸란의 내용은 지극히 무의미하다는 사실도 모르고 알라에게서부터 주어진 것으로 믿고 살아간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과 비교하면서 설명해 주면 전도하는데에도, 양육하는데에도 대단히 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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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선교전략 / 코란의 주제5

무함마드 종교에 대한 가르침

이00 선교사

꾸란의 전체적인 종교적 주제와 맥락은 다음과 같다. 즉 꾸란의 전체 114 수라장들은 흔히 이슬람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광범위한 삶의 모든 부분들을 다 다룬 것이 아니라 주로 이슬람 종교에 대해 다룬 것인데, 그것을 요약한다면 대단히 단순한 공식이 성립한다. 무함맏이 새롭게 고안해 낸 이슬람 종교와 그의 새로운 유일신 알라와 그의 새로운 움마 공동체인 무슬림들과 그들의 대표자로서 가장 중요한 선지자 역할을 하고 있는 자신은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와 같은 선지자들의 뒤를 따를 뿐만 아니라 그들을 확증하는 자이다. 꾸란에 나타나는 노아, 샘, 함, 야벳,아브라함, 룻, 요셉, 모세 등과 같은 선지자들은 많은 수라들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전했던 내용은 모두 이슬람 종교의 가르침을 전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또한 귀신들도 이슬람의 교리를 믿었고 다른 귀신들에게도 가르쳤다. 그 내용은 무함맏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것들인데, ‘알라는 유일하고, 그에게는 어떠한 동료도 다른 신도 없다. 사람들은 선지자에게 복종하지 않고 그들을 거짓말쟁이라고 했기 때문에 멸망을 당하였다. 그들은 나마즈를 완전하게 수행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종말의 날과 부활과 천국과 지옥에 대해 경고하였다.’ 선지자들이 증거했던 이슬람 종교는 알라의 종교이며, 세상에서 가장 좋은 종교이고, 이 종교를 믿고 따르며, 이 종교를 위해 싸우는 자는 낙원에 들어가고 이 종교를 믿고 따르지 않거나 이 종교를 배반하는 자들, 즉 이슬람 이외의 모든 종교를 믿는 자들은 지옥에 들어가서 고통스러운 불속에서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꾸란은 모두 114 수라로 구성되어 전체 부피가 적지 않지만, 대부분 동일한 주제와 사건과 이야기들이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것으로서,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대단히 단순한 책에 불과하다. 무함맏이 가르쳤던 종교적인 의무들은 실제에 있어서 그렇게 대단한 내용들도, 진리들도 아니다. 꾸란에서 무함맏과 그의 신 알라가 가르치는 선행이나 도덕, 법에 관한 내용들과 그 의미들은 동서양 고금에 존재했던 일반적인 철학자들의 가르침과 비교했을 때 훨씬 수준이 낮은 것들에 불과하고, 우상숭배 종교인 불교의 가르침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형편 없는 것들에 불과하다. 꾸란의 거의 모든 내용, 특히 선지자들을 이용해가며 했던 말들은 모두 그가 꾸며낸 거짓말들이며,그 나머지도 타락한 인간을 감화하여 변화시키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할 만한 특별한 점이 전혀 없기 때문에 무함맏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거짓말쟁이로 취급하였던 것은 타당한 판단이었다.

이렇게 조잡한 이야기들이 전지전능하시고, 지혜가 한이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기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지만, 배후에 역사하는 어두움의 영,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는 영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사실을 거의 보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오늘날 이슬람의 신앙에서 대부분의 것들이 아랍의 종교 전통에서 온 것들이며, 또한 지어낸 전설들에 불과하지만 진리의 조명을 받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그것이 진리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무슬림들을 거짓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 뿐이다.

무함맏이 말한 것처럼, 과연 성경은 무함맏의 확증을 필요로 하는가? 오늘날 무슬림들이 전혀 읽지 않고 있는 성경의 내용은 꾸란이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질서정연함과 심오한 진리들과 하나님의 성품으로 충만하다. 우주와 인류 역사의 시작, 죄의 시작,하나님의 구원 계획, 언약, 예언, 인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과 계시,인류 역사의 성격, 인간의 삶의 기준이 되는 공의로운 율법, 다양하고 구체적인 인간의 내면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들, 하나님과의 동행, 하나님의 언약들과 예언들의 구체적인 성취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 약속된 성령을 받고 실제적으로 죄인이 변화되어 새로운 생명과 의롭고 거룩하며 성화되어 가는 삶을 체험하는 것, 무함맏이 결코 제공해 줄 수 없는 수 많은 선지자들의 믿음의 발자취와 예수님의 거룩한 삶의 모범 등 그 어떤 것을 무함맏과 그의 책 꾸란이 흉내낼 수 있겠는가?

무함맏에 대한 동시대 사람들의 비난들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또한 탁월하게 신비한 과정을 통해 매듭(또는 옹이)에 숨결을 불어넣는 마법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수라 113 “(무함맏) 말하라! : ‘나는 아침 창조자로부터 (나에게) 자신이 창조한 것들의 악한 것들로부터, 어둠에 빠진 밤의 악한 것으로부터, 마디들에 호흡을 불어넣는 (마술사)들의 악한 것들로부터, 그리고 질투하는 질투자의 악한 것으로부터 피난처 주기를 구하며 기도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무함맏이 아랍 이방인들의 악한 영적인 세계를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113 수라와 114 수라는 무함맏은 Mu'awwidbatayn로 알려진 어떤 특정한 악한 존재들(악령들)로부터 피할 피난처를 구하고 있다. 이 두 수라 뿐만 아니라 수라 7:200; 16:98; 41:36에서 무함맏은 무슬림들에게 사탄으로부터 피하도록, 수라 40:56에서는 꾸란에 대한 논쟁을 할 때, 사람으로부터 피하기 위하여, 수라 72:6에서는 진으로부터 피하기 위하여 알라에게 피난처를 구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심지어는 어떤 진들이 무슬림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수라 72:1-19에서 “진들 중 어떤것이 꾸란을 듣고서 진리의 길로 들어섰고, 꾸란을 듣고 당장 믿었으며, 창조주에게 그 어떤 동료도 있지 않다고 말하여 무슬림이 되었다. … 당연히 우리는 인스도, 진도 알라의 영광에 항상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

수라 72는 진들이 직접 1인칭이 되어 말하고 있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10-19절까지는 완전히 진들이 진들의 세계와 그들의 일들과 알라에게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무함맏은 그가 죽인 사람들의 영이 그의 꿈 속에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알라가 창조한 것이 그에게는 악하게 보였고, 이를 두려워했다. 무함맏 자신이 밤에 두려움으로 떨었다. 매듭을 써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려는 여인들과 마술사를 두려워했다. 무함맏의 알라에 대한 두려움은 극에 달하였다는 사실을 위의 구절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무함맏에 대한 당시 아랍인들의 평가가 꾸란에 나타난다.메카 사람들은 무함맏을 공포에 이끌려 부자연스럽게 행동했기 때문에 마주눈 (미친, 홀린)이라 했다(수라 37:36 - 미친자 시인; 44:14 - 미친 자). 수라 52:29 “됐다. (오 무함맏), 너는 (사람들에게 꾸란 구절들을 가지고) 가르치라! 왜냐하면 너는 창조주의 호의로 점쟁이도, 미친 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상숭배자들이 무함맏은) ‘한 시인이다. 우리들은 그에게 재앙이 미치기를 기다린다’ 라고 한다.” 심지어는 무함맏은 자신이 미친 자가 아니라는 것을 맹세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수라 68:2 “연필과 (그와 함께 천사들이) 쓰는 기록들에 맹세하건데, (오 무함맏) 너는 창조주의 호의로 미친 것이 아니다.” 수라 81장은 무함맏이 메카에서 초기에 암송했던 수라로서 왜 메카인들이 그를 미친 시인이라고 했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암시를 주고 있다. 수라 81:1-25 “해가 둘둘 말려졌을 때, 별들도 (자기 하늘들에서) 흘러내릴 때, 산들도 (자기 자리들에서 옮겨져) 돌아다닐 때, (뱃 속의 새끼가) 열 달 된 임신한 낙타들도 자유롭게 보내졌을 때, 맹수들도 (한 곳에) 모였을 때, 바다들이 (화덕처럼) 불어졌을 때 (그리고 물 대신에 불로 채워졌을 때), 영혼들이 (다시 육체들에) 짝지워졌을 때, 산채로 매장된 (각각의) 소녀에게 어떤 죄 때문에 죽었는지를 물었을 때, (행위를 기록한 책) 페이지가 열려졌을 때, 하늘이 (땅 위에서) 벗겨졌을 때, 지옥이 (불신자들을 위해) 타올라 흐를 때,천국이 (경건한 자들에게) 가까워졌을 때, (바로 그 날에 각각의) 영혼이 (바로 그 날을 위해) 준비하여 온 것을 (즉 모든 선악을 행한 것을) 아노라! 충분하다. 나는 (밤들의 눈에서) 보이지 않는 자, (밤들도) 빨리 지나 (자기 ‘둥지들’ - 성벽들에) 숨어있는 자(별)들에게, 자기 어두움으로 오가는 저녁에게, 그리고 밝고 있는 새벽에 맹세를 하노라! 의심할 나위 없이 이 (꾸란은) 한 위대하고, 힘있고, 아르쉬의 주인 (되는 알라)의 견해로서 적절한 시간과 장소가 있는, 그곳에서 (즉 하늘에서 천사들 쪽에서)복종하는 자, 신실한 사도의 (즉 자브러일 천사의 알라 편에서 온) 말씀이다! 그리고 너희들의 주인인 (무함맏은) 미치지 않았다. 참으로 그 (자브러일을) 열려진 지평선에서 보았다. 이 (무함맏은) 출처를 모르는 계시를 탐내는 자도 아니다. (그는 알라 편에서 자기에게 온 계시들을 망치지 않고, 완전한 형태로 너희들에게 전해 주었다.)그리고 이 (꾸란은) 쫓겨난 사탄의 말이 아니다.”

본문에서 사람들에게 진리의 길을 가르쳐 주고, 생명을 주는 어떤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 대신 의미없이 중얼거렸던 시와 의미 없는 맹세와 무함맏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말과, 그가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출처도 모르는 계시를 탐욕스럽게 갈망하는 자도 아니고, 꾸란이 사탄으로부터 오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말들만 있을 뿐이다. 그의 이웃들은 그를 두려워하여 사히르(마술사)라고 했다(수라10:2) “불신자들은‘참으로, 이 (즉 무함맏은) 대단한 마술사이다’ 라고 한다”; 수라15:15“만일 우리-알라-가 그들에게 하늘에서 한 문을 열어 놓는다면, 그리고 거기에서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한다면, 그래도 당연히 그들-아랍인들-은, ‘의심할 나위 없이, 우리들의 눈들을 묶어 놓았다. 우리들은 마법에 걸린 사람들이다’ 라고 할 것이다.” ; 수라 38:4 “(메카우상숭배자들이) 그들에게 자기들로부터 (즉 인간 족속으로부터) 된 한 경고자? 선지자가 나온 것에 놀랐고, 그 불신자들이 말하기를, ‘이는 한 거짓 마법사이다. (그래서) 신들을 한 신으로 만들어 버렸느냐? 참으로 이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라고 했다.”). 수라 21:3-6“당연히 그것을조롱하여, 심령들이 전적으로 무지해진 상황에서 듣는다. 그리고 포악스러운 불신자들은 ‘이 자 (즉 무함맏)은 너희와 비슷한 한 인간일 뿐이다. 너희가 보고 있는 상태에서 마술에 (속으려고) 하느냐?’ (라고 하여) 서로 속삭인다. (그 때 무함맏이) 말하기를 ‘나의 창조주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말을 안다. 그는 듣는 자이며, 아는 자이다.’ ‘그러나 그들은(무함맏이 계시라고 주장하는 말들이) 조리없는 꿈들이다. (그 말들을) 아마도 그 자신이 지어내었다. 아마도 그는 한 시인이다. 그렇다. 그도 전에 보내진 선지자들이(초래시킨) 것과 같은 어떤 이적을 초래하게 하라!” 다른 사람들은 마슈르(마법에 걸린), 또는 미친자라고 했다(수라 17:47,48“우리는 그들이 너에게 (즉 너의 암송하는 것에) 귀를 기울였을 때 무엇 때문에 귀를 기울이는지를, 그리고 이 핍박자들이 서로 속삭이며, ‘분명히 너희들은 마술에 걸린 자들이다. 정신이 나간 사람들을 따르고 있다.’ 라고 말하는 것들을 아주 잘 알고 있노라. (오 무함맏) 그들은 네가 참으로 (마법에 걸린, 미친 자, 시인이라 하여) 어떤 예들을 드는 자들을, 됐다, 길을 잃고 (참) 길을 찾지 못하는 자들을 보라!” 다음 구절은 무함맏의 표현 자체에서 왜 아랍 우상숭배자들이 그를 마술사, 미친 자라고 했는지를 보여준다. 수라 17:50-51“말하라! ‘너희들은 돌이나 쇠붙이가 되라! 또는 너희 마음들에 (생명을 상상하는 것은) 아주 힘든 다른 어떤 존재가 되라! (모든 상태에서 알라가 너희들을 부활시킬 것이다)’ 아직 그들은 ‘우리들을 누가 부활시킬 것이냐?’ 라고 말한다. ……” 수라 25:9; 44:13). 수라 18:40-41“분명히 나의 창조주가 나에게 너의 동산-또는 과수원보다 더 좋은 (한 동산을) 줄 것이다. (너의 동산에는) 하늘에서 벼락들을 보낼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매우 부드러운 땅으로 변화될 것이다. 또는 그것의 물이 (땅 밑으로) 흡수되어 너는 그것을 찾아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여러 사람들은 카힌(점쟁이)라고 불렀다(수라 52:29; 69:38-42 “충분하다. 나는 너희들이 보는 것들에도, 너희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에도 멩세를 한다. 이 (꾸란은) 의심 없이 위대한 선지자의 (알라 왕궁에서 오게 된) 말들이다! 그는 어떤 시인의 말이 아니다! 너희들은 (그 꾸란이 알라의 말인 것을) 아주 적은 사람만 믿는다! 그리고 어떤 점쟁이의 말도 아니다. 너희들은 아주 적은 사람만 교훈을 받아들인다.!” ). 또한 진의 인도를 받아 영감있고 리듬있는 시를 반복적으로 암송했기 때문에 샤이르(시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수라 37:36; 52:30; 69:42).

무함맏은 자기를 반대하는 자들을 극도로 미워하였으며, 결코 너그럽고 온유하게 용서해 주는 법이 없었다. 그를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그의 마음 속에 항상 얼마나 악하고 저주스러운 가득찬 생각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수라 구절들이 수 없이 많다.

위와 같은 무함맏의 많은 헛된 맹세와 변명들과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시기와 미움과 저주로 가득찬 꾸란이 어떻게 죄로 인해 생명을 잃고 방황하는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변화시켜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인도할 수 있겠는가?

추종자들이 무함맏에게 가브리엘과 만났던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자 그는 종 울리는 소리와 금속이 쿵쿵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가 계시를 받는 동안 추종자들은 그의 얼굴이 창백해지거나 붉어졌으며, 그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이고, 가끔은 무의식 상태에 있었음을 보았다. 이처럼 무함맏은 계시를 받는 동안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무엇에 홀린 듯한 사람과 같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를 두려워했다.

이 밖에도 무함맏에 대해 무함맏 당시의 아랍인들이 비난했던 단어들은 “거짓말쟁이”, “전설을 말하는 자” 등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비난은 최근에 우리가 일부러 꾸며낸 것도, 우리가 이슬람을 비난하기 위해서 하는 말도 아니다. 꾸란 자체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꾸란 전체에 걸쳐 무함맏의 말들은 대체적으로 과장이 너무 심하고, 사소한 일에도 천국과 지옥을 운운할 정도로 언어에 경솔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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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선교전략 / 코란의 주제4

무함마드 종교에 대한 가르침

ㅇㄱㄷ선교사

무함맏이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좋아했다가 그들에게 실망하고 미워하게 되었던 것을 말해주는 또 다른 수라 구절이 있다. 수라 3:119 “오 (믿는 자들이여), 너희들은 그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은 너희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함맏에게 유대-기독교인들이 성경을 펴서 읽어주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무함맏에게 성경 자체를 펴서 읽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무함맏은 자기의 거짓을 그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성경의 진리를 거부했다. 도리어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읽어 주면 문맹이었던 무함맏은 그것을 자기식으로 교묘하게 바꾸어서 자기를 변호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수라 3:78 “그들중에는 (유대인들 중에는) 또 한 그룹이 있는데, 책에 (타우랏에) 있지 않은 것을 ‘책에서’ 라고 너희들이 생각하기 때문에, (타우랏) 책을 혀들을 감아서 (망치고 변질시켜서) 그들이 읽어준다. 그리고 알라의 앞에서 오지 않은(자기의 말들을) ‘알라의 앞에서 온 것’ 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들은 알고 있으면서도, 알라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 무함맏은 구약과 신약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데, 유대-기독교인들이 읽어주는 성경 구절들이 기록된 그대로인지 꾸며서 읽은 것인지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무함맏은 자기에게 굴복한 기독교인들로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얻기도 했으며, 다른 기독교인들로부터 성경에 대한 정보를 얻어서 그것들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무함맏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고 거부했을 때, 무함맏은 종교에 대해 언급하면서 기독교인들에게 “너의 종교의 한계로부터 벗어나지 말라” 라고 함으로써 기독교를 경고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소위 “알라의 종교”인 이슬람과 유대인들의 종교와 기독교를 동일한 올바른 종교의 범주에 놓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약의 선지자들과 극히 일부분의 이스라엘 종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이스라엘 민족들은 모두 이슬람 종교를 반대한 우상숭배자들이었다고 한결같이 비난하고 있다. 이슬람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모두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극단적으로 반대하는 양면성을 드러내고 있다.

 

수라 4:171 “오책이여, (예수를 신이라고 말함으로써) 너의 종교에 있는 한계로부터 벗어나지 마라! 알라 영광에 오직 진리의 말만 하라! 당연히 그 예수 그리스도 마리얌의 아들은 단지 알라의 선지자이고, 그의 마리얌에게 던진 말씀이고, 또한 그의 편에서 온 영일 뿐이다. 됐다. 알라와 그의 선지자들을 믿어라! ‘(주가) 셋 (즉 알라, 마리얌 그리고 이사 셋 모두 주님들이다)’ 라고 말하지 말라! ”

꾸란에서 무함맏은 종종 유대교와 기독교를 세상에서 권위 있는 종교들에 포함시키고 있고, 심지어는 기독교에서 이단시하고 있는 분파까지 무함맏에게 복종하는 경우에는 올바른 종교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수라 2:62 “당연히 믿는자 들이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과 (알라에게 믿음을 둔, 그러나 어떤 샤리아법을 준수하지 않는 종교적인 분파인) 사비교도들 (그들로부터) 어떤 자들 (전에 어떤 종교에 있었던 강한 믿음을 가지고, 유일한) 알라에게, 종말의 날을 믿는다면, 그리고 잘 준수한다면,그들에게 창조주의 앞에서 상급이 있고, 그들을 위해서 위험과 염려가 없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의 종교는 최고의 권위가 있는, 가장 믿을 만한 종교이다’ 라고 자주 말한다. 실제 역사적인 사실에 있어서 아랍 족속과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아브라함이 그들의 민족의 조상이고, 종교의 조상이라고 말한다(수라 2:124). 알라가 아브라함을 모든 민족들을 위한 이맘으로 만들었고, 그의 자손들도 이맘들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종교가 이슬람이었고, 그의 자녀들이 모두 무슬림이었다(수라2:130-132)고 주장한다. 하지만 무함맏 당시의 책의 사람들, 즉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무함맏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수라 3:19).그래서 수라 4:171; 5:77 “오 책의 사람들이여, 너희 종교의 한계를 넘어가지 말라!” 라고말한다. 이 말은 각각의 종교에 한계가 있다는 말로, 이슬람 이외의 다른 종교들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꾸란에서 무함맏은 자주 이슬람이 가장 좋은 종교, 가장 올바른 종교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는 항상 한 종교를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여러 종교들을 상대적으로 비교하고 있다. 이러한 꾸란의 종교적인 사상 때문에, 오늘날 수 많은 무슬림들은 ‘우리는 당신들의 종교를 존중하고 있소, 그런데 왜 당신들은 우리의 종교를 존중하지 않소?’ 라고 질문한다. 또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종교들을 존중한다.’ 라는 표현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며, 모든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들, 즉 불교와 힌두교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종교를 인정한다고 하는 말인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이슬람이 절대 진리를 소유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모순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거짓된 종교들을 존중함으로써 자신들의 거짓들도 존중해 달라고 하는 간청을 하는 셈이다.

 

수라 5:19“오 책의 사람들이여! 자 우리의 사도가 너희 책들 중에서 감추어진 많은 것을 너희들에게 분명히 한 경우에, 많은 것들을 거절한 때에 왔다. 너희에게 알라로부터 빛과 분명한 책이 왔다…. 알라는 모든 것들 위에 권세를 가지고 있다. 이 구절을 포함한 꾸란의 많은 구절에서 알라는 흔히 “우리”라는 1인칭 복수를 사용한다.그렇다고 이러한 인칭과 수가 꾸란 전권에서 일치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가끔은 1인칭 단수로, 아주 드물게는 3인칭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칭과 수에 관한 문제는 다른 곳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유일한 신 알라에 관한 문제가 아랍 우상숭배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것처럼, 유대인들-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가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그럼 유일신에 관한 무함맏과 유대인들-기독교인들 사이에 있었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었나? 사실 겉보기에는 유대인들의 유일신에 대한 사상이나, 무함맏의 유일신에 대한 사상은 큰 차이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유대인들이 무함맏을 믿을 수 없도록 만드는 이유는 선지자들에 대한 무함맏의 꾸며낸 이야기들과 자기들이 익숙히 알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 사이에 존재했던 첨예한 차이점 때문이었다. 이에 첨가하여 기독교인들의 반대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구속사적인 중요성을 제거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무함맏은 당시의 아랍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던 우상 숭배자들에게도, 유대인들에게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반대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수라 3:79에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무함맏이 소위 ‘선지자’라고 불렀던 예수를 하나님으로써 예배하는 것에 대해 무함맏에게 말했고, 무함맏은 자기가 새롭게 시작한 종교의 사상과 맞지 않기 때문에 거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을 위해 알라가 그에게 책, 지혜 그리고 선지자직을 준 후에, 사람들에게‘알라에게가 아니라, 나에게 예배하라’ 라고 말하는 것은 허용된 것이 아니다.”

 

결국 무함맏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부정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정죄하고 저주하였으며, 결국에는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수라 29:46 “(오겸손한<신자>자들이여), 너희들은 책들을 가지고 단지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대화하라! 오직 그들 중에서 억압-폭력을 사용하는 자들과만 (예리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가능하다).그리고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꾸란도, 너희들에게 주어진 모세오경과 신약성경도 믿는다. 우리들의 신(일라)도, 너희들의 신(일라)도 하나이고, 우리들은 그에게만 순종한다.’라고 말하라.” 초기에 반대에 부딪혔을 당시의 이러한 조심스러운 태도는 차츰 노골적인 압력 행사로 악화되었다. 수라 9:29,30“알라와 말일을 믿지 않는, 알라와 그의 선지자가 부정하다고 한 것들을 부정하다고 알지 못하는, 진리 (즉 이슬람) 종교에 신뢰하지 않는 책들로 구성되는 어떤이들에게 반대하는 자들은 그들이 짓밟혀졌을 때 자기들 손으로 세금을 내기 전까지는 전쟁을 하라! 유대인들은 ‘우자이르가 알라의 아들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알라의 아들이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문서나 증거 없이) 그들의 입에 있는 말들이다.” 이 말은 분명히 논리적으로도 모순이 된다. 만일 유대-기독교의 하나님이 이슬람의 신과 동일하다면, 왜 이슬람은 억지로 유대-기독교인들을 무슬림으로 개종시키려고 그처럼 가혹한 정벌을 했는가 하는 점이다.

 

결국 수라 5:72-73에서 보는 것처럼, 무함맏과 꾸란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노골적으로 저주하고, 유대-기독교 역사를 송두리째 뒤엎고 왜곡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수라 5:72-73 “알라가 마리얌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들은 분명한 불신자들이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 이스라엘이여, 나의 창조주와 너희 창조주가 되는 알라에게 종노릇하라!’ 라고 말했다. 당연히 누구든지 알라에게 쉬르크를 초래하면, 알라가 그에게 낙원을 부정하게<하람> 할 것이고, 그의 있을 곳은 지옥이 될 것이다.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어떤 돕는 자도 있지 않을 것이다. ‘알라는 셋 (즉 알라, 마리얌, 이사) 중의 하나이다’ 라고 하는 자들도 분명히 불신자들이다. 왜냐하면 유일한 알라 외에 어떤 신(일라)도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말하고 있는 말들을 멈추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들 중 불신자가 된 자들을 고통스러운 고난이 붙잡을 것이다.” 수라 3:67 “아브라함은 유대인도 기독교인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알라에게 복종하는 자”였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무슬림이었고, 그들의 종교는 이슬람이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무함맏은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과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모두 무슬림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종교는 알라의 참된 종교, 이슬람이었다고 우긴다. 이렇게 주장해야 되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무함맏은 자신이 구약에 예언된 선지자라고 꾸란에서 여러 번 주장한다. 그는 자기가 선지자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끊임 없이 주장한다. 즉 무함맏 자신과 이슬람 종교의 역사성에 치명적인 결핍이 있는 것이다.인류의 역사가 수천년이 흐른 이후에, 즉 7세기 초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슬람 종교에는 역사적인 기반과 배경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보완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인류의 역사 시작부터 변함없이 존재했던 종교를 자기의 종교로 삼고, 그 역사적 전통을 가로채는 방법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대교도, 기독교도 모두 사실은 이슬람이었다’ 라는 억지주장을 내세웠고, 아브라함의 생애를 팔레스타인 땅에서 아라비아 반도로 옮겼으며, 모든 선지자들을 무슬림으로 만들었고, 자기는 가장 신실하게 이슬람 종교를 확증하는 최후의 선지자의 자리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이것에 반대하는 자들은 역사적 사실이야 어찌 되었든지 간에 모두 불신자들이며, 우상숭배자들로 정죄되어야 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한 후에 무함맏은 자기를 따르는 무슬림들이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모든 길들을 막아놓았다. (알라에게 복종을 의미하는) 이슬람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원하는 자는 누구나 알라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수라 3:105 (종교적) 토론에 빠지는 사람처럼 되지 말라. 그들에게는 무서운 형벌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무슬림들에게는 꾸란과 무함맏의 권위와 진실성에 대하여 어떠한 질문도 해서는 안된다. 무함맏은 이미 유대인들-그리스도인들과의 종교적 토론에서 자신의 거짓이 충분히 드러났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과 종교적인 토론을 할수록 자기에게 불리할 뿐만 아니라, 이후 자기를 따르던 무슬림들도 종교적 토론을 하게 되면 패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과는 어떤 대화도 용납치 않았고, 철저히 전쟁과 세금과 같은 압제를 통해서만 그들을 굴복시켜야 한다고 명령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무수히 많은 무슬림들이 참된 진리를 알고 싶어도 무함맏의 협박과 주변 사람들의 위협 때문에 그 의심을 감추고, 진리를 알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많은 두려운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무함맏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일관되게 협박과 공갈로 자기 종교에 붙어있도록 강요하였다. 수라 41:13 “그렇다. 만일 그들이 (즉 메카의 우상숭배자들이 이 상세한 설명 뒤에도 유일한 알라를 믿지 않고) 거절하면, 그 경우에는 말하라! ‘나는 너희들을 정확히 옷-야벳-과 사묻-샘- (종족들을 내려친) 번개과 같은 한 번개, 즉 멸망이(임하는 것)을 경고한다.’”

 

무함맏의 모든 설교는 자비롭고 은혜로운 창조주, 유일한 알라만을 섬기고, 알라와 그가 보낸 사도 무함맏에게 복종하고, 알라와 무함맏의 종교인 이슬람을 따르라는 명령으로 함축된다. 꾸란의 다른 모든 내용은 이것을 확증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이것보다 더 중요한 내용은 꾸란에도, 하디스에도 있을 수 없고, 있지도 않다. 이것이 이슬람 종교의 전부이다. 모세오경, 시편, 신약성경, 그리고 그들의 모든 내용들과 선지자들은 단지 알라가 유일한 참 신이며, 알라가 그의 사도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수라 61:11). 즉 무함맏은알라의 이름도, 모든 선지자들도, 천사들과 영적 존재들도 모두 자신이 많든 새로운 종교를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서 이용하고 있다.

 

무함맏은 알라에게도 종교가 있고, 그것이 곧 이슬람이며, 따라서 이슬람은 창세전부터 있었다는 전설을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이슬람은 최후의 종교이며, 무함맏은 최후의 선지자이기 때문에 가장 위대하다는 논리적 모순을 과감하게 자행한다.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종교가 필요한데, 그것은 곧 유일한 신 알라에게 복종하는 이슬람이라고 가르친다. 천국은 종교적인 교훈이 가득찬 곳이다. 그리고 복종하는 자들은 곧 믿는 자들이며, 그들은 곧 무슬림이라고 가르친다. 무함맏이 말하는 종교와 무함맏의 조상들이 섬겼던 종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무함맏이 말하는 모든 종교 의식들은 아랍 우상 숭배자들로부터 온 것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무함맏은 자기 종교의 정통성을 성경의 선지자들의 종교에서 찾는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아브라함, 모세, 예수는 어떤 종교를 고안해 내려고 노력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성경에서는 참되신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교제를 한 번도 종교라는 용어로 설명한 적이 없다. 더군다나 하나님께 어떤 종교가 종속되어 있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교리적 주제들 중에 유사한 것들이 대단히 많은 것은 무함맏과 유대-그리스도인들의 끊임 없는 논쟁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 번도 의견의 일치를 얻지 못했다. 성경을 읽을 줄 몰랐던 무함맏은 궁지에 몰렸던 것이다.무함맏은 문맹으로서 한 번도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었고, 자기의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유대-그리스도이들은 단순히 성경을 읽을 뿐만 아니라 연구하는 자들이었다. 무함맏의 거짓말들은 모든 선지자들의 삶과 믿음과 그들에게 주어졌던 약속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유대인-그리스도인들 앞에서 벌거벗은 듯이 명백히 드러났다.그럴 때마다 무함맏은 억지로 꾸며낸 거짓말들로 그들을 공격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무슬림과 대화를 할 때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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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선교전략 / 코란의 주제

무함마드 종교에 대한 가르침

ㅇㄱㄷ 선교사


종교는 무함맏과 꾸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며, 사실상 종교에 대한 주제는 꾸란의 알파이며 오메가라고 할 수 있다

 

(수라26-28)...단지 알라 자신이 원하고 동의한 사람들을 위해 의도한 후에만 (그 중보가 유익이 있다.) 실제로 종말에 믿지 않은 사람들은 천사들을 부인들 이름(여성)으로 말할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서는 이에 대한 어떤 지식도 없다. 그들은 단지 속임과 추측을 따르는 자들일 뿐이다. 분명히 속임은 결코 진실을 대신할 수 없다.”수라 37:149-162 “이제 (무함맏 메카의 불신자들에게) 물어보라, 딸들(즉 그들의 꾸며낸 것에 따르면 천사들이 알라의 딸들인 것 같다<꾸란에 쓰여진 것>.)이 너희 창조자의 것이고, 아들들이 그들의 것이란 말이냐? 아니면 우리가 천사들을그들죄가되는경우에도딸삼아만들었단말이냐? 조심하라! 그들은 거짓말쟁이들이기 때문에“알라의 자녀(또는 딸들)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의심없이 거짓말쟁이들이다. (알라가) 아들들을 두고, 딸들을 선택할 것 같으냐! 어떻게 판단하느냐? 결국 기억 못하지 않느냐? 또는 너희들을 위해 (알라가 자녀를 둔 것에 대해) 어떤 분명한 증서가 있느냐? 그렇다. 만일 참으로 있다면 너희 책들을 가져와 보라 (이방인들이 알라와)함께 진들 (또는 천사들) 사이에 족보 (또는 어머니-자녀:모자지간 있다고 꾸밈) 만들었다. 그러나 진들 즉 천사들은 이제 만들어진 자인 것들을 분명히 알고 있다. 알라는 그들의 속성보다 깨끗하다. 오직 알라의 단정한 사람들만 (변함없는 알라를 그 분에게 합당하지 않은 속성으로부터 깨끗하게 붙든다.) (오 메카족속들아!) 의심 없이 너희들도, 너희의 숭배하는 우상들도, (한 사람을 알라에게) 대항하여 음모를 꾸미는 자, 거짓말할 줄 아는 자 아니다……”

 

위의 모든 구절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무함맏은 유일신을 주창하기 위하여 카바 신전의 모든 알라의 딸들과 아들들로 여겨졌던 우상들을 배격해야 했다. 그 천사들,즉 우상들이 알라의 중보자 역할을 했던 것도 분명하다. 꾸란에서 여러 번 언급된 알라의 아들들, 딸들이 부정되는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존재가 아랍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무함맏이 이슬람 이전의 아랍인들의 우상 숭배를 배격하고 알라를 유일신으로 추앙하는데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암시해 준다. 알라는 결코 혼자 존재하는 신이 아니었다.

 

이제 무함맏은 종교에 대한 체계들을 하나 하나 세워 나갔다. 무함맏이 만든 종교적인 체계는 철저하게 유대교와 기독교를 모방한 것이다.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중요시하고 정의했다. 그러나 무함맏은 믿음에 대한 정의를 “복종”이라고 정의하였다. 복종은 이슬람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다. 복종하는 종교가 이슬람이고, 복종하는 자들이 신자들이며, 복종하는 자들이 낙원에 들어간다. 반대로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불신자들이며, 지옥에 들어가는 자들이다. 수라 49:14 “아랍인들이‘믿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오 무함맏 그들에게) 말하라! ‘너희들은 믿은 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복종했습니다’ 라고 말하라! (왜냐하면 아직도)너희가 믿음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만일 너희들이 알라와 그의 선지자에게 복종을 한다면, 그 분이 너희들에게 (행한 선한) 일들 중에서 하나도 적게 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에 회개와 세례 의식이 있었던 것처럼, 알라에게 종교적인 의식을 행하기 위해 몸을 정결하게 씻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심지어 이전의 아랍 우상 숭배자들에게도 정결하게 하는 의식이 있었는데, 더 완벽하다는 종교에 정결의식이 없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수라 5:6무슬림들이 기도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 얼굴과 손을 팔꿈치까지 씻고, 머리를 물로 문지르고, 다리를 무릎까지 씻고,몸이 의식에 깨끗하지 않다면 목욕하라. 만일 아프거나 여행 중에 있거나 여자를 접촉했거나 물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깨끗한 모래나 흙을 취해서 얼굴과 손에 문질러라 라고 지시한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할례를 행하는 것을 중요시 여겼는데, 무함맏은 이슬람 신앙의 기초가 없기 때문에 그 역사의 기초를 아브라함에게서 도용하고, 모세 오경에 예언된 그 선지자를 자신으로 적용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할례와 제사 의식을 중요하게 여겨 그 의미는 전혀 모르면서도 표면적인 의식만 도용하여 사용하였다.

유대인들은 과거 성전이 있었던 방향을 향해 기도하는 습관이 있고, 기독교인들은 기도하는 습관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무함맏은 그들보다도 더 많고 엄격한 다섯번의 나머즈 시간을 정해 놓고, 다른 종교보다 형식적인 우위를 보이려고 경쟁하였다. 수라 98:1-5에서 세상에서 가장 올바른 책은 꾸란이고, 이슬람 종교가 올바른 길인데, 그 이유는 “그들은 단지 유일한 알라에게, 그 분을 위해 종교를 지키고,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예배하고, 나머즈를 완전히 준수할 뿐만 아니라 구제를 준수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알라를 위해 종교를 지키고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예배하고 나머즈를 준수한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슬람 종교는 알라 숭배, 성지순례, 금식, 나머즈 등과 같은 대부분의 아랍의 종교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우상숭배를 타파하고, 추가로 구제, 아랍 방식의 정결의식, 세금, 결혼 및 이혼 절차에 대한 의식, 지하드 등과 같은 종교 규범을 추가시켰다.

무함맏이 이슬람 종교를 만들고 아랍의 우상숭배자들에게 선포했을 때, 소수의 가난하고 소외받았던 사람들을 제외한 아랍인들은 당연히 무함맏을 믿지 않았다. 수라11:26-31절까지 무함맏이 자기 종족 아랍인들을 설득하는 장면이 나온다. “‘너희들은 유일한 알라에게 예배하라! (만일 유일한 알라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숭배하면), 너희들의 위에 고통스러운 고난의 날이 (올 것을) 나는 두려워한다.’ 그 때 그의 종족 중에 있는 불신자 어떤 사람이 ‘우리들은 너를 우리들과 똑 같은 사람이라고 알고 있고, 너에게는 단지 우리 안에 있는 낮은 사람 <천한 사람들만> 생각 없이 따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라고 말하였다. 그는 ‘오 나의 종족이여, 소식을 주라! 만일 내가 창조주 편에서 온 분명한 문서를 소유한다면, 그리고 그분이 나에게 자기왕궁에서 은사-선지자직을 주었다면, 그러나 이것이 너희들에게 은밀하게 되었다면, 우리가 너희들을 너희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 (믿게 하도록) 강요해야 하느냐?…… 오 나의 종족이여, 나는 너희들에게 이것을 위해 소유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

무함맏은 선지자들에 대해 잘 모르는 아랍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성경의 여러 선지자들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하였다. 수라 26:40에서 모세와 마술사들 간의 대결도 종교적 대결이었다고 말한다. 모세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만일 마술사들이 승리하게된다면, 우리가 그들을 따를 것이다”라고말하고있다. 마술사가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지만, 어쨌든 마술사를 따를 수도 있다는 전제를 하고 있다. 나중에 이들 마술사들은 모세에게 패배하여 알라를 믿고 무슬림들이 되었다. 따라서 모세도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해 이집트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수라40:26에서 이집트 왕 바로는 모세를 죽이려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가 우상숭배를 옹호하는 자들의 대표, 즉 왕이었고, 무함맏을 두렵게 하고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메카의 우상숭배자들을 예표하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모세는 무함맏의 예표가 되는 듯이 이집트인들의 종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집트의 폭군에 의해 반대를 당하였다고 말한다. 이처럼 무함맏은 이슬람 종교를 사람들에게 확증시키기 위해 모세의 종교가 곧 무함맏의 종교였으며, 마찬가지로 모든 선지자들의 종교가 무함맏의 종교 이슬람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무함맏이 과거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이용하자 아랍 우상 숭배자들은 선지자의 표적으로 기적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선지자는 자신의 말을 입증할 어떤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라 28:48-49 “이제 언젠가 그들에게 우리의 면전에서 진리의 (선지자가) 와서는 그들이 ‘그에게도 (즉 무함맏에게도) 모세에게도 주어진 기적들이 주어진다면, (우리들이 그를 따랐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들은 전에 모세에게 주어진 기적들에게도 불신자가 되지 않았느냐? 그들은 ‘(타우?과 꾸란이) 서로 서로를 이용하여 힘 있게 하는 두 마법사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두 책 중) 모두에게 불신자이다’ 라고 말한다.”

무함맏이 아랍 우상숭배자들을 설득하려고 이용하였던 것은 주로 성경의 선지자들 이야기였지만, 그가 하는 여러 이야기들 중에는 아랍인들도 아는 여러 전설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수라 23:83 “이것은 단지 너희들의 이전에 있던전 설들이다.” 무함맏의 근거 없고 꿈을 꾸듯 횡설수설하는 소리들과 말도 되지 않는 전설들을 아랍인들이 믿을리가 없었다(수라 21:3-6).

무함맏이 과거의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슬람을 확증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랍 우상숭배자들이 무함맏의 말을 들을수록 반대는 커졌고, 무함맏을 거짓말쟁, 마술사, 귀신들린 자 등으로 취급하며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수라 52:29 “됐다. (오 무함맏), 너는 (사람들에게 꾸란 구절들을 가지고) 가르치라! 왜냐하면 너는 창조주의 호의로 점쟁이도, 미친 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우상숭배자들이 무함맏은) ‘한 시인이다. 우리들은 그에게 재앙이 미치기를 기다린다’ 라고 한다.”) 수라 23:70 “또는‘그에게는 (무함맏에게는) 귀신들린 것이 있다.’ 라고들 하느냐?” 마법에 가까운 무함맏의 말들은 대단히 많지만, 한 예를 들겠다. 수라73:17 “그렇다. 만일 너희들이 불신자들이 되면, (스스로 공포로) 아이들(의 머리카락들을 희어지게 하여) 노인들로 바꾸어 놓을 날(의 고난)으로부터 어떻게 보호받을 것인가!” 심지어는 무함맏은 자신이 미친 자가 아니라는 것을 맹세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수라 68:2 “연필과 (그와 함께 천사들이)쓰는 기록들에 맹세하건데, (오 무함맏) 너는 창조주의 호의로 미친 것이 아니다.” 당시 아랍 사람들은 무함맏을 따르는 사람들까지 함께 비난하였다. “너희들은 단지 한마술에 걸린,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을 따르고 있다” 라고 하였다(수라25:8). 수라 81장은 무함맏이 메카에서 초기에 암송했던 수라로서 왜 메카인들이 그를 미친 시인이라고 했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암시를 주고 있다. 수라 81:1-25 “해가 둘둘 말려졌을때, 별들도 (자기 하늘들에서) 흘러내릴 때, 산들도 (자기 자리들에서 옮겨져) 돌아다닐 때, (뱃 속의 새끼가) 열 달 된 임심한 낙타들도 자유롭게 보내졌을 때, 맹수들도 (한 곳에) 모였을 때, 바다들이 (화덕처럼) 불어졌을 때 (그리고 물 대신에 불로 채워졌을 때), 영혼들이 (다시 육체들에) 짝지워졌을 때, 산채로 매장된 (각각의) 소녀에게 어떤 죄 때문에 죽었는지를 물었을 때, (행위를 기록한 책) 페이지가 열려졌을 때, 하늘이 (땅 위에서) 벗겨졌을 때, 지옥이 (불신자들을 위해) 타올라 흐를 때, 천국이 (경건한 자들에게) 가까워졌을 때, (바로 그 날에 각각의) 영혼이 (바로 그 날을 위해) 준비하여 온 것을 (즉 모든 선악을 행한 것을) 아노라! 충분하다. 나는(밤들의 눈에서) 보이지 않는 자, (밤들도) 빨리 지나 (자기 ‘둥지들’, 성벽들에) 숨어있는 자(별)들에게, 자기 어두움으로 오가는 저녁에게, 그리고 밝고 있는 새벽에 맹세를 하노라! 의심할 나위 없이 이 (꾸란은) 한 위대하고, 힘 있고, 아르쉬의 주인 (되는 알라)의 견해로서 적절한 시간과 장소가 있는, 그곳에서 (즉 하늘에서 천사들 쪽에서) 복종하는 자, 신실한 사도의 (즉 자브러일 천사의 알라 편에서 온) 말씀이다!그리고 너희들의 주인인 (무함맏은) 미치지 않았다. 참으로 그 (자브러일을) 열려진 지평선에서 보았다. 이 (무함맏은) 출저를 모르는 계시를 탐내는 자도 아니다. (그는 알라 편에서 자기에게 온 계시들을 망치지 않고, 완전한 형태로 너희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리고 이 (꾸란은) 쫓겨난 사탄의 말이 아니다.” 수라 37:6-10 “참으로 우리는 가장 가까운 하늘을 별들로 장식했다. 그리고 (그것을) 모든 종류의 불순종하는 사탄과 귀신들로부터 보호했다. 그 (귀신)들은 가장 높이 존재하는 자들을 (즉 천사들의 말들을) 언제든지 들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그들에게 모든 방향에서 (별들이) 던져진다. 그들을 위해서 (종말에) 끝없는 고난이 있다. 단지 어떤 때 (어떤 말을) 엿들은 자가 (즉 귀신이) 있다면, 그것도 날으는 별이 쫓아가서 따라잡을 것이다. (그리고 멸망시킬 것이다).” 수라 75:7-10 “그렇다. (본 소름끼치는 것들로부터) 눈을 감고, (하늘에 있는) 달도 잡힌 상태에서 해와 달이 하나가 되었을 때에, 그 날에 그 사람이 ‘(이 재앙들로부터) 어디로 피난할 수 있느냐?’ 라고 할 것이다.” 본문에는 무함맏이 계시를 받을 때 얼마나 공포와 소름을 느끼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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