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탈북자 선교는 하나님이 주신 북한선교의 통로 - 유병욱 목사

 

 

북한이탈주민(탈북자) 선교는 하나님이 주신 북한선교의 통로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북한선교위원회 총무 유병욱 목사, 부곡제일교회)

북한이탈주민선교는 하나님이 우리 한국교회에게 주신 복음의 통로이다. 우리 사회에서 북한 이탈 주민들은 한때는 귀순용사라는 극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로 여겨졌으나 이제는 그 수가 매년 수 천 명 규모로 증가하면서 별로 새롭지 않은 그러면서도 달갑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기존 북한 이탈 주민들의 사회 적응이 순조롭지 않은 상황에서 매년 입국하는 북한 이탈 주민들의 수가 빠르게 증가하자(1999148, 2000년의 312, 2001년의 583, 20021141, 20031218, 2004년에는 1894, 20051,383명이 입국)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덧 탈북자 문제라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사용되게 되었다. 북한이탈주민들은 입국 후 관계 당국에서 일정 기간 동안 조사를 받은 다음 경기도 안성에 있는 하나원에서 약 3개월간 체제적응교육을 받는다.

초기정착 교육과정을 수료하게 되면 거주 지원 및 정착금을 가족 수에 따라 받는다. 북한이탈주민들이 증가함에 따라 정부의 이들에 대한 제정지원 규모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에 정착하여 살면서 여러 가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차이로 인하여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우리는 한국을 찾아 북한을 탈출한 그런 북한이탈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참된 구원과 해방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야 하고 경험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이 북한이탈주민 형제들 뒤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2000만 명이 넘는 우리의 북한동포가 있음을 또한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이 있음을 직시하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북한이탈주민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저 북한 땅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기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나라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이탈주민 선교는 장차 통일을 대비하는 너무나도 중요한 사역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관심 밖에 있다. 회원 540여 명으로 이루어진 통일을 준비하는 귀순자협회라고 있는데 이 협회의 많은 회원들이 통일이 되면 거의 100%가 북한에 다시 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준비되어 자기 고향에 가서 교회를 짓는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복된 일이다. 그래서 북한이탈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북한선교의 시작이고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선교가 멀리 있을게 아니라 아주 가까이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재 국내에 북한이탈주민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교회는 두 가지 형태이다. 하나는 북한이탈주민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북한이탈주민 교회가 있다. 국내에서 신학을 한 북한이탈주민 출신 목회자가 세운 교회들이 있다.

북한이탈주민이 그 누구보다 탈북자를 잘 알고 있다. 서로 간에 감정적 공감대가 아주 높다. 그래서 탈북 목회자의 설교에 북한이탈주민들이 큰 은혜를 받고 있다. 다만 북한이탈주민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출석하는 교인들의 생계가 매우 어려워 재정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 대형교회들이 북한이탈주민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선교비를 뿌리고 있어 그로인하여 교인들이 정착하지 못하고 교회를 옮기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형교회의 선교방법의 인식의 전환과 개선이 필요하다고 본다. 오히려 기존교회와 북한이탈주민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들과 협력관계를 맺는 것이 더 필요하다. 북한이탈주민 선교를 하는 또 다른 하나는 북한이탈주민과 남한 성도가 함께 하는 교회가 있다. 한국교회는 북한이탈 성도들이 겪고 있는 현실적 어려움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북한이탈주민들이 교회에 잘 안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북한이탈주민 선교를 위해서는 몇 가지 이해가 필요하다.

1)북한사회와 북한 동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2)복음을 전할 때 조급해서는 안 된다.

3)가능한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을 많이 만들라는 것이다.

4)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이다.

5)종의 자세로 섬겨 감동을 주라는 것이다.

6)인간적 신뢰가 생겼을 때 전도하고 성경공부를 시작하라 이다.

7)검증된 북한이탈주민 사역자만 세우라이다.

북한이탈주민 선교를 통하여 복음이 북한 땅에 전해질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북한주민들이 북한 땅 뿐만 아니라 세상 열방으로 나아갈 것이다. 북한선교의 길목에 북한이탈주민 선교가 있다. 북한이탈주민 선교의 길목을 지나지 않고서는 북한선교는 어렵다.어떤 목사님이 북한선교를 생각하면 저의 가슴이 뜨거워집니다라고 말한 것이 생각난다. 구호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북한이탈주민 형제들을 통하여 저 북한선교라는 뜨거운 비전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한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선교관련 자료 / 단기선교여행 시 꼭 지켜야 할 10가지 지침

 

( 캄보디아 서원교 선교사님의 사역현장에서 )

 

 

미션파트너스(상임대표 한철호 선교사)'21세기형단기선교여행위원회'가 여름 단기선교여행 시즌을 앞두고 단기선교여행 시 꼭 지켜야 할 10가지 지침을 발표했다. 위원회는 "각 교회에서 다양한 형태의 선교여행이 계획되고 있는데, 철저한 준비과정을 통해 준비된 단기선교여행이 돼야 할 것"이라며 아래의 10가지 사항을 점검할 것을 제안했다.

 

단기선교여행의 목적을 분명히 하라.

현장 방문인지, 선교사를 돕기 위한 것인지, 공동체 훈련이 목적인지, 사역을 진행할 것인지 등에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한다. 많은 경우 위의 목적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데, 이 경우 많은 혼란이 생긴다. 물론 일정 부분 다양한 목적이 섞여 있더라도 주된 목적을 정하고 이에 따른 준비를 해야 한다.

 

프로그램을 준비하지 말고 선교를 준비하라.

많은 경우 현장에 가서 사역할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데에 대부분의 준비 시간을 사용한다. 찬양, 워십댄스 등을 준비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선교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선교는 그냥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화에 가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를 넘어간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생각하고 가야 한다.

 

짧은 기간 방문이 장기적인 효과를 주도록 하라.

 

1~2주간 짧은 방문이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게 하기 위해서는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에 집중해야 한다. 프로그램을 돌리거나 무엇은 나눠주고 오는 일에 정신없어서 사람들과 속 깊은 만남을 하지 못하면 장기적인 효과는 거의 없게 된다. 사람에게 집중하라

 

가르치러 가지 말고 배우러 가라.

 

선교를 가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와야 하고, 그들은 무엇은 배워야 한다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함께 서로를 배우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워십댄스를 보여주어도 우리만 춤추지 말고 준비단계에서부터 그들과 함께 준비해서 함께 춤을 추면서 서로에게 배우고 관계가 깊어지게 된다.

 

현지교회나 현장선교사와 긴밀하게 협력하라.

현장 상황을 무시한 채, 가는 사람들이 사역의 내용을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현지가 요청하는 일을 해야 한다. 선교는 우리의 사역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교회를 돕는 일이다. 준비 시 현지 선교사와 긴밀한 정보 공유를 하라. 현장에서 무엇을 요구하는지, 필요한 물품, 자원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현장의 상황에 따라 준비하고 현지 물가와 재정 지출에 대해서 사전에 알면 좀 더 정확하게 준비할 수 있다.

 

적은 인원으로 움직이라.

여러 명이 함께 갔더라도 현장에서는 적은 인원으로 활동해야 한다. 3~4명씩 팀으로 움직이라. 그래야만 모든 팀원이 모든 상황에 반응하게 된다. 3~4명은 함께 택시 탈 수 있는 인원이다. 10명 혹은 20명이 함께 움직이면 버스를 대절해서 움직이게 된다. 인원이 많아지면 기동성도 떨어진다. 모두 함께 움직이면 특정 상황에서 인도하는 리더 2~3명 외에는 현장의 상황에 참여하지 않고, 리더가 결정해 주는 대로 따라다니기만 한다. 이것은 선교가 아니다.

 

평가회는 반드시 현장에서 하고 돌아오라.

한국에 와서 평가회를 하면 팀원들이 다 모이지도 않는다. 귀국하면 현장에서 떠올랐던 생각이나 돌아가서 하고 싶은 일들이 다시 생각나지 않는다. 단기선교 일정 중 마지막 하루, 혹은 최소한 반나절의 시간을 떼어 놓고 평가회를 하고 돌아오는 것이 좋다.

 

반드시 일기를 쓰라.

여행 기간 하나님께서 계속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대해서 새롭게 깨달은 점, 자신에 대해서 새롭게 발견한 점, 공동체에 대해서 깨달은 점 등 하나님께서 다양하게 말씀하시는 것들을 잘 기록하면 차후에도 큰 은혜와 깨달음의 도구가 된다.

 

 

21세기형 단기선교여행 표준지침 해설서

위기상황 대처 훈련을 하고 떠나라.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연락해야 하는지, 위기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어떤 절차로 위기 관리를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 ()한국위기관리재단(www.kcms.or.kr)에서 필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선교여행 이후가 선교임을 인식하라.

선교여행을 갔다 온 후가 진짜 선교의 시작이다. 가기 전에 기도회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갔다 온 다음에 기도회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방문했던 선교지에서의 경험, 만남, 확인한 필요 등을 충분히 알고 진정한 의미 있는 기도회가 될 수 있다. 또한 방문했던 지역에서 온 외국인 근로자, 유학생, 다문화 가정들이 한국에 있는데, 일 년 내내 그들을 위한 사역에 참여할 수 있다. 선교여행 이후가 진짜 선교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선교사님은 숙식 무료입니다”/미션아일랜드, 선교사 등 안식처 ‘미션하우스‘ 경기도 부천에 오픈

 

 

기독교선교단체 미션아일랜드(missionisland.net대표 장기웅 동아방송예술대 교수)는 10일 선교사와 기독교사역자 등을 위한 단기 안식처 ‘미션하우스’를 오픈예배를 드렸다고 밝혔다.

오픈예배에서는 농업정책보험금융원 경영기획실장 정성봉 목사, 세계기독교직장선교연합회 총무 손병락 안수집사 등이 순서를 맡았다. 

 

 

미션하우스는 경기도 부천 중동로에 있으며 아파트 38평에 방 4개를 갖추고 있다.

1주일간 무료 숙식과 와아파이 등을 제공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용하는 사람이 없으면 계속 머무를 수 있다. 

 

 

선교사의 경우 파송증명서를 이메일(jkwoongg@daum.net)로 보내면 된다.

 

 

2012년 설립된 미션아일랜드는 기독교 문화예술축제, 음악회, 문화예술대상 시상 등을 갖고 있다

(문의 010-7900-4697).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2043812&code=61121111&sid1=chr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해외 선교사 증가율 0.69% 역대 최저


 

해외 선교사 증가율 0.69% 역대 최저 [2018-01-04 00:00]


한국선교연구원 선교운동 동향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여의도순복음 소속 선교사들이 지난해 5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순복음교회
에서 열린 세계선교사대회에서 성도들과 찬양을 부르고 있다. 국민일보DB


지난해 한국교회가 해외에 파송한 선교사는 전년보다 늘었다. 하지만 증가폭은 역대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선교연구원(KRIM·원장 문상철)이 2일 발표한 ‘한국 선교운동 동향’에 따르면 2017년 말 기준으로 159개 국가에 2만1220명의 한인 선교사가 파송된 것으로 조사됐다. 선교사의 수는 전년에 비해 145명 증가했다. 문제는 증가율이다. 2014년 1.90%, 2015년 1.01%, 2016년 1.94%로 소폭 오르내리다가 지난해 0.69%를 기록했다. KRIM이 선교동향 조사를 시작한 이래 가장 낮은 수치다.


이 같은 결과는 한국교회의 장기 침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됐다. 한국선교연구원 이천 본부장은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신뢰도가 떨어지면서 성도 수가 감소하고, 자연스레 선교현장에 인적·물적 자원을 지원하는 교회 동력도 떨어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선교사 수가 늘어난 데 대해서는 “많은 신학교들이 다수의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잉여 인적 자원이 선교지로 진출하는 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 추세대로라면 선교사의 연증가율이 0%를 지나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온다.


연증가율 감소는 과거와 비교하면 더 뚜렷하다. KRIM에 따르면 2006년에는 선교사 수 연증가율이 15.8%, 1990년대에는 평균 35%에 달했다. 이 같은 증가율을 잣대 삼아 2030년까지 ‘한국인 선교사 10만명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를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현시점에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장로회신학대 한국일(선교학) 교수는 “한국교회는 그동안 양적 성장에 취해 단순히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데 급급했다”고 지적하면서 “이제는 선교지 현장을 잘 이해하고, 현지인을 지도자로 세울 수 있는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등 내실을 다진다면 지금의 위기가 오히려 선교의 본질을 회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선교사들도 지금이 한국 선교의 변곡점임을 자각하면서 대책 마련에 나서는 분위기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가 최근 개최한 한국선교지도자포럼에서 참석자들은 미래전략팀을 구성하고 청년세대 선교동원법 등을 연구할 것을 결의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선교훈련 프로그램 개발도 구상 중이다. 또 연합선교 훈련의 필요를 느끼고 각 기관의 선교훈련 담당자들이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그래픽=이영은 기자

[출처] 국민일보
[원본링크]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878447&code=23111111&sid1=mis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이슬람 가족공동체 이해를 통한 선교전략 / 움마 다르 일부다처제 수피즘

 


장훈태-천안대학교 기독교학부 선교학


들어가는 말


2001년 9월 11일 테러 사건 이후 지구촌 사람들은 이슬람1)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런 관심과 함께 이슬람 관련 방송, 학술세미나,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왜 이런 현상들이 갑자기 일어나는 것일까라는 의구심마저 생긴다.


라민 샤네 교수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가장 큰 차이중의 하나는 기독교는 성경을 현지어로 번역하지만 이슬람은 꾸란을 현지어로 절대로 번역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아랍권의 종교적 근본주의가 세계 각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사회의 도덕성이나 사회 참여에 대한 프로그램 또는 마인드보다는 개인적인 신앙차원 즉 종교적 사유화에 더 집중되어 있다. 반면 이슬람은 교회와 국가를 구분하지 않고 양자를 통합시키는 사고 체계를 갖고 있다2)고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에 대한 오해를 하거나 이해기 부족하여 혼돈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에 대한 오해가 있다.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을 기독교의 또 하나의 형태라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슬람 신앙을 알라와 신자의 개인적인 관계로 보고 있는데 이것이 이슬람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다. 우리는 이슬람의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종교의 창시자이자 첫 번째 이슬람 국가의 건국인 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슬람은 정치와 종교를 하나로 본다.3) 정치와 종교의 일치를 통해 그들은 또 하나의 집단을 이루며 전 세계를 이슬람화하려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스리랑카의 이슬람이다. 스리랑카 무슬림들은 가톨릭계의 중 · 고등학교를 인수한 후 무슬림 학교로 변경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4) 이들은 하나의 종족집단을 형성하여 기독교와 대항하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 선교사들이나 외국 인권단체의 보고를 통하여 우리는 계속 이슬람 국가에서 일어나는 기독교 신자들이 당하는 박해소식을 보면 알 수 있다.5) 이슬람은 종교의 다원화를 거부하고 종교가정치, 사회의 모든 분야를 독점하려고 한다. 이슬람은 영혼구원을 위한 종교 본질보다는 국가와 사회를 강제적이라도 이슬람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이슬람사회의 종교적 비관용성은 날로 더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이 관용의 종교라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다. 전호진 박사는 ‘이슬람 원리주의는 자기들 나름대로는 할말이 있을지 모르나 합리성과 정당성을 상실한 극단의 논리이다. 특히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이슬람을 정치 이데올로기화하고 있다. 대부분의 이슬람 사회도 이슬람을 이데올로기로 몰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6) 이런 지적과 함께 이슬람의 가족제도에 대한 일반적인 특징과 이슬람 공동체의 복음전달, 장애요인과 가능성에 대한 진단을 통하여 복음 전달의 접촉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Ⅰ 이슬람의 가족제도


1.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Ummah)


이슬람은 전 세계 인구 63억의 21%에 해당하는 13억의 무슬림을 가지고 있는데 앞으로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한다.7) 최근 들어 무슬림의 성장속도는 어느 종교보다 빠르다. 이슬람은 96%로 가장 높고, 힌두교는 63%, 기독교는 55.6%이다.8) 특히 무슬림은 서부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에 걸쳐 살고 있다. 지난 20세기의 무슬림 성장은 대단했으며, 1900년도에는 12.3%에서 2000년은 21.1%로 성장했다. 이는 대부분 높은 출생률과 이주로 인한 성장이다. 서부 아프리카와 인도네시아, 미국에서는 개종으로 인한 성장률이 가장 높은 추세이다. 이처럼 급성장 하는 이슬람의 원동력은 무엇이며, 이들의 집단적 힘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바로 이슬람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A. D 622년 메디나(Medina: al-Madina, 도시)9)로 피신하면서 기본 생활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마호메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메디나에 살고 있던 정주자로서 그들을 지원한 안사르(Ansar)와 메카에서 온 자신의 추종자인 ‘무하지룬’(Muhajirun)의 형제를 맺게 함으로10) 한 집안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ummah; 대가족)의11) 주요한 기원이 되었으며 ‘이슬람 형제애’를 이룩하는 기초가 되었다. 메디나의 무슬림 공동체는 단순한 공동체에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국가이며, 그 후의 사건의 경과로 인해서 제국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이슬람 공동체 형성의 또 하나의 원인은 무함마드가 죽기전에 행한 마지막 설교에서 ‘이슬람의 형제애’를 역설하였다고 한다.


이슬람의 잠언에서도 한 무슬림이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무슬림이 아니라고 규정한다. 이란의 혁명가였던 호메이니는 이슬람 혁명에 성공한 후 "우리 이슬람은 다른 정부와 다른 지역에 거주할 지라도 한 가족이다"라고 선언하므로 이란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었다. 이슬람은 무슬림을 형제애로 묶어주는 공동체를 움마라고 하고 이를 알라 신이 세운 거룩한 기구로 믿는다. 이슬람 사회에서 움마의 구속력과 기본적인 특징은 가정이라는 숭고한 체제 속에서 길러지고 북돋아지는 경건성과 도덕적 행위이다. 이러한 배경을 보면서 가족 구성원들과 그에 딸린 식구들의 권한, 의무, 특권과 관련된 분명하고 상세한 훈계와 지시 사항들이 꾸란과 하디스(hadith) 문서에서 발견된다. 더욱이, 가정 생활의 실질적인 모델은 우리가 사랑하는 선지자의 삶의 형태로 주어진다. 무슬림에서 움마는 사회의 기본단위로서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사회의 기본적인 단위로서 가정은 상호적인 의무가 있다. 개인은 그 자체로 중요치 않고, 사회적인 존재로서 중요하다.12)


이러한 배경에서 무함마드가 형제애와 평등사상을 강조하게 된 원인은 메카에서 13년 동안 신의 계시를 전달받으면서 활동했던 시기를 메카시대라고 한다. 미신을 타파하고 우상숭배를 금지해야 한다는 유일신 유신론 사상13)의 운동을 전개했던 것이 메카에서 그의 주된 임무였다면 메디나에서는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생존 경쟁으로 인하여 야기된 부족간의 갈등을 치료하고 메카 아주자와 메디나 후원자 및 유대인들 간의 서로 다른 정치적, 종교적 목적을 융화시켜 하나의 공동체(ummah) 즉 이슬람 신앙공동체로 만드는 것이 그의 메디나 사명이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형제애 사상을 고취14)시켰다. 이슬람에서 형제애 혹은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한 핏줄을 이어받은 것을 강조할 뿐 아니라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 모두가 신의 아들이며 딸이라는 것을 내세워 신 앞에서는 인간 모두가 똑같다는 평등사상을 펼쳐 나간다. 그러나 이슬람의 형제애 혹은 평등사상을 보게 되면 남성 중심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모스크 사원을 출입하는 것이나 집안에서의 활동을 보면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 허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구별되어 있다.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에서 여성의 위치는 상당히 위축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15) 최근 들어 여성 해방운동가들에 의해 무슬림 여성의 활동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는 추세이지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꾸란에 나타난 움마는, 먼저 윤리적 공동체로서 신자들이 선행을 서로 격려하고, 악덕을 미워하며 배제하는 곳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움마는 단순히 신자들이 모이는 종교 공동체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움마는 정치와 종교가 하나가 되 철저한 신정국가(theocracy)일 뿐 아니라 순수한 종교와 순수한 정치의 분리가 불가능하며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분리가 없다.16) 따라서 움마라는 이슬람의 공동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정교분리는 상상할 수 없다. 종교와 국가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연합체이며, 이것이 후에 이슬람이 확산되는데 중요한 모체가 되었다.17) 실질적으로 이슬람 사회에서 국가는 신정(神政)일 뿐 아니라 국가를 통치하는 왕이나 대통령은 살아있는 신과도 같다고 믿는다. 이슬람 국가에서 알라, 왕, 국가는 삼위일체일 뿐 아니라 이를 비판하거나 파괴하는 자는 처벌을 받게 될 만큼 종교와 국가는 연합체이고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에서 움마는 대가족일 뿐 아니라 일차적인 집단(움마)인 것이다.18)

 

2. 무슬림 가족과 일반적 특징


독실한 무슬림들에게 이슬람의 제도나 관습은 성스러운 율법으로 성립된 종교적인 정치체제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그 주권의 원천은 신이며 주권자인 칼리프이다. 즉 칼리프의 일차적인 임무는 이슬람을 지탱하고 전파하는데 있다. 그 율법은 신에 의해서 계시된 성스러운 법률이고 공인된 해석자들에 의해서 확충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무슬림들은 이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단지 신앙과 의식과 종교적인 행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형사적인 문제는 물론 가족제도와 다른 사회에서는 세속적인 권력에 의해서 처리되어야 할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무슬림의 가족 혹은 이슬람의 넓은 집단 사회 가운데 그 기초가 되는 공동체인 가족을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슬람 사회가 다른 문명사회와 비교해 볼 때 나름대로 특이한 가족제도와 관습을 가지고 있는데, 무슬림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제도들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보아야 한다.19) 무슬림 가족은 율법의 기초아래 새로운 가정, 새로운 국가, 새로운 사회조직, 새로운 교리로서 가족을 이끌어간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무슬림은 상호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는 가족 공동체를 이루며 이를 중심으로 하여 활동한다. 그러면서도 가정내부에는 평등한 가족관계가 아닌 전향적인 평등관계를 가지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가정은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쉽게 파괴되지 않는다.


무슬림의 가정은 때로는 무미건조해 보일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삶은 은은한 사랑이 배여 있는데 이는 공동체적인 삶의 패턴이 이를 증명하는데, 특히 무슬림들의 주거형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무슬림의 주거 형태의 표본은 다르(dar)라고 불리는 가옥이다. ‘다르’는 크든 작든 대부분의 가옥은 중앙에 위치란 마당, 경우에 따라서는 돔으로 덮인 마당과 연결된 방들을 보게 된다. 혹은 건물(bayt)들로 구성되기도 한다. 가옥들은 그 규모, 방들의 숫자, 분수나 멋지게 꾸민 수도시설, 스투코로 된 조각이나 회화, 기타 개인적인 용도의 시설물의 유무에 따라서 차이가 난다.20) 필자가 무슬림 가정을 방문했을 때 가옥의 구조가 지역이나 국기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보았지만 대부분의 가옥 구조는 비슷했다. 아프리카수단의 경우는 커다란 대지 위에 마당은 중앙에 위치하고 침실과 주방은 별도로 되어 있었다. 이집트의 경우는 시골을 제외하고 도시는 3층집으로 되어 있으면서 남성과 여성의 응접실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개방화된 이슬람 지역(마그레브지역)에서는 공동체 중심으로 중앙에 거실이 있어 모두가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었다. 집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싸롱을 중심으로 한 긴 의자는 침대의 역할도 하기 때문에 생활이 편리하고, 가족 공동체간의 결속력을 갖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시부모를 모시는 일로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며, 부모가 귀찮아 자녀를 괄시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대가족으로 한 집에서 함께 거주하며 음식을 나눌 뿐 아니라 명예와 수치까지도 함께 공유한다.

 

1) 결속력이 강한 무슬림 가정


앞에서 무슬림 가정은21) 공동체를 중심으로 성립되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서구사회의 가정이 선진화가 되어 개인적이면서 핵가족화 되어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무슬림 가정은 결코 개인적이 아닌 결속력이 강한 공동체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가족공동체의 핵심은 남성 중심이면서 장남의 권위가 매우 높다.22) 무슬림 가족회의에서 의사결정이나 중요한 사항들은 장남의 의사가 상당히 반영된다. 물론 아버지는 모든 면에서 그 가정의 중심 역할을 한다. 한 가정 안에서 가족구성원의 행위나 결정이 독립적일 수 없으며 단절된 ‘너와 나’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무슬림 가정에서 남자가 분가할 경우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무슬림 가족 공동체로부터 분가한 형제들은 서구사회에 비하여 여전히 깊은 가족적 공동체와 유대관계를 갖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는 대개 독립을 한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 사이는 그렇지 않다. 부모와 자녀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신분상 위치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한 울타리 안에 있다. 한 예로 자식이 이슬람 율법이나 종교적인 행위에 있어 범법을 행하였을 경우 부모가 모든 것을 책임을 져야 한다. 부모는 자식에 대한 책임이 언제나 뒤따른다는 것을 보여 준다.

 


2) 무슬림 가정에서 부모의 절대적 권위


무슬림 가정에서 부모는 모든 것에 대한 권위가 존중된다. 무슬림 가정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대한 일종의 소유권을 가진다. 무슬림의 부모가 자신의 자녀에게 가혹한 학대를 가해도 다른 사람이 옆에서 간섭을 할 수 없다. 무슬림 사회에게 아동학대라는 용어를 찾기란 어렵다.


만약 자녀가 사회적 신분이나 명예가 있게 되면 전적으로 부모의 공덕으로 돌려진다. 자녀가 잘못하면 그것도 부모의 절대적인 책임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자녀가 많은 부(富)를 가지게 되면 그것도 부모의 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만큼 부모의 권위는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부모의 절대적인 권위만큼 평온하거나 안정적이지는 못한 것이 무슬림가정의 단점이다. 무슬림 가정에서 아버지의 지배적인 태도 때문에 아내와 자녀들이 자신들의 개인적인 자유를 찾고자 하여 속이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덧붙인다면 아내들은 이 부분에서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다.23) 그래서 아내나 자녀들이 남편이나 아버지에게 무엇을 말하더라도 다시 그녀의 남편에게 옮겨 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행동으로 간주된다. 한 여인이 외적으로 사소한 말로 한 가정에 파문을 일으키거나 당신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릴 경우 이혼24)까지 초래한다. 이 같은 환경으로 인해 여성들은 부당한 취급과 법적인 구제책이 없는 결혼 생활에서 종종 정서적인 생존을 위해 교묘한 방법이나 속임수를 쓰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기독교인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고 따르며 존경할 것을 권면한다.(엡 5:22-33).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순종에 대한 모델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아브라함을 주라고 부르면서 순종"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은 사라가 원하는 대로 하갈을 아내로 취하기도 했고 또 그녀를 내쫓기도 했다. 아내들의 이슬람적인 순종과 성경적인 순종은 비교할 수 없다. 이슬람적 순종은 외적이고 그만큼 쉽게 할 수 있지만, 곧 모욕과 증오감, 복수심과 기만을 낳기도 한다. 반면에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마음에서 스스로 받아들이고 신뢰와 존경을 주며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며 충실함을 소중히 여긴다. 아무튼 무슬림 사회에서 부모의 권위나 남편의 권위는 절대적이지만 반대로 모순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무슬림 사회의 생활이 성경적인 토대 위에서 기초되었을때 부부관계, 자식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려내게 되며, 이는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된다.


3) 무슬림 가족 공동체의 명예심


이슬람 사회에 있어서 한 가정의 명예와 가족 구성원인 개인의 명예는 동일하게 여겨진다.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의 명예는 그 가족의 명예가 되고, 한 사람의 수치는 곧 바로 전체 가족에게 영향을 미친다. 가족 중에 하나가 명예를 더럽혔으면 그는 가정에서 추방되기도 하며 다른 누군가 자기 가족 중 한 사람을 욕되게 한다면 가족 전체 명예를 더럽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히 한 가족의 문제일 뿐 아니라 넓은 의미의 친족 전체의 문제로까지 비화된다. 그만큼 가족의 역할과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슬람 사회의 가족의 역할로서 먼저 여성의 위치가 분명하고 투명해야 한다. 여성은 정숙함, 정절, 성적 부도덕이 있어서는 안 된다(수라 33:59; 수라 24:2-10; 24:21-16; 27-33; 수라 4:24). 여성들은 결혼에 있어서도 꾸란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먼저 신앙이 있는 배우자 선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수라 60:10; 수라 2:221; 4:25), 특정 결혼에 대한 금기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결혼의 금기 사항으로 근친상간이 있다(수라 4:22-27).


4) 무슬림 가정에서 모성(母性)의 중요성


무슬림 사회의 일반적인 상황은 어린이 교육에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무슬림가정은 일부다처제이기 때문에 누가 아버지인가를 어린이에게 밝힌다. 입양에 관한 조항은 있을 수 없다. 이런 가운데 모성의 중요성은 더 강조된다.25) 무슬림들은 자녀를 낳고 기르는 헌신적인 어머니의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뜻을 가진 ‘낙원이 어머니의 발에 있다는 것을 잊어 왔다. 여성 및 무슬림 사회 전체는 이슬람이 성공적인 어머니 상이 무슬림의 종교적 완전성으로 본다는 사실을 망각해 왔다. 유아부터 성인초기의 기간동안 그들이 필요로 할 때 그들 곁에 있어주며 그들을 양육할 때 표현되는 어머니의 애정과 관심은 다른 어떤 것으로 대치될 수 없다’는 것이다.26) Schleifer에 의하면, "무슬림 어머니들은 알라와 가족에 대한 기본적인 의무를 다해 왔을 뿐 아니라 지식을 쌓는 등의 다른 활동들을 성공적으로 추구해 왔다. 무슬림 여성들이 전통적으로 학자, 상인, 공예인, 심지어 비상시에는 군인으로서 활동하는 것은 이슬람의 견지에 상반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샤리아’(Sharia)의 관점에서 이러한 활동들은 의무로서 모든 여인들에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부차적인것들이다. 여성의 기본적인 역할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모성은 여성이 이생에서 존경받을 수 있고, 궁극적으로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특별한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27)


무슬림 사회에서 모성의 중요성은 어린이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질서 정연하게 양육 받은 아이들은 몇 가지를 기억하며 일생을 살아야 한다. 어린이는 먼저 ‘너희를 낳아준 자궁을 공경하라’(수라 4:1)는 교육을 받는다. 둘째, 다른 어린이에게 축복하라(수라 16:72). 셋째, 부모를 공경하고, 노인을 보살피라(수라 17:23-24). 넷째, 부모에게 감사하라(수라 31:14). 다섯째, 부모에 대한 친절, 어머니는 그를 낳았다는 것(수라 46:15)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 사회에서 모성은 어린이의 성장과 무슬림 공동체의 정체성과 책임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한 가정의 집단성, 돌봄 집단에 소속하고자 하는 문화적 욕구에 기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사람들의 사회생활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방식의 집단성을 수행하는 의미를 배운다.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이슬람에 기반을 둔 것은 아니지만 족장시대를 거쳐 한 가정의 공동체내의 역할로 인해 강화되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슬람 사회의 모성(母性)의 중요성이 강조됨에도 불구하고 이상과 현실은 항상 별개의 것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매춘 어린이 범죄(형제가 자매를 죽이는 행위), 근친상간, 남색, 여성할례, 여성의 동성연애, 가족 구성원과 여성 세계의 이기심 등이 부정적인 면이다. 그렇다고 모든 면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긍정적인 측면도 있는데, 가족간의 화목, 환대, 사람과의 관계, 행사들의 중요성 강조, 가정의 가치, 어린이와 노안을 돌보는 일 등은 어느 가정보다 강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5) 이슬람 사회의 일부다처제


이슬람에서 무함마드는 일부다처제를 인정한다.28) 사회는 제각기 시대적 상황에 따라 불가피하게 또는 남성의 분별없는 성욕으로 일부다처제가 행해져 왔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 국가들은 법률적으로 일부일처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꾸란을 실정법의 모체로 삼고 있는 이슬람권에서는 예외가 되고 있다. 물론 꾸란도 일부일처제를 원칙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특수한 환경과 조건하에서는 일부다처가 합법적으로 허용하는 예외규정을 두고 있다.29) 그들은 일부다처제의 뿌리를 아브라함에서 찾는다.30) 이런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무슬림 남자들은 네 명까지의 아내를 둘 수 있다. 이슬람에서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게 된 것은 첫째, 이슬람 초기에 전쟁의 결과로 인해 양산된 전쟁과부와 고아 특히 자립적인 삶이 어려운 여성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둘째, 아내의 불치병으로 인하여 정상적인 부부생활이 불가능할 경우이다. 셋째, 가족의 대(代)를 잇고 자신의 이름과 가문을 영속화하기 위해서이다. 한 남성이 네 명의 아내를 두었을 경우 부양할 재정적 능력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도 특수한 환경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31)


그리고 부인들에 대한 남편의 공정성을 보면, 첫째, 각 부인 소유의 독립가옥을.마련하여 주고, 둘째, 각 부인마다 남자의 낮 시간과 밤 시간을 균등하게 분배하고,셋째, 아침이 되면 각 부인을 찾아가 낮 동안 남편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일이다.32) 그리고 남편은 네 명의 아내 가운데 어느 하나를 편애하지 말아야 하고, 다른 하나는 네 명의 아내를 항상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 그리고 아내들은 상호간 협력하고 질투하지 말아야 하며 서로 다투거나 질투하게 되면 그것은 이혼 사유가 된다.


아무튼 이슬람 사회에서 한 남성이 네 명의 아내를 둘 수 있다는 것은 남녀간의 차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슬람 역사 1400년 동안 ‘동등하게’라는 말의 의미를 한 남자가 모든 아내를 물질적인 면에서 똑같이 취급해야 한다는 것으로 가르쳐 왔다. 만약 그가 한 여자에게 반지나 드레스를 주면 다른 여자에게도 같은 품질의 반지나 드레스를 주어야 한다.33) 동등하게라는 논리에 대해서 이 정순 박사는 부인들 사이의 동등함을 말하는 것이며, 한 남자가 네 명의 부인을 둘 수 있는 것은 남녀의 차별이지 동등이 아니라34)고 지적한다. 오늘날 일부다처제를 법적으로 금하는 나라는 마그레브의 튀니지와 소아시아의 터키이다. 일부다처제를 지키는 나라는 모로코, 레바논, 요르단, 수단 등이다. 국가법에 의해 승인에 의해 일부다처제를 실행하는 나라는 시리아, 이란, 소말리아, 파키스탄, 인도35)등이다.

 


6) 남녀차별과 서구의 문제


우리의 삶의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너무나 순진하다 못해 무신경적이라는 것이다. 서구인들은 자신을 남녀로 구별하여 관계하지 않지만 동양에서의 세계관은 남녀가 구분되어 있다. 이들은 항상 자신이 남자인가 여자인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동양 여인이 한 남자와 대화를 한다고 보면 곤란하다. 한 여성이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한 남자와 대화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적절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게 된다. 심지어는 의도적으로 여성이라는 것에 큰 신경을 쓰면서 유혹을 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동양의 여성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무슬림 여성들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따라서 남녀간의 차별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슬람 학자 알리 다쉬티에 의하면,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사회에서는 여자는 독립적인 인격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남자의 소유물이었으며, 여자에 대한 어떠한 가혹스런 대우도 허용된 풍속이었다고 한다. 꾸란 4:34에 ‘남자들은 여자의 관리자이며‥ 반항적인 여자라고 생각되는 자들을 충고하고, 또 여자를 침실로 데려가 때리라고 가르친다’. 꾸란 4:38에 ‘남자는 여자의 보호자’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 역시 남녀의 불평등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슬람법에서는 상속에서도 남녀간의 차이가 있음을 언급한다. 남녀간의 상속액 배분 비율은 2대1의 기준이 보통이다.36)


따라서 이슬람에서 남녀 차별은 여자가 얌전한 체해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느 성별이 중요하고 힘을 가졌는지 실증하는 것이 된다. 남녀 차별은 가문의 명예와 평판이 매우 밀접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가정은 가족들의 이성 관계를 제한하고 조정하며 통제한다. 이는 남성의 권력을 기초로 해서 아랍인들이 여성을 성 차별하는 기반이 되도록 한다.37) 그 이유는 남녀간의 문제를 사회적인 문제로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대단한 잠재력이 있는 힘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슬람 사회에서 남녀간의 차별은 꾸란에서 전반적으로 여성에 대해 부정적인 영향을 나타내고 있어 그 영향이 오늘날 전 이슬람 세계에 미치고 있다.

 

7) 무슬림 가정에서 여성의 보호


이슬람 사회에서 일부다처제를 허용한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일부다처제를 개인의 욕구나 성적인 만족을 위한 것보다는 사회복지 개념으로 해석한다. 꾸란 4:3에 "···한 여성이거나 너희 오른 손이 소유한 것이거늘 그것이···적합한 것이라" 이 구절은 고아의 복지를 위한 조건을 제시하면서 결혼에 대한 규칙을 소개하고 있다. 이 결혼 준칙의 선포한 역사적 배경은 「우후드」 전투시기 이후부터라고 본다. 이 전투에서 무슬림 병사들의 사상자가 발생함으로 무슬림 공동체내에는 많은 고아들과 과부들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들에 대한 대우는 최선을 다해서 돌보아야 하고 인간의 박애정신과 평등원칙에 의하여 다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38)


예로, 모로코에서 한 젊은 남자는 이슬람의 다섯 기둥을 실행하기 위해 메카에 두 번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슬람 준칙을 지키기 위해 메카를 순례한 것이다. 무슬림 법에는 여성은 혼사서 자유롭게 메카를 순례하지 못하며, 항상 남자 친척의 남성이나 인도자의 안내가 있어야만 순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여성은 남성의 보호가 있어야만 활동할 수 있다. 무슬림 여성이 남성과 동행하거나 여행을 할 수 있다. 해도 여성은 베일(veil)을 착용하고 떠나야 한다. 이슬람 공동체에서 베일은 여성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의상이다. 이는 여성으로 하여금 유혹하는 행동, 꾸밈새, 여성의 정숙함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착용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예속이 아닌 보호로 간주된다. 오늘날 무슬림 여성해방운동가들에 의해 베일에 대한 규정을 법적으로 폐지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얼마 전 터키의 일부 여성들은 베일을 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현재 이슬람의 변화이며 여성해방운동가들의 주장을 허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은 베일은 남성들로부터 보호하는 방패일 뿐 아니라 남성에게는 여성에 대한 유혹을 방어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39)


그러나 꾸란에서 제시하는 여성에 대한 좋은 의도의 규칙이나 방법이 있다. 해도여성에 대한 우대정책은 매우 부정적이다. 실질적으로 이슬람 지역에서 고아원이나 여성을 위한 복지시설은 찾아보기 힘들 뿐 아니라 한 남자에게 고아들과 여성을 관리하도록 허락한 것은 이슬람 전통문학 즉 자힐리야 문화가 그들의 세계관과 문화 안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불이익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는 꾸란 4:3에 "…너희를 부정으로부터 보호하여 주는 보다 적합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면 결혼한 여성의 불이익이 내용상에 담겨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한 여성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성불능이거나 심한 질병으로 성생활을 할 수 없어 이혼을 할 경우 그 부인은 보호해 줄 보호자를 잃게 된다. 이러한 조건으로 인해 질병에 걸린 부인을 보호하면서 다른 여성을 맞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슬림 사회의 법이나 준칙을 볼 때 꾸란은 대체적으로 여성들에 대해 부정적이다. 여성의 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곳, 여성의 권리가 허용되지 않는 곳이 무슬림 가정의 특성이다.

 

Ⅱ. 이슬람 가족제도에 따른 복음 전달


무슬림의 한 구성원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데 많은 장애물로 이슬람 근본주의와 전통적인 교리, 자할리야의 문화,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요소, 남성 중심의 결혼과 권위 등이 있다. 그들이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인한 어려움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 감정적, 신학적, 역사적, 문화적인 이유들로 인해 기독교에 대해 뿌리 깊은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아프리카 식민주의 시절에 제국주의적인 선교로 인한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 기독교인의 이중적인 삶의 모습, 빛과 소금의 역할로 생활화되지 않은 모습들이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가져온 동기였다. 실제적으로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기독교인이라는 말만 들어도 그들은 대화를 거부하거나 외면해 버리는 현실은 과거 서구선교사들과 잘못된 선교정책, 탄압에 의한 것임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요소들도 있지만 더 실제적인 장애요소는 기독교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가족공동체, 국가, 지역 공동체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는다.


1. 무슬림 전통주의적 제도로 인한 복음 전달의 장애요인


오늘의 교회는 선교를 전적으로 배제하는 사고방식과 세계관이 만연해 있다. 선교라는 단어의 의미는 재정의 되고 희석되어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의미로 다가온다. 오늘날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것만이 선교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선교는 복음적인 측면과 사회적 측면 사이에 항상 균형을 유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어떤 측면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우리는 쉽게 발견하게 된다. 과거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NGO 활동을 통한 기아대책, 지뢰희생자, 고아 입양 문제를 위해 선교하고 모금하는 것, 성경학교를 세우고 선교사를 후원하는 것, 라디오를 통한 복음전파를 위해 모금하는 것이 선교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한 영혼을 사랑하고 그들을 향한 헌신으로 사역하는 선교사와 교회개척, 선교현장의 교역자들을 돕는 선교 헌금을 모금하는 일은 그렇게도 힘이 든다. 그 이유는 교회와 교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선교의 정의에 대한 혼란과 뒤범벅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원인이다. 이같은 혼돈은 선교가 우월하다는 생각, 선교는 오래 전에 끝이 났다는 사고가 지배적일 때 일차적인 장애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 중국에서는 ‘교회가 신자 한사람을 얻을 때마다 나라는 국민 한 사람을 잃는다’라는 유행어가 있을 정도로 아시아의 그리도인들 중에는 신앙을 받아들이기 위해 가족들과 고통스럽게 이별을 해야 했던 사람들이 많았었다.40) 또한 북아프리카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믿을 경우경찰의 계속적인 검문과 미행을 받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41) 동아프리카의 경우 그리스도를 신앙으로 전적으로 받아들일 경우 여자의 경우는 남자로부터 버림을 받고 남자의 경우는 여자로부터 버림을 받았다.42) 그만큼 신앙의 자유가 없었다. 오히려 이슬람 사회에서는 다른 종교의 회심의 자유보다는 박해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다. 실제적으로 세계 이슬람 국가들은 타종교 국가를 대상으로 이슬람을 전파하면서 자국 내에서 기독교를 선교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슬람은 평화와 정의를 위해 싸우고 이를 위해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슬람국가에서 기독교인이 무슬림을 향해 ‘당신은 종교의 자유를 믿는가’라고 질문을 하면 물론 믿는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당신의 아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한다면 허용하겠는가’라고 질문하면 ‘나는 그의 목을 자를 것입니다’라는 대답43)을 보면, 기독교인에 대한 이해나 회심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무슬림임을 알 수 있다.


이슬람 국가에서 무슬림들은 타종교로 개종하는 것은 죽음과 같다. 무슬림 공동체에서 개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종교적, 가족적, 사회적으로 불가능하도록 제도화되어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슬람법은 전통적 사회의 종교적 관습, 법률적인 제도, 경제적 적용제도가 배교자로부터 재산이나 생명을 빼앗는 것도 합법적으로 간주한다. 무슬림들은 작은 공동체 안에 한 사람이라도 배교하게 되면 직장에서의 퇴출과 취업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들의 배교는 단순히 개종한다는 말로 쉽게 표현하기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는데 공동체 곧 작은 공동체인 가족들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복잡한 문제들이 내포되어 있다. 실제적으로 모로코에서 한 자녀가 기독교로 개종을 했는데 그 여파는 아버지와 그 형제들 그리고 그와 관련된 공동체에 연관되어 고통을 받기도 했다. 어떤 한 사람이 이슬람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는 엄청난 희생을 지불해야만 한다. 이처럼 이슬람에서 개종하는 사람은 이슬람 공동체로부터의 소외, 부모, 남편, 아내 등으로부터 심한 핍박, 고통, 추방, 불이익 등의 온갖 불이익을 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 회심하는 사람들이 비록 실제적인 숫자와는 여전히 적지만 어느 때보다 증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슬람권에서 영적인 필요를 점점 더 느끼고 있고 그들을 위한 기도가 강화되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이슬람 지역의 형제, 자매들은 기독교의 영적인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성육신, 영생, 구원, 죄 용서 등에 대한 용어들은 이슬람에서 듣지 못한 것들이라 매우 관심이 높다.


샤네 교수는 이슬람권 선교의 가장 장애물 중 또 하나는 바로 정치적 문제라고 지적한다.44) 이슬람 사회에서는 정치적인 배경이나 기반 없는 종교를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기독교 선교사들은 정치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현지에서 정치적인 형태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흐려지고 혼동스럽게 된다.


패트릭 존스톤(Patrick Johnstone)은 이슬람 선교장애 요인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감정적, 신학적, 역사적, 문화적 이유들이라’고45)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 실제적인 요소는 기독교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국가와 가족으로부터의 강한 압박과 추방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슬람 사회에서 기독교 근본진리를 믿고 신앙생활하기란 그만큼 힘이 든다. 따라서 무슬림 전통주의적 제도에서는 복음의 커뮤니케이션의 장애가 발생하게 되어 선교의 장애가 된다.

 

2. 무슬림 가족 공동체 따른 선교전략


1) 기독교선교 메시지의 사회적 공적 영역에서의 효과


우리는 이슬람권 선교를 위해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복음의 접촉점을 찾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슬람 사역의 어려움이 계속된다면 기독교 선교 메시지가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효과적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만 되는 것인가의 문제가 남게 된다.


이슬람 지역의 선교사역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분명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종교가 정치보다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종교와 정치는 상호 교차하며 정치 공동체와 도덕적 공동체에 의해 상호 중첩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종교가 정치를 인준하고 영향을 미쳐야지 정치가 종교를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에 의해 인준 받는 정치는 정치적 행위가 기독교 신앙과 신실함의 핵심인 정직성과 책임성의 표준에 도달해야 함을 지도자들이 주장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구속하신 하나님 앞에서 책임감을 느껴야 하고 인간 공동체내에서 상호간 책임을 져야 한다.


2) 복음전달의 효과적인 기회


종교는 인간의 연약함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여 보고자 하는 인간실존의 한계에 대한 몸부림이며, 인간 존재 의미에 대한 회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자기실현의 방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슬람도 인간론이 사람의 자력 구원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철학적이면서 이데올로기적이다.


무슬림들이 알라에 대하여 경배하거나 꾸란을 낭송할 때, 알리에 대하여 순종할 때 마음에 평안히 오고 사회전반에 걸쳐 진정한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종교이상의 이슬람교는 단순히 종교 이상의 총체적인 삶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의 주장처럼 이슬람은 신앙의 차원을 넘어선 삶 그 자체이다.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것들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무슬림들이 이러한 삶에 만족하며, 알라에 대한 순종과 행위가 일치하는가에 대하여 묻는다면 회의적이다. 필자는 무슬림들에 대한 태도에 대하여 의문점을 갖는다.


하나는 그들이 신봉하고 믿는 알라에 대한 신앙이 진실하고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는가? 둘째는 강압적이고, 준칙에 의존하고, 불평등적인 신앙 규범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되는가? 셋째, 이슬람은 신앙이라고 보기보다는 정치적이라는 점이 더 강하다는 점이다. 넷째, 어떻게 종교가 삶의 일부가 된 무슬림들의 영혼을 악령이 지배하는 것 등이다. 그리고 무슬림들의 일상적인 삶이 꾸란에서 규정하고 있는 엄격한 신앙 행위에 대한 것이라면 무슬림들의 영은 대부분 샤머니즘으로 불리는 악한 영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46)


이슬람의 무속 신앙적인 요인은 신비주의에 속하는 수피즘과 관련이 있다. 수피는 원래 이슬람의 세속적이며 비금욕적인 성격에 반대하면서 출발했다. 이슬람의 창시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는 극에 달했고, 이미 독신주의에 대한 비난과 영적인 기능을 가진 성직자 제도의 부재 등에 기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적 생명의 위치에 대한 예비적인 타협 등은 중동 지역의 사람들에게 세속적인 종교로 이해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슬람 지도자들 가운데 이슬람에 헌신적인 정신을 그들의 일상생활에 바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에게 이슬람은 단순한 외적 의례들의 집합이 아닌 영적인 훈련이었다.47) 수피주의자의 핵심은 수도원적이거나 아니면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여 이동하면서 꾸란이나 종교적인 경전을 암송하는 것으로 만남을 가졌고, 이러한 암송은 예배의식 성격을 띄어 일종의 춤과 반복적인 리듬 그리고 경전의 암송을 통한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수피지도자들을 신봉할 뿐 아니라 최고의 영적 지도자로 섬기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슬람은 다양한 신앙양태를 가졌음에도 과거나 현재에도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이슬람은 기독교의 가장 무서운 상대가 되어 복음에 대해 너무나 강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슬람 내에 복음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날 것을 믿을 만한 증거들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데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이슬람에 대한 신뢰성에 대한 의문은 복음전달의 좋은 기회가 된다.48) 최근 이슬람의 과격주의자들에 의한 테러 행위는 국제사회에 큰 파장을 가져다주었다. 파키스탄, 알제리, 이집트, 수단, 아프가니스탄, 이란, 유고슬라비아, 인도네시아와 같은 국가에서 발생하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방화와 테러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지하드’(Jihad)라는 명분을 내세워 야만적이고 환멸을 안겨주는 행동을 보여줌으로 많은 무슬림들이 이슬람에 대한 신뢰성에 의문을 갖게 했다. 1999년 인도네시아의 극단적인 이슬람 신봉자들은 교회와 민간인을 향해 약탈을 감행했고, 자바섬에 위치한 교회들을 파괴하기도 했다. 한 교회의 목사 부부가 교회 건물 안에서 이방 신에게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일도 발생했다. 순교자 부부는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죽었지만 그 결과 범죄자 가운데 한 명이 회심하여 믿음을 갖게 되었다.49)


둘째, 이슬람 지역을 향한 중보 기도가 더욱더 강하게 실행되고 있다. 최근 『모로코여 일어나 빛을 발하라』 라는 소책자는 마그레브에 속한 한 국가를 향한 52주중보기도 책자이다.50) 예수 그리스도에게 철저히 회심을 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숫자가 예수의 초자연적인 계시를 통해서 또는 부인할 수 없는 기적적인 치료를 통해서 신앙을 갖게 되었다. 최근 이슬람 지역에서 개인, 가정들 그리고 한 지역 사회가 예수께 돌아오고 있다. 기도는 선교의 돌파구가 되는 도구이다.


셋째, 이슬람국가의 도시화가 복음 전달의 접촉점이 된다. 도시들은 다민족적, 다인종적, 다언어적, 다종교적이다. 이 도시들은 지구촌의 변화를 만드는 곳이며, 권력의 중심지들이다. 도시들이 움직일 때 전세계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51)


도시화는 도전적인 장소이다. 도시들은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 차이들로 가득할 뿐 아니라 대립하는 세계관, 가치 체계, 생활양식들이 도시 중심지에 밀접하게 존재하고 있다. 이 동일한 장소들이 자연환경과 인간 생활을 총체적으로 황폐화시키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세력들을 발산한다. 도시들은 많은 종류의 문제들이 발생하여 매일 다투는 전쟁터와 같다. 이런 측면에서 20세기의 선교 개척지는 시골과 같은 지역으로 이식되었지만 이제는 도시를 미래의 개척지라고 생각하는 전환이 필요하다. 지난 20세기까지는 기독교가 시골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21세기의 기독교는 도시에 중심을 잡고 사역해야 할 것이다.


도시로의 인구 이동은 이슬람 공동체의 영향력과 동일한 대가족 공동체의 영향력에서 좀더 떨어진 환경에 머물게 되기 때문에 무슬림들에게는 복음을 접하기에 훨씬 열린 환경이 된다. 그러므로 이슬람 지역에 대한 선교 전략이나 사역을 계획하는 자들은 도시의 실정을 수용해야 한다. 도시 성장의 이면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구속 목적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다. 이 엄청난 사람들의 군집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역사에 있어 가장 큰 복음화의 기회들 중 하나를 교회에 제공하게 하신다. 대도시에 밀어닥친 여러 인종들, 족속들, 다양한 인간 집단들은 지역적으로 과거의 어느 때보다 더 접근하기 용이하다. 경우에 따라서 새로운 도시 거주자들이 겪는 변화의 과정들은 그들로 하여금 더 복음을 잘 받아들이게 하기도 한다. 또한 도시화에 따라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사회 문제인 가난, 질병, 마약, 매춘, 범죄, 청소년의 일탈행위 등이 도시 한가운데 방치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전도 종족 집단(Unreached People Group)을52) 향한 복음 전달과 도시선교의 기회가 된다.


따라서 세계의 도시화는 선교의 구조로 보아야 할 뿐 아니라 종말론적 구조로도 보아야 한다. 우리 시대의 하나님께서는 지구의 사람들을 서로 더 밀접하게 접촉시키고, 더 많이 서로 영향을 끼치고 의존하여 복음을 듣게 하기 위해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요인들을 통해 결정적인 활동을 하고 계신다.53) 이 활동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구속의 목적을 역사에 진척시킨다. 우리 시대의 표적은 이슬람권 도시이다. 도시를 향한 전 세계적인 이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기독교 선교의 가장 위대한 무대를 설치하시고 최후의 시간을 위한 무대를 준비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3) 무슬림 선교를 위한 상황화


최근 상황화에 대해 기술한 서적들이 많이 있다.54) 그래서 무슬림을 위해 사역하고자 하는 이들은 숙독하여 지역마다 나름대로의 전략과 개념을 가지고 사역을 추진할 수 있을까를 타진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이런 사역을 위해서는 복음을 상황화하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다양한 생각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자신들의 문화 가운데 있는 무슬림에게 나아가기 위해 완전히 무슬림 스타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55) 이러한 접근 방법은 무슬림들과 동일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슬림은 사회적으로 완전히 독립적으로 될 수 있는 서구인과는 다르게 가족과 공동체와 연루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복음을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전해 주려는 타문화 사역자 그룹이 있다. 이들은 문화적으로 현지문화에 장애가 되는 것은 말씀을 전할 때 반드시 제거해야 된다는 것이다. 만약 복음이 전달된다면 현지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셋째, 상황화에 있어서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다른 문화, 언어그룹, 종교적 공동체에 완전히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무슬림 선교를 위한 상황아 사역에 있어서 상황화의 범위를 확장하는 일에 있어 조심해야 한다. 성경에는 상황화에 대한 두 개의 중요한 모델이 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다른 하나는 사도 바울이다. 선교학자들은 예수께서 인간과 동일화하신 행위를 묘사할 때 성육신 사역(Incarnational Ministry)을 사용한다. 예수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을 살았고 죄를 짓지 않으셨다. 죄의 구속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죄의 굴레 속으로 구태여 들어가실 필요는 없으셨다. 따라서 예수는 유대사회에서 사회적 위치가 낮은 자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위치가 존중받는다고 생각하는 인간들과 문제화 삼으신 것을 본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회심자 사이의 통합을 위하여 무척 노력했다. 바울 자신은 이방인 도시에 살았고 나름대로 이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타문화의 말씀 전달자로서 유대인, 이방인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달했다.


그렇다면 이슬람 문화에서 그들을 회심케 하기 위해서는 먼저 관계성을 개발하는 일이다. 관계성에 대한 가치는 복음을 전하는 지도자에게 또한 유익을 가져다준다. 둘째는 무슬림에서 회심한 자들이 겪게 되는 최대의 갈등은 가장 가까운 공동체와 결별하고 고립되어 개인주의적인 서구식 삶의 스타일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은 공동체의 존립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만일 무슬림 회심자들을 위한 기독교 공동체가 없다면 그들은 갈등을 겪게 되고 결국은 되돌아서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슬람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먼저 우리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이슬람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그것은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의 영에 눌리지 않아야 한다. 무슬림을 우리의 적 사단의 종으로 보아서는 결코 안된다. 우리의 적은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종으로 만든 이슬람의 영이지 무슬림이 아니다. 그리고 무슬림은 우리의 증오와 미움의 대상이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유업으로 나눌 형제로 보아야 한다. 콜린 채프만이말한 것처럼 무슬림들을 대할 때 올바른 자세를 가져야 한다.56)

 

나오는 말


이슬람 역사 1400년 동안은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상대일 뿐 아니라 가장 거대하고 견고한 공동체를 바탕으로 확장을 계속하고 있다. 아랍 지도자 무암마르 가디프는 남아프리카의 이슬람화를 위해 후원을 하고 있다. 이 움직임은 아프리카에서 경제, 문학, 정치적인 연합체를 이루고자하는 이슬람 부흥운동 중의 하나이다.57) 이슬람은 아랍어를 대륙의 주된 공용어로 내걸고, 이슬람 공동체를 통한 세계각국에 무역의 기회를 증진시키려 할 뿐 아니라 모든 수단을 이용하여 개종자를 얻어내려 하고 있다. 새로운 모스국, 이슬람 학교와 대학들이 전 세계에 세워지고 있다.


이제 전 세계는 이슬람의 도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을 보일 때가 되었다. 특히 이슬람 선교에 있어서 여러 문제 중 더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신학적인 부분이 아니라 문화적이 부분으로서 이슬람 공동체(Ummah)의 독특성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여기에 작은 공동체인 가족에 대한 부분은 이슬람 선교전략에 중요한 부분이 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슬람의 가족공동체 이해를 통하여 북음의 접촉점에 대한 가능성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 가능성을 통하여 이슬람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여러 전략들을 활용한다면 이슬람 선교를 위한 모델이 될 것이다. 여기에 대한 가능성으로 먼저 개종자를 돕는 일이다. 회심자가 두 얼굴을 갖는 것이 어쩌면 거의 불가피하고 처음에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회심자가 집에서 자신이 발견한 것을 그룹 사람들에게 말하면 위험성이 따르게 될 것이다. 그런 영적 미숙함에 있는 자들을 살아남도록 도와주고, 언제나 만나서 도울 준비, 성경 공부를 통하여 꾸란의 차이를 설명하고 신앙고백을 하고 따르도록 돕는다.


마지막으로 무슬림을 위해 영적인 세계에서 승리하도록 기도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기도는 복음전도의 기본이 된다. 기도 없는 선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영적 전쟁에 있어 승리하고 사랑이 있는 행함을 보여줄 때 무슬림 선교는 가능하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공일주, 『이싸냐 예수냐?』 서울: 죠이선교회출판부, 1997

박순종,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무슬림과 이슬람교에 대한 인식조사" 『세계선교』 1999년봄·여름호/통권35호

이광호, 『세계선교의 새로운 과제』 서울: 예영커뮤니케이션, 1998.

이정순, 『무슬림 여성과 베일』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전호진, 『이슬람, 종교인가? 이데올로기인가?』 서울: SFC출판부, 2002.

전호진, 『종교다원주의와 타종교 선교전략』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7.

조희선, "아랍·이슬람 여성에 관한 고찰"-종교적 당위성과 현실- 『선교-문화연구』 2001년제 5·6호 천안: 천안대학교 선교-문학연구소

최영길, 『이슬람의 이해』 서울: 도서출판 신지평, 1999.

함태경, "이란 선교역사와 교회현황" 『국민일보 선교편』 2002년 7월 23일.

로렌드 뮬러, 『모슬렘 선교를 위한 TOOLS』 임하나 역 서울: WEC출판부, 2002.

봅쇼 그랜, 『마침내 드러나다』 이숙희역 서울: 죠이선교회출판부, 1995.

리스틴 말루히, 『미니스커트, 어머니 그리고 모슬렘』 예수 전도단 역 서울: 예수 전도단, 1998.

로버트 슈라이터, 『신학의 토착화』 황애경 역 서울: 가톨릭출판사, 1991.

존 엘더, 『무슬림을 향한 성경적 접근』 KTM 편집부 역 서울: 도서출판 펴내기, 1992.

핸드릭 크래머, 『기독교 선교와 타종교』 최정만 역 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5.

Greenway, Rogers S. "세계도시화와 선교교욱" 장훈태역 『선교신학의 21세기 동향』 서울; 이례서원, 2000.

Johnstone, Patrick. The Church Bigger than you think, 이창규,·유병국역 서울: WEC 출판부, 1999.

Lewis, Bernard 『이슬람 1400년』 김호동 역 서울: 까치글방, 2001.

Latifa, 『빼앗긴 얼굴』 최은희 역 서울: 이례, 2002.

Smith, Donna P. & Andreas Maurer, 『무슬림을 위한 기독교 전도』(Souh Afica: MERCSA, 1988.

Ati, Hammudah Abd al. The Family structure in Islam(USA: American Trust Publications, 1977.

Cppper, Anne.Ishamal My Brother(London: STL Books, 1988

Maurer, Andreas Islam mission seminar(Intercultural Leadership Institute, 2002)

Mohamad, Mahathir Islam & The Muslim Ummah, Hashim Makaruddin: Malaysia, 2000.

Patrick Johnstone & Jason Mandryk, Operation World, Carlisle: Paternoster,2001.

Speiser, E. A. The Anchor Bible: Genesis, New York: Doubleday, 1964.

Affan Seljuq, "The Muslim World League Journal", Jan/Feb, 1991

 

 


각 주1 이슬람(Islam)이라는 말은 무슬림들에게는 신에 대해서 신자가 ‘항복한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한다. 그 분사형인 무슬림(Muslim)은 그러한 항복의 행위를 취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무슬림은 어느 다른 존재가 아닌 ‘오로지’신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이며, 따라서 다신주의자가 아닌 유일신주의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2 라민 샤네 교수는 예일대학교에 소속되어 있다. 2002년 8월 6일 ‘이슬람 선교를 위한 해법’이란 주제로 홍영기 교수와 대담한 것을 재인용하였다.

3 Bernard Lewis, 『이슬람 1400년』 김호동 억(서울: 까치글방, 2001), 18.

4 필자가 스리랑카 북부지역을 방문했을 때 미션계의 고등학교가 무슬림화 된 곳을 목격했으며, 가톨릭이나 기독교계의 교사들을 추방하고 대신 무슬림 교사로 채용한다는 소식을 접한바 있다(2002.7_8 스리랑카 북부지역 리서치)

5 오픈도어(opendoors) 선교회가 발행하는 기도소식지에 의하면,‘박해받는 교회와 성도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는 도표가 있다. 기독교 박해 1순위로 사우디아라비아로서 이슬람의 종주국이며, 전세계에 이슬람을 전파하는 선두기지이다. 다음으로 북한, 라오스, 투르크메니스탄, 중국, 베트남, 이란, 몰디브, 남부수단, 코모로제도 등이다.

6 전호진, 『이슬람, 종교인가?』(서울: SFC출판부, 2002), 9. 저자는 본고에서 이슬람을 하나의 종교로 보기보다는 이데올로기로 보고 있다.

7 Patrick Johnstone & Jason Mandryk, Operation World(Carlisle: Paternoster, 2001), 2; 49.

8 이 정순, 『무슬림 여성과 베일』(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17 재인용

9 메디나는 새로운 신앙과 신도들의 중심지가 되는 ‘도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메디나에서의 계시들은 무슬림 공동체 안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들과 관련된 법적 정치적인 사항들을 포함하는 곳이기도 하다. Bernard Lewis, 『이슬람 1400년』 16.

10 이광호, 『세계선교의 새로운 과제』(서울: 예영컴퓨니케이션, 1998), 173.

11 움마와 관련된 것으로 Mahathir Mohamad, Islam & The Muslim ummah, (Hashim Makarnddin: Ma1aysia, 2000), 51-62를 참고하라. 핸드릭 크래머, 『기독교 선교와 타종교』 최정만 역(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5), 244.

12 Affan Seljuq, "The Muslim World League Journa1",/Feb, 1991을 참조함.

13 무함마드가 주장하는 메카에서 유일신론, 유신론 사상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꾸란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으로 그의 신성과(수라 5:19) 십자가 죽음(수라 4:157)에 대한 이중적 부인을 하고 있다.·예수에 대한 긍정적 측면은 예수에 대한 나머지 모든 것들을 언급할 뿐이다. 그리고 예수의 성육신을 부정한다.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할 때 처녀였다(마 1:18-25; 눅 1:26-35). 그러나 꾸란에 보면 무슬림들은 예수님의 기적적인 수태를 받아들인다(수라 3:45-47; 19:21; 21:91)또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꾸란 에 그 이름이 언급된 유일한 여성이라는 것인데, 꾸란은 거기에 대한 참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왜 임의적인가(수라 3:59)? 다만 마리아는 위대한 여인으로 칭송을 받을 뿐이다.

14 최영길, 『이슬람의 이해』 (서울: 도서출판 신지평,1999), 58-9.

15 Latifa, 『빼앗긴 얼굴』 최은희 역(서울: 이례, 2002)을 참고하기 바란다. 1996년 탈레반 정권이 들어선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에게 권위, 인권이란 찾아 볼 수 없다. 라티파는 탈레반의 광신적인 신앙이 자신의 세계를 어떻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희선, "아랍·이슬람 여성에 관한 고찰"-종교적 당위성과 현실- 『선교-문화연구』 2001년 제5·6호(천암: 천안대학교 선교-문화연구소), 51이하를 참조 바란다.

16 전호진, 『종교다원주의와 타종교 선교전략』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7), 293.

17 Ibid., 158-60.

18 봅쇼 그랜, 『마침내 드러나다』 이숙희 역(서울: 죠이선교회출판부, 1995), 174.

19 이광호, 『세계선교의 새로운 과제』 185-90.

20 Bernard Lewis, 『이슬람 1400년』 136.

21 Affan Seliuq, "The Muslim World League Journal’’, Jan/Feb,1991을 참고하라. 무슬림 가정의 제도는 이슬람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가정은 신앙의 가르침에 따라 그 구성원들을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는 사회의 기본 단위이다.

22 꾸란 2:228에 의하면 ‘남자는 여자보다 상위(上位)에 있고 또 위력(偉力)하여 여자의 보호가 된다’(꾸란 4:34)는 것을 보아 남성 우월주의가 존재하고 있음을 본다. 이슬람에서 여성의위치는 언제나 차별적이다. 상속 액에서도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예배의 참석에서도 구별되어 참여한다. 꾸란 4:34에 ‘남성은 여성의 보호자라 이는 하나님께서 여성들보다 강한 힘을 주었기때문이라 남성은 여성을 그들의 모든 수단으로서 부양하나니 건전한 여성은 헌신으로 남성을 따를것이며 남성이 부재시 남편의 명예와 자신의 순결을 보호할 것이라 순종치 아니하고 단정치 못하다고 생각되는 여성에게는 먼저 충고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잠자리를 같이 하지 말 것이며 셋째로는 가볍게 때려 줄 것이라 그러나 다시 순종할 경우는 그들에게 해로운 어떠한 수단도 강구하지 말라 진실로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니라. 『성 꾸란』 최영길 역, (사우디아라비아 파하드 국왕성꾸란 출판청)을 참고바람.

23 크리스틴 말루히, 『미니스커티, 어머니 그리고 모슬렘』 예수 전도단 역(서울: 예수 전도단, 1998), 114 재인용.

24 이슬람 사회에서 이혼은 아주 단순하다. 남편이 아내를 향해 ‘나는 너와 이혼한다’라는 말을 세 번만 되풀이하면 어떤 설명이나 이유 없이 부인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다(꾸란 65;1,2).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꾸란 2:229절을 보면 된다. ‘화해를 통한 두 번의 이혼은 허락되나 그 후의 두 당사자는 동등한 조건으로 재결합을 하든지 이혼을 해야되며 너희가 그녀들에게 주었던 지참금을 되돌려 가져오는 것은 허용되지 아니하나…’라고 되어 있다.

이슬람 사회에서 이혼에 대한 것도 다양하다. 먼저 수라 2:226-242에 나타난 것을 보면, 4개월간의 격리의 시간을 가진 뒤 이혼을 할 수 있다. 수라 4:19-21에는 그들의 뜻에 반하여 여성을 재산으로 삼는 것은 금지하고 있으며, 수라4:127-131에는 과부와 고아들을 도울 것을 명하고 있다. 수라 33:49에는 동침하기 전에 이혼하려 할 때에는 ‘이다트’기간(3개월)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수라 58:1-4에는 오래된 이교도들의 이혼제도를 배척하기도 한다.

25 Donna p. Smith, & Andreas Maurer, 『무슬림을 위한 기독교 전도』(South Africa: MeRCSA,1998), 114-265.; Scheifer, Motherhood in Islam 88.; Andreas Maurer, Islam mission seminar (Intercultural Leadership Institute, 2002), 6

26 Andreas Maurer, Islam mission seminar, 7.

27 Ibid.

28 꾸란 4:3에 ‘‘만일 너희가 고아들을 공정하게 대처하여 줄 수 있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좋은 여성과 결혼하라 두 번 또는 세 번 또는 네 번도 좋으니라 …너희를 부정으로부터 보호하여 주는 것보다 적합한 것이라".

29 최영길,『이슬람의 이해』 214.

30 이광호, 『세계선교의 새로운 과제』 164.

31 Hammudah Abd al Ati, The Family Structure in Islam(USA: American Trust Publications, 1977), 50-145.

32 최영길, 『이슬람의 이해』 216.

33 존 엘더, 『무슬림을 향한 성경적 접근』 KTM 편집부 역(서울: 도서출판 펴내기, 1992), 86-87.

34 이 정순, 『무슬림 여성과 베일』 34.

35 Ibid.

36 전호진,.『종교다원주의와 타종교 선교전략』 299.; 꾸란 4:11; 남자에게는 여자의 두 배에 달하는 몫이 차려지느니라…둘 이상의 여자가 있을 경우는 유산의 3분의 2를 취하고 여자 하나만 있을 때는 절반을 얻게 되느니라’

37 크리스틴 말루히, 『미니스커트, 어머니 그리고 모슬렘』 59-60.

38 『성 꾸란 』 최영길 역, 130.

39 Anne Cppper, Ishamal My Brother(London: STL Books, I988), 30.; 이정순, 『무슬림 여성과 베일』 36.

40 로버트 슈라이터, 『신학의 토착화』 황애경 역(서울: 가톨릭출판사, 1991), 67.

41 필자가 북아프리카 지역을 방문했을 때 기독교인이 무슬림과 대화를 했다는 이유로 검찰에 소환된 것을 보았다.

42 Ibid., 69.

43 전호진, 『종교다원주의 타종교 선교전략』 296.

44 라민 샤네 교수는 예일대학교에 소속되어 있다. 2002년 8월 6일 ‘이슬람 선교를 위한해법’이란 주제로 홍영기 교수와 대담한 것을 재인용.

45 Patrick Johnstone, The Church Bigger than you think, 이창규, 유병국역(서울: WEC출판부, 1999), 192.

46 박순종,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무슬림과 이슬람교에 대한 인식조사" 『세계선교』 1999

년 봄·여름호/ 통권35호, 115-16.

47 Ibid.,117에서 재인용.

48 최근 이란은 이슬람 혁명 후 개종 변화가 꿈틀대고 있다. 그 이유는 국민염원 외면한 정치에 이슬람교도 의문, 회의가 싹트고 있다. 정부는 기독교 성장에 제동을 걸고 있지만 비밀 가정교회로 복음활동은 지속되고 있다. 수십만 명의 잠재된 개종인구에 비해 사역자수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함태경, "이란 선교역사와 교회현황" 『국민일보 선교편』 2002년 7월 23일.

49 Patrick Johnstone, The Churuh Bigger than you think, 193.

50 이 책자는 순니 이슬람 신봉자들이 99%나 되는 모로코를 향한 기도책자이다. 모로코 신자들과 모로코에 복음을 전하고자 사역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로 시작된 것이 바로 ‘Arise Shine Morocco’(ASM)이다. 이는 모로코와 미전도 종족 그룹, 그리고 모로코 교회들을 위한 기도의 필요성을 전 세계 교회에 알리고 기도를 집중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51 Rogers S. Greenway, "세계도시화와 선교교육" 장훈태역 『선교신학의 21세기 동향』(서울; 이례서원, 2000), 512.

52 E. A. Speiser, The Anchor Bible: Genesis(New York: Doubleday, 1964), 86.

53 Rogers S. Greenway, "세계도시화와 선교교육" 514.

54 정흥호, 『상황화 신학』 서울: 로고스, 1998,: 베반스, 스티브. 『상황화신학』. 최형근 역. 서울: 죠이선교회, 2002.: 부스웰, 제임스 "상황화:이론과 전통, 그 방법."『신학과 선교』, 데이비드J. 헤셀그레이브 편, 93-126. 서울: 엠마오, 1986.;서창원, 『제3세계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Stephen. Bevans, "Models of Contextual Theologies." Missiology 13, no. 2(April1985); shoki Coe, "Contextualization." InMission Trends No. 3: Third World Theologies, ed. Geraid H. Anderson and T.F. Stransky, 19-24.New york; paulist press, 1976.; bruce C.E.F.leming, Contextualization of Theology: An Evangelical Assessment. Pasadena: William Carey Library, 1980.; Dean S. Gillilrinand, "Principles od the Christian Approach ot an African-Based Islamic Society.: Missiology ;Heideman, Eugene S. "Syncretism, Contextualization, Orthodoxy, and Heresy." Missiology 25, no. I(January 1997): David J.Hesselgrave, and Edward Rommen. Contextualization: Meangs, Methods, and Models. Grand Rapids:Baker Book house, 1989.; Kato, Byang. "The gospl, Cultural Contextualization, and Religious Syncretism." In Let the Earth Hear His Voice, ed. Douglas, J.D. Minneapolis: World Wide Publications, 1975.; Bruce. Nicholls, Contextualization: A theology of Gospel and Culture. Downers Grove: Inter-Varsiry Press, 1979.; Robert J. Schreiter, Constructing Local Theologies. Maryknoll: Orbis books, 1985.

55 로렌드 뮬러, 『모슬렘 선교를 위한 TOOLS』 임하나 역(서울: WEC출판부, 2002), 77.

56 공일주, 『이싸냐 예수냐?』(서울: 죠이선교회출판부, 1997), 169-70.

57 1995년 10월 22일 요한네스 버그의 ‘선이 타임수’에 게재된 내용임.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이슬람 선교전략-터키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교회가 탄생된 곳도 있다

 

들어가는 말 

미국을 중심으로 여러 서방국가들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였고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되기 전 많은 세인들의 생각 가운데 '이슬람' 하면 다만 '코란과 칼' 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9.11 무역센터 자살 테러 이후 '코란과 칼' 이라는 이슬람에 대한 선입견 속에서 이제 이슬람은 곧 ‘테러 집단’ 이라는 생각으로 세상 사람들의 생각 속에 새롭게 자리 잡은 것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이라크 공격이후 서방 국가들은 이제 이라크 공격을 통해 자국이 무엇을 잃었으며, 무엇을 얻었는가에 대하여 나름대로 계산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특별히 이슬람국가 안에서도 온건파와 강경파간의 보이지 않는 부딪힘과 그리고 엇갈린 주장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한 예를 들면 지난 3월 중순 터키를 방문한 요르단 국왕 압둘라 왕은 이제는 온건한 이슬람주의자들이 일어나 이슬람 강경파들에 향해 ‘이 정도면 되지 않았느냐? 코란에는 테러와 관련된 내용들이 없지 않느냐? 라는 목소리를 내야 된다’ 라고 주장하였으며, 또한 지난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인권운동가 ‘시린 에바디’ 여사는 인도네시아에서 열렸던 한 세미나에서 ‘진정한 이슬람은 테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라고 주장을 했다.(2004년 3월 18일 터키 휴리엣트 신문서 발췌) 

이처럼 이슬람 국가 안에서도 이제는 그들이 안고 있는 테러 집단이라는 오명을 씻고 새로운 이미지를 위한 노력을 시도하는 것도 사실이다. 

본인이 사역하고 있는 터키는 전체 국민 98%가 이슬람을 신봉하는 이슬람 국가 중 하나이며, 과거엔 오스만 제국을 건설했던 자부심을 안고 언젠가는 다시 한 번 이러한 꿈을 실현해 보겠다는 욕망과 ‘아타튜르크’ 초대 대통령 및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이어가는 군인들의 ‘케말주의’, 그리고 유럽이 접해있는 이유로 인해 유럽 문명 속에 세속적인 문화와 케말주의와 그리고 종교와 정치를 일원화 해보려는 일부 강경 이슬람주의자들이 서로 혼합되어 흘러가는 국가임을 먼저 밝힌다. 

이 논고를 쓰기 전 본인은 이슬람을 위한 전략가도 아니며 또한 이슬람을 연구하는 학자도 아님을 미리 밝히고 다만 중동권에서 사역을 감당하는 한 사역자의 시각으로 특히 비 아랍권인 터키를 중심으로 이슬람에 대한 선교전략을 논할까 한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白戰百勝)이라는 말이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의 전쟁에서 백 번 다 승리할 수 있다’라는 중국 병법가(兵法家) 손자의 모공 편에 나오는 병법 중에 한 방법이다. 

성경에서도 민수기 13장과 여호수아 2장에서 모세와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말씀에 준하여 모세는 열두 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냈고, 또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여리고 성을 공격 하기 전,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 그곳의 상황을 파악한 사례가 성경에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에서도 여호와의 도우심 속에서 먼저 상대방의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라고 생각하기에 비아랍권인 터키의 최근 상황을 먼저 나누기를 원하다.

 

1. 터키 사역자 및 선교활동 변화 비교도 

(1) 연도별 성도 및 선교사 숫자 비교 (2003년도 선교사 통계에서 단기 90명을 제외한 것임) 

연도별 1961년 1971년 1981년 1994년 1998년 2003년 

선교사 수 2명 20명 50명 400명 600명 988명 

현지인 신자수 2명 20명 50명 400명 1121명 2000명 

위 도표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1998년을 기준하여 2003년도까지 선교사의 숫자 및 성도숫자가 급성장하고 있다. 또한 아직 사역자들의 대다수가 대 도시에 거주하고는 있으나 기타 지역 즉 동쪽 및 작은 도시로도 이전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 글로벌 시대 속에서 커뮤니케이션 정보화 발달로 인한 모든 기술과 지식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졌으며 생활수준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유럽 공동체 가입을 추구하는 가운데 서구 문화 및 생활습관을 닮아가려는 생활방식 속에서 나타나는 유럽화 현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개인주의, 인권 옹호, 타종교에 대한 터키인의 이해력이 증가하였다. 

끝으로 비아랍권인 터키 현지인들을 택하여 아랍권 무슬림을 향하시는 마지막 시대의 성령의 증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터키 현지인 사역자가 98년도 25명에서 2003년도 47명으로 53%가 성장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효율적인 선교 전략 및 접근 방법 


본인은 앞에서도 밝힌 것처럼 이슬람 선교 전략가도 아니고 또한 학자도 아니므로 일반적인 상황은 접어두고, 다만 사역자로써의 실질적인 상황을 중심으로 좀 더 효율적인 전략에 대해서 7년 전 바울 선교사 중동지부 대회에서 먼저 밝혔다. 

그 당시 발표한 효율적인 전도 방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가족 중심의 전도: 터키는 철저한 가족 및 장자 중심의 사회이다. 그러므로 한 가정의 가장이 변화가 되면 그 가족의 변화는 어느 나라보다 용이하다. 접촉점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 가족 중심의 모임 및 프로그램의 활성화가 필요하다. (가족 캠프, 부부 및 가족 세미나 등등) 

2) 알레비를 통한 사회적 분위기 조성: 터키 국민의 15-20%가 알레비에 속한다.(시아파) 이들은 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으며 일반 회교사원에는 참여치 않는 가운데 가정에서 스스로 예배를 드리며, 보이지 않는 사회적 불평등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현재 터키 내에서 개종한 현지 신자들 중에 대략 80%가 알레비에 속한 자들이다. 

우선 이들을 향한 선교전략을 통해 사회적 보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들을 통한 이웃과 친척을 향한 선교전략도 필요한 것 같다. (참조: 알레비란 시아파의 한 분파로써 모하메드의 사위이며 4대 칼리프였던 ‘알리’의 추종자들이다. 이들은 코란 보다는 ‘알리’의 가르침을 더 중요시 여기며, 통치권의 계승문제로 인하여 ‘알리’가 사원에서 칼로 피살당한 이후 이들은 잠이(회교사원)에 참석치 않는다.) 

우리들은 먼저 왜 이토록 이슬람권에서는 가족을 중요시 여기는가에 대해서 이해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 ‘필 파샬’ 이 지은 ’무슬림 전도의 새로운 방향‘이라는 책에서 ’할레블리언‘의 주장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가족은 큰 집 하나에 살거나 아니면 여러 집이 붙어서 산다. 수입과 지출은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나누지만 제일 웃어른이 담당한다. 재산도 대가족에게 공통으로 소유된다. 서구의 핵가족 특성과 달리, 대가족은 더 많은 안정감이 있고 결속감이 있다.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나 몸에 병이 들 때 혹은 누가 죽을 때, 주변에 돌봐줄 가족이 있다. 대가족은 젊은 부부가 아이를 낳거나 요리를 하고 집안일을 할 때 그 방법을 가르쳐주고 도와준다” 

또한 그는 새로운 전략을 위해 다음과 같은 사항도 지적하고 있다. 


“모임의 구성원이 여성들, 아이들, 학생들로만 이루어져 있으면 무슬림전도가 성공적으로 되지 않을 것이다. 무슬림 남성이 전도 활동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신자들은 주변의 친구들이나 친척들 중 여러 명을 그리스도께로 데려올 때까지는 신앙을 공개적으로 나누는 것에 있어서 신중하도록 해야만 한다. 신자를 기존에 속해 있던 공동체에서 빼내는 ‘축출작업’을 멈추어야 한다. 신자들은 자신이 속한 문화에 남아 있어야 한다” 


무슬림 가정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남성위주의 선교전략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본인도 이러한 주장에 적극 동의하며 좀 더 나아가 남성위주뿐만 아니라 가족 중심의 전도 활동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터키는 청장년을 중심으로 한 전도활동과 개종이 활발하며, 본인이 섬기고 있는 가정교회도 가족중심으로 75.8%가 나오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24.2% 출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무엇보다도 가족중심적인 복음 전도 활동이 중요하다. 

또한 이러한 주장을 보충하기 위한 한 예를 들자면 본인이 사역하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C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어느 날 이름도 모르는 한 사람으로부터 그 마을 A라는 중년이 성경을 받으면서 일이 시작된다. 

A라는 중년은 받은 성경에 관심을 두지 않고 서랍 한 구석에 놓는다. 얼마의 기간이 지난 어느 날 그 중년은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이것, 저것을 찾다가 문득 과거 자신이 받았던 성경을 다시 보게 된다. 그는 다만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손에 쥔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 

성경을 읽어나가면서 그는 그 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영접하며, 끝내는 자신이 안고 있는 새로운 삶 속에서의 기쁨을 먼저 가족과 나누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온 가족이 믿고 그 다음엔 가까운 곳에 함께 사는 친척들에게 전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많은 핍박과 조롱과 감시가 있었다. 

작은 마을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신의 생계를 위협하는 일일 것이었다. 그러나 함께 믿음을 공유하고 있는 가족들의 격려 속에 복음 전도는 계속되고, 이젠 마을의 대부분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매주 예배를 드리는 마을로 바뀌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자생적으로 교회가 탄생된 곳도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의 상황을 정리해보면 먼저 성령의 역사와 증거가 있었으며, 그리고 사회에서 보이지 않게 소외받고 있는 종교집단인 알레비라는 이슬람 한 종파를 믿는 사람들이었으며 그리고 가족 중 장년, 즉 어른이 먼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에 대항하는 여러 가지 반대도 적었으며, 그리고 이웃이 여러 모습으로 핍박을 할 당시에도 가족 구성원끼리 서로 격려하는 믿음의 나눔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족은 모슬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있어서 큰 자산과 같다. 이것은 이슬람사회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얼마 전 터키를 방문하여 세미나를 주최한 ‘정민영’ 사역자도 이슬람권에서 교회개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잇다. 


“이슬람은 공동체가 강한 종교이고, 우리의 일은 제자를 삼는 것 그리고 양육하는 것이다. 교회로 모이면 이슬람권에서 박해 당할 때 공동체적으로 서로 도울 수 있다. 따라서 효과적인 전도사역은 서로 돕고 세워줄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종족, 환경)이 주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좀 더 쉽게 결단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본인은 이슬람권에서의 좀 더 나은 선교 전략 가운데 하나로 가족을 위한 복음 전도 활동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인 전도 방식보다는 단체의 전도 방식을 이용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족 중심의 전도 활동을 긍정적으로 이끌고 나가기 위해선 여러 가지 갖추고 준비되어질 사항들이 있다. 

 

1. 가족중심적인 행사 


무슬림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족중심으로 복음 전도 활동을 위해서는 필요한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족중심적인 행사가 필요할 것이다. 그에 따른 예로는 부부세미나, 가족 체육대회, 가족 오락 프로그램, 가족 식사초대, 가족이 함께 영화 관람 등등 가족이 함께 동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져야 하며 그에 따른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 라는 격언이 있듯이 사역자들은 우선 주변의 이웃들과 무엇보다도 가깝게 지내야 될 필요가 있다. 그들로부터의 최소한의 신뢰를 얻어야 될 것이다. 자신이 인정하는 친구들에게는 어떠한 것도 아낌없이 주고 보살피는 이들의 풍습과 신앙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역자들은 우선 가족 중심의 믿음을 그리고 친구로써의 믿음을 심는 것이 이슬람권에서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빠른 선교 전략일 것이다. 우리들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것을 주님은 성육신 삶을 통해서 먼저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 실천하셨다. 


2. 사회 고위층을 향한 전략 


다니엘이 바벨론으로 나라를 잃고 포로로 끌려간 시절에, 그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들은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벨론의 여러 총리와 방백들의 음모로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통해 다리오 왕 자신이 바벨론 온 땅과 백성들에게 다니엘이 믿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조서를 내리는 것처럼 (단6:16-27) 이슬람권의 사회 고위층이 자신의 믿음을 나누는 일은 그 어느 것보다 여파와 효과가 매우 클 것이다. 

물론 다른 사회적 분위기에서도 같이 느끼는 일이지만 특별히 수직적인 생활 방식에 익숙해 있는 이슬람권에서의 고위층의 한 마디는 매우 영향을 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가족적인 고위층 접근을 통한 선교전략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선 사역자 가족에게도 좀더 여유로운 생활과 문화 생활 등이 필요할 것이다. 


3. 성령의 역사와 증거가 있는 사역적인 전략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뜨거운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능력이 나타나고 많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특별히 이슬람권에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한 선교전략도 매우 중요하다. 이들은 아직까지 무속적인 신앙이 혼합되어있는 가운데 무술적인 행위와 점, 그리고 이상한 현상 같은 것에 매우 중요점을 두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증거와 함께 복음 증거는 매우 중요한 전략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씀을 근본으로 하는 믿음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와 증거 전략이 필요하다. 

본인이 사역하고 있는 도시에서도 몇 년 전 유럽 모국가에서 젊은이들이 와서 많은 능력을 행하며 교회를 이루어 나갔다. 그들은 몇 달도 안돼, 상상할 수 없이, 몇 백 명씩 모이는 가운데, 다른 모든 가정교회들이 주춤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능력에만 치중하고 말씀에는 소홀히 한 결과, 지금은 아무도 없고 교회마저 문 닫고 이곳을 떠난 사건이 있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와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을 근본으로 하며 함께 병행하는 지혜로움이 필요한 것이다. 

‘한 걸음에 모든 것을 다 이루겠다‘라는 생각은 이슬람권에서의 가장 커다란 실패의 원인이다. 인내하며 그들 편에서 바라다보고 참아주며 격려하며 사랑으로 하나 하나 열매를 맺어 나가는 것이 가장 느린 길인 것 같지만, 바로 이것이 이슬람권에서의 가장 빠른 길이며 가장 안전한 선교전략일 것이다. 

결론 


성경 말씀 가운데 살전1:5절에서 "내가 여러분 가운데 어떻게 살았는가를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 라며 바울은 부모처럼 함께 살면서 섬겼음을 밝히고 있고, 이어서 바울 사도는 6절에서 “주를 본받는 자”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무슬림들에게 보여주는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성경 빌4:9절에서 “나를 본 것처럼, 나처럼 하라”는 말씀처럼 무슬림들에게 사역자 자신에게 나타나는 열매와 삶의 본을 권유하며 그리고 추천하며 하늘의 복을 함께 나누는데 있어서 초청이 필요하다. 

바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 및 지도자들을 보고 자신들도 그렇게 했다. 

사역자가 다시 돌아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본이 되는 삶을 사는 신자들을 만드는 것이 사역자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취할 첫 원리인 동시에 가장 빠르고 가장 확실한 전략은 바로 “성경대로 행하자” 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행하는 삶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선교사들이 다른 접근에 대해 더 관심 갖는 것을 우리들은 자주 보게 된다. 우리들은 좀 더 나은 선교 전략을 위해서, 그리고 선교 열풍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뒤돌아볼 여유가 필요하며, 한국교회에서도 중동지역에서 사역하는 사역자들에 대한 인식이 무엇보다도 바뀌어야 되는 가운데 다른 동남아시아 지역보다도 중동에 있는 사역자들에 대한 관심과 격려와 후원이 더 절실히 필요할 때이다. 

지금까지 보여주고 있는 모습처럼 한국교회가 빠른 열매와 유행적인 선교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리고 어렵다는 이유로 인해 중동을 향한 선교 관심자들이 중동을 계속 회피한다면 지금까지 이루지 못한 어려운 일들이 계속 반복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하나님 나라 완성에 지연을 초래하게 되며 이것에 대한 책임도 우리들 각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될 때이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선교사 언어교육원 중국선교 사명자)

 

중국교회와 한국교회를 통한 세계복음화 운동

                         

서론


중국의 선교 전략과 활동을 논의하는 것은 2가지 이유에서 쉬운 일이 아니다. 첫 번째 중국은 엄청나게 큰 땅과 많은 인구 그리고 복잡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서 현대 중국선교에 대한 모순적인 증언들이 모두 옳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중국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고 가정교회들에 대한 박해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증언이다.

예를 들어서 베이징의 대형 가정교회(쇼우왕교회)는 2011년 4월에 중국정부에 의해서 폐쇄되었고 교회 건물을 몰수되었다. 담임목사였던 진 티안밍과 다른 목회자들은 모두 가택 연금되었다. 반면에 다른 지역의 가정교회들과 신학교들 특히 중국 남부에는 제한적인 종교적 자유 속에서 다양한 활동을 위해 공개적으로 모일 수 잇다.

두 번째, 외국인 교회 지도자들은 보안상의 이유로 인해서 공개적으로 중국교회를 논할 때에 매우 주의해야 한다.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인 시진핑의 체제 아래서 많은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감옥에 갇혔고, 외국인 선교사들, 특히 많은 한국인 선교사들이 최근에 중국에서 추방되었다. 이론적으로 중국에는 외국인 선교사가 존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중국 정부가 선교사 비자를 발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에는 수천명의 선교사들이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자는 세계 선교에 있어서 중국교회의 중요성을 지적하기 원한다. 그 이유는 앞으로 중국교회가 세계복음화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경제성장과 더불어서 교회의 급격한 성장으로 중국은 현재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기독교인이 살고 있다. 중국교회의 역할을 특히 이슬람 세계의 복음화에 매우 중요하다.

본 논문의 주요 논지는 현대 중국교회의 핵심 사안이 중국의 성장하는 교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위한 지도자 교육이다.

중국교회가 물질주의에 물들기 전에 앞으로 10-20년동안 700개의 신학교를 위해서 수백 명의 중국인 신학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중국의 신학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개혁주의 교회들 중에서도 기독교 교육을 특별히 강조하는 한국 장로교회는 중국의 지도자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쏟아야 할 필요가 있다.

비록 중국의 모든 개신교 교회들이 삼자교회와 가정교회라는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지지만 미래에는 여러 교단들이 세워질 것이다. 한국의 개혁주의 교단들은 중국교회의 지도자 훈련과 외국인 선교 동원이라는 두 가지 주요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Ⅰ. 중국 교회 역사


A. 5번의 기독교 선교의 시도

중국교회의 역사에서 19세기 초반에서부터 시작된 2번의 개신교 선교를 포함하여 5번의 주요한 기독교 선교가 시도되었다.


1. 네스토리우스파 선교(7세기)


역사적으로 5세기에서 6세기에 네스토리우스파가 중국에 접근하였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증거들이 있다. 예를 들면, 셀레우시스-크레시포네의 대주교인 알치우스(411-415)와 네스토리우스파의 총대주교인 실라스(505-520)는 중국에 수도좌를 세웠다. 하지만 고고학적인 첫 번째 발견은 1625년 다아나라의 수도인 시안에 있는 네스토리우스파 비석이다. 비석에는 631년에서 681년까지 중국에 네스토리우스파 선교가 있었음을 역사적으로 보여준다. 비석은 시리아인 선교사, 아로펜이 635년 중국에 왔으며 당나라의 화제인 태종(627-649)에 의해서 받아들였으며 중국에 경교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도교를 신봉하는 우종 황제는 845년에 기독교인과 불교도들을 박해하였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두 번째 전래는 13세기에 몽골의 침략기 중에 이루어졌다. 9세기 중엽과 13세기의 두 시기 사이에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눈에 띄게 사라졌으며. 거의 정보가 남아있지 않다. Kenneth S. Latourette 박사는 네스토리우스 교회가 사라진 세 가지의 이유를 제시한다.

1) 중국에서 기독교는 외국 민족의 종교로 인식되었다.

2) 당시에 중국은 특별히 외국의 종교를 받아들여야 할 만한 필요가 없는 시기였다.

3)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은 고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


2. 로마카톨릭 수사들(13세기)


교황 이노센트 4세는 중국에 수사들을 보내서 몽골의 황제를 살피고 복음을 전하도록 했다. 플라노 카르피니의 요한은 1245년 3월에 “고울의 리옹을 떠났다. 그는 ”몽골의 역사“라는 책을 썼는데 몽골인은 비록 많은 우상을 가지고 있고 해, 달, 불, 물과 같은 자연을 숭배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일신교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1247년 3월에 칼피니가 교화에게 돌아왔고, 1253년에 플레밍의 프란시스코 수도회의 수도사인 루브룩 윌리암이 몽골 위구르와 중국 서부인 타타르로 떠났다. 그는 그곳에서 수많은 네스토리우스파 사제들을 보았다.

몽골인들은 강력한 이슬람 세력이 몽골인들이 유럽과 접촉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과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윌리엄은 몽골의 황제 만구와 황비가 교회에 오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1294년에 이탈리아의 수사 몬테카비노 요한과 그의 네 명의 동료들은 캄발루크(북경)에 가서 2개의 교회를 세우고 6,00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마르코 폴로는 24시간 24년간(1271-1295년)의 긴 여행을 통하여 중국을 방문하여서 많은 수의 기독교인들을 보았다. 그리고 “중국 남부에는 망기라고 부르는 700.000 가구가 이 법(그리스도의)을 따르고 있다”라고 말했다.

 

3. 예수회의 선교(16세기)

 

마테오 리치는 1599년 북경에 도착해서 유교를 믿는 상류층 사이에서 사역을 하였다. 1599년과 1601년에 기록한 그의 책 “Commentari” 에는 그의 선교사역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616년에 포르투갈에서 온 예수회 선교사가 680명이고 유럽에서 온 선교사가 740명이었다. 그들의 사역은 중국의 교육 영역에 특히 효과적이었다. 예수회의 마지막 선교사는 1814년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그 외에 프란시스코 수도회와 도미니크 수도회의 선교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조상숭배에 대한 논란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조상숭배를 허용하였지만 다른 로마 카톨릭 수상들은 조상숭배를 반대하여 천주교에 혼돈을 가져오게 되었다. 교황 피우스 12세가 1939년 조상숭배를 용인함으로 이 문제를 매듭짓게 되었고 현재까지 천주교는 조상숭배 형식을 허용하고 있다.

 

4. 개신교의 선교(1807-1949)

 

중국의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는 런던선교회의 로버트 모리슨이다. 그는 1807년 홍콩에 도착해서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였고 1834년까지 그곳에서 사역하였다. 허드슨 테일러는 1853년 중국에 입국하여서 1863년 중국내 지선교회를 세우고 1905년까지 중국에 머물면서 사역을 하였다. 모택동 주석이 1949년 중국을 통일하기 전까지 중국에는 중국내지선교회 선교사가 1300명이 있었으며, 외국인 선교사를 모두 합하면 거의 6000명에 가까운 선교사가 있었다.

중국에는 북미에서 온 유명한 장로교 선교사들이 있었다. 북장로교회 선교사, 존 네비우스(1829-1893)는 1854년 상해에 들어와서 1877년 산동지역으로 들어갔다. 네비우스가 산동 지역에서 사역을 하는 도중에 1900년 6월 한국에 있던 미국인 선교사들의 초청으로 한국에 들어와 “네비우스 선교정책” (자치, 자립, 자생)을 선교사들에게 소개했다. 이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한국 교회의 급격한 성장에 주춧돌이 되었다.

미국 의학박사인 존 그래스고 커(1824-1901)는 1856년 홍통에 들어와서 1858년 광저우에 병원을 세웠다. 이 병원은 중국에 초기 현대 병원들 중에 하나이다.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인 칼빈 마틸(1836-1908)은 1864년 산동 지역에 도착하였으며 기독교 교육 영역에서 사역을 하였다. 그는 신학과 법학에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중국에 기독교 교육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 주석이 중국을 차지할 무렵 중국에는 1,811,100명의 개신교 기독교인(0.67%)과 11,470개의 교회, 48개의 신학교, 21개의 성경학교, 18개의 기독교 종합대학, 70개의 기독교 병원이 있었고 3백 3십만의 로마카톨릭 신자들이 있었다. 이후로 중국 교회들은 공산주의 아래서 엄청난 박해를 경험하였고 중국 정부는 정부가 통제하는 삼자교회를 통해서 기독교를 통제하였다.

 

5. 근대화 속에 중국교회(1979-)

 

1979년 등소평 주석이 중국을 차지하고 네 가지 영역에서 중국의 근대화를 주장하였다. 네 가지 영역은 농업, 산업, 교육, 국방력이었다. 중국은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문을 열기 시작해서 병든 경제를 발전시키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수천 명의 선교사들이 비록 중국 정부가 선교사 비자를 발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곳에서 사역을 하게 되었다.

 

3가지의 긍정적인 요인이 기독교와 관련하여 중국 사회에 나타났다.

 

1) 중국 공산 정부는 중국 교회로부터 서구 식민적인 선교사의 영향을 분리하였다. 중국 교회는 외국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2) 중국의 많은 학생들이 북미, 유럽, 호주/뉴질랜드 그리고 아시아에 그들의 교육을 위해 나가서 처음으로 기독교의 복음을 듣기 시작했다.

3) 18세가 되기까지 공산주의 교육 아래서 무신론자로 교육을 받은 중국인들이 윤리적 기준의 중요성과 영적인 가치를 깨닫기 시작하였다.

 

B.중국 기독교의 고통

 

중국의 개신교인의 인구는 1949년 이전까지 약 140년의 선교에도 전체 인구의 1%를 넘기지 못했다. 1948년 전에는 “거북이 교회성장” 이라고 불렸던 것이 현재에는 “들불 교회성장”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는 몇 가지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1. 서구 식민주의 “서양 마귀들”

 

청나라(1644-1912) 시대에 거대한 국가였던 중국은 여러 지역을 다스리는 여러 영주들로 인해서 지방 분권화된 국가로 변화했다. 청나라는 1860년에서 1894년 사이에 빠르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엽에 영국의 군대는 중국에까지 미쳐서 첫 번째 아편전쟁(1839-1842)을 일으켰다. 1852년에 영-불 군대는 두 번째 아편전쟁에서 중국을 물리쳤다. 중국은 외세에 의해서 조각으로 나뉘었다. 상해의 공원 입구에는 “중국인과 개 입장금지”라는 푯말이 걸리기도 했다.

중국 정부의 양쯔강 유역은 영국 식민 지역이었다. 중국 남부의 위난 지역은 프랑스 군대에 의해서 통제되었고 중국 동부의 산동 지역은 독일이 그리고 중국 북부의 몽골 지역은 러시아가 차지하였다. 외국 특히 서양의 마귀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폭발은 1900년에 55일 동안 베이징을 포위했던 의화단 사건을 야기시켰다. 의화단은 236명이 외국인 선교사들과 130명의 개신교 선교사들을 포함하여 23,000명의 중국 기독교인을 살해하였다. 의화단은 기독교가 서구 식민제국의 선두주자라고 믿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중국 상류층 사람들은 기독교를 거부하였다.

일본의 군대 역시 중국에 진출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을 한국에서 벌여서 중국을 물리쳤다. 일본 군대는 1918년 만주와 시베리아를 침공하면서 중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였으며, 1937년부터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중국을 침공하였다. 이것이 중국인들이 당시에 기독교를 포함해서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외세와 국민당을 이끌던 장개석 대통령의 수하에 비리 공직자들을 대적하고 모택동의 공산주의를 지지했던 역사적 이유이다.

 

2. 공산주의의 기독교 박해

 

중국은 1951년까지 모든 외국인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삼자 교회의 지도자들인 우야중 목사(YMCA의 총서기)와 중국기독교협회 총무 등광훈 목사를 선두에 내세우고 삼자교회를 강화시키며 반삼자교회들을 박해하였다. 삼자교회를 반대하는 어떤 기독교 지도자라도 바로 구금되었다. 위치만 리와 왕명도는 박해로 인해서 고통을 받았다. 셀 수 없이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박해로 고통을 받았고 강제노동수용소로 쫓겨났다.

현재 가정교회와 삼자교회의 급격한 성장은 지난날 공산정부 치하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받았던 고난의 결과이다. 북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의 터툴리안(170-220)은 사형집행 직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순교자들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다.” 1979년 이후로 구금되었던 지하가정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부분적인 자유가 주어지면서 중국교회에 영적인 부흥이 일어났다. 전 세계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중국의 고통받는 기독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의 시간과 재정을 들여서 중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선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3. 가정교회 VS 삼자교회

 

가정교회와 삼자교회 간의 수십년 동안의 해묵은 갈등과 불신은 많은 가정교회의 지도자들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으며, 이러한 갈등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 문제는 1937년 한국교회에 있었던 신사참배를 떠올리게 한다.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교회의 지도자들은 수감되었지만 일본정부의 요구에 응했던 지도자들은 그들의 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다. 감옥의 성자들과 타협자들의 갈등은 1945년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면서 발생하였다. 결과적으로 1951년 수감되었던 지도자들은 한국장로교회 내에 새로운 교단(부산의 고려파)을 세우게 되었다.

삼자교회는 중국의 국가종교사무국의 철저한 통제 아래에 있다. 모택동의 시대(1948-1976)에 중국정부는 모든 주요 기독교 활동을 관리하였다. 삼자교회는 교회 내에 공산당의 앞잡이라고 가정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삼자교회는 가정교회의 지도자들을 박해했다. 중국정부가 가정교회를 박해하는 동안에는 이 두 공동체간에 갈등은 계속 될 수밖에 없다.

과거에 중국의 가정교회들은 교육수준이 낮은 시골의 주민들 사이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비등록 교회의 기독교인들은 적은 숫자가 모이지만 생동감이 있고, 감격이 있으며, 그들의 신앙은 살아있다. 현재 가정교회는 중국 전역의 도시들 가운데서 확산되고 있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중국의 수도인 북경에 존재하는 3000개의 가정교회를 포함해서 중국 전역에 80000개의 가정교회가 있다고 보고했다. 가정교회들 중에 많은 수는 중국 외부의 다양한 기독교 단체와 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할 경우에 가정교회 가운데 다양한 종류의 교단들이 세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Ⅱ. 중국 교회에 대한 바울의 선교전략

 

역사는 발전을 겪으면서 종종 반복된다. 역사에 대한 동양적 관점은 삶을 순환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런 의미 없이 출생하여서 늙어가고 병들어가고 결국은 죽음을 맞이한다는 “생, 노, 병, 사의 역사관”이었다. 반면에 역사에 대한 서구의 세속적인 관점은 “나사모양의 역사관”으로 농경사회에서 봉건사회를 거쳐서 자본주의와 현대주의 그리고 결국에는 후기현대주의에 이르기까지 문명이 발전한다는 것이다.

1세기의 사도 바울의 선교전략은 21세의 선교전략가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준다. 1세기의 교회와 사회는 중국 교회와 사회의 현재 상황과 매우 중요한 유사점과 차이점이 존재한다. 만약 사도 바울이 현재에 살았더라면 그는 분명히 에베소를 주목하고 에베소교회를 위한 그의 선교전략을 중국교회의 모델로 삼았을 것이다.

 

1. 현대 중국과 1세기 에베소의 유사점 

 

1) 많은 인구 : 500,000명

에베소는 1세기경에 커다란 항구와 시장과 도서관을 갖은 소아시아의 가장 큰 도시였다. 에베소는 상업적, 문화적, 교육적으로 중심도시였다. 마찬가지로 중국은 13억 인구를 가지고 있다. 에베소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사도 바울에게 엄청난 선교의 도전이었던 것처럼 중국의 소수 기독교인(5%)이 대다수인 93%의 비기독교인 인구에 다가가는 것은 엄청난 선교의 도전이다.

2) 종교적 도시 :

아테미(그리스 식)이라고 불리는 여신 다이애나(로마식)의 거대한 신전은 에베소의 외각에 위치해 있었다. 이 신전은 높이가 342피트, 넓이가 164피트였으며, 높이가 56피트인 여러 기둥들에 의해서 지지되었고 빛나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제단이 있었다. 아테미 여신은 신전 안에 모셔져서 숭배되었다(행 19:27-28).

마찬가지로 중국의 전통, 종교인 불교, 도교, 유교 그리고 조상숭배가 오늘날 되살아나고 있다. 무신론 공산주의 정부는 지난 65년간 중국에 수많은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들을 만들어냈다.

3) 죄악의 도시 : 윤리적 가치의 상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부도덕한 상황을 묘사하였다. “그들이 감각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9). 마찬가지로, 불의, 뇌물, 모든 종류의 부도덕함은 오늘날 중국 사회에 만연해있다.

4) 박해 :

사도행전 19장 23절에 에베소에 아테미 여신상을 만들어서 돈을 벌던 은장색 데메드리오는 에베소인들을 동원하여서 “에베소의 위대한 아테미여!” 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사도 바울과 그가 전한 복음에 대항하여 농성을 벌였다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초대교회의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받았고 “카타콤의 기독교인들”로 불렸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중국의 문화혁명(1967-1976) 당시에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아시아의 기독교인 박해는 우리에게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 칙령(313년)을 통해서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기 전까지 초대교회가 경험했던 극심한 박해를 떠올리게 된다.

 

2. 에베소 복음화를 위한 사도 바울의 선교 전략

 

그 외에도 에베소 교회와 중국 교회의 사이에는 수많은 유사점들이 존재한다.

첫째로, 중국에서 13억 명의 인구에서 기독교인이 아주 적은 소수(5%)를 차지하는 것처럼 에베소 교회도 아주 적은 수의 기독교인이 있었다.

두 번째, 에베소 교회에서 할례당(유대인)과 무할례당(이방인) 기독교인들 간에 불화가 있었던 것처럼(엡 2:11) 중국 교회에는 많은 방언과 지역주의, 지역 간에 격차로 인해서 불화가 있다

세 번째, 에베소 교회는 영적인 아이를 낳을 훈련과 교육이 부재했다(엡 4:14). 중국 교회에도 오늘날 숙련된 기독교 일꾼들이 너무나 부족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에베소 교회에 대한 선교 전략은 교회의 지도자(사도, 선지자, 전도자, 목사, 교사의 영적 은사를 강조함으로 교회의 지도자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훈련된 영적인 지도자들은 전도와 학생 사역, 사회운동 그리고 많은 다른 사역들을 일으키기 위해서 그들의 교회 일반 성도들을 동원해야 한다. 그것이 지역 교회의 핵심 지도자들을 훈련시키는 현대적인 “제자훈련 프로그램”이다.

어떻게 중국의 소수인 기독교인들이 절대 다수인 비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가지고 다가갈 수 있을까? 사도바울의 선교 전략인 지역 교회의 지도자 훈련이 바로 정답이다. 현대 중국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인들이 말씀으로 양육되어야 한다. 영적인 열정으로 그들은 그들의 믿음을 불신자들과 효과적으로 나눌 수 있다.

   

Ⅲ. 중국 교회의 중요 사랑

 

1. 중국, 기독교인들에 의한 “중국의 기독교화”(민족복음화운동)

 

중국인들에 의한 “중국의 기독교화”라는 개념은 중국 기독교인들은 자국민의 전도에 대한 우선적인 책임을 갖는다는 것이다. 19세기와 20세기에 전통적인 서구의 선교 지도자들은 종종 서구의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세계 선교를 하는 것을 목표로 강조하였다. 비록 그들은 현재 지도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성경 교육기관과 신학교들을 세우기는 했지만, 세계복음화를 위한 “민족복음화운동”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그들은 21세기에 제3세계 선교사들이 서구의 선교사들의 숫자를 넘어서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외국 선교사들과 중국 교회의 관계도 과거의 “부자지간”과 같은 관계에서 “동역자”의 관계로 그리고 현재의 “원주민교회 산하”로 전환되었다.

선교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더 많은 선교사들을 보낸다고 해서 항상 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일본은 45년이 넘는 선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1억2천7백명의 인구 중에서 641,351명의 개신교 기독교인(0.4%)을 포함해서 오직 110만 명(0.8%)이 기독교인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 비교해 볼 때 일본은 33개의 나라, 245개의 선교단체에서 파송된 많은 수의 선교사들이(3,500명) 있다. 추가적인 선교사 파송은 일본을 복음화하기 위한 해답은 아니다. 해답은 8,023개의 교회에서 백만 명이 넘는 일본 기독교인들을 세워서 자국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민족복음화운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본민족복음화” 의 문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수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중국 교회의 지도자 양성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중국 기독교인들은 정부의 선교사 비자 거부 때문에 외국 선교사에게 의존하지 않고 일반 자국 자신의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중국교회는 여전히 자국민을 전도해야 하는 엄청난 과업을 가지고 있다. 중국은 국내에 13억의 세계 최대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71,385,700명의 중국민족이 전 세계에 살고 있다. 미국에 1,215개, 홍콩에 1,250개, 대만에 3,728개의 교회들 합쳐서 총 9,609개의 중국교회들이 화교 중국인들 사이에 존재한다. 홍콩에 있는 세계 선교 중국 협력센터(CCCOWE)는 6개의 대륙에 있는 중국교회의 연합사역을 하고 있다. 해외 중국 기업과 함께 하는 오늘날의 중국의 경제력과 전 세계에 퍼져있는 중국 교회들은 중국 교회의 세계 선교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수의 기독교 인구를 나타내고 있다. 중국에는 6천만 명의 개신교 기독교인들이 있다(1천6백만 삼자교회 성도들을 포함). 80,000개의 가정교회 또는 36,000명의 사역자들이 모일 수 있는 교회가 있다. 중국에서 매일 기독교로 회심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2만 명이다. 이 환상적인 교회의 성장은 하나님께서 모택동 주석의 공산주의 법에 의한 통제에서 박해당하고 순교한 많은 기독교인들의 열매를 수확하시는 것이다. 확실히 지금은 하나님께서 중국에서 일하셔서 수많은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계시는 때다.

저자는 중국 교회와 한국 교회가 기독교인이 겪은 고난과 빠른 교회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여러 가지 유사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교회성장 폭발”, "들풀교회 성장"은 널리 알려져 있으며 “한국교회 성장 폭발”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다.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 호레이스 언더우드 박사(장로교)와 호레이스 아펜젤로(감리교)는 1885년에 한국에 함께 들어왔다. 그들은 다른 많은 선교사들과 함께 교회를 세우고, 인기 있는 남학교와 여학교를 세우고, 병원과 고아원을 세웠다. 그들은 기독교 대학과 신학교를 통해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했고 한국 교회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일제 식민시대(1910-1945)와 한국전쟁(1950-1953) 시간에 고통스러운 박해의 경험은 수천 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위해서 감옥에 갇히고 사형을 당하게 했다. 그들은 일본의 신사참배와 공산주의에 저항하였다. 한국 교회는 “고통당하는 교회”로 알려졌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결과적으로 순교자들로부터 열매를 수확하였다.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민족복음화운동”을 강조하고 한국 기독교인들이 한국의 복음화에 중대한 책임감을 갖게 되었다.

1990년에는 1천2백만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한국 CCC의 설립자인 김준곤 목사는 “민족복음화 운동”의 핵심 운영자다. 서구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의 토대를 닦았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조국을 복음화 시키는 주된 책임을 갖게 되었다.

중국 교회는 40년 전의 한국 교회로부터 배울 점이 잇다. 1970년대에 일어났던 한국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은 빠른 경제 성장과 세속주의로 인해서 1990년대부터 쇠락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교회를 떠나는 젊은 세대들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최근에 서울에서 어떤 한국 목사가 설교 중에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영국을 이미 떠나셨고, 현재 미국을 떠나고 있으며, 한국을 떠나려고 준비 중이시다.” 그러나 다행이도 한국 교회가 종교의 자유를 바탕으로 이미 250개의 신학교로 많은 수의 사역자들을 키웠다는 점에서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현재 중국 교회의 정치적 상황은 한국 교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2. 연장신학교육(TEE)을 통한 교회 지도자 양성

 

분명히 지금은 중국교회 안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하심으로 수많은 중국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고 있는 때이다. 중국교회는 나날이 성장하는 세속주의와 물질주의로 말미암아 중국의 교회성장이 가로막히기 전에 수많은 가정교회들이 필요한 교회 지도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을 제공하고, 그들을 양육시켜야 하는 때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다”(마9:37). 학식 있는 신자가 있는 도시에서 더 많은 가정교회가 성장하는 이때에 중국교회는 말씀으로 제대로 훈련된 교회 지도자들을 배출해야 한다. 이것이 가정교회와 삼자교회의 공통된 화두 중에 하나이다. 지도자 훈련은 두 가지 갈래로 구분된다. 일반 평신도 수준에서 지도자 훈련을 하는 것과 사역자들(목사, 선교단체 지도자, 신학 교수)을 위한 훈련이다.

연장신학교육(TEE) 훈련 프로그램 또는 장거리 교육(Distant Education)은 매우 중요해졌다. 냉전 기간(1950-90) 중에 TEE는 공산국가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광범위하게 조직되었다. TEE 프로그램에 따르면 성경교사는 매주 소그룹을 만나서 준비된 연장교육 교과서(Programmed Instruction Materials)를 사용하여 성경말씀을 가르쳤다. 이 PIM 교과서는 각자 다른 수준의 학위에 맞도록 준비되었다. 오늘의 TEE사역은 현대 매스미디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과 수많은 종류의 교육 자료(문서, 인터넷, DVD, 라디오, 스마트폰)를 갖게 된 것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OMF, WEC, SIM과 같은 많은 전통적인 선교단체들은 중국을 포함하여 접근제한국가(Restricted Access Nations)에서의 교회개척을 매우 강조해 왔다. 그러나 앞날의 선교전략은 숙련된 기독교 사역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육 사역이다. 그러므로 많은 선교단체들은 중국의 TEE사역과 신학교육을 도모하는 좀 더 영적이고 학문적인 자질을 갖춘 선교사들을 모집해야 한다.

 

3. 신학 교수들에 대한 간절한 필요

 

홍콩의 국제중국성경신학교의 학장인 토마스리 박사는 2012년에 한국에서 열린 아시아선교협회(Asian Society of Missiology) 세미나에서 중국에는 21개의 삼자교회의 다양한 수준의 신학교를 포함하여 총 700개의 신학교와 성경학교들이 있다고 말했다. 많은 가정교회 신학교들이 도시에 있으며, 그들의 교육 사역을 공개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반면에 최근 5년간(2008-2012) 삼자교회는 240만 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5,195개의 교회를 세웠고 1,057명의 목사에게 안수를 주었으며, 482명의 견습 목사를 세우고 1,443명의 장로를 세웠다. 21개의 삼자교회 신학교에는 292명의 교수가 가르치며 4,36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신학 학위를 가진 신학 교수들이 심각하게 부족한 상황은 중대한 문제이다. 오늘날 신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중국에서 가르치고 있는 중국인 신학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중국 외부에서 많은 중국신학자를 양성하는 것은 시간이 오래 소요될 것이다.

최근 중국의 많은 가정교회 신학교들이 그들의 학문적인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Asia theological Association(ATA) 인가를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학위가 아시아와 서양의 다른 신학교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10-20년은 중국교회에 매우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다. 중국교회는 성장하고 있는 교회의 수요에 맞춰서 중국 내, 외부에서 더 많은 교수와 목사를 훈련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교회내면에 물질주의가 싹트기 전에 수많은 목회자와 신학 교수들을 배출했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와 중국교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중국의 공산주의 정부는 종교적 자유를 제한한다는 점이다. 지금은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폴 그리고 필리핀에 있는 신학교들이 중국 목사와 신학자들을 훈련시켜야 하는 시기이다. 해외에 있는 중국 신학교들, 특히 북미와 호주, 뉴질랜드에 있는 신학교들은 더 많은 중국인 신학자들을 배출하기 위해서 아시아 신학교들과 같이 협력하여 동역해야 한다.

한국의 경우에, 신학박사 학위나 기독교교육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한국 신학자의 수가 2,000명 이상이다. ATA 인증 재평가 팀은 2013년 10월에 4개의 신학교(총신 신학대학원,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횃불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백석 대학교)를 방문하였다. 총신 신학교(합동)의 사당동 캠퍼스에 700명의 대학원생(Ph.D., D. Ed., Th. M.)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대학교에는 Ph. D과정(20명), Doctor of Theology(10명), Doctor of Biblical Studies(3명), Doctor of Lifelong Edcation(28명)이 있다. 횃불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대학교에는 40명의 Ph.D. 과정 학생들이 있었다. 백석대학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는 Ph.D. 학생(56명), Th.D. in Ministry(35명), Th.M.(71명)이며 지금까지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졸업생이 Ph.D.(34명), Th.D. in Minstry(49명), Th.M.(72명)이 배출되었다. 이 외에도 적어도 10개의 다른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진행 중인 학생이 적어도 400-500명이 될 것이다.

지금은 한국인 신학자들이 박사 학위를 가지고서도 한국에서 교수직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교회에는 목사와 신학교 교수들이 풍성하게 공급할 수 있는 반면에, 중국과 타 아시아 교회들은 자질을 갖춘 목사들과 신학자들을 찾고 있다. 한국교회의 선교운동은 지역 교회들을 동원해서 25,000명의 한국인 선교사들을 170개의 나라에 파송했지만 신학교와 신학 교수 사역에 대한 선교비전은 아직 유아기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한국인 신학자들을 대상으로 신학교수 선교대회가 필요하며 또한 신학 교수와 기독교대학 교수들을 위한 선교단체가 세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 성장하고 있는 가정교회 신학교들은 ATA 인증을 받아서 그들의 학문적 수준을 향상시키고 아시아의 다른 신학교들로부터 학위를 인정받으려 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아시아의 ATA를 비롯한 6개 대륙(아프리카, 남미, 중미, 유럽, 북미, 호주/뉴질랜드)의 신학교 인증협회로 구성된 국제복음신학교육협회 (International Council of Evangelical Theological Education-ICETE)로부터 인정을 받기 원한다. ATA는 중국의 정치적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중국 신학교들이 국제 신학교들과 협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 이유는 중국교회와 신학교들은 국제기독교 사회와 아주 오랜 시간동안 고립되어 왔기 때문이다. 저자는 네 가지 신학 학위(Ph.D, Ed.D, D.Min, Th.M)를 수여할 수 있는 중국 아시아 신학대학원(AGST-Chinese)을 세울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Asia Graduate School of Theology (AGST)는 1984년 홍콩의 ATA 이사회에서 창립되었다. 1985년부터 AGST-Philippines, AGST-Japan, AGST-Alliance 그리고 AGST-Indonesia에서는 200명이 넘는 졸업자들을 배출하였다.

AGST-International(한국)은 2013년 조직되었으며 1972년에 하와이에 창설된 Hawaii Theologicl Sminaary 에서 관활하게 되었다. ATA가 인증하는 11개의 한국 신학교가 협력하고 있다. 아시아 각 나라의 AGST 프로그램은 ATA의 인증을 받고 있다.

 

4. "Back to Jerusalem" 운동

 

"Back to Jerusalem Movement(BJM)"의 기원은 1921년 중국 산동 지역의 예수 가족 공동체의 ‘징띠엔잉’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중국전역의 가정교회 운동으로 퍼졌다. BJM의 기본 신념은 1세기에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기독교가 중세기를 지나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거쳐서 17세기에 북미로 건너가고 18세기에 서구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를 거쳐서 제 3세계를 복음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BJM은 이제 중국교회가 복음을 가지고 다시 중동과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중국서부에 있는 신장성 지역에 1천6만의 위구르를 포함에서 2천5백만 이상의 무슬림(2%)이 살고 있다. 중국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대사명에 따라 중국내에 무슬림들과 중동과 중앙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한 비전을 품어야 한다.

제4회 BJM 국제선교대회가 1910년 에딘버그 선교대회 100주년을 기념하여 2010년 6월 1-4일 예루살렘에서 개최되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화교선교단체(The Great Commission)의 창립자이니 토마스왕 박사와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 있는 Ambassador for Christ 의 총무 데이빗주 박사 외 많은 중국교회 지도자들이 BJM을 열렬히 후원하고 있다. BJM 예루살렘 선교대회의 선언문의 7가지 사항 중 하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무슬림과 유대인, 타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아마도 사도 바울이 직면했던 것과 비슷하게 영적인 갈등이 더 심각해 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빌 1:30)

BJM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중국신학교들이 선교비전을 품어야 한다. 이것은 신학생들에게 선교를 가르치고 중국교회에서 선교를 촉진시킬 더 많은 중국인 선교학 교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서 중국교회가 많은 수의 선교사들을 해외로 파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삼자교회와 가정교회 모두에 선교를 강조해야 하는 때가 찾아온 것이다.

 

Ⅳ. 중국복음화를 위한 한국교회 선교전략

 

현재 중국기독교의 급속도 성장과 더불어 중국교회의 시급한 문제는 영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목회자와 신학교 교수를 충분히 배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 지도자 양성의 과제는 중국교회 내에 물질주의와 세속주의가 침투하기 전에 앞으로 약 10-15년 내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수천만 명의 중국기독교인이 충분한 신학적으로 훈련받은 목회자와 신학교교수가 부족하게 된다면 중국교회는 혼돈과 교회분열과 이단교리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한국과 중국은 수 세기에 걸쳐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교회와 한국교회는 역사적으로 유사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중국이 한국의 이웃에 있는 대 국가이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중국교회와 함께 동역해야 한다.

예를 들어, 총신대 신학대학원과 신학원은 3백만 성도와 11,456교회, 140노회, 19,829명의 목사 2,600 선교사의 규모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 가장 큰 교단이 장로교 합동교단에 속해 있다. 총신의 재학생은 700명의 대학원생과 1,700명의 M.Div학생, 4,000명의 대학생이 있고 모두 합해서 6,400명의 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다. 이 신학교는 한국에서 뿐 아니라 아시아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 신학교다.

한국의 다른 대형교단 신학교들도 수많은 교역자와 신학교수를 배출하였다. 한국장로교(통합)는 280만 신도와 8,305 교회를 소유한 한국의 제2대 교단으로 이 교단에 속한 장신대신학 대학원은 3,000명이 넘는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 현재 한국내 Ph.D/Th.D 학위를 소유한 한국 신학자의 수가 2,000명이 넘으며, 이제는 한국 내에서 교편을 찾기가 힘든 시대가 되었다. 한국의 신학교수들은 선교의 비전을 갖고 특별히 중국신학교육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선교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1. 한국교회에 드리는 제안

 

1) 큰 교단신학교들은 중국어 신학교 프로그램을 설치하기를 원한다. 현재 한국에 중국 학생을 위하여 중국어로 강의하며 M.A.,M.Div. 학위를 수여하는 신학대학원이 2개가 있다. 서울중국신학교(안성)와 세계선교신학교(수원)는 2014년 9월에 Asia Theological Association 인가심사를 받았다. 양평에 있는 ACTS도 우심화 교수를 중심으로 중국 연구원이 개설되었고, 대전에 있는 침신대에서도 2014년 중국어 M.Div. 프로그램을 설치하려고 노력했으나 한국정부의 비자 문제로 연기되었다. 총신(합동)도 중국어 신학프로그램을 시작할 계획을 갖고 있다.

장신대, 백석대, 서울신대, 횃불트리니티 신대 외 다른 신학교와 기독교대학들도 표준 중국어 신학교육 프로그램을 설치하기를 제안한다. 현재 제주도는 중국인이 비자 없이 방문할 수 있으므로 중국신학교육을 위한 유일한 장소로 사용될 수 있다.

2) 외국에서 신학교육을 받는 신학생들을 위하여 Asia Graduate School of Theology(AGST) International(한국)이 2013년에 창설되었고 4개 학위(M.A. Th.M., Ph.D., D.Min.)를 수여하게 되었다. AGST International은 하와이에 있는 Hawii Theological Seminary가 ATA인가를 받은 한국 신학교들과 협조해 운영되고 있다. AGST International이 중국어 신학프로그램을 개설해 최고 수준의 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신학교육을 한국과 중국에서 마련하기를 제안한다.

3) 한국과 북미에 있는 한국 신학교들은 연장신학교육(TEE)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신학교수 및 선교사들과 협조해 TEE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하고, TEE 교육자료(책, 텔레비전, 라디오, 인터넷, 커리큘럼 등)을 개발해야 한다.

4) 한국에 250개 신학교와 북미에 100개 한인신학교가 존재하고 있다. 이 많은 신학교와 기독교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이 선교의 비전을 가져야 하는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한국교회 선교는 지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고 신학교 레벨에서는 대단히 미약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신학교 교수를 위한 선교대회가 필요하며 한국에서는 KWMA, 북미에서는 KWMC/KIMNET과 협조하여 선교대회를 격년에 걸쳐서 매번 다른 신학교에서 개최하기를 원한다. 한국의 GMS, OMF, SIM과 같이 신학교 교수들로 이루어진 선교단체를 조직하여 신학교와 기독교대학에서 선교의 동력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5) 한국의 대형교단 신학교에서 Korean International Mission for Church growth Institute-KIMCHI(한국 교회 성장과 선교세미나)를 마련해 중국의 중요 신학자와 교회 지도자를 한국에 초청해 한국교회의 성장, 신학교육, 선교운동을 소개하며 친교를 갖기를 제안한다. KIMCHI는 충현교회 전 담임목사 이종윤 박사가 창설했으며, 매년 외국교회 지도자를 국가별로 약 30명 초청해 1주일간 한국교회 성장을 소개했다. 비용은 중국대표단이 이동경비를 부담하고 한국 신학교에서 숙식비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2. 북미 한인교회에 드리는 제안

 

1) 한국교회와 중국교회의 협조를 도모하기 위하여 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와 월드미션동서센터(East West Center for World Missions)는 북미에 있는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중국신학생을 풀러에 정기적으로 초청해 한국교회를 소개하는 세미나를 갖도록 제안한다.

예를 들어, 보스턴 근처에 있는 고든코넬 신학교(Gordon Conwell Theological Seminary)는 2014년 5월26-29일 북미의 13개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약 50명 중 중국신학생을 초청해 세미나를 가졌다. 이러한 세미나를 통해 장래 중국교회 지도자가 되는 중국신학생에게 한국교회의 성장, 신학교육, 선교활동을 소개하며 한국교회와 친교를 나눠 아시아 복음화에 동참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2) 북미에 있는 4,00개 한인교회와 1,300개 중국교회의 동반자 관계를 도모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북미의 중국교회는 CCCOWE-북아메리카와 연결되어 있으며 홍콩에 본부를 두고 있는 전 세계중국교회협의회(Chinese Churche Coordination Office for Works Evangelization-CCCOWE)와 연결돼 있다. 북미에 두 개의 중요한 중국선교단체를 소개하기를 원한다. 캘리포니아(Sunnyvale)에 있는 The Great Commission Center(Thomas Wang)과 Pennsylvania(Paradise)에 있는 Ambassdor for Church(David Chor)이다 북미의 한국교회 지도자와 중국교회 지도자의 긴밀한 동반자 관계는 특별히 중국교회 지도자 양성에 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

 

역사적으로 한국교회는 기독교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현재 중국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은 훈련된 사역자와 신학교 수의 심각한 부족으로 인해서 교회 지도자 영성과 같은 강력한 개혁주의 전통의 힘이 필요하다. 즉, 한국의 개혁주의 장로교회는 중국교회(가정교회와 삼자교회)와 함께 동역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신학교육과 해외선교에 있어서 중국교회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중국교회가 세계적으로 많은 수의 기독교 인구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 복음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국교회와 중국교회는 모두 박해와 고난을 경험했고 최근에 폭발적인 교회의 성장도 경험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와 중국교회를 사용하셔서 45억 아시아인(전 세계의 60%)과 다른 대륙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하실 것이다.

 

/노봉린 박사(ATA International Senior Advisor, Th D) 

/미주크리스찬신문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선교사 언어 교육원 선교사명자)

 


존 로스의 선교방법


만주우장의 선교사 존 로스(1842-1915) 선교사는 스코틀랜드인으로 최초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하기 훨씬 이전에 한국인 팀의 도움을 받아 한글로 신약을 번역해 한국선교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한국인들을 전도자로 무장하고 훈련시켰으며 이들은 1844년 한글성경을 배포하고 기독교 공동체를 설립하기 위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존 로스 자신이 한국을 방문한 것은 1887년 한 차레이지만 그의 한국인 전도자팀은 초기 한국 기독교 공동체의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한다.


이같은 지적은 지난달 말 시카고에서 열렸던 세게한인선교대회에서 강사로 초청된 조동진 목사의 강의에서도 나타난다. 조동진목사는 존로스를 한국선교의 아버지로 못 박고 한국선교사로서 '흠이 없는사람' 이라고 강조했다. 그러한 '존 로스의 선교방법'에 대해 배안호 목사(전 탄자니아선교사)가 최근 펴낸 "한국교회와 자립선교"에 실린 글을 발췌해 본지에 연재한다.


만주의 교회들을 섬기고 만주에서의 선교활동을수 행하는 것이 로스로 하여금 복음화 된 한국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사역을 중단하게 하지는 못했다. 로스는 선교사로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하여 학자와 선교 전략가로서도 큰 적합성을 보여주었다. 로스는 비록 한국을 한 번밖에 방문하지 못했지만 학자로서 다른 어떤 선교사들보다 한국의 역사, 문화, 당대의 사건들에 대하여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선교전략가로서 그는 만주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사역할 기회를 지나치지 않고서 그들중 일부를 훈련하여 한국으로 다시 보냈다. 이 권서인들은 가는 곳마다 기독교 공동체를 설립하고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초기 한국교회의 형성과 발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로스가 이들을 자신의 선교방법에 따라 철저하게 가르쳤기에 이것이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에 의심이 없다. 실제로 우리는 이들이 로스의 토착교회 이론의 방법들로 가르침을 받았기에 한국의 토착교회들에 자신들의 훈련의 실제적인 흔적을 남겼다.


로스가 실행했고 그것으로 한국의 권서인들을 훈련했던 이 토착교회 이론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사실 로스가 믿었던 선교방법은 자신의 문헌:1903년에 저술한 "만주의 선교방법", 그의 논문들, 보고서들 및 연설문에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설명되어 있다. 로스의 저술 속에 나타난 그의 토착교회 이론을 연구함으로써 로스의 이 선교방법이 실제로 초기 한국교회의 형성과 발전에 반영되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가늠하게 된다.


로스의 선교방법을 살펴보기 전에 선교사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느냐에 관한 그의 이해를 연구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의 많은 저술들 가운데 로스는 목회자와 선교사 간에 분명한 선을 긋는데, 그는 "선교사는 목회자가 아니며 결코 한 가지에 침잠해서는 안된다"(should never sink into one)고 확고히 저술했다. 로스는 예비 선교사가 구비해야 할 일단의 엄격한 자격들을 설정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그는 "선교사는 바울의 유형으로서 교육과 훈련이 잘 되어 있어야 하며 재능이 특출하며 믿음이 견고하고 영성과 지성이 탁월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기록하며 계속하여 "선교사는 근대에 있어 사도들의 대리자로서 사도들의 유일하며 진정한 후계자이다"라고 기록한다.


로스로서는 사도 바울이 선교사의 원형적 모델이었다. 로스는 모든 선교사는 '사도 바울을 진정으로 모방하는자'이어야 하며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의 발자취들을 지적, 신체적, 영적으로 좇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리하여 자연스럽게 선교사에 대한 그의 정의는 자신의 선교방법의 원칙을 잘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진정한 사도들의 후계자들이다. 우리는 그 사역방법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의 발자취를 쫓는다. 우리가 믿기로는 교회에 의해 파송된 모든 선교사는 어떤 토착교회의 목회자가 아니라 바울을 모방하는 자이어야 한다. 이로부터 선교사가 지적, 신체적,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가도 추론될 수 있다."


이리하여 바울을 자신의 멘토로 삼은 로스는 자기 자신의 선교방법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의 선교방법을 네 가지로 구분하여 그 상이한 국면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바울의 발자취를 좇는 광범위한 '순회'에 대한 강조

(2) 자전하는 교회의 형성

(3) 자치하는 교회의 형성

(4) 자급하는 교회의 형성

 

(1) 광범위한 순회


선교사에 대한 이해를 신약의 사도바울의 생애를 기초로 하기에 로스는 선교사의 근본적인 사역들 중의 하나로 자신의 논문 선교사 바울에서 '순회'를 꼽았다. 같은 논문에서 그는 사도행전 13-21장에 서술된 바울의 순회 여행의 특성들을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바울의 순회여행은 오늘날 많은 선한 사람들이 추천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가 있다. 바울은 복음이 알려진 모든 장소들에서는거저 통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복음이 전파되지 아니한 장소들에서는 자신의 생명에 대한 위협으로 쫓겨날 때까지 바울이 핵심적 진리라고 간주했던 것에 관한 지식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는 수년간의수많은 교훈들에 대한 가르침과 설교가 요구되었다. 바울의 이 특징으로부터 얻어지는 교훈은 선교사들과 선교 사역에 관심을 가진 모든 이들이 심각하게 생각하여야 하며, 특별히 바울이 사역했던 어떤 곳보다 훨씬 어려운 곳인 중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로스는 선교사들과 선교사역에 관심을 가진 모든 이들이 바울의 사역의 발자취들, 특별히 그의 선교 여행으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사실, 만주에서 활동하는 최초의 목사 선교사이었기에 로스는 1872년 도착일로부터 광범위한 순회여행을 했다. 그의 순회여행에 대한 강조는 그의 저서 만주에서의 선교방법들에서 볼 수 있는데 로스는 자신의 선교방법을 설명함에 있어서 전체 15장 중 첫번재 장을 순회 여행에 할애하고 있다. 로스는 순회 여행의 형태를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첫번째는 활동적인 권서인으로서의 단순한 여행(simple travel with active colporlage)이며 두번째는 감독(superintending)하는 여행이다.


1) 활동적인 권서인으로서의 단순한 여행


활동적인 권서인으로서의 단순한 여행의 목적은 주로 장래 사역과 관련된 땅과 사람을 조사하는 것이다. 이 형태의 여행은 선교사가 언어에 대한 지식을 얻기 전에 선교의 초창기에만 필요한 것이다. 성경을 포함한 기독교 서적들의 활발한 배포가 이 여행에 동반된다. 이 여행을 통하여 선교사는 '장래 사역을 위한 견고한 기초를 놓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교의 장래 발전을 위한 지능적 계획들(intelligent Plans)을 형성하기 위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그러나 로스는 이 형태의 여행은 '선교사역을 수행하는 효과적 내지는 만족한 방법은 아니다'라는것을 깨달았다. 특별히 '심지어 기독교 교리에 대한 용어'조차 알지 못하는 중국인들과 같이 복음이 낯선나라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이리하여 로스는 이 단계 동안은 선교사는 자신이 선포하고 있는 것이 사람들에 의해 충분히 이해되고 있는가에 대해 특별한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 유념했다. 다른 한편, 선교사역이 확립되고 기독교 교리가 부분적으로라도 알려진 곳(오늘날의 대부분의 선교지는 이범주에 속한다)에는 "이 형태의 여행이 보다 항구적인 선교사역과 연관되고 그에 종속된 기독교 문서배포의 형태로 수행된다면 적극 추천할 만한다" 라고 로스는 쓰고 있다.


2) 순회의 제2단계에서의 감독

 

첫번째 형태의 여행의 한계를 설명한 후, 로스는 다른 형태의 여행인 감독을 위한 여행을 추천한다. 이 형태의 여행은 로스의 사역방법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로서자신의 선교에 보편적으로 채택되었다. 로스는 이 감독을 위한 여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선교사들은 대도시에 센터를 지어 정착한다. 여기서 주 사역인 전도, 목회, 교육, 의료사역을수행한다. 이 센터를 중심으로 하여 선교사는 수백마일에 걸쳐 살고 있는 수백만의 사람들을 감독한다. 이 넓은지역에는 20개 이상의 선교 기지들(stations)이 있을 수 있는데 각 기지에는 다소간의 훈련과 경험을 갖고 있는 토착전도자들이 있다.  젊은 학생 전도자들이 이 선택 전도자들을 돕는다.


이 형태의 전략에서 외국인 선교사의 역할은 분명하다. 그는 중심적 선교기지를 세우며, 토착 전도자들을 채용하여 다양한 외곽 기지들에서 전도와 목회 사역을 하도록 이들을 배치하는 것이다. 선교사 자신은 이 외곽 기지들은 정기적으로 방문한다. 이 방문기간 동안 그는 토착전도자들의 임무를 감독한다. 이것의 좋은 사례는 로스와 웨스터가 김청송이 설립한 간도의 기독교 공동체를 반복적으로 방문한 것이다. 선교사의 순회 여행 기간 중의 역할에 대해 로스가 잘 서술하고 있다.

 

선교사언어교육원제공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성경은 나의 삶이자, 전부이다.  

 

1984년에 에티오피아의 기독교인 데레제 틸아훈을 찾아온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토지 측량 기사 일을 정리하고 공산주의 정부를 위해 정치 활동을 할 것을 요구했었다. 그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할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함께 성경을 공부하며 기도한 지체들의 덕분이라고 그는 말한다. 성경공부를 통해 하나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가지며 서로를 위해 중보 기도하고 교제를 하면서 그들은 공산주의 통치 17년을 견딜 수 있었다. 데레제는 성경공부에 참석한 지체들의 믿음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이를 통해 성경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았고 성경공부가 그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공산주의를 위해 일하는 것을 거절한 그는 자유와 일자리를 동시에 잃게 됐고 다른 많은 기독교인들처럼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가족들이 옷 속에 성경을 감춰서 감옥 안으로 보내 준 덕분에 성경을 읽을 수 있었고 틈이 날 때마다 말씀을 갈망하는 다른 죄수들을 위해서 성경을 소리내어 읽어주었습니다." 그는 성경 말씀이 고난을 이길 힘이 되었던 은혜를 고백했다.

  

영국 위클리프번역선교회는 모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가지게 된 에티오피아 크리스천의 감격을 아래와 같이 소개해준다. 

 

어릴 적부터 예배는 참석했지만 자신의 성경을 가져본 적이 없던 그는 생애 처음으로 직접 성경을 읽을 수 있었던 고등학교의 기독교 동아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했다. 데레제는 성서유니온선교회에서 일하면서 10년간 전국에 있는 고등학생들에게 성경공부와 묵상 교재들을 배포하며 이들이 교재를 활용하도록 돕는 사역을 했다.

 
그러는 가운데 영어성경보다는 암하라어 성경이 이해하기 쉬운 자신을 돌아보면서 모국어로 기록된 성경과 묵상 교재들의 필요성을 깨닫게 됐다. 위클리프 성경번역 선교회 회원이면서 SIL 에티오피아 대표로서 그의 오랜 친구인 아레마예후 하이루와 SIL 사역자들은 그에게 성경번역에 헌신할 것을 권유했다. 가족과 교회에 기도를 부탁하고 자신도 기도하는 가운데 신중하게 생각을 정리하면서 헌신의 결단을 하는데 2년이 걸렸다.


"헌신하게 된 가장 큰 동기는 모국어 성경 번역의 필요가 절실하고 그 대상 언어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이었죠. 에티오피아에서 사용되고 있는 80여 개의 언어들 가운데 단지 8개의 언어로만 성경이 번역돼있는 현실에서 모국어로 번역된 성경이 없는 사람들에게 암하라어 성경을 전해도 그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모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을 때 그들은 말씀을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2009년  5월부터 데레제는 아프리카 위클리프 성경번역선교회 사역자인 동시에 SIL 에티오피아 사역자로서 성경 활용 부서에서 일하게 됐다.

 
"시골로 지역에서 성경을 배울 수 있는 곳을 찾기는 어렵죠. 성경을 공부하면서 나의 삶이 변했듯이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모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공부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그는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면서 모국어로 번역된 성경과 말씀 공부 교재들이 필요한 사람들을 기쁨으로 섬길 마음을 나누었다. 올 한 해의 말씀으로 나훔서 1장 7절을 선택한 데레제는 자신의 오래된 모국어 성경 위에 손을 얹으며 말씀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다.


"주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성경은 나에게 새로운 삶을 주었습니다. 이제는 성경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에티오피아 모든 사람들이 모국어로 번역된 말씀을 읽고 변화되길 바라는 데레제에게 성경은 바로 자신의 삶이다. 

 

위클리프선교회, 자국어 번역 성경 가진 에티오피아 크리스천 감격 소개
/미주크리스찬신문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우리는 그러지 맙시다

 


선교사란 간판을 해외까지 당당히 걸고 나가서 악취를 풍긴 나쁜 남자가 있었다. 그 후에 그 나라에 들어온 몇몇 안 되는 선교사들이 모일 때마다 “우리는 그러지 맙시다.” 만날 때 마다 역시 “우리는 그러지 맙시다.” 란 말을 새김질했다고 한다. 바울사도 또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러면 안 된다는 애절한 당부를 철저히 하였다.

“우리는,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간음한 것과 같이 간음하지 마십시다. 그들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나 죽어 넘어졌습니다.”(고전 10:8) 우상의 신전에 들어가 공창(公娼)들과 몸과 마음을 더럽히면서 모압의 미인계에 푹 빠진 저들을 하나님은 심판하신 것이다.(민 25:9)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명예를 더럽힌 혹독한 몫은 살벌한 전염병의 죽음이었다. 그래도 음란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않겠느냐? 간음하면 정녕 너도 죽는다! 는 무서운 경고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시는 행음의 근처도 가지 않겠습니다.”약속해야 한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시험하지 맙시다.”(고전 10:9) 홍해바다를 가르신 특출한 권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면서도, 큰 뜻이 숨어있는 신비를 모르고 하나님의 계획하신 전체의 삶을 트집 잡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에서 내린 꿀 섞은 과자 같은 만나를 진저리나는 음식이라고 투덜대기 시작했다. 갈증 날 때마다 바위 쪼개어 물 주신 하나님을 향해 먹을 물도 공급 못하는 무능한 신으로 경멸했다.(민 21:5) 지고지순한 하나님의 사랑인 출애굽사건을 웃음거리로 만들려하자 갑자기 불 뱀들이 불쑥 불쑥 뛰어나와 사람들을 물어뜯기 시작한 것이다. 감히 하나님을 비웃고 거역하는 가증스런 언덕에 오만한 모습으로 서려는가? 오직 납죽 엎드려 주님께 경박한 짓을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해야만 하리라. 꽃잎과도 내통하는 언어가 있다면 하나님과 통정하는 신비 속에 살아야 하리라.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원망하다가 파멸시키는 이에게 멸망당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처럼 원망하지 마십시오.”(고전 10:10) 열 번이나 모세와 하나님께 거역한 광야의 이스라엘 민족은 원망, 불만, 비방의 볼멘소리가 아예 습성이 되었다. 두 명의 신실한 가나안 땅의 정탐호소는 만사 못 미더운 불안으로 받아드리고, 믿음 없는 허풍쟁이 열 명의 사기꾼에 매수된 뿌리 없는 대중은, 사십년을 헛고생 했구나 통곡하며 반란을 선동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약속대로 약속의 땅을 밟았을 때 헐뜯기만 했던 불평족들은 한사람도 그 땅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황금 같은 복의 통로를 아깝게도 막아버리고 볼멘소리만을 고집했던 얼뜨기처럼, 되지 않으리라 다짐해야 하리라.

창세 이후로 우리는 줄곧 종말에 사는 시한부 인생들이다. 교묘한 속임수, 거짓말,계속적 다툼과 불화, 수군덕거림, 뇌물수수, 가식, 탐욕, 절망과 근심, 사명에 대한 게으름, 감사 없는 생활을 끊어야 할 다급한 시점에 서있다. 소는 지치면 주저앉을망정 꾀는 부리지 않는단다. 우직한 하늘나라 바보가 될지언정 언어수작을 부리지 않겠노라고 울먹여야 한다. 왕따, 몽따를 당할지언정 어둠과는 내통하지 않으리라 선언해야 한다. 지름길로 달려 성공하려다가 미로에 빠져서는 더더욱 안 되리라. 성공한 사람보다 소중한 사람이 되어야 하리라.

“우리는 그러지 맙시다.”


/이동휘 목사(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바울선교회 대표이사)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