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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거룩한 칭호

 

말씀 : 요일3:1~6

 

1.가장 위대하고 놀랍고 영광스러운 칭호

 

여러분, 세상에서 뭔가 특별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칭호가 붙습니다. 성왕 다윗, 지혜의 왕 솔로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또 일반적으로도 음악의 아버지, 축구의 황제, 가왕 누구누구, 요샌 뭐 외모지상주의에 빠져 여신, 얼짱, 몸짱 그러면서 그럴듯한 칭호를 붙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복되고 거룩한 칭호는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과 예수님께 대한 칭호로서 하나님, , 그리스도, 구세주 등의 칭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인류의 구속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신 예수님, 인류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해 주실 분 등등의 의미이지요. 세상에 이렇게 거룩하고 복되고 위대한 칭호가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하고 능력과 지혜가 뛰어나고 인품이 좋고 엄청난 업적과 공로를 남겨 대단한 칭호를 얻어도 하나님께 적용되는 칭호에 비한다면 새발의 피도 안되지요.

 

그런데 여러분, 인간에 붙여진 칭호 중에 그래도 어느 정도 하나님께 대하여 붙여진 칭호에 근접하는 칭호가 있습니다. 그게 뭐겠습니까?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성도라는 칭호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 누구누구, 성도 누구누구 이런 칭호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물론 하나님, , 그리스도, 구세주라는 칭호에는 어림도 없지만 그래도 인간으로서는 세상의 다른 어떤 위대한 칭호나 타이틀이나 지위와도 비교도 할 수 없이 위대하고 아름답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칭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물론 이 땅에서도 어느 정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되지만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갔을 때 어떻게 됩니까? 거의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됩니다. 물론 능력과 지혜에 있어서는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지만 거룩과 의와 선과 사랑 등의 영화로운 속성에 있어서는 거의 예수님 수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적으로 영화로운 몸을 입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영광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칭호가 얼마나 굉장하고 대단하고 영광스러운 것이냐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도 뭔가 특출 나서 다른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멋진 칭호를 얻는 것도 귀한 일이고 복된 일이고 영광스러운 일일진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칭호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이 영광스러운 칭호를 가진 우리들은 얼마나 대단한 존재 들이냐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1절을 보십시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보라.’ 너무나 엄청난 일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감탄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얼마나 대단하고 영광스럽고 복된 것인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만 생각하면 감사와 기쁨의 탄성이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칭호를 가지고 있는 자로서 늘 자부심과 긍지 속에 감사와 기쁨과 거룩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은총 풍성하게 누리는 삶이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우리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하나님의 자녀가 된 과정

 

1절을 다시 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컴을 받게 하였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엄청나고 놀랍고 경이로운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그 경이로운 사랑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만해도 엄청난 사랑인데 게다가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까지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냥 일반적인 인간이라도 그런 일을 하면 대단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과 사람과는 그 비중이나 가치가 비교할 수 없이 다릅니다. 물론 사람도 생명을 바쳐 다른 사람을 살린다면 대단한 일이고 칭찬과 상급도 받아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죄와 무지 속에 있고, 어리석고 무모하고 심지어 더럽고 추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숭고한 헌신도 그 가치가 줄어 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물론 그 결과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자신을 희생하여 몇 사람을 살린다해도 숫자적으로 얼마 안될 뿐 아니라 그 영혼을 살릴 수는 없기 때문에 온전한 것이 못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없고 흠없으신 분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그럴 이유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게다가 수적으로도 예수님의 헌신과 희생은 수억명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 사랑과 헌신과 섬김을 우리가 어디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놀랍고 크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사랑을 받은 자인지를 늘 기억하며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하나님의 자녀들의 특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엄청나고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신분을 얻게 되었는지를 말씀하고 나서 2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여기서 그가 나타나시면 그와 같을 줄을 안다는 것은 마지막때에 주님이 오실 때 우리도 변화되어 주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변화되어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직접 보게 됨으로 우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가를 확실히 보게 된다는 것이다.

 

장래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렇게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거룩하신 영광에 참여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주님이 재림하시고, 어떤 모습으로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아가게 될지는 확연하게 우리에게 보여 주시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주님과 같이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그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능력과 지혜와 권세가 주님과 똑같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신령하고 영화로운 몸을 덧입어 주님처럼 거룩하고 영화롭고 선하고 의로운 모습으로, 죽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그 어떤 어둠의 그림자도 없는 빛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엄청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무슨 권세와 능력과 지혜가 이런 특권을 주겠습니까? 우리가 감히 주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 어마어마한 특권이요, 주님처럼 되기 때문에 주님 안에 있는 그 온전하고 영원하고 영화로운 은총들을 충만하게 받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엄청난 사실을 기억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찬양하며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리며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엄청나게 귀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만큼 거기에 어울리는 삶 또한 있어야 합니다.

 

오늘 3~6절의 말씀이 그 말씀인데요, 한번 같이 보겠습니다.“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라는 것은 장차 주님과 같이 되어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서 서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영광을 누릴 소망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자녀는 이 소망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물론 어느 정도 소망거리가 있긴 하지만 그건 별거 아니니까 다른 어떤 것보다 주님을 향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죄는 불법, 즉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결코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 질 수 없다. 그래서 주님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하지 않고, 만약 범죄한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지고 있어야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무엇입니까? 물론 겸손 사랑 자비 긍휼 용서 의 선 지혜 등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겠죠.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입니다. 물론 거룩이란 하나님께 속한 것, 하나님께 받쳐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에서 구별되고 분리되어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되고 분리되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과 방법과 방향과 목적에 부합된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은 그런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왜곡되고 혼돈된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을 버리고, 그래서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목적을 향하여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삶의 의미이고 그러면 세상에서 모든 욕심 욕망 미움 저주 시기 질투 불법 악 폭력을 버리고 그야말로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날 우리가 힘이 없고,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도리어 비난을 받는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돈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를 크게 짓고 시스템을 멋지게 하고 재미있게 유쾌하게 편안하게 해 준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봉사하고 선을 행해도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면 교회는 결코 신뢰성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봉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회가 존재해야 할 목적을 그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봉사하고 섬기는 것에 대하여 뭐 그렇게 칭찬하지 않습니다. 해야할 일을 하는 것 뿐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하게 진실하게 깨끗하게 아름답게 살아가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우선 자신의 심령속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게 되고, 동시에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게 됩니다. 그래서 인정받고 신뢰받게 되고 그러면 복음의 역사도 저절로 일어납니다. 그러면 주님 앞에서 섰을 때 큰 상급도 받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놀랍고 귀한 특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로써 한편으로는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고 동시에 거룩하고 깨끗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삶의 모습으로 주님의 향기를 발함으로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고,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주님과 동행하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큰 상급도 받아 누릴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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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서로 용납하라 Sunday evening Service


제목 : 서로 용납합시다.

말씀 : 골3:12-14

오늘 본문에서도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에 대하여 말씀한다. 한마디로 자비를 베풀고 용납하고 참으며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다. 이 말씀도 말은 쉬울지 몰라도 실천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말씀이다. 나를 사랑해주고, 내 편을 들어주고,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에게는 그런대로 가능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과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이 다르고 더 나아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에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계속해서 훈련하다보면 조금씩 가능해진다. 주님 앞에 엎드려 끊임없이 기도하며, 자신을 낮추면서 무언가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하고 용서하고 받아주고 용납하기를 연습하다보면 조금씩 그런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할 때에 그저 자신을 낮추고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에 좀더 거룩한 삶의 모습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1.사랑과 자비와 긍휼등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

골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사랑과 거룩의 삶을 살아갈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전에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가야할 당위성에 대해서 말씀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사랑을 받은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에 걸맞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의 너무나 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께 너무나 큰 특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우리가 어떤 특혜를 받았는가? 우리가 어떤 신분을 갖게 되었는가? 우리는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그것도 뭐 남들보다 크게 선해서 그런 것도 아니지 않는가? 남들보다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워서 그런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나를 택하셔서 이 특권을 주시지 않았는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기 않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 나가고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의 사랑의 법을 적용시키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얼마나 주의 영광을 나타내고 향기를 발할까? 얼마나 크나큰 은총 속에 살아갈까?

2.구체적 사랑의 모습들

골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긍휼히 여기라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다. 동정하다. 연민을 갖다는 뜻이다. 사실 우리가 이 마음만 가지면 사랑하지 못할 일이 없다.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 결국 모두가 불쌍한 인생이 아닌가? 무지해서, 연약해서, 심각하게 타락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사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과 무지와 어리석음을 아시고 우리를 끊임없이 용서해 주시지 않는가? 오죽하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밖에 없었겠는가? 그러므로 혹 누군가가 잘 사랑해지지가 않고 용서가 잘 안된다면 그의 무지와 죄와 어리석음과 죄로 오염된 마음의 상태를 생각해보고, 동시에 내가 어떻게 주님의 은혜가운데 살고 있는지 되새기며 어찌 하든지 긍휼히 여기고 그래서 용서하고 그래서 함께 주의 은총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자.

2)자비를 베풀라

자비란 선함, 친절함, 우호적임, 온화함 등을 말하는 것으로 긍휼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고 연민을 가지면 자비를 베풀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주님의 자녀가 되었은즉 최대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왜? 불쌍한 영혼이니까. 왜 나도 하나님의 자비로 용서받고 주의 은총가운데 살고 있으니까?

눅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3)겸손하라.

겸손은 말 그대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자신을 낮추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갈등도 일어나지 않는다. 누구라도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하지 못하고, 싸우고 대접받으려고 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교만에서 나온다.

자신을 낮춘다면 사랑하고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지 못할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주님 앞에 설 때에 나 자신이 흉악한 죄인이요, 벌레만도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면 내가 뭘 그렇게 잘 났다고 남을 업신여기고, 용서하지 못하고, 허물을 받아주지 못하겠는가?

벧전5:5(하),6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4)온유하라.

온화하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것을 말한다. 물론 사람마다 성격이 있고, 기질이 있지만 우리는 자신을 깨트리고 부서트려서 부드러워져야 한다. 부드럽지 못한 것은 아직도 내 자아가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물론 온유하라고 해서 죄와 추함과 더러움 마져도 적당히 받아 주라는 의미는 아니다. 흔히 하는 말 맞다나 사람은 미워하지 않되 죄는 미워해야 한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 탄 듯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라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도 계속해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도 화를 내기도 하셨다. 어려운 이야기지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부드럽게 상냥하게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교회에서도 좀더 친절하자. 상냥하자.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오래 참으라.

앞서 말씀드렸던 일들은 인내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다. 긍휼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고 겸손하고 온유하다고 해서 세상이 금방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진심을 금방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그런 점을 이용해 먹으려고도 한다. 뭔가 나만 손해보고 나만 바보 되는 것 같을 때도 많다.

그러다보면 그만 나도 모르게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온유를 지키지 못하고 화를 내거나 같이 대적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열 번 잘하다가 한번 잘못하여 앞에 잘한 것까지 말짱 도루묵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정말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도 내 맘대로 잘 안된다. 기도해야 한다. 엎드려야 한다. 깨져야 한다. 훈련해야 한다.

눅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6)용서하라.

골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여기서 불만의 원어적인 뜻은 비난, 허물, 책망을 의미하는 말로 서로 상대방의 허물이나 자신에게 잘못하는 일을 가지고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즉 싫은 사람, 미워하는 사람, 나를 비난하는 사람도 받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참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도 사랑하고 그 요구를 다 받아주기 힘든데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은 얼마나 더 힘들겠는가?

그러나 이것도 주님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가능해 진다. 주님이 나를 받아 주신 것을 생각하면, 주님이 나 같은 것을 위해서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을 생각하면, 주님이 영원한 형벌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어찌 불가능하기만 하겠는가? 일만달란트 빚진 것을 탕감받은 사람이 일백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주지 않고 그걸 가지고 물고 늘어지고 비난하고 욕하고 원수같이 생각한다면 얼마나 어불성설인가?

마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7)이 모든 것위에 사랑을 더하라.

골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여기서 온전하게 매는 띠란 옷을 입고 모든 옷을 정리해주는 역할을 하는 띠를 말한다. 즉 사랑이 앞서 말했던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 등을 하나로 묶어서 온전하게 해 주는 띠와 같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랑만 있으면 앞에서 언급된 모든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마치 자녀가 온전치 못하고 타인에게는 욕을 먹을망정 부모는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솔직히 그 사랑이라는 것도 마음은 그렇게 하고 싶지만 행동으로 잘 안될 때가 많다. 그야말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할 때가 너무 많은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변명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저 다른 방법이 없다. 은혜받아야 한다. 능력 받아야 한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내 자아가 깨져야 한다. 생각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고 목적이 바뀌어야 한다. 물론 그래도 온전치는 못하겠지만 그렇게 할 때 그나마 조금 주님의 사랑의 모습을 닮아서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고 용납하며 사랑하며 살아 갈 수 있다. 그럴 때 나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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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기도하라

말씀 : 히13:18,19

1.기도의 중요성

1)사도 바울의 기도에 대한 태도

히브리서의 마지막 부분. 본론적인 말씀을 모두 마치고 이제 남은 부분은 성도들에게 부탁의 말씀과 축복. 그중에 오늘은 부탁의 말씀. 그 부탁은 무엇인가? 기도해 달라는 것.

히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우리를 위해 기도하라. 바울은 다른 서신서에서도 자신이 기도할 뿐 아니라 기도할 것을 강조하며 동시에 계속 기도를 부탁.

①바울 자신이 기도함

[행16:13]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행16:25]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빌1:9]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②기도할 것을 강조함

[롬12:12]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엡6:18]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골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살전5:17]쉬지 말고 기도하라

③기도를 요청함

[고후1: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골4:3]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살전5:25]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히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2)예수님도 기도하시고 기도를 명령하심

①예수님이 기도하심

[막1:35]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마14:23]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눅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②예수님이 기도를 명하심

[마6: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26:41]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눅18:1]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③예수님이 기도를 가르쳐 주심

주기도(마6:9~1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기도가 얼마나 중요하면 예수님이 직접 기도하시고 기도를 명하시며 기도를 가르쳐 주셨겠나? 그러니 얼마나 기도해야 하겠나?

2.기도의 의미

1)기도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것

내가 똑똑하다고 여기면 기도할 필요 없다. 그러나 나는 정말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을 긍정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신앙의 행위.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바른 신앙생활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눅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2)기도는 영혼의 호흡.

육체는 육체적 양식과 호흡, 마음에는 마음의 양식과 호흡, 영혼에는 영혼의 양식과 호흡이 있어야. 말씀을 통해 생명의 양식을 먹고, 기도로 영적인 신선한 공기를 계속 공급해 주어야.

세상은 영적으로 너무나 오염된 공기. 불신, 불만, 시기, 원망, 이기심, 욕심, 살인, 더러움, 증오, 간음, 도적질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 그래서 영혼이 죽어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기도함으로 영적 신선하고 깨끗한 공기를 마셔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영혼이 치유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3)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과의 교제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그 영광과 은혜를 나누어주시기를 바라신다. 그러한 교제의 수단이 말씀과 기도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부르셔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일단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많은 경우 기도하면 하나님께 자신의 요구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듣기부터 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행9:4)

그런 다음에 우리는 비로소 말해야 한다. 세상에서도 먼저 어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아랫사람이 말하는 것이 예의. 말을 할 때도 예의를 갖추어서 해야. 자신의 필요만을 다짜고짜 말해서는 예의가 아니다. 먼저 영광과 찬양을 돌리고 감사하고 자신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고 그리고 나서 자신의 필요를 아뢰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해 늘 하나님과 올바르게 의사소통을 하자. 대화가 단절되면 서로간의 관계도 단절되는 것이다.

4)기도는 문제해결의 열쇠.

그렇다고 기도가 내 뜻을 이루는 도구라는 것은 아니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능력과 지혜를 주셔서 해결하시고 때로는 직접 개입하셔서 해결 하신다.

렘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여기서 ‘비밀한 일’은 것은 원어로는 ‘숨겨진 일, 단절된 일, 도달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의미. 우리 지혜로는 도무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알게 됨으로 문제가 해결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일들이 많다. 하나님께 관한 모든 것도 우리 지혜로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알려주시고 감동감화를 주시지 않으면 주님도 알 수 없다. 주님을 영접한 후에도 우리의 지혜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해서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일들이 많다. 그러므로 더욱 말씀묵상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나마 주님이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깨닫게 하셔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상황과 환경을 변화시키기도 하신다. 때로는 도리어 나를 변화시켜 해결하게도 하신다. 때로는 기적을 통해서도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도 하신다. 예수께서도 많은 기적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도 하셨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진실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기도할 때에 분명히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말씀 묵상과 기도생활에 힘씀으로 주님의 능력과 인도하심과 지혜로 문제를 해결하고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자.

5)성도의 향기이다.

계8: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즉 기도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향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기도가 향기인가?

일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성막 안에 있는 지성소 법궤 앞에서 항상 향을 피워 제사를 드렸다. 제사는 짐승을 잡아 태움으로 죄를 태우며 헌신하겠다는 의미. 동시에 그 향기를 하나님께서 흠향하신다는 것은 그 제사 드리는 자의 마음을 받아 주신다는 의미이기도.

마찬가지로 기도란 물론 하나님과의 대화를 의미하지만 자신의 죄와 무지와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찾아 아뢰며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향기가 되는 것이다.

②성도의 인격의 아름다운 향기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 자기 부정. 자기 죄를 고백하고 선과 의와 진리 가운데 살기를 다짐. 남을 욕하고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기를 구하게 된다.

그래서 점점 성화되어 감. 그래서 진정으로 기도하는 마음에는 불만과 시기와 적개심과 원망과 미움이 자리 잡지 못하게 된다. 가정과 이웃과 사회 속에서 화평과 사랑과 정의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그래서 결국 향기를 발하는 성도가 되는 것이다.

3.기도의 내용

물론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이웃과 이 나라에 영적, 물질적, 정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자신과 우리 모두가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살기를 기도해야. 그 중에 오늘 말씀에 나타난 기도의 내용.

1)선한 역사를 위하여

히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모든 일’은 물론 복음을 전하는 일, 교회를 섬기는 일, 성도를 믿음 위에 세우는 일, 감사와 기쁨과 은혜 속에 살게 하는 일. 이런 일들을 행함에 있어서 어떤 사심이나 명예욕이나 권력욕이나 물욕 없이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여,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했다는 것. 그러므로 너희들도 이 일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해달라는 것.

즉 내 욕망이나 세상에서의 필요나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살게 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그게 가장 귀한 일이고, 우리 모두에게 결국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복을 가져다 주는 일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귀한 것보다 먼저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2)현실의 문제들

기도의 첫 번째 제목은 선한 역사를 위하여,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러나 그렇다고 현실적인 문제를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는 뜻은 아님. 현실적인 문제도 하나님의 일보다 중요하지 않지만 그래도 중요한 문제. 그래서 주님이나 바울도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할 것을 요청.

오늘 히13:19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너희가 기도하기를 더욱 원하노라. 내가 될 수 있는 한 빨리 너희에게 갈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 무슨 문제이지만 모르지만 그들에게 속히 가기를 원했지만 갈 수 없는 상황. 그래서 속히 갈 수 있도록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고 있는 것.

예수님께서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시면서 그러나 마6:11절에서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먼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한 다음에 현실적으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문제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그러나 그것도 자신의 욕심과 영광과 안일함과 부귀영화를 위해 구하지 말아야. 부귀영화를 위해서도 물론 기도해야 되지만 자기 혼자 영광을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구해야.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우리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광을 누리게 됨.

그러므로 더욱 기도생활에 힘쓰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한 역사를 위하여, 성도들이 믿음 소망 사랑위에 든든히 서도록, 물질적로 넉넉하고 육체적으로 강건할 수 있기를 기도하자.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고 교회도 더욱 든든히 서가고 우리도 더욱 영육 간에 큰 기쁨과 은혜와 감사와 능력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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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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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예배설교] 떳떳한 인생(요일3:18-22) Sunday evening Service

제목 : 떳떳한 삶을 위하여

말씀 : 요일3:18~22

 

법이 왜 필요할까? 그밖에 무언가 인간의 삶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것 같은 질서나 규범이나 관례나 이런 것들은 왜 필요할까? 물론 그런 것들은 결코 인간의 삶을 규제하고 통제하고 자유를 제한하고 불편하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런 것들은 인간의 삶을 평안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고,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들이다.

물론 애당초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굳이 그런 규제를 두지 않아도 자기 이성과 영으로 자신을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다면 그런 것들은 필요치 않다. 아니 사실은 만약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면 구태여 스스로를 통제하고 제어할 이유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영성과 지성과 감성과 이성이 우리가 굳이 애쓰지 않아도 진리와 선과 의를 따라 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그렇지를 못하다. 우리 모두가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올바른 분별력이 없다. 때로는 분별을 하면서 그 분별한 선과 의를 따라 살아갈 능력이 없다. 그래서 법과 규범과 질서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법과 규례와 질서를 따라 살아갈 때에 우리는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세상에서 최대한의 평안과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두말할나위도 없다. 모든 인생이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어떻게 죄와 무지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받아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지 알지 못함으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 자신과 인간과 세상과 영원한 나라에 대하여 계시해 주신 말씀이 성경인 것이다. 그래서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갈때에 우리가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과 진리 안에서 평안과 기쁨과 자유를 누리려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물론 완전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주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따라 살아갈 때에 우선은 자신이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그래서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빛을 비춤으로 저들을 주님 품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때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요, 또한 그럴 때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1.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때 진리에 속한 자임이 나타남

요일3:18,19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우리가 정말로 사랑의 예수님, 구원의 예수님을 심령에 모시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음과 말로만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마음이 있다면 행위도 따른다. 물론 정말 마음은 원인데 여건과 상황이 안돼서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긴 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행동하지 않는 것은 사실은 마음에 별로 없다는 뜻이다. 마음이 있으면 서울이고 부산이고 단숨에 달려가지만 마음에 없으면 안강이라도 안 달려간다.

그래서 마6:21절에서는 예수님께서도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고, 약2장에서는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하셨다. 당연하지 않나?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면서 실제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말로만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계속 말만 하면 위선이 된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연약해서, 혹은 상황과 여건이 안돼서 못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마음이 없는 것이다. 뭐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그 마음에 있다는 것도 결국 자기 방어와 변명을 위한 수단에 불과할 수 있다.

안 그런가? 정말로 사랑하고 자신이 필요하다고 여기면 결국은 한다. 주님을 위한 일도 그렇다. 주님을 위해 드릴 물질도 시간도 없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위한 것이나 자녀를 위한 것은 한다. 이웃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시간과 물질이 없고 여건이 안된다고 하지만 자녀를 위해서는 한다. 물론 다는 못하겠지만 주님을 위해서나 이웃을 위해서는 못하는 일도 자녀를 위해서는 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이렇게 믿음이나 사랑이 행위로 나타날 때에 우리가 주님의 자녀인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즉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진리에 속한 자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논리. 하나님께 속하였으면 하나님께 속한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께 속한 자가 마귀에게 속한 불법과 거짓과 악과 더러움 속에 살면 안 되지 않는가? 빛 가운데 왔는데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산다면 어떻게 빛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을 받았는데 여전히 더러운 모습으로 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요8:12절을 보라.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한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빛이신데 그 예수님을 따르면서 어둠 속으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예수님이 빛이시니까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오면 그 빛을 받아 당연히 빛의 은혜를 누려야 되지 않는가? 그래서 엡5:8,9절에서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빛과 진리와 생명과 의와 선과 사랑이신 예수님께로 나온 자로써 온전히 예수님을 따름으로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서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가자. 다만 따라 가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속에서 사랑과 의와 선을 실천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을 살아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2.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때 굳세게 됨

요일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주 앞에서 굳세게 한다는 것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행할 때에 마음에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침으로 더욱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모든 불안이나 두려움이나 상황이나 환경이나 사람에 의하여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 등의 어둠에 속한 것들을 물리치고 빛과 같은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 우리가 진실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선을 따르고 사랑하며 살아갈 때에 우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동시에 나도 평안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담대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주님의 능력도 덧입지 못하고, 그래서 마음에 기쁨이 없고, 스스로 위축되고, 당당하지 못하고, 불안하고, 부끄럽고 그래서 결국 능력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 또한 이렇게 주님의 능력을 덧입지 못하면 결국 마귀에게 끌려 다니는 형국이 됨으로 더더욱 빛의 은혜를 누리기 못하고 어둠의 세력들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신앙적으로만 아니라 윤리적 도덕적으로도 그렇다. 깨끗하고 선하고 의롭고 아름답고 진실하게 살아가면 당당하다. 마음이 뿌듯하고 자존감이 있고 자랑스럽다. 그러나 죄와 향락과 불법과 불의에 빠지면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다. 숨으려고 한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범죄는 주로 어두운 곳에 이루어진다. 물리적으로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의미적으로도 숨겨진 곳, 은밀한 곳, 사람들의 이목이 없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선하고 자랑스럽고 당당한 일이라면 왜 숨어서 하겠는가? 일부러 나보란 듯이 하지... 그래서 잠28:1절에서는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선과 진리를 따르되 행함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혜와 능력을 주신다. 평안과 가쁨과 위로와 소망을 주신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당당하게 된다. 얼굴이 밝아진다. 그러나 죄가운데 있거나 하나님 앞에 뭔가 떳떳하지 못할 때는 얼굴에 생기가 없어진다. 뭔가 그늘진 모습이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서, 특별히 사랑의 도를 따라서 그런 말씀들을 실천해 나아갈 때에 정말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자부심을 가지고 생기있게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3.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용서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요일3: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우리가 나름대로 열심히 의롭게 살아가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약하고 미련하고 부족하다. 그래서 실족할 때도 많다. 그러나 정말 믿음 안에서 선과 진리를 따라서,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기를 힘쓰는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의기소침하고 위축될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희망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과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것을 핑계로 최선을 다해 힘쓰지 않는다면 그건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을 이용해 먹는 것과 같다. 정말 마음에 원이면 원하는 것을 향해 힘써 가야하고 그러다가 넘어지고 실족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별로 힘쓰지도 않는다는 것은 실상은 마음에도 그다지 없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은 원이로된 육신이 약하다는 핑계로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하지 말고 열심히 사랑하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자. 그래도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문제들은 주님께 맡기고, 그저 하나님앞에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역사 감당하며 생기 넘치는 삶을 살아가자.

4.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때에 구하는 바를 얻게 됨

요일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 그대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때에 기도 응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 계명을 지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연한 말씀이 아닌가? 앞의 2:2절에서는 계명을 지키면 그를 아는 줄 알 것이라고 하셨다. 2:5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 안에 있는 줄 알리라고 하셨다. 2:10절에서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있는 자라고 하였다. 2:29절에서는 의를 행하는 자라야 그에게서 난 줄 알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겠는가? 선을 행하며, 사랑을 실천하며 주님의 뜻을 향하여 갈 때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면 흡족한 마음으로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이다. 그리고 또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은 기도라고 해서 맨날 달라는 기도만 드리지도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를 기도한다. 그러니 응답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말과 혀로만하고 하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이니 어떻게 기도응답을 기대하겠는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정말 주의 율례와 법도를 따르자. 주님의 말씀은 결코 우리를 힘들고 부자유스럽고 어렵고 번거롭고 통제하고 제한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자유와 평안을 주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자. 물론 그래도 안되는 것이 있을지라도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용서해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힘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며 의기소침하지 말고 주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속에서 당당하고 생기가 넘치고 능력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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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주님을 통해서 봅시다Sunday evening Service
말씀 : 막8:22~26

제목 : 주님을 통해서 봅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이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세 가지 영역의 세계를 모두 볼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는 물질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을 가지고 산이나 바다나 땅이나 사람이나 기타의 모든 물질세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 인간은 지적, 정신적 눈을 가지고 정신적이고 지적인 세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눈을 가지고 있기에 도덕적 가치를 분별하며, 철학적 사고를 하고, 음악이나 미술 등의 예술 활동을 하는가 하면 과학이나 수학 등의 지적인 활동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인간은 영적인 눈으로 신령한 세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정의는 물론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에 이 영적인 눈으로 신령한 세계를 보고, 하나님의 세계를 보며,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반드시 보아야 할 이러한 세 영역의 세계를 모두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세가지 영역의 세계를 보되 바르게 그리고 밝게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이 올바르고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벳새다 지방의 맹인을 고쳐주시는 과정에서 이 맹인에게 육적인 눈과 아울러 영적인 눈도 밝게 해 주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벳새다의 맹인의 고쳐주시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가 생각할 것은 무엇입니까?

1.주님의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주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는데 그 방법이나 과정은 매우 다양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맹인을 고쳐주신 기사도 여러 번 나타나는데 그들을 고쳐주신 방법도 다양했습니다.

먼저 오늘 23절에서는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 말씀에서는 맹인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셔서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마9:27~31절에서도 맹인을 고쳐주신 기사가 나오는데 거기서는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눈이 밝아졌습니다.

마가복음10:46~52에는 바디매오라는 맹인을 고쳐주셨는데 거기서 예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시자 눈이 떠졌습니다. 즉 여기서는 오직 말씀으로만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9:1~7을 보면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에게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자 그가 그대로 하자 눈이 떠졌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침으로 이긴 진흙을 눈에 바르고 나서 어떤 행동을 요구하셨고 그 요구에 순종할 때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같은 맹인을 고쳐주시는데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주님은 사람이나 환경이나 물질이나 그 어떠한 것의 제한도 받지 않으시고 당신의 주권에 의하여 자유롭게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시고 때로는 무조건 고쳐주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인간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주님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능력을 마치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자신이 원하면 자신이 원하는 방법대로 주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위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오류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지와 교만의 소치입니다. 주님은 결코 내 생각대로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내가 원하는 시간에 얽매어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주님의 역사하심을 맛보기를 원한다면 다만 주님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방법대로 주님의 때에 주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을 간구하며 기대하며 주님께 맡기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2.주님께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어떤 방법을 취하시고 무엇을 요구하시든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23절 다시 봅니다.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이 치유의 과정에서 우리는 우선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그를 동네 밖으로 데리고 가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의 눈에 침을 뱉고 안수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치유과정에 대해서도 우리는 자칫하면 회의 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부러 동네 밖으로 데리고 가신 것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굳이 사람들이 없는 동네 밖으로 데리고 가실 이유가 없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아니 도리어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서 고쳐 주시면 얼마나 주님의 인기가 높아지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굳이 그를 동네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26절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는데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단지 병이나 고쳐주는 분인 줄 알고 병이나 고침받기 위하여 따라다니는 것을 우려해서 였을 것입니다.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 때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해도 주님께서 뭔가를 요구하시거나 뭔가를 행하실 때에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무조건 주님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생각해 볼 장면은 주님께서 그를 데리고 나가서 그의 눈에 침을 뱉고 나서 안수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만약 누군가 우리 얼굴에 침을 뱉는다면 어떻겠습니까? 극심한 모멸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눈에 침을 뱉는 것은 전혀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아니 기왕 고쳐 줄 것이면 좀 고상한 방법으로 하시지 왜 하필이면 침을 뱉아 고쳐주시느냐고 불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 그랬지 않았습니까?(왕하5장) 그는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 갔을 때 무슨 대대적인 종교의식을 통하여 고쳐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사선지자가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 하니까 모멸감을 느끼며 제깐 놈이 뭔데 나와 보지도 않고 그 잘난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 하느냐, 그까짓 요단강에서 씻으려면 차라리 그보다 몇배 더 크고 아름다운 우리 아람의 아바나와 바르발 강에서 씻겠다고 하면서 화를 내며 돌아가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이 맹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하시든지, 그것이 이성적으로 수용이 되든 안되든, 침을 바르든, 물을 바르든, 진흙을 바르든, 심지어 똥을 바르든 주님의 방법에 순응하고 수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순순히 주님을 따라 나서야 합니다. 내 의사와 내 이성의 생각과는 별개로 주님께서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든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때 결국 주님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3.주님을 통해서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일단 침을 바르고 안수하신 다음에 무엇이 보이느냐고 질문을 던지자 맹인이 대답합니다.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막8:24) 그러니까 아직 제대로 못보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는 들이었기 때문에 나무들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나무가 많이 서있는 것을 보고 사람 같기도 하고 나무 같기도 해서 마치 나무들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다시 안수를 하시자 그가 말합니다.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막8:25)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데 안수를 두 번 하신 것입니다. 23절에서 안수하고 25절에서 다시 안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한번 안수로 병을 못고치시나요? 아니 안수하지 않으면 못고치나요? 아니죠. 말씀만으로도 고치시죠. 그런데 왜 굳이 침을 뱉고 두 번씩이나 안수를 하셨을까요? 일단은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어떻게 하시든지 순종하라는 의미가 있고 다른 하나는 이 맹인이 믿음이 부족해서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주님을 믿고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시 안수를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안수는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 또는 영력이 주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손을 얹고 기도한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안수를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믿는 마음으로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하며 행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으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안수를 두 번하셨다는 것은 물론 안수를 받는 자의 태도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안수를 하셨는데 그러자 이 사람이 주목하여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처음에는 주목하여 보지 않아서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 같은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눈이 안떠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안수하니까 주목하여 보게 되었고 그러자 온전히 보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하여 보았다는 문자적인 뜻은 ‘~을 통하여 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의역을 해서 주목하여 즉 열중하여 보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원뜻은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을 보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마음으로 보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고쳐주실 것을 믿고 확신하는 마음으로 있는 힘을 다하려 세상을 보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이 보였고 세상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주님을 통해서 세상을 바르게 보기 위한 열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고 귀를 열어 주심으로 주님과 천국과 세상을 밝게 바르게 볼 수 있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이 바르게 보입니다. 목적과 방향과 목표가 확실히 보이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자신을 보고 물질계를 보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면 그 모든 것이 바르게 정확하게 확실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로소 정말 올바르고 정확한 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영역의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맹인은 오직 주님을 통하여 세상을 보면서 모든 어둠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벳새다 맹인은 고쳐주시는 과정을 다시한번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언제 어떻게 역사하실지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엎드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역사하시든 그대로 믿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물질을 보고, 경제를 보고, 정치를 보고, 소망을 보고, 영광의 나라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밝고 바르고 정확한 눈으로 모든 물질계를 보고, 지적이고도 정신적인 세계를 보며,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르게 확실하게 보면서 살아가실 때에 더욱 온전한 생의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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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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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오후설교] Sunday Night Service

제목 :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삶

말씀 : 벧전1:18~21

 

뉴욕의 한 교회에서 아주 오래전 있었던 일입니다. 한 할머니가 예배가 끝내 갈 즈음에 손을 들더니 말했습니다. ‘목사님 죄송하지만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강단에 나가서 간증 좀 하게 해 주세요.’ 할머니의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목사님이 허락을 하자 할머니가 앞으로 나가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1860년 9월 19일, 이 교회 바로 옆에 있는 한 노예시장에서 노예로 팔려가기 위하여 다른 여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서 있었습니다. 이윽고 노예를 사려는 사람들이 모이자 우리를 팔아넘기기 위하여 경매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나는 어디로 팔려갈까, 내가 팔려 갈 집 주인들은 좋은 사람일까, 나를 학대하고 나를 짐승처럼 대하는 아닐까, 과연 내 운명은 어떻게 될까’하면서 불안과 초조 속에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이 교회에서 사람들이 예배를 마치고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한 점잖은 신사분이 오시더니 나를 800불을 주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분은 나를 해방시켜주며 이제는 당신은 자유인이 되었으니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분은 이 교회의 목사님이셨는데 그 날 예배시간에 우리가 지금은 노예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지만 이번 주일날 한 사람의 노예라도 해방시켜주자고 의논이 되어 노예 한 사람을 사게 되었는데 거기서 바로 내가 선택되었던 것입니다.

그 날 이 후로 나는 그 날의 감격과 기쁨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약 70년전의 일이지만 그날의 상황들이 지금까지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이 교회도 너무나 감사하고 도무지 이 은혜를 잊을 수가 없어서 한 평생 이 교회를 섬기고 기도하며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쳐 나름대로 섬겨왔습니다.

이제 저는 얼마 안 있으면 하나님께로 갈 것입니다. 저는 너무나 미천한 사람이지만 이제 제가 하나님 품으로 가기 전에 여러분에게 꼭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이렇게 노예에서 해방되어 그 은혜를 도무지 잊을 수가 없어서 한평생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나를 해방시켜 준 이 교회에 감사함으로 섬겼던 것처럼,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고 다 죄와 사탄의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들이니까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잊지 말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섬기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이 정말 아름답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너무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구속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의 노예로 있다가 해방되는 것도 이와 같이 감격스럽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고 평생 잊을 수 없고,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은혜일진대 죄와 사탄과 지옥의 노예에서 건짐 받은 이 은혜는 얼마나 감사하고 영광 돌려야 하고 찬양하고 얼마나 감사와 기쁨으로 섬겨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여기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속 받았는지, 구속함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정말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총의 그 놀랍고 크고 영광스럽고 고귀함을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1.세상의 헛된 것으로부터 대속 받음

벧전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 받았다. ‘헛된’이라는 말은 ‘공허한, 헛된, 효과 없는, 쓸데없는, 무가치한, 무익한’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헛된 행실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상숭배를 비롯한 세상의 헛된 사상이나 종교나 철학이나 물질 등의 죄와 무지 속에서 세상의 사상과 가치관과 종교를 따라 행하던 모든 행실들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헛되고 무익하고 쓸데없고 무가치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사상과 가치가 완전히 무가치하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상까지도 100% 무가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비록 온전치는 못하나마 조금이라도 위안을 주거나 희망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헛된 것입니다. 혹시 그것을 통하여 무언가 약간의 유익을 얻는다해도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모독하고 나아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음으로 인간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몰아가는 악한 행위에 불과한 것인 것입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그런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상과 자신과 육신의 욕망과 돈과 명예와 사람 등의 헛된 것을 섬기며 그걸 인생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죄와 사망과 지옥의 노예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감사하고 다행스럽고 영광을 돌릴 일입니까? 사람의 노예에서 해방된 것도 평생 감격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은혜를 잊지 않고 은혜에 보답하며 살아야 할 텐데 하물며 마귀에게서 해방되고 영원한 지옥에서 구속되어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된 이 은혜를 어찌 다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사람의 노예 생활하는 것도 두렵고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일일진대 마귀사탄의 종노릇하다가 지옥에 가는 것은 얼마나 더 끔찍스러운 일인지를 기억하며 거기서 해방되어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된 것이 정말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지를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감격과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렇게 놀라운 은혜를 입었으니 평생 이 은혜를 잊지 말고 다시는 세상의 것에 종노릇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감사와 감격과 기쁨과 은혜가운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주님과 동행할 때에 진정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자들로써 진정 거룩하고 아름답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2.우리의 대속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된 것임.

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우리가 과거의 모든 헛된 것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는데 그것은 금이나 은과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도 아니고, 지식이나 과학으로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순한 인간이나 성인군자나 선지자나 능력자가 아니라 본래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전부터 하나님께 함께 계셨던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물론 우선은 예수님은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온전히 영광스럽고 거룩하고 깨끗하고 정결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아들로써 온전히 영광스럽고 거룩하시고 성결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렇게 고귀하신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구원의 은총을 입은 우리도 너무나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구속 혹은 대속이 뭡니까? 한마디로 값을 지불하고 처벌을 면제받아 구원받게 된 것을 말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노예로 팔린 사람을 돈을 주고 사서 풀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구속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그 고귀한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죄의 삯을 지불하시고 죄와 마귀사탄과 지옥의 노예에서 구원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어마어마한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사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존귀한 존재입니까? 여러분, 세상에서 한 1,000억을 주고 산 물건이라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얼마나 애지중지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천억 1조 100조가 아닙니다. 온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대속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엄청난 존재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아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은 물론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일도 이보다 기쁘고 감사하고 감격스럽고 복되고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에 이 보다 귀하고 영광스럽고 복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평생을 감사와 기쁨과 감격과 은혜 속에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우리가 고귀한 존재인지 안다면 우리는 정말 고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몸값을 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귀한 존재이니까 귀하게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귀한 몸을 함부로 굴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왕자와 거지와 어울려 거지와 같은 삶을 살아 갈수는 없지 않습니까? 몇천만원짜리 옷을 입고 똥통에서 놀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헛된 것들과 모든 죄와 마귀 사탄으로부터 너무나 귀하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그 보배로운 피로 대속함을 받은 너무나 엄청난 은혜를 입은 사람들, 너무나 고귀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한편으로는 정말 감사하고 기뻐하고 영광을 돌리며 다른 한편으로는 거룩하고 진실하고 아름답고 고귀하게 살아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히 여김을 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벧전1: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그래서 영광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 우리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우리 믿음의 대상도 하나님이시다. 우리 소망의 대상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온전히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과거에는 세상의 헛된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거기에 생명과 생명의 기쁨이 있는 양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속고 있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죄와 무지의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와 사탄의 권세에 있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과거의 헛된 것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알았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 안에 얼마나 영광스러운 나라가 있는 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선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또한 이렇게 고귀한 존재이니까 고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더 이상 땅의 것을 좇아 사는 인생이 아니라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과거에는 몰라서 세상의 것을, 헛된 것을 좇아 살았는데 이제는 그걸 알았으니까요. 얼마나 죄와 무지가운데 있었는지 알게 되었으니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얼마나 엄청난 은혜와 기쁨과 영광과 은혜가 있는 줄 알았으니까요. 그러니 그걸 안다면 왜 세상의 헛된 것을 바라보며 살겠습니까? 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정말 우리가 얼마나 고귀한 인생인지를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금보다 천하보다 세상 모든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은총으로 죄와 사탄의 노예에서 벗어나 주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그 영광과 존귀와 거룩하고 기쁨과 은혜에 참여하게 된 자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한편으로는 감사하고 감격하고 기뻐 찬양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놀라운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여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이 놀라운 신분에 걸맞게 거룩하게 아름답게 존귀하게 살아가며 또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갈 때에 주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나라 이루어가며 주님의 은총 풍성하게 누리는 복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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