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설교] 시험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 Dawn Prayer Meeting Sermon)

시험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야고보서 1:1~18

 

시험을 쳐보면 학생들의 실력이 나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실력도 없으면서 잘난 척하는 아이들이 있는데 시험을 치면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미국한인교회에 영문과 나온 부목사님이 계시는데, 영어를 좀 하는 척해서 미국인 손님이 왔을 때 통역을 하라고 불렀더니, "저는 영문도 모르고 영문과를 나왔습니다."하며 도망을 가더랍니다. 영문도 모르고 영문과를 나왔으니 영어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분의 영어 실력이 들통 난 것입니다.
   캐나다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 한분이 영어를 좀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분 교회가 교회당이 없어 캐나다의 한 교회를 빌려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자기 교회 주최로 그 지역의 노인들을 모셔서 행사를 하는데, 목사님이 개회 예배 설교를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설교 준비를 해서 교회로 가니, 캐나다 목사님이 뜰에 계셨습니다. 서로 가깝게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캐나다 목사님께 성경봉독만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되었는지 예배시간에 캐나다 목사님이 나와서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이제 한국 목사님이 설교 통역을 해야 했습니다. 영어를 잘한다 해도 설교 통역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 목사님의 수준이 설교 통역을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습니까? 할 수 없이 통역을 하는데, 어떤 말씀은 들리고 어떤 말씀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주님, 이러면 어떻게 합니까?' 하는데, '네가 설교 준비한 대로 해라.' 하는 깨달음이 오더랍니다. 그래서 캐나다 목사님은 영어로 자기 설교를 하고, 한국 목사님은 목사님대로 자신이 준비한 설교를 했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 앞이라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우리 교민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의 재미난 이야기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래도 우리가 미국 시민인데 이래서야 되겠나? 이제 우리 서로 영어로만 말하자.”라고 했습니다. 하루는 할머니가 밖에서 "딩동!"하고 벨을 울렸습니다. 안에 있던 할아버지가 물었습니다. "who(후)꼬?" "me(미)랑께." 그 목사님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영어를 잘 모르고, 또 통역은 실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배짱으로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이 준비해 온 설교를 그냥 했습니다. 박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아멘! 아멘!” 하고 응답했습니다. 그렇게 예배를 마치고 내려가니, 노인들이 “목사님이 그렇게 영어를 잘 하시는지 몰랐습니다.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난처하기도 했지만, 노인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고 영어를 잘한다고 하니 그래도 기분이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가니, 이것을 어떻게 합니까? 서울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 후 캐나다에 유학 중인 학생이 떡 서 있는 것이 아닙니까? 목사님이 “어! 자네가 웬일이야?”라고 물었더니 유학생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왔다가 뒤에서 목사님 설교를 다 들었습니다. 목사님, 용기 있으시던데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얼굴이 고추잠자리가 되었답니다.
   우리의 신앙이 좋은가 나쁜가는 평상시에는 잘 모르지만 시험을 당해보면 금방 들어납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은 큰 시험이 와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신앙이 좋지 않은 사람은 작은 시험에도 흔들리고 넘어집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언제나 시험이 있습니다. 어린아이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시험이 있는 것처럼 청년의 신앙이나 아비의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도 시험이 있습니다. 직분이 없는 사람에게도 시험이 있고 직분을 가진 사람에게도 시험이 있습니다. 시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차이는 시험을 이기느냐 시험에 드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본문 2절에 보면 믿음의 형제들이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여러 가지 시험이란 크게 3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테스트와 유혹과 시련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한 테스트도 시험이고, 사단이 믿는 자들을 타락시키기 위한 유혹도 시험입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로 인해서 겪게 되는 시련도 시험입니다.
   시험에 드느냐 시험에 들지 않느냐는 개인의 신앙의 척도에 따라서 다릅니다. 같은 일을 당해도 시험에 드는 사람이 있고 시험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신앙을 가진 사람과 영적으로 약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시험에 잘 들고 잘 넘어집니다. 장성한 신앙을 가진 사람과 영적으로 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시험을 잘 견디고 잘 넘어지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 노는 것을 보세요. 평상시 잘 넘어집니다. 걸어가다가도 잘 넘어지고, 달려가다가도 잘 넘어집니다. 넘어져도 일어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어른들은 잘 넘어지지 않습니다. 어쩌다 넘어져도 바로 일어섭니다.
   어린아이 신앙과 약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시험에 잘 듭니다. 남들은 잘 이겨내는 것도 시험거리가 됩니다. 그리고 넘어져서는 잘 일어나질 못합니다. 전에 어떤 분은 교회에서 아이들이 떠든다고 시험에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떠드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게 시험거리라면 그분이 이겨낼 시험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장성한 신앙, 단단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시험에 잘 들질 않습니다. 신앙이 잘 넘어지지 않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군대 생활할 때 열심히 전도했답니다. 훈련소 시절, 비가 와서 야외 훈련을 받지 못하게 되어 여섯 중대가 한 자리에 모여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면 그 분이 앞에 나가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같은 내무반의 한 훈련병이 목사님을 많이 핍박했습니다. 한 번은 방독면을 쓰지 않고 가스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훈련을 받았는데 그때 그 사람이 죽을 뻔했습니다. 그날 그 사람이 목사님에게 달려와서 눈물을 흘리며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원래는 자기도 교인이었는데 자기를 전도한 청년회장이 아주 부끄러운 짓을 하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답니다. ‘이제 보니 교인들은 위선자구나.’ 그래서 그 때부터 교회를 떠났을 뿐 아니라 교회와 교인들을 아주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가 손해를 봅니다. 청년회장도 사람이니 실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목사인 저도 사람이니 실수할 수 있습니다. 장로님도 실수 할 수 있고, 기도 많이 하는 권사님도 실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실수를 붙잡고 매달리면 자기가 망합니다. 목사님이 실수하든 장로님이 실수하든 권사님이 실수하든 그것 때문에 여러분이 손해 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넘어갈 수 있기 바랍니다.
   무엇 때문에 시험에 들든, 누구 때문에 시험에 들든 시험에 들면 자가만 손해입니다. 광야에서 시험에 들었던 사람들은 가나안에 못 들어갔습니다. 심지어 모세도 시험에 들어서 가나안에 못 들어갔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위대한 지도자였습니까? 그런 그가 하나님의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하니 모세도 가나안에 못 들어갔습니다.
   시험을 이겨내십시오. 그러면 그만한 보상이 있습니다. 4절에서는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한다고 말하고, 12절에서는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광야에서 시험에 들지 않았던 사람은 딱 두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이 두 사람은 모세도 들어가지 못했던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시험을 이기고 가나안과 같은 신앙의 깊은 세계와 축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시험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기뻐하라(2절).
    만약 우리가 당하는 시험이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라면 나를 더 강한 신앙인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요긴하게 사용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기에 기뻐해야 합니다.
   옛날에 목조로 만든 배는 돛대가 중요합니다. 바람이 불면 돛대에 부딪히고 바람의 힘으로 배가 빨리 가게 됩니다. 그런데 강풍을 만나는 경우에는 그 돛대가 부러져서 배와 화물뿐만 아니라, 선원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할 때도 있었습니다. 만약에 돛대에 결함이 있다면 큰 일 날 수 있기 때문에 배를 만드는 사람들은 강한 나무로 돛대를 만듭니다. 조선업자들은 강한 돛대를 만들기 위해서 높은 언덕의 정상에 있는 나무를 돛대감으로 점찍어 둡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바람으로부터 보호할 만한 주위의 모든 나무들을 베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 나무는 사방에서 부는 바람과 싸우며 더욱 단단하게 자라갑니다. 그리고 그 나무가 배의 돛대가 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하고 튼튼한 나무가 되면 베어서 돛대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선물과 엄청난 일거리를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약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지킬 수 없고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일들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러 가지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당하는 시험이 사단의 유혹이라면 내가 하나님 편에 있다는 증거이기에 기뻐해야 합니다. 사단이 보기에 내가 자기의 적이니까 나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적이라는 뜻은 내가 하나님 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시험을 당하면서도 기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4절에 보니 우리가 시련을 당하면 온전하고 구비하고 부족함이 없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련 속에서도 기뻐해야 합니다.
   식물학자들은 바람이 세차게 불면 나뭇가지가 심하게 흔들리는데 그 때 나무의 뿌리가 땅 속 깊이 내려간다고 말합니다. 나무가 평온할 때 성숙하고 온전해 지는 것이 아니라 큰 바람이 불 때에 오히려 그 바람 때문에 더 튼튼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 신앙은 언제 온전해 질까요? 우리 믿음은 언제 성장할까요? 평온할 때가 아니라 신앙의 어려움이 있을 때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만나면 오히려 우리가 더 성숙해 집니다. 그래서 시 119:71에 다윗은 고백하기를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2.인내하라(4, 12절).
   제가 보니까 신앙생활에서 인내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여러 면에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심지어 설교를 듣는 데도 인내가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설교가 늘 은혜가 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때도 많습니다. 저는 저하고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주신 분들에게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같은 사람의 설교를 1주일에 몇 번씩 듣습니다. 1년이면 제 설교를 수백 번 듣습니다. 이 중에는 제 설교를 수천 번씩 들은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언제나 신선하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거나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그럴 것입니다. 그래도 인내하고 설교를 열심히 들으시면 여러분의 영혼에 유익이 될 것입니다.
   몇 년 전 영국의 어떤 사람이 신문에 이런 글을 실었답니다. "내가 예수 믿고 30년 간 교회를 성실하게 다니며 수없이 많은 설교를 들었는데 기억되는 설교는 없다. 그러니 목사님들은 설교 준비에 시간과 전력을 다 쏟을 필요 없이 다른 것에 전력을 쏟으면 좋겠다. 30년 간 들어도 기억되는 설교가 없으니…." 이렇게 비꼬고 난 후 이런 저런 논쟁이 신문에 왔다 갔다 했는데, 그 논쟁이 언제 끝났는지 아십니까? 한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이런 글을 신문에 싣고 난 후부터였습니다. "나는 아내랑 결혼해서 30년간 살면서 3만 2천 번의 식사를 했다. 아내가 해 주는 밥을 그렇게 많이 먹었어도 지금 생각하니 무슨 반찬을 먹었는지 별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밥을 먹어서 내가 살아 있지, 그 밥을 먹지 않았으면 나는 죽었을 것이다." 목사님의 설교 중에 생각나는 것이 없어도 그 말씀을 먹었기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 설교가 좀 신선하지 않아도 말씀의 은혜로 사는 것이니 인내하고 설교를 잘 듣기를 바랍니다.
   인내는 헬라어로 ‘휘포메노’라고 하는데 ‘아래에 머문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내는 자신을 낮춰야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인내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인내를 잘하는 사람이 세상살이 승리합니다. 운동선수 중에는 재능은 뛰어난데 훈련 중에 인내하지 못해서 대성하지 못하는 선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인내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인내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인내를 잘하는 사람이 신앙생활도 승리하는 것입니다. 인내의 모범을 보인 사람은 노아입니다. 노아는 홍수를 대비해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120년 동안 홍수의 징조는 전혀 없었습니다. 노아에게 120년 이라는 시간은 시험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인 테스트도 있었고, 마귀가 주는 유혹도 있었고, 방주를 짓느라고 고생하며 시련도 있었습니다. 노아는 120년을 변함없이 인내하며 하나님의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노아를 본 받아서 시험을 잘 참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시험을 이겨낼 지혜를 구하라(5-8절).
   어떤 상황에 놓였을 때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해야 할지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면 참 답답한 일이다. 이런 경우 기도하라는 것이다.
   제가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좋아하는 몇 사람이 있습니다. 모세, 다니엘, 요셉, 여호수아 주로 구약의 인물들을 좋아합니다. 사도 바울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던데 저는 바울은 왠지 저하고는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그 가운데 모세와 다니엘을 특히 좋아합니다. 그들은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했으며 그 지혜로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시험이 있을 때 그들처럼 기도하므로 승리합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풍성하게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5절에 보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5-8에 보면 기도하는데,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기도하면 산도 옮겨진다고 말합니다. 어느 농부가 아들과 함께 이 말씀대로 하나님이 응답 하는지를 보려고 늘 그늘이 져서 텃밭에 채소들이 잘 자라지 못해 앞산의 그림자를 좀 옮겨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면 이루어 준다고 했으니 아들과 아버지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저 앞산의 그림자를 좀 옮겨 주시옵소서....., 믿습니다. 아멘.”하고 눈을 떠 보니 앞산도, 그림자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내 그럴 줄 알았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자세로 기도하면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한 한인교회에서는 기도로 산을 없앤 일이 있습니다. 그 교회가 작은 산 하나를 사서 거기에 교회를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산의 흙을 없애는 일이 문제였습니다. 흙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팔면 되지만 필요로 하는 곳이 없으면 돈을 주고 버려야 하기 때문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교회 건축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교인 중에 한 사람이 기도로 산을 옮기자고 해서 교회에서 기도회를 하게 되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건설회사 사장이 찾아와서 산의 흙을 사고 그 회사에서 중장비까지 동원해서 흙을 치워주었습니다. 그 교회는 흙을 판 돈으로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기도하는 우리들에게 지혜도 주시고 길도 열어주시고 모든 것을 후히 주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고, 성도들도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4.낮은 자는 주님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낮아짐을 자랑하라(9-11절).
   낮은 형제가 자랑해야 할 자기의 높음은 주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는 주님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세상을 이기고,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랑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부한 자가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는 말은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겸손 하라는 것입니다. 재물이나 인기나 권력은 마치 풀의 꽃과 같습니다. 풀이나 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잠간 화려하지만 곧 시들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것이 영원할 것으로 착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재벌들의 재물이 4대 이상 지속된 예는 10% 미만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연예인들의 인기를 보세요. 굉장한 인기를 누리는 것 같은데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권력도 10년을 넘지 못합니다. 태광실업의 박연차 회장을 보세요. 과거 권력에 붙어서 굉장할 것 같았는데 지금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형 노건평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자랑거리를 위해서 맹렬할 정도로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종말을 맞이하고 영원한 세계 앞에서면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소설을 쓰는 여자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집념이 강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글을 쓰고 또 자기의 인기를 유지하는 일 외에는 전혀 눈길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쓴 소설은 꾀나 인기가 있었습니다. 잘 팔렸습니다. 그럴수록 자기의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더 열심히 소설을 썼습니다. 돈도 꾀나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돈을 가만히 놀려두지 않고, 계속해서 부동산에 투자해서 자기의 재산을 증식해 나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몸이 견딜 재간이 없습니다. 결국은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병원에 가서 종합검진을 받아보았습니다. 뜻밖에도 간암 말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남은 삶이 불과 3개월밖에 되지 않는 시한부 인생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집까지 일부러 천천히 걸어오면서 처음으로 그는 자기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했던 말씀이 그렇게나 실감나게 느껴질 수가 없었습니다. 전1:2의 말씀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정말 그 동안 살아온 모든 삶이 헛되게 느껴졌습니다. 집에 도달했습니다. 그저 눈물만 흐를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쳐다보아도, 그 동안 애써 장만해 놓았던 가구들을 쳐다보아도, 심혈을 기울여 써온 원고뭉치를 쳐다보아도 그저 눈물만 솟구칠 뿐이었습니다. 도무지 참을 재간이 없었습니다. 교회로 뛰어갔습니다. 그는 아무도 없는 교회에 홀로 무릎을 꿇고 흐느끼면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깊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 주님! 저의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구차한 요구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만큼은 꼭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남은 3개월 동안에 제가 무엇을 해야 저의 삶이 의미 있는 삶이 되겠습니까? 이 한 가지만큼은 꼭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애타게 기도하는 가운데 그에게 느껴지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동안 글을 쓰고 재산을 불리느라고, 그는 충분한 사랑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자기로 인해서 섭섭한 마음을 가졌을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했습니다. 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눈물로 용서를 구했습니다. 다 풀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억척스럽게 재산을 모으기만 했지 한 번도 자기의 재산을 값있게 써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자기의 재산 가운데 상당한 부분을 하나님께 감사헌금과 선교헌금으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가족들을 위한 유산으로 분배했습니다. 유언장도 완성을 했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글을 쓰는 일이라든지, 재산을 불려나가는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저 틈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하나님께 깊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3개월이 지나갔습니다. 의사는 틀림없이 3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났지만 생명은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병원으로 갔습니다. 이번에는 일부러 다른 병원으로 가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것이 웬일입니까? 간암이라는 것은 순전히 오진이었습니다. 너무 과로해서 간에 무리가 갔을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휴식을 취하면 충분히 회복될 수 있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서 목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집사님, 얼마나 억울하세요? 어디 가서 이 보상을 받겠습니까?" 그 때 집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목사님! 저는 제 생애 있어서 지나간 3개월처럼 의미 있고 값진 삶을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 저의 남은 삶이 얼마가 되든지 간에 저는 언제나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심정으로 살렵니다." 그 집사님이 세상의 부함을 위하여 열심히 살았지만 영원한 세상을 대면하니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5.좋으신 하나님을 신뢰하라(13-17절).
   13절의 시험은 유혹을 말하는데 유혹을 당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유혹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혹은 사단이 주는 것이고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마치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처럼 우리들을 속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16절에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혹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온갖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개고기를 무척 좋아하는 분이 하루는 친구와 함께 자기 집의 개를 잡아먹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일론 빨랫줄로 개의 목을 묶어서 끌고 산으로 갔습니다. 산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개를 삶아서 뜯어먹을 작정이었습니다. 가마솥에 불을 지펴놓고 목을 졸라 개를 죽이려고 나일론 줄을 잡아당기니 개가 놀라서 발악을 하는 바람에 줄이 풀려 개가 도망을 갔습니다.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사람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그 개가 꼬리를 흔들고 팔짝팔짝 뛰며 그 사람을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얼마나 양심의 가책을 받았는지 모른답니다. 그래서 그때 ‘내가 개고기를 먹으면 개새끼다.’라고 다짐하고 그 때부터 개고기를 먹지 않았답니다. 자기가 죽이려 했던 개가 자기를 그렇게 환영해 주는데 어떻게 잡아먹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를 죽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힘든 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고, 우리의 연단도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에게 섭섭한 마음을 갖고 믿음을 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하나님을 좋으신 분으로 확신하고 믿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6.자존감을 잃지 말라(18절).
   사람이 어려움을 많이 겪다보면 자기가 별 볼일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신자들이 시험 중에 그런 생각을 할까봐서 18절을 기록한 것입니다. 18절의 내용은 시험 중에 있어도 신자는 만물의 영장이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가르쳐줍니다.
   씨멘즈(D. A. Seamands)박사는 <상한 감정의 치유>라는 책에서 낮은 자존감이 우리에게 미치는 네 가지 영향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로 낮은 자존감은 우리의 잠재력을 마비시킵니다. 달란트비유에서 1달란트 받은 사람은 실패할까봐 두려워서, 주인으로부터 받은 1달란트를 투자하지 않고 그냥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이처럼 낮은 자존감은 우리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둘째로 낮은 자존감은 우리의 꿈을 파괴시킵니다.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12명의 정탐꾼 중에 10명은 낮은 자존감 때문에 그렇게도 소원하던 가나안 입성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땅에 가보니 그 성읍은 견고하고 사람들은 거인들입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마치 메뚜기와 같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도 우리는 메뚜기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표현한 것은 낮은 자존감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낮은 자존감이 우리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셋째로 낮은 자존감은 우리의 대인관계를 해칩니다. 일반적으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비교의식, 열등의식을 품고 살아갑니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키가 작다고 키 큰 사람과 함께 서 있기를 싫어합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을 보고 ‘가방 끈이 길다고 대개 뻐기는데’라고 하며 괜히 질투를 합니다. 돈 많은 사람을 보면, ‘어떤 사기를 쳐서 그렇게 돈을 많이 벌었을까’라고 생각을 합니다. ‘무식하게 그런 거도 모르냐?’는 말을 듣고 그냥 농담으로 넘기지 못하고, ‘그래. 나 무식하다! 무식한 놈의 주먹 한 번 맛볼래?’하며 달려듭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가 어렵습니다. 넷째로 낮은 자존감은 하나님의 사역에 방해가 됩니다. 모세는 처음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낮은 자존감 때문에 선뜻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할 수 있게 습니까? 백성들이 물으면 내가 무엇이라고 대답하리이까.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입니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십시오.” 무려 다섯 번씩이나 계속해서 거절했습니다. 이처럼 낮은 자존감은 하나님의 일을 주저하게 합니다. 낮은 자존감의 사람은 자기의 학벌이나 경험이나 나이나 외적인 조건, 등의 이유를 대면서 하나님의 일을 회피합니다.
   자신 존재 가치를 주님 안에서 인정하고 자기를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시험을 당하고 있더라도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요.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십시오. 세상에서 이 보다 더 높은 자존감을 갖게 만드는 신분은 없습니다. 주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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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회설교]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 ( Dawn Prayer Meeting Sermon)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
(요일 1:5~10)

<서론>
저는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제일 먼저 지으신 것이 무엇입니까? 빛이 있으라고 하셨죠. 빛을 제일 먼저 지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빛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빛은 모든 푸른 풀의 엽록소와 합쳐서 탄소동화작용을 일으켜 영양분을 만들어냅니다. 빛이 없으면 영양분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식물의 엽록소를 통하여 탄소동화작용으로 영양분을 만들어 동물들의 양식이 되고 또 사람들은 그 동물들을 양식으로 삼기도 하는 것입니다. 영적 세계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둠이 점령하고 다스리는 세상에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셔서 세상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본론>
1. 예수님의 빛은 어둠을 멸하신다
예수님의 빛은 어둠을 멸하십니다. 여러분, 캄캄한데 불을 켜서 캄캄한 곳에 가 보십시오. 어두움은 그냥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 동화에 보면 별들이 태양을 보고 늘 말합니다. “너희는 어두움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 우리는 밤에 어두울 때 하늘에서 반짝 반짝 빛나니 얼마나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고 찬양을 받는지 아느냐.” 태양이 별들을 보고 “어두움을 좀 구경시켜죠. 너희들만 구경하지 말고... 나도 구경시켜줘~” “그러면 오늘부터 밤에 우리 따라 오너라.” 그래서 별이 앞장을 서고 별을 따라 태양이 가보니 어두움이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야, 거짓말쟁이야 어두움이 어디 있느냐?” 별들이 말합니다. “이상하다~ 우리끼리 갈 때는 어두움이 반드시 있는데 왜 네가 따라오면 어둠이 없어지는지 모르겠다.” 그와 같이 어두움은 빛 앞에 견디지를 못합니다. 어두움의 영적인 의미는 마귀 아닙니까? 어두움은 마귀의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빛이 나타나면 마귀의 어두움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마귀가 와서 온갖 어두움을 다 가지고 오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별일 없이 어두움은 다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5절로 7절에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은 빛이시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드리고 따라가면 하나님의 빛이 우리에게 빛이 비춰서 우리에게서 어두움이 다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에 살려고 해도 살 수가 없습니다. 빛이 밝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보배로운 피로써 우리를 정하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고 우리는 다 빛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빛은 마귀의 일을 멸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온갖 사나운 짐승들이 어르렁 거리고 돌아다녀도 빛이 비치면 모든 짐승들이 다 도망을 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최근에 골목길에 어두운 때 공갈치고 협박하고 남의 물건 빼앗는 그런 악행이 자행되고 있는데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 그 골목길에 등불을 많이 켜놓았더니 획기적으로 그러한 범죄가 없어졌다는 말을 신문에서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어두움은 빛 앞에서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이 쫓겨나가는 것입니다. 마귀가 와글거리고 집안이 복잡하고 우한질고가 끝나지 않고 슬픔이 가득한 집안에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예수를 믿고 가정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면 순식간에 그 집안에 우한질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마귀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어두움이 빛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 빛이 그 집안에 비치니 어두운 세력이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마귀는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박멸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시므로 우리가 빛을 찾아가면 예수님은 우리의 세계를 비쳐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빛은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의 빛을 비춰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가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치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뭘 예수 믿는 사람들 예수 믿고 복 받는다고 기복신앙을 전한다고 하지만 여러분, 기복신앙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의 세력이 있을 때는 춥고 어둡고 괴롭고 가난하고 굶주리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면 추우면 따뜻해지고 부요해지고 풍부해지고 소망차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빛은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의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가난을 물리칠 수 있는 길은 예수를 믿는 길인 것입니다. 제가 처음 1958년 교회를 개척했을 때 그 동리는 말할 수 없이 어두웠습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매일같이 싸우고 술주정뱅이가 여덟 팔자걸음을 걷고 동리를 휩쓸고 다니고 우리들이 생각할 때 희망이 있겠느냐 그런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도 그곳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뭘 증거했느냐. 삼박자 축복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진다. 핍박을 많이 받았지요. 예수 믿으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느냐. 천당 이야기하지 말고 천당 반조각이라도 우리에게 가지고 오너라. 그러나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증거한 결과로 3년 만에 그 동리에 비참한 가난은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희한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술주정뱅이들이 바른 사람이 되어 들어오고 직장 없는 사람이 직장을 구하고 정부의 도움도 받게 되고 서로 협조도 하고 어찌했든지 좌우간 빛이 비치니까 어두움이 사라졌습니다. 그리스도가 비취니까 어두움의 일들이 사라지고 동리에 웃음소리가 들리고 즐거움이 찾아온 것입니다. 주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그 오른편에는 즐거움이 넘친다고 기쁨과 즐거움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빛은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의 빛이요, 포로된 자에게 자유와 해방의 빛인 것입니다. 술이나 담배, 도박의 포로가 되어서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어제도 텔레비전을 보니까 신년도부터 담뱃값이 올라서 담배 피는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해요. 그런데 그 담배를 떼려고 애를 써도 담배를 못 떼고 괴로워해서 나중에는 전기담배, 담배는 아닌데 전기로 만든 파이프를 품고 억지로 연기를 피우는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하고 비교해서 나는 그런 걱정할 것도 없고 같이 연기를 피울 필요도 없고 포켓트에 담뱃대를 넣어 다닐 필요도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냐, 예수님께서 습관에 포로된 자에게 그 빛이 비치면 자유가 다가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와 해방의 빛이 비치는 것입니다. 눌린 자, 압제당한 자들에게는 치료의 빛이 비춰지는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압니까? 이 세상에 스트레스 당하면 안 걸릴 병이 없습니다. 요사이 병들이 그렇게 많은 것은 사회생활에 그렇게 스트레스가 심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스트레스를 쫓아버리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스트레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앞에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눌린 자, 압제당한 자들이 치료의 빛을 받아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사랑의 빛이 되어 비취므로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 마땅한 자를 주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씻어 주시고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빛 안에 생명이 있다
예수님의 빛 안에는 생명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생명이 있으면 팔딱팔딱 뛰지 않습니까? 살아있지 않습니까? 죽은 물고기는 물에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습니까? 여러분, 생명이 있으면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가 운명과 환경을 정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면서 살지만 이 세상에서 생명을 잃어버린 사람은 세상 습관에 떠내려가는 사람입니다. 아무 기쁨과 즐거움이 없습니다. 좌절과 절망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귀는 죄와 허물, 질병과 고통, 저주와 궁핍, 죽음과 멸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두움의 임금이요 모든 고통의 근본인 것입니다. 마귀가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괴롭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 첩경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마귀는 아담과 하와에게 거짓말로 속이지 않았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으면 너도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된다고 거짓말을 해서 거짓말을 믿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저주를 받고 그들이 자녀를 낳으니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쳐 죽이는 살인비극이 일어났습니다. 마귀는 엄청나게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마귀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오늘도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귀를 우리가 주먹으로 싸울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 마귀의 어두움을 없애버리느냐. 마귀는 어두움의 세력이니까 어두움이 떠나가면 마귀는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물러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예배하고 찬양하고 예수 안에서 즐거워하면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시라 그 앞에 어두움인 마귀가 서지 못하고 예수님의 빛은 어두움의 열매를 싹 멸해버리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마귀는 나쁜 마귀, 예수님은 좋은 예수님이십니다. 마귀가 오는 것은 나쁜 일을 가져오고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좋은 것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일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벽예배를 드리고 집에 와서 잠들 때도 예배를 드리고 잠을 자고 그리스도와 같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빛이 여러분 속에 있으므로 늘 좋은 일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2절로 4절에 보면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은 사람들의 빛이고 그 빛이 비치면 생명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계 역사를 보게 되면 문명이 어디서부터 피어났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된 곳으로부터 문명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문명한 국가들에 가보면 모든 면에 발전하고 향상하고 자연도 잘 개발되고 아름답고 집들도 다 우아하게 지어지고 공공건물도 다 아름답게 지어졌습니다. 제가 제일처음 세계 만방에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할 때 가는 곳마다 부럽기가 말로다 할 수 없어요. 저 알라스카로부터 시작해서 미국 전국, 구라파,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스위스 가는 곳마다 똑같은 집을 지어도 그렇게 집이 아름답고 쓸모있게 지어졌어요. 그들이 공공기관도 참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지어졌고 사회가 안정되고 잘 살고 그래서 우리는 언제 저렇게 잘 살 수 있을까? 부러웠습니다. 다니면서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간 나라마다 그렇게 선진국이 되어서 잘 사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가 잘 되는 길은 예수를 믿어서 그 빛이 우리에게 비치고 빛은 생명이라 생명으로 넘치는 개인과 가정과 사회가 되어야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60년대 그렇던 우리 한국이 복음이 들어와서 성도수가 백만이 되고 2백만이 되고 3백만이 되고 5백, 6백, 7백, 8백, 9백, 천만이 되었어요. 우리 한국이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빛이 비춰서 어두움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마귀의 일이 멸해지고 생명이 넘쳐났습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서 오늘날 한국의 어느 중소 도시에 가도 구라파가 부럽지 않습니다. 저는 종종 중소도시에 가서 혹시 내가 외국에 왔지 않느냐. 그럴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그처럼 눈부신 발전이 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빛이므로 그 빛이 비쳐서 그 생명이 나타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짧은 세월 동안에 우리 한국의 중소도시 시골에까지 여러분 십자가 없는 데가 있는지 한번 찾아보십시오. 전에 한국에 관광으로 온 구라파 사람들에게 질문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한국에 와서 무엇이 제일 인상적이냐, 두말하지 않고 말하기를 한국에 와서 제일 인상적인 것은 기독교 국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유럽보다 더 많은 십자가가 있다. 어느 동리에 내려가도 십자가 없는 동리가 없다. 그 말 듣고 난 다음 보니까 참말이라. 난 그렇게 생각 안했는데 그 다음 차를 타고 내려가면 십자가가 없지 싶어도 어디가도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어디가도 빛이 비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빛이 비치면 빛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가져온다고 말한 것입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생명의 역사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이 더 잘 살고 더 문명되고 더 아름답게 되려면 더 많이 예수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빛이 더 비치죠. 빛이 비치면 생명이 나타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이 생명의 빛입니다. 여러분 가정이 평안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면 가정에 예수님을 모시면 되는 것입니다. 빛이 들어오기 때문에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가 쫓겨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불안과 고통은 전부 마귀가 갖다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날 보고 너무 마귀만 뭐라고 하지 마십시오. 마귀만 자꾸 괴롭히면 됩니까? 사람도 잘못하는 일이 많은데... 내가 하는 말은 사람이 잘못하는 것은 마귀가 들어왔기 때문에 잘못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쫓겨나가면 어두움의 일도 다 쫓겨나가는데 마귀가 어떻게 쫓겨나가느냐. 예수님 이름 부르면 마귀가 쫓겨나간다. 예수님은 빛이시고 마귀는 어두움이기 때문에 빛이 비취는데 어두움이 어떻게 장난을 하는 것입니까? 나는 어떠한 분이 훌륭한 책을 저술했는데 그 책을 읽으니까 그 분이 말하기를 내 인생에 가장 큰 행복은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배고픈 것을 알게 되고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초등학교 4학년 밖에 공부 못한 것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것 그것이 나의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이었다. 왜 그러느냐. 그렇기 때문에 동리에 교회가 들어왔을 때 나는 올데 갈데 없어서 내가 교회 제일 처음 나갔다. 그래서 동리에 아무도 교회 안 나갈 때 우리 또래 애들 중에 내가 교회에 나가서 빛을 얻었다. 생기를 얻었다. 꿈을 얻었다. 그래서 지금 그 동리에서 제일 성공하고 잘사는 사람이 자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말하면 여러분 알 것이지만 그 어른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그 이름을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우리 한국의 재벌 중에 한 사람인 것입니다. 반드시 여러분, 공부 못했다고 탄식할 필요 없어요. 가난하다고 탄식할 필요 없고 몸이 약하다고 탄식할 필요 없는 것은 우리에게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해주는 빛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우리 모든 병을 고치시며 우리의 생명을 주시고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빛 되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들어오면 빛이 들어오기 때문에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낙오된 침울한 어두움은 다 사라지고 빛이 가득하게 비치는 것입니다. 빛이 비치면 또 따뜻하잖아요. 따뜻한 사랑과 기쁨이 가득하게 되고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한번 따라 말씀하십시오. 나는 세상의 빛이라. 예수님이 세상의 빛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있으면 여러분 속에 그 빛이 들어와서 빛이 반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이 반사된 이상 어두움은 떠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35절로 3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빛을 믿고 빛의 아들들이 되면 어두움은 떠나가버리고 밝고 맑고 환한 좋은 일들이 생겨나지 않습니까? 빛이 있으면 어두움의 슬픔이 사라지고 좌절과 절망이 사라지고 빛의 밝은 손길을 따라가면 여러분에게 좋은 일이 생기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로 47절에 보면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어두움에 거하지 않습니다. 어둠은 마음에 우울, 불안, 초조, 절망, 좌절 같은 것 육신의 절망, 질병 같은 것, 여러분의 사업이 무너지고 피투성이가 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이런 좌절과 절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더라.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처절한 절망 가운데 빛 되신 예수님이 비치면 성령이 역사하여 주셔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의 생활이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절망이 있습니까? 가정이 좌절되었습니까? 생활에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습니까? 예수님 빛이 비치게 하시면 성령이 그 빛을 받아서 여러분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종교를 믿는다고 하는데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 실생명을 변화시키는 역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어두움에 안 거해야 해요. 예수님은 어두움을 쫓기 위해서 왔어요. 가난은 어두움입니다. 병도 어두움입니다. 허무와 절망도 어두움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에게 고통을 갖다주는 어두움이 참 많지만 예수님은 빛이시라 예수님 찾아오면 우리에게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 얼굴만 봐도 얼굴에 어두움이 없습니다. 얼굴에 빛이 비칩니다.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이 아무리 많아도 마음이 평안하지 못한 사람은 얼굴에 어두움이 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생명의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어두움을 다 짊어지고 갈보리 십자가에 올라가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어두움을 다 쫓아내셨습니다. 마귀를 끌어안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사와 권세가 다 빼앗겨버리고 완전히 파멸된 것입니다. 십자가보다 더 위대한 곳이 없습니다. 그곳에서 마귀는 자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비췄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어둠의 세력을 이와 같이 멸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용서와 의의 빛이 비추고 거룩함과 성령충만의 빛이 비치고 치료와 건강의 빛이 비치고 축복과 형통의 빛이 비치고 부활 영생 천국의 빛이 비치는 처소가 갈보리 십자가인 것입니다.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면 그곳에서 생명의 빛이 우리 가슴속에 비쳐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일을 멸하려면 주님 앞에 꿇어 앉아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향해서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드리면 갈보리산에서 비취는 빛이 여러분에게 비치게 되는 것입니다. 어둠이 사라지고 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병원을 짓기 위해서 평양에 갔을 때였습니다. 그때 우리 교인들 아시아나 비행기를 한 대 대절해가지고서 평양에 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저는 공산당 간부의 차에 태워서 대접을 언제나 잘해 주었는데 대접을 잘해주는 것인지 나를 지키기 위한 것인지 몰라도 으스스해도 좋습디다. 그런데 저녁에 나가니까 시내가 그렇게 깜깜할 수가 없어요. 전기가 없으니까. 캄캄한데 내가 가는 앞마다 전기가 쫙 들어와요. 어둠이 사라져 버려요. 내가 지나고 난 다음에 보니까 캄캄해요. 그래서 어두움과 빛이 이렇게 다르구나. 환하게 보이는 것은 대한민국 같고 캄캄한 것은 북한인 것 같고... 우리 한국이 살려면 그 빛이 비춰야 돼요.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빛을 비추면 성령이 역사하게 되고 성령이 역사하게 되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계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비취면 치료하는 광선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하나님, 우리에게 치료하는 광선이 되시고 우리를 파괴하는 광선이 아닙니다. 영도 치료하고 마음도 치료하고 환경도 치료하고 그래서 망아지같이 뛰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인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빛은 우리의 갈 길을 비추어 주신다
예수님의 빛은 우리의 삶의 갈 길을 밝히 비춰주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리스도께 의지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길을 비춰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마귀는 악한 자의 꾀에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악한 자의 꾀라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지 아니하고 인본주의로 사는 것은 악한 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자의 꾀에 빠지지 않도록 예수님은 우리를 붙잡아서 광명한 빛을 비춰주는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 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의 꾀에 빠지지 않도록 예수님은 우리의 빛이 되시는 것입니다. 죄의 길에 서지 않도록 예수님은 우리를 의롭게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도록 겸손하게 주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8절로 9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이 우리의 힘으로 의롭고 거룩하고 착하게 되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힘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면 예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예수의 생명이 성령으로 우리를 변화받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그리스도의 빛을 바라보면 그리스도의 빛은 우리에게 변화를 가져와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 온유, 절제 같은 열매를 맺게 해주시고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채워 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늘 같이 지내면 하나님의 빛이 비치고 하나님의 빛은 우리에게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해주시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빛이 비치느냐. 매일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말씀을 생각하고 그리고 그 말씀에 입각해서 기도 드리고 그 기도와 함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 우리는 늘 하나님과 같이 있게 되고 하나님의 빛이 우리속에 늘 비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일이 빛을 통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빛은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다
예수님의 빛이 비치면 우리는 해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돼요. 그리스도의 빛이 비치니까 마귀가 죄의 힘이 되는데 마귀가 쫓겨나가니까 죄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님의 빛이 생명의 성령의 빛이 되어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예수님께서 흑암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내서 하나님의 아들 나라로 옮겨서 그 하나님 아들 나라에서 살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지상에 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들 나라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충만히 계시고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 우리 가운데 비치고 있는 천국 백성으로써 하늘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가는 천당은 최후 종착역이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하늘나라가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서 죽어 천국 가서 누릴 영광만 바라고 사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를 믿어서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살게 되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는데 회개하고 주님을 믿으면 천국이 여러분을 가까이 찾아오는 것이지 회개하라 죽어서 천당이 올 때가 가까이 왔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이 현실에서 여러분 천국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빛으로 비치면 마귀가 빛 앞에서 어둠이 사라져 버리고 어둠이 사라져버리면 성령께서 역사해 주셔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같은 것 얼마나 좋은 열매입니까? 그 열매를 이 땅에서 맺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것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해주시고 모든 죄악을 용서하시고 질병을 고치시고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고 좋은 것으로 우리 소원을 만족케 하사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해주시고 이런 빛의 열매를 주님께서 우리에게 많이 허락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케 함으로 삶의 참 의미와 가치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 비치면 우리는 하나님 품안에 다시 안기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범죄해서 쫓겨났던 우리가 빛 되신 하나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갈 수 있게 되고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된 것입니다. 실제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기도해서 응답받는 재미가 굉장한 재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이 비춰서 성령으로 충만하면 기도하면 하나님이 재깍재깍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안 이루어지는 것이 이상한 일이고 이루어지는 것은 보통 일인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고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보고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고 하나님과 가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과 무에서 놓여나 참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주님과 같이 생명 속에 있게 되므로 참 행복을 마음속에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그러므로 예수님의 빛은 어둠을 멸하고 예수님의 빛은 생명을 충만히 채워주고 예수님의 빛은 갈 길을 비춰주고 예수님의 빛은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을 모신 자는 더 이상 어둠에 있지 않고 빛 가운데 들어와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되고,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과의 교통 속에 밝고 맑고 환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 가운데 살도록 예수님 앞에 늘 나와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우리의 태양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빛을 비취려면 방안에 있지 말고 밖으로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고 태양을 보면 빛이 비치지 않습니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과 같은 빛이 비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빛 속에는 온갖 치료가 다 있고 축복이 다 있고 은혜가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항상 성령의 신령한 빛을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거하면 마귀는 자동적으로 쫓겨나가는 것입니다. 마귀의 일은 자동적으로 떠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빛 가운데서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으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품에 품고 있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들어와 있다고 여러분 상상을 하십시오. 빛이 비치므로 여러분 생애 속에 모든 것이 살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빛은 생명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빛을 비치면 모든 생명이 잘 된다고요. 그리고 행복과 기쁨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그리스도의 빛이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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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회설교] 신앙생활은 경주하는 것과 같다 

신앙생활은 경주하는 것과 같다

히브리서 12:1-2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으며,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성경은 신앙생활을 비유적으로 많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첫째, 신앙인은 나그네입니다. 이 세상은 잠시 지나치는 곳이고 목적지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둘째, 신앙인은 약혼녀입니다. 신랑은 예수님이시고 지금은 혼인잔치를 위하여 준비하는 때입니다. 셋째, 신앙인은 군인입니다. 대장은 주님이시고, 훈련을 통해서 정병이 되어가며, 적은 원수 마귀입니다. 넷째, 신앙인은 밭입니다. 좋은 밭이 되어야 열매가 풍성합니다. 길가나 돌밭 그리고 가시밭이 되면 안 됩니다.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다섯째, 신앙인은 성전입니다.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하지만 아직 완성되진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지어져가야 합니다. 현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섯째,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입니다. 지체가 몸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처럼 교회 없는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지체에게 나 홀로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연합이 사는 길입니다. 일곱째, 신앙인은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우리는 동역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분의 뜻을 위하여 헌신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 외에도 다양한 비유들을 통해서 신앙생활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신앙생활은 경주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본문을 통해서 신앙의 경주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1절).
   스포츠 경기장에서는 허다한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선수들을 응원을 합니다. 신앙의 경기도 허다한 사람들이 구경을 하며 응원을 합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 스포츠의 관중들은 실제 선수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경주는 실제 선수생활을 했었고 이미 승리한 사람들이 관중이라는 것입니다.
   히 11장과 히 12장은 편의상 장을 구분해 놓은 것입니다. 본래는 장과 절이 구분이 없었습니다. 히 11장과 12장은 따로 떨어진 문서가 아니라 연결된 내용입니다. 12장 1절을 ‘이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12장은 11장과 연속적으로 봐야 합니다.
   히 11장에서는 성경에 나왔던 대표적인 믿음의 선배들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들은 비록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했으나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음을 지켰고 이미 영원한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승리의 면류관을 받았고 하늘의 위로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여기 나오는 허다한 증인들은 히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과 히 11장에 기록 되지는 않았지만 믿음의 경주에서 이미 승리하고 이미 천국에 들어간 수많은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히 11:35이하에 보면 그분들은 이 세상에서 신앙의 경주를 하며 온갖 어려움을 이겨낸 분들입니다. 히 11:16절에 보면 그들은 그런 어려운 중에도 더 나은 본향인 천국을 사모했습니다. 하나님은 온갖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천국을 사모하는 그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그 성이 바로 천국입니다. 히 11:40에서는 천국을 아주 간단하게 표현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천국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좋은 것들로 충만한 곳입니다.
   신앙의 경주를 응원하는 이분들은 이미 천국에 들어간 분들입니다. 이미 천국의 안식을 경험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이 응원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내용으로 응원을 할까요? 제가 이미 천국에 들어갔고 천국의 안식을 누리고 있는 입장이라면 무슨 내용으로 응원을 할까요? “힘내세요. 저도 땅에서 힘들었지만 참았어요. 비록 땅에서 믿음을 지키느라고 고생은 했지만 천국에 와서 보니 인내하길 잘했어요. 힘내세요. 천국은 너무 좋아요. 너무 너무 행복해요. 조금만 인내하세요. 여기에는 당신을 위한 처소가 준비되고 있어요. 힘내세요” 신앙의 경주에는 우리를 응원하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2.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1절).
   1절에 보니 신앙의 경주를 하는 사람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경주하라고 말씀합니다.
   경주하는 사람이 무거운 갑옷을 입고 뛴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습니까? 당사자는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벗어버려야지요. 그래야 잘 달릴 수 있습니다. 선수가 구두 신고, 넥타이 매고, 양복 입고, 가방 들고 뛴다고 생각해보세요. 잘 달릴 수 있겠습니까? 무거운 것은 다 벗어야 합니다. 경주하는데 방해되는 것은 다 짐입니다. 벗어야 합니다.
   선수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몸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저항을 덜 받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기록을 낼 수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방해되는 것들은 과감하게 내려놓아야 합니다.
   신앙의 경주를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몇 가지 살펴봅시다.
   첫째, 죄가 우리를 누르는 무거운 짐입니다. 창 4:13에 보면 가인이 고백했습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죄는 우리를 짓눌러 지치게 합니다. 다윗은 시 38:4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죄의 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 됩니다. 사 53:6에서는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마 1:21에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 되셨을 때에 천사가 요셉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줄 때의 내용이 나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주님의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들을 죄의 짐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성육신 하셔서 33년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죄의 짐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엡 1:7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래서 예수님은 마 11:28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혹시 무거운 죄에 짓눌려 있다면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를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흰 눈처럼 맑게 해주실 것입니다. 요일 1:9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죄가 우리를 누르는 무거운 짐입니다만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한 창녀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몸을 팔고 있었지만 죄책감은 천근만근 날마다 때마다 언제나 그의 마음을 무겁게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이 죄책감은 육체적인 병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이제 배는 불룩하여 치료불능의 판결을 받고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생이 너무나 허무하였습니다. 이대로 죽는다고 생각하니 인생이 억울하였습니다. 그 창녀는 병석에서 전도를 받았습니다. 어느 부흥회에 참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 분이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말씀이 신비롭게 들렸습니다. 그 창녀는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예수님! 정말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셨다면 내 죄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까? 정말 그렇다면 내 죄도 받아주시옵소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기도를 하는 순간 배가 편안해짐을 확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배가 점점 정상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평안이 자기를 덮어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정말이다. 그 분 예수는 내 죄도 짊어지셨다.” 그의 배에 평안이 왔습니다. 죄의 짐은 주님이 해결하십니다.
   둘째, 걱정, 근심, 염려가 무거운 짐입니다. 찬송가 369장 1절만 불러봅시다. “죄 짐 맡은 우리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받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걱정근심 무거운 짐은 주님을 믿고 맡기면 해결 됩니다. 요 14:1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벧전 5:7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여기서 ‘맡기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피립토’라는 말인데 ‘던지다. 내던지다’라는 뜻입니다. 내 어께에 있는 무거운 짐 때문에 너무 힘이 들어서 그 짐을 내던져버렸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 짐의 무게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걱정과 근심, 염려를 맡기는 것도 똑같습니다. 믿음으로 맡겼다면 그 다음부터는 그 짐으로부터 자유하는 것입니다.
   믿고 맡겼다고 말은 하는데 아직도 걱정이 되고 근심과 염려가 있다면 맡기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삿짐센터에 전화를 해서 이사를 부탁해놓고 자기가 짐을 싸고 자기가 짐을 나르는 사람과 같습니다. 부탁했으면 이삿짐센터에서 사람들이 나올 것이고 그 사람들이 이사를 해줄 것이니 나는 자유해야 정상입니다.
   6.25가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 할머니가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미군트럭이 할머니 앞에 섰습니다. 운전병이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게 길을 가는 것이 안쓰러워서 할머니를 차에 태워드리려고 차를 세운 것입니다. 미군운전병은 할머니를 태우고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백미러로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할머니는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중심을 잡느라고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운전병이 차를 세우고 할머니에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왜 짐을 머리에 이고 계세요. 바닥에 내려놓으세요” 할머니의 대답이 기가 막혔다고 합니다. “내가 차에 탄 것도 미안한데 어떻게 짐까지 내려놔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예화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이렇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걱정과 근심, 염려를 주님에게 맡긴다고 기도하지만 여전히 내가 머리에 이고 낑낑거리고 있습니다.
   믿고 맡기면 주님이 돌봐주십니다. 벧전 5:7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돌보신다’는 말은 ‘멜레이’란 말인데 이 말은 엄마가 갓난아기를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아기는 염려가 없습니다. 염려하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아기는 엄마가 책임집니다. 염려, 근심, 걱정 다 주님에게 맡기십시오.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우리의 염려, 근심, 걱정은 주님에게 맡기고 우리는 주님을 높이면 됩니다. 그분이 하실 것이니 그분을 찬송하면 됩니다. 그분이 하실 것이니 그분에게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대군을 이끌고 유럽을 휩쓸고 있을 때, 오스트리아의 국경 도시인 펠드리히를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펠드리히 시에서는 비상 시의회를 소집하고 항복 여부를 논의하였는데 대다수 시의원들의 의견은 미리 항복해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데로 모아졌습니다. 그때 교회의 지도자 한사람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부활주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우리의 힘만을 믿는다면 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긴다면 살 길이 열릴 것입니다. 무서워 떨고만 있지 말고 교회의 종을 힘껏 치고 부활절 예배를 드립시다. 그리고 그 뒷일은 하나님께 맡깁시다”라고 말했습니다.
   드디어 펠드리히 시에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찬송소리가 메아리치기 시작했습니다. 종소리와 찬송소리는 프랑스군 진영에까지 울려 퍼졌습니다. 프랑스 군대는 밤사이에 오스트리아 군대가 도착했기 때문에 울리는 기쁨의 종소리와 노래 소리일 것이라고 판단해서 공격을 취소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말았습니다. 이 결과는 주님이 돌봐주신 결과입니다. 펠드리히 사람들이 믿고 맡긴 결과입니다. 우리도 주님에게 맡깁시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립시다. 그리고 주님이 하실 것을 믿고 감사하고 찬송하며 예배로 영광을 돌립시다.

3. 인내로써 경주하라(1절).
   신앙의 경주를 하면서 인내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신앙의 경주에는 힘든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어떤 운동이 가장 힘들 것 같습니까? 체력소모가 가장 많은 운동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미국 스포츠사이트 ESPN은 2010년 말 8명의 전문가들이 60개 종목을 대상으로 난이도가 높은 정도를 수치화했습니다. 인내력, 내구력, 힘, 스피드, 긴장, 유연성, 민첩성 등 10개 항목을 10점 만점으로 계산했습니다. 이중 복싱이 72.375점을 받아 힘든 운동 1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또한, 여러 명이 함께 하는 단체전을 제외하고 개인전으로 오랫동안 경기하면서 체력소모가 심한 운동은 ‘테니스’라고 합니다. 언뜻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톤을 떠올릴 수 있지만, 잘 뛰는 선수들은 2시간 조금 더 걸리면 레이스를 마칩니다. 그러나 테니스는 제한시간 규정이 없어 5시간 가까이 경기를 합니다. 그래서 테니스와 복싱을 지옥의 스포츠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테니스와 복싱보다 더 힘든 것이 신앙의 경주입니다. 테니스나 복싱은 몇 시간이면 끝나지만 신앙의 경주는 일생을 해야 하는 경주입니다. 테니스나 복싱은 상대가 한 명이지만 신앙의 경주는 적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거기다가 신앙의 적인 귀신들은 눈에 보이지 않게 활동을 합니다.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야하기 때문에 힘든 일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경주에는 인내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둘째, 신앙의 경주는 완주해야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스포츠 경기는 끝까지 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상대보다 압도적으로 앞서서 가더라도 중간에 포기하면 지는 것입니다.
   마라톤은 42.195km를 달려야 합니다. 마라톤의 기록은 아직 2시간대를 깨지 못한 것 같습니다. 케냐의 마라토너 데니스 키메토사가 세운 기록이 2시간 2분 57초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42.19km를, 골인 지점 5m를 앞까지 1시간 30분 만에 달렸다고 가정을 합시다. 엄청난 기록입니다. 이제 5m만 달리면 세계신기록입니다. 그런데 그 선수가 5m 앞에서 인내하지 못하고 경기를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잘 달린 것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아무리 잘 달려왔어도 중간에 포기하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평소에 신앙생활 잘 했던 것 같았는데 죽음 직전에 인내하지 못하고 믿음을 버렸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무조건 끝가지 가야 합니다.
   과거에 어느 집사님의 기도 제목 중에 하나가 ‘끝까지 믿음을 지키게 하옵소서’였습니다. 늘 기도제목을 내면 그 기도제목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특별기도회를 할 때도 그 기도제목을 내놓았고, 송구영신예배 때마다 그 기도제목을 내놓았습니다. 그분은 참 지혜로운 분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완주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끝까지 인내하시길 바랍니다.
   셋째, 인내하면 반드시 합당한 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약 1:4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인내의 결과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김연아 선수는 7살에 피겨를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평균 6번 1년에 1,800번 넘어졌습니다. 매일 아침 9시에 운동을 시작해서 늦은 시간까지 하루 10시간이 넘는 훈련을 했습니다. 그 결과 세계적인 선수가 된 것입니다. 김연아 선수가 운동을 하면서 포기하고 싶은 때가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많았을까요 몇 번 없었을까요? 포기하고 싶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을 겁니다. 만약에 김연아 선수가 중간에 포기했다면 지금의 명성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포기하고 싶어도 참고 또 참으면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천성길은 험한 길입니다. 천국은 너무 좋지만 천국까지 가는 길은 험한 길이 많습니다. 가시밭도 많습니다. 때로는 눈물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신앙의 경주에서도 좌절하거나 중단하지 않는 끈기가 필요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참을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산에서 조난당한 사람은 조난당한 현장에서 죽는 경우가 드물다고 합니다. 대부분 마을 가까이 내려와서 죽는 경우가 많답니다. 물론 조난당한 사람은 자신이 마을 인근까지 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는 도저히 안 되겠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후 모든 것을 포기해버림으로써 죽음을 맞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산악전문인들은 ‘마지막이라고 느꼈을 때 30분만 더 버텨라’고 가르친답니다.
   물은 100도가 되어야 끓기 시작합니다. 증기기관차는 수증기 게이지가 212도를 가리켜야 움직인다고 합니다. 99도에는 물이 끓지 않고, 211도에서는 기차가 움직이지 않는답니다. 고작 1도 차이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더 이상 길이 없다 싶을 때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여기에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한 건물의 입구에서 꽃을 파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얼굴에 주름이 많고 옷차림도 허름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한번은 건물의 주인이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시나 보죠? 표정이 항상 밝아 보여요.” 그러자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제 걱정을 트럭에 담으면 아마 100대 분량도 더 될 것입니다.” 부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습니까? 무슨 특별한 비결이 있나요?” 할머니는 행복한 삶의 비결을 들려주었습니다. “내게 특별한 비결이 하나 있어요. 저는 고통이 닥치면 예수님께서 무덤에 머물러 계셨던 사흘을 생각하면서 사흘 동안 기다립니다. 사흘 뒤에는 어김없이 새로운 해가 뜬답니다.”
   우리가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고민 중 90%이상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들입니다. 사흘만 인내하면 대부분의 문제는 자연히 해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 하십니다. 갈 6:9은 말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은 인내하는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4.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2절).
   신앙생활을 실족하지 않고 하려면 주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돌풍을 만났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주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오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에게 외쳤습니다. “주님, 주님이시면 저를 오라고 해주세요”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라” 베드로는 담대하게 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을 바라보며 물위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물위를 걷는 기적이 베드로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보고 걷던 베드로가 성난 파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파도를 보는 순간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볼 때는 물위를 걸었는데 파도를 바라보니 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성난 파도가 많습니다. 어려운 환경의 파도,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의 파도, 사회생활 중에 겪는 힘든 일들의 파도, 질병의 파도 등 다양한 파도가 쉬지 않고 밀려오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세상의 파도를 보지 말고 파도를 초월하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사격선수는 시합을 할 때 표적만 뚫어지게 바라봅니다. 누가 응원을 하는지, 옆 선수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신경 쓰지 않고 표적만 바라봅니다. 우리는 주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주님 안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주님과 함께 만나야 합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교회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예수님에게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부터 하였다고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집이니 주님이 계시다고 믿고 인사부터 하였습니다.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교회에 오면 먼저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부터 해보실래요? 참 좋은 습관입니다. 그런데 사실 주님은 어디든지 계십니다. 교회에 계신 것처럼 가정에도 계시고, 회사에도 계시고, 학교에도 계십니다. 우리는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우리도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어떤 아이가 사과를 먹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얘야, 어디서 그 사과를 얻었니?”, “과일 가게에서요”, “아저씨가 주시던?”, “아니, 안 주셨어요, 아무도 보지 않기 때문에 갖고 왔어요.” 황당한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뭐?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하늘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셔.”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괜찮아요, 가게에는 지붕이 있으니까 하나님도 못 보셨어요”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을 의식하며 ,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경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1.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1절).
   2.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1절).
      첫째, 죄가 우리를 누르는 무거운 짐입니다.
      둘째, 걱정, 근심, 염려가 무거운 짐입니다.
   3. 인내로써 경주하라(1절).
      첫째, 신앙의 경주에는 힘든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둘째, 신앙의 경주는 완주해야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인내하면 반드시 합당한 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4.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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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 희망을 닦습니다 ( Dawn Prayer Meeting Sermon)

희망을 닦습니다

벧전1:3∼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베드로전서 1:4)

손등에는 까만 구두약이 묻었어도 눈에는 희망이 반짝거리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남에게 진 빚 때문에 아버지가 투옥되었기에 소년은 구두를 닦으면서 어렵게 지내야 했습니다.소년은 밤하늘에 박혀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 별을 보며 탄식 대신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길 한모퉁이에서 밤늦게까지 구두를 닦으면서 노래를 부르는 소년을 본 사람들이 “구두 닦는 일이 그렇게 좋으냐?”고 물을 때마다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럼요,저는 구두를 닦고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닦고 있는 걸요”

희망을 닦던 소년은 후에 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습니다.‘올리버 트위스트’를 쓴 찰스 디킨스의 이야기입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요, 내일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절망에 빠진 사람은 살아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생의 위기,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생의 고통을 당했더라도 내게 있는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인생은 언제든지 새롭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비록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빼앗기더라도 아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면 그는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희망의 주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늘 새로운 희망으로 채워주십니다.베드로 전서 1장 3∼4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첫째로, 성도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의 희망입니다.

성도에게는 영원한 천국,즉 썩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하늘의 기업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물질이나 사업이나 건강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믿음 안에서 천국에 있습니다.이 천국의 소망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도 없고,깨뜨릴 수도 없는 산 소망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어떤 희망이 담겨 있습니까? 먼저 우리의 마음을 부활의 희망, 천국의 희망으로 채우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역경이나 질고 앞에서도 절망을 모르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별이 더 밝게 빛나는 것처럼,환경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내일의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아무리 환경이 우리를 힘들게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늘 희망을 그 마음에 간직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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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새벽 기도회 설교] 믿음은 자랍니다  (Special  Dawn Prayer Meeting)

요일2:12-14

믿음은 자랍니다

 

6월은 만물이 자라나는 계절입니다. 작년 가을, 우리 교회 마당에 두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습니다. 느티나무를 심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는 아주 큰 느티나무가 있는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어릴 때 저는 그 나무에 오르락 내리락 하며 꿈을 꿈었습니다. 그 나무에 올라 책을 읽었고 그 나무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았습니다. 세상에 나무가 많지만 느티나무처럼 넉넉한 나무는 없습니다. 그래서 작년에 교회에 나무를 심을 때 느티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심을 때 그 나무는 아무 잎이 없었습니다. 가지만 앙상하게 뻗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곧 겨울이 되었는 데 그나마 가지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도무지 그 나무에서 새 잎이 나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볼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저 나무에 하루속히 아름다운 잎이 피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또 기도했습니다. ”저 나무에 잎이 나고 가지가 뻗어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밑에서 쉬게 하옵소서“. 그러던 3월 어느날 연한 잎 하나가 뾰족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신기했는지 제가 새벽마다 그 나무를 바라 보았습니다. 4월이 지나 5월이 되자 드디어 잎이 무성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번 목회자 세미나때 수많은 목회자들이 그 나무밑에서 쉬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 느티나무를 보고 제가 깨달았습니다. ”아, 나무는 자라는구나. 살아 있는 나무는 반드시 자라는구나”.

 

어떻습니까? 나무가 자란다면 사람은 어떨까요? 사람도 자랍니다. 사람은 태어나자 마자 자라기 시작하여 25세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그리고 25세부터는 매년 1%씩 노화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25세부터는 노화되는 것이 아니라 성숙되는 것입니다. 육체적 생명력은 감소되지만 정신적 생명력은 더 자랍니다. 죽음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육체적 성장과 함께 정신적 성숙이 멈춘 상태입니다. 더 이상 자랄 수 없어 성장과 성숙이 완전히 멈춘 상태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성장이 멈추면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아직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더 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아직 살아 있는데도 성장을 멈춘 것입니다. 이것을 자폐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폐증이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그런데 이 자폐증도 우리가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오래전 신문에서 자폐증을 극복한 한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이름은 박윤서, 이 아이는 본래 “자폐증” 환자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그를 고쳐보려고 백방으로 데리고 다녔으나 고치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어머니가 직접 키우기로 하고 그때부터 고락을 같이 했습니다. 하도 키우기 어려워 여러번 죽을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하루에 두 세시간 밖에 자지 못하는 아들과 같이 고생하면서 일년 365일, 하루 24시간, 아들이 가는 곳마다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윤석이가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건강해지고 공부도 잘하고 그래서 좋은 대학에 두 군데나 합격했습니다. 공부만 잘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도 좋아졌습니다. 주일날이면 반드시 교회를 빠지지 않습니다. 성격도 명랑하고 밝게 자랐습니다.

 

무엇이 이 아들을 자폐증에서 고쳤을까? 사랑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부모의 평생 소원은 자녀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런 소원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라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자라기를 원합니까? 여러분의 믿음, 여러분의 인격, 여러분의 영적 생명이 자라기를 원합니까?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자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세 단계로 우리의 믿음이 자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아이 단계, 둘째 청년 단계, 셋째 아비 단계. 이 세 단계에 따라 여러분의 인격과 믿음과 영적 생명이 자라나길 바랍니다.

 

아이의 믿음

먼저 12절을 보십시오. 요일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성경은 우리 믿음의 단계를 “자녀”의 단계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자녀”를 헬라어로 “테크논”이라고 합니다. 자녀를 나타내는 말이 성경이 많지만 이 단어는 “아주 작은 자녀”, 곧 “갖 태어난 아이”를 말합니다.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듯이 우리도 영적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성경은 그것을 “거듭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육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듯, 우리의 영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납니다. 두 번째 태어나기 때문에 “다시 나고”,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거듭났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태어나는 것은 언제나 은혜입니다. 태어날 때 우리가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열달동안 품어 많은 고생을 하고 우리를 낳았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그러나 은혜로 태어났으나 자라는 것까지 거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막 핏덩이로 태어나면 그때부터 시작입니다. 핏덩이가 어른이 되려면 많은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선 어린아이는 약합니다. 툭하면 아프고 툭하면 병원갑니다. 엡4장에 의하면 어린아이는 이렇습니다. 엡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 “요동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을 이 처럼 잘 나타내는 말은 없습니다. 어린아이는 몸과 마음이 약하기 때문에 쉽게 요동합니다.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과 모든 교훈의 풍조”에 잘 넘어 갑니다. 궤술은 속이는 것이고 유혹은 나쁜 길로 이끄는 것이고 교훈의 풍조는 세상적 가치관입니다. 어린이들은 판단력이 없기 때문에 늘 속습니다. 늘 유혹에 빠집니다. 세상적 가치관, 세상적 풍조에 늘 마음을 빼앗깁니다. 요즘 성폭력범들이 대낮에 어린이를 유인하려고 대담하게 학교 운동장까지 들어옵니다. 그래서 사고를 냅니다. 그러나 그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은 어린이가 또한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아저씨가 맛있는 것 사줄게” 하면 따라갑니다. 선악에 대한 분별력이 없습니다. 이것이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이는 예쁘지만 매우 이기적입니다. 오로지 자기만 압니다. 엄마가 자기만 안아주고 자기만 사랑해 주기를 바랍니다. 어쩌다 동생을 더 예뻐하면 꼬집고 때립니다. 어린아이 사랑은 또한 이기적입니다. 창6장에 노아 시대의 사랑이 나옵니다. 창6:2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은지라”. 여기서 “아름다움”이란 말은 “나아마”입니다. 육체적,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서로 만나 사랑할 때 그들의 선택한 표준은 육체였습니다. 그나마 한 사람이 아니라 “좋아하는 모든 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좋아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과 다릅니다. like와 love는 다릅니다. 고양이는 쥐를 like 하지만 love 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성숙되지 못하면 사랑도 늘 이렇게 합니다. I love you 는 없고 I need you 만 있습니다. 자기를 주는 사랑은 없고 소유가 목적인 사랑만 합니다. 이렇게 사랑하다 보니까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라는 유행가까지 나옵니다. 통계에 보면 이혼의 40%가량이 결혼한지 5년만에 헤어집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그만 두는 사랑, 그것이 어린아이의 사랑입니다.

 

자기만 아는 어린아이의 특징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납니다. 어린이가 엄마에게 이것 저것 많이 요구하듯이 어린아이 신앙을 가진 사람은 기도를 해도 요구하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하나님을 목적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수단삼아 기도합니다. 이름하여 “자동판매기의 하나님”입니다. 자동판매기는 커피나 음료수가 들어있는 기계에 동전을 넣고 누르면 돈 액수만큼 물건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동판매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지만 우리의 소원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면 안됩니다. 몇 년전 국가 조찬기도회에 갔더니 기도를 맡은 분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대통령이 하나님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이 그를 그의 도구로 사용하옵소서”. 아주 좋은 기도였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내가 하나님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내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나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또한 잘 참지 못합니다. 조금만 고통이 오면 힘들어 합니다. 따라서 어린아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고난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고난없이 자라지 못합니다. 죄와 시험은 구분해야 합니다. 죄는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시험은 감당해야 합니다. 아픔과 상처도 구분해야 합니다. 상처는 서로 주지 말아야 하지만 아픔은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라기 위해서는 아픔도 필요합니다. 대나무의 마디도 나무의 나이테도 아픔을 통해 생깁니다. 별도 충분히 어두어야 보이고 연도 바람이 불어야 납니다. 실수와 훈련도 구분해야 합니다. 실수는 저지르지 않은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훈련은 많이 받을수록 좋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 믿음 가진 사람은 시험에 이기지 못합니다. 아픔을 견디지 못합니다. 훈련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보니까 그 중심에 “자기”가 있습니다.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내가 더 우선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요일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어린이 단계의 믿음의 최고 문제는 죄입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께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로 그 죄가 게으름으로, 자기중심주의와 이기주의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죄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믿고 기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유익과 자기 만족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이것이 어린아이 믿음입니다.

 

청년의 믿음

그러다가 두 번째로 들어가면 청년의 단계가 됩니다. 청년의 믿음은 13절 뒷 부분에 나타납니다. 요일2:13,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슴이니라”. 청년의 믿음은 자기를 알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보니까 자기 속에 악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아무 문제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만 문제가 있는 줄 알았는 데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었습니다. 그 본질은 악이었습니다. 그래서 악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으면 즉시로 모든 일이 잘되고 나도 천사처럼 된다는 오해입니다. 마치 “얍”하고 마술사가 기합을 넣으면 보자기에서 비들기가 나오고 닭이 나오는 식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이런 마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술사도 자기 자식들앞에서는 마술을 안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식들이 아무 것도 안하고 기합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아이들을 보면서 많이 배웁니다. 한번은 아들이 수학문제를 가지고 와서 도와 달라고 합니다. 간신히 한 문제를 풀었습니다. 그랬더니 두 번째 문제를 물어봅니다. 낑낑 거리고 풀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문제를 또 물어 봅니다. 보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네가 풀어봐” 했더니 아들이 한술 더 떠서 말합니다. “아빠, 제가 다른 숙제도 많고 하니 아예 여기에 답을 써 주세요”. 그때 제가 말했습니다. “이제 부터는 네가 해봐. 나 바빠”. 아들은 매우 놀란 눈치였습니다. 자기가 부탁하면 아빠는 항상 도와주리라고 믿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아빠는 아들에게 마술하지 않습니다. 힘들지만 아들이 하게 합니다. 정상적인 아버지라면 다 그렇게 합니다. 다 풀어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믿음의 공식이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영성가 리쳐드 포스터가 한 말입니다. “은혜는 훈련으로, 훈련은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때문입니다. 믿음이 어릴수록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반드시 훈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은혜가 어린아이 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라면 훈련은 청년의 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은혜는 훈련으로 가고, 훈련은 다시 은혜로 가야 합니다. 은혜가 좋은 것이지만 거기에 머물기만 하면 의존적이 됩니다. 훈련이 필요하지만 다시 은혜로 가야 합니다. 율법주의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은혜받고 훈련으로 가고 훈련한 뒤에 또 은혜로 갑니다. 그리고 또 훈련으로 가고 훈련받은 후에 또 은혜로 갑니다. 은혜와 훈련이 교차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믿음이 됩니다.

 

얼마전에도 새 가족으로 몇 달동안 잘 나온 신자 하나가 저를 찾아 왔습니다. 그는 처음 교회 나온 날부터 너무 잘 교회 나왔습니다. 그런데 요 얼마동안 눈에 띄게 잘 안 보입니다. 그가 저에게 찾아와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목사님, 몇 달 전에는 솔직히 제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좋고 기도하면 다 들어주시는 것같고 예배드리면 은혜가 임하고 했는데 요즘은 그렇지가 않아요. 갑자기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하는 잘되던 일도 안돼요. 제 믿음이 떨어져서 그런 것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때 제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믿음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자라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형제가 처음 교회 나올 때는 어린 아이의 믿음이었습니다. 어떤 부모가 어린 아들의 말을 거절하겠습니까? 부모는 아이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줍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면 다 해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하게 합니다. 못해서가 아니라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안하던 일을 자기가 직접 하려니 힘이 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안계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외로운 싸움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제 어린아이 믿음에서 싸우는 믿음으로 올라가셔야 합니다. 싸움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싸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요일2:4절을 펴서 읽어주었습니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자, 보세요. 믿음이 자라면 우리 안에 있는 악이 보입니다. 우리 주변에 강한 자도 보입니다. 우리에게 악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우리 곁에 강한 자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느라 그것들을 미쳐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불쌍히 여겨 그 문제와 우리가 직접 만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형제가 할만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형제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분이 이기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형제의 싸움은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다는 것입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이기셨거든요. 이미 이긴 싸움을 형제는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담대하세요. 승리는 형제의 것입니다“. 그 분의 얼굴이 밝아서 돌아갔습니다.

 

영적 싸움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이 “좋은 습관을 들이는 것”입니다. 이규경이 쓴 “짧은 동화 긴 생각”이란 글이 있습니다. 이렇게 썻습니다. “어떤 사람이 작은 습관을 하나를 만들었다. 그는 그것을 늘 끌고 다녔다. 그 습관이 자라서 그의 삶이 되었다. 지금 그는 그 습관에 끌려 다닌다”. 사람이 처음 습관을 만들지만 나중에는 습관이 사람을 끌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최고 작전은 이것입니다. 잘못된 습관에 안주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교회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게 하고 기도하게 하지만 다만 잘못된 습관에 빠져 있게만 하는 것입니다. 일단 잘못된 습관에만 빠져 있으면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 나가고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해도 마귀는 놀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잘못된 습관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좋은 것은 간단히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베벌리 실즈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갈만한 길에는 언제나 지름길은 없다”. 좋은 길에는 반드시 시간과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일성수는 우리 영혼에서 생명처럼 지켜져야 할 중요한 습관입니다. 주일날 일찍 교회오는 것, 앞자리부터 앉는 것, 수입이 생기면 먼저 하나님께 먼저 떼어 놓는 것, 감사의 이유가 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친절히 인사하는 것, 처음 만난 사람에게 “반갑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인사하는 것,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미소짓고 인사하는 것,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새벽기도가는 것, 하루 한 시간 성경읽고 기도하는 것,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 남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 시간내서 전도, 봉사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습관에서 옵니다. 좋은 습관을 생명처럼 여기고 나쁜 습관은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트루먼 대통령이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독수리처럼 날개 쳐 오르고 싶다면 칠면조와 놀지 말아야 한다“. 나쁜 습관의 폐단을 말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습관이 기도하는 습관입니다. 주기도문에 그런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원하소서”. 왜 주님께서 시험을 없애주지 않고 시험에 들지 말도록 기도하라고 했을까? 왜 주님께서는 악을 발본색원해주지 않고 다만 악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라 하셨을까? 답이 있습니다. 기도는 마술이 아닙니다. 기도는 평생 반복할 영적 습관입니다. 한번의 기도로 없어질 시험은 없습니다. 계속 기도하고 끝까지 기도하고 실패해도 기도하고 넘어져도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요일2:13,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슴이니라”. 악한 자를 이기는 것입니다. 매일 악한 자를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청년 단계의 믿음입니다.

 

아비의 믿음

마지막 단계가 아비의 단계입니다. 13절 첫 부분을 보십시오. 요일2: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믿음의 마지막 단계는 아비의 단계입니다. 이 단계의 특징은 하나님을 아는 단계입니다. “아버지를 앎이요”. “안다”는 말은 “지식으로 안다”는 말이 아닙니다. “경험적으로 안다. 체험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마지막 단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마음으로 사랑하기 보다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젠가 새벽기도하는 데 그런 감동을 받았습니다. “너는 나를 위해 있니? 나와 함께 있니?” 비슷한 말이지만 의미가 달랐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 있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목회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으려면 모세처럼 날마다 시내산에 올라가야 합니다. 모세는 세 단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첫째 불가운데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출3:2절, 호렙산 떨기나무에서 불가운데 만났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 올라가는 데 올라가는 길에는 빽빽한 구름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 자욱한 구름속으로 모세는 8번이나 시내산을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정상에 올랐는 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어둠속에 계셨습니다. 출20:21절입니다.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 뜻밖이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 만나는 과정은 처음은 흑암, 다음은 구름, 마지막이 불이라고 생각합니다. 점점 좋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처음엔 불, 다음엔 구름, 마지막이 흑암입니다. 시내산 정상에 계신 하나님은 흑암속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만나는 순서입니다. 하나님은 갈수록 더 어두운 곳에 계시고 갈수록 더 힘들게 만납니다. 처음에는 잘 보이다가 갈수록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가야 합니다. 일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사역보다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시간보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선물보다 하나님자신이 더 좋아야 합니다.

 

옛날 어느 나라의 왕이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죽기 전에 왕은 세 왕비를 불렀습니다. “내가 그대들에게 한 가지씩 주고 싶으니 소원이 있으면 말하시오”. 한 왕비가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저에게는 아름다운 왕궁을 주옵소서”. 둘째 왕비가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나라의 반을 주옵소서“. 드디어 셋째 왕비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왕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만 지키고 있었습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그대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소? 무엇이든 소원을 말하시오“. 셋째 왕비가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왕이시여, 저에게는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저는 오로지 왕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제 소원은 당신 자신입니다”. 왕이 죽자 셋째 왕비가 모든 것을 차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왕을 가진 자가 왕궁도 갖고 나라도 갖는 것입니다. 믿음도 기도도 목회도 봉사도 다 하나님 갖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소유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최고의 소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자, 하나님을 소유하면 다른 작은 것을 갖기 위해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 하나님을 소유하면 사람에게 사랑 못받는다고 상처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 하나님을 소유하면 힘이 없다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자라야 합니다.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 자기만 아는 어린아이의 믿음에서 싸우는 청년의 믿음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아비의 믿음으로 자라야 합니다. 고전13:11,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버릴 것 버리고 자랄 것은 자라야 합니다. 그리하여 점점 장성하여 예수님의 분량에 이르러야 합니다. 자라기 원합니까? 자라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만큼 자라게 하옵소서.

 

아이의 믿음

요일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엡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창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은지라”.

요일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청년의 믿음

요일2:13,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슴이니라”.

리쳐드 포스터, “은혜는 훈련으로, 훈련은 은혜로(grace to discipline ,discipline to grace)

요일2:4,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요일2:13,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슴이니라”.

 

아비의 믿음

요일2: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출20:21,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

고전13:11,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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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설교] 사랑만한 힘이 없습니다 ( Dawn Prayer Meeting Sermon)

사랑만한 힘이 없습니다

(요일4:7-10)

 

우리 옆에 있는 분에게 말합시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도 사랑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입니다. 사랑만한 힘이 없습니다.

 

최근에 작은 동영상을 보고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아, 사랑의 힘은 위대하구나”. 미국에 뇌성마비와 전신마비로 태어난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릭입니다. 이 아이는 태어날 때 탯줄이 목에 감기는 바람에 뇌에 산소공급이 중단되면서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포기하라고 말했지만 부모는 그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키우다가 12살 때 특수 컴퓨터 장치를 통해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대화하다가 아들이 달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 달리고 싶다는 말에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철인 3종 경기에 참여합니다. 철인 3종경기는 수영(3.9㎞), 싸이클(180.2㎞), 마라톤(42.195㎞)으로 건강한 사람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오직 아들을 위해 철인 3종경기에 도전합니다. 수영할 땐 아들을 고무보트에 태운 채 허리에 끈을 달고 바다를 헤엄쳤고, 싸이클할 땐 아들을 위해 만든 특수 의자에 아들을 태우고 달렸고, 마라톤할 땐 아들이 탄 휠체어를 밀며 달렸습니다. 피나는 노력 끝에 16시간 14분만에 완주했습니다. 관중들은 한 사람도 떠나지 않고 관중석에서 아들과 아버지를 눈물로 맞이했습니다. (영상)

 

(어떻습니까?) 아버지의 사랑이 눈물겹지 않습니까? 나이가 적지 않은 아버지가 오직 아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달리는 모습이 위대하지 않습니까? 이 아버지는 아들을 위하여 그 후에도 같은 철인 3종경기를 6번이나 완주했습니다. 위대하다 못해 거룩한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보고 혹시 “하나님도 나를 저렇게 사랑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세상의 아버지라고 누구나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릭의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은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입니다. 경기가 끝나고 릭이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맞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도 한 마디 했습니다. “아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은 우리가 없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 7절입니다. 요일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그리고 8절입니다. 요일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같이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할까요? 왜 하나님의 사랑만 완전할까요?

 

하나님이 먼저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먼저 찾아 오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필요한 자가 주는 자에게 다가가는 사랑입니다. 은혜를 받을 자가 은혜를 베풀 자에게 요청하는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정반대입니다. 은혜를 베풀 자가 은혜 받을 자에게 다가갑니다.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에게 다가갑니다. 사랑을 가진 자가 사랑이 없는 자에게 다가 갑니다. 9절을 보십시오.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몇 년 전에 서울 방배동에서 아이 하나가 길을 잃었습니다. 가족들이 백방으로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동네 사람 하나가 아침에 물을 버리기 위해 하수구로 갔는 데 속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119를 불러 맨홀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아이 하나가 하수구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 잃어버린 아이였습니다. 제가 그 소식을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아, 그렇다. 하나님도 이렇게 우리에게 오셨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쩌면 하수구와 같습니다. 온갖 쓰레기, 오물, 폐수, 악취가 코를 찌른 하수구와 같습니다. 그 하수구에서 어머니를 잃은 아이가 하염없이 울고 있을 때 하나님이 들어왔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사랑은 먼저 찾아가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무기형을 받은 아들을 위하여 하루도 빠짐없이 면회를 갔다는 어머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평생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하고 사람 죽이고 무기수가 된 아들을 어머니는 왜 못 잊고 매일 면회를 가는 것입니까? 사랑은 먼저 찾아가는 것입니다. 먼저 찾아가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에게 찾아왔습니다.

 

한번 더 용서하셨습니다.

찾아올 뿐 아니라 한번 더 용서하시는 사랑입니다. 일본인, 시오노 나마미가 쓴 “로마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책은 로마제국이 어떻게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세계를 지배해 왔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답중의 하나는 “로마는 전쟁에 패한 장수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는 전쟁에 패한 장수는 그 자리에서 처형합니다. 그러나 로마는 한번 전쟁에 실패했다고 버리지 않습니다. 또 한번 기회를 줍니다. 그러면 다음 전쟁때 목숨걸고 싸워 이기고 돌아옵니다. 그래서 저자는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언제 강해지는가? 용납받을 때 가장 강해진다”.

 

하나님도 우리의 한번의 실수 때문에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대로 처벌하지 않습니다. 롬3:25,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여기서 ”간과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그냥 지나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실수와 죄에도 불구하고 그냥 지나친다는 말입니다. 알아도 모르는 척, 보아도 못 본척, 그렇게 지나가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없는 자처럼 당당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저자세로 계셨기 때문에 우리가 고자세로 사는 것 아십니까? 하나님이 침묵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목소리 높이며 사는 것 아세요? 하나님이 힘을 아끼시기 때문에 우리가 힘있게 사는 것 아세요?

 

책임지고 희생하셨습니다.

또 하나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회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위대한 것은 자기 자신이 대신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화목제라고 합니다. 구약시대 제사중에 화목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소나 양을 성전에 끌고 와서 물로 씻고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누구 누구의 죄를 이 양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이 양은 우리 자신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내가 뒤집어 쓰고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유입니다.

 

사랑의 오해(1)-사랑의 반대는 미움이다

저는 평소에 사랑에 대한 오해가 셋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첫 번째는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라는 오해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라는 오해입니다. 물론 사랑하면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워한다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 사람을 사랑할 힘이 아직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부부관계의 비밀이 여기 있습니다. 많은 부부들이 서로 미워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자세히 들여다 보면 둘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할만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미워하는가 하고 보면 상대방 자신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실수를 미워합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미워합니다. 이것도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는 미워합니다. 죄는 미워하시고 죄인은 사랑하십니다. 죄도 안 미워하시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오해(2) 좋아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오해가 좋아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오해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좋아하지 않는데도 사랑해야 합니까?” 만일 이런 질문은 예수님께 했다면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당연히 사랑해야지”.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 일본 사람 좋아합니까? 대부분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북한 공산당을 좋아합니까? 누구나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좋아하도록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사랑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여러분은 병원의 중환자들 좋아합니까? 일생 전과자로 감옥을 전전하는 사람, 좋아합니까? 지하도에 엎드려 있는 장애인 거지를 좋아합니까? 좋아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적 사랑과 성경적 사랑의 차이가 여기 있습니다. 세상적 사랑은 좋아하는 것만 사랑합니다. 성경적 사랑은 싫어해도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죄 때문에 우리를 다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랑했습니다.

 

사랑의 오해(3) 사랑은 감정이다

가장 큰 오해가 있습니다. 사랑은 감정이라는 오해입니다. 물론 사랑은 감정입니다. 그러나 감정이 사랑이 아닙니다. 감정은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아름답게도 합니다. 그러나 감정이 사랑의 전부는 아닙니다. 많은 부부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부부는 옛날에는 참으로 많이 사랑했어. 지금은 식었어". 그래서 감정이 식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가시고기”로 유명한 작가 조창인은 “사랑으로 나를 채우고”란 그의 책에서 사랑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한 순간의 폭우가 아닙니다.

기나긴 세월의 가랑비에 젖겠다는 각오입니다.

열정은 감정의 폭우입니다.

한 몫에 다시 사랑할 듯싶지만, 이내 그치고 맙니다.

그러나 사랑은 열정이 사라진 뒤

오랜 세월 속에서 천천히 젖는 가랑비입니다.

 

사랑의 감정이 폭우처럼 쏟아져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감정이 사라져도 오랫동안 가랑비 젖듯 스며들어야 사랑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고전13:7절,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여름 한때의 폭우가 아니라 긴 시간 우리속에 젖어드는 가랑비입니다. 마조리 홈즈가 두 종류의 사랑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낭만적 사랑과 책임적 사랑입니다. 두 사랑은 이렇게 다릅니다. “낭만적 사랑은 끝이 보일 때까지 사랑하고 책임적 사랑은 끝까지 가는 사랑이다”. 끝까지 가려면 책임이 따르고 행동이 따르고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뇌성마미, 전신마비 아들 닉을 사랑한 아버지는 말로만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달리고 싶다고 하자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다니던 직장도 그만 두었습니다. 노후에 편하게 살 것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새로 시작했습니다. 아들과 함께 철인3종경기에 나가기 위해 평소에 안타던 자전거도 배웠습니다. 평소에 안 배우던 수영도 배웠습니다. 그리고 기나긴 42.195킬로의 마라톤도 시작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도 말렸습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이 그것 뿐이냐고. 꼭 그렇게 해야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냐고. 그저 잘 먹이고 잘 보호하고 아프면 약먹이고 병원 데려가면 되지 않겠냐고. 그러나 이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좋아하는 것을 해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었습니다. 행동이 따르고 희생이 따랐습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0절을 다시 보세요.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위하여 행동하셨습니다.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냈습니다. 33년간 섬기고 사랑하게 했습니다.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게 했습니다. 책임지고 행동하고 희생했습니다. 롬5:6, 우리가 연약할 때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연약해지셨습니다. 롬5:8,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롬5:10,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했습니다. 행동하고 책임지고 희생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일4:11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의 모든 삶을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다음은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받았습니까? 문제는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 하나님의 사랑이 스며들어야 합니다.

 

가정에서의 하나님의 사랑

특히 가정 생활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 해야 부부들이 서로 낭만적이면 좋겠습니다. 남자들은 좀 더 자상하고 여자들은 좀 더 여성적이면 좋겠습니다. 유대인 격언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 여자들은 상중에라도 화장해라”. 가족이 죽어 상을 만났을 때에도 여성들은 화장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여성은 여성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를 볼 때마다 은혜를 받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을 따라 전전하다가 두 번이나 다른 남자에게 뺏길 뻔 했습니다. 한번은 애굽의 바로에게, 또 한번은 불레셋 왕에게입니다. “그때 사라의 나이가 적어도 60대, 70대는 되었을 텐데 어떻게 사라는 남자들에게 그렇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을까?” 궁금했습니다. 답은 이것입니다. 사라는 늙었어도 여성으로서의 자기관리를 잘 했습니다. 평소에 예쁘게 하고 상냥하게 말하고 여성적이고 교양이 있고, 그러니까 남자들이 좋아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부는 설령 낭만적이 아니더라도 그만 두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입센이 쓴 “인형의 집”에 보면 주인공이 집을 나갑니다. 남자가 자기에게 행복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어디를 가도 남자가 잘해주기만 바라는 여자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남편이 나에게 얼마나 잘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남편을 위해 얼마나 사랑하고 희생하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사랑의 관점을 바꿔야 합니다. 서로 잘 하면 좋습니다. 나는 못하지만 잘 하는 상대방을 만나면 행운아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 행운을 믿고 기다리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잘 하려고 하기 보다 나에게 잘하는 배우자를 꿈꿉니다. 문제는 거기서 생깁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사랑입니다. 내가 잘 하는 사랑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닮은 이유는 부모는 자식이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사랑합니다. 부부의 사랑도 그래야 합니다.

 

요즘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이 이상형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저는 우리 젊은이들이 모두 자기 이상형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상형이 없다고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영원한 이상형은 없습니다. 이상형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일수록 더 빨리 실망합니다. 이상형을 못 찾았어도 이상형과 함께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상형을 만들면 됩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서 이상형을 찾지 않았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상형을 찾았다면 우리를 평생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있는 대로 받아서 평생 그의 이상형으로 만들어 가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어느 대학에 몇 커플들이 데이트합니다. 첫 번째 커플은 얼굴이 시원찮은 여학생과 잘생긴 남학생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저 여자애는 아마도 재벌인가 봐.” 또 하나의 커플이 지나갔습니다. 이번에는 거꾸로 얼굴이 못생긴 남학생과 잘생긴 여학생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저 남자애는 아마도 고시에 합격한 모양이야”. 마지막 커플이 지나갔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두 학생 다 볼품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저 친구들은 정말 사랑하나 봐.” 사랑이라고 다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개인관계, 가정생활에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나라와 민족으로 확대됩니다. 나라와 민족은 우리가 평생 가슴에 안고 사랑해야 할 사랑의 대상입니다. 저는 김소운이라는 시인의 말을 좋아합니다. “내 어머니가 비록 한센씨병 환자일지라도 나는 내 어머니를 사랑한다”. 이 말은 일제시대 일본에 의해 짓밟히고 짓눌려 가난하게 사는 불쌍한 한국민족을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민족을 사랑할 때도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국민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민족을 사랑하지만 다 좋아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전국에 40만명의 점쟁이, 무당, 박수들이 있습니다. 다방 수보다 많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의 약 70%는 아직도 하나님 모르고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만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한 우상이 있습니다.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남은 자본주의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고 북은 공산주의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남은 물질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북은 김일성이를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북은 사상을 하나님처럼 섬기다가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되었고 남은 돈을 하나님처럼 섬기다 정신적으로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특별히 북한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번에 천안함 사건으로 저들이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힘없는 백성들이 한 일은 아닙니다. 북한은 우리가 빼앗길 수 없는 우리 민족의 땅입니다. 1840년 영국의 토마스목사가 26세의 나이로 순교한 곳이 평양 대동강변입니다. 카나다 선교사 매켄지가 한국에 와서 오직 한복만 입고 한식만 먹고 선교하다가 병들어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자기 시체를 교회 옆에다 묻어달라고 유언하고 죽은 곳이 황해도 장연입니다. 1884년 한국인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솔내교회가 개성옆에 솔내에 있습니다. 해방전까지 유일하게 목회자를 양성했던 평양 신학교가 평양에 있었습니다. 1907년 한국교회 대 부흥운동이 시작된 곳도 평양, 원산이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주기철 목사등 수많은 순교자를 낸 곳도 평양입니다. 우리는 사상을 떠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상은 몇 십년있으면 지나갑니다. 그러나 민족은 영원합니다.

 

양화진에 가면 선교사의 묘지가 있습니다. 그중 감동적인 묘비가 하나 있습니다. 모비에 영어로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내게 줄 수 있는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모두 한국에 바치겠다”. 이 비장한 말을 한 사람은 루비 켄트릭이라고 하는 여성 선교사였습니다. 루비 켄트릭은 1908년, 25살의 나이로 한국에 왔습니다. 25살의 처녀로 해외선교에 나선다는 것은 무리였지만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여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개성에 와서 학교 선생으로 봉직하면서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은 그에게 낯선 민족이었습니다. 남자들은 상투를 틀고 다녔고 사람들은 흰옷을 입고 가마를 타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 한국사람이 그에게는 너무 사랑스러웠습니다. 한국 사람만 보면 눈물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어느날 갑자기 병이 났습니다. 그리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가 죽어가면서 한 말이 이것입니다. “내가 죽거든 나를 한국땅에 묻어 주세요”.

 

루비 켄트릭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택사스의 모교회는 통곡을 했고 그 뒤를 따르는 선교지가 줄을 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도전받고 해외로 나간 선교사가 20명은 넘었습니다. 그 25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교한 루비 켄트릭이 남긴 “내게 줄 수 있는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모두 한국에 바치겠다” 는 비문을 보면서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부터 100년전, 미국의 한 처녀가 낯선 나라 한국에 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다 죽었는 데 나는 이 민족의 아들로 태어나 무엇하고 있는가? 나는 적어도 루비 켄트릭만큼, 외국 선교사만큼 이 민족을 사랑하는가?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사랑, 희생하고 책임지고 끝까지 버리지 않는 사랑, 그 사랑을 우리가 받았으니 이제는 우리가 그 사랑을 줄 때입니다. 11절, 요일4:11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남은 생에 이 사랑을 실천하겠습니까? 가정에서 직장에서 지역사회에서 이 민족의 삶속에서 이 사랑을 실천하겠습니까? 사랑이라도 다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만 진짜 사랑입니다. “나로 하나님의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내 영혼에 부어지게 하옵소서. 남은 생애 그 사랑으로 살게 하옵소서”.

(요일4:7-10)

사랑만한 힘이 없습니다

(릭 영상)

 

요일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이 먼저 찾아 오셨습니다.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한번 더 용서하셨습니다.

롬3:25,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책임지고 희생하셨습니다.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회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의 오해(1)-사랑의 반대는 미움이다

사랑의 오해(2) 좋아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의 오해(3) 사랑은 감정이다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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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설교]믿음의 눈으로 예수를 바라보자 ( Dawn Prayer Meeting Sermon)

믿음의 눈으로 예수를 바라보자 / 히12:2

본문: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어느 외판 사원이 여러 곳을 방문할 때마다 늘 물건을 못 파는 상황을 상상하면서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그의 판매 실적은 아주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는 이 두려움을 도저히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말씀 카드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면서 암기하여 그 말씀을 통해 두려움을 쫓아내기로 했습니다. 그 카드에는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마17:20),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등 용기를 북돋아 주는 여러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그 말씀은 외판원에게서 두려움을 몰아 내고 판매 실적을 올리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말씀은 어두운 인생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고 등불이 되고 안내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정신의학자 칼 메닝거(Karl Menninger)는 『믿음을 가진 태도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감을 잃은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학적인 말이자 심리치료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말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현실, 즉 사실에 부딪힌다 해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즉 그 사람의 믿음의 자세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환난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그 환난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믿음의 눈으로 보느냐, 아니면 절망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 1-2)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고 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막4:35-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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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존 맥스웰 목사가 오하이오에서 목회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사냥꾼으로 유명한 교우와 함께 100리쯤 쭉 뻗은 고속도로를 갈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교우의 특별한 면을 발견하고 놀랐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기 다람쥐가 있네요.』 그러나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 저기를 보십시오. 오리가 두 마리나 있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여전히 보지 못했습니다. 『목사님, 사슴을 보십시오.』 『토끼가 지나갔습니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사냥꾼 교우는 십여 마리의 짐승을 봤습니다. 그러나 같은 길을 같은 차를 타고 가면서도 사냥꾼은 쉽게 보는 것을 맥스웰 목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본 것은 오직 고속도로뿐이었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 『믿음의 눈』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이 본 것을 열 사람의 정탐꾼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 123:1)

 

종교개혁자 루터의 이야기입니다. 독일에서는 고학생들 중에 노래를 잘하는 학생들은 남의 집 앞에서 노래를 불러 돈을 받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루터가 부잣집 창문 아래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체격이 크고 무섭게 생긴 사나이가 창문을 열고 뛰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그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주먹질이라도 할 줄 알고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나이는 계속 쫓아왔고 붙잡히게 됐습니다. 공포에 벌벌 떨고 있는 루터에게 그 사람은 주먹이 아닌 돈 뭉치를 내밀었습니다. 장학금을 주려는 따뜻한 마음의 자선가였던 것입니다. 루터는 그때를 회고하면서 『두려움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만사가 모두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고,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감사하고 좋게 보이며,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환경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다르고, 그 해석에 따라 삶이 행복하게 느껴질 수도, 불행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고난은 두려움의 눈으로 보면 나를 파멸케 하는 것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나를 값지게 하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 18)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시119:37)

 

찬송가 357장 (통 39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 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1. 주 믿는 사람 일어나 다 힘을 합하여

이 세상 모든 마귀를 다 쳐서 멸하세

저 앞에 오는 적군을 다 싸워 이겨라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

2. 온 인류 마귀 궤휼로 큰 죄에 빠지니

진리로 띠를 띠고서 늘 기도 드리세

참 믿고 의지하면서 겁없이 나갈 때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

3. 끝까지 이긴 사람은 흰 옷을 입히고

또 영생복을 주시니 참 기쁜 일일세

이 어둔 세상 지나서 저 천성가도록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

<후렴>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어느 날, 걱정과 염려에 사로잡혀 무거운 마음으로 차를 운전할 때였습니다. 횡단보도 앞에 정차해 있는데 옆 차선에 있는 시내버스의 광고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See the unseen』, 곧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세상, 누구도 못 봤던 세상을 보라는 문구였습니다. 그 문구를 보는 순간, 『암담하고 답답해 보이는 현실 뒤에 계시는, 보이지 않지만 살아 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라는 말씀처럼 느껴져 큰 힘과 위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보이는 현실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염려와 걱정에 사로잡혀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순간,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을 열어 주십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걱정, 근심, 두려움이라는 현실뿐 아니라 그 문제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최선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 현실의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헛된 것을 의지하지 않고, 두려움에 떨지 않고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무엇이 참된 것인가를 분별하고 그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걱정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주님 뜻대로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신 주님, 귀한 주님의 이름을 찬양드립니다.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주님만이 나의 기쁨이요 전부임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나는, 가장 행복한 자요, 부요한 자인 것을 또한 믿나이다. 주님만이 저의 지혜시고 의로움이시고 거룩함과 구원이십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도 좇지도 말게 하시며, 영원한 지혜자이신 주님만을 붙들게 하소서. 나는 비록 이렇게 미약하고 어리석지만 하나님께서 제게 역사 하실 때 담대하고 하나님께서 보시기 심히 좋았더라 하실 수 있는 그런 제가 될 수 있을꺼라 믿습니다. 하나님 한분만 바라보고 주님만 생각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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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깨우는 성도의 새벽기도 ( Dawn Prayer Meeting)

 

어둠을 빛으로 이기시고 새벽을 맞게 하시는 하나님!

만물을 새롭게 빚으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오늘 아침 정한 맘을 주시고

정직한 마음으로 새롭게 하여 주시길 간구합니다.

 

하늘의 빛으로 세상과 이웃의 어둠을 밝히 사 고단한 일상에 따스한 체온을 주옵소서!

공의가 검불처럼 여겨지며 정의가 신음하는 부끄러운 세상입니다.

협력과 타협이 썰물처럼 빠져 나간 세상 무대에는 주먹과 욕설이 부끄럼을 모르며

후안무치한 망나니 같이 잘난 사람이 많습니다.

 

잃어버린 양심에 무딘 분별력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어리석은 무리도 적어 보이지 않습니다.

소금과 빛처럼 저희가 새롭게 변하고 믿음을 발하여 세상의 상처와 아픔을 달래며

의를 심는 십자가의 도를 감당하게 하소서!

 

나부터 몸소 실천하여 생활속에 지킴이가 되고 도우미가 되어 살도록 능력을 부어

주시길 간구합니다. 주님 늘 함께 동행하사. 어디에서나 어느 때든지 세상을

이길 힘으로 함께 하소서.

날마다 승리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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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회 대표 기도문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이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새벽 제단에 우리를 인도해 주시니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 이 새벽 저희를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게 하여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자리에서 결코 벗어남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얻는 기도의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

우리도 주님처럼 드리는 삶을 살게 하시사 말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행함과 나눔으로써 기쁨이 되는 성도들이 되게 하시고 언제 어디에서든지 주님의 발자국을 용감히 따를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

각자의 기도제목으로 부르짖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옵소서. 병든자를 치유하여 주시고 문제있는 가정과 직장을 회복하여 주시옵소서. 자녀들에게 학업의 열매, 믿음의 열매,  사랑의 열매가 열리는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오늘도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채워지지 않게 하셔서 간구하는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즐거움이 되게 하소서

단위에서 말씀전하시는 담임목사님! 그 입술을 주장하셔서 우리의 영혼이 새로워지는 승리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고 그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소원을 들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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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

이 고요한 새벽에 주님 앞에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하루를 주님과 함께 시작하오니,

주님과 함께 일하게 하시고

주님과 함께 끝맺게 하옵소서.

이 아침에 나온 모든 심령들이 주의 은총을 받아서 ,

이 하루를 그 은총 속에 살게 하옵소서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  

이 새벽에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온 개인적인 짐, 가정의 짐,

나라의 짐들이 많습니다.

이 무거운 짐들을 다 주 앞에 내려놓으니,

주님께서 대신 져 주시길 원합니다

 

인간의 욕심대로 구하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구하여 이뤄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생명, 가정의 장래, 나라의 운명까지도

주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사오니 ,

주여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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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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