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새벽 기도회 설교] 믿음은 자랍니다 (Special Dawn Prayer Meeting)
요일2:12-14
믿음은 자랍니다
6월은 만물이 자라나는 계절입니다. 작년 가을, 우리 교회 마당에 두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습니다. 느티나무를 심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는 아주 큰 느티나무가 있는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어릴 때 저는 그 나무에 오르락 내리락 하며 꿈을 꿈었습니다. 그 나무에 올라 책을 읽었고 그 나무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았습니다. 세상에 나무가 많지만 느티나무처럼 넉넉한 나무는 없습니다. 그래서 작년에 교회에 나무를 심을 때 느티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심을 때 그 나무는 아무 잎이 없었습니다. 가지만 앙상하게 뻗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곧 겨울이 되었는 데 그나마 가지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도무지 그 나무에서 새 잎이 나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볼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저 나무에 하루속히 아름다운 잎이 피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또 기도했습니다. ”저 나무에 잎이 나고 가지가 뻗어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밑에서 쉬게 하옵소서“. 그러던 3월 어느날 연한 잎 하나가 뾰족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신기했는지 제가 새벽마다 그 나무를 바라 보았습니다. 4월이 지나 5월이 되자 드디어 잎이 무성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번 목회자 세미나때 수많은 목회자들이 그 나무밑에서 쉬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 느티나무를 보고 제가 깨달았습니다. ”아, 나무는 자라는구나. 살아 있는 나무는 반드시 자라는구나”.
어떻습니까? 나무가 자란다면 사람은 어떨까요? 사람도 자랍니다. 사람은 태어나자 마자 자라기 시작하여 25세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그리고 25세부터는 매년 1%씩 노화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25세부터는 노화되는 것이 아니라 성숙되는 것입니다. 육체적 생명력은 감소되지만 정신적 생명력은 더 자랍니다. 죽음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육체적 성장과 함께 정신적 성숙이 멈춘 상태입니다. 더 이상 자랄 수 없어 성장과 성숙이 완전히 멈춘 상태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성장이 멈추면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아직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더 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아직 살아 있는데도 성장을 멈춘 것입니다. 이것을 자폐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폐증이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그런데 이 자폐증도 우리가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오래전 신문에서 자폐증을 극복한 한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이름은 박윤서, 이 아이는 본래 “자폐증” 환자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그를 고쳐보려고 백방으로 데리고 다녔으나 고치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어머니가 직접 키우기로 하고 그때부터 고락을 같이 했습니다. 하도 키우기 어려워 여러번 죽을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하루에 두 세시간 밖에 자지 못하는 아들과 같이 고생하면서 일년 365일, 하루 24시간, 아들이 가는 곳마다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윤석이가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건강해지고 공부도 잘하고 그래서 좋은 대학에 두 군데나 합격했습니다. 공부만 잘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도 좋아졌습니다. 주일날이면 반드시 교회를 빠지지 않습니다. 성격도 명랑하고 밝게 자랐습니다.
무엇이 이 아들을 자폐증에서 고쳤을까? 사랑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부모의 평생 소원은 자녀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런 소원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라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자라기를 원합니까? 여러분의 믿음, 여러분의 인격, 여러분의 영적 생명이 자라기를 원합니까?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자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세 단계로 우리의 믿음이 자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아이 단계, 둘째 청년 단계, 셋째 아비 단계. 이 세 단계에 따라 여러분의 인격과 믿음과 영적 생명이 자라나길 바랍니다.
아이의 믿음
먼저 12절을 보십시오. 요일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성경은 우리 믿음의 단계를 “자녀”의 단계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자녀”를 헬라어로 “테크논”이라고 합니다. 자녀를 나타내는 말이 성경이 많지만 이 단어는 “아주 작은 자녀”, 곧 “갖 태어난 아이”를 말합니다.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듯이 우리도 영적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성경은 그것을 “거듭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육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듯, 우리의 영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납니다. 두 번째 태어나기 때문에 “다시 나고”,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거듭났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태어나는 것은 언제나 은혜입니다. 태어날 때 우리가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열달동안 품어 많은 고생을 하고 우리를 낳았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우리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그러나 은혜로 태어났으나 자라는 것까지 거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막 핏덩이로 태어나면 그때부터 시작입니다. 핏덩이가 어른이 되려면 많은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선 어린아이는 약합니다. 툭하면 아프고 툭하면 병원갑니다. 엡4장에 의하면 어린아이는 이렇습니다. 엡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 “요동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을 이 처럼 잘 나타내는 말은 없습니다. 어린아이는 몸과 마음이 약하기 때문에 쉽게 요동합니다.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과 모든 교훈의 풍조”에 잘 넘어 갑니다. 궤술은 속이는 것이고 유혹은 나쁜 길로 이끄는 것이고 교훈의 풍조는 세상적 가치관입니다. 어린이들은 판단력이 없기 때문에 늘 속습니다. 늘 유혹에 빠집니다. 세상적 가치관, 세상적 풍조에 늘 마음을 빼앗깁니다. 요즘 성폭력범들이 대낮에 어린이를 유인하려고 대담하게 학교 운동장까지 들어옵니다. 그래서 사고를 냅니다. 그러나 그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은 어린이가 또한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아저씨가 맛있는 것 사줄게” 하면 따라갑니다. 선악에 대한 분별력이 없습니다. 이것이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이는 예쁘지만 매우 이기적입니다. 오로지 자기만 압니다. 엄마가 자기만 안아주고 자기만 사랑해 주기를 바랍니다. 어쩌다 동생을 더 예뻐하면 꼬집고 때립니다. 어린아이 사랑은 또한 이기적입니다. 창6장에 노아 시대의 사랑이 나옵니다. 창6:2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은지라”. 여기서 “아름다움”이란 말은 “나아마”입니다. 육체적,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서로 만나 사랑할 때 그들의 선택한 표준은 육체였습니다. 그나마 한 사람이 아니라 “좋아하는 모든 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좋아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과 다릅니다. like와 love는 다릅니다. 고양이는 쥐를 like 하지만 love 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성숙되지 못하면 사랑도 늘 이렇게 합니다. I love you 는 없고 I need you 만 있습니다. 자기를 주는 사랑은 없고 소유가 목적인 사랑만 합니다. 이렇게 사랑하다 보니까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라는 유행가까지 나옵니다. 통계에 보면 이혼의 40%가량이 결혼한지 5년만에 헤어집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그만 두는 사랑, 그것이 어린아이의 사랑입니다.
자기만 아는 어린아이의 특징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납니다. 어린이가 엄마에게 이것 저것 많이 요구하듯이 어린아이 신앙을 가진 사람은 기도를 해도 요구하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하나님을 목적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수단삼아 기도합니다. 이름하여 “자동판매기의 하나님”입니다. 자동판매기는 커피나 음료수가 들어있는 기계에 동전을 넣고 누르면 돈 액수만큼 물건이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동판매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지만 우리의 소원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면 안됩니다. 몇 년전 국가 조찬기도회에 갔더니 기도를 맡은 분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대통령이 하나님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이 그를 그의 도구로 사용하옵소서”. 아주 좋은 기도였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내가 하나님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내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나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또한 잘 참지 못합니다. 조금만 고통이 오면 힘들어 합니다. 따라서 어린아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고난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고난없이 자라지 못합니다. 죄와 시험은 구분해야 합니다. 죄는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시험은 감당해야 합니다. 아픔과 상처도 구분해야 합니다. 상처는 서로 주지 말아야 하지만 아픔은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라기 위해서는 아픔도 필요합니다. 대나무의 마디도 나무의 나이테도 아픔을 통해 생깁니다. 별도 충분히 어두어야 보이고 연도 바람이 불어야 납니다. 실수와 훈련도 구분해야 합니다. 실수는 저지르지 않은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훈련은 많이 받을수록 좋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 믿음 가진 사람은 시험에 이기지 못합니다. 아픔을 견디지 못합니다. 훈련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보니까 그 중심에 “자기”가 있습니다.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내가 더 우선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요일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어린이 단계의 믿음의 최고 문제는 죄입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께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로 그 죄가 게으름으로, 자기중심주의와 이기주의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죄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믿고 기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유익과 자기 만족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이것이 어린아이 믿음입니다.
청년의 믿음
그러다가 두 번째로 들어가면 청년의 단계가 됩니다. 청년의 믿음은 13절 뒷 부분에 나타납니다. 요일2:13,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슴이니라”. 청년의 믿음은 자기를 알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보니까 자기 속에 악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아무 문제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만 문제가 있는 줄 알았는 데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 있었습니다. 그 본질은 악이었습니다. 그래서 악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으면 즉시로 모든 일이 잘되고 나도 천사처럼 된다는 오해입니다. 마치 “얍”하고 마술사가 기합을 넣으면 보자기에서 비들기가 나오고 닭이 나오는 식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이런 마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술사도 자기 자식들앞에서는 마술을 안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식들이 아무 것도 안하고 기합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아이들을 보면서 많이 배웁니다. 한번은 아들이 수학문제를 가지고 와서 도와 달라고 합니다. 간신히 한 문제를 풀었습니다. 그랬더니 두 번째 문제를 물어봅니다. 낑낑 거리고 풀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문제를 또 물어 봅니다. 보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네가 풀어봐” 했더니 아들이 한술 더 떠서 말합니다. “아빠, 제가 다른 숙제도 많고 하니 아예 여기에 답을 써 주세요”. 그때 제가 말했습니다. “이제 부터는 네가 해봐. 나 바빠”. 아들은 매우 놀란 눈치였습니다. 자기가 부탁하면 아빠는 항상 도와주리라고 믿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아빠는 아들에게 마술하지 않습니다. 힘들지만 아들이 하게 합니다. 정상적인 아버지라면 다 그렇게 합니다. 다 풀어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믿음의 공식이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영성가 리쳐드 포스터가 한 말입니다. “은혜는 훈련으로, 훈련은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때문입니다. 믿음이 어릴수록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반드시 훈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은혜가 어린아이 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라면 훈련은 청년의 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은혜는 훈련으로 가고, 훈련은 다시 은혜로 가야 합니다. 은혜가 좋은 것이지만 거기에 머물기만 하면 의존적이 됩니다. 훈련이 필요하지만 다시 은혜로 가야 합니다. 율법주의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은혜받고 훈련으로 가고 훈련한 뒤에 또 은혜로 갑니다. 그리고 또 훈련으로 가고 훈련받은 후에 또 은혜로 갑니다. 은혜와 훈련이 교차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믿음이 됩니다.
얼마전에도 새 가족으로 몇 달동안 잘 나온 신자 하나가 저를 찾아 왔습니다. 그는 처음 교회 나온 날부터 너무 잘 교회 나왔습니다. 그런데 요 얼마동안 눈에 띄게 잘 안 보입니다. 그가 저에게 찾아와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목사님, 몇 달 전에는 솔직히 제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좋고 기도하면 다 들어주시는 것같고 예배드리면 은혜가 임하고 했는데 요즘은 그렇지가 않아요. 갑자기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하는 잘되던 일도 안돼요. 제 믿음이 떨어져서 그런 것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때 제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믿음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자라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형제가 처음 교회 나올 때는 어린 아이의 믿음이었습니다. 어떤 부모가 어린 아들의 말을 거절하겠습니까? 부모는 아이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줍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면 다 해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하게 합니다. 못해서가 아니라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안하던 일을 자기가 직접 하려니 힘이 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안계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외로운 싸움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제 어린아이 믿음에서 싸우는 믿음으로 올라가셔야 합니다. 싸움을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싸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요일2:4절을 펴서 읽어주었습니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자, 보세요. 믿음이 자라면 우리 안에 있는 악이 보입니다. 우리 주변에 강한 자도 보입니다. 우리에게 악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우리 곁에 강한 자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느라 그것들을 미쳐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불쌍히 여겨 그 문제와 우리가 직접 만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형제가 할만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형제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분이 이기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형제의 싸움은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다는 것입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이기셨거든요. 이미 이긴 싸움을 형제는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담대하세요. 승리는 형제의 것입니다“. 그 분의 얼굴이 밝아서 돌아갔습니다.
영적 싸움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이 “좋은 습관을 들이는 것”입니다. 이규경이 쓴 “짧은 동화 긴 생각”이란 글이 있습니다. 이렇게 썻습니다. “어떤 사람이 작은 습관을 하나를 만들었다. 그는 그것을 늘 끌고 다녔다. 그 습관이 자라서 그의 삶이 되었다. 지금 그는 그 습관에 끌려 다닌다”. 사람이 처음 습관을 만들지만 나중에는 습관이 사람을 끌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최고 작전은 이것입니다. 잘못된 습관에 안주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교회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게 하고 기도하게 하지만 다만 잘못된 습관에 빠져 있게만 하는 것입니다. 일단 잘못된 습관에만 빠져 있으면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 나가고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해도 마귀는 놀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잘못된 습관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좋은 것은 간단히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베벌리 실즈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갈만한 길에는 언제나 지름길은 없다”. 좋은 길에는 반드시 시간과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일성수는 우리 영혼에서 생명처럼 지켜져야 할 중요한 습관입니다. 주일날 일찍 교회오는 것, 앞자리부터 앉는 것, 수입이 생기면 먼저 하나님께 먼저 떼어 놓는 것, 감사의 이유가 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친절히 인사하는 것, 처음 만난 사람에게 “반갑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인사하는 것,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미소짓고 인사하는 것,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새벽기도가는 것, 하루 한 시간 성경읽고 기도하는 것,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 남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 시간내서 전도, 봉사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습관에서 옵니다. 좋은 습관을 생명처럼 여기고 나쁜 습관은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트루먼 대통령이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독수리처럼 날개 쳐 오르고 싶다면 칠면조와 놀지 말아야 한다“. 나쁜 습관의 폐단을 말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습관이 기도하는 습관입니다. 주기도문에 그런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원하소서”. 왜 주님께서 시험을 없애주지 않고 시험에 들지 말도록 기도하라고 했을까? 왜 주님께서는 악을 발본색원해주지 않고 다만 악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라 하셨을까? 답이 있습니다. 기도는 마술이 아닙니다. 기도는 평생 반복할 영적 습관입니다. 한번의 기도로 없어질 시험은 없습니다. 계속 기도하고 끝까지 기도하고 실패해도 기도하고 넘어져도 다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요일2:13,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슴이니라”. 악한 자를 이기는 것입니다. 매일 악한 자를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청년 단계의 믿음입니다.
아비의 믿음
마지막 단계가 아비의 단계입니다. 13절 첫 부분을 보십시오. 요일2: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믿음의 마지막 단계는 아비의 단계입니다. 이 단계의 특징은 하나님을 아는 단계입니다. “아버지를 앎이요”. “안다”는 말은 “지식으로 안다”는 말이 아닙니다. “경험적으로 안다. 체험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마지막 단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마음으로 사랑하기 보다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젠가 새벽기도하는 데 그런 감동을 받았습니다. “너는 나를 위해 있니? 나와 함께 있니?” 비슷한 말이지만 의미가 달랐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 있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목회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으려면 모세처럼 날마다 시내산에 올라가야 합니다. 모세는 세 단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첫째 불가운데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출3:2절, 호렙산 떨기나무에서 불가운데 만났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 올라가는 데 올라가는 길에는 빽빽한 구름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 자욱한 구름속으로 모세는 8번이나 시내산을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정상에 올랐는 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어둠속에 계셨습니다. 출20:21절입니다.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 뜻밖이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 만나는 과정은 처음은 흑암, 다음은 구름, 마지막이 불이라고 생각합니다. 점점 좋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처음엔 불, 다음엔 구름, 마지막이 흑암입니다. 시내산 정상에 계신 하나님은 흑암속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만나는 순서입니다. 하나님은 갈수록 더 어두운 곳에 계시고 갈수록 더 힘들게 만납니다. 처음에는 잘 보이다가 갈수록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가야 합니다. 일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사역보다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시간보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선물보다 하나님자신이 더 좋아야 합니다.
옛날 어느 나라의 왕이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죽기 전에 왕은 세 왕비를 불렀습니다. “내가 그대들에게 한 가지씩 주고 싶으니 소원이 있으면 말하시오”. 한 왕비가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저에게는 아름다운 왕궁을 주옵소서”. 둘째 왕비가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나라의 반을 주옵소서“. 드디어 셋째 왕비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왕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만 지키고 있었습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그대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소? 무엇이든 소원을 말하시오“. 셋째 왕비가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왕이시여, 저에게는 아무 소원도 없습니다. 저는 오로지 왕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제 소원은 당신 자신입니다”. 왕이 죽자 셋째 왕비가 모든 것을 차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왕을 가진 자가 왕궁도 갖고 나라도 갖는 것입니다. 믿음도 기도도 목회도 봉사도 다 하나님 갖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소유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최고의 소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자, 하나님을 소유하면 다른 작은 것을 갖기 위해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 하나님을 소유하면 사람에게 사랑 못받는다고 상처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 하나님을 소유하면 힘이 없다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자라야 합니다.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 자기만 아는 어린아이의 믿음에서 싸우는 청년의 믿음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아비의 믿음으로 자라야 합니다. 고전13:11,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버릴 것 버리고 자랄 것은 자라야 합니다. 그리하여 점점 장성하여 예수님의 분량에 이르러야 합니다. 자라기 원합니까? 자라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만큼 자라게 하옵소서.
아이의 믿음
요일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엡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창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은지라”.
요일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청년의 믿음
요일2:13,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슴이니라”.
리쳐드 포스터, “은혜는 훈련으로, 훈련은 은혜로(grace to discipline ,discipline to grace)
요일2:4,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요일2:13,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슴이니라”.
아비의 믿음
요일2: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출20:21,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
고전13:11,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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