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회설교] 신앙생활은 경주하는 것과 같다
신앙생활은 경주하는 것과 같다
히브리서 12:1-2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으며,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성경은 신앙생활을 비유적으로 많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첫째, 신앙인은 나그네입니다. 이 세상은 잠시 지나치는 곳이고 목적지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둘째, 신앙인은 약혼녀입니다. 신랑은 예수님이시고 지금은 혼인잔치를 위하여 준비하는 때입니다. 셋째, 신앙인은 군인입니다. 대장은 주님이시고, 훈련을 통해서 정병이 되어가며, 적은 원수 마귀입니다. 넷째, 신앙인은 밭입니다. 좋은 밭이 되어야 열매가 풍성합니다. 길가나 돌밭 그리고 가시밭이 되면 안 됩니다.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다섯째, 신앙인은 성전입니다.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하지만 아직 완성되진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지어져가야 합니다. 현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섯째, 신앙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입니다. 지체가 몸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처럼 교회 없는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지체에게 나 홀로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연합이 사는 길입니다. 일곱째, 신앙인은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우리는 동역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분의 뜻을 위하여 헌신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 외에도 다양한 비유들을 통해서 신앙생활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신앙생활은 경주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본문을 통해서 신앙의 경주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1절).
스포츠 경기장에서는 허다한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선수들을 응원을 합니다. 신앙의 경기도 허다한 사람들이 구경을 하며 응원을 합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 스포츠의 관중들은 실제 선수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경주는 실제 선수생활을 했었고 이미 승리한 사람들이 관중이라는 것입니다.
히 11장과 히 12장은 편의상 장을 구분해 놓은 것입니다. 본래는 장과 절이 구분이 없었습니다. 히 11장과 12장은 따로 떨어진 문서가 아니라 연결된 내용입니다. 12장 1절을 ‘이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12장은 11장과 연속적으로 봐야 합니다.
히 11장에서는 성경에 나왔던 대표적인 믿음의 선배들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들은 비록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했으나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음을 지켰고 이미 영원한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승리의 면류관을 받았고 하늘의 위로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여기 나오는 허다한 증인들은 히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과 히 11장에 기록 되지는 않았지만 믿음의 경주에서 이미 승리하고 이미 천국에 들어간 수많은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히 11:35이하에 보면 그분들은 이 세상에서 신앙의 경주를 하며 온갖 어려움을 이겨낸 분들입니다. 히 11:16절에 보면 그들은 그런 어려운 중에도 더 나은 본향인 천국을 사모했습니다. 하나님은 온갖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천국을 사모하는 그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그 성이 바로 천국입니다. 히 11:40에서는 천국을 아주 간단하게 표현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천국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좋은 것들로 충만한 곳입니다.
신앙의 경주를 응원하는 이분들은 이미 천국에 들어간 분들입니다. 이미 천국의 안식을 경험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이 응원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내용으로 응원을 할까요? 제가 이미 천국에 들어갔고 천국의 안식을 누리고 있는 입장이라면 무슨 내용으로 응원을 할까요? “힘내세요. 저도 땅에서 힘들었지만 참았어요. 비록 땅에서 믿음을 지키느라고 고생은 했지만 천국에 와서 보니 인내하길 잘했어요. 힘내세요. 천국은 너무 좋아요. 너무 너무 행복해요. 조금만 인내하세요. 여기에는 당신을 위한 처소가 준비되고 있어요. 힘내세요” 신앙의 경주에는 우리를 응원하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2.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1절).
1절에 보니 신앙의 경주를 하는 사람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경주하라고 말씀합니다.
경주하는 사람이 무거운 갑옷을 입고 뛴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습니까? 당사자는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벗어버려야지요. 그래야 잘 달릴 수 있습니다. 선수가 구두 신고, 넥타이 매고, 양복 입고, 가방 들고 뛴다고 생각해보세요. 잘 달릴 수 있겠습니까? 무거운 것은 다 벗어야 합니다. 경주하는데 방해되는 것은 다 짐입니다. 벗어야 합니다.
선수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몸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저항을 덜 받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기록을 낼 수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방해되는 것들은 과감하게 내려놓아야 합니다.
신앙의 경주를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몇 가지 살펴봅시다.
첫째, 죄가 우리를 누르는 무거운 짐입니다. 창 4:13에 보면 가인이 고백했습니다.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죄는 우리를 짓눌러 지치게 합니다. 다윗은 시 38:4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죄의 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 됩니다. 사 53:6에서는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마 1:21에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 되셨을 때에 천사가 요셉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줄 때의 내용이 나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주님의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들을 죄의 짐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성육신 하셔서 33년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죄의 짐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엡 1:7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래서 예수님은 마 11:28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혹시 무거운 죄에 짓눌려 있다면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를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흰 눈처럼 맑게 해주실 것입니다. 요일 1:9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죄가 우리를 누르는 무거운 짐입니다만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한 창녀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몸을 팔고 있었지만 죄책감은 천근만근 날마다 때마다 언제나 그의 마음을 무겁게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이 죄책감은 육체적인 병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이제 배는 불룩하여 치료불능의 판결을 받고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생이 너무나 허무하였습니다. 이대로 죽는다고 생각하니 인생이 억울하였습니다. 그 창녀는 병석에서 전도를 받았습니다. 어느 부흥회에 참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 분이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말씀이 신비롭게 들렸습니다. 그 창녀는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예수님! 정말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셨다면 내 죄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까? 정말 그렇다면 내 죄도 받아주시옵소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기도를 하는 순간 배가 편안해짐을 확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배가 점점 정상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평안이 자기를 덮어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고백했습니다. “정말이다. 그 분 예수는 내 죄도 짊어지셨다.” 그의 배에 평안이 왔습니다. 죄의 짐은 주님이 해결하십니다.
둘째, 걱정, 근심, 염려가 무거운 짐입니다. 찬송가 369장 1절만 불러봅시다. “죄 짐 맡은 우리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받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걱정근심 무거운 짐은 주님을 믿고 맡기면 해결 됩니다. 요 14:1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벧전 5:7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여기서 ‘맡기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피립토’라는 말인데 ‘던지다. 내던지다’라는 뜻입니다. 내 어께에 있는 무거운 짐 때문에 너무 힘이 들어서 그 짐을 내던져버렸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 짐의 무게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걱정과 근심, 염려를 맡기는 것도 똑같습니다. 믿음으로 맡겼다면 그 다음부터는 그 짐으로부터 자유하는 것입니다.
믿고 맡겼다고 말은 하는데 아직도 걱정이 되고 근심과 염려가 있다면 맡기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삿짐센터에 전화를 해서 이사를 부탁해놓고 자기가 짐을 싸고 자기가 짐을 나르는 사람과 같습니다. 부탁했으면 이삿짐센터에서 사람들이 나올 것이고 그 사람들이 이사를 해줄 것이니 나는 자유해야 정상입니다.
6.25가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 할머니가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미군트럭이 할머니 앞에 섰습니다. 운전병이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게 길을 가는 것이 안쓰러워서 할머니를 차에 태워드리려고 차를 세운 것입니다. 미군운전병은 할머니를 태우고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백미러로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할머니는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중심을 잡느라고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운전병이 차를 세우고 할머니에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왜 짐을 머리에 이고 계세요. 바닥에 내려놓으세요” 할머니의 대답이 기가 막혔다고 합니다. “내가 차에 탄 것도 미안한데 어떻게 짐까지 내려놔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예화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이렇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걱정과 근심, 염려를 주님에게 맡긴다고 기도하지만 여전히 내가 머리에 이고 낑낑거리고 있습니다.
믿고 맡기면 주님이 돌봐주십니다. 벧전 5:7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돌보신다’는 말은 ‘멜레이’란 말인데 이 말은 엄마가 갓난아기를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아기는 염려가 없습니다. 염려하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아기는 엄마가 책임집니다. 염려, 근심, 걱정 다 주님에게 맡기십시오.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우리의 염려, 근심, 걱정은 주님에게 맡기고 우리는 주님을 높이면 됩니다. 그분이 하실 것이니 그분을 찬송하면 됩니다. 그분이 하실 것이니 그분에게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대군을 이끌고 유럽을 휩쓸고 있을 때, 오스트리아의 국경 도시인 펠드리히를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펠드리히 시에서는 비상 시의회를 소집하고 항복 여부를 논의하였는데 대다수 시의원들의 의견은 미리 항복해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데로 모아졌습니다. 그때 교회의 지도자 한사람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부활주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우리의 힘만을 믿는다면 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긴다면 살 길이 열릴 것입니다. 무서워 떨고만 있지 말고 교회의 종을 힘껏 치고 부활절 예배를 드립시다. 그리고 그 뒷일은 하나님께 맡깁시다”라고 말했습니다.
드디어 펠드리히 시에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찬송소리가 메아리치기 시작했습니다. 종소리와 찬송소리는 프랑스군 진영에까지 울려 퍼졌습니다. 프랑스 군대는 밤사이에 오스트리아 군대가 도착했기 때문에 울리는 기쁨의 종소리와 노래 소리일 것이라고 판단해서 공격을 취소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말았습니다. 이 결과는 주님이 돌봐주신 결과입니다. 펠드리히 사람들이 믿고 맡긴 결과입니다. 우리도 주님에게 맡깁시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립시다. 그리고 주님이 하실 것을 믿고 감사하고 찬송하며 예배로 영광을 돌립시다.
3. 인내로써 경주하라(1절).
신앙의 경주를 하면서 인내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신앙의 경주에는 힘든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어떤 운동이 가장 힘들 것 같습니까? 체력소모가 가장 많은 운동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미국 스포츠사이트 ESPN은 2010년 말 8명의 전문가들이 60개 종목을 대상으로 난이도가 높은 정도를 수치화했습니다. 인내력, 내구력, 힘, 스피드, 긴장, 유연성, 민첩성 등 10개 항목을 10점 만점으로 계산했습니다. 이중 복싱이 72.375점을 받아 힘든 운동 1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또한, 여러 명이 함께 하는 단체전을 제외하고 개인전으로 오랫동안 경기하면서 체력소모가 심한 운동은 ‘테니스’라고 합니다. 언뜻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톤을 떠올릴 수 있지만, 잘 뛰는 선수들은 2시간 조금 더 걸리면 레이스를 마칩니다. 그러나 테니스는 제한시간 규정이 없어 5시간 가까이 경기를 합니다. 그래서 테니스와 복싱을 지옥의 스포츠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테니스와 복싱보다 더 힘든 것이 신앙의 경주입니다. 테니스나 복싱은 몇 시간이면 끝나지만 신앙의 경주는 일생을 해야 하는 경주입니다. 테니스나 복싱은 상대가 한 명이지만 신앙의 경주는 적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거기다가 신앙의 적인 귀신들은 눈에 보이지 않게 활동을 합니다.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야하기 때문에 힘든 일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경주에는 인내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둘째, 신앙의 경주는 완주해야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스포츠 경기는 끝까지 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상대보다 압도적으로 앞서서 가더라도 중간에 포기하면 지는 것입니다.
마라톤은 42.195km를 달려야 합니다. 마라톤의 기록은 아직 2시간대를 깨지 못한 것 같습니다. 케냐의 마라토너 데니스 키메토사가 세운 기록이 2시간 2분 57초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42.19km를, 골인 지점 5m를 앞까지 1시간 30분 만에 달렸다고 가정을 합시다. 엄청난 기록입니다. 이제 5m만 달리면 세계신기록입니다. 그런데 그 선수가 5m 앞에서 인내하지 못하고 경기를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잘 달린 것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아무리 잘 달려왔어도 중간에 포기하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평소에 신앙생활 잘 했던 것 같았는데 죽음 직전에 인내하지 못하고 믿음을 버렸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무조건 끝가지 가야 합니다.
과거에 어느 집사님의 기도 제목 중에 하나가 ‘끝까지 믿음을 지키게 하옵소서’였습니다. 늘 기도제목을 내면 그 기도제목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특별기도회를 할 때도 그 기도제목을 내놓았고, 송구영신예배 때마다 그 기도제목을 내놓았습니다. 그분은 참 지혜로운 분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완주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끝까지 인내하시길 바랍니다.
셋째, 인내하면 반드시 합당한 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약 1:4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인내의 결과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김연아 선수는 7살에 피겨를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평균 6번 1년에 1,800번 넘어졌습니다. 매일 아침 9시에 운동을 시작해서 늦은 시간까지 하루 10시간이 넘는 훈련을 했습니다. 그 결과 세계적인 선수가 된 것입니다. 김연아 선수가 운동을 하면서 포기하고 싶은 때가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많았을까요 몇 번 없었을까요? 포기하고 싶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을 겁니다. 만약에 김연아 선수가 중간에 포기했다면 지금의 명성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포기하고 싶어도 참고 또 참으면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천성길은 험한 길입니다. 천국은 너무 좋지만 천국까지 가는 길은 험한 길이 많습니다. 가시밭도 많습니다. 때로는 눈물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신앙의 경주에서도 좌절하거나 중단하지 않는 끈기가 필요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참을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산에서 조난당한 사람은 조난당한 현장에서 죽는 경우가 드물다고 합니다. 대부분 마을 가까이 내려와서 죽는 경우가 많답니다. 물론 조난당한 사람은 자신이 마을 인근까지 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는 도저히 안 되겠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후 모든 것을 포기해버림으로써 죽음을 맞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산악전문인들은 ‘마지막이라고 느꼈을 때 30분만 더 버텨라’고 가르친답니다.
물은 100도가 되어야 끓기 시작합니다. 증기기관차는 수증기 게이지가 212도를 가리켜야 움직인다고 합니다. 99도에는 물이 끓지 않고, 211도에서는 기차가 움직이지 않는답니다. 고작 1도 차이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더 이상 길이 없다 싶을 때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여기에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한 건물의 입구에서 꽃을 파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얼굴에 주름이 많고 옷차림도 허름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한번은 건물의 주인이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시나 보죠? 표정이 항상 밝아 보여요.” 그러자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제 걱정을 트럭에 담으면 아마 100대 분량도 더 될 것입니다.” 부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습니까? 무슨 특별한 비결이 있나요?” 할머니는 행복한 삶의 비결을 들려주었습니다. “내게 특별한 비결이 하나 있어요. 저는 고통이 닥치면 예수님께서 무덤에 머물러 계셨던 사흘을 생각하면서 사흘 동안 기다립니다. 사흘 뒤에는 어김없이 새로운 해가 뜬답니다.”
우리가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고민 중 90%이상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들입니다. 사흘만 인내하면 대부분의 문제는 자연히 해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 하십니다. 갈 6:9은 말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은 인내하는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4.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2절).
신앙생활을 실족하지 않고 하려면 주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돌풍을 만났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주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오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에게 외쳤습니다. “주님, 주님이시면 저를 오라고 해주세요”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라” 베드로는 담대하게 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을 바라보며 물위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물위를 걷는 기적이 베드로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보고 걷던 베드로가 성난 파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파도를 보는 순간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볼 때는 물위를 걸었는데 파도를 바라보니 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성난 파도가 많습니다. 어려운 환경의 파도,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의 파도, 사회생활 중에 겪는 힘든 일들의 파도, 질병의 파도 등 다양한 파도가 쉬지 않고 밀려오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세상의 파도를 보지 말고 파도를 초월하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사격선수는 시합을 할 때 표적만 뚫어지게 바라봅니다. 누가 응원을 하는지, 옆 선수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신경 쓰지 않고 표적만 바라봅니다. 우리는 주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주님 안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주님과 함께 만나야 합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교회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예수님에게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부터 하였다고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집이니 주님이 계시다고 믿고 인사부터 하였습니다.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교회에 오면 먼저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부터 해보실래요? 참 좋은 습관입니다. 그런데 사실 주님은 어디든지 계십니다. 교회에 계신 것처럼 가정에도 계시고, 회사에도 계시고, 학교에도 계십니다. 우리는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우리도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어떤 아이가 사과를 먹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얘야, 어디서 그 사과를 얻었니?”, “과일 가게에서요”, “아저씨가 주시던?”, “아니, 안 주셨어요, 아무도 보지 않기 때문에 갖고 왔어요.” 황당한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뭐?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하늘에서 하나님이 보고 계셔.”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괜찮아요, 가게에는 지붕이 있으니까 하나님도 못 보셨어요”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을 의식하며 ,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경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1.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1절).
2.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1절).
첫째, 죄가 우리를 누르는 무거운 짐입니다.
둘째, 걱정, 근심, 염려가 무거운 짐입니다.
3. 인내로써 경주하라(1절).
첫째, 신앙의 경주에는 힘든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둘째, 신앙의 경주는 완주해야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인내하면 반드시 합당한 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4.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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