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설교] 사랑만한 힘이 없습니다 ( Dawn Prayer Meeting Sermon)

사랑만한 힘이 없습니다

(요일4:7-10)

 

우리 옆에 있는 분에게 말합시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도 사랑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입니다. 사랑만한 힘이 없습니다.

 

최근에 작은 동영상을 보고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아, 사랑의 힘은 위대하구나”. 미국에 뇌성마비와 전신마비로 태어난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릭입니다. 이 아이는 태어날 때 탯줄이 목에 감기는 바람에 뇌에 산소공급이 중단되면서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포기하라고 말했지만 부모는 그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키우다가 12살 때 특수 컴퓨터 장치를 통해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대화하다가 아들이 달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 달리고 싶다는 말에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철인 3종 경기에 참여합니다. 철인 3종경기는 수영(3.9㎞), 싸이클(180.2㎞), 마라톤(42.195㎞)으로 건강한 사람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오직 아들을 위해 철인 3종경기에 도전합니다. 수영할 땐 아들을 고무보트에 태운 채 허리에 끈을 달고 바다를 헤엄쳤고, 싸이클할 땐 아들을 위해 만든 특수 의자에 아들을 태우고 달렸고, 마라톤할 땐 아들이 탄 휠체어를 밀며 달렸습니다. 피나는 노력 끝에 16시간 14분만에 완주했습니다. 관중들은 한 사람도 떠나지 않고 관중석에서 아들과 아버지를 눈물로 맞이했습니다. (영상)

 

(어떻습니까?) 아버지의 사랑이 눈물겹지 않습니까? 나이가 적지 않은 아버지가 오직 아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달리는 모습이 위대하지 않습니까? 이 아버지는 아들을 위하여 그 후에도 같은 철인 3종경기를 6번이나 완주했습니다. 위대하다 못해 거룩한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보고 혹시 “하나님도 나를 저렇게 사랑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세상의 아버지라고 누구나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릭의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은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입니다. 경기가 끝나고 릭이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맞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도 한 마디 했습니다. “아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은 우리가 없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 7절입니다. 요일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그리고 8절입니다. 요일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같이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할까요? 왜 하나님의 사랑만 완전할까요?

 

하나님이 먼저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먼저 찾아 오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필요한 자가 주는 자에게 다가가는 사랑입니다. 은혜를 받을 자가 은혜를 베풀 자에게 요청하는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정반대입니다. 은혜를 베풀 자가 은혜 받을 자에게 다가갑니다.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에게 다가갑니다. 사랑을 가진 자가 사랑이 없는 자에게 다가 갑니다. 9절을 보십시오.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몇 년 전에 서울 방배동에서 아이 하나가 길을 잃었습니다. 가족들이 백방으로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동네 사람 하나가 아침에 물을 버리기 위해 하수구로 갔는 데 속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119를 불러 맨홀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아이 하나가 하수구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 잃어버린 아이였습니다. 제가 그 소식을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아, 그렇다. 하나님도 이렇게 우리에게 오셨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쩌면 하수구와 같습니다. 온갖 쓰레기, 오물, 폐수, 악취가 코를 찌른 하수구와 같습니다. 그 하수구에서 어머니를 잃은 아이가 하염없이 울고 있을 때 하나님이 들어왔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사랑은 먼저 찾아가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무기형을 받은 아들을 위하여 하루도 빠짐없이 면회를 갔다는 어머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평생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하고 사람 죽이고 무기수가 된 아들을 어머니는 왜 못 잊고 매일 면회를 가는 것입니까? 사랑은 먼저 찾아가는 것입니다. 먼저 찾아가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에게 찾아왔습니다.

 

한번 더 용서하셨습니다.

찾아올 뿐 아니라 한번 더 용서하시는 사랑입니다. 일본인, 시오노 나마미가 쓴 “로마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책은 로마제국이 어떻게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세계를 지배해 왔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답중의 하나는 “로마는 전쟁에 패한 장수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는 전쟁에 패한 장수는 그 자리에서 처형합니다. 그러나 로마는 한번 전쟁에 실패했다고 버리지 않습니다. 또 한번 기회를 줍니다. 그러면 다음 전쟁때 목숨걸고 싸워 이기고 돌아옵니다. 그래서 저자는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언제 강해지는가? 용납받을 때 가장 강해진다”.

 

하나님도 우리의 한번의 실수 때문에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대로 처벌하지 않습니다. 롬3:25,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여기서 ”간과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그냥 지나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실수와 죄에도 불구하고 그냥 지나친다는 말입니다. 알아도 모르는 척, 보아도 못 본척, 그렇게 지나가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없는 자처럼 당당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저자세로 계셨기 때문에 우리가 고자세로 사는 것 아십니까? 하나님이 침묵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목소리 높이며 사는 것 아세요? 하나님이 힘을 아끼시기 때문에 우리가 힘있게 사는 것 아세요?

 

책임지고 희생하셨습니다.

또 하나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회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위대한 것은 자기 자신이 대신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화목제라고 합니다. 구약시대 제사중에 화목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소나 양을 성전에 끌고 와서 물로 씻고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누구 누구의 죄를 이 양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이 양은 우리 자신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내가 뒤집어 쓰고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유입니다.

 

사랑의 오해(1)-사랑의 반대는 미움이다

저는 평소에 사랑에 대한 오해가 셋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첫 번째는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라는 오해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라는 오해입니다. 물론 사랑하면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워한다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 사람을 사랑할 힘이 아직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부부관계의 비밀이 여기 있습니다. 많은 부부들이 서로 미워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자세히 들여다 보면 둘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할만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미워하는가 하고 보면 상대방 자신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실수를 미워합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미워합니다. 이것도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는 미워합니다. 죄는 미워하시고 죄인은 사랑하십니다. 죄도 안 미워하시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오해(2) 좋아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오해가 좋아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오해입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좋아하지 않는데도 사랑해야 합니까?” 만일 이런 질문은 예수님께 했다면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당연히 사랑해야지”.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 일본 사람 좋아합니까? 대부분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북한 공산당을 좋아합니까? 누구나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좋아하도록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사랑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여러분은 병원의 중환자들 좋아합니까? 일생 전과자로 감옥을 전전하는 사람, 좋아합니까? 지하도에 엎드려 있는 장애인 거지를 좋아합니까? 좋아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적 사랑과 성경적 사랑의 차이가 여기 있습니다. 세상적 사랑은 좋아하는 것만 사랑합니다. 성경적 사랑은 싫어해도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죄 때문에 우리를 다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랑했습니다.

 

사랑의 오해(3) 사랑은 감정이다

가장 큰 오해가 있습니다. 사랑은 감정이라는 오해입니다. 물론 사랑은 감정입니다. 그러나 감정이 사랑이 아닙니다. 감정은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아름답게도 합니다. 그러나 감정이 사랑의 전부는 아닙니다. 많은 부부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부부는 옛날에는 참으로 많이 사랑했어. 지금은 식었어". 그래서 감정이 식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가시고기”로 유명한 작가 조창인은 “사랑으로 나를 채우고”란 그의 책에서 사랑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한 순간의 폭우가 아닙니다.

기나긴 세월의 가랑비에 젖겠다는 각오입니다.

열정은 감정의 폭우입니다.

한 몫에 다시 사랑할 듯싶지만, 이내 그치고 맙니다.

그러나 사랑은 열정이 사라진 뒤

오랜 세월 속에서 천천히 젖는 가랑비입니다.

 

사랑의 감정이 폭우처럼 쏟아져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감정이 사라져도 오랫동안 가랑비 젖듯 스며들어야 사랑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고전13:7절,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여름 한때의 폭우가 아니라 긴 시간 우리속에 젖어드는 가랑비입니다. 마조리 홈즈가 두 종류의 사랑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낭만적 사랑과 책임적 사랑입니다. 두 사랑은 이렇게 다릅니다. “낭만적 사랑은 끝이 보일 때까지 사랑하고 책임적 사랑은 끝까지 가는 사랑이다”. 끝까지 가려면 책임이 따르고 행동이 따르고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뇌성마미, 전신마비 아들 닉을 사랑한 아버지는 말로만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달리고 싶다고 하자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다니던 직장도 그만 두었습니다. 노후에 편하게 살 것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새로 시작했습니다. 아들과 함께 철인3종경기에 나가기 위해 평소에 안타던 자전거도 배웠습니다. 평소에 안 배우던 수영도 배웠습니다. 그리고 기나긴 42.195킬로의 마라톤도 시작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도 말렸습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이 그것 뿐이냐고. 꼭 그렇게 해야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냐고. 그저 잘 먹이고 잘 보호하고 아프면 약먹이고 병원 데려가면 되지 않겠냐고. 그러나 이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좋아하는 것을 해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었습니다. 행동이 따르고 희생이 따랐습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0절을 다시 보세요.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위하여 행동하셨습니다.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냈습니다. 33년간 섬기고 사랑하게 했습니다.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게 했습니다. 책임지고 행동하고 희생했습니다. 롬5:6, 우리가 연약할 때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연약해지셨습니다. 롬5:8,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롬5:10,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했습니다. 행동하고 책임지고 희생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일4:11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의 모든 삶을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다음은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받았습니까? 문제는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 하나님의 사랑이 스며들어야 합니다.

 

가정에서의 하나님의 사랑

특히 가정 생활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 해야 부부들이 서로 낭만적이면 좋겠습니다. 남자들은 좀 더 자상하고 여자들은 좀 더 여성적이면 좋겠습니다. 유대인 격언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 여자들은 상중에라도 화장해라”. 가족이 죽어 상을 만났을 때에도 여성들은 화장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여성은 여성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를 볼 때마다 은혜를 받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을 따라 전전하다가 두 번이나 다른 남자에게 뺏길 뻔 했습니다. 한번은 애굽의 바로에게, 또 한번은 불레셋 왕에게입니다. “그때 사라의 나이가 적어도 60대, 70대는 되었을 텐데 어떻게 사라는 남자들에게 그렇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을까?” 궁금했습니다. 답은 이것입니다. 사라는 늙었어도 여성으로서의 자기관리를 잘 했습니다. 평소에 예쁘게 하고 상냥하게 말하고 여성적이고 교양이 있고, 그러니까 남자들이 좋아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부는 설령 낭만적이 아니더라도 그만 두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입센이 쓴 “인형의 집”에 보면 주인공이 집을 나갑니다. 남자가 자기에게 행복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어디를 가도 남자가 잘해주기만 바라는 여자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남편이 나에게 얼마나 잘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남편을 위해 얼마나 사랑하고 희생하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눈으로 사랑의 관점을 바꿔야 합니다. 서로 잘 하면 좋습니다. 나는 못하지만 잘 하는 상대방을 만나면 행운아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 행운을 믿고 기다리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잘 하려고 하기 보다 나에게 잘하는 배우자를 꿈꿉니다. 문제는 거기서 생깁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사랑입니다. 내가 잘 하는 사랑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닮은 이유는 부모는 자식이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사랑합니다. 부부의 사랑도 그래야 합니다.

 

요즘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이 이상형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저는 우리 젊은이들이 모두 자기 이상형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상형이 없다고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영원한 이상형은 없습니다. 이상형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일수록 더 빨리 실망합니다. 이상형을 못 찾았어도 이상형과 함께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상형을 만들면 됩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서 이상형을 찾지 않았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상형을 찾았다면 우리를 평생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있는 대로 받아서 평생 그의 이상형으로 만들어 가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어느 대학에 몇 커플들이 데이트합니다. 첫 번째 커플은 얼굴이 시원찮은 여학생과 잘생긴 남학생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저 여자애는 아마도 재벌인가 봐.” 또 하나의 커플이 지나갔습니다. 이번에는 거꾸로 얼굴이 못생긴 남학생과 잘생긴 여학생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저 남자애는 아마도 고시에 합격한 모양이야”. 마지막 커플이 지나갔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두 학생 다 볼품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저 친구들은 정말 사랑하나 봐.” 사랑이라고 다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개인관계, 가정생활에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나라와 민족으로 확대됩니다. 나라와 민족은 우리가 평생 가슴에 안고 사랑해야 할 사랑의 대상입니다. 저는 김소운이라는 시인의 말을 좋아합니다. “내 어머니가 비록 한센씨병 환자일지라도 나는 내 어머니를 사랑한다”. 이 말은 일제시대 일본에 의해 짓밟히고 짓눌려 가난하게 사는 불쌍한 한국민족을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민족을 사랑할 때도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국민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민족을 사랑하지만 다 좋아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전국에 40만명의 점쟁이, 무당, 박수들이 있습니다. 다방 수보다 많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의 약 70%는 아직도 하나님 모르고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만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한 우상이 있습니다.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남은 자본주의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고 북은 공산주의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남은 물질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북은 김일성이를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북은 사상을 하나님처럼 섬기다가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되었고 남은 돈을 하나님처럼 섬기다 정신적으로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특별히 북한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번에 천안함 사건으로 저들이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힘없는 백성들이 한 일은 아닙니다. 북한은 우리가 빼앗길 수 없는 우리 민족의 땅입니다. 1840년 영국의 토마스목사가 26세의 나이로 순교한 곳이 평양 대동강변입니다. 카나다 선교사 매켄지가 한국에 와서 오직 한복만 입고 한식만 먹고 선교하다가 병들어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자기 시체를 교회 옆에다 묻어달라고 유언하고 죽은 곳이 황해도 장연입니다. 1884년 한국인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솔내교회가 개성옆에 솔내에 있습니다. 해방전까지 유일하게 목회자를 양성했던 평양 신학교가 평양에 있었습니다. 1907년 한국교회 대 부흥운동이 시작된 곳도 평양, 원산이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주기철 목사등 수많은 순교자를 낸 곳도 평양입니다. 우리는 사상을 떠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상은 몇 십년있으면 지나갑니다. 그러나 민족은 영원합니다.

 

양화진에 가면 선교사의 묘지가 있습니다. 그중 감동적인 묘비가 하나 있습니다. 모비에 영어로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내게 줄 수 있는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모두 한국에 바치겠다”. 이 비장한 말을 한 사람은 루비 켄트릭이라고 하는 여성 선교사였습니다. 루비 켄트릭은 1908년, 25살의 나이로 한국에 왔습니다. 25살의 처녀로 해외선교에 나선다는 것은 무리였지만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여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개성에 와서 학교 선생으로 봉직하면서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은 그에게 낯선 민족이었습니다. 남자들은 상투를 틀고 다녔고 사람들은 흰옷을 입고 가마를 타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 한국사람이 그에게는 너무 사랑스러웠습니다. 한국 사람만 보면 눈물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어느날 갑자기 병이 났습니다. 그리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가 죽어가면서 한 말이 이것입니다. “내가 죽거든 나를 한국땅에 묻어 주세요”.

 

루비 켄트릭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택사스의 모교회는 통곡을 했고 그 뒤를 따르는 선교지가 줄을 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도전받고 해외로 나간 선교사가 20명은 넘었습니다. 그 25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교한 루비 켄트릭이 남긴 “내게 줄 수 있는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모두 한국에 바치겠다” 는 비문을 보면서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부터 100년전, 미국의 한 처녀가 낯선 나라 한국에 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다 죽었는 데 나는 이 민족의 아들로 태어나 무엇하고 있는가? 나는 적어도 루비 켄트릭만큼, 외국 선교사만큼 이 민족을 사랑하는가?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사랑, 희생하고 책임지고 끝까지 버리지 않는 사랑, 그 사랑을 우리가 받았으니 이제는 우리가 그 사랑을 줄 때입니다. 11절, 요일4:11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남은 생에 이 사랑을 실천하겠습니까? 가정에서 직장에서 지역사회에서 이 민족의 삶속에서 이 사랑을 실천하겠습니까? 사랑이라도 다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만 진짜 사랑입니다. “나로 하나님의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내 영혼에 부어지게 하옵소서. 남은 생애 그 사랑으로 살게 하옵소서”.

(요일4:7-10)

사랑만한 힘이 없습니다

(릭 영상)

 

요일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이 먼저 찾아 오셨습니다.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한번 더 용서하셨습니다.

롬3:25,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책임지고 희생하셨습니다.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회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의 오해(1)-사랑의 반대는 미움이다

사랑의 오해(2) 좋아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의 오해(3) 사랑은 감정이다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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