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 새벽 기도회 기도문( Dawn Prayer Meeting)

 

진리와 생명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하루의 첫 시간을 드릴 수 있도록 부르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불러 주셨사오니 아직도 주께 고하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한 죄를 자복하게 하옵소서.

성령의 불꽃같은 눈동자로 보시고 태우시며 정결하게 하옵소서.

우리 죄를 자백하면 의로우신 주님의 보배피로 깨끗하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이 시간 놀라운 주의 임재와 역사를 체험하고,

이제 또 밝은 아침이 오면 주께서 주신 일들을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건강과 지혜를 주옵소서.

세상에 부끄럽지 말게 하시고

우리의 불의한 행위로 주님의 영광 가리우지 않도록 주께서 지켜 주옵소서.

믿음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하시고,

우리의 삶으로 보여 주는 증거가 곧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내는 전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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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 새벽 기도회 기도문( Dawn Prayer Meeting)

 

사랑의 하나님,

이 새벽 시간에 주를 향하여 마음을 열고 나아오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지난 밤 평안히 쉬게 하시고

이 아침에 주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의 소원을 아뢰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첫 시간을 주와 교통함으로 시작하오니

오늘 하루가 우리에게 더 기쁘고 복된 날이 되게 하옵소서.

주께서 친히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셔서 주님께서 지시하시는 일들을 할 수 있게 하옵소서.

그 일들을 통하여 아버지께서는 영광받으시고,

우리에게는 넘치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저녁기도를 드리면서 하루를 되돌아볼 때,

오늘 하루도 주께서 함께하셨음을 바라보고

진정으로 감사하게 하옵소서.

새벽을 깨워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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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깨우는 영혼의 새벽기도 ( Dawn Prayer Meeting)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새벽을 깨워 기도할 수 있도록 건강과 믿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새벽에 하나님을 의뢰하여 기도할 때에 새힘을 주셔서

하루를 넉넉히 살아갈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귀를 누릴 때에 주의 이름을 높이게 하옵소서.

주님의 구원하심을 인하여 삶의 환희와 감격을 노래하게 하시며,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말씀 안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하시고,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게 하옵소서.

이 나라를 사랑하셔서 연단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바라보게 하시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 찬양하는 백성 되게 하옵소서.

주님과 동행함으로 강하고 담대하여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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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회 기도문( Dawn Prayer Meeting)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며 하루를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루 저희에게 맡겨 주신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하시고,

주 안에서 맡겨진 모든 일들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전능하신 주께서 저희들을 인도하시어 바른 길로 가게 도와 주옵소서.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십니다.

말씀 안에서 우리의 생각과 계획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가정에 평화를 주시고 이 나라 백성들을 주님의 자비로 이끌어 주옵소서.

교회를 지켜 주시고 성도들이 주 안에서 하나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짐을 주께 맡깁니다.

주님만 굳게 의지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쉴만한 물가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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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깨우는 기도 새벽기회 기도문( Dawn Prayer Meeting) 

사랑과 자비와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지난 밤 동안도 저희들을 주님의 품안에서 지키시며 편히 쉬게 해 주시고
새 힘과 희망을 가지고 새 날을 맞이하게 하여 주셨사오니 감사하옵니다.
또 저희들을 재촉하셔서 이 새벽에 주님의 거룩한 전에 나와서 기도의 제단을 쌓게 하시니 감사하옵나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여.
그러나 저희들은 아직도 죄에 끌리어 주님께 복종하지 못하고 있사옵나이다.
세상의 쾌락을 위해서는 한 없는 애착을 가지고 있사오나 영적인 일과 영혼을 위해서는 너무나도 나태합니다.
세상의 안일만을 추구하며, 주님께 엎드려 기도하는데는 게으르며,
자기를 섬기는데는 매우 활발하나, 남을 섬기는데는 태만 하였사오니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용서해 주옵시고 주님의 공로를 의지하여 주님의 형상대로 변화되게 이끌어 주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영과 육을 당신께서 맡아 주관하시고 저희들의 영혼을 건강하게 하셔서 당신의 등불이 되게 하시옵소서.
저희들의 영혼이 늘 그리스도의 빛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죄와 어둠이 없는 깨끗한 영혼이 되게 축복하옵소서.
저희들이 육신의 축복 뿐만 아니라 영혼의 축복을 간구하는 기도를 쉬지 않게 도와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 새벽에 사랑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주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옵소서.
개인적인 문제로, 가정의 문제로, 사업의 문제로, 신앙의 문제로 고민하여 아뢰는 기도를
주님께서 응답해 주시고 크신 축복을 내려 주옵소서.

만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교회를 늘 새롭게 하시고 주님의 성령이 늘 살아있는 교회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 교회가 크게 부흥하게 하시며 주님께서 명령하신 교회의 사명을 다 감당하게 하시옵소서.
저희 교회에 기도의 불길이 꺼지지 않게 하시며 이 새벽 제단에 더욱 열심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택하신 목사님에게도 주님께서 축복하셔서 교회와 양떼를 보살피기에 조금도 부족함 없게 하옵소서.

저희들의 오늘 하루의 생활을 지키시고 인도하여 주시며 깨끗하고 진실된 삶을 살 수 있게 하옵소서.
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을 알 수 있는 지혜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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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깨우는 영혼의 새벽기도 ( Dawn Prayer Meeting)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 여호와 하나님 !

지난 밤도 주님의 ․품안에서 편히 쉬게 하시고 이렇게 새 날의

첫 시간을 먼저 주님께 바치고 주 앞에 제단쌓을 수 있도록

허 락하여 주시오니 감사하옵나이다.

주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와 땀을 홀리며 하나님께 기도드

린 것처럼, 저희들도 소원하는 바를 이 시간 간절하게 아뢰오니

응답하여 주시 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빛나는 새벽 별 같으신 주님, 새로운 하루를 열어 주시고, 먼저 주

님의 성전에 나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새벽에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 충만케 하옵소서.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이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않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은 하 루가 되기를 원합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하 루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도를 행하며 믿음의 길로 가게 하시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온몸으로 드리기 원합니다.

 이 시 간 거룩하신 하늘의 말씀으로 우리의 빈 심령을 채워 주시고,

온전 한 믿음과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하루를 살게 하옵소서.

 

가정과 교회를지켜 주시고 이 나라를 안보 해주시며,

 복음의 역사가 이 땅을 끝 임없이 다스리게 하옵소서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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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 새벽 기도회 기도문( Dawn Prayer Meeting)

 

하나님 아버지 ,

이 고요한 새벽에 주님 앞에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하루를 주님과 함께 시작하오니, 주님과 함께 일하게 하시고

주님과 함께 끝맺게 하옵소서.

 

이 아침에 나온 모든 심령들이 주의 은총을 받아서 ,

이 하루를 그 은총 속에 살게 하옵소서

주님, 이 새벽에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온 개인적인 짐,

가정의 짐,나라의 짐들이 많습니다.

 

 이 무거운 짐들을 다 주 앞에 내려놓으니,

주님께서 대신 져 주시길 원합니다 인간의 욕심대로 구하지 말게 하

시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구하여 이뤄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생명, 가정의 장래, 나라의 운명까지도 주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사오니 , 주여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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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설교] 낙타 무릎 ( Dawn Prayer Meeting Sermon)

낙타 무릎

야고보서 1:5-8 
 

본서를 기록한 사람은 야고보 장로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으로 뒤늦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의 별명이 하나 있었습니다. ‘낙타 무릎’입니다. 얼마나 기도를 오랫동안 했던지 무릎에 굳은살이 배겨서 낙타무릎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에 생긴 별명입니다.
   야고보서의 핵심 주제는 ‘행함 있는 믿음’입니다. 그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낙타 무릎’이라는 별명을 가진 장로답게 기도에 관한 교훈도 잊지 않았습니다.
   기도의 중요성은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부족한 것입니다. 그만큼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중요한 것입니다.
   찰스 하지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기도의 중요성을 맥박에 비유하여 강조했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크리스천이나 맥박이 뛰지 않는 사람은 그 존재가 모두 불가능하다” 맥박이 뛰지 않는 사람을 육체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듯이 기도생활을 하지 않는 크리스천은 영적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또는 그 사람의 건강이 어떤지 알려고 할 때 먼저 맥박을 잽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이 영적으로 살았는지 죽었는지 또는 건강한지 병들었는지를 알아보려면 그의 기도의 맥박이 어떻게 뛰고 있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야고보 장로를 통해서 주시는 기도에 관한 교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설교를 들으시고 기도의 맥박이 멈춘 분들은 기도생활을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의 맥박이 뛰기는 뛰데 병든 사람의 맥박처럼 힘이 없는 사람들은 기도의 불을 받으시고 열정적인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들
   마 16장에 보면 주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천국열쇠를 주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천국열쇠를 받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천국열쇠를 사용하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천국 열쇠를 사용하는 시간입니다.
   5:17,18을 보면 엘리야는 기도로 하늘의 문을 닫기도 했고 열기도 했습니다. 그는 천국열쇠를 사용한 것입니다. 엘리야가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니 하늘이 닫히고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시 비가 오기를 기도하니 닫힌 하늘의 문이 열리고 하늘이 비를 주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기도에도 응답해 주십니다. 엘리야가 기도로 하늘의 문을 여닫았던 것처럼 우리가 기도해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럼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1) 기도하는 사람에게 지혜를 주십니다(1:5)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고구마 줄기를 뽑으면 고구마가 줄줄이 올라오는 것처럼 지혜를 얻으면 그 지혜로 인하여 따라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잠 3:13-18에 보면 지혜를 얻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오른손에는 장수가 있고 왼손에는 부귀가 있습니다. 지혜의 길은 즐거운 길이고 평강한 길입니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지혜가 돈이고, 정보가 돈이고, 기도가 돈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돈을 많이 벌수 있습니다. 앞선 정보력이 수입을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돈이 붙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중에 가장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런데 성경 [사무엘상]에만 “다윗이 지혜롭게 행했다”는 말이 5번이나 나옵니다. 그는 지혜로웠기에 훌륭한 목동이 될 수 있었고, 훌륭한 장군이 될 수 있었고,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지혜를 얻는 방법이 기도입니다. 1:5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로 지혜를 얻은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아버지를 잘 만나서 왕이 됩니다. 그러나 명장이요 지혜로운 아버지가 다스리던 나라를 젊은 사람이 다스리려니 두렵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기브온 산당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그가 드린 일천번제를 받으시고 그가 구한 것에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꿈속에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십니다. “솔로몬아, 네가 무엇을 구하느냐?”,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 종에게 은혜를 주시사 왕이 되게 하셨는데, 제가 어떻게 이 일을 감당 하겠습니까? 하나님, 저에게 이 일을 감당할 지혜를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솔로몬, 네가 재물이나 존영이나 원수 멸하는 것이나 장수를 원치 않고, 내가 네게 맡긴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지혜를 구하니 참 귀한 것을 구했구나. 내가 네가 구한 지혜와 지식을 주겠다. 뿐만 아니라 네가 구하지 않은 재물과 존영과 장수도 다 네게 주리라.”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의 지혜가 하늘로부터 솔로몬에게 임했습니다. 그러니 왕의 자리가 부담되지 않고 쉬었습니다. 티끌같이 많은 백성이 적게 보입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라도 척척 해결하고 재판하니, 모든 백성이 깜짝깜짝 놀라며 왕에게 복종합니다. 그러니까 왕권이 견고해지고 나라가 발전합니다.
   역대하 9장을 보면 솔로몬이 마시는 그릇은 다 금이고, 레바논 백향목 궁에서 쓰는 그릇도 다 정금이었습니다. 나라에 금이 돌같이 흔합니다. 또 천하 열왕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 솔로몬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갖가지 귀한 보석을 가지고 찾아옵니다. 솔로몬의 집과 나라는 안에서도 잘 되고 밖에서도 갖다 주니 잘 되었습니다.
   이런 복이 여러분 집에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여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받으시고 고구마 줄기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 하나 때문에 복이 넘치게 따라오길 바랍니다.
 

   2) 기도하는 사람에게 고난을 극복하는 힘을 주십니다(5:13)
   5:13에 보면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복도 넘치도록 받지만 고난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걸 모르기 때문에 고난이 찾아오면 신앙이 흔들리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고후 12:12에 보면 사도의 표 네 가지가 나옵니다.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그 네 가지 표 중에 첫 번째가 ‘모든 참음’입니다.
   골 1:11에 보면 성령이 역사하시면 능력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은혜도 주십니다.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십니다. 견디는 은혜를 주시는 것은 신앙생활에는 어려움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 중에서 건져주시든지 아니면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미국에 아주 유명했던 가수 중에 케이트 스미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케이트 스미스는 ‘God Bless America’(하나님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라는 노래로 유명한 가수입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믿음으로 살았던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녀가 믿음을 갖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케이트 스미스는 어느 날 두 친구와 같이 노를 젓는 보트를 타고 놀고 있었습니다. 너무 놀이에 열중 하고 보니 배가 썰물에 밀려 나간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날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노를 저어 보았지만 썰물이 너무 세차게 밀려 나가기 때문에 이 강한 조수를 거슬려 해변으로 도저히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해변에서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그들은 사람 살려 달라고 소리 쳤지만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케이트 스미스는 두려워 떠는 가운데 두 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내용의 성경구절이 생각이 났습니다. 스미스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무서워할 것 없어. 성경에 두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고 하셨어. 우리 여기 세 사람이 있지 않니? 우리 셋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 주실 것을 나는 믿어. 우리 함께 기도하자” 세 찬구는 머리를 배 밑창에 조아리고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살려 주세요. 하나님, 우리는 죽게 되었어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우리를 살려 주세요. 우리를 도와주세요.” 이 세 친구가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보니 저 멀리서 불빛 하나가 점점 가까이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배로 인해서 조난당했던 이 세 친구가 안전하게 해변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케이트 스미스는 기도의 응답으로 곤란 중에서 건짐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혹 예기치 못한 고난을 당하면 케이트 스미스처럼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고난에서 건져주시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고난당함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때 우리가 기도하면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복싱경기에서 승리하려면 잘 때리기도 해야 하지만 잘 맞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펀치가 아무리 강해도 맷집이 약하면 지는 것입니다. 상대를 아무리 많이 때려도 상대의 주먹 한 방에 쓰러지면 지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생활을 할 때 복싱 시합이 있었습니다. 제가 키는 작아도 5명을 K.O로 눕히고 결승에 올라갔습니다. 보통 한 게임에서 3,4번씩 상대를 다운시키며 승승장구했습니다. 저는 결승에서도 상대를 눕히고 반드시 우승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결승전 1라운드가 시작되자마자 상대에게 한 방 맞았습니다. 저는 잠간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눈을 떠보니 제가 바닥에 누워있고 경기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제가 상대의 주먹 한방을 견디지 못하고 K.O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고난을 견디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조금 어렵고 문제가 있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작은 시험에도 교회를 옮기고, 작은 고난도 견디지 못하면 그런 사람은 신수성가 하지 못합니다.
   만세운동을 하다가 잡혀 일제의 고문에 방광 파열로 19살의 꽃다운 나이에 옥사한 유관순 열사는 모진 고문에도 신앙을 지켰고 나라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유관순 열사가 그 어린 나이에 모진 고문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공급 받았기 때문입니다. 유관순은 순국하기 직전에 다음과 같은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주의 음성을 들은 이 몸, 나를 버리고 십자가 등에 지고 주를 따라가리라! 주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나의 자취, 어느 지경까지든지 주의 뒤를 따라가리라!” 유관순은 기도로 고난을 이긴 것입니다.
   타스커라는 사람은 “기도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한다. 그렇지 못할 때에라도 기도는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켜 그 문제를 대처할 수 있게 해 준다”라고 했습니다.
   길에서 놀던 아이가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납니다. 이 아이가 먼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울면서 약을 찾습니까? 의사를 찾습니까? 병원을 찾습니까? 아닙니다. 엄마를 찾습니다. “엄마! 엄마!” 왜 엄마를 찾을 까요? 엄마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약을 발라 주든지 병원으로 데려가든지 문제를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당했을 때 울면서 엄마를 찾는 어린아이처럼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3) 기도하는 사람에게 치유의 은혜를 주십니다(5:14,15)
   주님은 치유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지금도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며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채찍에 맞으셨는데, 그 이유를 사 53:5에서는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들의 건강을 위하여 채찍에 맞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치유의 은혜를 누리는 비결이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5:14,15에 보면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주시지만 우리가 치유의 은혜를 누리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짐승들은 상처가 생기면 그 상처를 햇빛에 노출시킨다고 합니다. 상처가 햇빛을 쪼이면 신기하게도 치료의 속도가 더 빠르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상처 난 짐승들이 햇빛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치유의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치유의 광선이 우리를 건강하게 치유해 줄 것입니다.
   여러분, 차범근 축구 감독 잘 아시죠. 그분에게 유명한 간증이 있습니다. 선수 시절에 그에게 누가 전도했는데 처음에는 시큰둥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봤어요? 보여주면 믿을께요!” 그러자 전도한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기 보여요? 공기 보여주면 나도 하나님을 보여주지. 공기가 눈에 안 보여도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나중에 느낄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러던 중 무릎 부상으로 앓게 되었습니다. 선수 생활을 접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당시 유명한 한얼산기도원 이천석 목사님을 찾아가 안수기도를 받았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후 신앙생활 하면서 선수 생활도 잘 하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증거 하면서 축구감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약을 쓰고 수술을 하는 것은 사람이 하지만 치료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아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양천구 신월동에 가면 서안복음병원이라는 병원이 있습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신월동에 있는 교회에서 봉사했는데 그 교회 담임목사님 사모님이 그 병원 간호사였기 때문에 가끔 그 병원에 간적이 있습니다. 그 병원 간판에는 [우리는 봉사! 하나님은 치료!]라고 적혀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치유의 은혜를 주십니다.
 

   4) 기도하는 사람에게 땅에 열매를 주십니다(5:18)
   5:18을 보면 엘리야가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열매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에 열매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열매가 없다면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한 것입니다.
   금년에 교회 텃밭에 고구마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땅이 좋지 않고 거름공급이 잘 되지 않아서 열매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도 고구마 줄기로 반찬을 만들어 먹었기에 그나마 다행입니다.
   고구마 농사는 우리의 주임무가 아닙니다. 과외로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가정생활, 작장생활이 고구마 농사처럼 열매가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가정생활에 열매를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회생활에 열매를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시대에는 일부다처제였습니다. 한나의 남편 엘가나에게는 또 다른 아내 브닌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브닌나는 자녀가 있는데 한나는 자녀를 낳지 못했습니다. 브닌나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한나를 격동시켰고 그 일로 한나의 마음은 슬펐습니다. 엘가나가 브닌나 보다 한나를 더욱 사랑했지만 한나의 마음의 슬픔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한나는 성전에 올라가 기도합니다. 눈물로 기도합니다. 그녀는 결사적으로 매달려서 기도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한나에게 열매로 사무엘과 또 다른 세 아들과 두 딸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나처럼 자식의 문제는 아니지만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에 열매를 원하시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열매를 주시는 분입니다.
 

2.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야고보서에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다양하게 말씀하고 있지만 오늘 저는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 믿음의 기도(1:6-8; 5:15)
   1:6-8을 보면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의심의 기도를 하면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해야 응답해주십니다.
   히 11:6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는 두 가지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 즉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 말은 자기가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느 사람이 산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합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날이 훤히 밝아오자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되게 안 믿어지네...”라고 하더랍니다. 이런 기도는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의 기도를 하는 사람은 응답을 마음으로 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으로 응답을 바라봅니다. 믿음의 사람의 마음에는 응답의 그림이 선명하게 있는 것입니다. 현실에는 없지만 그 사람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5만 번 응답 받은 조지 뮬러는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기도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수 없이 많이 경험했습니다. 하루는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 고아원의 원생들은 엄청나게 많은데 먹을 게 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조지 뮬러는 식사시간이 되니 아이들은 식당에 모읍니다. 그리고 빈접시를 놓고 기도합니다. “주님, 오들도 좋은 아침을 저희들에게 허락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식탁에 빵이 없지만 그의 마음에는 이미 풍성한 빵이 그려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기도를 마치자마자 빵빵 소리가 나면서 시끄럽더랍니다. 나가서 봤더니 빵공장 빵을 실어왔다는 겁니다. 빵공장에 불이 났는데 불은 잡았지만 만들어진 빵을 팔수가 없어서 조지 뮬러의 고아원에 주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어도 믿음으로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지금 현실은 어렵고 힘들어도 믿음의 눈으로 승리를 바라보고, 성공을 바라보고, 건강을 바라보고, 풍성함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럼 믿음의 기도를 원하십니다.
 

   2) 정욕적이지 않은 순수한 기도(4:2,3)
   4:2,3입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정욕이란 무엇입니까? 다음 절에 보니 ‘세상과 벗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1서 2:15-16에서는 세상의 개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존 웨슬리는 육신의 정욕을 ‘재물욕’이고, 안목의 정욕을 ‘성욕’이고, 이생의 자랑을 ‘명예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저는 정욕이란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자기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시는데 나는 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욕입니다.
   요일 5:14-15에서 기도응답을 받는 원칙을 다음과 같이 표현 했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기도응답의 비결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주님이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드리셨습니다. 눅 22:42입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무디는 어떻게 기도하면 좋은가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쳐줍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탄원서를 펼쳐놓고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제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학교에서 배운 가장 귀한 교훈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선택하시도록 맡기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인과 종의 위치는 분명한 것입니다. 종은 언제나 자기의 뜻이 아닌 주인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도 내 뜻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종이 바뀐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내 원대로 마시고 하나님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할 성도들이 “하나님의 원대로 마옵시고 내 원대로 해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정욕적이지 않은 순수한 기도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어떤 아이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한국의 수도가 서울이 아니라 부산이 되게 해주세요. 제가 오늘 시험 볼 때 한국의 수도는 부산이라고 썼거든요.” 얼마나 귀여운 기도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아이의 기도를 들어주실리 만무합니다.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자신의 기도를 점검하십시오. 그리고 자기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배치된다면 기도를 바꾸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드린다면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것입니다.
 

   3) 중보의 기도(5:16)
   5:16에서는 서로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기도를 뛰어넘어서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드리십시오. 우리는 뜻은 정확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교회가 받은 사명이 많지만 그 중에 대표적인 두 가지가 사명은 중보기도와 선교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중보기도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중보기도의 응답으로 성인오락실 ‘바다이야기’가 사라졌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열리기로 했던 동성애축제가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필리핀 아브라 지역의 30년 된 정권이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는데 생각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교회가 통합 하여 첫 주일 예배가 끝난 후 점심시간에 어린이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옆 교회 집사님이 자동차를 후진하는데 차 뒤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보지 못했습니다. 아이는 자동차 밑으로 들어갔고 운전자는 차에 뭐가 걸린 것으로 생각했는지 자동차를 앞뒤로 왔다갔다 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청년은 너무나 놀라서 주저앉아서 울었습니다. 그 청년은 아이가 병원으로 간 후에도 진정을 하지 못하고 한 동안 울었습니다. 그 청년의 이야기로는 차 밑에 깔린 아이의 허리가 뒤로 완전히 젖혀졌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제 마음에는 ‘그 아이가 장애자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가 통합하고 첫 번째 주일에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쓰러진 아이를 김기승 집사님이 자동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저는 걱정이 많았지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알았던 여러분들도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신기하게도 병원에 실려 간 아이가 어느 한 곳도 이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장애자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단 하루도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건강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위하여 기도한 저희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중보기도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아말렉과 전쟁을 했습니다. 여호수아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아말렉과 싸웠는데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 전쟁에서 가르쳐주는 가장 강력한 교훈은 기도의 힘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전쟁터로 가지 않고 산위로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그 시간 참으로 신기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모세의 기도의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의 기도의 손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아론과 훌의 도움으로 두 손을 계속해서 들고 기도하여 결국 이스라엘이 대승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들에게 기도는 사역을 위한 준비 정도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사역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가장 핵심적인 사역은 기도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기도의 손을 내리는 순간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자녀, 여러분의 사업은 아말렉에게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기도의 손을 드는 순간 여러분의 자녀들이 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의 손을 드는 순간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사업은 아말렉을 물리치며 승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기도하기로 결단하십시오. 기도의 손을 들겠다고 마음을 먹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시간을 기도를 위하여 떼어두십시오.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시고 기도의 자리로 나오십시오.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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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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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설교] 참된 지혜  ( Dawn Prayer Meeting Sermon)

참된 지혜

야고보서 3:13~18

 

본문에서는 두 가지 지혜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째, 14-16절에 보면 “땅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라고 말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개역 성경에서는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 지혜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혜는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지혜입니다.
   사람들이 착하지 않은데 지혜만 있으면 교묘하게 악을 행합니다. 우리나라 보험사와 경찰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해 6,000억 원의 보험금을 사기꾼들이 타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뻔히 알면서도 단서가 없어서 못 잡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가장 많이 적발된 것은 자동차 보험입니다. 사기 유형으로는 피해액 부풀리기, 진료비 과잉청구, 고의적인 사고 유발 등이 있다고 합니다. 6,000억의 보험금이 빠져나간다면 그만큼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지혜가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지혜입니다.
   둘째, 13,17,18절에 보면 위로부터 난 지혜가 있습니다. 이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입니다. 17,18절에 보면 이 지혜는 사람을 성결하게, 화평하게, 관용하고 양순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진 사람은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고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모든 행복과 축복과 능력의 참된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여자 성도가 남편이 겉으로는 멀쩡한데 자꾸 아프다고 해서 강남의 유명한 S병원에 찾아갔습니다. 진단 결과 목에 이상이 있다고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해서 목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상태가 더 심해졌습니다. 병원에 가서 얘기했더니 수술이 잘 되었다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경희의료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고 또 검사를 했습니다. 검사 결과 뇌에 콩알만한 종양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대학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해보니 역시 뇌종양이라고 했습니다.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을 해도 10% 밖에는 가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3일 금식기도를 드렸습니다. 10% 밖에 가망이 없어도 수술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기도 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 중에 예레미야 33장 3절의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를 하는데 응답으로 그 병에 대해 알아보라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책을 사서 조사해 보았더니 뇌종양의 종류만 30가지가 넘었습니다. 열심히 읽어보고 남편의 종양의 종류를 찾아봤더니 충으로 된 종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충으로 된 종양은 약으로도 고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사한테 찾아가 약으로도 고칠 수 있다고 했더니 의사가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책을 보여주고, 약을 구해달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결국 수술을 받지 않고 약을 복용해서 종양을 깨끗하게 치료받았습니다. 이 여집사님은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서 남편을 살린 것입니다.
   왕상 3장에 보면 솔로몬은 젊은 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치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지혜가 가득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솔로몬이 젊은 나이에 왕이 되어서 그런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니 걱정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느낀 솔로몬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기브온 산당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꿈에 나타났습니다. 솔로몬은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에게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며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후 솔로몬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부터 난 지혜가 발휘 되어서 나라를 잘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부귀와 영광 장수보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십시오.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지혜가 있으면 모든 것을 다 얻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고 세상 지혜로 욕심과 탐욕에 빠져 있습니다. 골 1:9 말씀에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위로부터 온 지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위로부터 온 지혜는 무엇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행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렇게 살려고 결심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선생님들에게 새해에는 어떻게 살 것인지 자신의 결심들을 한 가지씩 적어오라고 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선생님들이 제출한 새해의 결심들을 보시고 몇 가지만 골라서 선생님들에게 읽어주었습니다. 그러자 한 선생님이 손을 들더니 “왜 내 것은 읽지 않고 빠뜨리는 것입니까?”라고 고함을 지르며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대답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챙기지 못해서 그런 것이니 잠깐 기다려 보십시오” 그러면서 그 선생님이 쓴 것을 찾아 읽어주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러한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금년 한 해 절대로 사소한 일에 화를 내지 않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행해야 합니다. 13절에 보면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라고 말합니까?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이는 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가진 지혜와 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저는 오늘 본문에서 위로부터 온 하나님의 지혜의 증거를 세 가지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1.선행이 참된 지혜를 가진 증거입니다(13절).
   선행이란 착한 행실을 말합니다. 부디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가 교회와 가정과 사회생활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선행을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해 봅시다.
   첫째,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인 선행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보여주신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신앙적인 선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많은 돈을 벌고 큰 명예와 강력한 권세를 가지는 것보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적인 선행이라는 것은 먼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그 다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신자의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에 4살 난 어떤 어린이가 상속을 받아 백만장자가 된 일이 있습니다. 신문기자가 “그 많은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느냐?”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 어린이는 어린이다운 대답을 했습니다. “사탕을 사 먹겠습니다” 만약 그 아이가 나이를 먹어도 4살의 정신연령을 가지고 물려받은 유산으로 평생 사탕이나 사먹고 산다면 유산을 물려준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자신을 구원해 주시고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후원해 주시는데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서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답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하고 싶은 일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기뻐하고 좋은 일인지, 아니면 고작 사탕이나 사 먹고 싶어 하는 백만장자 아이와 같은 생각인지 한번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이웃을 향한 사회적인 선행이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 외로운 가정을 돌보는 일, 고아들을 돕는 일, 무지한 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 환자들을 찾아 위문하고 기도해 주는 일, 타락한 자들을 찾아 재 결심시키고, 낙심한 자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들이 사회적인 선입니다.
   우리가 사회적인 선행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본능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넣어주셨습니다. 그래서 17절에 위로부터 난 지혜 가운데 긍휼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회적인 선행을 실천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빛을 세상에 반사하는 반사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을 보여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통해서 주님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선행과 온유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프리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한 기독교인 영국귀족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그 나라의 소년 한 명을 하우스보이로 채용했습니다. 소년은 조용한 가운데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인 귀족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뜻밖에도 영국인 귀족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제가 이 집에서 일한 지 꼭 석 달째 되는 날입니다. 제 마음 속에 뜻한 바가 있어서 이제는 이 집을 떠나야 될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저를 잘 돌보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영국인 귀족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제 막 정이 들려고 하는데 그만 두고 떠난다고 하니까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년을 이렇게 달래었습니다. “얘야, 월급이 적다면 내가 좀 더 올려줄테니 떠나지 말고 여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안되겠느냐?” 그러자 소년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돈 때문에 이 집을 떠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가 이 집에 오기 전에 한 가지 결정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기독교를 믿어야 할 지 회교를 믿어야 할 지 망설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작정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 집에 가서 한 3개월 일해 보고, 그 다음 회교를 믿는 집에 가서 또 3개월 일해 보고 난 뒤에 제가 믿을 종교를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3개월 동안 기독교를 믿는 집에서 일했으니까, 이제는 회교를 믿는 집에 가서 일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안녕히 계십시오.” 당찬 소년의 말에 영국인 주인은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만약 그 영국귀족이 믿음으로 잘 살았다면 그 아이가 기독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 영국귀족이 믿음과 삶이 달랐다면 그 아이는 회교도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귀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도 하고 주님의 영광의 광채를 가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회적인 선행을 실천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은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 장애의 몸으로 시설을 운영하는 집사님 부부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그분들에게 큰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해서 늘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저는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돕는 자들을 붙여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분들의 선행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집사님 부부를 바라보고 계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교회가 금년에 새로운 땅을 매입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복을 받았으니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무료백내장 수술을 하려고 진행 중입니다. 사실 빚도 많은데 그런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는 것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도 사회적인 선행을 요구하시기에 그 일을 추진 중에 있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선행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전도입니다. 행 10:38에 보면 주님께서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받으시고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을 전파하신 일입니다. 전도가 선한 일이었습니다.
   인간은 몸만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혼이 죽어서 영원한 지옥에 떨어진다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았던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도와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교회의 심장소리입니다. 전도가 중단된 교회는 심장이 멈춘 교회입니다. 전도가 약해진 교회는 심장이 정상적으로 박동하지 못하는 교회입니다. 이번 해피데이 전도에 모든 성도들이 헌신합시다. 불신자를 예비신자로 작정하고 예비신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만나서 섬기고 영향주고 교회로 모시고 옵시다. 그것만한 선행도 없는 것입니다.

2.온유함이 참된 지혜를 가진 증거입니다(13절).
   참된 지혜의 특징은 단순히 선행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유함이 나타나야 합니다. 아무리 참되고 선한 행위라도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이 강제나 폭력이 되면 안 되고 온유함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온유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첫째, 온유함은 따뜻함입니다.
   동화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몹시 추운 날 밤중에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눈이 나뭇가지 위에 수북하게 쌓였습니다. 날씨가 추우니까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이 얼어붙었습니다. 나뭇가지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축 쳐져 있었습니다. 바람이 그 옆을 지나갔습니다. 나무를 보니까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바람은 나무를 불쌍히 여기고,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을 털어 주려고 바람을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얼어붙은 눈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람은 더 세차게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급기야 바람을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들이 “뚝!” 소리를 내면서 부러졌습니다. 그러니까 바람은 나무를 도우려다가 오히려 나무에게 상처를 입히고 만 것입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해님이 떠올랐습니다. 기진맥진한 바람은 해님에게 하소연했습니다. “해님아, 내가 저 나무들이 불쌍해서 도와주려고 하다가 그만 나뭇가지만 부러뜨리고 말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니?” 해님은 빙긋이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걱정하지마. 내가 도와줄게.” 그러면서 해님은 하늘 높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리고 따스하게 동산을 비추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얼어붙었던 눈들이 녹으면서 물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해님은 바람에게 말했습니다. “바람아, 이제는 네가 나설 차례야. 내가 너를 따뜻하게 비추어 줄 테니까 너는 그저 내 열을 받아서 동산 안을 조용히 지나다니기만 하면 돼. 그러면 쌓인 눈들이 다 녹게 될거야!” 그 말을 듣고 바람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해님은 따스하게 바람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훈훈해진 바람이 동산 안을 조용히 다니니까, 해님의 말대로 과연 얼어붙었던 모든 눈들이 녹아 내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동산은 본래의 제 모습을 찾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따듯한 눈빛,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상처 입은 사람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참된 지혜를 가진 사람은 따듯함으로 사람을 대합니다. 그 따듯함에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삶의 현장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따듯하게 말하는 훈련을 하도록 하십시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있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그런 여인은 돌로 쳐서 죽여야 합니다.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주님에게 “율법에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돌로 치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땅 바닥에 글을 쓰신 후에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간음하던 여인을 돌로 치려고 손에 손에 돌을 들고 있던 사람들이 돌을 버리고 돌아갔습니다. 그 때 주님은 그 여인을 향해서 따듯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 여인은 주님의 따듯한 사랑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온유함은 따듯함입니다.
   둘째, 온유함은 부드러움입니다.
   유명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일화가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남아프리카연방의 통합을 위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프리카 부족의 추장들 여럿을 초대하여 왕실에서 만찬을 베풀었습니다. 만찬을 베풀기 전, 아프리카 추장들에게 식사법에 대한 교육을 했지만 막상 만찬이 시작되자 눈치를 살피던 추장들이 포크와 나이프를 제쳐놓고 손으로 먹기 시작했습니다. 각료들과 신하들이 긴장한 가운데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여왕이 자신도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손으로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눈치만 보던 분위기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모두들 기분 좋게 식사를 마쳤고 회의도 아주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추장들은 여왕이 하는 일은 모두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왕이 인상을 쓰며 추장들을 나무랐으면 회의가 실패했겠지만, 추장들에게 맞춰줌으로 회의를 성공시킨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부드러움이 추장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든 것입니다.
   잠 25:15에 보면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부드러우면 강한 자에게 질 것 같지만 부드러운 혀가 뼈를 꺾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와이셔츠가 있습니다. 하늘색 와이셔츠인데 굉장히 좋아합니다. 색깔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이 너무나 부드럽습니다. 이제는 낡아서 버려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그 옷을 입다보면 올이 빠져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면 가위로 올을 잘라버리고도 입습니다. 부드러우니까 버려야 하는데도 자꾸만 입게 됩니다. 제가 좋아하지 않았던 와이셔츠가 있었습니다. 유명 메이커 옷입니다. 그런데 그 와이셔츠는 목 부분이 부드럽지를 못합니다. 껄끄럽습니다. 그 셔츠를 입고 다니면 목이 불편합니다. 손이 자꾸만 목으로 갑니다. 껄끄러움 때문에 무슨 일을 하면 잘 집중을 못합니다. 기도를 해도 깊이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 셔츠가 새것이고 유명 메이커이고 또 폼도 나는 옷이었지만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드러운 사람이 사랑을 받습니다. 부드러운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선택을 받는 것입니다. 늘 뻣뻣하고 강한 사람은 피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하고는 만나고 싶지도 않고 대화도 하기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부드러운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잘 훈련된 말처럼 하나님이 고삐를 당기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온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떠나라고 하시면 떠났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면 했고, 하나님이 놓으라고 하시면 놓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부드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3.화평함이 참된 지혜를 가진 증거입니다(17,18절).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피스메이커입니다. 마 5:9절 말씀에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독한 시기와 다툼입니다. 스위스의 철학자 힐티는 “인류최대의 불행은 우리 개인 개인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지혜와 총명이 있는 듯해도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다면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참된 지혜가 아닙니다. 땅의 지혜, 정욕적인 지혜, 귀신의 지혜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마귀가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려고 합니다. 마귀가 사람의 마음을 장악하려고 할 때 사용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독한 시기와 다툼입니다. 교회 안에 교우나 가족 중에 한 사람 혹은 직장 안에서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생기게 합니다. 그 사람과 대화를 하다보면 짜증이 나고 미워하는 마음도 생기게 합니다.
   생활을 하면서 불편하고, 밉고, 보기 싫고, 상대하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나의 좁은 마음을 이용해서 마귀가 나를 장악하려고 하는 시도입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하시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보려고 노력하십시오. 사랑하면 모든 것이 예뻐 보이는 것입니다. 상대의 실수도 예쁘게 봐줄 수 있고 상대의 결정적인 잘못도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영국의 전 노조 위원장이었던 스타길이라는 사람의 연설을 하번 들으면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막 끌어 오른다고 합니다. 그 연설을 듣고 독일의 히틀러가 전 독일을 마귀적인 힘으로 다스릴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독한 시기와 다툼을 내려놓고 화평을 추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미워하면 미움이 한 없이 솟아나옵니다. 마귀가 나의 감정을 건드려서 불편하고, 밉고, 보기 싫고, 상대하기 싫은 사람이 생기게 하거든 물이 계속해서 나오는 수도꼭지를 잠가버리듯이 주의 이름으로 물리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십시오.
   한때는 지하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부자 나라가 되고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술과 지식이 없으면 선진국이 될 수 없습니다. 나라가 작다고 하더라도 지식과 기술, 지혜가 앞선 나라가 선진국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가 더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가?’, ‘누가 더 지혜로운 사람인가?’ 하는 것이 성공을 결정하는 요인입니다. 그래서 21세기는 창의력, 즉 지혜의 시대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가진 기술이나 배경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성공적이고 풍성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전 10:10에서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 1839∼1937)는 “내 사업의 성공비결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다”라고 했습니다. 작은 부자는 자기의 노력과 수고로 이루어지지만, 큰 부자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냇가에 가서 물을 떠오는 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되지만, 큰 비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유나이티드제약회사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제약회사 사장인 강덕영 집사님은 한국에서 약을 개발해서 외국에 수출한 첫 번째 회사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국에서 개발한 약을 선진국에 수출하는 데 성공했을까요? 그는 세계 여행을 하며 선진국의 80%가 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믿는 나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선진국가에 약을 만들어 팔려면 나도 성경을 알아야겠다. 하나님을 알아야겠다.’ 생각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성경을 읽고 연구해서 약을 만들었습니다.
   G.M.F 다움생식회사 사장, 엄성희라는 권사님은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지고 실패해서 재기의 가능성조차 안보이자 아무도 모르게 제주도로 도망을 갔습니다. 제주도에서 세를 얻어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웃 사람들이 구역예배를 드리자고 했습니다. 억지로 예배에 참석을 했는데 이웃들의 기도를 받고 마음에 평안을 맛보게 되었고 그 이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새벽마다 목욕재개를 하고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읽는데 창세기 1:29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 말씀이 엄성희 권사님을 사장이 되게 하고, 회사를 세우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은 모든 채소요,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입니다. 그래서 남편과 같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음식’이라는 뜻의 G.M.F(God Made Food)라는 회사 이름을 정하고 무공해 유기농산물만을 사용한 생식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새벽기도를 드리고 회사에서는 8시 30분에 모든 직원들을 모아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회사의 생식이 전국적으로 판매되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지혜의 근본이심을 믿으시고 성경 읽고 기도해서 인생을 변화시키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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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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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새벽 기도회 설교] 십자가 정신 (Special  Dawn Prayer Meeting)

십자가 정신

베드로전서 2:18~25

 

기독교 진리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기독교에서 십자가가 빠지면 타종교와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독교를 타종교와 명확한 선을 긋게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시다가 변화되신 사건을 변화산 사건이라고 합니다. 주님에게서 광채가 나고 주님의 옷은 세상에서 빨래하는 사람들이 희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주님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대화의 내용이 주님의 별세 즉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 만큼 십자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성경을 쥐어짜면 피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가 흐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흐릅니다. 구약은 양의 피로 충만하고 신약은 예수님의 피로 충만합니다. 십자가가 성경 진리의 핵심입니다.
   본문은 그 당시 주인의 학대 속에서 고통당하던 종들을 위로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종들이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고난에 관한 내용을 끄집어내서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말하면서 그 고난이 주는 의미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들여다보며 십자가 정신을 생각 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믿는 자들에게 본을 보이는 고난입니다. 21절에 보면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고 우리에게 고난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모델이 되셔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십자가의 고난은 피하고 부활의 영광만을 받으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의 본을 보여주시기 전에 십자가의 고난의 본을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본을 따라 가기만 하면 세상은 더욱 아름답게 변할 것이며,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본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은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가 하루는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왜 너는 예수님을 존경한다고 하면서 믿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간디는 그 친구의 질문에 “만약 예수님을 올바로 따르는 신앙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고려해 보겠다”라고 했답니다. 간디 주변에 있던 그리스도인들 중에 간디에게 주님을 따르는 본을 보여준 사람이 없기 때문에 간디는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간디가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하숙집 주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간디에게 전혀 본이 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만약 하숙집 주인이 간디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본을 보여주셨다면 간디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이고 그 결과 인도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중국의 모택동 역시 젊었을 때 미국으로 건너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두 가지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하는데, 하나는 기독교요, 다른 하나는 서구 문물입니다. 그런데 미국에 있는 동안 기독교인들에게 대단히 실망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공산주의에 빠져서 중국을 공산화 시켰다고 합니다. 그의 주변에도 주님을 따르는 본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주님과 관련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몇 그룹의 사람들로 나눠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룟 유다 그룹이 있습니다. 유다는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으며, 돈궤를 맡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돈에 눈이 어두워 노예의 몸값인 은 삼십에 선생을 판 자입니다. 재물에 눈이 어두워 살고 있다면 가룟 유다 그룹에 속합니다. 여러분도 혹시 세상 재물에 눈이 어두워 예수를 등지고 살지는 않습니까?
   본디오 빌라도 그룹입니다. 빌라도는 세속적인 인기와 명예와 권세를 잃을 것이 두려워서 죄가 없으신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세를 지키기 위하여 생명의 주를 못 박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권력에 눈이 어두워 살고 있다면 이 그룹에 속합니다.
   구레네 시몬 그룹입니다. 그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을 구경하다가 로마 병정에 의해서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억지로 지고가는 십자가에는 기쁨과 즐거움과 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간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때에는 재수 없는 일을 만난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것이 복이었습니다. 롬 16:13에 보면 구레네 시몬의 가족은 사도 바울이 인정할 정도로 귀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구레네 시몬의 12대 후손이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 대제입니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열매를 주실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 그룹입니다. 평안할 때는 주님을 위하여 목숨이라도 바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고난의 현장에서는 주님을 부인하고 십자가의 현장에는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고난은 회피하고 영광만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모든 일에 앞장서는 것 같으나 헌신의 자리에는 나타나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사도요한 그룹입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현장도 떠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목숨이라도 드려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죽음도 감수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도요한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하여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스스로 육체적인 고통을 선택한 분들이 있습니다. 중세의 수도사들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중세의 수도사들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사람이 토마스 아켐퍼스입니다. 그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내용은 주로 자신을 너무 믿지 말고 이 세상의 유혹과 위험으로부터 피하라는 것, 자신을 바로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 자신에 대한 계속적인 비판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덕목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라고 말합니다. 그의 영향을 받고 「걸식교단(mendicant order)」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결식교단의 대표적인 인물은 프란시스입니다. 프란시스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따라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는 말씀대로 제자들을 끌고 다니면서 이 집 저 집에서 걸식을 하면서 전도했습니다.
   저는 프란시스 같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삶을 닮으려고 했던 열정은 참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정도 직장도 재산도 버리고 걸식하며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가 세상을 떠나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신앙을 지키며 믿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해마다 예루살렘에서는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는 길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가장행렬을 합니다. 저는 가장행렬 정도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필리핀에서는 실제로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십자가 처형을 재현합니다. 이런 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필리핀에서는 고난당할 사람을 선택해서 십자가에 실제로 못을 박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람은 흠이 없는 청년으로 몸에 상처도 없어야 하고, 빚진 것도 없어야 합니다. 필리핀 천주교회는 십자가에 달린 그 청년의 생활을 평생 다 책임져줍니다. 이건 아닙니다. 주님을 본받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21절에 자취라는 말이 나오는데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린이들이 글씨를 배울 때 점선으로 된 글씨본을 따라서 그대로 글씨의 모양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본받아야 할 좋은 글씨체라는 뜻이 있습니다. 훌륭한 스승의 글씨체를 보고 영향을 받아서 열심히 노력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새롭게 해석해서 자기체를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자취를 따라 간다는 말은 전자가 아닌 후자 즉 스승의 글씨체를 보고 영향을 받아서 자기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 16:24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고난의 길을 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처럼 나무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십자가 정신을 두 가지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십자가 정신이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내 뜻을 내려놓는 정신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때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주님 자신은 십자가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아버지의 뜻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코뚜레를 한 소는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주인이 끄는 대로 끌려갑니다. 코가 아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본받는 생활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도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 주님이 원하시는 곳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소하고 다른 점은 소는 코뚜레 때문에 억지로 주인이 끄는 대로 끌려갑니다. 소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뜻이 알아지면 예수님처럼 스스로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드릴 때 어땠겠습니까? 아브라함의 마음이 그것을 원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아들을 죽여 제물로 드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셨기 때문에 자기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의 순종을 보시고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하신 것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바로 십자가의 정신을 실천한 것입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났지만 나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갈등할 때가 있습니다. 또 성령께서 감동을 주신 일과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따라는 것이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2.십자가 정신이란 타인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정신입니다.
   주님은 누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까? 첫째는 아버지를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었기에 십자가를 받아드리셨던 것입니다. 둘째는 아버지가 택하신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범죄 해서 저주 가운데 빠졌는데 그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타인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이 타인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지 본문에서는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 주님은 믿는 자들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24절).
   24절에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변함없는 원칙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자연계와 만물을 사랑하십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사람을 특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이 없고 이룬 것이 빈약하고 내 놓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몸과 마음과 행동으로 나타내는 직접적인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한 3: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16)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을 미워하시지 않고 미워하실 수 없다. 이것이 사랑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에게 또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의의 원칙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죄를 가장 싫어하시고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죄 값은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죄 용서 받는 유일한 하나님의 방법을 계시하셨습니다. 그것은 흠이 없이 깨끗하고 정결한 양을 죽여 피를 뿌림으로 용서받는 것입니다. 성경은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왜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사람이 지은 죄로 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대신 양이 피를 흘리고 죽는 것입니다. 양의 생명을 바쳐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때가 되고 절기만 되면 양을 잡았습니다. 한 마리 깨끗한 양에게 지금까지 저지른 내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잡아 피 흘리게 하는 것입니다. 매번 매년 이 일은 제사장에 의해서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양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양 한 마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례요한이 외쳤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바로 그분입니다. 이 어린양의 죽음으로 저와 여러분의 죄와 저주가 벗겨졌고 자유 함과 평화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고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 방법만을 고집하십니다. 왜냐하면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달리신 갈보리의 십자가는 나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십자가 밑에서 고백되어 지는 모든 죄를 깨끗하게 용서해 주십니다.
   사실 죄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모든 문제가 해결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가 죄로 인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문제가 십자가로 해결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면 모든 문제가 죄로 인하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은 후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습니까? 영적인 문제, 가정의 문제, 대인관계의 문제, 환경의 문제, 건강의 문제, 죽음의 문제 등등 이런 모든 문제가 죄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십자가에서 해결하신 것입니다.
   노르웨이의 어느 도시 '양의 교회'라는 크고 유명한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의 종탑 밑에는 한 마리의 양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 교회의 이름과 종탑 밑에 어린양을 쌔긴 데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 교회를 처음 세울 때 있었던 일인데, 교회 종탑을 만들게 위해 꽤 높은 곳에서 일을 하던 한 인부가 그만 실수로 발을 잘 못 디디는 바람에 미끄러져 떨어지고 말았답니다. 종탑 아래에는 단단한 아스팔트였기 때문에 떨어지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죽을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그 밑을 양치기와 그가 이끄는 한 무리의 양떼들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모여선 사람들이 '저런! 저런!' 하고 있는 동안 그 사람은 지나가든 양떼 위에 '퍽!' 하고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었습니다. 모두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군거리고 있는데 놀랍게도 인부가 아무 대도 다친 곳이 없이 그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부가 일어난 자리 밑에는 불상 하게도 한 마리의 어린양이 죽어 있었습니다. 이에 그 교회의 교인들은 사람의 목숨을 대신하여 죽은 그 어린양을 기념하기 위하여 짓고 있던 교회 이름 '양의 교회'라 하고 종탑 밑에 양을 새겨 넣었다고 합니다.
   교회는 양의 교회입니다. 어린 양되시는 주님이 죽으심으로 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둘째, 주님은 믿는 자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24절).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채찍에 맞으셨는데 채찍에 맞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24절에 분명히 말하고 있다. “저가 채찍에 맞으므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시 103:3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대표적인 2가지 은택이 나옵니다. 첫째가 죄 사함의 은택이며, 둘째가 병 고침의 은택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모든 병을 고치시며”
   병 고침은 하나님의 구속사업의 계획안에 들어 있습니다. 마 8:16,17절에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건강에 대한 믿음과 신유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으신 이유가 우리의 나음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우리가 병약한 자아상을 가지고 살아가면 안 됩니다.
   나를 대신해서 채찍에 맞으신 주님의 고난의 능력을 믿는다면 우리는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살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대로 역사해주실 것입니다. 94세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50살 때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예수님을 영혼 구원의 구세주로만 믿지 않고 병을 치료하시는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믿음대로 무병장수 하다가 94세에 세상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이분은 자녀들을 모아놓고 “너희들 지난 40년 동안 내가 아픈 것 보았느냐”, “나는 병 없이 본향에 가련다.” 하시더니 94세에 소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죽던 날 시계를 보시더니 “나는 오늘 10시에 집으로 간다.” 하시더니 9시에 성경 요한계시록 20장, 21장을 읽다가 10시가 되자 “예수님이 계신다. 나는 가야한다. Goodbye!” 하고 손을 흔들더니 의자에 앉은 채로 본향집으로 가셨습니다. 막 11:23절에 보면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실 것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손길을 통해서 병든 자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2007년 1월 이스라엘 선교 갔을 때 일이 생각납니다. 우리 일행은 나사렛 교회에 가서 기도사역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한국에 돌아온 후에 나사렛 교회 목사님께서 우리의 기도사역을 통해서 C형 간염환자가 고쳐졌다는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셋째,주님은 믿는 자들을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알기 전에는 길 잃은 가엾은 양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제는 영혼의 목자 되신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에게 큰 위로와 평안과 희망을 주십니다.
   계22:16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주님은 우리의 인생의 나침반이라는 뜻입니다. 나침반이 발명되기 전에 뱃사람들은 별을 보고 길을 찾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생의 광명한 새벽별이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그 일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시 23:1 에 보면 여호와는 양을 인도하는 목자입니다.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가면 방황하지 않습니다. 양은 목자를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길 잃은 양과 같은 우리가 방황하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인생의 방황이 끝납니다. 주님을 어설프게 만나면 믿는 것 같은데도 인생의 방황이 계속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을 만났습니까? 인생의 방황이 끝났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인생에 방황을 끝내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주님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질병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인생의 방황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처럼 우리도 타인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희생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희생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높이심이 숨어있습니다. 빌 2:5-11을 보면 십자가 희생 뒤에 숨어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주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하나님은 주님을 부활시키시고 모든 자들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모든 자들로 그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백화점 왕으로 유명한 워너메이커는 자기가 가진 것으로 평생 타인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분이 종로 2가에 있는 YMCA 건물을 지어준 분입니다. 그가 남을 위한 희생을 희생으로 여기지 않고 살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젊을 때 하루는 장미화원을 잘 가꾼 한 가정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 집의 주인은 그를 자신의 정원으로 데리고 가서 백장미와 흑장미 등 온갖 장미들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장미꽃들을 꺾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몇 개의 덩굴은 꽃 한 송이만을 남겨두고 모두 가지를 쳐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워너 메이커는 “아니, 왜 가지를 모조리 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좋은 장미 덩굴을 만들려면 가지를 쳐내야 합니다. 내가 가지를 쳐서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지를 잘라내 잃는 것이 없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워너 메이커는 그날부터 나누어주는 사업을 시작했고 결국 점점 더 큰 사업체를 갖게 돼 나중에는 미국의 대재벌이 되었습니다.
   남을 위하여 나를 포기하고 희생하는 것은 결코 나를 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복된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도 십자가 정신으로 타인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야 겠습니다.
   오늘은 십자가 정신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십자가 정신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둘째는 남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정신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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