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가정] 아름다운 부부

 

 

 
최근에 한 아름다운 부부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부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결단이요 결심이다!’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사랑이 결단이라는 말은 ‘헌신’의 또 다른 표현이다. 사랑은 곧 헌신이다. 언제나 이야기하듯이 사랑은 가벼운 감정의 터치가 아니다. 낭만적이고 에로틱한 사랑은 곧 끝이 난다. 그 이후에 우리는 진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어릴 때부터 친부로부터 성폭행을 당해오면서 두 번의 낙태를 경험하고 정신질환을 앓기도 했던 한 가엾은 자매가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자매는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고, 한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다. 자매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숨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 남자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말해주었다.

자매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그 남자는 난처한 기색으로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의 과거를 용납할 수는 없어요.”라고 하면서 자매를 떠나갔다. 이 남자는 자매의 겉모습만을 가볍게 사랑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사랑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른다. 자매는 또 한 번의 큰 상처를 견디며 살아갔다. 그러던 중 또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진실하게 자매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이 자매는 또다시 헤어질 아픔을 감수하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이 남자는 자매의 손을 꼭 잡아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다니 너무 마음이 아파요. 얼마나 힘들었어요? 이제는 내가 당신 곁에 있으면서 당신의 상처가 더 속히 치유되도록 도와줄께요.”

나는 이 젊은 남자보다 더 큰 사랑을 고백한 사람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유교적인 사상이 만연한 한국적 상황에서 자매의 지독한 과거를 그 자매와 함께 용납하며 헌신하기로 다짐하고 평생 사랑하기로 결단한 이 남자는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랑의 힘’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평범한 한국 남성들이라면 전자의 그 남자처럼 자매의 과거를 결코 용납하지 못하고 이별을 선언했을 것이다.

 

성경에도 비슷한 인물이 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정혼녀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자 매우 놀라고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아니 배신감을 느꼈거나 치욕을 느꼈

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 당시 사회적 관습을 따르지 않았다. 그 당시의 관습이라면 결혼 전에 임신을 한 처녀는 돌에 맞아 죽어야 했다. 만약 요셉이 이 사실을 부모에게 알렸거나 마을 사람 누군가에게 말했다면 마리아는 죽임을 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연인이나 배우자의 허물을 감싸안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휩쓸려 성급한 행동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마 1: 18-19)

 

만약 주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요셉에게 말하기도 전에 요셉이 성급하게 마리아를 정죄하고 죄인으로 사람들 앞에 서게 했더라면 어떠했을까. 요셉은 정말 멋진 남자였다. 자매들이여. 요셉과 같은 사람과 결혼하라. 만약 요셉이 신실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꿈에 주의 사자가 나타나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했더라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실하고 믿음 있는 요셉은 그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마리아와 혼인을 하였다. 믿음과 신실함과 신뢰할 만하고 존경할만한 남성을 만나는 여성은 가장 행복한 여성일 것이다.

 

나는 주위에서 많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특별히 어렸을 때 상처받은 여성들이 신실한 남성을 만나 치유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온 몸에 전율이 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반대로 상처받은 여성들이 더한 상처로 신음하는 남성을 만나 서로가 그 상처 위에 상처를 덧입히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권면하고 싶어진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부란 상처 없이 허물 없이 모든 환경이 유복한 두 사람이 만나 부부가 된 경우가 아니다. 한쪽이 지독한 상처로 허물어져 내릴지라도 다른 한 쪽이 그 상처를 껴안고 치유의 손길과 사랑의 헌신을 쏟아붓는 그런 부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부라도 믿는다.

 

결혼 전에 치유를 경험하면 남편이나 아내에게 그런 아름다운 사랑을 부어줄 수 있다. 그 사랑의 능력으로 상대방 배우자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게 된다. 하나님은 그런 목적으로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드셨다. 불완전한 세상에서 불완전한 부모의 양육을 받으며 곳곳에 상처의 흔적이 있는 두 사람이 서로의 상처에 영혼의 약을 바르며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치유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이 목적을 이루어가지 않는다면 부부는 곧 냉담해지고 서로에게 지치게 되리라. 이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부부, 서로에게 헌신하는 부부가 더욱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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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설교 :: 건강한 가정을 위하여

 

 


제목 : 행복한 가정을 위하여

말씀 : 잠 31;28∼31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30절)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행복을 위해 허락하신 가장 귀한 선물은 가정입니다. 하나님이 최초의 신랑 아담군과 최초의 신부 하와양의 결혼 주례를 맡으셔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땅을 정복하라,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축복하신 후 그들을 에덴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가정은 최초의 인간공동체였고 학교였으며 사회였습니다. 건강한 가정만이 밝은 사회,좋은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이 사회와 국가를 이루는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가정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부모님이 건강해야 합니다.

 

미국 초기 청교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영향을 끼친 분 중에 조너선 에드워드 목사님은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하는 믿음 좋은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맥스 쥬크 부부는 술과 담배에 찌든 생활을 했습니다. 믿음 좋은 에드워드 가계와 믿음이 전혀 없는 맥스 쥬크 부부의 가계를 연구,조사하였습니다. 그 조사 결과 하나님 말씀을 좇아 살아온 조너선 목사의 후손은 873명에 달했고 목사?장로 150여명,대학총장 12명,대학교수 75명,의사 60명,변호사 100여명,판사 30명,부통령 1명,하원의원 3명,많은 군장교 저술가 공무원들이 배출됐습니다.

 


이에 반해 맥스 쥬크의 후손은 조너선 목사 후손보다 많은 1292명에 달했으나 유아때 죽은 자가 309명,장애인이 440명,거지가 309명,나머지도 대부분 매춘부 절도범 살인자였으며 모두 가난하게 사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부모가 건강해야 자녀가 건강합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잘 섬기면 후손이 복을 받는 일은 하나님이 정하신 일입니다.


둘째, 부부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29절). 아내는 남편을 그리스도 섬기듯 순복하고 남편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줌과 같이 서로 사랑할 때 부부만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사랑스러우면 장인 장모가 존경스럽고 남편이 믿음직스러우면 시부모님도 좋아집니다. 부부 사이가 행복하면 태어난 자식들도 예쁘지만 부부간의 갈등과 헤어짐의 상처는 웃어른과 어린 자녀들에게까지 미칩니다. 부부 사랑이 부모 공경과 자녀 사랑을 위한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자녀는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28절). 부모 공경은 모든 이웃 어른을 섬기는 기분입니다. 부모님을 잘 섬기고 주 안에서 순종하면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의 복을 받습니다(엡 6:1∼3). 우리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서로 돕고 살아가야 합니다. 부부 사랑,부모 공경,자녀 사랑이 있는 건강한 가정은 주님이 다스리는 가정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둘이 한몸 되는 부부로 살게 하시고 좋은 부모님과 자녀들을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건강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을 꽃피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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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가정] 마음의 문을 여는 가족
 

 


마음의 문을 여는 가족
 

매일의 삶을 함께 나누는 가족들이 마음의 문을 닫아 놓은 채 갈등하게 되면 그 가정은
지옥이 됩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행복한 가정을 만든다는 명분 아래 심리학적 방법론에 근거한 수많은
해결책들을 내어놓습니다.

예를 든다면, “부부관계를 좋게 하는 방법”, “가족 사이의 효과적인 대화법”,
“효과적으로 부부 싸움하는 방법” 같은 것들이지요.
그러나 갈등의 근본원인인 이기심은 뒤로한 채 임시적인 방법에만 의존하는 해결책은
언제나 실패하고 맙니다.

따라서 가정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영적인 문제이며 가정은 가장 치열한 영적 싸움터임을
깨닫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족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위해 희생하면서 서로를 사랑하는 겁니다.
바로 이 말씀에 순종할 때 이 부부는 성품과 삶이 완전히 변화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지요.

그러나 사단은 사람들을 유혹해서 이 변화되는 기적 보다는 그럴듯해 보이는 심리적인 방법을
더 선호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어리석음이며 이 어리석음을 사단이 이용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명령을 감정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순종해야 합니다.

이 때 비로써 두 사람 사이에 닫혀 있었던 마음의 문이 열리고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면서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께서 순종하는 이들에게 성령의 열매인 사랑하는 마음을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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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그리스도인의 가정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불가피 한 경우"에는 사람이 나눌 수 있느니라(?): 
                -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변질시키는 한국 교회 세태를 통탄하면서 -

                                                                이성호 목사

        혼인 주례식에서 목사들은 주로 다음의 성경 구절로 예식을 마친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 (마19:7). 오늘날 이 구절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기 보다는 혼인식 마지막에 첨부되는 한 구절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혼인이 얼마나 많이 사람들에 의해서 나뉘어 지고 있는가?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주의 말씀과 "사람이 나누고" 있는 이 모순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만족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의 삶은 우리의 삶이다." 이것이 "말씀 따로, 생활 따로"라는 한국교회의 고질병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현상 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은 이러한 말씀과 생활의 분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하나의 노력이다.

천생연분?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는 구절이 한국 교회에서 그 강조점이 본문의 의도와는 달리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현상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 구절을 세상 사람들의 "천생연분"과 비슷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다"가 "하나님이 미리 짝지어 주셨다"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혼인을 앞둔 청년들과 그들의 부모들은 이 구절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미리 짝지어 준" 배우자를 위해 엄청난 열심을 가지고 기도한다. 물론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지적하고 싶은 것은 본문의 강조점은 "천생연분"이 아니라 "혼인의 엄숙성"이라는 것이다.  비록 형식상 목사의 주례로 짝이 지어지지만 실제로 그들의 주례자는 목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이 본문의 강조점이다.

        세상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를 묶는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이 식어지게 되면 더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다. 그들에게는 사랑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모든 것을 정당화시킨다.  영화 '타이타닉'이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감독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혼외 정사를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롬 1:23)" 버리려고 하는 것이 바로 세상이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한다.  남편과 아내를 하나로 묶는 것은 바로 하나님 "만"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부부의 사랑이나 기타 다른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 그분을 대신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성도들은 남편이 실직을 해서 경제적인 회생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여도, 아내가 정신병이나 불치병을 앓고 있어도, 심지어 사랑이 없어지게 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킨다.  왜냐하면 혼인을 유지시키는 것은 우리의 인간적인 지식이나 노력,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 19:7은 혼인을 앞둔 청년이나 혼인식의 주인공들에게도 적합한 말씀이지만  보다 구체적인 대상은 "불가피한 경우"로 인해 이혼 서류를 앞에 놓고 있는 부부이다.  혼인식을 막 치룬 부부들은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라는 말씀에 이구동성으로 '아멘, 아멘'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아마 불신자들도 여기에 대해서는 참 좋은 말씀이라고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혼 서류를 앞에 둔 부부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교회당 안에서) 혼인했다고 생각한다면, 왜 이혼은 사람 앞에서 (법정에서) 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혼의 거의 불가능성

        오늘날 미국에서는 이혼율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혼한 가정들이 "정상"적인 가정(숫자적으로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혼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것들 중에는 정말 "불가피하다"고 느끼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이혼하는 것이 낫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분명히 있다. 어떤 남편이 교통사고로 하반신 불수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남편은 경제적인 지원을 거의 할 수 없을 것이고 자녀 교육에도 상당한 제약이 있을 것이다. 이 같은 경우에 남편은 생을 자포자기하고 아내에게 오히려 거친 행동을 하게 된다 그의 아내는 앞으로 평생동안 성의 즐거움 없이 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아내에게 엄청난 짐이다. 남편이 자기 스스로가 이혼을 요청할 때, 아내는 더 약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판단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 대답 중의 하나는 "그들이 어떻게 혼인을 했는가?"이다. 그들은 혼인식에서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건강하거나 아플 때나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부부로서의 대의를 지키겠다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자들이다.  "배우자가 건강하고 부유할 때"라는 조건이 혼인에 붙는다면, 우리는 혼인을 "언약"이 아니라 "계약"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만약 혼인의 본질을 계약으로 본다면 더 이상 우리는 할 말이 없다. 100번을 혼인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혼인은 비즈니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인간은 개나 돼지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이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뀌는 또 하나의 순간이다.

        예수님께서 이혼 가능성을 열어 두고 계신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음행"에서만 나온다. 요즘 많은 기독교 학자들이 이 음행을 확대 해석하려고 시도하지만 성경 본문을 보라. 아무리 살펴보더라도 그렇게 확대 해석할 근거가 없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음행 보다 가정 폭력이 더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폭력이 이혼에 대한 더 중요한 근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같은 경우에도 어느 기간 동안 별거를 하든가 아니면 그 남편을 법에 호소하여 격리시키는 것은 가능할 지 모르지만, 이혼이 허락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상대방이 다른 남자나 여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만큼 견디기 힘든 일은 부부생활에 없을 것이다  이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아셨기에 우리 주님은 이혼의 문을 열어 놓으셨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 "어쩔 수 없는 허락"이지 "장려"나 "권면"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떤 목사님들 중에는 이 말씀을 근거로 배우자 중 한 명이 음행을 하면 반드시 이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지만, 이것은 본문에 대한 철저한 오해이다. 어떤 교인은 이 구절을 근거로 이혼하기 위해 의도적인 음행(비록 자신이 그것이 나쁜 줄 알면서도)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의도와 전혀 상반된 것이다.  예수님은 "음행"의 경우라 할지라도 상대편이 돌아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을 더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금방 드러난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들과 영적 간음을 수없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언약을 버리지 않으시고 인내하셨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 올 때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부로 다시 받아들이셨다. 이것이야말로 부부관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이혼의 불가능성에 대해서 강조해야 한다.

비록 이혼하더라도 . . .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혼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허용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음행의 연고(불신자의 핍박)로 이혼을 하려는 사람에게 주시는 주님이 명령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고전 7: 10, 11)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주목해 보다.  1) 이 말씀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엄격한 명령이다. 이 명령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 사도는 주님의 권위를 사용하고 있다.  2) 이 말씀은 혼인을 앞에 둔 사람이나 이혼을 이미 한 사람들이 아니라 혼인을 이미 한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이다.  3) 강조점은 역시 이혼의 가능성이 아니라 불가능성이다.  사도 바울에게 만일 이혼해도 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의 첫 번째 명령은 "안 된다"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하려는 사람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결심하여야 한다: 독신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전 남편과 화합하려고 노력할 것인가? 이러한 결단 없는 이혼은 교회 안에서 허락되지 않는다.  결국 혼인은 우리 임의로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혼만큼은 우리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볼 때, 교회 안에서의 이혼은 재 결합을 전제로 한 이혼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온다. 왜 사도 바울은 "갈릴 경우에는 좋은 사람 만나서 재혼할 수 있느니라"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이혼한 사람들에게 다시 전 배우자와 화합하라고 명하시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본문에서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이혼이라는 법적 절차가 상대방 배우자로 하여금 완전히 자유롭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보통 우리는 이혼은 혼인의 끝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이혼을 했더라도 그들의 하나됨은 어떤 유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나뉨은 사람에 의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여전히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은 "버린 여자에게 장가가는 자마다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도 일치한다. 왜 "이혼한 사람"과 혼인하는 것이 간음이 될 수 있는가?  하나의 대답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혼하였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부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이 나눈 것"과 "하나님이 나눈 것"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혼을 허락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나누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나누고 계시는가? 이혼과 나눔의 동일시 할 때의 필연적 결과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있느니라"이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하나님만이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누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두 배우자가 합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허락(혼인식)이 필요로 하듯이, 두 사람이 나누어지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허락이 필요하다. 그 허락은 바로 죽음(장례식)이다.  한 배우자가 죽으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몸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혼인해도 간음이 되지 않는다 (고전 7:39). 그렇다면 상대편이 죽으면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홀가분하게 다른 사람과 혼인해도 되는가?  사도 바울은 배우자를 사별한 성도들에게조차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고전 7:40, 이것은 단순히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 다음에 바로 사도는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성령님의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이 말씀은 혼인 적령기를 앞두고 있는 청년에게 권하는 독신(7:32-34)과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목사들이 상처한 사람들에게 던져야 할 일차적인 권면은 재혼이 아니라 독신이며, 따라서 독신의 복됨을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 얼마나 세상 상담학과는 구별되는 말인가?

        이혼한 사람들에게 주님은 두 가지를 권면하신다. 하나는 전 배우자와 화합하기를 노력하는 것, 다른 하나는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혼은 혼인의 끝이 아니다. 혼인의 끝이 될 수도 없다. 혼인의 끝은 하나님만이 결정하신다. 사람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다른 사람과 재혼하기 위한 시작도 아니다. 오히려 상대방을 용서하기 위한 훈련과정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이혼 기간 동안 원수사랑의 훈련을 하시기를 원하신다.  이 기간은 원수인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기간이다. 또한 자신을 버린 그(녀)를 위해 기도하는 기간이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비록 힘이 들더라도 다시 화합하기를 노력하는 기간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원수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낄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가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혼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비록 그 사람에게 뼈아픈 시간이 된다 할 지라도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들은 복 있는 자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화평케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는 이혼자들이 교회에서도 동일한 취급을 받지 않도록 교회는 그들을 돌보아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혼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이혼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이다. "혼인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듯이 이혼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 "네 원수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혼한 사람들만큼 이 말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또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무시하고 이혼하더라도 무조건 다시 합하라고 명하지 않으셨다.  만약 그렇게 명하셨다면 그 말씀은 이혼한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짐이 되었을 것이다. 이혼한 사람들은 전 배우자와 다시 화합하기를 소망하는 가운데, 즉, 전 배우자가 회개하거나 자신이 그를 진정으로 용서할 마음을 준비하면서, 얼마든지 독신으로 지낼 수 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그러한 노력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으로 나뉨을 허락 받을 때까지, 즉 상대방이나 자신의 죽음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15).  결국 이혼 기간 동안 그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상대방에 대한 용서와 화합이다.

        많은 성도들이 이와 같은 혼인의 엄숙함에 고개를 저을지 모르겠다.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의 이같은 말씀을 들었을 때,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마 19:10)"라고 불신의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 지어다." 다른 말씀도 마찬가지지만 혼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도 아무나 받을 수 없다. 오직 귀 있는 자만이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받을만한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 

목회자의 사명

        이번 이산가족 상봉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장기려 박사님을 한 번 보자.  그 분은 사랑하는 아내를 이북에 홀로 두고 이남으로 내려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분은 끝가지 재혼을 하지 않았다.  그는 통일이 되면 다시 한 부부로 살 것이라는 기대를 늘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갔다. 결국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분은 독신으로 돌아가셨지만 그분은 부부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셨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 교회는 (배우자가 살아 있을 동안의) 재혼에 대해서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재혼은 이혼한 부부가 다시 합할 가능성을 현저하게 막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재혼은 혼인이 아니라 간음이다.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재혼을 허락하는 것은 공식적으로 간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재혼을 옹호하는 입장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 근거하고 있다. 어떤 남편이 폭행이 심하다고 하자. 그 남편이 평생동안 그렇게 폭행이 심할지 아니면 때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그 남편을 돌이키셔서 정말 훌룡한 남편으로 바꾸실지 누가 알겠는가?

        재혼이 더 나은 혼인 생활을 보장할 것인가라는 말에도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통계적으로도 재혼한 가정의 85%가 이전 보다 더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더 큰 문제는 재혼은 부모들의 죄의 결과가 자손들에까지도 미친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어린 자녀들이 부모들의 이혼과 재혼으로 고통당하고 있는가? 우리는 인간이기에 장래의 일을 알 수 없다. 좋은 혼인 생활이 사람의 기준으로 판단되어서도 곤란하다.  혼인의 일차적이 목적은 두 사람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따라서 "좋은 사람만 있다면"이란 말을 교회는 삼가야 한다.  "좋은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전 배우자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혼한 사람들이 늘어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교회는 이혼과 재혼의 문을 쉽게 열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이 문을 쉽게 열어 버린 미국 교회들은 이혼과 재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거의 침묵하고 있다. 

        평신도는 고사하고 교회의 저명한 목사나 신학교수들이 자기 아내를 버리고 재혼하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물론 이유는 있으리라. 어떤 분은 아내가 정신병이 들었기 때문에, 어떤 분은 사모님이 너무 목회가 힘들어서 가정을 떠났기 때문에 재혼을 했다고 한다. 본인은 이러한 경우에도 그들이 목회나 신학 교수를 포기해서라도 가정을 지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왜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가?  병든 아내와 도망간 아내, 그리고 목회와 신학 활동, 둘 중에 어느 것이 중요한가? 그들은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더욱 혼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목회자는 어떠한 경우라도 "아내와 동거하라"는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에 순종하여야 한다. 목회자는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여야 한다." 어떻게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고 목회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한국 목회자들이여, 어떠한 경우에라도 아내를 버리는 것을 정당화하지 말라.  목회나 성도는 포기해도 된다. 당신들이 없어도, 하나님은 돌들을 일으켜서라도 얼마든지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실 것이다.  그러나 아내를 포기한다면 누가 그녀를 보호해 주겠는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간음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면 저로 간음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아내를 버리는 자는 "간음하게 하는 죄"를 짓는다. 간음하는 죄보다 더 큰 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본인은 목회자들에게 더 이상 "간음하게 하는 죄", 즉 아내를 버리는 죄를 짓지 말라고 호소한다.

        이혼과 재혼,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러기에 목사들은 말씀과 씨름해야 한다. "전 남편(아내)과 다시 화합하라"는 주님의 명령과 "도저히 서로 같이 살 수 없어 보이는" 인간적 상황! 이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넓은 길은 존재한다.  이혼한 사람들이 상담하러 왔을 때, 목사들은 "좋은 사람 만나서 혼인하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대답은 불신자들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의 답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은  그 상처받은 영혼들을 말씀으로 치료할,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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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녀 평등]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
 
 

아내: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
부제: 남녀 평등에 대하여

오늘날, 비록 현실적으로는 차별적 요소가 있을 지 모르지만, 남녀 평등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만약 여기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하면, 아주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그런 점에서,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교회들은 정말 큰 위기와 숙제를 안고 현대를 살아가고 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 올 때만해도 교회가 남녀 평등을 선도하였는데, 이제는 그와 반대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위기 가운데 자신들을 성찰하지 않고 성경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다면, 교회의 앞날은 어둡기만 할 것이다. 특히, 교회 안에서 여성에 대한 비하가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철저한 자기 반성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우리는 더욱 성경에서 말하는 남녀 평등이 어떤 것인지를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우리는 현대적인 관점에 보았을 때, 성경이 남녀 차별을 이야기 하고 있음을 인정하여야 한다. 성경은 분명히 여자에게 교회 안에서 다스림의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다스림의 권한 속에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가르침의 권한을 제한한다.  많은 이들이 이것은 차별이 아니고 구별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오늘날 누가 보아도 이것은 차별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오직 능력에 따른 차별만이 인정될 뿐이지 성에 따른 차별은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여자 중에서 지적으로 훨씬 탁월하고 리더쉽도 있는데, 금하는 것은 차별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숙제는 이러한 차별이 평등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이다.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인간 사회는 본질적으로 타락하여서 참된 평등의 사회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평등에 대한 올바른 개념도 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된 평등의 모습을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아마, 이세상에서 가장 평등한 모습은 삼위 하나님 그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구분된 세개의 위격을 가지시면서도 동시에 본성에 있어서 단일한 이것 보다 더 평등한 모습이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삼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현대의 시각에서 볼 때, 대단히 불평등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순서에 있어서 성부는 항상 1위가 되신다.  더구나 성자는 단일하심에도 불구하고 성부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한다. 심지어 그분은 성육신하시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성령 하나님 역시 자의로 말씀하시지 않고 성자께서 주시는 말씀만 교회에 주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당신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또 하나의 평등한 모습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머리로서의 그리스도와 지체로서의 교회는 한 몸을 이룬다. 이 속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머리로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는 그리스도께 순종한다. 비록, 교회가 고난가운데 있으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간구하고, 강청하고, 심지어 불평하고 원망할 수는 있겠지만(대표적으로 시편의 탄원시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버려서는 안되고 더구나 그리스도께 명령을 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 역시 아무리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교회를 사랑만 할 수 있을 뿐이지 버리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 삼위 안의 사랑과 복종의 관계가 여기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어떻게 보면 아주 불평등한 모습이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교회 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위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성경은 여자와 남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니까 남녀 간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남녀간의 차별을 말하는 다른 구절을 무시하는 것도 정직한 성경읽기는 아니다. 문제는 남녀가 하나인데 어떻게 하나인가가 중요하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머리 대 머리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머리와 지체로서 하나라고 말한다. 만약, 이것을 불평등의 관계로 본다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도 불평등의 관계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의 관계 역시 대단한 불평등의 관계이다.

문제는 왜 머리와 몸의 관계를 불평등의 관계로 보는가이다. 그것은 바로 머리와 몸을 하나로 보는 것이 아니라 따로 떼어 놓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사고 방식 속에는 이것은 조화와 평등이 아니라 차별일 뿐이다. 하지만, 성경은 머리와 몸의 관계가 지극히 정상적이며 올바른 관계임을 가르친다. 즉, 사랑과 복종은 평등이나 하나의 개념과 상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현대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평등의 개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까? 오직 사랑과 복종이라는 “차별”적인 요소만 있을까?  그렇지 않다.  성경은 아내에게 대해서 말하기를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라고 말한다(벧전 3장 7절).  그리고 바로 이 사실 때문에 남편들은 아내를 “귀히 여겨야”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그들의 기도가 막히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즉,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있어서 생명의 은혜를 받음에 있어서는 전혀 차별이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현대적인 관점에서 남녀평등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 때문에 교회 안에서 남성들은 특히 남자인 목사들은 여자를 귀히 여겨야 한다.  만약 그들이 귀히 여지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주님 역시 그들의 기도를 귀히 여기지 않으실 것이다.  즉, 아내를 귀히 여기는 문제는 단순히 도덕적인 문제를 떠나, 우리가 주님과 교제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생사가 걸린 영적인 문제이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은 아내 귀한 줄 모르는 남편이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함을 암시하고 있다. 정말로 이런 생각을 한다면, 남자들이 교회 안에서 여자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수적인 교회들은 남녀 차별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 안수를 받아들인 교회들 보다 자신들이 더 성경적으로 옳다고 자만만 할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많은 노력을 들여서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에 따른 경건의 연습을 해야 한다.

[아내를 구체적으로 귀하게 여기는 방법 하나를 제안하고자 한다. 바로 아내에게 경어체를 쓰는 것이다. 내 경험상, 이것은 아내와 다툴 때,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넘지 않도록 제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결혼을 앞두거나 갓 결혼한 젊은 청년들에게 권한다. 벧전 3장 7절에 따르면, 여자는 더 연약한 그릇이다. 잘못된 말 한마디가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반말은 평소 사이 좋을 때는 보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지는 모르지만, 서로 다툴 때는 험한 말이 쉽게 나오게 되고 서로의 관계에 치명상을 줄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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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을 위한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아버지! 저희들에게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허락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은 저희와의 관계를 중히 여기셔서 목숨까지 버려가며

그 관계를 회복해 주셨지만, 저희는 주님과의 관계를

막 연하게 생각하며 저희들과의 관계도 손쉬운 관계로만 여겨 왔습니다.

 

주님!

저희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시고 정말 소중한 관계를 이루어나가게 도와주소서!

 

주님!

저희 가정에 비둘기 같은 평화를 주옵소서! 온 가족의 마음을

 주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묶어 주셔서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며 살아가게 허옵소서!

 

먼저 저희 가정에 주신 주님의 축복과 은총을 깨닫고

감사할 때 행복이 있사오니 범사에 감사하며

불평이나 원망하는 생활을 하지 않도록 하시옵소서!

 

행복과 사랑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불행과 다툼을 주는 것은

인간의 욕심과 사탄의 장난이오니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가정,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가정, 찬송과 기도가 언제나

끊이지 않는 믿음의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희생과 양보와 절제 속에 행복이 있음을 깨달아

그러한 생활을 하게 하시며 저희 가정의 행복이

이웃과 사회와 온 인류의 행복의 밑거름이 되는 축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가정의 행복을 원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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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정이 되게 하소서..

 

우리에게 가정을 주셔서 이 땅에 사는 동안

외롭지 않게 하여 주신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고 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의 많은 가정들이 신음하며 아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정을 작은 교회로 작은 천국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자신만 아는 우리의 이기적인 죄악 된 본성과

인격적인 미성숙함으로 부부간에 상처를 주며 상처를 받으며

부모와 자식 간에도 대화의 부재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가정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신앙생활도 즐겁고 교회도 건강한데

사단은 온갖 계락을 통해 가정들을 무너뜨리려 합니다.

 

믿음의 가정들로 하여금 영적인 분별력을 주옵소서.

서로의 잘못을 꼬집고 헐뜯으며 상대방을 미워하지 말게 하시고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죄를 미워하며 죄를 짓게 만드는

사단을 대적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이런 가정이 되길 소원합니다.

가정들마다 칭찬이 보약임을 알게 하소서.

 

남편은 입만 열면 아내를 자랑하며

아내는 우리 남편이 최고라고 말하게 하소서.

부모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자녀들을 주의 말씀으로

양육하게 하시며 자녀는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며 순종하게 하소서.

 

사랑하기에도 모자라는 시간 미워하지 않게 하시며

사랑으로 허다한 허물을 덮어가는 가정이 되게 하사 상처입고

허물어진 가정들이 하나님이 만드신 본래의 가정들로

 회복되어 가게 하소서.

 

우리 가정의 주인 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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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을 위한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아버지! 저희들에게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허락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은 저희와의 관계를 중히 여기셔서 목숨까지 버려가며

그 관계를 회복해 주셨지만, 저희는 주님과의 관계를

막 연하게 생각하며 저희들과의 관계도 손쉬운 관계로만 여겨 왔습니다.

 

주님!

저희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시고 정말 소중한 관계를 이루어나가게 도와주소서!

 

주님!

저희 가정에 비둘기 같은 평화를 주옵소서! 온 가족의 마음을

 주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묶어 주셔서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며 살아가게 허옵소서!

 

먼저 저희 가정에 주신 주님의 축복과 은총을 깨닫고

감사할 때 행복이 있사오니 범사에 감사하며

불평이나 원망하는 생활을 하지 않도록 하시옵소서!

 

행복과 사랑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불행과 다툼을 주는 것은

인간의 욕심과 사탄의 장난이오니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가정,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가정, 찬송과 기도가 언제나

끊이지 않는 믿음의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희생과 양보와 절제 속에 행복이 있음을 깨달아

그러한 생활을 하게 하시며 저희 가정의 행복이

이웃과 사회와 온 인류의 행복의 밑거름이 되는 축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가정의 행복을 원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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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신 하나님!

 

주님이 은혜로우신 섭리로

저를 이세상에 보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저를 잉태하고 해산하고

양육한 부모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자식 양육의 고귀한 사명을 수행한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평강을 주소서.

그동안 쇠약해진 심신을 소생시켜 건강하게 하시며

양육한 자녀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부모 되게 하심

그들의 노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의 평생을 지켜주시옵소서.

 

또한 오늘 생일을 맞은 저를 위해 기도드립니다.

세인들에게 생일이란 축하받는 기념의 날이지만

하나님의 지녀된 저희로서는

먼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존재를 부여하신 하나님을 알고

경배와 섬김의 일생을 가게 하옵소서.

믿음 지혜, 사랑, 겸손, 순종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봉사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전도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이 세상의 모든 죄악과 환난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소서.

인생이 위로 하나님께 영과 이요

아래로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게 하옵소서.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저의 인생을 의탁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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