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번연, 천로역정영화로 본다  (The Pilgrim's Progress)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대표적인 기독교 고전인데,

존 번연 원작 영화 천로역정한국어로 더빙되어 있어 쉽고 재밌게 감상할 수있습니다. 

 

 

 

 

존 번연은 1628년 영국 베드퍼드의 엘스토우에서 땜장이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평생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1649, 혼수로 아서 덴트의 보통 사람들이 천국으로 가는 길

과 루이스 베일리의 경건의 실천을 가져 온 여인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경건서적과 아내의 영향으로 회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끄신 존 번연의 영적 체험담으로, 6년간의 수감생활을 겪은 후인 1666년에 기록된 책입니다. 번연은 박해로 인해 신앙이 약화된 동료 성도들을 권면하고, 자신 또한 그들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시험들을 견뎌 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 책을 썼습니다.

 

번연은 자신의 일생 동안 일어난 외적인 사실들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오히려 베드포드에 있는 성도들에게 자신을 영적 아버지가 되도록 이끄신 하나님의 섭리의 발자국들을 추적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관한 책을 쓰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떻게 은혜를 행하셨는지에 관해 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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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 고난의 의미

 

 

 

제목 : 고난의 유익

말씀 : 롬5:1-4

17세기에 영국이 낳은 세계적 문학가이며, 거의 성자에 반열에 오를 큼 훌륭한 목사였던 죤 번연이라는 분이 있다. 이분은 사실 신학을 전공한 분도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한분도 아니었다. 처음에 그의 직업은 함석이나 쇠붙이 등을 붙이고 때우는 땜장이였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기도생활을 하였고 수십번씩 성경을 읽으며 기타의 서적도 열심히 읽었다.

그리하여 세상적인 공부도 많이 하지 않았고, 신학도 공부하지 않은 그는 목사가 되었으며(침례교에서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신실한 신앙인으로 교회의 인정을 받으면 목사가 될 수 있음.) 기독교 교리서와 기도문 등의 많은 책을 썼고 그중에서도 천로역정은 지금까지 많은 신앙인들에게 읽혀져 많은 도전과 소망을 주고 있는 불후의 고전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삶을 파란만장했다. 그는 침례교의 설교자였는데 국교파의 모함을 받아 12년동안 감옥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너무 몸이 허약하여 병치레만하다가 그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찍 하나님품으로 가고 말았다. 큰 딸 메리는 시각장애인이었고, 두 아들은 번연만큼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는 더욱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고난과 그 고난으로 인하여 날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 그로 하여금 더욱 신실한 신앙인이 되게 하였으며 결국은 「천로역정」이라는 기독교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라고해도 과언이 아닌 불후의 명작을 낳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많은 고난이 있다. 기독교인이라해도 별로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랑의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왜 이렇게 불행과 고통이 있는데 그대로 보고만 계시는가? 왜 홍수는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왜 많은 사람들이 고치기 힘든 질고로 고통을 당하게 내버려 두시는가? 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가?”

물론 이러한 고통과 불행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아서 내버려 두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 인류가 고통가운데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렇다면 왜 고통의 현실에 직접개입하지 않으실까? 물론 무언가 인간의 삶에 필요한 일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게 뭘까?

1.하나님을 찾고 믿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은 평안하고 부족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잘 찾지 않는다. 자녀를 키워 봐도 그렇다. 어릴 때는 열심히 부모를 찾는다. 부모에게서 떨어지면 죽는 줄 알고 열심히 따라 다닌다. 그러나 점점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하면 멀어지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벌써 서서히 멀어진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대학교 청년시절을 지나며 점점 멀어져 그때부터는 별로 찾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인생이다. 힘없고 빽없고 혼자 살기 어렵고 고통의 현실이 있으면 무언가 의지할 것을 찾는다. 그러나 아쉬운 게 없으면 자기 멋대로 살려고 한다. 고통과 어려움과 아쉬운게 없이 평안해지면 슬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쉽다. 엉뚱한 짓을 하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애굽에서 평안히 거할 때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부르짖지도 않았다. 그러나 바로 왕에게 학대를 당하고 고역으로 힘들어지자 그때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가정적으로도 평안할때는 하나님을 잘 찾지 않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가정에 무언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와 울고불고하는 경우가 많다. 실직이나 사업의 실패나 자녀에게 어려움이 오거나 여하튼 무언가 시련과 고통이 있을때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잘 아시기에 여러번 평안하고 형통할 때 조심 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신31:20,21절에 보면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즉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 안에 들어가서 먹고 배부르고 평안하게 거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잊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결국 환난을 자초하게 될 것이고 그때에 모세의 노래 즉 이스라엘의 배교를 경고한 노래를 통하여 비로소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 인생은 어리석어서 평안할 때 주님을 멀리하기 쉽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생에게 환난과 고통으로 경고를 보내신다. 돌아오라는 신호이다. 엎드리라는 신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환란과 고통이 그 당시에는 쓰리고 아프지 마는 이러한 고통은 인간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한다는 것, 인생이 연약하고 무지하고 어찌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만든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믿고 의지하게 하기 위한 도구로써 고통을 허용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혹시 고난이 있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며 축복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그 앞에 더욱 엎드리자.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도리어 복의 기회로 만들어가자.

2.천국을 사모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칼빈(J.Calvin)은 “이 세상에 고통이 많은 것은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말했다. 사실 이 세상에 고통이 없이 편하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다지 천국을 사모하지 않을 것이다.

안 그런가?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다면, 세상에서 아무런 근심도 고통도 부족한 것도 없다면 천국이 무에 그리 그리워지겠는가? 그저 세상의 것에 빠져서 무사안일하게 거기서 만족을 추구하며 살게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고 말씀 하신 것이다. 먹고 배부르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기면 천국이 그렇게 절실하게 요청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환란과 고통을 당하게 되면 근심과 고통과 슬픔이 없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간절히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편안하게 살때에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그리워하지도 않고 돌아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압박과 고통을 당하게 될때 그제서야 가나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시 우리 가운데 고통의 현실이 있다면 그것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욱 천국을 사모하게 하시고, 천국을 사모할때에 너무 세상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참 자유를 누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너무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더욱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그 천국을 앞당겨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하는 가운데 그 하나님의 능력과 힘으로 고난의 현실을 이기고 천국의 은혜를 앞당겨 누리는 삶을 살아가기 바란다.

3.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환란과 고통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내멋대로 살고 죄를 짓게 될 때 오는 수가 많다. 그래서 불순종하고 제 멋대로 살다가도 고통이 닥치면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도 많이 보게 된다. 속된 말로 하면 실컷 두들겨 맞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때가 너무 많은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순종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때로는 고난의 현실을 허용하신다.

그래서 시편119편 67절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하고 고백했고, 계속해서 71절에 보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 주의 율레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당하는 질병이나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가 미워서 주시는 벌이라기보다는 그것을 통하여 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하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인 것이다.

그래서 히12:6절에 보면 “주께서 그 사랑 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고 했다. 또 11절에서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환란과 고통과 실패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더욱 그 앞에 엎드리자. 물론 그것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원망하고 불평하고 한탄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더욱 인생의 구렁속으로 몰아가는 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의 현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는 도리어 큰 축복이요,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앞에 더욱 엎드려 살아갈때에 어떤 어려움의 현실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도리어 복의 기회로 삼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자.

4.인내와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미국의 어느 잡지에 5천년 묵은 나무가 있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나무가 살고 있는 땅은 결코 좋은 땅이 아니라고 한다. 산언덕에 바람이 부딪치고 바위가 많은 토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나무는 땅도 나쁘고 모든 조건이 나쁘기 때문에 오히려 뿌리는 아주 깊이 박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나무는 이 척박한 땅에서 성장하여 아주 단단하게 되었고 뿌리도 깊이 내려 그렇게 오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저 평안하게 사는 것이 인생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삶은 마치 온실 속의 화초와 같다. 온실 속의 화초는 뿌리도 깊지 않다. 단단하지도 않다. 더위나 추위나 습도에 대한 적응력도 부족하다. 그래서 조금만 조건이 맞지 않으면 금방 시들기 쉽다. 우리 인생도 동일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신다. 강하게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뿌리 깊은 나무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어떠한 환란과 시련과 역경이 오더라도 힘차게 이겨 나갈 수 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종종 우리를 고통의 현장속으로 데리고 나가기도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3,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믿음으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감을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늘 기뻐하며 살 수 있는데 심지어는 환난 가운데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환난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살수 있는가하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환난은 인내를 이룬다는 것은 비록 고통의 현실이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결국 이겨내고 은혜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을 의지함으로 인내할때에 결국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격으로 훈련되어지고 그렇게 잘 훈련될때 우리는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게 되며 동시에 우리를 더욱 소망위에 든든히 세울 것이기 때문에 환난조차도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가 있다는 말씀이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고난의 현실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고난은 분명히 쓴 것이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도 쓴약이 몸에 좋다고 하지 않는가? 늘 평안한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고난을 일부러 자초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혹시 고난의 현실이 있다면 무언가 하나님의 필요가 있음을 기억하자.

더욱 우리의 신앙 인격을 다듬기 위한 것이든, 더욱 우리를 소망위에 세우시고 천국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한 것이든 아니면 혹시 우리의 죄로 인하여 더욱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순종케하기 위한 것이든 어쨌든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

그러므로 혹시 우리에게 어떤 고난의 현실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리석게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그 시련과 고통을 통하여 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더욱 주님 앞에 엎드리며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삶을 통하여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어 누릴줄 아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조학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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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번연 원작 영화 천로역정(풀 버전 영어와 한글 가각소개)

 

 


주님을 사랑하는 분들께 존번연의 천로역정 영화를

소개합니다.19세기까지 천로역정은 기독교인들의 초베스트셀러였다고 합니다.

생명으로 가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사람이
적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진리입니다.

시간을 내서 꼭 보시고 우리 사랑하는 주님을 향한 진리를 향해

더욱 전진하는 유익한 시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편하게게 보실 수 있도록

천로역정 영화의 영어와 한글자막버전을 동시에 소개합니다.

 

( Pilgrim's Progress: English Version 영어버전)

 

 

천로역정 (한글자막 풀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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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번연(1626-1688)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

 

 

 


 존 번연: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청교도 작가중의 한 사람

 존 번연은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청교도 작가가운에 한 사람이다. 이것은 당시 대다수의 청교도 작가들이 옥스퍼드와 캠브릿지 대학 출신이었음에 비해 번연은 가난한 땜쟁이의 맏아들로 태어나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기 때문에 놀라운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번연이 태어난 17세기 영국은 내란(1642-47)과 청교도가 주도한 공화국시기를 거쳐 다시 왕정복고(1660)와 청교도 추방령(1662)과 찰스 2세의 관용령(1972)등의 정치적, 종교적 소용돌이의 시대였다. 번연은 16-18살때인 1644-46년에 의회군에 입대하여 전쟁에 참여해서 죽을고비를 많이 넘기기도 했다.
번연은 오랜 기간동안의 회심에 대한 몸부림 이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비국교도 소속으로서 당국의 허가없이 설교를 했다가 32살때인 1660년 11월 불법집회를 인도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1661년 1월 3개월형을 언도받고 수감생활을 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설교를 하지 말라고
하는 당국자들의 말을 거절했기 때문에 형량은 1672년으로 연장되었다. 1672년 3월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베드포드 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5월에는 찰스 2세의 관용령으로 정식으로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번연은 부지런히 목회를 하며, 설교와 전도를 하면서도 계속 글을 써서 60살때인 1688년 죽기 불과 2년전까지 약 6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천로역정: 성경다음으로 가장 사랑받은 책

 

이러한 번연의 60권의 저서가운데서 가장 널리알려진 불후의 명작 「천로역정」은 바로 번연의 감옥생활중에 탄생되었다. 1부는 1678년, 제2부는 1684년에 출판되었다. 출판이후 천로역정은 아마도 성경다음으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많이 읽히고, 가장 사랑받는 작품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678년에 천로역정 1부 초판이 발간된 이래 번연의 생애동안 11판이나 거듭인쇄되었고, 1688년 번연이 죽었을 때,
화란어, 프랑스어, 웨일즈어로 번역되었다. 오늘날 천로역정은 약 70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성경을 번역한 다음 가장 먼저 번역하는 기독교 서적은 바로 번연의 「천로역정」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성경번역 다음으로 천로역정이 두 번째로 1895년 미국선교사


게일에 의해서 번역된바 있다. 이후로도 지금까지 천로역정은 아마도 단행본으로서는 가장 많은 십여종의 수많은 번역본들이 있을 정도로 중요한 책이기도 하다.

성도의 일생을 여행으로 그리는 천로역정의 내용과 전달형식의 탁월성 천로역정이 이렇게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아마도 천로역정이 다루고 내용과 그 전달형식의 탁월함에서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천로역정의 주제는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라고 하는 구원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구원론의 주제는 루터가 역시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해 ‘이신칭의’의 진리를 발견함으로써 16세기 종교개혁이 출발된 주제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구원론은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체험적이고 피부에 와 닿는 주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번연은 이러한 구원론을
신학적인 논문이나 논리적 설명이 아니라 탁월한 문학적 알레고리 기법을 사용해서 다루고 있다. 즉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경험인 그리고 성경에서 성도의 삶에 대한 가장 중요한 상징의 하나인 여행의 상징을 사용해서 성도의 일생을 한 도시(장망성: 이 세상 상징)를 떠나서 다른 도시(천성:천국 상징)로 들어가는 여행으로 묘사한다. 이 여행은 온갖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해가는 싸움의 과정이기도 하다. 번연은 이러한 여행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인물, 장소, 사건들을 사용해서 구원의 과정에서 경험되어지는 성도의 마음의 상태를
천재적으로 묘사해낸다. 천로역정은 곧 구원받은 성도들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영적 성장의 단계를 여행의 과정으로, 또한 영적 성장에 따르는 내적 투쟁의 과정을 싸움의 과정으로 그림처럼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따라서 우리는 번연의 천로역정을 통해서 성도들의 영적 일대기를 그림처럼, 하나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볼 수 있는 감동을 받게되는 것이다.

 

천로역정은 청교도 구원신학의 설계도요 목차

 

사실 천로역정은 바로 청교도 신학의 구원론의 전체 설계도요 목차와 같은 역할을 한다. 천로역정에 나오는 주인공 ‘그리스도인’의 여행과정은 곧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 칭의, 성화, 영화에 이르는 구원받은 성도의 영적 일생의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청교도 신학의 심오한 구원론의 내용이 탁월한 문학적 그릇을 통하여
그림처럼 선명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전달되고 있기 때문에 시대를 초월한 고전이 될 수 있었다.

 

스펄전이 가장 사랑한 책


아마도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가장 사랑하고 애독했던 사람은 19세기 최고의 설교자였던 찰스 스펄전이었을 것이다. 스펄전은 무려 생애동안 천로역정을 100번이상 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스펄전이 50중반에
소천했기 때문에 스펄전은 무려 1회에 평균 2번 이상씩 천로역정을 읽었던 셈이다.

스펄전에 이토록 천로역정을 읽고, 읽고 또 읽어서 자신의 피와 살이 되도록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물음인 다음의 문제에 대한 가장 명쾌하고, 선명한 그리고 감동적인 대답을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2017년 '5월의 필독서' 소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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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도서] 폭스의 순교사

 


책소개

 

그리스도인의 역사는 피뿌린 역사이다. 그 피는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피요, 그 다음으로는 그분을 따르는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흘린 피이다. 이 피는 아벨의 피부터 시작하여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피를 거쳐, 로마카톨릭의 시퍼런 칼날 끝으로 흘러내려, 오늘날 우리 가슴속까지 깊이 간직되어 있다.


이 책은 우리 주께서 고난받아 죽으신 이래로, 그분을 고백한 성도들이 있었던 모든 시대에 가해진 박해를 기록해 놓은 책이다. 로마 제국과 중세 시대 로마카톨릭에 의해 행해진 박해가 주로 다루어져 있으며, 특별히 로마카톨릭이 성도들에게 자행한 박해는 너무나 끔찍하고 잔인해서, 누구라도 그 집단을 지옥의 교회요 사탄의 교회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 박해와 순교의 모습들이 가장 처참하고 가장 극적이며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바로 그 순교의 현장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저자소개

존 폭스(1517-1587)는 영국 링컨셔 주 보스톤 출신으로 옥스포드대학에서 문학과 신학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수학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면서 그의 사상은 종교 개혁 쪽으로 진행되었고 결국 로마카톨릭의 오류를 깨닫고 그 교회사를 파헤치기로 마음먹었으며 학교에서는 퇴학당하게 된다.

폭스는 그의 생애에서 오랫동안 숨어 피해 다니는 삶을 살았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분리한 헨리 8세와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 때에는 평안한 날을 보냈지만 곧 이어 등극한 메리 여왕은 철저한 로마카톨릭이었고 따라서 폭스는 다시 박해를 피해 다녀야 했다.

스위스에서 그는 〈행적과 유적들을 통해서 본 교회사,1554년〉를 집필했으며 엘리자베스 여왕이 등극하면서(1558년) 폭스는 고국으로 돌아가 이 책을 영어판으로 냈는데(1563년) 이때부터 이 책은 〈순교자들의 책〉으로 알려졌으며, 1570년에는 개정 증보판으로 완성되었고 그의 생애 중 두 번의 재판을 내게 된다(1576,1583).

그러는 과정에 그는 건강을 잃었지만 그의 숭고한 신앙과 당시 페스트가 창궐한 가운데서도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그의 희생적 모습으로 인해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 ˝우리의 아버지 폭스˝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서문

성경 이외에 가장 뛰어난 기독교 고전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을 두 권 말하라 한다면, 누구라도 존 번연의 <천로역정>과 더불어 바로 이 책, <폭스의 순교사>라고 말할 것이다.


이 책은 우리 주께서 고난받아 죽으신 이래로, 그분을 고백하는 성도들이 있었던 모든 시대에 주어진 박해를 기록해 놓은 책이다. 박해와 순교에 대해서 기록한 많은 책들이 있지만, 이 책에는 그러한 박해의 모습들이 가장 처참하고 가장 극적이며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바로 그 순교의 현장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특별히 로마 제국과 중세 시대라는 대 박해의 기간을 중점으로 다루고 있는 이 책은 대부분의 교회사가들이 간과하는 내용들이 너무나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들의 교회사들이 로마카톨릭을 중심으로 기록되고 있는 동안, 그 지옥같은 거짓 교회가 자행해 온 거대한 죄악은 결코 발견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참된 교회와 성도들의 피뿌린 역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끔찍하리만치 잔인하게 묘사된 서술 속에서 슬픔과 고통을 억누르지 못하고 눈물짓기도 하겠지만, 그러한 고통 가운데서도 웃음 지으며 죽어가는 성도들의 의연한 모습 속에서 또한 진한 감동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미래의 영광에 대한 소망에 젖은 그들의 눈동자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를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그들은 그들을 위해 죽으신 구주께 최상의 신실함을 보여 드렸던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존 폭스 자신도 메리 여왕의 통치라는 큰 박해의 기간을 살았던 성도로서, 성도들의 순교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거니와, 그가 지은 원래의 저서인 <순교자들의 책, The Book of Martyrs>은 메리 여왕 때까지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후대의 여러 사람들이 박해에 대한 그 뒷이야기들을 나름대로 묶어 편집하곤 했다. 본서는 그러한 내용들이 윌리엄 B. 폴부쉬의 편수로 이루어진 것인데, 원 저서의 충실도와 그 뒷 기사들에 대한 편집에 있어 윌리엄 폴부쉬의 것을 따라갈 책들은 없다.


말씀보존학회는 지금까지 진리의 서적들을 출간함에 있어서, 특별히 교회사와 연관된 책들로서 <신약교회사>, <피흘린 발자취>, <성경적 성별>을 펴냈었다. 이제 우리는 <폭스의 순교사>를 펴냄으로 인해 이 땅에 올바른 교회사와 참된 기독교 신앙의 모습을 한층 더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의 역사는 피뿌린 역사이다. 그 피는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피요, 그 다음으로는 그분을 따르는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흘린 피이다. 이 피는 아벨의 피부터 시작하여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피를 거쳐, 로마카톨릭의 시퍼런 칼날 끝으로 흘러 내려, 오늘날 우리 가슴 속에까지 깊이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책 속으로

제 1 장 네로에 의해 자행된 첫 번째 총체적 박해

 

마태복음에서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도 먼저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한 시몬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그리스도 우리 구주께서는, 지옥의 문들이 이기지 못할 정도로 견고한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이 말씀에는 세 가지 주목할 만한 사항들이 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실 것이다. 둘째, 그 교회는 세상뿐 아니라 극도로 강력한 지옥의 모든 힘과 권세들로부터 거센 비난과 공격을 받을 것이다. 셋째, 그러나 그 교회는 마귀와 그의 모든 악의가 극에 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속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 예언이 입증되는 것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오늘에 이르는 교회의 모든 역사가 다음에서 보는 것처럼 오로지 본 예언만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둘째, 군소 왕들과 제왕들, 군주들, 지배자들 그리고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부하들과 함께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교활하게 온 힘을 기울여 이 교회를 대적했던 그 세력이 얼마나 강력했던가! 그리고 셋째, 말씀하셨던 그 교회는 이 모든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지금껏 어찌나 잘 버텨오고 있는지! 그것이 뚫고 지나 온 폭풍과 격동을 바라보자니 한마디로 기가 찰 지경이다. 그것에 관해 더 분명히 천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나는 다음과 같은 목적으로 이 현 역사를 다루어 놓았다. 즉 우선은 자신의 교회에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그분께 영광으로 돌려지게 하기 위함이요, 또한 교회의 존속과 진행 과정을 심심찮게 제시함으로써 더 풍부한 지식과 경험으로 읽는 이에게 유익을 주고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일깨우는 데에도 기여케 하려는 것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시기 전이 됐든 후가 됐든 우리 구주의 역사를 조목조목 설명하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 아니기에, 우리는 이후에 일어난 주님의 부활로 인해 유대인들이 진땀을 뺐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상기시켜 주기만 하면 된다. 한 제자는 주님을 배반하였고, 또 다른 이는 심각한 얼굴로 주님을 맹세코 부인했다. 그런가 하면 다른 모든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내빼 버렸다. 하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우리가 만일 “대제사장과 안면이 있는 제자”(요한, 요한복음 18:15 참조)를 이들의 대열에서 제외시키지 않는다면, 주님의 부활 사건이야말로 그 모든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또 성령이 임하신 이후로 그들의 마음에 새로운 확신을 심어 주었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부여받은 권세로 주님의 이름을 담대하게 선포했으며, 이를 지켜보던 유대 지도자들은 혼란에 빠지고 이교 개종자들은 아연실색해 버렸던 것이다.

  1. 스테판(St. Stephen)
 : 스테판은 순서상 주님 다음으로 순교를 당했다.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죽인 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그의 신실한 자세가 그의 죽음을 야기했다. 그들의 흥분은 광기에 가까웠는지라 그들은 그를 성읍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였다. 그의 순교 시점은 일반적으로 유월절, 그러니까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시고 승천하신 후 이듬해 봄에 있었던 유월절로 잡고 있다. 이 일을 발단으로 그리스도를 메시아나 선지자로 믿고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극심한 박해가 일었으며, 이 사건을 기록한 누가는 지체치 않고 우리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가해졌고, 모든 사람이 유대와 사마리아 전 지역으로 흩어졌다”고 일러 준다(행 8:1).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니카놀(Nicanor)을 포함한 약 2,00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스테판에게 일어난 박해 때 순교했다.

  2. 큰 야고보(James the Great)
 : 사도들의 행적을 짚어 가는 누가의 말에 따라 우리가 만나는 다음 순교자는 세베대의 아들로서,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이다. 그는 우리 주님의 친척이기도 한데, 이는 그의 모친 살로메가 주의 모친 마리아와 친사촌 지간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순교는 스테판이 죽은 지 10년째 되던 해에 일어났다. 이 사건은 당시 유대 통치자로 임명된 헤롯 아그립파(Herod Agrippa)가 부임 즉시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추고자 일으킨 맹렬한 박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지도자들을 강타해서 그들에게 효과적인 일격을 가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저명한 원저자 클레멘스 알렉산드리누스(Clemens Alexandrinus)가 제시한 기사를 우리는 빼놓지 말고 주목해야 한다. 즉 야고보가 자신이 순교당할 장소로 끌려갔을 때의 일이다. 그를 고소했던 자가 사도의 놀라운 용기와 담대함에 돌연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더니 그의 발치에 풀석 주저앉아 용서를 구했다. 그는 자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면서 야고보와 함께 순교의 면류관을 쓰기로 결심했고, 그리하여 그 둘은 동시에 목이 베어졌다. 이와 같이 열두 사도 중 첫 번째 순교자는, 마실 준비가 돼 있노라고 우리 구주께 말씀드렸던 그 잔을 기꺼운 마음으로 의연하게 들이켰던 것이다. 티몬(Timon)과 파메나(Parmenas)도 동일한 시기에 각기 빌립보와 마케도니아에서 순교했다. 이 사건들은 A.D. 44년에 일어났다.

  3. 빌립(Philip)
 : 갈릴리의 벳새다 출신이며 최초로 “제자”라고 불린 사도이다. 그는 북부 아시아(Upper Asia)에서 힘써 일하다 프루기아(Phrygia)의 헬리오폴리스(Heliopolis)에서 순교했다. 그는 채찍질당하고 감옥에 던져진 후, A.D. 54년에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

  4. 마태(Matthew)
 : 세금 징수를 업으로 삼았던 그는 나사렛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복음서를 히브리어로 기록했고, 후에 그것을 작은 야고보(James the Less)가 헬라어로 번역했다고 한다. 그가 땀 흘렸던 무대는 파대(Parthia)와 에디오피아(Ethiopia)였는데, 그는 A.D. 60년 이 에디오피아의 나다바(Nadabah) 성읍에서 미늘창(창과 도끼를 겸한 무기)에 찔려 순교했다.

  5. 작은 야고보(James the Less)
 : 어떤 사람들은 이 야고보를 요셉의 전 아내의 소생, 즉 우리 주님의 이복 형제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며 어찌된 영문인지, 마리아는 우리 구주 외에 어떤 자녀도 낳은 적이 없다는 로마카톨릭의 미신을 쏙 빼닮았다. 이 작은 야고보는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들을 감독하는 자로 선출되었고, 94세의 고령에 유대인들에게 몰매 맞고 돌에 맞다가 결국 둥근 홈을 내는 반원형 망치로 두개골이 깨지고 뇌가 터져 나와 죽고 말았다.

  6. 맛디아(Matthias)
 : 다른 대부분의 제자들에 비해 알려진 바가 적으며, 유다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사도로 선출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돌에 맞은 후 참수당했다.

  7. 안드레(Andrew)
 : 베드로의 형제였다. 그는 아시아의 수많은 민족들에게 복음을 설교했는데, 에뎃사(Edessa)에 도착하자마자 붙잡혀 두 끝이 땅에 가로로 고정되어 있는 십자가(모양이 ‘X’자임)에 못박혔다. ‘안드레의 십자가’(St. Andrew’s Cross)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했다.

  8. 마가(St. Mark)
 : 레위 지파의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여겨지는 바로는 그가 베드로를 통해 회심하여 서기로서 그를 섬겼고, 그의 감독하에 자신의 복음서를 헬라어로 기록했다고 한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인들에 의해 그들의 우상 세라피스(Serapis)를 위한 대제전일에 질질 끌려 다니며 갈가리 찢겨졌고, 그들의 무자비한 손길에 생을 마감했다.

  9. 베드로(Peter)
 : 어떤 이들은 베드로가 다른 수많은 성도들과 함께 로마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말한다. 헤게시푸스(Hegesippus)의 말에 의하면, 네로가 베드로를 죽일 구실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들이 어지간한 법석을 떨며 베드로에게 시를 떠나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결국 그들의 끈덕진 간청에 손을 든 베드로는 피신할 채비를 갖추었는데, 그가 성문에 이르렀을 때 그를 만나려고 오시는 주님을 뵌 베드로가 경배드리며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여쭙자,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 다시 왔노라.”고 대답하셨다는 것이다. 이에 베드로는 자신의 고난이 당연한 것임을 깨닫고 로마로 발길을 돌렸다는데, 제롬(Jerome)의 말에 따르면, 그는 머리와 발이 거꾸로 된 채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이는 자신은 주님과 같은 모양과 방법으로 못박힐 가치가 없다는 생각에 자청한 것이었다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확실치 못한 부분이 없지 않은데, 이는 베드로가 로마에 갔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론이 제기되며, 그러한 반론은 타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10. 바울(Paul)
 : 이전엔 사울(Saul)이라 불리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느라 겪은 극심한 고난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수고를 뒤로 한 채, 네로가 자행한 이 첫 번째 박해의 또 다른 희생양이 되었다. 압디아(Abdias)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바울에게 사형을 언도한 네로는 자신의 근위병들 중 페레가(Ferega)와 파르데미우스(Parthemius)라는 이들을 보내 그에게 사형을 선고케 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바울에게 다가간 그들은 자신들도 믿고 싶으니 위해서 기도해 주기를 그에게 요망했고, 그는 그들이 즉시 믿고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일러준 대로 이 일을 마친 군인들은 와서 그를 처형장으로 데려갔으며, 그는 그곳에서 기도를 끝내고 자신의 목을 칼날에 내어주었다.

  11. 유다(Jude)
 : 야고보의 형제이며, 보통 다대오(Thaddeus)라고 불렸다. A.D. 72년, 에뎃사(Edessa)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12. 바돌로매(Bartholomew)
 : 대여섯 나라들에서 말씀을 전파했고, 마태복음을 인도어로 번역하여 그것을 그 나라에 보급시켰다 한다. 결국 그를 못 죽여서 안달이 나 있던 우상 숭배자들에게 잔혹하게 두들겨 맞고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13. 도마(Thomas)
 : 디두모(Didymus)라고도 불리며, 파대(Parthia)와 인도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그곳에서 이교도 제사장들의 분노를 산 그는 창에 찔려 순교했다.

  14. 누가(Luke)
 : 복음 전도자이자 그의 이름을 사용한 복음서의 저자이기도 하다. 바울과 함께 다양한 나라들을 여행했으며, 우상을 숭배하는 그리스 제사장들에 의해 올리브 나무에 목매여 죽임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5. 시몬(Simon)
 : 다르게는 셀롯(Zelotes)이라고도 불리며, 아프리카의 모리타니아(Mauritania)뿐 아니라, 심지어 영국에서도 복음을 전했다. A.D. 74년에 영국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16. 요한(John)
 : 이 “사랑하는 제자”는 큰 야고보의 형제였다. 스머나, 퍼가모, 사데,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아, 두아티라 교회들은 그가 세운 교회들이다. 에베소에 있을 때 그를 로마로 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그리하여 거기서 펄펄 끓는 기름 가마솥에 던져 넣어졌다고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털끝 하나 안 상하고 기적적으로 탈출했다. 이후 도미시안(Domitian)에 의해 팟모섬으로 유배당한 그는 그곳에서 요한계시록을 썼고, 도미시안의 뒤를 이은 네르바(Nerva)가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는 잔혹한 죽음을 모면한 유일한 사도였다.

  17. 바나바(Barnabas)
 : 쿠프로(Cyprus) 태생이지만 유대인의 후손이며, A.D. 73년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와 같이 온갖 끊이지 않는 박해와 등골을 오싹케 하는 처형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사도들과 그들로부터 배운 이들의 교리에 깊숙이 뿌리 내렸으며, 흘려진 성도들의 피를 자양분 삼아 나날이 강성해졌다(pp.17-23).

자료제공 : http://www.biblemast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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