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주일오후예배설교 (Sunday afternoon worship preaching )

 

 

 

제목 : 보배로운 믿음

말씀 : 벧후1:1~4

베드로 전서

A.D.64년경. 로마 네로 황제의 기독교 핍박 시작. 아직 본격적으로 박해가 시작되진 않았지만 로마제국 내에 흩어져 거류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박해에 대비해 믿음으로 이겨 나갈 것을 권면. 우리는 산 소망이 있는 자들, 영혼의 구원을 받은 자들로 잠깐 근심 할 수 밖에 없지만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은 것, 오직 주의 말씀만 영원함.

우리는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 그러기에 거짓 것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선한 싸움을 해야 함으로 오히려 더 많은 고난과 핍박. 그러므로 깨어 근신하며 굳건한 믿음으로 마귀를 대적하며 기꺼이 고난 받을 것.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증표로써 도리어 영광스러운 일. 그렇게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하나님이 끝까지 지켜줘 승리할 것.

그렇다.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있는 세상. 마귀사탄이 역사하고 있는 세상. 나도 세상도 다 죄와 무지와 어둠. 끊임없는 죄와 유혹과 핍박과 도전. 그러므로 고난과 핍박도. 그러나 우리는 진리에 속한 자이므로 좁은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달려가야. 진리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해야. 깨어 근신해야.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차지할 것.

베드로 후서

베드로가 두 번째 보낸 서신. 베드로전서를 보낸 뒤 3,4년 뒤에. 네로의 핍박이 더욱 가중되던 때.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 발생. 어느 정도 견디다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배교하기도. 특히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의문. 곧 오실 줄 알았던 주님이 오시지는 않고 핍박만 가중되자 낙심하는 사람들.

이에 베드로사도는 다시 서신을 보내어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주셨으니 믿음을 굳게 지킬 것. 믿음으로 인내 할 것. 개가 토하였던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로 돌아가듯 과거로 돌아가지 말라.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끌려가지 말라.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음을 기억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킬 것을 강조.

우리도 정말 조심해야.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우리들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왜곡된 가치관에 속지 말아야. 마귀 사탄은 때로는 달콤하게 때로는 환난과 핍박으로 때로는 세상의 온갖 왜곡되고 거짓된 사상으로 우리를 넘어트리려고 함. 깨어 있어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아야. 오직 그것만이 진리의 길, 생명의 길. 그러려면 참고 기다려야.

오늘 말씀. 송신자와 수신자. 축복 기도. 성도의 정체성 상기.

1.송신자와 수신자

벧후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1)예수 그리스도의 종 - 송신자

베드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라고 소개.

종은 dou'lo"로 노예라는 뜻. 완전히 주인에게 종속되어 있는 자, 주인을 섬기며 그 뜻을 받들어 수행하는 자. 주인의 뜻을 헤아려 준행하며 그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 자. 그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자. 동시에 종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했을 때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자.

우리는 완전히 주님께 종속되어 주님의 수족이 되어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존재. 종은 몸도 마음도 시간도 물질도 재능도 생각도 오직 주인의 것. 주인의 뜻에 의하여 움직여야. 주님은 완전한 생명과 사랑과 은혜와 기쁨과 위로와 소망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 주님 뜻대로 살아갈 때 최고의 가치, 의미, 복, 은혜 누리다가 영광의 나라.

사도는 ajpovstolo"로 ‘보냄을 받은 자’ 원칙적으로 모든 인간은 관리인으로 보냄을 받은 자. 주어진 자리에서 잘 관리하여 하나님의 주신 동산을 아름답게 가꾸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그 가운데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도록. 그러나 세상 사람은 몰라.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거기다 한가지 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보냄을 받은 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로 보냄을 받은 자. 그러므로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그러므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바르게 사용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자.

2)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 - 수신자

베드로는 수신자들의 신분 또는 정체성을 상기시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 즉 베드로는 이 편지를 받는 그들이 얼마나 굉장한 사람들인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상기시킴, 즉 귀한 믿음의 소유자답게, 그 엄청난 신분의 소유자답게 세상의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이 보배로운 믿음을 굳게 지키고, 의와 진리와 선 가운데 귀한 삶을 살라는 것.

우리는 세상의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얻게 됨. 그러므로 이 보배로운 믿음을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꾸면 안돼. 환난과 핍박이 와서 설령 육체의 생명은 잃은 망정 이것만은 잃어서는 안돼.

당연하지 않나? 믿음보다 큰 보배가 어디 있는가? 무엇이 믿음보다 우리에게 더 큰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주겠나? 무엇이 이보다 더 큰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영광을 가져다주겠나? 이것은 상대적인 문제가 아니다. 세상의 무엇과 비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세상의 것은 다 잃어봤자 별거 아니다. 그러나 믿음은 잃으면 끝장. 영원히 끔찍한 고통.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6) 또 마13:44절에서 말씀.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큰 보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가장 큰 보배를 가진 자들임으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자. 세상의 별 것 아닌 것들에게 조금이라도 믿음을 팔아먹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자. 오직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영원하고도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자.

2.축복기도

벧후1: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모든 서신서의 서두와 종결 부분에서 계속 말씀했던 내용. 여기서는 두 가지를 강조. 첫째는 인생의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 둘째는 그 복은 어디로부터 어떻게 오는가? 물론 인생의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이 복의 근원. 그 하나님을 알고 바르게 섬길 때 은혜와 평강. 인생의 진정한 복은 하나님이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생명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세상에서 누리는 진정한 평안과 기쁨과 즐거움과 위로와 소망도 오직 하나님이 주실 때 가능. 세상의 돈과 명예와 물질과 지식도 어느 정도 우리 삶에 유익이 되나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게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그 은혜는 하나님을 앎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을 알 때 믿게 되고 믿을 때 그 은혜를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구해야. 그러려면 주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어야. 주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믿고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더욱 주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 엎드려야 한다.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주님이 깨닫게 하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셔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게 한다. 그래서 주님의 평강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들을 찾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따라가기보다 주님을 찾자. 겸손히 엎드리자. 주님을 사모하자. 그래서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충만함으로 세상의모든 것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3.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심

벧후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 여기서 생명이란 하나님이 본래 주셨던 기쁨과 은혜와 복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영원토록 조금도 부족함 없이 완전히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생명. 물론 이것은 신기한 능력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완성된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이다. 우리의 죄와 무지와 허물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런 완전한 생명의 소유자가 되는 것.

경건이란 그런 완전한 생명을 가진 자들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 생명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본질적인 정체성. 경건은 온전한 생명을 가진 자들이 가져야 할 삶의 외견적인 모습. 그런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은 그렇게 생명을 가진 자로 경건한 삶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갈 때 주어지는 모든 은혜들을 주셨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고, 특혜이고, 외견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삶의 모습. 그러므로 특별한 은혜를 받은 자들답게 특별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세상과 야합하거나 타협하거나 끌려 다니지 말고 믿음을 지켜나가라는 의미.

그러므로 우리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존귀한 인생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긍지와 자존심을 가지고 험하고 혼탁하고 왜곡된 세상에 끌려가지 말자. 이것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주의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감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생이 되자.

4.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됨.

벧후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로써’ 라는 것은 3절의 자기 영광과 덕으로써 라는 말씀으로 오직 주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지극히 큰 약속을 주셨다는 말씀. 지극히 큰 약속이란 물론 영원한 영광의 나라. 따라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 때문에 그까짓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끌려 다니거나 노예가 되지 않고 신성한 성품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따라 사는 자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받은 자들이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약속으로 받았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약속으로 받으면 세상의 것들이 작은 것임을 안다. 거기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거기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살게 된다.

당연하지 않나? 진정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았는데 그까짓 세상의 것에 끌려 다닐 이유가 뭔가? 세상의 것을 바라볼 이유가 뭔가? 어찌 주님을 바라보지 않겠나? 그러면 성령님이 어찌 함께 하시지 않겠나? 그러면 얼마나 더 주님을 닮아가겠나? 그러면 얼마나 주님의 은총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겠나?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주님의 종임을 잊지 말고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바르게 사용하자. 진실로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는 기억하며 세상의 것에 휘둘리거나 낙심 원망 근심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주님과 온전히 동행하며 주님의 영광 나타내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는 복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자.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주일오후설교] 지혜의 유익

 

 

제목 : 지혜의 유익

말씀 : 잠3:21-26

여러분, 세상에서 정말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 귀한 것이 믿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총,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유일한 방법인 이 믿음보다 귀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 아무 것도 그것보다 우리에게 더 큰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 아무것도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을 줄 수는 없다. 더 큰 위로와 소망을 줄 수는 없다.

그래서 지난시간에 같이 본바와 같이 15절의 말씀에 보면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지혜 즉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는 그 일이 진주를 갖는 것 보다 더 귀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 지혜 하나님을 알고 믿고 따르는 지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지혜는 세상에서 우리가 바라고 사모하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값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정말 이 보다 귀한 것은 없다. 이것과 바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정말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가치관과 올바른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면 정말 하나님을 아는 지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지혜,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그 지혜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올바른 가치관이나 생각을 가지지 못한 정신 이상자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그렇고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이 지혜의 유익과 지혜의 가치를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시간에는 16절에서 지혜는 장수와 부귀를 준다고 하였고, 또 17절에서는 지혜는 즐거움과 평강을 준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서는 18절에서는 지혜는 영생을 준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결국 지혜를 얻으면 천하를 얻는 것이다. 장수와 부귀, 즐거움과 평강, 영생 이 이상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이 이상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 지혜를 가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더나아가서는 그 지혜를 따라 살라야 한다. 공연히 세상 풍조에 이리저리 휩쓸리지 말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가치관이나 목표나 방향을 가지고 살것이 아니다. 우리의 방향, 우리의 가치, 우리의 목표는 하나다. 기준은 오직 지혜이다. 하나님안에 있는 지혜,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다. 그것을 따라 살면 반드시 영과 육이 은혜를 받는 풍성함을 누린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도 역시 계속해서 이 천하보다 귀한 지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1.지혜를 얻으려면

오늘 본문에서는 지혜의 유익을 말하기전에 먼저 지혜를 얻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혜를 얻으면 참 평안과 기쁨이 있을 것인데, 영과 육이 풍성함을 누릴 것인데 그렇다면 이러한 지혜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인가하는 것을 먼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1)말씀을 읽고 묵상해야한다.(21절)

오늘 본문 21절 뒷부분에 보면 “이것들로 네 눈 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네 눈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는 것은 말 그대로 항상 우리 눈앞에 말씀이 있게 하라는 이야기다. 눈앞에 성경말씀이 있게 하라는 것은 물론 성경책을 눈앞에 놔두고 구경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라는 이야기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지혜를 얻게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물론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다. 판사가 되려면 헌법, 민법, 상법, 형사소송법 등등의 법 서적을 부지런히 읽어야한다. 의사가 되려면 의학서적을 눈앞에 놓고 살아야 한다. 영어를 잘하려면 늘 영어책을 가까이 해야한다. 소설을 잘 쓰려면 늘 소설책을 가까이 해야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해야한다. 생명에 관한 지식을 얻고자 한다면 생명의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 말할것도 없이 성경은 최대의 지혜서이다. 성경은 유일하게 생명의 구원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다. 성경은 구원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비결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책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주는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지혜를 얻고, 생명의 비밀을 깨닫게 되고, 구원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비결을 알게된다. 그래서 최대의 지혜를 소유한 사람, 생명의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밤낮으로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이 가장 복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2:1-3) 왜? 성경에는 생명에 이르는 길이 있으니까. 성경에는 기쁨과 은혜의 길이 있으니까. 성경에는 진리의 길이 있으니까. 그래서 결국 열매를 맺게 되니까.

그러므로 성경을 읽으라. 묵상하라. 농촌에서 솔직히 농번기에는 읽기가 힘들다. 그러면 겨울철에 1독을 하겠다는 마음으로 한번 시작해 보시라. 그리고 모든 공적인 예배에도 부지런히 참석하라. 그냥 참석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심비에 새기라.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고 적용시키라. 그러면 지혜를 얻는다. 풍성한 삶을 산다. 은혜의 삶을 산다. 반드시 복된 사람이 된다.

2)지혜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21절 전반절에 보면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삶속에서 적용시키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한번 그렇게 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 말씀을 올바르게 듣고 읽는 사람은 그 안에서 은혜를 받는다. 도전을 받는다. 새로운 용기가 솟아난다. 그것을 따라서 살게 될 유익을 확실히 알게 된다. 그 길이 얼마나 복된 길인지 분명히 보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결단이 생긴다. 그래서 실행하게 된다. 실행하면 은혜가 온다. 은혜가 오면 더욱 신이나서 말씀안에서 살게 된다. 그래서 그 말씀을 묵상하고 지키는 자들은 반드시 복있는 사람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계1:3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정말 복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바로 말씀안에 거하는 사람이다. 말씀을 묵상하며 읽으며 그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읽으라. 묵상하라. 그대로 행하라. 그리하여 은혜를 받으라.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을 살게 된다.

2.지혜를 얻는 자의 유익

지혜를 얻은 자의 유익은 이미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가 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도 또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왜 자꾸만 강조할까? 물론 먼저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니까 그렇다. 중요하지 않은 사실을 강조할 리가 없다.

그리고 자꾸만 강조하는 이유가 또 하나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을 잘 안듣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한번 말해서 잘 들으면 두말할 필요가 무엇인가? 한번 말해서 잘 들으면 한번 말하면 그만이다. 우리 자녀들이 한번 말하면 알아서 하면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시행이 안되면 했던 소리 또 하고 또 하고 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자꾸만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니까, 중요해서 말을 해도 잘 시행이 안되니까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은 성경에서 강조해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그만큼 중요한 말씀이다. 귀를 기울였으면 이제는 실제로 그 말씀안에서 살자. 그럼 정말 지혜자가 된다. 복있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오늘도 또 강조하고 있다.

1)생명을 얻는다.

이것은 이미 18절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다. 18절 전반절에서는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고 말씀하고 있고 오늘은 “그리하면 그것이 네 영혼의 생명이 되며....”라고 또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적으로는 좀 다르지만 의미는 똑 같은 말이다.

그러니까 지혜를 얻은 자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지혜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고, 하나님 자신이기도, 예수님을 지칭하기도 한다. 즉 성경을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여 거기서 생명의 말씀을 깨닫고, 구원의 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이 역시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 아닌가? 오직 성경안에만 생명의 도가 있다. 진리의 길이 있다. 영생복락의 길이 있다. 구원의 길이 있다. 물론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할때에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한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또 요20:31에서는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의 기록 목적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게 하고 믿게하여 그 이름을 힘입어서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까이 하라. 말씀을 묵상하라. 그러면 지혜를 얻는다. 생명의 은총을 누린다. 영생복락을 누린다. 복의 길이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길도 아니다. 다만 믿고 따르면 된다. 말씀을 하나님을 주님을 가까이 하면 된다.

2)아름다움과 은총을 누린다.

본문 22절 하반절에 보면 “네 목에 장식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장식이란 ?호의, 은총, 은혜, 매력, 아름다움?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혜의 말씀을 늘 가까이하며 그것을 지켜 살면 은혜와 은총과 아름다움속에 살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자는 아름다워 진다. 그 말이 아름답다. 그 인격이 향기로워 진다. 그 마음이 넉넉해진다. 정말 그 마음 씀씀이가 아름다워진다. 심령의 평안함을 누린다. 모든 추하고 더럽고 허물많던 모습들이 사라진다. 모든 이기심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증오와 욕심과 저주가 사라진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관용하고 너그러워진다. 왜 진리와 사랑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님이 인도해주시니까. 성령님이 나를 이끌어가니까.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무엇인가? 가장 은혜로운 모습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외양이 아니다. 능력도 아니다. 지식도 아니다. 권세도 아니다. 부귀도 아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아름다운 마음이다. 맑고 깨끗한 영혼이다. 가식도 미움도 증오도 질투도 거짓도 없는 해맑은 모습이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덮어주는 마음이며 그러한 아름다운 마음들이 밖으로 표출될 때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다.

갓난아기가 아름다운 것은 왜인가? 그야말로 어둠의 그림자가 없기 때문이다. 거짓이 없다. 미움도 증오도 없다. 순수하다. 깨끗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은혜로운 것이다. 그래서 모든 보는 이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사는 자는 바로 이런 은혜를 누린다는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살아가면 성령이 역사하신다. 말씀이 인도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속에 찌꺼기를 제거해 주신다. 태워주신다. 모든 세상적인 욕망을 없이 해 주신다. 그러면 그 영혼이 투명해진다. 정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진정한 은혜와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러한 은혜를 누려보지 않으려는가?

3)평안을 누리게 된다.(23-25)

오늘 23, 24절에서는 “네가 네 길을 안연히 행하겠고 네 발이 거치지 아니하겠으며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고 말씀하고 있다. 즉 우리가 말씀안에서 진리안에서 살아갈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는 길을 평탄케 해주시고,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밤에 잠자리에 누울때에도 아무 근심걱정이 없어서 평안히 잠잘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잠을 잘 잘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행복한 일이다. 잠을 잘 잔다는 것은 근심걱정이 없다는 이야기다. 근심 걱정 불안 공포 미움 증오 욕심이 있으면 잠이 잘 안온다. 잠이 잘 안온다는 것은 무엇인가 평형이 깨졌다는 것이다. 정신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육적인 것이든 무엇인가 평안의 상태에 문제가 생기면 잠이 잘 안오는 것이다. 잠자리에 누워도 별로 편안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주신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평강을 주신다. 그래서 그것이 영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혹은 육체적인 것이든 세상의 조건과 무관한 평강을 채워주셔서 모든 근심 걱정 물리쳐 주시고 잠자리도 평안케 해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시 127:2에서는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믿고 따르는 자들을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평강과 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의 소망으로 채워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진정한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갖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죽음의 순간이나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평안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이다. 오늘 25,26절에 보면 “너는 창졸간의 두려움이나 악인의 멸망이 임할 때나 두려워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는 너의 의지할 자이시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말씀이다. 넘어지지 않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뿐만아니라 설령 우리가 넘어질때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켜 주셔서 넘어지 않게 하심으로 평강을 누리고 설령 넘어져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그것을 이기게 함으로 평강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순간에도 심지어는 멸망의 순간에도, 급작스런 위기의 순간에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하나님 역사해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기에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죽음앞에서도 겁 낼 필요도 없고, 환난과 핍박속에서도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네가 정녕 나를 믿고 의지하고 따르기만 한다면 내가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순탄하며 순탄한대로 풍파가 있으면 풍파가 있는대로, 살면 사는대로 죽으면 죽는대로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요14:27에서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빌4:6,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말씀을 정리한다.

여러분, 근심하지 마시라.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하지도 말라. 다만 주님을 믿으라. 말씀을 묵상하라. 기도하라. 맡기라. 다만 주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사랑하며 그것을 따르라. 그러면 반드시 주님이 역사하신다. 성령님이 인도하신다. 그러면 은혜를 누린다. 평강을 누린다. 생명의 은총을 누린다. 우리 온 성도들은 이러한 사실을 새롭게 기억하며 오직 주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좇아 살때에 진정 지혜로운자로써 주님의 평강와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며 사시기를 바란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주일오후예배설교] 찬송과 기도

 

 


제 목 : 찬송과 기도

말 씀 : 약5:13-18

여러분, 우리 인생의 여정에는 누구에게나 굴곡이 있습니다. 누구나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도 있고, 평안할 때가 있으면 뭔가 좀 힘들 때도 있습니다. 일이 잘 풀릴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일이 자꾸 꼬일 때도 있습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것들을 누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기쁘고 즐겁고 행복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보전되지 못하고 죄와 무지가 들어옴으로써 어렵고 힘들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혹시 인생의 여정에서 어렵고 힘들 때가 있더라도 너무 힘들어하거나 절망하거나 낙심하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고통스러울 때가 있으면 즐겁고 기쁠 때도 있으려니 하고 기도하며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또 형통할 때에도 너무 자랑하거나 남 앞에 으스대지 마세요. 그저 겸손하게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받는 이웃을 돌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 기쁠때나 슬플때나 상관없이 주님의 은혜로 승리하며 감사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바로 여기에 대한 답변을 주고 계십니다.

1.고난이 올 때 기도하라.

오늘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고난이 오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고난 앞에서 아무 대책이나 노력도 없이 무작정 기도만 하고 앉아 있으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고난이나 시험이나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문제 해결의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해 보세요.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없습니다. 웬지 아세요. 그게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앞에서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 앞에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힘과 지혜와 능력과 용기를 주셔서 그 고난에 넉넉히 대처해 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시든지 환경이나 상황을 바꾸어 주시든지 하여 결국 문제를 해결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면 그것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케 하셔서 문제를 해결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혹시 고난이 온다해도 당황하거나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할때에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4-18절 까지는 우리 인생에게 다가오는 고난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인 질병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1)장로(교회대표자)를 청하여 기도하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5:14)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하라고 하니까 앞으로 아프면 목사님 부르지 말고 장로님 불러야 되나 생각하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여러분, 목사도 장로입니다. 가르치는 일과 치리하는 일 두가지를 다하는 장로를 목사라하고, 치리만 하는 장로를 일반적으로 장로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질병이 생겼을 때 먼저 교회의 대표자들을 불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병원에는 가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먼저 해야 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반적인 고난도 먼저 기도하고 대책을 세우고, 질병도 먼저 함께 기도하고 병원도가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문제 해결의 길이 보입니다.

2)믿음으로 회개하며 기도하라.

약5:15,16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여기에 보면 질병의 원인이 두가지로 나타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이것은 질병이 자연적인 현상으로 온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것은 질병의 원인이 본인의 죄로 인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죄를 고하라. 서로 기도하라. 이것은 죄를 들어내는 것을 부끄러워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사람앞에서도 죄를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 자신의 죄를 내 놓는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인만큼 죄를 철저히 회개한다는 의미와 함께 죄로부터 철저히 떠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서로 내 놓고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에 그 기도가 더욱 힘이 있는 것입니다.

3)간절히 기도하라.

오늘 17,18절을 보십시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엘리야도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자신에게 무슨 신성이나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는데 그가 간절히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능력이 나타나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에 간절히 해야 합니다. 때로는 생명을 걸어놓고 매달려 부르짖어야 합니다. 히스기야도 죽음을 직면했을 때 벽을 향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죄를 범했을 때 눈물로 침상을 띄울 만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혔을 때 간절히 기도하며 찬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눅18장)를 통하여 낙망하지 말고 응답될 때까지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질병이든지 어떤 다른 고난이든지 혹시 고난이 올 때 먼저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주님께 대한 믿음 가운데서 교회의 대표자들을 불러 기도하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회개하며 기도하고, 목숨을 내걸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즐거울 때는 찬송하라.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5:13) 그렇다고 고난당할 때는 기도만 하고, 즐거울 때는 찬송만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고난당할 때는 특별히 더 기도하고, 즐거울 때는 특별히 더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즐거울 때 찬송하라는 것은 일이 잘되고 형통하고 경제가 풀리고 자녀가 잘되고 취업이 되고 병이 낫고 하여튼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찬송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찬송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경배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므로 내가 누리는 모든 형통함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인 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은 잘될 때 오히려 신앙을 까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되고 형통하니까 아쉬운 게 없다고 찬양도 기도도 예배 생활도 잘 안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예 그게 하나님의 은혜인 줄도 모르고 그저 자신의 능력이요 노력인 줄 알고 자기가 영광을 다 차지하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살아 숨쉬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노력했어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머리가 좋아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때를 잘 만났어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원래부터 우리의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노력했다면 노력 할 수 있는 힘과 지혜는 어디서 왔습니까? 머리가 좋다면 그 좋은 머리는 어디서 왔습니까? 때가 좋았다면 그 좋은 때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여러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모든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일차적으로 근본적으로 가장 먼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이며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럴 때 감사와 기쁨과 은혜는 더욱 충만해집니다. 일도 더욱 잘 풀려갑니다.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시며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기쁠때나 즐거울 때나 형통할 때나 불통할 때나 먼저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고난 당할 때 먼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형통할 때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고난 받으면 받는대로 형통하면 형통한대로 어떤 여건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으로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주일오후설교 / 가장 안전한 길

 

 

 

제목 : 가장 안전한 길

말씀 : 잠3:5,6

 


사람이란 어차피 돈이나 권력이나 건강이나 능력이나 젊음이나 사람이나 여하튼 무엇인가를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라. 여하튼 나는 그냥 내 존재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존재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의지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고 사느냐 하는 것이 문제로 남게 되는 것이다.

어떤 참람한 사람은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미련한 중에 미련한 인생이요, 불쌍한 중에 불쌍한 인생이다. 그까짓 주먹이 세면 얼마나 셀까? 오래가면 얼마나 오래갈까?

대통령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임기라야 고작해야 5년인데 5년 임기가 끝남과 함께 그가 의지하는 것도 사라진다. 돈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도 있는데 돈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될까? 길어봐야 100년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도 돈과 함께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다. 지식이나 명예와 권세나 과학이나 모두가 그렇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까? 물어 보나마나다. 가장 큰 능력 자, 가장 지혜로운 자, 가장 사랑이 충만한 자, 가장 인자한 자, 가장 영원한 자 이런 자를 의지해야 가장 안전한 것이다. 그가 누구일까? 물어보나마나 하나님이시다.

1.하나님을 의뢰해야 한다.

오늘 5절 말씀을 보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 네 길을 지도해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를 바라보며 사는 자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가장 안전한 길이요, 가장 복된 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인가?

1)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依賴하여야 한다.

본문 5절에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데 그 방법론으로써 제시하고 있는 것이 마음을 다하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마음을 다하라고 했을 때 마음이란 아주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마음, 정신, 이해력, 의지, 중심」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또한 다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총동원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씀을 좀 풀어 말한다면 마음과 정신과 의지와 중심을 총동원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그 어느 한 영역이라도 남기지 말고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전인격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동원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야 한다는 말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영혼, 우리의 정신, 우리의 감정, 우리의 지식, 우리의 이성, 우리의 육체, 우리의 능력 등 하여튼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부분을 총동원하여 그 어느 부분이라고 빠짐이 없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렇다.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맡기고 의지한다는 것은 우리의 전 인격을 드리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부부간에 서로 믿고 의지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어떤 영역을 남겨놓고 어떤 부분은 맡기지 않는다면 이것은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돈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몸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시간을 맡기지 않는다든지 하면 이것은 무언가 서로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부는 온전한 믿음의 관계속에 있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도 감정도 육신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을 다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이런 오류속에 살때가 많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도 감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지적인 것과 이성적인 부분을 하나님께 의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긴 하면서도 세상에 나가면 자기의 지식과 이성과 감정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이 많은 것이다.

이것은 사실은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은 아무튼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라는 것이다. 상황과 조건과 시대의 흐름도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영향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여하튼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그야말로 갓난아기가 하나님만 졸졸 따라 다니는 것 같이 우리의 전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온전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그런 삶을 살자.

2)人間에 대한 信賴를 버려야 한다.

오늘 본문의 5절 말씀에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명철을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려면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너무 지당한 말씀이 아닌가? 우리는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이다. 마6:24절에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의 문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무엇인가를 반드시 의지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인데 자기지식이나 자기의 지혜나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돈을 의지하고 권력을 의지하고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고 자기의 지혜와 경험을 의지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둘 중에 어떤 것을 의지할 것인가가 문제인데 그것을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비교해보면 너무나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인간은 무능하다. 하나님은 전지하시지만 인간의 지식은 한계가 있다. 하나님은 영화로우시지만 인간은 비천하다. 하나님은 권능자이시지만 인간은 약하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시지만 인간은 미련하다. 하나님은 거룩하시지만 인간은 죄로 오염되어 있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이시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지만 세상의 것은 영원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과연 이 둘 중에 무엇을 따를 것인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 보나마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를 포기해야 한다. 자기 지식과 자기 경험과 자기 능력과 자기 의지를 포기해야한다. 그래야만이 온전히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다. 그래야 만이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도 깊이 되새기며 나보다는 하나님 편을 택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자.

3)凡事에 하나님을 認定해야 한다.

본문 6절에 보면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고 했다. 이 말씀도 정말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한다. 모든 말씀이 다 그렇지만 정말 깊이 묵상해보자.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 중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을 인정하기 때문에 여기에 앉아 있다. 그러나 범사라는 말에 주목해 보라. 과연 범사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말을 따르는가?

여기서 범사라는 말이 우리말 성경에는 한단어로 되어 있지만 원문성경에는 범과 사가 각각 다른 단어로 되어있다. 범이란 「모두, 전체, 완전함」을 의미하며 사는 「길, 도로, 여행, 태도, 습관, 인생행로, 행위, 일, 일의 방식」 등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범사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걸어가야 할 모든 길, 인생항로의 전체, 인생길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말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인정하라고 하였는데 인정한다는 것은 「알다, 이해하다」라는 뜻으로 경험해서 이해하고 아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아는 것이란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이해하고 경험해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렇게 완전히 이해하고 경험해서 안다면 그 아는 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을 안다면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모든 것이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월등하신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돈이나 명예와나 권력과도 비교 할 수 없이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모든 영역에서 완전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다. 나의 생명과 영원을 책임져 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이 사실을 정말 이해하는가? 이 사실을 정말 아는가? 정말 인정하는가? 그러면 맡기라. 정말 하나님을 알고 느끼고 깨닫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자. 어떤 부분은 인정하고 어떤 부분은 인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자.

범사라는 말을 다시한번 주목하라.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가치기준이 어떻게 달라져도, 상황이 어떻게 변해도, 심지어는 교회가 어떻게 변해간다해도 우리는 범사에 그를 올바르게 알고 오직 그 뜻만을 좇아야 하는 것이다. 그의 말씀만이 유일한 잣대가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2.하나님을 依賴하는 자가 받는 福

그래서 오늘 본문 6절 하에 보면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바로 알아,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범사에 그를 인정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신다고 했다.

여기서 지도하다는 말은 「평탄하게 하다, 곧게하다, 똑바르게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지혜, 능력, 경험, 이성 의지하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지혜와 능력과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 길을 인도하셔서 평탄케해 주신다는 것이다. 인생을 고통스럽게 하고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모든 울퉁불퉁하고 뾰족한 것들을 평탄하게 하셔서 그러한 아픔과 고통과 슬픔의 현실들을 이기게 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인생의 구부러진 것을 똑바르게 하여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자. 오직 하나님만이 전능자이시다. 전지자이시다. 사랑과 능력의 은혜와 평강의 주님이시다. 그러기에 그분만이 우리의 진정한 목자가 되신다. 그 분만이 완전한 목자요, 선한 목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완전한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따라가자.

우리의 알량한 명철도 의지하지 말라. 경험도 의지하지 말라. 지식도 의지하지 말라. 그런 것들은 다 불완전한 것들이다. 다 연약한 것들이 오직 주님을 의지하라. 주님을 의지하되 마음을 다하여 의지하라. 전인격을 다 동원하여 의지하라. 부분적으로 하지 말고, 취사선택해서 하지 말고, 어느 한 영역만을 맡기지 말고 전영역을 다 맡겨라.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인정하라. 그리고 그를 따르라. 그리하여 선한 목자되시는 주님의 지도하심가운데 은혜와 평강의 길을 걸어가는 모든 성도들이 되자.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제목 :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말씀 : 벧전4:1~6

제법 오래 전에 인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인도 북부의 ‘무자파르나가르’라는 작은 동네에 엄청난 땅을 소유한 큰 부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미간척지도 많아서 이웃사람들에게 자신의 땅을 개간해 주면 1/3은 개간한 사람의 땅으로 만들어주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땅을 개간하다가 엄청난 고대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 뿐 아니라 인근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물을 발견하여 몰래 빼돌리기도 하고 주인도 부자가 되면 뭔가 자기 몫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인도의 문화재 관리국에서 당국자들이 나와서 100년 이상 된 유물은 개인소장이 불가함으로 집으로 가져간 모든 유물을 회수할 것이고 지금부터 유물을 유출하는 자는 엄단할 것이라고 경고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인과 주민들이 반발하며 유물을 내주지 못하겠다고 버텼고 결국 경찰이 출동하여 경찰과 주민 사이에 큰 충돌이 벌어졌는데 주민들이 과격하게 저항함으로 급기야 경찰이 실탄까지 발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주민들은 더욱 난폭한 폭도로 변하여 삽과 낫과 곡괭이와 총을 들고 저항하게 되어 결국 많은 경찰이 투입되어 수십 명의 주민이 죽거나 다치고 나서야 폭동이 진압되고 유물은 문화재당국이 몽땅 회수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아무 소득도 없이 수십 명이 죽거나 다치고 많은 사람들이 구금당하는 것으로 사태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황금유물이 발견되기 전에는 비록 부자는 아니었지만 평화롭게 지내던 마을이 황금유물이 발견된 후에 사람들이 그만 돈에 눈이 어두워 정부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감옥에 갇히고 남은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마을 떠나 유령마을처럼 번해 버렸던 것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을 데가 어디 있습니까? 그만 황금에 눈이 멀어 마을은 황폐화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육체적 정신적 너무나 큰 상처와 아픔만을 남겼으니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물론 돈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게 진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건 물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과 그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진실하게 선하게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영원한 생명은 물론 이 땅에서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과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베드로전서는 바로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혹시 고난을 받는 한이 있어도 오직 유일한 우리의 소망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요, 이 말씀을 묵상할 때에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여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을 따라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벧전4:1,2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므로 너희도 마음으로 갑옷을 입고 즉 마음을 단단하게 무장하고 고난을 받을망정 죄를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도 더 이상 죄가운데 살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한 것이므로 마음을 굳게 먹고 세월이 어떠하든 주님을 따라 진리와 선과 의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습니까?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다시 죄가운데 살 수 있습니까? 또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과가 사해진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이 죽으실 때에 우리도 같이 십자가에 죽은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하여 죽으셔서 내 죄가 사해졌으니 예수님이 죽으실 때 내 죄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종노릇하던 옛자아가 죽고 예수님께 종노릇하는 새 자아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죄의 종노릇을 하겠습니까? 죄에게 종노릇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죄를 향해 호통을 치고 명령하고 물리쳐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말 믿음과 선과 진리와 사랑과 의 가운데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게 새생명을 가진 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삶을 살려면 어쩔 수 없이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죄와 적당히 타협하며 어울리며 친구삼아 살아가면 고난이 없습니다. 그저 세상 물결 흐르는 대로 남들이 사는 대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에 속한 사람이요, 죄에서 해방된 사람이므로 죄와 타협하고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싸워야 하기 때문에 도리어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새생명을 가진 자의 당연한 삶이고 그게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과거에는 몰라서 그랬다 치고 이제는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니까,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니까 더 이상 과거처럼 죄에 질질 끌려 다니지 말고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을 주님의 따라 선과 진리와 의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야 생명의 기쁨과 능력과 은혜와 평강과 소망이 넘치는 인생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죄와 무지와 왜곡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있는 세상에서 진리를 따라 가는 길이 혹시 어렵고 힘들어도 오직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서 모든 죄된 것들을 물리치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더욱 생명의 능력과 기쁨과 자유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죄가운데 사는 것은 과거로 충분합니다.

벧전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참 이 말이 너무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까? 무지 속에서 어둠 속에서 사탄에게 얽매어 사탄의 하수인 노릇하던 것은 지난 것으로 이미 넘치지 않느냐? 지나간 세월을 그렇게 살아간 것만 해도 너무 억울하지 않느냐? 정말 무지해서 어리석어서 캄캄한 가운데서 어리석게도 바보같이도 미련하게도 마귀에게 속아서 그게 인생인줄 알고 그게 행복인줄 알고 그게 인생이 가야할 길 인줄 알고 그것을 바라보며 거기에 빠져서 죽자 사자 그런 것만을 따라서 세월을 허비하고, 돈을 허비하고, 육신을 허비하고, 정열을 허비하고, 능력을 허비하고, 아니 그냥 허비한 것이 아니라 악에게 바치고 마귀에게 바치고 살았으니 얼마나 원통한 일이냐, 얼마나 분한 일이냐, 얼마나 치욕적인 일이냐, 그러니 이렇게 지나간 죄악으로도 너무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하고 아까운데 계속해서 그런 삶을 살아갈 수는 없지 않느냐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술취함과 방탕함과 호색과 향락과 우상을 섬기던 모습을 생각하면 얼마나 한스럽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의 필름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것들 아닙니까? 할 수만 있다면 돌아가서 추한 모습 들 싹 다 지워버리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습니까? 정말 안 그렇습니까? 마귀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한 세월입니다. 속고 살아온 세월입니다. 헛된 것을 위해서 살았던 세월입니다. 그냥 헛될 뿐 아니라 악하게 육신의 정욕을 따라 죄를 섬기며 세상의 온갖 우상들을 섬기던 세월이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지나간 세월로 족하지 않습니까? 지나간 세월만으로도 원통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계속해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죄와 무지가운데 살던 때는 지나간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아깝고 억울하고 분하다는 것을 기억하며 이제는 정말 지나간 때에 죄를 따라 살던 삶의 모습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진리를 따라 생명의 길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운데 주님과 동행할 때의 주님의 은총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세상 사람들의 조롱을 이겨야 합니다.

벧전4:4~6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지 않고 진리를 따라 주님을 따라 방탕과 음란과 향락 등의 온갖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갈 때에 세상 사람들이 비웃고 조롱하고 심지어 힘있는 자들이 핍박을 하기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자들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하지도 말고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그저 우리 갈 길을 묵묵히 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는데 항상 조롱과 핍박과 그 밖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아직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득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갖 죄와 무지 속에서 그저 육신의 욕구만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어찌하든지 우리를 시험에 빠트리고 구덩이 빠트리고 넘어지고 곤경에 처하게 하여 하나님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자기들이 가는 길과 다르다고 우리를 미워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천국만을 이야기하니까 자기들의 것을 헛것으로 만들어 버리니까 더더욱 우리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은 이게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과 다르니까요. 우리는 진리이고 그들은 비진리니까요. 그래서 딤후3:12절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3:14절에서도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있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물론 당연히 그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그 길로 가는 자만이 영생복락을 누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인생의 길을 알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방탕하게 살아가며 심지어 의인을 핍박한 사람들은 결국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6절의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은 이미 죽어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 있을 때에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복음을 전했느냐?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나 영으로 살게 하기 위하여, 즉 육체는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으나 영으로 하나님을 따라 삶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 하나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려면 물론 당연히 고난도 수반될 수 밖에 없으나 그러나 그게 생명의 길이므로 우리는 그 길을 달려가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비웃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핍박해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같이 대항하여 싸우지도 말고 그저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은혜의 길을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신의 삶에 대하여 이실직고 할 수 밖에 없고, 그 때에 믿음 안에서 산자는 영생복락이요, 불신 가운데 자기 마음대로 산 자는 영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에러도 오직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참된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도 큰 상급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주일오후설교] 선악과에 대하여

 

 

 

제목 : 선악과의 의미

말씀 : 창2:15-17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의문이 생기게 마련이다. 의문과 의심은 다르다. 의심은 하나님 존재자체나 천국과 지옥 등의 신앙에 관한 중요한 주제들을 잘 믿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의문은 분명히 믿기는 믿는데 잘 알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하여 궁금증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왜 그렇까? 왜 그렇게 하셨을까? 과연 어떻게 될까? 천국은 어떤 모습일까? 등등 신앙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궁금증들이 의문이다.

그리고 이런 의문들은 결국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 어떤 주제에 의문을 가질때 더욱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며 기도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그런 과정을 거쳐 의문점들에 대하여 올바르게 이해하게 될 때 신앙은 더욱 견고해지고, 전도할 때도 많은 도움이 된다.

오늘은 우리 신앙인들이 가질 수 있는 의문점 중의 하나인 선악과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여러분들은 이런 의문을 가져보았는가? 나는 사실 처음 신앙생활 시작할 때에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이 선악과 문제다. 나뿐 아니라 이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의문점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독교를 공격하기도 한다.

선악과와 관련된 의문은 크게 두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만들어놓으셔서 사람들을 죄에 빠지게 하였느냐는 것이다. 선악과만 없었다면 사람이 그것을 따 먹지도 않았을 것이고,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죄를 짓지도 않았을 것이고, 죄를 짓지 않았으면 걱정 근심 고통없이 잘 살았을 터인데 왜 그걸 만들어서 사람을 곤경에 처하게 하였느냐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드실 때 사람이 결국 따 먹게 될 것을 알았느냐 몰랐느냐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따 먹을 줄을 뻔히 알고도 그것을 만드셨다면 결국 죄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줄 모르고 만들어놓으셨다면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지 못한 분이 아니냐는 것이다. 전지전능이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아는 것을 말하는데 그걸 모르셨다면 어떻게 전지전능하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무엇이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혹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에 대하여 우리 인간이 100%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두가지다. 하나는 우리의 한계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나 신앙에 관한 모든 것들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영원무궁하시고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유한하고 부족한 우리 인간으로서는 당연히 다 알 수 없다는 것이며, 더구나 영적인 세계는 이 세상의 이치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이기에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는데 그나마 성경이 태초부터 영원까지의 하나님과 인간과 우주에 대하여 모조리 다 기록한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다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다 알려주어도 다 알지도 못하겠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과 같은 책들이 수백권, 수천권은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한권도 제대로 다 읽지 못하고 다 알지 못하는데 그 수백 수천권의 책을 어떻게 다 읽고 어떻게 다 알겠는가? 그래서 성경에서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죄와 구원의 문제에 집중해서 다루고 우리가 알고 싶은 모든 것들을 다 다루고 있지 않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 외에는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존 칼빈 선생은 말하기를 ‘성경이 가라는 곳까지 가고 멈추라는 곳에서 멈추라.’고 하였다. 무슨 말인가? 성경에 기록한 것 이외에 알 수 없는 부분은 억지로 인간의 이성대로 풀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공연히 억지로 풀다가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켜 이단 삼단으로 가지말고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은 알려 주신대로 말씀묵상하며 그 안에서 올바르게 알고, 비밀에 두신 것에 비밀에 두신대로 그저 하나님께 맡기고 살라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에는 우리가 얼마든지 은혜가운데 믿음생활하기에 충분한 만큼 하나님과 하늘나라에 대한 정보가 제공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든지 은혜가운데 신앙생활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악과의 의미는 무엇일까?

1.선악과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야말로 낙원 같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셔서 인간에게 주었다. 거기는 생명나무를 비롯한 많은 종류의 실과나무를 비롯하여 각종 동식물들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인간에게 주시며 그것들을 다스리며 누리라고 하셨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모든 실과는 네 마음대로 먹어도 좋지만 단 하나 선악과만은 금지하셨다.

그렇다면 왜 그러셨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선악과는 인간이 범치 말아야 할 하나님의 영역의 표시하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우주만물과 인간을 만든 창조주이고 우리는 피조물이니까 이 선악과을 볼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선악과를 볼때마다 하나님이 인간의 통치자가 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 뜻대로 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복종의 표로써 하나님께서 금한 이 실과는 절대로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선악과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법 규정이었던 것이다.

여러분, 사실 자식들도 똑같다. 자식들에게 금지조항을 두지 않고 모든 것을 허용하면 결국 방자해진다. 버릇이 없어진다. 아버지나 자기나 똑 같은 줄로 안다. 그러나 일정한 금지조항을 두고 지키게 하면 무언가 자신이 부모의 영역을 침범할수 없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고 그러므로써 부모에 대한 공경과 순종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기억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때에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게 하시려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더욱 하나님의 통치권을 온전히 받아들여 그 안에서 살아갈때에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누리자.

2.인간의 삶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만약 선악과나 사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물론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일도 없고, 사단의 유혹으로 죄를 지을 염려도 없이 평안하게 살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일이 있다. 과연 그러한 상태 즉 죄의 영향에서 100% 배제된 상태에서의 선이나 자유나 평안이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결론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결국 로봇과 같은 삶에 불과하고 로봇과 같은 삶이라면 오로지 선 속에 산다해도 참된 인생의 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악에 빠질 유혹이 전혀없이 모든 것이 선인 상태라면 선을 선택하고 말고 할 필요도 없이 자동으로 선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자동으로 선을 행하며 산다면 그것은 결국 로봇에 불과한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로봇에 불과한 삶은 결코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자녀가 부모의 조종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처럼 그저 부모가 조종하는 대로 살아간다면 어떻겠는가? 설령 자녀가 오직 선(善) 가운데 산다고 할지라도 그 인생에 과연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겠는가?

그러나 자녀가 세상에 죄의 영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로써 선과 의와 진리를 선택하며 살아간다면 그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가 있겠는가?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인격을 가지고 선과 진리와 의를 선택함으로써 진정 의미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선악과라는 금지 규정을 두신 것이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그 고귀한 인격을 선하게 활용하여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삶도 더욱 가치있고 의미있게하는 삶을 살아가자.

3.인간과의 계약관계 속에서 온전한 교제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른 것은 다 임의로 먹으라하시고 선악과만은 먹지말라고 하신 것은 일종의 인간과 맺은 계약이다. 그래서 이것은 소위 행위언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러분, 부부가 어떻게 이루어지나? 그것은 계약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상대방을 사랑하며 도우며 협력하며 위로하며 격려하며 동반자로 살겠다는 약속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이 잘 지켜질 때 부부관계는 행복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쌍방이라도 이 약속을 어길 때는 자칫하면 부부관계는 깨지든지 아니면 함께 산다 해도 그 삶은 행복할 수가 없다.

부부관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사회생활은 계약관계로 형성된다. 성문법이든 불문법이든 관습법이든 여하튼 모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계약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특징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인격 즉 생각과 감정과 이성과 지성과 영성을 가지고 일정한 계약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권리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신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고귀한 인격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계약관계 속에서 우리와 교제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주신 지정의의 인격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은 그 언약을 충실하게 지키며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리며 살아갈때에 인간의 삶도 그 안에서 진정한 의미와 가치와 행복을 누리게 하신 것이다.

만약 이 계약이 없었다면 하나님과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제가 가능할까? 그렇지 못하다. 그러면 그냥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만을 받아먹는 일방적인 관계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 인생은 고귀한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사람과 사람사이도 그렇지 않은가? 나에게 주어진 의무는 없고 그저 맨날 받기만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무가치하겠는가? 그게 무슨 교제이겠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일부러 계약관계를 만들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실 것은 주시고, 인간이 하나님께 마땅히 드릴 것은 드리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지고 우리 인생의 삶도 참된 의미와 가치를 누리는 삶이 되게 하셨던 것이다.

내용이 좀 어려웠는지 모르겠지만 이 선악과와 관련된 문제도 우리가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 믿음도 온전해지고 이것을 가지고 공격을 한다든지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이해시켜 줌으로 저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요약해서 말한다.

선악과의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의미한다. 다른 많은 것을 주시고 단 하나 선악과만을 금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은 절대 다른 존재로 하나님은 다스리고 통치하시고 인간은 거기에 따라야 할 존재임을 명심하고 그 하나님의 통치를 분명히 받아들여 살아갈때에 더욱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게 하려 하심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삶을 가치있게 하시려는데 있다. 인간이 로봇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인격을 올바르게 활용하여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말씀에 순종하고 선을 택하며 살아감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와 은총을 누리게 하려 하심이다.

세 번째는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은 계약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으로 우리 인생을 창조하셨기에 우리와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모든 교제는 계약을 전제로 한다. 어떤 관계라도 어떤 형태라도 계약관계를 통해서 유지된다. 그리고 계약에는 언제나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이 지켜지지 않으면 계약관계는 파기된다. 계약이 파기되면 서로의관계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얻지 못하게 된다.

선악과는 바로 그런 계약의 조건으로 주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 계약에 충실할때에 하나님과의 계약관계가 늘 유지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유익한 것들을 누리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인간도 가치있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선악과를 두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거기에 온전히 순복하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인격을 동원하여 선과 진리와 의의 편을 선택하며, 또 하나님께 주신 계약관계에 충실하게 임하여 살아갈때에 저와 여러분은 더욱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는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 드리고 우리에게는 더욱 생명의 은총과 인생의 참된 가치가 있는 삶이 될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주일오후예배설교] 항상 선을 따르라


 

 


제목 : 항상 선을 따르라

말씀 : 살전5:15-18

1.귀한 신분으로 사는 일은 힘들지만 보상이 따른다.

우리는 거룩한 사람들이다. 거룩이란 다른 것이다. 다르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 목적, 방향, 의미, 영광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거룩한 삶은 영적으로만 아니라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모든 영역에서 동일하게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비그리스도인들보다 힘들게 여겨질 수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세상에 속한 자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늘나라에 속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쪽 나라의 법과 원리와 규례와 법도에 충실해야 한다. 세상의 법도와 율례와 규례를 따르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더 하나님 나라의 법도와 원리와 규범과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그걸 힘들게 생각하기 보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존귀한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도 존귀한 자로 산다는 것은 마땅히 거기에 걸 맞는 삶의 자세가 있어야 한다. 의무도 있어야 한다. 거기에 걸맞는 규범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분명히 힘든 것도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귀한 신분에 어울리는 삶은 다만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무거운 짐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귀하고 가치있고 옳고 바르게 산다는 것은 그만한 권리도 따르게 된다. 분명히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고 명예와 영광도 따르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야 얼마나 더 하겠는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이보다 더 귀한 신분이 어디 있는가? 이렇게 귀한 신분을 가졌으니 얼마나 더 귀하게 아름답게 가치있게 거룩하게 옳고 바르게 살아야 하겠는가? 또 그렇게 고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람처럼 귀하게 살아갈 때에 얼마나 그 삶이 아름답고 귀하고 가치있고 의미있고 인정받고 귀히 여김을 받겠으며 얼마나 큰 상급과 영광이 있겠는가?

그래서 대하15:7절에서는 말씀한다.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너희의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라 하니라.” 또 잠13:13절을 보라.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느니라.”

그러므로 성도라는 거룩한 신분을 가지고 거기에 걸맞는 삶을 살아갈 때에 때로는 힘든 일도 있겠지만 그러나 도리어 그것이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신분을 가진 자라는 것을 반증하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동시에 그런 고귀한 삶에는 반드시 그 이상의 보상도 뒤따른다는 것을 기억하며 자부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의 법을 따라 거룩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감으로 주님의 은총 충만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2.항상 선을 좇으라.(15절)

살전5: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사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만해도 상당한 수준의 선이다. 남이 나에게 악을 행할 때 악으로 갚지 안고 그냥 참고 용서해 줄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그러나 성경은 거기서 한 단계 더 나가서 선을 베풀라고 하신다.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란 가족이나 이웃이나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이나 미워하는 사람이나 원수나 내 민족이나 다른 민족이나 권세있는 자나 없는 자나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항상 선을 베풀라는 것은 조건이나 여건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선을 베풀라는 말씀이다. 어떤 상황, 조건, 여건, 환경들이 선을 베풀지 않는 것에 대한 이유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시간이나 돈이나 여유가 있으나 없으나, 상황이 좋으나 나쁘나,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나 미워하나 선을 베풀라는 말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것만해도 대단한데 한걸음 더 나아가 선을 베풀라는 것이다. 좋은 조건에서 선을 베푸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나쁜 조건 속에서 선을 베풀라는 말이다.

그래서 롬12:17에서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하셨다. 또 벧전3:9절에서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다. 또 마5:44에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과 멸시와 천대까지 참으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또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원수까지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자. 그래서 결국 나와 네가 함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3.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5:16 항상 기뻐하라 /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주님은 우리가 기쁨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거룩하고 깨끗하고 성결하고 진실한 삶은 힘들고 어렵게만 여기는데 그렇지 않다. 그런 삶을 살면서도 얼마든지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 수 있다. 아니 그런 삶에 진정한 자유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가 있다. 거룩한 진실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갈 때에 조건과 상황과 환경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종종 우리가 기뻐하며 살아갈 것을 말씀하고 계시다.

오늘 16, 18절을 보라.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또 요15:11을 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물론 주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이제 우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도 하셨다. 그러나 이것도 애통하는 것,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 십자가를 지는 것, 우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애통하기 위하여 애통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애통하는 것이다. 힘들고 지치게 하기 위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죽고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애통하고 울고 해야 하는 것은 생명의 은총을 누리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그런 과정이 없으면 생명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죄와 무지 속에서 무감각하게 살아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부인하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동행해야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 주님의 뜻은 우리가 기쁨으로 사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다. 그러므로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모든 일에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 형통하면 형통한대로 불통하면 불통한대로 그저 기뻐하고 그저 감사하라. 나같은 죄인 살려주심을 기뻐하고 감사하라. 나를 사랑해 주심에 감사하고 기뻐하라. 일용한 양식이 있음을 기뻐하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기뻐하라. 지금 내 모든 것을 가져 가신다해도 지금까지 누릴 수 있었음에 감사하라. 설령 지금 나를 데리고 가신다해도 천국이 있음에 기뻐하고 감사하라.

4.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5:17 쉬지말고 기도하라.

이것은 항상 선을 좇고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기 위한 조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쉬지 말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늘 연결되어 있으라는 말이다. 그래야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과 은혜가운데 기뻐하고 감사하고 승리하며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맨 날 교회나 방이나 산에 올라가서 기도만하고 앉아 있으라는 말은 아니다. 세상 은 다 팽개쳐 놓고 맨날 예배나 드리고 찬송이나 하고 기도나 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세상이 유지되겠나? 그러려면 뭐하러 육체를 주시고 지적인 능력과 감정과 의지를 주셨겠나? 그러려면 차라리 처음부터 그냥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지. 신령한 삶은 결코 세상을 멀리하고 그저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묵상만 하는 것이 아니다. 신령한 삶은 영적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생활에 균형을 잘 잡는 것이다. 일할 때 일하고 공부할 때 공부하고 돈을 벌 때 돈을 벌어야 한다. 건강을 위하여 육체적 활동도 해야 한다.

그러나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모든 일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즉 그 모든 활동들이 언제나 주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고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매사에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해야하는 것이다.

물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 주님과 대화하는 정기적인 기도시간도 가져야 한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매사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하는 것이다. 기도로써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 자신을 지키고 주님 뜻대로 그나마 살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연약하다. 세상은 험하고 무수한 도전과 시험과 유혹과 핍박과 고난이 있다. 우리는 그런 시험들 앞에서 무기력할 때가 너무 많다. 내 힘으로 이겨나가기에는 너무나 벅찬 상대들이다. 또 우리가 늘 세상의 것만 보고듣고 하면서 영적 감각이 떨어지기 쉽다. 분별력이 떨어지기 쉽다.

따라서 깨어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 삶을 통하여 그 자체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그런 삶을 통하여 성화되어 가야 한다. 물론 구원은 이미 받았지만 우리는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천국백성이라는 확정 판결을 받았지만 아직은 세상 속에 있고 세상은 너무나 죄와 무지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26:41절에서 말씀하셨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물론 믿음을 따라 사는 일이 때론 힘들긴 하지만 그러나 그것만이 진정한 생명의 은총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오직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놀라운 신분을 가진 자로서 더 큰 은혜를 누리는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주를 따르자.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약하고 부족하여 시험에 들기 쉬운 존재라는 것도 기억하며 깨어 기도하며 말씀으로 무장하여 성령의 능력을 덧입자.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과 주님의 은혜로 항상 기뻐하며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삶을 살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큰 상급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주일오후예배설교] 성령의 열매

 

 


제목 : 성령의 열매

말씀 : 갈5:16-24

1.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명제는 뭡니까? 성령의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니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명제는 성령을 받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아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성령의 은총에 의해서만 주님을 믿을 수 있고,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의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지혜자나 능력자라해도 하나님을 알 수도 믿을 수도 그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요? 여러분, 무한히 크고 넓고 깊은 하나님의 능력, 지혜, 권세, 사랑, 거룩하심을 인간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세상과는 전적으로 다른 차원의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인간이 스스로 생각해서 어떻게 알겠습니까? 인간의 너무나 미약하고 그 미천하기 짝이 없는 생각과 지식과 경험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알겠느냐는 말입니다. 게다가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그 심령은 어두워졌습니다. 그래서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경험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너무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깨달아 알 수가 없고, 믿고 따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녕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그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보게 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게 되고 참된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2:13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신령한 일은 신령한 영이신 성령의 조명하에서만 깨달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명령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쓸 때 성령을 받아 생명을 얻고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해서 그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여러분의 심령속에 성령님을 온전히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진정한 구원의 은총과 큰 기쁨과 감격과 은혜가운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령은 받은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았으면 이제는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 능력이 온전히 우리가운데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을 받으면 당연히 그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하지만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있는 우리 인생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도 그렇지 않습니까? 양심에서는 안된다 안된다하면서도 때로는 행동이 그 안되는 일을 좇아갈 때가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하면서도 행동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을 따라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좇아 살고 싶습니다.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 살라야지 하면서 다짐도 해 봅니다. 그런데 우리의 육신은 자꾸만 세상의 것을 좇아가려고 합니다. 말 그대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록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해도 아직도 우리에게는 연약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어 있는 부분이 남아 있어서 마음은 어두워졌고, 지혜는 제한되어 있고, 육신도 의지력도 연약해 졌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세상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하면서 세상적인 지식과 이성과 가치관들이 굳어져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꾸만 그쪽으로 가려는 성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됩니까? 물론 기도하고 힘써야 합니다. 비록 완성시키지는 못하겠지만, 하늘 나라에 가서야 완성되겠지만 어쨌든 주님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고민하며 이 문제를 놓고 씨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왕도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령께서 나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하나씩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조금씩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3:12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께서는 정말 하나님앞에 간절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수 있도록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 가실때에 구원의 은총을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하나님앞에 간절히 엎드려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작업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오늘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즉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 자신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장사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소망 가운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옛것을 자꾸 십자가에 못박아야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오늘 다 읽어드리지 못했지만 앞부분 17~2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17절에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간단히 말씀드려 우리 육신의 욕구는 자꾸만 진리와 생명과 은혜와 영원한 영광의 나라보다 자꾸만 돈과 명예와 권력과 세상 즐거움 등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가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 뜻대로 살기보다는 세상 뜻대로 곧 마귀의 뜻대로 살기가 쉽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의 정욕에 속한 것들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음 부분에서는 육체에 속한 것과 성령에 속한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왜 육체에 속한 것들을 거부하고 성령에 속한 것을 따라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육체에 속한 것은 어떤 것입니까? 19~21절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등이 육체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분명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육체의 요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의 모습속에서 이 중에 한가지라도 걸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겉으로는 아닌 것 같아도 그저 육신의 요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아무리 고상하고 학식과 명예와 권세가 있는 것 같고 아주 대단한 것 같아도 그래도 별거 아닙니다. 다 이런 모습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아직도 우리들 속에도 이러한 요소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못된 본성들이 남아 있어서 자꾸만 고개를 들고 세상 밖으로 나아오려고 하니까 우리는 어쩔 수없이 자꾸만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러한 죄된 본성들이 고개를 들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기도하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하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세상적이고 마귀적인 것들은 자꾸만 쇠약해져가고, 성령께서 주시는 품성들은 날로 강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 열매는 사라지고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열매를 무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오늘 22,23절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 생명과 은혜와 기쁨과 사랑과 의와 희락의 영이신 성령께서 주시는 이런 열매가 당연히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영혼이 기쁨을 누리고 은혜를 누리고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 주는 복된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들입니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러한 것들이 우리 모든 인생들의 삶속에 나타나기만 한다면 어찌 세상이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어찌 우리들의 삶이 빛과 빛는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어찌 세상의 고통과 아픔과 절망적인 상황들이 우리를 삼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성령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따를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며 무릎 꿇으며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며, 성령의 소욕은 육체의 소욕을 거스린다는 것을 기억하며 끊임없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온 성도여러분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온전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실 때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서 여러분 자신도 구원의 은총을 온전히 충만하게 누리시고 여러분으로 인하여 이 땅위에 정오의 빛과 같이 빛나는 세상이 펼쳐지게 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3월 주일오후예배설교

 

 

 

 

 

 

제목 : 그리스도의 군사

말씀 : 딤후2:1-6

우리가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생명의 능력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귀사탄이 끊임없이 도전하고 유혹하고 시기하고 비난하며 덤벼들기 때문이다. 때로는 강력하게 때로는 달콤하게 때로는 비열하게 때로는 고상하게 때로는 교묘하게 우리를 속이고 넘어뜨리려고 한다.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언제 당하는지도 모르게 당한다. 자칫 잘못하면 속임수에 넘어가 도리어 우리가 속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교묘한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당했던 것처럼. 그리고 세상이 지금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비진리가 혹은 거짓이 진리 행세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심지어 교회를 다니면서도 여기에 속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려야 한다. 분별력을 기르고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사탄에게 속지 않고 물리치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은혜를 충만하게 받아야 한다.(1절)

딤후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우리가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기려면 강해야 한다. 강하지 않으면 진다. 군인이 체력이나 정신이나 사기가 약해지면 진다. 그러므로 우리도 강해야 한다.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강해야 한다. 그래야 마귀가 덤벼들어도 끄떡 않고 이긴다.

그러면 어떻게 강해지는가? 물론 많지만 일단 주님의 은혜로 충만해야 한다. 주님의 은혜란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모든 선물들을 말한다. 믿음, 구원, 감사, 사랑, 기쁨, 능력, 지혜, 선과 진리와 의 등...... 이 은혜를 받으면 천국에 대한 확신과 믿음, 소망을 갖게 된다. 유혹을 분별하고 이길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상황 환경 고난도 이기게 된다. 그래서 사명감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를 덧입자. 더욱 충만한 은혜를 받자. 성령의 능력을 덧입자. 그러기 위해 깨어 기도하자. 그래서 주의 은혜를 덧입고 주의 능력을 덧입어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주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모든 유혹과 도전을 물리치고 힘차게 달려가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자.

2.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2절)

딤후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자신이 먼저 말씀위에 서서 말씀으로 세상을 이기고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쳐 말씀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게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말씀은 천국을 알게 된다. 인생의 갈길을 알게 한다. 선과 진리를 알게 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거짓되고 왜곡되고 잘못된 가치관 속에 있는 풍조와 양식과 습관과 모든 삶의 모습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말씀 위에 굳게 서면 능력도 얻게 된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확신과 소망과 위로와 힘을 줌으로 올바른 분별력을 줄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유혹과 도전과 고난과 조롱과 시기와 질투와 욕심을 이기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행20:32절에서 말씀하셨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그러나 말씀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천국과 진리의 길도 제대로 모를 뿐 아니라 마귀에게 속기 십상이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받았다고 하면서 말씀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산다고 말한다. 그럴 수는 없다. 모든 은혜와 능력과 지식과 판단은 반드시 말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말씀 밖으로 넘어가면 설령 능력이 나타나도 사탄의 역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무장하라. 말씀을 묵상하라. 말씀을 잣대로 삼으라. 그러면 그 말씀이 우리를 지킨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붙든다. 힘을 주고 능력을 준다. 마귀 사탄을 물리친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3.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3절)

딤후2: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렇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필연적으로 고난이 있다. 왜냐하면 세상이 진리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로 말미암아 오염된 자연적인 세상은 결코 예수님께 대하여 호의적이지 않다. 물론 예수님을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하기도 하지만 오염되고 왜곡된 이성대로 자신들이 원하고 추구하는 이상적인 모델을 찾는데 그친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도리어 예수님의 오신 참뜻을 왜곡시킨다. 십자가와 부활과 주되심을 거부하고 꾸며낸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기독교를 핍박하고 조롱하고 대적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결국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필연적으로 고난이 따른다. 고난을 피한다는 것은 결국 십자가의 길을 회피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진리를 향해, 생명을 향해,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향해 달려가려면 영적,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 고난 즉 희생과 수고와 섬김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빌1:29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무장하여 올바른 분별력과 능력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환경이나 상황을 이기고 유혹과 핍박을 물리치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자.

4.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딤후2: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군사는 그를 모집한 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세움을 받았다. 그러므로 군사는 그 모집한 자의 뜻에 절대 순복해야 한다. 그래서 군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며 훈련받으며 적들을 물리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군사도 동일하다. 주님은 먼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부르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세우셨다. 그래서 세상 속으로 가서 마귀사탄과 싸우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물론 말씀 훈련, 기도훈련, 전도훈련도 해야 한다. 동시에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영광이나 즐거움 보다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한다. 오직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해 가야 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

그것이 바른 길이요 진리의 길이 인생의 목적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가는 길이요 동시에 우리 자신도 진정한 생명의 은혜와 능력과 자유가운데 살게 되는 길이다.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길을 택하며 주님의 나라 이루어가고 주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는 삶이 되자.

5.법대로 경기해야 함

딤후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그렇다. 모든 경기자는 법대로 해야 한다. 운동경기도 법대로 해야 한다. 시험도 법대로 치러야 한다. 인생도 법대로 살아야 한다. 신앙생활도 법대로 해야 한다. 물론 인생 최상위의 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법을 제정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또한 법을 주셨다. 그 법대로 살아갈 때에 가장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고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법대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7:21절에서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물론 이 말씀이 100%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하나님의 법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인정하고 그것을 최대한 따라가야 한다. 그럴 때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성공자가 된다.

오늘부터 사순절 집중전도. 오늘은 주님께 영광 돌리고 안식도 취하는 날. 그러므로 오후에 좀 편히 쉬면 좋은데 전도를 나가려니 솔직히 나도 좀 힘들다. 그러나 이 일은 사순절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길.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주님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생명이 역사를 이루어가는 길,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하라.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일.

그러므로 좀 힘들지만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주일오후찬양예배설교   /   기쁨과 평안

 

 

 

제목 : 떳떳한 삶을 위하여

말씀 : 요일3:18~22

법이 왜 필요할까? 그밖에 무언가 인간의 삶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것 같은 질서나 규범이나 관례나 이런 것들은 왜 필요할까? 물론 그런 것들은 결코 인간의 삶을 규제하고 통제하고 자유를 제한하고 불편하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런 것들은 인간의 삶을 평안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고,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들이다.

물론 애당초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굳이 그런 규제를 두지 않아도 자기 이성과 영으로 자신을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다면 그런 것들은 필요치 않다. 아니 사실은 만약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면 구태여 스스로를 통제하고 제어할 이유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영성과 지성과 감성과 이성이 우리가 굳이 애쓰지 않아도 진리와 선과 의를 따라 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그렇지를 못하다. 우리 모두가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올바른 분별력이 없다. 때로는 분별을 하면서 그 분별한 선과 의를 따라 살아갈 능력이 없다. 그래서 법과 규범과 질서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법과 규례와 질서를 따라 살아갈 때에 우리는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세상에서 최대한의 평안과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두말할나위도 없다. 모든 인생이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어떻게 죄와 무지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받아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지 알지 못함으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 자신과 인간과 세상과 영원한 나라에 대하여 계시해 주신 말씀이 성경인 것이다. 그래서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갈때에 우리가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과 진리 안에서 평안과 기쁨과 자유를 누리려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물론 완전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주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따라 살아갈 때에 우선은 자신이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그래서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빛을 비춤으로 저들을 주님 품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때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요, 또한 그럴 때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1.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때 진리에 속한 자임이 나타남

요일3:18,19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우리가 정말로 사랑의 예수님, 구원의 예수님을 심령에 모시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음과 말로만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마음이 있다면 행위도 따른다. 물론 정말 마음은 원인데 여건과 상황이 안돼서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긴 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행동하지 않는 것은 사실은 마음에 별로 없다는 뜻이다. 마음이 있으면 서울이고 부산이고 단숨에 달려가지만 마음에 없으면 안강이라도 안 달려간다.

그래서 마6:21절에서는 예수님께서도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고, 약2장에서는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하셨다. 당연하지 않나?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면서 실제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말로만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계속 말만 하면 위선이 된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연약해서, 혹은 상황과 여건이 안돼서 못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마음이 없는 것이다. 뭐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그 마음에 있다는 것도 결국 자기 방어와 변명을 위한 수단에 불과할 수 있다.

안 그런가? 정말로 사랑하고 자신이 필요하다고 여기면 결국은 한다. 주님을 위한 일도 그렇다. 주님을 위해 드릴 물질도 시간도 없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위한 것이나 자녀를 위한 것은 한다. 이웃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시간과 물질이 없고 여건이 안된다고 하지만 자녀를 위해서는 한다. 물론 다는 못하겠지만 주님을 위해서나 이웃을 위해서는 못하는 일도 자녀를 위해서는 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이렇게 믿음이나 사랑이 행위로 나타날 때에 우리가 주님의 자녀인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즉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진리에 속한 자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논리. 하나님께 속하였으면 하나님께 속한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께 속한 자가 마귀에게 속한 불법과 거짓과 악과 더러움 속에 살면 안 되지 않는가? 빛 가운데 왔는데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산다면 어떻게 빛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을 받았는데 여전히 더러운 모습으로 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요8:12절을 보라.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한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빛이신데 그 예수님을 따르면서 어둠 속으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예수님이 빛이시니까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오면 그 빛을 받아 당연히 빛의 은혜를 누려야 되지 않는가? 그래서 엡5:8,9절에서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빛과 진리와 생명과 의와 선과 사랑이신 예수님께로 나온 자로써 온전히 예수님을 따름으로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서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가자. 다만 따라 가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속에서 사랑과 의와 선을 실천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을 살아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2.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때 굳세게 됨

요일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주 앞에서 굳세게 한다는 것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행할 때에 마음에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침으로 더욱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모든 불안이나 두려움이나 상황이나 환경이나 사람에 의하여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 등의 어둠에 속한 것들을 물리치고 빛과 같은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 우리가 진실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선을 따르고 사랑하며 살아갈 때에 우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동시에 나도 평안과 위로와 소망 가운데 담대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주님의 능력도 덧입지 못하고, 그래서 마음에 기쁨이 없고, 스스로 위축되고, 당당하지 못하고, 불안하고, 부끄럽고 그래서 결국 능력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 또한 이렇게 주님의 능력을 덧입지 못하면 결국 마귀에게 끌려 다니는 형국이 됨으로 더더욱 빛의 은혜를 누리기 못하고 어둠의 세력들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신앙적으로만 아니라 윤리적 도덕적으로도 그렇다. 깨끗하고 선하고 의롭고 아름답고 진실하게 살아가면 당당하다. 마음이 뿌듯하고 자존감이 있고 자랑스럽다. 그러나 죄와 향락과 불법과 불의에 빠지면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럽다. 숨으려고 한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범죄는 주로 어두운 곳에 이루어진다. 물리적으로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의미적으로도 숨겨진 곳, 은밀한 곳, 사람들의 이목이 없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선하고 자랑스럽고 당당한 일이라면 왜 숨어서 하겠는가? 일부러 나보란 듯이 하지... 그래서 잠28:1절에서는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선과 진리를 따르되 행함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혜와 능력을 주신다. 평안과 가쁨과 위로와 소망을 주신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당당하게 된다. 얼굴이 밝아진다. 그러나 죄가운데 있거나 하나님 앞에 뭔가 떳떳하지 못할 때는 얼굴에 생기가 없어진다. 뭔가 그늘진 모습이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서, 특별히 사랑의 도를 따라서 그런 말씀들을 실천해 나아갈 때에 정말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자부심을 가지고 생기있게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된 삶을 살아가자.

3.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용서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요일3: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우리가 나름대로 열심히 의롭게 살아가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약하고 미련하고 부족하다. 그래서 실족할 때도 많다. 그러나 정말 믿음 안에서 선과 진리를 따라서,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기를 힘쓰는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의기소침하고 위축될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희망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과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것을 핑계로 최선을 다해 힘쓰지 않는다면 그건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을 이용해 먹는 것과 같다. 정말 마음에 원이면 원하는 것을 향해 힘써 가야하고 그러다가 넘어지고 실족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별로 힘쓰지도 않는다는 것은 실상은 마음에도 그다지 없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은 원이로된 육신이 약하다는 핑계로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하지 말고 열심히 사랑하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자. 그래도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문제들은 주님께 맡기고, 그저 하나님앞에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역사 감당하며 생기 넘치는 삶을 살아가자.

4.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때에 구하는 바를 얻게 됨

요일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말씀 그대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때에 기도 응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 계명을 지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연한 말씀이 아닌가? 앞의 2:2절에서는 계명을 지키면 그를 아는 줄 알 것이라고 하셨다. 2:5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 안에 있는 줄 알리라고 하셨다. 2:10절에서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있는 자라고 하였다. 2:29절에서는 의를 행하는 자라야 그에게서 난 줄 알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겠는가? 선을 행하며, 사랑을 실천하며 주님의 뜻을 향하여 갈 때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면 흡족한 마음으로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이다. 그리고 또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은 기도라고 해서 맨날 달라는 기도만 드리지도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를 기도한다. 그러니 응답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말과 혀로만하고 하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이니 어떻게 기도응답을 기대하겠는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정말 주의 율례와 법도를 따르자. 주님의 말씀은 결코 우리를 힘들고 부자유스럽고 어렵고 번거롭고 통제하고 제한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자유와 평안을 주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자. 물론 그래도 안되는 것이 있을지라도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용서해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힘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며 의기소침하지 말고 주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 속에서 당당하고 생기가 넘치고 능력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자.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