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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강좌>

한국인들의 이슬람에 대한 이해

 

 

이슬람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신약의 코이노니아

 

아랍 이슬람 국가에 적은 수효의 선교사들이 나가 있다. 그렇지만 정작 아랍 이슬람 세계를 잘 알고 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현실적으로 국내 사정상 교회와 신학교가 이슬람과 아랍을 잘 공부할 수 있는 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간혹 이슬람 강좌를 선교단체나 신학교에서 듣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이슬람 전체의 모습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다(혹자는 충분하다고 할지 모르나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아랍 무슬림의 세계관을 아는데 상당한 세월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국내에서 이슬람에 대한 이해 역시 아랍 국가에서 이슬람과 편차가 있다. 사실 이슬람에 대한 이해에서도 아랍 무슬림끼리 서로 시각 차가 있다 2012년 이집트에서 이슬람주의자 무함마드 무르씨 대통령이 취임한 뒤 이집트는 이슬람주의자 무슬림과 비이슬람주의자 무슬림 간에 “무엇이 이슬람이냐”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달리하였고 이슬람주의자 무슬림 형제단과 이슬람주의자 살라피 간에는 “무엇이 이슬람 율법(샤리아)이냐”를 두고 의견이 달랐다.

한국도 여전이 무엇이 이슬람이냐와 무슬림에 대한 태도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갖기도 한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이슬람에 대한 이해에서 무엇이 서로 다른가?

 

첫째, 이슬람의 뜻은 평화peace이다. 이슬람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복종을 드러내는 것”을 가리키고 전문용어로는 “알라가 무함마드에게 내려준 종교”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이란 말에는 평화라는 의미가 없다.

둘째, 이슬람은 삶의 양식 a way of life이다. 이슬람은 법과 정치, 경제, 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무슬림들이 믿는다. 그러나 실제 이슬람 국가에서 무슬림들의 삶은 이슬람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 무슬림들이 더 많다. 일부 이슬람학자들은 오늘날 무슬림들의 행태를 보면 무함마드가 기겁을 할 것이라고 했다.

셋째, 이슬람은 종교이고 국가이다. 이 부분에서는 무슬림들끼리 의견이 갈린다. 이슬람주의 무슬림은 이슬람이 종교와 국가가 포함되어 있어서 이슬람은 종합적인 제도nizām shāmil라고 한다. 그러나 비이슬람주의 무슬림은 “종교는 알라에게, 조국은 모두에게”라는 구호를 내걸어 종교와 정치를 구별 지었다.

넷째, 이슬람은 영적인 종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을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는 꾸란에서 성령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고 본질상 하나님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3위로서 인격을 가진 분이다. 그래서 성부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함께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섭리하고 운행한다. 이런 정의에 따른 성령은 꾸란과 이슬람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무슬림이 이슬람을 spiritual이라고 쓴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성령과 다른 개념이다.

실제 꾸란과 성경간의 연속성은 없다. 특히 유대인들은 무슬림들이 무효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이전의 경전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알라”라면 “알라”는 유대인들의 신은 아니라고 했다.

다섯째, 이슬람교는 인간완성의 정점이다.[1] 이슬람은 이 땅에 이슬람 국가를 세우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고 인간 완성에서 가장 좋은 종교는 이슬람이라고 했다.

이슬람은 알라- 무함마드를 빼놓고 성립이 되지 않는 종교이고

전 세계 무슬림들이 아랍어로 기도를 해야 하므로

세계 무슬림들은 아랍인 무함마드의 사상을 꾸란과 하디스에서 배우게 된다.

아랍어를 모르면 이슬람을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언어와 종교가 밀접하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이슬람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한데 그러면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신약에서 partnership이란 말에 해당하는 키워드는 코이노니아koinonia이다. 코이노니아는 공동 참여joint participation, 교제fellowship, 커뮤니티community, 동역partnership 등으로 번역되었다. J.Y. Campbell은 “코이노스koinos로 표현된 주요 개념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람들과 관련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참여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했다. 코이노니아는 단순히 다른 사람과 연결된다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다.

 

70인역에는 코이노니아가 3번 나오는데 그 의미는 개인과 개인 간의 교제로서 수평적 관계를 가리켰으나

사도 행전 2:42 등 신약에 나오는 코이노니아는 인간과 하나님 간의 수직적 관계를 자주 나타낸다.

그 예로서 고후 6:14절의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에서 사귐은 코이노니아인데 교제(파트너십)과 동일어이다.[2]

그리고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에서는 communicate라는 말인데 “다른 사람과 가진 것을 나눈다”는 의미다.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삶과 봉사와 재산을 남과 나누는 것이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에서 코이노니아는 교제fellowship이다. 이 교제는 초대 기독교인들 간에 있었던 영적 교제이었다. 또 요한 1서에 나오는 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와 공동참여와 다른 사람과 공동 참여를 가리켰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란 내적인 태도가 밖으로 나타나려면 희생이 요구된다.

그 동안 대개는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전도부터 해야 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무슬림과의 새 패러다임은 먼저 그들과 좋은 관계를 열어간다는 것이다. 아랍인들은 서로에게 진정한 친구 혹은 좋은 이웃이 되면 서로 허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종교적인 이야기도 포함되고 꾸란과 성경의 공통된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대화를 전개하면 좋다. 이렇게 시작된 대화가 계속 이어지면 아랍인들의 문화와 세계관에 적합한 성경의 이야기들을 미리 준비하여 두었다가 대화 상황이 적절할 때 그들과 나누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코이노니아가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도록 하기 전에 우리들이 무슬림과 수평적인 관계에서 교제를 나누는 것이 전도의 첩경이 된다. 신약의 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인 간의 신앙 교제를 말하지만 우리와 종교가 전혀 다른 무슬림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밖으로 표현되어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 : 공주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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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 이슬람의 어제와 오늘

 

- Islam in Korea in the 21st Century ; The Past and Present’  

저자 : 이정순 | 출판사 : 도서출판 대서 

발행일 : 2012-11-15 | (152*225)mm 280p | 978-89-92619-73-8

 

머리말

   

한국사회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하고 있어 2045년에는 세계 최고령 국가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2012619일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영국투자은행인 로열뱅크 오브 스코틀랜드(RBS: The Royal Bank of Scotland )인구 고령화가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한국인의 평균나이가 2045년에는 50세로 세계에서 가장 높을 것으로 전망했다. 인구 고령화로 한국의 노동인구는 2016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해 2020년부터는 유럽과 일본의 노동인구 감소 속도보다 빨라질 것으로 예상했다. 이러한 전망에 따라 한국은 앞으로 이주노동자를 더 필요로 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이주 무슬림 노동자들이 현재보다도 더 많이 한국에 유입될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이에 우리는 한국 이슬람이 어디까지 와 있는가를 올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에서 발흥되어 지난 1400여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며 발전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무슬림을 중동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남미, 유럽과 북미, 아시아등 전 세계어디서든지 쉽게 만날 수 있다. 이슬람은 각 나라의 문화와 접촉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며 그들 나름대로 정체성을 형성하며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따라서 21세기 이슬람 문화는 과거의 전통과 현대의 문명이 혼합된 특유한 문화이다. 현재 전 세계 무슬림 인구는 약 16억 명이며,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다. 유엔은 이와 같은 추세라면 2200년이면 이슬람이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오늘날 한국을 비롯하여 비이슬람 국가에서 무슬림들의 수적 증가율이 높아지고 있다. 15만 명에 이르는 무슬림들을 한국의 전역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무슬림은 이제 더 이상 먼 나라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슬람은 다양한 모습으로 한국인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한국에서 이슬람은 이슬람은 평화라는 태도를 내세우며 다가오므로 공격적인 모습은 아닐지라도 분명한 것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와 한국은 더 이상 단일 문화국가가 아닌 다문화국가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에서 무슬림의 증가가 단일문화의 한국사회를 다문화사회로 점차 변화시키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무슬림들이 더 이상 한국에 소수로 자리 잡고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들은 한국사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다수로서의 정체성과 문화를 형성해가고 있다. 따라서 무슬림에 대한 한국사회의 관심과 이해가 더욱 깊이 있게 요구되고 있다.

   

2001년도 한국이슬람중앙회측은 한국인 무슬림이 34천여명이라고 발표하였다. 한겨레신문2011517-20일까지 한국의 무슬림이라는 주제 하에 4일간 연속기사를 내보냈다. 517일자 한겨레신문1면에는 한국에 13~14만 명의 무슬림이 살고 있으며, 이 가운데 적어도 45천여 명은 한국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 무슬림은 지난 10년 동안 32.3%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슬람과 한국과의 문화적 교류는 신라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근대에 와서는 1950년대 한국전쟁에 유엔군으로 참전한 터키 군인들이 이슬람을 전파했지만 1960년대까지 그 활동은 매우 미약했다. 1970-80년대 중동에 진출한 한국인 건설근로자들 중에 일부가 무슬림이 되었다. 1980-90년대 이슬람권 국가에 유학한 한국인들이 유학 중에 무슬림이 되어 귀국 후에 책출판과 대중 매체를 통하여 이슬람을 적극적으로 소개하였다. 또한 노동인력으로 한국에 온 외국인 무슬림들과 접촉한 한국인들 중 일부가 무슬림이 되기도 하였다.

   

이슬람은 막강한 오일머니를 통해 국내 곳곳에 모스크를 세우고 성인들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까지 포교 대상으로 삼고 있다. 19765월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서 한국 역사상 최초로 중앙모스크가 개원했다. 그 이후 20128월 현재 국내에 모스크가 17(11개의 모스크와 모스크 역할을 하는 6개의 문화센터)이다. 모스크로의 발전을 기다리고 있는 이슬람 임시 예배소는 서울 지역 5개를 비롯하여 광주, 인천, 대구, 부산, 대전 등 전국에 60여개소가 있다. 20111216일자 한국이슬람교의주간무슬림에는 남이섬에 관광휴양지내에 있는 종합음식상가(밥플렉스) 건물 2층에 무슬림 관광객들을 위한 예배실과 우두실이 마련되었다고 안내하고 있다.

 

200811국민일보가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87.2%이슬람의 내용이나 특징에 대해 모른다고 답했다. 무슬림이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것에 대해서도 크게 개의치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20081210일 명동 청어람에서 열린 이슬람포비아(Islamophobia: 이슬람 혐오증ㆍ공포증) 실체를 진단한다의 주제 포럼에서 중동지역 K선교사는 현재 이슬람의 포교활동에 관련된 보도 내용 중 상당수가 근거가 불충분하거나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2009418일 한국선교신학회 이슬람선교포럼에서 K교수는 이슬람포비아는 타당성이 결여된 음모이론에 가까운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단언하며 이런 위기감으로 인해 보수ㆍ근본적 선교사역자들이 음모론을 확산시켰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K선교사와 K교수의 주장이 실린 기사가 한국인 무슬림의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어 오히려 이슬람 측에서 역으로 이용하고 있다.

 

현재 이슬람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매우 편식되어 있다. 한국 선교단체 간의 이슬람에 대한 인식이 다르고, 이슬람에 대하여 강의하는 강사들끼리도 의견이 다르다. 그동안 이슬람 포용론경계론으로 양분화 되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슬람에 대하여 잘 모르는 성도들만 혼란이 더 가증되고 있다. 또한 선교현장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에게도 혼란을 주고 있다. 이슬람에 대한 더욱 올바른 이해와 무슬림을 향한 사역에 전략적인 관심이 모아져야 할 때이다.

  

이슬람을 올바로 알려고 할 때 이슬람 국가별로 서로 다른 양상이 있음을 알고 그것에 맞는 이해와 연구를 해야할 것이다. 이슬람권지역에서 사역하는 사역자라도 자신의 지역에 대해서만 잘 아는 것이지 다른 모든 이슬람권지역의 사역을 깊이 연구하지 않고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한다면 분명 실제 상황과는 다른 큰 차이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610년에 발흥하여 21세기까지이어져 오는 약 1400년의 역사를 가진 이슬람을 오늘의 시각만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 시대별 특징과 이슬람이 전파된 나라마다 다른 환경에서 변형된 이슬람인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꾸란이 쓰인 7세기 이슬람과 21세기의 이슬람은 공통점이 있지만 다른 면이 매우 많다.

   

한국 이슬람이 출판한 책들 중에는 한국인들이 이슬람에 대해 서구적 관점으로 인한 편견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한다고 하면서 객관성 보다는 이슬람을 다양하게 포장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이런 정보는 한국사회에 또 다른 편견을 갖게 한다.

   

필자는 1980년부터 12월 말레이시아를 처음 방문하여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금으로 된 원형 모스크와 더운 날씨에 베일을 착용하고 길거리에 다니는 여성들과 여중생들도 교복으로 베일용 스카프를 착용하고 다니는 모습 등이 이슬람에 관심을 갖게 하였다. 그 후 2012년 겨울 쿠웨이트를 방문하기 까지, 필자는 지난 32년 동안 이슬람에 관심을 가지고 중동과 북 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를 포함하여 유럽과 북미, 남미, 동ㆍ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등을 방문하여 현장조사와 학문적 연구를 하였다. 학문적 연구를 더 깊이하기 위하여 2004-2012년 겨울, 봄 학기 시작 전에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Oxford University)의 첫 학기 동안 방문연구원(Visiting Fellow)으로 네 번과 여름에 한 번, 모두 다섯 번 방문하였다.

 

2006219일 필자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방문연구를 한 후 귀국길에 카타르 항공에 탑승했다. 카타르에서 한국에 오는 중간에 북경에서 한 번 더 탑승객을 내려주고 마지막 기착지로 인천에 들어오는 여정이었다. 북경에서 많은 승객이 내리고 나니 비행기가 텅 빈 것처럼 몇 십 명 안남었는데 비행기 중간에 무슬림 소녀가 혼자 앉아있기에 그쪽으로 다가가서 영어로 말을 걸었다. 인사를 나누다 보니, 무슬림 소녀가 저 한국 사람이 예요라고 말을 하기에 깜짝 놀랐다. ’아마 부모님 중에 한명이 외국인인가 보다하고 질문하니 부모님이 모두 한국인이라고 했다. 다만 부모가 무슬림들이기 때문에 아랍어를 공부하러 무슬림 소녀(K)가 아프리카 수단에 갔다가 방학을 맞이하여 한국에 입국하면서 평상복이 아닌 무슬림 여성들의 의상을 착용하고 비행기를 탄 것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필자는 한국인 무슬림들에 대하여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에 필자는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수집하여 온 한국인 무슬림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여 한국인 이슬람 개종 요인을 연구하여 학회지에 발표하였다. 그리고 전에 발표한 모스크의 역할과 상징성은 책으로 엮고자 약간의 수정과 편집을 하였다. 이 책에서 무슬림 여성의 베일외에는 무슬림 여성의 삶과 문화에 대하여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필자의 다른 책 이슬람 문화와 여성에 구체적으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한국 이슬람의 역사는 이미 역사를 연구한 분들의 책을 주로 인용하였다. 그러나 한국인의 이슬람 개종 사례는 이에 대한 공신력과 객관성을 높이기 위하여 추측성의 보도가 아닌 필자가 오랫동안 수집한 한국의 주요 신문의 기사들과 한국이슬람중앙회의 자료 등을 인용하였다. 이것은 한국 이슬람에 대하여 막연한 추측이나 소문이 아닌 구체적인 실체에 근거해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이다. 신문 기사에 난 사람들의 이름은 약자로 처리하였다.

이 책은 이슬람과 기독교의 신학적인 논쟁이나 이슬람포비아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며,

한국사회와 한국교회가 한국인 무슬림의 증가 현상을 올바로 인식하여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신학적인 것보다는 우리가 이슬람에 대하여 이해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반적인 이슬람의 역사, 종교, 문화ㆍ사회적 관점과 무슬림들의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특히 한국사회와 교회가 무슬림을 단순히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실상과 확산에 대한 좀 더 바른 이해를 갖도록 하려는 데에 있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21세기 한국 이슬람을 이해하는데 유용성을 제공하며 올바른 안목을 기르는데 실제적인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 책을 출판하는데 수고를 아끼지 않은 도서출판 대서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이정순.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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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강좌 (이슬람과 이슬람문화 ) Islamic culture

 

이종화 명지대·아세아신학대 강사

 

복식문화

남녀간, 지역간, 기후의 차이에 따라 의복의 형태는 각각 다른 특징을 보인다. 남성의 전통적 의복은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나 대개 위 아래가 하나로 된 긴 장옷 형태가 일반적이다. 이 의복은 ’‘갈라비야’‘다쉬다쉬등으로 불리며 사르왈이라는 바지 위에 입기도 한다. 장옷을 입은 허리에는 다양한 장식을 한 단도를 차는데, 이것으로 남성다움을 과시한다. 또한 단도의 형태와 색깔 그리고 재료에 의해 신분과 부족을 구분하기도 한다.

 

머리에는 다양한 줄무늬로 디자인한다. ‘구트라라는 천을 쓰는데 이깔이라 부르는 머리끈으로 머리에 고정된다. 구트라와 이깔은 단지 머리에 쓰는 용도뿐만 아니라 부족간 구별과 통치 가문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구트라의 무늬와 이깔의 형태와 색을 보고 그 사람의 출신 부족과 신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머리에 터번을 두르기도 하는데, 터번은 끊어지지 않은 하나의 긴 천을 머리 부분에 정성스럽게 두른 것으로, 흰색·검은색·청색 등으로 채색되어 있다. 어깨에는 비쉬트라 불리는 직사각형의 망토를 장옷 위에 걸치는데, 이것은 옷의 기능뿐만 아니라 온도차가 매우 심한 밤의 사막 여행에서 휴식과 수면을 위해 몸을 덮는 담요의 기능까지 겸하고 있다.

 

여성의 의복은 꾸란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밖으로 나타내는 것 이외에는 유혹하는 어떤 것도 보여서는 아니 되니라. , 가슴을 가리는 수건을 써서 남편과 그의 부모, 자기 부모, 자기 자식, 자기의 형제, 형제의 자식, 소유하고 있는 하녀, 성욕을 갖지 못하는 하인, 그리고 성에 대해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어린이 이외의 자에게는 아름다운 곳을 드러내지 않도록 해야 되니라.’(2431)

 

따라서 여성의 전통 의복은 온몸을 덮어 가족 이외의 사람들로부터 신체와 장신구들을 가리기 위한 것이다. 여성의 몸을 가리는 이러한 의상은 히잡’(머리나 몸을 덮는 의상) ‘부르끄으’(얼굴 가리개) ‘니깝’(얼굴 전체를 덮는 검은 베일) ‘차도르’(머리 덮개)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또한 여성 의상의 모양과 색깔은 지역, 종교적 성향, 계층, 연령, 취미 등 여러 요인에 따라 달라진다. ,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걸프 지역의 여성들은 검은색 히잡을 쓰고 온몸을 가리지만, 북아프리카의 여성들은 흰색이나 다양한 색의 히잡을 선호하며 얼굴을 내놓는 두건 형태의 히잡을 쓰거나 아예 쓰지 않기도 한다.

 

또한 종교적 믿음이 강한 보수적 성향의 여성들은 온몸을 가리는 히잡을 착용하는 반면, 개방적인 여성들은 두건 형태의 히잡을 쓰거나 아예 쓰지 않기도 한다. 연령에 따라서도 젊은 여성들은 원색 계통의 화려한 히잡을 좋아하고, 나이 든 여성들은 단색 계통의 히잡을 선호한다.

 

음식문화

   

무슬림들의 주식은 역시 빵이다. 유목민들에게 구운 빵은 이동중에도 쉽게 먹을 수 있고 보관도 용이해 매우 간편한 음식이다. 빵과 더불어 주요한 음식으로는 육식이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사용되는 양고기는 무슬림들이 가장 좋아하는 육류이고 닭고기·쇠고기·낙타고기 등을 먹는다. 하지만 돼지고기는 엄격히 금한다. 요리 방법은 주로 불에 구워 먹는데, 육류구이 요리의 대표적인 것은 케밥이라는 음식이다. 케밥은 양고기를 작은 크기로 잘라 주로 소금과 후춧가루로 양념해 구운 것이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코프타라는 음식이 있다. 코프타는 잘게 다진 양고기에 여러 가지 양념과 재료를 섞어 버무린 다음 소시지 모양으로 만들어 구운 것이다. 또한 일종의 샌드위치인 샤와르마라는 음식도 즐겨 먹는다. 이것은 큰 꼬챙이에 수직으로 켜켜이 쌓인 양고기나 쇠고기를 가스 불판 앞에서 돌리면서 굽는 것이다. 구운 고기는 얇게 잘라 빵 사이에 오이피클이나 샐러드와 함께 넣어 샌드위치를 만드는데 이것이 샤와르마다. 또한 요리할 때는 기름을 즐겨 많이 사용하는데, 이것이 비만한 체구의 무슬림 남녀를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무슬림들이 즐겨 마시는 음료는 주로 커피와 차다. 커피는 무슬림들이 커피 수출로 유명했던 예멘의 모카 항구를 통해 인류에 보급시킨 음료다. 커피가 무슬림들의 기호식품으로 이슬람 세계에 퍼져 나가게 된 것은 15세기 중반부터다. 예멘의 수피 수도사가 에티오피아 지방을 여행하다 열병에 걸려 앓아 누웠을 때 원주민들이 커피 가루를 물에 타 먹여 회복했다고 한다. 이 수도사에 의해 예멘 지방에 커피가 알려지게 되었다.

 

 

초창기에는 이슬람의 신비주의 종단인 수피종단에서 수도사들이 모여 앉아 설교를 들을 때나 명상중에 잠을 쫓을 때 커피를 즐겨 마셨다. 기록에 의하면 이미 1511년 이슬람의 성지 메카에서 성지 순례자들에게 커피를 팔았던 것으로 전한다. 곧이어 커피는 성지 순례자들에 의해 이집트·시리아·이란·터키 등지로 퍼져 나갔다. 무슬림들은 커피가 정신을 맑게 하고 피로를 회복시키며 열을 내리게 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여 즐겨 마셨으며 도시 곳곳에 커피점이 성행했다.

 

 

커피가 이처럼 빠른 속도로 전 이슬람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술을 금지하는 이슬람법 때문이다. 이슬람에서는 음주를 금하기 때문에 술을 대신할 음료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곧 커피였으며 선술집과 같은 사교장소를 대신한 곳이 커피점이었다.커피와 함께 차도 무슬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기호식품이다. 차는 19세기 이후부터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책과 더불어 소개돼 이슬람 세계에 널리 퍼졌다.

 

 

무슬림들은 샤이라고 불리는 차를 우리처럼 한 잔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보통 두세잔을 계속해서 마신다. 차는 각 지역의 특성에 따라 끓이는 시간과 첨가하는 재료가 다르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박하 잎을 넣어 박하향을 나게 하는 나으나으. 보통 차에는 많은 설탕을 넣어 달게 마시는데, 이것은 설탕이 더운 날씨에 지친 몸의 피로를 회복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슬람에서 돼지고기를 금하는 이유

 

 

무슬림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힌두교도에게는 쇠고기가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힌두교도들은 인도에 있을 때, 즉 자기들의 공동체 안에 살고 있을 때는 이 계율을 철저히 지키지만 무슬림들은 자기들의 공동체 안에서나 밖에서도 돼지고기를 철저히 먹지 않는다. 또한 힌두교도는 쇠고기를 먹지는 않지만 농가에서는 흔히 소를 사육하며 경작에 이용하기도 하나 무슬림들은 돼지를 사육하는 일조차 전혀 없다.

  

이슬람에서는 왜 돼지고기를 그렇게 철저하게 금지했을까? 수많은 학자들이 이슬람에서 돼지고기를 금하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해석하지만, 같은 질문을 이슬람 신학자에게 질문한다면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꾸란을 통해 지시하셨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대답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꾸란에서는 돼지고기뿐 아니라 먹을 수 없는 음식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이슬람에서 규정한 금지된 음식은 어떤 것들일까?

   

이슬람에서 허용된 것은 할랄이라고 하고, 금지된 것은 하람이라고 부른다. 어느 것이 하람인지는 꾸란에 자세히 명시되어 있다. 그래서 이슬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슬람의 율법이 복잡하고 금하는 것이 많은 까다로운 종교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꾸란이나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에서는 특별히 금지된 것들을 제외한 모든 행위는 허용된다고 말하고 있다.

   

선지자 무함마드는 초기 이슬람 신자의 질문을 받고 할랄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고, 하람은 금지하신 것이나 꾸란에 아무런 언급이 없는 사항은 모두 너희에게 허락되어 있느니라하고 대답했다. 따라서 복잡하고 까다로운 것처럼 보이는 이슬람 율법은 몇가지 금기사항만 유의하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관대한 법이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꾸란에서는 명쾌하게 허용된 음식과 허용되지 않는 음식을 정의하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믿는 자들이여,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부여한 양식 중 좋은 것을 먹되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분만을 경배하라. 죽은 고기와 피와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 그러나 고의가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먹을 경우에는 죄악이 아니라고 했으니 하나님은 진실로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신 분이니라.’(꾸란 2172~173)

 

 

꾸란 제53절에서는 먹을 수 없는 육식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 하나님의 이름으로 잡지 않은 것, 목 졸라 죽인 것, 때려 잡은 것, 떨어뜨려 죽인 것, 서로 싸우다 죽은 것, 다른 야생동물이 먹다 남긴 고기, 우상에 제물로 바쳤던 고기, 화살로 점을 치기 위해 잡은 것 등이다. 이처럼 꾸란에서는 동물에 관하여 돼지고기와 죽은 고기, 피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죽인 동물의 고기만 금지사항으로 규정해 놓았다.

   

그러나 선지자 무함마드는 하디스에서 뾰족한 엄니나 독치를 가진 동물과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맹수 그리고 독수리··송골매·솔개 등의 조류를 모두 먹어서는 안될 동물로 규정해 놓았다. 결국 양··염소·낙타 등과 같은 초식동물을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동물로 한정해 놓았지만 먹을 수 있도록 허용된 동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고 잡지 않은 고기는 먹을 수 없도록 규정한 것이다.

   

반면 해양동물은 모두 정당하게 먹을 수 있다. 동물에는 육지의 것과 바다의 것이 있다. 바다에서 사는 동물은 어디에 있었던 것이든, 살아 있는 것이든 죽은 것이든, 또한 무슬림이 잡든 비무슬림이 잡든 모두 정당하게 먹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꾸란에서 바다의 사냥과 그 음식은 너희와 여행자들을 위해 허용하니라.’(꾸란 596)라 했고, 선지자 무함마드 또한 바닷물은 깨끗한 것이며 그 안에서 죽은 동물 또한 먹어도 좋은 음식이니라.”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이슬람에서는 육식을 하는 데 여러 가지 제한을 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가피한 상황의 경우에는 언제나 허용의 길도 열어놓는 것이 이슬람의 특성이다. 위에서 인용한 꾸란 구절에서 보았듯 고의가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먹을 경우는 죄악이 아니라고 했다. 다시 말해 누구든 굶주렸거나 강제에 의한 경우에는 이를 불가항력으로 간주해 아무 고기나 먹을 수 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돼지만은 특별히 언급해 먹지 말라고 명령했을까?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의학자들은 돼지고기가 보유한 여러 가지 선충들이 인간의 몸에 해롭다든지, 또 어떤 학자들은 돼지의 습성이 나쁘다든지, 돼지고기는 사막 기후에 부패하기 쉬워 적합하지 않다는 견해 등이다.

 

그러나 이슬람 신학자들은 꾸란을 통해 하나님께서 금했기 때문에 무슬림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며,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다고 생각한다.

   

주거문화

 

 무슬림들은 생활방식에 따라 유목민, 정착 농경민, 도시민의3부류로 나뉘는데 이들은 각각 특징적인 생활방식에 따라 주거문화를 발달시켰다. 유목민의 주거문화는 그들의 옛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데 주로 천막을 이용하는 것이다. 자주 이동하는 유목민이 가진 특징에 따라 조립과 해체가 편리한 천막의 주거문화를 이루게 된 것이다. 정착 농경민의 주거문화는 기후 조건과 가용의 건축자재에 따라 발달했다. 산악지대에서는 돌을 주로 사용하여 건축하는 반면 찰흙이 풍부한 강 유역에서는 잘게 썬 짚을 진흙과 반죽하여 만든 찰흙벽돌을 사용하여 건축한다. 찰흙벽돌은 열을 잘 차단하기 때문에 외부의 온도가 아무리 올라가더라도 실내는 쾌적하고 시원한 상태를 유지시킨다.

 

 

도시의 주거문화는 메디나로 불리는 도심권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메디나는 성벽으로 둘러쌓여 요새화되어 있으며 이 안에 상업지역, 공공지역, 주거지역이 함께 있다. 상업지역인 수끄는 좁은 거리와 골목길이 교차되는 복잡한 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거의 비슷한 형태를 한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직종별, 취급품목별로 동일한 가게들이 몰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공공지역은 종교와 통치의 중심지역으로 모스크와 이슬람 학교가 있어 종교의 중심지가 되며 또한 관청이 모여 있어 통치를 관장한다. 주거지역은 좁은 골목길이 사방으로 얽혀 미로를 이루고 거의 동일한 형태의 집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로 담은 없으며 집과 집이 서로 맞닿아 담의 역할을 대신한다. 집의 구조는 거리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집안 마당이나 정원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 있는 방들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가정생활의 중심은 집안 마당이 된다.

 

 

주거지역 안의 대부분의 거리들은 너무나 협소하여 자동차가 다닐 수 없고 단지 보행자와 짐을 실은 당나귀만 다닐 수 있다. 하지만 19세기 말부터 전통적인 도시를 재보수하고 재건축하려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따라서 전통적인 대도시들은 서구식 도시계획과 건축술의 도입으로 인해 고유의 전통을 잃고 급격하게 변모하고 있다.

   

이슬람 건축의 백미, 모스크

   

인류의 종교에 대한 애착과 열정은 세계적으로 많은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유산으로 남겨 놓았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유럽의 대성당들이 이러한 건축물들이다. 마찬가지로 이슬람에서도 무슬림들의 종교적 열정으로 인해 모스크라고 불리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종교건축물들이 많이 건축되었다. 부드럽게 속삭이다 거칠게 포효하는 듯한 돔의 둥근 선과 첨탑의 날카로운 선. 이슬람 세계를 여행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지평선 위에 그려진 이 둥근 선과 직선의 신비로운 조화에 한번쯤은 넋을 잃고 바라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돔과 첨탑이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의 대표적 건축양식이다.

 

  모스크 중앙의 둥근 지붕은 영어로는 돔, 아랍어로는 꿉바라고 하며, 뾰족하게 솟은 첨탑은 미나렛이라고 부른다. 사실 돔이나 첨탑과 같은 건축양식이 이슬람 초창기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이슬람공동체가 점차 확산되고 정복을 통해 제국으로 발전하면서 주변의 비잔틴이나 페르시아문화의 영향을 받은 이슬람 특유의 모스크 건축양식이 탄생한 것이다.

   

모스크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인 돔은 대부분 학자들이 비잔틴 건축양식의 영향이라고 주장하지만, 아랍 민속학자들은 이미 이슬람 출현 이전에 아랍 유목민들이 낙타의 등 위에 싣고 다니던 조그만 가죽 천막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 완만한 선이 의미하듯 모스크의 돔은 평화를 상징한다. 돔의 끝은 보통 초승달로 장식하는데 초승달은 샛별과 함께 이슬람의 대표적 상징이며 진리의 시작을 의미한다. , 무함마드가 최초로 계시를 받을 때 초승달과 샛별이 한데 어울려 떠 있었다고 전해지며 그때부터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에게 내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모스크 건축양식의 또 다른 특징인 첨탑은 기능면에서 두 가지 역할을 한다. 하나는 하루 다섯차례의 예배 시간을 알리기 위해 무앗찐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이 첨탑 위에 올라가 아잔을 외쳤다. 높은 데 올라가 소리칠수록 멀리까지 잘 들리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기능은 이방인들에게 그 지방의 모스크 위치를 쉽게 알려주기 위함이다. 높은 첨탑은 쉽게 눈에 띄기 때문에 길을 모르는 외지인이라도 이 첨탑을 보고 모스크를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첨탑 양식은 역사적으로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시리아·북아프리카·안달루시아(스페인·포르투갈 지방) 지방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사각형이었고, 이라크 지역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건축양식을 모방해 나선형이었으며 이란·터키 지방은 원통형이었다. 모스크에 따라 첨탑의 수도 다양하지만 일정한 규정도 없다. 1개나 2개가 보통이었지만 오스만터키 제국 시대에 들어오면서 첨탑의 수가 권력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그 한 예로 술탄 아흐마드 1세는 이스탄불에 자신의 이름으로 모스크를 건립할 때 6개의 첨탑을 세우게 했다. 그러나 이슬람의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모스크가 6개의 첨탑인 것을 알고 경비를 대 메카의 모스크에 하나의 첨탑을 더 세우게 했다.

 

  돔과 첨탑 등 화려한 외부구조와 달리 모스크 내부구조는 극히 단순하다. 돔이 받치는 내부구조는 기둥이 필요 없기 때문에 운동장과 같은 넓은 공간이 펼쳐지며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을 뿐이다. 그러나 모든 모스크들은 단순하나마 일정한 구조물을 갖추고 있다. 사방의 벽면 중 한쪽 벽면에는 아치형으로 움푹 패인 벽감이 있다. 이를 미흐랍이라고 부르는데, 예배를 보는 방향 다시 말해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방향을 나타낼 뿐 별다른 의미는 없다. 따라서 전세계의 모든 모스크들은 메카 방향을 향해 모스크가 건립된다.

 

  미흐랍의 바로 오른쪽에는 계단 형식의 설교대가 있어 민바르라고 부른다. 금요일 합동예배 전에 카팁이라고 불리는 설교자가 이 설교대에 올라가 설교한다. 한편 여성들을 위한 공간은 모스크의 양 측면이나 뒷면 혹은 2층에 마련되어 있는데 보통은 커튼이나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다.

 

 

모스크 내부 장식 중 특이한 것은 인물이나 동물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 인물이나 동물의 조각은 물론이요, 인물이나 동물을 묘사한 모자이크나 프레스코 벽화도 발견할 수 없다. 그것은 꾸란 5924절의 하나님만이 진정한 창조주로서 인간이나 동물을 만들 수 있다는 데 근거한 것이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조각이나 그림은 자칫 잘못하면 우상숭배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슬람에서의 우상숭배 경계 때문에 모스크 내부 장식에서는 인물상 및 동물상은 전혀 보이지 않지만, 아름다운 문양의 아랍어 꾸란 장식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위 아라베스크라고 불리는 꽃 문양에 기초한 복잡한 기하학적 문양이 모스크 벽면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다. 결국 이슬람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계 때문에 회화는 발달하지 못했지만 대신 서예와 조형미술이 발달한 셈이다.

   

이슬람의 출생 의례

 

어느 문화권, 어느 사회나 아이의 출생은 대단히 경사로 여기며 이에 대한 축하 의례를 행한다. 이슬람 사회도 다른 문화권과 마찬가지로 아이의 출산은 아이들이 없는 집안은 축복받지 못한다는 하디스의 기록이 있을 정도로 매우 기쁜 일이다. 아이의 탄생은 신의 은총이며 사회적으로는 가계의 승계, 노동력의 증가, 전사의 확보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슬람의 관점에서는 임신 순간부터 출산에 이르는 산모의 전 과정을 성스러운 투쟁으로 묘사한다. 심지어 출산중에 목숨을 잃은 산모는 순교자로 간주하여 천국에서의 보상을 약속한다. 출산이 임박해 오면 공동체 내에서 평판이 좋고 노련한 조산원을 고용해 작은 칼과 명주실 등 필요한 출산 준비를 한다. 임신한 부인은 조산원으로 활동하지 못한다. 아기의 옷가지를 준비하고, 꾸란을 주머니에 넣어 아기가 태어날 방의 벽에 메카 방향으로 걸어둔다. 이때 아기용품도 꾸러미를 만들어 그 속에 참깨를 뿌리고 호적과 꾸란 밑에 나란히 건다.

 

 

출산 때는 남성은 격리되고 조산원과 이웃 여인들이 꾸란의 개경장과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를 외치며 출산을 돕는다. 꾸란 구절 가운데 마리아의 예수 출산과 지진에 관한 부분을 계속해서 낭송한다. 산모는 음식이 금기되며, 박하차 같은 뜨거운 음료를 마신다.

 

 

조산원이 출산 소식을 전하면 아버지는 첫번째 의식으로 아기 머리가 메카 쪽으로 향하도록 안고 오른쪽 귀에 아잔’(예배를 알리는 낭송), 왼쪽 귀에 이까마’(아잔과 비슷한 내용으로 모스크 내에서 예배 직전에 낭송된다)를 불러주며 알라에게 아기의 탄생을 고하고 알라의 은총을 구한다.

 

 

아잔을 부르고 난 후에는 아기의 강건함을 기원하는 의미로 신선한 대추야자 열매를 씹어 그 액을 아기의 입에 넣어주는 의식을 치르는데, 이것을 타흐리크라고 한다. 갓 태어난 아이는 처음 이틀 동안은 꿀이나 설탕물을, 세번째 날에는 식물성 식용유 한 스푼을 먹이고 산모의 젖을 빨게 한다.

 

  특히 남아를 간절히 고대하던 산모가 남아를 출산하면 조산원은 그가 냉정을 되찾을 때까지 여아를 출산했다고 거짓 알려주는 지혜를 발휘한다. 이는 산모가 남아 출산을 너무나 기뻐한 나머지 혼절하는 사태를 막기 위함이다.산모는 여아를 생산한 경우 즉시 가사에 복귀할 준비를 해야 하지만, 남아를 출산한 경우 최소 36일간 침대에서 산후조리를 하며, 그 뒤 40일간 휴식을 취한다. 산모는 출산후 40일이 되는 날 신부 옷을 꺼내 입고, 신부와 같은 대접을 받으며 남아 출산에 따른 보상을 받는다.

 

  그리고 일상으로 복귀한다. 출생 의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생후 7일째 행해지는 탄생 축제와 작명 의식이다. 성대한 잔치가 병행되는 작명 의식 때에야 비로소 가까운 이웃이나 친지들이 선물을 준비하고 처음 아기를 보러 온다. ‘하렘’(여성거주 공간)에 여인들이 들어오면 조산원은 아기 침대에 묶어둔 소금 주머니를 풀어 뿌리면서 예언자의 은총을 받지 못한 자의 눈 속에 소금이 들어가기를또는 사악한 자의 눈 속에 더러운 소금이 함께 하기를이라고 중얼거린다.

 

  소금을 뿌리는 행위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부정하고 사악한 것, 특히 손님 중에 숨어 들어올지 모르는 악귀의 해악으로부터 아기와 산모를 보호해 달라는 기원의 표시다. 이때 여인들은 자수 손수건의 한 귀퉁이에 금화를 싸서 선물로 아기 침대 위에 올려놓고 아기에게 덕담을 한다. 덕담 내용은 주님이여, 우리의 예언자 무함마드를 복되게 하소서이다. 이때 만약 아기의 모습을 이례적으로 칭찬하면 주인은 기겁을 하고 즉시 부정하면서 혹시 질투의 기운이 아기에게 미칠까봐 의혹의 눈길로 상대를 바라본다.

 

  축제가 시작되면 상류사회에서는 여성 가수와 밴드가 동원되어 산모를 위로하며, 아기의 출산을 위해 직간접으로 관계했던 여인들이 한바탕 함께 즐긴다. 탄생축제는 생후 1주일부터 5주째까지 매주 각각의 독특한 의례가 이어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1주일째의 작명 의식이다. 작명은 전통에 따라 일정한 형식을 취하지만, 많은 지방에서는 아직도 아이를 보호하는 수단으로 상당기간 동물이나 곤충의 이름, 혐오스러운 표현, 발음하기 어려운 낱말을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생후 7일째 작명하는 날 아기의 머리털을 정수리만 남기고 자른 다음 그 머리털의 무게에 해당하는 금이나 은을 가난한 사람에게 희사한다. 이러한 의식은 작명과 함께 새로운 삶과 세계로의 입문을 의미한다. 그런 다음 주인은 손님들을 초대하여 동물들을 희생한다. 보통 남아인 경우에는 양 2마리를, 여아인 경우에는 양 1마리를 잡는다.

   

아끼까의식은 생후 7일째뿐만 아니라, 지방에 따라서는 14일째와 21일째에도 행한다. 이 의식은 부모가 그의 자식들을 위해 희생의식을 치르지 않으면 그 자식이 곧 죽게 되거나 최후의 심판일에 자식이 부모를 변호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기인한다. 희생 제물은 일반적으로 3등분하여 한 몫은 집안에서 요리하여 손님들을 대접하고, 한 몫은 가까운 친지나 친구·조산원에게 나누어 주고, 또 한 몫은 가난한 이웃에게 희사한다. 이러한 3분 희사 방식은 여러 다른 희생의식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이슬람 사회에서 할례의 시기는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아랍사회에서는 작명 의례를 행한 직후인 생후 8일째 할례를 행한다. 그러나 아랍권 일부에서와 비아랍권에서는 생후 40일째 또는 아이가 좀더 성장한 후인 57세때 할례를 행한다. 상류층 자제가 할례할 때는 가진 자의 비용으로 수십명의 고아와 가난한 자의 자식들이 함께 할례를 행하는 것이 미덕으로 되어 있다. 성대한 잔치와 할례복 준비에 많은 경비가 소요되기 때문이다.

 

  성장에 따른 의례

   

아이는 의례적인 무수한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성장해 간다. 첫번째 이가 났을 때, 첫 걸음마, 첫돌 의식 등이 그것이다. 산모는 꾸란의 규정에 따라 만 2년 이상 모유로 양육할 책무를 진다. 건강상의 이유로 수유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남편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런 경우 우유나 분유 대신 유모를 고용한다. 모유의 신성함 때문에 같은 유모의 젖을 빨았던 유아들은 후일 아무런 인척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이 엄격히 금지된다. 유아기의 성장에는 어머니의 역할이 특히 강조된다. 이슬람은 자신의 자식을 샤하다를 암송할 수 있는 나이까지 잘 키워 부모에게 복종하고 신을 경외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든 어머니에게 천국을 보장한다.

 

  자식이 갖는 소중함과 의미가 크면 클수록 부모는 질병을 유도하는 사악한 기운이나 흉안(凶眼)의 해악으로부터 자식을 보호하고자 미신에 가까운 여러 가지 방책을 강구한다.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아이의 몰골을 지저분하게 하거나 현란한 장식을 달아 흉안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다. 터키 동부나 쿠웨이트·시리아 일부 지역에서는 남아를 여장(女裝)시켜 악귀의 눈을 피하기도 한다. 가난하고 지저분한 아이보다 부유층 자제가, 여아보다 남아가 더욱 흉안의 시기를 받기 쉽다고 믿기 때문에 왕족이나 상류층 자제는 거의 취학 연령에 도달할 때까지 하렘에 칩거하면서 외부인과의 접촉을 제한했다.

 

  할례 이후부터는 아버지에게 절대적 복종과 존경심의 바탕에서 예절, 사회의 관습과 관례, 종교적 지식 등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게 된다. 이때 쉐이크라는 가정교사를 고용하기도 한다. 말하기 시작할 때 처음 받는 교육은 신앙의 고백, 샤하다를 외우며 무슬림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5세 때부터 세정과 예배의식을 행하고 어머니나 할머니로부터 선조의 영웅담이나 신화적 전설을 전해 듣는다.

   

7세가 되면 남녀가 유별하여 하렘에 함부로 왕래할 수 없으며, 여아는 바깥 출입시 베일을 쓴다. 이때부터 남자는 서당이나 학교에서 꾸란과 하디스를 배우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게 된다.이에 비해 여아는 교육 혜택을 덜 받는 경우도 있다. 일류 상류층에서는 여교사를 초빙하여 가정에서 글자를 익히고 꾸란 낭송 및 종교적 교육을 받게 하지만, 대부분의 집안에서는 엄격한 통제 속에 수예·방직·카펫 짜기 등의 기술교육을 익히게 한다.

 

  결혼 의례

   

의심할 바 없이 결혼은 모든 인간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통과의례로 간주되며 이슬람 세계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결혼 의례는 각 문화권의 전통과 관습 또는 종교에 따라 행하여지는데 이슬람에서의 결혼은 도덕틀의 유지를 통한 사회의 결속과 가족의 연대를 강화하는 기능, 그리고 성적 욕구의 충족이라는 본능을 제도화하는 의미를 갖는다. 이슬람권의 혼례가 다른 문화권의 혼례와 확연히 구별되는 것으로는 신분과 직업에 상응하는 중매혼, 일부다처의 허용, 결혼지참금제도, 사촌간 결혼, 남성 위주의 결혼생활 등이 있다.

   

이슬람 전통사회에서 결혼은 개인적 문제라기보다 가족이나 혈연공동체 모두에게 관련되는 공통의 관심사이기 때문에 연애결혼은 거의 상상할 수 없다. 남자 1820, 여자1618세의 적령기에 도달하면 흔히 그 마을에서 가장 명망이 높고 평판이 좋은 사람이 중매쟁이가 되어 양가의 사회적 신분, 재산, 직업, 결혼 당사자의 교육 정도나 됨됨이를 고려해 신랑·신부의 혼담을 진행한다. 연애결혼이 허용되지 않는 아랍 전통사회에서 카타바’(중매쟁이)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사회적 신분이란 그 가계의 혈통이 예언자 무함마드와 관련이 있는지, 종교적 헌신도나 신앙의 정도,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후 몇세대가 지났는지, 재산, 가정의 도덕적 규율상태 등을 살핀다. 쉬아파와는 달리 순니파에서는 남자는 자신보다 낮은 지위에 속한 가문의 여자와 결혼할 수 있으나, 여자의 경우에는 자신보다 비천한 가문의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일부 지역에서는 유아기에 이미 양가 사이에 약혼을 하는 관례가 강하게 남아 있다. 또 아무런 인척관계가 없더라도 어릴 때 같은 유모의 젖을 공유한 남녀의 결혼은 관습적으로 금지하는 점이 서아시아 사회에서의 젖의 신성함과 관련하여 매우 특이한 점이다.

 

  신랑감은 아버지가, 신부감은 어머니가 고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배우자의 최종 결정권은 아버지가 갖는다. 신부에게 아버지가 없는 경우에는 남자 형제가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한다. 여자는 부모가 선택해준 신랑 후보를 거절할 수 있으나, 본인이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할 권리는 일반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결혼 후보는 부모나 후견인과 함께 신랑·신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하지만, 혼례일까지 상대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결혼이 금지되는 근친의 범위는 어머니··여자형제·배다른 누이·숙모·고모·이모·외숙모·조카·질녀·장모·의붓딸·아버지의 다른 부인들·며느리 등이며, 두 자매와의 동시 결혼, 같은 유모의 젖을 공유했던 사람, 노예와의 결혼도 금지된다. 또한 남녀 공히 부부생활을 위협하는 지병이나 신체적 결함이 없어야 하고, 남자는 4명의 아내를 갖지 않은 상태, 여자는 이혼한 후 전남편과의 관계가 청산되고 재혼 금지 기간을 충족한 상태여야 한다. 부족에 따라서는 처가 사망한 경우 처제나 처형과의 결혼이 보편적이고, 형제가 사망하는 경우 형수나 제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수계혼(嫂繼婚) 제도가 성행하기도 한다.

   

종교적인 제한으로는 무슬림 남자는 이교도 여인 중 기독교도나 유대교도와의 결혼이 허용되지만, 무슬림 여자와 이교도 남자의 결혼은 허용되지 않는다. 결혼은 허용되어도 이교도인 아내는 개종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남편의 유산상속권을 갖지 못한다.

   

결혼조건이 충족된 상태에서 쌍방의 합의가 이루어지면 신랑·신부는 보호자와 각각 두사람의 증인이 참석한 가운데 까디(판관)’에 의해 결혼의 합법성이 공표된다. 전통 관습법은 서면양식 없이 판관에 의해 쌍방의 합의가 공동체에 공표됨으로써 효력을 발생했으나, 지금은 여성 보호 차원에서 모든 조건을 세부적으로 명시한 혼인계약서가 작성되어 공개된다. 성혼(成婚)의 절차는 주례인 판관에 의해 결혼계약의 구체적 사실이 확인되고 동의된 다음 결혼의 의미와 이슬람적 가르침에 대한 설법이 있은 후 신랑·신부가 오른손 엄지를 세워 서로 누르며 손수건으로 그 위를 덮는다. 그리고 신랑·신부가 꾸란의 개경장을 함께 낭송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러한 법적 절차와 함께 관습적 절차의 충족도 결혼의 성립에 매우 중요한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신부의 처녀성 문제다. 이는 흔히 첫날밤을 지낸 후 하얀 천에 묻은 혈흔을 대중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처녀성이 증명되고 그 결혼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절차로 나타난다. 그러나 요즘은 혈흔을 직접적으로 공개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이슬람권의 결혼이 다른 문화권의 결혼과 가장 다른 차이점은 역시 일부다처제다. 이 제도는 남편이 다수의 아내를 공평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는 조건 하에 4명까지 결혼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아랍사회의 권장된 결혼 관습 중 하나는 사촌결혼이다. 사촌 중에서도 부계 사촌(父系四寸), 즉 숙부의 딸을 신부로 맞이한다. 부계 사촌 누이동생에 대한 남자의 권리와 의무는 거의 절대적이어서 본인이 사촌 누이동생과의 결혼 의사를 포기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반면 신랑이 가족들의 압력에 의해 부계 사촌누이와 내키지 않는 결혼을 했을 때는 자신의 의사로 두번째 부인을 얻음으로써 그 보상을 얻기도 한다.

   

사촌결혼 풍습은 크게 가족간 연대의 강화, 상속에 따른 재산권 보호, 결혼 후의 원만한 가족관계의 기대, 과다한 결혼지참금 지불이라는 경제적 압박 해소라는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남녀가 철저히 분리되고 교제가 통제된 사회구조에서 사촌누이는 내외하지 않고 자유로이 교통할 수 있는 유일한 근친 이성이라는 현실적 측면도 강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는 대가로 신부측에 일정한 재화를 지불하는 마흐르제도는 이슬람 이전 아랍사회에서도 잔존하던 유습이다. 애초에 마흐르는 부족이나 가문간 연대 표시를 위한 기능이 강했으나, 이슬람 이후 이 제도는 종교적인 강제규범으로 승화되어 순수하게 이혼이나 재해시에 여성을 위한 최소한의 복지금의 의미로 정착되었다. 따라서 마흐르는 남편과 함께 사는 동안에는 친정에서는 관리하고, 필요시에 여성에게 전달된다. 친정에서는 이 돈을 임의로 처분할 수 없도록 이슬람법으로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이슬람에서의 죽음과 장례

   

이슬람에서의 죽음이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과정으로 간주되어 영원한 삶에 이르는 교량으로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에 기쁨으로 본다. , 내세는 이승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차원적 삶의 양태가 보장되는 곳이다.

   

이처럼 이슬람교에서 죽음은 이승과 저승의 매듭이고, 새롭고 영원한 삶에 이르는 교량이다. 따라서 죽은 자를 화장하는 경우 영혼의 안식처가 소멸된다고 보아 매장하여 무덤이라는 영혼의 거주공간을 만들어 주도록 가르친다. 나아가 영혼이 분리된 이후에도 육체와 영혼간의 사랑은 끝나지 않고 그후로도 상당기간 지속된다고 보기 때문에 사체(死體)에 대한 손상이나 무덤 위를 밟고 다니는 행위는 금기시된다. 이런 이유에서 이슬람사회에서의 장례의 특징은 빠른 매장(보통 24시간 이내), 간단하고 엄숙한 상례(喪禮), 내세에 대한 강한 믿음 등으로 규정된다.

   

자신의 죽음을 인지한 자는 세정의식을 행하고 얼굴을 메카 방향으로 향한 상태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샤하다’(신앙고백)를 낭송한다. 그럴 만한 기력이 없는 상태에서는 가족이나 친지들이 샤하다를 낭송하여 들을 수 있게 한다.

 

 

사자(死者)는 얼굴이나 머리를 메카로 향하게 한 다음 우선 눈을 감기고 입을 다물게 한다. 발목을 묶고 두 손은 가슴 위에 놓는다. 가족이나 무가실’(장의사)이 사체를 향료를 넣은 비눗물로 세정한 후 염()을 한다. 이때 남편이 아내의 시신을 혹은 아내가 남편의 시신을, 세정하는 것은 허용된다. 고인의 머리털과 체모를 깎는 풍습이 일반적이다. 그런 다음 솜으로 입과 귀·코 등을 막으며 염습을 하고 하얀 무명천이나 자루를 이용해 한 겹 또는 여러 겹으로 둘러싼다. 이때는 하나의 천을 사용하며 천을 서로 연결해 쓰지 않는다. 흰색이나 초록색 수의를 입히기도 한다.

  

임종 순간에는 통곡으로 애도가 시작된다. 죽음을 알리기 위해 즉시 부고를 하되, 큰 소리로 울거나 비탄에 젖어 울부짖거나 뺨을 때리고 옷을 찢는 등의 행위는 이슬람 이전의 관습으로 금기시된다. 다만 조용히 흐느끼는 행위에 대해서는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는다.

 

 

장례 절차는 아침에 시신(屍身)이 집을 나설 때 모든 친지와 이웃이 상여꾼이 되어 모스크까지 간다. 가까운 모스크에서 홀수 열을 만들어 보통 낮예배에 이어 장례예배를 마친 다음 장지로 향한다. 상여꾼을 별도로 고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이것은 강력한 사회연대 의식의 표현이다. 영구행렬의 맨 앞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샤하다를 읊으며 걸어가고 그 뒤로 죽은 사람의 친구들과 초대된 사람들이 따르며 그 뒤에 까리(꾸란 독경사)들이 장례와 관련된 꾸란 구절들을 낭송하며 따라가고 마지막으로 어린아이들과 관 그리고 곡하는 여자들이 뒤를 따른다.

   

시신이 도착할 때가 되면 이미 무덤은 매장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고, 시신은 관 없이 매장한다. 사람 키 높이로 비교적 깊고 넓게 판 묘실에 얼굴을 메카 방향으로 향하게 안치하고, 하얀 천으로 싼 시신 위에는 아무 것도 덮지 않은 상태에서 공간을 두고 그 위를 큰 돌이나 석판으로 덮는다. 그리고는 흙을 다져 봉분 없이 지표면보다 약간 높게 평분을 만들고 표식을 한다. 비문을 세우기도 하는데, 여자의 경우 남편의 이름 대신 친정 아버지의 이름을 표시한다. 그런 다음 장례행렬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하나씩 묘지 위의 흙을 어루만지며 고인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눈다.

  

화장하지 않고 매장하는 풍습은 내세에서 영혼과 함께 육신도 부활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묘실은 3~4명을 매장할 정도로 넓게 파는데, 한 세대가 지나면 한 무덤에 또 다른 가족을 매장하는 복장(復葬) 관습 때문일 것이다. 묘소에 집을 짓고 비석을 세우는 것은 일반적으로 금지되었는데, 후일 아랍 이외의 지방에서 왕묘나 성자들의 묘소에 대규모 묘당을 짓는 유행이 생겨났다.

  

장례식 당일에는 고인의 집에서 일절 음식을 만들지도, 대접하지도 않는다. 음식은 모두 동네 사람들이 분담하여 만들어 온다. 장례후 첫 3일간 밤새 꾸란을 낭송하는 관습이 일반적이고, 지역에 따라 3일째, 40일째, 1년째 가족들이 고인의 추모집회나 기도 의식을 거행하기도 한다. 매장후 3일째 되는 날 무덤에 가서 꾸란을 외우는 추모의식을 갖기도 한다.

   

다음날은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무덤을 방문하고 그 음식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추모의식을 반복한다. 이러한 행위는 장례후 하루가 되면 영혼은 육체를 완전히 떠나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대기 장소로 이동하지만, 처음에는 매주 금요일마다 자신의 무덤으로 되돌아온다는 민간신앙 때문이다. 그 영혼들은 주로 금요일 오후예배 이후 무덤으로 돌아와 육체에 접목돼 밤새 지내다 일출과 함께 돌아간다고 믿고 있다.

   

통상 장례식후 40일간 추모의례가 다양한 형태로 지속된다. 유족들은 화려한 차림을 피하면서 주로 금요일에 가족과 친지가 모여 음식을 장만하고 꾸란을 독경하는 주기적인 추모의식을 행한다. 1주기가 돌아올 때까지 가족들은 근신하는 자세로 경건하고 검소한 일상을 보낸다. 추모 기간 동안 집에서 음주가무는 물론 축제, 결혼식 같은 세속적인 모든 즐거움은 유보되며 붉은색 옷이나 진한 화장, 천박한 행동은 삼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마을 사람들을 초대하여 1주기 추모식을 치름으로써 고인을 위한 일련의 통과의례는 끝난다.

 

이슬람 세계의 축제문화

   

이슬람 세계의 축제와 명절은 아랍 이슬람권이나 비아랍 이슬람권, 순니나 쉬아 등의 종파나 정파에 관계 없이 모두 이슬람력에 따라 정해진다. 나라마다 고유의 국경일이 있으나 모든 무슬림들이 함께하는 휴일과 명절로는 금요일의 집단예배일, 이슬람력 9월 라마단월의 단식이 끝난 후인 101일에 시작되는 단식을 깨뜨리는 축제인이들 피트르축제, 그리고 이슬람력 12월 성지순례를 끝내고 양을 희생시켜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는 축제인 이들 아드하축제가 있다. 특히 위의 두 축제는 종교적 의무의 수행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며 무슬림들의 사회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들 피트르축제는 이슬람의 5대 의무 가운데 하나인 단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무슬림들은 이슬람력 9월인 라마단 달의 한달간을 종교적 의무의 수행을 위해 단식을 행한다. 라마단 성월의 단식이 끝나면 3일 간의 명절이 이어지는데, 이 축제가 바로 단식을 마치는 것을 축하하는 이들 피트르이다.

   

축제 첫날 무슬림들은 목욕재계하고 가장 좋은 외출복을 찾아 입고 아침 일찍 가까운 모스크로 향한다. 축제 예배에서 설교를 듣고 집으로 돌아와 준비한 성찬을 들며 단식을 마무리한다. 이 기간중 친척과 친지들을 방문하여 인사를 드리고 선물을 교환하는 방식은 우리의 명절과 너무도 흡사하다. 또 이때 대규모의 귀성이 이루어지고 조상의 묘를 찾아 추모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모든 무슬림은 이 라마단달에 평상시 무슬림이라는 사실을 잊고 지내며 종교적 수행을 게을리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단식을 행함으로써 스스로 무슬림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또 이슬람으로 맺어진 공동의 유대감과 결속력을 느끼게 된다.‘이들 아드하축제는 이슬람의 한 기둥인 성지순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성지순례는 경제적 능력과 신체적으로 건강한 무슬림이면 남녀를 막론하고 일생에 한 번은 반드시 실행해야 할 의무사항이다.

 

  성지순례는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있는 하람성원에 가서 순례 의식을 행함을 말한다. 성지순례는 이슬람력으로 10월부터 1210일까지 행해지는데 실제 의식은 128~10일 이루어진다. 이 기간 외에 행하는 성지순례는 우무라라고 불리는데 이것은 의무사항이 아닌 자발적인 종교행위이다.성지순례를 통하여 세계의 모든 무슬림들은 형제애와 평등사상의 실현을 목격하게 된다. 각 국가, 사회 각계 각층에서 창조주의 부름에 응하여 성지순례에 나선 무슬림들은 같은 색깔과 같은 형태의 의복을 입고 같은 규정, 같은 예식, 같은 시간, 같은 목적을 하나님께 간구한다. 이 기간에는 빈부의 구별, 상하의 구별, 지위의 구별 없는 보편성과 평등사상이 고취되며 서로를 함께 느끼는 형제애가 조성된다.

   

성지순례달인 핫즈달 10일에 순례객은 메카에서 그리고 세계의 모든 무슬림들은 가정에서 양이나 다른 동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희생시키게 된다. 이 날을 이들 아드하라 하며 무슬림들에게 가장 큰 축제의 날이 된다. 이 축제를 통해 무슬림들은 형제애와 공동체적 연대감, 평등사상을 경험하게 된다.

 

  이슬람권의 양 축제는 종교적, 사회적인 면에서 이슬람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라마단월의 단식기간을 맞이하여 대부분의 관공서나 직장의 근무시간이 단축됨에 따라 생산량도 줄어든다. 이와 반대로 가족과 친척들 간의 빈번한 왕래와 식사로 인해 소비는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 소비와 생산의 불균형이 물가상승이라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렇게 오른 물가는 라마단월이 끝난 후 예전의 물가로 다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상승한 상태로 계속 유지되기 때문에 라마단달의 물가상승률이 이슬람국가에서의 1년간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의 척도다.

 

 

이들 아드하축제는 성지순례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한 희생의 재물로 양을 잡아 바친 것을 본받아 모든 성인 남자 무슬림들은 각자 양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게 된다. 따라서 이슬람국가에서 축제에 소요되는 양의 수는 실로 엄청나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 축제를 통하여 농촌경제는 큰 활력을 얻게 된다는 점이다. 매년 한차례에 걸쳐 도시의 돈이 농촌으로 유입되며, 농촌은 이 시점을 기준으로 1년간의 경제생활을 계획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도시와 농촌간의 경제적 교류를 하게 되는 것이다.

 

 

손님 접대문화

 

 

이슬람에서는 손님이 방문했을 때 정성을 다하여 극진히 대접하는 것을 무슬림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아랍 유목민의 전통에서 유래된 것으로, 유목민들의 손님에 대한 환대는 숭고한 덕목으로 간주되며 극진한 환대를 베푸는 것이 자신의 품격과 위신과 명예를 높인다고 생각한다. 환대의 관습은 사막이라는 절박한 환경에서 누구나 길을 잃어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될 때를 대비해 길 잃은 자에게 환대를 베풀어 미래에 닥칠지 모르는 재앙을 피해 나가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될 수 있다.

 

 

환대의 규율에 따라 도망자라 할지라도 손님이 되면 주인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그를 지켜 주어야 한다. 주인은 객을 맞이하여 그의 체력 회복을 돕고 보호해야 한다. 오늘날에도 아랍인들의 집이나 가게 앞에는 물이 가득 든 항아리와 컵을 놓아두어 목마른 자들로 하여금 마시게 하는데, 이는 이러한 손님 접대문화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환대의 관습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전통으로 유지돼 친지나 친구 간의 상호방문이 매우 빈번하고 정해진 약속 없이도 비교적 자유로이 이루어진다. 찾아온 손님에게 주인은 최선을 다해 환대하며 자신이 급한 일이 있다 할지라도 손님에게 불쾌한 기분을 주지 않기 위해 손님과의 시간에 더 큰 비중을 둔다. 이러한 손님 환대에 대한 관습은 집의 구조에서도 잘 나타난다. 무슬림 가정의 대부분은 커다란 홀을 가지고 있다. 이 홀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것으로써 가족들의 방보다 우선하여 비중을 두고 있다.

 

 

손님 접대문화는 타인에게 물질을 베푸는 관습을 낳게 되었는데, 흔히 사다까로 불리는 헌금은 무슬림들에게 흔한 일이며 길거리나 사원 앞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푸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또한 결혼·장례·할례·라마단 때의 식사시간, 그리고 희생제 등 여러 행사를 맞이하여 주인이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타인에게 물질을 베푸는 관대함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아직까지 이슬람사회가 부의 불균형한 분배가 만연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제스처 문화

 

 

무슬림들은 받은 인사말과 같거나 더 좋게, 또는 더 길게 답하여 성의껏 인사를 나눈다. 인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답하는 것을 큰 미덕으로 여기므로 상대방의 첫 인사에 답하지 않거나 소극적으로 임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언어를 통한 인사 말고도 무슬림들은 제스처를 통한 인사를 자주 하는데 그들과 빠른 시간 안에 거리감을 줄이기 위해 이 제스처를 이용한 인사법은 매우 유용하다. 인사법은 문화권마다 다양한데 아랍인들의 인사법은 동작이 큰 것이 특징이다. 오랜만에 남자 친구나 귀한 손님을 맞이할 때는 껴안고 양 볼에 입을 맞춘다. 이러한 제스처는 친밀감을 표시하는 인사법이다.

 

 

또한 무슬림들은 대화중에 자신의 감정이나 행동에 관한 표시를 나타내려고 할 때가 많다. 특히 외국인과 이야기할 때는 자신의 생각을 인상지우려고 노력한다. 이 때문에 그들은 큰 목소리로 말하며 크고 과장된 몸짓을 사용한다. 또한 대화할 때 상대방의 눈을 주시하거나 상대방의 어깨를 두드리며 팔을 잡거나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대화 상대와 몸이 접촉되기를 원한다.

 

 

아랍인은 한국인들과 달리 허리를 굽히거나 머리를 굽혀 인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랍인들의 종교적 배경에서 관습화된 것으로, 하나님 외에는 허리나 머리를 굽히거나 엎드려 절하지 않는다. 또 아랍인에게 왼손을 내밀어서는 안 된다.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에서는 오른쪽은 선과 행운, 왼쪽은 악과 불행의 상징으로 해석하고 있다.

 

 

만약 왼손을 내밀면 그것은 당신의 눈은 사시가 된다는 불길한 뜻을 전하는 것이므로 삼가야 한다. 이와 더불어 음식을 먹거나 마실 때, 선물을 주고받을 때 등 좋은 일일 때는 오른손을 사용하고, 소변이나 대변을 마친 후 그곳을 청결히 할 때나 코를 풀 때 등 더러운 일일 때는 왼손을 사용한다. 따라서 인사할 때는 반드시 오른손을 사용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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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스크(Naskh): 나중에 받은 계시에 의하여 먼저 받은 계시는 취소되었다

 

꾸란은 무함마드가 A.D. 610년부터 죽기까지 23년 동안 받았다는 내용이다. 꾸란 안에 같은 주제에 대하여 서로 다른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꾸란 2240절에 의하면 과부는 1년 이후에 재혼이 가능하다. 그런데 같은 꾸란에 남편이 죽으면 4개월 10일 이후에 재혼이 가능하다는 내용도 있다. “너희 중에 누가 죽어서 과부를 남기면 과부들은 재혼하기 전에 4개월 10일을 기다려야 한다. 그들이 이 정해진 기간을 지키면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을 너희는 비난하지 말 것이다(꾸란 2:234).” 그렇다면 남편이 죽고 언제 재혼이 가능하가? 이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나스크 교리가 생겼다. 꾸란에 기록된 계시는 바뀔 수 있으며, 계시가 바뀔 때는 나중에 받은 계시가 먼저 받은 계시를 취소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받은 계시는 이슬람 신학에 의하면 취소된 구절이 된다. 이에 대하여 꾸란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만일 우리(알라)가 원하였다면 우리가 너에게 계시한 것을 없앨 수 있다(꾸란 17:86).”, “우리가 어느 한 구절을 다른 구절로 대체할 때 알라는 그가 보내는 것을 더 잘 알고 있다(꾸란 16:101).”

 

그래서 꾸란은 메카에서 12년 동안 받은 메카 계시,

그 이후에 메디나에서 10년 동안 받은 메디나 계시로 나뉜다.

메카에서는 무함마드가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서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꾸란 2:256)”

종교는 강요되어서는 안 되고 자유가 보장되었다.

그런데 이 내용이 메디나로 오면서 바뀌게 된다.

메디나로 온 무함마드는 27개월이 지난 후부터는 칼을 들게 된다.

그리고 메카로 가는 대상들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종교에 강요가 없다던 평화의 계시칼의 계시로 바뀌었다.

 

이교도를 발견하는 대로 살해하라(꾸란 9:5)”,

불신자를 만나거든 목을 쳐라(꾸란 8:12)”

따라서 평화에 관한 계시는 나중에 받은 칼의 계시에 의하여 취소되는 것이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메카에서는 종교의 다름을 인정하였고, 평화를 이루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무슬림은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주장했다(꾸란 29:46).

그러나 메디나에 오면서 다음과 같은 구절로 바뀐다.

 

알라와 내세를 믿지 아니하며 알라와 메신저가 금기한 것을 지키지 아니하고

진리의 종교를 따르지 아니한 자들에게

비록 그들이 성서의 백성이라고 하더라도 항복하여

지즈야를 지불할 때까지 지하드를 하라

그들이 스스로 저주스러움을 느끼리라(꾸란 9:29)”

 

소동이 없어질 때까지 그리고 종교가 알라에게로 귀의할 때까지

그들과 싸움을 계속하라(꾸란 8:39)”

이 구절들에 의하여 기독교인과 유대인에 대한 태도가 바뀐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바뀌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바뀌지 않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그런데 이슬람의 진리인 꾸란의 계시는 상황에 따라 계속 바뀌어 갔다.

 

이슬람 초기에 무함마드가 사탄의 계시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은 메카의 쿠라이시 부족과 타협하기 위하여,

메카의 부족신이였던 알라에게 세 명의 딸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계시였다.

그러나 그 계시가 돌연 취소되었다.

무함마드 자신이 사탄의 계시를 받았기에

알라에게 혼이 나고 그 계시가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가지고 인도계 영국 작가였던 살만 루시디(Salman Rushidy)

악마의 시(Satanic Verses)’라는 책을 썼는데,

인하여 무슬림들에게 20년 이상 살해의 위협 속에 지내게 되었다.

또 그 책을 번역한 사람들이 일본과 이탈리아에서 암살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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