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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성경 번역자요, 전도자인 서상륜(1849~1926)

세계 선교사상 유래가 없는 업적을 남긴 서상륜은 1849년 7월 26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서석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그의 출생일을 7월 19일로 보는 학자도 있다).
그의 가문은 생활이 유족한 부유층에 속하였으나 부친이 콜레라로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뒤를 이어 모친마저 별세하였다. 그 후 가세가 기울고 서상륜과 서경조형제의 앞길 에는 암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부모의 별세로 기울어진 가세를 책임져야 하는 장남 서 상륜은 20여세의 젊은 나이로 상업에 종사하였다.
그는 국경을 넘어 만주를 왕래하며 홍삼을 판매하는 매약행상을 하였다. 그는 30세 되던 해에 열병에 걸려 생명에 큰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의료선교사가 경영하는 병원에 입원 하였다. 이 병원에서 그는 ‘한국의 안드레’라고 할 수 있는 매킨타이어에게 전도를 받았다. 정성어린 간호와 치료로 완쾌되자, 서상륜은 약속대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세 례를 받았다. 서상륜이 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만주에서는 백홍준, 이응찬 등이 매킨타이어 에게 전도를 받고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 번역도 착수하고 있었다. 세례를 받 은 서상륜은 매킨타이어의 집에 유하면서 성경 번역에 뒤늦게 참여하였다.
1882년 가을에 이르러 누가복음서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으니 이것이 한글로 된 최초의 복 음서이다(‘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 이어 1883년에는 요한복음과 사도행전 3천부를 간행하 였으며 1884년에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심양의 문광서원에서 발간했다. 1887년에 이르 러서는 마침내 <예수셩교젼셔>라는 책명의 신약성서 전부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간행 과정에서 서상륜은 성경 번역뿐 아니라 목활자의 각인, 식자공, 인쇄공의 일 도 맡아 하였다. 이 성경을 흔히 <로스역 성경>(Ross Version)이라고 한다.
성경을 번역 출판한 서상륜은 우선 남만주 일대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민경배 교수 에 의하면, 서상륜은 성경을 가지고 다니면서 원근을 가리지 않고 남만주 지역에 흩어져 사 는 동포에게 성의껏 반포하였다.
위험이 뒤따랐던 그의 행로에는 모험도 많았다. 한 번은 압록강을 건너 입국하다가, 그 짐 속에 있는 성경이 발각되어 생명의 위험까지 직면한 일도 있었다. 다행히 서상륜은 조선 관 헌의 도움을 받아 성서 10권만을 가지고 밤중에 도망하는데 성공하였다. 서상륜이 성경을 국내에 갖고 들어와 널리 반포한 공로는 매우 컸다. 참으로 그의 발걸음은 큰 업적을 남겼 다. 그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중심에 ‘성경말씀’이 장중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초석을 놓았 던 것이다.
또한 서상륜은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 설립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목사가 새문안교회를 창성했는데 그때 세례 받은 14명의 신자 들이 모두 서상륜의 전도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었다. 말년에는 동생과 함께 설립한 솔내 (소래 교회로 내려가서 교회를 섬기는 일과 그 마을을 기독교화 하는데 전념하던 중) 1926 년 1월 별세하였다.(참고: 민경배 저, 한국기독교회사)
송광택 목사(서울반석교회 협동목사) /

* 출처 : 온누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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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특집다큐 한국 기독교 선교의 개척자 이수정 [영상보기]

선교사들의 입국과 이수정

 

 1882년 미국과 영국에 이어 1886년에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여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1884년 알렌이 그 이듬해에 언더우드와 아펜질러, 스크렌톤이 입국하여 선교활동르 한다.

 1, 조선의 첫 선교사 알렌

 알렌은 마이애미 의대를 졸업하고 중국선교를 하다가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이며 공식적으로는 미국 공관의로 조선에 입국한다. 선교사로 입국한 것도 아니고 공개적으로 선교가 허용된 것이 아니므로 조용히 가정에서 가족들과 예배를 드리던 중 1884년 갑신정변이(급진적인 개화파인 김옥규느 서재필, 박영효 등이 일본을 등에 업고 쇄국정책을 내세우는 보수파이며 지권당을 제거하려다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고 살아남은 박영효와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보수파인 민영익과 친분이 있는 이수정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죽이려고 이수정이 조선으로 귀국하는데 한 요인이 된다.)  일어나고 이 때 민비(명성황후)의 친척이며 보수파인 민영익도 자객의 칼에 7군데 맞아 혈관이 끊기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칼에 맞아 찢어진 상처와 끊긴 혈관은 한의들이 할 수가 없었다. 뮐렌도르프의 소개로 알렌은 민영익을 명주실로 꿰매고 약을 발라 외상을 석달이나 성심껏 치료해 주었다. 이 일로 민영익 뿐 아니라 고종과도 원만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엇고 그 결과 광혜원(은헤를 널리 베푸는 집이라는 뜻으로 고종이 지어줌. 후에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뀜, 광혜원자리는 갑신정변 떄 죽은 홍영식의 집이었다) 이라는 한국 최초의 근대병원을 설립하게 된다.

 

언더우드(광혜원에서 화학을 가르침), 스크렌톤, 앨러스(의료 선교사)모두 광혜원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알렌 선교사는 선교본부와 관계를 끊고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의 서기관이 되어 달은 유럽나라들처럼 제국주의의 일환으로 와서 조선의 잇권을 빼앗기 위해 열을 올리는 미국의 손, 발이 되어 일을 함으로 지금도 믿지 않는 역사학자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2, 한국 선교의 개척자 언더우드

 알렌이 1884년에 입국한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면 그 이들해 입국한 언더우드는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함께 개신교를 대표하는 선교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언더우드는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아버지와 신앙심 깊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10살이 되었을 때 언더우드는 형과 함께 카톨릭에서 운영하는 남자 기숙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신앙이 남달랐던 형제는 자기전에 늘 기도했다. 다른 학생들이 놀림에도 굴하지 않고 기도하던 형제를 따라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릉 학생들도 기도하는 습관이 기숫사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후 언더우드의가족은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며 우여곡절 끝에 신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이미 신학교 재학 중 인도선교 준비를 하였으나 아펜젤러를 만남으로 한국선교에 대한 열망에 불탔고 '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라는 음성을 듣고 1885년 일본에서 이수정을 만나 한국어을 배우고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 마가복음을 들고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와 신혼여행도(명성황후 시의였던 의료 선교사 릴리아스 호톤양과 결혼함) 전도여행으로 떠날 만큼 복음의 열정으로 살았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선교사로서, 학자로서, 교육가로서, 성경번역자로, 편집가, 여행가. 정치가로 평화의 사도로서 일생을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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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문 ♡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선교사님들의 피와 땀으로 한국에 많은 믿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세계 제2의 선교사 파송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많은 선교사님들이 있으나 그 중에  중요한 인물이 바로 언더우드 선교사님이시다

이분의 기도와 헌신이 있었기에

기독교한국이 이처럼 세계선교에 우뚝서게 되었다고 봅니다.

오늘 제가 소개하는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조선을 위한 기도입니다.

 

제목 : 뵈지 않는 조선의 마음

 

주여 !!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 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어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 

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 

오직 제 읻음을 붙잡아 주소서

아멘 !!

 

미국 북 장로교회 해외선교부는 1884728, 언더우드를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했고,

언더우드는 1111일 목사 안수를 받고 곧바로 교단을 옮겼다.

그는 뉴욕에서 출발하기 전, 미국을 시찰 중인 일본 군사시찰단을 우연히 만났으며,

군사시찰단과 같이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출항하는 우편 증기선 '시티 오브 뉴욕'에 승선해

1885125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 한국 선교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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