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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제목: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말씀: 암 9:1-15


아모스서의 말씀을 읽으면 심판과 징계의 하나님이 무섭고 가혹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특히 9장 1-5절 말씀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죽이리니 그중에서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칼을 명령하여 죽이게 할 것이라"은 섬뜩하기마저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렇게 무섭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본 마음은 죽이고 멸망시키고 싶은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고 회복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타락시키고 파멸시키는 죄의 속성을 정확히 아시기에 죄를 절대로 용납하실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죄에 엄격하신 것은 하나님 사랑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절대로 적당히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들 가운데 있는 악함과 죄와 더러움의 껍질을 벗기시기 위해 체질하시며 연단하십니다. 9절에 이러한 하나님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보라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서 체질하기를 체로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입니다.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에 하나님의 속마음이 묻어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11-15절 말씀처럼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날에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다시 회복시키고", "그들이 만국 백성을 기업으로 얻게 하겠다."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너무나 쉽게 포기하곤 합니다. 우리 주변 사람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 징계하시기는 할지언정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는 내 생각, 내 기준으로 마음대로 단정 짓고 포기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 때로는 징계하고 경고하면서도 회복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고 기다려주는 마음,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마음, 이 마음으로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품을 수 있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내 삶을 향해 꿈을 가지고 계시고 한 번도 그 꿈을 포기하신 적이 없으신데 나는 그 꿈이 희미하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대충, 살아지는 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요동칠 때가 있다. 현재의 내 모습, 현실 상황에 메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다시 힘을 내야겠다. 사춘기 딸아이를 바라볼 때도 오늘의 말씀이 큰 힘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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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 후의 삶이 준비되셨습니까?

지옥은 실존합니다!

 

 

 


요즈음 기도중에 성령께서 자꾸 지옥에 대한 경각심과 관련된 설교와 영상를 보고 느끼게 하셔서 왜 자꾸 이런 설교와 메세지를 허락하시는가를 여쭈어보았다.


성령께서는 "끝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은 귀가 가리워져 복음의 본질을 다루는 말씀을 도외시하고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다. 죽음 이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으며 비롯 교회에 출석하고 있어도 진정으로 거듭나지 못한 자는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이며,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지옥은 실존하며 회개치 못한 영혼은 마치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들이듯 지옥은 죄를 빨아들이는 자석같아서 육신의 죽음뒤에 그 영혼을 빨아들인다.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기회는 육신의 생명이 있을때 뿐이니, 절박하고 엄중한 마음으로 너희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가를 확증해보고 호리라도 죄가 있다면 회개하고 돌이키라. 지금의 이땅에서의 시간은 덤으로 주어지는 은혜의 시간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복음의 본질인 십자가 구속, 회개, 천국, 지옥, 재림, 심판의 메세지가 희소한 이 시대에 이 영상이 아직도 믿지않는 사람들과 교회내 거듭나지 못한 교인들에게 도전과 은혜의 기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사람이 두번 태어나면 한번만 죽고 한번 태어남으로 그친다면 두번 죽습니다. 육체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거듭나지 못한 영혼은 육체는 물론 사람의 본체인 영혼이 죽습니다. 부디 이 영상을 흘려보지 마시고 꼭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살아 있는동안만 당신이 호흡할때만 입니다 부디 이 영상을 보게 하시는 이 순간이 전능자이신 예수님이 당신에게 허락하시는 영생초대의 기회로 받아들이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영상 유튜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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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인 전도란?

 


전도의 정의:


21세기를 사는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갖고있는 가장 잘못된 개념중 하나가 전도일 것이다.
내가 이 자리에서 "전도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본다면 열명중 아홉명은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입니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성경이 증거하는 전도의 개념이 아니다.
성경은 "전도"라는 단어를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라 정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도의 성서적 뜻은 무엇인가?
"전도"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선포하다'는 뜻이다.
전도란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란 말이다.


선포의 내용:


그렇다면 무엇을 선포하는게 전도인가?
"전도"라는 단어는 헬라어 성경 60구절 속에서 28개의 다른 형태로 61번 등장한다.
이러한 단어의 쓰임새를 분석하여 선포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총체적으로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이 발견된다.
"선포"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복음 사역과 연결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역은 12가지의 내용으로 구체화된다:


(1) 회개의 침례,
(2) 예수님의 심판,
(3) 예수님의 성육신,
(4) 예수님의 이름,
(5)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심,
(6) 예수님의 성자되심,
(7) 예수님의 복음,
(8) 예수님의 나라,
(9) 예수님의 기적,
(10) 예수님의 은혜,
(11) 예수님의 부활,
(12) 예수님의 말씀.
이 열두가지를 선포하는 것이 전도인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께 범죄한 죄인이기에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당신을 심판하기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당신의 죄를 담당케 하셨고, 당신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으며, 당신을 대신하여 지옥의 고통을 맛보게 하셨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삼일만에 부활시키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게하심으로써 당신의 부활을 예비하셨다.
당신은 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구원받는다.
그러니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과, 주되심과, 성자되심을 믿으라!
은혜의 예수님께서 당신을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하실 것이다!

이것이 선포의 내용인 것이다.


현재의 문제: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만난 21세기의 많은 전도자들은 이렇게 전도하지 않는다.
그대신 교회나가세요!
교회나가면 자녀가 잘될 것입니다!
교회나가면 만사가 형통하고 병이 낫고 문제가 풀릴 것입니다!
교회가면 친구들도 많이 사귈 수 있고, 공짜 점심도 먹을 수 있으며, 외로움을 달랠 수도 있습니다!
저도 교회에 나갔더니 건강해 졌고, 사업이 번성해졌으며, 자녀도 좋은 대학 갔습니다.
그러니 교회에 나가십시오!


말하며 전도한다.

마치 낚시꾼이 냄새가 구수한 깻묵을 바늘에 걸고 물속의 물고기를 낚듯이, 스파게티 소스를 파는 장사꾼이 소스를 팔기위해 통에 각종 장식을 달아놓고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하듯이, 그렇게 사람들을 꼬시려고만 한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그저 사람들을 구수한 말들로 꼬셔 무작정 교회로 데려오려고만 한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전도가 아니다.
전도란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탕발림말로 사람을 꼬셔 교회로 나오게 하는것이 전도가 아니다.
전도란 진리를 가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선포함으로써 죄인을 예수님의 몸인 교회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적 사역인 죄, 심판, 지옥, 회개, 구원, 천국등을 선포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사역이다.

질문 1: 이쯤에서 나에게 이렇게 묻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초면에 만나는 사람에게 죄, 죄인, 심판, 지옥이야기를 하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상식적으로 좋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좋은이야기만 하다가 성장한 후에 다른 이야기를 하는게 효과적입니다.

그렇지 않다.
이러한 발상은 세상의 마케팅 전략에 물들어버린 인본주의적 전도방식이다. 고린도후서 4:1~2는 이러한 발상을 이렇게 공격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전도의 직분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혼잡"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과일 장수들이 보기 좋은 과일을 맨 위에 놓고 아래에다가는 작은 과일들을 숨겨넣는 행위를 말한다.
이렇게 하는 행위는 하나니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인지라, 그렇게 전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전도할 적에 남들이 듣기 좋아하는 복이나, 상급이나, 천국이야기만 위에다 죽~ 늘어놓고, 죄나 지옥이나 심판에 대한 이야기는 살짝 가리며 전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대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다 들려 주라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혼잡"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포도주에 물을 탐으로 원래의 농도를 줄이는 행위를 말하기도 한다.
포도주에 물을 타서는 안된다.
포도주는 포도주 자체로 있어야지 물을 타면 본래의 맛을 잃고 싱겁고 맛없게 된다.
전도도 마찬가지이다.
불신자들의 비유를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심판과 지옥을 이야기 하지 않고 축복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은 복음을 희석시키는 행위라는 것이다.
절대로 이렇게 전도해서는 안된다.
말씀이 있는 그대로 전해질 수 있도록 있는 그대로 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진리를 잊어버렸다.
그들은 인본주의에 찌들어 있는지라 불신자들의 심기를 건들지 않기 위하여 될 수 있으면 지옥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심판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며 회개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오직 복이나 천국, 축복이나 형통등의 말로만 사람들을 꼬시려 한다.
이것은 전도가 아니다!
죄를 이야기 하지 않고 어떻게 십자가의 예수님을 설명할 수 있나?
심판을 이야기 하지 않고 어떻게 공의의 예수님을 설명할 수 있나?
지옥을 이야기 하지 않고 어떻게 천국의 예수님을 설명할 수 있나?
죄와 심판과 지옥이 없으면 예수님도, 십자가도, 부활도 필요없다!
죄와 심판과 지옥이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필요한 것이다.
고로 이 모든 것을 하나도 가감하지 않고 다 전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인 것이다.


질문 2: 이렇게 질문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가 준비도 안된 사람들이 그러한 말을 듣다가 거부반응을 일으키면 어떡합니까?
오히려 역효과가 납니다.
이는 미련한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다.
이 세상에 준비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어디에 있던가?
여러분들은 준비된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구원에 이르렀나?
아니지 않나?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분의 말씀이 순식간에 바람처럼 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구원에 이른것이 아닌가?
그리고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당연지사가 아니던가?
죄인이 죄성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 어찌 편안하게 들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진리앞에서 귀를 틀어막고 도망가고자 하는 것이 지극히도 당연하다.
게다가 죄인을 찔러 반응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하나님의 말씀이란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여 듣는 사람들의 심령속으로 들어가 죄성을 비수처럼 찌른다고 했는데, 말씀의 칼날이 내 심령속에 사정없이 와서 꽃히는데 어찌 꿈틀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예레미아가 전도할때 왜 사람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저넣었나?
에스겔이 전도할때 왜 사람들이 그를 핍박했던가?
사도 바울이 전도할때 왜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던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께서 전도하실때 왜 사람들이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나?
복음을 들은 불신자들이 거부반응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어두움 속에 살고 있는 벌레에게 빛을 비추어봐라.
꿈틀대며 그 빛으로부터 도망가기위해 발버둥을 친다.
이처럼 어둠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적 사역을 전했더니, 그들로부터 거부반응이 일어났던 것이다.
명심하라.
불신자들로 하여금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전하는 복음은 희석된 복음이요, 가감된 복음이라는 것을!


질문 3: 또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도 있다.

만약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너무 직설적이라서 불신자들의 심기를 건드려 마음의 문을 닫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이 역시도 인본주의적인 발상이다.
위의 질문은 우리가 걱정할 부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
우리의 사명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명이다.
우리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우리가 내 자신도 살리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살린단 말인가?
사람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의 사명은 그러한 하나님이 역사할 수 있도록 말씀을 정확하게 전하는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말씀을 혼잡하지 않게 충실히 전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사용하사 예정된 자를 부르신다.
고로 우리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이상, 듣는 자들이 구원으로 예정받은 자라면 그들은 반드시 돌아오고, 예정받지 못했다면 복음을 거절할 것이다.
고후 2:15-17를 들어보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우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보라.
우리가 복음을 정확하게 전할 때 두 가지의 일이 일어난다.
구원을 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은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고, 망하는 자들은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른다.
이것이 참된 전도의 목적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전도란 예정된 자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 들여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게 하는 것이고, 예정받지 못한 자로 하여금 복음을 거절하여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작업이다.
사도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며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다"고 말했다.
우리의 사명을 말씀을 심고 물을 주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명은 그 사람을 자라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처럼 행동하려고 하기 때문에 복음을 희석시키는 것이다.

고후 4:3도 보라.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이 얼마나 명확한 계시인가?
우리가 복음을 열심히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신자들이 그 복음을 받지 않는다면 그들은 망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남을 구원시킬 수 있다고 착각하니까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더 말하지만 성경은 우리더러 죄인을 구원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일은 딤후 4:2의 말씀처럼 오로지 하나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여기에 "전파하라"고 번역된 헬라어도 케루쏘이다.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것이다.


질문 4: 이렇게 묻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불신자들이 일단은 교회에 와야 말씀을 듣고 구원받을 것 아닙니까?
불신자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 뭐 그리 문제가 됩니까?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다.
그러나 이도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도는 교회 안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밖에서 하는 것이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며 머리되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공동체이지, 불신자를 초대하여 전도하는 곳이 아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면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지 않는 자를 절대로 교회당 안으로 데려오지 않았다.
함께 예배드리지도 않았다.
교회란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산자를 위한 공동체이지 죽은자를 살리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교회당 안에서 예배드렸고, 교회당 밖에서는 전도했다.
그래서 밖에서 구원을 얻은 성도들을 교회당으로 데려와 함께 예배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전도의 방법이다.

그러나 21세기의 많은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방법을 무시한다.
'일단은 교회로 불러놓고서 교제를 통하여 친목을 다진후 마음이 열려있는 상태에서 복음을 전하자'고 말한다.
그래서 "열린 예배"따위나 "알파코스"등을 통하여 교회와 세상이 별 차이가 없다는 식의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나서 복음을 전하려 한다. 교회에서 가요를 부르고, 세상의 프로그램을 도입하며, 세상과 교회는 별로 다를 것이 없으니 너무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말라는 식으로 어필을 한다.
그리고 교회로 불러모은 불신자들의 비유를 맞추며 굽실댄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이 아니다.
도대체 성경 어디에 하나님의 말씀 하나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기에 부족하기에 "열린 예배"나 "알파 코스"와 같은 것을 사용하라고 되어있는가?
성경 어디에 불신자들을 끌어모아 그들의 비유를 맞추며 기독교는 그렇게 폐쇠적인 곳이 아니라고 거짓말하라고 되어있는가?
사람의 마음은 우리가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적 사역을 선포함으로써만 열린다.
그리고 그 일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계시하는 구절이 있다.
행 2:14이하를 보면 교회 밖에서 이루어지는 베드로의 선포가 나와있다.
베드로의 선포를 보면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과 죄로부터 자유하게 위해서는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구원이 시작된다는 사실이 계시되어 있다.
예수님의 케리그마적 사역을 선포한 것이다!
그는 사교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인간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운동이나 어떠한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지 않았다.
그는 밖에 나가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했다.
그랬더니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여기에 "마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심령의 '중심'이라는 뜻이고 "찔리다"고 번역된 헬라어는 '뚫리다,' '꿰찔리다'는 뜻이다. 베드로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중심에 쉬지않고 뚫리고, 꿰찔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역사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의 심령에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죄를 짓던 사람들이 갑자기 마음이 찔리기 시작한 것이다.
좌우에 날선 양날검보다도 더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이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죄인들의 중심에 사정없이 꽃히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는가?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리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의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순서가 보이는가?
말씀이 먼저왔고, 그 다음에 구원이며, 그 후에 성도의 교제다.
이것이 성경적인 순서이다.
교제가 먼저 오지 않는다.
구원이 먼저 오지도 않는다.
말씀이 먼저요, 구원은 그 다음이며, 교제는 가장 나중이다!
그러나 현재 대다수의 교회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한다.
일단 불신자들을 교회로 불러 교제하게 한 후, 그 후에 구원을 선포하고, 그 다음에 말씀을 전한다.
이것은 인간이 고안해낸 인본주의적 순서이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순서가 아니다.
이렇게 인본주의적인 순서를 따르니까 교회에는 죽은자들로만 꽉 차서 바른 예배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질문 5: 마지막으로 이렇게 질문하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에이~ 너무 원론적으로만 하지 맙시다.
그렇게 원론적으로만 하면 교회가 성장하지 않습니다.

아니다.
교회는 원론적으로만 해야 한다.
원론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망가지는 것이다.
교회는 사업터가 아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위에만 세워지며,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운행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완성된다.
아무리 교회가 양적으로만 부흥하면 뭐하나?
그 안에는 죽은 시체들이 득실대는데?
참된 전도가 아닌 다른 것으로 그들을 모은 결과이다.
명심하자.
교회에서는 성경이 열려야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설교되어져야 하며, 그 분의 가르침이 가르쳐져야 한다.
바로 그럴 때 교회는 성장하는 것이다.

ㅡ이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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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큐티]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로마서 2:45)

 

“Or do you show contempt for the riches of his kindness, tolerance and patience, not realizing that God’s kindness leads you toward repentance? But because of your stubbornness and your unrepentant heart, you are storing up wrath against yourself for the day of God’s wrath, when his righteous judgment will be revealed.”(Romans 2:45)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오랫동안 참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작정 목적 없이 방관하시지는 않습니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나의 행동이 옳다는 것을 항상 증명해주지 않습니다. 잘못된 일을 계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와 인내를 멸시하는 행동이 됩니다.

 

은혜스런 찬양과 설교를 원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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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특강 / 종말론적 신앙이란?

 

"사랑하는 자녀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2,3)

 

다섯 달만 연기된 종말

 

미국 패밀리라디오 운영자 해롤드 캠핑이 지구의 종말이 닥친다고 예언한 521일이 아무 문제없이 자나갔습니다. 그러자 영적인 종말은 그날부터 시작되어서 눈에 보이지 않게 진행되다 (금년 1021일이 )진짜 마지막 날이 될 것이라고 수정했습니다. 며칠 동안 잠적했다 고작 꺼내 놓은 변명치고는 너무 초라하다 못해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이 거짓 예언에 속아 자살한 자가 미국에서 2명이고 정신적 경제적 피해를 입은 자는 부지기수입니다. 패밀리라디오 측에선 경제적 피해는 가능한 보상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실현이 의심스러운데다, 그 정신적 영적 피해는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지 참으로 걱정입니다.

 

예수님이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다 구덩이에 빠지리라"(15:14)는 경고가 생각날 뿐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그냥 두는 수밖에 없습니다. 언론의 자유가 미국에선 거의 완벽하게 보장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아무리 말리거나 깨우쳐주려 해도 한번 왜곡된 종말관에 빠지면 헤어나기 심히 힘들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멀쩡한(?) 신자들 가운데도 이런 비성경적 종말관에 완전히 빠지지는 않지만 잠시나마 미혹되는 경우를 봅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24:36)는 예수님 말씀에 따라, 한갓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럼에도 종말은 어떤 날이라도 될 수 있기에 혹시 진짜 그날에 종말이 오면 어쩌나싶어 관심을 갖거나, 마음에 각오라도 단단히 한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대부분의 신자들은 종말론적 믿음을 그야말로 종말을 미리 대비하며 사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의도적으로 세상사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생업에도 열정적으로 종사할 필요 없고, 자연히 재산 관리에는 무관심 내지 문외한이 되고, 매일이다시피 교회에 모여 성경과 기도에 전무하며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캠핑은 겨우 지난 5/21에서야 영적 종말이 시작되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 훨씬 전부터 그랬기에 정말 이 땅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고 여깁니다.

물론 죄는 아담의 타락 이후부터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인류가 번성함에 따라 그 죄는 확장 발전하여 다양 교묘 음흉 치사해졌지 그 반대로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보아도 모든 면에서 더 꼴이 아닙니다. 영적 종말은 실은 창조 당시부터 시작된 셈입니다.

 

거기다 하나님은 아담의 배교를 묵과하지 않고 그 즉시 벌을 주되 종말론적 심판을 하셨습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며 인간들은 평생을 두고 이마에 땀 흘리는 수고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이 있는 동안, 또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다른 말로 종말까지 그 벌을 감수해야 한다면 최초의 벌이 바로 종말론적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인간은 죄의 본성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채 낙원에서 쫓겨났기에 그 후손들 사이에는 아무리 세대가 오래 지나도 온갖 죄악이 번창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원흉인 사단도 함께 벌을 받았지만 완전한 멸망은 미뤄지고 원죄 하에 태어난 인간들을 여전히 농간할 수 있도록 잠간의 유예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인간이 가는 곳, 하는 일마다 죄의 냄새가 무럭무럭 날 것입니다.

 

창조가 바로 종말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인류의 타락과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 또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인데, 그 일은 이천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 십자가 은혜를 믿는 자에게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신자가 행하는 땅 끝까지, 살아가는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다 언제인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분이 다시 오시면 사단과 죄악에 대한 진짜 마지막 심판이 이뤄질 것입니다.

 

요컨대 인류의 역사는 종말을 향해 가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구원의 완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시작되었음은 그 종말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과 끝에는 삼위하나님이 계십니다. 세상 시작과 끝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지 절대 사단이나 인간이 아닙니다. 세상을 창조하든 심판하든 오직 그분의 영광만 드러날 뿐입니다. 물론 시작과 끝을 잇는 그 중간에도, 당연히 인간의 타락도 포함하여,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영원불변한 진리입니다.

 

역사 연대표는 항상 인간에게만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에는 창조와 종말이, 타락과 구원이 짝을 이루어 같은 항목에 속해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역사의 현장 속에선 단지 그 둘이 아직은 미완성인 상태로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초림하신 뜻은 그 둘의 완성을 사람들로 미리 보고 알게 해주려고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높이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 둘의 완성이 오직 당신을 통해서만 이뤄진다는 진리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참 생명을 이 땅에서부터 누릴 수 있게끔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언젠가 주님이 다시 오시면 심판의 완성과 구원의 완성이 동시에 이뤄질 것입니다. 그 사건은 인간 역사에는 종말이 될 것이며, 하나님 시간표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가 될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 땅의 이 세대에 지옥의 심판은 이미 내려졌고, 동시에 천국의 구원도 벌써 도래했지만 완성만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사단에 묶여서 심판의 완성으로 가는 부류와 하나님께 속해 구원의 완성으로 가는 부류, 둘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정표 안에는 태초부터 영원까지 구원과 심판이 이미 완벽하게 다 성취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골고다 십자가는 시공간 안에 제한 받는 인간에게 역사의 한 시점과 한 장소와 한 인물을 통해 그 둘의 완성을 모든 이가 보여 알도록 한 것입니다. 십자가만이 이미 완성되어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과 심판으로 인간을 나누는 유일한 분기점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길은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자는 영원한 구원 안에 이미 든 것이며, 그렇지 못한 자(그 중에는 언젠가 십자가를 통과할 자도 분명 있지만 누가 언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름)는 영원한 심판 안에 벌써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 십자가를 통과해 버리면 더 이상 되돌아 갈 길은 결코 없습니다. 그분의 대속죽음은 영단번의 완전한 희생이었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제사를 지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럼 예수를 믿은 신자는 어떤 신분과 특권을 가진 것입니까? 한마디로 천국과 구원의 완성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일정표에는 완성되어 있지만 단지 인간이 실제로 체험하는 완성만 인간이 지각하는 시간표상의 미래 일로 남겨져 있을 뿐입니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인식하든 못하든 이미 종말을 맞았으며, 종말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심판의 완성과 지옥의 비참함을, 신자는 구원의 완성과 천국 영광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영주권 받고도 불법체류자 같은 신자

 

요한 사도는 본문에서 신자의 종말관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지금부터 이미 하나님 자녀입니다. 장래의 종말이 어떻게 될지는 단지 인간의 시공간 안에 눈에 보이게는 아직은 나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안다"고 합니다. 믿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확정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종말 즉, 신자에겐 구원의 완성은 실현될지 안 될지 의심할 수 있는 성질이 절대 아니며, 아직 잘 모르기에 계속 공부하면서 알아가야 할 진리도 아니며,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불안하기에 단순히 소망하거나 기대하는 상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미국에서 영원히 살겠다고 영주권신청을 했는데 이민국에서 허락이 떨어졌다는 편지는 도착했는데 아직 영주권카드는 받지 못했고 한국여권에 스탬프가 찍혀지지 않은 상태일 뿐입니다. 신자란 예수를 믿음으로써 천국의 영주권신청만 한 것이 아니라 그를 허락한 편지와 영주권카드(성령님의 내주로)까지 날라 왔지만 그 입성만 잠시 미뤄진 것입니다. 영주권 승인 편지를 받은 후로는 영주권자 자격으로 모든 권리와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듯이, 신자도 이 땅에서 천국 시민권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올바른 종말론적 신앙이란 단순히 종말을 대비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종말을 소유한 자로 종말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궁극적이고 영원한 구원은 확보되어 있습니다.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으로 세상과 사람들 앞에 그 종말을 확실히 보여주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또 그러도록 바로 천국으로 입성시키지 않고 이 땅에 아직 남겨져 있는 것입니다. 요한만큼 천국에 빨리 올라가고 싶은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서로 사랑하며 열심히 살라고 하지 않습니까? 신자는 이미 천국 안에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라고 남겨두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이 말하는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란 단지 예수 믿고 죽으면 천국갈 수 있다는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종말에 "주와 같이 될 줄을 아는" 소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요한이 누구입니까? 천국을 확실하게 보고 온 자입니다. 역사상 그만큼 천국을 자세히 볼 수 있었던 자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그가 본 천국에는 예수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그분처럼 되어서 그분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 믿는 자는 아직 그곳에 가지만 않았을 뿐 이미 그와 똑 같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정말 이 땅에서부터 종말 안에서 천국의 모든 신령한 복락을 미리 누리고 주위에 나눠주고자 하는 열망을 가져야 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신자의 능력으로 그럴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런 앎과 열망 속에서, 조금 단계를 낮추어 확신과 소망으로만 살아도 주님이 그런 하늘의 풍성한 은혜를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요한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니까 불신자보도 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장래 완성될 구원에서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데" 어찌 지금 그와 같이 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니 천국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자인데 어찌 깨끗하게 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령님이 믿은 후의 신자에게 영원토록 내주하신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몸이 들어붙은 샴쌍둥이와 같은 형상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이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보고 있는 앞에서 감히 더럽고 추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다시 같은 비유를 들자면 영주권 승인서를 받아놓고도 불법체류자처럼 추방당하면 어쩌나 싶어 경찰차만 보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바보는 없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캠핑의 종말 예언에 간 졸였거나 혹시나 싶었던 것과 이 경우와 무엇이 다릅니까? 그것도 예수님 재림으로 최후 심판이 있지만 그 날짜만은 아무도 모른다고 익히 알고 있는 신자들 가운데서도 그러니 말입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신자

 

물론 신자라고 이번 사태에 망부석처럼 완전 무심하게 지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관심 호기심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염려했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종말이 닥칠까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닥치지 않을 텐데 그 이후에 기독교가 또 욕먹을 사태를 걱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경전문가라도 특정날짜를 지정하면 결코 그 날에 오실 리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나마 이번에 다행인 것은 신자에게는 날짜 지정한 종말론에 더 이상 속지 말라는 또 다른 증거가 되었고, 불신자에겐 하도 세상이 흉흉해서 종말에 대해 한번쯤은 상기시키는 반사적 유익은 있었으니 말입니다.

 

분명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거의 눈앞에 이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딤후3:1-5)되고 있습니다. 인간 역사의 모든 세대가 다 그러긴 했지만 이 구절에서 열거한 모든 사항이 하나 빠짐없이 철저히 해당되고, 특별히 마지막 경건의 모양만 있고 능력이 없는 모습은 바로 오늘 이 세대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세상이 흉흉할수록 신자가 붙들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뿐입니다. 예수 믿었으니 천국 가는데 지장이 없다고 안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내 혼자만 착하게 지내면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나아가 경건의 모양보다 능력을 구하라고 해서 초자연적 은사만 실행하거나 힘든 일에 기적 같은 보상만 소망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요한이 신자가 가져야 할 종말론을 본문에서 언급하기 바로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1a) 십자가 사랑을 신자에게 주셔서 당신의 자녀라 일컬음을 이미 얻게 하셨다고 합니다. 앞에서 누차 말씀드린 대로 천국 안에 벌써 들어오게 하신 것입니다. 신자에겐 구원의 완성만 남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1b) ‘세상은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지 못한 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됨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시작과 종말이 그분으로 말미암은 줄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사단에 미혹되어 그 종으로 살고 있기에 타락의 완성으로 자기들 인생이 흘러가고 있는 줄도 꿈에도 생각 못합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예수 믿은 우리를 처량하게 여깁니다. 오지도 않을 종말을 심심하면 끄집어내어서 세상을 시끄럽게 구니까 아예 상종도 못할 광신자들이라는 비난과 함께 말입니다.

 

요한은 신자더러 종말을 선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예수를 잘 모르듯이 예수를 모시고 사는 우리들 또한 그들에겐 잘 모르는 자로 인식 되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과 전혀 다른 소망을 안고 살기에 그들이 확연히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뭐라고 하든, 이해하든 말든, 심지어 오해하고 뜯어 말려도 신자는 그 소망대로 살아야만, 아니 자연스레 그렇게 살아져야 합니다. 비유하자면 날씬하고 예뻐져서 마음에 드는 남자를 사로잡고야 말겠다는 소망이 있는 여자는 남들이 저러다 병원 신세 지는 것 아닌가 염려해도 다이어트나 운동에 열중합니다. 자기가 번 돈 모두를 예뻐지는데 다 털어 넣지 않습니까? 신자도 이미 종말 안에 사는 모습을 감추려야 감출 수 없어야 합니다.

 

예수만 붙든다는 것은?

 

예수만 붙든다는 것은 흉흉하고 고통스런 세상일에 자신이 완전히 지쳐 있어도, 고난은 끝이 없고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고 기도할 힘조차 없어져도, 심지어 제발 빨리 이 고통만 끝내고 싶은 심정이 생겨도 내가 그분의 사랑 안에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그분이 나를 붙들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열심히 또 더 강하게 믿음을 세워서 염려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차원과는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언제 어떤 모습일지 아무도 모르듯이, 한 개인의 종말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신자는 종말이든 죽음이든 그 자체를 대비해서 살아선 안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종말 안에서, 죽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물론 우리의 영원한 참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춰져만 있는 것이지 때가 되면 반드시 너무나 풍성하고 신비로운 모습으로 신자 앞에 활짝 펼쳐질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요체는 이런 확정된 그러나 아직은 실현되지 않은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기에" 그곳을 향해 매일 한걸음씩 실제로 걸어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종말의 날자만 적시하지 않았을 뿐 곧 다가올 심판에 대비해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것도 엄밀히 따지면 캠핑이 벌린 짓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종말의 두려움만 강조했거나 전도의 가장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했으니까 말입니다.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전도에 종말은 아예 언급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종말만 강조하면 자칫 그들로 신자마저 종말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심판의 완성으로 치닫고 있어도 그들이 전혀 믿지도 알지도 못하는 예수님 재림에 대해 말로 설명해주어야 큰 효과가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을 향해 때로는 타락의 완성, 심판의 종말을 경고하면서 전도해야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들 앞에서 신자가 이미 도래된 천국 안에서 구원이 완성되어져 가는, 그래서 자기들과는 다르지만 함께 따르고 싶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바꿔 말해 신자는 종말이 다가갈수록 이 땅에서부터 예수님과 동행하며 더욱 열심히 성실히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다면 자연히 사람들이 우리가 자기들과는 다른 사람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종말이 앞으로 언제 닥칠지 모르고 또 어떤 큰 재앙과 환난을 동반할지 짐작도 못하기에 믿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가꾸어서 그 종말을 대비하는 것이 종말론적 신앙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을 이미 도래한 그리스도의 종말 안에서 살고 있기에 주님의 재림이 언제 어느 때 어떤 모습으로 닥친다 해도 전혀 요동치 않아야 합니다. 아니 나를 영광된 구원의 완성으로 이끌 것이므로 오히려 크게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그러기에 종말과 전혀 무관하게 이 땅에서 더욱 성실하고 깨끗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종말론적 신앙을 갖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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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참 모습Ⅱ (시96:1-13)

 

지난주일  출애굽기에 나타난 교회의 참 모습에 대해 생각하면서 

오늘날 교회들이 가져야할 참 모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출애굽교회모습은 애굽의 정치적 억압과,

애굽의 문화에서 탈출하고 애굽의 제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태에서

가나안 땅을 향해 행진하는 교회였다고 말씀드리면서,

 

오늘날 교회도 죄와 사망과 율법주의적 억압에서 자유함을 얻고,

이방문화 즉 미신과 우상문화와 쾌락주의와 물질주의 문화와 인본주의 문화에서

탈출하고 잘못된 의식과 제도에 벗어나 영원한 가나안복지를 향하여 행진하며

오직 믿음과 은혜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시편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을 찾아보면서 오늘날 교회가 가져야할

참 모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시편교회에 나타난 모습이 무엇입니까?

1. 기뻐하며 찬양하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1 -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라고 합니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깊이 감동되었을 때에는 영혼의 필수적인

응답으로 찬양이 있기 마련입니다.

 

시편교회에는 감사와 기쁨의 찬양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여기서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양하라 함은 구원받은 자의 노래를 의미합니다.
찬양의 가장 원천적이며 절실한 제목은 구원입니다.

이 구원의 은총은 노래를 부르고 또 불러도 결코 고갈되거나 싫증나지 않는 감격을

안겨주는 기쁨이 되는 영원한 노래입니다.

 

구원의 감격은 찬양하고 또 찬양해도 항상 감격적인 영원한 노래입니다.

구원의 감격을 노래하는 자가 기뻐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감격을 노래하면서 즐거워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시편교회는 시와 찬미와 감사와 감격과 춤의 축제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리하여 시149:3 -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라고 했고,


시150:4 -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가져야 할 참 모습이 무엇입니까?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감사의 시가 있고, 감사찬미가 있고,

구원의 감격과 춤과 축제가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시30:11 - 시편기자는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구원얻은자의 고백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러한 구원의 감격과 춤과 기쁨이 없습니다.

외국에서 유명한 예배 학자가 한국에 와서 한국교회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에 소감을 묻자 그 학자가 대답하기를

 

"마치 장례식예배에 참석한 것 같았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기쁨이 없고 축제가 없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감격과 기쁨과 찬양과 춤과 즐거움이 넘치는 잔칫집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를 천국의 모형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은 잔칫집으로 비유됩니다.

예수님은 신랑 우리는 신부 교회는 혼인 잔칫집과 같은 곳입니다.

즐거움과 기쁨과 미소가 있는 곳입니다.

잔칫집과 초상집은 다릅니다.

[예] 오전에 장례주례 오후에 결혼주례
20여년전 일입니다. 어려운 가정황견에도 불구하고 신앙으로 잘

성장한 여자 청년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은 오후 3시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집사님 남편한분이 세상을 떠나 그날 장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장례를 서둘러 오전9시에 하여 모든 절차를 마치고 납골당까지 갔다 오니 겨우

시간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오전에 장례식 오후에 결혼식 주례를 하면서 그 차이점을 느꼈습니다.

교회는 잔칫집이 되어야 합니다.

현실이 어둡고 힘들어도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영원합니다. 영원한 하늘나라의 기업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구원의 감격과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잔칫집의 모습이 참 교회의 모습입니다.

2. 시편교회는 구원을 전파하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2 -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지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의 목적은 인류와 만물의 구원입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그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한 독립국가를 이루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하시고,

구 후에는 히브리민족을 통한 인류구원을 계획하시고,

다윗의 자손에서 메시야가 나게 하시고, 메시야을 통하여 인류와 만물을 구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이러한 구원의 은혜를 노래하여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의 노래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적의

놀라움과 행적이 어떠한 것인지는 담고있습니다.

찬양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적에 대한 선포입니다.

 

시편교회는 찬양을 통해서 열방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전파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 경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본문 3 -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지어다"라고 합니다.


시98:1 -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라고 했으며,
대상16:23 -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포할지어다"
대상16:8 -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벧전2:9 -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자기들을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찬양으로 선전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가져야할 참 모습이 무엇입니까?

내가 받은 구원의 감격을 기뻐하며 노래하고 즐거워할 뿐 아니라 구원의 메시지를

찬양으로 만방에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복음의 소식을 노래하는 표정도 중요합니다.

 

감사와 기쁨과 평안의 표정으로 노래하고 선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에게 평안을 줄 수 있는 표정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표정에 구원의 메시지를 담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시편교회는 합당한 예배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오늘 본문8-9 -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시편교회의 예배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여기서 경배하라함은 예배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고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경배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이란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본성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본성은 영이시며 그의 속성은 거룩하시고 사랑하시고 은혜로우시며

공의로우심입니다. 이러한 분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① 본성이 영이신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해야 합당합니까?
요4:24 - 예수님이 수가성의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신령이란 영으로 예배하라는 것이고,

진정이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를 의미합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이나 예배는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② 거룩하신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거룩하신 보혈의 피로 씻음 받아 정결한 마음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회개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배와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③ 사랑하시고 은혜로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과 예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감사함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물을 가지고 궁전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경배할지어다.
출23:15 - 너는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배에 있어서 감사의 예물은 필수적입니다.

가인과 아벨 때부터(창4:3-4) 노아도(창8:20) 아브라함도(창14:20) 감사의

제물을 드렸으며 그 후 율법시대에는 예배시의 예물은 의무로 되어있었고(레1:7)

예수님 당시에도 성전에 연보궤를 두고 하나님께 헌금을 드렸고(막12:41-44)

초대교회는 모일 때마다 헌금을 하여 구제사업과 선교사업에 사용했습니다.

(행2:44-45, 고전16:1-2) 오늘날 교회에는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물질적인 예물자체에는 큰 의미를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물을 드리는 인간의 마음과 정성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1:11 -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라고 했으며 헛된 제물을 다시 가지고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도 마음자세가 되어있지 않는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정성어린 가난한 과부의 작은 헌금을 칭찬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본문9절에 보면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라고 한 것입니다. 아름답고 거룩한 예물을 드려

예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드리는 예물이요,

정성과 기쁨으로 드리는 예물이요,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그의 전인적 헌신을 의미합니다.(롬12:1)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는 제사적

삶을 살았음을 고백했습니다.(딤후4:6) 이것이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나의 삶의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나타나는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참 모습입니다.

④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가 무엇입니까?
이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9하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라고 합니다.
때로 예배는 제사장들이 제물을 가지고 성소로 들어가는 경건 되고 두렵고 떨리는

엄숙함이 있어야 합니다.

나답과 아비후와 같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조심성 없이 하거나,

홉니와 비느하스같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업인 여기거나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전인적정성을 다해 드려야 할 것입니다.

4. 시편교회는 심판주로 임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했습니다.

오늘 본문13 -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막연하게 미래시제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불순종에 대해서 친히 찾아오셔서 판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역사에 임하셔서 그들의 죄악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심판을 경고하시고 오늘도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심판을

경고하시고 사역 자들을 통하여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주의 날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 날에 예수님이 진실과 공평으로 판단하시고 심판하시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진실하고 공의로운 심판을 위하여 재림하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큰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회복해야 할 참 모습은 바로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교회의 참 모습은 시편교회와 같이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잔칫집교회이며, 그 구원의 진리를 선파하는 것이며

여호와이름에 합당한 예배와 진실하시고 공의로운 심판자를 기다리는

 

소망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우리교회가 이러한 교회 되기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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