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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1)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면서 겪는 고난과 고통의 문제는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면서 늘 우리를 괴롭혀왔다.


아주 오래 전에 욥은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갈 것이라”(욥 23:3)고 부르짖었다.
이렇게 부르짖는 사람은 단지 욥뿐만은 아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고통 속에서 절규하고 있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어찌하여 이런 일을 허락하십니까?”
“하나님이 내게 관심을 갖고 계시다면 왜 이렇게 행하시는가?”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왜 하나님은 나를 떠나셨는가?”

 

내가 아는 한 젊은 그리스도인 여성은 암에 걸린 교회 목사님이 완쾌되도록
몇 달 동안 기도했으나, 결국 목사님이 돌아가시자 이렇게 말했다. 
“온 교인이 기도에 매달려 부르짖었지만,
하나님은 그 젊은 목사님을 고쳐주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저는 이런 종류의 부탁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귀찮게 해드리는 일을 다시는 하지 않으려고 해요.
제가 왜 그렇게 해야 하죠? 저는 또 실망하기 싫어요.

 

” 이 젊은 그리스도인처럼 느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이 어떤 것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대로 행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행하게도,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이 물음에 대한 충분한 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계속되더라도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을,
이를 악물고 굳게 붙들어야 하는 때가 있다.

나는 이해하기 힘든 고난의 문제에 대하여 모든 답을 제시할 수 있다고 감히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나 자신이 고통과 슬픔의 문제로 몸부림치면서 깨달은 실제적인 지혜들을 제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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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2)

 

하나님은 주권적인 분이시다!

 

우선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인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분이 모든 것들을 통제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의 예상을 뒤엎는 일이 일어나서 그분을 놀라게 하는 경우는 없다.
반면 우리는 주권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하면 놀라게 된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도 나처럼 놀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통제권을 잃어버리신 것처럼 살아간다.
우리는 그분이 저 먼 우주 밖으로 나가시고 우주가 저절로 돌아가도록
내버려두셨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아니면 우리는 그분이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주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한번 뛰어보세요”라고 말하면
그분이 “얼마나 높이 뛸까?”라고 물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분에 대해 오해한다면, 그분께 실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자. 그분은 주권적인 분이시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제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우리가 기도할 때 종종 그분은 논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방법으로 개입하신다.
그러나 그분의 개입은 우리의 변덕스러운 기분이나 편의성에 따른 것이 아니고,
그분의 주권적 선택과 선하심과 은혜에 따른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개입하시는 방법을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정하신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눅 7:28)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히는 가혹한 현실에 처해 있었다.

그리하여 요한은 자기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눅 7:19)라고 묻게 했다.
이런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눅 7:22,23)라고 대답하셨다.

요한은 메시아가 행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일들을 예수님이 행하시지 않자
그분이 메시아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꼭 우리가 예상하는 그런 방식으로
일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주권자는 우리가 아니라 그분이시다.
고난과 슬픔이 찾아올 때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 중 한 가지가 있을 뿐이다.

원한을 품고 우리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아니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인생의 모든 것이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임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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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3)

 
원하는 것만 받는 게 신앙인가?

 

신앙은 단지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하나님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주시는 것이라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의심 없이 받는 것이다.

간혹 일부 신자들은 모두 건강하고 부유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시련을 면제 받는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그 반대의 것을 때때로 약속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다”(요 16:33)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도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라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고난의 면제를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도 돌보아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한다면, 그분을 닮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난을 환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것이
바로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 제가 아무 해도 당하지 않고 복을 누리도록
이런저런 것들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것이 왜 어려운가? 우리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구하느라고
너무 바빠서 하나님의 선(善)을 구하지 못한다.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그것이 찾아왔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의심하며 분노와 원한에 사로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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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4) 


고통의 순간에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언제나 신앙은 우리를 궁극적 승리로 이끈다.
그리스도인들은 근본적으로 승리자의 편에 서 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당하시는 중에
하나님마저 그분에게서 등을 돌리셨다.

만일 당신이 그 자리에서 이것을 목격했다면,
그분이 궁극적으로 승리하실 것이라고 믿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패배처럼 보이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탄에 대하여 승리하셨고,
우리의 구속이 성취되었다.

장차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위에 온전히 실현될 것이며,
고통과 눈물이 영원히 끝날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타락하여 고통에 빠진 세상에서 살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주위에 널린 죄의 결과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우리가 고난을 피할 수 없지만, 적어도 혼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소망 없이 고통당하거나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라고 말했다.

나는 감히 제안한다.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묻지 말고,
“고통의 순간에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고 묻자!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징표는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고통 중에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다.
이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없다면,
은혜와 진리 안에서 계속 성장할 수 없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힘을 얻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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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독에 빠졌다가, 예수에 빠지다! - 신앙스토리 5

 

예배를 통해 회심한 후 급속히 성장한 사람
술독에 빠졌다가 예수에 빠진 ‘노숙자 선교회’ 책임자 멜 트로터 이야기 


_ 제임스 헤플리  James Hefley

 

 
 ‘시카고 퍼시픽 가든 선교회’ (the Pacific Garden Mission in Chicago)는 시카고의 가난한 노숙자들을 아주 효과적으로 돌본다는
평을 받는 단체였다.
1897년의 어느 추운 날 밤 이 선교회 건물 안에서 예배가 진행되고 있었다.
찬송가를 인도하는 사람 해리 몬로(Harry Monroe)는 전에 위조 지폐를
만들었으나, 이 선교회에서 회심한 후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있는 중에 어떤 술 취한 젊은이가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게 되었다.
몬로는 찬송가 부르기를 잠시 중지시키고, 큰 소리로
“하나님, 이 불쌍한 젊은이를 구하소서”라고 기도했다.
그 후 이 젊은이는 고개를 들고 설교와 간증을 열심히 듣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멜 트로터였다.

트로터는 19세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내 그의 과음은 통제 불능이었으며, 그의 직장 업무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는 가는 직장마다 쫓겨났다.
 

일찍이 결혼한 그는 아내에게 착실히 살겠다고 여러 번 약속했지만 단 며칠뿐, 다시 술을 입에 대곤 했다.
술을 사기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팔아치웠다. 심지어 그의 말(馬)과 약(藥)까지 팔았다. 
그의 아내가 아기를 낳은 후에도 그의 행동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술을 마셨다.

언젠가 집을 나가서 열흘 동안 술 파티를 벌인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의 아기가 아내의 품에서 죽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자기의 아기를 방치하여 죽게 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그는 자살을 결심했다.
그리스도인이던 그의 아내는 아기를 내려놓고 트로터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했다.
그녀의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다시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아기의 장례를 치른 후 그는 다시 취해서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결국 술에서 벗어날 수 없어 절망감에 빠진 트로터는 자기의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다.

1897년 1월 19일 그는 물에 빠져 죽겠다고 미시간 호수를 향해 걸었다.
그가 반 뷰렌(Van Buren) 거리를 따라서 걷고 있을 때 누군가 말 그대로 팔을 뻗어서
그를 ‘시카고 퍼시픽 가든 선교회’ 건물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때가 바로 선교회 안에서 해리 몬로가 찬송가 부르기를 인도하는 중이었다.
트로터가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을 때 몬로는 찬송가 부르기를 중지시키고,
그를 위해 큰 소리로 기도했던 것이다.

 

예배가 끝난 후 몬로는 트로터에게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마음을 열고 그분을 받아들이십시오”라고 말했다.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서서히 술이 깬 트로터는 몬로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드렸다.

그날 이후 트로터는 몰래 술집으로 빠져나가는 대신 시간이 날 때마다 선교회를 찾았다.
그는 기타를 연주하고 찬송가 부르기를 인도하고 심지어 몬로와 함께 그 지역의 교회들을 방문했다. 
그의 신앙은 급속히 성장했다.

회심한 지 3년 후 그는 그랜드 래피즈(Grand Rapids. 미국 미시간주 서부 켄트 지역)의 ‘노숙자 선교회’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 후 40년 동안 그는 그 선교회를 통하여 많은 열매를 맺었다.
그는 이 선교회를 발판으로 하여 전국에 66개의 다른 노숙자 선교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은 예전의 자기 모습처럼 삶의 목적과 희망을 잃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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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주(主) 되심은 희생을 요구하는가? (1)

 

나는 나를 처음 그리스도께 인도한 여인에게 중요한 질문을 했었다.
그녀가 나에게 제시한 복음은 아주 매력적이고 멋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포기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잠깐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오직 당신의 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죄의 회개를 요구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들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만일 그녀가 “당신은 테니스, 당신의 친구들, 삶의 즐거움을 포기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대하여 어쩌면 다시 생각해보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당신은 당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 즉 당신의 삶을 망치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나에게 ‘희생’은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 의미로 다가왔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becoming a Christian)과 ‘그리스도인인 것’(being a Christian)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될 때 나는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성경은 우리가 희생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것을 말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그분의 희생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는 사람은 그분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그런 희생을
치르셨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에 동요를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게 된 사람은 그분의 생명을 희생하도록 만든 것들을 미워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많이 희생해야 하느냐를 놓고 고민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자기의 죄들을 버리기를 원한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당신은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을 방해할 수도 있는 것들을 희생(포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을 섬기는 종의 삶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이제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자신이 모든 것들을 잃어버린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서”라고 그는 분명히 밝힌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큰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귀했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더욱 사랑을 느낄수록,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우리의 포기를 희생으로 여기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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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주(主) 되심은 희생을 요구하는가? (2)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하려는 사람은 우선 시간 사용부터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려고 한다면 우리는 빈둥거리면서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때로는 돈을 버는 시간까지 제한해야 한다. 경건 생활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규칙적으로 시간을 내어 노력할 때 경건 생활이 이루어진다. 

교회의 일에 동참하려면 우리는 돈을 제대로 사용하도록 훈련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찮은 것들이나 사치스러운 것들에 돈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때로는 필수품으로 간주했던 것들조차 포기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바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힘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한다.
다른 일들에 우리의 힘을 실컷 사용하고 나서 남은 힘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경건 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육체적 힘도 반드시 필요하다.
다른 일들에 육체적 힘을 다 써버린 다음 경건 생활을 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 은 라이프-스타일(lifestyle),
즉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적절한 삶의 기준을 세워서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우리의 시간과 돈과 힘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소위 ‘출세 지상주의’에 빠져 있다.
예를 들어 진급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들은 차분히 앉아서
‘내가 진급하면 우리 가족에게 어떤 변화가 생길까? 그것이 나의 교회 봉사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까?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진급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더 중요한 영적인 일들을 위해 진급을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희생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포기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
그들은 그것들을 계속 추구할 때 어떤 결과가 찾아올 것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과 달라야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희생은 그들이 선택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자기 절제’이다.
희생 곧 자기 절제는 이 세상의 삶을 풍요롭게 살게 해주고 영원한 상급을 받게 해준다.
사실, 우리가 포기하는 것들도 알고 보면 바울의 말대로 ‘배설물’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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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올바른 체벌을 하기 위하여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언 22장 15절


* 올바른 체벌 원리

1. 하나님께서 자녀를 징계하고, 
    회초리를 들어 훈련시키고, 따끔하게 처벌해서 아이를 바로 잡으라고 하셨다.

2. 아이에게 매를 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죄의 결과는 아픈 것임을 꼭 가르쳐 준 다음 매를 거두도록 한다.

3. 십계명을 아이의 마음 가까이에 두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든 
    다 우상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가르쳐야 한다.

4. 하나님과 함께 매를 들라.
    매를 들어야 하는 순간에 아이에 눈물에 속지 않고
    그 분물 뒤에 숨은 죄를 집어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 체벌을 하기 전 기도

하나님, ________ 가  오늘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 일은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버렸습니다.

저도 하나님 앞에서 ________ 와 같은 잘못을 하기도 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맞을 때 ________ 처럼 아파서 울기도 합니다.

하나님,  ________ 의 어리석음을 용서해주시고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도록 ________ 마음을 지켜주세요.

이제 제가 ________ 때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매가 ________ 에게 상처가 되지 않고
깊은 교훈으로 남을 수 있도록 주께서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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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성 없는 훈련이 의미가 있는가? (1)

 

이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는 이 땅에서 가장 발전되지 못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과 달리 동물들은 출생 직후 아비와 어미를 잃는다 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잘 발달된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인간이 되기를 배워야 하는 존재이다.

갓 태어난 인간은 엄마의 젖가슴에서 젖을 빨아먹을 수 있는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그 이후의 삶의 많은 단계들이 이 본능 하나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듦에 따라 아이는 나이프, 포크, 그리고 스푼을 가지고 식사하는 법과 컵을 가지고
물을 마시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식을 길러본 많은 부모들이 체험하듯이, 이런 배움의 과정은 길고 힘든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을 키우는 부모는 자식이 삶에 적응하기 위해 배워야 할 것을 가르치는 데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방금 이야기한 육체적 출생과 양육에 관한 이야기는 영적 출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즉 중생(重生)은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다.
하지만 중생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중생 다음에는 성장의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에게 믿음 안에서 부모, 형제 및 자매를 붙여주신다.
물론 그 목적은 그들이 새 신자의 영적 성장을 돕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런 영적 성장은 한번에 또는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나름대로 훈련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어린아이가 밥이나 국을 쏟지 않고 식사하는 법을 배우고 넘어지지 않고 걷는 법을 배우듯이,
우리도 영적 성장을 위해 배워야 한다. 

훈련이 자발성을 말살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러나 포크를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 자발성으로 충만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단지 훈련이 안 되었을 뿐이다.
운동선수나 음악가들은 여러 해 동안 반복적이고 때로는 지루한 훈련 과정을 거치지만, 경기나 연주 중에는
매우 자발적으로 경기하고 연주한다.
즉, 경기나 연주 중에 그들의 근육과 감정과 생각은 매우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문제들에서도 우리는 훈련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한다.

영적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사람은 유혹의 순간에, 순종해야 할 순간에, 찬양해야 할 순간에,
증거해야 할 순간에 자발성이 발동하여 신앙적 선택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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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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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성 없는 훈련이 의미가 있는가? (2)

 

자발성을 위한 전제 조건


훈련 자체가 자발성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훈련은 자발성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도 생활, 성경 읽기, 예배, 금식 및 구제의 훈련을 하는 것은 그때그때의 변덕스러운
기분 때문이 아니라 의지적 결단 때문이다.
훈련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발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자발성을 소중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평생 영적 훈련을 실행한다.
왜냐하면 훈련은 그가 자발적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기술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물론 훈련을 통해 습관화된 행동들이 신앙과 아무 관계없이 인위적인 것으로 전락하여 타성에 빠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하루 종일 푸시업(push-up)만 하면서 결코 링(ring, 체조 경기의 한 종목)에 오르지 않는
체조 선수처럼 될 수도 있다.
당신은 그가 왜 ‘링’에 오르지 않는지를 아는가?
그것은 그가 사고의 위험이 없는 기초체력 운동을 하는 데 아주 익숙해져서 편하게 기초체력 운동만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링’에 올라 힘차게 창공을 가르며 마음껏 재주를 펼치는 사람은
사고의 위험성을 잊어버리고 체조의 스릴을 즐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운동선수들은 혼자서 훈련하지 않고 단체로 훈련하는 것이다.
단체로 훈련하면, ‘링’에 오르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을 서로 독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를 지켜보다가 “친구여, 어찌하여 더 이상 ‘링’에 오르지 않는가?”라고
말해줄 친구들이 우리 주위에 필요하다. 

훈련과 자발성의 유기적 관계를 시험해볼 수 있는 기준은 사랑의 행동이다.
사랑의 문제에 대하여 깊은 교훈을 가르쳐주는 사도 요한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들이 우리의 사랑을 체험하는가?”라고 묻는다.
그의 물음은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좋은 잣대이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자발적인 행위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도록 만들어주는 프로그램을 우리의 뇌에 삽입함으로써 사랑하도록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발성에만 의존해서 사랑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주 비현실적인 사고방식이다.
현실적으로 볼 때, 오랜 세월 사랑을 실천해온 사람들은 끈질긴 훈련과 노력 없이는
사랑의 실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사랑의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들은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을
사주는 수준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훈련과 습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습관은 게으름의 결과로 생긴다.

아무 생각 없이 행동을 반복하다보면 습관이 생긴다. 습관이 형성되는 데 노력이 거의 필요하지 않다.

습관은 하나님이나 이웃을 만날 수 있는 장(場)이 아니다.
우리는 습관을 버리기를 아주 싫어하는데, 왜냐하면 습관에 따라 판에 박힌 생활을 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피상적으로 볼 때 훈련과 습관은 똑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우리 앞에 우리가 찬양해야 할 하나님이 서 계시거나 우리가 사랑해야 할
원수가 서 있을 때 훈련과 습관의 큰 차이가 확연히 나타난다.
훈련이 제대로 된 사람은 문 밖으로 뛰어나가지만, 습관적으로 살아온 사람은 몸을 돌이켜
따뜻한 침대로 향한다.

기도와 성경 읽기와 예배를 통하여 훈련을 쌓은 그리스도인들은 갑자기 닥친 상황에서 순종의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우물쭈물하지 않을 것이다. 
신령한 생활을 방해하는 무서운 적은 바로 이기심, 즉 나 자신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이다.
습관에만 얽매여 있는 사람은 자신의 문제만을 생각한다.

반면 영적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생활방식을 과감히 깨어버린다.
영적 훈련은 게으름의 습관을 깨어버리고 우리를 하나님이 주인이신 큰 세상으로 인도한다.
이 큰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생각하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된다. 
교회의 의식들은 영적 훈련의 좋은 경우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공동체는 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주일마다 정해진 시간에 우리는 각자의 개인적 세계에서 빠져나와 예배의 세계로 들어간다.
1년 중 정해진 때가 되면 우리는 판에 박은 듯이 반복되는 세상의 일들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역사(歷史)를 상기시키는 절기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의 생활 속에서 영적 훈련을 위한 작은 의식들을 실천하는데,
이는 이런 의식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자신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영적 훈련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
신자들은 영적 훈련이 대부분의 경우 단조롭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엇인가를 오래 기다려야 할 때 우리는 참지 못한다.
어떤 훈련에 즉시 강한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 즉각적으로 그것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우리가 그 훈련의 가치를 깨닫는 데 더디기 때문에 그것이 지루하고 단조롭게 느껴지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이럴 때에는 인내심을 가지고 훈련을 계속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더 충만한 영적 상태를 갈망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그러므로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라.
성령님이 일하실 것이다.
우리를 그분께 맡겨드리면 그분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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