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예배설교] 대속하러 오신 메시아 (Wednesday Evening Sermon)

대속하러 오신 메시아

이사야 53장 1∼12절

 

이사야 53장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고난과 영광’을 주제로 그의 징계와 고난이 우리를 위하심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징계를 당함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사 53:5).

그런데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의 모습은 초라합니다(1∼3절). 이사야는 앞으로 오실 메시아가 사람들이 기대하던 슈퍼영웅이 아니라 메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이 애처롭고 초라한 모습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풍채나 사회적 지위, 가문, 경제적 부유함, 학문적인 어떤 매력도 없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는 연약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언은 700년 후 복음서에서 그려진 예수님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한 것처럼 멸시받는 지역 나사렛 사람으로 나셨습니다. 그가 친구로 삼고 제자로 부르신 사람들도 갈릴리 어부였습니다. 또한 비난 받던 세리와 장애인, 병든 자,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는 죄인의 친구”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는 실제로 허물 많고 초라한 인생들의 친구가 되시고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또한 그 메시아는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셨습니다(4∼6절). 하나님께서 그에게 죄를 담당하도록 한 것입니다. 바로 대속주로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허물과 죄가 드러나지 않게 감추고 숨기고 의로운 척하며 살아갑니다. 같은 죄인들끼리 서로 정죄하며 판단하고 외면하고 멸시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메시아는 죄가 없었으나 대신 죗값을 받으셨고 형벌을 받고 죽으셨습니다(7∼12절). 바로 대속 제물로, 제물 된 어린양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십니다. 완전한 의인이시면서도 죄인 취급을 받으시며 곤욕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묵묵히 침묵하시며 재판을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보리산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곧 나와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대속의 제물이십니다.

그러면 하필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방법을 사용해 죄인들을 구원하셔야 했을까요.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원의 계획이라면 훨씬 더 강력하고, 훨씬 더 수월하며, 훨씬 더 설득력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친히 죄인의 몸으로 오셔서 몸소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러한 방식을 피할 수는 없었을까요. 하나님께서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창조자이신 하나님, 세상을 만드시고 세상의 질서를 세우신 하나님께서 죄의 책임을 메시아에게 전가하시고, 대속하셔서 모든 인간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한 구속이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고전 1:18).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십자가의 대속을 능력으로 힘입는 성도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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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설교] 구원에 이르는 자 (Wednesday Evening Sermon)

끝까지 참아 구원에 이르는 자 

요한복음 6장 1∼71절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집회 후에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식사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는 신약 4복음서에 공통적으로 기록될 만큼 큰 기사이며 이적이었습니다. 남자만 5000명쯤 참석한 집회는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가 7만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성황리에 이뤄진 집회였습니다.

오병이어를 경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그 자리를 피해 홀로 산으로 떠나가셨습니다(15절). 이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아다녔고 왕으로 세우려는 자들은 다음날까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22∼25절).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시고, 개인의 문제와 더불어 대중에게 오병이어의 이적까지 베푸시는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이 기다리던 메시아임에 틀림 없었습니다. 이제는 정치적으로 입문해서 왕위에 오르는 일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한 바와 같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분으로 왕권을 회복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먹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합니다. 이미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그들은 계속해서 그런 기적을 바라고 있었습니다(31∼34절).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곧 세상에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먹고 배부르기 위한 것”이라고 꾸짖으십니다(26절). 이어 “내가 주는 것은 세상의 먹고사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양식”이라고 강조하십니다. 곧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달아 십자가의 삶을 따르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는 이와 같은 토론이 긴 시간 이뤄집니다. 그러나 오병이어를 경험한 그들은 예수님의 진의를 깨닫지 못합니다(60∼64절). 세상적인 복을 추구하는 신앙의 의식구조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66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기적을 체험한 많은 무리들은 결국 예수님을 떠납니다. 남은 사람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뿐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사역이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열두 제자들도 마음이 흔들립니다. 예수님께서 분위기를 아시고 질문하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67절)

이때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그러나 예수님은 열두 제자만 남은 상태에서조차 “너희 중에 한명은 나를 팔아넘길 자로서 마귀”라고 말씀하십니다(70절). 결국 제자는 열한명만 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써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광야에서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멸망시켰다”고 전했습니다(고전 10:4∼5).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장정만 60만명을 헤아렸지만 다 죽고 가나안에 입성한 이는 여호수아와 갈렙 둘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10가지 재앙을 목격했고 홍해를 건너는 기적을 체험했으며,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를 먹고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를 마셨지만 그들은 광야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 시대에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끝까지 참아 구원에 이르는 자는 과연 얼마나 되며 누구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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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 복의 사람 아브라함 (Wednesday Evening Sermon)

복의 사람 아브라함
창세기 12장 1∼3절

 

하나님은 아담을 통해 세상을 맡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고자 계획을 세우셨으나 인간이 죄를 범해 복의 사람이 저주의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모이는 곳마다 죄악이 넘쳐나고 심지어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신다는 하나님의 탄식소리가 천지를 울렸습니다. 인류는 결국 하나님의 진노 아래 노아의 홍수를 당할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새로운 인류 구원의 계획을 세우셔야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으로 인류 구원의 서막을 여시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에는 복이라는 단어가 5번이나 계속해서 쓰여 있는데, 그 복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는 ‘브라카’이며, ‘하나의 복’ ‘복 자체’ ‘복덩이’ 등으로 해석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복 대신 하나님의 저주가 아담에게, 가인에게, 함에게, 뱀에게, 그리고 자연에게까지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저주가 창세기 12장 1∼3절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복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불행과 저주에서 복과 생명으로의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먼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천하 만민에게 복의 통로가 될 만큼 충분한, 차고 넘치는 복이었습니다. 천지창조를 마치시며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드신 주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금도 부족함이나 모자람이 없는 넉넉한 복이시기에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어 ‘브라카’의 상태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한 복을 받아 그 사람 자체가 복덩이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복덩이가 되면 그가 머무는 곳과 일하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넘침같이 하나님의 복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본문 3절은 브라카가 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선포입니다. 하나님은 누군가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그 저주가 저주한 사람에게 되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복은 손자인 야곱으로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복으로 무장한 사람을 저주의 화살이 빼앗지 못했고, 저주와 불행도 그를 침범할 수 없습니다. 비양심적인 삼촌 라반도, 폭력적인 형 에서도 야곱을 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어 3절 하반절에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임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복이 아브라함에게만 주어진 복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매개로 해 열방과 모든 민족과 모든 족속에게로 흘러간다는 의미입니다. 이 복이 우리에게까지 흘러 우리 모두가 축복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도 모두 한 사람의 축복의 통로가 돼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브라카’가 되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순종했나요. 갈 바를 알지 못했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갔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복과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아브라함처럼 복의 사람임을 믿고 그 복으로 이웃을 주님의 사랑으로 나누며 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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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 풍성한 열매를 (Wednesday Evening Sermon)

 

풍성한 열매를 맺읍시다
요한복음 15장 5∼8절

 

광대한 성경 말씀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어떤 단어가 좋을까요. 바로 예수(복음)일 것입니다.

예수 복음의 내용이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잘 요약돼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지만 이런 기쁜 소식이 있음에도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사람 모두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까요.

십자가에 달린 독생자를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안에 생명의 주인으로 주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내가 거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할 때 구원의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요 15:5).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새로운 피조물로 구원받게 됩니다(고후 5:17). 그러나 우리는 입으로만 “주여, 주여” 부를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간파하신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노아 당시에도 입으로는 “주여, 주여”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방주(예수 안) 안에는 거하지 않아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8명이라고 베드로전서 3장 20절에 쓰여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입으로 “주여, 주여” 부르고 그들의 목적(떡, 병고침 등) 때문에 주님을 따랐지만 정작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지 못하고 떠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요 6:66∼68).

입술로는 “주여, 주여”라고 부르짖을지라도 생명의 떡이며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6)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노아 때 사람들처럼, 벳세다 들녘 예수님 당시 사람들처럼 입으로는 “주여, 주여” 부르면서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않으면 썩은 가지처럼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내 마당(성전 뜰)만 밟는다고 탄식하고 계십니다(사 1:12). 이처럼 성전 뜰(교회 안)에서 “주여, 주여” 부른다고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안에 거하지 않고 욕심 때문에 성전 뜰만 밟은 벳세다 들녘의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생명의 떡을 먹고 지성소 안에 들어가 거룩한 영광의 빛이신 예수님 안에 거해야겠습니다.

예수의 부활 승천을 준비하는 사순절 기간입니다. 거룩하고 경건하게 지내는 교회 절기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20)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겨야겠습니다. 우리의 정과 욕심 때문에 죄로 인해 어두워질수록 빛이신 예수님을 멀리하지 말고 그 영광의 빛 속으로 들어갑시다.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 그 거룩한 영광의 빛 속에서 찬란한 부활의 풍성한 생명을 누립시다. 2014년 부활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풍성한 부활의 생명의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주님의 제자가 됩시다.

이천구 광명 행복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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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세째 수요저녁예배 대표기도문 (가족이 구원받는) Wednesday worship prayer

 

만왕의 왕이시며 진정한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으시고,

부르시고, 품에 안으시고, 보호하시고, 지금까지 길러주셨습니다.

그 놀라우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전능하신 주여,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우리도 사랑하며 기도하게 하옵소서.

그들의 삶이 변화되고 그들의 가족이 구원받는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기쁨이 넘쳐 흐르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가 주님의 심정이 되어서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기뻐하며 돌아오는 목자의 모습을 사모하게 하옵소서.

집 떠난 아들이 돌아올 때 환영하며 입맞추던 아버지처럼

잃어버린 자에 대한 사랑을 결코 잊어 버리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어떠한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그 사랑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시고,

어려운 상황일수록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가르쳐 주신 주님,

그 가르침을 받고도 우리는 우매하여 종종 죄악속에 거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악에게 지지 않는 놀라운 믿음을 우리에게 더하여 주옵소서.

혹시 우리가 교우들이나 이웃의 허물을 보았을지라도 그 허물로 인하여 우리가 실족하지 않도록 하시고,

오직 주의 사랑과 교훈으로 바르게 하며 덮을 수 있는 은총을 더하소서.

무엇보다도 주의 크신 영광과 은총을 바라보며

오늘을 주의 주신 지혜와 총명속에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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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 대표기도문 (사랑과 은혜)Wednesday worship prayer
삼일 기도회의 대표기도

(롬 12:12)


당신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빛되시며 주님을 믿는 모든 영혼들의 생명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지난 삼일 동안에도 저희를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보호속에서 살게 하시고 다시 이 시간 주님의 거룩하신 제단앞에 엎드려 기도하게 하시니 그 사랑과 은혜에 감사와 영광을 드리나이다.

 

  그러나 이 시간 저희들은 주의 뜻대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주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주님의 품을 떠나려고 애쓰며 세상과 불의와 타협하며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는 나약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저희들과 죄를 제거해 주시고 자비로써 저희들 마음에 성령의 불을 붙이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돌같은 마음에 새로운 마음을 허락 하셔서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따르며 즐거워 할 수 있는 귀한 믿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오늘도 갈급한 심령으로 나왔사오니 주께서 저희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옵소서. 주여 저희 성도들의 사업과 가정과 자녀들에게 함께 하셔서 축복에 축복을 더해주는 놀라운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그러나 저희들이 물질의 축복에만 만족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게 하시고 영의 축복을 사모하며 늘 기도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닫혔던 입술과 마음을 활짝 열어주시고 저희의 교회와 가정에서 기도드리는 간구의 소리가 늘 끊어지지 않게 하시옵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거룩한 교회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오니 당신의 교회를 모든 진리로 채워 주시고 온 교회에 평화와 진리가 가득차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저희 교회의 머릿돌이 되어 주셔서 온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며 감싸 줄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저희 교회는 분열과 싸움과 교만과 같은 마귀의 역사가 없는 아름다운 교회로 이끌어 주옵소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수고하시는 목사님께 은혜와 진리로 충만케 하여 주시고, 장로님들과 여러 전도사님, 집사님들에게도 더욱 크신 축복을 내리셔서 교회와 목사님을 받들어 섬기는데 부족함없게 도와 주옵소서.

  이 예배를 온전히 주님께 드리오며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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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설교 (Wednesday Evening Sermons)

복음의 도구

마태복음 13장 31∼32절

 

열매와 씨앗은 본질상 같은 것이지만 기능은 분명히 다릅니다. 씨앗이나 열매는 모두 우리의 식단을 채울 수 있으나, 종자로 구분되는 씨앗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대를 이어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 분명한 ‘종자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전 인류의 종자가 되고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모든 백성의 종자가 되었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종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보면 항상 택한 한 사람 혹은 택한 민족을 통해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마치 누룩 비유나 겨자씨 비유처럼 작은 것에서 시작해서 전체에게 확산되는 방법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태반이 되게 했으며, 신약의 선교 역사를 보면 로마와 영국, 미국 등과 같은 나라들을 통하여 선교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쓰임 받은 나라들은 처음부터 복음의 도구가 된 것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국력과 경제력, 문화적 힘에 복음을 실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로마 제국의 경우에는 칼과 병거로 유럽과 아프리카를 지배했으나 그 지배력은 결국 복음 전파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대영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칭을 얻었던 영국은 제국의 힘에 복음을 실어 전 세계에 전파했습니다. 현재의 미국도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데 쓰임 받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대한민국은 전 세계 175개국 중 726만명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8대 경제대국이 되었으며, 문화적으로는 한류라 불리는 드라마와 K팝이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확산되고 있습니다. 역사상 대한민국의 영향력이 이렇게 커진 때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우리 민족을 쓰시려고 만드신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해외선교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실제로 많은 성과도 보았습니다. 초기 선교의 경우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입장이었다면 이제 경제력과 문화적 힘을 바탕으로 보다 공격적인 선교 역량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한국 교회는 선교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더욱 순전한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도록 하는 데 진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동족이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한 북한 동포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북녘 땅은 우리에게 아직도 미전도 지역으로 남아 있는 ‘땅끝’입니다.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했지만 북한 상황은 결코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상황이 아무리 비관적이라고 해도 우리는 동토의 땅 북한에도 복음이 전파될 것을 기대하며 파종해야 합니다. 그 종자는 탈북 동포들일 수 있고, 중국 국경에 살아가는 조선족일 수도 있으며, 북한 땅에 드나드는 경제인일 수도 있습니다. 대량의 종자가 아니라 단 한 알의 종자라도 좋은 땅에 뿌려지기만 하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종자의식을 갖고 북한 땅에 뿌려질 종자를 찾아 파종하는 데 우리의 역량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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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설교 (Wednesday Worship Sermon)

고난의 길을 가라  

사무엘상 23장 1∼14절

 

사무엘상 23장에는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울의 공격을 피해 도망다니던 다윗은 모압 땅 미스베로 달아납니다. 그러나 언약의 땅인 이스라엘 지경을 벗어난 그 피난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시고, 다윗은 순종합니다. 그가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 땅은 유다 땅 ‘헤렛 수풀가’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포항의 호미곶이나 울산의 간절곶 같은 곳입니다.

사울이 찾아내기 힘든 외진 곳으로 도피한 것입니다. 이곳에서 다윗은 숨 죽인 채 지냅니다. 그러다 돌발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일라 지역으로 블레셋이 침공한 것입니다. 정부군을 이끌고 나가서 이들을 물리쳐야 하는 몫은 당연히 사울에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로 인식합니다. 다윗이 기도하자 하나님은 전쟁에 참여하라고 응답하십니다. 그일라 땅은 우리나라로 치면 청주나 대전 정도가 됩니다. 내륙지방인 것이죠. 다윗의 처지에서 이곳으로 가서 전쟁을 벌이는 일은 상식 이하의 선택입니다. 블레셋 민족과 싸움을 벌여야 하는 동시에 사울에게 자신의 위치를 노출하게 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죠.

본문 3절을 보면 참모들이 반대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받은 응답에 확신이 있어 그대로 밀어붙입니다. 5절에서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하지만 그 뒤 참모들이 예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23장 7절에 보면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로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고 나옵니다. 이것이 사울의 인식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순종의 결과가 참으로 비참합니다. 14절에는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고 나옵니다. 다윗에게 주어진 은혜는 ‘목숨 보존과 도망’이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인생을 다루시는 방식은 참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 그일라 전투에 나갔지만 결국 사울에게 쫓기게 될 줄 알았을까요?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참모들이 알고 있는 것을 다윗이 몰랐을 리가 있겠습니까. 고난이 닥칠 것을 알고도 이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 시대 많은 성도들은 예수를 진심으로 믿은 대가를 보상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고, 고난 받는 삶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요 복이라고 인식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고난 받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사도행전 5장 41절에는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나옵니다. 사도들의 신앙의 자세를 보면 다른 것이 은혜와 복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위해 죽기까지 수고하고 고난 받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복된 은혜입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 자리로 부름 받은 것 자체를 기뻐했던 것입니다.

다윗과 사도들이 보여주고 있는 ‘자원하여 고난 받는 삶과 신앙’의 자세를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능력이 여러분 모두의 현실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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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설교 (Wednesday Worship Sermon)

복의 근원
창세기 12장 1~8절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저마다 해야 할 일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양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모든 삶의 의미는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며, 모든 사람이 깨달아야 할 사실입니다.

모든 삶의 의미는 소명의식에서 비롯돼야 합니다(창 12:1∼2). 물론 삶 자체에 의미가 있는지 묻는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고민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삶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한 사람은 어둡고 지루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삶의 의미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를 성경에서는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는 일이 무엇이든, 그 일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받은 복을 전해주는 통로가 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든 평범한 자리에 있든 반드시 힘써야 할 것이 바로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복을 누립니다(창 12:3∼8). 긴 삶 속에서도 삶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건강과 장수,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이 복인 줄 압니다. 그런데 이런 복은 마치 모래알을 손에 움켜쥔 것과 같아서 시간이 흘러가면 다 사라지고 맙니다. 오랫동안 붙잡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시 1:1∼6).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자신이 하는 일이 다 형통합니다. 또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자신의 의지나 욕망을 다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두 아들 비유’(마 21:28∼32)는 순종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제가 사는 서울 성동구의 구정 목표는 ‘사람 중심의 행복한 성동’입니다. 1910년대 러시아 혁명의 구호도 ‘인간이 주인인 세상을 건설하자’였습니다. 인간의 꿈과 의지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이런 사상은 창조 이래 계속돼 왔는데 하나님 중심의 세상과 맞선 주장입니다.

그래서 낙원에서 쫓겨났고, ‘바벨탑 사건’과 같이 계속 하나님께 반항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인간은 인간의 꿈과 욕망을 실현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인간이 주인인 세상을 만들고 싶어한다는 말입니다. 이 사상은 날이 갈수록 맹렬하게 불타오릅니다. 슬프게도 희망은 보이지 않고 절망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래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탄식했습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답은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요 14:26)입니다. 성령님의 도움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으며, 복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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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설교 (Wednesday Worship Sermon)

부활절 사건에 대하여

마가복음 15장 11∼15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산헤드린은 예수님께 신성모독죄를 적용해 처형했지만 실상은 그보다 더 절박한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십자가 처형을 고집한 산헤드린의 속사정을 살펴봅시다.

마가복음 15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위해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산헤드린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1절). 산헤드린의 주된 구성원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서기관들입니다.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운 주동자라면 가룟 유다는 결정적인 공모자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한통속이 된 것은 그들의 속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가룟 유다를 도적이라 했습니다(요12:6).

산헤드린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위선자라 할 수 있습니다(마23:13). 재판장인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죽일 만한 그 어떤 죄, 더구나 십자가에 처형할 만한 죄를 찾지 못하고 놓아주려 했습니다. 하지만 산헤드린의 사주를 받은 군중들의 요구를 따라야 했습니다. 산헤드린의 목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했을까요.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 대접 받고 문안 받는 것을 좋아했고, 부자들과는 억지로라도 친구가 되려 했어도 가난한 자들과는 눈도 마주치기 싫어했습니다.

누가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말뿐인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눅10장).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위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약한 자의 편이 되어야 할 저들은 오히려 그들을 외면했습니다.

주님은 어디를 가든 병자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한센병 환자도, 이방인도, 죄인이라고 비난받는 이들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유대인도 사마리안도 심지어 로마인도 찾아가 만나주시고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 곁은 언제나 인산인해였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에 감사하고 감탄하며 찬송하고 영광을 노래했습니다. 주님께서 감싸주시는 따스함은 저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산헤드린이 주님을 따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점점 커가는 데 자신들은 작아져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대책이 무엇이었습니까. 산헤드린은 군중을 충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예수님이 베푸신 사랑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완결판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요19:30)입니다. 그 증거가 예수님 부활입니다. 2016년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는 한국교회가 되길 소망하면서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한 주 되길 바랍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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