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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관련 10대 명언

  

   

1. 인명재처(人命在妻) 사람의 운명은 아내에게 있다.
  

2. 진인사대처명(盡人事待妻命) 최선을 다한 후 아내의 명령을 기다리라.
  

3. 수신제가(修身제가) 손과 몸을 쓰는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4. 처화만사성(妻和萬事成) 아내와 화목하면 만사가 순조롭다.
 

5. 지성(至誠)이면 감처(感妻) 정성을 다하면 처가 감동한다.
  

6. 처하태평(妻下泰平) 아내 아래 있을 때 모든 것이 평온하다.


7. 순처자(順妻者)는 흥(興)하고 역처자(逆妻者)는 망(亡)한다


아내(Wife)에게 순종하면 삶(Life)이 즐겁지만, 

  
거스르면 칼(Knife) 맞는다.

  
8. 맹처삼천(猛妻三遷) 맹렬한 아내는 육아를 위해, 


부동산 투자를 위해, 자녀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를 한다.
  

9. 회개하라 처국(妻國)이 가까웠느니라.
  

집을 비웠던 아내가 돌아올 때가 되었으니,
  

마음을 단정히 하고 잘못된 행실을 고쳐라.
  

10. 지어미 살아실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지나간 후에 애닯다 어이하리

  
아내가 살아있을 때 잘해야지 

  
떠나고 나면 한탄해도 소용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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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설교 <교회란 무엇인가? >

 

 

 


교회란 무엇인가?

 

1.들어가는 말


교회는 경건한 신앙인의 집단이기 이전에 하나님에 의해 설립되고 유지되며 갱신되는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의지에 기초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성을 닮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공동체는 '공동 체로 계신 하나님'을 닮고 있습니다. '공동체로 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가 썼던 말인데, 이 말은 하나님이 혼자로 계신 분이 아니라 삼위일체를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유대교나 이슬람교인들의 하나님과는 달리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삼위로 계시는 가운데서 통일성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말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코이노니아(사귐)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현대신학자 몰트만은 이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사회적 삼위일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소중한 진리의 하나는, 바로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은 언제나 공동체를 향한 의지를 갖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홀로 계신 분이 아니라 공동체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말로 표현해서,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교회, 즉 친교 혹은 사귐을 이루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개인주의자가 아니라, 더불어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사회주의자라고 표현하니까, 교단의 어떤 분은 제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좌익의 이데올로기로 설명한다고 비판하셨는데, 본래 이 용어는 개인주의와 대립된 의미에서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도 이 용어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주의와 동일한 어휘를 갖는다는 의미에서, 단순하게 보면, 오해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방식이 공동체적이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회주의자라고 말한다면, 이 때 하나님의 존재방식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주적 사회주의 혹은 사회적 민주주의와 유사하다고 할 순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과 이데올로기는 유사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유한한 존재로서 늘 불완전한 용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고, 불완전한 사회체제나마 이를 수용하고 신앙의 눈으로 늘 이를 개혁해 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본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삼위일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사회적, 공동체적 존재양식입니다. 또 본인은 교회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성자-성령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이런 각도에서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사귐'이라고 불립니다.

 


2.교회의 본질


1)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것은 바로 교회가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무슨 임무를 맡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교회를 선택하시고 교회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기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선택하셨을 때, 하나의 믿음의 백성과 이 백성을 통하여 복을 받게 될 온 인류를 염두에 두셨는데, 이 때에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에게 복을 내릴 임무를 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아 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큰 복과 임무를 주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믿음의 후손들인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세우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백성은 구약성서의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신약성서의 시대와 교회사의 시대를 거치면서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 한복판에서, 이 세상의 백성 한가운데를 지나가면서 '하나님의 도성',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가는 백성, 유랑하고 순례하는 백성입니다.

물론 그 나라는, 요한계시록의 환상에서 나타났듯이, 어떤 저 먼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 한가운데로 내려오기 때문에, 바로 이 세상에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계의 피안이 아니라 이 세계의 미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후의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세워지고 경험되는 영원히 현재적인 세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저기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가운데' 있다",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바로 이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나 라를 찾고 구하고 두드리고 있으며,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도 이곳에 오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와의 관계에서 교회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반영(反影), 복사(複寫), 거울, 즉 피사체(被寫體)입니다, 교회는 그 나라의 여명(黎明), 전조(前兆)이요, 그 나라의 전위대(前衛隊) 혹은 돌격대(突擊隊)입니다.

보충설명: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의 전체에 면면히 흐르는 신앙과 희망의 대상인 하나님의 나라는 1.정치적 독재-억압이 없는 민주주의적 정치, 2.경제적 독점-착취가 없는 사회주의적 경제, 3.차별-소외가 없는 평등주의적 사회, 4.자연의 지배-착취가 없는 공생주의적 생태계, 5.죄책감과 심판과 무의미로부터 해방된 하나님과의 교제 안의 영원하고 복된 생활을 지향하는, 성서의 중심되는 구원개념입니다.

 


2)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신약성서 시대에서는 교회론에 하나의 큰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교회를 새롭게 소집하셨습니다. 그분은 옛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병들고 흩어져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이 백성을 치유하고 갱신하고, 이 백성이 다시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온전히 봉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새로운 무리를 모으셨습니다. 그 중에서 12명을 택하신 것은 바로 상실된 이스라엘의 사명을 회복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온 몸을 다하여 제자들을 부르시고 섬기시고, 끝내 는 그 몸을 십자가에서 깨뜨려 피와 물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시면서까지 인류의 구원과 교회의 소집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몸으로 다시 살아나셔서 인류와 교회에 새로운 희망을 주시고, 또 그분이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셔서 교회를 새롭게 소집, 갱신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형성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아낌 없이 내어 주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그 구원받은 자들을 모아 자신의 몸으로 삼으시고, 그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사랑과 희생의 능력으로써 교회를 통치 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온갖 은사들을 주셔서 교회 안에서 은혜가 충만하게 하시며, 교회를 날로 날로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새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자신의 몸을 주셔서 우리를 그의 몸으로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창설자는 능력있고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머리)도 예수 그리스도이며, 교회를 유지, 갱신, 확장하시는 분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성서 시대에 와서도 교회는 여전히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선택으로 인하여 세워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보충설명: 신약성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임재)하는 곳 혹은 형식은 1.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사도적 생활(마태 28,18 이하), 2.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떼고 피를 마시는 성만찬 공동체(고전 11, 23 이하), 3.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사귀고 예배하는 형제-자매적 공동체(마태 18, 20), 4.헐벗고 주리고 목마르고 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고 섬기는 곳(마태 25,31 이하; 교회 밖의 교회 혹은 보이지 않는 교회 혹은 익명적 그리스도인!), 5.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능력으로써 충만해진 그분의 몸, 하나님의 대성전이 된 우주(골로새서, 에베소서)입니다.

 


3) 교회는 '성령의 교제'입니다.


셋째로 교회는 성령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교회는 또한 성령이 창조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공동체, 성령 안의 사귐, 성령의 코이노니아입니다. 물론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시고 부르시고 모으신 것입니다만, 아버지와 아들의 활동 속에는 언제나 성령도 함께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그 자신 안에서 서로 협력하고 협동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이 없는 교회는 온전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약성서 시대에서 성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시고, 신약성서 시대에 성자 예수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셨지만, 성령이 오심으로써 비로소 교회는 이 세상에서 구체적인 능력을 얻고 구체적인 모습, 즉 '성령의 교제'라는 모습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신학적 출발점은 하나님 아버지의 공동체 의지(천지 창조와 이스라엘의 선택)에 있고, 교회의 역사적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 사(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새로운 백성의 선택)에 있지만, 교회의 사회적 출발점은 바로 성령강림(오순절 사건과 선교적 파송)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교회 안에 풍성한 성령의 은사들을 선사하시고, 그리하여 성령의 은사들을 통하여 교회를 생기있고 활기차고 능력있게 하시고, 이 세상의 어두운 거짓 영들의 한복판에서 참 증인, 세상의 빛과 소금, 변화의 누룩으로 만드십니다.


보충설명: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모든 지체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은사들 간에 아무런 차이나 구별이 없으며,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과 차별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들 간의 구분은 존재합니다. 바울에 의하면 세 가지 종류의 은사가 있는데, 1.'선포의 은사'에는 사도, 예언자, 전도자, 교사, 권고자가 속해 있고, 2.'봉사의 은사'에는 병고치는 자, 사랑을 베푸는 자(집사)가 있고, 3.치리의 은사에는 감독(장로)이 속해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심지어 고난도 하나님의 은사이며, 남 모르는 사랑의 행위, 기술적 봉사, 결혼, 순결(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독신적 삶) 등도 은사로 인정됩니다.이처럼 주님이 부르신 자에게는 모두 은혜의 분량대로 은사가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의 독점이나 획일화, 횡포나 지배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각자에게 주어진 것대로, 서로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써 피차 복종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과 그 은사들의 코이노니아(사귐, 교제), 즉 카리스마적 공동체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 자신 안에서 이미 공동체를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떻게 각기 교회를 이루시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삼위 안에서 일치를 이루시듯이, 이 삼위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그리스도 의 몸-성령의 교제가 서로 조화와 일치를 이룰 때, 비로소 교회는 온전한 모습을 이룹니다. 카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주로 강조해 왔고, 개신교 회의 대다수 교회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오순절 계통의 교회는 '성령의 교제'를 특히 강조해 왔습니다. 이 세 가지 교회론의 공통요소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 하 나님의 주도권에 있습니다만, 각기 독특한 차이점을 갖고 있습니다.


1.하나님의 백성은 교회의 역사성-시간성-세상성을 나타내고, 2.그리스도의 몸은 교회의 영원성-공간성-구별성을 나타내며, 3.성령 교제는 교회의 구체성-사회성-초월성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역사 안에 있으면서도, 영원하며,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모임임을 알아야 합니다.

2.그리고 교회는 시간대(성부 시대- 성자 시대-성령 시대 혹은 구약 시대-신약 시대-교회사 시대)를 통과하면서도, 공간성(예수 그리스도와의 수직적 일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지니며, 그러면서도 사회적인 모임임을 알아야 합니다.

 

3.교회의 사명


교회가 이 세상 한 가운데서 해야 하는 역할, 임무 혹은 사명과 봉사는 무엇입니까? 교회가 그 무엇을 하든지 간에 결국에는 이 땅에서 복음(하나님의 나라)을 증언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유일하고도 독특한 사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활동은 오직 이 증언으로 요약되며, 교회의 모든 봉사는 이 증언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증언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증언은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와 치유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였듯이, 교회도 말과 행위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증언합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교회가 말로써 증언하는 형태에 찬양, 설교, 교육, 전도, 선교 및 신학(6개)을 포함시켰고, 행위로써 증언하는 형태에 기도, 목회상담(영혼치유), 그리스도인의 모범적 생활, 봉사, 예언자적 행동 및 친교(6개)를 포함시킨 적이 있습니다(12개). 그러나 본인은 교회가 하나의 교회이지만,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로 둘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관점에서 교회의 사명을 설명해 볼까 합니다.


먼저, 교회는 모이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어원인 '에클레시아'는 바로 세상에서 불러 모여진 자들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거룩한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도의 교제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세상에서 부름받아 모인 거룩한 백성입니다. 이런 모이는 교회가 해야 하는 사명은 예배와 찬양, 설교, 교육, 신학, 목회상담 및 친교입니다(6개).

그리고 모이는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모이는 것은 흩어지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는 결국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신학자 본회퍼도 "교회는 남들을 위해 존재할 때에만 교회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남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깥을 향해 존재합니다. 교회가 남들을 위해서 해야 하는 기능에는 기도, 전도, 선교, 봉사, 모범적인 생활 및 예언자적 행동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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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15-21 라합의 믿음

 

여호수아서에는 가나안 정복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크고 작은 수많은 사건들이 24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중에 여리고 성 정복 역사를 기록했으며(히11:30절), 그 사건 중에서 기생 라합의 신앙을 행함 있는 믿음의 대표적인 모델로 제시했습니다.(11;31절), 이스라엘 군대를 대적하려고 했던,여리고는 완전히 무너지고, 모든 사람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라합과 그에게 속한 사람들은 구원(救援)의 열매를 얻었습니다. 이와 같은 라합의 행함은 참 믿음의 증표(證票)요 증거(證據)라고 성경(聖經)은 교훈(敎訓)하고 있습니다.

 

1.라합은 하나님의 군대를 영접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성 함락을 위해서 정탐꾼들을 보내었습니다. 정탐꾼이란 오늘날의 간첩으로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 은밀히 파견되는 첩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여리고 성을 정탐하던 중에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여리고의 비밀경찰들에게 쫓기다가 기생 라합의 집에 뛰어들었습니다.(1절), 이때 기생 라합은 그들이 여리고를 함락하기 위해 보내진,정탐꾼임을 알았지만, 영접하고 숨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라합은 어떤 이유로 적이었던 정탐꾼들을 영접했겠습니까? 그녀가 지조 없는 기생이거나 자기 한 목숨만을 부지하기 위해 민족을 헌신짝처럼 여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라합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확신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한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다"(히11:31절), 고 증언합니다. 그러면 그녀의 영접은 신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는 큰 결단입니다. 그녀는 이미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역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8-11절),

 

그녀는 하나님을 "상천 하지의 하나님"(11절),이라고 고백했는데, 이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유일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이미입니다. 라합은 그와 같은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했을 것입니다. 사실 그녀는 하나님과 자기 민족과의 사이에서 갈등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타락한 자기 민족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하는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 결단이 이스라엘 정탐꾼들에 대한 영접이라는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라합처럼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하고 그리스도를 영접이라는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라합처럼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결단이 곧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는 유일한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요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우리에게 증거합니다.

 

2. 라합은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영접할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고 그들을 도피시켜 주었습니다. 15절에 "라합이 그들을 창에서 줄로 달아내리우니 그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라합이 정탐꾼들을 도피시킨 일은 민족을 정면으로 배반하는 행위요, 국가의 배신자가 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라합이 이스라엘의 첩자들을 도피시킨 일은 발각되기만 하면 중한 벌에 처해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국가 보안법에 걸려 최고형인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라합은 그 자신은 물론 자기 가족의 목숨을 걸고 정탐꾼들을 보호해 주고 도피시키는 모험을 감행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모험은 자신이 택하신 신앙의 길로만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목숨보다 신앙을 더 귀중하게 여겼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타락해 가는 세대 가운데서 신앙을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참된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음을 교훈해 줍니다. 기독교 역사상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버린 이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분노하는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오늘날 조그만 손해 때문에 가볍게 신앙을 버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은전 30에 예수님을 판 유다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날은 세상의 허영과 이익 때문에 스스로 신앙을 버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성도들은 신앙을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세상의 위협과 박해 때문에 신앙을 버리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모든 것을 잃는 경우를 당해도 라합처럼 하나님과 그 나라만을 섬기는 길만을 택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계2:10절)고 명합니다.

 

 3.라합은 약속을 믿고 붉은 줄을 내걸었습니다.

 정탐꾼들을 숨겨 도피시켜 준 대가로 라합이 받은 상급은 세상의 가치로는 계산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라합이 받은 상급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사망과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믿음의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라합과 그 가족에게 구원으로 보상해 주신 것입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여리고 공격시에 정탐꾼들과 맺은 약조를 믿고 붉은 줄을 그 창가에 내리웠습니다. 그 줄은 만일 이스라엘 군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여리고 성 사람들에게 라합이 첩자와 내통했다는 증표도 됩니다.

 

그러나 라합은 믿음으로 그녀와 온 가족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수6:22-25절), 라합이 믿음으로 내린 붉은 줄이 라합과 그 가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줄이 된 것입니다. 결국 라합이 내린 붉은 줄은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대속의 피에 대한 믿음을 상징해 주는 것입니다.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百姓)들은 어린 양의 붉은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름으로 죽음의 사자로부터 구원(救援)받은 경험(經驗)이 있습니다.(출12;13절), 마찬가지로 라합은 붉은 줄을 창가에 내리우므로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더 나가 라합은 더 커다란 축복(祝福)을 받습니다. 그것은 라합이 다윗 왕(王)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祖上)이 되어 그리스도의 족보(族譜)에 올랐다는 사실입니다. 마1:5절에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야고보 사도의 지적처럼 "유령의 믿음"입니다.

 

약2:19.20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고 했습니다. 라합처럼 믿음을 실행하는 성도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의 축복과 영광을 풍성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가장 천한 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이러한 라합의 구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아무리 무능하고 가치없으며 천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그의 영광에 참예케 한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라합과 같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2:26절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실천이 뒤따라야 하며, 행위는 믿음의 증거요 열매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라합이 행함의 열매를 통해 그 믿음을 입증하고 큰 축복을 누렸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의와 진리를 행하는 산 믿음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라합이 내걸었던 붉은 줄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피를 믿는 신앙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장자의 재앙에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름으로 죽음을 모면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를 믿는 이는 영생 구원을 얻게 됩니다. 라합의 행함있는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라합은 비록 기생의 몸이었지만, 믿음으로 정탐꾼들을 영접하고 도피시켜 줌으로서 여리고 멸망시 구원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믿는 것을 실행해야 그 축복의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믿으면 말씀대로 행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입술로만 주여주여 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행위로 옮기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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