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모세는 어떤 믿음을 가졌나 출12장21~36절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생활의 기본은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친척과 본토 그리고 아버지의 집을 떠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백30년 간 애굽의 노예생활을 접고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널 수 있었던 것도 역시 믿음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모세의 믿음을 좀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모세는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은 맹신이 아닙니다. 불건전한 상상을 토대로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와 하나님의 약속 위에서만 바르게 형성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누구입니까? 이 말씀 위에 굳건히 서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환경이 믿음의 토대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앞세우다가 큰 낭패를 당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둘째 믿음은 행동으로 분명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출애굽기 12장28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물러가서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재앙을 당하지 않는 방법은 가가호호 문설주와 인방에 양을 잡아 바른 피를 뿌렸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한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은 우리들의 환경과 상식을 초월할 때가 많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모세의 행동하는 믿음은 3백만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속에 믿음의 불을 지폈습니다.어린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며 출애굽의 여정을 위한 준비를 마친 것입니다.애굽 전역은 장자와 첫 것의 죽음을 맛보아야 하는 비극의 소용돌이에 휩쓸렸습니다.그러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행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인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믿음이란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셋째 믿음은 상급이 따른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 12장35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께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믿음을 통해 하루 저녁에 해방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고 상급과 물질도 얻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첫 것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온 나라가 슬픔에 가득 찼지만 믿음의 백성들에게는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해방의 기쁨이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상급이 따릅니다. 히브리서 11장6절을 봅시다.“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삶의 목표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과 환경과 소유를 믿다가 낙심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처럼 어려운 때가 바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지금이 바로 전도할 기회입니다. 우리는 행동으로 믿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함이 있는 믿음을 소유해 풍성한 삶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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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도마의 부활절 요20장24~29절

 

기독교에는 중요한 두 절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탄절이요, 또 하나는 부활절입니다. 성탄절은 이 세상을 구속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난 절기요, 부활절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심으로 사망권세를 깨고 인간의 구속을 완성시킨 절기입니다.

 

즉, 성탄이 인류 구속의 시작이라면 부활절은 인류구속을 완성한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미를 바로 깨닫고 믿는다면 이 두 절기의 축복과 은혜는 한없이 나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 두 절기를 개개인에게 적용해본다면 또 다른 의미와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성탄절은 객관적인 주님의 탄생이지만 부활절은 주관적인 주님의 탄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계실 때는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시지만 실제로 주님은 그 당시 만난 사람들 속에서만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 아니 가까이 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를 믿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절 이후에는 예수님이 부활한 후 성령으로 오시어 누구든지 어디서든지 어느 때든지 믿을 수도 있고,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 개인으로 보면, 성탄절보다 부활절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나의 부활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부활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주님의 수난의 행사 등을 하며 기념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성령으로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런 행사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절은 나의 부활절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도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마는 의심 많은 제자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왜 도마가 의심 많은 제자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신 자리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은혜 받는 자리에 도마만이 빠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주님을 쫓아다닌다고 해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신앙은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흔들리는 의심의 장벽을 넘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됩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20:25)

 

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주님은 도마를 사랑하사 도마가 있는 장소에 다시 나타나시고 손을 내밀어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그때 도마에게 부활의 주님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의심 많고 피상적인 신앙의 장벽을 넘게 된 것입니다.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 이다.”(요20:28)

 

그제서야 예수님은 도마의 주님이 된 것입니다.즉 도마의 부활절이 온 것입니다. 도마가 그랬듯이 의심 없이 주님을 믿는 것이 복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지만 오직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됩니다. 즉 나 자신의 성탄이 되는 부활절이 와야 합니다. 그래야 이 어렵고 힘든 세대를 믿음으로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의심은 했지만 도마처럼 자신의 부활절을 맞이하여 주님을 만난 자는 복된 자입니다. 보지 못하고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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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놀라운 사랑, 그 십자가 경험해야 마태복음 27장45~46절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결정됩니다. 십자가로부터 인생의 승패, 생사가 갈라집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은 사십부터가 아니다. 이십부터도 아니다. 인생은 십자가로부터다”

 

그러면 당신은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있으면 생명을 얻는 자요, 그렇지 않으면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자입니다.

 

온갖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드려 불꽃처럼 살다간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모두 다 십자가를 경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마음에 사랑이 일어나고 십자가를 경험할 때 이웃의 허물을 용서할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밀려올 때에 탄식을 감사할 수 있고 십자가가 느껴질 때에 고난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묻습니다.

 

“그대, 겟세마네_그 신음이 들리는가? 갈보리_그 십자가를 사랑하는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27:46)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네번째 유언입니다. 예수께서 그 영혼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단절 당하심'에 대한 탄식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깊은 아픔은 단절로부터 오는 고통입니다. 사랑하는 이와의 단절, 그토록 믿었던 이에게서의 배신 등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너무나 크나큰 아픔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그 영혼이 완전히 단절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 영혼의 고통이 얼마나 깊었던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그 땀방울이 핏방울 되어 떨어졌습니다. 그 심연의 고통이 이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는 이렇게 처절하게 완전히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아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것이 곧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의 방법이요 하나님의 지혜였기 때문입니다(고후1:18).

 

예수께서 그렇게 처참하게 버림받게 된 것은 바로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버림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로서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어린 양으로서 죄인들을 대신해 속죄 제물로 드려진 것입니다(요1:29).

 

그러므로 십자가 위에 부어진 하나님의 진노는 아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바로 죄인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아! 놀라운 사랑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바로 주께서 그렇게 버림받음으로 우리가 다시 살아난 대속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 때문에 나는 가치 있는 존재, 십자가의 값을 지불해서라도, 독생자를 대속하여서라도 구원할 만한 존귀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감격은 울거나 감사하는 것, 그것만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알고,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 이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그 피토하는 절규가 바로 너희 죄악을 인한 대속의 죽음이라고 누가 일러 주겠습니까? 누가 십자가 외에는 이 땅에 자유가 없고 생명이 없고 희망이 없다고 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십자가의 사랑의 고백을 바로 당신이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골고다의 십자가 사랑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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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사로 한 사람 때문에 요한복음 12:9~11

 

정신의학자 칼 융은 “최후 결과의 본질적인 요인은 한 사람의 생명으로 말미암는다. 그 한 사람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위대한 역사의 변혁도, 전 세계의 미래도, 소망도 한 사람의 숨어 있는 자원에 의 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기독교는 온 인류를 구속하는 종교입니다. 그 구원의 역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특별히 가까이 지냈던 가정이 있는데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이었습니다. 예수는 종종 예루살렘에서 5리가량 떨어져 있는 나사로의 집에서 쉬면서 친교를 나누셨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모함하여 죽이려 했을 때 나사로까지도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토록 보존하리라”(요한복음 12:24~25).

 

예수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과 같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진리를 생물학적인 사실을 통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나사로 한 사람,즉 나 하나의 소중성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의 모험과 신앙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선민이 되었고, 모세 한 사람의 신앙과 용기로 말미암아 노예생활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류가 타락한 것과 같이 예수로 말미암아 그 분을 믿는 사람마다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진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칼 한 번 쓰지 않고 여리고를 정복했습니다.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 한 사람 한 사람 때문에 나라와 민족에 영광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한 사람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됩니다. 벽돌 하나, 하나가 쌓여 큰 건물을 이루는 것과 같이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맡겨진 사명을 다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평양 시내에서 낯모르는 소년의 손에 전도지 한 장을 쥐어주었습니다.16세 밖에 안된 이 소년은 가정 외에 별다른 외출을 모르고 사는 어머니께 그 전도지를 전해드렸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소년의 어머니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후 평양 장대현교회 교인이 되었고 이 여인 한 사람으로 인해 한국 최초의 여전도회를 조직하게 되었으니 그분이 바로 이신행 여사입니다.

 

미국의 하버드대학에 가면 캠퍼스 안에 동상이 하나 서 있는데 그것은 설립자인 존 하버드의 동상입니다. 하버드는 1636년에 영국에서 이민 온 목사입니다. 하버드 목사는 신천지를 복음화하려고 목사를 양성키 위해 자기의 모든 재산과 장서를 바쳐 하버드대학을 창설했습니다. 초기에 목사를 양성하던 대학이 지금은 수많은 세계의 석학들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말미암아 인류역사에 큰 공헌을 한 하버드대학이 된 것입니다.

 

“한 자루의 초에 불을 밝히는 것이 어둠 속에 그냥 있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하나님은 우리를 가정과 교회, 직장에서 너와 더불어 살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살다보니 힘든 일도, 냄새나는 일도, 고통스런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향해 변화되고 나를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큰 상처가 생길 수 있습니다.나사로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를 믿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오늘의 말씀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나 한 사람 때문에 오는 결과의 중요성을 깨닫고 한 알의 밀알이 되어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시는 성도가 되시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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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리스도인의 삶은 섬기는 삶 막10장 32~45절, 빌1장 1절~11절

 

그리스도인의 삶은 섬기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기 위해서 왔으며 많은 사람들의 죄 값을 위하여 나의 생명마저 내어 주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세상의 것과 다른 가치기준이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봉사를 위한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을 세상의 권세처럼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때때로 교회 안에서 세상적인 가치기준을 버리지 못한 직분 자들 때문에 문제가 야기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그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야고보와 요한 두형제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왕이 되거든 특별한 대우를 해 달라고 청탁을 했는데 이 일로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을 비난한 것입니다.

 

교회가 왜 불화하고 다투며 분열합니까?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직분 자들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지배하고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게 되고 싶은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사람이고 교회는 섬기는 것을 배우는 학교이며 섬기는 것을 훈련받는 훈련소입니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섬김의 삶을 사셨고 우리에게 명령하셨으니 우리도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그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된 섬김이 향기로운 봉사입니다.

 

또 그리스도인의 봉사는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소유는 모두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재물이나 지식, 재능까지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길 때, 그 모든 것들은 참 가치가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남을 섬기라고 내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봉사하는 사람은 항상 이러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봉사는 그의 신앙의 열매입니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는 것처럼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의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참 섬김의 자세를 종을 예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종은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둘째, 종은 대가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했든지 “나는 마땅히 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는 자세를 잃지 않습니다. 셋째, 종은 자기의 의지대로 무슨 일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인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일을 위하여 부름 받은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섬기는 삶을 살 때 기뻐하십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종이 되셔서 섬기는 삶을 사신 것처럼 우리가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 사순절을 지키는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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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고난은 축복의 기회 눅12:16~21

 

프랑스의 한 철학자는 “전 세계는 행복을 열광적으로 찾고 있다. 그러나 인생의 행복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서도 행복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공통적인 욕구”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외 없이 동일하다는 것과 문제는 행복을 추구하되 그것을 분명히 모른다는 데에 인생의 숙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행복이며 과연 어디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요.본문의 어리석은 한 부자는 창고를 크게 지어 모든 곡식과 필요한 물건을 거기 가득 쌓아두고 평안히 쉬며 먹고 마시고 즐기고자 했습니다.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해 부요하지 못한 자에게 미처 생각하지 못한 놀라운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부자는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먼저 부자가 먹고, 마시고, 즐기고, 고통 없이 쉬는 육체적 만족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적 만족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인 욕망의 허망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육체적 만족을 느꼈다 할지라도 만족이 크면 클수록 만족 후에는 육체적인 욕망의 허무감이 더욱 큰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육체의 욕망을 좇는 일에 줄달음질을 치고 있습니다. 자기가 빠졌던 함정에 다시 빠지고 앞서가는 사람들이 빠진 웅덩이에 자신을 던져 넣는 결과에 주목하지 않는 비극적인 삶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의 수고와 고난은 잠깐이요, 구원의 행복은 족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진정한 행복은 육체의 만족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 그 안에 물건과 곡식을 쌓는 물질의 부요가 자신에게 최대의 행복을 보장해줄 걸로 알았습니다.

 

현대를 3M의 시대라 합니다. 기계(Machine)가 지배하는 시대, 다수(Mass)가 높이 평가되는 시대, 돈(Money)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물질만능주의의 시대로 특징지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은 경제적인 안정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생활만 부하면 모든 염려가 물러가고 마음의 평화가 보장되는 줄로 착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방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경제적으로 부요하지만 정신적인 면에서 과연 부요합니까? 그러므로 물질의 풍요를 누리는 인간이 행복의 소재를 어디에 두었느냐가 문제입니다. 풍요를 누리면서 행복의 소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 둔다면 그 이상의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인생의 행복은 하나님과의 정당한 관계를 맺는데 있습니다. 본문 21절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는 이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육체와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는 바람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 대해 얼마나 충족한 부요를 쌓았느냐가 문제입니다.

 

행복이 어디에 있을까요. 결코 육체의 만족이 아닙니다. 물질의 풍요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예수를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그를 알고 그에게 헌신할 때 비록 괴로워도, 고단해도 그것은 고통이 아니요 진정한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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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최후의 만찬 갈3장13~14절

 

어느 날 영국의 북부도시 에딘버러 시립공원에 12그루의 나무가 심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열두제자의 이름을 따서 나무 하나 하나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그리고 맨 마지막엔 가롯유다의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나무들은 모두 다 잘 자랐습니다.

 

몇 년이 지나 나무들은 제법 무성하게 가지를 드리우고 그늘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나무 그늘에서 쉬거나 지나가면서 나무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베드로 나무야 많이 자랐구나. 좀 더 무성해 지거라.”또는 “요한 나무야 잘 있었느냐. 너는 사랑스럽구나. 그래, 어서 더 자라서 더 많은 사랑을 받아야지” 그런데 사람들은 가롯유다의 이름이 붙은 나무를 보기만하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예끼 이 몹쓸 가롯유다야! 네가 예수님을 팔아먹었지? 네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했지. 저주를 받아라.”하고 침을 뱉으면서 지나갔습니다. 그런지 3년이 못되어 가롯유다 나무는 시들시들해지더니 끝내 말라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의 저주와 욕설에 그 나무는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저주는 이렇게 무섭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주일 넷째 날인 성목요일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사랑하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습니다(마 26:26~28). 예수님은 그 밤에 감람산에 올라가셔서 밤새워 기도하시고 원수들에게 붙잡혀 온갖 모욕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옷을 벗은 채 가죽 채찍으로 피가 쏟아지도록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가 아니라 저주의 십자가였습니다(신 21:22).

 

예수님은 저주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아무도 지려하지 않는 치욕의 십자가를 나를 위해 기꺼이 짊어지신 것입니다. 하나님마저 얼굴을 돌려버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_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통곡하며 부르짖던 저주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욕심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거짓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불순종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정욕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자존심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맞아야할 그 매를 대신 맞으시고 예수님은 내가 써야 할 가시관을 대신 쓰셨으며 예수님은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와 여러분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죄 값을 치를 능력이 없습니다. 그 죄 값을 치러 주시려고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저주에서 풀려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죽음의 저주에서 풀려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 모두가 마귀의 저주에서 풀려났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고통과 근심의 저주에서 풀려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 때문에 저주에서 풀려 진정한 자유함을 얻은 우리가 된 것입니다.

 

한 주간동안 고난주간이 계속됩니다. 갈보리 언덕에 우뚝 선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내가 져야할 저주의 십자가를 다시 바라봅시다. 그리고 십자가 구속의 은총을 다시 바라봅시다. 그리고 십자가 구속의 은총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받을 때, 아브라함에게 신령한 복과 기름진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축복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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