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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직회 헌신예배 기도

 

 


사랑이 많으시고 인자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희들에게 성일을 주시어 아침부터 주님 전에 나와 주님 품안에서 편히 쉼을 갖게 하시고
 이 시간도 제직회 헌신예배로 제단을 쌓게 허락하시니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저희 제직들에게 일을 맡겨주셨건만 저희들은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하여 하나님 앞에 서기에 심히 부끄럽습니다.
저희들의 믿음이 약하고 나태하여 주님의 책망을 피할 수 없는 악한 종들입니다.
주여 저희 악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저희들의 심령을 정결케 씻어 주시옵소서.
올해도 주께서 저희들에게 직무를 맡겨 주셨사온데 지난해를 거울삼아 올해는 과거에 못 다한 일까지도 성실히 수행하게 하옵소서.

자비로우신 주님! 금년 1년 동안 주의 교회를 위하여 세워주신 제직들이 헌신을 다짐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들에게 제직의 직분을 맡기시고 그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실 줄 믿습니다.
주여, 저희들은 가진 지식도, 물질도, 재능도 부족합니다.
저희들에게 더욱 믿음을 주셔서 주의 보좌 앞에 나아와 큰 사명을 지고,
교회의 기둥답게 교회의 살림을 꾸려가며, 구제와 봉사, 복음전파 등의 일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특히 막중한 직무를 맡은 회장과 임원들을 중심으로 서로 협력하여 교회의 부흥발전에 애쓰며,
가난하고 어려운 교우들을 돌보며, 주님의 복음의 증거자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저희 제직회에서 계획하고 있는 모든 사업 위에 축복하여 주시고,
모든 제직들과 성도님들이 뜻을 합하여 주님의 선한 사업에 동참한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또한 제직들의 가정에 평안을 주시며, 그 사업 위에 축복하여 번영케 하시고, 각 직장에 함께 하여 주옵소서.
능력의 주여! 저희들을 매일 매일 붙들어 주시옵소서.
오늘의 헌신예배를 통하여 마음이 무장되게 하시고 이 결단이 금년 한해 동안 변치않도록 지켜주옵소서.
전원이 온 교회 앞에서 예배와 봉사와 선한 사업에 본이 되게 하시고, 교회 분위기가 뜨거워져서 크게 발전하게 하시고,
결코 한 분도 게을리 하다가 책망 받지 않도록 일깨워 주옵소서.

은혜로우신 주여! 오늘 이 헌신 예배를 위해 주님께서 귀히 쓰시는 목사님을 보내주셔서 말씀으로 은혜 받을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강단에서 주의 말씀이 선포되어질 때,
성령으로 함께 역사하셔서 저희 제직들에게 새 힘을 불어 넣어주는 은혜와 능력의 말씀이 되게 하옵소서.
말씀을 들을 때에 저희 제직들이 큰 은혜 받아 더욱 헌신하게 하옵소서.

주여, 이 시간 저희 제직들이 주님께 헌신하는 마음으로, 진정으로 드리는 이 예배가 주님께 상달되어 헛되지 않게 하시고,
주님께 충성하기로 거듭 다짐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이 예배 시종을 주님께 의탁하옵고
죄로 인해 고통 당하는 저희들을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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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선교학교와 기독교교육

 

 

미션스쿨 활짝… 1909년 전국에 950여개

 

19세기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수행된 선교운동은 복음 전파만이 아니라 서구문화의 이기(利器)들, 곧 교육, 의료 혹은 서양 과학을 이용했다. 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에서의 선교는 기독교 복음 전파와 함께 서구문화 전파라는 성격을 띤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서구문화의 전파자로서 역할을 했다.


당시 한국사회의 현실적 필요와 요청 때문에 학교교육이나 의료활동은 각광을 받았고, 이를 통해 선교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개화와 계몽, 사회변화, 민주의식, 구습 타파, 여권 신장 등 다양한 영역에 있어서 변화와 개혁을 가져왔다. 말하자면 기독교는 한국사회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다.

선교지에서 최초로 선교학교, 곧 미션스쿨을 설립했던 인물은 스코틀랜드의 첫 해외선교사였던 알렉산더 더프(Alexander Duff·1806∼1878)였다. 1830년 23세의 나이로 인도 캘커타로 파송된 그는 선교 사역에 있어서 기독교 교육의 중요성을 입증해준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교육은 복음을 전하는 최상의 수단이었다. 19세기 말 우리나라에 입국한 이들도 의료활동과 함께 교육활동을 복음 전도를 위한 중요한 방편으로 인식했다. 이것은 ‘개화’(開化)라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당면과제와도 부합되는 일이다. 그러기에 조선 정부도 신교육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국내 최초의 기독교학교 배재학당

 

이런 상황에서 1884년 6월 24일부터 7월 4일까지 선교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내한했던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는 조선 정부와 접촉을 시도했고, 고종으로부터 미국 북감리회가 국내에서 교육과 의료사업을 실시해도 좋다는 최초의 윤허를 받았다. 그래서 입국한 선교사들은 학교 설립을 우선 과제로 여겼다.

그 결과

1885년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학교인 배재학당이 아펜젤러에 의해 설립되었다.

1886년에는 언더우드에 의해 경신학교와 감리교의 스크랜턴 여사에 의해 최초의 여자 학교인 이화학당이 설립됐다.

이화학당은 1887년 2월 고종황제가 하사한 이름이었다. 경신학교는 예수교학당, 민로아학당, 구세학당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경신학교라는 이름으로 현존하고 있다.

1887년에는 여선교사 엘러스(A J Ellers)에 의해 정신여학교가, 캠벨(J P Campbell)에 의해

1898년에는 배화여학교가 각각 서울에 설립되었다.

1886년부터 시작된 세브란스에서의 의학 교육은 한국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899년 정식 의학교로 출범했고, 1901년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가 되었는데, 1908년에 최초로 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였다. 이 학교는 1915년 설립된 연희전문학교와 1957년 병합되어 연세대학교로 발전했다.

 

한반도 전역에 세워진 기독교학교

 

또 평양에서는 1897년 베어드(W Baird)에 의해 숭실학교가, 1894년에는 모펫(S Moffett)에 의해 숭인상업학교가, 1899년에는 감리교의 노블(W A Noble)에 의해 정의여학교가, 1903년에는 모펫에 의해 숭의여학교가 각각 설립되었다. 대구에서는 1903년 브루엔(H M Bruen)에 의해 신명여학교가, 1906년 아담스(J E Adams)에 의해 계성학교가 설립됐다. 그 외에도 선천, 강계, 재령 등지에 여러 기독교 학교가 설립되었다. 부산의 경우 1895년 멘지스에 의해 일신여학교가, 1906년에는 마산에 아담스와 이승규에 의해 창신학교가 세워졌다. 남장로교 선교부가 일한 호남 지방의 경우 전주에는 신흥학교(1900) 기전여학교(1902)가, 광주에는 숭일학교(1907) 수피아여학교(1908)가, 목포에서는 정명여학교(1902) 영흥학교(1903)가, 순천에는 매산학교(1913)가 각각 설립됐다. 캐나다선교부는 함흥에 영생여학교(1903) 영생남학교(1907)를, 간도에는 은진중학교 명신여자중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 외에 감리교회는 서울 외에도 인천 수원 공주 등지에 기독교 학교를 설립했다.

 

청일전쟁 후 한국에서의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그후 사립학교가 급증했는데 1909년에는 전국에 950여개의 기독교계 학교가 설립됐다. 그 가운데 장로교계가 605개교, 감리교계 학교는 200개교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설립된 선교학교는 한국에서의 사립학교 교육을 주도하게 된다. 통계의 차이가 있지만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탄할 당시 조선총독부는 전국에 300여개 기독교 학교, 약 3만명을 헤아리는 학생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기독교 학교에 의해 변화된 사회상

한국에서 기독교 학교는 세 가지 점에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교육은 특수한 계층의 일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것임을 일깨워 주었다. 공교육(公敎育·public education) 개념을 심어준 것이다.

둘째, 교육은 남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성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선교부가 여자 학교를 설립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자에게 있어서 무식은 덕이니라”는 고루한 의식은 여자 학교 설립과 함께 불식되었다.

셋째, 서구적 개념의 교육과정의 다양화였다. 과거 우리의 교육은 생의 가치나 삶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과거(科擧)라는 국가고시를 위한 것으로서 관직에 나가는 방편에 불과했다.

그러나 선교학교를 통해 교육은 건실한 민주시민을 양성하고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교육임을, 그리고 다양한 교육과정을 통해 사회 여러 영역의 인재를 양성하는 것임을 일깨워 주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교육은 한국사회 변화를 주도했다.

(고신대 교수·이상규 /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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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으로 삽시다
 

사도행전 20장 22∼28절

지구상에는 50만 종류의 식물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식물 중 쓸모없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야생종자 전문가인 강병화 고려대 교수는 “세상에는 잡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식물은 나름대로 사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잡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그것이 꼭 있어야 할 풀입니다.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한낱 미물도 그러할진대 주님의 사람인 크리스천에게는 더 큰 사명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본문에서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라고 했습니다. 사명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주신 명령이요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은 내가 고안해내고 명상해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령이요 일입니다.

바울 사도는 다메섹에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결박하기 위해 가다가 오히려 예수님을 만나고 사명을 받았습니다. “너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이때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 일평생 달려갔습니다. 그것이 삶의 목표였으며, 사명이 된 것입니다. 바울이 받은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복음을 ‘은혜의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은혜의 복음이란 죄로 말미암아 사탄의 종으로 끌려가 영원토록 고통을 당할 인간을 구하기 위해 만드신 하나님의 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독생자를 보내시고 내가 당할 벌을 대신한 고귀한 희생입니다.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볼 때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요, 하나님의 길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은혜의 복음은 돈을 주고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사명이었습니다. 인간 편에서는 은혜로 받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희생입니다. 우리는 거저 은혜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바울의 사명일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믿을 때부터 바로 우리에게 주신 사명으로 깨닫는 사람도 있고 지금 깨닫는 사람도 있고, 아직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명을 발견하기 위해 기도합시다. 그래서 그 사명을 붙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명에 헌신하는 성도들이 돼야 합니다. 복음 전파의 거룩한 사명이 바울에게만 주신 사명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사명임을 알고 거룩한 목표를 향해 일평생 전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변충진 인천 늘푸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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