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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가족공동체 이해를 통한 선교전략 / 움마 다르 일부다처제 수피즘

 


장훈태-천안대학교 기독교학부 선교학


들어가는 말


2001년 9월 11일 테러 사건 이후 지구촌 사람들은 이슬람1)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런 관심과 함께 이슬람 관련 방송, 학술세미나,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왜 이런 현상들이 갑자기 일어나는 것일까라는 의구심마저 생긴다.


라민 샤네 교수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가장 큰 차이중의 하나는 기독교는 성경을 현지어로 번역하지만 이슬람은 꾸란을 현지어로 절대로 번역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아랍권의 종교적 근본주의가 세계 각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사회의 도덕성이나 사회 참여에 대한 프로그램 또는 마인드보다는 개인적인 신앙차원 즉 종교적 사유화에 더 집중되어 있다. 반면 이슬람은 교회와 국가를 구분하지 않고 양자를 통합시키는 사고 체계를 갖고 있다2)고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에 대한 오해를 하거나 이해기 부족하여 혼돈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에 대한 오해가 있다.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을 기독교의 또 하나의 형태라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슬람 신앙을 알라와 신자의 개인적인 관계로 보고 있는데 이것이 이슬람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다. 우리는 이슬람의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종교의 창시자이자 첫 번째 이슬람 국가의 건국인 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슬람은 정치와 종교를 하나로 본다.3) 정치와 종교의 일치를 통해 그들은 또 하나의 집단을 이루며 전 세계를 이슬람화하려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스리랑카의 이슬람이다. 스리랑카 무슬림들은 가톨릭계의 중 · 고등학교를 인수한 후 무슬림 학교로 변경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4) 이들은 하나의 종족집단을 형성하여 기독교와 대항하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 선교사들이나 외국 인권단체의 보고를 통하여 우리는 계속 이슬람 국가에서 일어나는 기독교 신자들이 당하는 박해소식을 보면 알 수 있다.5) 이슬람은 종교의 다원화를 거부하고 종교가정치, 사회의 모든 분야를 독점하려고 한다. 이슬람은 영혼구원을 위한 종교 본질보다는 국가와 사회를 강제적이라도 이슬람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이슬람사회의 종교적 비관용성은 날로 더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이 관용의 종교라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다. 전호진 박사는 ‘이슬람 원리주의는 자기들 나름대로는 할말이 있을지 모르나 합리성과 정당성을 상실한 극단의 논리이다. 특히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이슬람을 정치 이데올로기화하고 있다. 대부분의 이슬람 사회도 이슬람을 이데올로기로 몰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6) 이런 지적과 함께 이슬람의 가족제도에 대한 일반적인 특징과 이슬람 공동체의 복음전달, 장애요인과 가능성에 대한 진단을 통하여 복음 전달의 접촉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Ⅰ 이슬람의 가족제도


1.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Ummah)


이슬람은 전 세계 인구 63억의 21%에 해당하는 13억의 무슬림을 가지고 있는데 앞으로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한다.7) 최근 들어 무슬림의 성장속도는 어느 종교보다 빠르다. 이슬람은 96%로 가장 높고, 힌두교는 63%, 기독교는 55.6%이다.8) 특히 무슬림은 서부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에 걸쳐 살고 있다. 지난 20세기의 무슬림 성장은 대단했으며, 1900년도에는 12.3%에서 2000년은 21.1%로 성장했다. 이는 대부분 높은 출생률과 이주로 인한 성장이다. 서부 아프리카와 인도네시아, 미국에서는 개종으로 인한 성장률이 가장 높은 추세이다. 이처럼 급성장 하는 이슬람의 원동력은 무엇이며, 이들의 집단적 힘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바로 이슬람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A. D 622년 메디나(Medina: al-Madina, 도시)9)로 피신하면서 기본 생활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마호메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메디나에 살고 있던 정주자로서 그들을 지원한 안사르(Ansar)와 메카에서 온 자신의 추종자인 ‘무하지룬’(Muhajirun)의 형제를 맺게 함으로10) 한 집안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ummah; 대가족)의11) 주요한 기원이 되었으며 ‘이슬람 형제애’를 이룩하는 기초가 되었다. 메디나의 무슬림 공동체는 단순한 공동체에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국가이며, 그 후의 사건의 경과로 인해서 제국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이슬람 공동체 형성의 또 하나의 원인은 무함마드가 죽기전에 행한 마지막 설교에서 ‘이슬람의 형제애’를 역설하였다고 한다.


이슬람의 잠언에서도 한 무슬림이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무슬림이 아니라고 규정한다. 이란의 혁명가였던 호메이니는 이슬람 혁명에 성공한 후 "우리 이슬람은 다른 정부와 다른 지역에 거주할 지라도 한 가족이다"라고 선언하므로 이란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었다. 이슬람은 무슬림을 형제애로 묶어주는 공동체를 움마라고 하고 이를 알라 신이 세운 거룩한 기구로 믿는다. 이슬람 사회에서 움마의 구속력과 기본적인 특징은 가정이라는 숭고한 체제 속에서 길러지고 북돋아지는 경건성과 도덕적 행위이다. 이러한 배경을 보면서 가족 구성원들과 그에 딸린 식구들의 권한, 의무, 특권과 관련된 분명하고 상세한 훈계와 지시 사항들이 꾸란과 하디스(hadith) 문서에서 발견된다. 더욱이, 가정 생활의 실질적인 모델은 우리가 사랑하는 선지자의 삶의 형태로 주어진다. 무슬림에서 움마는 사회의 기본단위로서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사회의 기본적인 단위로서 가정은 상호적인 의무가 있다. 개인은 그 자체로 중요치 않고, 사회적인 존재로서 중요하다.12)


이러한 배경에서 무함마드가 형제애와 평등사상을 강조하게 된 원인은 메카에서 13년 동안 신의 계시를 전달받으면서 활동했던 시기를 메카시대라고 한다. 미신을 타파하고 우상숭배를 금지해야 한다는 유일신 유신론 사상13)의 운동을 전개했던 것이 메카에서 그의 주된 임무였다면 메디나에서는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생존 경쟁으로 인하여 야기된 부족간의 갈등을 치료하고 메카 아주자와 메디나 후원자 및 유대인들 간의 서로 다른 정치적, 종교적 목적을 융화시켜 하나의 공동체(ummah) 즉 이슬람 신앙공동체로 만드는 것이 그의 메디나 사명이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형제애 사상을 고취14)시켰다. 이슬람에서 형제애 혹은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한 핏줄을 이어받은 것을 강조할 뿐 아니라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 모두가 신의 아들이며 딸이라는 것을 내세워 신 앞에서는 인간 모두가 똑같다는 평등사상을 펼쳐 나간다. 그러나 이슬람의 형제애 혹은 평등사상을 보게 되면 남성 중심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모스크 사원을 출입하는 것이나 집안에서의 활동을 보면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 허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구별되어 있다.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에서 여성의 위치는 상당히 위축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15) 최근 들어 여성 해방운동가들에 의해 무슬림 여성의 활동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는 추세이지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꾸란에 나타난 움마는, 먼저 윤리적 공동체로서 신자들이 선행을 서로 격려하고, 악덕을 미워하며 배제하는 곳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움마는 단순히 신자들이 모이는 종교 공동체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움마는 정치와 종교가 하나가 되 철저한 신정국가(theocracy)일 뿐 아니라 순수한 종교와 순수한 정치의 분리가 불가능하며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분리가 없다.16) 따라서 움마라는 이슬람의 공동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정교분리는 상상할 수 없다. 종교와 국가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연합체이며, 이것이 후에 이슬람이 확산되는데 중요한 모체가 되었다.17) 실질적으로 이슬람 사회에서 국가는 신정(神政)일 뿐 아니라 국가를 통치하는 왕이나 대통령은 살아있는 신과도 같다고 믿는다. 이슬람 국가에서 알라, 왕, 국가는 삼위일체일 뿐 아니라 이를 비판하거나 파괴하는 자는 처벌을 받게 될 만큼 종교와 국가는 연합체이고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에서 움마는 대가족일 뿐 아니라 일차적인 집단(움마)인 것이다.18)

 

2. 무슬림 가족과 일반적 특징


독실한 무슬림들에게 이슬람의 제도나 관습은 성스러운 율법으로 성립된 종교적인 정치체제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그 주권의 원천은 신이며 주권자인 칼리프이다. 즉 칼리프의 일차적인 임무는 이슬람을 지탱하고 전파하는데 있다. 그 율법은 신에 의해서 계시된 성스러운 법률이고 공인된 해석자들에 의해서 확충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무슬림들은 이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단지 신앙과 의식과 종교적인 행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형사적인 문제는 물론 가족제도와 다른 사회에서는 세속적인 권력에 의해서 처리되어야 할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무슬림의 가족 혹은 이슬람의 넓은 집단 사회 가운데 그 기초가 되는 공동체인 가족을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슬람 사회가 다른 문명사회와 비교해 볼 때 나름대로 특이한 가족제도와 관습을 가지고 있는데, 무슬림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제도들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보아야 한다.19) 무슬림 가족은 율법의 기초아래 새로운 가정, 새로운 국가, 새로운 사회조직, 새로운 교리로서 가족을 이끌어간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무슬림은 상호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는 가족 공동체를 이루며 이를 중심으로 하여 활동한다. 그러면서도 가정내부에는 평등한 가족관계가 아닌 전향적인 평등관계를 가지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가정은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쉽게 파괴되지 않는다.


무슬림의 가정은 때로는 무미건조해 보일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삶은 은은한 사랑이 배여 있는데 이는 공동체적인 삶의 패턴이 이를 증명하는데, 특히 무슬림들의 주거형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무슬림의 주거 형태의 표본은 다르(dar)라고 불리는 가옥이다. ‘다르’는 크든 작든 대부분의 가옥은 중앙에 위치란 마당, 경우에 따라서는 돔으로 덮인 마당과 연결된 방들을 보게 된다. 혹은 건물(bayt)들로 구성되기도 한다. 가옥들은 그 규모, 방들의 숫자, 분수나 멋지게 꾸민 수도시설, 스투코로 된 조각이나 회화, 기타 개인적인 용도의 시설물의 유무에 따라서 차이가 난다.20) 필자가 무슬림 가정을 방문했을 때 가옥의 구조가 지역이나 국기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보았지만 대부분의 가옥 구조는 비슷했다. 아프리카수단의 경우는 커다란 대지 위에 마당은 중앙에 위치하고 침실과 주방은 별도로 되어 있었다. 이집트의 경우는 시골을 제외하고 도시는 3층집으로 되어 있으면서 남성과 여성의 응접실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개방화된 이슬람 지역(마그레브지역)에서는 공동체 중심으로 중앙에 거실이 있어 모두가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었다. 집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싸롱을 중심으로 한 긴 의자는 침대의 역할도 하기 때문에 생활이 편리하고, 가족 공동체간의 결속력을 갖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시부모를 모시는 일로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며, 부모가 귀찮아 자녀를 괄시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대가족으로 한 집에서 함께 거주하며 음식을 나눌 뿐 아니라 명예와 수치까지도 함께 공유한다.

 

1) 결속력이 강한 무슬림 가정


앞에서 무슬림 가정은21) 공동체를 중심으로 성립되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서구사회의 가정이 선진화가 되어 개인적이면서 핵가족화 되어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무슬림 가정은 결코 개인적이 아닌 결속력이 강한 공동체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가족공동체의 핵심은 남성 중심이면서 장남의 권위가 매우 높다.22) 무슬림 가족회의에서 의사결정이나 중요한 사항들은 장남의 의사가 상당히 반영된다. 물론 아버지는 모든 면에서 그 가정의 중심 역할을 한다. 한 가정 안에서 가족구성원의 행위나 결정이 독립적일 수 없으며 단절된 ‘너와 나’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무슬림 가정에서 남자가 분가할 경우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무슬림 가족 공동체로부터 분가한 형제들은 서구사회에 비하여 여전히 깊은 가족적 공동체와 유대관계를 갖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는 대개 독립을 한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 사이는 그렇지 않다. 부모와 자녀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신분상 위치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한 울타리 안에 있다. 한 예로 자식이 이슬람 율법이나 종교적인 행위에 있어 범법을 행하였을 경우 부모가 모든 것을 책임을 져야 한다. 부모는 자식에 대한 책임이 언제나 뒤따른다는 것을 보여 준다.

 


2) 무슬림 가정에서 부모의 절대적 권위


무슬림 가정에서 부모는 모든 것에 대한 권위가 존중된다. 무슬림 가정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대한 일종의 소유권을 가진다. 무슬림의 부모가 자신의 자녀에게 가혹한 학대를 가해도 다른 사람이 옆에서 간섭을 할 수 없다. 무슬림 사회에게 아동학대라는 용어를 찾기란 어렵다.


만약 자녀가 사회적 신분이나 명예가 있게 되면 전적으로 부모의 공덕으로 돌려진다. 자녀가 잘못하면 그것도 부모의 절대적인 책임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자녀가 많은 부(富)를 가지게 되면 그것도 부모의 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만큼 부모의 권위는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부모의 절대적인 권위만큼 평온하거나 안정적이지는 못한 것이 무슬림가정의 단점이다. 무슬림 가정에서 아버지의 지배적인 태도 때문에 아내와 자녀들이 자신들의 개인적인 자유를 찾고자 하여 속이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덧붙인다면 아내들은 이 부분에서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다.23) 그래서 아내나 자녀들이 남편이나 아버지에게 무엇을 말하더라도 다시 그녀의 남편에게 옮겨 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행동으로 간주된다. 한 여인이 외적으로 사소한 말로 한 가정에 파문을 일으키거나 당신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릴 경우 이혼24)까지 초래한다. 이 같은 환경으로 인해 여성들은 부당한 취급과 법적인 구제책이 없는 결혼 생활에서 종종 정서적인 생존을 위해 교묘한 방법이나 속임수를 쓰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기독교인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고 따르며 존경할 것을 권면한다.(엡 5:22-33).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순종에 대한 모델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아브라함을 주라고 부르면서 순종"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은 사라가 원하는 대로 하갈을 아내로 취하기도 했고 또 그녀를 내쫓기도 했다. 아내들의 이슬람적인 순종과 성경적인 순종은 비교할 수 없다. 이슬람적 순종은 외적이고 그만큼 쉽게 할 수 있지만, 곧 모욕과 증오감, 복수심과 기만을 낳기도 한다. 반면에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마음에서 스스로 받아들이고 신뢰와 존경을 주며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며 충실함을 소중히 여긴다. 아무튼 무슬림 사회에서 부모의 권위나 남편의 권위는 절대적이지만 반대로 모순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무슬림 사회의 생활이 성경적인 토대 위에서 기초되었을때 부부관계, 자식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려내게 되며, 이는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된다.


3) 무슬림 가족 공동체의 명예심


이슬람 사회에 있어서 한 가정의 명예와 가족 구성원인 개인의 명예는 동일하게 여겨진다.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의 명예는 그 가족의 명예가 되고, 한 사람의 수치는 곧 바로 전체 가족에게 영향을 미친다. 가족 중에 하나가 명예를 더럽혔으면 그는 가정에서 추방되기도 하며 다른 누군가 자기 가족 중 한 사람을 욕되게 한다면 가족 전체 명예를 더럽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히 한 가족의 문제일 뿐 아니라 넓은 의미의 친족 전체의 문제로까지 비화된다. 그만큼 가족의 역할과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슬람 사회의 가족의 역할로서 먼저 여성의 위치가 분명하고 투명해야 한다. 여성은 정숙함, 정절, 성적 부도덕이 있어서는 안 된다(수라 33:59; 수라 24:2-10; 24:21-16; 27-33; 수라 4:24). 여성들은 결혼에 있어서도 꾸란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먼저 신앙이 있는 배우자 선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수라 60:10; 수라 2:221; 4:25), 특정 결혼에 대한 금기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결혼의 금기 사항으로 근친상간이 있다(수라 4:22-27).


4) 무슬림 가정에서 모성(母性)의 중요성


무슬림 사회의 일반적인 상황은 어린이 교육에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무슬림가정은 일부다처제이기 때문에 누가 아버지인가를 어린이에게 밝힌다. 입양에 관한 조항은 있을 수 없다. 이런 가운데 모성의 중요성은 더 강조된다.25) 무슬림들은 자녀를 낳고 기르는 헌신적인 어머니의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뜻을 가진 ‘낙원이 어머니의 발에 있다는 것을 잊어 왔다. 여성 및 무슬림 사회 전체는 이슬람이 성공적인 어머니 상이 무슬림의 종교적 완전성으로 본다는 사실을 망각해 왔다. 유아부터 성인초기의 기간동안 그들이 필요로 할 때 그들 곁에 있어주며 그들을 양육할 때 표현되는 어머니의 애정과 관심은 다른 어떤 것으로 대치될 수 없다’는 것이다.26) Schleifer에 의하면, "무슬림 어머니들은 알라와 가족에 대한 기본적인 의무를 다해 왔을 뿐 아니라 지식을 쌓는 등의 다른 활동들을 성공적으로 추구해 왔다. 무슬림 여성들이 전통적으로 학자, 상인, 공예인, 심지어 비상시에는 군인으로서 활동하는 것은 이슬람의 견지에 상반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샤리아’(Sharia)의 관점에서 이러한 활동들은 의무로서 모든 여인들에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부차적인것들이다. 여성의 기본적인 역할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모성은 여성이 이생에서 존경받을 수 있고, 궁극적으로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특별한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27)


무슬림 사회에서 모성의 중요성은 어린이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질서 정연하게 양육 받은 아이들은 몇 가지를 기억하며 일생을 살아야 한다. 어린이는 먼저 ‘너희를 낳아준 자궁을 공경하라’(수라 4:1)는 교육을 받는다. 둘째, 다른 어린이에게 축복하라(수라 16:72). 셋째, 부모를 공경하고, 노인을 보살피라(수라 17:23-24). 넷째, 부모에게 감사하라(수라 31:14). 다섯째, 부모에 대한 친절, 어머니는 그를 낳았다는 것(수라 46:15)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 사회에서 모성은 어린이의 성장과 무슬림 공동체의 정체성과 책임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한 가정의 집단성, 돌봄 집단에 소속하고자 하는 문화적 욕구에 기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사람들의 사회생활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방식의 집단성을 수행하는 의미를 배운다.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이슬람에 기반을 둔 것은 아니지만 족장시대를 거쳐 한 가정의 공동체내의 역할로 인해 강화되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슬람 사회의 모성(母性)의 중요성이 강조됨에도 불구하고 이상과 현실은 항상 별개의 것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매춘 어린이 범죄(형제가 자매를 죽이는 행위), 근친상간, 남색, 여성할례, 여성의 동성연애, 가족 구성원과 여성 세계의 이기심 등이 부정적인 면이다. 그렇다고 모든 면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긍정적인 측면도 있는데, 가족간의 화목, 환대, 사람과의 관계, 행사들의 중요성 강조, 가정의 가치, 어린이와 노안을 돌보는 일 등은 어느 가정보다 강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5) 이슬람 사회의 일부다처제


이슬람에서 무함마드는 일부다처제를 인정한다.28) 사회는 제각기 시대적 상황에 따라 불가피하게 또는 남성의 분별없는 성욕으로 일부다처제가 행해져 왔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 국가들은 법률적으로 일부일처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꾸란을 실정법의 모체로 삼고 있는 이슬람권에서는 예외가 되고 있다. 물론 꾸란도 일부일처제를 원칙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특수한 환경과 조건하에서는 일부다처가 합법적으로 허용하는 예외규정을 두고 있다.29) 그들은 일부다처제의 뿌리를 아브라함에서 찾는다.30) 이런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무슬림 남자들은 네 명까지의 아내를 둘 수 있다. 이슬람에서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게 된 것은 첫째, 이슬람 초기에 전쟁의 결과로 인해 양산된 전쟁과부와 고아 특히 자립적인 삶이 어려운 여성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둘째, 아내의 불치병으로 인하여 정상적인 부부생활이 불가능할 경우이다. 셋째, 가족의 대(代)를 잇고 자신의 이름과 가문을 영속화하기 위해서이다. 한 남성이 네 명의 아내를 두었을 경우 부양할 재정적 능력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도 특수한 환경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31)


그리고 부인들에 대한 남편의 공정성을 보면, 첫째, 각 부인 소유의 독립가옥을.마련하여 주고, 둘째, 각 부인마다 남자의 낮 시간과 밤 시간을 균등하게 분배하고,셋째, 아침이 되면 각 부인을 찾아가 낮 동안 남편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일이다.32) 그리고 남편은 네 명의 아내 가운데 어느 하나를 편애하지 말아야 하고, 다른 하나는 네 명의 아내를 항상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 그리고 아내들은 상호간 협력하고 질투하지 말아야 하며 서로 다투거나 질투하게 되면 그것은 이혼 사유가 된다.


아무튼 이슬람 사회에서 한 남성이 네 명의 아내를 둘 수 있다는 것은 남녀간의 차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슬람 역사 1400년 동안 ‘동등하게’라는 말의 의미를 한 남자가 모든 아내를 물질적인 면에서 똑같이 취급해야 한다는 것으로 가르쳐 왔다. 만약 그가 한 여자에게 반지나 드레스를 주면 다른 여자에게도 같은 품질의 반지나 드레스를 주어야 한다.33) 동등하게라는 논리에 대해서 이 정순 박사는 부인들 사이의 동등함을 말하는 것이며, 한 남자가 네 명의 부인을 둘 수 있는 것은 남녀의 차별이지 동등이 아니라34)고 지적한다. 오늘날 일부다처제를 법적으로 금하는 나라는 마그레브의 튀니지와 소아시아의 터키이다. 일부다처제를 지키는 나라는 모로코, 레바논, 요르단, 수단 등이다. 국가법에 의해 승인에 의해 일부다처제를 실행하는 나라는 시리아, 이란, 소말리아, 파키스탄, 인도35)등이다.

 


6) 남녀차별과 서구의 문제


우리의 삶의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너무나 순진하다 못해 무신경적이라는 것이다. 서구인들은 자신을 남녀로 구별하여 관계하지 않지만 동양에서의 세계관은 남녀가 구분되어 있다. 이들은 항상 자신이 남자인가 여자인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동양 여인이 한 남자와 대화를 한다고 보면 곤란하다. 한 여성이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한 남자와 대화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적절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게 된다. 심지어는 의도적으로 여성이라는 것에 큰 신경을 쓰면서 유혹을 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동양의 여성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무슬림 여성들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따라서 남녀간의 차별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슬람 학자 알리 다쉬티에 의하면,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사회에서는 여자는 독립적인 인격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남자의 소유물이었으며, 여자에 대한 어떠한 가혹스런 대우도 허용된 풍속이었다고 한다. 꾸란 4:34에 ‘남자들은 여자의 관리자이며‥ 반항적인 여자라고 생각되는 자들을 충고하고, 또 여자를 침실로 데려가 때리라고 가르친다’. 꾸란 4:38에 ‘남자는 여자의 보호자’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 역시 남녀의 불평등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슬람법에서는 상속에서도 남녀간의 차이가 있음을 언급한다. 남녀간의 상속액 배분 비율은 2대1의 기준이 보통이다.36)


따라서 이슬람에서 남녀 차별은 여자가 얌전한 체해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느 성별이 중요하고 힘을 가졌는지 실증하는 것이 된다. 남녀 차별은 가문의 명예와 평판이 매우 밀접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가정은 가족들의 이성 관계를 제한하고 조정하며 통제한다. 이는 남성의 권력을 기초로 해서 아랍인들이 여성을 성 차별하는 기반이 되도록 한다.37) 그 이유는 남녀간의 문제를 사회적인 문제로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대단한 잠재력이 있는 힘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슬람 사회에서 남녀간의 차별은 꾸란에서 전반적으로 여성에 대해 부정적인 영향을 나타내고 있어 그 영향이 오늘날 전 이슬람 세계에 미치고 있다.

 

7) 무슬림 가정에서 여성의 보호


이슬람 사회에서 일부다처제를 허용한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일부다처제를 개인의 욕구나 성적인 만족을 위한 것보다는 사회복지 개념으로 해석한다. 꾸란 4:3에 "···한 여성이거나 너희 오른 손이 소유한 것이거늘 그것이···적합한 것이라" 이 구절은 고아의 복지를 위한 조건을 제시하면서 결혼에 대한 규칙을 소개하고 있다. 이 결혼 준칙의 선포한 역사적 배경은 「우후드」 전투시기 이후부터라고 본다. 이 전투에서 무슬림 병사들의 사상자가 발생함으로 무슬림 공동체내에는 많은 고아들과 과부들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들에 대한 대우는 최선을 다해서 돌보아야 하고 인간의 박애정신과 평등원칙에 의하여 다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38)


예로, 모로코에서 한 젊은 남자는 이슬람의 다섯 기둥을 실행하기 위해 메카에 두 번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슬람 준칙을 지키기 위해 메카를 순례한 것이다. 무슬림 법에는 여성은 혼사서 자유롭게 메카를 순례하지 못하며, 항상 남자 친척의 남성이나 인도자의 안내가 있어야만 순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여성은 남성의 보호가 있어야만 활동할 수 있다. 무슬림 여성이 남성과 동행하거나 여행을 할 수 있다. 해도 여성은 베일(veil)을 착용하고 떠나야 한다. 이슬람 공동체에서 베일은 여성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의상이다. 이는 여성으로 하여금 유혹하는 행동, 꾸밈새, 여성의 정숙함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착용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예속이 아닌 보호로 간주된다. 오늘날 무슬림 여성해방운동가들에 의해 베일에 대한 규정을 법적으로 폐지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얼마 전 터키의 일부 여성들은 베일을 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는 현재 이슬람의 변화이며 여성해방운동가들의 주장을 허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은 베일은 남성들로부터 보호하는 방패일 뿐 아니라 남성에게는 여성에 대한 유혹을 방어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39)


그러나 꾸란에서 제시하는 여성에 대한 좋은 의도의 규칙이나 방법이 있다. 해도여성에 대한 우대정책은 매우 부정적이다. 실질적으로 이슬람 지역에서 고아원이나 여성을 위한 복지시설은 찾아보기 힘들 뿐 아니라 한 남자에게 고아들과 여성을 관리하도록 허락한 것은 이슬람 전통문학 즉 자힐리야 문화가 그들의 세계관과 문화 안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불이익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는 꾸란 4:3에 "…너희를 부정으로부터 보호하여 주는 보다 적합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면 결혼한 여성의 불이익이 내용상에 담겨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한 여성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성불능이거나 심한 질병으로 성생활을 할 수 없어 이혼을 할 경우 그 부인은 보호해 줄 보호자를 잃게 된다. 이러한 조건으로 인해 질병에 걸린 부인을 보호하면서 다른 여성을 맞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슬림 사회의 법이나 준칙을 볼 때 꾸란은 대체적으로 여성들에 대해 부정적이다. 여성의 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곳, 여성의 권리가 허용되지 않는 곳이 무슬림 가정의 특성이다.

 

Ⅱ. 이슬람 가족제도에 따른 복음 전달


무슬림의 한 구성원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데 많은 장애물로 이슬람 근본주의와 전통적인 교리, 자할리야의 문화,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요소, 남성 중심의 결혼과 권위 등이 있다. 그들이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인한 어려움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 감정적, 신학적, 역사적, 문화적인 이유들로 인해 기독교에 대해 뿌리 깊은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아프리카 식민주의 시절에 제국주의적인 선교로 인한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 기독교인의 이중적인 삶의 모습, 빛과 소금의 역할로 생활화되지 않은 모습들이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가져온 동기였다. 실제적으로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기독교인이라는 말만 들어도 그들은 대화를 거부하거나 외면해 버리는 현실은 과거 서구선교사들과 잘못된 선교정책, 탄압에 의한 것임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요소들도 있지만 더 실제적인 장애요소는 기독교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가족공동체, 국가, 지역 공동체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는다.


1. 무슬림 전통주의적 제도로 인한 복음 전달의 장애요인


오늘의 교회는 선교를 전적으로 배제하는 사고방식과 세계관이 만연해 있다. 선교라는 단어의 의미는 재정의 되고 희석되어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의미로 다가온다. 오늘날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것만이 선교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선교는 복음적인 측면과 사회적 측면 사이에 항상 균형을 유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어떤 측면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우리는 쉽게 발견하게 된다. 과거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NGO 활동을 통한 기아대책, 지뢰희생자, 고아 입양 문제를 위해 선교하고 모금하는 것, 성경학교를 세우고 선교사를 후원하는 것, 라디오를 통한 복음전파를 위해 모금하는 것이 선교의 일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한 영혼을 사랑하고 그들을 향한 헌신으로 사역하는 선교사와 교회개척, 선교현장의 교역자들을 돕는 선교 헌금을 모금하는 일은 그렇게도 힘이 든다. 그 이유는 교회와 교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선교의 정의에 대한 혼란과 뒤범벅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원인이다. 이같은 혼돈은 선교가 우월하다는 생각, 선교는 오래 전에 끝이 났다는 사고가 지배적일 때 일차적인 장애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 중국에서는 ‘교회가 신자 한사람을 얻을 때마다 나라는 국민 한 사람을 잃는다’라는 유행어가 있을 정도로 아시아의 그리도인들 중에는 신앙을 받아들이기 위해 가족들과 고통스럽게 이별을 해야 했던 사람들이 많았었다.40) 또한 북아프리카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믿을 경우경찰의 계속적인 검문과 미행을 받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41) 동아프리카의 경우 그리스도를 신앙으로 전적으로 받아들일 경우 여자의 경우는 남자로부터 버림을 받고 남자의 경우는 여자로부터 버림을 받았다.42) 그만큼 신앙의 자유가 없었다. 오히려 이슬람 사회에서는 다른 종교의 회심의 자유보다는 박해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다. 실제적으로 세계 이슬람 국가들은 타종교 국가를 대상으로 이슬람을 전파하면서 자국 내에서 기독교를 선교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슬람은 평화와 정의를 위해 싸우고 이를 위해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슬람국가에서 기독교인이 무슬림을 향해 ‘당신은 종교의 자유를 믿는가’라고 질문을 하면 물론 믿는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당신의 아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한다면 허용하겠는가’라고 질문하면 ‘나는 그의 목을 자를 것입니다’라는 대답43)을 보면, 기독교인에 대한 이해나 회심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무슬림임을 알 수 있다.


이슬람 국가에서 무슬림들은 타종교로 개종하는 것은 죽음과 같다. 무슬림 공동체에서 개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종교적, 가족적, 사회적으로 불가능하도록 제도화되어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슬람법은 전통적 사회의 종교적 관습, 법률적인 제도, 경제적 적용제도가 배교자로부터 재산이나 생명을 빼앗는 것도 합법적으로 간주한다. 무슬림들은 작은 공동체 안에 한 사람이라도 배교하게 되면 직장에서의 퇴출과 취업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들의 배교는 단순히 개종한다는 말로 쉽게 표현하기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는데 공동체 곧 작은 공동체인 가족들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복잡한 문제들이 내포되어 있다. 실제적으로 모로코에서 한 자녀가 기독교로 개종을 했는데 그 여파는 아버지와 그 형제들 그리고 그와 관련된 공동체에 연관되어 고통을 받기도 했다. 어떤 한 사람이 이슬람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는 엄청난 희생을 지불해야만 한다. 이처럼 이슬람에서 개종하는 사람은 이슬람 공동체로부터의 소외, 부모, 남편, 아내 등으로부터 심한 핍박, 고통, 추방, 불이익 등의 온갖 불이익을 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 회심하는 사람들이 비록 실제적인 숫자와는 여전히 적지만 어느 때보다 증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슬람권에서 영적인 필요를 점점 더 느끼고 있고 그들을 위한 기도가 강화되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이슬람 지역의 형제, 자매들은 기독교의 영적인 부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성육신, 영생, 구원, 죄 용서 등에 대한 용어들은 이슬람에서 듣지 못한 것들이라 매우 관심이 높다.


샤네 교수는 이슬람권 선교의 가장 장애물 중 또 하나는 바로 정치적 문제라고 지적한다.44) 이슬람 사회에서는 정치적인 배경이나 기반 없는 종교를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기독교 선교사들은 정치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현지에서 정치적인 형태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흐려지고 혼동스럽게 된다.


패트릭 존스톤(Patrick Johnstone)은 이슬람 선교장애 요인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감정적, 신학적, 역사적, 문화적 이유들이라’고45) 지적한 바 있다. 여기서 실제적인 요소는 기독교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국가와 가족으로부터의 강한 압박과 추방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슬람 사회에서 기독교 근본진리를 믿고 신앙생활하기란 그만큼 힘이 든다. 따라서 무슬림 전통주의적 제도에서는 복음의 커뮤니케이션의 장애가 발생하게 되어 선교의 장애가 된다.

 

2. 무슬림 가족 공동체 따른 선교전략


1) 기독교선교 메시지의 사회적 공적 영역에서의 효과


우리는 이슬람권 선교를 위해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복음의 접촉점을 찾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슬람 사역의 어려움이 계속된다면 기독교 선교 메시지가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효과적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만 되는 것인가의 문제가 남게 된다.


이슬람 지역의 선교사역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분명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종교가 정치보다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종교와 정치는 상호 교차하며 정치 공동체와 도덕적 공동체에 의해 상호 중첩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종교가 정치를 인준하고 영향을 미쳐야지 정치가 종교를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에 의해 인준 받는 정치는 정치적 행위가 기독교 신앙과 신실함의 핵심인 정직성과 책임성의 표준에 도달해야 함을 지도자들이 주장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구속하신 하나님 앞에서 책임감을 느껴야 하고 인간 공동체내에서 상호간 책임을 져야 한다.


2) 복음전달의 효과적인 기회


종교는 인간의 연약함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여 보고자 하는 인간실존의 한계에 대한 몸부림이며, 인간 존재 의미에 대한 회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자기실현의 방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슬람도 인간론이 사람의 자력 구원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철학적이면서 이데올로기적이다.


무슬림들이 알라에 대하여 경배하거나 꾸란을 낭송할 때, 알리에 대하여 순종할 때 마음에 평안히 오고 사회전반에 걸쳐 진정한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종교이상의 이슬람교는 단순히 종교 이상의 총체적인 삶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의 주장처럼 이슬람은 신앙의 차원을 넘어선 삶 그 자체이다.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것들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무슬림들이 이러한 삶에 만족하며, 알라에 대한 순종과 행위가 일치하는가에 대하여 묻는다면 회의적이다. 필자는 무슬림들에 대한 태도에 대하여 의문점을 갖는다.


하나는 그들이 신봉하고 믿는 알라에 대한 신앙이 진실하고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는가? 둘째는 강압적이고, 준칙에 의존하고, 불평등적인 신앙 규범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되는가? 셋째, 이슬람은 신앙이라고 보기보다는 정치적이라는 점이 더 강하다는 점이다. 넷째, 어떻게 종교가 삶의 일부가 된 무슬림들의 영혼을 악령이 지배하는 것 등이다. 그리고 무슬림들의 일상적인 삶이 꾸란에서 규정하고 있는 엄격한 신앙 행위에 대한 것이라면 무슬림들의 영은 대부분 샤머니즘으로 불리는 악한 영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46)


이슬람의 무속 신앙적인 요인은 신비주의에 속하는 수피즘과 관련이 있다. 수피는 원래 이슬람의 세속적이며 비금욕적인 성격에 반대하면서 출발했다. 이슬람의 창시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는 극에 달했고, 이미 독신주의에 대한 비난과 영적인 기능을 가진 성직자 제도의 부재 등에 기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적 생명의 위치에 대한 예비적인 타협 등은 중동 지역의 사람들에게 세속적인 종교로 이해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슬람 지도자들 가운데 이슬람에 헌신적인 정신을 그들의 일상생활에 바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에게 이슬람은 단순한 외적 의례들의 집합이 아닌 영적인 훈련이었다.47) 수피주의자의 핵심은 수도원적이거나 아니면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여 이동하면서 꾸란이나 종교적인 경전을 암송하는 것으로 만남을 가졌고, 이러한 암송은 예배의식 성격을 띄어 일종의 춤과 반복적인 리듬 그리고 경전의 암송을 통한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수피지도자들을 신봉할 뿐 아니라 최고의 영적 지도자로 섬기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슬람은 다양한 신앙양태를 가졌음에도 과거나 현재에도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이슬람은 기독교의 가장 무서운 상대가 되어 복음에 대해 너무나 강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슬람 내에 복음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날 것을 믿을 만한 증거들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데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이슬람에 대한 신뢰성에 대한 의문은 복음전달의 좋은 기회가 된다.48) 최근 이슬람의 과격주의자들에 의한 테러 행위는 국제사회에 큰 파장을 가져다주었다. 파키스탄, 알제리, 이집트, 수단, 아프가니스탄, 이란, 유고슬라비아, 인도네시아와 같은 국가에서 발생하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방화와 테러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지하드’(Jihad)라는 명분을 내세워 야만적이고 환멸을 안겨주는 행동을 보여줌으로 많은 무슬림들이 이슬람에 대한 신뢰성에 의문을 갖게 했다. 1999년 인도네시아의 극단적인 이슬람 신봉자들은 교회와 민간인을 향해 약탈을 감행했고, 자바섬에 위치한 교회들을 파괴하기도 했다. 한 교회의 목사 부부가 교회 건물 안에서 이방 신에게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일도 발생했다. 순교자 부부는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죽었지만 그 결과 범죄자 가운데 한 명이 회심하여 믿음을 갖게 되었다.49)


둘째, 이슬람 지역을 향한 중보 기도가 더욱더 강하게 실행되고 있다. 최근 『모로코여 일어나 빛을 발하라』 라는 소책자는 마그레브에 속한 한 국가를 향한 52주중보기도 책자이다.50) 예수 그리스도에게 철저히 회심을 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숫자가 예수의 초자연적인 계시를 통해서 또는 부인할 수 없는 기적적인 치료를 통해서 신앙을 갖게 되었다. 최근 이슬람 지역에서 개인, 가정들 그리고 한 지역 사회가 예수께 돌아오고 있다. 기도는 선교의 돌파구가 되는 도구이다.


셋째, 이슬람국가의 도시화가 복음 전달의 접촉점이 된다. 도시들은 다민족적, 다인종적, 다언어적, 다종교적이다. 이 도시들은 지구촌의 변화를 만드는 곳이며, 권력의 중심지들이다. 도시들이 움직일 때 전세계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51)


도시화는 도전적인 장소이다. 도시들은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 차이들로 가득할 뿐 아니라 대립하는 세계관, 가치 체계, 생활양식들이 도시 중심지에 밀접하게 존재하고 있다. 이 동일한 장소들이 자연환경과 인간 생활을 총체적으로 황폐화시키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세력들을 발산한다. 도시들은 많은 종류의 문제들이 발생하여 매일 다투는 전쟁터와 같다. 이런 측면에서 20세기의 선교 개척지는 시골과 같은 지역으로 이식되었지만 이제는 도시를 미래의 개척지라고 생각하는 전환이 필요하다. 지난 20세기까지는 기독교가 시골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21세기의 기독교는 도시에 중심을 잡고 사역해야 할 것이다.


도시로의 인구 이동은 이슬람 공동체의 영향력과 동일한 대가족 공동체의 영향력에서 좀더 떨어진 환경에 머물게 되기 때문에 무슬림들에게는 복음을 접하기에 훨씬 열린 환경이 된다. 그러므로 이슬람 지역에 대한 선교 전략이나 사역을 계획하는 자들은 도시의 실정을 수용해야 한다. 도시 성장의 이면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구속 목적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다. 이 엄청난 사람들의 군집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역사에 있어 가장 큰 복음화의 기회들 중 하나를 교회에 제공하게 하신다. 대도시에 밀어닥친 여러 인종들, 족속들, 다양한 인간 집단들은 지역적으로 과거의 어느 때보다 더 접근하기 용이하다. 경우에 따라서 새로운 도시 거주자들이 겪는 변화의 과정들은 그들로 하여금 더 복음을 잘 받아들이게 하기도 한다. 또한 도시화에 따라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사회 문제인 가난, 질병, 마약, 매춘, 범죄, 청소년의 일탈행위 등이 도시 한가운데 방치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전도 종족 집단(Unreached People Group)을52) 향한 복음 전달과 도시선교의 기회가 된다.


따라서 세계의 도시화는 선교의 구조로 보아야 할 뿐 아니라 종말론적 구조로도 보아야 한다. 우리 시대의 하나님께서는 지구의 사람들을 서로 더 밀접하게 접촉시키고, 더 많이 서로 영향을 끼치고 의존하여 복음을 듣게 하기 위해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요인들을 통해 결정적인 활동을 하고 계신다.53) 이 활동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구속의 목적을 역사에 진척시킨다. 우리 시대의 표적은 이슬람권 도시이다. 도시를 향한 전 세계적인 이주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기독교 선교의 가장 위대한 무대를 설치하시고 최후의 시간을 위한 무대를 준비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3) 무슬림 선교를 위한 상황화


최근 상황화에 대해 기술한 서적들이 많이 있다.54) 그래서 무슬림을 위해 사역하고자 하는 이들은 숙독하여 지역마다 나름대로의 전략과 개념을 가지고 사역을 추진할 수 있을까를 타진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이런 사역을 위해서는 복음을 상황화하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다양한 생각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자신들의 문화 가운데 있는 무슬림에게 나아가기 위해 완전히 무슬림 스타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55) 이러한 접근 방법은 무슬림들과 동일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슬림은 사회적으로 완전히 독립적으로 될 수 있는 서구인과는 다르게 가족과 공동체와 연루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복음을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전해 주려는 타문화 사역자 그룹이 있다. 이들은 문화적으로 현지문화에 장애가 되는 것은 말씀을 전할 때 반드시 제거해야 된다는 것이다. 만약 복음이 전달된다면 현지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셋째, 상황화에 있어서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다른 문화, 언어그룹, 종교적 공동체에 완전히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무슬림 선교를 위한 상황아 사역에 있어서 상황화의 범위를 확장하는 일에 있어 조심해야 한다. 성경에는 상황화에 대한 두 개의 중요한 모델이 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다른 하나는 사도 바울이다. 선교학자들은 예수께서 인간과 동일화하신 행위를 묘사할 때 성육신 사역(Incarnational Ministry)을 사용한다. 예수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을 살았고 죄를 짓지 않으셨다. 죄의 구속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죄의 굴레 속으로 구태여 들어가실 필요는 없으셨다. 따라서 예수는 유대사회에서 사회적 위치가 낮은 자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위치가 존중받는다고 생각하는 인간들과 문제화 삼으신 것을 본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회심자 사이의 통합을 위하여 무척 노력했다. 바울 자신은 이방인 도시에 살았고 나름대로 이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타문화의 말씀 전달자로서 유대인, 이방인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달했다.


그렇다면 이슬람 문화에서 그들을 회심케 하기 위해서는 먼저 관계성을 개발하는 일이다. 관계성에 대한 가치는 복음을 전하는 지도자에게 또한 유익을 가져다준다. 둘째는 무슬림에서 회심한 자들이 겪게 되는 최대의 갈등은 가장 가까운 공동체와 결별하고 고립되어 개인주의적인 서구식 삶의 스타일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은 공동체의 존립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만일 무슬림 회심자들을 위한 기독교 공동체가 없다면 그들은 갈등을 겪게 되고 결국은 되돌아서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슬람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먼저 우리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이슬람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그것은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의 영에 눌리지 않아야 한다. 무슬림을 우리의 적 사단의 종으로 보아서는 결코 안된다. 우리의 적은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종으로 만든 이슬람의 영이지 무슬림이 아니다. 그리고 무슬림은 우리의 증오와 미움의 대상이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유업으로 나눌 형제로 보아야 한다. 콜린 채프만이말한 것처럼 무슬림들을 대할 때 올바른 자세를 가져야 한다.56)

 

나오는 말


이슬람 역사 1400년 동안은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상대일 뿐 아니라 가장 거대하고 견고한 공동체를 바탕으로 확장을 계속하고 있다. 아랍 지도자 무암마르 가디프는 남아프리카의 이슬람화를 위해 후원을 하고 있다. 이 움직임은 아프리카에서 경제, 문학, 정치적인 연합체를 이루고자하는 이슬람 부흥운동 중의 하나이다.57) 이슬람은 아랍어를 대륙의 주된 공용어로 내걸고, 이슬람 공동체를 통한 세계각국에 무역의 기회를 증진시키려 할 뿐 아니라 모든 수단을 이용하여 개종자를 얻어내려 하고 있다. 새로운 모스국, 이슬람 학교와 대학들이 전 세계에 세워지고 있다.


이제 전 세계는 이슬람의 도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을 보일 때가 되었다. 특히 이슬람 선교에 있어서 여러 문제 중 더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신학적인 부분이 아니라 문화적이 부분으로서 이슬람 공동체(Ummah)의 독특성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여기에 작은 공동체인 가족에 대한 부분은 이슬람 선교전략에 중요한 부분이 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슬람의 가족공동체 이해를 통하여 북음의 접촉점에 대한 가능성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 가능성을 통하여 이슬람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여러 전략들을 활용한다면 이슬람 선교를 위한 모델이 될 것이다. 여기에 대한 가능성으로 먼저 개종자를 돕는 일이다. 회심자가 두 얼굴을 갖는 것이 어쩌면 거의 불가피하고 처음에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회심자가 집에서 자신이 발견한 것을 그룹 사람들에게 말하면 위험성이 따르게 될 것이다. 그런 영적 미숙함에 있는 자들을 살아남도록 도와주고, 언제나 만나서 도울 준비, 성경 공부를 통하여 꾸란의 차이를 설명하고 신앙고백을 하고 따르도록 돕는다.


마지막으로 무슬림을 위해 영적인 세계에서 승리하도록 기도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기도는 복음전도의 기본이 된다. 기도 없는 선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영적 전쟁에 있어 승리하고 사랑이 있는 행함을 보여줄 때 무슬림 선교는 가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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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1 이슬람(Islam)이라는 말은 무슬림들에게는 신에 대해서 신자가 ‘항복한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한다. 그 분사형인 무슬림(Muslim)은 그러한 항복의 행위를 취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무슬림은 어느 다른 존재가 아닌 ‘오로지’신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이며, 따라서 다신주의자가 아닌 유일신주의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2 라민 샤네 교수는 예일대학교에 소속되어 있다. 2002년 8월 6일 ‘이슬람 선교를 위한 해법’이란 주제로 홍영기 교수와 대담한 것을 재인용하였다.

3 Bernard Lewis, 『이슬람 1400년』 김호동 억(서울: 까치글방, 2001), 18.

4 필자가 스리랑카 북부지역을 방문했을 때 미션계의 고등학교가 무슬림화 된 곳을 목격했으며, 가톨릭이나 기독교계의 교사들을 추방하고 대신 무슬림 교사로 채용한다는 소식을 접한바 있다(2002.7_8 스리랑카 북부지역 리서치)

5 오픈도어(opendoors) 선교회가 발행하는 기도소식지에 의하면,‘박해받는 교회와 성도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는 도표가 있다. 기독교 박해 1순위로 사우디아라비아로서 이슬람의 종주국이며, 전세계에 이슬람을 전파하는 선두기지이다. 다음으로 북한, 라오스, 투르크메니스탄, 중국, 베트남, 이란, 몰디브, 남부수단, 코모로제도 등이다.

6 전호진, 『이슬람, 종교인가?』(서울: SFC출판부, 2002), 9. 저자는 본고에서 이슬람을 하나의 종교로 보기보다는 이데올로기로 보고 있다.

7 Patrick Johnstone & Jason Mandryk, Operation World(Carlisle: Paternoster, 2001), 2; 49.

8 이 정순, 『무슬림 여성과 베일』(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17 재인용

9 메디나는 새로운 신앙과 신도들의 중심지가 되는 ‘도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메디나에서의 계시들은 무슬림 공동체 안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들과 관련된 법적 정치적인 사항들을 포함하는 곳이기도 하다. Bernard Lewis, 『이슬람 1400년』 16.

10 이광호, 『세계선교의 새로운 과제』(서울: 예영컴퓨니케이션, 1998), 173.

11 움마와 관련된 것으로 Mahathir Mohamad, Islam & The Muslim ummah, (Hashim Makarnddin: Ma1aysia, 2000), 51-62를 참고하라. 핸드릭 크래머, 『기독교 선교와 타종교』 최정만 역(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5), 244.

12 Affan Seljuq, "The Muslim World League Journa1",/Feb, 1991을 참조함.

13 무함마드가 주장하는 메카에서 유일신론, 유신론 사상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꾸란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으로 그의 신성과(수라 5:19) 십자가 죽음(수라 4:157)에 대한 이중적 부인을 하고 있다.·예수에 대한 긍정적 측면은 예수에 대한 나머지 모든 것들을 언급할 뿐이다. 그리고 예수의 성육신을 부정한다.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할 때 처녀였다(마 1:18-25; 눅 1:26-35). 그러나 꾸란에 보면 무슬림들은 예수님의 기적적인 수태를 받아들인다(수라 3:45-47; 19:21; 21:91)또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꾸란 에 그 이름이 언급된 유일한 여성이라는 것인데, 꾸란은 거기에 대한 참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왜 임의적인가(수라 3:59)? 다만 마리아는 위대한 여인으로 칭송을 받을 뿐이다.

14 최영길, 『이슬람의 이해』 (서울: 도서출판 신지평,1999), 58-9.

15 Latifa, 『빼앗긴 얼굴』 최은희 역(서울: 이례, 2002)을 참고하기 바란다. 1996년 탈레반 정권이 들어선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에게 권위, 인권이란 찾아 볼 수 없다. 라티파는 탈레반의 광신적인 신앙이 자신의 세계를 어떻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희선, "아랍·이슬람 여성에 관한 고찰"-종교적 당위성과 현실- 『선교-문화연구』 2001년 제5·6호(천암: 천안대학교 선교-문화연구소), 51이하를 참조 바란다.

16 전호진, 『종교다원주의와 타종교 선교전략』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7), 293.

17 Ibid., 158-60.

18 봅쇼 그랜, 『마침내 드러나다』 이숙희 역(서울: 죠이선교회출판부, 1995), 174.

19 이광호, 『세계선교의 새로운 과제』 185-90.

20 Bernard Lewis, 『이슬람 1400년』 136.

21 Affan Seliuq, "The Muslim World League Journal’’, Jan/Feb,1991을 참고하라. 무슬림 가정의 제도는 이슬람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가정은 신앙의 가르침에 따라 그 구성원들을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는 사회의 기본 단위이다.

22 꾸란 2:228에 의하면 ‘남자는 여자보다 상위(上位)에 있고 또 위력(偉力)하여 여자의 보호가 된다’(꾸란 4:34)는 것을 보아 남성 우월주의가 존재하고 있음을 본다. 이슬람에서 여성의위치는 언제나 차별적이다. 상속 액에서도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예배의 참석에서도 구별되어 참여한다. 꾸란 4:34에 ‘남성은 여성의 보호자라 이는 하나님께서 여성들보다 강한 힘을 주었기때문이라 남성은 여성을 그들의 모든 수단으로서 부양하나니 건전한 여성은 헌신으로 남성을 따를것이며 남성이 부재시 남편의 명예와 자신의 순결을 보호할 것이라 순종치 아니하고 단정치 못하다고 생각되는 여성에게는 먼저 충고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잠자리를 같이 하지 말 것이며 셋째로는 가볍게 때려 줄 것이라 그러나 다시 순종할 경우는 그들에게 해로운 어떠한 수단도 강구하지 말라 진실로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니라. 『성 꾸란』 최영길 역, (사우디아라비아 파하드 국왕성꾸란 출판청)을 참고바람.

23 크리스틴 말루히, 『미니스커티, 어머니 그리고 모슬렘』 예수 전도단 역(서울: 예수 전도단, 1998), 114 재인용.

24 이슬람 사회에서 이혼은 아주 단순하다. 남편이 아내를 향해 ‘나는 너와 이혼한다’라는 말을 세 번만 되풀이하면 어떤 설명이나 이유 없이 부인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다(꾸란 65;1,2).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꾸란 2:229절을 보면 된다. ‘화해를 통한 두 번의 이혼은 허락되나 그 후의 두 당사자는 동등한 조건으로 재결합을 하든지 이혼을 해야되며 너희가 그녀들에게 주었던 지참금을 되돌려 가져오는 것은 허용되지 아니하나…’라고 되어 있다.

이슬람 사회에서 이혼에 대한 것도 다양하다. 먼저 수라 2:226-242에 나타난 것을 보면, 4개월간의 격리의 시간을 가진 뒤 이혼을 할 수 있다. 수라 4:19-21에는 그들의 뜻에 반하여 여성을 재산으로 삼는 것은 금지하고 있으며, 수라4:127-131에는 과부와 고아들을 도울 것을 명하고 있다. 수라 33:49에는 동침하기 전에 이혼하려 할 때에는 ‘이다트’기간(3개월)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수라 58:1-4에는 오래된 이교도들의 이혼제도를 배척하기도 한다.

25 Donna p. Smith, & Andreas Maurer, 『무슬림을 위한 기독교 전도』(South Africa: MeRCSA,1998), 114-265.; Scheifer, Motherhood in Islam 88.; Andreas Maurer, Islam mission seminar (Intercultural Leadership Institute, 2002), 6

26 Andreas Maurer, Islam mission seminar, 7.

27 Ibid.

28 꾸란 4:3에 ‘‘만일 너희가 고아들을 공정하게 대처하여 줄 수 있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다면 좋은 여성과 결혼하라 두 번 또는 세 번 또는 네 번도 좋으니라 …너희를 부정으로부터 보호하여 주는 것보다 적합한 것이라".

29 최영길,『이슬람의 이해』 214.

30 이광호, 『세계선교의 새로운 과제』 164.

31 Hammudah Abd al Ati, The Family Structure in Islam(USA: American Trust Publications, 1977), 50-145.

32 최영길, 『이슬람의 이해』 216.

33 존 엘더, 『무슬림을 향한 성경적 접근』 KTM 편집부 역(서울: 도서출판 펴내기, 1992), 86-87.

34 이 정순, 『무슬림 여성과 베일』 34.

35 Ibid.

36 전호진,.『종교다원주의와 타종교 선교전략』 299.; 꾸란 4:11; 남자에게는 여자의 두 배에 달하는 몫이 차려지느니라…둘 이상의 여자가 있을 경우는 유산의 3분의 2를 취하고 여자 하나만 있을 때는 절반을 얻게 되느니라’

37 크리스틴 말루히, 『미니스커트, 어머니 그리고 모슬렘』 59-60.

38 『성 꾸란 』 최영길 역, 130.

39 Anne Cppper, Ishamal My Brother(London: STL Books, I988), 30.; 이정순, 『무슬림 여성과 베일』 36.

40 로버트 슈라이터, 『신학의 토착화』 황애경 역(서울: 가톨릭출판사, 1991), 67.

41 필자가 북아프리카 지역을 방문했을 때 기독교인이 무슬림과 대화를 했다는 이유로 검찰에 소환된 것을 보았다.

42 Ibid., 69.

43 전호진, 『종교다원주의 타종교 선교전략』 296.

44 라민 샤네 교수는 예일대학교에 소속되어 있다. 2002년 8월 6일 ‘이슬람 선교를 위한해법’이란 주제로 홍영기 교수와 대담한 것을 재인용.

45 Patrick Johnstone, The Church Bigger than you think, 이창규, 유병국역(서울: WEC출판부, 1999), 192.

46 박순종,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무슬림과 이슬람교에 대한 인식조사" 『세계선교』 1999

년 봄·여름호/ 통권35호, 115-16.

47 Ibid.,117에서 재인용.

48 최근 이란은 이슬람 혁명 후 개종 변화가 꿈틀대고 있다. 그 이유는 국민염원 외면한 정치에 이슬람교도 의문, 회의가 싹트고 있다. 정부는 기독교 성장에 제동을 걸고 있지만 비밀 가정교회로 복음활동은 지속되고 있다. 수십만 명의 잠재된 개종인구에 비해 사역자수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함태경, "이란 선교역사와 교회현황" 『국민일보 선교편』 2002년 7월 23일.

49 Patrick Johnstone, The Churuh Bigger than you think, 193.

50 이 책자는 순니 이슬람 신봉자들이 99%나 되는 모로코를 향한 기도책자이다. 모로코 신자들과 모로코에 복음을 전하고자 사역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로 시작된 것이 바로 ‘Arise Shine Morocco’(ASM)이다. 이는 모로코와 미전도 종족 그룹, 그리고 모로코 교회들을 위한 기도의 필요성을 전 세계 교회에 알리고 기도를 집중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다.

51 Rogers S. Greenway, "세계도시화와 선교교육" 장훈태역 『선교신학의 21세기 동향』(서울; 이례서원, 2000), 512.

52 E. A. Speiser, The Anchor Bible: Genesis(New York: Doubleday, 1964), 86.

53 Rogers S. Greenway, "세계도시화와 선교교육" 514.

54 정흥호, 『상황화 신학』 서울: 로고스, 1998,: 베반스, 스티브. 『상황화신학』. 최형근 역. 서울: 죠이선교회, 2002.: 부스웰, 제임스 "상황화:이론과 전통, 그 방법."『신학과 선교』, 데이비드J. 헤셀그레이브 편, 93-126. 서울: 엠마오, 1986.;서창원, 『제3세계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Stephen. Bevans, "Models of Contextual Theologies." Missiology 13, no. 2(April1985); shoki Coe, "Contextualization." InMission Trends No. 3: Third World Theologies, ed. Geraid H. Anderson and T.F. Stransky, 19-24.New york; paulist press, 1976.; bruce C.E.F.leming, Contextualization of Theology: An Evangelical Assessment. Pasadena: William Carey Library, 1980.; Dean S. Gillilrinand, "Principles od the Christian Approach ot an African-Based Islamic Society.: Missiology ;Heideman, Eugene S. "Syncretism, Contextualization, Orthodoxy, and Heresy." Missiology 25, no. I(January 1997): David J.Hesselgrave, and Edward Rommen. Contextualization: Meangs, Methods, and Models. Grand Rapids:Baker Book house, 1989.; Kato, Byang. "The gospl, Cultural Contextualization, and Religious Syncretism." In Let the Earth Hear His Voice, ed. Douglas, J.D. Minneapolis: World Wide Publications, 1975.; Bruce. Nicholls, Contextualization: A theology of Gospel and Culture. Downers Grove: Inter-Varsiry Press, 1979.; Robert J. Schreiter, Constructing Local Theologies. Maryknoll: Orbis books, 1985.

55 로렌드 뮬러, 『모슬렘 선교를 위한 TOOLS』 임하나 역(서울: WEC출판부, 2002), 77.

56 공일주, 『이싸냐 예수냐?』(서울: 죠이선교회출판부, 1997), 169-70.

57 1995년 10월 22일 요한네스 버그의 ‘선이 타임수’에 게재된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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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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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선교행적과 무슬림 선교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선교목사)

 

하나님께서는 세계적이시고 우주적이시지만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이고 인종적이고 민족적이고 국가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고 말씀하셨고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고 말씀하셨으며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욘 1:2)고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이방을 멸시하고 정죄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사마리아의 수가성으로 가셨지만 제자들은 가기를 싫어했고, 베드로에게 가이사랴로 가라고 했지만 베드로도 처음에는 가기를 싫어했습니다. 나중에는 할 수 없이 가기는 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가기 싫다고 하는 요나를 니느웨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베드로와 바울을 반기독교 세력의 중심부인 로마로 가게 하셨습니다.

 

오늘의 현실에서 한국교회와 세계 교회의 선교의 시급한 대상은 공산권과 모슬렘권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지칭한 두 “악의 축”이 오늘의 선교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시급한 선교의 대상은 북한과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라고 생각합니다. 니느웨와 로마가 정복의 대상이 아닌 선교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북한과 아프가니스탄은 정복의 대상이 아닌 선교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기적이고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저에게 이와 같은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하나님의 관심과 비전을 깨우쳐주신 분들이 고 랄프 윈터 박사님을 비롯한 풀러 신학교의 선교학 교수님들이었습니다.

 

제가 랄프 윈터 박사님의 역사적 및 선교적 안목에 접하게 된 것은 조동진 목사님의 권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11년 동안의 유학을 마칠 무렵인 1973년 조동진 목사님이 저를 만나자고 했습니다. 후암교회의 교육목사로 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즉시 그러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풀러신학교에 가서 1년 동안 선교학을 연구하고 나서 후암교회로 오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즉시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1974년 초 풀러신학교에 가서 Research Associate의 자격으로 8개월 동안 선교학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신학과 선교신학을 접목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기간이었습니다. 미국 교회사의 아버지 라토렛 교수님이 교회사와 선교학을 겸해서 연구했고, 랄프 윈터 박사님이 교회사와 선교학을 겸해서 연구했는데 저도 교회사 연구에다 선교학 연구를 접목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풀러신학교 선교신학원에서 윈터 교수님을 비롯한 그 당시 유명한 선교학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저의 안목을 넓혀갈 수가 있었습니다. 윈터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저는 그 분의 진취적인 입장을 다소 비판하며 질문도 했지만 많은 깨달음과 도전도 받았습니다. 한 평생을 교회 역사 연구와 선교 전략 개발에 모든 정열을 쏟아 바치면서 즐겁고 멋지게 살다가 주님 품으로 돌아가신 랄프 원터 박사님에게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하지 않을 수 밖에 없습니다.

 

랄프 원터 박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 가지 더 하겠습니다. 참고가 될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2008년 5월 한국을 방문한 랄프 윈터 박사님을 반갑게 만났습니다. 강의도 같이 했고 대담도 같이 하며 오랫만에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1976년에 랄프 윈터 박사님이 한국에 와서 며칠 동안 강의를 했는데 그 때도 제가 그 분의 통역을 맡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8년 5월 랄프 윈터 박사님이 강의와 대담을 하면서 미국 복음주의교회의 잘못들을 진솔하게 지적하는 것을 보고 들으면서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1) ‘구원’을 단순히 몇 마디 말을 감성적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얻어진다고 간주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지적했습니다. 2) 단기 선교 여행만큼 선교에 해를 끼치는 것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3) 북 치고 시끄럽게 노래하는 것은 예배를 해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사실 요사이 한국교회는 북치고 장구치고 시끄럽게 음악을 연주하므로 예배를 해치고 영성을 죽이는 것같이 보입니다. 4) 신앙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의미가 변질되어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교회는 본래 가족 중심의 신앙공동체였는데 오늘날 서구화와 개인주의화와 대형화 때문에 가족공동체의 특성이 해체하기에 이르렀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와 같은 미국 복음주의교회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 충고했는데 너무너무 진솔하고 귀중한 충고였습니다.

 

저는 2008년 5월 10일 윈터 박사님과 마지막 대담을 했는데 윈터 박사님은 한국교회가 미국과 서구교회의 실수들을 반복하지 말 것을 재차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했습니다. 윈터 박사님은 단기선교에 대해 “다른 나라를 배우는 것은 좋지만 선교적 관점에서 도움이 안 된다”고 부정적인 입장을 다시 나타내 보였습니다. “선교에 공헌을 못할 뿐만 아니라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을 볼 때가 있다.오히려 방해꾼이 되거나 소란을 일으키는 일도 있다. 그럴 경우 선교사는 여행안내자일 뿐이다. 또 다른 문제는 장기 선교사가 쓸 돈을 단기 선교여행자가 쓰는 것이다. 전쟁할 때 군인들을 전쟁터에 보내는데 일반 시민도 전쟁터가 보고 싶다고 해서 다 태워 보내는 것은 낭비고 방해다. 군인만 보내야지 무장되지 않은 일반 시민을 보낼 필요는 없다.”

 

문화와 복음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선교는 문화와 복음을 엮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모든 문화 안에는 결점이 있기 마련이다. 다른 문화가 나쁘다고 하기 전에 미국의 문화도 가장 나쁜 문화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그러나 문화 안에 좋은 면이나 배워야 할 면 도움이 되는 면도 있다. 결점이 있는 문화권 속에서도 신앙이 자리잡게 될 수 있고 문화도 변할 수 있다. 모든 문화는 질그릇에 비유할 수 있다. 복음은 보배다. 어느 한 질그릇의 보배를 다른 문화권의 질그릇에 집어넣는 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보배가 한 질그릇에 담겨졌을 때 그 보배가 문화권 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보배가 문화라는 질그릇에 스며들면서 그 질그릇의 결점들이 조금씩 변화되는 것을 경험했다. 인도에는 힌두권에 속하면서도 예수를 따르는 자들 2천 4백만 명이 있다. 그들은 예수라는 보배를 가지고 있지만 힌두권이라는 질그릇 안에서 계속 사역하고 있는 것이다. 모슬렘권에서 예수를 따르는 자와 예수를 따르지 않는 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언어를 쓰지만 보배가 있고 없고가 차이 나는 것이다. 매우 중요한 차이지만 드러나는 문화적 행위에서는 크게 차이가 안 난다.”

 

윈터 박사님은 미국 복음주의의 오류들을 지적하면서 미국의 복음주의를 성경과 동일시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가 참되지 복음주의에 근거한 기독교를 성경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미국의 복음주의는 결점도 많고 완전한 해석이 아니다. 미국의 복음주의는 하나의 종교다. 복음주의의 못된 이단 중에서도 가장 큰 이단은 아주 짧은 시간에 ‘구원’을 단순이 몇 마디 말을 감성적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얻어진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구원 받는 것, 이런 가르침은 아주 못된 것이다. 구원은 감정적으로 순간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과정이다.” 제가 윈터 박사님에게 “한국교회에 더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복음으로 돌아가라고 조언하고 싶다.믿음은 순종하는 것이다. 외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에 항복하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왕국이 이뤄지는 곳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도래했는데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온 것에 완전 복종하는 것이다. 그냥 믿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복종해야 한다. 믿는 것은 마귀도 한다. 그러나 마귀는 가슴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귀 담아 들어야 할 너무너무 귀중한 조언과 충고였습니다. 랄프 윈터 박사님은 존 스토트 박사님,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과 함께 현대 선교 신학계의 대표적인 선구자였습니다. 랄프 윈터 박사님은 지식이 풍부한 분이었고 안목이 균형 잡힌 분이었고 판단이 명석한 분이었고 표현이 진솔한 분이었고 가슴이 따뜻한 분이었고 시간에 충실한 분이었습니다. 저로 하여금 랄프 윈터 박사님, 존 스토트 박사님,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과 가까이 지내며 그 분들로부터 귀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예수님의 선교행적과 모슬렘 선교”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목회자이든지 선교사이든지 어떤 종류의 목회나 선교를 하든지 평생토록 힘써야 할 일은 우리들의 사도이시고 대제사장이시고 목자이시고 선교사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본 받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목회와 선교의 모델이신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가장 분명하게 나타내 보여주는 말씀이 요한복음 1:14과 마가복음 10:45이라고 생각합니다. 존 스토트 박사님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마가복음 10:45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선교행적”을 살펴보면서 선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선교를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선교는 ‘떠나는’ 것이고 ‘찾아가는’ 것이고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 집을 떠나 세상을 찾아오셔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실 아브라함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떠남’과 ‘찾아감’과 ‘됨’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선교는 ‘becoming’ 입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본래 말씀이셨고 하나님이셨는데 하늘을 떠나 세상에 오셔서 육신을 가진 사람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The Word became flesh.” 선교는 되는 것입니다. 선교는 becoming 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육’ 즉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본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살과 피를 가진 사람이 되신 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는 놀라운 일이고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물론 헬라인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셔서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죽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미련한 일이며 약한 일이며 멸시를 받을만한 일이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나 선교는 ‘되는’ 일입니다. 선교는 ‘성육’의 사건을 본받아서 백인이 흑인이 되는 일이고, 미국 사람이 한국 사람이 되는 일이고, 한국 사람이 태국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본래 앗씨시의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일부러 가난한 거지가 되었고 일부러 병든 환자가 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한센병자가 되기를 그렇게도 소원했습니다. 선교는 나 자신을 포기하고 나와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그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선교사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삶에 지친 그래서 목이 마른 수가성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 그 여인과 비슷한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여인처럼 행로에 피곤하여 주저 앉으셨다고 했고 여인처럼 목이 말랐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요 4:6, 7). 그 여자가 알아 들을 수 있는 평범하고 쉬운 말로 소통을 시도했습니다. 너무너무 황송한 일이지만 그것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고 죄인들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예수님께서 취하신 선교적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선교는 ‘떠나는’ 것이고 ‘찾아가는’ 것이고 ‘되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조동진 목사님께서 최근에 선교사 중에서 누구를 가장 존경하냐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한국에 와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던 존 로스 목사를 가장 존경한다. 그는 한국에 도착해 4?5년은 공부만 했다. 사서삼경을 비롯한 유교를 공부했고 도교와 불교를 배웠다. 유불선의 영향 속에 있던 한국인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했던 것이다. 존 로스 선교사는 한국 사람이 되는데 최선을 다한 훌륭한 선교사였다.”

 

둘째로,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천군 천사들과 함께 영광 중에서 사셨지만 하늘 영광을 떠나 세상에 오셔서 세상의 사람들과 함께 가난과 고난의 삶을 사셨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선교는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선교는 ‘성육’의 사건을 본받아서 리빙스톤이나 슈바이처처럼 백인이 아프리카의 흑인들과 함께 사는 것이고, 언더우드 선교사 4대 손처럼 미국 사람이 한국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고, 신홍식 선교사처럼 한국 사람이 태국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은 한센병자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선교는 나 자신의 평안한 삶을 포기하고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그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선교사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시자마자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과 함께 사셨고 나중에는 제자들과 함께 사셨고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0-13).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기와 병자들과 죄인들을 찾아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고 대화를 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너무너무 황송한 일이지만 그것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고 죄인들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예수님께서 취하신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조동진 목사님은 선교의 ABC 중의 하나는 선교지에 가서 무슨 음식을 주든지 그대로 받아서 먹으면서 함께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교는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선교는 선교지에 가서 대형 집회를 잠깐 하고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나라가 아닌 다른 곳에 가서 나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오래 사는 것입니다.

 

독일의 저명한 선교신학자 준더마이어(Sundermeier) 박사는 올바른 선교는 ‘콘비벤츠’(Konvivenz) 즉 ‘함께 사는 삶’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콘비벤츠는 브라질의 도시나 농촌에 있는 소집단들이 이웃 돕기 운동에서 유래한 것으로, ‘서로 돕고, 서로 배우며, 함께 축하’하는 공동체적 삶의 형태를 갖는다고 지적했습니다. 준더마이어 박사는 서로 돕고, 배우고 함께 축제를 경험하는 콘비벤츠의 원리를 무엇보다 복음서에 기록한 예수님의 삶에서 입증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사람들 가운데 살았으며 그들과 함께 동고 동락 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하여’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았다. 특히 예수님은 사람들과 자주 함께 식사를 나누었는데 이러한 식탁 공동체야 말로 예수님의 선교에 중심이 된다. 왜냐하면 함께 하는 식탁은 ‘공동체’와 ‘잔치’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교적 교회는 타자와 함께 사는 교회이다.” 선교는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셋째로,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섬기는’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 10:45).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몸을 어루만져 주시면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셨고, 열병환자의 손과 소경의 눈을 어루만져 주시면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모든 병자들과 모든 죄인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원수들에게까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했습니다(마 5:44). 주님께서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과 그리고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강도에게도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폈습니다. 그리고 원수에게까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했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선교는 함께 사는 것이고 모두를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 선교적인 삶을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이 사셨다고 생각합니다.저는 지난 주 토요일인 11월 12일 UBF 가을 수양회에 가서 “사랑과 선교”라는 제목으로 강의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몸으로 나타내면서 말이 아닌 삶과 죽음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증언하신 사랑의 선교사요 사랑의 순교자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선교의 깃발을 높이 그리고 강하게 휘두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만큼 십자가의 사랑과 구원을 온 세상에 강력하게 전파한 복음의 증인과 복음의 선교사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사랑과 섬김의 삶을 아주 조금이라도 흉내를 내곤 했습니다. 2005년 12월 16일 1,400만 원 상당의 선물 보따리를 가지고 강변교회가 아프간 무라취드에 세워준 학교 준공식에 참석했습니다. 그 지역의 모슬렘 지도자들과 군인들과 경찰 지도자들이 참석했고 400여 명의 어린 학생들이 참석했습니다. 저는 아프간에 두 번 방문했지만 공식적으로 설교나 전도나 기도나 강의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학교 준공식 행사를 하는 중에 아프간 어린이들이 나와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분명한 한국말 발음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저는 너무너무 놀랐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보통 때 그런 노래를 하면 테러를 당할 것입니다. 선교의 길은 반드시 설교나 전도나 강의를 하는 길이 아니고 다양한 행사나 프로그램에 치중하는 길이 아니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는 삶의 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놀라운 사실을 북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에서도 방글라데시에서도 중국 연변지역에서도 발견했습니다.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조용히 펼 때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과 가슴이 녹아지는 선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넷째로,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유에 탄생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목적이 우리 죄인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심에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증오와 분노와 분쟁으로 가득한 세상과 우주에 ‘화해’와 ‘평화’를 가져오는데 있었다고 누가와 사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화해)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6).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화해’와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그리고 사람이 죄를 짓고 과실을 범하면 그 사람의 죄와 과실을 용서하고 그 사람과 화해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5).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며 그 형제와 화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22).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죄와 사망과 저주에서 구원하시는 구세주로 세상에 오셨지만 동시에 ‘화해’와 ‘평화’의 주님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세상을 등지고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에게 화해와 평화의 주님으로 찾아가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을 찾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낮아진 모습이었고 따뜻한 모습이었습니다. 말하기 싫어하는 수가성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넸습니다. 소통을 먼저 시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사실 소통이야말로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중요한 방편입니다. 마음과 말을 주고 받는 소통이 없이 화해와 평화는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낮아진 모습으로 그리고 따뜻한 모습으로 수가성 여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여인이여, 내가 목이 마른 데 내게 물 한 모금 마시게 해 줄 수가 있소?” 그 여인은 아주 퉁명스러웠습니다. “별 사람 다 봤네. 점잖은 유대 양반이 개 같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건네며 물 한 모금까지 달라고 하시네.” 아주 무례하고 퉁명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낮은 자세로 따뜻한 모습으로 말을 건넸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 14). 결국 소통이 이루어졌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 수가성 여인은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했고 예수님을 향해서 “선지자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수가성 여인과 주님 사이에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수가성 사람들과의 화해와 평화도 이루어졌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물동이를 내 버려두고 수가성으로 달려가서 만나기 싫어하던 수가성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만난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그 결과 수가성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 4:28-30). 저는 예수님의 삶과 사역과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평화를 가장 생생하게 나타내 보이신 분이 평화의 사도 프랜시스요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이요 한국교회와 사회가 존경하던 한경직 목사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은 모든 사람들을 찾아가서 낮은 자세와 따뜻한 자세로 말을 건네고 소통하면서 화해와 평회를 이루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사람들은 물론 동물들과 식물과도 친밀한 소통을 하면서 화해와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선교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길 때 그곳에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사마리아와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가이사랴와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로마와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일본과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북한과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아프가니스탄과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사실 화해와 평화는 성경의 목표이며 역사의 완성점입니다. 선교는 화해와 평화를 이루어가는 방편이고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함께 모슬렘과의 화해와 평화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적인 일이 아닙니다. 남북의 화해와 평화는 한국교회와 한국 민족이 반드시 이룩하여야 할 필수적인 일이고 민족적인 과제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겔 37:17). 에베소서 1:10과 계시록 7:9-12은 앞으로 이루어질 우주적인 화해와 평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화해와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정치적인 방법이나 군사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진리의 깃발만을 휘두르는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씻음을 받는 일과 온유와 겸손과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가슴과 몸에 지닌 하나님의 사람들과 민족의 지도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악을 선으로 갚으며 악을 행한 상대방을 존중하고 포용하고 품었던 야곱과 같은 그리고 요셉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민족의 지도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 앞에서 일곱 번 땅에 허리를 굽히고 절하며 예물을 드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주여,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창 33:10).

남한 교회가 북에 대해서 이와 같은 겸손과 존경과 사랑의 자세를 취하여야 남북의 화해와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2007년 10월 12일 신촌 성결교회에서 림인식 목사님께서 지적한 일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기에게 악을 행한 형들을 만나자 방성대곡하며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 45:5, 7, 8). 모슬렘과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쟁과 분열로 치닫고 있는 한국과 세계 안에 지금이야말로 화해와 평화의 도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세계가 필요로 하는 선교사야말로 분노와 증오 그리고 분쟁과 분열로 치닫고 있는 세계 곳곳을 찾아가서 화해와 평화를 이룰 수 있는 화해와 평화의 도구로서의 선교사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씻음을 받는 일과 온유와 겸손과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가슴과 몸에 지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본래 일본 사람을 싫어했고 북한 사람을 싫어했고 중국 사람을 싫어했고 모슬렘을 싫어했고 타 종교인들을 싫어했었습니다. 자유주의자도 싫어했고 순복음주의자도 싫어했었습니다. 그러나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므로 조금씩, 조금씩 저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어졌습니다. 일본 사람을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고 일본 교회와 교류하는데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북한 사람을 사랑하며 북한 사람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중국 사람을 사랑하며 중국에 있는 조선족 어린이들 170여 명을 지난 10여 년 이상 돕게 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학교 하나를 지어주고 아프간 어린이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기도 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도 조용기 목사님도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고 가까이 소통하며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5개 종단의 지도자들과 친하게 교제하면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을 만들기도 했고 작년 8월 27일에는 5개 종단 지도자들 9명과 함께 밀가루 300톤을 가지고 북한 개성에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오기도 했습니다. 동물들과 식물들과도 친밀하게 소통하는 흉내를 내기도 합니다. 개들도 고양이들도 새들도 물고기들도 식물들도 친밀하게 다가가면 반갑게 반응하는 것을 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일이고 조금씩, 조금씩 흉내를 내고 배워서 되어진 일입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이 물려주신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평화의 귀한 영적인 유산들을 조금씩 조금씩 물려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선교가 힘써야 할 일은 무엇보다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설교만 하고 강의만 하고 가르치기만 하고 함께 놀아주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선교는 설교만 하고 강의만 하고 가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놀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가 만들어낸 말이지만 틀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셨고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도 하시고 대화도 하시면서 함께 놀아주셨다고 생각합니다. 2005년 11월 12일자 기독교개혁신보에 실렸던 저의 글을 여기 그대로 소개합니다.

“나는 선교지를 여행하면서 현지인들과 선교사들과 자녀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사랑과 힘과 기쁨이 되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내가 지난 10여 년 동안에 발견한 한 가지 사실은 설교나 강의가 반드시 저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때로는 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놀아주는 것이 위로와 기쁨이 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2년 전 브라질을 방문한 일이 있다. 이틀 동안 밤마다 강성철 선교사와 총신 제자 한 사람과 젊은 초년생 선교사 한 사람과 밤 늦게까지 볼링을 친 일이 있다. 아주 재미가 있었다. 물론 내가 모두 이겼다. 그런데 내가 생각지도 못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강성철 선교사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이다.그 젊은 초년생 선교사가 많은 스트레스와 좌절을 경험하고 있었는데 스승인 나하고 이틀 동안 볼링을 치고 나서 위로와 격려와 힘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선교에 임하게 되었다는 반가운 말을 들었다.” “내가 5년 전에 불라디보스톡에 간 일이 있었다. 어느 날 20여 명의 선교사 자녀들과 서너 시간 동안 열심히 논 일이 있었다. 게임도 하고 선물도 나누어주고 농구도 같이 하고 그네도 같이 타고 시이소도 같이 타며 신나게 놀았다. 어린이들이 나를 너무 좋아했고 모두 기뻐했다.유치부 어린아이 하나는 내가 떠날 때 예쁜 상자를 선물로 주었다. 그네를 함께 탄 아이였다. 그 상자 속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또 오세요. 정예찬 2000. 6. 10’ 하루 오후에 선교사 사모들 대 여섯 명을 데리고 바닷가에 가서 놀다가 왔다. 맛있는 바다 가재도 사 주었다. 너무너무 좋아했다.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가 스승이 되는 내가 그들을 데리고 바닷가에 가서 함께 놀아준 것이 그들에게 많은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 “나는 두 주 전에 한 주간 동안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을 다녀왔다. 러시아 목회자 50여 명과 한인 선교사 20여 명이 한데 모여 연해주 목회자 수련회를 가졌다. 내가 저들에게 강의도 하고 설교도 했지만 내가 주력한 것은 저들과 함께 교제하고 음식을 먹고 놀아준 것이었다. 도착하던 날 저녁 46명의 한인 선교사 가족들과 한국식당에서 음식을 나누었다 고등학생이 된 은덕이라는 여학생이 나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5년 전 내가 블라디를 방문했을 때 어린 아이들 20여명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 때 은덕이는 초등학생이었다. 은덕이는 그 사진을 고이 간직하였다가 다시 자기들을 찾아온 나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나는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함께 놀아줄 때 선교사들은 물론 현지인들의 마음이 열립니다. 그들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들의 마음에 사랑이 들어가고 복음이 들어가고 예수님이 들어 가십니다.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선교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제물 되는 삶을 사시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2005년 12월 31일 강변교회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서 2006년도 새해의 기도 제목을 다음과 같이 정한 일이 있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예수님의 마음과 생각과 눈물을 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저는 2010년 1월 1일 새해의 소원과 기도 제목을 다음과 같이 정한 일이 있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눈물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온유와 겸손과 착함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수고와 고난과 희생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기독교는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으로 이루어진 종교입니다.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없이 선교가 이루어진 일은 거의 없습니다. 1866년 9월 5일 대동강 변에서 27살의 젊은 나이에 순교의 제물이 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의 제물 되는 죽음이 없었다면 1885년 조선땅에 선교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제물 되는 죽음이 16년 후인 1882년에는 조미 수호 통상조약이 체결되게 했고, 그 2년 후인 1884년에는 알렌 의사가 조선에 들어오게 했고, 그 다음 해인 1885년에는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 땅에 들어오게 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한 사람의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흐름’에 얼마나 길고도 깊은 고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놀라움과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헨리 아펜젤러와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에 와서 ‘희생적인 삶’ 즉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교회와 조선의 교육과 조선의 의료 사역의 기초가 놓여졌습니다. 저는 언더우드 가의 3대가 조선 구원의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여 조선 사람들에게 끝이 없는 사랑을 쏟아 부으면서 희생적인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희생적인 제물 되는 죽음을 죽어 지금 양화진에 모두 함께 묻혀 있다는 사실 앞에서 지극한 경외감과 존경과 사랑을 느끼면서 한 없이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선교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구원의 역사와 선교의 역사를 만듭니다. 토마스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조선땅에 구원의 역사와 선교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모슬렘 선교도 북한 선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지적한 여섯 가지 선교의 모습을 몸과 마음과 삶과 사역에 지니고 찾아가면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구원과 화해의 선교가 아름답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한 가지 추가해사 말씀을 드리면 모든 선교에는 필수적인 파트너십 즉 협력이 절대로 필요한데 모슬렘 선교와 북한 선교야말로 파트너십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쟁은 불신과 반발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들간의 파트너십과 현지인들과의 파트너십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파트너십이 이루어지려면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온유 겸손 섬김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선교가 무엇이며 선교사가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았습니다. 선교가 무엇이고 선교사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선교사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로, 선교는 떠나는 것이고 찾아가는 것이고 되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선교는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셋째로, 선교는 함께 살면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넷째로, 선교는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선교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파트너십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우리 주님께서 사시고 보여주신 삶과 사역의 모습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는 너무 이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 유행에 치우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교도 그런 경향에 치우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최근에 자신이 복음 사역을 다시 시작한다면 정치와는 무관한 사역을 하고 싶다는 고백을 한 일이 있습니다. 목회 사역은 물론 선교 사역도 좀 단순해지고 좀 바보스러워지고 좀 어리석어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에 대한 순수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가슴과 몸과 손발에 지니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를 온유와 겸손과 따뜻함으로 품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몸에 지니고 약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삶을 살면서 사역을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우리들도 조금씩, 조금씩 주님 닮은 선교적인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들도 주님 닮은 선교적인 삶을 조금씩, 조금씩 살아갈 수 있게 하시고 선교적인 죽음을 죽을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우리들에게 십자가의 피를 부어주셔서 십자가의 사랑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랑과 구원과 화해와 평화의 도구들과 제물들로 삼아주시옵소서!

 이슬람 파트너스 강의-

 

/바울선교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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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결혼·인터넷 채팅이슬람, 한국여성 집중 포교

 

FIM국제선교회 크리스천을 위한 이슬람 세미나

 

유영대 기자 국민일보

 

"30대 여성 A씨는 파키스탄에서 온 무슬림 남성과 2004년 결혼했다. 남편은 결혼 전에 자신의 종교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결혼 후 이슬람 경전인 꾸란(코란)을 읽도록 강요했다. 꾸란을 공부하지 않는다며 언어·신체적 폭력을 휘둘렀고 한국국적을 취득한 뒤 이혼하겠다고 했다. 10B양은 중학생 때이던 2010년 여름 인도네시아 무슬림을 인터넷 채팅으로 만나 신앙고백을 하고 무슬림이 됐다. 20대 중반의 여성 C씨도 인터넷 이슬람카페 회원들에게 궁금한 것을 묻다가 무슬림이 됐고 2011년 회원 3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앙고백을 했다."(소윤정 아세아연합신학대 선교대학원 교수)

 

이슬람이 한국여성들을 집중적으로 포교하는 등 한국인에 대한 포교를 강화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FIM국제선교회는 28일 서울 서초구 나루터로 신반포중앙교회에서 크리스천을 위한 이슬람 세미나를 갖고 이슬람의 한국 내 포교 현황과 한국교회의 대처방안 등에 대해 논의했다.

FIM국제선교회 유해석 대표는 영국의 이슬람화 과정이 한국에 주는 교훈을 제목으로 한 강의에서 한국의 이슬람 인구는 10년 안에 100만명에 육박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현재 OIC(이슬람이 국교이거나 주요 종교인 국가의 연합체) 57개국 출신자 128698명이 국내에 체류하고 있다. 불법 체류자 23653명을 포함하면 전체 체류인원은 15만명이 넘는다. 또 한국이슬람교중앙회에 따르면 한국인 무슬림은 19703700명에서 8022000, 200535000, 20097만명으로 급증했다. 이를 종합하면 현재 국내의 내·외국인 무슬림 수는 최소 23만명에 달하며 현재 추세대로면 100만명 돌파도 멀지 않았다는 게 유 대표의 관측이다.

 

소윤정 아세아연합신학대 선교대학원 교수는 이슬람과 한국여성이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무슬림 외국인과 결혼한 한국여성은 지난해 12월 현재 1638이라며 이 중 45.8%(750)의 한국여성은 파키스탄 무슬림과 결혼한 것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소 교수는 이슬람이 특히 인터넷과 방송 등을 통해 한국 여성들을 집중 포교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무슬림들은 이들 매체를 통해 이슬람을 믿는 것은 행복하게 살기 위한 길이고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하나님은 같은 존재라고 주장한다면서 교회는 헌금을 요구하지만 우리는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봉사하는 것이라며 기독교를 의식한 발언을 통해 이슬람을 홍보한다고 소개했다. 이어 일부다처제는 구약성경에서 나온 것이고 남편이 이혼하지 않도록 부인을 4명까지 두게 함으로써 여성을 철저히 보호한다는 교리도 적극 옹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 대표도 꾸란에 따르면 무슬림 여성은 반드시 무슬림 남성과 결혼해야 하며 무슬림 여성의 90% 이상은 같은 민족과 결혼한다면서 반면 무슬림 남성은 무슬림 유대인 기독교인 등 어떤 종교의 여성과도 결혼할 수 있으며 이슬람법에 따라 자녀를 낳으면 아버지의 종교를 따르게 한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세대가 갈수록 이슬람 인구는 늘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소 교수는 무슬림과 결혼한 여성은 이슬람교의 교세확장을 위한 도구가 된다이러한 결혼관의 차이를 모르고 결혼한 많은 한국여성들의 결혼생활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교육과 홍보의 부재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강연자들은 한국교회가 이슬람의 포교에 적극 대처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소 교수는 무엇보다 무슬림 여성 전도와 한국 여성들의 복음화를 위해 이슬람에 관한 전문성을 갖춘 여성목회자 리더십을 세우고 무슬림 선교기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유 대표는 "영국 등 기독교가 발전하고 융성했던 곳들이 이슬람화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면서 "한국교회는 교회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일이 없도록 건강성을 회복하고, 다문화 선교에 힘을 모으며, 신앙 전승률을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성봉 신반포중앙교회 목사는 "이슬람은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경계의 대상"이라며 "그들이 미사여구를 동원해 접근할지라도 정체를 바로 알고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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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선교전략4-코란의 주제(2)

 

종교는 무함맏과 꾸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며, 사실상 종교에 대한 주제는 꾸란의 알파이며 오메가라고 할 수 있다

 

(수라26-28)...단지 알라 자신이 원하고 동의한 사람들을 위해 의도한 후에만 (그 중보가 유익이 있다.) 실제로 종말에 믿지 않은 사람들은 천사들을 부인들 이름(여성)으로 말할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서는 이에 대한 어떤 지식도 없다. 그들은 단지 속임과 추측을 따르는 자들일 뿐이다. 분명히 속임은 결코 진실을 대신할 수 없다.”수라 37:149-162 “이제 (무함맏 메카의 불신자들에게) 물어보라, 딸들(즉 그들의 꾸며낸 것에 따르면 천사들이 알라의 딸들인 것 같다<꾸란에 쓰여진 것>.)이 너희 창조자의 것이고, 아들들이 그들의 것이란 말이냐? 아니면 우리가 천사들을그들죄가되는경우에도딸삼아만들었단말이냐? 조심하라! 그들은 거짓말쟁이들이기 때문에알라의 자녀(또는 딸들)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의심없이 거짓말쟁이들이다. (알라가) 아들들을 두고, 딸들을 선택할 것 같으냐! 어떻게 판단하느냐? 결국 기억 못하지 않느냐? 또는 너희들을 위해 (알라가 자녀를 둔 것에 대해) 어떤 분명한 증서가 있느냐? 그렇다. 만일 참으로 있다면 너희 책들을 가져와 보라 (이방인들이 알라와)함께 진들 (또는 천사들) 사이에 족보 (또는 어머니-자녀:모자지간 있다고 꾸밈) 만들었다. 그러나 진들 즉 천사들은 이제 만들어진 자인 것들을 분명히 알고 있다. 알라는 그들의 속성보다 깨끗하다. 오직 알라의 단정한 사람들만 (변함없는 알라를 그 분에게 합당하지 않은 속성으로부터 깨끗하게 붙든다.) (오 메카족속들아!) 의심 없이 너희들도, 너희의 숭배하는 우상들도, (한 사람을 알라에게) 대항하여 음모를 꾸미는 자, 거짓말할 줄 아는 자 아니다……

 

위의 모든 구절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무함맏은 유일신을 주창하기 위하여 카바 신전의 모든 알라의 딸들과 아들들로 여겨졌던 우상들을 배격해야 했다. 그 천사들,즉 우상들이 알라의 중보자 역할을 했던 것도 분명하다. 꾸란에서 여러 번 언급된 알라의 아들들, 딸들이 부정되는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존재가 아랍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무함맏이 이슬람 이전의 아랍인들의 우상 숭배를 배격하고 알라를 유일신으로 추앙하는데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암시해 준다. 알라는 결코 혼자 존재하는 신이 아니었다.

 

이제 무함맏은 종교에 대한 체계들을 하나 하나 세워 나갔다. 무함맏이 만든 종교적인 체계는 철저하게 유대교와 기독교를 모방한 것이다.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믿음을 중요시하고 정의했다. 그러나 무함맏은 믿음에 대한 정의를 복종이라고 정의하였다. 복종은 이슬람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다. 복종하는 종교가 이슬람이고, 복종하는 자들이 신자들이며, 복종하는 자들이 낙원에 들어간다. 반대로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불신자들이며, 지옥에 들어가는 자들이다. 수라 49:14 “아랍인들이믿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오 무함맏 그들에게) 말하라! ‘너희들은 믿은 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복종했습니다라고 말하라! (왜냐하면 아직도)너희가 믿음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만일 너희들이 알라와 그의 선지자에게 복종을 한다면, 그 분이 너희들에게 (행한 선한) 일들 중에서 하나도 적게 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에 회개와 세례 의식이 있었던 것처럼, 알라에게 종교적인 의식을 행하기 위해 몸을 정결하게 씻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심지어 이전의 아랍 우상 숭배자들에게도 정결하게 하는 의식이 있었는데, 더 완벽하다는 종교에 정결의식이 없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수라 5:6무슬림들이 기도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 얼굴과 손을 팔꿈치까지 씻고, 머리를 물로 문지르고, 다리를 무릎까지 씻고,몸이 의식에 깨끗하지 않다면 목욕하라. 만일 아프거나 여행 중에 있거나 여자를 접촉했거나 물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깨끗한 모래나 흙을 취해서 얼굴과 손에 문질러라 라고 지시한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할례를 행하는 것을 중요시 여겼는데, 무함맏은 이슬람 신앙의 기초가 없기 때문에 그 역사의 기초를 아브라함에게서 도용하고, 모세 오경에 예언된 그 선지자를 자신으로 적용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할례와 제사 의식을 중요하게 여겨 그 의미는 전혀 모르면서도 표면적인 의식만 도용하여 사용하였다.

 

유대인들은 과거 성전이 있었던 방향을 향해 기도하는 습관이 있고, 기독교인들은 기도하는 습관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무함맏은 그들보다도 더 많고 엄격한 다섯번의 나머즈 시간을 정해 놓고, 다른 종교보다 형식적인 우위를 보이려고 경쟁하였다. 수라 98:1-5에서 세상에서 가장 올바른 책은 꾸란이고, 이슬람 종교가 올바른 길인데, 그 이유는 그들은 단지 유일한 알라에게, 그 분을 위해 종교를 지키고,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예배하고, 나머즈를 완전히 준수할 뿐만 아니라 구제를 준수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알라를 위해 종교를 지키고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예배하고 나머즈를 준수한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슬람 종교는 알라 숭배, 성지순례, 금식, 나머즈 등과 같은 대부분의 아랍의 종교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우상숭배를 타파하고, 추가로 구제, 아랍 방식의 정결의식, 세금, 결혼 및 이혼 절차에 대한 의식, 지하드 등과 같은 종교 규범을 추가시켰다.

 

무함맏이 이슬람 종교를 만들고 아랍의 우상숭배자들에게 선포했을 때, 소수의 가난하고 소외받았던 사람들을 제외한 아랍인들은 당연히 무함맏을 믿지 않았다. 수라11:26-31절까지 무함맏이 자기 종족 아랍인들을 설득하는 장면이 나온다. “‘너희들은 유일한 알라에게 예배하라! (만일 유일한 알라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숭배하면), 너희들의 위에 고통스러운 고난의 날이 (올 것을) 나는 두려워한다.’ 그 때 그의 종족 중에 있는 불신자 어떤 사람이 우리들은 너를 우리들과 똑 같은 사람이라고 알고 있고, 너에게는 단지 우리 안에 있는 낮은 사람 <천한 사람들만> 생각 없이 따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오 나의 종족이여, 소식을 주라! 만일 내가 창조주 편에서 온 분명한 문서를 소유한다면, 그리고 그분이 나에게 자기왕궁에서 은사-선지자직을 주었다면, 그러나 이것이 너희들에게 은밀하게 되었다면, 우리가 너희들을 너희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 (믿게 하도록) 강요해야 하느냐?…… 오 나의 종족이여, 나는 너희들에게 이것을 위해 소유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

 

무함맏은 선지자들에 대해 잘 모르는 아랍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성경의 여러 선지자들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하였다. 수라 26:40에서 모세와 마술사들 간의 대결도 종교적 대결이었다고 말한다. 모세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만일 마술사들이 승리하게된다면, 우리가 그들을 따를 것이다라고말하고있다. 마술사가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지만, 어쨌든 마술사를 따를 수도 있다는 전제를 하고 있다. 나중에 이들 마술사들은 모세에게 패배하여 알라를 믿고 무슬림들이 되었다. 따라서 모세도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해 이집트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수라40:26에서 이집트 왕 바로는 모세를 죽이려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가 우상숭배를 옹호하는 자들의 대표, 즉 왕이었고, 무함맏을 두렵게 하고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메카의 우상숭배자들을 예표하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모세는 무함맏의 예표가 되는 듯이 이집트인들의 종교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집트의 폭군에 의해 반대를 당하였다고 말한다. 이처럼 무함맏은 이슬람 종교를 사람들에게 확증시키기 위해 모세의 종교가 곧 무함맏의 종교였으며, 마찬가지로 모든 선지자들의 종교가 무함맏의 종교 이슬람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무함맏이 과거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이용하자 아랍 우상 숭배자들은 선지자의 표적으로 기적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선지자는 자신의 말을 입증할 어떤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라 28:48-49 “이제 언젠가 그들에게 우리의 면전에서 진리의 (선지자가) 와서는 그들이 그에게도 (즉 무함맏에게도) 모세에게도 주어진 기적들이 주어진다면, (우리들이 그를 따랐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들은 전에 모세에게 주어진 기적들에게도 불신자가 되지 않았느냐? 그들은 ‘(타우?과 꾸란이) 서로 서로를 이용하여 힘 있게 하는 두 마법사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두 책 중) 모두에게 불신자이다라고 말한다.”

 

무함맏이 아랍 우상숭배자들을 설득하려고 이용하였던 것은 주로 성경의 선지자들 이야기였지만, 그가 하는 여러 이야기들 중에는 아랍인들도 아는 여러 전설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수라 23:83 “이것은 단지 너희들의 이전에 있던전 설들이다.” 무함맏의 근거 없고 꿈을 꾸듯 횡설수설하는 소리들과 말도 되지 않는 전설들을 아랍인들이 믿을리가 없었다(수라 21:3-6).

 

무함맏이 과거의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슬람을 확증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랍 우상숭배자들이 무함맏의 말을 들을수록 반대는 커졌고, 무함맏을 거짓말쟁, 마술사, 귀신들린 자 등으로 취급하며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수라 52:29 “됐다. (오 무함맏), 너는 (사람들에게 꾸란 구절들을 가지고) 가르치라! 왜냐하면 너는 창조주의 호의로 점쟁이도, 미친 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우상숭배자들이 무함맏은) ‘한 시인이다. 우리들은 그에게 재앙이 미치기를 기다린다라고 한다.”) 수라 23:70 “또는그에게는 (무함맏에게는) 귀신들린 것이 있다.’ 라고들 하느냐?” 마법에 가까운 무함맏의 말들은 대단히 많지만, 한 예를 들겠다. 수라73:17 “그렇다. 만일 너희들이 불신자들이 되면, (스스로 공포로) 아이들(의 머리카락들을 희어지게 하여) 노인들로 바꾸어 놓을 날(의 고난)으로부터 어떻게 보호받을 것인가!” 심지어는 무함맏은 자신이 미친 자가 아니라는 것을 맹세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수라 68:2 “연필과 (그와 함께 천사들이)쓰는 기록들에 맹세하건데, (오 무함맏) 너는 창조주의 호의로 미친 것이 아니다.” 당시 아랍 사람들은 무함맏을 따르는 사람들까지 함께 비난하였다. “너희들은 단지 한마술에 걸린,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을 따르고 있다라고 하였다(수라25:8). 수라 81장은 무함맏이 메카에서 초기에 암송했던 수라로서 왜 메카인들이 그를 미친 시인이라고 했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암시를 주고 있다. 수라 81:1-25 “해가 둘둘 말려졌을때, 별들도 (자기 하늘들에서) 흘러내릴 때, 산들도 (자기 자리들에서 옮겨져) 돌아다닐 때, (뱃 속의 새끼가) 열 달 된 임심한 낙타들도 자유롭게 보내졌을 때, 맹수들도 (한 곳에) 모였을 때, 바다들이 (화덕처럼) 불어졌을 때 (그리고 물 대신에 불로 채워졌을 때), 영혼들이 (다시 육체들에) 짝지워졌을 때, 산채로 매장된 (각각의) 소녀에게 어떤 죄 때문에 죽었는지를 물었을 때, (행위를 기록한 책) 페이지가 열려졌을 때, 하늘이 (땅 위에서) 벗겨졌을 때, 지옥이 (불신자들을 위해) 타올라 흐를 때, 천국이 (경건한 자들에게) 가까워졌을 때, (바로 그 날에 각각의) 영혼이 (바로 그 날을 위해) 준비하여 온 것을 (즉 모든 선악을 행한 것을) 아노라! 충분하다. 나는(밤들의 눈에서) 보이지 않는 자, (밤들도) 빨리 지나 (자기 둥지들’, 성벽들에) 숨어있는 자()들에게, 자기 어두움으로 오가는 저녁에게, 그리고 밝고 있는 새벽에 맹세를 하노라! 의심할 나위 없이 이 (꾸란은) 한 위대하고, 힘 있고, 아르쉬의 주인 (되는 알라)의 견해로서 적절한 시간과 장소가 있는, 그곳에서 (즉 하늘에서 천사들 쪽에서) 복종하는 자, 신실한 사도의 (즉 자브러일 천사의 알라 편에서 온) 말씀이다!그리고 너희들의 주인인 (무함맏은) 미치지 않았다. 참으로 그 (자브러일을) 열려진 지평선에서 보았다. (무함맏은) 출저를 모르는 계시를 탐내는 자도 아니다. (그는 알라 편에서 자기에게 온 계시들을 망치지 않고, 완전한 형태로 너희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리고 이 (꾸란은) 쫓겨난 사탄의 말이 아니다.” 수라 37:6-10 “참으로 우리는 가장 가까운 하늘을 별들로 장식했다. 그리고 (그것을) 모든 종류의 불순종하는 사탄과 귀신들로부터 보호했다. (귀신)들은 가장 높이 존재하는 자들을 (즉 천사들의 말들을) 언제든지 들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그들에게 모든 방향에서 (별들이) 던져진다. 그들을 위해서 (종말에) 끝없는 고난이 있다. 단지 어떤 때 (어떤 말을) 엿들은 자가 (즉 귀신이) 있다면, 그것도 날으는 별이 쫓아가서 따라잡을 것이다. (그리고 멸망시킬 것이다).” 수라 75:7-10 “그렇다. (본 소름끼치는 것들로부터) 눈을 감고, (하늘에 있는) 달도 잡힌 상태에서 해와 달이 하나가 되었을 때에, 그 날에 그 사람이 ‘(이 재앙들로부터) 어디로 피난할 수 있느냐?’ 라고 할 것이다.” 본문에는 무함맏이 계시를 받을 때 얼마나 공포와 소름을 느끼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슬람 선교전략 4-코란의 주제3

 

당시 아랍 사람들은 무함맏의 꾸란에 대해서도 노골적으로 비난 하였다. 수라 25:4-5 그 당시의 사람들이 꾸란에 대해 비난한 내용이다.

 

불신자들 중 어떤 사람들이, ‘(이 꾸란은) 단지 (무함맏) 자신이 스스로 꾸며낸 거짓말이다. 그에게 이 (거짓말을 지어낼 때) 다른 어떤 종족 (특별히 책들의 종족)이 도와 주었다라고 모독하고 중상한다. 또 그들은 ‘(이것은) 이전에 있던 전설인데, (무함맏이) 그것들을 다시 고쳐 쓴 것이다. 그렇다. (이 전설들은 어떤 자들 편에서) 그에게 아침과 저녁에 읽혀져 주어진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비난을 들으면서 무함맏을 따르던 자 중 일부도 무함맏을 거짓말쟁이라고 말하였다. 이럴 때 무함맏은 그들도 독한 말로 욕을 하였다. 수라 33”12-13 “그 때 외선자들과 마음에 상처 받은 (즉 확신이 약한) 어떤 자들이 알라와 그의 선지자가 우리들에게 오직 거짓 약속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많은 반대에 부딪히자 무함맏은 화가 났다. 무함맏은 자기를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자들의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며, 보복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였으며, 저주하기 시작하였다. 수라 43:22-26 “아니다. 그들은 말했다. ‘당연히 우리는 조상들을 한 종족-종교 위에 있었고, 당연히 우리들은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입니다.’그러므로 우리<알라>는 당신<무함맏>보다 전에 어떤 마을과 도시에 어떤 증거자-선지자 보내지 않았다. 단지 그곳의 나타난 것들이 : ‘당연히 우리 조상들을 한 족속-종교 위에서 찾았고, 당연히 우리들은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입니다라고 한다. (선지자가 그들에게) ‘만일 내가 너희들에게 너희 조상들을 찾은 종교에서 올바른 종교를 끌어낸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라고 말할때 , 그들은 : ‘당연히 우리들은 너희들이 사도로 만들어 보낸 종교에 불신자들이다라고 말했다. 됐다. 우리가 그들에게서 보복을 받았다. 이제 그를 (자기 선지자들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자들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보라! 기억하라. 아브라함이 아버지에게 그리고 종족에게 말했었다. ‘당연히 나는 당신들을 숭배하는 우상들보다 정결하다.” 무함맏은 자기 동족들과 종교적인 문제로 다투게 될 때에도 자기 조상들이 섬겼던 잘못된 우상 숭배보다 올바른 종교를 끌어낼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아브라함에게 두어, 아브라함이 그의 아버지와 동족들이 섬겼던 우상 숭배에서 참 종교를 이끌어 낸 것과 같은 행위을 무함맏 자신이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아랍 우상숭배자들의 비난 중에는 근거 없는 것들도 있었다. 아랍 우상숭배자들이 무함맏과 그를 추종하는 자들을 무지막지하게 대한 것들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랍인들의 우상 숭배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으며,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항상 지적되는 사항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함맏은 단지 아랍인들에게서만 반대를 받았던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반대를 받았다. 무함맏이 당시의 사람들과 함께 했던 것처럼, 서로에 대한 신뢰와 축복 대신에, 서로에게 욕지거리와 비난과 저주를 퍼부었던 지독한 말다툼으로 구성되어 있는 종교의 경전은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꾸란은 사람들에게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 아니라 무함맏이 자기의 반대자들에게 무섭게 쏟아부은 저주로 가득찬 책이다. 꾸란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대한 진리를 기록한 책이 아니라, 진실을 왜곡한 거짓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 채운 책이다. 수라 32:13 “나는 지옥을(불신자) 귀신과 사람들의 모든 자로 채우는 자이다.” 이러한 소름끼치는 말을 마귀 이외에 누가 할 수 있겠는가? 과연 사랑의 하나님이 이러한 독한 저주를 퍼붓겠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런 무서운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겠는가?

 

메카에서 무함맏의 종교는 거의 발전이 없었다. 도리어 많은 반대와 핍박을 받았고,심지어는 그를 따르는 소수의 사람들도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수라18:15,16“자우리 종족은 그 분 외에신들을’ ()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그 우상들이 신인 것에 대하여) 분명한 한 증서를 가져온다면. (결코 가져올 수 없다.) 그렇다. (어떠한 문서도 없이, 동료가 있다 라고 하여) 알라의 영광에 거짓말을 지어내는 사람보다도 난폭한 자가 누가 있느냐? (젊은이들이여!) 너희들은 그들과 알라 외에 그들이 숭배하는 것들로부터 떠나서 거절했기 때문에, 이제 (유일한 너희의 창조주, 알라 자신에게 예배하기 위하여) 동굴에 피난처를 찾아가라! 너희 주가 너희에게 자기 은택을 크고 풍성하게 할 것이고, 너희들의 일들을 번성시킬 것이다.”

 

아랍인들이 무함맏을 거절하고 반대하자 무함맏은 자기를 따르지 않는 모든 아랍인들을 정죄하였으며, 점점 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를 품게 되었다. 수라 6:114 “(오무함맏, 아랍 우상숭배자들에게 말하라!) ‘나는 알라 외의 다른 것을 맹세하겠는가? 그 자신이 너희들에게 이 책 (꾸란을) 상세한 (즉 너희들이 논쟁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에 충분히 답변을 주는) 상태로 내려준 자이지 않느냐?’ 우리가 책을 준 사람들(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은 그의(꾸란이) 너희들의 창조주보다 진리로 내려진 것을 알 것이다.” 수라 11:17 “자 이제 창조주 편에서 온 분명한 증서를(즉 꾸란을) 소유한 사람이 (단지 이 세상의 유익들만을 찾는 사람들과 똑같겠는가?) 오히려(알라) 편에서 온 증거 (즉 가브리엘 천사가) 그의(무함맏의) 동료이고, 그보다 이전(즉 분명한 문서인 꾸란보다 이전에) 모세의 책(타우랏이) 있었다. 그것은(이스라엘을 위해 온) 인도자와(알라의) 호의이었다. , 그 자들이 (즉 분명한 증서를 소유한 자들이) 그것을(꾸란을) 믿게 될 것이다. (선지자에게 대항하여서는) 집단들 중에서 누구든지 그 꾸란에 불신자가 되면, 그에게 약속된 장소는 지옥이다.” 수라 21:7 “(오무함맏) 우리는 너보다 전에도 (천사들을 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사람들을 (즉 인간들을)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계시를 보낸 상태로 선지자로 삼았다. 그렇다. (오 메카 족속아) 만일 너희들이 모를지라도 (타우랏, 인질을 아는) 족속의 지식있는 자들에게 물어보라!”

 

수라 21:7은 알라도 무함맏처럼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무함맏을 거절할 것을 모르고 기대를 하였던 무지한 신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즉 알라가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일도 모르고 무함맏에게 말했던 것이다. 수라 29:46-47에서 볼 수 있듯이 무함맏은 그의 사역의 초기에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라고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가르쳤다. “(오 믿는 자들이여) 너희들은 친근한 책-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오직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토론하라! 단지 그들 중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들과만 (날카로운 관계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너희들은 말하라! ‘우리들은 자신들에게 내려진 것에도 (꾸란도), 너희들에게 내려진 (타우랏과 인질도) 믿는다. 우리들의 신도, 너희들의 신도 하나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에게만 복종을 한다.’ (오 무함맏, 우리는 너보다 전에 있었던 선지자들에게 책들을 내려 주었다.) 그러므로 너에게도 책, 즉 꾸란을 내려주었다. 그렇다. 우리는 책이 (즉 타우랏과 인질이) 주어진 자들은 그것을 (즉 꾸란을) 믿을 것이다.” 무함맏과 그의 신 알라와 오늘날의 무슬림들은 이 본문에 비추어 보았을 때, 끊임없이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외선을 행하고 있고, 또한 거짓말을 일삼아 왔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리 평화를 원하더라도 무슬림들은 결코 평화로운 방법으로 그들을 대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무함맏은 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옹호할 뿐만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과 책을 읽는 당시의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 모두를 인정하여 주었다. 수라 3:52-54 “이제 언젠가 예수가 그들 (유대인들) 편에서 불신(신성모독)을 보고서, ‘알라의 (종교에 초대할 때) 누가 나에게 협력자가 될 것인가?’ 라고 말했다. 사도들이 우리가 알라의 종교에 협력하는 자들입니다. 알라를 믿었습니다. 오 예수여, 증거하소서, 우리는 알라에게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창조주여, 증거한 것을 믿었습니다. 당신의 선지자를 따랐습니다. 충분합니다. 우리를 증거자들의 반열에 기록하소서!’ 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교묘하게 했다. 알라도 교묘하게 했다. 알라는 더 교묘하게 하는 자이다.” 수라 10장은 무함맏이 초기에 이스라엘 민족과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극도로 호의적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수라 10:93-94 “의심없이 우리는 이스라엘을 빼어난 최종적인 곳에 장소를 정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정하고 깨끗한 것들에서 양식을 주었다. 후에 그들이 지식(즉 모세오경)이 주어질 때까지 불일치(모순) 하지 않았다.…… (오 무함맏), 만일 우리가 너에게 밝힌 것들에서(즉 전에 종족들에 대해 밝힌 우리 구절들에서) 의심하게 된다면, 그럴 경우에 너보다 전에 있었던 책(즉 모세오경과 신약성경) 읽는 사람들로부터 물어보라! 분명히 너에게 창조주 편에서 진리인 꾸란이 왔다.” 수라 44:29-32 “그렇다. 그들에게 하늘도, 땅도 울지 않았고, 그들에게 기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 참으로 우리는 그들을 아는 상태에서 모든 세상들, 즉 사람들 중에서 선택하였고, 선호하였다.” 비교적 초기의 메카 수라에 속하는 위의 44장에서 무함맏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동경심과 감정은 거의 눈물을 쏟을 직전이었다. 수라 45:16도 비슷한 내용이다. “참으로 우리는 이스라엘 (종족)에게 책, 즉 타우랏, 지혜 그리고 선지자직을 수여했다. 그리고 그들을 정하고 깨끗한 것들에서 양식을 주었으며, 또한 그들을 모든 세상보다 높게 했다.”

 

그래서 무함맏은 유대-기독교인들에게 자기가 만든 새로운 신과 종교가 서로 비슷하니 함께 숭배하자고 제안한다. 수라 3:64-65 “ ‘(오무함맏) 말하라! ‘오 친근한 책’ (즉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여) 우리에게도 너희에게도 동일한 한 말씀에 일치하여 유일한 알라에게만 예배를 드리자! 그에게 어떤 것도 동료로 만들지 말자! 그리고 알라를 두자! 어떤 것들을 신으로 삼지 말자!’ 만일 그들이 (즉 친근한 책들 그 초대를)거절하면, 그 때는 너희들이 (오 신자들이여) ‘너희들은 증인이 되라! 우리는 무슬림들이다. 유일한 알라에게 복종하는 자들이다라고 말하라! ”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먼저 무함맏은 자기가 유대-기독교 전통을 따르는, 즉 구약과 신약 성경에 예언된 대로 와서 그것을 확증하는 자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무함맏은 우선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종교, 모세의 종교, 노아의 종교이고, 무함맏은 그들의 종교에 꾸준히 머물러 있는 자라고 주장한다. 수라12:38,39 “나는<무함맏은> 나의 조상들의 길,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종족과 종교를 따른다. 우리를 위해서 알라에게 어떤 것을 동료로 만드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 오 친구들이여, 흩어진 다양한 안개 신들이 더 좋은가 아니면 유일하고 승리자 알라가 더 좋으냐? 너희들은 그를 버려두고, 자기들과 조상들이 부른 이름들 -우상들에게만 예배하고 있다가장 올바른 종교는 바로 이것이다.” 라고 말한다. 무함맏 당시의 아랍인들과 조상들이 섬겼던 알라의 동료신들을 비난하고 있으며, 이슬람이 가장 좋은 종교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슬람 종교가 가장 올바른 이유는 알라에게 다른 동료가 없는 유일한 신이기 때문이며, 정통 아브라함의 종교를 따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함맏과 이슬람에게 있어서 자기의 아랍 조상들로부터 참된 이슬람 종교를 물려 받았다는 증거가 꾸란에는 전혀 없다. 무함맏에게 있어서 아랍인들은 조상 대대로 우상들을 섬긴 불신자들이었다. 무함맏이 자신의 선지자직의 정통성과 권위를 찾는 것은 자신의 조상들이 섬겼던 종교도 아니고, 결코 자신의 조상도 아닌 아브라함의 종교에 언제나 호소한다. 심지어 무함맏은 아브라함을 자기의 조상이라고 뻔뻔스럽게 주장한다. 무함맏은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이슬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모세와 노아와 예수 등 모든 선지자들이 이슬람 종교를 위해 투쟁한 사람들이라고 선동한다. 수라 42:13 알라가 노아에게 명령한 것과 같은 동일한 종교를 너희를 위해 제정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종교를 아브라함, 모세, 예수에게 명령했다고 한다. 즉 무함맏은 알라의 종교에 있어서 꾸준히 머물러 있다. 거기에는 어떠한 분할도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한결같이 무함맏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자, 무함맏은 자신이 과거의 다른 선지자들과 전혀 다른 것이 없는 자라고 주장한다.수라 46:9 “(오무함맏) 말하라! ‘나는 선지자들 중에서 새롭운 자도, 첫번째도 아니다. (즉 나보다 이전에도 알라의 선지자들이 지나갔다. 왜 너희들은 나의 선지자들에게 놀라서 부정하려고 하느냐?) 나는(미래에) 자신에게도 너희들에게도 무엇이 이루어질지를 모른다. 나는 단지 자신에게 계시된 것을 따르는 자이다. 나는 단지 분명한 경고자이다.” 그러나 무함맏은 자기 자신이 다른 선지자들과 비교하여 전혀 새롭지 않다고 한 것, 즉 전혀 특별한 점이 없고, 첫번째도 아닐만큼 뛰어난 점도 없다고 소개한 것과는 달리, 신구약 성경의 모든 내용을 뒤엎어 놓을 만큼 역사상 가장 끔찍한 일을 저지를 존재가 되었다. 더군다나 자기를 추종하는 자들의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자가 선지자들 중의 가장 위대한 지위를 찬탈했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무함맏은 자신이 성경에 자신이 예언되어 있으며, 자신은 성경의 선지자들의 전통을 있는 자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무함맏은 선지자들과 예언이 중단되었던 역사를 이어주는 자라고 선포한다. 수라 5:19“오 친근한 책이여, 자 우리의 사도(무함맏)이 전에 선지자들보다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우리에게 어떤(천국에 대해서) 복음을 전하는 자와 어떤(지옥의 고통을) 두렵게 하는 자가 오지 않았다.’ 라고 너희가 말하기 때문에 너희들에게(종교 법령들을) 선포하려고 왔다. 자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와(지옥을) 두렵게 하는 자인 자가 왔다.” 본문은 성경 계시의 종결성에 대한 무함맏의 무지를 드러낸다. 신구약 성경이 종결된 이후 상당한 세월이 지났는데도, 어떠한 선지자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무함맏은 바로 이러한 세월을 간격을 이어주는 최종적인 선지자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무함맏이 문맹이 아니었고, 계시록을 한 번만이라도 읽었다면, 이미 오래 전 성경에 선포된 무서운 저주를 자기에게 초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2:18-19“내가 이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하나님이 이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19:19-21“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탄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 도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그러나 이러한 무함맏의 제안이 유대-기독교인들에게 처음부터 한결같이 거절되었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결과이다. 수라 3:65-71에서는 유대-기독교인들이 무함맏을 거절했을 때, 그가 상당히 실망했음을 보여준다. 수라 3:65 “오 친근한 책, 왜 아브라함에 대하여 (그는 우리의 종교에 있었다 라고 하여) 논쟁하느냐! 결국엔 타우랏도, 인질도 그 후에 주어진 것이 분명하지 않으냐? 도대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여) 너희들이 아는 것들 (모세와 예수 선지자들에)대하여 논쟁하고 있다. 이제 무엇 때문에 너희가 모르는 것 (아브라함이 어떤 종교에 있었는지)에 대하여 논쟁하려 하느냐? 알라는 알고 있고, 너희는 모른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도, 그리스도인도 아니다. 오히려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은 경우에 (알라에게) 복종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상숭배자들도 아니었다. 아브라함에게 더 가까이 있는 자는 그(의 길)을 따르는 자이다. 자 이 선지자 (무함맏)과 믿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알라는 겸손한 자들의 친구이다. 친근한 책 중 한 교파는 너희들을 (너희 참 종교로부터) 혼동시키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느끼지 못할 때에 단지 자기들만 혼동시킬 뿐이다. 오 친근한 책이여, 무엇 때문에 너희 자신들이 증거자 되어 알라의 (타우랏에 있는 무함맏이 참 선지자인 것에 대한) 구절들을 부정하느냐? 오 친근한 책이여, 무엇 때문에 너희 자신들이 알면서도 진리를 거짓과 혼합시키고 진리를 가두느냐?”

 

위의 본문은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무함맏의 주장으로, 유대인들이 그의 말을 들었을 때, 충분히 미친 사람이 지껄이는 헛소리이다라고 말했을 법한 말이었다. 아브라함이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은 세상 모든 사람이 아는 사실인데, 아브라함이 유대인도 그리스도인도 아니었고, 알라에게 복종하는 자, 즉 무슬림이었다고 억지를 부린다.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장 가까이서 추종하는 자는 무함맏과 무슬림들이라고 주장한다. 도리어 무함맏은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모른다고 비판하였다. 결국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그를 거짓 선지자로 판단하고 배척하였다.

 

이슬람 선교전략 4 - 코란의 주제(4)

 

무함맏이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좋아했다가 그들에게 실망하고 미워하게 되었던 것을 말해주는 또 다른 수라 구절이 있다. 수라 3:119 “(믿는 자들이여), 너희들은 그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은 너희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함맏에게 유대-기독교인들이 성경을 펴서 읽어주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무함맏에게 성경 자체를 펴서 읽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무함맏은 자기의 거짓을 그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성경의 진리를 거부했다. 도리어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읽어 주면 문맹이었던 무함맏은 그것을 자기식으로 교묘하게 바꾸어서 자기를 변호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수라 3:78 “그들중에는 (유대인들 중에는) 또 한 그룹이 있는데, 책에 (타우랏에) 있지 않은 것을 책에서라고 너희들이 생각하기 때문에, (타우랏) 책을 혀들을 감아서 (망치고 변질시켜서) 그들이 읽어준다. 그리고 알라의 앞에서 오지 않은(자기의 말들을) ‘알라의 앞에서 온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들은 알고 있으면서도, 알라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 무함맏은 구약과 신약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데, 유대-기독교인들이 읽어주는 성경 구절들이 기록된 그대로인지 꾸며서 읽은 것인지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무함맏은 자기에게 굴복한 기독교인들로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얻기도 했으며, 다른 기독교인들로부터 성경에 대한 정보를 얻어서 그것들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무함맏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고 거부했을 때, 무함맏은 종교에 대해 언급하면서 기독교인들에게 너의 종교의 한계로부터 벗어나지 말라라고 함으로써 기독교를 경고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소위 알라의 종교인 이슬람과 유대인들의 종교와 기독교를 동일한 올바른 종교의 범주에 놓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약의 선지자들과 극히 일부분의 이스라엘 종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이스라엘 민족들은 모두 이슬람 종교를 반대한 우상숭배자들이었다고 한결같이 비난하고 있다. 이슬람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모두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극단적으로 반대하는 양면성을 드러내고 있다.

 

수라 4:171 “오책이여, (예수를 신이라고 말함으로써) 너의 종교에 있는 한계로부터 벗어나지 마라! 알라 영광에 오직 진리의 말만 하라! 당연히 그 예수 그리스도 마리얌의 아들은 단지 알라의 선지자이고, 그의 마리얌에게 던진 말씀이고, 또한 그의 편에서 온 영일 뿐이다. 됐다. 알라와 그의 선지자들을 믿어라! ‘(주가) (즉 알라, 마리얌 그리고 이사 셋 모두 주님들이다)’ 라고 말하지 말라! ”

 

꾸란에서 무함맏은 종종 유대교와 기독교를 세상에서 권위 있는 종교들에 포함시키고 있고, 심지어는 기독교에서 이단시하고 있는 분파까지 무함맏에게 복종하는 경우에는 올바른 종교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수라 2:62 “당연히 믿는자 들이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과 (알라에게 믿음을 둔, 그러나 어떤 샤리아법을 준수하지 않는 종교적인 분파인) 사비교도들 (그들로부터) 어떤 자들 (전에 어떤 종교에 있었던 강한 믿음을 가지고, 유일한) 알라에게, 종말의 날을 믿는다면, 그리고 잘 준수한다면,그들에게 창조주의 앞에서 상급이 있고, 그들을 위해서 위험과 염려가 없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의 종교는 최고의 권위가 있는, 가장 믿을 만한 종교이다라고 자주 말한다. 실제 역사적인 사실에 있어서 아랍 족속과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아브라함이 그들의 민족의 조상이고, 종교의 조상이라고 말한다(수라 2:124). 알라가 아브라함을 모든 민족들을 위한 이맘으로 만들었고, 그의 자손들도 이맘들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종교가 이슬람이었고, 그의 자녀들이 모두 무슬림이었다(수라2:130-132)고 주장한다. 하지만 무함맏 당시의 책의 사람들, 즉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무함맏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수라 3:19).그래서 수라 4:171; 5:77 “오 책의 사람들이여, 너희 종교의 한계를 넘어가지 말라!” 라고말한다. 이 말은 각각의 종교에 한계가 있다는 말로, 이슬람 이외의 다른 종교들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꾸란에서 무함맏은 자주 이슬람이 가장 좋은 종교, 가장 올바른 종교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그는 항상 한 종교를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여러 종교들을 상대적으로 비교하고 있다. 이러한 꾸란의 종교적인 사상 때문에, 오늘날 수 많은 무슬림들은 우리는 당신들의 종교를 존중하고 있소, 그런데 왜 당신들은 우리의 종교를 존중하지 않소?’ 라고 질문한다. 또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종교들을 존중한다.’ 라는 표현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며, 모든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들, 즉 불교와 힌두교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종교를 인정한다고 하는 말인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이슬람이 절대 진리를 소유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모순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거짓된 종교들을 존중함으로써 자신들의 거짓들도 존중해 달라고 하는 간청을 하는 셈이다.

 

수라 5:19“오 책의 사람들이여! 자 우리의 사도가 너희 책들 중에서 감추어진 많은 것을 너희들에게 분명히 한 경우에, 많은 것들을 거절한 때에 왔다. 너희에게 알라로부터 빛과 분명한 책이 왔다. 알라는 모든 것들 위에 권세를 가지고 있다. 이 구절을 포함한 꾸란의 많은 구절에서 알라는 흔히 우리라는 1인칭 복수를 사용한다.그렇다고 이러한 인칭과 수가 꾸란 전권에서 일치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가끔은 1인칭 단수로, 아주 드물게는 3인칭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칭과 수에 관한 문제는 다른 곳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유일한 신 알라에 관한 문제가 아랍 우상숭배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것처럼, 유대인들-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가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그럼 유일신에 관한 무함맏과 유대인들-기독교인들 사이에 있었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었나? 사실 겉보기에는 유대인들의 유일신에 대한 사상이나, 무함맏의 유일신에 대한 사상은 큰 차이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유대인들이 무함맏을 믿을 수 없도록 만드는 이유는 선지자들에 대한 무함맏의 꾸며낸 이야기들과 자기들이 익숙히 알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 사이에 존재했던 첨예한 차이점 때문이었다. 이에 첨가하여 기독교인들의 반대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구속사적인 중요성을 제거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무함맏은 당시의 아랍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던 우상 숭배자들에게도, 유대인들에게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반대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수라 3:79에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무함맏이 소위 선지자라고 불렀던 예수를 하나님으로써 예배하는 것에 대해 무함맏에게 말했고, 무함맏은 자기가 새롭게 시작한 종교의 사상과 맞지 않기 때문에 거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을 위해 알라가 그에게 책, 지혜 그리고 선지자직을 준 후에, 사람들에게알라에게가 아니라, 나에게 예배하라라고 말하는 것은 허용된 것이 아니다.”

 

결국 무함맏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부정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정죄하고 저주하였으며, 결국에는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수라 29:46 “(오겸손한<신자>자들이여), 너희들은 책들을 가지고 단지 가장 아름다운 방법으로 대화하라! 오직 그들 중에서 억압-폭력을 사용하는 자들과만 (예리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가능하다).그리고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꾸란도, 너희들에게 주어진 모세오경과 신약성경도 믿는다. 우리들의 신(일라), 너희들의 신(일라)도 하나이고, 우리들은 그에게만 순종한다.’라고 말하라.” 초기에 반대에 부딪혔을 당시의 이러한 조심스러운 태도는 차츰 노골적인 압력 행사로 악화되었다. 수라 9:29,30“알라와 말일을 믿지 않는, 알라와 그의 선지자가 부정하다고 한 것들을 부정하다고 알지 못하는, 진리 (즉 이슬람) 종교에 신뢰하지 않는 책들로 구성되는 어떤이들에게 반대하는 자들은 그들이 짓밟혀졌을 때 자기들 손으로 세금을 내기 전까지는 전쟁을 하라! 유대인들은 우자이르가 알라의 아들이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알라의 아들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문서나 증거 없이) 그들의 입에 있는 말들이다.” 이 말은 분명히 논리적으로도 모순이 된다. 만일 유대-기독교의 하나님이 이슬람의 신과 동일하다면, 왜 이슬람은 억지로 유대-기독교인들을 무슬림으로 개종시키려고 그처럼 가혹한 정벌을 했는가 하는 점이다.

 

결국 수라 5:72-73에서 보는 것처럼, 무함맏과 꾸란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노골적으로 저주하고, 유대-기독교 역사를 송두리째 뒤엎고 왜곡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수라 5:72-73 “알라가 마리얌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들은 분명한 불신자들이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 이스라엘이여, 나의 창조주와 너희 창조주가 되는 알라에게 종노릇하라!’ 라고 말했다. 당연히 누구든지 알라에게 쉬르크를 초래하면, 알라가 그에게 낙원을 부정하게<하람> 할 것이고, 그의 있을 곳은 지옥이 될 것이다.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어떤 돕는 자도 있지 않을 것이다. ‘알라는 셋 (즉 알라, 마리얌, 이사) 중의 하나이다라고 하는 자들도 분명히 불신자들이다. 왜냐하면 유일한 알라 외에 어떤 신(일라)도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말하고 있는 말들을 멈추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들 중 불신자가 된 자들을 고통스러운 고난이 붙잡을 것이다.” 수라 3:67 “아브라함은 유대인도 기독교인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알라에게 복종하는 자였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무슬림이었고, 그들의 종교는 이슬람이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무함맏은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과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모두 무슬림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종교는 알라의 참된 종교, 이슬람이었다고 우긴다. 이렇게 주장해야 되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무함맏은 자신이 구약에 예언된 선지자라고 꾸란에서 여러 번 주장한다. 그는 자기가 선지자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끊임 없이 주장한다. 즉 무함맏 자신과 이슬람 종교의 역사성에 치명적인 결핍이 있는 것이다.인류의 역사가 수천년이 흐른 이후에, 7세기 초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슬람 종교에는 역사적인 기반과 배경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보완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인류의 역사 시작부터 변함없이 존재했던 종교를 자기의 종교로 삼고, 그 역사적 전통을 가로채는 방법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대교도, 기독교도 모두 사실은 이슬람이었다라는 억지주장을 내세웠고, 아브라함의 생애를 팔레스타인 땅에서 아라비아 반도로 옮겼으며, 모든 선지자들을 무슬림으로 만들었고, 자기는 가장 신실하게 이슬람 종교를 확증하는 최후의 선지자의 자리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이것에 반대하는 자들은 역사적 사실이야 어찌 되었든지 간에 모두 불신자들이며, 우상숭배자들로 정죄되어야 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한 후에 무함맏은 자기를 따르는 무슬림들이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모든 길들을 막아놓았다. (알라에게 복종을 의미하는) 이슬람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원하는 자는 누구나 알라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수라 3:105 (종교적) 토론에 빠지는 사람처럼 되지 말라. 그들에게는 무서운 형벌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무슬림들에게는 꾸란과 무함맏의 권위와 진실성에 대하여 어떠한 질문도 해서는 안된다. 무함맏은 이미 유대인들-그리스도인들과의 종교적 토론에서 자신의 거짓이 충분히 드러났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과 종교적인 토론을 할수록 자기에게 불리할 뿐만 아니라, 이후 자기를 따르던 무슬림들도 종교적 토론을 하게 되면 패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과는 어떤 대화도 용납치 않았고, 철저히 전쟁과 세금과 같은 압제를 통해서만 그들을 굴복시켜야 한다고 명령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무수히 많은 무슬림들이 참된 진리를 알고 싶어도 무함맏의 협박과 주변 사람들의 위협 때문에 그 의심을 감추고, 진리를 알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많은 두려운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무함맏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일관되게 협박과 공갈로 자기 종교에 붙어있도록 강요하였다. 수라 41:13 “그렇다. 만일 그들이 (즉 메카의 우상숭배자들이 이 상세한 설명 뒤에도 유일한 알라를 믿지 않고) 거절하면, 그 경우에는 말하라! ‘나는 너희들을 정확히 옷-야벳-과 사묻-- (종족들을 내려친) 번개과 같은 한 번개, 즉 멸망이(임하는 것)을 경고한다.’”

무함맏의 모든 설교는 자비롭고 은혜로운 창조주, 유일한 알라만을 섬기고, 알라와 그가 보낸 사도 무함맏에게 복종하고, 알라와 무함맏의 종교인 이슬람을 따르라는 명령으로 함축된다. 꾸란의 다른 모든 내용은 이것을 확증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이것보다 더 중요한 내용은 꾸란에도, 하디스에도 있을 수 없고, 있지도 않다. 이것이 이슬람 종교의 전부이다. 모세오경, 시편, 신약성경, 그리고 그들의 모든 내용들과 선지자들은 단지 알라가 유일한 참 신이며, 알라가 그의 사도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수라 61:11). 즉 무함맏은알라의 이름도, 모든 선지자들도, 천사들과 영적 존재들도 모두 자신이 많든 새로운 종교를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서 이용하고 있다.

 

무함맏은 알라에게도 종교가 있고, 그것이 곧 이슬람이며, 따라서 이슬람은 창세전부터 있었다는 전설을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이슬람은 최후의 종교이며, 무함맏은 최후의 선지자이기 때문에 가장 위대하다는 논리적 모순을 과감하게 자행한다.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종교가 필요한데, 그것은 곧 유일한 신 알라에게 복종하는 이슬람이라고 가르친다. 천국은 종교적인 교훈이 가득찬 곳이다. 그리고 복종하는 자들은 곧 믿는 자들이며, 그들은 곧 무슬림이라고 가르친다. 무함맏이 말하는 종교와 무함맏의 조상들이 섬겼던 종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무함맏이 말하는 모든 종교 의식들은 아랍 우상 숭배자들로부터 온 것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무함맏은 자기 종교의 정통성을 성경의 선지자들의 종교에서 찾는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아브라함, 모세, 예수는 어떤 종교를 고안해 내려고 노력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성경에서는 참되신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교제를 한 번도 종교라는 용어로 설명한 적이 없다. 더군다나 하나님께 어떤 종교가 종속되어 있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교리적 주제들 중에 유사한 것들이 대단히 많은 것은 무함맏과 유대-그리스도인들의 끊임 없는 논쟁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 번도 의견의 일치를 얻지 못했다. 성경을 읽을 줄 몰랐던 무함맏은 궁지에 몰렸던 것이다.무함맏은 문맹으로서 한 번도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었고, 자기의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유대-그리스도이들은 단순히 성경을 읽을 뿐만 아니라 연구하는 자들이었다. 무함맏의 거짓말들은 모든 선지자들의 삶과 믿음과 그들에게 주어졌던 약속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유대인-그리스도인들 앞에서 벌거벗은 듯이 명백히 드러났다.그럴 때마다 무함맏은 억지로 꾸며낸 거짓말들로 그들을 공격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무슬림과 대화를 할 때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슬람 선교전략 4 - 코란의 주제(5)

 

꾸란의 전체적인 종교적 주제와 맥락은 다음과 같다. 즉 꾸란의 전체 114 수라장들은 흔히 이슬람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광범위한 삶의 모든 부분들을 다 다룬 것이 아니라 주로 이슬람 종교에 대해 다룬 것인데, 그것을 요약한다면 대단히 단순한 공식이 성립한다. 무함맏이 새롭게 고안해 낸 이슬람 종교와 그의 새로운 유일신 알라와 그의 새로운 움마 공동체인 무슬림들과 그들의 대표자로서 가장 중요한 선지자 역할을 하고 있는 자신은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와 같은 선지자들의 뒤를 따를 뿐만 아니라 그들을 확증하는 자이다. 꾸란에 나타나는 노아, , , 야벳,아브라함, , 요셉, 모세 등과 같은 선지자들은 많은 수라들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전했던 내용은 모두 이슬람 종교의 가르침을 전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또한 귀신들도 이슬람의 교리를 믿었고 다른 귀신들에게도 가르쳤다. 그 내용은 무함맏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것들인데, ‘알라는 유일하고, 그에게는 어떠한 동료도 다른 신도 없다. 사람들은 선지자에게 복종하지 않고 그들을 거짓말쟁이라고 했기 때문에 멸망을 당하였다. 그들은 나마즈를 완전하게 수행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종말의 날과 부활과 천국과 지옥에 대해 경고하였다.’ 선지자들이 증거했던 이슬람 종교는 알라의 종교이며, 세상에서 가장 좋은 종교이고, 이 종교를 믿고 따르며, 이 종교를 위해 싸우는 자는 낙원에 들어가고 이 종교를 믿고 따르지 않거나 이 종교를 배반하는 자들, 즉 이슬람 이외의 모든 종교를 믿는 자들은 지옥에 들어가서 고통스러운 불속에서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꾸란은 모두 114 수라로 구성되어 전체 부피가 적지 않지만, 대부분 동일한 주제와 사건과 이야기들이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것으로서,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대단히 단순한 책에 불과하다. 무함맏이 가르쳤던 종교적인 의무들은 실제에 있어서 그렇게 대단한 내용들도, 진리들도 아니다. 꾸란에서 무함맏과 그의 신 알라가 가르치는 선행이나 도덕, 법에 관한 내용들과 그 의미들은 동서양 고금에 존재했던 일반적인 철학자들의 가르침과 비교했을 때 훨씬 수준이 낮은 것들에 불과하고, 우상숭배 종교인 불교의 가르침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형편 없는 것들에 불과하다. 꾸란의 거의 모든 내용, 특히 선지자들을 이용해가며 했던 말들은 모두 그가 꾸며낸 거짓말들이며,그 나머지도 타락한 인간을 감화하여 변화시키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할 만한 특별한 점이 전혀 없기 때문에 무함맏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거짓말쟁이로 취급하였던 것은 타당한 판단이었다.

 

이렇게 조잡한 이야기들이 전지전능하시고, 지혜가 한이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기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지만, 배후에 역사하는 어두움의 영,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는 영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사실을 거의 보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오늘날 이슬람의 신앙에서 대부분의 것들이 아랍의 종교 전통에서 온 것들이며, 또한 지어낸 전설들에 불과하지만 진리의 조명을 받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그것이 진리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무슬림들을 거짓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 뿐이다.

 

무함맏이 말한 것처럼, 과연 성경은 무함맏의 확증을 필요로 하는가? 오늘날 무슬림들이 전혀 읽지 않고 있는 성경의 내용은 꾸란이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질서정연함과 심오한 진리들과 하나님의 성품으로 충만하다. 우주와 인류 역사의 시작, 죄의 시작,하나님의 구원 계획, 언약, 예언, 인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과 계시,인류 역사의 성격, 인간의 삶의 기준이 되는 공의로운 율법, 다양하고 구체적인 인간의 내면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들, 하나님과의 동행, 하나님의 언약들과 예언들의 구체적인 성취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 약속된 성령을 받고 실제적으로 죄인이 변화되어 새로운 생명과 의롭고 거룩하며 성화되어 가는 삶을 체험하는 것, 무함맏이 결코 제공해 줄 수 없는 수 많은 선지자들의 믿음의 발자취와 예수님의 거룩한 삶의 모범 등 그 어떤 것을 무함맏과 그의 책 꾸란이 흉내낼 수 있겠는가?

 

무함맏에 대한 동시대 사람들의 비난들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또한 탁월하게 신비한 과정을 통해 매듭(또는 옹이)에 숨결을 불어넣는 마법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수라 113 “(무함맏) 말하라! : ‘나는 아침 창조자로부터 (나에게) 자신이 창조한 것들의 악한 것들로부터, 어둠에 빠진 밤의 악한 것으로부터, 마디들에 호흡을 불어넣는 (마술사)들의 악한 것들로부터, 그리고 질투하는 질투자의 악한 것으로부터 피난처 주기를 구하며 기도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무함맏이 아랍 이방인들의 악한 영적인 세계를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113 수라와 114 수라는 무함맏은 Mu'awwidbatayn로 알려진 어떤 특정한 악한 존재들(악령들)로부터 피할 피난처를 구하고 있다. 이 두 수라 뿐만 아니라 수라 7:200; 16:98; 41:36에서 무함맏은 무슬림들에게 사탄으로부터 피하도록, 수라 40:56에서는 꾸란에 대한 논쟁을 할 때, 사람으로부터 피하기 위하여, 수라 72:6에서는 진으로부터 피하기 위하여 알라에게 피난처를 구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심지어는 어떤 진들이 무슬림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수라 72:1-19에서 진들 중 어떤것이 꾸란을 듣고서 진리의 길로 들어섰고, 꾸란을 듣고 당장 믿었으며, 창조주에게 그 어떤 동료도 있지 않다고 말하여 무슬림이 되었다. 당연히 우리는 인스도, 진도 알라의 영광에 항상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수라 72는 진들이 직접 1인칭이 되어 말하고 있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10-19절까지는 완전히 진들이 진들의 세계와 그들의 일들과 알라에게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고 있다. 무함맏은 그가 죽인 사람들의 영이 그의 꿈 속에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알라가 창조한 것이 그에게는 악하게 보였고, 이를 두려워했다. 무함맏 자신이 밤에 두려움으로 떨었다. 매듭을 써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려는 여인들과 마술사를 두려워했다. 무함맏의 알라에 대한 두려움은 극에 달하였다는 사실을 위의 구절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무함맏에 대한 당시 아랍인들의 평가가 꾸란에 나타난다.메카 사람들은 무함맏을 공포에 이끌려 부자연스럽게 행동했기 때문에 마주눈 (미친, 홀린)이라 했다(수라 37:36 - 미친자 시인; 44:14 - 미친 자). 수라 52:29 “됐다. (오 무함맏), 너는 (사람들에게 꾸란 구절들을 가지고) 가르치라! 왜냐하면 너는 창조주의 호의로 점쟁이도, 미친 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상숭배자들이 무함맏은) ‘한 시인이다. 우리들은 그에게 재앙이 미치기를 기다린다라고 한다.” 심지어는 무함맏은 자신이 미친 자가 아니라는 것을 맹세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수라 68:2 “연필과 (그와 함께 천사들이) 쓰는 기록들에 맹세하건데, (오 무함맏) 너는 창조주의 호의로 미친 것이 아니다.” 수라 81장은 무함맏이 메카에서 초기에 암송했던 수라로서 왜 메카인들이 그를 미친 시인이라고 했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암시를 주고 있다. 수라 81:1-25 “해가 둘둘 말려졌을 때, 별들도 (자기 하늘들에서) 흘러내릴 때, 산들도 (자기 자리들에서 옮겨져) 돌아다닐 때, (뱃 속의 새끼가) 열 달 된 임신한 낙타들도 자유롭게 보내졌을 때, 맹수들도 (한 곳에) 모였을 때, 바다들이 (화덕처럼) 불어졌을 때 (그리고 물 대신에 불로 채워졌을 때), 영혼들이 (다시 육체들에) 짝지워졌을 때, 산채로 매장된 (각각의) 소녀에게 어떤 죄 때문에 죽었는지를 물었을 때, (행위를 기록한 책) 페이지가 열려졌을 때, 하늘이 (땅 위에서) 벗겨졌을 때, 지옥이 (불신자들을 위해) 타올라 흐를 때,천국이 (경건한 자들에게) 가까워졌을 때, (바로 그 날에 각각의) 영혼이 (바로 그 날을 위해) 준비하여 온 것을 (즉 모든 선악을 행한 것을) 아노라! 충분하다. 나는 (밤들의 눈에서) 보이지 않는 자, (밤들도) 빨리 지나 (자기 둥지들’ - 성벽들에) 숨어있는 자()들에게, 자기 어두움으로 오가는 저녁에게, 그리고 밝고 있는 새벽에 맹세를 하노라! 의심할 나위 없이 이 (꾸란은) 한 위대하고, 힘있고, 아르쉬의 주인 (되는 알라)의 견해로서 적절한 시간과 장소가 있는, 그곳에서 (즉 하늘에서 천사들 쪽에서)복종하는 자, 신실한 사도의 (즉 자브러일 천사의 알라 편에서 온) 말씀이다! 그리고 너희들의 주인인 (무함맏은) 미치지 않았다. 참으로 그 (자브러일을) 열려진 지평선에서 보았다. (무함맏은) 출처를 모르는 계시를 탐내는 자도 아니다. (그는 알라 편에서 자기에게 온 계시들을 망치지 않고, 완전한 형태로 너희들에게 전해 주었다.)그리고 이 (꾸란은) 쫓겨난 사탄의 말이 아니다.”

 

본문에서 사람들에게 진리의 길을 가르쳐 주고, 생명을 주는 어떤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 대신 의미없이 중얼거렸던 시와 의미 없는 맹세와 무함맏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말과, 그가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출처도 모르는 계시를 탐욕스럽게 갈망하는 자도 아니고, 꾸란이 사탄으로부터 오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말들만 있을 뿐이다. 그의 이웃들은 그를 두려워하여 사히르(마술사)라고 했다(수라10:2) “불신자들은참으로, (즉 무함맏은) 대단한 마술사이다라고 한다”; 수라15:15“만일 우리-알라-가 그들에게 하늘에서 한 문을 열어 놓는다면, 그리고 거기에서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한다면, 그래도 당연히 그들-아랍인들-, ‘의심할 나위 없이, 우리들의 눈들을 묶어 놓았다. 우리들은 마법에 걸린 사람들이다라고 할 것이다.” ; 수라 38:4 “(메카우상숭배자들이) 그들에게 자기들로부터 (즉 인간 족속으로부터) 된 한 경고자? 선지자가 나온 것에 놀랐고, 그 불신자들이 말하기를, ‘이는 한 거짓 마법사이다. (그래서) 신들을 한 신으로 만들어 버렸느냐? 참으로 이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라고 했다.”). 수라 21:3-6“당연히 그것을조롱하여, 심령들이 전적으로 무지해진 상황에서 듣는다. 그리고 포악스러운 불신자들은 이 자 (즉 무함맏)은 너희와 비슷한 한 인간일 뿐이다. 너희가 보고 있는 상태에서 마술에 (속으려고) 하느냐?’ (라고 하여) 서로 속삭인다. (그 때 무함맏이) 말하기를 나의 창조주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말을 안다. 그는 듣는 자이며, 아는 자이다.’ ‘그러나 그들은(무함맏이 계시라고 주장하는 말들이) 조리없는 꿈들이다. (그 말들을) 아마도 그 자신이 지어내었다. 아마도 그는 한 시인이다. 그렇다. 그도 전에 보내진 선지자들이(초래시킨) 것과 같은 어떤 이적을 초래하게 하라!” 다른 사람들은 마슈르(마법에 걸린), 또는 미친자라고 했다(수라 17:47,48“우리는 그들이 너에게 (즉 너의 암송하는 것에) 귀를 기울였을 때 무엇 때문에 귀를 기울이는지를, 그리고 이 핍박자들이 서로 속삭이며, ‘분명히 너희들은 마술에 걸린 자들이다. 정신이 나간 사람들을 따르고 있다.’ 라고 말하는 것들을 아주 잘 알고 있노라. (오 무함맏) 그들은 네가 참으로 (마법에 걸린, 미친 자, 시인이라 하여) 어떤 예들을 드는 자들을, 됐다, 길을 잃고 () 길을 찾지 못하는 자들을 보라!” 다음 구절은 무함맏의 표현 자체에서 왜 아랍 우상숭배자들이 그를 마술사, 미친 자라고 했는지를 보여준다. 수라 17:50-51“말하라! ‘너희들은 돌이나 쇠붙이가 되라! 또는 너희 마음들에 (생명을 상상하는 것은) 아주 힘든 다른 어떤 존재가 되라! (모든 상태에서 알라가 너희들을 부활시킬 것이다)’ 아직 그들은 우리들을 누가 부활시킬 것이냐?’ 라고 말한다. ……수라 25:9; 44:13). 수라 18:40-41“분명히 나의 창조주가 나에게 너의 동산-또는 과수원보다 더 좋은 (한 동산을) 줄 것이다. (너의 동산에는) 하늘에서 벼락들을 보낼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매우 부드러운 땅으로 변화될 것이다. 또는 그것의 물이 (땅 밑으로) 흡수되어 너는 그것을 찾아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여러 사람들은 카힌(점쟁이)라고 불렀다(수라 52:29; 69:38-42 “충분하다. 나는 너희들이 보는 것들에도, 너희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에도 멩세를 한다. (꾸란은) 의심 없이 위대한 선지자의 (알라 왕궁에서 오게 된) 말들이다! 그는 어떤 시인의 말이 아니다! 너희들은 (그 꾸란이 알라의 말인 것을) 아주 적은 사람만 믿는다! 그리고 어떤 점쟁이의 말도 아니다. 너희들은 아주 적은 사람만 교훈을 받아들인다.!” ). 또한 진의 인도를 받아 영감있고 리듬있는 시를 반복적으로 암송했기 때문에 샤이르(시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수라 37:36; 52:30; 69:42).

 

무함맏은 자기를 반대하는 자들을 극도로 미워하였으며, 결코 너그럽고 온유하게 용서해 주는 법이 없었다. 그를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그의 마음 속에 항상 얼마나 악하고 저주스러운 가득찬 생각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수라 구절들이 수 없이 많다.

 

위와 같은 무함맏의 많은 헛된 맹세와 변명들과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시기와 미움과 저주로 가득찬 꾸란이 어떻게 죄로 인해 생명을 잃고 방황하는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변화시켜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인도할 수 있겠는가?

 

추종자들이 무함맏에게 가브리엘과 만났던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자 그는 종 울리는 소리와 금속이 쿵쿵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가 계시를 받는 동안 추종자들은 그의 얼굴이 창백해지거나 붉어졌으며, 그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이고, 가끔은 무의식 상태에 있었음을 보았다. 이처럼 무함맏은 계시를 받는 동안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무엇에 홀린 듯한 사람과 같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를 두려워했다.

 

이 밖에도 무함맏에 대해 무함맏 당시의 아랍인들이 비난했던 단어들은 거짓말쟁이”, “전설을 말하는 자등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비난은 최근에 우리가 일부러 꾸며낸 것도, 우리가 이슬람을 비난하기 위해서 하는 말도 아니다. 꾸란 자체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꾸란 전체에 걸쳐 무함맏의 말들은 대체적으로 과장이 너무 심하고, 사소한 일에도 천국과 지옥을 운운할 정도로 언어에 경솔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이슬람 선교전략(4)-코란의 주제(6)

 

무함맏은 새로운 종교 이슬람의 고안자이다.

이슬람 종교는 무함맏 이전에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었다. AD 600년 이전에 󰡐알라󰡑, 󰡐이슬람󰡑, 󰡐무슬림󰡑 이러한 단어들은 세상 그 어디에도, 그 어떤 문서에도 없었던 것이다. 이슬람 종교는 하심 계통의 꾸라이쉬 부족의 아둡라의 아들 무함맏에 의해 아라비아의 메카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무함맏은 40세가 되었을 때, 가브리엘이라고 주장하는 천사에 의해 알라에 관한 계시가 아닌, 알라의 뜻에 관한 계시를 시리즈로 받았다.

 

무함맏은 아담과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모세와 심지어는 예수까지 참 무슬림이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무지한 자힐리야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성경의 선지자들을 믿고 따르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자기의 종교로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유일신 여호와가 있었다면, 무슬림들에게는 무함맏에 의해 유일신이 되어버린 알라가 있다. 무슬림이란 단어는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을 모방하여 󰡐이슬람과 무슬림󰡑, 󰡐복종과 복종하는 자󰡑의 구조를 만든 것이다.

 

기독교에는 그리스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면, 무함맏은 자기가 스스로 고안해 낸 이슬람 종교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신앙의 대상이라면, 무슬림들의 신앙의 대상은 알라이고, 이 알라는 그 이전의 그 어떤 신보다도 위대한 위치를 찬탈해 버렸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 이삭, 다윗의 후손으로 왔다면, 자신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 혈통으로 왔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한 아브라함 ? 이스마엘 ? 무함맏 신화를 만들어 냈다. 유대인들에게는 토우랏과 자부르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경이, 이제 무슬림들에게는 꾸란과 하디스가 경전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며, 그것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과 종교의 기준이 되었으며 세계관이 되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여 닮으려 한다면, 무슬림들은 무함맏을 모방하여 닮으려 한다. 사람들의 삶은 그들이 따르는 자를 닮게 마련이고, 실제로 그리스도인과 무슬림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교회라면, 무슬림들을 위한 공동체는 움마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안에 있는 모든 영역을 무함맏과 그의 종교 이슬람은 모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꾸란에서도 충분히 간파할 수 있다.

 

수라 2:135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이 되라! 올바른 교훈을 찾자!󰡑 라고 그들은 말한다. (즉 유대인들은 유대인이 되라! 말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라! 라고 말한다. 너는 말하라! 오 무함맏이여!) 오직 우리는 참 길에서 떠나지 않은 자, 우상숭배자들이 되지 않은 아브라함의 종족에-그의 종교에 (따르고 있는 자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라고 해서 무함맏이 천재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상 무함맏은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이었으며 전해지는 바로는 문맹이었으며, 꾸란을 읽어서 알 수 있듯이 말에는 모순이 많으며 거짓말쟁이였다. 그가 기록한 꾸란의 거의 대부분의 내용들이 꾸며낸 거짓말들이다.

 

무함맏은 수라 2:256에서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고 말한다. 󰡒종교에 강요하여 들어가게 하는 것은 없다.󰡓 하지만 사탄과 무함맏은 무슬림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그 길을 막고 있다. 무슬림들은 이슬람과 꾸란에 대해 그 어떠한 질문도 의문도 가져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무함맏의 거짓말들에 속고 있는 무슬림들에게 진리의 빛으로 비추어 주고, 어두움 가운데서 어두움의 영이 이끄는대로 무력하게 이끌려 가는 불쌍한 무슬림들을 구원해 내야 한다.

 

사실상 무슬림들도 꾸란의 가장 중요하고 전체적인 주제가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무슬림들이 꾸란의 모든 내용을 알고 믿고 있는 것도 아니다. 거의 모든 무슬림들은 꾸란의 모든 수라들 중에서 개경장(첫번째 수라)와 이슬람 종교를 가르치고 기독교를 대적하기 위한 것과 같은 극히 일부분의 내용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사실상 이슬람의 교리나 개경장과 같은 것은 이슬람 종교를 잘 포장해서 이슬람이 진정한 종교라고 선전하여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것들에 불과하며, 그러한 것들은 꾸란의 전체의 내용과 잘 조화되지 않는다.

 

사역자들은 이슬람을 포장한 것들에 지나치게 주목해서는 안된다. 또한 그러한 것들에 현혹되어서도 안된다. 포장된 겉모습 내면에 있는 이슬람의 진정한 모습은 이슬람의 배경이 되고 있는 역사와 이슬람의 기초가 되고 있는 꾸란의 진정한 주제에 관한 것이다.

 

무슬림들은 꾸란의 진정한 주제가 종교 토론에 불과한 것을 모른 채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단순히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그리스도인 학자들이나 사역자들 조차도 이 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슬람을 다루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우리는 무슬림들에게 꾸란의 진정한 주제가 하나님 자신과 그의 계획에 대한 계시나 인간을 죄와 멸망에서 구원함으로써 하나님을 알며, 사랑하고, 찬양하게 하고,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맛보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꾸란의 허구성을 그들도 깨닫도록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이나 맹목적인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두움에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살아가기 때문에 꾸란의 내용은 지극히 무의미하다는 사실도 모르고 알라에게서부터 주어진 것으로 믿고 살아간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과 비교하면서 설명해 주면 전도하는데에도, 양육하는데에도 대단히 큰 도움이 된다.

출처 : 바울선교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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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요즘 종결자라는 단어가 유행인 것 같다. 낯선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분명 신조어는 아니다. 외래어긴 하지만 terminator라는 단어가 더 친숙하다. 굳이 다른 한국말로 번역하자면 ‘끈질긴 자’, ‘끝을 보고야 마는 자’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선교에도 이런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선교의 종결자’. 좀 더 문학적인 표현으로 ‘선교의 마침표’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 시대에 선교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선교의 종결자가 있다면 누구일까?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럼 왜 예수님께서 선교를 유언으로 명령하시고 2천 년이 훨씬 넘어선 지금에도 선교는 미완성 과업으로 남아 종결되지 않을까? ‘선교는 하나님이 종결자다’라는 말은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는 정답 같은 오답이다. 선교의 종결자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선교의 마침표를 찍어야 할 자는 바로 교회다. 선교사도 아니고 선교단체도 아니다. 교회다. 예수님께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신 대상은 바로 제자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인 교회가 바로 그분의 명령을 받들어 사명을 성취해야 한다. 선교라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기차가 하나님이라면 교회가 철로이기 때문이다. 철로 없이 기차는 달릴 수 없다. 그렇다면 선교의 종결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인 것이다. 머리의 명령을 받아 그것을 성취하는 것은 몸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선교의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1 개정개역)

 

 선교의 목적(종결)은 무엇인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개정개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온 땅의 사람들이 승리와 기쁨의 상징인 '종려 가지'를 들고 순결을 의미하는 '흰 옷'을 입고 하나님과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찬양하는 모습이다. 얼마나 장엄한 모습인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지만 온전한 화음은 아니다. 사람들과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고통의 소리를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8:22). 구원받은 모든 족속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어린 양의 희생의 사랑을 노래해야만 하는 합창제가 남아 있다. 그 장엄한 노래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울려 퍼지는 그날 드디어 선교의 마침표가 찍히는 것이다. “항해하는 자와 바다 가운데 만물과 섬들과 그 거민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사 42:10) 그 때 역사의 막은 내려진다.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이것을 말씀하시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 개정개역)

 

1) 창조의 목적

하나님께서는 바벨탑 너머로 흩어지는 사람들을 보셨다. 눈에는 촉촉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사람들이 온 땅에 충만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그들이 나아간 것이 아니라 흩어진 것이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맞서다가 강제로 흩어지게 되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프셨다. 원래 하나님의 의도는 인류가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종족마다 제각기 독특한 컬러를 가지고 서로서로 조화롭게 사는 것이었다. 이것이 샬롬이다. 하나님은 획일적인 것을 싫어하신다.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다양성 가운데 통일과 조화를 이룬 샬롬공동체를 꿈꾸신다. 이것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라”하신 진정한 의미인 것이다.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창 10:5 개정개역)

 

2) 예수님의 첫 사역지

예수님께서 첫 사역지로 정하신 곳은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 예루살렘이 아니었다.고향 나사렛도 아니고 태어나신 곳이요 다윗 왕의 고향인 베들레헴도 아니었다. 이방의 갈릴리였다.(마 4:12-16)

 

왜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메시아로 선포된 이후의 첫 사역지로 정하셨을까? 단지 다른 지방보다 더 멸시 받고, 영적으로 가장 비참한 상태에 놓인 갈릴리 사람들이 불쌍해서일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과 같다.

 

3) 예수님의 오신 목적

구약에서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선민의식 때문에 원심적 선교가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요나 선지자가 이방인을 향해 나아갔지만 어디까지나 떠밀려 억지로 나아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심적선교를 스스로 펼치셨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을 듣고 이스라엘의 언약 속으로 들어왔다(수2:9-10). 이방 여인 룻도 인애의 사랑으로 이스라엘의 한 사람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의 언약 아래 들어왔다. 모두 하나님께서 스스로 행하신 구심적인 선교였다.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주어진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출 19:6). 그러나 하나님은 열방을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꿈을 포기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역으로 선교의 도구로 이용하셨다. 그들을 바벨론 포로와 앗수르의 포로가 되게 하심으로 당시 세상의 중심이 되는 나라에 당신의 백성을 심으셨다.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로 그들과 함께 거기 머물면서 스스로 당신을 이방인들 가운데 나타내셨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통해 그리고 에스더를 통해 스스로 나태내시고 당신의 구원을 보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취하시고 세상에 오시었다. 예수, 그이름은 여호와 삼마의 신약적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개정개역)

 

이 말씀은 어떤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 명절을 지키기 위해 왔다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하는 성경구절이요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죽기 위해서 오셨다.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는 누구를 위한 십자가인가? 유대인만의 전유물인가? 죽기로 예정된 하나의 밀알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죽음으로 맺게 될 많은 열매는 바로 유대인 뿐만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이다.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선민 의식에 절어 있던 유대 제자들에게 이것을 깨닫게 해주고 싶으셨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제자들을 향하여 뜬금없이 밀알(죽음과 열매) 이야기를 하신 것이다. 유대인이라고 하는 한 종족만이 아니라 온 땅의 모든 족속이라는 많은 열매를 맺는 바로 그 때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이다.” (요 12:23)

 

이것이 복음의 특징이다. 모든 죄인, 모든 인류에게 기쁨의 큰 소식 말 그대로 복음인 것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개정개역) 이것을 깨닫는 것이 곧 성경을 바로 깨닫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를 분명히 아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는 것이 참된 헌신이다.

 

4) 교회의 태동 목적

지상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어 성령을 보내 주시었다. 이제는 또 다른 보혜사를 통해서 천상사역이 시작되었다. 살려주는 영으로 오신 성령은 교회를 태동하게 하였다. 갓 태어난 교회의 울음소리는 함께한 모든 이방인들이 들을 수 있는 각기 다른 방언으로 울려 펴졌다. 교회가 무엇을 위해 태동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는 사건이다. 교회는 모든 방언으로 복음의 나팔을 불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4 개정개역)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단어

 

왜 그럼 이토록 중요한 개념을 교회는 오랫동안 몰랐을까? 우리의 성경해석이 너무 이기적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전후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내게 유익이 되는 한 구절만 쏙 뽑아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빌 4:13의 말씀을 우리는 좋아한다. 그러나 그 참 의미는 헤아려 보지 못하고 무작정 좋아하는 것 같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개정개역)

 

이 말씀은 11절과 12절의 연속성 속에서 해석이 되어야 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1-12 개정개역)

 

바울이 말한 '모든 것'은 가난, 궁핍, 핍박, 환란, 죽음을 다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이런 것들은 모두 뺀 우리가 좋다고 여기는 것들만이다. 그는 가난해도 비참하거나 비굴하지 않으며 부해도 교만하지 않는다. 그는 주님 때문에 핍박을 받아도 항상 기뻐할 수 있다. 환란과 죽음이 그를 대면하여서도 그는 감사할 수 있다. 그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태복음 28:18-20 이러한 우를 범하는 예라고 생각한다.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 종족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교회는 오랫동안 이 말씀을 잊었다. 오직 ‘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겠다’라는 말씀만을 기억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족속으로 가라’는 선교의 명령에는 관심도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평범했던 한 사람, 구두 수선공이었던 ‘윌리암 케리’에게 세계를 바라보게 하셨다. 개신교선교는 그렇게 무명의 한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어렵게 불씨를 지필 수 있었다(William Carrey, Pere des missions moderns, 1761~1834).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어렵게 시작된 근대선교도 한동안 이 ‘종족’이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했다. 교회가 보지 못하던 이 ‘종족’이라는 단어를 보게 한 사람이 바로 도날드 맥가브란이라는 선교사이다.

 

도날드 맥가브란 (Donald McGvran, 1897)은 인도의 하다에서 선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콜롬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은 후 다시 20년 정도 더 인도에서 사역하면서 대중운동(Mass Movements)에 대해 연구하였다. 오래전부터 그는 현재와 같은 선교사들의 사역을 통해서는 세계복음화라는 목표의 달성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전략이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때부터 여러 기독교학교들에서 선교학에 대해 강의하였고 1961년에는 기독교 역사상 선교방법론에 대한 연구가 가장 활발했던 것으로 유명한 교회성장연구소(Institute of Church Growth)를 세웠다. 그에게 있어 개선책은 대중운동이었다. 즉 부족 전체나 혹은 동질성집단(Homogeneous Units) 전체를 기독교로 이끄는 것이다. 그런 집단-개인의 개종은 개별적인 회심보다 훨씬 더 안정되고 교회성장을 지속하게 해준다. 동질성집단의 원리라고 명명한 맥가브란의 대중운동 개념은 1974년 로잔회의에서 발표된 후 세계에 널리 퍼졌다. 그는 1955년 이전까지 모든 선교회를 지배하고 있던 전통적이고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선교방법을 뒤흔들어 놓았다. 맥가브란이 그처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몇몇 신학교에서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렀던 선교학을 전문적 연구 차원으로 부상시켰다는 데 있다. 그 이후 교회는 종족이라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단어를 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들을 향해 가는 걸음은 더디기만 하다. (종족이란 공통의 역사와 한 언어와 문화로 연결된 사람들의 그룹을 의미한다.) 오늘날 세계 선교사들의 3%만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 사역한다는 통계는 이것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단면이라 하겠다.

 

 

목적(목표)과 전략의 혼돈

 

종결해야 할 목표는 무엇인가? 선교의 최종목적은 무엇인가?

목적은 한 가지이다. 그러나 전략은 여러 가지이다. 목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략은 변한다. 목적은 전략에 선행한다. 목적이 없는 전략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우리는 목적과 전략을 혼동해 왔다. 선교의 목적과 전략을 혼동했던 것 같다. Peter Wagner, 풀러신학교 교수는 전략을 이렇게 정의했다. “전략이란 하나의 분명한 목표(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다. 선교전략이란 그리스도의 몸(교회)이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 그리고 그분이 맡기신 일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는 방법이다.”

목적과 전략의 혼동이 선교사역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퍼즐의 한 조각만을 가지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전체를 보아야 한다.모든 종족을 보아야 한다.

 

 

미전도종족 선교의 역사

 

1970년대에 전세계인구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바로 미전도종족들 가운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어떤 선교학자들은 믿었다. 만약에 그들을 겨냥한 어떤 효과적인 선교운동이 전개되었다면 2000년 말에는 선교의 사역이 종결될 것이다.

1974년 로잔대회에서 랄프 윈터박사는 참가자들에게 도전을 주었다. 16,750 종족의 알려지지 않은 혹은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말했다. 세계선교의 새로운 도전을 주었다. 사람들이 그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물었지만 그도 알지 못했다. 아직은 자세한 자료도 없는 실정이다.

1980년 영국의 에딘버러 선교대회에서 랄프 윈터는 다시 지구상의 미전도종족에 대한 도전을 하였다. 그때 스칸디나비아 출신 그린랜드에서 사역하고 있던 한 선교사가 강단에 올라와 “2000년까지 모든 사람에게 교회를!”라고 외쳤고 함께 자리한 수천 명의 전세계의 교회 선교 지도자들이 함께 구호를 외쳤다. 예정에 없던 돌발적인 상황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외침을 따라 했지만 그다지 심각하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십 년 후에 AD2000운동이 출발하였다.

Patrick Johnstone(Operation World 편집자이며 WEC선교회)의 선교사는 그간의 십 년간의 노력의 결과를 발표한다. 이른바 ‘세계 복음화의 현재와 미래’라는 보고서이다.

처음 이 운동을 시작하면서 13,000여 종족에 대한 리서치를 하였다. 그들은 인구가1만 명 이상 되는 종족중에 2% 미만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 혹은 5%미만의 신자를 가진 종족을 교회개척이 시급하게 필요한 종족으로 규정했다.

두 번째 성과로는 이 연합운동의 결과 1900년 5개 단체에서 2000년에는 73개의 단체가 주로 종족을 중심으로한 연합사역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도표가 그다지 의미가 없는 이유가 있다. 엄청난 인구가 사는 사람들 속에 단지 하나 교회는 그리 효과적이지 못하다. 반딧불 하나로 넓은 홀을 다 밝힐 수는 없다. 소금 농도는 3.5%이다. 바닷물이 썩지 않는 이유는 바로 3.5%의 소금의 힘이다. 100미리 리터의 물에 3.5그램의 소금만 있으면 그 물은 웬만해서 썩지 않는다.티스푼 하나가 5그램이라고 한다. 3.5그램은 스푼의 위를 깎아낸 정도의 분량이 아닐까? 적어도 한 종족에 3.5%의 소금 같은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 'FTT 운동이란' 639개 종족 복음화 추진

빌리그레이엄 전도협회가 암스텔담 2000 선교대회를 주최하면서 대회에 참여한 한 소그룹 지도자들이 모든 종족에게 교회 개척을 목적으로 하는 전략적 관계를 형성했다. 이 그룹은 ‘테이블 71’이라고 칭했다(그분들이 자리했던 테이블 번호). 2004년 가을에 이들은 다시 모여 남은 비접촉 미전도종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남은 과업 완수’(Finishing The Task) 운동을 시작했다. FTT운동의 목표는 3400여 미전도종족 중 10만 이상의 인구를 가진 639개의 미개척 종족을 우선 복음화시키는 데 있다.또 미전도종족 입양뿐만 아니라 현지에 교회를 세우고, 이 교회가 자립 및 재생산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이를 위해 지역교회와 현장 선교사, 선교단체의 유기적인 네트워크 구성이 필수요건이다. 특히 지역교회가 선교에 주체가 되고 선교단체는 정보와 전략을 제시하는 협력기관으로 활동한다.

 

* Target 2020

예수전도단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모든 나라, 모든 도시, 모든 족속에 복음 전도하여 교회를 세우고 제자화하기 위하여 서기 2020년까지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을 우리는“Target 2020”이라고 부른다.

‘Target2020’은 최소복음화된 국가와 인구 백만 이상이나 관문되는 대도시, 미전도종족 내에 토착적인 교회를 개척, 제자화하고 스스로 배가 되게 하여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완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목표를 갖는다.

1. 2020년까지 최소복음화 나라 50개 국을 개척한다.

2. 2020년까지 최소복음화된 인구 백만 이상의 대도시와 관문도시 130개를 개척 혹은 참여한다.

3. 2020년까지 최소복음화된 인구 백만 이상의 미전도종족과 관문종족 170개를 개척 혹은 참여한다.

 

넘어야 할 장벽

 

오늘날 선교의 완성이라는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넘어야 할 장벽도 많고 싸워 이겨야 할 적들도 많다. 가장 큰 적이 무엇일까?

전년도(2010년) 통계에 따르면 전세계 20억의 인구가 아직도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미전도종족이라고 한다(크리스챤 투데이 2011.10. 23). 2010년 10월 3차 로잔대회에서 20일 ‘세계의 종교’(World Faith)란 주제하에 열린 미싱피플 : 복음을 듣지 못한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란 세미나에서 미전도종족 네트워크인 ‘에슨 투 에슨’(Ethne To Ethne)의 선교 지도자들이 한 발표이다. 수많은 세계 교회와 선교단체들이 세계 선교에 열정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1만 6천여 가량의 미전도종족 중 3천7백여 종족이 복음을 접하지도 못한 채로 남아 있다고 말하고 그 이유를 교회들의 주저함이 영향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교회, 선교회, 선교사들이 주저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현재 전 세계로 파송되는 선교사들 가운데 단지 3%만이 미전도 종족에게로 파송되고 있다는 것을 미국 언리치드피를즈 대표 켄트 박사는 말했다. 그는 말하기를 교회가 미전도종족 선교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실패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되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이 그 바탕에 깔려 있을 때가 많다고 말했다. ‘그들을 변화시킬 수 없을 것’ 이라는 생각 때문에 투자하길 원치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스도인 리더들이 갈렙의 정신이 아닌 메뚜기의 정신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수 14:12개정개역)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 13:33 개정개역)

 

또 하나의 주저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와 너무나 다르다는 편견도 작용한다. 이 편견에 대해 15년간 미전도종족을 대상으로 사역을 해온 에디오피아 출신의 아리킬룸 베예네선교사는 소말리아에서 복음을 듣고 신실한 기독교인이 된 미전도종족 출신 청년의 이야기를 전한다. ‘우리는 겉으로 보면 달라 보이고 무서워 보이기까지 한다.그러나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겉으로는 무서워 보일지 몰라도 안으로는 진리를 갈급하게 찾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 개정개역)

이 고백은 하나님을 아는 자만의 고백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으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개정개역)

 

미전도종족선교의 목표

 

미전도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끔 인도하는 일이다. ‘에슨 투 에슨’의 남아공 디렉터 피터 탄탈 선교사는 아프리카 교회의 기독교인들이 배우는 것과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는 거리가 있다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프리카는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기독교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1900년에 아프리카에는 8백만여의 기독교 인구가 있었지만 지금은 5억이 기독교인이다.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은 기독교인구가 90%를 넘는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또한 가장 높은 에이즈 감염률과 빈곤, 부정부패와 같은 문제를 경험하고 있다. 우리가 미전도종족 선교를 행함에 있어서 이겨야 할 도전은 교회가 이렇게 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성경적인 가르침으로 바르게 인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 가르치고 또한 보여줘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19 개정개역)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개정개역])

 

본문에서 본 동사는 ‘제자를 삼아라’이다. ‘세례를 주다’와 ‘가르치라’는 분사형으로 사용되었다. 세례를 베풀면서 그리고 가르치면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이다. 이 분사형 단어들은 제자를 삼는 방법(전략)과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세례는 예수님과 더불어 죽고 살았음을 선포하는 의식이다. 종교인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한 새생명의 사람을 낳아야 한다. 참된 제자가 되는 첫 걸음이다. 가르치되 머리에 지식만을 넣어주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가르침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손과 발로 내려 가야 한다. 삶으로 실천된 지식이 아니면 율법처럼 죽이는 의문이 될 수 있다. 진리가 실생활에 적용되도록 해야만 한다. 아비의 심정으로 가르치고 모범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가르치시지 않으셨다. '행하시고 가르치셨다'. 순서에 주목해 보자. '가르치고 행하신 것'이 아니라, '행하시고 가르치셨다'(행1:1). 성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지 않으면 생명 없는 종교로만 남게 된다.

 

나가는 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개정개역)

 

그 동안 우리는 선교의 쉼표는 찍었다. 많은 선교 전략들이 유행처럼 등장하고 사라졌다. 느낌표도 찍었다. 선교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가슴 절절히 외쳤고 그 결과 선교사 이만 명 시대를 열었다. 선교의 말 줄임표도 찍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땅끝으로 남아있는 많은 종족들을 바라보며 어떻게 행진해야 할지 머뭇거렸다.이제는 유행에 휩쓸리지 말자. 이제는 전략과 목적에 혼란을 갖지도 말자.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께 부를 그 영광과 환희의 송가를 부를 그날을 향해 믿음의 행진을 계속하자. 3%는 부끄럽다. 적어도 십일조, 1/10 선교사는 미전도 종족, 복음이 시급한 사람들에게 나아가 제자를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실 것이다. 임마누엘 주님의 마라나타를 꿈꾼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출처 : 조승호 선교사(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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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선교행적을 통한 무슬림 선교

 

하나님께서는 세계적이시고 우주적이시지만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이고 인종적이고 민족적이고 국가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고 말씀하셨고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고 말씀하셨으며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욘 1:2)고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이방을 멸시하고 정죄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사마리아의 수가성으로 가셨지만 제자들은 가기를 싫어했고, 베드로에게 가이사랴로 가라고 했지만 베드로도 처음에는 가기를 싫어했습니다. 나중에는 할 수 없이 가기는 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가기 싫다고 하는 요나를 니느웨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베드로와 바울을 반기독교 세력의 중심부인 로마로 가게 하셨습니다.

오늘의 현실에서 한국교회와 세계 교회의 선교의 시급한 대상은 공산권과 모슬렘권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지칭한 두 “악의 축”이 오늘의 선교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시급한 선교의 대상은 북한과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라고 생각합니다. 니느웨와 로마가 정복의 대상이 아닌 선교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북한과 아프가니스탄은 정복의 대상이 아닌 선교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기적이고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저에게 이와 같은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하나님의 관심과 비전을 깨우쳐주신 분들이 고 랄프 윈터 박사님을 비롯한 풀러 신학교의 선교학 교수님들이었습니다.

제가 랄프 윈터 박사님의 역사적 및 선교적 안목에 접하게 된 것은 조동진 목사님의 권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11년 동안의 유학을 마칠 무렵인 1973년 조동진 목사님이 저를 만나자고 했습니다. 후암교회의 교육목사로 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즉시 그러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풀러신학교에 가서 1년 동안 선교학을 연구하고 나서 후암교회로 오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즉시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1974년 초 풀러신학교에 가서 Research Associate의 자격으로 8개월 동안 선교학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신학과 선교신학을 접목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기간이었습니다. 미국 교회사의 아버지 라토렛 교수님이 교회사와 선교학을 겸해서 연구했고, 랄프 윈터 박사님이 교회사와 선교학을 겸해서 연구했는데 저도 교회사 연구에다 선교학 연구를 접목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풀러신학교 선교신학원에서 윈터 교수님을 비롯한 그 당시 유명한 선교학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저의 안목을 넓혀갈 수가 있었습니다. 윈터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저는 그 분의 진취적인 입장을 다소 비판하며 질문도 했지만 많은 깨달음과 도전도 받았습니다. 한 평생을 교회 역사 연구와 선교 전략 개발에 모든 정열을 쏟아 바치면서 즐겁고 멋지게 살다가 주님 품으로 돌아가신 랄프 원터 박사님에게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하지 않을 수 밖에 없습니다.

랄프 원터 박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 가지 더 하겠습니다. 참고가 될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2008년 5월 한국을 방문한 랄프 윈터 박사님을 반갑게 만났습니다. 강의도 같이 했고 대담도 같이 하며 오랫만에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1976년에 랄프 윈터 박사님이 한국에 와서 며칠 동안 강의를 했는데 그 때도 제가 그 분의 통역을 맡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8년 5월 랄프 윈터 박사님이 강의와 대담을 하면서 미국 복음주의교회의 잘못들을 진솔하게 지적하는 것을 보고 들으면서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1) ‘구원’을 단순히 몇 마디 말을 감성적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얻어진다고 간주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지적했습니다. 2) 단기 선교 여행만큼 선교에 해를 끼치는 것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3) 북 치고 시끄럽게 노래하는 것은 예배를 해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사실 요사이 한국교회는 북치고 장구치고 시끄럽게 음악을 연주하므로 예배를 해치고 영성을 죽이는 것같이 보입니다. 4) 신앙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의미가 변질되어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교회는 본래 가족 중심의 신앙공동체였는데 오늘날 서구화와 개인주의화와 대형화 때문에 가족공동체의 특성이 해체하기에 이르렀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와 같은 미국 복음주의교회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 충고했는데 너무너무 진솔하고 귀중한 충고였습니다.

저는 2008년 5월 10일 윈터 박사님과 마지막 대담을 했는데 윈터 박사님은 한국교회가 미국과 서구교회의 실수들을 반복하지 말 것을 재차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했습니다. 윈터 박사님은 단기선교에 대해 “다른 나라를 배우는 것은 좋지만 선교적 관점에서 도움이 안 된다”고 부정적인 입장을 다시 나타내 보였습니다. “선교에 공헌을 못할 뿐만 아니라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을 볼 때가 있다.오히려 방해꾼이 되거나 소란을 일으키는 일도 있다. 그럴 경우 선교사는 여행안내자일 뿐이다. 또 다른 문제는 장기 선교사가 쓸 돈을 단기 선교여행자가 쓰는 것이다. 전쟁할 때 군인들을 전쟁터에 보내는데 일반 시민도 전쟁터가 보고 싶다고 해서 다 태워 보내는 것은 낭비고 방해다. 군인만 보내야지 무장되지 않은 일반 시민을 보낼 필요는 없다.”

문화와 복음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선교는 문화와 복음을 엮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모든 문화 안에는 결점이 있기 마련이다. 다른 문화가 나쁘다고 하기 전에 미국의 문화도 가장 나쁜 문화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그러나 문화 안에 좋은 면이나 배워야 할 면 도움이 되는 면도 있다. 결점이 있는 문화권 속에서도 신앙이 자리잡게 될 수 있고 문화도 변할 수 있다. 모든 문화는 질그릇에 비유할 수 있다. 복음은 보배다. 어느 한 질그릇의 보배를 다른 문화권의 질그릇에 집어넣는 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보배가 한 질그릇에 담겨졌을 때 그 보배가 문화권 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보배가 문화라는 질그릇에 스며들면서 그 질그릇의 결점들이 조금씩 변화되는 것을 경험했다. 인도에는 힌두권에 속하면서도 예수를 따르는 자들 2천 4백만 명이 있다. 그들은 예수라는 보배를 가지고 있지만 힌두권이라는 질그릇 안에서 계속 사역하고 있는 것이다. 모슬렘권에서 예수를 따르는 자와 예수를 따르지 않는 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언어를 쓰지만 보배가 있고 없고가 차이 나는 것이다. 매우 중요한 차이지만 드러나는 문화적 행위에서는 크게 차이가 안 난다.”

윈터 박사님은 미국 복음주의의 오류들을 지적하면서 미국의 복음주의를 성경과 동일시하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가 참되지 복음주의에 근거한 기독교를 성경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미국의 복음주의는 결점도 많고 완전한 해석이 아니다. 미국의 복음주의는 하나의 종교다. 복음주의의 못된 이단 중에서도 가장 큰 이단은 아주 짧은 시간에 ‘구원’을 단순이 몇 마디 말을 감성적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얻어진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구원 받는 것, 이런 가르침은 아주 못된 것이다. 구원은 감정적으로 순간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과정이다.” 제가 윈터 박사님에게 “한국교회에 더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복음으로 돌아가라고 조언하고 싶다.믿음은 순종하는 것이다. 외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에 항복하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왕국이 이뤄지는 곳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도래했는데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온 것에 완전 복종하는 것이다. 그냥 믿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복종해야 한다. 믿는 것은 마귀도 한다. 그러나 마귀는 가슴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귀 담아 들어야 할 너무너무 귀중한 조언과 충고였습니다. 랄프 윈터 박사님은 존 스토트 박사님,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과 함께 현대 선교 신학계의 대표적인 선구자였습니다. 랄프 윈터 박사님은 지식이 풍부한 분이었고 안목이 균형 잡힌 분이었고 판단이 명석한 분이었고 표현이 진솔한 분이었고 가슴이 따뜻한 분이었고 시간에 충실한 분이었습니다. 저로 하여금 랄프 윈터 박사님, 존 스토트 박사님,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과 가까이 지내며 그 분들로부터 귀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예수님의 선교행적과 모슬렘 선교”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목회자이든지 선교사이든지 어떤 종류의 목회나 선교를 하든지 평생토록 힘써야 할 일은 우리들의 사도이시고 대제사장이시고 목자이시고 선교사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본 받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목회와 선교의 모델이신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가장 분명하게 나타내 보여주는 말씀이 요한복음 1:14과 마가복음 10:45이라고 생각합니다. 존 스토트 박사님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마가복음 10:45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선교행적”을 살펴보면서 선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선교를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선교는 ‘떠나는’ 것이고 ‘찾아가는’ 것이고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 집을 떠나 세상을 찾아오셔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실 아브라함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떠남’과 ‘찾아감’과 ‘됨’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선교는 ‘becoming’ 입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본래 말씀이셨고 하나님이셨는데 하늘을 떠나 세상에 오셔서 육신을 가진 사람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The Word became flesh.” 선교는 되는 것입니다. 선교는 becoming 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육’ 즉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본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살과 피를 가진 사람이 되신 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는 놀라운 일이고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물론 헬라인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셔서 사람으로 살다가 사람으로 죽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미련한 일이며 약한 일이며 멸시를 받을만한 일이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나 선교는 ‘되는’ 일입니다. 선교는 ‘성육’의 사건을 본받아서 백인이 흑인이 되는 일이고, 미국 사람이 한국 사람이 되는 일이고, 한국 사람이 태국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성 프랜시스는 본래 앗씨시의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일부러 가난한 거지가 되었고 일부러 병든 환자가 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한센병자가 되기를 그렇게도 소원했습니다. 선교는 나 자신을 포기하고 나와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그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선교사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삶에 지친 그래서 목이 마른 수가성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 그 여인과 비슷한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여인처럼 행로에 피곤하여 주저 앉으셨다고 했고 여인처럼 목이 말랐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요 4:6, 7). 그 여자가 알아 들을 수 있는 평범하고 쉬운 말로 소통을 시도했습니다. 너무너무 황송한 일이지만 그것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고 죄인들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예수님께서 취하신 선교적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선교는 ‘떠나는’ 것이고 ‘찾아가는’ 것이고 ‘되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조동진 목사님께서 최근에 선교사 중에서 누구를 가장 존경하냐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한국에 와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던 존 로스 목사를 가장 존경한다. 그는 한국에 도착해 4?5년은 공부만 했다. 사서삼경을 비롯한 유교를 공부했고 도교와 불교를 배웠다. 유불선의 영향 속에 있던 한국인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했던 것이다. 존 로스 선교사는 한국 사람이 되는데 최선을 다한 훌륭한 선교사였다.”

 

둘째로,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천군 천사들과 함께 영광 중에서 사셨지만 하늘 영광을 떠나 세상에 오셔서 세상의 사람들과 함께 가난과 고난의 삶을 사셨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선교는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선교는 ‘성육’의 사건을 본받아서 리빙스톤이나 슈바이처처럼 백인이 아프리카의 흑인들과 함께 사는 것이고, 언더우드 선교사 4대 손처럼 미국 사람이 한국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고, 신홍식 선교사처럼 한국 사람이 태국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은 한센병자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선교는 나 자신의 평안한 삶을 포기하고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그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선교사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시자마자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과 함께 사셨고 나중에는 제자들과 함께 사셨고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0-13).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기와 병자들과 죄인들을 찾아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고 대화를 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너무너무 황송한 일이지만 그것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고 죄인들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예수님께서 취하신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조동진 목사님은 선교의 ABC 중의 하나는 선교지에 가서 무슨 음식을 주든지 그대로 받아서 먹으면서 함께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교는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선교는 선교지에 가서 대형 집회를 잠깐 하고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나라가 아닌 다른 곳에 가서 나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오래 사는 것입니다.

독일의 저명한 선교신학자 준더마이어(Sundermeier) 박사는 올바른 선교는 ‘콘비벤츠’(Konvivenz) 즉 ‘함께 사는 삶’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콘비벤츠는 브라질의 도시나 농촌에 있는 소집단들이 이웃 돕기 운동에서 유래한 것으로, ‘서로 돕고, 서로 배우며, 함께 축하’하는 공동체적 삶의 형태를 갖는다고 지적했습니다. 준더마이어 박사는 서로 돕고, 배우고 함께 축제를 경험하는 콘비벤츠의 원리를 무엇보다 복음서에 기록한 예수님의 삶에서 입증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사람들 가운데 살았으며 그들과 함께 동고 동락 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하여’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았다. 특히 예수님은 사람들과 자주 함께 식사를 나누었는데 이러한 식탁 공동체야 말로 예수님의 선교에 중심이 된다. 왜냐하면 함께 하는 식탁은 ‘공동체’와 ‘잔치’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교적 교회는 타자와 함께 사는 교회이다.” 선교는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셋째로,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섬기는’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 10:45).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몸을 어루만져 주시면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셨고, 열병환자의 손과 소경의 눈을 어루만져 주시면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모든 병자들과 모든 죄인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원수들에게까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했습니다(마 5:44). 주님께서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과 그리고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강도에게도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폈습니다. 그리고 원수에게까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했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선교는 함께 사는 것이고 모두를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 선교적인 삶을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이 사셨다고 생각합니다.저는 지난 주 토요일인 11월 12일 UBF 가을 수양회에 가서 “사랑과 선교”라는 제목으로 강의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몸으로 나타내면서 말이 아닌 삶과 죽음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증언하신 사랑의 선교사요 사랑의 순교자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선교의 깃발을 높이 그리고 강하게 휘두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만큼 십자가의 사랑과 구원을 온 세상에 강력하게 전파한 복음의 증인과 복음의 선교사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사랑과 섬김의 삶을 아주 조금이라도 흉내를 내곤 했습니다. 2005년 12월 16일 1,400만 원 상당의 선물 보따리를 가지고 강변교회가 아프간 무라취드에 세워준 학교 준공식에 참석했습니다. 그 지역의 모슬렘 지도자들과 군인들과 경찰 지도자들이 참석했고 400여 명의 어린 학생들이 참석했습니다. 저는 아프간에 두 번 방문했지만 공식적으로 설교나 전도나 기도나 강의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학교 준공식 행사를 하는 중에 아프간 어린이들이 나와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분명한 한국말 발음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저는 너무너무 놀랐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보통 때 그런 노래를 하면 테러를 당할 것입니다. 선교의 길은 반드시 설교나 전도나 강의를 하는 길이 아니고 다양한 행사나 프로그램에 치중하는 길이 아니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는 삶의 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놀라운 사실을 북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에서도 방글라데시에서도 중국 연변지역에서도 발견했습니다.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조용히 펼 때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과 가슴이 녹아지는 선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넷째로, 선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유에 탄생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목적이 우리 죄인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심에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증오와 분노와 분쟁으로 가득한 세상과 우주에 ‘화해’와 ‘평화’를 가져오는데 있었다고 누가와 사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화해)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6).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화해’와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그리고 사람이 죄를 짓고 과실을 범하면 그 사람의 죄와 과실을 용서하고 그 사람과 화해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5).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며 그 형제와 화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22).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죄와 사망과 저주에서 구원하시는 구세주로 세상에 오셨지만 동시에 ‘화해’와 ‘평화’의 주님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세상을 등지고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에게 화해와 평화의 주님으로 찾아가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을 찾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낮아진 모습이었고 따뜻한 모습이었습니다. 말하기 싫어하는 수가성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넸습니다. 소통을 먼저 시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사실 소통이야말로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중요한 방편입니다. 마음과 말을 주고 받는 소통이 없이 화해와 평화는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낮아진 모습으로 그리고 따뜻한 모습으로 수가성 여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여인이여, 내가 목이 마른 데 내게 물 한 모금 마시게 해 줄 수가 있소?” 그 여인은 아주 퉁명스러웠습니다. “별 사람 다 봤네. 점잖은 유대 양반이 개 같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건네며 물 한 모금까지 달라고 하시네.” 아주 무례하고 퉁명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낮은 자세로 따뜻한 모습으로 말을 건넸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 14). 결국 소통이 이루어졌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 수가성 여인은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했고 예수님을 향해서 “선지자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수가성 여인과 주님 사이에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수가성 사람들과의 화해와 평화도 이루어졌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물동이를 내 버려두고 수가성으로 달려가서 만나기 싫어하던 수가성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만난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그 결과 수가성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 4:28-30). 저는 예수님의 삶과 사역과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평화를 가장 생생하게 나타내 보이신 분이 평화의 사도 프랜시스요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이요 한국교회와 사회가 존경하던 한경직 목사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은 모든 사람들을 찾아가서 낮은 자세와 따뜻한 자세로 말을 건네고 소통하면서 화해와 평회를 이루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사람들은 물론 동물들과 식물과도 친밀한 소통을 하면서 화해와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선교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길 때 그곳에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사마리아와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가이사랴와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로마와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일본과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북한과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아프가니스탄과의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사실 화해와 평화는 성경의 목표이며 역사의 완성점입니다. 선교는 화해와 평화를 이루어가는 방편이고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함께 모슬렘과의 화해와 평화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적인 일이 아닙니다. 남북의 화해와 평화는 한국교회와 한국 민족이 반드시 이룩하여야 할 필수적인 일이고 민족적인 과제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겔 37:17). 에베소서 1:10과 계시록 7:9-12은 앞으로 이루어질 우주적인 화해와 평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화해와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정치적인 방법이나 군사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진리의 깃발만을 휘두르는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씻음을 받는 일과 온유와 겸손과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가슴과 몸에 지닌 하나님의 사람들과 민족의 지도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악을 선으로 갚으며 악을 행한 상대방을 존중하고 포용하고 품었던 야곱과 같은 그리고 요셉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민족의 지도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 앞에서 일곱 번 땅에 허리를 굽히고 절하며 예물을 드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주여,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창 33:10).

남한 교회가 북에 대해서 이와 같은 겸손과 존경과 사랑의 자세를 취하여야 남북의 화해와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2007년 10월 12일 신촌 성결교회에서 림인식 목사님께서 지적한 일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기에게 악을 행한 형들을 만나자 방성대곡하며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 45:5, 7, 8). 모슬렘과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쟁과 분열로 치닫고 있는 한국과 세계 안에 지금이야말로 화해와 평화의 도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세계가 필요로 하는 선교사야말로 분노와 증오 그리고 분쟁과 분열로 치닫고 있는 세계 곳곳을 찾아가서 화해와 평화를 이룰 수 있는 화해와 평화의 도구로서의 선교사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양의 피로 씻음을 받는 일과 온유와 겸손과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를 가슴과 몸에 지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본래 일본 사람을 싫어했고 북한 사람을 싫어했고 중국 사람을 싫어했고 모슬렘을 싫어했고 타 종교인들을 싫어했었습니다. 자유주의자도 싫어했고 순복음주의자도 싫어했었습니다. 그러나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므로 조금씩, 조금씩 저의 생각과 마음이 바뀌어졌습니다. 일본 사람을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고 일본 교회와 교류하는데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북한 사람을 사랑하며 북한 사람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서게 되었습니다. 중국 사람을 사랑하며 중국에 있는 조선족 어린이들 170여 명을 지난 10여 년 이상 돕게 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학교 하나를 지어주고 아프간 어린이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기도 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도 조용기 목사님도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고 가까이 소통하며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5개 종단의 지도자들과 친하게 교제하면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을 만들기도 했고 작년 8월 27일에는 5개 종단 지도자들 9명과 함께 밀가루 300톤을 가지고 북한 개성에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오기도 했습니다. 동물들과 식물들과도 친밀하게 소통하는 흉내를 내기도 합니다. 개들도 고양이들도 새들도 물고기들도 식물들도 친밀하게 다가가면 반갑게 반응하는 것을 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일이고 조금씩, 조금씩 흉내를 내고 배워서 되어진 일입니다.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이 물려주신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평화의 귀한 영적인 유산들을 조금씩 조금씩 물려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선교가 힘써야 할 일은 무엇보다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설교만 하고 강의만 하고 가르치기만 하고 함께 놀아주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선교는 설교만 하고 강의만 하고 가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놀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가 만들어낸 말이지만 틀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셨고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도 하시고 대화도 하시면서 함께 놀아주셨다고 생각합니다. 2005년 11월 12일자 기독교개혁신보에 실렸던 저의 글을 여기 그대로 소개합니다.

“나는 선교지를 여행하면서 현지인들과 선교사들과 자녀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사랑과 힘과 기쁨이 되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내가 지난 10여 년 동안에 발견한 한 가지 사실은 설교나 강의가 반드시 저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때로는 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놀아주는 것이 위로와 기쁨이 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2년 전 브라질을 방문한 일이 있다. 이틀 동안 밤마다 강성철 선교사와 총신 제자 한 사람과 젊은 초년생 선교사 한 사람과 밤 늦게까지 볼링을 친 일이 있다. 아주 재미가 있었다. 물론 내가 모두 이겼다. 그런데 내가 생각지도 못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강성철 선교사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이다.그 젊은 초년생 선교사가 많은 스트레스와 좌절을 경험하고 있었는데 스승인 나하고 이틀 동안 볼링을 치고 나서 위로와 격려와 힘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선교에 임하게 되었다는 반가운 말을 들었다.” “내가 5년 전에 불라디보스톡에 간 일이 있었다. 어느 날 20여 명의 선교사 자녀들과 서너 시간 동안 열심히 논 일이 있었다. 게임도 하고 선물도 나누어주고 농구도 같이 하고 그네도 같이 타고 시이소도 같이 타며 신나게 놀았다. 어린이들이 나를 너무 좋아했고 모두 기뻐했다.유치부 어린아이 하나는 내가 떠날 때 예쁜 상자를 선물로 주었다. 그네를 함께 탄 아이였다. 그 상자 속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또 오세요. 정예찬 2000. 6. 10’ 하루 오후에 선교사 사모들 대 여섯 명을 데리고 바닷가에 가서 놀다가 왔다. 맛있는 바다 가재도 사 주었다. 너무너무 좋아했다.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가 스승이 되는 내가 그들을 데리고 바닷가에 가서 함께 놀아준 것이 그들에게 많은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 “나는 두 주 전에 한 주간 동안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을 다녀왔다. 러시아 목회자 50여 명과 한인 선교사 20여 명이 한데 모여 연해주 목회자 수련회를 가졌다. 내가 저들에게 강의도 하고 설교도 했지만 내가 주력한 것은 저들과 함께 교제하고 음식을 먹고 놀아준 것이었다. 도착하던 날 저녁 46명의 한인 선교사 가족들과 한국식당에서 음식을 나누었다 고등학생이 된 은덕이라는 여학생이 나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5년 전 내가 블라디를 방문했을 때 어린 아이들 20여명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 때 은덕이는 초등학생이었다. 은덕이는 그 사진을 고이 간직하였다가 다시 자기들을 찾아온 나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나는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함께 놀아줄 때 선교사들은 물론 현지인들의 마음이 열립니다. 그들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들의 마음에 사랑이 들어가고 복음이 들어가고 예수님이 들어 가십니다.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선교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제물 되는 삶을 사시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2005년 12월 31일 강변교회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서 2006년도 새해의 기도 제목을 다음과 같이 정한 일이 있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예수님의 마음과 생각과 눈물을 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저는 2010년 1월 1일 새해의 소원과 기도 제목을 다음과 같이 정한 일이 있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눈물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온유와 겸손과 착함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수고와 고난과 희생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기독교는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으로 이루어진 종교입니다.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없이 선교가 이루어진 일은 거의 없습니다. 1866년 9월 5일 대동강 변에서 27살의 젊은 나이에 순교의 제물이 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의 제물 되는 죽음이 없었다면 1885년 조선땅에 선교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제물 되는 죽음이 16년 후인 1882년에는 조미 수호 통상조약이 체결되게 했고, 그 2년 후인 1884년에는 알렌 의사가 조선에 들어오게 했고, 그 다음 해인 1885년에는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 땅에 들어오게 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한 사람의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흐름’에 얼마나 길고도 깊은 고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놀라움과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헨리 아펜젤러와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에 와서 ‘희생적인 삶’ 즉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교회와 조선의 교육과 조선의 의료 사역의 기초가 놓여졌습니다. 저는 언더우드 가의 3대가 조선 구원의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여 조선 사람들에게 끝이 없는 사랑을 쏟아 부으면서 희생적인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희생적인 제물 되는 죽음을 죽어 지금 양화진에 모두 함께 묻혀 있다는 사실 앞에서 지극한 경외감과 존경과 사랑을 느끼면서 한 없이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선교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구원의 역사와 선교의 역사를 만듭니다. 토마스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제물 되는 삶과 제물 되는 죽음이 조선땅에 구원의 역사와 선교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모슬렘 선교도 북한 선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지적한 여섯 가지 선교의 모습을 몸과 마음과 삶과 사역에 지니고 찾아가면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구원과 화해의 선교가 아름답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한 가지 추가해사 말씀을 드리면 모든 선교에는 필수적인 파트너십 즉 협력이 절대로 필요한데 모슬렘 선교와 북한 선교야말로 파트너십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쟁은 불신과 반발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들간의 파트너십과 현지인들과의 파트너십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파트너십이 이루어지려면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온유 겸손 섬김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선교가 무엇이며 선교사가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았습니다. 선교가 무엇이고 선교사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선교사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로, 선교는 떠나는 것이고 찾아가는 것이고 되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선교는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셋째로, 선교는 함께 살면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넷째로, 선교는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선교는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선교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파트너십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우리 주님께서 사시고 보여주신 삶과 사역의 모습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는 너무 이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 유행에 치우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교도 그런 경향에 치우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최근에 자신이 복음 사역을 다시 시작한다면 정치와는 무관한 사역을 하고 싶다는 고백을 한 일이 있습니다. 목회 사역은 물론 선교 사역도 좀 단순해지고 좀 바보스러워지고 좀 어리석어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에 대한 순수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가슴과 몸과 손발에 지니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를 온유와 겸손과 따뜻함으로 품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몸에 지니고 약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삶을 살면서 사역을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우리들도 조금씩, 조금씩 주님 닮은 선교적인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들도 주님 닮은 선교적인 삶을 조금씩, 조금씩 살아갈 수 있게 하시고 선교적인 죽음을 죽을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우리들에게 십자가의 피를 부어주셔서 십자가의 사랑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랑과 구원과 화해와 평화의 도구들과 제물들로 삼아주시옵소서!

출처 :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선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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