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을 분별하는 43가지 방법

 

1. 기성교회의 간판을 붙여도 성경에 있는 진리의 말씀보다 개인의 사상을 전파한다.
미신적인 요소가 많다. 성경에 없는 말을 하면 무조건 이단으로 간주해야 한다.

2. 성경을 가감한다.(성경을 완전히 곡해하면서 자기들의 교파확장을 위하여 소책자 및
전도용 책자를 만든다)

3. 이단들은 거짓예언, 환상을 좋아하며 신도들을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

4. 한때 교단의 교파에 몸 담았던 자들이 신흥교파를 만들어 낸다.

5. 하나님의 절대섭리를 인간의 자유의지로 조정하려고 한다.

6. 종말론 교리 중에 시한부 재림 및 휴거와 재림일자를 못박아 놓는다.
(성경의 마태복음 24장에 분명히 예수재림을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7. 구원교리 중에도 하나님의 예정론을 부인하며, 창조이전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8. 절기와 때 그리고 음식물에 대하여는 특히 율법적이다.

9. 이단들은 자기들만 구원받았다고 주장한다.

10. 주관적 개인 체험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만 비밀로 주셨다고 주장한다.

11. 성경에 있는 말을 많이 인용하되 선지지나 사도들의 말을 자기들의 교주의 말과 동등시한다.
그리고 자기들의 교리 정립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12. 그들의 경전과 교리가 시시때때로 환경에 따라서 변한다.

13. 대부분의 이단들은 가정을 버리도록 유도하는 결과를 가져오며 부녀자들과 청소년들을 유혹하여
노예취급을 한다.

14. 이단들은 거의가 다 과대망상 환자, 내리는 영웅주의나 인기주의에 심취해 있다.

15. 이단들은 분리주의자라고 자처한다.

16. 신흥이단들은 사랑을 외치는 팜플렛을 돌린다. 전도지는 기성교단을 은근히 꼬집는 내용으로
꽉 차 있다.

17. 이단들은 언제나 도피할 성을 찾고 있으며 항상 마음이 불안하여 나중에는 죽음도 불사하며
함께 망하는 것도 공동의 운명으로 알자고 강조한다.

18. 이단들은 새로운 신자들을 전도대상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기성교인들을 상대로 포교활동을 전개한다.

19. 이단들은 언제나 성경전체를 사용치 않고 성경의 몇 구절만 외워서 사용하기 때문에 깊은 논쟁을 피하고
자기들 집단에 한번만 와 보라고 강조한다.

20. 대부분 사회지도층 인사 및 정계의 인사들을 영입하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금의 돈을 뿌린다.

21. 이단들은 청소년들에게 흥미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프로그램을 기성교회가 하지 못하는 것을 개발하여
포교활동을 전개한다.

22. 이단들은 처음에는 헌금을 강요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는 서서히 자기들의 본색을 들어내면서 자기들만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기성교회에 헌금을 하는 대신에 자기들 집단에는 재산까지라도 팔아서 바치도록
강요한다.

23. 이단들은 성경에 없는 말들을 함부로 하면서 또 성경을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4. 이단에 빠지는 자들은 교회관이 분명치 않기 때문에 Para Church Movement에 지나치게 흥미를 느끼고
교회안의 활동이나 봉사는 거의 하지 않는다.

25. 이단들 중에 기복사상을 심취되어 귀신론이나 샤머니즘 사상만을 강조하는 교파도 있다.

26. 이단들 중에는 전인격적인 기독교 교육보다는 사람에게 즉흥적 기쁨을 구하는 임기응변식의 전도를 하는
무리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7. 이단의 정의에서 밝힌대로 성도들의 신앙 즉 정통적 교리 및 역사적인 정통성에서 이탈된 무리들은
이단으로 간주한다.

28. 이단들은 예수 외에 다른 이름, 다른 창조주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단교주가 메시야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재림주라고도 하며 죽어도 부활한다고 외친다.

29. 시한부 종말설에 심취된 이단들은 학생들은 공부도 중단하고 가정은 파괴 될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사회를 크게 혼란케 한다.

30. 이단들은 지역사회에 있는 교회들과 연합하여 교계의 행사하는 일을 기피한다.

31. 이단 교파의 교주들은 쇼맨쉽(showman-ship)이 매우 강하다.

32. 이단파의 교주들은 성령의 불 받은 종, 특히 은사 받은 종, 특별계시를 받은 종으로 자처하고 있다.

33. 이단교파의 교주들 중에는 마귀의 힘을 빌어 병 고치는 일을 자행하면서도 ‘예수가 고치셨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인용하기도 한다.

34. 이단들은 666이나 14만 4천 등 숫자들을 자기의 편의대로 많이 사용한다.

35. 이단교파의 교주들은 거의 대부분 신학교육이 결여 돼 있다.

36. 이단에 빠진 무리들은 괴상한 행동이나 이상한 영음을 자기들만 받았다고 주장하며 늘 영음만을 강구한다.

37. 이단파들의 카리스마적인 수법이나 행정 및 재산과 조직 관리는 거의가 저들의 소속돼 있었던 이단 교파에서
배운 것이다.

38. 최근의 이단들 중에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및 삼위일체를 강요하면서도 은사면에 더 치중하여 하늘의
비밀을 깨달았다고 강조하는 무리들도 있다.

39. 이단교주들은 과거의 전과기록이 있거나 사기성이 많은 것이 특성이며 거짓말을 잘하는 습관이 있다.

40. 성경을 자기들에게 편리하도록 고쳐서 사용한다.

41. 이단들이 하는 상투적인 말은 “하나님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보내셨다. 하나님께서 비밀을 알려주었다.
꿈에 보았다”라는 말들을 자주 사용하여 초신자들에게 공포감을 주는 버릇이 있다.

42. 이단의 무리들은 기성교계의 좋은 이름들을 거의 다 도용하고 있다.
특히 통일교에서는 “기독교나 국제 및 세계”라는 단어를 앞에 쓰고 있어서 기성교계와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43. 이단들도 “깨어라”라는 말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지금 말세의 교회를 어지럽히며 혼란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는 마귀들’을 대적하기 위해서 모든 기성교회의 건전한 성도들은 참으로
깨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단에 관한 판별법을 종합하여 요약하면 이단무리는 지나친 시한부 종말론 사상에 심취하여
그 신비에 빠져든 무리들이다. 이들 이단 교주들은 성경 외에 사상을 도입하여 엉터리 예언이나 점장이
식으로 선량한 교인들을 유인하여 탐심을 채운다. 그리고 이들은 성경해석을 제멋대로 하며 건전한
교계를 혼란시키는 무리들이다.

이제부터 이단을 쉽게 구분하려면
사도신경 고백 부인 외에 예수 십자가 대속과 부활, 그리고 성경을 다 믿지 않는 무리들이 교주를 신격화시키면
이단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리고 말씀 없이 지나친 은사에 매력을 느끼도록 유도하면 문제가 있는 것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은밀히 자칭 하나님처럼 심판주, 말세의 참종, 참어린양 등의 명칭이 따라다니면 반드시 이단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마지막 때에 교계를 혼미케 하는 이단무리들에게 현혹되지 않기 위해 건전한 교회에서 목회자들을 도우며 조용히
그리고 뜨겁게 성실히 신앙 생활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할 때에 주님은 자기 눈동자 같이 사랑하는 양들을 지켜 보호할 것이다.

 

/탁지원 전도사님(현대종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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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생명 축제 설교 / 10초전도 /  


당신은 하나님께 최고의 VIP   (요한복음 3:16)
요한복음 3장 16절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익숙하게 아는 성경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M. Luther는 이 요한복음 3장 16절을 『축소된 복음』(Gospel in miniature)이라고 합니다.

복음의 에센스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 말씀을『최고(greatest)』라는 표현으로 해석하는데 참 의미가 깊습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애인(greatest lover)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고로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을”… 최고의 숫자(greatest number)입니다. 모든 민족과 인종을 다 포함합니다.

“이처럼 사랑하사”… 최고의 수준(greatest degree)입니다. 생명을 희생시킨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최고의 선물(greatest gift)입니다. 더 이상은 없는 최상, 최대의 선물입니다.

“주셨으니”… 최고의 행동(greatest act)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다 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최고의 초청(greatest invitation)입니다. 제한 없는 우주적 초청입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최고의 단순함(greatest simplicity)입니다.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됩니다.

“멸망하지 않고”… 최고의 해방(greatest deliverance)입니다. 죽어야할 죄수가 석방되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으리라”… 최고의 소유(greatest possession)입니다. 영생, 그 이상의 재산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은 “모든 사람의 성구” 또는 “기독교 복음의 심장”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축복과 혜택을 줄 수 있을까요?

 

 

1. 당신도 놀라운 사랑의 VIP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무엇보다도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요일 4:8,16)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은 나라와 민족과 인종을 초월하여 나 같은 죄인까지도 기꺼이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대상임을 믿고 건강한 자긍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가 좋대요! 나를 사랑하신대요! 이 얼마나 황홀한 행복인가요? 할렐루야!

어떤 신학자는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3S Love」로 정의해줍니다.

①주권적인 사랑입니다.(Sovereign Love)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입니다. “우리는 죄인이라는 자격밖에 없는데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곧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입니다.”(프린스톤의 B.B.Warfield)


②희생적인 사랑입니다(Sacrificial Love)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비싼 대가를 치르십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십니다. 엄청난 희생을 치르신 것입니다.

③구원하는 사랑입니다(Saving Love)

하나님의 사랑의 원인과 목적은 오직 구원입니다. 오늘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나의 선행이나 공로나 업적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어느 훌륭한 기독교 의사(윌터 윌슨)가 군대 생활하다가 이런 놀라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군부대에는 이따금 위문품이 오지요. 어느 날 한 기업체로부터 위문품을 받았습니다. 선물은 포켓용 거울이었습니다. 그런데 표면에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 쓰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는 이렇게 부연으로 쓰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지 알고 싶으면 뒷면을 보세요.”

그는 궁금한 마음으로 작은 거울 속에 비치는 자기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남이 그처럼 지극히 사랑하는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황홀한 감동을 받습니다. 나 같은 죄인까지도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구나!

그날로 그는 거듭난 사람이 되어 몸만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하는 훌륭한 의사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최고의 VIP입니다.


저는 언제 읽어도 감동이 되는 인간 승리자 송명희 자매의 시가 가슴을 뿌듯하게 해줍니다.

그는 어거스틴의 신앙고백을 토대로 이 시를 지었습니다.

나 하나

나 하나만 있더라도

세상을 지으신 주


나 하나가 죄를 짓더라도

십자가에 죽으신 주


나 하나가 있더라도

천국을 마련하신 주


사랑하는 여러분,

나도 하나님께 최고의 VIP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2. 당신도 놀라운 선물의 VIP입니다.

 

사랑은 sentimental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기꺼이 내어줍니다.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승화될수록 가장 비싼 것을 줍니다. 아깝지 않습니다.

사랑할수록 모든 것을 다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의 표출로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죄 없으신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주셨습니다.(로마서 4:25. 8:32)

여기 “주셨다.”는 말은 ‘넘겨준다, 양도한다, 희생시킨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을 위한 최고의 선물은 국가나 정부, 권력이 아닙니다. 돈도 아닙니다. 재능도 아닙니다.

인류 최고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4장 10절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표명합니다.

우리는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하사품을 받았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이십니다.

미국의 훌륭한 설교가 Chuck Swindoll은 이렇게 감동적인 설명을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정보였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육자를 보내주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기술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과학자를 보내주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제학자를 보내주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쾌락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연예인을 보내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용서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세주를 보내주신 것이다.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주실 자,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짊어지실 자로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셨습니다.


당신은 바로 그 구원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받으신 최고의 VIP입니다.

 

3. 당신도 놀라운 믿음의 VIP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참 단순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십자가만 쳐다보는 믿음으로도 억만 가지 죄로부터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도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벅찬 가슴으로 간증합니다.(에베소서 2: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내가 예수 믿고 교회 다닌다는 것이 신기하잖아요?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가족 구원을 위해 더욱 간절하게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제 남편에게도 믿음을 선물로 주옵소서. 우리 부모형제에게도 믿음의 선물을 주옵소서.

우리 자녀들에게도 구원의 확신에 이르는 믿음을 선물로 주옵소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 받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중심주제는 『믿어야 할 예수』입니다. 요한은 믿음이라는 명사를 사용하는 대신에, “믿어야 한다.”(pistuo)는 동사를 씁니다.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98번이나 반복합니다. 특히 3장에서 만도 7번이나 거듭거듭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결론에서도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는다고 거듭 강조합니다.(20:31)


그래서 오늘 아침 우리는 이런 소박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주님, 저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저에게도 큰 믿음을 주옵소서!”

 

 

4. 당신도 놀라운 생명의 VIP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죄로 죽게 된 인간을 살려주시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영생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의 결론은 명료합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생, 이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최상의 선물입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죽습니다. 다 죽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므로 살 수 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영원히 삽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심판에서 면제를 받습니다. 그리고 영생복락을 누립니다.(15, 16, 17, 18)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우리의 호적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적하는 것입니다.(5:24)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온 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그래서 요한복음의 또 하나의 주제는『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23번 강조)

예수님은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에 죽음의 현장에서도 이렇게 선포하십니다.(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믿으십시니까?


기독교는 단순한 도덕종교가 아닙니다. 인격 수양의 종교 정도도 아닙니다. 생명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생복락을 누립니다.


거기다가 예수님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도 풍성한 인생을 누리게 하십니다.(10:10)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인생이 풍성해집니다. 생기가 넘치고, 활력이 넘치고, 역동적인 인생을 삽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것과 같은 기쁨이 있습니다. 소위 분에 넘치는 초과분의 인생을 삽니다.

오늘 이 순간부터 얼마든지 누릴 수 있습니다.


몇 해 전 전 세계인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 책「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를 쓴 Spencer Johnson이 또 한 권의 책을 써서 우리에게 큰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책의 제목은 「선물」(The Present)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한 노인이 어린이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줄거리를 소제로 합니다. 그 노인은 소년에게 인생의 가장 중요한 선물을 주겠다는 대화를 펼쳐가지만 그 선물의 내용을 냉큼 얘기해주지 않습니다. 그 선물을 스스로 찾아야만 한다고 암시만 줄 뿐입니다.

어느덧 소년은 성인이 되어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아가다가 아주 오랜 만에 옛날 그 노인을 만나 그분이 가장 행복한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다시 인생의 진지한 대화를 나누다가 인생 최고의 선물을 찾습니다. 그 선물은 바로 「현재」(The Present)라는 단순한 진리입니다.

영어 단어의 뉴앙스에 따라 오늘이야말로 가장 큰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The Present는 곧 The Present입니다.

 

현재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선물은 구원과 영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공짜 선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셔서 그 비싼 선물을 그냥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하나님께 최고의 VIP입니다.

이 얼마나 황홀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최상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혹시 아직까지도 그 예수님을 모르는 분이 계신가요? 아직도 믿지 않는 분이 계신가요?

오늘 아침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놀라운 선물되시는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접하세요.


어떤 분이 이런 소박한 간증 시를 들려줍니다.

“주님, 빈 잔을 들고, 황야를 지나, 당신에게로 기어갔습니다. 기운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한 방울이라도, 얻을 수 있을지 의심하면서....

제가 당신을, 단지, 좀 더 잘 알았더라면, 양동이를 들고 달려 왔을 텐데.”

예수님은 바로 오늘 그 선물을 당신에게 주고 계십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최고의 VIP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영접하십시오.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셔 들이세요.

(기도 초청)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누구신가요?

하나님께 최고로 사랑받는 VIP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아침 당신은 요한복음 3장 16절의 거울을 들여다보십시오.

그분은 마치 나 한 사람밖에는 사랑할 대상이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까지 나를 위해 놀라운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제 그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각박하고도 삭막한 이 세상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최상의 사랑과 축복을 누리는 최고의 VIP 인생을 살아가십시오.

출처:지구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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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박 한 응목사                        
본  문 : 로마서 12 : 1 - 3
제  목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자.(Series 1)
찬  송 : 213, 214, 321, 325, 327, 539

        할렐루야!!
        오늘도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충만한 은혜를 내려주시려고 오늘 거룩한 날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은사를 충만하게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예>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그 교회의 권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저, 목사님 긴히 말씀 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 예, 어려워 마시고 말씀하십시오’ 라고 대답을 하자 그 권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저 목사님, 저 아무래도 권사를 못하겠습니다.’
        ‘아니 권사님,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까지 잘 해오셨잖습니까?’
        ‘일도 많고 너무 바쁘고 해서 집사하고 바꿔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권사는 못하고 집사는 할 수 있습니까?’
        ‘네 가만히 보니까 집사는 심방도 하지 않고, 또 하는 일도 별로 없고, 이름만 가지고 있어도 되잖습니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하기야 우리 교인들 중에는 권사라고 해도 심방 한 번 하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속장이라고 해도 속회 심방 한번 하지 않는 속장도 있습니다.
        집사, 권사라고 해도 새벽기도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십일조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달에 감사헌금 한 번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안 한다고 내가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죽으면 따라서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길고 짧은 것은 주님 심판대 앞에 가 보아야 합니다. 주님 심판대 앞에서는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나의 불신앙적인 행동이 나 하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따라 행하여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이와 같은 불신앙적인 신앙생활이 남에게 믿음의 상처를 준다거나 실족케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책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8:6-7)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 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잘못하는 사람을 본받으려고 하십니까? 기왕이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을 본받아야 합니다. 도둑놈 따라가면 결국 도둑놈 됩니다. 노름꾼 따라다니면 결국 노름꾼 됩니다. 게으름뱅이를 따라가면 결국 게으름뱅이가 됩니다.
       민수기 16:3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가데스바네아에서 고라가 다단과 아비람과 온과 더불어 당을 조직하고 모세를 반역하였습니다. 이때 고라를 추종하는 사람이 250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라와 그의 가족들을 땅을 갈라서 생매장을 시켰고 추종하던 250명은 제단에서 불이 나와 모두 타죽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은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공존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함께 자라지 않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반드시 가라지를 먼저 묶어 지옥 불에 던져 태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3:29-30)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또한 마지막 때가 되면 악한 사람은 더 악해지고 선한 사람은 더 선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세가 가까울수록 믿음 있는 사람은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믿음 없는 사람은 자꾸만 하나님과 멀어지고 교회와 멀어지고 세상과 가까워집니다.
        (계22:10-12)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 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그뿐만이 아니라 말세에는 사람들이 완악 하여져서 바른 교훈이나 바른 말 듣기를 싫어한다고 하였습니다.
        (딤후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래서 신앙으로 말씀으로 권면을 하여도 듣지 않습니다.
        주일성수를 하여야 하늘의 신령한 영적 축복을 받는다고 하여도,
        새벽기도를 하여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동행하여 주시며 만사를 형통케 하시는 축복을 받는다고 하여도,
        또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물질의 축복을 받고 황충을 금하며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는다고 아무리 설교를 하여도 마이동풍이고 권면을 하여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완악하고 강퍅해졌기 때문입니다.

 

        집사, 권사, 속장은 이름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부르기 좋으라고 붙여준 이름이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에서 받은 직분은 그 직분이 어떤 것이든 간에 죽도록 충성하라고 주신 직분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멘>
        (계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런데도 그 직분에 충성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때에 반드시 책망을 받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겔16:59)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 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지금까지 쌓여만 가던 모든 죄악은 모두 아침 안개의 사라짐같이 빽빽한 구름이 물러감같이 사함을 받고 예수님의 흘리신 보혈로 씻음 받아 거듭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아 멘!>

 

        그래서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여러 가지 방법론이 제기되겠습니다만 저는 오직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예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사랑이요 은혜이며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할렐루야!! <아 멘!>
        만약에 우리에게 예배가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하는 생각만 해도 앞이 캄캄합니다. 하나님은 죄악으로 타락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허락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렇게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선교도 중요하고 기도도 중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입다. 그래서 오늘과 다음 주일까지 예배에 대한 말씀으로
        오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자”
        오늘 저녁예배에는 “예배를 바로 드려야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인다”
        다음 주일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방해하지 말자”
        그리고 다음 주일 저녁예배에는 “예배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이렇게 시리즈로 말씀을 드리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다 같이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자”<아멘!>
        우리 ○○교회 성도들은 기왕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1.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인도하시고 모세를 통하여 성막을 건축케 하신 후에 성소에서 만나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 주시는 곳은 성전입니다.
        출30:6절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곳에서 너를 만날 것이라” 고 하셨고 왕상 9:3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시11:4)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장소는 광야가 아닙니다. 세상이 아닙니다. 골방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안방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 교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1) 하나님과 만날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①삭개오는 예수님을 한 번 보기만 하여도 평생소원이 없으리라고 생각하였지만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오시고 그로 인하여 그의 온 가정이 구원받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②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는 죽어가면서도 메시아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영혼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③요한복음 4장 5절 이하의 기록된 사마리아 수가성의 한 여인은 남편을 다섯씩이나 거느린 한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구원을 받고 그의 인생이 변화되었으며 그리스도를 온 성에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④막달라 마리아는 창녀였습니다. 일곱 귀신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고 그의 인생이 변화되어 일평생 주님을 섬기는 생활로 변화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후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의 무덤에 장사지낸 지 삼일 째 되는 날 아침 일찍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2) 하나님과 만나고 예수님과 만날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니라”(출15:26) 고 말씀 하셨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①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고치셨습니다.
       ② 여리고성의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③ 열 명의 문둥이를 고치셨습니다.
       ④ 거라사 지방의 군대 마귀 들린 자를 고치셨습니다.
       ⑤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주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 모두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주님은 지금도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와 만나고 계시며 우리의 모든 질병을 고쳐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는 곧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병 고침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는 줄로 믿습니다.<아 멘!>

(3) 하나님을 만날 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① 창21:14절 이하에는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쫓겨난 하갈이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가지고 온 물과 떡이 모두 떨어지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죽어 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방성대곡하여 울 때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저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샘물을 주시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② 요한복음 6장의 말씀에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일어난 한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아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예수께서 5병2어를 가지시고 저들을 배불리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5병2어를 가지고 남자 장정만 5천명을 먹였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기적의 역사입니다. 바로 한 소년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③ 왕상 17:8절 이하의 말씀에는 사르밧의 한 과부가 선지자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그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의 요구를 듣고 순종하였을 때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병에 기름이 끊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자연적인 기적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2. 예배는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는 시간입니다.

        (사55:6-7)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분배받아 집을 나간 아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허랑 방탕하여 허비한 후에 설상가상으로 흉년까지 들어서 아사 상태에까지 되었습니다. 이때 그 아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들이 집을 떠난 후로 아버지는 그 아들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는 거지가 되어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달려가서 그 아들을 얼싸 안았습니다.
        아들이 생각하기엔 아버지가 도무지 용서해 줄 것 같지 않아서 아들은 고사하고 그저 품꾼으로라도 받아만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생각으로 돌아왔을 때 그 아버지는 아들의 지난 모든 일을 묻지도 않으시고 용서해 주시고 아들로서의 모든 권한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고,
        또 기억치도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렘31:34)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할렐루야!!

 

3. 예배는 하나님과 화목 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거역하였기 때문에 죄를 범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원수 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롬5:8-10)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복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고 하셨고
        (욥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 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만이 할 수 있습니다.

 

4. 예배는 우리의 영의 양식을 공급받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적 생명을 공급받는 귀한 시간입니다.
        모든 생명체들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아니면 식물들까지도 성장할 수 있는 양식을 공급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영적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을 수 있는 오직 귀한 시간이 바로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배 시간이야 말로 얼마나 귀한 시간인 것을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예배를 소홀히 하는 성도가 있어서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2:30) 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은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에게 분을 내시며 저들을 책망하여 내쫓으셨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영적으로 기갈이 들으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갈급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영혼은 항상 은혜가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하고 하나님이 시간마다 순간마다 주시는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하나님은 항상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시107:9)
         (사25: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라”
         그런데 문제는 기름진 것이 눈앞에 있는데 먹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의심과 두려움과 세상의 재리와 염려로 인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영의 양식을 먹지 못하여 영양실조가 되었는데도 이 핑계 저 핑계로 하나님의 주시는 신령한 영의 양식을 먹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22;1-14절 말씀에 예수님은 혼인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혼인 잔치를 베푼 왕이 종들을 불러 청한 사람을 모셔오라고 하였지만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거절하고 사양을 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청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무슨 이유를 대면서 거절하고 사양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심령 상태는 지금 아사(餓死) 상태인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말세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이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암8:11-13)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 하여 피곤하리라”
        이와 같은 마지막 말세가 가까이 다가오는 이때에 오늘 예배드리는 ○○교회 성도 여러분들은 은혜를 사모하고 간구하여 항상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5.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1) 신령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요4: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십니다.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면 오히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처럼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습니다.

(2) 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산 예배는 피 흘림이 있는 예배입니다.
        피 흘림이 있는 예배는 희생과 헌신과 감사가 있는 예배를 말합니다.
        희생이 없고 감사가 없고 제물이 없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제단 쌓는 곳에 강림하셨고, 제물 있는 곳에 불로 응답하셨습니다. 또 제물 있는 곳에서 만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29:42)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3) 새롭게 변화된 몸과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를 받는 것” 은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는 것으로써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는 세상 것을 다 끊어버리고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성령이 역사 하시고 거듭남의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며 그런 다음에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옷도 아무렇게나 입던 옷 그대로 입고, 또 지각이나 하고, 와서는 졸기나 한다면 이런 예배를 진실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여 부르짖고 찾아서 만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신4:29)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렘29:12-14)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막혔던 모든 문제들이 열려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구원의 문이 열려지고 우리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모든 질병도 깨끗하게 고침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아 멘!>
         아무쪼록 이 시간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가 되심을 고백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은총과 축복을 충만히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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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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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28 : 10 - 22

제 목 : 2017년에 드릴 서원 기도

찬 양 : 552, 338, 368, 384, 539, 550.

 

 

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은혜를 사모하여 나오신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우리들은 2017년의 한 해를 시작하였습니다. 지난해에는 참으로 우리들을 우울하게 하는 일들이 많았던 한해였습니다. 2017년의 새해가 밝았지만 뭐 그리 시원하게 느껴질 만한 소식은 없고 오히려 우리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전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경제학자들은 새해에도 경제가 회복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정치는 날이 갈수록 더욱 혼탁해 지고 있습니다.

기상학자들에 의하면 금년은 역사상 가장 뜨거운 한 해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대기권 오염으로 인한 엘니뇨현상으로 인하여 금년에는 더 많은 기상 이변과 재난이 겹칠 것이라고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와 같은 기상 이변으로 인하여 남극과 북극의 빙산들이 녹아서 남태평양의 나라들은 바닷물의 해수면이 올라가 해마다 수만 명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목숨을 잃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울한 소식들에도 불구하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재기의 몸부림을 치면서 새롭게 출발을 하려고 애쓰는 모습들을 역력히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안한 국가경제와 날마다 올라가기만 하는 온갖 물가고, 그리고 농사는 점점 어려워져만 가는 농촌 문제들이 웬지 모르게 우리들의 신앙과 믿음까지도 위축이 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때일수록 우리들은 더욱 신앙과 믿음으로 무장을 하여서 어떤 환난과 고난 속에서도 굳건한 반석 위에 설 수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아멘!>

   

오늘 본문 말씀은 야곱이 부친 이삭을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챈 후 형 에서의 진노를 피하여 하란 땅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는 도중 루스 광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지시에 따라서 에서의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눈이 어두운 부친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가 받을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늦게 이 사실을 안 에서가 동생 야곱을 죽이려고 합니다. 리브가는 재빨리 야곱을 불러서 외삼촌의 집으로 피신을 시킵니다. 그러나 외삼촌이 사는 하란 땅은 야곱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고 또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도 모르는 길입니다. 게다가 하란 땅은 하루 이틀에 갈 수 있는 길도 아닙니다.

  

이와 같은 길을 가던 야곱은 루스 광야에서 하룻밤을 노숙(露宿)을 하게 되었습니다. 광야의 밤은 참으로 춥고 외롭고 두려운 밤입니다. 돌을 베고 누워서 하늘을 보니 캄캄한 밤하늘에는 마치 은구슬을 뿌려 놓은 듯 별빛만이 반짝이고 사방은 고요한데 이따금씩 먹이를 찾는 야행성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적막을 깨뜨리고 들려옵니다. 추위와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잠을 청해 보지만 쉽사리 잠이 오질 않습니다. 두고 온 가족들 생각이 납니다. 이 시간 쯤 모든 가족들은 따뜻한 잠자리에서 잠을 잘 텐데 왜 자신만이 이와 같은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지 후회도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형편이 이 야곱의 형편과 같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평안과 안식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데 자신만이 아무도 없는 쓸쓸한 광야에서 추위와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앞으로 2017년을, 아니 우리의 일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갈 길이 보이지 않고 막막하기만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도 여러분들이여!

루스 광야의 야곱을 찾아와 만나주신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들을 찾아와 만나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추위에 떨던 몸이 잠시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할렐루야!!

자신이 누운 바로 앞에서 하늘 보좌까지 사닥다리가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다리에는 수를 셀 수 없는 천군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꼭대기 하늘 보좌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서서 말씀을 하시는 모습도 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야곱에게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본문 13-14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본문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은 즉시 일어나 베고 누웠던 돌을 세워 단을 쌓고 하나님께 감사와 서원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벧엘이란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전 이라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야곱이 루스 광야에서 돌단을 쌓고 하나님께 드린 서원 기도를 통하여 2017년의 한 해를 살아가는 우리의 기도가 되어서 금년 한해를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 날마다 시간마다 순간마다 승리의 날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1. 먼저 야곱의 형편을 살펴보면서 오늘의 나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야곱은 지금까지 속이고 빼앗는 간교한 생활을 하여왔습니다. 

야곱이 아비 집을 떠나 하란으로 갈 때의 나이가 77세였습니다. 야곱은 그 나이가 되도록 항상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찬 생활을 하여 왔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나서 불과 1분 차이 때문에 장자가 되지 못하고 장자의 기업을 얻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하여 항상 불만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래서 한 때는 기진맥진하여 돌아오는 형 에서를 속이고 팥죽 한 그릇에 형의 장자권을 빼앗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그의 부친 이삭이 떠날 날이 가까워지자 형 에서를 불러서 맛있는 요리를 부탁하고 그 요리를 먹은 후에 축복하리라는 말을 듣고 어머니 리브가와 결탁을 하여 부친을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챈 것입니다. 참으로 간교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2) 야곱은 지금 쫓기고 있고 외로움과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형 에서는 동생 야곱에게 아비의 마지막 축복까지 빼앗긴 것을 알고 그 동생 야곱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지금 어쩔 수 없이 쫓기고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항상 쫓기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야곱이 잠들려고 누워있는 루스 광야는 참으로 험한 광야입니다. 육식성 동물들이 먹이를 찾아 울부짖고 있으며 땅에는 전갈과 같은 독충들이 있습니다. 죽은 시체를 찾아 맴도는 독수리들도 있습니다.

야곱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외로움에 떨고 있습니다. 이렇게 밤은 깊어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루스 광야에서 돌을 베고 누워서 떨고 있는 야곱의 모습은 바로 오늘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여러 가지의 걱정과 근심에 떨고 있습니다. 금년 한해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날로 어려워 가는 농촌 사정과 천정부지로 치솟기만 하는 물가고와 애써 농사를 지어도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아 만년 적자 농사를 지어야 하는 실정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이와 같을 때에 진정한 우리의 위로가 되시고 소망이 되어 줄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피폐하고 병들어 버리고 외국 농산물들이 물밀 듯 들어와 경쟁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다른 물가는 매년 계속해서 오르고 있는데 쌀값은 오히려 떨어지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농가도 워크아웃 제도를 도입하여 경쟁력 있고 소망이 있는 농가만 지원을 해 주고 그렇지 못한 농가는 지원도 해 주지 않고 다른 직업으로 전환하도록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농촌의 인구는 지금보다 반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기를 (146: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을 때에 진정으로 우리의 위로가 되시며 소망이 되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인줄로 믿습니다. 예수 안에 참 평화가 있고, 예수 안에 소망이 있고, 예수 안에 평안이 있고, 예수 안에 참 기쁨이 있습니다. 믿으시면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2. 이와 같이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야곱을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고난당할 때에 내게 가장 가까이 찾아오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멘>

 

6:50절 말씀에는 제자들이 배를 저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갈 때에 갑자기 풍랑이 일어서 곤경에 빠졌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서 오실 때에 제자들이 이를 보고 유령이라고 두려워 떨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고 하시고 바람과 풍랑을 꾸짖어 잠잠케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그에게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본문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나와 40년의 세월 끝에 요단강 건너편까지 왔을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가시고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이 때 여호수아는 두려웠습니다.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1:5-6)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또 이사야 41:10절 말씀에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후에 3일 만에 부활을 하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숨어 있는 골방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홀연히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신, 구약의 모든 말씀은 오르지 하나님만이 예수님만이 우리 인간의 참된 평안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이 예수 안에서 참된 평안을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찬송가 4121>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 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3.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야곱은 즉시 하나님께 돌단을 쌓고 감사와 서원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꿈속에서 하나님을 뵈옵고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야곱은 즉시 일어나 베고 누웠던 돌을 세워 단을 쌓고 기름 한 병을 부어 드리고 기도를 드립니다. 야곱의 드린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1) 야곱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본문 16-17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야곱은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자기만이 홀로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낙심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외로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광야에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을 듣고 야곱은 새 힘이 솟았습니다.

야곱과 같이 우리들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사는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잠들어 있는 순간에도 졸지도 않으시며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21:3-6)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야곱은 너무나 감사하여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고 누웠던 돌을 세우고 그 돌에 기름을 붓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28:16-19)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다 같이 찬송가 3384절을 부르겠습니다.

 

  야곱이 잠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2) 야곱은 서원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야곱이 드린 서원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습니까?

야곱은 자신의 가는 길에서 지켜 주시기를 간구 하였습니다.

본문 20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기를 간구 하였습니다.

본문 21절 말씀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하나님의 전을 세울 것을 서원 하였습니다.

본문 21-22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것을 약속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본문 22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이와 같은 야곱의 기도야말로 참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도입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서 야곱 때에는 하나님의 성전은 감히 생각지도 못하던 때입니다. 그리고 그 때는 그 누구도 십일조를 드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다만 조부 되는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돌아와 노획한 물건 중에서 십일조를 구분하여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드렸다는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때에 십일조 드릴 것을 약속할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2017년이 시작되었습니다. 152주일 중에 오늘이 첫 주일입니다. 첫 주일을 맞이한 우리들은 야곱과 같이 감사와 서원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와 같은 믿음과 신앙의 잠재력이 있는 야곱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믿음 있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 믿음을 통하여 역사를 일으키시며, 사람을 축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축복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4. 그러면 오늘의 우리들은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1)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인생은 마치 야곱과 같이 사람도 속이고 하나님도 속이고 배신하고 불순종하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쫓김을 당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광야와도 같이 거칠고 황량한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도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동행하여 주시고 우리들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2) 광야와 같은 험한 이 세상에서 야곱과 같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인생, 그리고 지나간 2016년은 루스 광야에 영원히 묻어버리고 벧엘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심령과 믿음이 바로 벧엘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이 벧엘이 되어야 합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 하나님의 집에서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아 멘>

  

(3) 그리고 야곱과 같이 돌단을 쌓아야 합니다.

 

 

돌단을 쌓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란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드리는 것이며 그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제단에 불을 내리셨고 제물 위에 불로 응답을 하셨습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제일 먼저 하나님께 제단 쌓고 제물을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이며 예배를 소홀히 하게 되면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17년도에는 우리 모두 다 같이 제단 쌓는 예배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예배를 폐하는 어떤 이들의 악한 습관에 유혹되지 말고(10:25) 항상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는(12:11)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4) 야곱과 같이 감사와 서원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무슨 감사를 드려야 합니까?

우리가 감사를 드리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평을 하기로 말하면 모든 만사가 불평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은혜 안에서 지켜주신 것 모두가 감사의 조건들입니다

 

무슨 서원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 “하나님의 전이 되게 하옵소서하는 기도입니다.

(고전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2012년에는 우리 자신이 거룩한 하나님의 전이 되도록 힘쓰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지금까지 잘못된 생각과 악한 습관 때문에 더럽혀진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서 늘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게 거하시는 성전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아 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도록 서원의 기도를 하여야 하겠습니다.

야곱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것을 하나님께 서원하여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어도 또 누가 하라고 하지도 않았어도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도 이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목사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믿음으로 십일조를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 서원하고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되 반드시 창고가 차고 넘치도록 채워주신다고 하셨습니다.

(3:11-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야곱은 이와 같이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과의 서원 기도를 마치고 다시 길을 갑니다. 야곱은 이제는 자신이 생깁니다. 담대해 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이 예배를 드린 후에는 담대하십시오. 그리고 소망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갖으십시오.

야곱은 그 후 하란 땅의 외삼촌 라반을 찾아서 그의 집에서 20년의 세월을 사는 동안 하나님은 항상 야곱과 동행하여 주셨고, 지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20년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큰 무리를 이끌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32:10)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2017년의 첫 날, 첫 주일을 맞이하여 이 시간 우리가 앞으로 1년 동안을 어떻게 살아갈 것과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어떻게 할 것을 하나님께 서원하고 약속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심과 같이 여러분을 축복하실 줄로 분명히 믿습니다.<아 멘>

모든 사람들이 금년에는 더욱 살기가 어려운 해가 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왕상 18장에 보면 이스라엘 나라에 3년 반 동안 가뭄과 기근이 들었어도 물 두멍에 물이 마르지 않고, 밀가루 항아리에 밀가루가 가득히 차고, 기름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엘리야를 공궤 하여 축복을 받은 사르밧의 과부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믿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하다면 무엇이 걱정이 되겠습니까?

환경과 여건이 좋은 때에 신앙생활 잘하는 것보다 모든 환경과 여건이 극도로 악화되었을 때의 믿음이 더욱 값진 것입니다.

이제 2017년도를 맞이하여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야곱과 같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면 야곱의 길을 형통케 하신 하나님이 분명코 여러분의 앞날을 형통케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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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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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주님만 따라 가리라

 

설교 : 박한응목사

본 문 : 마태복음 4 : 18 - 22

제 목 : 나 주님만 따라 가리라

찬 송 : 216, 321, 370, 408.

복음송 : 비바람이 앞길을 막아도

 

할렐루야!!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평강이 이 시간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다 같이 찬송가 455장을 부르겠습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이 찬송에서 나 주님만 따라 가리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으로 오늘밤 함께 은혜 받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년에는 오직 주님만 따라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 멘>

사람은 누구를 따라가느냐에 따라서 그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장사꾼을 따라가면 장사꾼이 되고, 과학자를 따라가면 과학자가 됩니다. 도둑놈을 따라가면 도둑놈이 되고, 마귀 따라가면 지옥 가게 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 선지자를 끝까지 따라가서 갑절의 능력을 받은 능력의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제자의 길을 버리고 물질과 명예를 따라갔다가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시몬과 그의 아우 안드레가 바다에서 고기를 잡기 위하여 열심히 그물질을 하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실 때에 저들은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으며, 또한 야고보와 요한도 그물을 깁고 있다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따라 나섰습니다.

또 막2:14절에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쫓으라하시니 일어나 예수님을 좇았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년에는 오직 예수만 따라가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세상에는 우리들을 유혹하는 곳도 많이 있고 또 우리가 가야 할 곳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예수 따라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모든 생활이 예수 중심의 생활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 중심의 생활, 교회 중심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절대로 부귀와 명예와 평안의 길이 아닙니다. 좁고 험한 가시밭길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의 길입니다. 그래도 가야할 길이 바로 예수님 따라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에는 장애물도 많이 있습니다. 온갖 것들이 우리를 방해합니다. 때로는 눈보라와 같은 매서운 환난의 바람이 불어 올 때도 있고, 비바람이 우리의 갈 길을 막을 때도 있습니다.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 넘을 수 없는 태산과 같은 시험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야 합니다. 앞서가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할렐루야!!>

 

  <G.S> 비바람이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눈보라가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이 길은 영광의길 이 길은 승리의길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신 길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아 멘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예수님이 부르셔서 제자를 삼으신 것처럼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의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 따라가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1.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자기를 부인하라 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초대 왕 사울은 처음 왕으로 세움 받았을 때는 성령이 충만하였지만 그 후 교만하여 악신이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내 육성과 나의 혈기와 고집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자기 자신을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2)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자기가 져야 합니다. 누구에게든지 자신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무겁다고 벗어버린다든지 사명 감당을 하지 않을 때에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최선을 다하여 잘 감당할 때에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적은 일에 충성을 하니까 많은 것을 맡긴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선 여러분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을 하십시오. 그래야 더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현재의 직분에도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서 더 큰 것을 바란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금년에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만 따라가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도 말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의 십자가만을 지고 사명 감당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2. 예수님의 제자의 길은 모든 것을 다 버리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시몬과 안드레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하였고, 야고보와 요한은 그의 부친과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하였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베냐민 지파요 가말리엘 문하생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리고(3:8) 예수님을 따라서 이방 민족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여 온 세계를 복음화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하란을 떠났을 때에 가나안 땅을 주셨고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왕상19;19절에는 엘리사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 열 두 겨리 소로 밭을 갈다가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엘리야를 따랐습니다. 또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는 것입니다.

(10:29-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17: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그의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주님을 위해서라면 우리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3. 예수 따라가는 길은 멸시와 천대를 받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는 곳에는 환영하는 사람들보다는 어떻게든지 예수님을 힐난하고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여도 그들은 병이나 고치려고 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받으신 수치와 천대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멸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성령 세례를 받고 나가서 부활의 예수를 증거할 때에도 제자들을 술이 취하였다고 조롱을 하였고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저들이 배우지 못한 어부들인데 어찌 이와 같이 말을 잘하느냐고 조롱을 하였습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역사 2천년 동안 우리 기독교인들은 남들에게 환영받고 영광 받은 것이 아니라 멸시받고 천대를 받았습니다. 아무 상관도 없이 예수 소리만 들어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세상에서 핍박을 받을 때에 하늘에서 상이 크다고 하십니다.

(5: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오늘도 가야하고 내일도 가야 합니다.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우리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 길이 아무리 험하고 고통스러워도,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서 가야합니다. 포기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산상에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우리 인간의 구원을 다 이루시고 다 이루었다”(19:30) 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달려갈 길을 마칠 때까지 믿음을 굳게 지켜 주님 따라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 멘>

   

4.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백배의 상급을 받는 길입니다.

   

(10:29-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작은 충성도 결코 헛되지 않고 큰 것으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6:7),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16:27)

이제는 2017년 새해를 맞이하여 앞서가신 예수님을 따라서 부지런히 가야 합니다. 뒤도 돌아보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뒤돌아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9:62) 좌우 옆으로 치우치거나 보아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앞만 보고 가야 합니다.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등산을 좋아하는 박 집사는 주일날 교회를 가야 하는데 등산을 좋아해서 산으로 갔습니다. 되돌아 올 때는 이미 날은 저물었고 산을 거의 내려올 지경에는 캄캄한 밤이라 그만 잘못하여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순간적으로 생각하기를 이제 죽었구나. 집사가 주일을 범하고 등산을 왔으니 이젠 죽었구나하는 생각과 동시에 한 소나무 가지를 간신히 잡게 되었습니다. 주위가 캄캄한데 위를 보아도 도무지 올라갈 수가 없고 손을 놓으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박살이 날 것 같아서 더욱 소나무 가지를 움켜잡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위에 아무도 없소 사람 살려 주세요그러나 아무런 소리가 없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여 옵니다. 그 때 절벽 위에서 바로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났습니다. “○○○ 집사야!”

이 사람은 너무도 기뻐서 소리쳤습니다.“, 여깁니다. 빨리 살려주세요그러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상했습니다. 이 캄캄한 밤중에 또 이 산중에서 자기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 때 절벽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나는 네가 믿는 하나님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얼마나 기쁜지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만 게신 줄 알았는데 이 산중 절벽에도 계셨군요. 그런데 괜히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하나님 빨리 올려 주세요 팔이 아파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라고 안달입니다.

그 때 다시 절벽 위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네가 진정 나를 믿느냐? 내가 진정 너를 구할 수 있다고 믿느냐?” 그 사람은 대답하기를 하나님!, 이럴 때 하나님 안 믿으면 어느 때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빨리 올려 주세요. 이제 팔의 힘이 다 빠졌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습니다. 오늘은 비록 교회를 빠졌어도 내가 집사가 아닙니까? 집사가 하나님 안 믿으면 누가 믿습니까?”

위에서 다시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네가 진정 나를 믿는다면 내가 너를 구해 줄 테니 그 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놓아라

그 사람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이 캄캄한 밤중에 내가 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놓았을 때 만의 하나라도 실수를 하신다면 나는 박살이 날 텐데 하고 고민을 하다가 하나님을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나님 이 손을 놓으면 절벽으로 떨어져 박살이 나서 죽습니다. 그 위에 하나님 말고 다른 사람 있으면 나 좀 살려 주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 말씀이 없습니다. 박 집사는 소나무를 잡고 있는 팔에 시간이 갈수록 힘이 빠져 결국 나뭇가지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젠 죽었구나 하는 순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불과 한 뼘도 안 되는 발밑에 땅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생의 모습입니다. 아니 오늘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진실 된 믿음이 없이 시시 때때로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길로 간 것이 바로 우리들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교회에서는 집사요 권사요 속장이요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오지 못하고 주일성수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여 준다고 하시는데도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내 생각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은 이제는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2017년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종하면서 예수님만을 따라가는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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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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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의 이야기 전도여행 Paul's missionary trips

 

1. 첫 번째 전도 여행/13-14

 

2년 동안

 

갈라디아 지방(사도 바울의 1차 전도지역을 갈라디아라고 부른다.)

 

이렇게 갈라디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보니 자꾸 이방인들을 유대인들처럼 만들려고 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렇게 논쟁을 일으킨 사람들은 유대인이었다가 복음을 믿은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방인 신자들을 할례를 받게하고, 모든 율법의식을 지키게 하려 하였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복음은 예수 + nothing이라고 하였다.

* 예루살렘

* 총회

* 율법? 아니요!

 

그러나 계속해서 유대인들이 문제를 일으키게 되자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대표를 보내어서 이 문제에 대하여 복음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게 하였다. 이때에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이 문제를 놓고 의논한 결과 그들은 구원을 받는 데에는 예수 외에는 아무 조건도 없다고 결론을 맺었다.

 

구원받기 위해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의 법을 지켜야 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러나 믿은 후에 자원하여 말씀에 순종할 수는 있다. 복음을 구체적으로 요약을 해서 들려주면 듣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여기에 율법은 끼어 들 자리가 없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깊이 깨닫게 될 때에 참다운 삶이 나타나게 된다.

 

이때에 총회 장이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였다. 그리고 이때에 사도들과 바울이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제 두 번째 전도여행을 떠나게 된다.

 

2. 두 번째 전도 여행(15:-)

 

* 3년 동안

* 마게도냐

아가야

그리이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흘렀고, 남서쪽인 아프리카로 흘러 들어갔다. 그래서 2-5세기에 유명한 신학교와 신학자들이 많이 일어났다. 사도 바울은 두로와 시돈을 거쳐서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갔다. 이 곳에서 길리기아 지방으로 돌아서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으로 가서 드로아에 이르렀다. 이때에 성령께서 이 곳으로 더 이상 가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마게도니아에서 바울을 부르는 환상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럽으로 복음이 전해지게 된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서 네압볼리, 빌립보(감옥에 들어감-찬송과 지진으로 간수가 자살 하려고 함-그를 구원함-그 밤에 그 간수와 가족들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이 곳에서 루디아라는 여인-데살로니가에서 온 여인-이 복음을 듣고, 점치던 여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곳에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빌립보서에는 계속 기쁨이란 단어가 등장함. 그 후에 반대에 부딪혀서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를 거쳐서 아덴과 고린도(서울)와 겐그레아(인천 같은 도시) 지방으로 여행하였다.)

 

빌립보가 있는 지역을 마게도니아라고 불렀다.(지금의 알바니아) 소아시아는 지금의 터어키 그리고 남쪽은 아가야(지금의 그리이스)라고 불렀다. 바울이 바로 이 아덴에 이르러 논쟁과 논란을 벌였다.

 

고린도에 약 16개월간 있으면서 데살로니가 전, 후서를 썼다. 이때에 죽은 가족들로 인해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안 믿는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고 슬퍼하라고 하였다. 그들은 이미 주님의 재림이 지나가고 자신들은 다 버림받은 것이 아니냐고 걱정을 하였다. 이때에 사도 바울은 죽은 자들이 먼저 살아나고 살아있는 자들과 함께 공중으로 들림을 받을 것이므로 서로 위로하라고 하였다.(살전후)

 

그리고 겐그레아에서 에베소로 건너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려고 이미 곳곳마다 회당을 준비해 놓으셨다. 주님께서 오실 때에 상당히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알렉산더가 헬라 문화를 전 세계에 퍼뜨렸다. 그래서 전세계 공용어는 헬라어였다. 그래서 주전 150년 구약 성경을 그리이스 성경으로 번역을 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유대 사람이면서 유대 말을 잘 몰랐다. 그래서 헬라어로 성경을 번역했는데, 이것을 70인경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때에는 사도들이 헬라어로 쓴 신약 성경을 썼으며 구약 성경도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주전 4-500 년경 에스라를 통해서 10명만 있는 마을에는 곳곳에 회당을 지어 놓았다.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95년에 죽게 되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를 통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미 고린도 등에서 예루살렘을 위한 구제 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에 전해 주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선교 보고를 하였다.

 

잠시 쉬었다가 바울은 또 다시 출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에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로 인해서 다툼이 있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려가기를 원했고, 바울은 그를 데려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마가가 어려서 일차 여행에서 돌아간 것이 그 싸움의 문제였다. 그래서 바울파와 바나바 파가 갈라졌다. 바울은 누가를 데리고 다시 전도한 지역으로 갔고, 바나바는 또 다른 지역으로 따로 전도여행을 떠났다. 이것을 보면 꼭 한국교회와 같다. 장로교가 수십 개가 된다. 한국 교회는 교단이 생육하고 번성했다. 그러나 인간은 싸워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손해를 보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싸움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셨다. 단결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성숙해 가는 재미있게 목회 하는 교회가 필요하다. 한국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싸우고 분열은 하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고 성숙해 가는 교회는 드물다.

3 세 번째 전도여행

 

* 4년 동안

* 소아시아

 

이제 바울은 세 번째로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이번 여행은 약 4년간 하게 되는데 1차 전도 여행을 했던 갈라디아 지역은 들리지 않고 직접 에베소로 갔다.

 

그래서 이곳에서 드로아, 네압볼리,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를 방문을 하였다. 이때에 드로아에서 바울이 고별 설교를 밤늦게까지 하다가 한 청년이 창문에서 떨어져서 죽은 일이 발생을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에 오면 조는 사람들이 있다. 호롱불에서 나오는 탄산가스를 창문에 앉은 사람이 다 마심-그리고 고린도에서 56-7년에 로마서를 썼다. 하나님께서 그 동안에도 많은 열매를 주셨는데, 이제는 스페인까지 가야하겠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때에 이미 로마에는 교회가 있었다. 로마에 가서도 복음의 열매를 맺고 싶다고 한 유명한 로마서가 이때에 쓰여졌다.

 

그리고 다시 돌아갈 때는 2차 여행과 같이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거쳐 온 모든 지역들을 다시 돌아서 갔다. 그리고 드로아에 이르러서 밀레도에 이르렀을 때에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다시 초청하여 고별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다시 배로 여행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 때에 약 2년간 있는 동안에 누가를 데려왔다. 이때에 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또 자료를 수집하여 누가복음을 쓸 자료를 수집한다.

 

* 재판

* 벨릭스

* 베스도

* 아그립바

 

바울이 예루살렘의 환영을 받자마자 사도들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유대인들이 당신이 모세도 금하고 할례도 금하고 율법도 금하고 있다고 하여 단단히 벼르고 있다고 알려준다.

 

결국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 잡혀서 공회에 끌려가게 되었다. 그래서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이 이렇게 된 배경에 대하여 유명한 간증을 하게된다.(22)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사형을 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로마 총독이었던 벨릭스에게로 끌고 갔다. 그래서 벨릭스가 심문을 하였으나, 바울이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밝히고 황제에게 항소하였다. 그리하여 바울은 감옥에 약 2년 동안 있게 되었다. 24장 맨 마지막 절을 보면 "이태를 지나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베스도가 와서 보니까 아직 미결된 죄수가 하나 있다고 하여 조사를 해보니 아무 잘못이 없어 보였다. 그리하여 당시에 유대인의 왕이었던 아그립바 왕에게 심문을 받게 하였다. 그러자 아그립바 왕이 조사를 해보니 아무 잘못이 없었다. 그리하여 아그립바 왕이 바울이 가이사에게 항소하지 아니하였으면 놓아줄 뻔 하였도다. (26:31-32)고 말함.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받을만한 행사가 없다 하더라. 아그립바가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놓을 수 있을 뻔 하였도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로마로 호송할 것이 결정이 됨.

 

그리하여 바울은 로마로 호송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간에 풍랑을 만났으나 바울이 그들을 격려하고 인도해 준다. 위기 속에서의 사도 바울-하나님과 친하니까 풍랑 속에서도 담대하다. 정말 신앙이 있는 사람은 풍랑을 만나야 알 수 있다.-평상시에는 모두 다 신자 같으나 정말 어려움이 당하면 진짜가 나타난다.-일제 시대에 다른 목사님들이 다 포기할 때에 주기철 목사님같이 고난을 당한 사람이 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신뢰하고 의뢰하는 사람들은 시련이 올 때에 그 진가가 발휘된다. 바울은 한 명도 안 죽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배가 산산조각이 났다. 그래서 배 한 조각씩 붙잡고 살아났다.

 

* 첫 번째 감옥살이(27-28)

* 석방됨

 

그리하여 그들은 살아난 후에 로마에 도착하였다. 2823절을 보면 결론 부분이 나타난다.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는지라"(28:23) 바울은 감옥에 갔다가 잠깐 놓였을 때에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전하였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디에 데려다 놓아도 문제가 없다.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면 된다. 그래서 어디 가서 무엇을 하면서 살든지 믿는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도 문제가 없는 것이다. 진짜 신앙 생활은 삶 속에서 나타난다. 사도 바울이 바로 이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디를 가도 예수님을 전하는 일만 하였다. 우리의 인생의 목표도 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어 그 말이 서로 맞지 아니하니..."(28:24) - 사도 바울은 이러한 현상을 보고서 이사야의 예언을 빌려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눈과 귀를 받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만 하면 된다.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은 우리 책임이 아니다.

 

* 두 번째 감옥살이

* 확장

 

사도 바울은 이때에 집을 하나 세를 내어서 가택 연금 상태로 이년간 있었다.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28:31-) 사도 바울은 이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쳤으나 아무도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가 바로 62년쯤 된다. 60년경에 로마에 와서 62년까지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빌레몬서를 쓰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사도행전의 이야기이다

 

전설에 의하면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무죄로 석방되었는데, 그때에 그는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에 그는 다시 로마에 와서 네로 때에 순교를 당하게 되었다(베드로는 64년경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바울은 이 곳에서 마지막 편지(디모데후서)를 썼다. 그는 디모데후서에서 자기가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리고 (누가만 그와 함께 있었다) 마가를 데려오고, 추위를 가릴 겉옷과 성경책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 바울은 68년 봄에 순교를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2년 뒤인 709월에 이스라엘은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해서 멸망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나라도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1948년에 독립하게 된다. 이스라엘인은 약 1500만 정도인데 이스라엘 본토에는 약 300만 명이 살고 있다. 우리도 사도행전을 보면서 도전을 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들도 사도 바울과 같이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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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Trinity-Introduction)

 

하나님은 본질상 한분 이시나 이 한분 안에 성부, 성자, 성령으로 불리워지는 삼위가 존재 한다고 말한다. 솔직히 성경에는 삼위일체란 단어는 없지만 삼위일체 교리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성경적 교리로서 신비로운 진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신앙의 자세로 성경을 근거로 하여 공부해 보기로 하겠다.

 

(1)삼위일체의 정의 ()

 

삼위일체의 영어 TrinityTri-Unity의 단축형이고 라틴어 Trinitas에서 인출된 바 [하나에서 셋, 셋인 하나, 하나인 셋]이란 뜻이다(28:19). 즉 한 본체가 영원한 삼위로 실존한다는 표현의 교리적인 술어이다(3:16).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본질상 한분 이신데 이 한분 안에 세분의 인격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불리는 삼위(三位)가 존재한다는 말이다(4:5). 그러면서도 그것은 세 하나님을 말하지 않고 일체(一體) 즉 한 본질되신 한 하나님을 지칭한다.

 

*소요리문답 제6문에 [하나님의 신격에 삼위가 계시니 <성부> <성자> <성령>이신데, 이 삼위는 한 하나님이며 본체는 하나요 권능과 영광은 동등 하느니라]고 하였다. [어떻게 한 하나님이 셋으로 나누어지는 것일까?]하고 논리적으로 따지려 들면 삼위일체 이해는 수포로 돌아간다. 그러나 겸허한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삼위일체만큼 흥미롭고 확실하며 은혜가 넘치는 일이 없는 것이다.

 

(2)삼위일체의 성경적 근거

 

성경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밝혀 주는 구절이 너무도 많다. 그 대표적인 것만 골라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구약의 근거

구약에는 하나님에게 한 위 이상이 존재함을 지적해 주는 구절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복수로 나타내시기도 했으며(1:26,11:7), 여호와의 천사는 한 신적위로 나타났으며(16:7-13,18:1-21,19:1-22), 여호와의 영도 또 다른위로 표현되었다(48:16,63:10). 이외에도 메시야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다른 두 인격에 대하여도 말하는 구절들이 있다(48:16,61:1).

 

1.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우리(We)라는 복수로 표현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삼위되신 하나님을 표현한 것이다. 1:26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였다. 그 외에도 창11:7,6:8에 기록되어 있다.

 

2. 구약 창18:1-24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천사)가 사람의 모양으로 세 명 혹은 두 명으로 나타나곤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삼위 하나님의 다양한 출현으로 여겨진다.

 

3. [48:16]에 주 여호와(성부)께서 나(성저)와 신(성령)을 보내셨느니라라고 하였다.

 

2) 신약의 근거

 

신약의 증거는 구약의 증거보다 더욱 명백한 증거를 갖는다. 가장 유력한 증거는 구약의 사실에 잘 나타나 있다. 성부는 성자를 세상에 보내시고, 성자는 성령을 보내신다. 신약성경속 에서는 삼위가 명백하게 언급되어 있는 곳이 여러군데 있다. 즉 예수님의 명령(28:19)과 사도적 축복(고후13:13)에서 또는 눅1:35,고전12:4-6,벧전1:2등에서 언급되고 있다.

 

1. [3:16-17]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성부)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성자)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2. [28:19-20]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성부)와 아들(성자)과 성령(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3. [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는데 요1: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다.

 

4. [1:18]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니(하나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고 하였다.

 

5. [고전12:4-6]에 은사는 여러가지나 성령(성신)은 같고 직임은 여러가지나 주(성자)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가지나 모든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성부)은 같으니라고 하였다

 

6. [고후13:13]에 주 예수 그리스도(성자)의 은혜와 하나님(성부)의 사랑과 성령(성신)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 하였다.

 

7. [2:5-8]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였다.

 

(3)삼위일체 교리의 예증

 

삼위일체 교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증을 들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1. 태양의 경우: 본체(성부), (성자), (성령).

2. 사람의 경우: (성부), (성자), (성령).

3. 물의 경우: 고체(성부), 액체(성자), 기체(성령).

4. 나무의 경우: 뿌리(성부), 줄기(성자), 열매(성령).

5. 꽃의 경우: 본체(성부), 색깔(성자), 향기(성령).

6. 곤충의 경우: (성부), 애벌레(성자), 나비(성령).

7. 심리적 합일: (성부), (성자), (성령).

8. 논리적 합일: (성부), (성자), (성령).

9. 형이상학적 합일: 주관(성부), 객관(성자), 주객관(성령).

10. 삼각자의 경우: 삼각자는 3각과 세변이 모여서 하나의 삼각자라고 부른다. 이와같이 하나님도 한분 이시지만 그의 사역에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어떤 지식으로도 신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하다.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말물을 초월한 존재로서 실체와는 구별되기 때문에 만약 인간이 스스로 신을 이해 한다면 그것은 참신이 아니다]고 하였다.

 

(4)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1. 성부 하나님은 구원을 계획하시고(예정, 선택) 만물을 창조하셨다(고후8:6,1:4).

 

2. 성자 하나님은 계획된 구원을 십자가를 지심으로 성취하셨다(6:35-40,9:5).

 

3. 성령 하나님은 성취된 구원을 인간의 마음과 생활에 적용시켜 완성(온전)케 이루신다(5:3,8:14).

 

(5)삼위일체의 동일성

 

삼위는 세 개체가 아니라 오히려 신적 본질이 그 안에 존재하는 세가지 양상이요, 형태이다. 동시에 이들은 서로 인격적 관계를 확립할 수 있는 성질을 각각 가지고 있다. 성부는 성자에게 말씀하실 수 있고,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보내실 수 있다.

 

삼위일체 교리의 오묘한 신비는 삼위 중 각 위가 신적 본질의 완전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삼위의 테두리를 벗어나 밖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1. 본질상으로 동일하시다(2:6)

1) 성부 하나님.(고전8:6,1:1,4:6,2:11)

2) 성자 하나님.(1:1,18,20:28,9:5,8,요일5:20)

3) 성령 하나님.(15:26,5:3-4,고전2:11)

 

2. 능력상으로 동일하시다(요일5:20).

1)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성부 하나님.(1:1,2:10)

2)창조 당시에 함께 계신 성자 하나님.(1:26,1:3)

3)창조 때 운행하신 성령 하나님.(1:2,8:16)

 

3. 시간상으로 동일하시다(13:8).

1)태초에 계신 영원하신 하나님.(1:1,33:27)

2)태초에 계신 영원하신 예수님.(1:1,7:24)

3)태초에 계신 영원하신 성령님.(1:2,9:14)

 

4.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께서 장차 발생할 모든 일들을 미리 정하시는 그의 영원하신 목적이다. 우리가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히 알게 될 때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농부는 농사짓는 일을, 어부는 고기잡는 일을 하듯이 [하나님이 어떠한 일을 하시느냐?]를 자세히 연구해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1:36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고 하였다.

 

즉 하나님의 사역은 예정하시는 일, 창조하시는 일, 섭리하시는 일, 심판하시는 일로 일을 하신다. 예정, 창조, 섭리, 심판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안에 있다.

 

(1) 예정 하시는 일

예정은 도덕적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요, 그 모든 부분에서 도모와 의지가 동일하신 하나님 삼위의 일치한 행위이다(9:13,벧전2:8).

그러나 구원의 경륜에 있어서 구속은 성자에게 성화는 성령에게 특별히 귀속시킴 같이 예정의 주권적 행위는 성부에게 특별히 귀속 시키는 것이 성령의 분명한 교훈이다(17:6-7,8:29).

 

1.예정의 뜻(37:5,18:6,19:24).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예수를 미리 정하신 것(3:20)과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경륜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것이다(1:5,9).

 

2. 예정이란 선인과 악인, 남녀 노소의 모든 인류, 집단과 개인에게 까지 관계하시는 하나님의 관계이시다(4:28,8:29,1:4-6)

 

선한천사와 악한 천사 까지도 포함하며(8:38,9:26,벧후2:4,딤전5:21,1:6), 신적 예정의 대상에는 중보자 그리스도까지 포함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의 대상이 되셨음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다(벧전1:20,2:4)

 

3. 예정의 종류

1) 선택:*하나님의 구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선택(4:37,13:5)

*특별한 직무와 특별한 봉사를 위한 인물의 선택(18:5,삼상10:24).

*하나님의 자녀와 영원한 영광의 계승자로 삼으시기 위한 개인의 선택(11:5,1:4)

 

2) 유기:*유기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작용속에서 어떤 사람을 간과하시고, 그들의 죄를 따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거듭남과 구원의 은총을 하사하실 때 어떤 사람들을 버려두신다는 것이고, 그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느끼시는 수치와 진노를 그들의 탓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19:24,1:24,6:4,10:29,21:8).

*하나님의 원하심과 예수님의 부르심과 성령의 도우심을 물리치지 않고 구원의 문에 들어선 자는 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란 축복을 받게 된다.

 

(2) 창조 하시는 일

창조란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부분적으로는 먼저 있었던 물질을 사용하지 않고 창조하시고 한편으로는 본질상 충분한 물질로부터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산출해 내신 하나님의 사역이다.

 

1. 창조의 뜻

창조는 없는 데서 형상을 이루게 하는 것이고(1:1), 있는 것으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며(1:27), 기존 물질로 번성해 나가는 것이다(1:28).

 

2. 창조의 시기와 방법

태초에 창조하시고(1:1) 계속하여 창조하셨다(4:13).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셨다(65:17). 창조 사역의 첫 부분은 엄밀히 무에서의 창조이며, 기존 재료를 사용치 않은 창조였다.

  

3. 창조의 분류와 순서

 

1) 천사의 성질(28:15,24:39)

천사란 말은 [사신(messenger)]이란 의미이다. 천사의 계급에는 그룹(3:24,25:18,37:16), 스랍(6:2,6), 미가엘(10:13, 21, 12:1,12:7), 가브리엘(8:16), 사단(28:12-15,벧후2:4,요일3:8,12:9)등을 들 수 있다.

2) 만물의 창조(1:1-2:3)

(1:1-5), 궁창 위의 물과 아랫물(1:6-8), 육지, 바다, 식물(1:9-13), . . (1:14-19), 새와 물고기(1:20-23), 육축과 사람(1:24-31), 안식하심(2:1-3), 우주의 삼라만상, 천지만물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6일 동안 창조하셨다(1:1-31). 그러므로 창조란 [무에서 유를 만든 것] 곧 전혀 없는 것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있게 하셨다는 말인데, 유형(물질)세계 뿐아니라 무형(영적)세계는 물론이고 천사(영물)까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예술작품이요 하나님의 위대하신 솜씨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예술가와 설계사보다 뛰어난 위대하신 예술가이시며 설계사인 것이다.

 

* 6일 창조 단계 (서로 관계 있고 질서있게 창조함) *

1-빛과 어두움 분리 완 4-일월성신(..)

2-궁창과 하늘 분리 성 5-새와 고기

3-바다와 육지 분리 단 6-육축과 사람

*7일은 안식하셨다.

 

(3) 섭리 하시는 일

섭리란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피조물들을 보존하시며 세상에 발생하는 모든 사건 속에서 활동 하시며, 만물을 정해진 목적에 맞도록 이끄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특히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사역에는 협력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섭리 사역에 있어서 피조물이 창조주를 협력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들면, 인간이 성화되는 과정에서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진실하고 선하고 의롭게 살려고 애를 써야 되며, 가만히 앉아서 거룩하기를 바란다든가 달란트를 파묻어 놓고 주님의 능력만을 고대해서는 않된다는 말이다(14:17,8:28,2:13).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창조하신 만물의 본래 존재 목적대로 친히 다스리고 계신다(103:19). 하나님은 세상의 통치자 이시니 만왕의 왕이시다(19:6).

 

1) 섭리의 뜻

섭리란 창조물을 보존하고(9:6), 인간의 쓸것을 채우시며(4:19), 인생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것을 말한다(74:12).

 

2) 섭리의 종류

1. 보통 섭리:*만유를 자연법을 통해 통치하고(103:19), 보호하며(34:20) 채워주신다(4:19).

*기본적 섭리-햇빛과 비를 공평히 내려 주신다(5:45).

*개별적 섭리-구하는 자에게 주신다(7:7).

2. 특별 섭리:*자연 법칙을 초월해서 일어나고(2:9), 인력으로 불가능한 이적기사(2:1)와 인간의 구원을 위해 특별한 능력을 행사하게 된다(14:21)

 

3) 섭리의 목적

모든 섭리는 선의 성취(12:35-41)와 마귀를 대적하고 인류를 구원하며(벧후3:9), 인생에게 부활에 대한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다(고전15:54).

 

4) 심판하시는 일

모든 사람이 최후에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는 것은 인간 심리의 가장 심오한 확신중의 하나이며, 이것은 기독교에서만 국한되는 것이다. 성경은 최후 심판이 궁극적으로 있을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25:31-46).

 

농부가 씨앗을 뿌렸으면 거둘 때가 있고 아침이 있으면 밤이 있으며 학생이 입학 했으면 졸업때가 있듯이 종말론적 의미에서 역사의 시작이 있었으니 반드시 역사의 끝이 있는 것이다.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뤄지는데(9:27) 선한 청지기와 불의한 청지기에게 각각 응분의 댓가가 주어질 것이다(25:14-30).

 

11:9에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대로 좆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고 하였고, 3:15에도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인간이 종착역에 도착해서 하나님의 공의에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데 그때엔 우리 자신도 까마득하게 잊고 있는 과거에 자신이 살아온 과정이 밝히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선악간에 보응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때 하나님 앞에서는 변명도 소용없고 뇌물도 통할 수 없다.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말씀인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대 앞에 자기 자신의 의()로 설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고, 오직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고 의지하는 성도이어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사람은 유한하나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인간은 변해도 하나님은 불변하신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시며 무소부재 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에 악을 미워하고 죄인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시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에게는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아바 아버지가 되셔서 세상 끝날까지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이시다. 이처럼 좋으신 안버지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인 성도에게 경배(예배)를 받기를 원하신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영광을 돌리시기 바란다.

 

15:16에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였고,

 

19:23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약속하셨으며,

 

6:4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생각하는 코너*

하나님이 안보이니 못 믿겠다고 하는 형제 자매여! 그대는 태양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가? 아니요!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물 가운데 태양도 제대로 볼 수 없다면 어떻게 의에 태양되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한 눈에 볼 수 있겠는가?

 

사물을 관찰해 보면 안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귀하고 더 크고 귀중한 것이 많이 있다.

 

생명, 공기, 사랑, 지식, 전자, 원자등은 눈(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존재하고 또한 귀중한 것처럼 하나님도 육안으로는 안 보이지만 실존하고 계심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사물에 따라 보는 방법이 각기 다르다. 예를 들면 물체는 눈으로 확인해 보아야 하고, 음성은 귀로 들어보아야 하고, 음식을 입으로 먹어 보아야 하고, 냄새는 코로 맡아 보아야 하고, 사람은 겪어 보아야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영이신 고로 믿어 보아야 알 수 있다. 만일 사람이 청결한 마음으로 영의 눈(믿음의 눈)을 갖고 보면 거룩하시고 영광스럽고 신령한 하나님의 성상(聖像)을 우러러 볼 수 있는 것이다.

 

! 주여, 영의 눈을 열어주소서!

 

1. 기독교의 하나님과 범천 사상의 하느님, 하늘님, 할얼님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므로 애국가를 부를 때에는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해야 한다.

2. 일본인은 하나님을[가미], 아랍인은 하나님을 [알라], 중국인은 하나님을 [상제], 영어는[] 이라고 부른다.

3. 기독교의 하나님은 엘로힘, 아도나이, 여호와, 아버지로써 하늘에만 있는 하늘님도 하느님도 아니고 [하나님] 즉 유일신(唯一神)이며 무소부재 하셔서 어디에나 아니계신 곳이 없으신 전능하신 분 이시다. 한마디로 기독교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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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론(Theology)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God)의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의 존재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서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의 정의에 대하여 여러가지 표현이 있으나 하나님은 무한한 완전성을 지닌 순수한 영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이와같은 서술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1)하나님은 순수한 영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정의하려고 시도하지 않으나 그리스도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다](4:24)라고 규정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영이시며 영의 완전한 관념에 속하는 모든 특질들이 하나님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순수한 영이라고 하는 사실은 하나님은 어떤 종류의 육체를 가지셨거나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라는 개념을 부인하는 것이다.

 

(2)하나님은 인격적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다]고 하는 사실은 또한 그의 인격성을 포함해서 표현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영은 지성적이며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인격적 존재라고 말할때 하나님이 자신의 생활과정을 결정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비인격적인 세력인 힘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들과 교제 할 수 있고 인간들이 의지할 수 있으며, 인간들의 생활속에 들어와 인간의 어려움을 도우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더우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인격적 존재로 나타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빌립에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그러한 완전한 방법으로 아버지를 예시하셨다(14:9).

 

(3)하나님은 무한히 완전 하시다.

하나님은 무한한 완전성에 의하여 그의 모든 창조물과 구별된다. 하나님은 그의 존재하심과 선하심에 있어서 제한을 받지 않으시며 완전하시다. 하나님은 한계나 제한이 없으실 뿐 아니라 도덕적 완전성과 영광스러운 존엄으로 모든 피조물위에 뛰어나신 분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여호와여 신중에 주와같은자 누구니이까 주와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가?(15:11)

 

(4)하나님과 그의 완전성은 동일하시다.

단일성은 하나님의 근본적 특성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질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지신 분이 아니시며, 그의 존재하심과 속성이 동일하신 다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성은 인간에게 계시해 주신 하나님 자신을 말하는 것이며,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이시고 생명이시며, 빛과 사랑이신 분이심을 성경이 증명해 주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주장하는 유신론과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 장님이 태양을 볼수 없다고 하여 태양이 없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신고로 인간의 오감으로 보거나 만지거나 느낄 수 없고 그림으로 그릴 수도 없으며 저울이나 자로 달거나 잴 수 없지만, 우리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계심을 분명히 확신하고 있다. 장님이 태양을 볼 수 없다고 하여 태양이 없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은 육안으로 볼 수 없지만 우리는 지금 이 시간도 하나님과 대화하며, 날마다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을 지상의 가장 큰 축복이요, 행복이라고 믿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된 교과서는 아니지만 성경공부는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14:1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고 하였고, 10:4에는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고 하였다.

 

이 말씀은 아무리 지식이 많은 학박사라도, 천하를 호령하는 권세자라도 돈 많은 백만장자라 하여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교만한 자요 어리석은 자이며, 악인이라고 하신 말씀인 것이다.

 

1.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은 몇가지의 다른 근거 위에서 부정되어 왔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이같은 부정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하는 주장과 흡사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절대적으로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인간이 무한한 깊이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측량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알 수 있다고 할 경우 그 지식은 참되고 진실한 지식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천둥이 치거나 위급한 일을 만날때 [아이구! 하나님]하고 하늘을 향해 도움을 청하는 선천적 지식 즉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에 대한 일정한 지식을 갖고 태어나고(11:9), 후천적 지식 즉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통해 배움으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일반계시(자연계시)로서는 구원자되시는 하나님을 확실히 알기에 불충분하고 성경(특별계시)을 통하여 하나님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1:1, 요일5:20).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런 논증을 간략하게 공부해 보기로 하겠다.

 

(1)성경론적 논증: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가르쳐 준다. 누구나 하나님을 알고자 하면 성경을 상고하여야 한다.

11:6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였다.

 

(2)본체론적 논증: 모든 사람은 직관적으로 하나님에 관한 관념을 지니고 있으며, 그 관념 자체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을 찾으려고 한다.

 

이름이 있으면 실체가 있듯이 하나님이라는 개념(이름)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한다( 3:14).

 

(3)우주론적 논증: 우주론적 논증이 증명하고 있는 내용은 우주는 적절한 원인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으며, 이 원인은 우주 밖에 있는 것으로서 지적이라는 것이다. 원인없는 결과가 없듯이 우주안에 모든 것이 우연히 생기거나 진화된 것이 아니고 조물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19:1,1:20).

 

(4)목적론적 논증: 물건마다 목적이 있고 반드시 누군가에 의해 설계되어 만들어졌다면 우주만물의 움직임과 생명체의 조직이 시계처럼 질서와 목적이 있어 움직이는 것을 볼때 삼라만상 역시 창조주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속에 설계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1:3, 14:17). 그러므로 우리는 목적론적 논증은 제일 원인이 지적이고 지적이고 자유적이며 상상할 수 없이 위대하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5) 도덕론적 논증: 도덕적인 법칙은 인간이 스스로 인간에게 부과한 것이 아니며 또한 심판의 공포도 인간 스스로 집행한 것이 아닌 이상, 이 법칙을 부과하는 하나의 거룩한 의지와 이 도덕적 성품의 위협을 자아내게 하는 하나의 형벌적 능력이 있다. 우리의 양심은 이렇게 외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8)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 하시리라(12:14). 환언하면 양심은 위대한 율법 수여자이신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율법의 파괴에 대해 내리는 형벌의 사실을 인식한다. 그뿐 아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양심의 소리를 들을때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이름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을 [20:7,8:1]에서 가끔 단수형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명칭은 자기 백성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명칭이다.(18:10,50:10) 하나님의 명칭은 인간이 조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서 주어진 신적 기원을 가지게 되므로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공부해 보기로 하겠다.

 

(1)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

구약에서 하나님은 높으시고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 초월의 하나님이란 뜻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로힘(Elohim), 헬라어로 데오스(Theos),인데 전능하신 하나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신비로우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은 전지 전능 하셔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는 말이다.

영어에서 하나님을 갇(God) 대문자로, 잡신(귀신)을 갇(god) 소문자로 표기하여 구분하지만, 한글 성경에는 [하나]라는 숫자에다 []이라는 인격적 표현으로써 [하나님]이라고 번역하였으니 [하나]는 절대성, 유일성, 위대성을 나타내고 []은 생명이 있고 인격을 갖춘 존경사인 것이다.

 

1. 엘로힘(Elohim): 창조와 능력의 하나님(1:1). 즉 하나님께서 강하시고 권능이 있는 분으로 두려움을 줄 수 있는 대상이라고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2. 샤다이(Shaddai): 영원 불변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17:1).

3. 엘욘(Elyon): 숭고하고 존귀하시며 가장 높으신 하나님(14:19,24:16,14:14). [올라간다. 높아진다는 뜻]

4. 아도나이(Adonai): 모든것의 주인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6:2,83:18) [재판하다. 통치한다는 뜻]

5. 여호와(Jehovah): 영원 자존자이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3:14). 성경에 여호와라는 말(단어)은 약 7000번 이상 사용 하였는데,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께 소명(부르심)받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더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3:13-15)고 가르쳐 주었다.(6:2,42:8참고) 옛날 성경원본을 사본으로 베끼던 서기관들은 [여호와]란 명칭이 나오면 밖에 나가 손을 깨끗이 씻은 후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록했다고 한다. 요엘2:32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자가 있을 것임이니요, 남은자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자가 있을 것임이니라.고 하였다.

 

(2)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

 

신약에서 데오스(Theos)는 구약의 엘(El), 엘욘(Elyon)과 동의어로서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하는 보통 명칭이다. 이 명칭은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모든 자녀들과 각 자녀의 하나님으로 인정된 것을 표시한다.

 

1. 데오스(Theos):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5:7).

2. 큐리오스(Kurios):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1:8).

3. 로드(Lord):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20:28).

 

(Lord)는 히브리어로[아도나이] 헬리어로[큐리오스]인데,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시요, 인간의 생사 화복과 다스리시는 소유주시요, 지배자이신 주(주인)이라는 의미이다. 즉 인간은 종(청지기)의 입장에서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숭배하는 이름이다.

 

3. 파더(Father): 영원의 아버지이신 하나님(3:15).

 

 

이스라엘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구약에서도 사용되었다(32:6,63:16,3:4). 신약의 명칭은 모든 성도들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자칭하므로 보다 개인적인 명칭이다. 어떤때는 만물에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가르키기도 하고(고전8:6,3:14,1:17), 그리스도의 아버지 되시는 삼위의 제 1위를 가리키기도 한다(14:11, 17:11).

 

8:15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하였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지은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인자 하시고 친절하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가 되셔서 항상 지켜주시고 인도하시며 책임져 주신 분이시다.

 

4.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은 그의 이름에서 뿐만 아니라 특히 그의 속성들에 있어서까지 그 자신을 계시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속성에는 크게 두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님만이 가지는 고유한 성격인 [절대적 속성]과 인간에게도 비슷하게 찾아 볼 수 있는 [보편적 속성]이 있다.

 

1) 절대적 속성

일반적인 분류순서에 의하면 절대적 속성은 영원 자존성, 영원불변성, 영원 무한성, 무소 부재성, 전지전능성의 다섯가지 이다. 이와같은 속성들은 하나님의 절대성을 기초로하여 형성된다.

 

1. 영원 자존성: 자기 자신외에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신다는 것(3:14,6:4,90:2,17:3,고전8:6), 즉 하나님은 모든 덕행과 행위에 있어서 독립적이므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에게 의존하도록 하신다(33:11,17:25,4:11)

 

2. 영원 불변성: 자신의 신적 존재, 완전성, 목적과 약속에 있어서 언제나 동일하다는 것(6:26,딤전1:17,13:8,1:17), 즉 인간들은 변화무상한 것이 특징이지만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시다. 1:17에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하였고, 23:19에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라고 하였다. 찬송가에도 내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 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디는 늘 보호하시네라고 하였다.

 

3. 영원 무한성: 하나님은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아니하시는 분이라는 것(11:7,37:23,102:12,렘애3:22), 즉 인간은 불완전 하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인간은 유한 하지만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만 하나님은 육체가 아니고 영이시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하여 어디에나 아니 계신곳이 없으신 분이다. 1:8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고 하였다(139:7-10참조).

 

4. 영원 유일성: 하나님께서는 영과육으로 형성된 것처럼 여러 부분의 성질로 이루어지신 분이 아니시므로 나누이지 않으시는 분임을 의미한다(4:35). 하나님과 그의 속성은 하나이고, 또 하나님은 생명과 빛이 되시고 사랑과 의로우시며, 진리라고 할 수 있다.

 

5. 전지전능성: 모든 만사를 다 알아 무엇이든지 완전무결하게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18:14,대상28:9,9:6,42:2,32:17,6:8,9:23,1:37).

 

하나님의 보편적 속성은 인간에게도 비슷하게 찾아볼 수 있는 속성이다. 인간에게 있는 속성은 유한하며, 하나님의 무한하고 완전한 속성에 비할 때 불완전한 속성임을 기억해야 한다.

 

2) 지적 속성

하나님의 지성에 속한 속성(21:27,40:5,10:4).

 

1. 영적 속성: 하나님은 영이라는 속성, 즉 하나님은 물질적 실체가 아니라 영적인 실체다. 하나님은 영이시라(4:24)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영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2. 지적 속성: 하나님의 지성(12:13,2:20,11:33,1:6), 즉 인간의 지식은 배워서 아는 것이요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스스로 가지는 것이요 그의 지성 안에 항상 존재하신다(139:1-4,11:33,고전2:10).

 

3. 판단 속성: 하나님의 결정(대상16:14,2:1-2). 즉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 이시요 그의 판단이 온 땅에 머물러 계신다. 2:1-2에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고 하였다.

 

3) 정적 속성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 속성(6:6,20:5,9:19,3:16).

 

1. 사랑의 속성: 하나님의 성품의 완전성(요일4:16).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8). 인간의 사랑은 상대적인 사랑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아카페]사랑 즉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죄인을 향한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 십자가의 사랑인 것이다(3:16,5:6).

 

2. 신의 속성: 신적 완전성(36:6,119:68,1:7,5:45,14:17). 즉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해를 비취게 하시고 의로운자와 불의한 자에게 비를 내리워 주신다(5:45).

 

3. 긍휼의 속성: 하나님의 선하심(103:8,145:9,3:12). 즉 죄의 결과로 짊어진 비참함과 비통속에 빠져있는 자들에게 향해질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3) 의지적 속성

하나님의 의지에 속한 속성(대하25:16,7:13,7:8).

 

1. 거룩한 속성: 하나님의 완전성(39:7,17:11,벧전1:16). 즉 하나님은 죄와는 완전히 구별된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거룩한 성품을 갖고 계신다(15:11,34:10,6:5,1:13,4:8).

2. 공의의 속성: 거룩한 존재성(11:5,30:18,1:18). 즉 하나님은 공의 하셔서 결코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시며,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벌을 내리시는 심판 주이시다(99:4).

3. 진실의 속성: 하나님의 신실성(32:4,15:8,고후1:12,딤후2:13).즉 하나님은 진실 하심으로 거짓이 없으시고 그의 언약을 반드시 이루신 분이시다(23:19,고전1:9,딤후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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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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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력의 중요성 및 각 절기의 기원과 의미 

 

I. 교회력의 중요성

 

기독교는 시간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기독교에서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시간을 벗어나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하늘에서 떨어진 어떤 특별한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구체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이 살아가는 그 시간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역사적인 시간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일반적인 구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났던 하나님의 특별한 행동에 의해 성취된 구원을 증거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체적인 시간에,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바로 그 시간 안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시간을 중시하는 기독교의 태도는 예배에도 반영된다. 예배의 구조는 하루, 한 주, 혹은 한 해 동안의 리듬을 갖는다. 기독교 예배는 시간으로부터의 회피가 아니라 시간을 자신의 기본 구조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현재는 과거에 일어났던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의 행위와 만남의 장이 된다. 우리가 예배에서 경험하는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시간적 사건들에 근거된 실재이다. 시간을 구성하는 방식은 구원의 근거가 되는 행위들을 상기하고 다시 경험할 수 있게 해 준다. 한마디로 기독교 예배는 시간 위에서 설립된다.

 

교회력은 이처럼 시간을 중시하는 기독교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즉 교회력은 특정한 시간 안에서 발생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일정한 주기에 따라 반복함으로써 그 구원사건을 회상1)할 뿐 아니라 다시금 새롭게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력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영위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교회력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II. 각 절기의 기원과 의미 

 

절기는 교회력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회상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 그러므로 각 절기들이 어떻게 만들어 졌으며, 또한 그것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면, 교회력의 중요성을 더욱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1. 주의 날

   

교회력은 주의 날(the Lord's day; 1:10)부터 시작된다.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이 6일간 창조하시고 7 일째 날 안식하셨다는 것에 근거하여 율법이 제시하는 안식일을 지킨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한 주의 첫 째 날을 예배를 위한 특별한 날로 제시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주의 첫날을 연보를 위한 날로 성별 시키라고 말했다 (고전 16:2). 바울은 또한 트로아에서 토요일 자정까지 설교한 뒤에 일요일 새벽까지 기독교인들과 대화하였다(20:7, 11). 계시록의 저자도 자신이 성령에 의해서 사로잡힌 날이 주의 날이라고 말한다(1:10). “주의 날1세기 말엽 한 주의 첫째 날로 이미 기독교인들에게 친숙해 져 있었다. “주의 날을 지키는 것은 초대교회가 자신의 신앙을 증거 하는 방식이었다. 복음서는 모두 빈 무덤이 발견된 날이 안식 후 첫날 아침이라고 증언한다(28:1-6, 16:2-6, 24:1-3, 20:1-8). 안식 후 첫날은 창조의 첫째 날로써 하나님이 어두움과 빛을 갈랐던 바로 바로 그 날이다.2) 복음서는 또한 부활한 그리스도가 한 주가 시작되는 첫째 날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고 증언한다(28:9이하, 24:13이하, 20:14이하).

 

AD 115년경 익냐시우스(Ignatius)는 매그네시아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식일을 금하고 주의 날을 기준으로 사는사람들에 관하여 언급한다. 2세기 초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디다케(the Didache) 역시 기독교인들에게 주의 날에 함께 모여서 떡을 떼며 성만찬을 행하라고 권고한다. 심지어 이교도들도 기독교인들은 특별한 날(주의 날) 동트기 전에 성만찬을 위해 모이는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또 주의 날의 다른 용어인 “Sunday"(태양의 날)2세기 중엽 등장했다. 순교자 저스틴은 155년 경 이교도 청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Sunday에 함께 모인다. 그 날은 하나님이 어두움을 물리치고 우주를 창조한 첫 날이며,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일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곧 이교도 용어이지만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로 해석하여 Sunday를 받아들였다. 바나바 서신은 Sunday8, 즉 그리스도가 죽은 자 들에게서 부활한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 날이라고 불렀다. 초대 교인들은 Sunday를 창조의 제 8일로 생각했다. 8일은 하나님이 안식하신 뒤 새로운 창조를 시작한 날이란 의미를 갖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의미가 여기에 들어 있다 (고후 5:17). Sunday는 휴식의 날이 아니라 예배의 날이었다.

 

Sunday는 다른 날들보다 상위의 개념을 지녔다. 그 날은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에서 Sunday는 주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회상하는 날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구세주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터툴리안은 기독교인들은 Sunday, “주께서 부활한 날에 무릎 꿇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Sunday는 부활의 신앙을 입증한다. 따라서 Sunday는 매주 지키는 부활절이라고 볼 수 있으며, 부활절은 한해의 가장 큰 Sunday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부활절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는 그가 유월절에 십자가형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을 에집트에서 구하여 안전하게 홍해를 건너게 하고 자유로운 백성으로 만들어 준 사실을 기억(historical anamnesis)하는 절기였기 때문이다. 초대 교인들은 자신들 역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으며, 따라서 더 이상 죄와 죽음의 노예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자유로운 백성이 되었다고 확신했다. 유월절에 잡는 어린양을 가리키면서, 바울은 다음과 말한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으로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고전 5:7-8). 이 말씀은 옛날 유대인의 구원 사건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노예와 구원의 도식은 같지만,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사역에 의해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대 교인들이 매 주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기념했지만, 연중 최고의 주의 날을 기념하는 것은 유월절3) 때가 적절했다. 한 주의 초점이 주의 날에 맞추어진 것처럼, 한해의 초점은 파스카(유월절)에 맞추어 졌다. 기독교인들은 적어도 2세기까지 이 파스카를 지켰다.

 

2-3세기 교회 역시 이 파스카를 준수했는데, 이때 세례와 안수 그리고 첫 성찬을 통해서 새롭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예배를 드렸다. 파스카가 홍해를 건넘으로써 노예로부터 해방된 것을 회상하는 절기였던 것처럼, 교회 역시 세례를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4-5). 처음 3세기 동안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은 파스카때 함께 회상되었다. 터툴리안은 유월절은 세례예식이 행해지는 날 보다 훨씬 더 엄숙하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우리의 세례의 근거가 되는 주의 수난이 이루어진 때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초대 교인들 사이에서는 기독교의 파스카가 유월절에 대한 유대력을 좇아야 하는가에 대한 긴 토론이 있었다.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은 유대력으로 닛산월 14일에 일어났는데, 유대력은 음력이기 때문에, 유월절은 보름날 시작되었다.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교회는 결국 유대의 유월절과 달리 교회의 파스카는 항상 Sunday에 지킬 것을 결의하였다. 이는 Sunday의 상징적 의미를 인식한 결정이었다. 나중에 서 유럽에서는 파스카가 보름 이후 혹은 춘분인 321일 이후의 Sunday로 고착되었고, 로만 캐톨릭과 개신교회는 부활절을 이 방식으로 설정하였다.4) 이것이 부활절이 매년 다른 날(322일부터 425일 사이)로 된 이유이다.5)

 

4세기 무렵, 예루살렘에서 지낸 예수의 마지막 사건들 전체를 회상했던 파스카는 몇 개로 구분되었다. 이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을 배려하기 위해 각각의 거룩한 장소들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분리해서 예배할 필요 때문이었다. 유게리아(Eugeria, 스페인여성으로 384년 순례자중 한 명)의 노트가 한 예로 제시될 수 있다. 그녀의 순례 노트에는 다음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수난/종려 주일, 혹은 수난 주간(Holy Week, Great Week으로 불려지기도 함)의 시작은 부활절의 시작이었다. 이 주일에 모든 사람들은 시편과 교창 성가집(antiphone)을 들고 감독 앞에 가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축복 있으라라는 말을 계속 반복했다.” 다음 3일 간은 작은 예배들이 있었는데, 수요일은 예외적으로 장로(평신도가 아닌 목회자를 가리킴)가 예수를 배반한 유다의 음모에 관해서 읽을 때, 사람들은 신음하며 한탄했다. 목요일은 성만찬을 행한 후 모두가 감독을 겟세마네로 이끌어 갔다. 금요일에는 골고다에서 예배가 이루어 졌는데, 거기서 모든 이들이 행진하면서 나무 십자가에 입 맞추었다.

 

그러나 4세기 말에 와서 이런 방식의 수난주간 행사는 중단되었다. 어거스틴은 예수가 어느 날 십자가에 달렸고 어느 날 묻혔는지 그리고 어느 날 부활했는지 복음서에 분명하게 나온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날들을 지켜야 한다라고 말했고, 이때부터 고대의 파스카는 다음과 같이 분리되어 지키게 되었다: 성 목요일(Holy Thursday), 성 금요일(Good Friday), 성 토요일(Holy Saturday), 그리고 부활주일(Easter eve and Day), 또한 수난주간에 앞선 수난/종려 주일과 수난주간의 작은 날들.

 

  

3. 성령강림절(오순절)

 

 

파스카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절기는 오순절이다. 오순절은 레위기 23:15-16에 나오는 유대교의 추수 절기였다: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일곱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 일을 계수 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러나 1세기에는 때때로 오순절이 시내 산에서 토라를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되기도 했다. 기독교인들에게 오순절은 성령이 강림하여 교회가 탄생된 기념일로 여겨졌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성령이 유대절기인 오순절날 강림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토라를 받은 것과 성령 받은 것이 대비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의 계약을 시내 산에서 완성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오순절날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계약을 맺었다고 그들은 믿었다. 적어도 2세기까지는 오순절이 세례를 위해 적절한 날로 여겨졌다. 미쳐 준비를 못해 부활절날 세례 받지 못한 자들은 오순절날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교회의 탄생 기념일인 오순절날 새 기독교인들의 영적인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4세기까지는 오순절이 성령의 강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천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했다. 터툴리안은 그리스도가 오순절날 승천하셨다고 말했다. 그러나 4세기 말에 이르러 성령강림과 그리스도의 승천은 분리되어 기념되었다. “사도헌장”(Apostolic Constitution)에는 그리스도의 승천 기념일이 부활절 후 40일째 되는 날이 적절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을 40일간 가르쳤다는 사도행전 1:3에 근거한 것이다.

 

파스카(수난절/부활절)와 오순절(성령강림절)은 교회력에서 가장 오래되고 최고로 중요한 절기의 시작이며 마지막이다. 오순절은 부활주일부터 50번째 날을 지칭할 뿐 아니라 부활주일부터 시작하는 50일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유대력에서는 오순절, 첫 열매의 날”(the Day of First Fruits)을 유월절부터 시작된 한 주기의 결론으로 여겼다. 이 주기 동안 출애굽 자체와 그것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들이 기념되었다. 오순절은 추수의 성별에서 시작되는 추수시즌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오순절이란 용어는 50일 주기의 마지막날과 50일 주기 전체를 지칭했다.

 

기독교인들 역시 오순절을 오순절의 날 하루 뿐 아니라 부활절에서 시작된 50일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 즉 오순절은 예수의 부활에서 시작하여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교회가 탄생된 때까지의 50일을 가리켰다. 어거스틴은 주의 부활후 이 날들은 평화와 기쁨의 기간이다. 그러므로 금식해서는 안되고 부활을 상징하여 서서 기도해야한다. 이는 매 주일 지켜져야 하고, 알렐루야 송을 불러야 한다. 알렐루야 송은 장차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위치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오순절은 부활절기의 일환으로 지켜졌고, 성령강림과 교회의 탄생은 부활절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니케아 공의회(AD 325)Lent(사순절)“40로 정했다. “40은 금식하고 사역을 준비했던 예수의 광야 40일과 비교될 수 있다. 어거스틴의 시대에 사순절은 세례를 위한 준비 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주의 수난에 동참할 준비를 하는 기간이었다. 사순절은 회개의 기간이었고, 영적인 훈련의 수단인 금식은 사순절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에도 매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했다. 주의 날은 사순절 기간보다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순절 기간 중 6번의 주일은 40일에 포함되지 않았다. 사순절은 따라서 재의 수요일(부활주일 전 7번째 수요일)에서 시작되어 부활절 바로 전날까지 총 46일이 되었다.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사순절, 부활절, 그리고 오순절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일러서 부활절 기간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교회력의 중심이다. 이 기간은 교인들이 재로부터 정화에 이르는 순례의 행진을 하는 동안 도전 받고 갱신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4. 성탄절과 주현절

   

 

또 하나의 중요한 절기는 성탄절이다. 성탄절은 부활절보다 오래되지 않았고, 또한 구약의 절기에서 유래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성탄절은 부활절과 함께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주현절(epiphany, 16)은 오늘날 성탄절만큼 중요하게 취급되지는 않지만, 성탄절보다 오래되었고, 초대 교회력에서는 주현절이 부활절과 오순절 다음으로 중요한 절기였다. 주현절의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2세기 후반 에집트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piphany"현현”(manifestation)을 의미하는데,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현현한 것을 지칭한다. 주현절은 예수의 탄생, 그의 세례, 그리고 갈릴리의 가나에서 행한 첫 기적 등을 기념하는데, 이 모든 사건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초대 교회는 종종 이날을 “The Theophany"(하나님의 현현)라고 명명했는데, 이 명칭은 지금도 동방 정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부활절과 마찬가지로, 주현절은 4세기에 몇 개로 나뉘어 졌다. AD 354년부터 그리스도가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날이 1225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날짜가 인정된 것은 아프리카에서는 312년 보다 앞서고, 로마에서는 336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점진적으로 크리스마스가 주현절의 일부로 지켜지게 되었다. 386년 크리소스톰은 안디옥에서 성탄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날은 최근 빠른 시간 내에 발전되어 절기로 지켜지게 되었다.” 뒤에 오는 주현절에 관하여 그는 왜 이날을 주현절이라고 부르는가? 예수가 모두에게 알려진 것은 탄생된 때가 아니라 세례 받은 때이기 때문이다. 세례 받기 전까지 그는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16일 지켜지는 주현절이 동방전통에서는 예수의 세례를 기념하는 날로, 서 유럽에서는 동방박사들이 예수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날로 각각 지켜지고 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이 현현 하셨다는 사실을 이방에 알렸기 때문이다. 주현절과 성탄절을 분리해서 기념하게 된 이유는 예수의 생애 동안 발생한 사건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기념하려는 초대교인들의 열망 때문이었다. 성경에는 예수가 언제 태어났고, 어느 날 세례 받았는지, 또 동방박사들이 어느 날 방문했는지 등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16일과 1225일은 고대 이집트와 줄리안(로마) 달력에 따라 동지를 기념하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됨에 따라, 성탄절은 동지를 표시했던 이교도의 정복되지 않는 태양의 축제를 대신하게 되었다. 어두움을 정복하는 빛이라는 주제는 항상 주현절과 성탄절의 주된 개념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날들은 예수가 죽은 날과 그가 잉태된 날을 일치시키는 전통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부활절 준비를 위해서 사순절이 필요 했던 것처럼, 성탄절과 주현절 역시 준비기간을 필요로 했다. 스페인의 한 공의회는 1217일부터 주현절(16)까지 교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치 않았는데, 이는 대강절(Advent)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다. 5세기에 가울(Gaul) 에서는 주현절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40일을 두었는데, 이것은 Lent 기간이 40일이라는 점에 착안한 것이었고, 그 시작은 지금의 대강절 즈음이었다. 결국 로마는 1225일 보다 4주 앞선 주일부터 대강절로 정했다.

 

대부분의 중요한 기독교 절기들은 4세기에 마무리되었다. 존 크리소스톰은 386년 행한 설교에서 예배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리스도가 육체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세례를 받지 않았을 것이고 (주현절), 그는 십자가에서 죽고 또한 부활하지도 않았을 것이고(파스카), 성령을 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오순절).” 4세기에 세 개의 중요한 초대 절기들-주현절, 부활절, 오순절-은 다시 다음과 같이 나뉘어 졌다: 성탄절, 성금요일, 승천일, 그리고 대강절, 사순절 같은 절기들. 4세기 이후 생긴 중요한 절기 가운데 하나는 삼위일체 주일(Trinity Sunday)이다. 삼위일체 주일은 오순절 후의 주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약 1000년 경 도입되었다. 여타의 절기들과 달리, 이 절기는 역사적 사건과는 무관한 신학적인 교리를 나타낸다

 

III. 성서일과 (Lectionary)

 

  

성서일과는 교회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lectionary” 란 말은 넓은 의미에서 교회력에 있는 특별한 절기의 예배를 위해 선택된 본문들의 체계를 지칭한다. 이러한 성서일과에는 lectio continualectio selecta의 두 원리가 있다. 전자는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 까지 읽든지, 성서의 어느 특정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가는 방법을 가리키고, 후자는 절기에 따라 선택해서 읽는 것을 말한다. 유대교의 회당에서는 각 절기에 해당하는 성서의 본문들을 규정해 놓고 일상적인 안식일에 lectio continua의 원리에 따라 선택된 성서 본문을 읽는다. 이 원리는 개인적으로 성서를 꾸준히 읽을 때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성경의 각 구절들의 맥을 찾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더욱이 교회력에 따라 성서의 본문을 찾을 때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에 반하여 lectio selecta는 성서의 본문을 선택하여 읽는 방법이므로 교회력과 관련해 볼 때 유용한 원리라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의 성서일과에 대한 기원은 분명치 않지만, 유대교의 유월절에 읽었던 출애굽기 12장은 로마에서 200년 경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325년 이전에 이미 기독교의 주요 절기들을 위해 특별히 지정된 성서 본문이 있었고, 일반적인 주일에는 lectio continua의 원리에 의해 성서의 본문을 읽었다. 서 유럽에서는 다양한 성서일과들이 발달되었다. 9세기 초 성서일과들이 표준화되어 최근까지도 로만 캐톨릭, 성공회, 루터 교회 등에서 사용되었다.

 

   

성서일과는 3년 주기로 되어 있으며 그 본문의 예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강절

 

1) 첫주: 122 (1, 4, 7), 80:1-7 (2, 5, 8), 25:1-10 (3, 6, 9)

 

둘째주: 72:1-8 (1, 4, 7), 85:8-13(2, 5, 8), 126 (3, 6, 9)

 

셋째주: 146:5-6 (1, 4, 7), 1:46b-55 (2, 5, 8), 12:2-6 (3, 6, 9)

 

넷째주: 24 (1, 4, 7), 시편 89:1-4, 19-24 (2, 5, 8), 80:1-7 (3, 6, 9)

 

2) 첫주: 24:36-44 (1, 4, 7), 13:32-37 (2, 5, 8), 21:25-36 (3, 6, 9)

 

둘째주: 3:1-12 (1, 4, 7), 1:1-8 (2, 5, 8), 3:1-6 (3, 6, 9)

 

셋째주: 11:2-22 (1, 4, 7), 1:6-8, 19-28 (2, 5, 8), 3:7-18 (3, 6, 9)

 

넷째주: 1:18-25 (1, 4, 7), 1:26-38 (2, 5, 8), 1:39-55 (3, 6, 9)

 

2. 성탄절

 

1) 9:2-7 (매년), 시편 96 (매년), 디도서 2:11-14 (매년), 2:1-10 (매년)

 

2) 62:6-7 (매년), 시편 97 (매년), 디도서 3:4-7 (매년), 2:8-20 (매년)

 

3) 52:7-10 (매년), 시편 98 (매년), 1:1-12 (매년), 1:1-14 (매년)

 

3. 주현절

 

구약: 42:1-9 (1, 4, 7), 1:1-5 (2, 5, 8), 61:1-4(3, 6, 9)

 

복음서: 3:13-17 (1, 4, 7), 1:4-11 (2, 5, 8), 3:15-17 (3, 6, 9)

 

4. 재의 수요일

 

시편 51:1-12, 고후 5:20b-6:2, 6:1-6, 16-21 (매년)

 

5. 사순절

 

1) 첫 번 주일: 2:4b-9, 15-17, 3:1-7; 5:12-19; 4:1-11 (1, 4, 7)

 

9:8-17, 25:1-10, 벧전 3:18-22, 1:9-15 (2, 5, 8)

 

26:1-11, 91:9-16, 10:8b-13, 4:1-13 (3, 6, 9)

 

2) 두 번째 주일: 12:1-4b(4b-8), 33:18-22, 4:1-5(6-12), 13-17, 3:1-17 혹은 마 17:1-9 (1, 4, 7)

 

17:1-10, 15-19, 105:1-11, 4:16-25, 8:31-38 혹은 막 9:1-9 (2, 5, 8)

 

15:1-12, 17-18, 127, 빌립보서 3:17-4:1, 13-31-35 혹은 9:28-36 (3, 6, 9)

 

3) 세 번째 주일: 17:3-7, 95, 5:1-11, 4:5-26[27-42] (1, 4, 7)

 

20:1-17, 19:7-14, 고전 1:22-25, 2:13-22 (2, 5, 8) 3:1-15, 103:1-13, 고전 10:1-13, 13:1-9 (3, 6, 9)

 

4) 네 번째 주일: 삼상 16:1-13, 23, 5:8-14, 9:1-41 (1, 4, 7)

 

역대하 36:14-23, 137:1-6, 2:4-10, 3:14-21 (2, 5, 8)

 

5:9-12, 34:1-8, 역대하 5:16-21, 15:1-3, 11-32 (3, 6, 9)

 

6. 종려주일

 

50:4-9b, 31:9-16, 빌립보 2:5-11 (매년)

 

수난 이야기: 26:14-27:66 (1, 4, 7); 14:1-15:47 (2, 5, 8); 22:14-23:56 (3, 6, 9)

 

7. 성금요일

 

52:13-53:12 (매년), 4:14-16, 5:7-9 (매년)

 

8. 부활절

 

28:1-10 (매년), 16:1-8 (매년), 24:1-12 (매년)

 

9. 성령강림절

 

2:1-21 (매년), 고전 12:3b-13 (1, 4, 7), 8:22-27 (2, 5, 8), 8:14-17 (3, 6, 9)

 

20:19-23 혹은 7:37-39 (1, 4, 7), 15:26-27, 16:4b-15(2, 5, 8),

 

14:8-17, 25-27 (3, 6, 9)

 

10. 삼위일체 주일

 

4:32-40 (1, 4, 7), 6:1-8 (2, 5, 8), 8:22-31 (3, 6, 9)

 

33:1-12 (1, 4, 7), 29 (2, 5, 8), 8 (3, 6, 9)

 

고후 13:5-14 (1, 4, 7), 8:12-17 (2, 5 8), 5:1-5 (3, 6 9)

 

28:16-20 (1, 4, 7), 3:1-17 (2, 5, 8), 16:12-15 (3, 6, 9)

   

이상과 같이 살펴본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는 무엇보다도 설교와 예배를 준비하고 주관해야하는 목회자에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교회력에 따르는 성서일과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일정한 기준 없이 설교자의 주관에 따라 본문이 선택되므로, 설교자 자신의 편견과 선입관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 이런 경우 일관된 말씀의 진수를 맛보고 싶어하는 교인들의 불만을 살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예배의 경우에도 찬송가, 교독문 등을 임의로 선택하지 않고 교회력에 맞추어서 선택함으로써, 교인들이 미리 준비하여 생동감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성서일과에 따라서 설교하고 예배할 경우, 정장복 교수는 그 장점을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첫째, 설교자의 개인적인 의도보다는 말씀 중심의 사역이 가능해 진다. 설교자 개인의 편견과 선입관을 배제하고, 일관된 말씀의 사역을 할 수 있다. 따라서 교인들이 말씀의 맥을 짚을 수 있게 된다. 둘째, 교회력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 중심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그분의 구속의 은총을 실감하는 효과를 경험할 수 있다. 신앙생활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바, 교회력에 따라 설교할 경우, 그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갖는 깊은 의미를 새기게 되어, 자신들의 삶 속에서 재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셋째, 모든 교회가 성서일과를 사용할 경우, 동일한 말씀을 들을 수 있음으로써 교회 일치에 많은 도움이 된다. “모든 교회는 하나이다라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모토인데, 어디서나 같은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교인들 스스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넷째, 설교자들이 일정한 주기로 말씀을 연구할 수 있어서 말씀에 질서가 형성될 수 있다. 사실 설교자들의 최대의 고민은 이번 주에는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하는 가라는 것이다.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서 성서의 여기저기를 살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교회력에 따라 설교하게 되면, 이런 고민이 해소될 수 있다. 다섯째, 설교 뿐 아니라 목회의 전반적인 계획 수립에 도움이 된다. 교회력이란 일정한 기준이 주어지기 때문에, 임의로 목회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섯째, 교인들이 설교의 방향을 미리 알 수 있게 되어 준비할 수 있다.

 

교회력에 따라 목회계획을 세우고 설교하게 되면, 현장성이 약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할 수도 있다. 이는 목회 현장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따라서 말씀을 준비하기가 어렵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탄절, 수난절, 부활절, 오순절 등 중요한 절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목회자가 현장에 맞게 설교의 주제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력은 결코 교회가 서 있는 자리, 즉 문화, 사회, 환경을 제한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력은 목회자가 목회 환경에 맞게 자유로이 목회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이점에서 성서일과와 목회현장의 갈등은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력에 따라 예배하고 목회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목회와 설교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최승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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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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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교육방법

1. 선생의 예수

니고데모가 조용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이신줄 아나이다](3:2).그의말은 매우 정확한 판단이다. 예수의 교훈 비록 전세계 많은 사람이 이 교훈과 관계없이 지내고,그의 추정자들 까지도 그 교훈에 무관심하고 , 또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지만 그 교훈은 실로 세상에 어떤 선생이라도 예수님만큼 감화를 끼친 스승은 없다. 그분은 홀로 모든 선생들 중에 가장 위대하신 분이다. 복음서를 읽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의 생애중에 많은 시간과 정력이 교훈하는 일에 바쳐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교육 방법을 연구하는 것은 의의가 있는 일이다.

 

그는 어떤 교안을 작성했는가? 그는 자기에게 교육 받는 사람들을 어떻게 접촉했는가? 어떤 방법으로 그가 받고 있는 진리를 제출했는가? 그리고 결과는 어떠했는가! 이런 질문들은 예수의 교육 방법 연구에 있어서 필요할 뿐 아니라 현대 교육 방법 혁신에 있어서도 의미가 있는 일이라 하겠다. 또는 이런 내용과는 달리 그는 그리스도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의 교육 방법을 논함에 있어서 다음 두가지 조건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첫째, 여기서 말하는 [방법]이란 말은 분명한 설명이나 형식화 한 어떤 체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특징 있는 교육 방법은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활용하시는 그것이다. 이것이 모든 규칙을 능가하는 방법이다. 둘째, 예수님은 한분의 선생이었다. 나면서부터 선생이었으며, 가장 위대한 선생이었으나 그분은 선생 이상의 존재임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신약성경에 전해오는 교훈만이 그분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이상의 기대할 것이 그에게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은 특별한 의의가 없는 일이요 따라서 세상은 이미 파멸의 심연에 빠져 버렸을 것이다. 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은 그 교훈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교훈은 예수님의 교훈이기에 앞서 예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예수님은 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 오신 이라기 보다는 전할 복음이 있다는 것을 그 자신으로서 보여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한 테일 박사의 뜻깊은 주장이 결코 무리가 아니다.

 

이 두가지 점을 인식하고 예수님의 교육 방법을 연구하자.여기에서 두 가지 점을 밝혀야 한다. 즉 예수의 교육 방법의 특수한 점이 무엇이었던가? 또 그 교육의 일반적인 원칙은 무엇이었던가 하는 점이다.

 

2. 예수의 교육 방법의 특성

 

그는 무엇보다 구전교육 방법을 사용했다.글로 써서 가르치지 않고 이야기로 가르쳤다. 그는 단 한번 글씨로 쓰신 일(8:18)이외에는 모든 경우에 친히 말씀으로 가르치셨다. 그가 가르치신 아름다운 금언, 명구,신앙과 도덕 등 결정적으로 규정 지은 모든 말씀 곧 [하나님의 신학] 은 모두 갈릴리 농부와 어부들의 기억을 정리하여 문자로 기록된 말들이다.

 

그 구전식 교육에 위험부담은 없었는가? 시간이 흘러가면 그렇게 말로만 전해들은 교육이 망각되어질 위험성은 없었는가? 절대로 그렇지 안다.씨를 뿌린 농부는 그 곡식이 결실할 때까지 항상 돌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땅과 또 다른 결실을 한다. 예수님은 한번 사람의 마음 속에 뿌린 말씀은 뿌린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항상 돌보아 주셨다. 그 말씀은 해가 거듭할수록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박혀 영원히 자라는 생명이 되었다. 그의 말씀은 종이에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 생명을 가진 씨앗을 마음에 뿌리쳤다. 이 씨앗은 한번 마음 속에 뿌리를 박으면 세기에서 세기를 연결하여 죽지 않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노르웨이의 문호 입센은 [황제와 갈릴리 사람]이란 작품에서 제 4세기 로마황제 줄리안의 독백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가 지금 어디 있느냐? 골고다의 사건이 일어난 후 그는 어디서나 일하고 있느냐? 그는 지금 어디 있느냐? 그가 고통을 받고 죽고,또 세계에서 세게로 계속하여 정복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말로써 예수의 기사를 썼다.

 

둘째로 예수의 교육 방법의 특성은 그의 교훈 대부분은 충분한 원인을 가진 사건과 현장에서 추출되어 나왔다는 점이다.다시 말하면 어떤 특수한 사건에도 미리부터 생각하고 목적한 사실을 말하고, 그 특수한 진지를 설명했다. 회당에서 반신불수를 만난 일(12:10).길에서 만난 귀족청년과의 대화(21:16)제자들의 돌연한 논쟁 (9:46),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이 옮으냐,그르냐 하는 바리새인들의 질문(22:17), 이 모든 사건들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기가 목적하는 교훈을 주셨다.

 

이런 교훈은 그 적응성이 순전히 지방적이며 일시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오늘날에도 꼭 그렇게 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사건의 교훈을 통하여 가르쳐주신 진리는 변함이 없다. 예수의 교훈 대부분은 분명히 어떤 특별한 사건에 관련하여 주신 것이지만 지금도 그 교훈은 진리이다. 교리나 철학은 가르치는 방법으로 체계를 세운 어떤 것을 말씀하셨다면 벌써 오래전에 없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선명하게 빛나는 말씀은 예수님을 만나고 또 그와 친히 사귄 남녀들의 가장 절박한 현실에 응하여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토록 확실하게 남아 있다.

 

사상의 체계는 시대를 따라 변한다. 그러나 곤란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변하지 않는다. 인간이 눈은 유혹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눈물은 여전히 눈에서 흘러 나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교훈은 오늘날에도 세계 모든 사람들의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일정한 요구에 응하고 있다.

 

세째로 그의 교육 방법의 특색은 언제나 그가 가르치신 교훈은 듣는 청중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는 데 있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말씀을 듣는 청중의 입장이 되어 피교육자의 처지에서 교훈을 시작하셨다. 모세의 율법이 과연 그들에게 활동적인 종교였는가?에 의문을 가지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으로서 자기의 말씀을 전개했고, 거기서 또한 하나님의 더 좋은 율법의 높은 말씀을 전하셨다. 청중은 또한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자신이 나라 없는 백성의 처지에서 영적 국가인 하늘 나라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언제나 그는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의 처지에서 이야기를 시작했고 또 거기서부터 발전해 나갔다.

 

그러므로 자연히 그가 쓰시는 말씀은 단순했다. 직접적이고 단순하고 박력있는 그의 용어는 - 분명히 그가 쓰시는 용어는 그 당시 직업 종교가들의 것과는 달랐다 - 듣는이에게 쉽게 이해되었고 또 사람들이 잊어버리거나 등한시 할 수 없으리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당겼다. 그리고 그는 또 성급하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을 결코 조급하게 만들지 않았다. 한걸음씩,한걸음씩 그들을 인도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16:12). 그는 거룩한 보류의 마음과 침묵으로서, 그는 그의 계시를 미리 다 말씀하시지는 않았다(예를 들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등). 그리하여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까지 보류했다.

 

이런 실제적인 문제들은 오늘날에도 강조되어야 한다.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믿으라고 요구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 불완전한 신조 때문에 따르는 제자들로 하여금 돌아서게 하지는 않았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면에서 결점을 지니고 있다. 그는 그 자신을 자기 민족들의 입장에 서서 가르치므로 주민들은 할 수 있는대로 예수에게로 모이고 있었다. 초신자들도 예수를 환영했다. 처음 만날 때는 중요시 하여 누구에게든지 제자들을 처음 가르치실 때처럼 친구로 삼고 한 걸음 두 걸음 그 자신의 깊은 신비에 까지 인도해 가며 제자로서의 안전한 영광을 누리게 했다.

 

그의 방법의 특색 하나는 그의 교훈에는 비유적인 요소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의 설명, 그의 경우, 역설이나 어떤 무엇보다도 비유를 가장 순직한 예술적 수완보다 은총의 산 계시로 그린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사로서 생명, 운명,하나님등, 이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과 설명의 창문을 열어 자신이 실제로 말하고 있는 그 진리를 청중으로 하여금 확실히 보게했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그의 이야기가 듣는 사람의 심중에 한 그림으로 화하도록 하는 경우가 여러번 있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상상력이나 생각하는 두뇌가 별로 없는 사람이라도 그 말씀에서 나타나는 신비의 광경을 보게하여 [내가 본다] [나도 본다]는 부르짖음을 가지도록 했다.예수 앞에 나오기까지 인생 문제에 대하여 눈이 어둡던 사람이나 잠든 사람처럼 몽롱하여 인생의 영광스러운 문제에 한번도 접하지 못한 사람들도 예수에게 나와서는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영안이 밝아져서 생명의 원리를 알고 하나님을 알아 그에게 감사를 드렸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사람들에게 환상을 주시는 분이었다.

 

그리스도의 교육방법의 원칙

 

이제 우리는 그의 특수한 교육방법으로부터 시선을 옮겨 그 일반적인 원칙을 연구해 보자. 첫째,그의 교육은 무엇보다도 권위가 있었다.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 기록한대로 [무리가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라](7:28).예수님의교훈에는 [아마]라든지 [그럴 것이다], 혹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등의 불확실한 상상적인 이야기는 없다. 언제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와 같이 자신의 말슴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명확히 했다.[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는 말은 서기관들은 항상 [모세는 이렇게 말했다]라든지 [랍비 000는 이렇게 말했고, 율법과 예언자는 이런 말을 했다]고 인용했다.

 

이렇듯 서기관들은 자기들의 이름과 의견을 자신 있게 밝히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종교는 낡은 책에 의존하는 종교였다. 반드시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서 말하게 되는 종교였다. 서민층까지도 그 종교가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온 대변이라는 것을 알았고, 진실하지 못한 것으로 느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는 서기관들을 매우 멸시하고 있었다. 에머슨이 세네카(로마 철학자,B.C.54-A.D.39?)를 평가한 말이 서기관들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그는 자기의 사상을 자기 스스로 말할 수만 있었다면 대단히 훌륭한 사상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왜냐하면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경험하지 않은 사실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릴리 나사렛 사람 예수님에게서는 새로운 말씀이 흘러나왔다. [옛 사람도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이렇게 그는 서기관들의 사상과 그 처지를 일축해 버리고 전설을 기초로 삼고 있는 그들의 사상을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 옮겨 놓았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고, 또 놀라고, 경이롭게 바라보았지만,확신을 가지고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권위 있는 그 태도에 결국 군중은 감격하고야 말았다. 그가 말하고 있는 사실은 친히 체험 가운데서 나온 말씀이며 정말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는 분을 만났다고 믿어주고, 그분이야 말로 다른 사람을 교훈하실 수 있는 분이며 하나님에게서 직접 오신 분인 것을 믿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예수님의 교육이 지방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우주적이고 영원성을 지닌 것임을 재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점이 정치나 사회문제 내지는 도덕과 종교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옛 전통의 구습을 깨뜨리고 권위 의식에 대한 새로운 도전에 부딪친 시대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가 취하신 원칙을 외면하고서는 어떤 항해도나 나침판도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정신상태와 양심에 주신 그의 교훈은 지금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다음의 사실에 주의하여야 한다. 예수의 교훈이 비록 권위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그 교훈이 어떤 지나친 의미의 교훈이거나 교리적이거나, 또는 강제로 동의를 요구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한 가지 뚜렷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그가 가르쳐야만 할 사람에게 대하여 놀랄만한 인내를 지니고 계셨다는 점이다. 강제성을 띠고 이끌기를 거절하시고,그들에게 자기의 의지대로 강요하시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을 매우 존종하셨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베풀 수 있는 기적의 힘을 아무렇게나 쓰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에 현혹을 주고 판단을 그르치게 하지 않으시려는 의도에서였다. 길지 않은 기간 훈련을 시키시고는 제자들을 지방으로 파송하신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은 실로 위태로운 일이었다. 왜 그렇게 위험 부담이 있는 모험을 시도 하셨는가? 그 이유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이 얼마나 실제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가 보기 위해서였다.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의 기본되는 말씀은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너희를 친구라 하리라](15;15)였다. 만일 제자들이 이 말씀을 기억할 수만 있었다면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전할 때 강요의 방법을 써서 무오의 교리를 짊어지게 하여 사상적으로 질식시키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종이 아니고 친구라] 그는 결코 [이것이 진리이니 이것을 받으라. 그렇지 아니하면 멸망하리라]고 말씀하시지 않고,[나는 진리이니 나와 함께 있으면 너는 진리를 발견하리라]고 권유로 하셨다.[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이 교훈을 알리라](7:17).그의 교훈은 참으로 권위 있었으며, 결코 강압적이거나 독단적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개인의 인격을 무한히 존경했다는 점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가 자기의 결정을 자기가 하도록 하는 것이 예수의 교육 원칙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이 점은 모든 교육가가 본 받아야 한다. 교육자가 이 점에 실패하면 자기의 모든 일을 실패한다. 예수님은 그의 교훈으로서 세계가 일찌기 경험한 사실을 상기하게 하고 또 의문을 가지도록 크게 자극을 시키기도 했다. 예수님은 어떤 문제에 해답을 주셨다기 보다는 세계에 문제를 제시하고 세계로 하여금 거기에 관심을 가지도록 자극 하셨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언제나 직접적인 질문에 대하여 항상 직접적인 대답을 주시지 아니하셨다.

 

한 교법사가[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고 물었을 때에는 [어떤 사람이 여리고고 내려가는데...]로 시작하여 사마리아 사람의 착한 행실을 전해주셨다(10:29이하).베드로가 요한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21:21) 라는 물음에는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또 어느때는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는 물음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13:23)고 하셨다. 그가 말씀하신 비유는 모두 이런 방법이었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 자신의 영적 통찰력과 영적 실제에 대한 지각력을 사용하도록 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다(11:)

 

예수님 교훈의 목적은 모든 인생 문제에 대하여 미리 준비해 두었던 해답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인생 문제에 대하여 미리부터 그 답을 제공할 수 있었다고 하면 안식일 문제, 종교와 정치, 주인과 고용인, 그밖의 여러 가지 문제의 해답이 대단히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단순한 입법자가 되려고 오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어려운 문제에 대하여 칼로 베는듯한 규칙적이며 무미건조한 해답을 주시려고 육체를 입고 인간 사회에 오시지 않았다. 예수님이 해답을 주신 목적은 그가 살으신 일과 또 죽으신 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명랑하고도 힘있게 모든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새로운 상념적인 해결 방법을 주시는데 있다.바울은 [의문은 죽이고 영을 살린다](고후 3:6)고 말하낟. 이것이 곧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적 자유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방법은 자신이 교훈하신대로 실천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에수님으로부터 애매하거나 추상적이거나 불확실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전모가 그들의 눈에 구체적으로 실현되었고,사는 사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주신 교훈을 통하여 하나님에의 신앙이었다. 그가 생활에서 그렇게 가르치셨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교훈인가?그의 용서는 그의 마음 전체를 모두 주셔서 용서하시는 것이었다. 단순히 어떤 잘못에만 관계하여 그 부분만을 해결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기도에 대하여 교훈만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친히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다. 그는 사랑과 봉사에 대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는 교육만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친히 허리를 동이시고 수건을 들고 제자들의 발에 묻은 먼지를 씻어 주셨다. 형제라는 제목으로 웅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실망한자의 집을 찾아가서 형제요 친구라고 위로하셨다.

 

그리스도는 진실로 최고의 선생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가르치신 일에 대하여는 최대의 성의를 기울여 실천하셨고, 형식이 아니라 진실로 성심을 다하여 자연스럽게 그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이 점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자신을 종교에 바치지 않은 사람의 종교운동은 사람들에게 감화력을 전하지 못하며 예수의 말씀대로 산증거가 없으면 사람을 설복시킬 아무런 힘이 없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에서, 즉 그가 전하고 가르친대로 살아갈때, 그 종교는 가는 곳마다 감화를 끼친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 더 말할 수 있는 예수의 교육방법은 자기에게 배우는 사람들과 친밀한 교제를 가지고 그들을 사랑한다는 점이다.[사랑의 정신은 다른 사람에게 불을 붙인다]고 어거스틴이 외쳤다. 이 점에서 예수님은 영원히 거룩한 선생으로써의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의 사랑의 정신 때문에 그의 모든 제자들은 항상 그 심령에 뜨거운 불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가 사랑했다는 사실은 그들 사이를 단순히 법적인 것과 같이 딱딱하게 한 것이 아니고 기쁨과, 영광으로, 그리고 로맨스로 실수하는 학생들은 그 제자들이었다. 그래서 그 선생으로 하여금 실망케 하고,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큰 교훈에 항상 장애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이런 실수를 할찌라도 예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또 그들이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 서로가 얽혀져서 신앙은 항상 사랑으로 자라가고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는 그 정신은 그들 속에 있는 모든 장애물을 넉넉히 제해 주었다. 갈보리와 오순절이 다 지난 후에야 비로소 저들이 배운 교훈이 일층 구속의 중심 사명이 가장 완전하게,그리고 확실하게 그들에게 알려졌고, 그 교훈 때문에 저들은 생의 의의를 발견했고, 그 구속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기 위하여 그들 전부를 바쳐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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