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한국 이슬람화를 위한 선교전략 / 이슬람교 중앙회


2020년 한국 이슬람화를 위한 선교전략

 

한국 이슬람화 선교전략은 50주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들의 선교활동은 재단법인 한국 이슬람교(Korea Islamic foundation KIF)를 중심으로 이슬람교 중앙회(Korea Muslim Federation; KMF)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다양한 전략들이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소재한 중앙성원 본부와 산하 부산, 전주, 광주, 안양, 파주, 부평, 제주 등 전국 7개 도시의 지회들과 60여 개의 임시성원을 통해 추진되고 있다.


한국 이슬람화를 위한 단계별 한국진출 전략은 다양한 부문에서 전개되고 있다. 첫째는 이주 근로자로 위장하는 선교전략, 둘째는 유학생으로 위장하는 학원 선교전략, 셋째는 주요 전략 도시에 이슬람사원 건축을 통한 지성원 확산전략, 넷째는 이슬람문화센터의 설립과 이슬람문화 행사를 통한 간접 포교전략, 다섯째는 이슬람 대학과 유치원, 초, 중, 고등학교 설립 등 교육기관을 통한 선교전략, 여섯째는 한국기업 및 금융기관에 대한 투자 등의 경제협력을 통한 포교전략 등을 들 수가 있다.

 

1) 이주근로자들을 통한 이슬람화 선교전략


우리나라에 일자리를 찾아 입국한 무슬림 이주근로자들의 숫자는 10만이 넘는다. 이슬람 전문가들은 이 중에 1만3,000-만 명 정도가 이슬람의 포교를 위해 입국한 잘 훈련된 이슬람 선교사라고 보고 있다. 2006년에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해 입국한 인원이 300명이 넘는다는 인도네시아 출신 목회자의 증언도 있었다. 우려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근로현장이 안전지대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의 1차 포교대상자는 같은 처지에 있는 동료 외국인 근로자들이다. 친구가 되어 주고 도움을 주면서 그들을 이슬람으로 인도하고 있다. 일단 세력이 구축되면 친구로 삼은 한국인을 다음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확대한다.


이슬람권에서 온 이주근로자들이 합법적으로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한국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다. 그들이 한국체류 동안 교회에 출석하여 그들의 어려움을 교회에 상담하면 최대한 도움을 얻을 수 있음을 이용하고 있다.


교회가 무슬림들을 교회로 받아드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들을 섬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이들을 분별해 볼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무슬림을 사랑하는 소그룹의 LMF(Love Muslims Fellowship)모임을 두어 이들을 말씀으로 훈련하고 사랑으로 섬긴다. 크리스천 기업주나 직장인들은 근무환경을 개선하고 직장 신우회를 결성, 이들을 섬기도록 한다.

특히 무슬림 개종자와의 결혼 상담 시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거짓 개종자에게 속아 결혼하고, 고통을 당하거나 결국 자녀들 때문에 무슬림이 되는 불행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을 통해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해야 한다.

 

2) 유학생을 통한 학원 이슬람화 전략


서울대에는 현재 수백 명이 넘는 이슬람권에서 온 유학생들이 있다. 이들 대부분이 석·박사과정의 학생들이다. 그들이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우수 두뇌집단인 서울대 학생을 목표로 하는 학원이슬람화 전략에 착수하였다. 지난 4월에 ‘서울대무슬림회(SNU Muslim Society)’라는 이름으로 영국에서 무슬림 강사를 초청하여 ‘인생의 목적’이라는 특강을 위한 모임을 가지고 학생들과 그 가족들을 초청한 것이다. 그들 50명과 외부에서 온 300명이 모였다고 한다. 앞으로도 이슬람문화연구, 이슬람역사연구, 코란 스터디, 아랍어 동아리 등 다양한 전략들이 나올 것이다. 이들 중에는 ‘선교사’라는 명함을 자랑스럽게 내미는 학생들이 있다고 한다. 현재 그들의 예배에 200-400명이나 되는 무슬림들이 참석하고 있는데 그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학내 무슬림 선교사들이 외부세력들과 연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에게도 우선전파 대상은 외국유학생들이다. 어느 정도 세력이 구축이 되면 다음 전략으로 한국학생들에게 포교한다는 것이다.


사우디의 ‘킹 압둘라 종합대학’에서 서울대 교수들에게 거액의 연구비를 제안하고 있다. 그들에게 10년간 지원할 수 있는 10억 달러의 기금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국제 학문적 교류 측면에서 유익한 이런 제안을 누가 거절할 수 있겠는가? 또 파키스탄에서 한국 내 20여개 대학에 약 1,000명의 유학생을 보낼 것이라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국비 장학생들이 유학을 계획하고 있다.


앞으로 대학마다 경쟁적으로 이슬람지역의 유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하는 일이 진행될 것이다. 지금 지방대학교에서는 학생 수가 줄어 운영난을 겪고 있는데 해결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는 앞으로 한국의 대학교 이슬람화를 위한 전략적 플랫폼이 될 수 있다. 학원에서도 무슬림사랑모임(LMF) 활동을 통해 이슬람화를 저지하는 연합된 노력이 서울대학교에 집중되어야 한다.


이슬람화를 위한 매스컴 홍보전략

 


이슬람은 특히 한국의 매스컴을 통한 홍보 전략에 힘을 쏟아왔다. 2005년도 이슬람 13부작의 특집을 방송하였다. 1시간짜리를 13회에 걸쳐 방영하여 이슬람에 대한 호감을 갖도록 하는 대대적인 선전 효과를 거두었다. 한국 이슬람화를 위한 투자였던 것이다. 특히 아프가니스탄 사태 이후에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호감적인 인식을 불식시키기 위한 것처럼 보이는 후속 특집들이 KBS와 MBC에 의해 각각 방영되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가장 최근에 SBS가 방영한 ‘신의 길, 인간의 길’이라는 4회 특집이다. 이 특집의 의도는 예수를 신화적 존재로 오도하고 기독교를 폄훼하여 이슬람교를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천만 기독교인을 분노케 한 이번 특집이 기독교인이었던 담당 PD가 무슬림으로 개종했기 때문에 가능했고, 거액의 중동자금이 지원되었다는 후문이 들린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국 이슬람화를 위한 고도의 이슬람 홍보 전략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슬람의 대담하고 적극적인 공세에 놀랄 수밖에 없다.

 

중점 홍보전략 I:이슬람이 평화의 종교라는 주장

 


첫째로 그들은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홍보하고 있다. 무슬림들은 ‘이슬람’이란 단어가 평화라는 의미의 ‘쌀럼’에서 왔다고 주장하면서 이슬람교가 ‘평화의 종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슬람은 평화가 아니라 ‘복종’이라는 단어에서 온 것이다. 영국의 한 이슬람전문가는 이렇게 반문한다. “코란에서 단 한 구절이라도 평화를 말하는 구절을 찾아볼 수 있는가?” 코란의 내용 중 평화와 반대되는 뜻의 구절이 500-700구절이 넘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결코 평화의 종교라 말할 수 없다.

 

중점 홍보전략 II:알라는 우리 하나님과 같은 신이라는 주장

 


둘째로 그들은 유일신 알라는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 알라는 하나님과 전혀 다른 신이다. 이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교회, 이슬람과 그 정체에 대한 교육 필요

 


이슬람은 이단 중의 이단이다. 2020년도까지 한국을 이슬람화하고, 2080년도까지 세계를 이슬람화하겠다는 엄청난 이단종교에 대하여 한국교회가 너무나 모르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이슬람이 기독교를 와해시키고 우리의 안방을 점령하려고 몰려오고 있는데도 무방비 상태다. 이제는 저들의 전략을 알고 대비해야 한다.

 


교단마다 이슬람대책위원회를 두고 연구하면서 이들의 이슬람화 선교활동을 추적, 감시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이슬람전문가들 양성하기 위해 적극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이슬람화를 위해 암약하고 있는 이슬람 선교사들을 찾아 그리스도의 능력 있는 말씀과 뜨거운 사랑으로 그들의 심령을 녹아지게 해야 한다. 저들이 속고 있는 적그리스도의 영인 알라 대신에 참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슬람에서 외치는 “동방에서 이슬람의 횃불을 밝히는 한국!”(쿠웨이트 알아라비 2007 4월호)이라는 구호가 아니라 “동방에서 이슬람을 위한 사랑의 횃불을 밝히는 한국!”이라는 구호가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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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이슬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전망

 

 들어가는 말

 

최근 세계통계보고서에 의하면 전 세계 인구는 72억 명이 넘었다. 그 가운데 23% , 16억의 무슬림이 살고 있다. 전 세계 인구 다섯 명 가운데 한명이 이슬람 종교를 가진 무슬림(Muslim)이다. 지난 14세기 동안에 서구와 이슬람은 경쟁과 긴장을 동반한 대결의 역사였다. 그러나 한국역사를 돌아보면 이슬람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좋은 관계로 발전되어 왔다. 최근에는 다문화와 함께 이슬람은 더욱 알려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얼마 전 정부가 추진하려 했던 이슬람 금융을 통해서 우리는 이슬람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은 전통적으로 우리에게 생소한 종교이다. 한국에게 이처럼 이슬람이 생소했던 이유는 아마도 지리적 위치와 획일적인 문화 때문일 것이다. 이슬람이 발흥했던 아라비아 반도는 지금도 한국에서 항공편으로 약10시간 정도가 소요될 정도의 거리이다. 그렇기에 과거 아라비아 반도에서 한국까지 이슬람이 영향을 미치기에는 교통편이 발달되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획일적인 한국 정서에 외래 종교나 문화가 비집고 들어설 틈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지금까지는 한국에서 이슬람을 찾아보기란 매우 어려웠다.

 

한국과 이슬람의 관계는 한국의 고대 문헌 등에서 교류했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역사에서 이슬람 종교를 가지고 있었던 아랍인들을 만나게 된 문헌의 기록은 신라 시대부터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세력이 미미하였고, 따라서 우리에게 이슬람은 낯선 존재였다. 그 당시 무슬림들은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한국에 왔다기보다는 교역이 더 큰 목적이었겠지만, 한국과의 접촉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외국인의 유입증가와 함께 이슬람은 한국에서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다. 또한 이슬람은 수쿠크(Sukuk) 법에 대한 논쟁과 더불어 사회 전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이슬람이 한국에 어떻게 처음 접촉했는지, 한국역사 속에서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더 나아가 국내 이슬람의 현황을 파악해서 우리 곁에 얼마나 성큼 다가와 있는지를 알아보고,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대안을 세워보고자 한다.

 

. 한국이슬람의 어제

 

1. 통일 신라에서 18세기 말엽까지

 

1) 신라시대와 이슬람

 

한국과 중세 아랍인과의 접촉은 아랍 고전의 여러 문헌들에서 소개되고 있는데, 최초로 아랍 사회에서 한국이 언급된 나라는 신라였다. -아랍어에서 신라를 뜻하는 이름은 ‘al-Shila’인데, ‘al’은 관사로 사용되기 때문에 ‘Sila’라는 음역은 신라라고 올바르게 사용되었다.- 중세 아랍인들의 문헌에는 신라의 모습이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9세기 중엽에 술라이만(al-Sulaiman)이라는 아랍상인이 살았는데, 그는 중국과 인도의 소식(Akhbar al-Sin wal-Hind, A.D. 851)'에서 신라의 지정학적 위치를 중국의 동쪽 바다에 자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서 신라의 존재가 이미 아랍인들에게 알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술라이만이 밝힌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해안에 신라라는 섬들이 있다. 그곳의 주민들은 피부가 희다 그들은 중국 황제에게 선물을 보내고 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늘은 그들에게 비를 내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우리 동료들 가운데 아무도 그곳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은 또한 흰 매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페르시아 우편 관리인이었던 이븐 후르다드비(Ibn Khurdadbid)는 자신의 저서 도로들 및 왕국들 안내서에서 신라를 묘사하고 있는데, 그는 신라의 지정학적 위치뿐만 아니라 신라에는 이슬람교도들이 거주하고 있다고도 밝혔다. 그리고 그들은 신라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영구히 정착하고 싶어 한다고 밝혔다.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다. 이슬람이 이 나라에 상륙하면 그곳의 아름다움에 끌려서 영구히 정착하고 떠나려 하지 않는다.

 

중세의 지리학자인 이드리시(al-Idrisi)먼 나라를 종횡할 꿈을 가진 자들의 산보(Nuahat al-mushtaq fiikhtiraq al-afaq)'에서 신라를 소개하고 있으며, 세계지도에 신라를 섬나라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이 지도는 서양에서 한국을 처음으로 등장시킨 벨호(B.Velho)의 세계지도보다 408년이나 앞선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아랍이 서양보다 먼저 신라와 접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곳(신라)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정착하여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데 있다. 그 가운데서도 금은 너무나 흔해 그곳 주민들은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

 

이처럼 중세의 아랍인들에게 있어서 신라는 매우 아름다우며, 금이 많은 나라로 인식되어 있었다. 또한 아랍인들은 신라에 오면 정착하여 떠나기를 싫어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중세의 기록들을 통해서 우리는 신라시대에 이미 아랍 사회가 한국과 접촉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신라시대에 이슬람과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 자료들을 통해 찾아볼 수가 있다. 아랍 지역에서 신라로 무역을 하기 위해 왔을 뿐 아니라, 신라에서도 아랍 지역으로 갔던 내용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문헌 이외에도 경주에 있는 무인석상은 신라시대에 아랍과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경주시 외동면 괘릉리에는 원성왕(元聖王, 8C)으로 추정되는 괘릉이 있는데, 그 옆에 무인석상이 하나 서 있다. 보물1427로 지정되어 있는 이 무인석상은 신장이 약 2m 50cm쯤 되며, 곱슬 수염과 곱슬 머리의 늠름한 무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또 그 머리에는 무슬림의 전통복장인 터번을 쓰고 있다. 이들은 무장을 하지 않았으며, 그 모습은 아시아 계통이라기보다는 중세 서역인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안강의 흥덕왕(興德王, 9C)능에도 이와 비슷한 무인석상이 있는데 그 모습은 괘릉의 무인석상과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무인석상은 당시 중국 매우능묘에 서역 무인들의 모습을 호인용으로 만든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 왕릉의 위엄과 수호적인 역할의 기능을 하였다. 이를 토대로 신라 왕조 때 이미 서역인들의 존재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이들이 신라의 왕조와 호전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대표적 향가이자 설화인 처용설화(處容說話)’에 등장하는 처용의 일행은 신라 제 49대 헌강왕(憲康王) 5(879) 3월에 개운포(開雲浦)에 나타났는데 이들의 용모는 아시아 사람들이 아니라 아랍 무슬림으로 묘사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처용의 존재를 기록하고 있다. 개운포에 등장하는 처용을 일관(日官)이 호전적으로 묘사함에 따라 헌강왕은 이들을 환영하고 서울에서 집과 벼슬을 주어 살게 하였다.

 

삼국사기에도 처용의 존재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술들로 보아서 처용은 개운포를 통해서 신라와 접촉했던 이방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이방에서 동해를 거쳐 신라에 접촉하였으며, 처용의 모습은 무성한 눈썹, 우그러진 귀, 붉은 모양, 우뚝 솟은 코, 밀어나온 턱, 숙어진 어깨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처용이 동양 사람이 아니라 아랍인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처용설화는 아랍 사회가 신라와 접촉했다는 것을 유추하게 하는 것이다. 신라인도 아랍에 접촉했던 기록이 있다.

 

신라의 대덕고승인 혜초는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아랍에 갔던 인물이었다. 인도와 페르시아, 아랍, 중앙아시아에 관한 견문록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작성하였다. 혜초는 아랍국에 대해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그가 방문할 당시 아랍 제국은 칼리프 시대(632-661) 후인 우마이야왕조(661-750)시대였다. 우마이야왕조 시대에는 수도를 메디나에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로 옮겼는데, 혜초가 묘사한 소불림국(小佛臨國)은 당시 이슬람 제국의 수도였던 다마스커스를 의미한다.

 

혜초는 아랍 사람들이 입고 있는 복장을 묘사하면서 헐렁한 적삼을 입고 한 장의 모직 천을 걸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이슬람의 전통복장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또한 혜초는 대식국을 가리켜 불법을 알지 못하는 나라이며, 이슬람 신앙을 가졌기에 알라 외의 다른 누구에게도 절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신라와 아랍 간에 있었던 문명의 교역에 대한 증거로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adhibah)제도로 및 제왕국지(845)’를 들 수 있다. 그는 신라의 지리적 위치를 밝히고 신라와의 무역의 목록들을 나열하고 있다. 비단, , 사향, 침향, 말안장, 초피, 도기, 범포, 육계 등은 신라가 수출한 물품들이었고, 아랍이 신라에게 수출한 물품은 유향과 안식향을 비롯한 아랍산 향료, 신라고분과 사찰에서 출토된 각종 유리기구, 일반서민들도 애용하던 구슬 같은 기호품, 단검이나 토용 등이었다.

 

신라 고분인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동 98호 남분 및 북분에서는 20점 가량의 유리기구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아랍계 상인들을 통해서 신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교역 물품을 통해서 아랍과 신라 사이에 문명의 접촉과 교류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고려시대와 이슬람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신라시대 때보다 아랍과의 교류가 보다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고려 시대 때에는 원제국을 통하여 아랍문명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으며, 처음으로 움마(Ummah, 이슬람공동체)가 부분적으로 형성되었다. 기록상 최초로 한반도에 진출한 무슬림은 고려 현종(顯宗) 15년인 1024년에 등장한다. 고려사 현종 15년의 기록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9월 을미일에 김인위(金因渭)를 상서 우복야 참지정사로 임명하였다가 이내 사직케 하였다. 갑인일에 흑수말갈의 아이고(阿里古)가 우리나라에 왔다. 9월 대식국의 열라자(悅羅慈) 1백 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고려사의 기록을 통해서 고려사회 내에 무슬림 상인들이 무역을 주목적으로 일시에 백 명 이상의 인원으로 구성된 대규모 사절단의 형태로 방한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이 이미 고려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교역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고려와 아랍간의 교류는 한반도와 중국을 잇는 해상항로를 통해 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랍 상인들이 대거 고려로 교역 여행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의 송나라와 아랍과의 국제무역의 번성과 고려와 송간의 원활했던 교역관계를 기반으로 하는데, 당시 송대는 이슬람 세력 팽창의 시기로서 무슬림 상인그룹에 의한 국제무역의 번성기였다. 따라서 아랍은 송과의 무역뿐만 아니라 고려와도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물의 교류는 주로 공()무역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식 상인들이 고려에 거주하는 동안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조정에서 거행된 주요 국가행사에 외국 사절들과 함께 참석할 정도로 환영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이들은 왕실과의 긴밀한 공()무역관계를 통해서 점차적으로 고려 사회 안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성() 중에도 고려시대 때 시작된 성이 있다. 이러한 성()들 가운데에는 당시 무슬림들이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이 있다. 무슬림들 중에 일부는 고려에 귀화하였는데, 이를 통해 성()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2) 고려시대와 이슬람

 

삼가(三歌) 장순룡(張舜龍)1274년 고려 충렬왕의 몽골비()인 제국공주의 종관으로 고려에 왔는데 그는 투르크계 위그르 출신의 무슬림으로서 한국에 귀화한 최초의 무슬림이었다. 고려사 제 123권을 보면 장순룡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장순룡은 근본이 회회족이며 처음 이름은 삼가이다. 그의 부친 장경은 원나라 세조를 섬겨 필도적 벼슬을 했다. 장순룡은 제국 공주의 겁령구로 와서 낭장 벼슬을 받았고 여러 관직을 거쳐서 장군으로 승진되면서 이 성명을 고쳤다.

 

여기에서 사용된 삼가의 의미는 세 번째 형으로서 투르크계 위구르인을 지칭한다. 장순룡에 대한 이야기는 덕수 장씨 가승보에서도 등장한다. 장순룡은 본래 무슬림으로서 원나라의 관리였으나, 원나라의 공주의 시종관으로 고려에 오게 되었다. 그는 고려 사회에 정착하면서 귀화한 최초의 무슬림이었는데, 고려와 원 사이의 외교조정의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의 충렬왕과 원의 세조에게서 신임을 얻어서 두 나라 모두에게서 높은 관직을 받게 되었다. 장순룡의 후손들은 25대에 걸쳐서 고려와 조선조에 관료와 학자, 무관의 관직을 이어갔는데 지금은 경기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에 분포해 있다.

 

민보(閔甫)라는 인물도 고려 사회 안에 귀화한 무슬림이었는데, 그는 고려사 제31권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민보는 충렬왕 1294년에 장군의 신분으로 원나라의 조공을 드리러 갔는데 1299년에는 대장군의 신분으로 원나라로 가게 되었고, 1301년과 1303년에는 대호군의 신분으로 원나라에 가게 되었다. 또한 1305년에 상호군의 신분으로 원나라에 가게 되는데 고려사에 나타난 민보는 고려 사회에서 무관을 담당하는 관료로서 원나라의 조공을 드리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민보는 무슬림 사람으로서 고려국으로 귀화함으로서 무관으로서 역할을 하였으며 원나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었다.

 

설손(偰遜)은 고려사 제 112권에 등장하는 귀화한 무슬림이다. 설손은 무슬림으로서 원나라의 황제에게 경전을 가르치는 학자였는데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고려에 와서 귀화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왕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 고려 사회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고려사 속에서 나타난 장순룡, 민보, 설손과 같은 인물들은 고려 사회 내에서 귀화했던 무슬림들이다. 이들은 조정의 지원을 받으며 고려 사회 내에서 대내외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관료였다. 이들이 가지고 있던 무슬림 신앙이 얼마나 존속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고려 사회에 귀화해서 살았던 이들이 무슬림 신앙과 생활을 추구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슬람은 하나의 사회ㆍ경제적 세력으로 고려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개성과 그 주변에 거주했었는데 이는 고려 시대에 거주했던 무슬림들이 조정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 사회 내에서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생활방식들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고려의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3) 조선시대와 이슬람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고려시대에 이어서 이슬람과의 교류가 계속 되어졌다. 조선시대에는 무슬림들의 종교 행위가 보장되었으며, 이슬람의 과학기술과 공예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이슬람과의 문명의 교류에 관련한 서술이 잘 나타나 있다.

 

조정에서는 회회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하고 있었으며, 조선 사회 내에서 가족을 이루고 살도록 하였다. 또한 무슬림 상인뿐 아니라 무슬림 종교 지도자를 거주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이슬람 종교의식을 보장하고 있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지도자가 거주하였을 정도로 이슬람은 조선시대에 정착될 수 있었다.

 

조정은 이슬람 종교 지도자인 회회 사문들의 생활을 지원을 함으로서, 이들의 복지와 생계를 도왔다. 회회 사문들의 존재는 조선시대 사회 안에 무슬림들이 움마를 이루고 살았다는 것이고, 조정이 이슬람의 종교를 호의적으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유한 이슬람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는 것이다.

 

세종이 즉위했던 원년에 회회인들은 공식적인 조하의 자리에서 불교의 승도와 함께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조선의 조정이 불교와 이슬람을 통솔하고 있으며, 이슬람은 이미 조정이 인정하는 하나의 공식적인 종교임을 알 수 있다. 회회인들이 임금을 찬양하는 송축 의식을 하였다는 것은 조정의 공식적인 행사와 의례에서 무슬림들을 포함시켰을 정도로 중요한 집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종이 왕세자와 문관과 무관의 신하들과 함께 조정의 조례행사를 실시할 때에 귀화한 회회인들이 조하에 참여하였는데, 이는 고려시대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에도 회회인들이 귀화했었으며, 이들은 조정의 중요한 행사에 참석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문물들과 기술들을 교류하는 수준으로서, 고려시대보다 더 활발한 이슬람과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특별히 이슬람력(Islamic calendar)은 조선의 역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로 인해 칠정산내외편이 만들어지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또한 조선 세조 때에는 투르크-페르시아계 무슬림 거주 지역에서 수출하는 도자기 안료인 회청이 수입되었다. 이로 인해 청자를 넣은 청화백자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청화백자의 등장은 도자기 공예 기술의 혁신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조선시대에 거주하였던 무슬림들은 주로 조정과 상류층 사회와의 교류를 담당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조정 행사에 공식적으로 참석하였을 정도로 이들의 위치는 중요했다. 그러나 이들은 소수였으며 조정과 주로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이 대중 속에 정착되지 못했고 결국 자생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지배층 중심의 성격은 민중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급변하는 대내외적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2. 19세기 투르크계 무슬림들의 이주

 

이슬람은 신라와 고려, 조선 시대 때까지 한국과 문명을 교류하고 이슬람선교를 시도했다. 15세기 중엽 조선의 세종 이후 약 4세기의 공백기 후에 이슬람 선교는 19세기 말부터 다시 진행되었다. 1898년 러시아의 청조(淸朝)로부터 동청(東靑)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계기로 러시아의 투르크계 무슬림들이 중국의 하얼빈(Harbin)을 중심으로 만주 일대에 러시아 전역으로 이주하여 움마를 이루게 되었다.

 

그 후 1915~1920년 사이에 제 1차 세계대전과 볼세비키 혁명을 계기로 투르크계 무슬림들이 국내에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1920~1940년 중반까지 200~250여명의 투르크인들이 한반도 전역으로 이주하여 이슬람공동체를 이루었다.

 

국내에 거주했던 투르크계 무슬림들은 주로 의류 도·소매업을 중심으로 포목점과 양복점을 경영하였는데, 상업과 국제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면서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들은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목포, 대전, 평양, 신의주, 청진, 홍남 등 전국에 걸쳐 이슬람공동체를 이루면서 종교적·문화적 활동을 지속해 갔다. 이들은 서울, 부산, 대구 등지에 이슬람 마을(Mahall-i Islamiyeg)이라는 공동체를 형성하였으며, 서울 시내의 중심가에는 이슬람 학교(Mekteb-i Islam)을 통하여 무슬림 자녀들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투르크 무슬림들은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계인들 및 고위 군부들과 밀접한 협력 관계를 추구하면서 무역과 상업 활동으로 인한 경제적인 부를 축적했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일본의 패망 이후로 불안한 국내 정치상황으로 인하여 투르크 무슬림들은 1940~1950년간에 캐나다, 미국, 호주, 터키 등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에 일제 치하를 겪은 우리 민족은 나라의 아픔을 끌어안고 같이 해결하려고 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경제적인 부만을 얻고자 하였던 투르크인들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갖기도 하였다. 결국 투르크 무슬림들은 한국에 이슬람을 적극적으로 포교하지 못했고, 한국의 공동체 형성에 특별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3. 6.25 전쟁 이후

 

1950년 한국전쟁 다시 유엔군 소속으로 터키의 군인들이 한국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참전한 병력의 규모는 미국 다음으로 여단 규모의 병력을 파병하였다. 당시 압둘가푸르 카라이스마일오울루(Adulgafur KaraismailogLu)라는 터키 제6여단 사령부의 군 이맘(Imam)은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선교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압둘라 김유도와 우마르 김진규등이 개종하였고, 이들은 1세대 한국인 무슬림들로 형성되었다. 이후 김유도와 김진규는 1955915한국이슬람협회를 결성함으로서 적극적인 이슬람 선교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슬람 선교 활동은 교육에도 이르렀는데, 한국 전쟁 당시 후방에서는 앙카라 학교를 건립하여 전쟁고아의 양육과 교육활동을 하였고, 19564월에는 청진학원설립함으로서 중등교육과 이슬람 교리교육을 무료로 실시하기도 하였다.

 

1956년 주베이르 코치(Zubeyr Koch)2대 이맘으로 부임하면서 입교자는 ‘208에 이르게 되었고, 1959년 이슬람협회 지도자였던 김진규는 서정길과 함께 이슬람 국가를 순방하면서 한국 이슬람의 실정을 알리고 후원을 요청하였으며 1960년에는 한국 무슬림으로는 최초의 성지 순례자들이 되기도 하였다.

 

그 이후 계속되는 지원을 통하여 19654한국 이슬람교 중앙연합회가 조직되었고 1967313재단법인 한국 이슬람교(Korea Islamic Foundation, KIF)’로 종교법인 등록을 하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한국 이슬람의 중추적인 의결기구로서 활동하고 있다.

 

19709월에 한국정부는 용산구 한남동의 1,500평의 땅을 이슬람 중앙성원 건립용 부지로 기증하였고, 이후 이슬람 국가들의 재정적 후원으로 1976521일 이슬람 성원의 개원식이 있었다. 이때부터 한국 이슬람은 증가하기 시작하였는데, 1960~1970년대에는 한국 기업들의 중동 국가 진출을 계기로 3,700명이었던 이슬람 인구가 약 두 배로 증가하기도 하였다.

 

1977년에는 한국에 이슬람 대학을 건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슬람 대학 건립 추진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2차 석유파동을 계기로 19805월에는 최규하 전 대통령이 칼리드(Khalid) 사우디아라비아의 왕과 한국 이슬람 대학 설립을 합의하였으며 경기도 용인 13만 평의 이슬람 대학 부지를 기증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이슬람 교육 및 연구 활동이 활발하였는데 1997세계 무슬림연맹(Rabita)'한국 이슬람교 중앙회주체로 무슬림 학자 20여명과 100여명의 국내외 이슬람 학자들이 모여 동아시아의 이슬람 역사와 문화적 조화의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이렇듯 현대에 들어서 이슬람은 활발하게 선교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한국 내에 무슬림들은 조금씩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출처 : FIM선교회 대표 유해석선교사 (전 총신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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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세계전략과 한국 침투를 막는 길

 

이슬람은 아랍뿐 아니라 전 세계에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신장성을 넘어서 서안까지 이슬람 사원이 세워져 있고

이슬람의 동진(東進)은 계속되어 이제 한국에도 다양한 형태로 침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최근 뉴스가 된 이슬람 신봉자들이 한국의 여성들과 결혼하고 이슬람을 강요하여 어렵게

된 경우와 서울대에 장학금지원, 큰 사회 문제가 된 모 방송의 '신의 길 인간의 길'지원등

다양한 형태로 이슬람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슬람의 세계 전략과 한국 침투를 막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것인지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걱정과 우려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1. 이슬람을 알자

 

우선 적을 알아야 대적을 분별하고 막을 수 있습니다.

이슬람이 신봉하는 교리와 그들이 믿는 신과 그들의 경전인 '꾸란', 마호멧과

무슬림(이슬람을 믿는 무리들)의 생활과 삶등을 면밀히 연구하고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라크 파슈툰 족에 대해서 면밀히 알고 단기선교를 준비하고 실행했다면 2007년 두 희생자를

막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2. 이슬람의 전략을 알아야 한다

 

이슬람은 단지 종교 이상의 세력이 되었습니다.

특히 미국의 쌍동이 빌딩을 비행기로 무너뜨린 오사마 빈 라덴은 이슬람을 정치적인 힘으로

이용하여 미국과 미국을 지원하고 협력하는 모든 사람을 '''사탄'으로 규정, 성전(聖戰,지하드)에 나설 것을 이슬람과 아랍권에 촉구하며 세계를 이슬람대 기독교의 대결구도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탈레반은 그 하부 조직의 하나일 뿐이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자행되는 테러기술자 훈련과 전 세계에서 자행되는 자살폭탄 테러의 배후에 빈라덴과 그의 투사(전사)들이 수천명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그들을 평화적으로 이해하고 위험지역에 들어가 선한 활동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모험적인 일입니다.

 

이란과 미국은 오랜 동안 숙적으로 남아 있고 주요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과 인도네시아,그외 전세계의 무슬림국가들은 내심 미국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미국의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어린시절 무슬림 국가에서 자랐기에 다소 무슬림에 대한 경계심이 소홀할 수도 있고 자칫 평화공존의 무드로 흘러서 기독교 선교가 위축될 우려도 있습니다.

 

천주교와 이슬람의 화해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음녀와 같은 바벨론인 천주교 바티칸과 은밀히 진행되는 종교간 협상은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와 교회의 선교를 위협하는 요인이 됩니다.

 

아울러 최근 한국의 김수환 추기경의 사망으로 착한 일을 하면 천국에 간다는 생각-공적신앙-이 개신교의 신앙과 교리에 위협을 주거나 교회의 잘못된 현상-교회 비대,돈 많은 목사,교회 아들에게 물려주기등-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개신교 선교의 위축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영적인 흐름 가운데 우리는 이슬람이 우리의 빈 마음과 방황을 엿보아 사탄처럼 치고 들어와 은혜를 잊고 하나님을 버리게 할 위험도 적지 않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울 힘써 자신을 지키고 십자가의 은혜를 묵상하며 시험을 이기고 목회자들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슬람의 선지자 마지막 선지자이고 마호멧이 받은 계시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 해도 우리가 전한 복음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1,6~8)는 바울의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그러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우선 개인이 신앙으로 더욱 무장해야 한다. 주님이 언제 오시든지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마음으로 항상 깨어있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유럽의 교회가 이미 박물관이 되어 버렸고 기독교를 반대하는 무신론을 선전하고 있는 영국, 예배당 건물이 술집과 스탠드바로 바뀌고 있는 스코틀랜드, 수많은 선진 서구에서 기독교 신앙은 화석화되었다. 미국에서도 동성애 안수등 예민한 문제에서 기독교 신앙은 퇴조하고 부시 대통령 8년 동안 복음주의 진영에 대한 날카로운 평가로 자유주의 진영에 정권이 넘어갔으므로 향후 미국은 상당히 진보적인 생각-낙태 찬성,동성애 허용등-들이 충돌할 가능성이 높으며 타 종교에 대한 관용을 내세워 다원주의와 종교간의 통합, 연합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때에 우리는 더욱 힘써 우리가 받은 기독교 신앙의 가치들을 지켜야 한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잊지 않고, 교회 생활에 더욱 힘쓰며,

새벽기도와 금식등을 통해서 날마다 거룩함에 이르고 전도와 사회 봉사를 통해서

불신자들과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교회적으로는 이슬람에 대한 연구와 세미나, 선교사를 초청한다든지 하여

이슬람의 내부와 세계 전력등에 대해서 강연을 듣고 경각심을 주는 방향으로 목회를 진행한다.

이 일에 대해서 교단이나 선교단체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중동선교회같은 단체들에서 발행하는 이슬람의 신앙 내용이나 현실들을 알아서 알리고 홍보하여

그 지역들에 선교사를 보내거나 단기선교등 활동을 하기 전에 충분한 숙고와 연구, 기도가 필요하다.

샘물교회가 당한 사건은 일차적으로 교회의 판단에 따라서 행동한 것이기에 개인적으로 대처할 문제만이 아니며 개인의 신앙과 순교는 때때로 공동체(가정,교회,국가)에 크나큰 영향을 주므로 영웅주의적 선교 접근은 지양해야 한다. 정확한 정보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기술을 가진 극악무도한 단체에 잡히면 협상도 불가능하며 오직 희생양이 될 뿐이다. 이 점에서 교회의 지도자(담임목사와 장로,선교담당목사)들은 청년들이 순수한 믿음을 이용해서 그들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

 

교단과 선교단체는 이런 점들을 미리 알고 대처할 수 있는 국제적인 넷트웍을 가져야 한다. 전문적인 선교단체라도 현지 상황이나 사정을 현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나 의사, 국제적인 활동가들보다는 모를 수 있으므로 국내에서 계획했던 대형집회나 운동(movement)등도 현지의 사역자와 긴밀히 협의하고 실행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장기적인 대책은 역시 하나님의 이슬람에 대한 계획을 알고

계속해서 어떻게 선교를 효과적으로 할 것인가를 기도하면서 고민해야 할 것이다.

현대는 정보전쟁의 시대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퇴라는 말은 항상 맞는 말이다. 파슈툰 지역의 문화와 사람들의 생각, 극단적인 테러단체들의 동향과 계획을 미리 알았다면 우리는 그들이 쳐 놓은 그물에 걸리지 않도록 대처할 수 있었으며, 온 세계가 온 나라가 떠들썩한 일을 목도하지 않고도 은밀한 가운데 이슬람 지역을 선교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김바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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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스크(Naskh): 나중에 받은 계시에 의하여 먼저 받은 계시는 취소되었다

 

꾸란은 무함마드가 A.D. 610년부터 죽기까지 23년 동안 받았다는 내용이다. 꾸란 안에 같은 주제에 대하여 서로 다른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꾸란 2240절에 의하면 과부는 1년 이후에 재혼이 가능하다. 그런데 같은 꾸란에 남편이 죽으면 4개월 10일 이후에 재혼이 가능하다는 내용도 있다. “너희 중에 누가 죽어서 과부를 남기면 과부들은 재혼하기 전에 4개월 10일을 기다려야 한다. 그들이 이 정해진 기간을 지키면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을 너희는 비난하지 말 것이다(꾸란 2:234).” 그렇다면 남편이 죽고 언제 재혼이 가능하가? 이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나스크 교리가 생겼다. 꾸란에 기록된 계시는 바뀔 수 있으며, 계시가 바뀔 때는 나중에 받은 계시가 먼저 받은 계시를 취소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받은 계시는 이슬람 신학에 의하면 취소된 구절이 된다. 이에 대하여 꾸란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만일 우리(알라)가 원하였다면 우리가 너에게 계시한 것을 없앨 수 있다(꾸란 17:86).”, “우리가 어느 한 구절을 다른 구절로 대체할 때 알라는 그가 보내는 것을 더 잘 알고 있다(꾸란 16:101).”

 

그래서 꾸란은 메카에서 12년 동안 받은 메카 계시,

그 이후에 메디나에서 10년 동안 받은 메디나 계시로 나뉜다.

메카에서는 무함마드가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서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꾸란 2:256)”

종교는 강요되어서는 안 되고 자유가 보장되었다.

그런데 이 내용이 메디나로 오면서 바뀌게 된다.

메디나로 온 무함마드는 27개월이 지난 후부터는 칼을 들게 된다.

그리고 메카로 가는 대상들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종교에 강요가 없다던 평화의 계시칼의 계시로 바뀌었다.

 

이교도를 발견하는 대로 살해하라(꾸란 9:5)”,

불신자를 만나거든 목을 쳐라(꾸란 8:12)”

따라서 평화에 관한 계시는 나중에 받은 칼의 계시에 의하여 취소되는 것이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메카에서는 종교의 다름을 인정하였고, 평화를 이루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무슬림은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주장했다(꾸란 29:46).

그러나 메디나에 오면서 다음과 같은 구절로 바뀐다.

 

알라와 내세를 믿지 아니하며 알라와 메신저가 금기한 것을 지키지 아니하고

진리의 종교를 따르지 아니한 자들에게

비록 그들이 성서의 백성이라고 하더라도 항복하여

지즈야를 지불할 때까지 지하드를 하라

그들이 스스로 저주스러움을 느끼리라(꾸란 9:29)”

 

소동이 없어질 때까지 그리고 종교가 알라에게로 귀의할 때까지

그들과 싸움을 계속하라(꾸란 8:39)”

이 구절들에 의하여 기독교인과 유대인에 대한 태도가 바뀐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바뀌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바뀌지 않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그런데 이슬람의 진리인 꾸란의 계시는 상황에 따라 계속 바뀌어 갔다.

 

이슬람 초기에 무함마드가 사탄의 계시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은 메카의 쿠라이시 부족과 타협하기 위하여,

메카의 부족신이였던 알라에게 세 명의 딸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계시였다.

그러나 그 계시가 돌연 취소되었다.

무함마드 자신이 사탄의 계시를 받았기에

알라에게 혼이 나고 그 계시가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가지고 인도계 영국 작가였던 살만 루시디(Salman Rushidy)

악마의 시(Satanic Verses)’라는 책을 썼는데,

인하여 무슬림들에게 20년 이상 살해의 위협 속에 지내게 되었다.

또 그 책을 번역한 사람들이 일본과 이탈리아에서 암살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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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끼야(Taqiyya): 위장 혹은 기만전략

 

이슬람에는 많은 교파가 존재한다. 그러나 크게 두 교파가 있는데 수니파와 시아파이다. 본래 이 교리는 시아파에서 기만을 의미하는 이함(Iham)이라는 교리인데, 수니파에서도 타끼야라는 교리로 받아들였다. 타끼야라는 아랍어에는 거짓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슬람의 도덕적 딜레마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거짓말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너희의 맹세 속에 비의도적인 것에 대하여는 책망하시지 아니하나 너희 심중에 있는 의도적 맹세는 책망하시느니라 알라는 관용과 은혜로 충만하심이라(꾸란 2:225)” 이 내용은 이슬람 초창기에 이슬람을 반대하는 메카의 쿠라시쉬(Quraish) 부족에게 잡힌 무슬림이, 이슬람을 믿지 않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풀려나서 무함마드에게 와서 고백했을 때 받은 계시이다.

무함마드의 언행록(Hadith)에 의하면 세 가지의 경우에는 거짓말이 허용된다. \첫째,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하는 거짓말,

둘째, 평화 또는 화해에 영향을 끼치기 위하여 하는 거짓말,

셋째, 여성을 설득하기 위하여 하는 거짓말이다.

윌리엄 와그너가 지은 이슬람 세계 변화 전략은 이슬람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두 가지 거짓말을 추가한다.

여행 중에 하는 거짓말, 즉 무함마드 당시 모든 여행은 상업적인 여행이었다.

따라서 아랍 상인들이 상업을 위하여 하는 거짓말,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기 위하여 하는 거짓말이 포함되어 있다.

 

2. 타하리프(Tahrif): 성경은 변질되었다

 

이슬람에는 성경이 변질되었다는 교리가 있다. 구약은 유대인들에 의하여, 신약은 기독교인들로 인하여 변질되었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변질된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되고, 변질된 내용 가운데 꼭 필요한 부분은 꾸란에 올바르게 정리되어 기록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성경이 변질되었다고 주장하는 핵심을 세 가지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꾸란에는 무함마드라는 예언자가 올 것이라고 예수님이 예언했는데, 지금 성경에는 그 내용이 없다. 둘째, 꾸란에는 예수님에게 신성이 없다고 가르치는데, 성경에는 예수님의 신성이 기록되어 있다. 셋째, 꾸란에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내용이 없는데, 성경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은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의 원본에는 꾸란과 일치되는 내용들이 있었지만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타락하여 그 내용을 변질시켰기 때문에, 알라께서 하늘에 있는 원본인 꾸란을 무함마드를 통하여 직접 계시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에서 주장하듯이 정말 성경은 변질되었을까? 만일 성경이 변질되었다면 성경이 변질되었다는 내용이 꾸란에 있어야 한다. 꾸란에는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이 타락했다는 기록은 있어도, 성경이 변질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꾸란에는 계시에 의심이 생기면 성서의 백성들에게 물어 보라고 말하고 있다(꾸란 10:94). 꾸란에는 꾸란 이전에 계시된 모세와 예언자들에게 내린 율법을 믿으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함마드 이전에 성경이 변질되었다는 내용이 꾸란에 없는데, 언제 변질되었다는 것일까?

 

성경은 변질되지 않았다. 구약성경은 A.D. 90년에 팔레스타인의 얌니아 종교회의를 통하여 확정되었다고 하지만, 이미 B.C. 400년경 말라기서가 기록된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었으며 수백 년 동안 유대인들에 의하여 사용되었다. 무엇보다도 구약의 권위를 예수님께서 인정하셨다(4:4; 14:27). 기독교에서도 구약 39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여 사용했다. 신약성경은 최종적으로 A.D. 397년 기독교 3차 카르타고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 무함마드가 태어나기 200여 년 전까지, 성경은 이미 오늘날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경전으로 확정되어 사용되고 있었다. 1947년 이스라엘의 사해 근처에 있는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은 늦어도 A.D. 1세기에 만들어진 것임에도, 오늘날과 동일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꾸란은 무슬림들이 성경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믿는 자들이여 알라와 선지자 그리고 선지자에게 계시된 성서와 너희 이전에 계시된 성서를 믿으라 했거늘 알라와 천사들과 성서들과 선지자들과 내세를 부정하는 자 있다면 그는 크게 방황하리라(꾸란 4: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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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이슬람교,

                                         한국이슬람교중앙회

슬람은 한국 역사에서 생소한 종교였다.

그러나 역사적 흔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통일신라 시대의 원성왕(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괘릉 옆에 무인석상이 서 있다.

무인석상은 곱슬머리와 곱슬 수염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머리에는 무슬림의 전통 복장인 터번을 쓰고 있다.

그 모습은 중동이나 중앙아시아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의 스님 혜초가 727년에 쓴 왕오천축국전에 의하면,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를 방문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이를 토대로 볼 때 통일신라 시대에 이미 중동 사람이나 중앙아시아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고려 시대에도 수도인 개경(오늘날의 개성)에 이슬람 사원 격인 예궁(禮宮)이 있었으며,

정기적으로 이슬람 예배가 진행되었다.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역법에는 이슬람력(Islamic calendar)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조선 세조 때에는 투르크-페르시아계 무슬림 거주 지역에서 수출하는 도자기 안료인 회청이 수입되었다.

그러나 이슬람은 한국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일부는 한국 문화 속에 동화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당시 터키 출신 이맘 두 명이 병사들과 함께 건너와 청진학교를 세우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에 교육으로 이슬람을 소개했다. 이들의 노력 덕에 2년 후 한국인 두 명이 무슬림이 되었다. 1955년 이 개종자를 필두로 현재 한국인 무슬림은 5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인 무슬림은 무슬림 국가의 재정 원조를 힘입어, 첫 모스크 서울중앙성원(Seoul Central Masjid)을 이태원에 세웠다. 현재 한국 전역에 모스크 10개와 기도처 40개가 있다.


한국인 무슬림이 점차 늘어나자 사회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전체 통계는 분명하지 않지만, 최근 들어 계속 늘고 있다. 게다가 외국인 출신의 무슬림이 한국에 더 들어오고 있다. 2007년까지 한국으로 들어온 외국인 무슬림은 110,000명이었다.
이슬람과 이슬람 문화에 대한 한국인의 이해가 부족하여, 공장이나 학교에서 무슬림이 차별을 당하기도 한다. 한국에 살면서 돼지고기를 먹는 것은 거의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한 예로 한국 정부의 아시아 프로그램 연수생으로 한국에 온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무슬림 노동자는 불행히도 연수 훈련지를 돼지 사육 농장으로 배정받았다. 한국 측에서 사육용 돼지를 키우는 일이 무슬림에게는 금지돼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계속적으로 이슬람이 다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약 2만 명의 산업연수생이 한국에 들어오면서부터다.

그 때부터 무슬림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현재 한국에는 무슬림이 약 25만 명, 비공식적으로는 약 40만 명에 달한다.

이제 이슬람은 한국에서도 중요한 종교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미래학자 최윤식 박사는 2050년에는 한국의 이슬람 인구가 300-400만 명이 될 것이며,

이슬람은 불교, 천주교에 이어서 3번째 큰 종교가 되고 기독교는 그 뒤를 이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따라서 이제는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과거 중동이 비잔틴 기독교 제국이었지만 지금은 이슬람 국가들로 바뀌었고,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유럽이 이슬람화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볼 때,

이제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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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이슬람교 중앙성원 한남동)

한국을 향한 이슬람의 다와’(선교)

 

경제·문화교류 통한 한국침투

 

한국의 이슬람화를 위해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서 치밀한 전략으로 이슬람의 침투를 추진하고 있는 이슬람 세력의 움직임이 매우 활발하다. 특히 강력한 오일파워를 가지고 있는 아랍권 이슬람 국가들과의 경제협력을 이끌어 내기 위해 정부차원이나 민간차원의 문화교류도 추진되고 있어, 이슬람교의 침투가 보다 더 용이해 지고 있다. 

 

지난 22일에는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인천시청 앞 대흥빌딩 3층에 마련된 한국중동문화원의 개원식이 열렸다. 아시아 지역에 이슬람과의 문화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상설공간이 마련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한국과 이슬람과의 문화교류의 물꼬를 트는 계기로 여겨진다. 동시에 이슬람교도 자연스럽게 더욱 활발하게 전파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중동문화원의 개원이 이슬람 세력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지는 이날 행사에 참석한 인사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중동권 22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아랍의 최고 국제기구인 아랍연맹의 아무르 무사 사무총장을 포함해 수단, 이란, 쿠웨이트, 레바논,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카타르 등 중동 각국의 장관, 왕자, 경제문화계 인사 100여 명이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한국중동문화원이 생기게 된 이유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의 유치를 위해서였다. 안상수 인천시장이 중동국가의 지지를 이끌어 낼 아이디어를 찾자 한덕규 한국중동협회 회장이 인천에 중동문화원을 지으라고 조언한 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인천이 국제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중동 자본을 끌어들이는 게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도 작용했다. 

 

이날 개원식에 참석한 카타르의 마르셸 빈 자심 알타니 왕자는 한국과 중동 국가들 간 문화, 문물의 지속적인 교류가 이뤄질 수 있는 실마리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문화원의 개원은 단순히 건물 하나 들어선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문화원뿐만 아니라 아랍거리도 만들어졌다. 참석자들은 개원식에 이어 청라지구에서 서울의 테헤란로와 같은 아랍거리명명식을 갖고 높이 1m의 석제조형물을 세웠다 

 

무슬림의 한국 이슬람화 전략

 

이슬람세력의 한국 침투는 매우 전략적이다. 지난 2005년도에 한국이슬람연맹에서 출판한 한국이슬람 50년사에는 이들의 선교전략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사원 건립= 현재 있는 서울 중앙성원을 비롯해 9개의 이슬람 성원, 4개의 이슬람 센터와 50여개의 임시 예배처소를 점차적으로 확대하고자 한다. 

 

국제 이슬람학교 설립= 무슬림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한 교육시설이라는 명목으로 영어로 가르치는 초등학교, 유치원 및 어린이집을 만들어 어려서부터 이슬람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최고의 시설을 갖추고 저렴한 가격에 운영된다면 많은 한국인 부모들이 자녀들을 그곳으로 보내고 싶어 할 것이다. 

 

이슬람 문화센터 건립= 이슬람 문화센터를 다와센터(Da’wah Center)라고 부른다. 이는 선교센터라는 말이다. 문화센터에서는 많은 이슬람국가들의 언어교육부터 시작하여 상설 이슬람 교리강좌 등을 통해서 한국 사회에 이슬람을 뿌리내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꾸란 번역 위원회= 꾸란을 한글로 더 완벽하게 번역하기 위해서 꾸란 번역위원들의 정기 모임이 매주 열리며 비정기적으로 연구 토론모임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슬람대학 건립= 1970년대 말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 사업으로 현재도 진행 중에 있다. 이 대학이 건립되면 한국 이슬람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최고급 무슬림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며 이들은 삽시간에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들에 침투할 것이다. 

 

이슬람 관련 서적 출판위원회= 지금까지 많은 이슬람 서적들이 나와 있다. 이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책들과 인쇄물들을 만들어 홍보하고자 한다 

 

한국 여성들과 결혼 및 출산 전략= 이슬람권에서 한국으로 건너 온 근로자들이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서 취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한국 여성과 결혼하는 방법이다. 한국 정부는 아내가 한국인이고 남편이 외국인이면 남편에게 체류허가를 발급해 준다.

 

 

그동안 불법체류를 한 사람일지라도 합법 체류자의 자격을 얻게 된다. 그들은 한국 여성과 결혼해 가능하면 많은 자녀들을 낳아서 무슬림들의 숫자를 늘리고자 한다. 이 방법은 이미 유럽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대로 가면 유럽의 무슬림 숫자는 2025년에 이르면 지금의 두배가 될 것이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이 출산 전략은 무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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