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슬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전망
들어가는 말
최근 세계통계보고서에 의하면 전 세계 인구는 72억 명이 넘었다. 그 가운데 23% 즉, 약16억의 무슬림이 살고 있다. 전 세계 인구 다섯 명 가운데 한명이 이슬람 종교를 가진 무슬림(Muslim)이다. 지난 14세기 동안에 서구와 이슬람은 경쟁과 긴장을 동반한 대결의 역사였다. 그러나 한국역사를 돌아보면 이슬람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좋은 관계로 발전되어 왔다. 최근에는 다문화와 함께 이슬람은 더욱 알려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얼마 전 정부가 추진하려 했던 이슬람 금융을 통해서 우리는 이슬람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은 전통적으로 우리에게 생소한 종교이다. 한국에게 이처럼 이슬람이 생소했던 이유는 아마도 지리적 위치와 획일적인 문화 때문일 것이다. 이슬람이 발흥했던 아라비아 반도는 지금도 한국에서 항공편으로 약10시간 정도가 소요될 정도의 거리이다. 그렇기에 과거 아라비아 반도에서 한국까지 이슬람이 영향을 미치기에는 교통편이 발달되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획일적인 한국 정서에 외래 종교나 문화가 비집고 들어설 틈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지금까지는 한국에서 이슬람을 찾아보기란 매우 어려웠다.
한국과 이슬람의 관계는 한국의 고대 문헌 등에서 교류했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역사에서 이슬람 종교를 가지고 있었던 아랍인들을 만나게 된 문헌의 기록은 신라 시대부터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세력이 미미하였고, 따라서 우리에게 이슬람은 낯선 존재였다. 그 당시 무슬림들은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한국에 왔다기보다는 교역이 더 큰 목적이었겠지만, 한국과의 접촉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외국인의 유입증가와 함께 이슬람은 한국에서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다. 또한 이슬람은 수쿠크(Sukuk) 법에 대한 논쟁과 더불어 사회 전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이슬람이 한국에 어떻게 처음 접촉했는지, 한국역사 속에서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더 나아가 국내 이슬람의 현황을 파악해서 우리 곁에 얼마나 성큼 다가와 있는지를 알아보고,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대안을 세워보고자 한다.
I. 한국이슬람의 어제
1. 통일 신라에서 18세기 말엽까지
1) 신라시대와 이슬람
한국과 중세 아랍인과의 접촉은 아랍 고전의 여러 문헌들에서 소개되고 있는데, 최초로 아랍 사회에서 한국이 언급된 나라는 ‘신라’였다. -아랍어에서 신라를 뜻하는 이름은 ‘al-Shila’인데, ‘al’은 관사로 사용되기 때문에 ‘Sila’라는 음역은 ‘신라’라고 올바르게 사용되었다.- 중세 아랍인들의 문헌에는 신라의 모습이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9세기 중엽에 술라이만(al-Sulaiman)이라는 아랍상인이 살았는데, 그는 ‘중국과 인도의 소식(Akhbar al-Sin wal-Hind, A.D. 851)'에서 신라의 지정학적 위치를 중국의 동쪽 바다에 자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서 신라의 존재가 이미 아랍인들에게 알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술라이만이 밝힌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해안에 신라라는 섬들이 있다. 그곳의 주민들은 피부가 희다 그들은 중국 황제에게 선물을 보내고 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늘은 그들에게 비를 내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우리 동료들 가운데 아무도 그곳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은 또한 흰 매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페르시아 우편 관리인이었던 이븐 후르다드비(Ibn Khurdadbid)는 자신의 저서 ‘도로들 및 왕국들 안내서’에서 신라를 묘사하고 있는데, 그는 신라의 지정학적 위치뿐만 아니라 신라에는 이슬람교도들이 거주하고 있다고도 밝혔다. 그리고 그들은 신라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영구히 정착하고 싶어 한다고 밝혔다.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다. 이슬람이 이 나라에 상륙하면 그곳의 아름다움에 끌려서 영구히 정착하고 떠나려 하지 않는다.
중세의 지리학자인 이드리시(al-Idrisi)는 ‘먼 나라를 종횡할 꿈을 가진 자들의 산보(Nuahat al-mushtaq fiikhtiraq al-afaq)'에서 신라를 소개하고 있으며, 세계지도에 신라를 섬나라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이 지도는 서양에서 한국을 처음으로 등장시킨 벨호(B.Velho)의 세계지도보다 408년이나 앞선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아랍이 서양보다 먼저 신라와 접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곳(신라)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정착하여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이 많은데 있다. 그 가운데서도 금은 너무나 흔해 그곳 주민들은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
이처럼 중세의 아랍인들에게 있어서 신라는 매우 아름다우며, 금이 많은 나라로 인식되어 있었다. 또한 아랍인들은 신라에 오면 정착하여 떠나기를 싫어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중세의 기록들을 통해서 우리는 신라시대에 이미 아랍 사회가 한국과 접촉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신라시대에 이슬람과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 자료들을 통해 찾아볼 수가 있다. 아랍 지역에서 신라로 무역을 하기 위해 왔을 뿐 아니라, 신라에서도 아랍 지역으로 갔던 내용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문헌 이외에도 경주에 있는 무인석상은 신라시대에 아랍과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경주시 외동면 괘릉리에는 원성왕(元聖王, 8C)으로 추정되는 괘릉이 있는데, 그 옆에 무인석상이 하나 서 있다. 보물1427로 지정되어 있는 이 무인석상은 신장이 약 2m 50cm쯤 되며, 곱슬 수염과 곱슬 머리의 늠름한 무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또 그 머리에는 무슬림의 전통복장인 터번을 쓰고 있다. 이들은 무장을 하지 않았으며, 그 모습은 아시아 계통이라기보다는 중세 서역인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안강의 흥덕왕(興德王, 9C)능에도 이와 비슷한 무인석상이 있는데 그 모습은 괘릉의 무인석상과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무인석상은 당시 중국 매우능묘에 서역 무인들의 모습을 호인용으로 만든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 왕릉의 위엄과 수호적인 역할의 기능을 하였다. 이를 토대로 신라 왕조 때 이미 서역인들의 존재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이들이 신라의 왕조와 호전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대표적 향가이자 설화인 ‘처용설화(處容說話)’에 등장하는 처용의 일행은 신라 제 49대 헌강왕(憲康王) 5년(879) 3월에 개운포(開雲浦)에 나타났는데 이들의 용모는 아시아 사람들이 아니라 아랍 무슬림으로 묘사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처용의 존재를 기록하고 있다. 개운포에 등장하는 처용을 일관(日官)이 호전적으로 묘사함에 따라 헌강왕은 이들을 환영하고 서울에서 집과 벼슬을 주어 살게 하였다.
삼국사기에도 처용의 존재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술들로 보아서 처용은 개운포를 통해서 신라와 접촉했던 이방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이방에서 동해를 거쳐 신라에 접촉하였으며, 처용의 모습은 무성한 눈썹, 우그러진 귀, 붉은 모양, 우뚝 솟은 코, 밀어나온 턱, 숙어진 어깨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처용이 동양 사람이 아니라 아랍인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처용설화는 아랍 사회가 신라와 접촉했다는 것을 유추하게 하는 것이다. 신라인도 아랍에 접촉했던 기록이 있다.
신라의 대덕고승인 혜초는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아랍에 갔던 인물이었다. 인도와 페르시아, 아랍, 중앙아시아에 관한 견문록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작성하였다. 혜초는 아랍국에 대해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그가 방문할 당시 아랍 제국은 칼리프 시대(632-661) 후인 우마이야왕조(661-750)시대였다. 우마이야왕조 시대에는 수도를 메디나에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로 옮겼는데, 혜초가 묘사한 소불림국(小佛臨國)은 당시 이슬람 제국의 수도였던 다마스커스를 의미한다.
혜초는 아랍 사람들이 입고 있는 복장을 묘사하면서 “헐렁한 적삼을 입고 한 장의 모직 천을 걸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이슬람의 전통복장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또한 혜초는 대식국을 가리켜 불법을 알지 못하는 나라이며, 이슬람 신앙을 가졌기에 알라 외의 다른 누구에게도 절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신라와 아랍 간에 있었던 문명의 교역에 대한 증거로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adhibah)의 ‘제도로 및 제왕국지(845)’를 들 수 있다. 그는 신라의 지리적 위치를 밝히고 신라와의 무역의 목록들을 나열하고 있다. 비단, 검, 사향, 침향, 말안장, 초피, 도기, 범포, 육계 등은 신라가 수출한 물품들이었고, 아랍이 신라에게 수출한 물품은 유향과 안식향을 비롯한 아랍산 향료, 신라고분과 사찰에서 출토된 각종 유리기구, 일반서민들도 애용하던 구슬 같은 기호품, 단검이나 토용 등이었다.
신라 고분인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동 98호 남분 및 북분에서는 20점 가량의 유리기구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아랍계 상인들을 통해서 신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교역 물품을 통해서 아랍과 신라 사이에 문명의 접촉과 교류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고려시대와 이슬람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신라시대 때보다 아랍과의 교류가 보다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고려 시대 때에는 원제국을 통하여 아랍문명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으며, 처음으로 움마(Ummah, 이슬람공동체)가 부분적으로 형성되었다. 기록상 최초로 한반도에 진출한 무슬림은 고려 현종(顯宗) 15년인 1024년에 등장한다. 고려사 현종 15년의 기록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9월 을미일에 김인위(金因渭)를 상서 우복야 참지정사로 임명하였다가 이내 사직케 하였다. 갑인일에 흑수말갈의 아이고(阿里古)가 우리나라에 왔다. 9월 대식국의 열라자(悅羅慈) 등 1백 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고려사의 기록을 통해서 고려사회 내에 무슬림 상인들이 무역을 주목적으로 일시에 백 명 이상의 인원으로 구성된 대규모 사절단의 형태로 방한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이 이미 고려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교역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고려와 아랍간의 교류는 한반도와 중국을 잇는 해상항로를 통해 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랍 상인들이 대거 고려로 교역 여행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의 송나라와 아랍과의 국제무역의 번성과 고려와 송간의 원활했던 교역관계를 기반으로 하는데, 당시 송대는 이슬람 세력 팽창의 시기로서 무슬림 상인그룹에 의한 국제무역의 번성기였다. 따라서 아랍은 송과의 무역뿐만 아니라 고려와도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물의 교류는 주로 공(公)무역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식 상인들이 고려에 거주하는 동안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되는데, 그것은 조정에서 거행된 주요 국가행사에 외국 사절들과 함께 참석할 정도로 환영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이들은 왕실과의 긴밀한 공(公)무역관계를 통해서 점차적으로 고려 사회 안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성(姓) 중에도 고려시대 때 시작된 성이 있다. 이러한 성(姓)들 가운데에는 당시 무슬림들이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이 있다. 무슬림들 중에 일부는 고려에 귀화하였는데, 이를 통해 성(姓)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2) 고려시대와 이슬람
삼가(三歌) 장순룡(張舜龍)은 1274년 고려 충렬왕의 몽골비(妃)인 제국공주의 종관으로 고려에 왔는데 그는 투르크계 위그르 출신의 무슬림으로서 한국에 귀화한 최초의 무슬림이었다. 고려사 제 123권을 보면 장순룡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장순룡은 근본이 회회족이며 처음 이름은 삼가이다. 그의 부친 장경은 원나라 세조를 섬겨 필도적 벼슬을 했다. 장순룡은 제국 공주의 겁령구로 와서 낭장 벼슬을 받았고 여러 관직을 거쳐서 장군으로 승진되면서 이 성명을 고쳤다.
여기에서 사용된 삼가의 의미는 세 번째 형으로서 투르크계 위구르인을 지칭한다. 장순룡에 대한 이야기는 “덕수 장씨 가승보”에서도 등장한다. 장순룡은 본래 무슬림으로서 원나라의 관리였으나, 원나라의 공주의 시종관으로 고려에 오게 되었다. 그는 고려 사회에 정착하면서 귀화한 최초의 무슬림이었는데, 고려와 원 사이의 외교조정의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의 충렬왕과 원의 세조에게서 신임을 얻어서 두 나라 모두에게서 높은 관직을 받게 되었다. 장순룡의 후손들은 25대에 걸쳐서 고려와 조선조에 관료와 학자, 무관의 관직을 이어갔는데 지금은 경기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에 분포해 있다.
민보(閔甫)라는 인물도 고려 사회 안에 귀화한 무슬림이었는데, 그는 고려사 제31권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민보는 충렬왕 1294년에 장군의 신분으로 원나라의 조공을 드리러 갔는데 1299년에는 대장군의 신분으로 원나라로 가게 되었고, 1301년과 1303년에는 대호군의 신분으로 원나라에 가게 되었다. 또한 1305년에 상호군의 신분으로 원나라에 가게 되는데 고려사에 나타난 민보는 고려 사회에서 무관을 담당하는 관료로서 원나라의 조공을 드리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민보는 무슬림 사람으로서 고려국으로 귀화함으로서 무관으로서 역할을 하였으며 원나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었다.
설손(偰遜)은 고려사 제 112권에 등장하는 귀화한 무슬림이다. 설손은 무슬림으로서 원나라의 황제에게 경전을 가르치는 학자였는데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고려에 와서 귀화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왕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 고려 사회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고려사 속에서 나타난 장순룡, 민보, 설손과 같은 인물들은 고려 사회 내에서 귀화했던 무슬림들이다. 이들은 조정의 지원을 받으며 고려 사회 내에서 대내외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관료였다. 이들이 가지고 있던 무슬림 신앙이 얼마나 존속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고려 사회에 귀화해서 살았던 이들이 무슬림 신앙과 생활을 추구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슬람은 하나의 사회ㆍ경제적 세력으로 고려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개성과 그 주변에 거주했었는데 이는 고려 시대에 거주했던 무슬림들이 조정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 사회 내에서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생활방식들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고려의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3) 조선시대와 이슬람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고려시대에 이어서 이슬람과의 교류가 계속 되어졌다. 조선시대에는 무슬림들의 종교 행위가 보장되었으며, 이슬람의 과학기술과 공예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이슬람과의 문명의 교류에 관련한 서술이 잘 나타나 있다.
조정에서는 회회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하고 있었으며, 조선 사회 내에서 가족을 이루고 살도록 하였다. 또한 무슬림 상인뿐 아니라 무슬림 종교 지도자를 거주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이슬람 종교의식을 보장하고 있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지도자가 거주하였을 정도로 이슬람은 조선시대에 정착될 수 있었다.
조정은 이슬람 종교 지도자인 회회 사문들의 생활을 지원을 함으로서, 이들의 복지와 생계를 도왔다. 회회 사문들의 존재는 조선시대 사회 안에 무슬림들이 움마를 이루고 살았다는 것이고, 조정이 이슬람의 종교를 호의적으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유한 이슬람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는 것이다.
세종이 즉위했던 원년에 회회인들은 공식적인 조하의 자리에서 불교의 승도와 함께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조선의 조정이 불교와 이슬람을 통솔하고 있으며, 이슬람은 이미 조정이 인정하는 하나의 공식적인 종교임을 알 수 있다. 회회인들이 임금을 찬양하는 송축 의식을 하였다는 것은 조정의 공식적인 행사와 의례에서 무슬림들을 포함시켰을 정도로 중요한 집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종이 왕세자와 문관과 무관의 신하들과 함께 조정의 조례행사를 실시할 때에 귀화한 회회인들이 조하에 참여하였는데, 이는 고려시대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에도 회회인들이 귀화했었으며, 이들은 조정의 중요한 행사에 참석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문물들과 기술들을 교류하는 수준으로서, 고려시대보다 더 활발한 이슬람과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특별히 이슬람력(Islamic calendar)은 조선의 역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로 인해 칠정산내외편이 만들어지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또한 조선 세조 때에는 투르크-페르시아계 무슬림 거주 지역에서 수출하는 도자기 안료인 회청이 수입되었다. 이로 인해 청자를 넣은 청화백자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청화백자의 등장은 도자기 공예 기술의 혁신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조선시대에 거주하였던 무슬림들은 주로 조정과 상류층 사회와의 교류를 담당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조정 행사에 공식적으로 참석하였을 정도로 이들의 위치는 중요했다. 그러나 이들은 소수였으며 조정과 주로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이 대중 속에 정착되지 못했고 결국 자생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지배층 중심의 성격은 민중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급변하는 대내외적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2. 19세기 투르크계 무슬림들의 이주
이슬람은 신라와 고려, 조선 시대 때까지 한국과 문명을 교류하고 이슬람선교를 시도했다. 15세기 중엽 조선의 세종 이후 약 4세기의 공백기 후에 이슬람 선교는 19세기 말부터 다시 진행되었다. 1898년 러시아의 청조(淸朝)로부터 동청(東靑)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계기로 러시아의 투르크계 무슬림들이 중국의 하얼빈(Harbin)을 중심으로 만주 일대에 러시아 전역으로 이주하여 움마를 이루게 되었다.
그 후 1915~1920년 사이에 제 1차 세계대전과 볼세비키 혁명을 계기로 투르크계 무슬림들이 국내에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1920~1940년 중반까지 200~250여명의 투르크인들이 한반도 전역으로 이주하여 이슬람공동체를 이루었다.
국내에 거주했던 투르크계 무슬림들은 주로 의류 도·소매업을 중심으로 포목점과 양복점을 경영하였는데, 상업과 국제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면서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들은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목포, 대전, 평양, 신의주, 청진, 홍남 등 전국에 걸쳐 이슬람공동체를 이루면서 종교적·문화적 활동을 지속해 갔다. 이들은 서울, 부산, 대구 등지에 이슬람 마을(Mahall-i Islamiyeg)이라는 공동체를 형성하였으며, 서울 시내의 중심가에는 이슬람 학교(Mekteb-i Islam)을 통하여 무슬림 자녀들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투르크 무슬림들은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계인들 및 고위 군부들과 밀접한 협력 관계를 추구하면서 무역과 상업 활동으로 인한 경제적인 부를 축적했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일본의 패망 이후로 불안한 국내 정치상황으로 인하여 투르크 무슬림들은 1940~1950년간에 캐나다, 미국, 호주, 터키 등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에 일제 치하를 겪은 우리 민족은 나라의 아픔을 끌어안고 같이 해결하려고 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경제적인 부만을 얻고자 하였던 투르크인들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갖기도 하였다. 결국 투르크 무슬림들은 한국에 이슬람을 적극적으로 포교하지 못했고, 한국의 공동체 형성에 특별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3. 6.25 전쟁 이후
1950년 한국전쟁 다시 유엔군 소속으로 터키의 군인들이 한국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참전한 병력의 규모는 미국 다음으로 여단 규모의 병력을 파병하였다. 당시 압둘가푸르 카라이스마일오울루(Adulgafur KaraismailogLu)라는 터키 제6여단 사령부의 군 이맘(Imam)은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선교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압둘라 ‘김유도’와 우마르 ‘김진규’ 등이 개종하였고, 이들은 1세대 한국인 무슬림들로 형성되었다. 이후 김유도와 김진규는 1955년 9월 15일 ‘한국이슬람협회’를 결성함으로서 적극적인 이슬람 선교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슬람 선교 활동은 교육에도 이르렀는데, 한국 전쟁 당시 후방에서는 ‘앙카라 학교’를 건립하여 전쟁고아의 양육과 교육활동을 하였고, 1956년 4월에는 ‘청진학원’을 설립함으로서 중등교육과 이슬람 교리교육을 무료로 실시하기도 하였다.
1956년 주베이르 코치(Zubeyr Koch)가 2대 이맘으로 부임하면서 입교자는 ‘208명’에 이르게 되었고, 1959년 이슬람협회 지도자였던 김진규는 서정길과 함께 이슬람 국가를 순방하면서 한국 이슬람의 실정을 알리고 후원을 요청하였으며 1960년에는 한국 무슬림으로는 최초의 성지 순례자들이 되기도 하였다.
그 이후 계속되는 지원을 통하여 1965년 4월 ‘한국 이슬람교 중앙연합회’가 조직되었고 1967년 3월 13일 ‘재단법인 한국 이슬람교(Korea Islamic Foundation, KIF)’로 종교법인 등록을 하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한국 이슬람의 중추적인 의결기구로서 활동하고 있다.
1970년 9월에 한국정부는 용산구 한남동의 1,500평의 땅을 이슬람 중앙성원 건립용 부지로 기증하였고, 이후 이슬람 국가들의 재정적 후원으로 1976년 5월 21일 이슬람 성원의 개원식이 있었다. 이때부터 한국 이슬람은 증가하기 시작하였는데, 1960~1970년대에는 한국 기업들의 중동 국가 진출을 계기로 3,700명이었던 이슬람 인구가 약 두 배로 증가하기도 하였다.
1977년에는 한국에 이슬람 대학을 건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슬람 대학 건립 추진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2차 석유파동을 계기로 1980년 5월에는 최규하 전 대통령이 칼리드(Khalid) 사우디아라비아의 왕과 한국 이슬람 대학 설립을 합의하였으며 경기도 용인 13만 평의 이슬람 대학 부지를 기증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이슬람 교육 및 연구 활동이 활발하였는데 1997년 ‘세계 무슬림연맹(Rabita)'과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 주체로 무슬림 학자 20여명과 100여명의 국내외 이슬람 학자들이 모여 “동아시아의 이슬람 ― 역사와 문화적 조화의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이렇듯 현대에 들어서 이슬람은 활발하게 선교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한국 내에 무슬림들은 조금씩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출처 : FIM선교회 대표 유해석선교사 (전 총신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