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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이슬람

 

하나님은 우리와 무슬림을 모두 사랑하신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믿고 사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만 아직도 무슬림에게 예수는 예언자요 선생일 뿐이다.

 

지금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이슬람이 확장되고 있다. 아시아의 2/3가 무슬림이다. 그곳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 the poorest unreached people들이 사는 곳(극빈국은 10/4082%가 있다)이다. 10/40에서 이슬람의 인구가 1위를 그 다음이 힌두교이어서 아시아 전체가 복음화의 대상 지역이다.

 

이슬람의 인구는 산아제한이 없어서 연 5천만명이 늘고 있다.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때 이슬람 문명의 핵심국이 되었다. 그후로 오늘날까지 이슬람 세계에는 핵심국이 없지만 이슬람은 부흥의 기회를 얻었다. 이슬람의 부흥은 서구화에 대한 반작용이지 근대화에 대한 반작용은 아니다. 지금은 이슬람의 부흥이 이슬람 사회의 중심에 놓인 주제다. 그러나 이슬람의 부흥운동도 어느 시점에 가서는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인구증가도 21세기의 20년대와 30년대 사이에는 한풀 꺾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이슬람 -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

 

오래전에 한국에 입국한 아시아 사람 수는 200만명이 넘고 있다. 한국의 이슬람은 5개이상의  모스크와 2개의 문화 센터를 두고 약 4만명의 신도들이 현재 포교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 지도자들의 대부분이 원리주의 색채를 가진 학자, 중산층, 지식인으로서 국내대학을 중심으로 중동 이슬람권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20여명의 박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 중동의 원리주의자들이 모두 젊은 청년, 대학 졸업, 전문인 의사, 박사 등이 주류를 이루는 것과 그 궤를 같이 한다. 그들의 대외 활동에는 1989년 서울 지역 중고교 역사 담당 교사들을 초청하여 이슬람 역사 바로 잡기라는 모임을 가졌고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대우재단 지원 󰡐이슬람 세계의 이해󰡑라는 이슬람 연속 강좌를 열었다. 1989년에는 대우 재단 빌딩에서 이슬람학을 선보인다는 명목으로 많은 학자들을 모여 한국 이슬람학회 총회를 가졌고 그 뒤 꾸란 번역을 실시하고 이슬람에 대한 책을 윤독하였다. 현재는 중동 각국 역사의 연구와 이슬람 종파 연구를 하고 있다.

 

한국 이슬람 중앙회측은 1990년대에는 <선교>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이슬람 선교>라는 말을 대외 홍보 책자에 사용하여 우리 기독교인들이 보기에 이 책자가 기독교인의 책인지 이슬람교의 책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슬람 세미나 󰡒이슬람과 한국 그리고 세계󰡓(1994), 󰡒이슬람과 평화󰡓(1995), 󰡒이슬람과 다른 이념󰡓(1996), 󰡒동아시아의 이슬람-역사와 문화적 조화(1997)󰡓라는 제목으로 이슬람 세계의 여러 학자들을 초청하였는데 세계 이슬람 연맹과 한국 학술진흥재단이 후원하고 주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대사관과 대우와 한국 아랍 친선협회가 협찬하였다. 이런 활동은 곧 이슬람이 <배움>을 통해 포교의 기치를 내결었던 이슬람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무슬림은 <믿으라>하지 않고 <배우라>고 말한다. 거기에다가 사무엘 헌팅턴의 이론을 빌려 앞으로 21세기에는 이슬람이 새로운 역할을 다방면에서 갖고 그 중심축이 유고 문화권과 이슬람이 만나는 아시아라고 강조한다.

 

금년 한국 이슬람 중앙 연합회는 한국 이슬람 문화 연구소를 개원하고 수석 연구원 1, 책임 연구원 3명이 이슬람에 대한 종합소개서를 발간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연합회측은 이슬람 대학 대학원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한국에서의 이슬람 선교 방안을 제시한다.

 

이상의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의 활동을 살펴보면서 무슬림에 대한 선교 방안과 대책을 생각해보자.

 

첫째, 이슬람 연구는 단지 이슬람 위주의 연구에서 떠나야 하겠다. 한국의 무슬림은 단지 강의 초청에는 응해 줄 수 있으나 이것이 진정한 화해와 공존의 장이라고 보기에는 미약하다. 더구나 한국인 중에 이슬람을 전공한 기독교인 학자는 극소수다. 이슬람 연구는 앞에서 보았듯이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 측과 한국 이슬람 학회에서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슬람측이 연구해 놓은 자료를 재검토하고 그리스도의 빛으로 바라볼 수 있는 성경적 안목과 이를 선교에 유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둘째,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는 한국인들이 이슬람을 오해와 편견으로 바라보고 언론매체가 이를 오도하고 있으며 기독교인들이 이에 일조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의 무슬림은 아랍어로 된 꾸란을 정확히 번역하지 않거나 이슬람을 사실적으로 기술하지 않아 앞으로 기독교인 이슬람 학자들의 양성이 절실히 요구된다. 중고등학교에서 이슬람을 과목으로 가르칠 때에도 이슬람 학자들이 호교론적으로 이슬람을 전달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현재 아세아 연합신학대학과 성결 대학교에서만 아랍어가 강의되고 있을 뿐 대부분 신학대학에서는 이슬람권 선교에 대한 강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셋째, 아랍어가 2001년에 중학교에서 생활 아랍어로, 2002년부터는 고등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개설될 계획으로 이미 교육부에서 발표한 바 있고 현재 교재 집필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아랍어는 이슬람의 언어이다. 물론 2,000만명의 아랍 기독교인들이 의사소통을 위해 쓰고 있지만 약 3억이 아랍어를 국어로 쓰고 세계 12억의 무슬림의 예배언어로 쓰이고 있다. 아랍어로만 되어 있어야 꾸란이라 불리고 알라는 아랍어로만 대화할 수 있다하여 아랍어를 천상의 언어로 불린다. 다시 말해서 아랍어를 배우면 이슬람을 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 아랍어 학습자들을 이슬람권 선교에 동원한다면 이 또한 극히 소외된 이슬람 지역 복음화에 하나님이 크게 쓰실 것이다. 아랍어 성경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표준아랍어로 되어 있어 아랍인 중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적절하고, 또 하나는 중동 23개국의 각국 방언으로 된 성경이 있는데 각 지역 복음화에 긴요할 것이다.

 

넷째, 1970년대 중동에 갔던 200여만명의 한국인 근로자에 대한 이슬람 포교를 한국 이슬람 중앙연합회가 하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지금 한국의 무슬림의 대부분이 당시에 근로자로 갔던 사람들이라는 데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또 이슬람 지역으로 유학을 가는 학생들은 돌아와서 이슬람 중앙연합회에서 일하고 있고 중동 현지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의 활동을 보고하고 있어 보안상의 문제도 신중을 기해야 할 형편이 되었고 최근들어 한국에 입국한 중동 무슬림들이 한국 체류를 위해 한국어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어 이들이 본국에 돌아가서 한국인과 만나게되면 한국인 선교사들의 활동이 쉽게 노출될 것이다. 게다가 한국에 입국한 아시아인 무슬림과 국제 결혼도 잦아지고 있어 앞으로 이슬람 가족제도를 전혀 모르는 한국 여성들의 사회 문제도 상당히 우려되는 형편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우리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무슬림들이 계속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보다 훨씬 더 복음에 적극반응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세계를 움직이고 계신다. 이제 하나님이 무슬림들을 어떻게 그리스도 앞으로 부르시는가 이야기해야겠다. 첫째, 정치적 사건을 통해서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엄격한 이슬람법을 시행하게 하였지만 이슬람의 그런 형식이 환멸을 느끼게 해 주었고, 그 결과 성경을 사러오는 숫자가 늘고 그리스도를 찾으러 교회에 나오는 무슬림 숫자가 늘고 있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 파키스탄에서 지아울 하끄 대통령이 정부에 이슬람법 시행을 강행하자 더 많은 성경이 팔리고 성경통신 강좌에도 더 많은 인원이 등록을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고백 하는 수가 더 많아졌다.

 

북부 이라크의 쿠르드인들이 동료 무슬림 사담 후세인 치하에서 그들 역시 더욱 복음에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이라크는 아랍족(78-80%)과 북부 쿠르드족(15-20%), 그리고 중부 순니(32-37%)와 남부 시아(60-65%)로 이루어져 이라크가 형성될 당시부터 복합적인 집단이었고 이들 각 공동체는 각기 동화되지 않은 채 살기도 했다. 쿠르드족에 대한 이라크 바아스당 정부는 당근과 채찍의 정책을 펴왔다. 쿠르드 문화 복원사업을 적극 지원하면서 쿠르드족 저항 운동만큼은 엄히 탄압하였다. 바아스당은 쿠르드족 분리주의 운동을 용납치 않았고 특히 석유가 많이 매장된 키르쿠크를 쿠르드족 자치지역에 통합시킬 수 없었다. 이로써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이라크 북부 쿠르디스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시행하여 수십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4천개 이상의 마을을 파괴시켜 수백만의 난민을 낳게 했고, 19969월 사담 후세인은 탱크를 비롯한 중화무기를 동원해 쿠르드 지역을 탄압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쿠르드인들이 복음을 갈망하게 되었다.

 

동서냉전의 상징이었던 구소련과 동구권이 붕괴되면서 중앙아시아의 여러 공화국에 사는 무슬림들은 70여 년간 무신론 공산주의 치하 이후 영적 갈증으로 복음에 적극 반응하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정치적 상황을 사용하신다.

 

둘째, 자연의 대이변을 든다. 방글라데시가 몇 년간 대홍수로 고생하고 있을 때 기독교 단체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제하였고,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에서 가뭄과 기근으로 허덕이는 아프리카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빵과 양식, 의료와 봉사를 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기독교인의 구제와 개발 사역 팀들이 무슬림이 하는 것보다 훨씬 반응이 좋아 무슬림들마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게 되었고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있다.

 

셋째, 사람들의 이주를 든다. 전쟁이나 도시화 등 살 기회를 찾아 이주하는 사람들이다. 구소련이 아프카니스탄을 침입함으로써 아프칸 사람의 1/4를 난민으로 만들었다. 1989년 구소련의 철수후 지난 8년간 계속돼 온 내전이 1997525일 끝났다.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학생 무장 조직 탈레반(순니파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 아프간 난민촌 이슬람학교 학생들로 구성됨)이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점령한 것이다. 지난 8년간 많은 수가 복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나라로 이주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찾았다.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입한 걸프전에서도 많은 난민들이 그리스도인 도움의 손길을 받았고, 그리스도께 향했다.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 등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복음에 대한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되었고 그들이 소외되었다고 느낄 때 기독교 단체들이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친구가 필요하여 또는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더 열려있는 도시로 이주하는 사람도 있다. 나중에 이들 중 많은 수가 세속화되고 환멸을 느껴 원리주의 이슬람을 택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께 올 수 있는 창문도 열려 있음을 본다.

 

네 번째는 능력에 대한 갈망이다. 병고에 시달릴 때와 악귀의 두려움으로 무력감을 느낄 때 특히 그러하다.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의 응답으로 자신들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고, 심지어 고난 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게 되었다. 이것은 곧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지의 무슬림 지역에서 교회가 성장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다섯째, 종족의 회생이다. 쿠르드인들이 같은 종교를 가진 후세인에 의해 압제를 당하는 곳에서 하나님이 이것을 어떻게 쓰시나 보게 되었다. 외국의 것이라 느끼지 않고 문화적으로 적절한 방법을 써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예배하는 무슬림들을 방글라데시에서 보았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통해 강한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강함을 약함 속에서 완전해진다는 사실을 배우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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