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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 遠征 때 코란 탐독한 나폴레옹,

                 그도 실은 무슬림이었다

 

 

      나폴레옹이 가톨릭이나 개신교 신자대신 굳이 무슬림으로 바뀐 이유나 그 시점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평정으로 일약 전국적 인물로

바뀐 그가 이집트원정에 올라 그의 원정함대가 알렉산드리아항(港)에 닿을 즈음,

          그가 선상에서 6주간 탐독했던 책이 코란이었다는 사실은 영국의 역사작가

빈센트 크로닌이 남긴 <나폴레옹>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가 이집트의 카디스(무슬림 법관), 쉬크(족장), 이맘(회교僧)들을 모아놓고

선포한 첫 포고령은 “내가 진정한 무슬림이라는 사실을 너희 국민들에게 고하라!”였고,

그 대가로 프랑스군 주둔지역 부근에  둘레 1.5마일 크기의 모스크(회교사원)를 짓겠노라는

약속까지 합니다. 이집트 종교지도자들이 나폴레옹에게 무슬림이 되는 징표로

할례와 (포도주의)금주를 요청하자 그는 잠시 주춤했으나 곧이어 타협이 이뤄집니다.

 


그가 향후 이슬람교를 적극 보호하고, 알라 신의 메신저와 선지자(모함메드)의 친구가

되겠다는 선언을 채택했고, 그는 실제로 유럽 전역에서 벌인 전투에서 승리할 때마다

그 영광을 알라신에게 돌림으로서 이 선언을 준수한 걸로 나타나있습니다.   

    

 나폴레옹이 황제 취임 대관식에서 왕관을 씌워주려는 교황을 거부, 자신이 손으로 

직접 왕관을 쓰는 장면.  자칫 나풀레옹의 위세와 교만을 시사하는 그림으로 오해되고 있으나,

실은 당시 나폴레옹은 이미 회교도로 바뀌어, 교황의 권위는 그에게 무슬림 교리 상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다비드 그림(1806~7)/파리 루브르 미술관 소장                      

                                         

그렇다면 훗날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이 대관식에서 교황이 씌워주는 왕관을 거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받아쓴 대목에 대한 해석은 달라져야 합니다.

교황의 왕관을 거부한 이유가 나폴레옹의 권위나 오만 때문이 아니라,

당시 이미 독실한 무슬림으로 바뀌어 있던 그에게 교황의 권위는

무슬림 교리 상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김승웅                        

 

예컨대 미국이민자의 경우 한 세대(30년), 유럽이민자의 경우 3세대가 지나면 정착이 가능하나

프랑스이민자만은 3세대가 지나도 개선은커녕 빈곤의 악순환을 되풀이,

그 정도가 타 지역 이민자의 5~19배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이슬람분포는 공식적으로는

7~8%에 불과하나, 이런 기회박탈로 인해 18~24세의 프랑스 청년 4가운데 한명은

이미 IS세력에 대한 동조자, 그것도 적극동조자로 바뀐 걸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니스의 트럭 테러를 다루는 과정에서 미국과 서구 언론이 보인 이 같은 스타일의 변화는

결코 취재보도의 낙후와는 무관한, 오히려 진보적이고 거시적 접근이라는 소회가 듭니다.

니스 테러범인 한 무슬림 운전자의 소년시절이나 프랑스이민경위나 캐는 기존의 미시적 취재로는

이슬람이라는 매머드조직의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마치 교전당사국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도 모르고 전선에 임한 미군장병들의

정훈(政訓)자료로 미 국무부가 태평양 전쟁 중이던 1944년, 당시 컬럼비아대학 인류학

여교수 루스 베네딕토에게 ​<국화와 칼>이라는 명저의 집필을 의뢰한 것과 유사한

접근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테러취재의 스타일 변화를 기해 일본 자리가 무슬림으로 바뀐 것입니다.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문화일보·시사저널 워싱턴특파원 역임>

 - 2016년 7월 25일字 이투데이 칼럼 "세계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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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선교전략-터키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교회가 탄생된 곳도 있다

 

들어가는 말 

미국을 중심으로 여러 서방국가들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였고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되기 전 많은 세인들의 생각 가운데 '이슬람' 하면 다만 '코란과 칼' 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9.11 무역센터 자살 테러 이후 '코란과 칼' 이라는 이슬람에 대한 선입견 속에서 이제 이슬람은 곧 ‘테러 집단’ 이라는 생각으로 세상 사람들의 생각 속에 새롭게 자리 잡은 것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이라크 공격이후 서방 국가들은 이제 이라크 공격을 통해 자국이 무엇을 잃었으며, 무엇을 얻었는가에 대하여 나름대로 계산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특별히 이슬람국가 안에서도 온건파와 강경파간의 보이지 않는 부딪힘과 그리고 엇갈린 주장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한 예를 들면 지난 3월 중순 터키를 방문한 요르단 국왕 압둘라 왕은 이제는 온건한 이슬람주의자들이 일어나 이슬람 강경파들에 향해 ‘이 정도면 되지 않았느냐? 코란에는 테러와 관련된 내용들이 없지 않느냐? 라는 목소리를 내야 된다’ 라고 주장하였으며, 또한 지난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인권운동가 ‘시린 에바디’ 여사는 인도네시아에서 열렸던 한 세미나에서 ‘진정한 이슬람은 테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라고 주장을 했다.(2004년 3월 18일 터키 휴리엣트 신문서 발췌) 

이처럼 이슬람 국가 안에서도 이제는 그들이 안고 있는 테러 집단이라는 오명을 씻고 새로운 이미지를 위한 노력을 시도하는 것도 사실이다. 

본인이 사역하고 있는 터키는 전체 국민 98%가 이슬람을 신봉하는 이슬람 국가 중 하나이며, 과거엔 오스만 제국을 건설했던 자부심을 안고 언젠가는 다시 한 번 이러한 꿈을 실현해 보겠다는 욕망과 ‘아타튜르크’ 초대 대통령 및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이어가는 군인들의 ‘케말주의’, 그리고 유럽이 접해있는 이유로 인해 유럽 문명 속에 세속적인 문화와 케말주의와 그리고 종교와 정치를 일원화 해보려는 일부 강경 이슬람주의자들이 서로 혼합되어 흘러가는 국가임을 먼저 밝힌다. 

이 논고를 쓰기 전 본인은 이슬람을 위한 전략가도 아니며 또한 이슬람을 연구하는 학자도 아님을 미리 밝히고 다만 중동권에서 사역을 감당하는 한 사역자의 시각으로 특히 비 아랍권인 터키를 중심으로 이슬람에 대한 선교전략을 논할까 한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白戰百勝)이라는 말이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의 전쟁에서 백 번 다 승리할 수 있다’라는 중국 병법가(兵法家) 손자의 모공 편에 나오는 병법 중에 한 방법이다. 

성경에서도 민수기 13장과 여호수아 2장에서 모세와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말씀에 준하여 모세는 열두 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냈고, 또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여리고 성을 공격 하기 전,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 그곳의 상황을 파악한 사례가 성경에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에서도 여호와의 도우심 속에서 먼저 상대방의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라고 생각하기에 비아랍권인 터키의 최근 상황을 먼저 나누기를 원하다.

 

1. 터키 사역자 및 선교활동 변화 비교도 

(1) 연도별 성도 및 선교사 숫자 비교 (2003년도 선교사 통계에서 단기 90명을 제외한 것임) 

연도별 1961년 1971년 1981년 1994년 1998년 2003년 

선교사 수 2명 20명 50명 400명 600명 988명 

현지인 신자수 2명 20명 50명 400명 1121명 2000명 

위 도표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1998년을 기준하여 2003년도까지 선교사의 숫자 및 성도숫자가 급성장하고 있다. 또한 아직 사역자들의 대다수가 대 도시에 거주하고는 있으나 기타 지역 즉 동쪽 및 작은 도시로도 이전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 글로벌 시대 속에서 커뮤니케이션 정보화 발달로 인한 모든 기술과 지식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졌으며 생활수준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유럽 공동체 가입을 추구하는 가운데 서구 문화 및 생활습관을 닮아가려는 생활방식 속에서 나타나는 유럽화 현상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개인주의, 인권 옹호, 타종교에 대한 터키인의 이해력이 증가하였다. 

끝으로 비아랍권인 터키 현지인들을 택하여 아랍권 무슬림을 향하시는 마지막 시대의 성령의 증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터키 현지인 사역자가 98년도 25명에서 2003년도 47명으로 53%가 성장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효율적인 선교 전략 및 접근 방법 


본인은 앞에서도 밝힌 것처럼 이슬람 선교 전략가도 아니고 또한 학자도 아니므로 일반적인 상황은 접어두고, 다만 사역자로써의 실질적인 상황을 중심으로 좀 더 효율적인 전략에 대해서 7년 전 바울 선교사 중동지부 대회에서 먼저 밝혔다. 

그 당시 발표한 효율적인 전도 방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가족 중심의 전도: 터키는 철저한 가족 및 장자 중심의 사회이다. 그러므로 한 가정의 가장이 변화가 되면 그 가족의 변화는 어느 나라보다 용이하다. 접촉점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 가족 중심의 모임 및 프로그램의 활성화가 필요하다. (가족 캠프, 부부 및 가족 세미나 등등) 

2) 알레비를 통한 사회적 분위기 조성: 터키 국민의 15-20%가 알레비에 속한다.(시아파) 이들은 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으며 일반 회교사원에는 참여치 않는 가운데 가정에서 스스로 예배를 드리며, 보이지 않는 사회적 불평등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현재 터키 내에서 개종한 현지 신자들 중에 대략 80%가 알레비에 속한 자들이다. 

우선 이들을 향한 선교전략을 통해 사회적 보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이들을 통한 이웃과 친척을 향한 선교전략도 필요한 것 같다. (참조: 알레비란 시아파의 한 분파로써 모하메드의 사위이며 4대 칼리프였던 ‘알리’의 추종자들이다. 이들은 코란 보다는 ‘알리’의 가르침을 더 중요시 여기며, 통치권의 계승문제로 인하여 ‘알리’가 사원에서 칼로 피살당한 이후 이들은 잠이(회교사원)에 참석치 않는다.) 

우리들은 먼저 왜 이토록 이슬람권에서는 가족을 중요시 여기는가에 대해서 이해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 ‘필 파샬’ 이 지은 ’무슬림 전도의 새로운 방향‘이라는 책에서 ’할레블리언‘의 주장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가족은 큰 집 하나에 살거나 아니면 여러 집이 붙어서 산다. 수입과 지출은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나누지만 제일 웃어른이 담당한다. 재산도 대가족에게 공통으로 소유된다. 서구의 핵가족 특성과 달리, 대가족은 더 많은 안정감이 있고 결속감이 있다.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나 몸에 병이 들 때 혹은 누가 죽을 때, 주변에 돌봐줄 가족이 있다. 대가족은 젊은 부부가 아이를 낳거나 요리를 하고 집안일을 할 때 그 방법을 가르쳐주고 도와준다” 

또한 그는 새로운 전략을 위해 다음과 같은 사항도 지적하고 있다. 


“모임의 구성원이 여성들, 아이들, 학생들로만 이루어져 있으면 무슬림전도가 성공적으로 되지 않을 것이다. 무슬림 남성이 전도 활동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신자들은 주변의 친구들이나 친척들 중 여러 명을 그리스도께로 데려올 때까지는 신앙을 공개적으로 나누는 것에 있어서 신중하도록 해야만 한다. 신자를 기존에 속해 있던 공동체에서 빼내는 ‘축출작업’을 멈추어야 한다. 신자들은 자신이 속한 문화에 남아 있어야 한다” 


무슬림 가정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남성위주의 선교전략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본인도 이러한 주장에 적극 동의하며 좀 더 나아가 남성위주뿐만 아니라 가족 중심의 전도 활동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터키는 청장년을 중심으로 한 전도활동과 개종이 활발하며, 본인이 섬기고 있는 가정교회도 가족중심으로 75.8%가 나오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24.2% 출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무엇보다도 가족중심적인 복음 전도 활동이 중요하다. 

또한 이러한 주장을 보충하기 위한 한 예를 들자면 본인이 사역하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C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어느 날 이름도 모르는 한 사람으로부터 그 마을 A라는 중년이 성경을 받으면서 일이 시작된다. 

A라는 중년은 받은 성경에 관심을 두지 않고 서랍 한 구석에 놓는다. 얼마의 기간이 지난 어느 날 그 중년은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이것, 저것을 찾다가 문득 과거 자신이 받았던 성경을 다시 보게 된다. 그는 다만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손에 쥔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 

성경을 읽어나가면서 그는 그 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영접하며, 끝내는 자신이 안고 있는 새로운 삶 속에서의 기쁨을 먼저 가족과 나누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온 가족이 믿고 그 다음엔 가까운 곳에 함께 사는 친척들에게 전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많은 핍박과 조롱과 감시가 있었다. 

작은 마을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신의 생계를 위협하는 일일 것이었다. 그러나 함께 믿음을 공유하고 있는 가족들의 격려 속에 복음 전도는 계속되고, 이젠 마을의 대부분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매주 예배를 드리는 마을로 바뀌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자생적으로 교회가 탄생된 곳도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의 상황을 정리해보면 먼저 성령의 역사와 증거가 있었으며, 그리고 사회에서 보이지 않게 소외받고 있는 종교집단인 알레비라는 이슬람 한 종파를 믿는 사람들이었으며 그리고 가족 중 장년, 즉 어른이 먼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에 대항하는 여러 가지 반대도 적었으며, 그리고 이웃이 여러 모습으로 핍박을 할 당시에도 가족 구성원끼리 서로 격려하는 믿음의 나눔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족은 모슬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있어서 큰 자산과 같다. 이것은 이슬람사회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얼마 전 터키를 방문하여 세미나를 주최한 ‘정민영’ 사역자도 이슬람권에서 교회개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잇다. 


“이슬람은 공동체가 강한 종교이고, 우리의 일은 제자를 삼는 것 그리고 양육하는 것이다. 교회로 모이면 이슬람권에서 박해 당할 때 공동체적으로 서로 도울 수 있다. 따라서 효과적인 전도사역은 서로 돕고 세워줄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종족, 환경)이 주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좀 더 쉽게 결단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본인은 이슬람권에서의 좀 더 나은 선교 전략 가운데 하나로 가족을 위한 복음 전도 활동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인 전도 방식보다는 단체의 전도 방식을 이용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족 중심의 전도 활동을 긍정적으로 이끌고 나가기 위해선 여러 가지 갖추고 준비되어질 사항들이 있다. 

 

1. 가족중심적인 행사 


무슬림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족중심으로 복음 전도 활동을 위해서는 필요한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족중심적인 행사가 필요할 것이다. 그에 따른 예로는 부부세미나, 가족 체육대회, 가족 오락 프로그램, 가족 식사초대, 가족이 함께 영화 관람 등등 가족이 함께 동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져야 하며 그에 따른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 라는 격언이 있듯이 사역자들은 우선 주변의 이웃들과 무엇보다도 가깝게 지내야 될 필요가 있다. 그들로부터의 최소한의 신뢰를 얻어야 될 것이다. 자신이 인정하는 친구들에게는 어떠한 것도 아낌없이 주고 보살피는 이들의 풍습과 신앙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역자들은 우선 가족 중심의 믿음을 그리고 친구로써의 믿음을 심는 것이 이슬람권에서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빠른 선교 전략일 것이다. 우리들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것을 주님은 성육신 삶을 통해서 먼저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 실천하셨다. 


2. 사회 고위층을 향한 전략 


다니엘이 바벨론으로 나라를 잃고 포로로 끌려간 시절에, 그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들은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벨론의 여러 총리와 방백들의 음모로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통해 다리오 왕 자신이 바벨론 온 땅과 백성들에게 다니엘이 믿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조서를 내리는 것처럼 (단6:16-27) 이슬람권의 사회 고위층이 자신의 믿음을 나누는 일은 그 어느 것보다 여파와 효과가 매우 클 것이다. 

물론 다른 사회적 분위기에서도 같이 느끼는 일이지만 특별히 수직적인 생활 방식에 익숙해 있는 이슬람권에서의 고위층의 한 마디는 매우 영향을 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가족적인 고위층 접근을 통한 선교전략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선 사역자 가족에게도 좀더 여유로운 생활과 문화 생활 등이 필요할 것이다. 


3. 성령의 역사와 증거가 있는 사역적인 전략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뜨거운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능력이 나타나고 많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특별히 이슬람권에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한 선교전략도 매우 중요하다. 이들은 아직까지 무속적인 신앙이 혼합되어있는 가운데 무술적인 행위와 점, 그리고 이상한 현상 같은 것에 매우 중요점을 두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증거와 함께 복음 증거는 매우 중요한 전략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씀을 근본으로 하는 믿음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와 증거 전략이 필요하다. 

본인이 사역하고 있는 도시에서도 몇 년 전 유럽 모국가에서 젊은이들이 와서 많은 능력을 행하며 교회를 이루어 나갔다. 그들은 몇 달도 안돼, 상상할 수 없이, 몇 백 명씩 모이는 가운데, 다른 모든 가정교회들이 주춤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능력에만 치중하고 말씀에는 소홀히 한 결과, 지금은 아무도 없고 교회마저 문 닫고 이곳을 떠난 사건이 있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와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을 근본으로 하며 함께 병행하는 지혜로움이 필요한 것이다. 

‘한 걸음에 모든 것을 다 이루겠다‘라는 생각은 이슬람권에서의 가장 커다란 실패의 원인이다. 인내하며 그들 편에서 바라다보고 참아주며 격려하며 사랑으로 하나 하나 열매를 맺어 나가는 것이 가장 느린 길인 것 같지만, 바로 이것이 이슬람권에서의 가장 빠른 길이며 가장 안전한 선교전략일 것이다. 

결론 


성경 말씀 가운데 살전1:5절에서 "내가 여러분 가운데 어떻게 살았는가를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 라며 바울은 부모처럼 함께 살면서 섬겼음을 밝히고 있고, 이어서 바울 사도는 6절에서 “주를 본받는 자”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무슬림들에게 보여주는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성경 빌4:9절에서 “나를 본 것처럼, 나처럼 하라”는 말씀처럼 무슬림들에게 사역자 자신에게 나타나는 열매와 삶의 본을 권유하며 그리고 추천하며 하늘의 복을 함께 나누는데 있어서 초청이 필요하다. 

바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 및 지도자들을 보고 자신들도 그렇게 했다. 

사역자가 다시 돌아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본이 되는 삶을 사는 신자들을 만드는 것이 사역자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취할 첫 원리인 동시에 가장 빠르고 가장 확실한 전략은 바로 “성경대로 행하자” 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행하는 삶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선교사들이 다른 접근에 대해 더 관심 갖는 것을 우리들은 자주 보게 된다. 우리들은 좀 더 나은 선교 전략을 위해서, 그리고 선교 열풍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뒤돌아볼 여유가 필요하며, 한국교회에서도 중동지역에서 사역하는 사역자들에 대한 인식이 무엇보다도 바뀌어야 되는 가운데 다른 동남아시아 지역보다도 중동에 있는 사역자들에 대한 관심과 격려와 후원이 더 절실히 필요할 때이다. 

지금까지 보여주고 있는 모습처럼 한국교회가 빠른 열매와 유행적인 선교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리고 어렵다는 이유로 인해 중동을 향한 선교 관심자들이 중동을 계속 회피한다면 지금까지 이루지 못한 어려운 일들이 계속 반복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하나님 나라 완성에 지연을 초래하게 되며 이것에 대한 책임도 우리들 각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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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단 한달을 마침을 보면서


이슬람에서 ‘신성한 달’로 여기는 기간인 라마단에 벨기에, 아프가니스탄, 영국 등 세계 곳곳에서 테러가 발생했으며
이슬람 달력으로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은 이슬람 신자들이 해가 뜬 시간에 음식을 먹지 않는 기간으로
지난달 27일부터 오늘 6월27일까지 일것이다..

 
라마단이 시작되는 날인 지난달 27일 아프가니스탄에서 차량 폭탄 테러가 일어나 십여 명이 숨졌으며
3일에는 영국 런던에서 차량 및 흉기 테러가 일어나 7명이 숨지고 50여 명이 다쳤고,
7일에는 이란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 소행의 테러가 일어나 최소 12명이사망했다
12일에는 파키스탄, 18일에는 이집트, 19일에는 프랑스에서 테러가 연이어 발생했다.

가장 최근에 일어난 테러는 20일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발생한 자살 폭탄 테러
용의자는 범행 직전 아랍어로 ‘알라 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라고 외쳐 이슬람 극단주의자였다고 한다.

‘피의 라마단’이라고 불릴 정도로 이 기간에 테러가 많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IS가 조직원들에게 라마단 기간에 테러를 일으킬 것을 부추기기 때문.
IS는 라마단이 신성한 기간이기 때문에 이 기간에 순교(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침)를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다고하는 이슬람교리때문일까?
무슬림(이슬람교 신자)들에게 라마단은 매우 신성하고 중요한 달입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알라(이슬람의 신)로부터 첫 번째 계시를 받은 달이라고 믿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 기간 동안 정해진 시간에는 철저히 금식(음식을 먹지 않음)을 하며 절제된 생활을 한다.
되도록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폭력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IS는 라마단에 테러를 일으키도록 부추기는 걸까요?
무슬림들은 라마단에 좋은 일을 하면 몇 배로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를 이용해 IS는 테러가 이슬람에 이로운 ‘지하드(성스러운 전쟁)’라며 라마단에 테러를 시도해 보상을 받으라고 꾀는 것이지요.
지난해에도 라마단에 사흘에 한 번 꼴로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죄 없는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목숨을 빼앗는 일을 저지르는 것은 분명 이슬람교의 교리에서 어긋나는 잘못된 일입니다.
IS는 종교에 대한 믿음을 악용(나쁘게 이용함)해 테러를 일으키고 있으며
테러로 사람들의 공포심을 커지게 만들어 자신들의 세력을 더욱 넓히려고 하는데 이것이 진정한 이슬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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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두 얼굴

 

그런데, 그들의 말처럼 정말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며, 폭력을 일삼는 극렬 원리주의자들은 정말 소수의 테러분자들일 뿐인가? 그들의 주장처럼 이슬람이 정말 그 정도이기만 하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하지만 이슬람은 두 얼굴을 가지고 둘 중의 어느 한 쪽을 편의에 따라 선택하여 사용하는 변신에 능한 이들임을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다. 심지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이슬람은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이며, 테러를 자행하는 극렬 원리주의자들은 소수일 뿐이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온건한 이들이며 우리와 같은 선한 이웃일 뿐이다는 주장들을 당연하듯 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바로 이 점이야 말로 이슬람 전략가들이 가장 노리는 전략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슬람은 평화를 의미하며 따러서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다라고 말하길 좋아한다. 하지만 이슬람'평화의 뜻이라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거짓이다. ‘평회를 의미하는 아랍어 단어는 쌀람’(히브리어의 샬롬)이며, ‘이슬람은 단순히 복종’(submission)을 의미할 뿐이다. 이슬람은 알라의 뜻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들(무슬림)로 구성된 종교요, 그 종교의 경전인 꾸란(Quran)은 최소한 다음과 같이 무슬림들에게 명령한다.

 

박해가 없어질 때까지, 종교가 알라의 것이 될 때까지 그들과 싸워라”(꾸란 2:193)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이슬람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이 세계를 평화의 집(Dar Es-Esalam. 다르에 쌀람)’ 전쟁의 집(Dar Al - Harb. 다르 알 하릅)’ 으로 이분한다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여타의 종교들을 물리치고 그들이 꿈꾸는 이상적 이슬람 공동체(움마)를 이루어 이슬람의 율법(샤리아)으로 다스림 받는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세계관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땅에 이슬람이 아닌 다른 종교들이 공존하는 현실을 가장 견디지 못하는 종교가 바로 이슬람인 것이다.

 

흔히 꾸란이냐 칼이냐?” 라는 문구로 이슬람을 이해하던 과거의 표현을 두고 무슬림들은 이슬람은 그렇지 않다. 평화의 종교인 이슬람에 대한 서구 기독교인들의 극단적인 편견이 담긴 표현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표현이야 말로 이슬람의 실체에 대해 가장 짧은 표현으로 그 이중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이슬람의 실체는 과거나 지금이나 그 근본에 있어서 변함이 없으며, 그 전략에 있어서도 옛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가 있다면 대신 총과 폭탄과 같은 현대식 무기로의 무장이라 하겠다.

 

이슬람은 처음부터 로 세계를 정복해왔고 여전히 을 휘두르며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이슬람에선 아무리 아니라하지만 이슬람의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 국가만 봐도 알 수 있다.

녹색바탕 위에 선명하게 보이는 아랍어 글씨와 그 아래에 놓인 긴 칼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알라 외에는 다른 신이 없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다!’ 하는 그들의 신앙고백이요,

그 신앙고백의 기초에는 엄연히 긴 이 놓여 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거기에는 그 고백과 함께 다른 상징은 아닌가?

 

하지만 그것이 굳이 평화를 위한 이라고 우긴다면,

평화모든 이교도와의 전쟁을 그치고 난 후의 평화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알라의 이름으로’ (비스밀라) 이 땅에 이교도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성전(聖戰. 지하드)해야 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온 세계가 이슬람 율법이 다스리는 이슬람 세계가 오기 전까지

 전쟁은 쉼이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오늘날 세계 속에서 테러소식이 가장 많은 나라들을 꼽아보라.

모두 이슬람이 국교이거나 절대 다수인 국가들이다.

왜 그럴까?

 

 경전을 통한 판단과 분별

 

아무리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평화로 포장하여 소개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절대적이고 규범적인 권위의 원천인 꾸란)코란)의 진술을 부정할 수는 없다. 꾸란에는 수많은 구절들이 무슬림들을 독려하면서 알라를 위해 투쟁(지하드)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여기에 몇 구절만 소개해 본다.

 

알라를 위하여 당신을 적대시 하는 자와 싸워라”(꾸란 2:190, 이하 김용선 번역본)

 

박해가 없어질 때까지, 종교가 알라의 것이 될 때까지 그들과 싸워라”(2:193)

 

알라와 그 사도에 싸움을 걸고 지상에 해악을 뿌리려 하는 자가 받는 벌은 살해되든가 십자가서 박히든가 손발을 반대쪽부터 절단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국외로 추방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현세에서 받는 그들의 굴욕이며 내세에서도 그들에게는 무서운 벌이기다리고 있다 “ ( 5:33)

 

그런데 신성월이 지났으면, 다신교도를 발견하는 즉시 죽여라. 잡아라 억류하라, 모든 길에 복병을 두고 기다리라. 그러나 만일 그들이 회개하여 예배를 지키고 희사를 한다면 방면해 주라, 알라께서는 관용하시고 자비로운 분이시다“ (9:5)

 

어떤 이들의 반박과 같이 기독교 역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살상과 전쟁들을 일으켜 온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그것을 경전을 통해 신의 이름으로 명시적으로 명령하는 것과,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칼을 든 것은 현실적으로 큰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어쨌든 이 명령들이 실제로 오늘날 무슬림들에 의해 수행된다고 가정해 보라. 세계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 구절들에만 의거해 보더라도 오늘날 테러행위를 서슴지 않는 극렬 무슬림들을 가리켜 어찌 소수의 극렬 윈리주의자라고 비난하겠는가? 오히려 무슬림들은 이러한 꾸란의 명령을 문자 그대로 수행하는 전사들에게 환호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땅에 사는 모든 무슬림들이 이러한 꾸란의 명령들을 문자적으로 실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정말 다행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마치 수 많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복음서의 지상명령을 끊임없이 읽고 또 듣고 살아가고 있음에도, 그렇게 심각하게 문자적으로 그 명령따라 살아가지 않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 그 명령을 발하신지 2천년이 되도록 그 명령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과업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꾸란을 읽는 수많은 무슬림들 역시 위에 명시한 구절들을 무자적으로 수행하지 않은 결과 그나마 세계는 이만큼이나 유지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아무리 주위에는 온건한 무슬림들이 많이 있다고 하지만,

이같은 알라의 절대적 명령들이 무슬림들의 가슴에 끊임없이 각인되는 한,

어느 날 예기치 않는 때에 그들은 오늘날의 테러분자들로 돌변하여 나타날 가능성들을 안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마치 수많은 기독청년들이 자아실현을 꿈꾸며 자기만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예수님의 제자 삼으라는 지상명령에 부담을 안고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슬람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단순한 도를 전하고 생명을 전하는선교가 아니라, 알라의 이름을 위해서는 테러와 피흘림도 불사한다는데 있다. 기독교의 선교 명령이 준행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자연스런 열매인 반면, 이슬람의 지하드가 수행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생명을 멸하고 파괴와 죽음이 열매로 맺어 나오는 현실이라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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