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풍성한 예배를 향하여

 

개혁주의 예배관 / 개혁주의를 말하다

이성호 교수

 

1. 서론: 예배의 대상이신 삼위 하나님

예배의 현장에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과 예배를 드리는 그의 백성이 존재한다. 둘 중에 누가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당연히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예배를 받으시는 분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온전한 예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오늘날 예배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예배를 받는 분에 대한 논의는 진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마치 예배를 받는 분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배를 받는 분에 대한 논의가 없으니 예배학이 하나의 인간학이 되어 버린다. 예배학이 범주 상 신학에 속한다면 예배의 주된 관심사도 예배를 받는 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예배와 나쁜 예배를 나누는 기준도 내가 얼마나 예배 속에서 은혜를 받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나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셨는가?”가 되어야 한다. 또한 예배학에 있어서 핵심 질문도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드릴 것인가?”가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예배를 받으시는가?”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를 거짓 종교와 구분 짓는 핵심교리이다. 이 교리가 이해하기 힘든 교리라고 해서 아예 제쳐 놓아서는 안 된다. 비록 이해하고 설명하기는 힘들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체험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예배는 그것을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체험할 수 있는 현장이다. 예배의 부름 속에서 삼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당신이 베푸신 잔치로 초대하시고, 우리는 송영을 통하여 그 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 삼위 하나님은 설교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 분에게 찬송과 기도로 응답한다; 삼위 하나님은 성찬 속에서 굶주리고 배고픈 우리의 영혼에게 참된 양식과 음료를 주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 양식을 받아 먹는다; 삼위 하나님은 축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는 아멘으로 화답한다. 예배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예배는 왕이신 삼위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함께 누리는 언약적 친교(covenantal communion)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신학과 예배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된 목적에 대해서 질문한다. 여기에 대한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고신교회의 진정한 고백이라면 예배는 교회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위치한다. 참된 예배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소교리문답이 가장 첫 질문에서 예배가 신자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라는 것을 두드러지게 교회에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교리문답은 교리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교리 혹은 신학은 예배를 위해서 존재한다.

 

신학과 예배는 분리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예배가 신학이고, 신학이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을 테오로기아(theologia)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theos)’(logos)’의 합성어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혹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로 번역될 수 있다. 신학을 이렇게 정의한다면 예배야 말로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예배 속에서 하나님은 설교를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들은 백성이 하나님께 기도와 찬송으로 응답하기 때문이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신학은 이성적인 성격이 강하다면 예배는 경험적 혹은 체험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신학적 작업을 통하여, 우리는 보다 분명하고 풍성한 이해를 가지고 예배에 임하게 되고, 그 예배의 결과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신학에 대하여 보다 굳건한 확신을 얻게 된다.

 

예배가 본질적으로 체험적이기 때문에 올바른 신학적 작업이 없다면 원래의 순수성에서 벗어날 위험성을 항상 안고 있다. 이것은 성경 자체가 그렇게 증거하고 있고, 교회 역사 속에서도 입증되어 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숭배의 늪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하였으며, 신약 이후의 교회에서도 순수한 예배 속에 세속적인 누룩이 항상 침투해 들어 왔다. 중세 로마 교회가 교리적으로 타락했을 때, 문제는 교리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예배의 타락으로 이어졌다. 만약 교리 자체만이 신*구교 사이에 문제였다면 종교개혁은 단지 교리의 개혁으로 끝났을 것이고 교회의 분열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개혁파 교회가 출현하게 된 결정적이 이유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고 싶은 거룩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이전의 예배 형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예배가 교회에서 드려지게 되었고, 참 성도는 그 예배 안에서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3. ‘오직 성경과 예배

 

일반적으로 종교개혁 당시 카톨릭과 개신교의 근본적인 교리의 차이를 이신칭의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들은 성찬에서 찾기도 한다. 처음에는 그렇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 그룹의 본질적인 차이는 권위에 관한 것이 분명해졌다. 개신교의 교리가 맞는지 아니면 로마교회의 교리가 맞는지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최종 권위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사소한 교리적 문제도 해결될 수가 없었다. 두 그룹이 결국 하나가 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 최종 권위에 대한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 두 그룹은 모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였으나 카톨릭은 성경의 충분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교회의 전통을 성경과 동일한 권위로 인정하였다. 반대로 개신교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충분하며, 모든 종교적 논쟁에 있어서 최종적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데, 언뜻 보면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 원리 때문에 두 교회가 결국 분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오직 성경은 특별히 예배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개혁교회는 이전에 전통의 이름으로 관습화되어 왔던 예전들을 비평적으로 검토하여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거나 부족한 것이 있으면 철저하게 개혁을 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개혁교회의 예배는 철저하게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예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개혁교회의 예배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성경에 충실한 예배라고 할 수 있겠다. 개혁교회의 역사는 바로 이 예배를 교회 안에 올바르게 정착시키기 위한 긴 투쟁의 역사였다.

 

4. 규범적 원칙(Regulative Principle): 개혁교회 예배원리의 독특성

 

오직 성경의 원칙을 교회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특히 이것은 예배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였다. 개신교 교회가 모두 오직 성경의 원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각 교파들 사이에 예배는 다양성이라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루터파와 개혁파의 예배가 다르고, 개혁파와 재세례파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다. 이 말은 오직 성경이라는 원칙을 각 교파마다 달리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터파의 경우 성경의 명시적인 가르침과 충돌하지 않는 한 성경이 허용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 결과 루터파는 성경의 가르침과 상충하는 로마교회의 화체설은 거부하였지만 로마 교회의 성만찬 예식은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한편 재세례파의 경우에는 성경이 직접적으로 명령한 것만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성경에서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가르침이 없는 유아세례는 예배에 있어서 거부되었다. 반면, 개혁파는 성경이 명시적으로 명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성경의 전체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고,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추론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필연적이고 선하다면 성경의 가르침으로 인정하였다. 유아세례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 특히 언약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너무나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예배에 대한 논쟁은 영국교회에서 보다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영국교회의 교권주의자들은 예배의 일치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영국교회는 영국 안의 모든 교회들이 따라야 할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작성하였다. 이름과 달리 이 책 속에는 기도에 관한 가르침뿐만 아니라 예배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예배 형식에 관한 세세한 규정을 담고 있는데 영국교회의 머리라고 불린 영국 왕들은 모든 영국교회 회원들이 이 책의 규정에 따라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엄하게 명하였다.

 

공동기도서는 내용에 있어서 로마교회의 반성경적 혹은 비성경적 예배를 배척하였고, 심지어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대륙의 개혁교회의 영향을 많이 반영하기도 하였지만, 보다 더 철저하게 예배가 개혁되기를 원하였던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이들은 청교도라고 불렸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공동기도서의 가장 큰 문제는 개 교회의 자유가 박탈당하였다는 사실에 있었다. 청교도는 성경이 명시적으로 규정한 것만이 신자의 양심을 구속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은 개 교회의 자유에 맡겨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규범적 원칙이라고 하는데,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모토가 예배의 영역에 적용된 것이다.

 

예를 들어 성직자가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는 성경에서 침묵하고 있는 비본질적인 영역(아디아포라)이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각 교회가 알아서 판단할 문제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각 교회에 주신 자유의 영역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고 보았다. 반면 영국교회 지도자들은 각 교회에 그와 같은 자유가 주어지게 되면 교회의 가시적 일치가 상실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기 때문에 성경과 명백히 상충하지 않는 한 비본질적인 문제는 교회의 지도자, 보다 구체적으로 주교회의에 의해 결정되어 통일성 있게 실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예배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위해 오랫동안 투쟁을 하였고 마침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예배모범에서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투잡(알바/부업)으로 월급 만큰 수익이 됩니다.

아래 접속하셔서 상담받아 보시고 결정하세요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이 글은 존 맥아더 목사님의 글입니다

종교개혁의 중대한 기폭제 역활을 한 것은 루터가 등장하기  100여년 전 보헤미안 그리스도인인 얀 후스가  쓴 “교회 (De Ecclesia)”라는 책이었다. 이 책의 가장 심오한 요지는 그 제목을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머리”라고 한 4장이었다.

후스는“ 교황도 추기경도 거룩하고 전 우주적 교회의 머리가 아니고 또한 추기경들만이 거룩하고 보편적인 가톨릭 교회의 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그는 그 시대의 교회 리더들 대부분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멸시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면서, “성직자들이 오히려  자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며 설교하는 자들을 미워한다.”라고 말했다.

후스는 이러한 그의 정직함으로 인하여, 그의 목숨을 잃었다.  그는 이단으로 선고 받았고, 1415년에 화형에 쳐해졌다.

그 후 100여년 후에, 이미 교황 제도에 대해서 반대하고 있던 마틴 루터가 그의 저서 ‘교회’를 읽고, 그의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나는 지금까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얀 후스’의 주장을 가르치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존 스터피츠”도 저와  마찬가지 이었구요. 우리는 알지 못했지만 한 마디로 모두 후스의 추종자들 이었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머리로서 교황은 종종  “거룩하신 아버지”, 혹은 “그리스도의 대리자” 라고 불린다. 그리나 이 호칭과 역할은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다.  교황은 성좌선언( ex cathedra)을 말 할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좌선언을 할 때에는 교황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무오성(무류성(無謬性))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성서에 무엇을 보태거나 확대 시킬 수 있는 권위가 있다고 주장한다.  

 

 (계 22: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그는 비성경적이고 불경스러운 권위를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에게 과시하고,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침해하고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왜곡하고 있다. (*성좌 선언에 대한 아래의 역자주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 모든 상황을 이해했고, 그리고 담대하게 선포했다.  마틴 루터는 그의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교황권이 진정한 적그리스도의 중심지라고 확신합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적그리스도에게 순종할 의무가 없는것 같이 교황에게도 순종할 의무가 전혀 없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칼빈은 “기독교의 강요”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로마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 과격하고 비판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도 바울의 말을 그대로 옮겨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우리를 비난하는 것은 사도 바울을 비난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누가 다른 주제에 대한 바울의 말로 우리가 로마 교황을 부당하게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우리에게 반감을 갖는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하여, 나는 그들이교황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은 해석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간단하게 보여줄 수 있다. (존알렌번역본 4권, 7장)

칼빈이 인용한 바울의 말은 데살로니가 후서에 기록된 적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다.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살후 2:4).

이 와 동일한 이해와 해석은 후에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에도 반영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교회의 다른 머리는 없다. 로마의 교황 역시 그 어떤 의미로도 교회의 머리가 될 수없고, 다만 그는 적그리스도요, 불법의 사람이요, 멸망의 아들이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에 대항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이다.”  (25.6)

그러나 이것이 교황이 마지막 적그리스도라는 것은 아니다.  요한일서 2:18이 말하는 것처럼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많은 거짓교사들이 항상 존재해 왔고 계속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청교도 카튼 매더는 바빌론의 멸망이란 책에서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마지막 적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적그리스도들이 등장할 것이라고 말한다.  적그리스도의 특성들은 로마의 교황에게 그대로 드러나 있으며 만약 누구든지 성경을읽고도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 한다면 그들은 눈먼 맹인과 같다고 생각한다.”

스펄젼은 “예수님을 향한 기도”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청중들에게 말하기를 “적그리스도를 대항하고 적그리스도가 무엇인지에 대항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모든 성도들의 의무입니다. 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로마나 영국의 천주교를 제외하고 적그리스도라 불릴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계속해서 말했다.

앵글리칸 천주교이던 로마 천주교이던 상관없이 천주교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반대됩니다.  이것은 적그리스도이며 우리는 이들을 대항하는 기도를 해야할 것입니다.  모든 믿는자들은 적그리스도가 맷돌이 홍수에 던져져 다시 떠오르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되도록 매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해하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도적질하며,  그리스도의 속죄의 자리를 성사들의 효험으로 대치 시키고,  빵 조각을 구세주의 몸으로 몇 방울의물을 성령님으로 둔갑시키고 , 우리와 같은 불 완전한 인간을 이 땅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세운다. 만일 우리가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들을 대항하여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잘못은 미워하지만 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믿는 거짓된 교리를 혐오하고 몹시 싫어하지만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기도할 때에 우리의 기도는 향기롭게 될 것입니다.

또 “영광의 그리스도”라는 설교에서 스펄젼은 말했다.

” 그리스도는 교황이 그의 영광을 도적질하라고 교회를 그의 피로 사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저 한낫 죄인에 불과한 자가 모든 열방의 존경을 받으며 자신을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부르라고하며 높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늘에서 이땅에 오셔서 그의 마음을 다해서 그의 백성들을 사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항상 그의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디모데전서 2:5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라고 전한다.  교황은 누군가가 채워야  할 필요가 없는 권력의 자리에 스스로 앉아 있는 것일 뿐이다.

 

존 맥아더

* 역자주: 엑스 캐소드라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권위의 자석으로 부터’라는 말이다.(가톨릭 대사전은 이 말을 ‘성좌 선언’으로 번역했고, “교황이 성좌에서 신앙과 도덕에 대한 교리를 정의하는 일”로 정의했다.) 이는 교황 무류설을 말하는 것으로 교황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그의 가르침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출처 :  http://gracetokorea.org/

Available online at: http://www.gty.org/Blog/B130221/a-timely-critique-of-the-catholic-church

COPYRIGHT (C) 2014 Grace to You

You may reproduce this Grace to You content for non-commerical purposes in accordance with

Grace to You’s Copyright Policy (http://www.gty.org/connect/Copyright).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이 글은 존 맥아더 목사님의 글입니다

 

지난 주에 교황 베네딕트16세가 곧 은퇴할 것이라는 중대하고 예상하지 못한 발표를 했다. 그 결과로 우리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쇄도하는 뉴스와 공개 토론의 홍수에 접하게 될 것이며 특히 새로운 교황이 누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 더욱 그러할 것이다.

앞으로 여러분은 친구들, 가족, 직장 동료들, 그리고 이웃들과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 토론하게 될 것이다. 이 기회는 모든 사람이 말하는 주제에 성경적인 빛을 비출 수 있는 기회이다. 그리고 주님이 그러한 기회를 주셨을 때, 나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대해 권위있게 그리고 명료하게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로마 가톨릭의 타락한 우상숭배에 대해서도 분명하고도 권위 있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이 가톨릭을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받아 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앞으로 로마 가톨릭과 화합하고 손을 잡아야 한다고 점점 더 많이 주장할 것이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교황, 마리아 숭배, 우상 숭배로 가득찬 미사 그리고 로마 가톨릭의 모든 제도를 진실되고 성경적인 기독교라고 다시 분류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에는 아주 많은 문제들과  연루 되어있다. 수세기 동안의 교회 역사와 선교사의 헌신 그리고 순교의 수난등을 뒤집어 놓아야 하는 것이 포함된다.

진리를 대항하는 사탄의 오래된 전쟁에서 가장 강력하고, 끊임없고, 그리고 거짓에 가득찬 적이 로마 가톨릭이다. 

가톨릭은 배교자이며 부패되고 이교적인 그릇된 기독교이다. 가톨릭은 엷은 베일에 가려져 있는 사탄의 얼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는 언제나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종교 개혁이 일어 나기 전 암흑의 시대에서 조차도 진정한 신자는 자기 자신을 가톨릭 신앙과 거리를 두었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의 그릇된 가르침과 우상 숭배를거부하므로 잔혹한 핍박과 형벌을 받았다.

이 시대의 분별력있는 성도는 가톨릭에 대항해서 굳건히 바로 서야 한다. 우리는 저들의 그릇된 사제주의와 거짓 계시, 거짓 전통을 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잘못된 성사들, 우상 숭배, 그리고 부패한 권위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만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는 사탄의 거짓말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과 틀리는 가를 알아야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을 방어하고 설명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만 한다.

이번 한 주, 우리는 로마 가톨릭의 핵심이 되는 교리와 제도를 알아 보고 그리고 그것들이 얼마나 부패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오도하고 있는지 살펴 보도록 하겠다. 이 짧은 시리즈로 그 잘못을 총망라해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 글이 앞으로 여러분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나는 여러분들이 그러한 기회를 잘 이용할 수 있게 되도록 여러분들을 돕기 원한다.

존 맥아더

출처 :  http://gracetokorea.org/

Available online at: http://www.gty.org/Blog/B130221/a-timely-critique-of-the-catholic-church

COPYRIGHT (C) 2014 Grace to You

You may reproduce this Grace to You content for non-commerical purposes in accordance with

Grace to You’s Copyright Policy (http://www.gty.org/connect/Copyright).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역사와 하나님의 뜻-일본 제국주의와 식민통치에 대한 성경적 입장

  

뉴라이트 계열의 근본주의 개신교들 가운데서 일본식민사관을 가지고 일제 식민지 통치를 옹호하거나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일제 식민통치가 한국이 근대화하는데 일조했다고 하거나,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보는 시각은 성경을 보는 신학의 부재에서 오는 기회주의자적 유치한 발상이다.   문제는 이러한 잘못된 역사관은 반개신교, 반기독교 정서를 가속화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조선이 제사를 드리고 미신을 믿는 등 우상숭배를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벌을 받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신도를 믿고 신사에서 귀신에게 제사하며, 천황을 숭배한 일본은 하나님의 크나큰 축복을 받아서 세계 강국이 되어 제국주의를 이루었단 말인가?   비록 미국에게 전쟁에서는 패배했지만 다시 복구되어 세계의 경제대국이 된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었단 말인가?


이런 식의 사고를 하는 목사들이 한국교회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그들의 수준이 얼마나 저급하고 그들이 목회하는 교회에는 비전이 없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목회철학은 <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자!  죽으면 내세천당이다>  일 수 밖에 없기에 교회는 더욱 세속화와 타락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자체가 비성경적이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1870년대 이후로 자본주의는 자본의 집적 ·집중에 따라 자유경쟁이 지배하는 산업자본주의의 단계에서 거대한 소수의 독점기업이 지배적인 힘을 가지는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이행한다. 


이에 따라 세계 열강들은 앞다투어 팽창주의와 식민주의를 내걸고 약소국을 무력으로 침략하여 자본과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하고 자국의 시장을 확장하였다.

 

제국주의를 표방한 세계 열강들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약소국을 침략하여 자원을 약탈하고 그들의 상품을 팔아먹기 위해서 철도, 전기, 도로, 통신과 같은 사회 기간망을 확충하고 금융회사와 공장을 설립하였으며, 원주민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의사소통을 원할히 하고자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것은 식민지를 위한 정책이 아니라 오직 수탈과 침략을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런 점에서 일제의 조선 식민통치는 그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럼 이러한 제국주의가 하나님의 뜻인가?  피식민지를 무력으로 지배하면서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철도와 전기와 통신, 금융회사, 공장들을 만들고 피식민지인들에게 열강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치며 교육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피식민지 국가들이 근대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는가?

 

제국주의와 식민통치가 휩쓸고 간 피식민지는 종교적으로, 이념적으로 국민과 국가가 분열되는 큰 상처를 지니고 말았다.  그리고 그러한 분열은 지금까지 전 세계의 곳곳에 남아있어서 전쟁과 내란으로 큰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당장 중동의 시리아 내전을 보라.   과거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 지역을 식민지 분할 통치하면서 종파간, 부족간 분열정책을 실시하였고, 사분오열된 그러한 후유증은 지금까지 중동의 불안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제국주의와 식민통치가 휩쓸고 간 아프리카, 베트남, 중국, 대한민국을 보라.  분열과 전쟁으로 수많은 국민들이 희생당하였다.   이렇게 국가가 분열되어 오랫동안 전쟁을 겪은 근본적인 원흉은 열강의 제국주의 때문이다.

 

제국주의는 힘과 권력, 정복과 착취, 탐욕과 강포, 전쟁과 살인을 특징으로 하며, 이러한 것은 성경에서 사탄의 근본적 속성과 동일한 특성을 갖는다.    사탄은 탐욕의 화신이며, 죄악이 가득해 불공정한 거래와 무역을 일삼으며 강포를 저질어 범죄하여, 탐욕의 주인이 되었다.


사탄의 화신 제국주의와 식민통치는 불공정한 거래를 일삼고,  사람에게 살인과 강포를 저지르며, 돈과 이익을 위해 인간을 하나의 도구로 취급하는 모든 자본주의 정신구조와 시스템이다.   불합리한 甲 乙관계, 착취와 비인간화, 돈으로 인간의 계급을 나누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온갖 강포를 저지르는 합법적인 도둑들과 탐욕의 정신에 함몰된 사회구조와 시스템은 사탄의 영을 받은 자들이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사탄적 속성은 정죄와 심판의 대상이지 결코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을 수 없다.

 

겔 28:16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 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겔 28:18 네가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므로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네 가운데에서 불을 내어 너를 사르게 하고 너를 보고 있는 모든 자 앞에서 너를 땅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

 

문제는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사탄적 속성을 경고하지 못하고 오히려 옹호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국주의에 편승하여 개신교나 카톨릭을 신봉하는 국가들이 국가적 폭력을 사용하여 피식민지에 선교하였다. 


<오!  힘에 의한 선교가 하나님의 뜻이로다>   하지만 이러한 선교방법은 비성경적인 방법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방법이다.   하나님이 힘과 권력으로 피식민지를 정복하여 그들에게 강압적으로 선교하는 것을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선교방법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대들은 성경과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자들이 아니다.


정말 안타갑게도 제국주의에 편승하여 기독교가 전파된 지역은 순전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서구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전함으로서 물질문명과 맘몬숭배, 자연파괴와 경쟁, 착취와 비인간화를 유발하고 말았다.   선교사들은 순전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사탄의 통치를 전한 실수를 하고 말았다


또한 독일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면서 유태인을 대학살 할 때  독일 기독교가 그 정당성과 신학적 원리를 제공하고(악의 처단) 그에 부역하고 동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이것이 기독교가 해온 비참한 참상이다.

 

이렇게 기독교가 제국주의에 편승한 결과 기독교는 급속한 세속화 과정을 겪고 세력이 약화되었다.  기독교의 신앙과 가치관은 무력화되었고 그 대신에 물질문명과 과학지상주의가 그 공간을 채워 나갔다. 

 

제국주의를 지지하고 힘과 권력에 의지한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철저히 해체되어 참 생명을 잃어나갔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 이상 기독교에 희망을 걸지 않게 되었다.  지금 종교개혁의 뿌리였던 유럽을 보라.   누가 기독교를 참 생명의 종교로 생각하는가?  이것은 기독교가 제국주의에 편승한 참혹한 결과물이다.

 


신사참배를 결정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임원들. 앞줄 중앙이 홍택기, 그 오른쪽은 김길창 목사

출처-<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신사참배 강요에서 나타난 일본제국주의의 죄악성


조선을 지배한 일제는 조선에서 독립운동이 고조되고 세계대공황이 발생하여 위기가 닥쳐오자 그 위기를 벗어나고자 의회 민주주의를 해체하고 군국주의체제로 전환하여 중국과 필리핀, 동남아 지역으로 침략전쟁을 확산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고,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화하였으며, 국민정신총동원령을 내려 경제적 수탈과 인력수탈을 극대화하였다.

 

그 결과는 내선일체, 전시동원체제, 강제징집, 강제동원, 창씨개명, 전쟁 위안부 동원, 신사참배, 친일과 반일의 국민분열 등으로 나타났다.

 

일제는 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을 천황의 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학교와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신사참배의 신도는 성경적 입장에서 보면 다신교적인 정령신앙, 자연숭배, 조상숭배, 영웅숭배, 귀신숭배, 천황숭배를 포괄하는 사악한 우상종교이다. 


이러한 신사참배에 조선의 장로교, 카톨릭,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굴복하여 동참하고 만다. 

 

하지만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교한 이들이 있었으니, 주기철 목사 같은 분이다.  이런 고귀한 분들은 안으로는 분란을 조장하는 친일 기독교세력과 밖으로는 일제의 군국주의의 거대한 권력과 싸워야 했고, 많은 분들이 옥고를 치루며 순교하였다. 


이를 계기로 친일 기독교인들이 언론매체에 기고와 각종 시국 강연회를 만들어 강제부역과 전시동원, 내선일체를 옹호하는 행적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고, 결국 친일과 반일의 기독교로 양분된다.

 
신사참배에 굴복한 친일 기독교세력은 신사참배는


1)정치적인 문제이지 신앙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2)우상숭배였지만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며, 생존의 문제에 대해 각자의 양심과 믿음이 분량에 맡겨야 한다 라고 변명하였지만, 성경의 관점에서 보건데 신사참배는 분명한 우상숭배이고, 배도이며 배교인 것이다.

 

어짜피 모든 배도의 시작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시작되고 생존의 문제에 고통을 주며 신앙적인 문제로 귀결이 난다.   그러면 이러한 신사참배를 강요한 일제의 식민통치가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남산의 조선신궁(1918착공-1925완성)


불교의 친일행적도 비슷하다.  일제는 사찰에 임야 소유권을 양도하면서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활용했다.    조선의 총독부는 조선의 승려들을 식민지 정책에 적극 이용했다.  일제는 1911년 사찰령을 발동해 31본산 제도를 만들고 모두 사찰의 주지임명권과 재산의 처리, 사찰의 병합, 사찰의 신설등의 전권을 행사했다.    이에 따라 31본산 주지들에서 말사 주지들까지 불교 언론계와 학계 등이 전방위로 친일행위에 가담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친일승려들은 탁발보국이란 명목으로 군수품과 국방헌금등을 헌납했다.   1940년의 창씨개명에도 앞잡이 노릇을 했다. 

 

일본 임제종과 조계종의 합병을 도모해 불교계의 이완용으로 불리는 이회광은 친일단체를 조직하는 등 조선불교의 매국을 선동했다.   일제시대에 조계종이라는 종명을 처음으로 확립한 권상로는 각종 시국강연을 다니면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국가적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뜻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국가적 고난의 대표적인 예는 통일왕국을 이루던 이스라엘이 2개의 국가로 분단되어지고,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각각 패망한 사건이다. 


국가가 패망한다는 것은 일반론적 입장에서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외교적인 다양한 원인들로 해석할 수 있지만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의 해석은 영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숭배, 강포, 압제, 착취, 불의를 행하였기 때문이다.

 

신28장에는 언약적 복과 언약적 저주가 나타나는데,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언약적 저주의 결과물인 것이다.

 

신 28: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신 28:25 여호와께서 네 적군 앞에서 너를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그들을 치러 한 길로 나가서 그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네가 또 땅의 모든 나라 중에 흩어지고

신 28:26 네 시체가 공중의 모든 새와 땅의 짐승들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들을 쫓아줄 자가 없을 것이며

신 28:36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 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신 28:37 여호와께서 너를 끌어 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람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이 분단되거나 패망하는 것이 아니고, 회개하여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섬기는 신정국가, 왕같은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었다.  구약의 예언서를 보라.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셨는가?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을 죽이고 핍박하였으며 더욱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을 거역하고 말았다.

 

남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은 거대 제국이었다.  바벨론은 왕을 숭배하고 다신교를 믿는 우상숭배의 나라였지만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악의 도구로 사용되었고, 악의 도구로써의 사용기간이 다 끝난 후에는 용도폐기되어 또 다른 거대제국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그럼 남유다의 입장에서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는가?  남유다가 생각하기를 <약소국인 우리나라를 강대국인 바벨론이 침략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너무나 감사하고 좋은 일이 아닌가?  이제 우리나라도 잘 살수 있을 것이야> 라고 했을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거역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한 신명기 28장의 언약적 저주였던 것이다.  


신 29:24 여러 나라 사람들도 묻기를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이같이 행하셨느냐 이같이 크고 맹렬하게 노하심은 무슨 뜻이냐 하면

신 29:25 그 때에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그 무리가 자기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버리고

신 29:26 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절한 까닭이라

신 29:27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땅에 진노하사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재앙을 내리시고

신 29:28 여호와께서 또 진노와 격분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내던지심이 오늘과 같다 하리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게 회복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과연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왜 조선은 일제의 침략을 받아야 했는가?

 

당시의 조선을 구약의 이스라엘과 비교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고난은 불신앙과 불의와 강포외 죄악으로 발생하였지만, 조선이 일제의 침략을 받은 이유를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숭배를 하였기 때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떤 사악한 가계저주론자들은 조상들이 저지른 제사나 미신등의 우상숭배 죄악 때문에 조선이 벌을 받아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의 패망을 구약 이스라엘의 패망과 동일시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당시 조선은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선민도 아니었고, 하나님과 언약적 복과 언약적 저주를 맺는 관계도 아니었다. 


이런 식의 역사관을 가진 개신교인들이 많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이것은 신앙과 믿음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서 세계를 보는 역사적 관점이 부족한 무지한 목사들의 책임이 크다.


그런식으로 가정한다면 신도를 믿는 귀신의 왕국 일본은 어떻게 제국주의화를 할 수 있었을까?   천황을 숭배하고 귀신을 믿는 일본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세계 강대국이 되어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귀신을 믿는 우상숭배의 왕국 일본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러시아와 청나라를 물리치고 필리핀과 베트남과 동남아의 수많은 섬들을 정복하였는가?   귀신의 나라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에게 원자폭탄 2개를 얻어 맞고 패망한 이후 지금까지 멸망당하지 않고 강대국으로써의 지위를 누리는 것은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일까?  아직까지 우상숭배의 나라 일본에게 왜 원천기술과 첨단 전자부품과 기계장비를 수입하여 쓰고 의존하고 있는가?

  

당시의 조선은 해외선교사들이 조금씩 들어와 조선 국왕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학교와 병원과 교회를 세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갖 유아기와 같은 시대였다.  이로 말미암아 각종 미신과 가난과 우매한 관습 등의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근대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는 초석을 쌓고 있었다.  


해외선교사들의 수고와 헌신으로 조선의 교회는 점차 성장하였고, 국제적인 기독교 네크워크망을 가질 수 있어서 외교적으로는 상당히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하지만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을 경험하지 못하여 기술과 자본의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군사력이 약하여, 세계 열강들의 제국주의 암투에 약소국으로 희생을 당하여야만 했다. 


당시의 조선은 부패한 세도정치를 겪으면서 국력을 강화시킬 원동력을 상실하였다.   세도정치하에 과거제 비리와 매관매직은 비일비재하였다.  


부패한 지방관리들은 조세제도를 불법적으로 운영하였다. 세도가문은 조선 후기 새롭게 성장하였던 상공인과 부농층마저 수탈하려고 애를 썼고 경제적 이권을 독점하여 사회문제를 야기시켰다. 그리고 삼정(토지세,군포,환곡)을 제멋대로 이용하여 평민들의 골수와 피까지 빨아먹었다. 

 

그 결과 잉여생산물이 나올 수 없었고 상업발달이 되지 않아 경제발전을 할 수없었다.  때문에 민란이나 혁명이 일어났지만 결국 민주주의 의식이 싹틀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 오히려 외세를 끌어들이는 실책을 하고 말았다.  이러한 타락한 위정자들로 인해서 국민들은 미신과 무기력증의 나락으로 더욱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 세도정치를 개혁하기 위한 여러가지 시도가 있었지만 지나친 쇄국정책으로 세계의 급변하는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여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였다.  세계는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제국주의와 식민지화, 침략과 전쟁으로 요동치고 있었지만, 조선은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처신했고, 홀로 독야청청하였던 것이다.


뒤늦게 고종은 강한 조선을 꿈꾸며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조선의 근대화를 시도하였다.   고종은 근대국가로 가는 길에 방해가 됐던 신분제도와 보수사상을 타파하고자 의제를 개혁하고 관립학교를 설립 하는 등 백성들의 의식계몽에 힘을 쏟았다. 


실제로 고종은 해외 의병활동에 군자금을 보태고 끊임없이 세계열강에 밀사를 보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등 국권 회복을 위해 많은 시도를 했다.   또한 서구식 제복과 총으로 무장한 근대식 군대를 양성하고, 전신선·전기 가설 및 철도 부설 등 근대화를 위한 인프라 구축에도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미 시기는 너무 늦었다.  


러,일,청의 군대가 들어와 주둔하면서 대한제국은 희생양이 되어 각국의 이익을 위한 각축장이 되었다. 일본이 청나라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한반도는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대한제국은 외교적으로 노력하였으나 서구 열강은 서로서로 약소국을 침략하여 식민지 건설을 경쟁하였기 때문에 대한제국이 내민 도움 요청을 묵살하였다.  .

<대한제국의 13년>

 

지금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미국을 기독교 국가요 하나님의 축복받는 세계 제일의 나라로 선망하고 있지만 그 미국이 과거에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하는데 동조하였다는 것(가쓰라-태프트밀약)은 알고 있는가?     

미국이 일제와 은밀한 거래를 하고 서로서로 제국주의를 용인해주면서 세계의 약소국을 침략하며 식민지화하 하는 것을 동조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만약 미국의 허락이 없었다면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 기독교 국가인 미국의 이러한 제국주의 행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일제침략과 식민지화에 대한 성경적 관점

 

구약의 이스라엘의 국가적 고난과 조선의 국가적 고난은 성격과 의미에서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선상에서 조선의 고난을 해석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오늘날  조선에 대한 일제침략은 성경적인 관점으로 볼 때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제국주의와 식민통치, 침략과 정복, 약탈과 강포, 전쟁과 살인, 비인간화와 억압과는 전혀 뜻을 같이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일제의 지배를 통해 조선이 변화받기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복음이 더욱 확산되고, 많은 수의 교회와 학교들이 지어져 위정자들과 국민들의 의식과 정신이 계몽되어 민주주의 의식이 싹을 틔우며, 온 국민이 힘을 합쳐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도록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모든 방법을 강구하는 데에 있었다. 


하나님의 뜻은 복음의 능력으로 조선의 모든 국민의 의식이 변화를 받아 모든 미신과 패배의식과 무기력증에서 해방되어 비전을 가지고 나라의 미래를 설계하고 계획할 수 있는 단계까지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혀 일제의 침략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러한 국가적 고난속에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기도하며, 노력하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일제의 침략에 순응하고, 운명론적 자포자기에 빠져 신사참배와 친일행위를 하면서 교회와 국민이 친일과 반일로 분열되는 것은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한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국민이 하나로 단결하여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찾으며 현실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약소국의 설움과 상처를 받았다 할지라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숙명론과 패배의식과 무기력함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열려있는 새로운 미래를 향해 싸워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일제로부터 해방을 앞당기고 남북 분단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만약 복음의 능력이 조선을 지배하고 끊임없이 저항하였다면 사회주의가 발을 붙여놓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을 무력화시키고 해체시키고 어용 기독교를 만든 일제의 지배에 맥없이 굴복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사회주의가 일본과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이 땅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많은 수의 독립 운동가들이 사회주의를 추종한 이유가 약소국에 대한 관심을 가진 유일한 강대국이 러시아 혁명정부였고 또한 반反일에 뜻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러시아 사회주의와 교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서구 열강과 미국이 조선의 고통을 도와주고 독립운동에 협력적이었다면 과연 조선이 좌파 우파로 갈라졌을까?  이러한 일제침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조선의 근대화가 앞당겨 질 수 있지 않았을까?

 
결론

 

이제 한국의 개신교는 바람직한 역사관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일제침략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거나,  일제 때문에 한국이 근대화하는데 유리했다고 보는 시각을 고쳐야 한다.   


운명론, 숙명론, 자포자기를 하나님의 뜻이라는 구실로 자기한계를 포장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자기한계를 극복하며 믿음을 가지고 돌파구를 찾아가는 가운데 주어지는 것이다. 

 

신사참배와 친일행위를 한 기독교는 철저한 회개와 반성위에 모든 친일사관을 뜯어고쳐야 한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믿음을 지키려고 싸우다가 옥고를 치루고 순교한 이들 앞에 신사참배를 용인하고 굴복한 자들은 지울 수 없는 영원한 배도자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친일 사관을 갖는 개신교는 자신들의 신앙의 뿌리가 신사참배를 용인하고 굴복한 부끄러운 기초위에 있는가 철저히 살펴보아야 한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반응형

 

기독교 성례전·성사의 어원은 ?


성사(라틴어: Sacrament, 聖事) 또는 성례전(聖禮典)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혜가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전달되는 ,쉽게 말해서 하느님의 은혜를 받는 기독교의 예식이다. 교파별로 개신교는 성례, 성례전으로 부르며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성공회는 성사라고 한다. 물론 모두 같은 말이다.

 

어원

성사(Sacrament)는 교부 터툴리안이 200년경 그리스어인 μυστριον(Mysterion,신비, 특별한 것이라는 뜻)를 라틴어로 옮긴 Sacramentum에서 파생된 말이며, 번역하면 ‘성별된 것이나 행동’ 혹은 ‘성스러운 것’, ‘성별하는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Sacramentum은 본래 로마 제국 군인들의 황제에 대한 복종 곧 제국의 질서에 대한 복종을 상징하는 표지를 뜻하기도 했으므로,성사는 기독교인의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을 상징하는 표지를 뜻하기도 한다.침례교 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토니 캠폴로(Tony Campolo)는 성사 또는 성례전을 기독교신자가 자신이 기독교 신자임을 항상 기억하게 하는 중요한 전통이라고 설명한다.

교파별 성사의 구분

로마가톨릭과 동방정교회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에서는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혼인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의 7가지 성사(이를 7성사라 부른다)를 통해 하느님의 은혜를 받는데,특히 로마가톨릭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사는 7성사"라는 교리를 다시 한 번 확립하였다.

성공회

성공회는 성공회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 판본별로 성사의 구분이 다르다. 한국 성공회의 경우, 1965년판 공동기도문(공도문)에서는 성사를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혼인성사, 병자성사, 신품성사의7가지로 구분했다. 성서에 나오는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는 예수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제정한 성사로, 나머지 성사는 동방 교회와 서방교회에서 모두 지키는 교회전통으로 이해한 것이다. 2004년판 성공회 기도서에서는 성서에 나오는 성사인 세례성사와 성만찬을 성사로, 혼인, 조병, 서품, 견진성사는 성사의 성격을 가진 성사적 예식으로 구분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한국성공회 일부에서는 공동기도문의 영향으로 성사를 7가지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개신교

개신교에서는 성만찬과 세례를 예수님이 제정한 성례전으로 이해한다.

성사의 효과

로마 가톨릭

로마 가톨릭에서는 성사의 효과를 사효적 효과(Effectum ex opere operato)와 인효적 효과(Effectum ex opera operantis)두 가지로 구분한다. 사효적 효과는 '거행된 성사 자체를 통해 받는 성사의 은혜'이며, 인효적 효과란 '성사에 참여하는 이의 노력과 정성과 열심에 따라 받게 되는 하느님의 은혜'이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에서는 전례를 통해 거행되는 성사의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신앙과 교리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성사의 효과는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약화시키거나 저해하지 않는다. 따라서 비록 교리 교육을 받지 않은 유아에 대한 세례성사에 있어 그 성사의 효과는 동일하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에서는 유아세례를 생후 100일 이내에 받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유아가 성장하여 견진성사,신품성사 등을 받기 위해서는 신앙과 교리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성공회

성공회에서는 성사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혜가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전달되는 예식'(성 아우구스티누스주교의 설명)으로 이해하며, 누구나 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공회에서는 사제가 어린이에게 세례를 베푸는 유아세례를 집전하는데[8],이때 어린이를 기독교신앙으로 키울 대부모가 같이 세례에 참여한다.어린이들은 나이가 어려서 비록 신앙고백을 할 능력은 없지만, 세례성사를 통해 전달되는 하느님의 은혜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이해가 성공회에서 설명하는 유아세례의 타당성인데, 이러한 설명에는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성만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세우신 성사이므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는 성공회의 성사이해[4]가 담겨 있다.

각주
1.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나 그리고 우리》-성사란 무엇입니까>?/홍영선 지음/대한성공회 p.182
2. 《위대한 설교자 10인을 만나다 영어: Ten Great Preachers by Bill Turpie》2. 토니 캠폴로 : 유머, 열정, 현실 참여의 설교자/빌 터피 저/김대웅 역/브니엘
3.↑ 《이야기교회사》-왜 세례를 받아야 하는 걸까?/이성덕 지음/살림 P.114
4.↑  성공회《공동기도문》(공도문)/대한성공회 P.6
5. 성공회 교리해설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나 그리고 우리》/홍영선 지음/대한성공회
6. 《공동기도문》/대한성공회
7. 《성공회 기도서》/대한성공회(2004년 개정판)
8.《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나 그리고 우리》-성사란 무엇입니까>?/홍영선 지음/대한성공회 p.237

 

 

반응형

'기독- 성경연구 > 기독-성경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찬예배 (동방 교회) ?  (0) 2017.06.02
기독교 세례 ?  (0) 2017.06.02
기독교 개신교 예배?  (0) 2017.06.02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하시는 일  (0) 2017.04.14
바울을 따르는 자가 되라  (0) 2017.04.14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