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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어제 성탄절은 잘 보내셨는지요?

 오늘은 2021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코로나 시대에 참으로  열심히 달려 왔습니다.

오늘 주일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3장1-21절
제목: 예수님만 보고 달리자.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쫓아 가노라'
 빌 3:14

 인생은 목표와 방향을 못
잡으면 신앙도 흔들립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구체적인 목표를 분명히
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본문에 바울은 인생은
미완성이라고 고백 했습니다. 12-13절
바울은 인생을 경기에
비유하며 '나는 이미 그것을 얻었다 함도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고
고백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길이 미완성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뒤에 것을 잊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과거 때문에 앞으로
전진하는데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뒤에 것을 잊어버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래 지향적인 인생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보람된 일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은 나이가
문제 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푯대 삼아 달려 간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완성은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때 까지며. 또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에야 인생의 완성이 이뤄지게
됩니다.

 달리기 선수가 초반에 아무리 잘 달렸을 지라도
중도에 포기 한다면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목표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포기 하지 말고
계속해서 신앙의 경주를
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의 목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14절

 인생은 한 척의 배가 항구를 떠나 목적지를 향해 하는 것과 같습니다.
때론 비바람이 몰아치는 폭풍을 만나기도 하고 세찬 눈보라를 만나기도
합니다.

 이럴때마다 예수님 바라보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길을 잃어 버리지 않습니다. 예수님 바라보면 어떤 환경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인생의 경주에서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히 12장2절 "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평안이 있고.
길이 있고.인생의 해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세상 것을 잡으려다 실패하고 좌절하고 무너집니까.

 인생을 낭비하면 훗날에는 반드시 후회 할 때가 옵니다.

 2022년 부터는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복된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2021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5일이 지나면 새해를 맞이합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2022년은 옵니다.

 새해에도 인생의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달려 가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바라보고 달려갈 때 길이
열리고 인생의 답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20절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성도들의 본향은 하늘나라 입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시편27편4절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다윗은 평생에 성전에서 살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평생에 주님의 
성전에서 예배 드리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2021년은 5일 남았습니다. 남은 시간을
마무리 아름답게 하시고. 
새해는 더 큰 믿음과 모든
소망이 예수님 안에서 다
이루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선우교회 서윤심목사
2021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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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주일예배설교:유혹앞에서(마4:1-11)


제목 : 유혹 앞에서

성경 : 마4:1-11

1.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요즘에 보면 상대적 빈곤감 또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보면 즉 실제로는 빈곤한 게 아닌데 많이 가진 자들과 비교하며 상대적으로 가난하게 여기고 박탈감을 느끼면 불평불만을 하게 되고 그래서 자존감도 잃어버리고 진짜로 가난한 자처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바보 같은 일입니까? 실상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데 하필이면 없는 것을 가지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남이 가진 것을 보면서 시기하고 질투하며 가지고 있는 것도 누리지 못하고 진짜로 가난한 자처럼 기쁨을 모르고 산다면 이렇게 어리석은 일이 어딨습니까?

그럼 왜 그렇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꾸 남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월급 200만원도 못 받는데 남이 300만원 500만원 1,000만원 받으니까 저 사람은 무슨 복이 많아서 머리가 좋아서 일류대학 나와 대기업에 들어가고 출세하여 잘먹고 잘사나, 저 사람은 무슨 복이 많아서 부잣집에 태어나서 저렇게 좋은 조건 속에서 온갖 좋은 혜택을 누리며 잘먹고 잘사는데 나는 왜 쎄가 빠지게 일해도 이 모양인가 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항하고 시비를 걸고 그래서 결국 스스로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그러면 안됩니다. 남이 월급을 1,000만을 받든 1억을 받든, 대궐 같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온갖 사치를 누리든 그런 거 배 아파하지 말고 그냥 하나님 앞에서 믿음 안에서 성실하게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누리고 있는 것 자체를 보면 우리는 결코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힘든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이 정도면 먹고 살만한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하셨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영원한 영광까지 주셨습니다. 그럼 됐지 자꾸 더 바라고 욕심을 내고 비교하며 원망하고 불평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그럴 일이 뭐 있습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행복은 자꾸 도망가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즘 세상이 그렇지를 못합니다. 완전히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서 그저 좋은 집에서 좋은 것 먹으며 좋은 옷 입고 많은 것을 소유하면 행복할 줄 압니다. 그래서 죽어라하고 돈돈돈 경제경제경제하면서 온통 관심의 초점을 돈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물질적 외형적인 것만 남과 비교하며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너무나 많은 갈등과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게 바로 마귀사탄의 역사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마치 옛날에 나라에 시끄러운 일이 있으면 소위 북풍이라고하여 작은 일을 크게 부풀리든지 없는 일을 만들든지하여 북한 공산당이 무슨 큰 일을 저지른 것처럼 하여 국민들의 관심의 초점을 그쪽으로 돌리게 함으로 시끄러운 일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귀사탄이 우리의 관심을 온통 돈에게 두게 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믿음이니 사랑이니 진리니 의니 선이니 이런 것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잘먹고 잘살면 장땡이라고 여기며 예수님도 안 믿고, 심지어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예수님보다 돈을 좋게 여기게 만들어 자꾸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돈을 따라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깨어 기도하며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마귀 사탄의 유혹에 속지 말고 진리를 따라 살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엡5:16~18절을 보겠습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여러분, 보세요. 세월이 선하다고 했습니까? 악하다고 했습니까? 악하다고 했습니다. 악한 게 뭡니까? 죄와 무지 속에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저 돈과 명예와 권력과 세상 즐거움에 빠져 사망 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알려면 세상의 것에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올바르게 판단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거짓되고 왜곡된 것들을 물리치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왜곡된 가치관이 만연된 세상에서 정말 깨어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임으로 올바른 영성을 가지고 모든 왜곡된 가치관과 유혹을 바르게 분별하고 물리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까?

2.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왜곡되고 유혹 많은 세상에서 진정한 승리자가 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조건은 오직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하지요.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시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 안에 있을 때만이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왜곡된 가치관과 악한 것들을 올바르게 분별하고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요,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 더럽고 추하고 악한 마귀 따위에게 시험을 받을 수 있습니까?

물론 왜 이유가 없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마귀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분임을 명백히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최초의 인간 아담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는데 예수님은 사탄의 권세와 유혹을 물리침으로 마귀에게 저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살리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함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능동적으로 시험에 임하셔서 사탄을 호통을 쳐서 쫓아내심으로 사탄의 권세룰 물리치고 우리를 구원해 주실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마귀에게 속아 죄와 무지 가운데 빠진 인생은 결코 자기 힘으로는 죄와 사탄의 권세를 이길 수 없습니다. 선이나 진리나 의에 대한 온전한 분별력도 없고, 악을 이길 힘도 없습니다. 자신이건 남이건 죄과 마귀와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이나 과학이나 다른 어떤 능력이나 지혜로도 안됩니다.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으나사나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임으로 그 안에 있으면 안전한 것입니다. 사탄 마귀가 넘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설령 사탄 마귀가 도전해도 주님의 능력으로 이기게 됩니다. 사탄 마귀가 어떻게 교묘하게 유혹하고 시험하고 도전해도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분별하고 물리치게 됩니다. 세상의 왜곡되고 그럴듯한 가치관에 속지도 않고 물질이나 권력이나 명예 따위에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세상의 물결이 아무리 거세게 밀려와도 휩쓸려가지 않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그런 것들을 이기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기쁨과 자유와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5: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지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서 그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심으로 세상의 모든 죄와 사탄의 권세를 이기고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물질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가장 먼저 이겨내야 할 시험은 물질의 시험입니다. 사탄은 온갖 방법으로 교묘하게 우리를 유혹하는데 가장 흔한 것이 물질을 통한 유혹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간사한 마귀가 심지어 예수님께도 물질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즉 40일 동안이나 금식하여 주리신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린 배도 채워서 좋고 권능을 보여주면 하나님의 아들임이 증명될 거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그런 수작이 예수님께 통할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말을 듣고 사탄을 꾸짖습니다. 마4:4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한마디로 떡 즉 물질이 우리를 지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물질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좌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영생복락의 말씀인데 그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고 썩어 없어질 물질이 지배하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생명의 길도 진리의 길도 모르고 썩어 없어질 물질만 따라가다가 영원한 멸망길로 가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내가 배가 고프고 힘든 건 사실이지만 너 따위의 말은 들을 수 없다며 사탄의 교묘한 물질적 유혹을 일축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물질은 요긴한 것이긴 하지만 절대로 물질이 내 삶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물질적 가치에 의하여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 그 말씀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당연히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 세상은 물질지상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이 믿음이나 사랑이나 진리나 의보다는 물질에 의하여 좌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 때문에 싸우고, 때리고 심지어 죽이기도 합니다. 물질 때문에 이웃과 친구와 심지어는 가족 간의 관계가 파괴될 때가 많습니다. 믿는 사람들도 물질 때문에 신앙생활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풍조가 세상을 뒤덮고 있어서 그게 도리어 정상인 것처럼 여겨질 지경입니다. 그러나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그건 속고 있는 것입니다. 껍데기에 인생을 거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 껍데기에 지배당하는 인생은 당연히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 지를 잊지 알고 더욱 깨어 기도하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며 말씀으로 무장하여 물질보다 오직 주님을 앞세우시기 바랍니다. 물질적 이해관계에 의하여 내 삶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과 믿음과 사랑과 진리와 선과 의의 참된 가치를 앞세우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참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명예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여러분, 마귀는 물질적 시험에 실패하자 이번에는 예수님의 명예욕을 자극시켜며 유혹합니다. 즉 성전 꼭대기로 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붙들어 다치지 않게 하실 것이고, 그러면 너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웅대접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그런 수작에 넘어갈 분이 아니시죠. 그래서 또 마귀를 꾸짖습니다. 마4:7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내가 너 따위의 말을 듣고 여기서 뛰어 내린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게다가 여기서 뛰어 내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이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사탄 따위의 말을 듣고 뛰어 내린다는 것 자체가 그 말에 순종하는 것이니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설령 뛰어 내려서 좋은 결과가 있다고 할지라도 마귀의 말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 그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여러분, 우리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한다면 그게 바로 사탄의 말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설령 돈보따리가 생긴다해도 마귀 따위의 말에 순종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마귀의 말에 의해서든 아니면 자기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서든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전에서 뛰어 내리는 행위는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방법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있다면 마귀의 말처럼 뛰어내릴 때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면 자신이 영웅이 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런 방법으로 명예를 주지는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갈 때에 명예를 주는 것이지 영웅심리를 가지고 쓸데없이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지켜 줌으로 영웅이 되게 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게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이 지켜 주실 만한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그렇게 해 주실지 안 해 주실지 한번 테스트해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무모하게 행동하면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 뜻 안에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말씀에 합당하게 믿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이게 올바른 믿음이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명예와 영광도 아울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기본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을 비롯하여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무엇을 하든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코 영웅심리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무언가를 행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함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명예도 얻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영적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시험이 실패로 끝나자 마지막으로 사단은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영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높은 산으로 가서 예수님에게 천하만국을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을 모두 주겠다는 것입니다. 즉 그저 눈 한번 질끈 감고 자신에게 절하면 세상만국을 다 주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탄이 그럴만한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 까짓 게 무슨 그런 권세가 있습니까? 그저 예수님이 지금 40일동안이나 전혀 아무것도 안 잡수시고 약해져 있으니까 이 약해진 틈을 노려 어떻게든 예수님을 넘어트리려고 술수를 쓰고 있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수작이 예수님께 어떻게 씨알머리나 먹히겠습니까? 예수님은 사탄을 향해 호통을 치십니다. 마4:10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내 지금 비록 힘이 들어도 어딜 감히 나한테 수작을 부리느냐? 오직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거늘 어찌 더럽고 추하고 악한 너 따위에게 경배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사탄은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나에게 절하라. 그러면 천하만국 즉 명예와 권세와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갖 우상을 섬기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돈과 명예와 권세와 세상 즐거움을 미끼로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신은 없다고도 했다가 신은 똑같다고 하면 믿지 말든지 아무거나 적당히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다. 돈과 명예와 권력에 행복이 있다. 그걸 소유하라. 그러면 행복하리라고 하면서 우리를 미혹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그 길로 갑니다. 자기 생각대로 갑니다. 그저 돈돈돈 경제경제경제 하면서 삽니다. 그게 바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모습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볼때에 보기에도 탐스럽고 먹음직스럽고 먹으면 뭔가 지혜와 생기를 얻을 것처럼 보여 덜커덕 따 먹음으로 죄의 굴레를 뒤집어썼던 것처럼 지금은 더 크고 더 좋은 선악과들이 세상에 널려 있어서 사람들이 그런 것들에게 쉽사리 걸려들어 선악과 따먹으며 죄의 길로,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 소리에 속으면 안됩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향락이나 세상의 가치관 앞에 무릎을 꿇으면 안됩니다. 그건 죽음의 길입니다. 오직 우리가 경배해야할 분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뿐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뿐입니다. 세상의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명예나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특별히 사순절을 보내면서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묵상함으로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영적 시험을 이기고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능력을 온전히 맛보며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신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가 갈 수 이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스런 찬양, 기도, 설교를 듣고자 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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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오대양 육대주 선교사입니다.여러분의 구독은 선교사 교육과 후원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Subscriptions are helpful for missionary education and sup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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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요셉이 감옥으로 간 까닭 (고난이 우리 삶에 끝이 아님)

 

 

 

요셉이 감옥으로 간 까닭은?

 

< 본문 - 창세기 39:19-23 >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영화가 있습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제목의 영화입니다. 우연히 산새 한 마리를 죽이게 된 동승(童僧)이 성불(成佛)에 이르기 위해서 겪어나가는 고뇌의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1989년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열린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인 금표범상을 비롯하여 국제기자협회상 등 4개의 특별상을 받았습니다.

  영화의 제목에서 보여준 것처럼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달마(達磨)는 남인도 향지국(香至國)의 세 번째 왕자로, 대승불교의 승려가 되어 6세기에 중국에 와서 선종(禪宗)을 창시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달마가 고향 인도를 떠나 동쪽 중국으로 먼 길을 간 까닭은 제자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제자 하나를 만나겠다는 열망 때문에 고향을 떠나 수 천리의 먼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에서는 달마처럼 먼 길을 가던 동승이 노중에 겪었던 고뇌와 갈등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모든 여정에는 그 나름대로의 뜻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때로는 불필요하고 때로는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과정이라 하더라도 다 나름대로의 뜻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고난과 역경의 길에도 그 나름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오늘의 고난이 우리 삶에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3-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또 로마서 8:18절에서도 말씀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는 이 말씀의 진리를 믿기에 때로 어려움을 당해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당하는 환난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역경이나 환난이 그것으로 끝이라고 한다면 그 어려움 가운데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게 끝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당한 환난이나 고난을 이겨내면 우리에게 더 큰 영광과 기쁨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죽음이라는 인생 최고의 두려움 앞에서도 우리 신앙인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더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인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신앙의 선조들보다 더 성실하고 본받을만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실하게 살았던 요셉이 누구보다도 큰 시련과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당한 그 고난은 그 어느 것 하나 의미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야곱은 4명의 아내로부터 12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그 중에서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은 요셉과 베냐민 단 두 명뿐입니다. 라헬은 야곱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지만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11번째 아들로 요셉을 낳게 되었고, 마지막 베냐민을 낳다가 죽고 맙니다. 그래서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남달리 사랑했습니다. 특히 라헬이 첫 번째 낳은 아들 요셉은 아버지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 때문에 요셉은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고 결국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요셉은 어린 나이에 노예가 되어 이국 땅으로 팔려가고 말았습니다.

  당시 노예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참했습니다. 노예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주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주인이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릴 수도 있고, 심지어는 죽일 수도 있습니다. 노예의 목숨은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파리 목숨’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죽도록 일만해야 했습니다. 일을 잘 했다고 칭찬받는 것도 아닙니다. 죽도록 일한 후에 늙으면 버려지는 것이 노예의 일생이었습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서 처음 일하게 된 곳이 애굽 왕 바로의 친위대장이던 보디발의 집이었습니다. 보디발은 당시 굉장한 권력자였습니다. ‘바로의 친위대장’이라는 그의 직책이 말해 주듯이, 그는 바로로부터 특별한 신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친위대장이라는 말은 요즘으로 하면 대통령 경호실장입니다.

  그런 보디발의 집에서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실하게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보디발의 신임을 받게 되고, 어린 나이에 보디발의 집 가정 총무까지 맡게 됩니다. 가정 총무의 자리는 당시 노예가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였습니다. 보디발의 집 모든 살림살이를 주관하는 위치였습니다.

  

  노예로서 그렇게 잘 나가던 요셉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쳐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젊고 잘 생기고 똑똑하기까지 한 요셉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단호하게 그런 유혹을 거절합니다. 한번은 집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또 유혹했습니다. 요셉의 옷을 붙잡고 동침하자고 유혹했습니다. 이것은 유혹이 아니라 주인으로서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유혹이든 주인의 명령이든 간에 요셉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유혹과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집요한 주인아주머니의 손에서 빠져나오느라고 요셉은 자신의 옷을 벗어버리고 도망쳐 나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되었습니다. 요셉을 유혹하는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보디발의 아내는 오히려 요셉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버립니다. 요셉이 벗어버리고 간 옷을 증거물로 삼아 남편 보디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종 요셉이란 놈이 나에게 못된 짓을 하려고 하다가 내가 소리를 지르니까 이 옷을 벗어놓고 도망갔습니다.’ 물론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그것 때문에 결국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요셉은 참으로 기구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형들로부터 미움을 사서 이국땅으로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가장 고통스런 삶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예생활이 좀 풀려지는 듯싶더니만, 이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더 처절한 삶의 자리로 곤두박질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요셉과 같은 처지에 놓였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온 것도 억울한데, 이제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것 때문에, 믿음을 지키겠다는 것 때문에 그는 더욱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한 말이나 행동 때문에 오히려 고통을 당하고, 오히려 손해를 본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나 손해가 적은 것이라면 그저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당한 일은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예가 된다는 것도 엄청난 것이었고, 감옥에 갇히는 것 역시 곧 죽음을 의미할 정도로 아주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저는 하나님께 불평했을 것입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고 원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살았는데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고 하나님께 불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노예로 팔려갔을 때에도, 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나 요셉이 보인 삶의 자세는 한결같았습니다. 그는 어디에서나 성실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는 주인 보디발이 그를 신임하고 집안 모든 살림살이를 그에게 맡길 만큼 성실했고, 감옥에서도 간수장이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다 관리할 수 있도록 제반 사무를 다 요셉에게 맡길 정도로 그는 신실했습니다.

  

  요셉이 그런 비참한 삶 속에서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찾아와도 묵묵하게 참고 이겨냅니다. 지금의 고통과 역경이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과정 없이 성공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통의 순간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꿈이 있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유명한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들, 그리고 우리가 성공했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 가운데 힘들지 않게 그 자리에 올라온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숨이 턱 밑에까지 차오르는 고통의 순간을 참고 이겨낸 선수만이 승리의 메달을 목에 걸 수 있습니다. 고된 훈련의 과정이 없었다면 영광과 환희의 순간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힘들 때 끝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마지막에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1등의 꿈을 꿉니다. 그러나 그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고통을 참아내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꿈을 포기해버립니다. 그래서 그 꿈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꿈이 분명한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니 포기할 수 없습니다. 꿈이 숱한 고난과 역경, 좌절과 슬픔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꿈을 이루어내게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꿈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떤 꿈을 갖고 계십니까? 오늘의 고통과 역경보다 훨씬 큰 꿈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고통과 역경을 참고 견디며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움 앞에서 불평하고 자신의 처지를 원망한다면 그건 우리의 꿈이 우리가 당한 어려움보다 작기 때문입니다. 꿈을 잃어버렸거나 꿈이 작으면 어려움 앞에서 좌절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역경을 이겨낼 힘이 내게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노예로 팔려간 요셉에게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바로 그 꿈입니다. 형들뿐만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도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크게 쓰실 것이란 꿈을 늘 가슴에 안고 살았습니다. 그 꿈이 너무너무 힘들 때에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꿈을 이룰 때까지는 어떤 어려움이나 힘든 상황에 내몰린다 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인 노예로 전락했을지라도, 또 감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는 원망이나 불평으로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야 할 굼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꿈을 주십니다. 인생의 꿈뿐만이 아니라 신앙의 꿈을 주십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나를 통해서 이루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꿈이 있습니다. 나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하나님의 꿈입니다. 때로는 그 꿈을 우리가 알지 못한 채 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그 꿈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마지막에 쟁취하고 얻게 될 영원한 꿈이 있습니다. 천국이라는 꿈 말입니다. 그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그 꿈을 꼭 붙잡아야 합니다. 그 꿈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어떤 역경과 고통의 순간이 와도 이길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그 꿈이 우리를 하여금 담대하게 만들어줍니다. 그 꿈이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해 줍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갔을 때에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에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늘 자신에게 꿈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의 눈길을 보내오고 자신과 동침하라고 명령을 내려도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라고 말하면서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짓은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믿음 때문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그런 믿음 때문에 또한 노예생활과 감옥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교회에 다니면 절대로 어려움이 없다.’거나 ‘믿음으로 살면 언제나 좋은 일만 일어난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다. 요셉은 믿음을 따라 살려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요셉만이 아닙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믿음 때문에 고난을 겪기도 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온갖 박해를 견뎌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믿음 때문에 죽음의 길을 가야 했던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길을 갔습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할 신앙의 길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다. 믿음을 지키다가 당하는 고난이나 역경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믿음입니다. 아니 우리의 삶에 닥친 그 어떤 어려움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 믿음뿐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어떤 어려움을 당하든지, 또 어떤 역경이나 고난이 우리를 힘들게 하든지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십시다. 힘들다고 믿음을 버리거나 고통스럽다고 믿음의 자리를 떠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을 이기는 것이 믿음인데, 믿음을 버린다면 무엇으로 그 어려움과 시련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우리에게 승리를 줍니다. 믿음이 우리 앞에 당한 고난과 어려움을 재해석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일어설 수 있게 해 줍니다.

  

  요셉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주인아주머니의 유혹과 부당한 명령 앞에서도 ‘지금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지금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데 내가 어찌 그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수 있겠느냐’고 말하고,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감옥에 가는 것도 두렵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감옥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본문 20-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또 23절에서도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며 지켜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특히 어려운 일을 만나면 내 주위에 아부도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더욱 힘이 듭니다. 심지어 기도를 해도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신 것처럼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아무 것도 안 하고 계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왔을 때에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창세기 39:2절에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이 노예생활할 때 하나님께서 늘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은 늘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요셉은 그것을 믿었고, 그것 때문에 요셉은 범죄에 빠지지 않고 성실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이 믿음을 가지십시다. 내가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일수록 하나님은 더욱 우리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 믿음으로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고, 힘들 때 내 손을 꼭 붙잡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이끌림 받으며 사십시다. 우리가 내민 손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요셉의 그 믿음이 그의 길을 형통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읽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23절 마지막에서 말씀하고 있는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똑같은 말씀이 39:2-3절에도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여러분, 형통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것이 형통한 것입니까?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찬송가 384장)고 찬송합니다. 그렇다면 만사형통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흔히 별 어려움이 없이 내가 계획한대로 잘 되어가면 형통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이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평안하게 잘 진행되고 있으면 형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계획한대로 잘 이루어져 가고 있으면 형통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사형통하리라”고 찬송할 때도 그런 의미의 형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한 삶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는 대로 되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 계획이나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바대로 되어가는 것이 형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간 것도 형통한 길이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것도 형통한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왜 자신이 노예로 팔려오게 되었는지, 왜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지를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 그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세기 45:5-8)

  요셉은 자신이 노예로 팔려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꿈을 이루시기 위해서 자신을 먼저 여기로 보내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옥에 갇히는 것도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꿈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과정을 거치게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바로 형통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기 위해서 그 과정을 거치게 하시는 것이기에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을 만나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었고, 불평 대신에 찬송과 감사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셉이 형들에 의해 팔려 애굽 땅으로 오지 않았다면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그는 바로 왕 앞에 설 수 없었습니다. 감옥에 와서 바로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바로 왕 앞에 설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요셉의 가족들은 7년의 흉년 가운데서 굶어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당신이 뜻하신 바를 이루어가셨고, 결국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의 약속들을 이루어가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총무의 일을 하게 된 것이나 감옥에서 제반 사무를 보게 되었던 것이 나중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국정을 운영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언제 어디에서 행정경험을 쌓을 수 있겠습니까? 보디발의 가정총무와 감옥에서의 제반 사무를 보던 것이 큰 경험이 되어서 국무총리의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내고 보면 우리의 삶에 그냥 되어지는 것도 없고, 의미 없이 경험되는 것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섭리의 과정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내가 지금 어려운 가운데 있다고 생각된다면 지금 내가 겪는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인도하실 것인가를 기대하시고, 그 어려움을 잘 이겨나가면 나중에 그 경험이 내 인생에 아주 중요하게 쓰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37-50장까지 기록된 요셉의 이야기 가운데 특이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요셉의 삶에는 어떤 특별한 기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가진 것 외에, 그 어떤 기적을 행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어떤 기적이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요셉의 위대한 모습은 계속된 고난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단 한 번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고,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셉에게 있는 꿈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요셉이 가진 믿음 우리도 가질 수 있습니다. 요셉이 가졌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 우리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꿈과 믿음과 확신을 회복하셔서 그것을 더욱 굳게 붙잡고 사십시다. 그러면 요셉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오늘 우리를 통해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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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감사하면 행복해 집니다

 

 

 

제목 : 감사하면 행복해 집니다.

말씀 : 마20:1~16

1.감사를 회복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미고사’캠페인을 벌였다고 하는데 참 좋은 캠페인이라고 여겨집니다. 이 말은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의 약자인데 참 좋은 말 아닙니까? 얼마나 아름답고 은혜스러운 말입니까?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런 말을 잘 할 수 있다면 이 사회가 얼마나 따뜻해지고, 사랑이 넘치고, 행복해 지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 세상에 이보다 쉬운 일이 어딨습니까?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든지 아무 때나 공짜로 할 수 있고 시간도 1초도 안 걸립니다. 이렇게 돈과 시간과 노력을 안들이고 서로에게 위로와 따뜻함과 평안함과 행복을 주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지난 6개월 동안 가족이나 교우나 직장 동료나 이웃이나 국가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의 말을 하셨는지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 한번 해 보실까요? ‘성도님,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집사님,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여보,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엄마아빠,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아들아,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세월이 자꾸만 이와는 반대로 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되었으면 이제는 좀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만도 한데 자꾸만 불만의 소리만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은지 툭하면 싸우고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치며 이혼도 쉽게 하곤 합니다. 회사에서도 그만하면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무슨 불만이 그렇게 많은지 툭하면 거리로 뛰쳐나와서 결사항쟁을 외칩니다. 국회의원들은 또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지 툭하면 머리에 띠 두르고 거리로 나와 난리를 치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은 지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감사와 은혜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자꾸 부정적이고 어두운 곳에 포커스를 맞추기 때문입니다. 누리고 있는 은혜는 생각지 않고 자꾸 부족한 것만 생각하고, 자신의 잘못은 생각지 않고 자꾸 남의 탓만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얼마나 귀한 존재로 창조되었는지 생각하지 못하고 뭔가 좀 모자라고 부족한 것만 생각하니까 자존감을 가지지 못하고 열등감속에서 쉽게 상처를 받고 좌절하고 낙심하곤 합니다. 그래서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파서 시기하고 질투를 합니다. 그러니 원망과 불평과 갈등과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모습들은 정말 나도 불행해지고 남도 불행하게 만드는 심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감사해야 하고 사랑해야 하고 축복해야 하고 서로 격려하고 남이 잘되면 기뻐해야 합니다. 그게 옳은 일이고, 자신도 복을 누리고 남에게도 복을 가져다주는 지혜로운 인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만 그 반대로 하니까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기쁘게 살 수 있는 상황에서도 행복하지 못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살전5:18절을 보십시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그게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길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그 밖의 모든 사회 속에서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에 여러분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해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늘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2.감사의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늘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가려면 우리의 생각을 감사의 관점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감사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감사이지만 불평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불평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먼저 오늘 말씀의 내용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있었는데 포도 수확 철이 되어 이른 아침 즉 해 뜰 때에 장터로 나가 일꾼을 구하여 포도원에서 일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손이 부족했든지 제3시 즉 오전 9시에 또 한사람을 불러왔습니다. 그래도 일손이 부족했든지 다시 제6시 즉 정오에 또 한 사람, 그리고 제9시 즉 오후3시에,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심지어 제11시 즉 해지기 한 시간 전에 또 한 사람을 데려다가 일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오후6시에 일을 마치고 품삯을 주기 시작하는 데 제일 마지막에 온 사람 즉 오후5시에 와서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1데나리온 즉 노동자 하루 품삯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먼저 온 사람들은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을 1데나리온이나 주는 것을 보고 그 사람보다 몇 배 더 일한 자신들에게는 적어도 몇 데나리온은 줄 것으로 잔뜩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자기들도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과 똑 같이 한 데나리온 밖에 안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들이 불평불만을 터트린 것입니다. ‘아니, 저 사람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1데나리온을 주고 우리는 그보다 몇 배를 더 일했는데 왜 똑같이 주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말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당신이 하루 종일 일한대가로 본래 정해져 있는대로 한 데나리온을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무엇이 불만이냐?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한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것인데 그럼 이 사람에게 은혜를 베푼 내가 잘못한 것이냐?’ 그러자 아무소리 못하고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불평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일한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뭐가 불만입니까? 남에게 더 주었다고 자기가 손해 봤습니까?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 잘못입니까?

여러분, 그러면 이 사람들이 왜 불평을 했습니까? 감사의 관점, 은혜의 관점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일해서 정당한 대가를 받았으면 일할 수 있는 터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고, 일을 시켜준 주인에게도 감사해야 하고, 일할 수 있는 건강과 지혜가 있음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고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같은 노동자의 처지에서 주인이 얼마나 고마운 분입니까? 지금도 그런 분들이 계시지만 당시는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일할 데가 없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늦게 일할 기회를 얻어서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은혜를 베풀어 한 데나리온을 받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으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들은 자신의 것을 다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남이 좀 많이 받는다고 여기며 배가 아파 감사해야 할 일에 불평을 터트린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걸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사에 자신에 대해서나 남에게 대해서나 감사와 사랑과 은혜의 관점으로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자신도 아름답고 복된 인생이 되고 남에게 복을 가져다주고 주님도 기쁘게 해드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수없이 감사할 것을 명령하시며 특별히 골3:16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여기에 보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즉 모든 것을 감사의 관점으로 보고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감사할 것이 천지고 그러면 감사의 찬양이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분, 따지고 보면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태어나고 먹고 입고 자고 생활하는 것 중에 은혜를 입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있습니까? 부모님과 가족의 은혜 없이 살 수 있습니까? 또 이웃의 은혜 없이 살 수 있습니까? 누누이 말씀 드리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단 1초도 살 수 없습니다. 부모님과 가족의 은혜 없이도 우리는 존재 할 수 없습니다. 이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저 잘나서 제 힘과 능력으로 사는 것 같지만 실상 이웃의 은혜가 없어도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도 없고 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평생을 감사하며 살아도 모자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감사거리가 있는데 왜 하필이며 불평불만 거리를 찾아 자기도 힘들고 남도 힘들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매사를 감사의 관점으로 보고 해석하고 적용함으로 자신도 행복하고 남에게도 행복을 주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비교의식을 버려야 합니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감사하며 살기 위해서 또 하나 가져야 할 태도는 비교의식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일찍 온 일꾼들이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은 것도 바로 감사의 관점은 없고 남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자신이 적게 받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보세요.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 사람에 비해서 나는 일을 많이 했으니까 더 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이나 자신이나 그보다 몇 배 더 많이 일한 자신이나 똑 같이 받으니까 상대적으로 자신이 손해 봤다는 생각에 그만 못마땅하게 여기고 불평불만을 털어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건 전혀 불평할 일이 아닙니다. 자기는 정당한 대가를 다 받았지 않았습니까?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게 비난 받을 일입니까? 오히려 불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주인에게 존경을 표해야 할 일이지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받은 것처럼 여기고 배가 아파 불평이 터져 나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사람들이 왜 행복하지 못합니까? 이 정도면 잘 먹고 잘 사는데 자꾸 못살겠다고 아우성입니까? 비교의식때문입니다. 누구는 부모 잘 만나 고생 안하고 호의호식하며 편하게 잘 먹고 잘사는 데 왜 나는 쎄가 빠지게 일해도 맨 날 이 모양 이 꼴이냐고 생각하고, 누구는 신랑 잘 만나서 명품 백 들고 다니며 자랑 질을 해대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이냐고 생각하고, 누구는 똑같이 일하고 한 달에 500만원 받는데 왜 나한테는 100만 밖에 안주냐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시기와 질투와 원망과 불평과 미움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늘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여기며 또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살아가는 태도는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원망과 불평과 갈등과 시기와 질투와 싸움의 덫에 걸려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론 나나 너나 우리 모두에게 평안과 기쁨은 점점 멀어져가고 결국 모두 함께 불행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될 뿐인 것입니다. 물론 세상은 본래 죄와 무지가운데 있어서 부조리한 현실이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고, 때론 투쟁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은 그러한 피해의식이나 비교의식을 버리고 먼저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불공평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받은 은혜가 더 크다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모든 것을 감사의 관점으로 보는 사람은 설령 세상이 불공평할지라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성실하고 진실하고 의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혹시 사람은 몰라줄지 몰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솔직히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결국은 사람들도 알아보고 귀하게 여겨주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어떤 삶의 자리에 있든 공연히 남과 비교하지 오직 믿음 안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모든 상황과 여건을 떠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감사와 기쁨과 가치와 보람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보상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먼저 온 사람들이 불평을 터트린 또 하나의 이유는 보상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은 나중에 온 사람보다 더 많이 일했기 때문에 당연히 더 많은 것을 받아야 한다는 보상심리가 있었는데 그게 좌절되니까 그만 불평을 터트렸던 것입니다. 물론 정당한 보상심리는 악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열심히 일한만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감사와 은혜의 측면은 무시하고 그저 더 많은 것으로 보상 받으려고 하는 왜곡된 보상심리가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 불명 불만을 늘어놓은 사람들이 바로 그랬던 것입니다. 10절을 다시 보실까요?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보세요. 그들은 ‘더 받을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덜 주니까 그만 엉뚱한 불만을 늘어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본래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겁니다. 그러면 지금 그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일할 수 있는 건강과 여건을 주신 하나님께나, 오늘 하루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주인에게나, 또 일을 할 수 있도록 내조해주고 동기부여를 해준 가족들에게나 우선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것을 시기하며 자기에게 더 많은 보상을 해주지 않은 주인을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이걸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꾸만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자꾸만 더 달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보다는 자꾸만 권리만 주장하기가 쉽습니다. 할 일은 작게 생각하고 받아야 할 것은 크게 생각을 합니다. 내가 남을 대접해 주지 못한 것은 생각지 않고 남이 나를 대접해 주지 않은 것만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서 왜 때때로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까? 그것은 다른 아닌 비교의식과 보상의식 때문입니다.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고, 저 사람보다 먼저 와서 더 많이 일했다고 여기고, 내가 이 교회를 세우는데 많은 공로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 서운하고 화가 납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 그러면 제가 뭘 얼마나 했다고 하면서 고까운 마음이 듭니다. 나는 이제 할 만큼 했으니 이제는 네가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이미 보상심리와 공로의식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눅17:10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당연하지 않습니까? 나 같은 죄인 살려주셔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한다면 우리가 생명을 바치고 전 재산을 다 바친들 할 만큼 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한들 주님의 은혜의 천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나 같은 것 불러 주심에 감사해야 하고, 주님의 일을 시켜 준 것에 감사하고, 내 미약한 힘이나마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데 조금이라도 필요해서 사용할 수 있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할 뿐이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많은 적든 이미 주어진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면 불평불만과 갈등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국가는 평안하고 행복해 집니다.

그러므로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매사를 감사의 관점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교의식을 버리고 주어진 삶의 자리가 어떤 곳이든 감사와 기쁨으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보상심리와 공로의식을 버리고 무엇이든 우리가 일할 수 있고, 기여할 수 있고, 누구에게인가 도움이 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거룩한 역사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인지를 되새기며 가정과 직장과 교회와 사회 속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열심히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여러분의 자신의 삶에 감사와 기쁨이 넘치고, 가족을 비롯한 모든 이웃들에게 행복을 주며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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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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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감사의 축복

 

 


제목 : 감사의 축복

말씀 : 골2:6,7

1.이미 받은 은혜를 누립시다.

지난 주간에 저는 서울 장신대에 목회자아카데미에 다녀왔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해 주셔서 후원해주셔서 오랜만에 모교에도 가보고 또 교수님과 유명 강사들의 강의를 들으며 영적, 지적 양식을 새롭게 채우는 유익한 시간으로 잘 보내고 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가지 새삼스럽게 배운 것이 있는데 역시 내 집이 좋구나하는 것입니다. 물론 내 집도 아니긴 하지만 여하튼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좋구나. 역시 가정이 정말 고마운 곳이구나하는 것들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집 떠나면 철 든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집을 떠나보니 가정과 가족과 특히 아내가 정말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라는 걸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좀 쑥스러웠지만 전화로 좀 더 잘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말로 했으면 무언가 행동으로 좀 보여주어야겠다 싶어서 오다가 일부러 영천 시내를 한바퀴 돌아 겨우 꽃집을 찾아 빨간 장미꽃을 한 다발 사다가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안하던 짓을 하니까 좀 쑥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주는 마음은 역시 기뻤습니다. 여러분도 아무쪼록 있을 때 잘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이냐, 은혜가운데 있으면 은혜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떤 은혜속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은혜를 느끼지도 못하고 그래서 잘 누리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록 좋은 집이 아니더라도 집을 나가보면 내집이 좋은 줄 알게 됩니다. 비록 진수성찬이 아닐지라도 집 나가보면 엄마가 혹은 아내가 지어주는 밥이 그리워 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공기 좋고 물 맑고 초목이 우거진 아름다운 환경 속에 살고 있을 때는 이게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곳에 있다가 저 광야지대에 한번 나가보십시오. 그러면 그때서야 비로소 이 아름다운 고향산천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존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종종 샤워를 하면서도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며 속으로 중얼거리곤 합니다. 하루종일 앉아서 설교준비나 기타 사무적인 일을 하다가 좀 끈끈한 몸을 이끌고 들어가서 샤워기를 틀고 물을 뿌리면 얼마나 기분이 상쾌해 집니까? 야, 이렇게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콸콸 나오다니 참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우리나라 좋은 나라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감사하곤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 우리는 너무나 많은 축복속에 살고 있습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생각해 보면 정말 너무나 감사한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너무나 많아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늘 그런 은혜속에 살고 있어서 그걸 모르고 감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기는커녕 뭐가 그렇게 부족하고 불만인지 맨날 싸우고, 머리띠 띠고 결사 투쟁을 외치고, 파업을 하고, 촛불을 들고 난리를 치는지 정말 저는 안타깝습니다. 이만하면 얼마든지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 수 있는데 왜 그럴까? 왜 이미 주어진 것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며 자꾸만 더 달라고만 아우성을 치는 것일까, 그거 주면 보나마나 또 다른 것 내 놓으라고 난리를 칠텐데 왜 그럴까하며 정말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뻐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다고다고 하는 사람은 평생 그러다 죽습니다. 여러분, 이미 주어진 것들을 먼저 감사함으로 누릴 줄 아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세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여러분, 잘 보세요. 그냥 감사하라는 것도 아니고 감사함이 넘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감사함이 넘친다는 뜻이 뭘까요? 아주 알기 쉽게 말한다면 100원어치를 받았으면 1,000원어치를 감사하고, 1,000원어치를 받았으면 10,000원어치를 감사하라는 뜻이 아니겠어요. 다시 말해 받은 것, 가진 것 그 이상으로 감사하라는 거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100원어치 받으면 1,000원어치 감사는 고사하고 왜 고작 100원어치만 주느냐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또 어떤 사람은 100원어치를 받았는데 그 받은 사실 조차도 알지 못한다는 거지요. 이런 사람은 참으로 미련한 사람이지요. 이런 사람은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요, 은혜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정말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생명을 받았습니다. 건강을 받았습니다. 지혜를 받았습니다. 물질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도 받았습니다. 그럼 이제 뭐가 더 그렇게 필요한가요? 이만하면 너무 많이 받은 것 아닙니까? 우리가 받은 것도 사실은 이미 돈으로 환산한다면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것을 받고도 받을 줄도 모르고 도리어 원망하고 불평하고 짜증내며 산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생각해 볼 일) 어떤 집사님 가족이 같은 교회 집사님의 초대로 식당에 가서 저녁 대접을 받게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초대를 받은 집사님은 식사를 하기 전에 정성껏 식사기도를 하였다.

이때 이 모습을 물끄럼이 바라보던 초등학교 3학년짜리 아들이 말했다. ‘아빠,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다. ‘보면 모르니? 감사기도 드리고 있잖아.’ 그러자 아들이 다시 말했다. ‘아빠, 집에서는 안하시면서 여기서는 왜 하시는 거예요.’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야, 넌 그것도 모르니? 우리 집에서 먹는 건 우리 돈 들여서 먹는 거고, 이건 공짜잖아.’ 그랬답니다.

여러분, 사실은요, 다 공짜로 주신 겁니다. 땅도 하늘도 바다도 태양도 비도 내 몸도 내 생명도 물질도 다 은혜로 주신 거지요. 그런데 밥 한그릇 얻어 먹은 것은 고마워하며(물론 그것도 다행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정말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뻐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받은바 은혜를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여러분은 다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감사는 더 큰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여러분, 감사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게 할뿐더러 더 나아가서는 또 다른 축복을 가져다 준다는 측면에서도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실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주는 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두 사람에게 똑 같은 물질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걸 그렇게 고마워하고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그걸 잘 활용해서 행복하게 삽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에게 얼마나 더 주고 싶겠습니까? 주는 사람도 신이 나서 자꾸만 주고 싶겠지요.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감사한 줄 모릅니다. 기뻐할 줄도 모릅니다. 도리어 왜 요만큼만 주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도 누리지 못하면서 욕심만 많아서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난리를 칩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에게 주고 싶겠습니까? 주고 싶기는커녕 준 것도 빼앗고 싶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누릴 줄 아는 자에게 주십니다.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은혜를 은혜로 알고 감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둥이를 고쳐준 사건이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와 멀리서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달라고, 우리를 고쳐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고쳐주십니다.

그래서 결국 열명의 문둥병자가 다 고침을 받았는데 그들중 아홉명은 예수님께 감사의 말씀도 드리지 않고 집으로 달려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 한명의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자 이 모습을 본 예수님께서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8,19)하시며 그에게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세요. 이 예수님의 은혜로 눈을 뜬 소경은 사실 직접적으로는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내가 믿노라고 고백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병고침을 받고 자신 앞에 엎드려 감사드리고 있는 이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와 믿음을 동일하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이건 다시 말하면 감사할줄 모르는 사람은 믿음이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다면 어찌 그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게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까지 주셨다는 것을 안다면 어찌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소경되었다가 눈뜬 사람은 감사할 때 그것으로 믿음으로 인정해 주셨고, 그래서 그는 결국 육적 소경에서 뿐만아니라 영적 소경에서도 건짐받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몰랐던 다른 아홉명은 비록 육적 눈을 떠졌을망정 영적 눈은 떠지지 못함으로 영원한 축복을 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심령에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고, 더 큰 축복이 찾아옵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도리어 원망하고 불평하는 심령에는 기쁨도 없고, 만족함도 없습니다. 복이 오기는커녕, 은혜가 임하기는커녕 있던 복도 달아납니다. 받은 은혜마져도 다 까먹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심령에는 성령이 역사하시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심령에는 마귀가 역사합니다. 당연한 거지요. 감사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은총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감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이라면 그래서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렇게 하나님의 뜻안에서 감사하며 사는 심령에 어찌 성령이 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원망과 불평과 시기는 마귀의 조종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게 만들려는 마귀의 수작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 하려는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서로 짜증나게 만들고 피곤하게 만들고 낙심하게 만드는 사탄의 궤계입니다. 그러기에 그 자체로 이미 마귀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임과 동시에 그것은 마귀가 더욱 역사하도록 빌미를 제공하는 어리석은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살전5:16~18절 말씀을 보세요.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라고요? 항상 기뻐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지요. 말하나마나 당연한 게 아니겠어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울면서 짜증내며 불평하며 원망하여 살기를 바라십니까? 그럴 리가 없겠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울며불며 짜증내며 불평하며 낙심하며 맥아리없이 축 쳐져서 생기도 없이 의욕도 없이 살기를 바라시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감사하며 은혜가운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고, 그 하나님의 뜻가운데 살아갈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으로 더 큰 것으로 맡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정말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뻐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즐거워하며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의 은헤를 충만하게 덧입어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더욱 감사와 은혜와 기쁨과 능력과 생기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감사는 고난을 이기게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모든 고난을 이기게 합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결국 감사하는 사람은 이기게 되고, 원망과 불평과 낙심하는 자는 지게 됩니다.

1620년 102명의 영국의 청교도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천고만신 끝에 신대륙 아메리카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아메리카는 처음부터 낙원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에 도착한지 얼마 못되어 그들 중 절반 이상이 굶주림과 풍토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도 해마다 겹치는 흉년으로 고생이 막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기도를 선포하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이렇게 금식기도를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어려움이 계속되자 한 농부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하나님께서 아직 응답해 주시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생각을 달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비록 흉년이 들고 형제자매들이 병으로 쓰러지고 했지만 이런 상황속에서도 분명 감사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식량이 풍족하지 않고 여건이 저 유럽보다 못하지만 신앙의 자유가 있고 정치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또 우리 앞에는 얼마든지 개척할 수 있는 광활한 대지가 열려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금식 대신에 감사의 기간을 정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농부의 말이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금식기도를 중단하고 대신에 감사를 선포했습니다. 이제부터 감사합시다. 감사의 기도를 드립시다. 감사의 예배를 드립시다. 우리에게는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다. 마음껏 찬양하고 예배드릴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광활한 대지가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힘들지만 머잖아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믿고 감사합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결국 그들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 정신이 바탕이 되어 오늘날 미국이 건설되었습니다. 물론 요즘은 너무 풍요롭다 보니까 미국도 좀 변질된 모습도 있긴 합니다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신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래서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믿고 감사할 때 하나님은 분명을 어떤 어려움도 이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행16장 바울과 실라 이야기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그야말로 거의 죽을만큼 맞고 착고에 채워져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쯤되면 원망과 불평과 탄식과 절망이 나올만도 한데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했고, 그러자 감옥문이 열리고 도리어 간수가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즉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원망과 불평대신 감사와 찬양을 드렸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심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영적으로만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으로도 동일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원망하고 불평하고 짜증내고 화를 내면 우리 몸에서 독소가 분출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막 화를 내고 짜증내며 밥을 먹어 보십시오. 밥이 얹힙니다. 소화가 안됩니다. 신물이 막 올라옵니다. 위가 잘 움직이지 않습니다. 소화액도 잘 안나오거나 반대로 과도하게 나와 위를 망가뜨립니다. 혈액순환이 안됩니다. 세포의 활동이 약화됩니다. 그러면 온몸에 힘이 빠집니다. 병균이 침입하면 저항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만 병에 걸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밥을 먹으면 밥이 꿀맛 같습니다. 위가 왕성하게 움직입니다. 적당량의 소화액과 소화효소가 나와 말끔히 소화를 시킵니다. 혈액 순환이 잘됩니다. 그래서 산소와 영양분을 온몸으로 골고루 날라다 줍니다. 신진대사가 원활하게 됩니다. 그러면 세포가 생기가 넘칩니다. 심지어 춤을 춘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 온몸이 활력이 넘칩니다. 병균이 왔다가 일곱길로 도망가버립니다.

여러분! 스티븐 호킹 박사에 대하여 들어보셨습니까? 그는 우주물리학 분야에서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과학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21세에 루게릭병 즉 근위축증이라는 병에 걸려 불과 1,2년 밖에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재 66세인데 아직도 생존하며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가 스스로는 걸을 수 없는 것은 물론 고개도 가누지 못하고 육체적으로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몸으로 생명을 지탱하며 연구활동을 할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저서 ‘시간과 역사’라는 책에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매일 매일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고 또 그 힘 때문에 살아간다.”

바로 그것은 감사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그 몸을 가지고도 하나님앞에 겸손히 엎드리며 그저 생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육체는 아무 쓸모없는 것처럼 되었지만 지적인 능력은 그래도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며 살았을 때 그는 다른 어떤 정상인보다도 더 위대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가 바로 행복의 원동력입니다. 감사가 승리의 원동력입니다. 감사는 영혼을 살립니다. 감사는 물질의 복도 가져옵니다. 감사가 우리의 육신의 건강도 지켜줍니다. 감사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이웃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맥추감사주일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주신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참으로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어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어떤 상황속에서도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가시는 진정한 행복자가 되시길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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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사순절을 보내면

 

 

 

제목 :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

말씀 : 요13:1-17


예수님이 누구신가? 오늘 16번째 설교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 것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책 이 요한 복음입니다. 요한복음 중에서도 13장부터 17장은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분명하고 가장 진하게 보여 줍니다. 그 중에서도 요13장은 예수님의 사랑의 모습을 가장 진하고 가장 강하게 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신" 분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 여기 "끝까지"라는 말은 시 간적으로 마지막까지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질적으로 가장 진하고 가장 뜨겁게 사랑하셨다 는 말입니다. "마지막까지 그리고 최고로"(To the end and to the uttermost)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한계가 있고 질적으로 한계가 있 습니다. 조건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무조건적입니 다. 무조건적인 아가페의 사랑으로 마지막까지 최고로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여기 "자기 사람들"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그래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 주로 믿게 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 당시에 믿었던 사람들 뿐 아니라 앞으로 믿게 될 모 든 믿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여러분들과 저를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 이별의 때가 이른 줄을 아셨을 때 예수님의 사랑은 더욱 더 뜨거워졌습니다. 이별은 마음을 슬프게도 하지만 사랑을 더 뜨겁게 만듭니다. 저는 이별 의 아픔과 슬픔을 이따금씩 경험합니다. 몇 년전 영국에서 공부하던 딸 혜원이를 영국에 두 고 비행기를 탔을 때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느꼈습니다. 몇 년전 항가리에서 선교하는 박윤 애 선교사를 항가리에 두고 비행기를 탔을 때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느꼈습니다. 최근에 한 주간 동안 사랑을 함께 나누던 뉴질랜들의 성도들과 귀여운 어린 아이들을 뉴질랜드 공항에 남겨 두고 비행기를 탔을 때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느꼈습니다. 이별의 때가 가까이 이르렀 음을 아셨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 대한 슬픈 마음과 함께 뜨거운 사랑을 느꼈습니다. 예수 님의 사랑은 더욱 더 간절해 졌고 뜨거워졌습니다. 끝까지 최고로 사랑했습니다.

2. 예수님은 "행동으로 사랑하신" 분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 의 발을 씻기시고"(4,5). 진정한 사랑은 몸으로 그리고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사람 을 손으로 만지고 싶어하고 그리고 무엇인가를 행동으로 나타내 보여 주고 싶어 합니다. 말 로 하는 사랑이 은과 같은 사랑이라면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는 사랑은 금과 같은 사랑입니 다. Word is silver, deed is gold. Preaching is silver, life is gold. 예수님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 을 손으로 만지시며 거룩하신 손으로 더러운 발을 씻어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의 발 을 씻는 행동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나타나 있었습니다. 첫째는 더러운 것을 씻어 주시는 죄 사함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이미 죄사함과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목 욕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날마다 죄를 범하는 죄인들이었습 니다. 날마다 발이 더러워지는 죄인들이었습니다. 날마다 씻음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었고 날마다 죄사함을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저들의 허물과 죄를 씻어주 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최고의 사랑은 허물을 덮어 주고 죄를 씻어 줍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거룩하신 주님의 손으로 만지시면서 깨끗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손은 우리들의 모든 병을 고치시고 우리들의 모든 죄를 사하고도 남는 거룩하신 손입니다. 그 거 룩하신 손, 십자가 못에 박히신 손, 피 묻은 손으로 우리들의 죄와 허물을 씻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피 묻은 손으로 날마다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는 행동은 둘째로 겸손과 섬김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겸 손한 모습으로 우리들을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섬김을 받아야 구원을 얻습 니다. 예수님은 종의 모습으로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 니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것은 종의 차림을 한 것입니다.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 을 씻긴 것은 하인들이 하는 섬기는 일을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사랑은 입으로 하는 설교로 나타나지 않았고 손으로 하는 섬김의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죄 씻음 의 행동과 섬김의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3. 예수님은 "서로 발을 씻으라고 분부하신 분"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는 것이 옳으니라 "(14).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보고 서로 발을 씻으라고 분부 했습니다. 왜 제자들보고 서로 발을 씻으라고 분부했을 까요? 우리들이 예수님처럼 행동하 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닮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들의 손과 삶이 거룩해 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성자처럼 만들어 주시기를 원하셨기 때 문입니다. 우리들도 성 프랜시스처럼 또는 손양원 목사님처럼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셨기 때 문입니다. 우리들이 마귀처럼 행동하기를 원하시지 않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발을 씻으라"는 분부는 우리들을 괴롭게 하는 분부가 아니라 우리들을 복되 게 만드시는 분부였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서로 발을 씻는 것 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불행한 일이 아니라 행복한 일입니다. "너희 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여러분들 그렇게 믿으십니까? 지난 5월에 장로로 임직을 받으신 두분 장로님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부인들도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서로 발을 씻는 것이 주님을 닮아 가는 복된 일인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앞으로 나와서 서로 발을 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남편이 먼저 아내의 발을 씻고 그 다음 아내가 남편의 발을 씻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 나의 더러운 발을 먼저 씻어 주옵소서. 나도 주님의 분부를 따라 발 을 씻어줍니다 이렇게 기로하는 마음으로 서로 발을 씻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 발을 씻는 행동에도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로의 허물을 용서하 는 의미가 있고 서로를 섬긴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의 허물을 용서하 고 서로를 섬길 때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구원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서 일어납니다. 주님이 하신 그 일을 우리가 하게 됩니다. 죄 씻음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 집니다.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 훈계나 강의나 설교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발을 씻는 사랑과 겸손과 봉사의 행위로 이루어 집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끝까지 사랑하신 분입니다. 행동으로 사랑하신 분입니다. 발을 씻는 겸손과 봉사의 행동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향해서 서로 발을 씻 으라고 분부하신 분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분부를 따라 서로 발을 씻는 일을 실천하십 시다. 북한 동포들의 발을 씻어야 하며 수재와 고난을 당한 사람들의 발을 씻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체면이나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서로 발을 씻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끄러움을 극 복하시면서 우리들의 더러운 발을 손으로 물로 그리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깨끗하게 씻 어 주셨습니다. "주님, 우리들의 발을 날마다 씻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도 서로 서로 발 을 씻어 주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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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예배 설교 ] 부활절 주일 설교 부활신앙

 

 

늘 살아 계시네  (막16:1~18 )

가이드 포스트지에 실린 킬링거 부인의 간증입니다. 이혼한 지 1년이 되던 날 그녀는 친구, 가족, 경제생활 등 모든 것이 먹구름에 싸여 죽기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책장에서 딸의 초등학교 3학년 때 과제물을 발견했습니다. 여덟 쪽인데 매 쪽에 한 살부터 여덟 살 때까지의 사진 한 장씩을 붙이고 자기의 삶을 설명한 과제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쪽에 End(끝)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딸의 글씨 옆에 담임선생님의 'Your beginning' (너의 시작이다)이라는 글씨가 End 라는 글씨를 내리 누르듯이 크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이 킬링거 부인이 새 출발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여덟 살 난 아이가 사진 이야기의 끝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마흔이 된 자기도 결코 끝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에게는 끝이 없습니다. 여덟 살의 딸아이가 자신의 숙제에 '끝' 이라고 썼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던 것처럼 마흔 살이지만 내 삶은 이제 시작이라는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재 위치는 어디입니까?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끝입니까? 그러나 끝은 여러분의 생각이지, 하나님에게는 시작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결코 헛된 생활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역시 부패하고 타락한 가톨릭을 개혁하면서 죽음과 고통과 어려움의 많은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험한 시험과 역경이 몰아친다 할지라도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새로운 용기와 소망이 넘친다."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언제나 소망과 용기가 넘친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늘 살아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새로운 삶이 전개될 줄로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다함께 "살아 계신 주" 함께 찬양합니다.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내 모든 죄 용서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나의 구세주.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주안에서 거듭난 생명 도우시는 주의 사랑. 참 기쁨과 확신 가지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입으며 살리.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그 언젠가 주 뵐 때까지 주를 위해 싸우리라 승리의 길 멀고 험해도 주님께서 나의 앞길 지켜주시리. 살아 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지금도 늘 살아 계신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늘 살아 계신 주님은 우리 가운데 계시어,


첫째로 두려움과 의심을 물리쳐 주십니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절망에 처한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27세가 되었을 때 신경쇠약증에 걸렸습니다. 그로 인해 공포와 두려움과 낙심 가운데 언제 자살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헤어 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어떤 좋은 약이나 의사보다, 뛰어나다고 믿는 인간의 생각이나 방법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하는 말씀을 읽을 때에 그는 마음에 감동을 느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예수께서 내 병을 못 고치시겠는가 생각하니 마음이 기뻐 그 말씀을 종일 복창하였습니다. 그러자 마음속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믿음이 점점 커지자 용기와 희망이 생기고 살아 계신 주께서 늘 함께 하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몰았던 신경쇠약으로부터 깨끗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뛰어난 심리학자로서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고통을 겪으며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미래를 알지 못해 불안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래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염려합니다. "이제는 끝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순간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들은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예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함입니다. 이는 여인들이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고 합니다. 그러니 저들에게는 오로지 슬픔과 두려움 밖에 없었습니다. 3절에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며 염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두려움과 염려는 이미 제거되어 있었습니다. 돌이 벌써 굴려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부활을 계획하셨기에 돌문을 여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인들은 보이는 돌은 염려했지만 부활신앙을 가로막은 절망의 돌을 치우는 일은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우리 앞에 있는 두려움과 염려의 돌을 옮겨주셨습니다. 더 이상 가로막고 있는 돌문을 바라보며 좌절하거나 실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돌무덤 안에 계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만나시려고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께서 늘 살아 계시어 우리의 두려움과 의심 또한 날마다 물리쳐 주심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처음 사랑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클락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일하는 전도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미국 시카고에서 매일 밤 전도 집회를 합니다. 꾸준하게 회중이 모입니다. 그런데 회중의 대부분은 술주정꾼, 도둑, 소매치기, 투전꾼 등입니다. 모두가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클락의 설교는 형편없습니다. 지루하고 싫증이 납니다. 느리고 흐리멍덩한 음성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매일 밤 500여명의 회중이 모입니다. 무엇에 단단히 매인 것처럼 열심히 설교를 듣습니다. 결신자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나옵니다. 싫증이 나서 제대로 들을 수조차 없는 설교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감동이 되었을까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클락의 진실된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처럼 사람의 마음을 깊이 찌르는 힘은 없습니다. 클락의 눈에는 사랑의 눈물이 언제나 고여 있습니다. 지난 날 클락이 이곳으로 처음 왔었을 때 그는 불쌍한 회중들의 가련함을 알고 울었습니다. 그런데 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마음을 차갑게 가졌습니다. 그 결과 울지 않는 노력은 성공했으나 설교에 능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 눈에 눈물을 돌려주시옵소서." 하나님은 그에게 눈물을 돌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처음 사랑을 회복시켜주셨고 놀라운 능력도 주셨습니다. 사랑은 위대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고 사람들을 이끄는 매력이 있으며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6절입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본문에 의하면 부활 사건의 초점이 빈 무덤이 아니라 갈릴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무덤 속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이미 부활하셔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갈릴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장소입니다.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려는 주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갈릴리는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곳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시키신 곳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숨어서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사랑과 처음 열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을 향한 사랑이 회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첫 사랑의 장소인 갈릴리로 모이게 하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부활을 확인시키심으로 새로운 용기를 주고, 첫 사랑을 회복하고,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첫 사랑을 잃어버린 분이 있습니까? 신앙의 좌절을 맛보고 낙심한 분이 있습니까? 부디 부활하신 주님을 통하여 첫 사랑을 회복하시고 은혜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부활을 증거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일본의 최고 기업인 '가네보' 제약회사의 경영자 미타니 야스토는 예수님을 만나 부활신앙으로 인생이 역전되었다고 간증합니다. 인사과장으로 일하면서 회사에서도 항상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고 상부에서 회사 안에서는 신앙생활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는 회사에서 쫓겨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겠습니다" 라고 상사에게 선언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서 "네가 나를 배반하는구나"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성경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구절을 읽으며 마음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자책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겠다고 기도하면서, 직장을 잃어버리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평강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다시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회사 동료들에게 열심히 전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 전역을 순회하면서 이백여 회의 전도집회를 하고 간증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회사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성실함과 실력을 인정받아 급격히 승진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주심으로 회사를 일본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시킨 기여를 인정받아 그 회사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이후 야스토는“예수님의 부활 신앙 체험으로 인생이 역전되었습니다.”라고 간증하게 된 것입니다.

15절에 예수께서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예수 부활하심으로 예수 믿는 자들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전하는 내용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빈 무덤을 본 자들은 예수님의 살아나심을 증거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자들도 누구를 만나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직접 빈 무덤을 보지 못했고,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셨다고 증거하며 목숨걸고 외쳤습니다. 우리도 부활신앙으로 부활의 증거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절 신앙과 부활신앙을 구별하여야 합니다. 부활절에 교회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계란을 준비하여 나눠주고 새벽 예배드리는 일들은 부활절 신앙이라고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고 체험하는 것은 부활신앙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부활절 신앙이 아닌 부활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 하는 신앙입니다. 부활사건은 나 자신이 믿어져야 관계가 있게 됩니다. 부디 두려움과 의심을 물리쳐주시고, 첫사랑을 회복시켜 주시며, 부활의 능력을 날마다 주시는 늘 살아 계신 주님을 전하는 부활의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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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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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부활절
  성경 ; 시118:14-25, 고전15:1-11, 요20:1-18
  제목 ;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할렐루야, 부활의 영광과 기쁨이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성도 여러분에
게 언제나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이번 부활절을 맞이해서, 저와 여
러분이 부활의 진리를 좀 더 깊이 깨닫고 확실하게 믿음으로써, 지금보다 훨씬
더 활발하게 부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주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우리가 전파한
복음도 헛되며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이다(고전15:14)’라고 했습니다. 바울
은 다시금 강조하기를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여러분의 믿음도
헛되고, 여러분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
들도 망했을 것이다(고전15:17)’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만일 기독교
인이 된다는 것이 지금 이 세상에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피
조물 중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일 것이다(고전15:19)’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실하
게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하게 믿을 경우, 믿음생활을
온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지 아니 믿는지 알 수가 없는, 그처럼
흐릿하고 불분명한 신앙이 아니라, 그야말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확
실한 믿음을 갖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부활신앙은 살아있는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죽은 나무는 날이 갈수록 썩어문드러지
지만, 살아있는 나무는 날이 갈수록 무럭무럭 성장하고 새롭게 변화하는 모습
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날이 갈수록 그 믿음이
더욱 성장하고, 그 생활하는 모습이 날마다 새롭게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습
니다.
    그리고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밝은 소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지금 사는
것이 많이 고달프고 괴로울지라도 밝은 미래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습니다. 예
수께서는 그 누구도 이겨내지 못한 죄와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부활을 승
리를 거두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하신 그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결코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절대로
굴복하지 않고 기어코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를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반드시 승리하도록 자비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몇 해 전, 조선일보 인터넷 판에는 ‘두 손이 없는 소금장수, 강경환 씨의
장엄한 인생’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
습니다.
    해마다 명절이 되면, 충남 서산 일대에 사는 독거노인들 집 앞에는 맑은
천일염 30킬로그램들이 한 포대씩 놓여 있곤 했다는 것입니다. 13년째나 계속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지난해에 그 주인공을 알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강경환 씨입니다.
그런데, 그는 두 손이 없는 장애인입니다. 두 손이 없는 그가 염전을 운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7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기초생활수급자였습니다. 그야말로,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쁜 사람이 남을 돕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두 손을 잃게 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습니다. 해변에서 깡통
하나를 발견해서 갖고 놀다가 돌로 그 깡통을 두드려댔는데, 그 순간 그 깡통
이 터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깡통은 6&#8228;25 동란 때에 묻어놓은 대인지뢰였습
니다. 이때, 그는 그만 두 손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남 보기가 부끄러워서 중학교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 그
는 아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밥을 먹여주고, 소변까지 뉘
어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외갓집에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다가 너무나 배가 고픈
나머지, 그가 스스로 수저질을 해서 밥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소변보는 일도
스스로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모든 것이 다 귀찮고 힘들어서 농약 먹을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누군가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
았습니다. 그 대신에, 그는 주막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밤 12시에 퇴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술을 먹고 집에 왔는데, 책상에 유인물이 하나 있
었습니다. 그는 무심코 그걸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그 유인물에는 팔 둘과 다
리 하나가 없는 ‘정근자’라는 사람이 교회에서 간증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
니다. 그는 그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때, 그는 그 간증을 듣고 생각했습니다. ‘저런 사람도 사는데, 나는 그
절반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얼마든지 사람구실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는 그 정근자 씨에게 편지했습니다. “나도 당신처럼 잘 살 수 있는가”하고
말입니다. 답장이 즉시 왔습니다. “너도 나처럼 잘 살 수 있다”고.
    강경환 씨는 기자에게 “나에게 손이 있었다면, 나는 그 손으로 나쁜 짓을
하고 살았을 거 같다”고 말했습니다. “손이 없는 대신에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마음의 변화를 갖게 되었으며, 그 결과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정근자 씨로부터 편지를 받은 이후, 술을 끊고 일을 배우기 시작했습
니다. 삽질도 익혔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손목에 낫을 테이프로 감고서 낫질을
하면서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다니던 교회에서 배우자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친구가 그에게 염전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피눈물
나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농사짓는 삽보다 훨씬 더 무겁고 큰 삽을 두 손
없이 사용해야 했습니다. 정상인만큼 일하기 위해서, 그는 하루 2시간만 잠을
잤습니다.
    그 와중에, 그는 남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손을 잃어버
린 대신에 얻게 된 귀중한 사랑이기 때문에, 그는 그 사랑을 직접 이웃에게 실
천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소금 한 포대에 만 원을 받으면, 거기서
1000원을 떼어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기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에게
소금을 나눠주었던 것입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올해까지 14년째를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는 소록도에도 해마다 김장용 소금을 30포대씩 보냈다고 합니
다.
    그는 2001년에 시청에 자발적으로 가서 기초생활수급자 신분을 포기했습
니다. 그리고 그는 작지만 아파트도 하나 장만했습니다. 그는 또한 “나는 살
수 있는 길이 어느 정도 닦아졌으니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주라”고 하
면서, 한 달에 6만원씩 받는 장애인 수당도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염전이 자기 것이 아니고 남의 염전을 소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사랑의 실천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가
사춘기 때에 손을 잃어버리고 청년시절까지 방황하다가 얻게 된 그 소중한 믿
음이 그로 하여금 계속 어려운 사람 돕는 일을 하게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강경환 씨는 지금 부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에, 그는 손만 잃
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의 생명까지 잃어버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살았으
나 죽은 자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정근자 씨를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
를 믿게 됨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부활의 삶을 얼마나 제대로 살고 있는지요? 진정
부활의 진리를 바로 잘 깨닫고 그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두
손이 없는 강경환 씨보다는 좀 더 나은 생활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스스로 그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부끄러워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겠지요. 쓸모없는 우리 인생을 존귀케 하
시려고 부활신앙을 허락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오늘 우
리는 지금보다 좀 더 성숙한 부활신앙을 갖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1.부활의 진리를 잘 깨닫고 그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고린도전서 15장 9절 이하에서 ‘나는 사도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나는 교회를 박해했던 인물이니, 사도라고 불
릴 자격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오
직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덕분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열
심히 일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그런 일을 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이 아
니라, 그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아무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사람이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를 뵙고 난 후에, 그는 부활예수를 증거하는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
러니까, 예수님 편에서 볼 때에, 바울은 과거에 아무 쓸모가 없는 정도가 아니
라, 복음전도의 방해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뵌 후에
는, 복음전도의 방해자가 아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새 인생을 살았던 것
입니다.

    프랑스 황제 루이 14세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
가다.' 라고 외치면서 베르사이유 궁전을 완성하고 프랑스의 권위를 세계만방
에 떨쳤던 아주 유명한 황제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 교인으로서 기독교를 방해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
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박해의 손을 뻗쳐 칙령 거역 죄로 ‘세오졸프’
라는 사람을 체포해서 파리 탑의 감옥에 감금했습니다.
    때마침, 부활절이 되어서 루이 14세는 황제의 복장을 갖추고 호화찬란한
부활절 행렬 대를 거느리고 파리 시가를 행진했습니다. 높은 감옥의 탑 위에서
이 행렬을 바라본 ‘세오졸프’는 하늘의 영감을 받아 부활절 찬송을 힘차게 부
르기 시작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부활 승천하셨다. 세상사람 찬양하니, 천사 화답하도
다.’ 이렇게 찬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황제는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그 찬송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찬송 소리는 의기양양하게 행진하던 루이 14세
의 양심을 때렸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왕 중의 왕' 이 되신다는 사실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황제는 부활 축제 행렬을 멈추게 한 후에 감옥으로 들어가서 ‘세오졸프’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빌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석방해서 자
유인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시편 118편 15절에서, 시인은 ‘바르게 사는 사람들의 집집마다에서 들려
오는 저 소리, 기뻐서 소리 지르는 저 환호성을 들어보아라. 여호와께서 힘쓰
시어 엄청난 일, 곧 승리를 거두게 하셨다.’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23절 이하
에서 ‘여호와께서 이루신 이 일, 그저 놀랍기만 하여라. 이 날은 여호와께서 승
리를 안겨주신 날, 다같이 기뻐하며 함께 잔치 벌이자!’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최대의 적인 죄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망과 기쁨을
안겨주셨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든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따를 경우, 새로
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우리 모두 부활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이 묻히신 무
덤을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그 무덤에는 예수님의 시신은 사라지고 빈 무덤뿐
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무덤 안에
예수님이 입으셨던 고운 베옷만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무덤 안으
로 들어가지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그때까지도 예수
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으로 다시 돌아와서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때, 무덤 안에는
흰옷을 입은 천사 두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 마리아가 대답했습니다. “누가 내 주님을 모셔갔는데, 그분
을 어디다 모셔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마리아는 그 등 뒤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
은 예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가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 너는 누구를
찾느냐?”마리아가 예수님께 “당신이 그분을 옮겨가셨다면 어디다 모셨는지 알
려주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마리아야!”하고 부르셨습니다. 그 순간, 마리아도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마리아는 얼떨결에 주님을 붙잡고 “선생님!”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를 계속 붙잡고 있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
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이제 너는 내 형제들을 찾아가서 내가 하나님께 올라
간다고 말하라.”고 일러주셨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만나 뵌 일과, 주님이 일러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그대로 전했습
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께
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은,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어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그를 살려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인간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모든 지혜와 능력을 다 동원해도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 인간을 감싸고 있기 때문입
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곧, 죽게 될 사람이 어찌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겠습
니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고 호화로운 집에서 살게 된다 할지라도 죽음
을 앞둔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진정 평안을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은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
렇게나 살지만, 부활을 믿는 사람은 함부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야 참으로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
이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 사
람이라야 천국에 들어가게 되어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감으로써, 오늘의
저와 여러분이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보답하면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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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말씀

 

 


고난 뒤에 있는 축복   (벧전 5:7-11)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
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
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베드로전서 5장 7절-11절)


1. 모든 사람들은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 비유했고, 그것도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 비유했습니
다.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나라 뿐만은 아닙니다.
세계 어느 곳에 가도 힘들게 사는 사람들은 다 있습니다.
그렇게 풍요로운 나라라는 미국에서도 보면,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편하게 사는 사람들 보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세상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찬송가에도‘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라는 찬송을 부릅니다.
이 세상은 험하고 나는 약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터전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어디를 가 보아도 안전한 삶의 터전은 없습니다.
<흔들리는 터전>이라고 하면 실감이 나지 않을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한번 <지진>이 날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진이 날 때 보면 땅의 기초가 흔들립니다.
아무리 높은 건물도 터가 흔들리니 무너져 내립니다.
우리의 삶의 터는 어디에 가 살아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요즘 탈북자들을 일컬어 <새터민>이라고 부릅니다.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한 사람이란 뜻일 것입니다.
저들이 천신만고 악몽과 같은 생활의 터전에서 탈출하여 <새터민>이 되었지만, 정작 남한에 와 보니 역시 세
상이 그렇게 살기가 쉽지만은 않음을 절감할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에 새 터를 마련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민 가서 고생하지 않고 자리를 잡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성공한 사람들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두 눈물날 정도로 고생한 분들입니다.


그렇게 보면 어딜 가나 모두 힘든 세상임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인과 신앙이 없는 사람의 차이는 이 세상 안에서도 구별됩니다.
신앙인은 터가 흔들릴 때도 이겨 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위에 찬송가처럼,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지만 늘 기도 힘쓰면 큰 능력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도 비유적으로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집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무너지지 않을 반석위에 지은 집이 있고, 다른 하나는 모래위에 짓는 집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반석이 바로 믿음을 의미합니다.
신앙이 왜 필요한가?
잔잔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이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파도가 일어나 몰려오기 시작하면 닻이 필요합니다.
<닻>을 내리면 파도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똑같은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가정은 무너지지 않는데, 어떤 가정은 무너져 내립니다.
믿음이란 닻줄이 없거나 끊어졌거나 하기 때문입니다.


2. 믿음의 터가 견고해 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믿음의 터는 <고난>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육체도 튼튼해지려면 단련해야 튼튼해집니다.
팔뚝의 힘도, 다리의 힘도, 반복된 운동을 통하여 견고해집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왜 기성세대에 비하여 약해졌습니까?
고난의 연단이 없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6.25 세대들을 보면 모두 삶의 연단을 통해 단련된 사람들이었기에 지금 세대들 보다 강하게 현실을 극복해 낼 수 있었습니다.
왜 군대에서 해병대가 강하다고 합니까?
훈련을 강하게 시키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한계 상황까지 이르도록 훈련을 시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일어나는 고난은 삶의 터를 견고케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우리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근신하라고 했습니다.
둘째,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셋째, 마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고난 중에 근신하지 못하고, 깨어있지 못하고, 마귀를 대적하지 못하고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술 취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낙심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방탕하는 일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남들이 낙심할 환경에서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남들이 포기하는 환경에서 정면으로 대결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낙심케 하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끄는 마귀를 대적하여 일어나야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낙심하면 들어 누워 버립니다.
술 취해서 비틀거립니다.
제대로 걸음걸이를 못합니다.
그리고 남의 얼굴을 그어 버립니다.
폭력을 씁니다.
주먹을 휘두릅니다. 
그래서 다시 감옥으로 갑니다.
그러다 나오면 다시 반복해 그런 길을 걷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흔들리는 터전에서 <닻줄>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붙들어 맬 수 있는 믿음이란 닻줄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닻줄이 있는 사람에게는 고난 뒤에 올 축복을 바라보게 됩니다.
폭풍이 지난 후에 떠오를 태양을 바라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반드시 신앙의 눈으로만 보여 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 눈을 통하여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요셉도 이 눈을 통하여 고난 뒤에 올 <축복>을 보았습니다.
에스더도 이 눈을 통하여 담력과 힘이 생겼습니다.
신앙의 사람들은 현재의 고난을 보면서 낙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고난 뒤에 오는 축
복을 바라보는 영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3. 고난 뒤에 있는 축복을 바라보는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영적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에게는 현세에서도 100배나 얻고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주님과 복음을 위한다는 고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고리입니다.
그 고리에 닻줄을 매어 놓으면 어떤 세상의 어떤 풍랑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복음 성가 중에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 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후렴>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참으로 가사에 은혜가 되는 복음성가입니다.


저는 이 노래를 우연하게 들으면서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눈물이 왈칵 났었습니다.
참으로 돌아보면 험한 세월을 살아왔다고 봅니다.
우리 세대가 다 그런 험한 세상을 만난 세대들이었지만, 전쟁, 죽음, 배고픔, 가난의 험한 세월을 지내왔습니다.
  그런 중에도 힘들고 어려운 목회의 길에서 이제까지, 이 자리까지 인도해 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 하세요”라는 말은 자꾸만 가슴에 와 닿는 말입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고난만 보지 말고,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영안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벌써 우리 보다 앞서간 성도들의 걸어간 길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고난 뒤에 있는 축복을 바라보면서 승리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 지금 고난 중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미리 감사 하십시요.
우리의 믿음의 터는 이 고난을 통하여 더욱 더 견고해 질 것입니다.
모쪼록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 서십시요.
일어서는 자들에게 주님은 그의 팔로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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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주일예배설교, 감사하는 자의 복

 

 

 

제목 : 감사하는 자의 복

말씀 : 시107:1~7

1.감사는 현재를 행복하게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누굽니까?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굽니까? 그것은 권세나 지식이나 재물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키가 크고, 인물이 훤칠하고, 능력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정말로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요, 모든 것을 누리는 사람이요, 그래서 진정한 행복을 아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100여세대가 살고 있는 15평짜리 낡은 아파트 단지가 있다고 칩시다. 여기에 모여사는 사람들은 물론 특별한 경우도 있겠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기본 재산도 별로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월급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재산도 월급도 많지 않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연속극에 나오는 넓고 호화스러운 집과 멋진 청춘남녀들과 그들이 다니는 멋진 직장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무슨 복이 많아서 저렇게 좋은 집에서 좋은 직장을 다니며 너무나 멋지게 생긴 사람들과 사는데 내 꼴은 이게 뭐냐고 탄식하며 원망하며 불만이 가득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집에 들어갈 때마다 감사할 것입니다. 비록 작지만 열심히 일하고 돌아와 안식할 수 있는 이 귀한 보금자리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비록 많은 월급은 아니지만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일터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비록 넉넉지는 않지만 우리 가족 먹을 것, 입을 것, 편히 누워 쉴 수 있는 보금자리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엿새동안 힘써 일하고 주일 하루 쉬면서 예배드리고 가족과 함께 하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습니까? 똑같이 기본 재산이나 월급도 많지 않고 15평짜리 낡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전자의 사람은 그나마 그 작은 아파트도 진정으로 소유하지도 누리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가난뱅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사람은 비록 가진 것이 많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누릴 줄 아는 부유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개를 가지고도 백가지를 누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백개를 가지고도 한가지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가 부자입니까?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물론 한 개를 가졌어도 백가지 천가지를 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백개 천개를 가졌어도 한가지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만가지를 주어도 한가지도 누리지 못하는 가난뱅이인 것입니다.

인터넷의 어떤 사이트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내 손에 펜 한 자루 쥘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 펜으로 그림도 그릴 수 있고, 사랑의 편지도 쓸 수 있으니까요. 내 입으로 말 한마디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 입으로 사랑의 말을 할 수 있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으니까요. 내 발에 신발 한 켤레가 신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 신을 신고 집으로도 일터로도 갈 수 있고, 산책도 할 수 있으니까요.

내 귀로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아름다운 음악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위로의 말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내 코로 향기를 맡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은은한 꽃향기와 맛있는 음식 냄새와 사랑하는 이의 체취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내 곁에 부모형제와 친구가 있다면 그것은 감사입니다. 서로 의지하고 기대고 마음을 털어놓으며 따뜻한 위로의 말도 전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못해도 손에 펜만 한 자루 쥘 수 있어도, 말만 할 수 있어도, 들을 수만 있어도, 걸을 수만 있어도, 냄새만 맡을 수 있어도, 내 곁에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그것만으로 감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뭔가 가치와 의미와 보람과 기쁨을 찾는데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가진 것을 진정으로 누릴 줄 아는 사람의 것입니다. 지식이나 권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 하나라도 감사할 줄 아는 자의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 격언에는 천국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고, 지옥은 불평하는 자들로 가득한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특별히 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없는 거, 모자라 거, 약한 것, 부족한 것 생각하며 원망 불평 낙심 절망하지 말고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살전5:18절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정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 풍성한 계절을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멀쩡한 사지를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자유와 평화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더 많은 것을 달라고 하기전에 먼저 감사함으로 행복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저와 여러분은 감사와 은혜가 충만한 심령으로 기쁨이 충만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감사는 행복한 미래를 보장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오늘을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내일의 복을 보장해 주는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이기도 합니다. 감사할 때에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지만 감사할 때에 힘도 생기고 지혜도 생기고 용기가 생깁니다. 긍정적 적극적 에너지 넘치게 됩니다.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여유가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게 됩니다. 그래서 앞길이 열리고 그래서 더 많은 것들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체불만족의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는 태어나면서부터 사지가 없이 머리와 몸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좌절과 원망이 아니라 이런 아들을 주신 것을 감사하며 긍정적으로 열심히 키웠습니다. 그에게 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을 생각하며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특수학교에 보내지 않고 일반학교에 보내 정상적인 아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게 하고 그들과 함께 농구도 하고 축구도 했습니다. 대학에 가서는 정상적인 학생들보다 더 많은 동아리 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당히 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선생으로, 잡지사 기자로, 방송사 캐스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이 오토다케의 부모나 오토다케 본인이 없는 것을 생각하며 원망과 불평 속에 있었다면 이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전생에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이런 아들을 주셨습니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왜 이런 꼴로 나를 태어나게 했습니까?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왜 남들 다 가지고 있는 팔다리도 내게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원망하고 불평하였다면 이 사람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보나마나 저 길거리 한 모퉁이에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얻어먹는 거지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토다케의 부모나 그 자신이나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불리한 여건보다는 그들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을 때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보다도 오히려 더 감사하며 위대한 일을 감당하며 복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원입니다. 감사는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하나님께 대하여 만족감을 느끼게 합니다. 자신과 가족과 이웃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듭니다.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게 만듭니다. 사랑과 기쁨과 용기와 자신감을 가져다줍니다. 갈등과 미움과 저주와 불평과 원망 등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없애버립니다. 또한 감사는 정신적, 육체적 긴장을 완화시켜 줍니다. 면역력을 높이고 활력을 주어 육체의 건강을 지켜줍니다. 질병에 잘 걸리지 않게 하고 설령 질병이 와도 감사와 긍정속에 사는 사람은 치료가 잘 됩니다. 마음이 편해지고, 혈압이 떨어지고, 소화를 잘되게 만듭니다.

여러분, 그래서 이런 사람은 잘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잘 되지요, 힘과 의욕이 생기지요, 마음이 편해지고, 육체의 신진대사도 잘 되지요, 옆에 있는 사람도 기쁘게 하지요, 어려움이 와도 낙심절망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헤쳐 나가지요, 모든 일에 긍정과 적극성과 성실성을 가지고 임하게 되지요, 그러니 어떻게 잘 안되겠습니까?

그래서 유명한 스펄전 목사님은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 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해와 달이 필요 없는 영원한 빛을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50:23에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을 통하여 자신과 이웃에게 힘과 의욕과 활력과 기쁨을 주고, 매사에 적극성과 긍정과 열심을 가지고,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을 감동시키고 그래서 오늘이 행복하게 하고 내일의 축복이 보장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감사가 곧 믿음의 척도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감사는 곧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동서남북 사방에서 모아서 구속하여 주신 은혜를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심을 믿는다면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는다면 감사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로, 이렇게 신비한 존재로 창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셔서 우리에게 맡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셔서 우리의 죄과를 죄대로 갚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걸 알고 믿는다면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창조, 인도, 거룩, 의, 선, 구원을 믿는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감사 곧 믿음이요, 믿음이 곧 감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죄는 감사하지 않는 죄이다.”라고 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자식이 부모의 은혜를 모른다면 어찌 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먹고 입고 잠자고 게다가 천국의 은총까지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는다면 이 어찌 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감사가 곧 믿음이고, 믿음이 곧 감사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감사할 수 밖에 없고, 믿음이 있는 자도 감사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고백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주실 것에 대한 믿음으로 감사하며 사심으로 더욱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할때에 더욱 은혜와 기쁨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구원의 은총에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감사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감사할 수 밖에 없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요건들이 있지만 설령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감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을 비롯한 모든 어둠의 권세에서 해방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2절부터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한마디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들 즉 죄와 마귀와 어둠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속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우리가 주리고 목마름으로 피곤할 때 우리를 부르셔서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리고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정 갈 바를 알지 못하던 인생이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가 생명의 길인지, 어디고 천국길인지 천지도 모르고 제멋대로 살던 인생이었습니다. 죄와 무지와 어둠의 세력에 붙잡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치닫던 인생이었습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커녕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 주신 것입니다. 다만 건져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영원히 거할 저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는 더 이상 죄와 무지와 마귀와 죽음의 권세에 억눌려 있는 자가 아니라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찌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큰 은혜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나아가 저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된 것은 더할 나위없이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는 감사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감사가 곧 믿음입니다. 또한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는 오늘과 내일의 행복을 보장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은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으로 채워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늘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더 많은 것이 있으면 감사하겠다하지 말고 지금 이미 주어진 것에서 감사거리를 찾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행복해지면 감사하겠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행복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혹시 조금 힘든 일이 있어도 거기에 함몰되지 말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가운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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