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설교]성도는 최고의 신사 (Sunday preaching)

 

 

 

 


말씀 : 행17:10-15

제목 : 신사적인 그리스도인

 

1.성도는 최고의 신사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지상 최고의 신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슨 몇백만원 몇천만원하는 명품 옷이나 시계나 구두를 신고 번쩍번쩍 빛나는 고급 세단차를 몰고 다니는 그런 신사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영혼과 인격과 정신과 생각과 가치관이 신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원래 신사 즉 gentleman은 ‘가문이 좋은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문으로도 큰 띠 紳, 선비 士자를 써서 옛날 중국에서 예복을 입고 큰 띠를 맨 고위직에 있는 선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사란 본래 높은 지식과 인격과 품위를 가지고 있는 높은 신분의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누굽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보다 고귀한 신분이 어디 있습니까? 또한 우리는 하나님과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사람들입니다. 이 보다 높고 고상한 지식이 어디 있습니까? 또한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원수조차 사랑하라는 최고의 윤리 강령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세상의 그 어떤 사람들보다 높고 고상하고 영광스러운 신분과 지식과 윤리강령을 가진 사람이므로 마땅히 최고의 신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벧전2: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인데 거지같은 인생을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거룩한 나라의 백성인데 속되고 추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니 그 고귀한 신분에 걸맞게 고상하고 품위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얼마나 존귀하고 거룩한 존재인지 기억하며 몸과 마음과 말과 행동과 영혼이 거룩하고 깨끗하고 품위 있고 단정한 참 신사다운 삶의 모습으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존중받으며 주의 은총 풍성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신사다운 면모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1절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너그러워서’라는 말씀은 본래 ‘고귀한 혈통의, 마음이 고상한’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에 쓰던 개역성경에서는 이 말씀을 ‘신사적이어서’라고 번역하였는데 이 말이 원어의 뜻에 훨씬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기에 신사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2.고상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들을 신사적이라고 평가한 것은 우선 그들은 고상한 인격을 가지고 있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앞에서 본 11절 말씀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들은 너그러워 즉 고상하여 말씀을 잘 받아들였다. 그리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속되고 추하고 더러운 것들에는 관심이 없고, 고상한 진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순전하고 고상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베뢰아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신사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상한 마음, 신사적인 마음,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의 돈이나 일이나 향락이나 이런 세속적인 것들로 가득차 있으면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받지도 않고 설령 받는다해도 결코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13장에서 사람의 마음을 네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길가와 같은 마음인데 이런 마음은 완고하고 강퍅하여 죽어도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제 고집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씨알머리도 먹히지 않습니다. 다음에는 돌밭과 같은 마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마음은 말씀을 받기는 받는데 건성으로 받아 말씀이 심비에 새겨지지 않음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면 실족해 버리는 마음입니다. 다음에는 가시떨기 밭과 같은 마음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 마음은 말씀을 받기는 한 것 같은데 마음속에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욕심이나 향락이나 이런 온갖 잡동사니들로 가득차 있어서 말씀의 씨앗이 싹이 터서 조금 자라다가 세상 것에 묻혀서 결실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마치 곡식이 잡초 속에 떨어져 겨우 싹을 내긴 했으나 잡초에 묻혀 아무런 결실도 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마음이 고상하여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씨앗이 잘 싹이 트고 자라나 30배, 60배, 100백의 결실을 맺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바로 신사적인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네 종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애굽왕 바로는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끝까지 완고하고 강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다가 끝내 열가지 재앙을 당하고 전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는 비극을 만났습니다. 가룟 유다는 가시떨기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재물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까지 팔아 넘겼고,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사람으로서 듣지 못할 소리를 들었고, 결국 비참한 자살로 최후를 마치고 말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가시떨기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재물을 탐을 내다가 부부가 함께 죽는 비참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데마라는 사람은 처음에는 바울을 따라 다니며 열심히 믿음 생활하는 것 같았으나 믿음의 뿌리가 없어 바울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 결국 천국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반면에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지난 시간에 함께 보았던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는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하여 베드로사도를 초청한 다음에 온 가족과 친척과 친구까지 초청해서 모아 놓고 기다리다가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러 오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모셔 들여 겸손히 말씀을 받음으로 온가족과 친척과 친구까지 구원받게 하였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도록 그물질을 하였으나 피라미 새끼 한 마리 잡지 못하고 지치고 곤한 몸으로 돌아와 항구에 배를 대고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오셔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어부인 베드로의 지식이나 경험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말씀이었습니다. 고기는 주로 호수의 가장자리 근방에서 잡히지 가운데 깊은 곳에서는 잘 잡히지 않습니다. 게다가 해가 중천에 떠오른 지금은 고기가 잡히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헛그물질을 했기에 지칠대로 지쳐 이제는 그물질 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까지 별거 아닌 자신의 경험과 이성과 지식을 다 내려놓고 ‘주여,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했으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여러분, 저는 농사도 잘 모르고, 여러분의 직장이나 경영하는 사업장의 상황이 어떤지 솔직히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농사를 짓는 일이나 직장생활하는 일이나 사업장을 경영하는 일에도 제 말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언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각론에 들어가서는 여러분의 경험과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되 근본적인 원칙은 반드시 제말대로 하십시오. 겸손히 저의 말을 받아들이십시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배격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겸손히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의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방법은 여러분들보다 만배 억배 수백 수천억배 더 좋고 더 크십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안에 성공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 안에 풍성함이 있습니다. 오직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그 방법을 따르는 자들에게 인생의 배가 가득 차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강퍅하고 완고하고 가시덤불같은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그 알량한 지식과 이성과 경험만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밤새도록 아니 죽을 때까지 수고해봐야 결국은 헛그물질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오늘 베뢰아 사람들처럼 옥토와 같은 마음, 고상한 마음, 신사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여러분 인생의 배가 만선을 이루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여러분, 베뢰아 사람들은 이렇게 고상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또 어떻게 하였다고 하였습니까? 앞에서 본 11절 다시 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러한가하여’라는 말씀은 성경이 정말 그런지 아닌지 의심하며 읽었다는 뜻이 아니라 정말 예수님이 누구신지, 참된 진리와 생명이 무엇인지, 진정 인생이 나아갈 방향이 어디인지 알기 위하여 성경을 날마다 상고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2절입니다.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그렇게 성경을 상고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처음에 바울에게 들었을 때는 겸손하고 고상한 마음으로 그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 다음에는 이 고상한 진리의 말씀을 더욱 바르게 자세히 확실하게 알기 위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바르게 깨닫고, 주님의 음성을 분명히 듣게 되었고,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분명히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일단은 겸손하고 순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다음에는 열심히 말씀을 상고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재림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분명하게 알려주시고 믿게 하시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정말 어디에 생명이 있는지, 무엇이 복을 받는 길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히 알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최고의 신사다운 면모를 가지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말씀을 받지도 않고, 설령 받았다해도 간절하 마음으로 상고도 하지 않으면 길가와 같은 마음, 돌밭과 같은 마음,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과 고집과 이성과 경험을 따라 살게 되고, 그러면 결코 신사와 같은 인생도, 성공한 인생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초라하고 추하고 자부심도 긍지심도 가치도 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열심히 상고하면 진실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능력가운데 살게 됩니다. 성공한 인생, 멋있는 인생, 신사중의 신사와 같은 인생, 주께 영광 돌리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겸손히 말씀을 받고 열심히 상고함으로 주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 생명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며 신사다운 신사의 삶을 살아감으로 빛과 같이 빛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믿음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짜 신사는 진리를 끝까지 지키는 사람입니다. 죄와 악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쉽게 불의에 굴복하고 죄와 야합하고, 세상과 짝하며 추하고 아름답지 못한 것들과 벗하며 지내면 신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도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짧은 신앙경륜에도 불구하고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믿음을 지킬뿐더러 바울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14,15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무슨 말씀이냐하면 바울은 베뢰아에 오기 전에 데살로니가에 있었는데 유대인들이 불량배들을 시켜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을 모함하여 체포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간신히 보석금을 주고 풀려나긴 했지만 더 이상 그곳에서 전도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 이곳 베뢰아로 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와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이 전도는커녕 도리어 신변이 위험해지자 예수님을 영접한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일행을 아덴까지 안전하게 피신시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믿게 된지 불과 한 두달내지는 몇 달 밖에 안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많은 군중을 선동하여 바울을 무슨 이단자나 사이비 집단으로 몰아간다면 혼란에 빠지고 미혹당하기 쉬운 때였습니다.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이런 위협과 유혹과 핍박이 있으면 교회를 떠나거나 아니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숨어있기 십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베뢰아 사람들은 그 짧은 신앙연륜에도 불구하고 그런 위협과 공갈과 유혹과 핍박 앞에 무릎 꿇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들은 겸손하고 고상한 마음으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였기 때문에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킬 뿐만 아니라 위험을 무릎쓰고 바울일행을 안전하게 아덴까지 피신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신사적인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났을 때 부인하고 도망가고 숨는다면 그게 무슨 신사이겠습니까? 조금 손해볼 것 같으면 진리를 팔아버린다면 그게 무슨 신사겠습니까? 베뢰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짧은 신앙연륜에도 자신들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키는 것은 물론 바울일행까지 안전하게 피신시켜주는 신사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신사다운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고귀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그런데 조금 힘들다고 진리를 버리겠습니까? 어떻게 조그마한 물질적 이익을 위하여 신앙양심을 팔아먹겠습니까? 어떻게 죄의 세력에 굴복하고 더럽고 추하고 거룩하지 못한 것들과 야합하며 친구가 되겠습니까? 그래가지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영화로우시고 거룩하신 주님의 자녀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저와 여러분은 진정 신사다운 크리스천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고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열심히 상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과의 온전한 관계속에서 내 생각, 고집, 이성, 경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세상의 모든 죄나 악이나 더럽고 추하고 속된 것들에게 지지 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오직 믿음안에서 예수님을 따라 거룩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귀한 신분에 어울리는 신사 중의 신사적인 모습으로 주의 영광 나타내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받고 존경받고 인정받으며 주님의 은총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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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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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 윤택한 영혼을 위하여

 

 

 

말씀 : 갈2:19~21

제목 : 영혼을 윤택함을 위하여

 

1.진리 안에서의 갈등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마음이 무겁고 갈등과 고민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초신자들은 공연히 교회에 나와서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차라리 아예 하나님도 모르고 말씀도 듣지 않았더라면 부담없이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텐데 공연히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말씀 듣고 보니까 부담만 되고, 걱정이 되고, 갈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일을 잘 하지 못하는 것도 부담이 되고, 이웃을 섬기지 못해서 마음이 무겁고, 때로는 주일날도 가족들하고 어디 나들이나 다녀오고 싶은데 그것도 맘대로 못하고, 헌금생활 제대로 못하는 것도 마음이 무겁고 그렇다고 또 하자니 돈이 아깝고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과 고민이 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 여러분에게 이런 고민과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의 감각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고민과 갈등이 없다면 그 영혼은 완전히 죽어서 감각이 없는 영혼인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은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육신이 시키는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놀고 싶으면 놀고, 아무거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도 고민도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도덕적 감각이 완전히 죽어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도적질을 하고도 오늘 한건 했다며 먹고 마시고 즐깁니다. 사기꾼들은 사기 쳐서 돈을 빼앗고는 기분이 좋아서 낄낄 거립니다. 마약에 취한 사람은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좋다고 희희낙락합니다. 술에 취하면 죄를 짓는데 용감해 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덕성이 마비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양심이 죽어서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때리고 차고 꼬집고 별짓을 다해도 아픈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죄짓고 제멋대로 살아가면서도 고민이 없습니다. 희희낙락합니다. 제 마음대로 살아가면서 나는 자유하다, 평안하다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아픔이 있습니다.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은 죄를 지으면 아픕니다. 조그마한 죄에도 통증을 느낍니다. 그러나 죽은 것은 아픔이 없습니다. 죄를 짓고도 뻔뻔합니다. 그래서 영혼과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저 육의 욕구를 따라 살면 되었지만 예수님 믿고 영혼이 살아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한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도 옛 자아가 남아서 자꾸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도록 충동질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주인이었기 때문에 내 맘대로 살면서 아무 갈등과 고민 없이 마음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새주인이신 예수님을 모셔들이고 예수님이 이끄시는대로 살아가려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내가 주인 노릇하던 그 행세가 남아 있어서 자꾸만 육의 욕망을 따라 가려고 할 때가 많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진리 때문에 겪는 고민과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요, 진리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갈등과 고민이 우리를 더욱 하나님 앞에 세움으로 성화의 길을 가게 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좀 더 풍성하게 누리게 하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후7:10절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지만 그 죄인중에 괴수라는 인식이 자신을 더욱 하나님 앞에 가까이 세우게 함으로써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던 신앙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신앙생활하면서 진리 때문에 겪는 갈등과 고민이 있을 때, 내가 정말 너무 부족하고 미련하고 죄많은 인생이라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 너무 죄송스럽고 마음에 부담이 되고 갈등이 생길 때 너무 낙심하고 탄식하고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책하고 탄식하고 낙심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더 주저앉힐 뿐입니다. 힘을 빼놓고 무기력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은 하납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래서 갈등과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으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은혜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점점 성화되어가고 그러면 점차 그런 갈등과 고민도 최소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고민과 갈등보다는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훨씬 크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과 참 자유가운데 할렐루야 찬양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하면 좀 더 성화되어 주님과의 갈등을 최소화시켜 주님의 은혜들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을까요?

2.속사람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갈등과 고민을 이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우리를 그렇게 고민과 갈등과 죄속으로 몰아가는 옛자아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자아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속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자아보다 새 자아가 힘이 훨씬 세면 우리는 옛자아에게 질질 끌려다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자아보다 옛자아가 힘이 세면 옛자아에게 질질 끌려다니니까 우리의 삶이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한 인디언 노인이 손자에게 말했었습니다. “얘야, 사람의 마음속에는 늘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단다. 한 마리는 악마 같은 놈으로 늘 거짓과 미움과 도적질과 향락과 음란과 분노와 질투와 탐욕과 교만 등의 악한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나쁜 길로 내몰려고 하고, 다른 한 마리는 착한 늑대로써 믿음과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희망과 친절과 선함과 겸손과 진실과 용서 쪽으로 우리를 끌고 가려고 하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와 같이 나쁜 늑대와 좋은 늑대가 들어 있어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단다.”

그러자 손자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그러면 좋은 늑대와 나쁜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기나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그야 사람이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기지!” 그러니까 나쁜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나쁜 늑대가 힘이 세져서 이기고, 좋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좋은 늑대가 힘을 얻어서 나쁜 늑대를 굴복시킨다는 것이지요. 힘이 센 놈이 이기는 것은 당연한 거지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 믿고 예수님을 새 주인으로 모셔들이더라도 지금까지 우리를 완전히 지배해왔던 이 나쁜 늑대인 옛자아가 완전히 물러가지 않아서 자꾸만 새자아에게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나쁜 늑대인 옛자아를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 나쁜 옛자아를 이기려면 새자아를 강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3:16절에서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속 사람을 강건케 하라. 그래야 너희가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왜곡된 사상들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쁜 늑대의 힘을 약하게 만들고, 좋은 늑대를 힘이 강하게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육체를 강건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육신에 필요한 영양분을 듬뿍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하면 됩니다.

영혼의 강건함도 동일합니다. 영적인 좋은 양식을 충분히 섭취하고 영적으로 열심히 훈련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쁜 늑대인 옛 자아에게는 먹이를 주지 말고, 좋은 늑대에게만 먹이를 주고 그 좋은 늑대가 열심히 움직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쁜 늑대는 점점 힘을 못쓰게 되고, 완전히 먹이를 끊어 버리면 굶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좋은 늑대인 새자아에게는 영양가 있는 풍성한 양식을 충분하게 공급해 주면 살이찌고 생명력이 풍성해지고 힘이 세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양식만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영양가 있는 양식을 듬뿍주고 열심히 운동을 시켜야 근육이 튼튼해져 힘이 세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자아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듬뿍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시키면 힘이 세져 바짝 말라서 힘없는 옛자아 따위는 단숨에 때려 눕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쁜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무엇이고, 좋은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무엇입니까? 물론 영적, 정신적 양식입니다. 나쁜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이런 것들입니다. 맨날 싸우고 죽이고 빼앗는 폭력적인 오락을 즐기거나 그런 폭력적이고 음란한 영화를 보고, 술집이나 도박장을 기웃거리고, 거짓되고 속되고 우상숭배와 저속하고 더러운 말을 일삼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등이 모두 못된 늑대가 좋아하는 먹이인 것입니다.

반대로 책을 읽어도 건전한 교양도서를 읽고, 아름다운 사랑과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줄수 있는 영화를 보고, 믿음의 사람들, 선한 사람들, 진실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좋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확실한 영혼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것은 우리 영혼을 살리는 확실한 양식입니다. 기도하며 찬양하며 믿음 안에서 아름답게 교제하는 것도 우리 영혼을 살찌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생명력이 넘치게 하는 귀한 양식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전도를 하고 이웃을 돕고 선을 행하는 것은 좋은 늑대를 열심히 운동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의 양식을 먹고, 세상에서도 아름답고 선한 것들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며 선을 행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좋은 늑대에 양식을 풍성하게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시키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100%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아가 옛자아를 이겨 거룩하고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꾸만 옛자아에게 먹이를 주고 새자아는 거의 굶다시피 한다면 보나마나 옛자아가 새자아보다 힘이 세니까 옛자아에게 져서 질질 끌려다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6:55절에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생수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우리 심령에 모셔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잘 안하니까 영양실조에 걸려 새자아가 맥을 못추는 것입니다. 자꾸만 세상의 헛된 양식만을 사모하며 그것만을 쫓아다니니까 옛자아는 기세등등하고, 새자아는 빈약하기 짝이 없어 옛자아 앞에서 기도 못펴고 초라한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시편1:1-3절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양식을 잡수시기 바랍니다. 억지로라도 잡수시기 바랍니다. 살기 위해서 잡수시기 바랍니다. 밥맛이 없을 때 살기 위해서라도, 힘을 내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억지로라도 먹고 영적인 운동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몸을 안 움직이면 몸이 자꾸 약해집니다. 아예 안 움직이면 온 몸이 굳어서 꼼짝도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움직이기 싫어도 자꾸 움직여야 합니다. 운동하기 힘들고 귀찮아도 자꾸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몸이 힘을 쓰는 것입니다.

새 자아도 그렇습니다. 억지로라도 먹어야 합니다. 귀찮아도 먹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영적인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자아가 강해집니다. 힘이 세집니다. 그래서 옛자아를 이깁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양식, 생명의 양식을 열심히 먹고, 열심히 영적인 활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속에 있는 새 자아, 영혼, 좋은 늑대가 토실토실 살이찌고 강건해지고 생명력이 넘침으로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전해오는 옛자아를 단숨에 눕혀 버리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예수님을 완전한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속사람을 강건케하여 옛자아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듣고 선하고 좋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열심히 참여해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변화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런 과정에서 예수님이 내안에 온전히 들어오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런 지혜와 능력과 은혜를 달라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세울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드디어 예수님이 완전히 우리 가운데 들어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진리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자아란 놈이 감히 준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악바리 같은 옛자아가 대들긴 하겠지만 그러나 한방에 K.O. 시켜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옛자아가 우리 가운데 온갖 유혹과 정욕과 탐심을 불러 일으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고 협박도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면 옛자아는 이빨도 빠지고 발톱도 빠지고 힘도 다 빠져버린 호랑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빨도 발톱고 힘도 다 빠져 버린 호랑이는 무늬만 호랑이지 실상은 호랑이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런 나쁜 늑대, 나쁜 호랑이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그런 것들을 물리쳐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기에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그의 심령속에 모셔 들여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을 때에 모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도전과 유혹과 핍박과 환난과 고난을 이기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0절에서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죽었다.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있는 것은 오직 믿음 안에서 즉 믿음을 따라서, 말씀을 따라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이 되셔서 완전히 그를 사로 잡았기 때문에 주인이신 주님만을 위해서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에게는 옛자아가 더 이상 준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모든 역경속에서도 주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고 하면서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며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에게 신앙적 갈등과 고민이 있습니까?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습니까? 희망적 징조입니다. 무언가 영혼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거기에 안주하지도 마십시오. 주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조금 더 힘을 내어 여러분의 거듭난 자아에게 양식을 듬뿍 공급하십시오. 영적인 활동을 조금 더 활발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힘 주시고 은혜 주시고 능력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새자아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생명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새자아가 옛자아를 확실히 제압하고 예수님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과 평안과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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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주일낮예배설교 / 강을 건넌 사람들 (October,Sunday Sermon)
 
제목 : 강을 건넌 사람들

말씀:수3:14-17


1.현실의 강을 넘어서야 합니다.

어떤 인터넷 매체에 보니까 박명수 어록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말들이 있었습니다. ‘성공은 1%의 재능과 99%의 빽이다.’ ‘일찍 일어난 새가 피곤하다.’ ‘고생 끝에 골병난다.’ ‘가는 말이 고우면 얕 본다.’ ‘늦었다고 생각할때는 늦은 거다.’ ‘참을 인이 세 번이며 호구된다.’ 그리고 이런 말들에 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고, 이런 말들을 주옥같은 명언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지요? 공감이 가는 말들인가요? 물론 어떤 면에서는 오늘 우리의 실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 공감이 되는 부분들이 없지 않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설령 그런 말들이 오늘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게 진리는 아닙니다. 아니 도리어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다면 그것은 현실이 그만큼 왜곡되고 썩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사고 방식은 결코 인간의 삶을 가치있고 의미있게 하며,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갈등과 탈법과 술수와 상처와 아픔과 시기와 질투와 무질서를 초래하여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더구나 그걸 진짜로 알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말 뿐입니다.

여러분, 세월이 어떻게 변하고, 가짜가 어떻게 그럴듯하게 가장해도 거짓은 거짓에 불과합니다. 세월이 변한다고 진리가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진리가 가짜가 되는 일이 있다면 그건 처음부터 진리가 아니었을 뿐이지 진리가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너무나 왜곡된 가치관이 마치 진리처럼 가장하고 판을 치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와 인본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무사안일주의와 쾌락주의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무슨 박명수 어록이니 뭐니 하는 이런 허접스런 말들이 나오고 그걸 또 무슨 주옥같은 명언이니 어쩌니하며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열심히 말씀과 기도로 훈련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당당하게 큰소리를 치며 흘러가고 있는 이 왜곡된 가치관들 속에 끌려가기 십상입니다. 우리가 맨날 보고 듣고 이야기하고 교제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이 자신이 죄와 무지속에 있는 줄은 모르고 그저 자기중심, 자기 소견, 자기 의지, 자기 경험대로 물질주의, 이성주의, 이기주의 물결속에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정말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거기에 휩쓸려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롬12:2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세대의 왜곡되고 거짓된 것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 영혼이 변화되고, 마음이 변화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그 뜻을 좇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 온전한 분별력을 가지고 모든 거짓되고 왜곡된 가치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다수라는 이름으로 진짜를 가장하고 있는 가짜를 바르게 분별하고 배격함으로 그런 것들에 결코 농락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오염되고 추하고 왜곡된 현실을 이기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잘 달려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현실의 강을 건넌 사람들

여러분,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런 왜곡된 현실의 강을 건너 살 것을 계속 말씀하셨고, 또 그런 말씀을 따라 삶으로써 성공했던 많은 사람들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노아 할아버지도 그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죄가 세상에 관영하여 하나님께서는 땅을 홍수로 멸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 할아버지 가정은 그런 현실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그 현실의 강을 건너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가시려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어 홍수를 피라하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노아는 즉각 순종하여 배를 만들기 시작하여 무려 120년 동안에 걸쳐 방주를 지었습니다.

여러분, 노아의 방주는 길이가 137m, 넓이가 23m, 높이가 14m의 3층짜리 배로 용적량이 3만톤이 넘는 거대한 배입니다. 물론 지금의 조선기술로는 이런 규모의 배 정도야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노아의 가족 여덟식구가 순전히 손으로 이 정도의 배를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120년동안 그 엄청난 일을 하면서 얼마나 힘이 들었겠으며, 또한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있었겠습니까? 이 배를 정말 우리가 완성이나 할 수 있을까? 정말 120년 후에 인류가 멸망할 비가 오기는 오는 걸까? 또 10년 30년 50년 70년 100년이 지나면서 내가 정말 말씀을 바로 듣기는 들은 걸까 등등 많은 생각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전 세계의 홍수심판이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믿고 배를 만드는 노아의 가족을 미치광이 취급을 하면서 노아의 가족을 비웃으며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런 모든 현실을 뿌리치고 배를 만들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오직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였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지만 중단하지 않고 열심히 성실하게 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120년이 지났을 때 정말로 하늘에 구멍이 뚫려 밤낮 40일 동안을 양동이로 물을 퍼붓듯이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온 세상이 물에 다 잠겼고, 노아를 비웃으며 먹고 마시고 즐기던 사람들은 하나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뭐라 그러거나 말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내부 속에서 어떤 생각들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120년간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의 가족 8식구만이 방주 안에서 안전하게 대홍수의 강을 건너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창12: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밑도 끝고 없이 무작정 가라는 것입니다. 떠나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 왜곡되고 죄된 문화가 판을 치는 이 땅과 이 사람들과 이 문화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들을 떠나 내가 새롭게 시작할 그 땅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아버지와 고향산천과 그 모든 환경과 문화의 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구원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애굽의 우상숭배의 문화의 땅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홍해 바다를 건너 멀리 가나안 땅까지 가게 하셔서 거기서 새역사를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들이 뜻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죄와 무지와 왜곡과 어둠의 현실들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딛고 일어서든지 아니면 그곳을 떠나든지 여하튼 왜곡된 현실의 강을 건너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고, 거기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에덴의 모습들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렸고, 너무나 많이 변질되어 있어서 우리가 넘어야 산과 건너야 할 강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때로는 환경과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산입니다. 때로는 이성과 경험이 우리가 건너야 할 강입니다. 불신과 의심과 욕심과 욕망과 돈과 권력도 넘어서야 할 강입니다. 사람과 문화와 과학도 우리가 넘어서야 할 산 중의 하나입니다. 술과 담배와 향락과 무사안일은 말할 것도 없이 반드시 건너가야 할 강입니다. 물질주의와 인본주의과 종교다원주의와 개인이기주의도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요, 건너야 할 강입니다. 이러한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비로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 모두가 원하는 진정한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정말 내가 지금 시급하게 넘어서야 할 산이 무엇인지, 빨리 건너야 할 강이 무엇인지 되새겨보면서 그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인도하심과 능력 주심을 따라 그 산을 넘고 그 강을 건너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산과 강의 저너머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에덴의 축복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약속의 말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산과 강을 넉넉히 건너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말씀드리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어떻게 왜곡되고 오염된 가치관과 문화가 판을 쳐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푯대로 삼고 천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바로 그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오매불망 기다리던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요단강을 건너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중요한 시점에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그때가 우기라서 요단강이 넘칠만큼 싯뻘건 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요단강을 건널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런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갔습니까? 오늘 14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이것은 6절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으로 거기에 보면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장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에 도착하면 무조건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요단강이 갈라질 것이다. 그러면 백성들은 제사장들이 멘 언약궤를 보고 건너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무슨 뜻입니까? 한마디로 세상 물결이 어떻게 넘실 거려도 말씀을 따라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약궤가 뭡니까? 말그대로 약속의 말씀이 들어있는 상자입니다. 그 안에는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생명의 떡이요,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따라가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 생명의 말씀을 따라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요단강물이 아무리 사납게 덤벼들어도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약속을 바라보며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요단강을 가나안복지로 인도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그 때 그 사람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갈때에 사나운 강물이 넘실대며 그들을 방해하고 위협하고 낙심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우리가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갈때에 우리를 실망시키고 낙담케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환난과 풍파가 닥칠때도 있고, 때로는 환경과 상황 때문에, 때로는 물질과 건강 때문에, 때로는 사람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말고 흔들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부여잡고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위협하고 유혹해도 그런 왜곡되고 죄되고 혼잡한 것들에게 눈길도 주지말고, 흔들리거나 낙심하지도 말고,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오직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부여잡고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장애물을 제거해 주시든지, 상황과 환경을 변화시켜 주시든지 아니면 상황과 환경을 그대로 두고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서 이기게 하시든지 여하튼 어떤 방법으로든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며 가나안 복지를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주님이 인도하십니다. 힘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이기게 하십니다. 환경과 상황을 변화시켜 주셔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그러실만한 능력과 권한과 사랑과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정말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주님의 방법과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때에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를 위협하고 유혹하고 넘어뜨리려는 모든 세력들을 이기고 에덴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또 하나 기억할 것은 에덴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려면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15,16절 말씀 보겠습니다.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자 보십시오, 요단강물의 흐름이 언제 그쳤습니까?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물속에 들어섰을 때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스라엘을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이 덤벼들던 요단강의 흐름을 끊고 강바닥을 드러내어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는데 그런 기적이 일어난 시점이 언제냐?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언약궤를 메고 사납게 요동치며 흐르는 요단강속으로 들어갔을 때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기적을 일으켜 놓고 건너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부분의 경우 기적을 만들어 놓고 누리게 하시기 보다는 믿음으로 행동할 때 기적의 은총을 누리게 하십니다. 노아에게도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들어놓고 타라고 하지 않으시고 네가 만들어서 타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실때도 먼저 그냥 무조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동안 반석에서 물을 내실 때도 모세에게 반석을 향하여 명령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포도주를 만들어 놓고 갖다 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물을 떠서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를 부활시킬때도 마르다에게 무덤 입구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는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실로암 못가에 있던 맹인에게는 흙을 눈에 바르고 실로암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말씀에 순종했을 때 결국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즉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갓난아기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믿음과 순진한 마음을 보시고 은헤를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세월이 어떻게 변해도 열심히 성실하게 진리를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지,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지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따르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따라가도 하나님이 아니라 하신 것,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왜곡되고 거짓된 것을 버리고 넘어가고 떠나 갈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유는 두말할나위도 없이 거기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 사랑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이 땅에서 누려야 에덴 동산이 있고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이어지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앞에 높게 서 있는 왜곡된 현실의 산들을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무나 도도하게 흐르는 왜곡의 가치관의 강을 건너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푯대로 삼고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넉넉하게 건너가게 하십니다. 승리하게 하십니다. 이 땅에서도 진정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다가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주십니다. 이런 진정하고 영원한 승리를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우리 온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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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님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

 

말씀 : 2:19~21

 

1.진리 안에서의 갈등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마음이 무겁고 갈등과 고민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초신자들은 공연히 교회에 나와서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차라리 아예 하나님도 모르고 말씀도 듣지 않았더라면 부담없이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텐데 공연히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말씀 듣고 보니까 부담만 되고, 걱정이 되고, 갈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일을 잘 하지 못하는 것도 부담이 되고, 이웃을 섬기지 못해서 마음이 무겁고, 때로는 주일날도 가족들하고 어디 나들이나 다녀오고 싶은데 그것도 맘대로 못하고, 헌금생활 제대로 못하는 것도 마음이 무겁고 그렇다고 또 하자니 돈이 아깝고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과 고민이 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 여러분에게 이런 고민과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의 감각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고민과 갈등이 없다면 그 영혼은 완전히 죽어서 감각이 없는 영혼인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은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육신이 시키는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놀고 싶으면 놀고, 아무거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도 고민도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도덕적 감각이 완전히 죽어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도적질을 하고도 오늘 한건 했다며 먹고 마시고 즐깁니다. 사기꾼들은 사기 쳐서 돈을 빼앗고는 기분이 좋아서 낄낄 거립니다. 마약에 취한 사람은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좋다고 희희낙락합니다. 술에 취하면 죄를 짓는데 용감해 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덕성이 마비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양심이 죽어서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때리고 차고 꼬집고 별짓을 다해도 아픈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죄짓고 제멋대로 살아가면서도 고민이 없습니다. 희희낙락합니다. 제 마음대로 살아가면서 나는 자유하다, 평안하다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아픔이 있습니다.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은 죄를 지으면 아픕니다. 조그마한 죄에도 통증을 느낍니다. 그러나 죽은 것은 아픔이 없습니다. 죄를 짓고도 뻔뻔합니다. 그래서 영혼과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저 육의 욕구를 따라 살면 되었지만 예수님 믿고 영혼이 살아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한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도 옛 자아가 남아서 자꾸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도록 충동질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주인이었기 때문에 내 맘대로 살면서 아무 갈등과 고민 없이 마음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새주인이신 예수님을 모셔들이고 예수님이 이끄시는대로 살아가려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내가 주인 노릇하던 그 행세가 남아 있어서 자꾸만 육의 욕망을 따라 가려고 할 때가 많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진리 때문에 겪는 고민과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요, 진리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갈등과 고민이 우리를 더욱 하나님 앞에 세움으로 성화의 길을 가게 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좀 더 풍성하게 누리게 하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후7:10절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지만 그 죄인중에 괴수라는 인식이 자신을 더욱 하나님 앞에 가까이 세우게 함으로써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던 신앙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신앙생활하면서 진리 때문에 겪는 갈등과 고민이 있을 때, 내가 정말 너무 부족하고 미련하고 죄많은 인생이라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 너무 죄송스럽고 마음에 부담이 되고 갈등이 생길 때 너무 낙심하고 탄식하고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책하고 탄식하고 낙심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더 주저앉힐 뿐입니다. 힘을 빼놓고 무기력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은 하납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래서 갈등과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으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은혜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점점 성화되어가고 그러면 점차 그런 갈등과 고민도 최소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고민과 갈등보다는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훨씬 크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과 참 자유가운데 할렐루야 찬양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하면 좀 더 성화되어 주님과의 갈등을 최소화시켜 주님의 은혜들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을까요?

 

2.속사람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갈등과 고민을 이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우리를 그렇게 고민과 갈등과 죄속으로 몰아가는 옛자아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자아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속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자아보다 새 자아가 힘이 훨씬 세면 우리는 옛자아에게 질질 끌려다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자아보다 옛자아가 힘이 세면 옛자아에게 질질 끌려다니니까 우리의 삶이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한 인디언 노인이 손자에게 말했었습니다. “얘야, 사람의 마음속에는 늘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단다. 한 마리는 악마 같은 놈으로 늘 거짓과 미움과 도적질과 향락과 음란과 분노와 질투와 탐욕과 교만 등의 악한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나쁜 길로 내몰려고 하고, 다른 한 마리는 착한 늑대로써 믿음과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희망과 친절과 선함과 겸손과 진실과 용서 쪽으로 우리를 끌고 가려고 하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와 같이 나쁜 늑대와 좋은 늑대가 들어 있어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단다.”

 

그러자 손자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그러면 좋은 늑대와 나쁜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기나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그야 사람이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기지!” 그러니까 나쁜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나쁜 늑대가 힘이 세져서 이기고, 좋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좋은 늑대가 힘을 얻어서 나쁜 늑대를 굴복시킨다는 것이지요. 힘이 센 놈이 이기는 것은 당연한 거지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 믿고 예수님을 새 주인으로 모셔들이더라도 지금까지 우리를 완전히 지배해왔던 이 나쁜 늑대인 옛자아가 완전히 물러가지 않아서 자꾸만 새자아에게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나쁜 늑대인 옛자아를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 나쁜 옛자아를 이기려면 새자아를 강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3:16절에서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속 사람을 강건케 하라. 그래야 너희가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왜곡된 사상들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쁜 늑대의 힘을 약하게 만들고, 좋은 늑대를 힘이 강하게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육체를 강건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육신에 필요한 영양분을 듬뿍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하면 됩니다.

 

영혼의 강건함도 동일합니다. 영적인 좋은 양식을 충분히 섭취하고 영적으로 열심히 훈련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쁜 늑대인 옛 자아에게는 먹이를 주지 말고, 좋은 늑대에게만 먹이를 주고 그 좋은 늑대가 열심히 움직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쁜 늑대는 점점 힘을 못쓰게 되고, 완전히 먹이를 끊어 버리면 굶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좋은 늑대인 새자아에게는 영양가 있는 풍성한 양식을 충분하게 공급해 주면 살이찌고 생명력이 풍성해지고 힘이 세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양식만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영양가 있는 양식을 듬뿍주고 열심히 운동을 시켜야 근육이 튼튼해져 힘이 세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자아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듬뿍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시키면 힘이 세져 바짝 말라서 힘없는 옛자아 따위는 단숨에 때려 눕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쁜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무엇이고, 좋은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무엇입니까? 물론 영적, 정신적 양식입니다. 나쁜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이런 것들입니다. 맨날 싸우고 죽이고 빼앗는 폭력적인 오락을 즐기거나 그런 폭력적이고 음란한 영화를 보고, 술집이나 도박장을 기웃거리고, 거짓되고 속되고 우상숭배와 저속하고 더러운 말을 일삼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등이 모두 못된 늑대가 좋아하는 먹이인 것입니다.

 

반대로 책을 읽어도 건전한 교양도서를 읽고, 아름다운 사랑과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줄수 있는 영화를 보고, 믿음의 사람들, 선한 사람들, 진실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좋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확실한 영혼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것은 우리 영혼을 살리는 확실한 양식입니다. 기도하며 찬양하며 믿음 안에서 아름답게 교제하는 것도 우리 영혼을 살찌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생명력이 넘치게 하는 귀한 양식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전도를 하고 이웃을 돕고 선을 행하는 것은 좋은 늑대를 열심히 운동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의 양식을 먹고, 세상에서도 아름답고 선한 것들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며 선을 행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좋은 늑대에 양식을 풍성하게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시키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100%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아가 옛자아를 이겨 거룩하고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꾸만 옛자아에게 먹이를 주고 새자아는 거의 굶다시피 한다면 보나마나 옛자아가 새자아보다 힘이 세니까 옛자아에게 져서 질질 끌려다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6:55절에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생수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우리 심령에 모셔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잘 안하니까 영양실조에 걸려 새자아가 맥을 못추는 것입니다. 자꾸만 세상의 헛된 양식만을 사모하며 그것만을 쫓아다니니까 옛자아는 기세등등하고, 새자아는 빈약하기 짝이 없어 옛자아 앞에서 기도 못펴고 초라한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시편1:1-3절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양식을 잡수시기 바랍니다. 억지로라도 잡수시기 바랍니다. 살기 위해서 잡수시기 바랍니다. 밥맛이 없을 때 살기 위해서라도, 힘을 내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억지로라도 먹고 영적인 운동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몸을 안 움직이면 몸이 자꾸 약해집니다. 아예 안 움직이면 온 몸이 굳어서 꼼짝도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움직이기 싫어도 자꾸 움직여야 합니다. 운동하기 힘들고 귀찮아도 자꾸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몸이 힘을 쓰는 것입니다.

 

새 자아도 그렇습니다. 억지로라도 먹어야 합니다. 귀찮아도 먹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영적인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자아가 강해집니다. 힘이 세집니다. 그래서 옛자아를 이깁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양식, 생명의 양식을 열심히 먹고, 열심히 영적인 활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속에 있는 새 자아, 영혼, 좋은 늑대가 토실토실 살이찌고 강건해지고 생명력이 넘침으로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전해오는 옛자아를 단숨에 눕혀 버리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예수님을 완전한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속사람을 강건케하여 옛자아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듣고 선하고 좋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열심히 참여해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변화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런 과정에서 예수님이 내안에 온전히 들어오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런 지혜와 능력과 은혜를 달라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세울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드디어 예수님이 완전히 우리 가운데 들어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진리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자아란 놈이 감히 준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악바리 같은 옛자아가 대들긴 하겠지만 그러나 한방에 K.O. 시켜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옛자아가 우리 가운데 온갖 유혹과 정욕과 탐심을 불러 일으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고 협박도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면 옛자아는 이빨도 빠지고 발톱도 빠지고 힘도 다 빠져버린 호랑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빨도 발톱고 힘도 다 빠져 버린 호랑이는 무늬만 호랑이지 실상은 호랑이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런 나쁜 늑대, 나쁜 호랑이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그런 것들을 물리쳐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기에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그의 심령속에 모셔 들여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을 때에 모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도전과 유혹과 핍박과 환난과 고난을 이기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0절에서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죽었다.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있는 것은 오직 믿음 안에서 즉 믿음을 따라서, 말씀을 따라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이 되셔서 완전히 그를 사로 잡았기 때문에 주인이신 주님만을 위해서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에게는 옛자아가 더 이상 준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모든 역경속에서도 주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고 하면서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며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에게 신앙적 갈등과 고민이 있습니까?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습니까? 희망적 징조입니다. 무언가 영혼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거기에 안주하지도 마십시오. 주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조금 더 힘을 내어 여러분의 거듭난 자아에게 양식을 듬뿍 공급하십시오. 영적인 활동을 조금 더 활발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힘 주시고 은혜 주시고 능력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새자아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생명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새자아가 옛자아를 확실히 제압하고 예수님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과 평안과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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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창22:9~14

제목 : 믿음과 순종과 축복

1.믿음과 순종과 축복

믿음이 있는 곳에 순종이 있고, 순종이 있는 곳에 축복이 있다. 여러분, 맞는 말입니까? 예, 맞는 말입니다. 안 그래요? 믿음이 있으면 순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있고말고요. 아니 믿는데 순종이 없을 수 있습니까? 안 그래요? 좋으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데 어찌 순종이 없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또 순종이 있는 곳에 축복이 있다. 이것도 마찬가지잖아요. 순종하는 복이 안 오면 그게 이상한 거지요.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데 어찌 복이 없겠습니까? 여러분, 신28:2절 보세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하시면서 오만가지 복을 다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잖아요. 여러분, 하나님이 뭐 허튼소리 하시는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실로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지금 여기서고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브라함인데요, 오늘 말씀은 여러분이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어떻습니까? 귀가 따갑도록 들었는데 잘 됩니까? 잘 안되지요. 왜요?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실상은 그래봤자 얼마나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요? 이 이야기 들어봤자 몇 번 들었습니까? 한 백번 들었을까요? 그런데 세상에서 정치이야기, 경제이야기,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는 몇 번 쯤 들었을까요? 한 천 번 들었을까요? 만 번도 더 들었을걸요. 그러니까 믿음 안에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는 아무리 많이 해도 세상에서 먹고 입고 잠자고 놀고 하는 이야기의 백분의 일, 천분의 일도 못 듣고 못 보는 거예요. 그러니 잘 안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하지요. 그러면 안 되는 게 당연하다고 가만히 있을 겁니까? 아니죠. 그러므로 더욱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하지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기독교적 가치관이 확립되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땅의 기름진 축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인간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다 읽어드리지 못했지만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삼아 각을 뜨고, 불에 태워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인신제사는 우상숭배자들이 하는 악습으로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삭은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무려 25년 만에 달랑 하나 주신 약속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장차 큰 민족을 이루고 주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삭을 잡아 불에 태워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말이나 되느냐 말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일까?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자녀가 아닌가? 그것도 아이를 도저히 낳을 수 없는 100세나 되어서 기적적으로 주신 아들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큰 민족을 이루려면 오히려 더 많은 자식을 주셔야 하는데 겨우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불에 태워 인신제사로 드리라니 내가 늙어서 헛소리를 들었나? 망령이라도 들었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고 말도 안되는 명령에 순종합니다. 왜요? 그게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분명 말도 안되지만 분명 뭔가 하나님의 섭리와 뜻과 계획이 있을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의 이성으로 다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우리 보다 높고 깊어서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이성과 경험과 능력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성적으로 이해가 됩니까? 예수께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다. 경험적으로 납득이 갑니까? 저 영원한 천국, 이것이 인간의 논리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이성과 과학과 논리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그런 것들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해가 되든 말든 납득이 되든 말든 순종할 것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만약 조금이라도 이성이나 논리를 가지고 생각했더라면 절대로 이삭을 바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인신제사를 드리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명령을 내리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내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티끌과 같이 많게 해주시겠다고 해놓고 25년 만에 겨우 아들 하나 주어놓고 그걸 도로 달라고 하십니까? 하면서 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자신의 모든 생각들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인 것입니다. 이해가 가든 안가든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와 무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높으심과 인도하심과 선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언제나 내 뜻과 이성과 경험과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잠3:5,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해가 되든 말든, 세상의 가치와 같든 다르든, 내 경험과 맞든 안 맞든, 손해가 되든 유익이 되든, 내 생각과 관계없이 인정하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 모든 생각과 경험과 환경을 떠나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오직 온전한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신 예수님의 뜻에 온전히 순복하십시오. 그저 갓난아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그때에 분명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2.온전한 순종

여러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말씀에 순종합니다. 창22:3,4절 보세요.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여러분, 이 말씀을 보십시오. 그는 아침 일찍 떠났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솔직히 무언가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임을 믿었지만 밤새도록 얼마나 고민을 했겠습니까?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아들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는데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날이 밝자마다 곧장 시행에 들어간 것입니다. 아내 사라에게 말도 없이 떠났습니다. 아내에게 말했다가 보나마나 이 양반이 나이가 들더니 드디어 망령이 들었냐고 하면서 핀잔만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아내에게 말도 하지 않고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자신도 시간을 지체하다간 아들을 번제로 드릴 자신이 없었기에 마음 변하기 전에, 마귀가 틈타기 전에 떠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즉시 시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시행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일을 뒤로 미루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계속 나중에 나중에 그럽니다. 이것만 해 놓고, 저것만 해결하고...... 나중에 생활이 안정되면, 나중에 시간 나면, 나중에 할 일 없어지면... 그러나 여러분, 지금 못하는 사람이 나중에 여유 생기면 할 수 있을 것 같죠? 그런 사람은 99%는 여유생기면 놀러 다닙니다. 여유돈 있으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쓰게 됩니다. 설령 나중에 한다 해도 지금 못한 것은 죽을 때까지 아니 천국에 가서 까지 못한 것으로 계속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마귀가 장난칩니다. 마음이 변하기 쉽습니다. 방해꾼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길을 떠나 사흘 동안 걸어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걸어갑니다. 여러분, 그 사흘길을 걸어오는 동안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래서 길을 떠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외아들을 자기 손으로 잡아 불에 태워서 번제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마음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발걸음은 재촉합니다. 이삭을 잡아 번제로 드릴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그는 묵묵히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 지시한 산 밑에 이르러 종들을 거기 머물라고 하면서 번제에 쓸 나무를 아들의 등에 지우고, 자기는 칼과 불을 들고 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때 이삭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번제를 드리려면 제물이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제물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나무와 불은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이 말을 듣는 순간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뜨끔했겠습니까? 차마 ‘네가 바로 번제물이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단다. 나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하나님께서 너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단다. 그러니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구나.’ 차마 이렇게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비해 주실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묵묵히 산에 올라 드디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도착하게 되고, 아브라함은 번제를 드릴 준비를 합니다. 장작을 쌓아 올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제물을 잡아서 각을 떠서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태워야 할 차례였습니다. 그 번제물은 다름 아닌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하나님께서 너를 번제로 드리라는구나. 내가 너를 대신해서 번제가 될 수만 있다면,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그러나 내가 아닌 너를 요구하시는구나.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 그러니 순종해야지.’ 하면서 아들을 결박합니다. 그 운명의 순간에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아픔이 몰려 왔습니다. 그러나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아들을 붙잡아 결박하고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죽이려고 눈을 감고 칼을 높이 들어 올렸습니다.

여러분, 그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결박하는 아버지의 심정. 아들을 장작더미위에 올려 놓고 칼을 높이 들어 올린 아버지의 심정,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이삭, 그것도 하나 밖에 없었던 아들 이삭,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결박 당할수만 있다면.... 내가 너를 대신하여 번제물이 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불 태워 질수만 있다면.... 이런 마음으로 이삭 대신 자신이 번제물이 되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요구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이삭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무슨 선한 뜻이 있을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니 거역할 수 없었기에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속에서 도저히 눈뜨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눈을 감고 아들을 향해 칼을 내리치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게 순종입니다. 내 생각과 달라도, 도저히 이해가 안가도, 있을 수 없는 일을 시켜도 그냥 따르는 것이 순종입니다. 아무리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라도 하나님이 필요로 하신다면 그냥 드리는 것이 순종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순종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의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믿음이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며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믿습니까? 주님의 선하심을 믿습니까? 구원자이심을 믿습니까?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상황이 이래요. 형편이 이래요. 저래요. 이래서 곤란해요. 저래서 곤란해요. 그럼 내가 손해봐요. 웃음거리 돼요. 주일날 하루 쉬면 손해가 얼만지 아세요? 아니 이 귀한 걸 달라고요? 그럼 난 어떻게 살라고요? 여러분, 이런 거 다 버리세요. 그냥 믿고 따르세요. 순종하세요. 그게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에게 주님의 한량없는 은총이 임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순종하는 자에게 임할 복

여러분, 그렇습니다. 순종이 곧 온전한 믿음이기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이 임합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내리치려고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창22:11,12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던 하나님께서 도리어 다급하게 아브라함을 제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너 정말로 이삭을 잡으려는 것이냐? 내가 정말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받기를 원하는지 아니냐? 아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네 믿음을 보고 싶었단다. 이제 충분하다. 그 믿음이면 충분하다. 너는 정녕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 자격이 있다. 그러니 이삭을 풀어주고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양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아들을 풀어주고 옆에 뿔이 나무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는 양을 가져다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삭이 아닌 양으로 제사를 모두 마쳤을 때 다시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22:16,1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요구했던 것은 이삭이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순종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빼앗아가려고 했겠습니까? 왜 말도 안되는 인신제사를 드리라고 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셨고 그 믿음과 순종이 있는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은총을 그렇게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순종하게 되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순종이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곧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하나님의 나의 주인이라는 종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종이 주인에게 따질 수 있습니까? 우매 자가 지혜 자에게 따질 수 있습니까?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왜 그래야 하느냐고 따질 수 있습니까? 죄인이 구세주에게 이러니저러니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믿음과 순종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요, 진정 주님만이 생명의 주님이시오, 구원자시오, 주권자라는 믿음이 있다면 순종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이 곧 믿음이요,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게 복이 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러한 순종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아도, 현실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달라고 하셔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결코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종하실 때에 좋으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의 모든 생각 지식 경험 이성 가치관 나 내려놓고 순종하심으로 주님께서 채워 주시는 영육간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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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네째 주일예배설교 /가정 천국을 이룹시다 (August Sunday Sermon)


말씀 : 엡5:31~6:4

제목 : 가정 천국을 이룹시다.

1.가정천국을 만들어 갑시다.

 

여러분,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만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여기서 누려야 할 천국은 결코 청와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이건희회장집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절세미인의 집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천국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눅17:21절을 보십시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보세요. 천국이 우리 안에 있다는 거예요. 물론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저 하늘나라 어디엔가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의 천국은 외부적인 어떤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안 그래요? 어떤 사람들은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도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람보기에는 초라해 보여도 천국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도 동일합니다. 가정이 천국이 되느냐, 지옥이 되느냐하는 것은 돈이나 명예나 권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의식주 문제는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천국을 이루는데 필수적인 조건이 아닙니다. 의식주문제가 해결되면 그 다음에는 우리가 어떤 마음과 삶의 자세를 가지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아끼며 살아가면 거기 가정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안 그래요? 의식주 문제 해결되었지요,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지요,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있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떤 분들은 그저 죽어라고 공부하고 일해서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행복해 지는 것으로 압니다. 물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일도 열심히 하고 기왕이면 돈도 많이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일날은 하나님의 거룩한 존전에 모여서 열심히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현실이 아무리 팍팍해도 가끔은 어떻게든 짬을 내어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도 가져야 합니다.

무슨 배부른 소리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여러분,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열심히 일해서 돈 버는 시간 보다 더 중요한 시간입니다. 안 그래요? 왜 공부하고 왜 열심히 일합니까? 행복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랑과 은혜와 기쁨을 나누는 시간도 갖지 못하고 죽도록 돈만 번다면 그게 뭡니까? 어떤 분은 그러고 싶지만 돈도 없고 시간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일하고 남는 시간으로 가족하고 함께 시간을 갖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도 좀 쉬면서 사랑하는 가족과의 교제를 통하여 가정 천국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요즘 같이 정말 바쁠 때는 그럴 수 없겠지요. 그러나 농촌이라고 일년 365일 계속 눈코 뜰새 없이 바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또 그럴 돈이 어디있느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돈 별로 안 듭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저 양반하고 한 달에 한 두번은 바람 쐬러 갑니다. 여러분, 죄송하지만 제가 재주가 꽤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회사 다닐 때에는 서예 사진 바둑 탁구 낚시도 하고 글도 좀 써본다고 써봤고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목회를 시작 한 후 돈이고 취미생활이고 심지어 운동까지 몽땅 다 버렸다가 몇 년 전부터 너무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지금은 운동도 조금씩하고 한 달에 한 두 번은 아내와 함께 바람도 쐴 겸 사진을 찍으러 갑니다. 우리는 어디 갈 때 사먹는 거 일절 없습니다. 김밥이나 주먹밥 싸고 물과 과일 몇 개 가지고 카메라 들고 나가면 돈 몇푼 안 들이고 몸과 마음이 힐링이 됩니다.

그러면 또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면 다 힐링되지 그런 게 뭐 필요하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죄송하지만 그건 무지한 말입니다. 인간은 영과 육과 혼의 전인적인 존재이므로 영적 육체적 정신적 양식을 골고루 섭취해야 하고 동시에 영적 육체적 정신적인 활동도 균형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전인적으로 균형이 잡히고 건강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물론 일할 때는 열심히 일하고 예배드리는 날은 열심히 예배드리고 동시에 어떻게든 짬을 내어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도 가지면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을 잘 다스리며 천국을 만들어 누리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예수님을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의 가정에 천국을 이루고 그것을 누리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일단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하나님을 가정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잖아요. 안 그래요? 천지만물의 창조주로서 모든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강과 위로의 근원이신 하나님 없이 어찌 천국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생명과 평강과 기쁨과 위로의 근원이신데 하나님이 없는 곳에 어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안식이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것도 제가 누누이 드린 말씀이지만 요15: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구원해주시고 말씀을 주시며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고.... 즉 우리를 억압하고 힘들게 하려고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안을 마음껏 누리게 하려고 주님이 오셨고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온전히 그리고 영원히 누리려면 오직 예수님은 우리 심령과 가정 속에 온전히 모셔야 합니다. 그래야 죄와 무지와 사탄과 지옥을 비롯한 모든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영적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으로 전인적인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을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들이면 주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으로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초월해서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물론 이 기쁨만이 영원한 천국으로까지 이어지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참되고 영원하고 온전한 기쁨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에이, 목사님.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도 행복하게 잘만 살던데요.’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가짜 행복이요, 위장된 행복입니다. 마치 마약에 취하고, 술에 취한 자가 누리는 평안이나 기쁨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마약이나 술에 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감각이 무디어집니다. 그래서 근심걱정이나 슬픔이나 고통을 조금쯤은 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치유되어 없어진 게 아니고 마약이나 술로 마취를 시켜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치유하지 않고 마취를 시켜 고통을 없애주는 방법은 언제 쓰는 겁니까? 그건 살 가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순간이라도 좀 고통 없이 지내라고 써 먹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경우라면 마약과 술과 담배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점점 문제가 심각해져 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약과 술은 사람의 마음을 마취시켜 죄에 대해서도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마약에 취하고 술에 취하면 용감하게 되고 부끄러움도 수치심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상방뇨도 하고 음란한 짓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왜요? 도덕적 윤리적 감각이 무디어져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기쁨이 바로 그와같은 것입니다. 죄와 무지에 취해서 있어서 감각이 무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할노릇 다하지 않으면서도 심지어는 악을 행하면서도, 그리고 자신이 가는 길의 끝이 영원한 진노라는 사실도 알지 못한채 희희낙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누리는 기쁨은 무지한 자아에 속고, 사탄에 속아 잘못 누리고 있는 기쁨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과 진리와 기쁨과 평강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심령 속에 모신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살아가기를 힘쓰게 됩니다. 하나님과 가족과 이웃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참 생명의 기쁨과 위로와 평강과 소망으로 채워 주십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도 참된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누리며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주님을 우리 심령과 가정 속에 온전히 모셔들이고 살아감으로 주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역사하심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쳐나는 복된 가정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가정천국을 이루기 위해 두 번째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고 위해주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2:24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여러분, 이 말씀은 명령입니다. 사람이 장성하면 반드시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도우면서 자녀를 낳아 양육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이런 명령을 주신 것은 이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에 인간의 삶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풍성하고 가장 행복한 상태가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장성하면 반드시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가정을 이루었으면 부부간에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뭐 너무 많지만 부부간에 서로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33절 보세요.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여러분, 너무 당연한 일 아닙니까? 부부는 말 그대로 일심동체잖아요. 그러면 내 몸인데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또 부부만큼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부부만큼 늘 가까이하면서 서로 위로해주고 도와주고 아껴주고 하면서 좋은 친구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부부는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함께하며 인생의 모든 희노애락을 함께하는 가장 가깝고 가장 소중하고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닙니까? 그러니 얼마나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아마 우리 젊은 부부들은 보셨을지도 모르지만 인터넷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일본의 노부부의 감동적인 사랑이야기가 있어 잠깐 소개합니다. 뭐 영상은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우리 마음을 감동하게 만듭니다. (실명한 아내를 위한 꽃밭.mp4, 유튜브 다운로드 영상) 마지막 부분에 환희 웃으며 다정히 앉아 있는 노부부 보이시지요. 저 할머니가 당뇨로 실명을 하고 우울증에 빠지자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밖에 비록 눈으로 보지는 못해도 코로 향기라도 맡고 기분 전환도 하고 또 꽃을 많이 심으면 사람들이 찾아와 할머니의 말벗이라도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꽃을 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10년 이상을 꽃을 심고 가꾸었는데 그러는 동안에 할머니가 점차 밖에 나와 꽃향기를 맡으며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고 또 점점 사람들도 찾아오기 시작하여 지금은 일년에 3,000명 이상이 찾아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친구가 되어주며 즐겁게 해주어 결국 실명한 할머니가 저렇게 밝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할아버지입니까?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그렇다고 아내들은 또 남편한테 당신은 뭐했냐고 하면 곤란하지요. 남편과 아내가 서로가 저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정말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답고 복된 가정이 되겠습니까? 33절 다시 한번 보실까요?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부부간에 정말로 소중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하며 서로 위로와 기쁨과 힘이 되어 가정천국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자녀를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가정이 천국이 되기 위해서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자녀를 잘 양육해야 합니다. 자녀를 바르게 잘 양육하면 먼저 그 가정이 행복해지고 나아가서는 다음 세대의 가정이 바로 서고, 아름답고 복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부모들 혹은 기성세대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저 자녀들이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에만 몰두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최대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잘먹고 잘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도외시 한 채 그저 외적인 풍요로움만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영성과 인성과 지성을 가지고 위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교육을 해야 하는데 그저 남보다 편하게 대접받으며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영성과 인성에 문제가 생기고 자녀자신도 행복하지 못하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문제가 생기고, 더 나아가서는 많은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4절의 말씀을 보세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무엇으로 양육하라고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즉 그저 맨날 공부해라, 공부해라 하면서 세상 공부만 시키는데 열정을 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 사랑하는 자녀가 영적, 인격적, 지적으로 올바르게 성장하여 영성과 인성과 지성을 고루 갖춘 올바른 지성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물론 자녀 자신이 행복하고 가정에 평안과 기쁨과 소망이 있고 나아가 이 사회가 아름답고 복된 사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물론 여러분의 자녀들이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해서도 열심히 가르치고 기도하고 힘써야 하겠지만 그에 앞서 여러분의 자녀들이 정말 성숙한 신앙인, 성숙한 인격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더욱 힘쓰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세상의 공부만 위하여 투자하지 말고 아이들의 영성과 인성을 길러주는데 더 많은 투자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자녀들이 영성과 인성과 지성과 감성을 고루 갖춘 올바른 인격체가 되어 주님도 기쁘시게 해드리고 남에게도 기쁨을 주며 자기도 진정한 인생의 가치와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우리의 모든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자녀는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가정천국이 되기 위하여서는 부부 진정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자녀를 사랑과 말씀으로 양육하고, 자녀는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가정은 정말 복된 가정, 아름다운 가정, 천국의 은총을 누리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6:2,3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약속 있는 첫 계명이란 십계명 중 인간에 대한 계명중 첫 번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인데 그 계명을 따라 부모님을 바르게 공경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국 부모님 공경이 첫계명이라는 것은 결국 부모님 공경이 인간 윤리의 기본이며 근간이며 뼈대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인륜의 근본이 되는 부모공경을 잘 실천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을 때의 공경은 마음으로만 하는 공경이 아닙니다. 여기서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것은 부모님을 존경하고 존경한다며 그에 합당한 예우를 해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님이 평안하게 기뻐하며 살아가실 수 있도록 마음도 평안하게 해드리고, 물질로도 봉양해 드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부모님들에게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하여 간곡히 말씀드려 주님을 영접하게 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렇게 부모님께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으로 봉양해 드릴 때 부모님이 이 땅에서도 평안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효도이고 공경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부부가 정말 서로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아끼고, 또 부모는 자녀를 사랑과 말씀으로 양육하고, 자녀는 부모를 공경할 때에 가정천국이 이루어지고, 그러면 나도 너도 우리 모두가 행복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달 오월을 맞이하여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을 가정 속에 온전히 모시고 부부가 정말 서로 사랑하고 부모는 자녀를 말씀과 사랑으로 양육하고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며 가족 간에 함께 하는 시간도 갖으며 가정 천국을 이루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지금 여기서 누려야 할 천국의 은총도 마음껏 누리는 복되고 아름답고 멋있는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 도 )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계절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아름다운 계절만큼이나 아름답고 복된 가정을 우리에게 주심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나이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많은 사람들이 가정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가족구성원들 간에 진정한 사랑과 은혜를 나누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나이다.

주여, 이 땅의 모든 가정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셔들이고 주님의 인도하심과 말씀안에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가족구성원들이 서로의 필요를 채워달라고 요구하기 보다는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로 살게 하시고, 부모는 자녀를 기도와 사랑과 말씀으로 양육할때에 우리의 모든 자녀들이 영성과 인성과 지성과 감성을 갖춘 성숙한 인격체로 성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녀는 부모님의 권위와 사랑과 헌신을 인정하고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드려 공경할 줄 아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모든 가정들이 믿음과 사랑이 넘치는 천국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봉헌기도 ) 영화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이 아름다운 계절, 이 생명력이 넘치는 계절을 우리에게 주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은총을 덧입어 이 생명과 자유와 평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시오니 영광과 존귀를 돌리나이다.

오 주님이시여, 지금 이 시간 우리가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총을 기억하며 예물 드리나이다. 주님의 그 은혜와 사랑과 인도하심에 감격하여 믿음으로 예물드리옵나니 드리는 손길 손길 위에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으로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것 거룩히 구별하여 십일조 예물 드리는 손길위에 축복하셔서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더욱 풍성하고 강건한 은총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고백하며 감사예물 드리는 손길에도 복을 주셔서 더욱 감사와 은혜가 가득한 복된 삶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이 예물을 통하여 주님의 생명의 역사가 더욱 힘있게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축 도 ) 이제는 온전히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셔들이고, 부부간에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며, 부모는 자녀를 사랑과 말씀으로 양육하며, 자녀는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여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야 할 우리 모든 성도들과 이 땅위의 모든 가정들 위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인도 교통 역사 충만케 하시는 은사가 이제로 영원까지 함께 하시옵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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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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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네째주일 예배설교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August Sunday Sermon)
제목 :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말씀 : 요15:5~11

 

1.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든 부모들은 한결같이 자녀들이 기쁘고 즐겁고 감사하며 의롭게 선하게 아름답

고 복된 가정도 이루고 서로 사랑하며 아껴주며 복되게 살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부

모도 자녀가 슬프게 고통스럽게 원망하고 짜증내고 싸우고 죄짓고 무가치하게 살기를 바

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시겠습니까? 물어보나마마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이 행복하고 기쁘고

감사하고 선하게 의롭게 아름답게 살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들이 그저 자나깨나 내 새끼 잘되고 밝게 기쁘게 감사하며 살

기를 바라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도 우리가 정말 늘 기쁘고 즐겁고 감사하며 살기를 바라

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구원이 뭡니까? 죄와 무지와 어둠과 슬픔과 고통에서 건져주어 천

국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이 뭡니까? 물론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감사와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가 모든 죄와 고통과

불안과 미움과 저주 속에서 해방되어 선과 진리와 의 속에서 참된 기쁨과 평안과 은혜의

삶을 살게 해 주시기 위한 것이지요. 이게 주님이 오신 목적이고 이게 천국의 삶이고 이

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내는 삶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으면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

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것이 아니

라 지금 여기서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여기서의 천국은 완전하지는 않습니

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있으면 천국의 모형을 맛

보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천국에 근접한 삶을 살아다가 죽어서 완전

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구원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주 말씀드렸지만 예수님께서 눅17:20,21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

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

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

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국은 이미 우리 안에 도래

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1절 말씀에서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앞에서 예수님께

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

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서 맺을 열매는 뭡니까? 물론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사랑 등의 주님이 주시는 온갖 좋은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이러한 내가 주는 온갖 좋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될 것이므로 너희가 생명의 기

쁨이 넘치는 복된 삶을 살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16:1절에서는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도말

하시고,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온전히 심령

속에 모셔들이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주님이 주시는 그 생

명의 기쁨과 은혜와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면서 주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2.온전히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미 앞에서 얼마간 언급이 되었지만 우리가 진정한 기쁨의 삶을 살

려면 말할 나위 없이 온전히 예수님을 심령 속에 모셔들이고 예수님 안에 살아가야 합니

다. 그러면 반드시 확실히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뭐 지극히 당연한

거 아닙니까? 주님이 누구십니까?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

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모든 마귀 사탄과 어둠의 세력들 물리쳐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안에 있으면 그런 은혜들을 누리게 되는 것은 너무

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요? 어두운 곳에 있으면 왠지 불안하고 두렵지 않습니까? 반대로 빛 가운데 있으

면 마음이 밝아지고 따뜻해지고 편안해지지 않습니까? 따뜻한 곳에 있으면 따뜻하고 추운

곳에 있으면 춥습니다. 상처와 고통과 아픔이 있는 곳에 있으면 마음이 슬퍼지고,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곳에 가면 나도 덩달아 마음이 기뻐지지 않습니까? 분위기가 험악하거나

어두침침한 곳에 있으면 두려움이 생기고, 뭔가 음침하고 더러운 곳에 있으면 영혼이 더

러워져 집니다. 그러나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곳에 가면 나도 은혜가 넘치게 되고, 깨끗

하고 정결한 곳에 가면 마음이 정화가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유일한 길이

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 안에 있으면 어찌 예수님 안에 있는 그 생명의 기쁨

과 평안과 위로를 누리기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좌우단간 어찌하든지 죽으나사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약4:8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

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즉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자꾸 세상의 것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갈리게 하지 말고 어찌하든 하나님을 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가까이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해 주시면 당연히 하나님안에 있는 그 생

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은 저절로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오늘말씀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은 포도나무

이시고 우리는 가지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가지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

니까? 그건 말하나마나 죽으나사나 나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래야

영양분을 공급받습니다. 그래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안 그러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으나사나 우리의 줄기이신 즉 우리의 근본이며 기초이며 생명의 주권

자이시며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

면 예수님께로부터 영적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좋은 것들을 충

분하게 공급받음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고 잎이 싱싱해지고 꽃이 실하게 피고 충실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5,6절에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

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주님 안에 있으면 주님이 주시는 능

력과 지혜로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지가 줄기를 떠나면 말할 것도 말라 죽게 되고 그러면 아무 쓸모없어 불태워 버

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나사나 예수님께 붙어 있어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온전히 예수님께 착 달라붙어서 온전히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그 생명의 은혜를 풍성하게 받아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

분 주님께 딱 달라 붙어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건 여러분 7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7절 보겠습니다.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보세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님이 우리 안에 있고, 동시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그러면 너희가 구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무른 말씀입니까? 내가 너희 안에 거한다면 내 말도 너희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든 원하는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

면 주님의 말씀도 당연히 우리 안에 거해야 하고 그러면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되고

그러면 주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으나사나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고, 예수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다. 이건 좀 추상적이예요.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는 걸 보여줄 수도 없고,

만져 볼 수도 없고,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들어 볼 수도 없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압니까

?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선과 진리와 의

와 거룩을 따르고 그러면 그게 바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으나사나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주님

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판단과 가치와 행동과 삶의

잣대여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삶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가까이하는 자의

삶이요, 예수님과 동행하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2,3절에서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

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

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죽으나사나 주님을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들이고, 주님을 모셔들였

으면 더 이상 세상의 헛되고 왜곡된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지 말고 오직 유일한 진리의 말

씀, 생명의 말씀이시며 인생의 유일한 등불이며 기준이며 안내자인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가 넘쳐

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어떤 은총을 누리게 됩니까?

3.천국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자는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천

국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천국은 두가지 천국

이 있고, 예수님 믿는 사람은 이 두가지 천국을 동시에 누리게 됩니다.

물론 1차적으로 누릴 천국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입니다. 예수님 믿으면 죄에서 해방되고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래서 지옥

백성에서 천국백성으로 옮겨집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천지가 개벽을 해도 이것만은

먼저 얻어놔야 합니다. 그까짓 세상적인 부귀영화 영광 명예 아무리 얻어 놔봤자 별것 아

닙니다. 진정한 생명의 은혜도, 영광의 나라도, 진정하고 영원한 자유와 평안과 기쁨과

소망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에게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주십니다. 영광의

나라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예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

수님이 믿고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천국은 지금 여기서 누리는 천국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은혜받고 천국

의 은총을 누리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과 지혜와 은혜를 주셔서 세상의 모든 어

둠의 세력과 마귀 사탄의 유혹과 시험과 도전을 이기게 하십니다. 세상에서 우리에게 진

정으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지 못하는 세상 영광이나 명예나 즐거움으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에게 얽매이지 않게 되고 끌려다니지 않게 됩니다. 오히

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향하여 달려가게 하십니다

. 그래서 진정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상

황과 환경과 환경에도 얽매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권세와 지옥의 권세와 세상

의 모든 왜곡되고 추하고 악한 것들에게서 자유하게 되어 지금 여기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적인 천국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어둠의 권세에 얽매이고

상황과 환경에 얽매이고 온갖 시기와 질투와 욕심 가운데 살면서 아무리 가져도 만족함을

모릅니다. 도리어 싸우고 빼앗고 갈등하고 어떻게든지 더 가지려고 난리를 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러한 세상의 것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명의 기쁨

과 은혜와 감격과 행복과 가치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다 썩어지고 없어지고 우리

를 떠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엄청나고도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 영원하고 완전한 복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행

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심지어 우리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세

상의 것은 대단한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엄청난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세상의 것을 얻

으면 다 얻은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세상의 것을 갖지 못하면 아무것도 못 가진 자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을 얻은 것, 구원을 얻은 것, 이것을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정말 기뻐하지도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영광을 돌려 드리지도

못하고 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하찮은 것 때문에 걱정과 원망과 불평을

할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믿음을 팔아먹고 세상의 것을 위하여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닙니다. 그건 정말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실상은 정 반대여야 합

니다. 믿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세상의 별 것 아닌 것, 세상의 대단치 못한 것 그런

것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것들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예수님 때문에, 믿음 때문에, 구원의 은총 때문에 얼마든지 버려도 좋은 것들입니

다. 그게 손해인 것 같지만 손해가 아니고, 그것이 잃은 것 같지만 실상은 모든 것을 얻

는 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별 것 아닌 것 때문에 믿음 안에 있는 것, 대단한 것,

엄청난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껍데기를 위하여 알맹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썩어 없어질

것을 위하여 영원한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더 나은 것을 위해서라면 덜 나은 것은 버릴 수 있지 않습니까? 더 좋

은 것을 위해서는 덜 좋은 것은 포기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덜 좋은 것을 위해서

더 좋은 것을 버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대단치도 않은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하

여 참으로 가치있는 믿음의 행위를 포기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또 세상의 별

로 대단치도 않은 것을 좀 잃었다고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생각하며 절망하며 슬퍼하며

원망하며 산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의 별 것 아닌 것을 좀 잃었다고 마치 천국마져 잃어버린 것처

럼 탄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돈과 건강과 지식으로 부요하지 않더라도 설

령 있는 것마져 빼앗겼다해도 천국을 놓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실제로 모든 것을 가지

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16:25,26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

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

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

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예수님을 위하여 세상의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모든 것

을 얻을 것이고, 세상의 것을 위하여 예수님을 포기하는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잃을 것

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결단코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여기 누릴 현재적 천국

의 은총을 누리기 위한 것들과 세상의 것을 바꾸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정말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들이

고, 모셔들였으면 이제는 정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오직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의 별 것 아닌 것들에 끌려다니거나 거기에 함몰되

어 현재적인 천국을 누리기 위한 일들을 게을리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 안에 진정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며 오

직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 진정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능력과 평안이

넘쳐나는 삶이 되실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과 도전과 유혹을 이기고 자유의

평안을 누리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행복하고 기쁘고 감사하고 은혜가 사랑이 넘

치고 생기가 흘러넘치는 복되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생이 되실 것입니다 주의 영광 나타

내며 주님 나라 이루어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정말 이런 복된 인생

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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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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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사도행전 16 ; 16 - 34
제  목 :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찬  송 : 250, 258, 259, 261, 287, 285.
복음송 : 예수 믿으세요.25(찬미예수2000 No,1020)


        할렐루야!!
        한량없이 크고 넓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오늘 이 시간 은혜를 사모하여 주님 전에 찾아 나오신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한 여름 그렇게도 기승을 부리며 전혀 수그러들 것 같지 않던 더위가 이제는 완연한 가을이 되었습니다. 이번 주 목요일(22일)은 절기상으로 추분(秋分)입니다. 추분은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입니다.
        또한 지난 여름 그렇게도 기승을 부리던 폭염이 지나간 들녘에는 가을이 어김없이 찾아와 황금물결이 춤추고 여름내 가꿔온 모든 곡식과 과일들이 무르익어 가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추수철 농번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마9:37-38)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오늘의 농촌에서는 일손이 부족하여 해마다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농촌에서만 일꾼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일꾼이 부족합니다. 주님은 일꾼을 부르십니다.
        (사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이 일꾼을 찾으실 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응답하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이 마지막 말세를 당한 이때에 하나님의 추수 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일 년 내 가꾸어 온 곡식을 추수하는 것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더욱 중요한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착하고 충성된 일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요즘의 세계정세를 살펴보면 세계 곳곳에서 천재지변이 계속 일어나고 있고 또한 분쟁이 그치질 않고 있습니다. 이태리와 미얀마에서는 사상 최대의 지진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경제적인 손실은 천문학적인 손해를 입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IS는 갈수록 포악해져서 세계 곳곳에서 테러를 일삼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온 세계가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이여!!
         이와 같은 일들이 왜 일어나야 합니까? 극도의 이기주의와 국수주의자들 때문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명을 경시하는 사탄들의 역사입니다. 요즘 인터넷을 통하여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자살 사이트와 음란 사이트가 성행을 하고 있고 사탄 숭배 사상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세계의 지도자들은 이 지구상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또 테러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모여서 회의도 많이 하고 있지만 곳곳에서 테러와 분쟁은 끝일 줄을 모르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단11:27) “이 두 왕이 마음에 서로 해하고자 하여 한 밥상에 앉았을 때에 거짓말을 할 것이라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니 이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것임이라”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2천 년 전에 오늘과 같은 일들이 일어날 것을 아시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24:6-8)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러므로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우리들은 다시 한 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깨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마24:16-18)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성도 여러분들이여!!
        그러면 우리가 도망하여 피할 수 있는 산이 어디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인을 하고 도피성으로 도망을 하면 살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6.25 전쟁 때 남으로 남으로 피난을 갈 때 안면도에 가면 산다고 그곳으로 피난들을 많이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세에 우리 성도들이 피할 수 있는 산은 영원한 피난처가 되는 교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오늘 본문 말씀은 여러분이 잘 아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선교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성령이 이를 막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날 밤에 환상 중에 마게도냐 지방의 사람이 마게도냐 지방에 와서 복음을 전해 달라는 간절한 청을 하였습니다. 이튿날 바울 일행은 배를 타고 마게도냐 지방으로 떠났습니다. 그래서 몇 날 며칠을 항해를 하여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 빌립보에 닿아서 거기서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까닭에 그곳에 가면 굉장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처음부터 시련을 당하였습니다.
        첫 번째 시련은 예배할 처소가 없었습니다. 그러든 중에 루디아가 예수를 믿고 영접하여 바울 일행을 자기 집으로 영접을 하여 루디아의 집이 복음을 전하는 기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시련이 다쳤습니다.
        빌립보 성에 귀신이 들려서 점을 치는 한 계집종이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바울 일행을 보고 계속 그를 따라다니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고 떠들고 다닙니다.

 


         성령의 역사는 귀신(사탄)이 먼저 알아차립니다.
         그 여종은 점을 쳐서 주인에게 돈을 많이 벌어주었습니다. 바울과 신라는 이를 불쌍히 여겨 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었습니다. 그가 제정신을 차리니까 더 이상 점을 못 치게 되고 그의 주인은 돈을 벌지 못하게 되자 바울과 신라를 고소하였습니다. 빌립보 성의 관원들은 재판도 하지 않고 바울과 신라를 마구 때리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바울과 신라는 옥에 갇혀서도 태연하게 찬송과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옥 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모두 열리고 쇠고랑이 모두 풀렸습니다. 밖에서 지키고 있던 간수가 깨어보니 옥문이 모두 열렸습니다. 죄수들이 모두 도망을 친 줄 알고 간수는 칼을 빼어 자결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바울이 소리쳤습니다. “여보시오 죽지 마시오. 우리는 도망가지 않고 다 여기 있소” 당시의 법에는 죄수가 도망을 치면 간수가 대신 중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간수는 자결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간수가 등불을 들고 들어가 보니 바울과 신라는 쇠고랑이 모두 풀리고 옥문이 모두 열렸는데도 태연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간수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간수 생활 수십 년간 이와 같은 일은 처음입니다. 누구든지 갇히게 되면 어떻게 하든지 빠져나가려고 하고 도망을 치려고 하는 것이 사람이나 짐승이나 똑같은 본능입니다. 그런데 옥문이 다 열렸는데도 쇠고랑이 다 풀렸는데도 도망을 가지 않았습니다.

 


         <예> 상당히 여러 해 전 흑백 텔레비죤을 보든 시절 TV에서 ‘뿌리’ 라는 영화를 상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인 쿤타킨테는 백인들에게 잡혀서 노예로 팔려 다니는데 그는 오르지 도망을 하여서 자기가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망을 치다가는 붙들려서 매를 맞고 나중에는 도망을 가지 못하도록 발가락을 모두 잘려도 또 도망을 칩니다.
         또 ‘빠삐용’ 이라는 영화를 보면 그 영화의 주인공인 빠삐용은 도망을 치는 것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바다 가운데 무인도의 수용소에서 탈출하는데 성공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의 바울과 신라는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자결을 하려고 하는 간수를 제지하였습니다. 간수는 이 사람이야말로 보통 사람이 아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전하는 하나님과 그의 전하는 예수가 참된 신앙인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신라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절한 마음으로 물었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간수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헛된 삶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당시 사회의 부패와, 정치적 부패 등등 모든 것에 회의감을 느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이 말은 모든 인생들의 질문이며 당면한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바울과 신라는 이 물음에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사도행전 2장 37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에 모든 사람이 마음이 찔려 사도들의 발 앞에 엎드려서 묻기를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 고 하였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 한 부자 청년이 찾아와서 영생의 길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말씀하시기를 (마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고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비슷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결과 다릅니다. 간수는 바울의 말씀대로 예수를 영접하여 구원을 얻었고 또 베드로의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여 구원을 받고 또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부자 청년은 예수님 앞에까지 와서 영생의 길을 알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길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간수는 바울과 신라를 자기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상처를 치료해 주고 음식을 차려서 대접하고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온 가족이 모두 하나님을 믿고 크게 기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이야기는 예화가 아닙니다. 비유도 아닙니다. 실제로 있었던 실화입니다. 그 후 이 간수는 루디아와 귀신들렸던 여종과 함께 빌립보 교회를 개척하는데 크게 공헌을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간수가 바울에게 물었던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이 문제는 모든 인류가 해결하려고 부단히 애쓰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래서 종교가 생겨나고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종교를 통해서 이 구원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사전에 보면 “큰 재난과 파멸에서 구출 받는 것” 이라고 해석이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홍수가 나서 떠내려가는 사람을 구출해 주는 것 또는 화재가 났을 때 용감한 소방관이 불 속에 들어가서 아이를 구출해 내는 것도 구원입니다. 회사가 부도가 나서 쓰러지기 직전에 좋은 친구가 돈을 대 주어서 사업의 실패에서 구출 받는 것도 구원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것의 구원보다 가장 시급하고 귀중한 것은 생명의 구원이며 영혼 구원입니다.
         이 영혼 구원에 대해서도 각종 종교가 자기네들 나름대로의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도 이 구원의 교리야 말로 그 어떤 교리보다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고 또 그 말씀을 통하여 이 시간 은혜 충만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1.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을 때 구원을 얻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 바울이 간수의 질문에 대답을 하였습니다.
         (행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독교의 구원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어서 영원한 하나님의 영생에 들어가는 길은 여러 갈래의 길 중에서 한가지의 길이 아닌 오직 한길 유일(唯一)한 길입니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 구원은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고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여 교계에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2:5-6)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 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구원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고행이나, 수양이나, 명상, 도덕, 제도, 이런 것으로 얻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강도 한사람은 그가 살아오는 중에 아무런 공로가 없었어도 십자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구주로 믿었기에 즉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밝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아 멘>  그래서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다 같이 복음성가를 부르겠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나요 발걸음 무겁게
       이세상 어디 쉴곳 있나요 머물곳 있나요
       예수안에는 안식이 있어요 평안이 넘쳐요
       십자가 보혈 믿는자마다 구원을 받아요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2. 죄 사함을 받아야 구원을 받습니다.

 


        (행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는 말씀을 듣고서 많은 청중들이 어찌하면 되겠느냐고 가슴을 치며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공범자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때 베드로의 대답은
        (행2:38-41)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는데 필수적인 조건이 회개입니다. 회개 없이 청결할 수가 없고 청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습니다. 세례 요한도 요단강에서 회개를 외쳤습니다.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나니라” 고 외쳤습니다. 더러운 육체, 죄악의 몸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가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 받아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눅19:9에는 삭개오가 지난날의 죄와 허물을 철저히 회개할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라고 인정을 하여 주었습니다.

 


        회개할 때 구원을 받습니다.
        (마3:8-10)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회개는 지난날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잘못 가던 길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믿었으면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찬송가 257장 3절>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앞에 옳다함 얻음은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피로 속죄함 얻었네
          속죄함 속죄함 주예수 내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피로 속죄함 얻었네

 

 

3.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3장 1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니고데모라고 하는 바리새인이 예수를 밤중에 찾아왔습니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고 하시자 니고데모가 다시 말하기를 사람이 어떻게 모태에서 다시 태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라고 질문을 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거듭난다 하는 것은 변화를 말합니다. 감리교의 창설자 요한 웨슬레는 이를 성화(聖化)라고 하였습니다. 거룩하게 변화한다는 뜻입니다. 맞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지난날의 모든 죄악을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분명히 변화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회개를 하고도 변화가 되지 못하였다면 그의 신앙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이 변하고, 믿음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생활이 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변화가 자신의 의지, 또는 이성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될 수가 없습니다.
         (슥4: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비겁하고 겁쟁이며 두려워 떨고 있었는데 오순절에 120명의 신도들과 같이 성령을 충만히 받고서야 변화가 되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빛을 통한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서야 바울로 변화가 되어 이방 나라에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성령을 받고서야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 주소서” 라고 응답을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에베소 교회가 지식으로 예수를 믿다가 바울이 와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19:2) 고 물을 때 저들은 성령이 있다는 말도 듣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바울이 저들에게 안수를 하니 모두가 성령을 충만히 받고 뜨거운 교회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구원 문제는 모든 인류에게 가장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은 천지 만물 중에 오직 교회밖에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이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모든 죄를 회개하여 용서함 받고, 그리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게 되면 우리가 원하는 완전한 구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여러분들은 이미 예수를 믿고 나왔으니 이제 철저히 회개하여 성령 받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고후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미 이와 같은 단계에까지 들어간 성도도 있을 줄로 믿습니다.
        이제 날마다, 시간마다, 순간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변화되어지는 성도가 되어서 우리 주님께서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영원한 하나님의 영생의 나라에 다 들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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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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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으세요

 

본문 : 요한복음 14: 1 -6

제목 : 땅 끝까지 가는 날

설교 : 권 오 선 목사

 

사람들은 자기 얼굴이 너무 예뻐다 . 와 머리 죽인다 . 어느 미용실에서 했어 . 만원짜리 길표 옷을 입었는데도 와 100 만원 줬다해도 믿겠다 . 혹시 하늘에서 목욕하러 내려왔다가 옷을 잃어버려서 남아 있는 것 아니야 그러면 그날은 지갑 다 털고 카드 한도액까지 그어댑니다 . 그걸 노리고 그러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 그런데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면 기분 나빠하고 오늘 재수 징그럽게 없다라고 합니다 . 참으로 어리석고 안타까운 생각입니다 .

예수 믿으세요 라는 말이 세상의 그 어떤 말보다 복있는 말입니다 .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영생을 얻고 천국을 소유합니다 . 저는 오늘 우리 예안교회에 오신 여러분들께 예수 믿으세요 라는 인류 최고의 복된 말씀을 드립니다 .

초대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고백록 이라는 유명한 책을 남겼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방황과 타락의 세월을 보내다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내가 예수를 믿고 나니 엄마의 품에 안긴 것 같이 평안하다 고 고백했습니다 . 여러분은 오늘 어떤 동기에서 오셨든지 예수를 믿으셔서 엄마 품에 안긴 것과 같은 평안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예수 믿으세요 라고 전도하다가 죽었습니다 . 그들은 예수 믿으세요 라는 말에 자기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 기독교 2 천년 역사 동안 예수 믿으세요 라고 전도하다가 죽은 사람들은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 우리나라도 1884 년 개신교가 처음 들어오면서 예수 믿으세요 라고 전하다가 많은 선교사들과 성도들이 죽었습니다 . 지금도 이 말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

기독교 2 천년 역사에서 제일 많이 사용하는 말이 예수 믿으세요 라는 말입니다 . “예수 믿으세요 라는 말에 자기의 생명과 인생을 거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 왜 그렇습니까 ? 예수 믿으면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 바둑에 꽃놀이 패 라는 것이 있습니다 . 패싸움만을 놓고 보면 꽃놀이 패를 가진 사람이 무조건 이깁니다 .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 꽃놀이 패인데 , 무슨 수로 이깁니까 ? 예수 믿는 것이 꽃놀이 패와 같습니다 .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복을 받으니까 좋고 , 죽으면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사니까 좋고 . 이것이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이제 곧 하나님 나라에 간다 고 하셨습니다 . 그러자 제자들이 주님이 가시면 우리 혼자 어떻게 살라고요 라며 걱정합니다 . 그때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아라 . 내가 하나님 나라에 먼저 가서 너희들을 위한 집을 마련하고 다시 와서 데려가겠다 고 하셨습니다 . 그러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 어떤 축복입니까 ?

 

첫째로 ,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

 

대부분의 종교는 다 구원관이 있습니다 . 회교는 마호멧트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 불교는 고행을 통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얻는 자력구원 입니다 . 20 세기 한국 불교의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는다면 성철스님일 것입니다 . 그 분은 결혼직후에 출가해서 부모가 찾아와도 고행에 방해가 된다면서 만나지 않았습니다 . 기거하는 곳에 철조망을 치고 10 년 동안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고행했습니다 . 16 년 동안 솔잎가루와 쌀가루만 먹었습니다 . 8 년 동안 장좌불와 ”, 즉 눕지 않고 앉아서 잠을 자고 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 참 대답합니다 .

이 정도의 수행을 했다면 마지막에는 나는 성공적인 수도생활을 마치고 , 속세로부터 해탈하여 최고의 경지인 열반의 세계로 간다 는 행복한 고백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 그런데 그 분이 마지막으로 남긴 열반송 에 보면 , “나는 한평생 무수한 사람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 보다 더하다 . 산채로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갈래니 한덩이 불덩이 푸른산에 걸려 있다 고 합니다 . 쉽게 풀어보면 나는 한 평생 많은 사람을 속였으니 그 죄가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높다 . 그 죄로 인해 나는 살아 있는 모습으로 지옥에 떨어지게 생겼다 는 것입니다 .

기독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 평생 남들이 흉내도 낼 수 없는 고행을 했으면서도 죄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 구원의 확신도 없습니다 . 지옥에 가게 생겼다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 이것이 20 세기 한국불교의 가장 위대한 인물의 고백이자 탄식입니다 . 그러니 산은 산이고 , 물은 물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 평생 고행하기 전이나 고행한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 죄는 그대로 있고 ,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 얼마나 허무하고 안타깝습니까 ?

인도의 위대한 전도자 썬다싱은 히말라야 산맥과 티벳고원을 넘나들며 고행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 평생 앉아서 먹고 자는 사람 , 하루 종일 물구나무 서 있는 사람 , 몸도 비틀지 못하는 좁은 공간에서 꼼짝하지 않는 사람 , 별의별 방법으로 고행을 했습니다 . 썬다싱은 그들에게 고행하니 평안하십니까 ? 구원의 길을 찾으셨습니까 ?”라고 물었지만 , 한결같이 마음이 더 불안하고 복잡하다 고 대답했습니다 .

모든 고행자들이 평생을 고행을 했으면서도 마지막에는 하나 같이 만족과 평안이 없고 , 구원의 길을 찾지 못했다 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를 핍박하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 평생 예수 전하다가 죽었습니다 . 그는 마지막에 내가 믿음으로 살았으니 하나님 나라에 간다 는 행복한 고백을 했습니다 . 다윗도 시편 23 편에서 내가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리로다 라고 합니다 . 스데반이 예수를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예수님이 나를 반기신다 고 합니다 . 세계적인 부흥사인 디엘 무디 목사님은 죽음 직전에 나는 하나님의 나라로 이사 간다 . 천사들이 나를 마중 나온다 고 행복해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 성 경에 보면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같이 천국에 간다면서 감격함으로 죽었습니다 .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 , 영생의 길을 찾아서 헤매고 고행을 하지만 , 예수를 떠나서는 길과 방법이 없습니다 . 오늘 본문 6 절에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 고 말씀하십니다 . 모든 종교인들이 죽음 앞에서 근심하며 후회합니다 .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죽음 앞에서도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에 가기 때문입니다 . 기독교가 참 생명의 종교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여러분도 예수 믿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둘째로 , 예수 믿으면 자유함이 있습니다 .

 

어떤 분들은 예수 믿으면 술담배도 못하고 , 주일날도 교회 가야하는데 무슨 자유함이 있나 라고 생각합니다 . 이것은 오해입니다 . 예수를 믿어야 진짜 자유함이 있습니다 . 요한복음 8 장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고 합니다 . 확인해 볼까요

예수 안 믿으시는 분들은 자녀들 이름도 마음대로 짓지 못하고 ,이사도 손 없는 날을 택해야 하고 , 묘터도 잘못 잡으면 가문이 망한다고 합니다 . 귀신을 노하게 하면 다 망한다면서 돈도 바치고 , 음식도 바치면서 잘 대접합니다 . 귀신이 좋아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 겁이 나서 섬깁니다 . 귀신으로부터 자유함이 없습니다 .

귀신이 무서운 분들은 예수를 믿으세요 . 귀신 섬기는 분들은 기절초풍할 일이지만 , 예수 믿는 사람들은 더러운 귀신 , 악한 귀신이라 고 저주합니다 . 사람이 개와 대결할 때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 개가 공격하려고 하면 사람도 같이 무서운 표정으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자세를 보이면 개는 꼬리를 내리고 도망합니다 . 그런데 사람이 먼저 겁을 먹고 도망가려고 하면 개는 사납게 공격을 해옵니다 .

귀신도 같습니다 . 귀신에게 겁을 먹으면 절대로 이기지 못합니다 .겁을 먹으면 귀신의 노예가 되어서 평생 자유함을 잃어버리고 살아야 합니다 . 그런데 귀신은 예수님과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무서워 합니다 . 성경을 보면 귀신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보고는 벌벌 떨고 다 도망갔습니다 . 믿음이 큰 능력이고 권세입니다 .

잘 안믿어 지십니까 ? 무당이 푸닥거리하고 점장이가 점치는 곳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 예수 믿는 사람 앞에서 짝두를 타면 발이 상하고 , 대나무나 숟가락을 아무리 세우려고 해도 안됩니다 . 귀신이 예수 믿는 사람들 앞에서는 겁이 나서 아무것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

저는 목회하면서 귀신들린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 귀신들린 사람은 장정도 제어할 수 없는 초인적인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 가족들도 무서워서 접근을 못합니다 . 그런데 목사와 교인들이 가면 벌벌 떨면서 구석에 쳐박혀 있습니다 . 거기서 기도하고 찬송하면 귀신들린 사람은 숨도 제대로 못 쉽니다 . 귀신이 예수를 무서워하기 때문입니다 . 이 얼마나 큰 권세입니까 ? 요한복음 1 12 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권세를 주셨다 고 합니다 .

귀신이 무서워서 섬기는 분들에게는 자유와 평안이 없습니다 .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받습니다 . 이것이 진정 자유이고 평안입니 다 . 예수를 믿으면 귀신이 두렵지 않습니다 . 죄의 문제로 죽는 순간까지도 고민하고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 하나님이 믿음을 보시고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 죽으면 마귀가 없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

마태복음 8 장에 보면 ,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배를 타고 가는데 태풍을 만나 배가 뒤집히게 생겼습니다 . 베드로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셔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사도행전 12 장에 보면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서 내일이면 죽습니다 . 그런데도 사형 전날 밤에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 베드로를 구하러 온 천사가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데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 천사가 발로 옆구리를 뻥차면서 일어나 하니까 겨우 일어나서 탈출했습니다 . 예수 믿고 천국을 소유하니까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평안했던 것입니다 .

이런 삶이 진정 자유고 평안입니다 . 여러분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 누구든지 예수만 믿으면 이런 자유와 평안의 삶을 사실 수 있습니다 .

 

셋째로 ,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존귀함을 받습니다 .

 

구약 욥기 36 7 절에 그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들과 함께 왕좌에 앉히사 영원토록 존귀하게 하신다 고 합니다 . 시편 16 편에서도 하나님께서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다 고 합니다 .

누가복음 15 장에 보면 어떤 큰 부자집의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간섭이 싫어서 유산을 받아 집을 나갔습니다 . 떠나면 행복할 줄 알고 떠났지만 , 나중에 돈이 다 떨어져 거지가 되었습니다 . 그때 이 아들이 우리 아버지 집은 부자라서 먹을 것도 많은데 , 내가 왜 뛰쳐나와서 이 고생을 하나 돌아가야겠다고 합니다 .

아버지는 밤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문 열어놓고 아들을 기다리는데 , 어느 날 아들이 거지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 모두가 더럽고 냄새난다며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 아버지는 이 아들에게 입을 맞추고 얼굴을 비비면서 손에 금반지를 끼우고 새 신발을 신기고 좋은 옷 을 입혔습니다 . 아들을 존귀하게 여기는 아버지입니다 .

이 아들의 아버지가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좋다며 하나님을 떠납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한 순간도 잊지 않으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 돌아오기만 하면 아들로 맞아주시고 존귀하게 대우해 주십니다 .

사회에서 존귀함을 받고 , 회사에서 존귀함을 받는 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어디서나 존귀함을 받고 살아간다면 큰 복입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 존귀함을 받는다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큰 복입니다 . 하나님께 존귀함을 받으면 셀 수 없는 축복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

예수 안믿는 사람들도 비가 오지 않으면 하나님 비를 좀 내려 주세요 라고 합니다 . 위험한 일을 만나도 아이구 하나님 살려 주세요 라고 합니다 . 스님들도 겨울에 얼음 위를 염불을 외우며 가다가 갑자기 얼음이 쩌정그러면 아이구 하나님 살려주세요 라고 한답니다 . 그런데 예수를 안믿으면서 이런 기도를 백날 해봐야 응답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십니다 .

2 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카이제 황제가 자기의 시종에게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거를 보여주면 나도 하나님을 믿겠네 라고 했습니다 . 그때 시종이 폐하 , 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 그렇습니다 . 이스라엘은 4 천년의 역사 중 , 3,300 년을 남의 나라 지배를 받았습니다 . 세계에서 가장 전쟁이 많았던 나라가 이스라엘이고 , 가장 전쟁이 많았던 도시가 예루살렘입니다 . 옛날 앗시리아 제국과 바벨론 제국 , 헬라제국과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을 아예 멸종시키려고 했습니다 . 히틀러도 그랬습니다 . 수천년 동안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

그런데도 지금 전세계의 경제나 정치 , 문화와 과학 등 모든 분야의 리더들이 유대인입니다 .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33%가 유대인입니다 . 이 기적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

여러분들이 혹시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못하신다면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히 보여줍니다 .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존귀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으면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 축복을 받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자녀가 가출한 부모님들이 애타게 찾는 문구를 신문이나 길거리 벽보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 “내가 잘못했다 . 다 용서할테니 제발 돌아와라 . 엄마 아빠는 문열어 놓고 잠도 못자고 기다린다 고 호소합니다 . 돌아오기만 하면 다 용서하고 무엇이든 주려고 합니다 . 이 부모의 심정이 우리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 지금도 하나님은 문을 열어놓으시고 여러분이 돌아오도록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든지 사랑으로 다 덮으시고 큰 복을 주십니다 . 여러분 모두 기다리시는 하나님께 다 돌아오셔서 이 축복을 받으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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