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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요셉이 감옥으로 간 까닭 (고난이 우리 삶에 끝이 아님)

 

 

 

요셉이 감옥으로 간 까닭은?

 

< 본문 - 창세기 39:19-23 >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영화가 있습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제목의 영화입니다. 우연히 산새 한 마리를 죽이게 된 동승(童僧)이 성불(成佛)에 이르기 위해서 겪어나가는 고뇌의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1989년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열린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인 금표범상을 비롯하여 국제기자협회상 등 4개의 특별상을 받았습니다.

  영화의 제목에서 보여준 것처럼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달마(達磨)는 남인도 향지국(香至國)의 세 번째 왕자로, 대승불교의 승려가 되어 6세기에 중국에 와서 선종(禪宗)을 창시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달마가 고향 인도를 떠나 동쪽 중국으로 먼 길을 간 까닭은 제자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제자 하나를 만나겠다는 열망 때문에 고향을 떠나 수 천리의 먼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에서는 달마처럼 먼 길을 가던 동승이 노중에 겪었던 고뇌와 갈등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모든 여정에는 그 나름대로의 뜻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때로는 불필요하고 때로는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과정이라 하더라도 다 나름대로의 뜻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고난과 역경의 길에도 그 나름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오늘의 고난이 우리 삶에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3-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또 로마서 8:18절에서도 말씀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는 이 말씀의 진리를 믿기에 때로 어려움을 당해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당하는 환난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역경이나 환난이 그것으로 끝이라고 한다면 그 어려움 가운데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게 끝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당한 환난이나 고난을 이겨내면 우리에게 더 큰 영광과 기쁨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죽음이라는 인생 최고의 두려움 앞에서도 우리 신앙인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더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인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신앙의 선조들보다 더 성실하고 본받을만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실하게 살았던 요셉이 누구보다도 큰 시련과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당한 그 고난은 그 어느 것 하나 의미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야곱은 4명의 아내로부터 12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그 중에서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은 요셉과 베냐민 단 두 명뿐입니다. 라헬은 야곱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지만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11번째 아들로 요셉을 낳게 되었고, 마지막 베냐민을 낳다가 죽고 맙니다. 그래서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남달리 사랑했습니다. 특히 라헬이 첫 번째 낳은 아들 요셉은 아버지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 때문에 요셉은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고 결국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요셉은 어린 나이에 노예가 되어 이국 땅으로 팔려가고 말았습니다.

  당시 노예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참했습니다. 노예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주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주인이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릴 수도 있고, 심지어는 죽일 수도 있습니다. 노예의 목숨은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파리 목숨’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죽도록 일만해야 했습니다. 일을 잘 했다고 칭찬받는 것도 아닙니다. 죽도록 일한 후에 늙으면 버려지는 것이 노예의 일생이었습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서 처음 일하게 된 곳이 애굽 왕 바로의 친위대장이던 보디발의 집이었습니다. 보디발은 당시 굉장한 권력자였습니다. ‘바로의 친위대장’이라는 그의 직책이 말해 주듯이, 그는 바로로부터 특별한 신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친위대장이라는 말은 요즘으로 하면 대통령 경호실장입니다.

  그런 보디발의 집에서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실하게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보디발의 신임을 받게 되고, 어린 나이에 보디발의 집 가정 총무까지 맡게 됩니다. 가정 총무의 자리는 당시 노예가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였습니다. 보디발의 집 모든 살림살이를 주관하는 위치였습니다.

  

  노예로서 그렇게 잘 나가던 요셉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쳐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젊고 잘 생기고 똑똑하기까지 한 요셉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단호하게 그런 유혹을 거절합니다. 한번은 집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또 유혹했습니다. 요셉의 옷을 붙잡고 동침하자고 유혹했습니다. 이것은 유혹이 아니라 주인으로서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유혹이든 주인의 명령이든 간에 요셉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유혹과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집요한 주인아주머니의 손에서 빠져나오느라고 요셉은 자신의 옷을 벗어버리고 도망쳐 나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되었습니다. 요셉을 유혹하는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보디발의 아내는 오히려 요셉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버립니다. 요셉이 벗어버리고 간 옷을 증거물로 삼아 남편 보디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종 요셉이란 놈이 나에게 못된 짓을 하려고 하다가 내가 소리를 지르니까 이 옷을 벗어놓고 도망갔습니다.’ 물론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그것 때문에 결국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요셉은 참으로 기구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형들로부터 미움을 사서 이국땅으로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가장 고통스런 삶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예생활이 좀 풀려지는 듯싶더니만, 이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더 처절한 삶의 자리로 곤두박질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요셉과 같은 처지에 놓였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온 것도 억울한데, 이제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것 때문에, 믿음을 지키겠다는 것 때문에 그는 더욱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한 말이나 행동 때문에 오히려 고통을 당하고, 오히려 손해를 본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나 손해가 적은 것이라면 그저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당한 일은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예가 된다는 것도 엄청난 것이었고, 감옥에 갇히는 것 역시 곧 죽음을 의미할 정도로 아주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저는 하나님께 불평했을 것입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고 원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살았는데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고 하나님께 불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노예로 팔려갔을 때에도, 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나 요셉이 보인 삶의 자세는 한결같았습니다. 그는 어디에서나 성실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는 주인 보디발이 그를 신임하고 집안 모든 살림살이를 그에게 맡길 만큼 성실했고, 감옥에서도 간수장이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다 관리할 수 있도록 제반 사무를 다 요셉에게 맡길 정도로 그는 신실했습니다.

  

  요셉이 그런 비참한 삶 속에서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찾아와도 묵묵하게 참고 이겨냅니다. 지금의 고통과 역경이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과정 없이 성공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통의 순간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꿈이 있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유명한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들, 그리고 우리가 성공했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 가운데 힘들지 않게 그 자리에 올라온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숨이 턱 밑에까지 차오르는 고통의 순간을 참고 이겨낸 선수만이 승리의 메달을 목에 걸 수 있습니다. 고된 훈련의 과정이 없었다면 영광과 환희의 순간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힘들 때 끝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마지막에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1등의 꿈을 꿉니다. 그러나 그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고통을 참아내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꿈을 포기해버립니다. 그래서 그 꿈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꿈이 분명한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니 포기할 수 없습니다. 꿈이 숱한 고난과 역경, 좌절과 슬픔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꿈을 이루어내게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꿈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떤 꿈을 갖고 계십니까? 오늘의 고통과 역경보다 훨씬 큰 꿈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고통과 역경을 참고 견디며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움 앞에서 불평하고 자신의 처지를 원망한다면 그건 우리의 꿈이 우리가 당한 어려움보다 작기 때문입니다. 꿈을 잃어버렸거나 꿈이 작으면 어려움 앞에서 좌절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역경을 이겨낼 힘이 내게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노예로 팔려간 요셉에게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바로 그 꿈입니다. 형들뿐만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도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크게 쓰실 것이란 꿈을 늘 가슴에 안고 살았습니다. 그 꿈이 너무너무 힘들 때에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꿈을 이룰 때까지는 어떤 어려움이나 힘든 상황에 내몰린다 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인 노예로 전락했을지라도, 또 감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는 원망이나 불평으로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야 할 굼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꿈을 주십니다. 인생의 꿈뿐만이 아니라 신앙의 꿈을 주십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나를 통해서 이루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꿈이 있습니다. 나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하나님의 꿈입니다. 때로는 그 꿈을 우리가 알지 못한 채 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그 꿈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마지막에 쟁취하고 얻게 될 영원한 꿈이 있습니다. 천국이라는 꿈 말입니다. 그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그 꿈을 꼭 붙잡아야 합니다. 그 꿈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어떤 역경과 고통의 순간이 와도 이길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그 꿈이 우리를 하여금 담대하게 만들어줍니다. 그 꿈이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해 줍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갔을 때에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에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늘 자신에게 꿈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의 눈길을 보내오고 자신과 동침하라고 명령을 내려도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라고 말하면서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짓은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믿음 때문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그런 믿음 때문에 또한 노예생활과 감옥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교회에 다니면 절대로 어려움이 없다.’거나 ‘믿음으로 살면 언제나 좋은 일만 일어난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다. 요셉은 믿음을 따라 살려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요셉만이 아닙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믿음 때문에 고난을 겪기도 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온갖 박해를 견뎌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믿음 때문에 죽음의 길을 가야 했던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길을 갔습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할 신앙의 길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다. 믿음을 지키다가 당하는 고난이나 역경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믿음입니다. 아니 우리의 삶에 닥친 그 어떤 어려움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 믿음뿐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어떤 어려움을 당하든지, 또 어떤 역경이나 고난이 우리를 힘들게 하든지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십시다. 힘들다고 믿음을 버리거나 고통스럽다고 믿음의 자리를 떠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을 이기는 것이 믿음인데, 믿음을 버린다면 무엇으로 그 어려움과 시련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우리에게 승리를 줍니다. 믿음이 우리 앞에 당한 고난과 어려움을 재해석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일어설 수 있게 해 줍니다.

  

  요셉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주인아주머니의 유혹과 부당한 명령 앞에서도 ‘지금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지금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데 내가 어찌 그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수 있겠느냐’고 말하고,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감옥에 가는 것도 두렵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감옥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본문 20-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또 23절에서도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며 지켜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특히 어려운 일을 만나면 내 주위에 아부도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더욱 힘이 듭니다. 심지어 기도를 해도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신 것처럼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아무 것도 안 하고 계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왔을 때에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창세기 39:2절에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이 노예생활할 때 하나님께서 늘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은 늘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요셉은 그것을 믿었고, 그것 때문에 요셉은 범죄에 빠지지 않고 성실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이 믿음을 가지십시다. 내가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일수록 하나님은 더욱 우리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 믿음으로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고, 힘들 때 내 손을 꼭 붙잡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이끌림 받으며 사십시다. 우리가 내민 손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요셉의 그 믿음이 그의 길을 형통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읽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23절 마지막에서 말씀하고 있는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똑같은 말씀이 39:2-3절에도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여러분, 형통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것이 형통한 것입니까?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찬송가 384장)고 찬송합니다. 그렇다면 만사형통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흔히 별 어려움이 없이 내가 계획한대로 잘 되어가면 형통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이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평안하게 잘 진행되고 있으면 형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계획한대로 잘 이루어져 가고 있으면 형통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사형통하리라”고 찬송할 때도 그런 의미의 형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한 삶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는 대로 되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 계획이나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바대로 되어가는 것이 형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간 것도 형통한 길이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것도 형통한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왜 자신이 노예로 팔려오게 되었는지, 왜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지를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 그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세기 45:5-8)

  요셉은 자신이 노예로 팔려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꿈을 이루시기 위해서 자신을 먼저 여기로 보내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옥에 갇히는 것도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꿈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과정을 거치게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바로 형통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기 위해서 그 과정을 거치게 하시는 것이기에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을 만나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었고, 불평 대신에 찬송과 감사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셉이 형들에 의해 팔려 애굽 땅으로 오지 않았다면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그는 바로 왕 앞에 설 수 없었습니다. 감옥에 와서 바로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바로 왕 앞에 설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요셉의 가족들은 7년의 흉년 가운데서 굶어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당신이 뜻하신 바를 이루어가셨고, 결국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의 약속들을 이루어가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총무의 일을 하게 된 것이나 감옥에서 제반 사무를 보게 되었던 것이 나중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국정을 운영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언제 어디에서 행정경험을 쌓을 수 있겠습니까? 보디발의 가정총무와 감옥에서의 제반 사무를 보던 것이 큰 경험이 되어서 국무총리의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내고 보면 우리의 삶에 그냥 되어지는 것도 없고, 의미 없이 경험되는 것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섭리의 과정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내가 지금 어려운 가운데 있다고 생각된다면 지금 내가 겪는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인도하실 것인가를 기대하시고, 그 어려움을 잘 이겨나가면 나중에 그 경험이 내 인생에 아주 중요하게 쓰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37-50장까지 기록된 요셉의 이야기 가운데 특이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요셉의 삶에는 어떤 특별한 기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가진 것 외에, 그 어떤 기적을 행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어떤 기적이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요셉의 위대한 모습은 계속된 고난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단 한 번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고,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셉에게 있는 꿈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요셉이 가진 믿음 우리도 가질 수 있습니다. 요셉이 가졌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 우리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꿈과 믿음과 확신을 회복하셔서 그것을 더욱 굳게 붙잡고 사십시다. 그러면 요셉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오늘 우리를 통해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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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주일낮예배설교 /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말씀 : 엡2:1~9

제목 : 지극히 풍성한 은혜

1.놀랍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여러분도 잘 아시는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토끼가 길을 가다가 함정이 있어서 내려다보았더니 함정에 빠져 며칠을 굶어 다 죽어가는 늑대 한마리가 제발 나 좀 구해달라고 애걸복걸을 합니다. 그러자 토끼가 너를 구해 주면 날 잡아 먹을 것이 아니냐며 거절을 하자 늑대는 어떻게 생명의 은인을 잡아먹을 수 있겠느냐며 그런 배은망덕한 일은 절대 없을 테니 제발 한번만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토끼는 늑대가 너무 불쌍해서 기다란 나무를 내려 주어 늑대는 겨우 함정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함정 밖으로 나온 늑대는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더니 나는 지금 너무 배가 고파 다른 사냥감을 구하기도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너라도 잡아먹어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토끼가 세상에 생명의 은인을 잡아먹는 이런 배은망덕한 일이 어디 있느냐며 따졌지만 도무지 통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마침 여우가 지나가기에 토끼가 여우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판결을 좀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우는 정확한 상황을 알아야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으니 처음부터 상황을 재현해 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늑대가 함정에 뛰어 들어가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함정에 빠져서 이러고 있을 때……” 그러자 여우는 늑대의 말을 조금 듣다가 말했습니다. “너는 거기서 계속 갇혀 있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토끼와 함께 떠나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뜻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만 배은망덕한 자가 되면 도로 함정에 갇힌 늑대와 같은 신세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는 바로 함정에 빠진 늑대와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죄와 무지의 깊은 함정 속에 빠져 아무리 발버둥쳐도 도무지 빠져나오지 못하고 결국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그 죄와 무지의 함정, 지옥의 함정에서 우리를 건져 주신 것입니다.

오늘 1~3절을 보십시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보십시오. 우리가 과거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는 허물과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공중 권세 잡을 자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삶으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입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영원토록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끔찍한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인생의 현주소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의 실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겨 찾아와 주시고 구원해 주심으로 이제는 반대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영원토록 할렐루야 찬양하고 감사하며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는 특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다행입니까? 얼마나 은혜에 보답하며, 얼마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실상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나마 죄가운데 빠져 자연 상태로는 허물과 죄로 진노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찾아와 그 죄의 함정 속에서, 사망의 함정 속에서, 지옥의 함정 속에서 건져 주셔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며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갈 뿐 다른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말 그대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졌는데,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얻었는데 다른 무슨 필요한 것이 있겠습니까? 물론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것들이 있는 있죠. 그러나 그런 것들은 그렇게 대단한 것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실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은 이미 있어야 할 만큼 주셨습니다. 그러면 됐지 우리가 뭘 그렇게 더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구원받아 거꾸로 영광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기억하며 정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려드리며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으로 과거의 우리의 상태는 어땠습니까? 어떻게 그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까? 이 엄청난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2.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의 모습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지 못할 때는 참으로 처참한 인생이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1절을 다시 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죽음은 물론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영적 죽음, 즉 둘째 사망입니다. 즉 지옥에 처할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랬느냐? 허물과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허물이란 미끄러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허물은 의도적으로 잘못한 것이 아니라 실수로 잘못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죄는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목적에서 벗어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부합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모든 것들이 곧 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허물과 죄란 고의든 실수든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는 모든 생각과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는 모두가 이런 죄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궤계에 빠진 이후로 인간에게 대물림하여 내려온 원죄로 자연인으로의 인간은 누구도 이것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허물과 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제 아무리 법 없이도 살 만한 천사 같은 사람이나 성인군자라도 허물과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인생의 도와 목적을 알 수도 없고, 알아도 그것을 따라 살아갈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생은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였는데 그 허물과 죄가운데 있는 인생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앞에서 보았던 2,3절을 다시 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말씀에 보면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이 살아가는 모습 세가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세상 풍조를 따른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것이고, 세 번째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풍조를 따른다는 것은 한마디로 세상의 물결 따라 유행 따라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와 선과 의가 인생이 살아가야할 방향이요 목적이요 기준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은 뒷전이고 그냥 당장 눈에 보기에 편하고 좋고 유리한대로 세상의 물결을 좇아 흘러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풍속이 다 나쁘고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는 좋은 전통도 많고 미풍양속도 많습니다. 나름대로 진리와 선과 의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 사실 세상의 문명의 이기나 문화나 과학이나 예술이나 스포츠나 우리가 함께 공유하고 누리고 따라가야 할 것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유감스럽게도 세상에는 너무나 왜곡된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와 세상 즐거움을 추구하며 인본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물질만능주의 속에서 자기 마음과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이성을 따라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는 모습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눈에 좋게 보이고 유익이 되고 기쁨이 되고 편하고 자유를 줄 것처럼 여기지만 그러나 이런 것들은 결코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과 자유와 평안과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도리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함으로 생명의 은총을 빼앗아 가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삶에 대하여 계속 경고를 보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죄와 무지속에 있는 대부분의 인생들은 이걸 모르고 자기가 보기에 옳은 길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세상의 대세가 되어버리고, 대세가 되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자유의 길, 평화의 길을 버리고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리에서 구원받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더 이상 그런 허물과 죄로 죽은 인생들이 따라가고 있는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것이 아니라 세상 많은 사람들이 달려가는 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의롭고 바른 것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당연히 거기에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결코 세상의 물결을 따라, 유행을 따라,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말씀안에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진정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공중권세 잡을 자를 따른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한마디로 마귀를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세상 풍조를 따르는 모든 것이 마귀를 따르는 일이지만 특별히 여기서는 온갖 종류의 우상을 섬기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인생은 얼마나 우지하고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을 합니까?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해도 떡을 하면 제일 먼저 한 접시 담아서 장독대로 가서 항아리 위에 올려놓곤 했습니다. 또 달에게 빌고, 해에게 빌고, 나무에다 빌고, 마을 앞 한길을 지나다가 마귀 어귀에 있는 서낭당에 돌을 하나 쌓고 가곤 했습니다. 나무를 베면 귀신이 노해서 화를 당한다고 나무도 못 베고, 못도 아무데나 못 박고, 결혼이나 이사도 제 맘대로 못 다니고 귀신한테 물어보고, 사랑하는 자녀의 이름도 제 맘대로 못 짓고 귀신한테 물어보고....... 얼마나 무지몽매한 일입니까? 이게 바로 마귀의 하수인이 되어 귀신을 섬기고 있는 어리석은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게 마귀의 하수인이 되어 꼼짝 못하고 종노릇하다가 결국 영원한 형벌가운데 처하게 되니 이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하고 어리석은 인생의 모습입니까?

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간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진리니 생명이니 의니 정직이니 성실이니 이런 것들은 뒤로 밀려나 있고 오직 육체의 욕심을 채우는 길로 달려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게 동물과 다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게 뭡니까? 영이 있고 이성 즉 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은 영적인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해서 섬길 자를 섬기고 버릴 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성은 정신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옳은 일을 택하도록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육신은 우리의 영과 혼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산다는 것은 그런 영과 이성의 지배를 벗어던지고 오직 육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영과 이성이 없는 동물과 같은 삶이고, 하나님의 고위한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생이 짐승과 같은 삶을 산다며 결국 하나님에게서 끊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6:3절 하반절에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육신이 되었다. 이미 육신을 가지고 있는데 뭘 또 육신이 됩니까? 영이 완전히 죽어 오직 육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겨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젠가 뉴스에 보니까 강원랜드 카지노 주변에서 집에도 못가고 빌빌 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7천명인지 몇 명인지 된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카지노에서 도박으로 보통 몇 억씩 날린 사람들인데 그래서 집에 가지 못가고 가족도 가정도 다 잃어버리고 쪽방 같은데 살며 식당 등에서 일하며 겨우 먹고 살면서 그나마 돈 몇푼 모이면 또 카지노에서 다 날리고 그러면서 산답니다. 참 기가 막힌 노릇 아닙니까? 이게 바로 영과 이성이 마비된 인생들의 모습이지요. 어디 이 뿐이겠습니까? 영과 이성의 지배를 받지 못하고 육신과 물질의 종이 되어 온갖 짓들을 다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고 과거에 바로 그런 자들이었는데 이제는 거기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과 혼의 지배를 받으며 주님과 동행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더 이상 세상 풍조를 따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살아감으로 더욱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충만함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인생

여러분, 우리는 정말 생각하면 할수록 감사할 것 뿐이고 영광 돌릴 것 뿐입니다. 우리는 정말 죽을 때까지 아니 영원토록 감사하며 기뻐하며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며 살아도 모자라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앞에서 말씀드린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것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벗어나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종종 말씀드리지만 얼마나 다행입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가 만약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끔찍하고 몸서리가 처지지 않습니까? 여러분, 앞에서 보았던 3절에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는 것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니 얼마나 두렵고 끔직한 말씀입니까? 어떤 분들은 별로 느낌이 없는 것 같은데 여러분, 상상해 보기도 싫은 일이지만 상상해 보십시오. 이 몸이 죽고 싶어도 영원히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야 된다면 그 고통과 아픔과 비참함과 끔찍함이 얼마나 하겠습니까? 어떤 분들은 이걸 무슨 상상 속의 이야기라고 착각하는데 천국과 지옥은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실제 상황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반드시 둘 중의 한 군데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거기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냥 불구덩이에서 구원받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반대되는 세상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완전히 영원히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행복과 만족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만이 넘치는 천국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무슨 잘나고 똑똑하고 의로워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입니다.

오늘 5절과 8절 말씀 보겠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5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8절) 여러분, 이게 웬 떡입니까? 웬 은혜입니까? 웬 사랑입니까? 웬 축복입니까? 우리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습니까? 그럴만한 공로가 있습니까? 그럴만한 지혜와 능력이 있습니까? 그럴만한 선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죄과대로 갚으셨다는 우리는 속된 말로 찍소리도 못하고 영원한 형벌에 처할 수 밖에 없었던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작은 믿음 하나 보시고 우리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며 그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갚기 위하여 애써야 하겠습니까?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아주 유명한 시조가 있지 않습니까? 먼저 이방원이 하여가(何如歌)를 지어 정몽주를 회유하려고 합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누구의 세상인들, 세상이 어떠한들 그게 뭐가 중요하냐? 그냥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 나와 손잡고 100년의 권세를 누려봄이 어떠하냐? 뭐 그런 정도의 뜻이겠지요. 그러자 정몽주가 그 유명한 단심가(丹心歌)를 지어 답을 하지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이 몸이 백번을 죽어도, 백골이나 넋이 있든 말든 임금을 향한 일편단심은 변할 수 없다는 거죠. 그리고 결국은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철퇴에 맞아 순교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잠시잠깐 세상에 왔다가 사라져 갈 세상의 임금을 위한 충신의 자세가 이러하다면 영원토록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세상에서 은혜를 입은 임금의 은혜를 이와 같이 죽음으로 갚았다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를 구하여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신 이 엄청난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이 귀한 말씀을 묵상하며 정말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얼마나 엄청난 은혜를 받은 존재인지, 우리가 얼마나 존귀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정말 세상의 왜곡된 풍조나 공중권세 잡은 자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만을 따라 주님과 동행할 때에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로 지금 여기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그 놀라운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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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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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제목 : 잃어버린 자아를 찾읍시다.

본문 : 행2:1-4

1.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특히 겨울밤에는 마실이라고 해서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도 방학 때는 이웃집에 놀러가 함께 놀다오곤 했었습니다. 지금은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할 것 없이 텔레비전을 보든지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놀든지 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런 게 없었죠. 그래서 동지 섣달 긴긴 밤에 별로 할 게 없으니까 마실을 가곤 했는데 때로는 좀 늦게까지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아이들은 그만 잠이 들기도 했는데 이 때 아이들이 짓궂게 불침이라는 걸 놓곤 했었습니다.

불침이라는 것 혹시 놓아 보거 맞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성냥개비를 반쯤 태우고 나서 숯처럼 만들어 끝에 불을 붙이고 다른 한쪽에 침을 발라 자는 아이의 다리 같은데 세워 놓으면 불이 숯을 타고 내려가 살에 닿으면 물론 아주 센 불은 아니어서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지만 자던 아이가 그만 기겁을 하고 벌떡 일어납니다. 그렇게 놀라서 일어나는 것이 재미있어서 아이들이 장난을 치곤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설교 준비를 하다가 이 이야기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름 아니라 우리 영혼도 불침을 한번 맞아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여러분, 육체의 잠이 깊이 들어있으면 곱게 깨우면 안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업어 가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금방 일어납니까?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뜨거운 맛을 보든지 아니면 반대로 찬 맛을 보면 됩니다. 즉 불침을 한방 놓든지 찬물을 한 바가지 끼얹으면 정신이 번쩍 나서 벌떡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잠만 아니라 영적인 잠이나 정신적도 잠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깊은 잠이 들어 있으면 웬만한 충격으로는 깨어나질 않습니다. 그야말로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죽어라고 왜곡되고 변질되고 추하고 어리석고 심지어 악한 생각과 경험과 이성과 가치관을 고집하며 살아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마치 바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바로는 아홉 번씩이나 끔찍한 재앙을 당하고도 깨닫지 못하다가 마침내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는 참혹한 꼴을 당한 후에야 비로소 심령에 충격을 받고 이스라엘을 보내게 되지 않습니까? 그만큼 인간의 심령이 얼마나 어둠과 무지 속에 굳어져 있는지 그 영적 정신적 잠에서 깨어나기가 정말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게 오히려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오면서 맨날 보고 듣고 배우고 말하고 행동한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맨날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잘먹고 잘살며 재미있게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들만 생가하며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육체적 물질절 생각과 가치관과 삶의 모습들이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두 그런 가치관 속에 살고 있으니까 그게 본래의 모습인 줄 알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물론 그게 인생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고 잠자고 놀고 그저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더 좋고 너 낫고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도 아니고 거기에 행복과 기쁨과 만족과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너무나 귀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육체적 물질적으로 잘먹고 잘사는 것만으로는 자신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누리지 못하고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마는 불쌍하고 어리석은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창1:2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여러분, 보세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이라니 얼마나 고귀한 것입니까? 물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물질적인 형상은 없으시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영적 정신적 감정적 지적 의지적 형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존귀하신 모습을 닮아 영적 정신적 감정적 의지적 지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선과 사랑과 의를 행하며 영육간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려야 할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그 모습도 심히 좋았고, 그 목적도 심히 좋았고, 그 마음도 영혼도 육체도 모든 것이 심히 좋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지혜롭게 다스리며 아름답게 가꾸는 가운데 사랑과 기쁨과 선과 의를 행하며 영육 간에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그런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어리석게도 그만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여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어둠과 무지 속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며 육체적 물질적으로 기쁨과 영광을 누리는 것을 인생이라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본래의 모습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냥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본래의 모습인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이와 같이 너무나 왜곡된 가치관에 길들여져 온전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더 이상 그저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의지하며 그저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욕망을 채우고 거기서 인생의 기쁨과 목적과 행복을 찾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위로 하나님을 잘 섬기며 아래로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사랑과 선과 의를 행하며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본래의 인생의 모습이고 그럴 때 당연히 진정하고 영원하고 온전한 행복과 기쁨과 만족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4:22~24절에서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제 정말 더욱 겸손히 그리고 열심히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함으로 진정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의 불방망이를 맞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면 진정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본래의 그 아름답고 가치있고 생명력이 충만한 모습을 회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방법은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우리 인생이 본래 죄와 무지 가운데 있으니 우리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는 안됩니다. 천만년 도를 닦아도 안됩니다. 이건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무언가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게 쉽게 깨지겠습니까? 단단한 쇳덩어리가 웬만한 충격을 주어서 깨지겠습니까?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쉽게 깨지겠습니까? 영적 정신적으로도 오랜 세월 동안 굳어진 것들은 웬만해선 안 깨집니다. 그렇게 단단하게 굳어지고 무디어진 것들을 능히 깨트릴만한 강력한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딴딴하고 질기게 굳어진 그 왜곡되고 무지하고 추하고 어리석고 심지어 악하기까지 한 그 무지하고 강퍅한 심령을 깨트릴 수 있는 무기는 무엇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성령의 역사하심 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불망이로 한번 뜨거운 맛을 봐야 합니다. 그러면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납니다. 우리가 멍하게 앉아 있거나 졸려서 눈꺼풀이 천근만근 내려앉을 때에 뒤통수를 한번 얻어맞든지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뜨거운 불 맛을 보면 정신이 번쩍 나는 것처럼 성령의 불방망이를 한번 맞으면 정신이 번쩍 나서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세상에서 굳어진 것들이 정말 끈질기게 내 안에 달라붙어 있어서 자꾸 그 잘난 이성과 경험과 지식을 따라가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좀 따라가는 것 같다가도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되고 세상의 것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게 되고 그래서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능력과 은혜를 맛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어떤 분들은 아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그냥 옛날에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하는 식으로 복이나 구하면서 종교생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가는 여기서도 진정 생명의 기쁨과 은혜도 누리지 못하거니와 나아가서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불쌍하고 어리석은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성령의 불망이를 한번 얻어 맞고 잠들어 있던 영혼이 깨어나 새로운 세계 속으로 들어오면 정망 여기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저도 정말 호된 충격을 받고 정신을 번쩍 들어 인생의 방향전환을 한 사람입니다. 일차적으로 저 자신에게 육체적 정신적 충격이 왔었습니다.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신경쇠약 같은 증세도 좀 있었고 특히 신경성 위염으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이번에는 자녀를 통해서 큰 충격이 왔습니다. 큰 아이가 큰 질병에 한달 이상 치료를 받았지만 영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때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나 잘나서 내 힘과 능력과 지혜로 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구나. 내가 아는 것도 별로 없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구나. 내가 기댈 곳은 하나님 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밤낮으로 하나님을 찾아 울고불고 눈물콧물 흘리며 회개하며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내 심령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회개와 감격과 기쁨이 수없이 교차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참 빛, 생명의 빛이 내 심령 속에 채워지며 내 속에 있던 모든 부정적이고 추하고 어리석고 악한 것들이 빠져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자연히 신경성 위염이나 신경 쇠약 증세도 함께 쫓겨 나갔고, 결국 아이의 병도 나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새로운 세계가 환하게 보였습니다. 영광의 나라가 보였습니다. 지금까지의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은 산산조각으로 깨져 버리고 삶의 이유와 목적과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할렐루야 찬양이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정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습니다.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회사 생활을 청산하고 지금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충격을 받고 자아가 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세계가 똑바로 보입니다. 환하게 보입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러나 자아의 껍질이 깨지지 않으면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씨앗이 껍질을 깨트리지 않고 어떻게 새 생명을 싹틔울 수 있겠습니까? 계란 껍데기를 깨트리지 않고 어떻게 병아리가 이 밝은 세상으로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애벌레가 껍질을 벗어 던지지 않고 어떻게 나방이 되어 훨훨 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내 자아와 경험과 이성과 지식의 틀을 깨트려야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로운 세계로 나오게 됩니다. 안 그러면 맨날 그 자리에 있습니다. 안 그래요? 내 지식과 경험과 이성의 틀을 깨트리지 않고 여전히 그 안에 있으면 어떻게 새로운 세상으로 나오겠습니까?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걸 깨트려야 하는데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이게 여간해서는 잘 안 깨집니다. 우리가 몇십년 동안 살아오면서 단단하게 굳어져 그 알량한 지식과 경험과 이성이 단단한 껍질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알량한 경험과 지식과 이성의 껍질이 나를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세계를 보지도 못하고 그곳을 향하여 달려가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걸 깨트려야 합니다. 깨트려야 변화가 옵니다. 이걸 깨트려 버려야 비로소 새로운 세계를 향해 비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성령의 불 맛을 한번 봐야 합니다. 성령의 불망이로 우리의 심령을 두들겨 부숴야 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지식이나 과학으로 되는 게 아니라 강력한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 능력있게 은혜가운데 신앙생활하며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았던 사람들은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다가 하나님의 빛으로 충격을 받고 깨졌습니다. 하늘에서 밝은 빛이 비추더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그때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 자리에 엎어지고 눈이 멀어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눈의 비늘이 벗겨지면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그의 영혼과 마음에 단단한 껍질처럼 붙어 있던 껍데기가 벗겨져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180도 궤도 수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던 삶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세를 추구하던 삶에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엄청만 충격 앞에서 그의 자아는 완전히 깨어지고 성령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큰 충격을 받고 비로소 온전히 거듭나 제자다운 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좀 길지만 전체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러분, 보세요.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무리 120여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흘 동안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쓸 때에 성령의 불이 임한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가 같은 것이 들리더니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불이 거기 모인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각자 따로따로 성령의 불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확 뒤집어 진 것입니다. 심령이 뜨거워지고 감격과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능력을 받고 자신들도 모르게 알 수 없는 방언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후의 삶은 완전히 180도 바뀌었습니다. 자기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고집하지 않고 자신의 것을 다 내놓고 유무상통했습니다. 지상의 메시아 왕국을 꿈꾸던 삶에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갔던 비겁한 자들이 십자가의 순교를 택하는 진정한 용기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직 자신을 위해 살던 삶에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하여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영적인 큰 충격을 받아 옛자아가 완전히 깨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영혼 속에 남아 있는 모든 어둡고 칙칙하고 추하고 악하고 독한 것들이 온전히 쫓겨나가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히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자신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의지하여 세상의 욕망과 유익과 기쁨을 따라 살던 삶에서 돌이키고, 세속에 얽매이고, 물질에 얽매이고, 육신에 얽매이고, 상황과 조건에 얽매이던 삶에서 벗어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로서 진정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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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순진한 믿음

말 씀 : 고전2:1-5

 


1.순진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언젠가 어떤 유명한 배우가 ‘나는 개그맨들을 정말 존경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유가 뭐냐고 했더니 자기들은 남이 다 써 준 각본대로 연기만 하면 되는데 개그맨들은 때로는 밤을 새워가며 머리를 쥐어짜서 뭔가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고 그 아이템을 가지고 어찌하든지 사람들을 웃게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이 생각하고 연구하고 연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매 회마다 색다른 소재를 발견한다는 게 너무너무 어려울 것 같다고 하며 자기는 그렇게 못할 것 같다고 하며 그래서 개그맨들을 존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그 말을 듣고 보니까 개그맨들이 다시 보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게 뭐냐하면 시키는대로 하는 것은 쉽고, 스스로 생각하고 연구하여 물질적인 것이나 지식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이든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미 전부터 있었던 것, 남이 다하는 것,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연구해놓아 지금까지 해 왔던 것들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그대로 따라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이 하지 않았던 것, 아직 표준화 되지 않고 매뉴얼이 없고 스스로 뭔가 개발하며 표준화시키고 매뉴얼을 만들고 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하다 못해 간단한 장난감을 하나 만드는 것도 뭔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혼자 연구해서 만들려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비로소 완성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중요한 것은 인생은 더욱더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한 길이기 때문에 혼자 생각하고 연구하고 경험하여 개척하며 가려면 너무나 어렵고 너무나 많은 오류와 착오를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너무나 고차원적이고 변화무쌍하고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는 인생의 문제를 온전하게 풀어낼 방정식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분들은 목사님, 왜 불가능합니까? 왜 혼자 연구하고 혼자 생각하는 길입니까? 우리 선인들이 오랜 세월의 경험을 통해서 생각하고 연구해서 만들어 놓은 매뉴얼이 있지 않느냐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우리 선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그들이 알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길을 나름대로 연구해 만든 매뉴얼이기 때문에 물론 그 중에 옳은 것도 많지만 그러나 왜곡되고 잘못된 것도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인생의 완전한 매뉴얼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완전한 매뉴얼은 무엇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대하여 말씀하신 성경 말씀뿐입니다. 오직 거기에 우리 인생이 무엇인지, 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궁극적인 목적지가 어디인지 완벽하게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매뉴얼인 성경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길만이 유일하게 완전히 안전한 길이고 가장 쉬운 길이고 완전하게 옳은 길이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은 인간 자체가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기 때문에 결코 완전한 매뉴얼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한번도 가보지도 않은 길이고 알지도 못하는 길인데 자꾸 혼자 이리저리 연구하며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너무나 큰 시행착오와 낭패를 경험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영원한 고통 속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그런 딱한 처지에 이르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안타깝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아니 도대체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인생이 어떻게 인생의 완벽한 매뉴얼을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매뉴얼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마다하고 자꾸 알지도 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일에 대하여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실패를 경험하고 고통을 맛보고 생명의 기쁨은커녕 멸망 길로 가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아니 이미 하나님께서 다 가르쳐 주신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로 가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에이, 목사님. 하나님이 정해주신 매뉴얼대로 사는 게 어떻게 쉽습니까?’하실지 모르지만 그러면 그게 쉽지 않으면 무엇이 쉽습니까? 알지도 못하는 길을 혼자 개척하며 연구하며 가는 게 쉽습니까? 혼자서 온갖 유혹과 어둠의 세력과 상황과 환경과 세상의 거센 풍파와 맞서 싸우며 사는 게 쉽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신 길을,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능력과 지혜로 모든 어둠의 세력들과 약한 것과 도전과 유혹과 시험을 이기며 가는 길이 쉽습니까? 전혀 모르는 길을 혼자 찾아가는 게 쉽습니까? 안내자를 따라 가는 게 쉽습니까?

 


여러분, 신30:11절과 14절 말씀 보십시오. 11절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4절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보세요. 이 말씀은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 저 미국이나 러시아라도 가야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바로 우리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말씀을 따라가는데 억만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피땀 흘리며 뼈 빠지게 일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머리 싸매고 골머리를 앓으며 연구해야 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농사짓는 게 쉽습니까? 하나님 믿는 게 쉽습니까? 세가 빠지게 일하는 게 쉽습니까?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게 쉽습니까? 아니 얼마나 쉽고 평안하고 좋습니까? 그냥 교회에 와서 평안히 앉아서 말씀 듣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얼마나 쉽습니까? 하나님이 그렇다 그러면 네, 하나님 알겠습니다. 그러고 그냥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하나님께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지혜와 평안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놀라운 은총가운데 살게 하십니다. 세상에 이 쉽고 이 좋은 것을 왜 안하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자신이 알지도 가보지도 못한 길을 자꾸 혼자서 자기 마음대로 어렵게 가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길, 예수님이 우리의 인도자가 되셔서 이끌고 가시는 그 길을 그냥 예수님만 졸졸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완전한 매뉴얼인 성경을 따라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가운데 생명의 길, 복의 길로 잘 달려가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자기 지혜를 의지하면 실패합니다.

 


오늘본문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보게 되는데요,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을 만난 후에 정말 자신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갔던 사람 바울이 한 때 실패를 경험한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며 그 실패를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보지는 않았지만 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여러분, 보세요. 바울이 약하고 두려워하고 떨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심히 떨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누굽니까? 그는 빌립보에서 죽지 않을 만큼 맞고 쇠사슬에 묶여 감옥에 갇혀서도 찬송하고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귀신을 쫓아내고, 그의 몸에서 앞치마나 손수건을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서 떨어져 죽자 기도하여 살게 한 사람입니다.

 


이런 천하의 바울이 약하고 두려하고 심히 떨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아덴에서의 실패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오기 전에 아덴에서 자신의 지식과 지혜로 사람들을 설복시키려다가 실패했던 것입니다. 아테네는 헬라제국의 수도로서 당시 철학, 문화, 학문, 종교,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으나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도 있을 만큼 우상이 득실거리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바울은 의분이 일어나 너희가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생각하는 그가 누구인지 알려 주겠다면서 그게 바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 역설하며 철학적 지식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설복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덴 사람들은 그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말쟁이인가보다 하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관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크게 낙담하여 그곳을 포기하고 고린도로 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실패하고 낙심하고 좌절했던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이성과 지혜를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 2절에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즉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바울은 아테네에서 자기 이성과 지혜를 의지했다가 철저히 실패하고 그곳을 떠나 고린도로 오면서 다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절대로 내 꼴 난 지혜를 의지하지 않으리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증거하리라. 그리고 고린도에서는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과 부활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쟁이처럼 오직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결국 고린도에서 성공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을 구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참된 지식이나 능력은 결코 인간의 지식과 지혜와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신의 그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 앞에 엎드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그 도를 따라 살아갈 때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진정한 지혜와 능력 가운데 생명의 길로 달려가며 인간의 모든 문제를 이기고 생명의 기쁨을 누리는 진정한 능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령 세상이 아무리 외적으로 좋아진다해도 인생의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여러분, 보세요. 오늘날 세상은 불과 10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습니다. 과학이나 문화나 교육이나 소득 수준이나 모두 백배 천배는 올라갔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물론 가난과 질병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해결된 문제보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백배 천배 많습니다. 못먹고 못살던 옛날이나 잘먹고 잘사는 지금이나 병들고 늙고 죽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죄악은 오히려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빼앗고 사기치고 강도짓하고 간음하고 살인하고 성폭력을 저지르로 하는 일들은 더욱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이만큼 잘 살게 되었으면 좀 감사하며 살만도 한데 힘들어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극심한 이기주의와 물질주의로 말미암아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툭하면 싸우려고 대들고 폭언과 독설을 퍼붓고 투쟁을 하곤 합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아무리 과학과 문화와 지식이 발달하여 혹 물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좀더 풍요로워진다해도 그런 걸 가지고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도리어 그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고 더욱 죄의 길로 달려감으로 말미암아 더욱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지식과 지혜와 과학과 물질문명에 내 인생을 맡기면 안 됩니다. 세상의 지식과 과학과 물질문명이 좀 발전했다고 그것 의지하고 바라보고 그런 관점에서 살아간다면 세상에서도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결국 영원한 멸망길로 갈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게 참된 능력이요 지혜요, 그런 사람들이 여기서도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5절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믿음은 인간의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꼴난 인간의 이성과 지혜와 경험으로 요리조리 백날 생각해봐야 참 생명의 도는 알 수 없다. 그저 우리의 약함과 무지와 부족함과 허물과 죄를 인정하고, 그저 순진한 아이처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러면 주의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그러면 영광의 나라를 알게 되고 그럴 때 생명의 능력이 넘쳐나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별 것 아닌 지식과 이성과 경험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런 거 내려놓으십시오.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인생이 백날 연구하고 따져보고 해봤자 그야말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맨날 거기가 거깁니다. 알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알고 이해하면 그게 이상한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하나님같이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죄와 무지와 한계를 인정하고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는 것뿐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그리스도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 예수님 안에 영광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그냥 어린애처럼 받아들이고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확실히 믿게 하십니다. 그러면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쳐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순종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복음을 순진하게 받아들이고 따라가면 복음에는 생명이 있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분명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4절을 보십시오. “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인간의 이성이나 능력이나 지혜나 이런 다 집어 치우고 그냥 단순무식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에 성령께서 역사하셨고, 성령이 역사하시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앞에 순진한 사람이 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분명 은혜의 사람, 능력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지식을 신뢰하고 그걸 따라가는 사람은 너 잘났으니 네 맘대로 해봐라 하면서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길은 요원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진정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며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순진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험한 풍랑 일어나는 바다위로 걸어오라고 하자 풍덩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물위를 걸어서 주님을 향하여 걸어갔습니다. 주님의 말씀이니까, 주님이 지켜 주실 것을 믿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물위로 뛰어내렸고 그리고 실제로 물위를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가다가 험한 풍랑 일어나는 바다를 보자 그만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러나 인간적으로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하였고 그러자 능력을 잃어버리고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어땠습니까? 하인이 병이 들자 예수님을 찾아가자 예수님이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자 그저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하고 말합니다. 주님이 수고스럽게 저희 집까지 가실 일이 뭐있습니까? 그냥 말씀 한마디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이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하시자 그 즉시 하인의 병이 낫지 않았습니까?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대어도 낫겠다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졌을 때 병이 나았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침으로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른 다음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지시를 받고 그대로 하자 눈이 떠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니까 순진하게 드리자 하나님께서 이삭도 살려주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순진하게 골리앗을 향해 돌진하여 결국 승리하였습니다. 나아만장군은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까 문둥병이 떠났습니다.

 

여러분, 믿음에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우리가 정말 우리 자신을 안다면 모든 면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안다고 하는 순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본다고 하는 순간 아무것도 못 보는 진짜 소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41)고 하십니다. 그들은 성경과 천국과 하나님에 대하여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못 보는 소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부족하고 연약하고 미련함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더라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참된 생명과 진리를 알게 되련마는 그 꼴난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이성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여 결국은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소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순진하게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내 지혜나 이성이나 감정이나 경험을 일단 다 내려놓고 주님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뭐가 어떠니 저떠니 이야기하지 말고 그저 겸손하게 엎드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다시 오실 예수님을 믿고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향해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겸손하고 순진한 마음으로 예배드리고 설교 듣고 찬양하고 기도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성령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기고 더욱 은혜와 능력과 기쁨이 충만한 복된 삶이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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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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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낮 설교] 주일낮예배설교 Sunday worship preaching

 

 


말씀 : 창22:9~14

제목 : 믿음과 순종과 축복

1.믿음과 순종과 축복

믿음이 있는 곳에 순종이 있고, 순종이 있는 곳에 축복이 있다. 여러분, 맞는 말입니까? 예, 맞는 말입니다. 안 그래요? 믿음이 있으면 순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있고말고요. 아니 믿는데 순종이 없을 수 있습니까? 안 그래요? 좋으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데 어찌 순종이 없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또 순종이 있는 곳에 축복이 있다. 이것도 마찬가지잖아요. 순종하는 복이 안 오면 그게 이상한 거지요.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데 어찌 복이 없겠습니까? 여러분, 신28:2절 보세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하시면서 오만가지 복을 다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잖아요. 여러분, 하나님이 뭐 허튼소리 하시는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실로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지금 여기서고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브라함인데요, 오늘 말씀은 여러분이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어떻습니까? 귀가 따갑도록 들었는데 잘 됩니까? 잘 안되지요. 왜요?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실상은 그래봤자 얼마나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요? 이 이야기 들어봤자 몇 번 들었습니까? 한 백번 들었을까요? 그런데 세상에서 정치이야기, 경제이야기,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는 몇 번 쯤 들었을까요? 한 천 번 들었을까요? 만 번도 더 들었을걸요. 그러니까 믿음 안에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는 아무리 많이 해도 세상에서 먹고 입고 잠자고 놀고 하는 이야기의 백분의 일, 천분의 일도 못 듣고 못 보는 거예요. 그러니 잘 안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하지요. 그러면 안 되는 게 당연하다고 가만히 있을 겁니까? 아니죠. 그러므로 더욱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하지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기독교적 가치관이 확립되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땅의 기름진 축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인간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다 읽어드리지 못했지만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삼아 각을 뜨고, 불에 태워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인신제사는 우상숭배자들이 하는 악습으로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삭은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무려 25년 만에 달랑 하나 주신 약속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장차 큰 민족을 이루고 주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삭을 잡아 불에 태워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말이나 되느냐 말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일까?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자녀가 아닌가? 그것도 아이를 도저히 낳을 수 없는 100세나 되어서 기적적으로 주신 아들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큰 민족을 이루려면 오히려 더 많은 자식을 주셔야 하는데 겨우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불에 태워 인신제사로 드리라니 내가 늙어서 헛소리를 들었나? 망령이라도 들었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고 말도 안되는 명령에 순종합니다. 왜요? 그게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분명 말도 안되지만 분명 뭔가 하나님의 섭리와 뜻과 계획이 있을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의 이성으로 다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우리 보다 높고 깊어서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이성과 경험과 능력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성적으로 이해가 됩니까? 예수께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다. 경험적으로 납득이 갑니까? 저 영원한 천국, 이것이 인간의 논리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이성과 과학과 논리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그런 것들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해가 되든 말든 납득이 되든 말든 순종할 것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만약 조금이라도 이성이나 논리를 가지고 생각했더라면 절대로 이삭을 바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인신제사를 드리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명령을 내리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내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티끌과 같이 많게 해주시겠다고 해놓고 25년 만에 겨우 아들 하나 주어놓고 그걸 도로 달라고 하십니까? 하면서 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자신의 모든 생각들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인 것입니다. 이해가 가든 안가든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와 무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높으심과 인도하심과 선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언제나 내 뜻과 이성과 경험과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잠3:5,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해가 되든 말든, 세상의 가치와 같든 다르든, 내 경험과 맞든 안 맞든, 손해가 되든 유익이 되든, 내 생각과 관계없이 인정하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 모든 생각과 경험과 환경을 떠나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오직 온전한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신 예수님의 뜻에 온전히 순복하십시오. 그저 갓난아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그때에 분명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2.온전한 순종

여러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말씀에 순종합니다. 창22:3,4절 보세요.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여러분, 이 말씀을 보십시오. 그는 아침 일찍 떠났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솔직히 무언가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임을 믿었지만 밤새도록 얼마나 고민을 했겠습니까?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아들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는데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날이 밝자마다 곧장 시행에 들어간 것입니다. 아내 사라에게 말도 없이 떠났습니다. 아내에게 말했다가 보나마나 이 양반이 나이가 들더니 드디어 망령이 들었냐고 하면서 핀잔만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아내에게 말도 하지 않고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자신도 시간을 지체하다간 아들을 번제로 드릴 자신이 없었기에 마음 변하기 전에, 마귀가 틈타기 전에 떠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즉시 시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시행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일을 뒤로 미루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계속 나중에 나중에 그럽니다. 이것만 해 놓고, 저것만 해결하고...... 나중에 생활이 안정되면, 나중에 시간 나면, 나중에 할 일 없어지면... 그러나 여러분, 지금 못하는 사람이 나중에 여유 생기면 할 수 있을 것 같죠? 그런 사람은 99%는 여유생기면 놀러 다닙니다. 여유돈 있으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쓰게 됩니다. 설령 나중에 한다 해도 지금 못한 것은 죽을 때까지 아니 천국에 가서 까지 못한 것으로 계속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마귀가 장난칩니다. 마음이 변하기 쉽습니다. 방해꾼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길을 떠나 사흘 동안 걸어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걸어갑니다. 여러분, 그 사흘길을 걸어오는 동안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래서 길을 떠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외아들을 자기 손으로 잡아 불에 태워서 번제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마음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발걸음은 재촉합니다. 이삭을 잡아 번제로 드릴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그는 묵묵히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 지시한 산 밑에 이르러 종들을 거기 머물라고 하면서 번제에 쓸 나무를 아들의 등에 지우고, 자기는 칼과 불을 들고 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때 이삭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번제를 드리려면 제물이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제물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나무와 불은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이 말을 듣는 순간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뜨끔했겠습니까? 차마 ‘네가 바로 번제물이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단다. 나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하나님께서 너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단다. 그러니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구나.’ 차마 이렇게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비해 주실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묵묵히 산에 올라 드디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도착하게 되고, 아브라함은 번제를 드릴 준비를 합니다. 장작을 쌓아 올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제물을 잡아서 각을 떠서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태워야 할 차례였습니다. 그 번제물은 다름 아닌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하나님께서 너를 번제로 드리라는구나. 내가 너를 대신해서 번제가 될 수만 있다면,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그러나 내가 아닌 너를 요구하시는구나.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 그러니 순종해야지.’ 하면서 아들을 결박합니다. 그 운명의 순간에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아픔이 몰려 왔습니다. 그러나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아들을 붙잡아 결박하고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죽이려고 눈을 감고 칼을 높이 들어 올렸습니다.

여러분, 그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결박하는 아버지의 심정. 아들을 장작더미위에 올려 놓고 칼을 높이 들어 올린 아버지의 심정,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이삭, 그것도 하나 밖에 없었던 아들 이삭,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결박 당할수만 있다면.... 내가 너를 대신하여 번제물이 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불 태워 질수만 있다면.... 이런 마음으로 이삭 대신 자신이 번제물이 되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요구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이삭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무슨 선한 뜻이 있을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니 거역할 수 없었기에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속에서 도저히 눈뜨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눈을 감고 아들을 향해 칼을 내리치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게 순종입니다. 내 생각과 달라도, 도저히 이해가 안가도, 있을 수 없는 일을 시켜도 그냥 따르는 것이 순종입니다. 아무리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라도 하나님이 필요로 하신다면 그냥 드리는 것이 순종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순종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의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믿음이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며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믿습니까? 주님의 선하심을 믿습니까? 구원자이심을 믿습니까?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상황이 이래요. 형편이 이래요. 저래요. 이래서 곤란해요. 저래서 곤란해요. 그럼 내가 손해봐요. 웃음거리 돼요. 주일날 하루 쉬면 손해가 얼만지 아세요? 아니 이 귀한 걸 달라고요? 그럼 난 어떻게 살라고요? 여러분, 이런 거 다 버리세요. 그냥 믿고 따르세요. 순종하세요. 그게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에게 주님의 한량없는 은총이 임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순종하는 자에게 임할 복

여러분, 그렇습니다. 순종이 곧 온전한 믿음이기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이 임합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내리치려고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창22:11,12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던 하나님께서 도리어 다급하게 아브라함을 제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너 정말로 이삭을 잡으려는 것이냐? 내가 정말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받기를 원하는지 아니냐? 아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네 믿음을 보고 싶었단다. 이제 충분하다. 그 믿음이면 충분하다. 너는 정녕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 자격이 있다. 그러니 이삭을 풀어주고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양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아들을 풀어주고 옆에 뿔이 나무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는 양을 가져다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삭이 아닌 양으로 제사를 모두 마쳤을 때 다시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22:16,1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요구했던 것은 이삭이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순종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빼앗아가려고 했겠습니까? 왜 말도 안되는 인신제사를 드리라고 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셨고 그 믿음과 순종이 있는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은총을 그렇게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순종하게 되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순종이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곧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하나님의 나의 주인이라는 종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종이 주인에게 따질 수 있습니까? 우매 자가 지혜 자에게 따질 수 있습니까?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왜 그래야 하느냐고 따질 수 있습니까? 죄인이 구세주에게 이러니저러니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믿음과 순종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요, 진정 주님만이 생명의 주님이시오, 구원자시오, 주권자라는 믿음이 있다면 순종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이 곧 믿음이요,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게 복이 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러한 순종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아도, 현실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달라고 하셔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결코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종하실 때에 좋으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의 모든 생각 지식 경험 이성 가치관 나 내려놓고 순종하심으로 주님께서 채워 주시는 영육간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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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Sunday worship preaching

주일낮예배설교 마음을 옥토로 만듭시다
 
 

 


말씀 : 마13:3-9

제목 : 마음을 옥토로 만듭시다

1.풍성한 열매의 관건은 밭입니다.

농사를 지어서 풍성한 수확을 얻으려면 여러 가지 구비 조건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밭이 가장 중요하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아무리 품종이 좋고 기후나 기술이 좋아도 토질이 형편없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농부가 농사를 지으려면 밭을 갈아 부드럽게 하고, 돌멩이를 골라내고, 퇴비도 넣고 토양 소독도 하면서 밭을 장만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밭이 깨끗하고 진실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워야 인생의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려면 우리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인간의 심령이 너무 왜곡되어 있어서 복음이라는 너무 귀하고 복된 생명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해졌는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귀한 생명의 말씀을 아예 받아들이지도 않고,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마저도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든지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상황속에 있습니다.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나라와 동시에 이 땅에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화와 소망을 주는 복음의 씨앗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의 밭에 뿌려 졌고 또 얼마든지 그것을 믿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릴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거부하고, 어떤 이는 겨우 받아들이긴 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거나 심지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생명의 열매를 맺으며 그 은총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무엇이 문제입니까? 왜 같은 생명의 씨앗이 들어갔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거부당하고, 어떤 사람은 조금 자라다가 말라죽고, 어떤 사람에게는 근근이 목숨만 부지하고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는 것입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이 문제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이 완고하고 단단하게 굳어져 있거나 돌밭과 같이 얄팍하거나 세상의 온갖 잡초들로 무성하여 복음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지 못하여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능력을 본 사람들 중에도 어떤 이는 복음을 받아들였고, 어떤 이는 복음을 거부하였다는 사실에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은 감히 세상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지혜와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엄청난 능력으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군중들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능력을 본 사람들 중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시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과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생명의 복음을 받아들여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지만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자기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이성대로 살아가는 완고하고 어리석은 자는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겨우 받아들인다해도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마음의 밭을 잘 다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것으로 인해 단단해지고, 세상의 온갖 잡초로 가득하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이성을 의지하려는 완고하고 교만한 마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깨트리고 부드럽고 깨끗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이 옥토가 되어 생명의 말씀이 싹이 트고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마음의 밭을 옥토로 만들 수 있습니까?

2.단단히 굳어진 마음을 깨트려야 합니다.(3,4절)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옥토로 만들려면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과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묵상하며 깨어 기도함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심령속에 들어있는 단단하게 굳어진 것들을 깨트려 버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속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먼저 3,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이 말씀은 비유의 말씀으로 씨를 뿌리는 자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씨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고, 밭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길가란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인간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해졌건만 사람들의 마음이 세상에 태어나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로 완전히 굳어져 있어서 생명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의 심령은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으로 너무나 단단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은 대부분 물질적으로 많고 좋은 것을 누리며 높은 자리에 올라가 대접받으며 육체적 물질적으로 평안하고 부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위하여 기를 쓰고 공부하고 일하고 힘쓰고 애쓰며 거의 대부분의 시간과 정열을 거기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육체적 물질적 사고로 심령이 완전히 굳어질 수 밖에 없고, 그러한 물질적 사고로 심령이 굳어지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명의 말씀에는 아예 관심도 없고,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도 못함으로 이를 거부하고 영원한 멸망의 길로 치달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나마 복음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마저도 아직도 그 심령 속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물질적 육체적 가치관으로 인하여 말씀 따라 가지 않고 세상을 따라 감으로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단단하게 굳어진 심령을 깨트려 부드럽게 하고 생명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존재인지,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이성과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너무나 왜곡되게 굳어진 옛자아가 깨트려 주심으로 진리를 향해 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성령이 역사하시고 성령이 역사하시면 그 동안 살아오면서 단단하게 굳어진 왜곡된 가치관들이 깨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심령 속에서 말씀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서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어 그야말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찌 하든지 정말 겸손한 마음으로 더욱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며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죄인이요 어리석은 자요 완고한 인생임을 고백하고 기도하며 성령의 역사하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충만하게 임함으로 세상의 것으로 굳어져 있던 마음이 활짝 열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온전히 심겨지고 그래서 그 말씀이 여러분 심령 속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그 은총을 충만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말씀이 심령 속에 깊이 뿌리 내려야 합니다.(5,6절)

그렇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 마음이 옥토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온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깊이 뿌리 내리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5,6절을 보십시오.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여기서 돌밭은 돌이 많은 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위 위에 약간 흙이 덮여있는 밭을 말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싹이 텄으나 가뭄이 들자 땅속의 습기를 공급받지 못함으로 금방 말라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심령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령에 말씀의 씨가 겨우 들어가긴 했는데 그 마음속이 아직도 세상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물질주의와 인본주의적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어서 말씀이 그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주님 안에 있는 진정한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고 세상의 복이나 기쁨이나 평안을 위해서 다니고, 그래서 뭔가 믿는 흉내를 내기는 내는데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만 실족하여 넘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10년 20년 30년 교회에 다녔다고 하면서 아직도 세상의 가치관으로 굳어진 심령이 깨지지 않음으로 그저 세상 기쁨이나 평안이나 위로나 복을 위해서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별일 없이 웃고 떠들고 재미있게 교제할 때는 그 재미로 교회에 다닙니다. 또 뭔가 어려움이 없고 일이 잘 되면 좋다고 교회에 다니고 어떤 때는 은혜를 받은 것처럼 눈물 흘리며 기도하기도 하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교인과 뭔가 관계가 틀어지고 뭔가 좀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만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뭔가 좀 자기에게 서운하게 대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알아주지 않는 것처럼 여기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나도 왕년에 세례를 받았다, 성가대를 했다, 교사를 했다고 하면서 교회에 안 나오는 분들도 많습니다. 여러분, 그건 그냥 교회에 왔다갔다 한 것이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속된 말로 때려 죽여도 교회에 안 나올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생명의 주를 만났는데, 천국과 지옥을 아는데 어떻게 교회를 안 나올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다름 아니라 마음이 돌밭이라 그렇습니다. 말씀을 받기는 받았는데 그 심령 속에 아직도 인간적인 생각과 가치관과 경험과 이성이 바위처럼 굳어 있어서 그냥 인간적인 생각으로 교회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교회생활하면 안됩니다. 정말 나 자신을 깨트려 부수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고, 오직 그 말씀만이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걸 알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냥 인간적으로 사랑하고 돕고 위로하는 것은 직장이나 마을이나 동호회나 계모임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도 사랑도 나눌 수 있고 서로 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단순히 인간적으로 교제하는 곳이 아닙니다.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래서 이 땅에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다가 무엇보다도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한 진리이고 이것을 아는 사람은 죽어도 교회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교회생활하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조금 어려움이 오고 일이 잘 안 풀리면 그만 졸업해 버립니다. 교회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조금 서운하게 하면 그만둡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우리 심령 속에 바위처럼 굳어져 있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지식의 단단한 것들을 주님의 능력으로 깨트려 버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인간적인 기쁨이나 평안이나 욕구 충족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며, 오직 말씀안에서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살다보면 인간적인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사랑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심령속에 굳어진 왜곡된 생각들을 하루속히 버리고 오직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권능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먼저는 나 자신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마음속의 잡초를 뽑아버려야 합니다.(7절)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들로 완고하게 굳어져 있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그 다음에는 마귀 사탄이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뿌려놓는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아무리 마음의 밭을 부드럽게 해도 온갖 못된 잡초들이 무성하면 생명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7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말씀을 겨우 받아들이긴 했는데 그래서 뭔가 자라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만 마음속에 세상의 온갖 잡동사니 같은 것들로 가득차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밭을 아무리 부드럽게 하고 퇴비를 넣고 씨앗을 뿌려도 잡초가 무성하면 어떻게 좋은 열매를 맺겠습니까?

여러분, 인간의 마음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심령에는 너무나 많은 잡초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 근심과 걱정이 잡초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향락과 즐거움이 잡초가 됩니다. 어떤 이는 원망과 불평과 미움과 욕심이 잡초입니다. 어떤 이는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잡초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잡초는 얼마나 질기고 강하고 잘 자라는지 모습니다. 밭에 곡식의 씨앗을 뿌려 놓으면 잡초가 먼저 납니다. 조금만 방치하면 잡초가 곡식을 완전히 덮어 버려 곡식은 약해져 죽거나 겨우 살아남아도 열매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 인간 심령도 그렇습니다. 마귀가 얼마나 강렬하게 역사하는지 조금만 방심하면 온갖 왜곡되고 추하고 부정적이고 악하고 불신앙적인 것들이 우리 심령을 차지해 버립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와 영광과 향락과 원망과 불평과 증오와 미움과 같은 잡초들이 말씀을 덮어 버립니다. 그래서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걸 제거하고 이겨야 합니다. 이걸 이기는 방법도 다른 게 없습니다.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덧입어 마귀가 잡초의 씨앗을 뿌리지 못하게 하고 자라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아니 완전히 뿌리째 뽑아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의 말씀이 무럭무럭 자라나서 생명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음으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8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고 말씀으로 채우고 잡초들을 제거하면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고 그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 심령속에 있는 세상의 온갖 잡다한 것들을 제거하고 진정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 사랑의 말씀이 무럭무럭 자라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되고 귀하고 영광스럽겠습니까? 얼마나 자신의 삶이 윤택하고 부요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주겠습니까? 주님은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이러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뿌리박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의 밭에 있는 모든 잡초들을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진정 주님의 인도하심과 성령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오직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생명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면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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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축복받는 새해


 

 

주일낮설교 / 생명의말씀  


말씀 : 잠3:1~10

제목 : 축복받는 새해

지하철에서 어떤 아저씨가 칫솔을 팔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안녕 하십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너무 좋은 물건 하나 소개해 드리려고 여러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물건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게 뭡니까? 칫솔입니다. 왜 가지고 나왔습니까? 물론 팔려고 가지고 나왔습니다.

자, 칫솔이 이렇게 다섯 개가 한 묶음으로 되어있습니다. 얼마일 것 같습니까? 단돈 천원입니다. 뒤에 보면 made in korea라고 쓰여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수출품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수출이 잘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망했습니다. 잘 되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요.

자, 어쨌든 백문이 불여일견, 하나씩 드릴테니 찬찬히 구경해 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몇 분이나 사실까요? 저도 모릅니다. 잠시 후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 네. 점잖은 신사 분 한분이 구입하셨습니다. 더 구입하실 분 안 계십니까? 네, 많은 분들이 저를 믿지 못하고 망설이고 계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만 팔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몇 개를 팔았습니까? 네, 한 개입니다. 그럼 제가 얼마를 벌었습니까? 1,000원입니다. 아니 원가를 빼면 300원 벌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실망했을까요? 네, 아주 많이 실망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여기서 포기할까요? 아닙니다. 저는 다음 칸으로 갑니다. 남은 하루도 즐거운 시간 되시고 안녕히 가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다음 칸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멋있는 아저씨입니까? 비록 지하철에서 칫솔을 팔고 있지만, 비록 수입은 많지 않지만 얼마나 여유가 있고, 얼마나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입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혹시 실망할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다음 칸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새롭게 밝아온 새해에는 혹시 좀 실망스럽고 힘든 일이 있다해도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희망과 긍정 속에 한 해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주님 말씀따라 한걸음 한걸음 앞을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분명히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한해가 될 줄로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복된 한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한해를 정말 은혜가 충만한 시간들로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혜가운데 살려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그러나 긍정의 생각이라고 내 마음대로, 세상 가치관대로의 긍정은 안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긍정하는 것이 올바른 긍정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죄와 어둠 가운데 있고 하나님은 빛이시오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긍정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을 긍정하는 것이 뭐냐,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수1:8절을 보십시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보십시오. 말씀을 묵상하라. 지키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할 것이라. 형통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모든 생명과 축복과 평강과 위로와 기쁨의 근원자이십니다. 모든 우주만물과 그 질서와 규칙과 규범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우주만물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모든 우주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당연히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따라가면 그 인생이 생명과 진리와 은혜로 충만해 질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빛이신 하나님, 생명이신 하나님을 따라가면 빛의 은혜, 생명의 은혜를 누릴 것이요, 어둠과 사망에 속한 마귀 사탄을 따라가면 어둠과 사망의 그늘 속에 살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죄와 어둠속에 있는 너무나 많은 인생들이 자기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마귀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인생의 참된 생명의 양식이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가져다주는 유일한 규범이며, 규칙이며, 가이드라인이며, 사용설명서인 성경을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도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룰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해서 인간이 스스로 만든 룰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오직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이 정해주신 룰만이 하나님께 통하는 길이며 그것만이 인간의 생명을 보장하고 풍성케 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직 성경만이 인간의 삶에 유일하게 완전한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유일한 규칙이요, 규범이요, 가이드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생의 영과 육과 정신에 관한 유일하고 완전한 규범은 오직 성경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천지창조 때부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알고 인간 존재에 대하여, 인간이 살아가야 할 올바른 길에 대하여 규칙을 정할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우주와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올바른 정보를 가지고 모든 인생은 이러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실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우주안의 그 어떤 존재도 우주와 인간과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다 알지도 못하고 권한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제시할 수 없고, 모든 우주의 질서를 정할 수도 없고, 규범을 만들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룰을 바르게 알고 그 가이드라인을 따라, 그 설명서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이드라인으로 삼아 육신을 사용하고 시간을 사용하고 물질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새롭게 밝아온 이 새해에는 오직 우리 인생의 유일하고 완전한 규범이며 등불이이며 가이드라인이며 사용설명서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한해 동안도 말씀이 여러분을 지키고 인도함으로 말미암아 말씀 안에 있는 생명과 기쁨과 평강과 은혜와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님의 은총이 풍성한 삶을 살려면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따라 살게 되고, 그러면 당연히 그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6절 말씀 보십시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러분, 이 말씀에서 특별히 범사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범사, 즉 모든 일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릴 때만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밥 먹을 때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직장에서 일을 할 때로 인정하고, 장사를 할 때도 인정하고, 공부할 때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잘되고, 건강하고, 형통하고, 축복받을 때도 인정하고, 잘 안되고, 건강하지 못하고, 불통해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만나도, 불만스러운 일이 있어도, 이해 못할 일이 벌어져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시간과 장소와 환경과 상황을 불문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생명과 지혜와 능력과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나 내게 주어진 시간이나 물질이나 재능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고 그러면 반드시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인정하면 어찌 예배와 찬송과 기도에 열심을 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어찌 내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며, 나아가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하나님과 나 자신과 이웃을 위하여 바르게 사용하며 살아갈 때에 어찌 그 인생이 별처럼 빛나지 않겠습니까? 그 인생이 어찌 아름답고 복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여러분,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음을 믿고 그저 하나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 할뿐입니다.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도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내 할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와같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정말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갈 때에 그 인생이 어찌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움과 은혜를 인정하고 예배드리고 찬송드리고 기도하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우리의 육신이나 정신이나 물질이나 시간이나 모든 것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사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어렵고 힘들고 이해가 안되고 억울한 일을 만나도 그저 하나님께 맡기며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존중히 여김을 받으며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가득한 이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하나님의 지혜를 따라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그 은혜를 누리려면 하나님의 지혜는 나보다 천배 만배 억배 더 크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오늘 7절 말씀 보십시오. “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자기가 똑똑한 것처럼 생각하며 제 고집대로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다고 내 놓을만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비록 피조물들 중에서는 제법 지혜롭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우리 인생이 아는 게 얼마나 됩니까? 우리가 경험한 것이 얼마나 됩니까? 배웠으면 얼마나 배웠습니까? 알면 얼마나 압니까?

욥이 고난을 당했을 때 욥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너무 답답해서 따져 묻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했습니다. 나는 정말 나름대로 선하고 의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왜 나에게 이런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오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악한데도 잘 먹고 잘 사는데 난 정말 억울하다고 하소연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내게 대답하라. 네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거기 있었느냐, 바닷물이 넘치게 하였느냐, 네가 아침이 오게 하였느냐, 네가 별들을 매어 묶을 수 있느냐, 네가 눈과 비를 내리었느냐,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네 가슴속의 지혜는 누가 주었느냐, 네가 염소의 새끼를 낳을 때를 아느냐,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러자 욥은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욥42: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렸고,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욥을 고난에서 건져주시고 다시금 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인품이 좋고 선하고 잘나도 하나님 앞에서 지혜를 자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처럼 여기고, 하나님앞에서 의로운 것처럼 여기는 인생은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마귀사탄에게 철저히 속고 있는 사람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솔직히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 우주 공간속에서, 천지가 창조되고 영원한 세계로 나아가는 길까지, 영원한 세상이 지속되는 그 모든 일에 대하여 아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자신의 한계와 무지와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자신과 세상의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지혜와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더욱 풍성히 누리는 이 복된 새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4.하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려면 진실로 하나님을 공경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9절 말씀 보세요.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보십시오. 네 재물과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제일 먼저,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아가서 십일조를 비롯한 모든 감사예물을 드릴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여호와를 인정하는 일이요, 바르게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게다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는데, 게다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야말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일에 사용되는 것인데,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이 유일하게 하늘 곳간에 쌓는 일인데 하나님을 믿고 인정하고 공경한다면 어찌 하나님께 먼저 드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무엇인가 힘써 노력해서 얻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야, 말합니다. ‘너, 정말 수고 많았다. 너 정말 대단하다. 이제는 좀 쉬면서 먹고 마시고 놀자.’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부모님이 날 낳아 주시고 열심히 키워 주신 덕분이라며 부모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곁에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던 친구나 선배나 기타 다른 사람에게 공을 돌리며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면 우리도 여전히 인본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육신으로 물질로 시간으로 하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었다해도 근본적으로나 실제적으로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터전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생명과 육체과 지혜와 능력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는 재료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햇빛과 비와 공기와 토지를 주셔서 그 안에서 활동하며 살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제일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제일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간도 물질도 재능도 다른 모든 것도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공경할 때 그 믿음과 신실함을 보시고 더욱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0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오늘 이 귀한 말씀들을 기억하며 올 한해 동안도 정말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결코 자신이나 세상의 지혜를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유일한 규범이며 잣대이며 안내자인 하나님의 말씀의 안내를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과 물질과 육신을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창고가 가득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은총과 귀중이 여김을 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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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설교 / 성령을 받아라

 

 


제목 : 성령을 받아라

말씀 : 행19:1-7


1.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유명한 지도자 가운데 지금 천국에 가 계신 고 이중표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의 설교의 주제는 별세 신앙이었습니다. 별세 신앙이란 말 그대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로서 더 이상 내 생각과 고집과 이성과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한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 속에 살면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이런 유명한 목사님이 된 데는 어떤 계기가 있었는데 그는 한국교회를 위해서 크게 사용되는 종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유명한 목사님들을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 때 한가지 발견한 것이 유명한 목사님들은 대부분 낙동강이나 대동강이나 두만강이나 큰 강변에서 자랐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경직, 김창인, 박조준, 김선도, 곽선희 목사님은 대동강 물을 마시며 자랐고, 김재준, 강원용목사님은 두만강 물을 마시며 자랐고, 이종성, 이상근 목사님은 낙동강 물을 마시며 자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한국교회 유명한 목사님들은 다 큰 강물을 먹고 살아서 저렇게 훌륭한 목사님들이 되었는데 저는 이 전라도의 작은 강 만경강물을 먹고 자라서 이렇게 키도 작고 능력도 부족합니다. 그래도 저도 한국교회를 위하여 큰 일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종아, 걱정 말아라. 압록강이 크면 얼마나 크겠느냐? 낙동강이 길면 얼마나 길겠느냐? 너는 압록강이나 낙동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큰 생명의 강물을 듬뿍 마시거라. 그러면 큰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은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성령의 생수를 듬뿍 마셔서 결국 한국교회의 유명한 목사님 중의 한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물론 세상의 조건도 인생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욱 인생을 좌우하는 것은 생명의 강물을 마셨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생명의 강물을 마셔도 적게 마셨느냐 많이 마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강물을 마신 자는 물론 그 영혼이 살아나고 정신이 살아나고 가치관이 살아나고 능력이 살아납니다. 적게 마신 자는 겨우 살아나고 많이 마신 자는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수 강물을 마시지 못한 자는 그 영혼이 죽어있음으로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의 은총과 능력가운데 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2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여러분, 여기서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은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보고 던진 질문입니다. 누구에게 던진 질문이라고요? 제자들에게.... 그러면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령을 받아야 예수님 믿을 수 있는데 그러면 제자라면 예수님 믿는다는 것이고 그러면 당연히 성령을 받았어야 하는 건데 왜 새삼스럽게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했지만 진정으로 믿은 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을 받아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그래서 자신이 죽고 거듭나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로서 거기에 걸맞은 생각과 가치관과 삶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하고 그냥 종교적으로 인간적으로 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교회 생활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정말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뭐 말할 것도 없이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즉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즉 이성과 지성과 마음으로 훌륭하고 능력 있고 선하시고 우리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는 분이라는 그런 종교적 차원의 고백이 아니라 정말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다가 부활하시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신 유일한 구세주가 되심을 분명하게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내 자아와 고집과 이성과 가치관이 깨져야 하는데 그러려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전히 거듭난 존재로 주님과 동행함으로 온전한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세상의 다른 좋은 것들도 얻기를 힘쓰기 전에 먼저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성령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받되 충만하게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자신의 죄와 무지를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님 믿고 거듭난 생명으로 영광의 나라를 누리는 것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써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은 왜 받아야 합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면 왜 성령을 받아야 합니까? 물론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고 그래서 비로소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길은 오직 성령을 받는 길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잖아요. 죄와 무지와 어둠과 한계 속에 있는 인생이 우주만물과 인간과 영원한 세계에 대하여 어떻게 압니까? 누구에게서 배워 압니까? 어떻게 연구해서 압니까? 설령 죄와 무지가운데 있지 않더라도 인간의 지혜는 정말 작은 것으로 그것으로는 죽음 이후의 세계는 말할 것도 없이 이 세상 우주만물과 생로병사에 대하여도 알 수도 없고 어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잘나고 유식해도 하나님과 인생과 우주만물을 바르게 알려면 오직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배우기 위해서 물론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그 말씀을 듣고 깨닫고 믿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함으로 말씀을 들어도 이해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동시에 우리 심령 속에 깨달음과 믿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야 비로소 하나님과 인생과 우주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하여 알고 깨닫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2:10절을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또 요14:26절을 보십시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즉 성령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시는 분이시오, 동시에 그것을 가르쳐 주시고 깨닫고 믿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야만 비로소 하나님을 알고 믿고 구원받고 능력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곧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고, 그래서 제자들은 그 말씀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에 힘쓰다가 성령 충만함을 받아 사명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특별히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오직 성령을 받아야 우리 영혼이 살고 그래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걸 기억한다면 인간의 그 작은 생각과 경험과 지식을 다 내려놓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과 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지금 여기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감사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성령은 어떻게 받습니까?

여러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 충만함을 받습니까?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성령의 임재를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오직 성령을 받아야 새 생명을 얻고 생명의 은혜와 능력 가운데 산다는 것을 인정하고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령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임재하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어떤 가정을 방문하고 싶은데 그 집에서 여러분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면 갈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그래도 억지로 갔는데 반가워하기는커녕 시큰둥하게 여기고 귀찮게 여기면 그 집에 오래 머물겠습니까?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의 오심을 정말 다른 무엇보다도 반가워하고 간절히 기다리고 사모하고 함께 하는 것을 기뻐하고 하는 그 영혼 속에 찾아 가시고 거기 오래 머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07:9절에서는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죽어라고 세상의 별것 아닌 것을 사모하며 그것에 온 정열을 바치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말고 정말 우리에게 완전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강과 위로를 주시는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하여 그 은혜를 충만하게 덧입기 위하여 열심히 주님 앞에 자신을 세움으로 생명의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릴 때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 심령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리 애타게 기다려도 심령이 더러워져 있으면 성령께서 찾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만약 귀한 손님을 초청해 놓고는 씻지도 않고 더러운 옷을 입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방에는 쓰레기가 잔뜩 쌓여있어서 냄새가 풀풀 나고 한다면 귀한 손님이 와서 그 집에 들어갈 마음이 나겠습니까?

성령님도 그렇습니다. 우리 심령이 불신과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원망과 불평과 분노와 음란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 등의 온갖 악하고 추하고 냄새나는 것들로 차 있으면 성령님이 찾아오시지도 않고 설령 찾아 오신다해도 금방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임재를 사모한다면 정말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하며 깨끗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아름답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님이 기쁘시게 찾아오시고, 계속적으로 함께 하시면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24:3,4절에서는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의 다른 무엇보다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평안과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동시에 우리 심령을 거룩하고 의롭고 깨끗하고 정직하고 아름답게 함으로 성령께서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속에 기쁨으로 찾아가심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성령 충만하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 그러면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기본적으로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알게 되고 인생을 알게 되고 그래서 주님을 믿고 거듭나 새 생명을 얻음으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그러나 물론 그렇게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 그대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당연히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도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의의 길로 잘 달려가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상태를 비유적으로 말하면 마치 술에 취한 사람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물론 결과가 비슷하다는 것이 아니고, 아니 결과는 반대인데 원리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술 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용감해 집니다. 전에 있던 교회 사택에 바로 아랫집에 술주정뱅이 아저씨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은 술을 안 먹었을 때는 말도 안하고 누구한테 해로운 소리 한마디 못하는 색시 같은 양반인데 술에 취하면 돌변합니다. 부인한테 행패를 부리고, 동네방네 다니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때로는 사택 앞에 와서 혼자서 막 소리를 질러댑니다. 그러면 우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술취한 사람 상대해봐야 나만 손해니까요. 그러면 혼자 소리지르다가 제풀에 꺾여 돌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술 때문에 감각이 무뎌져 겁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술 취하면 죄를 짓는데도 용감해 집니다. 아무나 붙잡고 시비를 걸고 싸우고 음란한 짓을 합니다.

성령에 취해도 그렇습니다. 물론 술 취하면 나쁘게 용감하지만 성령에 취하면 진리 안에서 용감해 집니다. 마귀사탄 따위가 두렵지 않습니다. 가난도 멸시도 환난과 핍박도 심지어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사도들은 유대관원들이 또 다시 예수를 전하면 잡아 가두겠다고 위협해도 하나님 말씀 듣는 것과 너희 말 듣는 것과 어느 것이 옳으냐면서 용감하게 예수님을 전했고,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순교를 당하면서도 예수님을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여러분, 술에 취하면 말이 많아집니다. 취중진담이라는 말이 있듯이 술취하면 평소에는 못하던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하고, 또한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면서 진절머리 나게 붙들고 이야기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도 그렇습니다. 물론 쓸데없고 추한 말이 많아지는 게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말이 많아집니다. 말씀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소망을 주느라고 말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술에 취하면 감각이 무뎌져서 힘든 일들을 조금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진짜로 근심걱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각이 무디어져서 아픔을 잘 느끼지 못함으로 누리는 일시적이고 결과적으로 더 큰 아픔을 초래하는 왜곡된 평안입니다. 그래서 술이 깨면 더 괴롭고 후회스럽고 수치감만 느끼게 됩니다. 더구나 그런 과정에서 온갖 죄와 악 속에 빠지게 되고, 자기 몸 다 망가뜨리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돈을 악을 사용하는,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무시당하고 멸시받는 미련하고 악한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취하면 진짜로 세상 근심 걱정 염려 원망 불평이 없어지게 됩니다. 생명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의 영이신 성령께서 평강과 위로와 기쁨을 주시기 때문에 진정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게 됨으로 모든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5:22,23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래서 또 엡5:1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헛된 것에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에 취해야 합니다. 여러분, 요즘에 보면 심지어 교회 안에서 조차도 술 먹는 것을 정당화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순전히 마귀 사탄의 역사에 놀아나는 일입니다. 여러분, 좀전에 말씀드린 엡5:18절에서 술취한 것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방탕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잠23:31,32절을 보십시오.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또 같은 잠23:20절을 보십시오.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 술을 즐겨하는 자들과 사귀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나실인 즉 하나님 앞에 구별된 사람은 독주는 물론 포도주나 심지어 포도나무 소산도 먹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뭐 그밖에 술이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윤리적으로 가정적으로 얼마나 큰 폐해를 가져다주는지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도 먹고 서양교회에서도 먹는데 하면서 괜찮은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면 남들이 도둑질하면 같이 도둑질 할 건가요? 여러분, 우리는 세상이 다 그래도 심지어 교회가 다 그래도 오직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말씀만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오직 거기에만이 진정한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강과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특별히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즐거움이나 그 어떤 다른 것을 사모함보다도 성령의 임재하심을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더욱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고 깨어 기도하며 말씀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심령을 깨끗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우리 교회 위에 성령이 충만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거룩하고 의로운 삶으로 주님의 향기를 발하며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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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진정한 소망

  
 


 
제목 : 진정한 소망

본문 : 딤전6:17~19

1.진정한 소망

여러분,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정말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기대하며 사십니까? 부자 되는 것, 자식이 출세하는 것,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그것도 기대하고 그것을 위해서도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렇게 되면 무슨 뾰죽한 수가 생길까요?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고 날마다 싱글벙글하며 살아갈까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가보면 똑같아요. 뭐 많이 배우고 돈많고 출세하고 건강하면 맨날 좋아 죽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똑같이 걱정하고 불안하고 염려하고 싸우고 갈등하고 지지고 볶고 삽니다. 그래서 뭐 전직 대통령, 전직 총리, 장관, 재벌 총수, 무슨 팝의 황제니 골프의 황제니 하며 불리던 사람들이나 유명 연예인이나 할 것 없이 자살도 하고 잡혀 가기도 하고 가정불화도 겪고 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의 것은 죽을 둥 살둥 달려가서 얻었다고 하는 순간 이미 멀어지기 시작해요. 세상의 것으로 누리려는 행복은 잡았다고 하는 순간 저만치 날아가서 날 잡아봐라 하면서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좇아 다니다가 결국 인생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도 모르고 세상 것 좇아 다니다가 죽는다면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하고 비참한 인생이 되겠어요.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기대하고 기다리고 힘써 나아가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하고 그래서 우리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만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희망이요, 소망입니다. 주님안에 만이 진정한 생명과 평화와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는 이세상에서도 모든 상황을 초월해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안과 은혜가 있으며, 더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보장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완전하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영광과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대한 기대와 소망속에서 사는 자들만이 완전히 후회없는 성공한 인생이 됩니다.

오늘 17절 말씀 보세요.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무엇에 소망을 두지 말라.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무엇을 소망을 두라? 하나님께 두라.

왜요? 재물은 정함이 없으니까. 정함이 없다는 게 뭡니까? 정해져 있는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즉 불확실하다는 거지요.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는 거라는 거지요. 내께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무슨 소리냐 영원토록 내꺼다. 실컷 쓰고 누리고 살다가 죽으면 그게 내꺼지 누구꺼냐 그럴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생명도 돈도 내일을 장담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설령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어도 결국 놓고 가야하고 그거만 믿고 산 인생이라면 결국 영원한 고통 밖에는 남아 있을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소망은 다릅니다. 주님께 있는 소망은 완전하고 영원하고 온전합니다. 영원하고 완전한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평안을 주십니다. 그것만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19절 보세요.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이것이 뭡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선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좋은 터를 쌓는 것이고,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생명이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단순한 육체적 생명이 아닙니다. 영적, 정신적, 육체적 생명을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완전한 생명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뜻을 따라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쌓는 지혜로운 인생이다, 그런 인생속에 영원한 생명의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정함이 없는 재물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세상의 즐거움을 기대와 기다림과 소망으로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유일한 참 소망이신 주님을 소망께 대한 소망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결코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세상에서도 평안과 기쁨을 누리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2.선한 사업에 부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소망이 다른 사람은 삶의 목적도 다르고 삶의 방향도 다릅니다. 돈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삶의 목적이 돈을 모으는 것입니다. 세상 즐거움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그저 먹고 마시고 노는 일에 사용합니다. 그저 부자되고 건강하게 잘먹고 잘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그저 돈이나 모으고 제 몸 하나 잘 입히고 잘 먹이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세상의 것을 목적으로 삼지도 않고 거기에 얽매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를 준비하며 삽니다. 그래서 돈을 버는 목적도 다르고, 돈과 시간과 재능과 육신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돈과 지식과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는 목적이 다릅니다.

그게 뭡니까?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나 혼자 잘먹고 잘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고 그래서 결국 주님과 나와 이웃이 함께 기뻐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삶이 이생에서나 저생에서나 가장 복되고 기쁘고 아름답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깊이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솔직히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게 무슨 그렇게 의미가 있겠어요? 돈이든 시간이든 재능이든 권력이든 지식이든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게 무슨 큰 가치를 만들어 내겠어요? 그렇게 해서 자신이 무엇이 그렇게 크게 즐겁겠어요? 여러분, 좋은 것은 함께 나눠야 더 좋아지고 더 많은 가치가 있는 거예요.

자 여기 맛있는 음식이 있어요. 저 혼자 독차지하고 앉아서 먹으면 무슨 맛이 그렇게 있어요? 여럿이 같이 먹으면 얼마나 더 맛이 있어요. 너무 너무 좋은 일이 있어요. 혼자 히죽히죽 웃으며 좋아하는 것보다 모든 사람이 함께 웃고 축하해주고 기쁨을 함께 나누면 얼마나 더 기뻐요? 호화판 유람선이 있어요. 저 혼자 타고 다니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함께 타고 다니며 서로 웃고 즐거워하면 얼마나 더 기쁘겠어요? 좋은 집이 있어요. 저 혼자살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함께 살 때 즐거운 거지요.

여러분, 사람은 원래 관계적인 존재예요. 가족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존재하는 거예요. 본래 그런 존재로 지음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절대 혼자 행복할 수 없어요. 혼자 배터지게 먹고 혼자 대궐 같은 집에서 살고 혼자 좋은 입고 하면서 행복할 수 없어요. 그러면서 행복하다면 그 인생은 죽은 인생이요, 병든 인생이요, 죄와 무지의 종이 된 인생이예요. 결국 영원한 지옥속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이예요.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자기만을 위해서 살면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18절 말씀 보세요.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선한 일이란 포괄적으로 좋은 일을 말합니다. 가난한 자를 돕고, 병든 자와 갇힌 자를 돌아보고, 절망속에 있는 자를 위로하는 등 모든 어렵고 고통받는 이웃을 돌아보는 것을 말합니다. 선한 사업에 부하라는 것은 그런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인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한 일들을 위하여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사용하는데 인색하지 말고 넉넉히 드리라는 것입니다. 나눠주기를 좋아하라는 것은 억지로 마지못해 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런 일들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들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된 인생의 올바른 가치관입니다.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19절에 있습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생명을 취하는 길이다.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나눌 때 그것이 결국은 자기 생명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택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지 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라는 뜻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너도 살고 나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너도 기쁘고 나도 기쁘고 주님도 기쁘고 결국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말 자기 혼자 잘먹고 잘사는 거 그거 별거 아닙니다. 그런 삶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안과 은혜도 없고요, 있다 해도 별거 아닙니다. 그런 삶은 죄와 무지속에 있는 인생의 모습이요, 영적, 정신적, 인격적, 체적 미숙아의 삶입니다.

여러분, 갓난아기 보세요. 갓난아기는 남을 모릅니다. 그냥 자기밖에 모르죠. 남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성장하여 성인이 되면 남을 배려하게 됩니다.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적, 인격적, 영적으로 자꾸 자라나야 합니다. 자라나서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이웃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여러분, 지금은 대강절 기간입니다.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 속에 기쁨으로 거하시도록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심령속에 기쁨으로 거하시겠습니까? 어떤 심령속에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주님께서 기쁘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자는 부자가 아닙니다. 권력자가 아닙니다. 지식인이 아닙니다. 단순히 윤리적으로 깨끗한 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죄와 무지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거기에 욕심을 두지 않고, 거기에 얽매이지도 않고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심령으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기쁨으로 오십니다.

또한 그렇게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그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자에게 기쁨으로 찾아 오셔서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평강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목적인 것입니다. 대강절은 바로 그런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기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세상의 별거 아닌 돈과 명예와 지식을 바라보며 거기에 소망을 두고 거기에 얽매이는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소망이요, 나의 기쁨이며 영원한 생명의 은총과 더불어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메시야라는 점을 기억하며 그저 겸손히 엎드려 그 분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정말로 주님을 기대하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산다면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살피고 이웃을 돌아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어지 모든 것들을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여러분 심령속에 가득하여 주님과 이웃을 기쁘게 해드리며 여러분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축복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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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성숙한 그리스도인

 

 

 

말씀 : 고전2:14-3:3

제목 : 성숙한 그리스도인

프란시스 베이컨이라는 사람은 사람을 다음과 같은 세 부류로 구분을 했습니다. 첫째는 거미 같은 인생입니다. 거미는 거미줄로 집을 지어놓고 거기에 걸려드는 것을 잡아먹는 곤충입니다. 그러므로 거미같은 인생이란 덫을 놓고 남의 등이나 쳐먹고 살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개미 같은 인생이라고 하였습니다. 개미는 부지런한 곤충으로 사람들에게 매우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개미같은 인생이란 긍정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이것은 남에게는 줄줄 모르고 그저 자신만을 위해서 모아 들이는 이기적인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꿀벌 같은 인생입니다. 꿀벌은 물론 꿀벌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열심히 모아서 남에게 다 줍니다. 심지어는 요즘에는 자기 생명을 받쳐 벌침으로 사람들을 고쳐주기도 줍니다. 그래서 꿀벌 같은 인생이란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서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는 어떤 모습을 지향해야 하는지는 제가 말씀드리지 여러분들께서 더 잘 아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러한 세상적인 관점에서의 세종류의 인간상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의 세종류의 인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는 육에 속한 사람이요, 다음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요, 그 다음은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에 대하여 말씀을 나눌 때에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을 향하여 좀더 달려감으로 주의 생명의 은총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1.육에 속한 사람

오늘 본문에 보면 먼저 육에 속한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14절을 보십시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이란 yucikov"(프쉬키코스)인데 이는 육적인, 천성적인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혼에 속한 사람, 즉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여 죄와 무지를 그대로 가지고 죄된 육신의 소욕대로, 죄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따라서 육에 속한 사람은 영이 죽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인생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영과 육과 혼을 가진 존재로 지음 받았는데 죄로 말미암아 영이 죽음으로 육과 혼도 죄와 어둠속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이것을 회복시켜야 영혼을 살려야 하는데 성령을 받지 못하여 영이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성령의 일을 거부합니다. 깨닫지도 못합니다.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도리어 믿는 일을 미련하고 어리석고 연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좀전의 14절 말씀 다시 보세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성령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 거지요. 복음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미련하고 황당하다고 여깁니다. 그런게 어디있느냐며 도리어 생명에 속한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고 핍박하고 해요. 당연하지요. 인간의 죽은 영혼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진리를 알고, 성령의 일을 아는데 그들에게는 성령이 없으니 다만 미련할 뿐이요, 어리석게 여겨질 뿐인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는 진리를 알고, 주님을 알고, 생명의 길을 아는데 성령이 없으니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거지요. 영이 죽어 있어서 성령을 체험할 수가 없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에 대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전혀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죄된 육과 혼의 요구대로 삽니다. 육과 혼의 본능을 따라, 타락한 본성을 따라 사는 거 뿐이예요. 비록 정신적으로 나름대로 고상한 가치를 추구한다해도 그러나 육은 육이고, 혼은 혼일 뿐이예요. 결국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살다가 죄의 심판을 받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죄된 육신의 본능을 따라 사는 삶은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죄된 육신의 본성을 따라 사는 인생은 결코 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설령 세상에서 좀 고상하고 선하고 가치있는 삶을 산다해도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만에 하나 육과 정신이 최상의 가치를 드러내며 산다고 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지옥의 고통을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은 한분도 절대로 이 편에 서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편에 서 있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동원해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천만다행으로 단순히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육신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과 유사해서 좀 혼돈이 됩니다만 성경에서는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오늘 3:1절의 말씀의 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하노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세요. 특별히 후반절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그 말씀이요. 고린도 교인중에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에 대하여 바울은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거예요? 밖에 있다는 거예요? 안에 있다는 거지요. 안에 있긴 있는데 어린아이같은 자들, 성숙하지 못해서 어린아이 같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들어오긴 했는데 아직은 육체적인 삶을 다 벗어던지지 못한 사람, 영보다 육의 지배를 더 많이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럴 수 있습니다. 자, 보세요. 남자가 20세가 되면 군에 입대합니다. 입대하자마자 군인은 군인입니다. 그런데 군인으로서의 모습은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군인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데 아직 군인 노릇을 잘 못합니다.

사람이 태어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는 태어나면서 사람입니다. 아니 엄마 뱃속에 잉태할 때부터 사람입니다. 그러나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 구실 제대로 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젖을 먹고 이유식을 하고 밥을 먹고 학교에 다니고 오래 기간 훈련과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도 사람구실 제대로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영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바로 육신에 속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들어오긴 했지만 아직 어린아이라서 주님의 모습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어린아이들처럼 대하며 젖을 먹였던 것입니다.

2절이지요.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린도 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너무나 어린아이와 같아서 차마 밥을 먹이지 못하고 젖을 먹였다는 것입니다. 밥을 먹이면 체 할 것 같아서, 단단한 밥을 먹이면 배탈이 날 것 같아 못 먹이고 계속 젖을 먹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 곁의 성도들이 좀 부족하고 연약해도 너무 타박하지 마세요. 그럴 수 있느냐고 몰아세우지 마세요. 그럴 수 있습니다. 뭐 솔직히 다 도토리 키재기 아니겠습니까? 내가 성숙했으면 얼마나 성숙했겠어요. 내가 믿음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우리 서로 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 많은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며 감싸주고 덮어주고 격려해주고 위로해 주고 기도해 주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젖은 무엇이고, 밥은 무엇입니까? 젖은 부드럽고 넘기기 쉽고 영양가가 많은 음식입니다. 밥은 무엇입니까? 단단합니다. 그냥 안 넘어 갑니다. 씹어야 합니다. 자기가 침으로 삭혀서 넘겨야 합니다. 거친 것도 있고, 쓴 것도 있습니다. 맵고 짜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도 젖과 밥이 있습니다. 젖은 부드럽고 달콤한 말씀들, 소화가 잘되는 말씀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주님이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등의 주로 은혜에 관한 말씀들입니다. 밥은 단단하고 넘기기 힘들고 소화가 잘 안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주로 책망이나 헌신의 요구에 대한 말씀들입니다. 이런 말씀은 씁니다. 소화가 잘 안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 배탈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목사의 고민이 깊어집니다. 성도들에게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할까? 어떤 양식을 먹일까? 어떤 분에게는 부드럽고 달콤하고 술술 넘어가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에게는 단단하고 거칠고 맵고 쓴 말씀도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아직도 어린아이이고, 어떤 분은 한참 일할 나이이고, 어떤 분은 이미 노년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어떤 말씀은 어떤 분에게는 고단백 영양분이 될 수 있지만 어떤 분은 먹고 배탈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 큰 어른들에게 매일 젖만 먹일 수도 없습니다. 또 단단한 음식만 먹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고민을 하며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달콤한 말씀만 바라지 말고 혹 쓴 말씀이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혹은 너무 초보적인 말씀을 한다고 그거 다 아는 건데 라고 생각하지 말고 믿음으로 아멘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는 이 말씀에서 큰 위로와 격려를 받게 됩니다. 정말 부족하고 연약하더라도, 아직도 세상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해도 주님을 시인한다면 우리는 비록 어린아이이긴 하지만 주님의 자녀라는 것 때문입니다. 천만다행히도 주님께서는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의 모습도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여러분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된 모습이 많더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나는 구원받았다는 그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삶이 더욱 생동감이 있고, 활력이 넘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육신에 속한 사람, 즉 영적 어린아이와 같은 삶은 물론 구원을 받긴 했지만 우리가 머물러 있어야 할 위치는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성장하여 자신의 몫을 감당하고, 그러는 가운데 더욱 은혜와 기쁨과 감격을 누리며 주의 역사를 펼쳐 가기를 원합니다. 거기가 바로 우리가 있어야 할 위치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인 영에 속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2:15절 보세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여기서 ‘신령한 자’가 바로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말그대로 육과 혼의 지배보다는 영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사람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이런 사람들이라고 100% 영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육과 혼의 지배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100% 신령하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영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을 정확하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구분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육 보다는 영에 더 많이 지배를 받는 사람은 신령한 사람이요, 영의 지배를 받긴 받지만 아직은 영보다는 육과 혼의 원리에 더 많이 좌우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사람 즉 아직 성숙하지 못한 크리스찬이 아닐까하고 말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어떻게 삽니까? 오늘 15, 16절을 보세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먼저 15절 보면 아주 신나는 말씀이 있어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대요. 이게 무슨 말씀이예요? 나는 남을 마음대로 판단하지만 남에게는 절대 판단 받지 않는다는 말이예요? 아닙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신령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사람은 남에게 판단 받을 만한 일을 잘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때문에 주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향해 힘써 달려가기 때문에 남에게 정죄받고 비난받을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는 진정한 자유가 있다는 거예요.

16절절 보세요.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잘못하면 주님을 가르친다는 말처럼 들을 수도 있는데 그게 아니라 주님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준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죽어가는 영혼을 바라보며, 또 아직도 미성숙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영혼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사람이란 주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기에 남에게 판단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에 주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따라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생명을 살리는 일에 열심히 참여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으면 약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임은 맞습니다.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거기에 머무를 수만은 없습니다. 계속해서 아기로 남아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쫄병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젖만 먹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밥을 먹여줄수는 없지 않습니까? 계속해서 보살핌을 받고 있을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그 자신에게는 기쁨과 감격과 은혜와 생명력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먼저 정말 여러분이 육에 속한 사람, 즉 성령을 배제한 채 그저 육신의 본능을 따라 사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 때문에 무엇보다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만에 하나 아직도 그저 육신의 본능만을 따라 살고 있다면 속히 영에 속한 사람 쪽으로 자리를 옮기시기 바랍니다.

혹시 아직도 온전히 영에 속한 사람이 되지 못하여 육신에 속한 사람 즉 믿음의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에 속했다해도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한 단계 더 나아가 영에 속한 사람으로써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 갈 때에 기쁨과 은혜와 생명력이 넘치는 풍성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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