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설교 : 요셉이 감옥으로 간 까닭 (고난이 우리 삶에 끝이 아님)
요셉이 감옥으로 간 까닭은?
< 본문 - 창세기 39:19-23 >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영화가 있습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제목의 영화입니다. 우연히 산새 한 마리를 죽이게 된 동승(童僧)이 성불(成佛)에 이르기 위해서 겪어나가는 고뇌의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1989년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열린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인 금표범상을 비롯하여 국제기자협회상 등 4개의 특별상을 받았습니다.
영화의 제목에서 보여준 것처럼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달마(達磨)는 남인도 향지국(香至國)의 세 번째 왕자로, 대승불교의 승려가 되어 6세기에 중국에 와서 선종(禪宗)을 창시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달마가 고향 인도를 떠나 동쪽 중국으로 먼 길을 간 까닭은 제자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제자 하나를 만나겠다는 열망 때문에 고향을 떠나 수 천리의 먼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에서는 달마처럼 먼 길을 가던 동승이 노중에 겪었던 고뇌와 갈등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모든 여정에는 그 나름대로의 뜻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때로는 불필요하고 때로는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과정이라 하더라도 다 나름대로의 뜻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고난과 역경의 길에도 그 나름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오늘의 고난이 우리 삶에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3-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또 로마서 8:18절에서도 말씀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는 이 말씀의 진리를 믿기에 때로 어려움을 당해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당하는 환난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역경이나 환난이 그것으로 끝이라고 한다면 그 어려움 가운데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게 끝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당한 환난이나 고난을 이겨내면 우리에게 더 큰 영광과 기쁨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죽음이라는 인생 최고의 두려움 앞에서도 우리 신앙인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더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인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신앙의 선조들보다 더 성실하고 본받을만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실하게 살았던 요셉이 누구보다도 큰 시련과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당한 그 고난은 그 어느 것 하나 의미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야곱은 4명의 아내로부터 12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습니다. 그 중에서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은 요셉과 베냐민 단 두 명뿐입니다. 라헬은 야곱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지만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11번째 아들로 요셉을 낳게 되었고, 마지막 베냐민을 낳다가 죽고 맙니다. 그래서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남달리 사랑했습니다. 특히 라헬이 첫 번째 낳은 아들 요셉은 아버지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 때문에 요셉은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고 결국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요셉은 어린 나이에 노예가 되어 이국 땅으로 팔려가고 말았습니다.
당시 노예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참했습니다. 노예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주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주인이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릴 수도 있고, 심지어는 죽일 수도 있습니다. 노예의 목숨은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파리 목숨’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죽도록 일만해야 했습니다. 일을 잘 했다고 칭찬받는 것도 아닙니다. 죽도록 일한 후에 늙으면 버려지는 것이 노예의 일생이었습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서 처음 일하게 된 곳이 애굽 왕 바로의 친위대장이던 보디발의 집이었습니다. 보디발은 당시 굉장한 권력자였습니다. ‘바로의 친위대장’이라는 그의 직책이 말해 주듯이, 그는 바로로부터 특별한 신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친위대장이라는 말은 요즘으로 하면 대통령 경호실장입니다.
그런 보디발의 집에서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실하게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보디발의 신임을 받게 되고, 어린 나이에 보디발의 집 가정 총무까지 맡게 됩니다. 가정 총무의 자리는 당시 노예가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였습니다. 보디발의 집 모든 살림살이를 주관하는 위치였습니다.
노예로서 그렇게 잘 나가던 요셉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쳐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젊고 잘 생기고 똑똑하기까지 한 요셉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단호하게 그런 유혹을 거절합니다. 한번은 집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또 유혹했습니다. 요셉의 옷을 붙잡고 동침하자고 유혹했습니다. 이것은 유혹이 아니라 주인으로서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유혹이든 주인의 명령이든 간에 요셉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유혹과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집요한 주인아주머니의 손에서 빠져나오느라고 요셉은 자신의 옷을 벗어버리고 도망쳐 나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되었습니다. 요셉을 유혹하는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보디발의 아내는 오히려 요셉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버립니다. 요셉이 벗어버리고 간 옷을 증거물로 삼아 남편 보디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종 요셉이란 놈이 나에게 못된 짓을 하려고 하다가 내가 소리를 지르니까 이 옷을 벗어놓고 도망갔습니다.’ 물론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그것 때문에 결국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요셉은 참으로 기구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형들로부터 미움을 사서 이국땅으로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가장 고통스런 삶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예생활이 좀 풀려지는 듯싶더니만, 이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더 처절한 삶의 자리로 곤두박질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요셉과 같은 처지에 놓였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온 것도 억울한데, 이제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것 때문에, 믿음을 지키겠다는 것 때문에 그는 더욱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한 말이나 행동 때문에 오히려 고통을 당하고, 오히려 손해를 본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믿음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나 손해가 적은 것이라면 그저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당한 일은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예가 된다는 것도 엄청난 것이었고, 감옥에 갇히는 것 역시 곧 죽음을 의미할 정도로 아주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저는 하나님께 불평했을 것입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고 원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살았는데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고 하나님께 불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노예로 팔려갔을 때에도, 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나 요셉이 보인 삶의 자세는 한결같았습니다. 그는 어디에서나 성실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는 주인 보디발이 그를 신임하고 집안 모든 살림살이를 그에게 맡길 만큼 성실했고, 감옥에서도 간수장이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다 관리할 수 있도록 제반 사무를 다 요셉에게 맡길 정도로 그는 신실했습니다.
요셉이 그런 비참한 삶 속에서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찾아와도 묵묵하게 참고 이겨냅니다. 지금의 고통과 역경이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과정 없이 성공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통의 순간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꿈이 있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유명한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들, 그리고 우리가 성공했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 가운데 힘들지 않게 그 자리에 올라온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숨이 턱 밑에까지 차오르는 고통의 순간을 참고 이겨낸 선수만이 승리의 메달을 목에 걸 수 있습니다. 고된 훈련의 과정이 없었다면 영광과 환희의 순간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힘들 때 끝까지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마지막에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1등의 꿈을 꿉니다. 그러나 그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고통을 참아내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꿈을 포기해버립니다. 그래서 그 꿈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꿈이 분명한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니 포기할 수 없습니다. 꿈이 숱한 고난과 역경, 좌절과 슬픔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꿈을 이루어내게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꿈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떤 꿈을 갖고 계십니까? 오늘의 고통과 역경보다 훨씬 큰 꿈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고통과 역경을 참고 견디며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움 앞에서 불평하고 자신의 처지를 원망한다면 그건 우리의 꿈이 우리가 당한 어려움보다 작기 때문입니다. 꿈을 잃어버렸거나 꿈이 작으면 어려움 앞에서 좌절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역경을 이겨낼 힘이 내게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노예로 팔려간 요셉에게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꾸게 하신 바로 그 꿈입니다. 형들뿐만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도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크게 쓰실 것이란 꿈을 늘 가슴에 안고 살았습니다. 그 꿈이 너무너무 힘들 때에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꿈을 이룰 때까지는 어떤 어려움이나 힘든 상황에 내몰린다 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인 노예로 전락했을지라도, 또 감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는 원망이나 불평으로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야 할 굼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꿈을 주십니다. 인생의 꿈뿐만이 아니라 신앙의 꿈을 주십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나를 통해서 이루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꿈이 있습니다. 나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하나님의 꿈입니다. 때로는 그 꿈을 우리가 알지 못한 채 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그 꿈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마지막에 쟁취하고 얻게 될 영원한 꿈이 있습니다. 천국이라는 꿈 말입니다. 그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그 꿈을 꼭 붙잡아야 합니다. 그 꿈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어떤 역경과 고통의 순간이 와도 이길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그 꿈이 우리를 하여금 담대하게 만들어줍니다. 그 꿈이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해 줍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갔을 때에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에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늘 자신에게 꿈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의 눈길을 보내오고 자신과 동침하라고 명령을 내려도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라고 말하면서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짓은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믿음 때문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그런 믿음 때문에 또한 노예생활과 감옥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교회에 다니면 절대로 어려움이 없다.’거나 ‘믿음으로 살면 언제나 좋은 일만 일어난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십시다. 요셉은 믿음을 따라 살려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요셉만이 아닙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진 믿음 때문에 고난을 겪기도 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온갖 박해를 견뎌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믿음 때문에 죽음의 길을 가야 했던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길을 갔습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할 신앙의 길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다. 믿음을 지키다가 당하는 고난이나 역경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믿음입니다. 아니 우리의 삶에 닥친 그 어떤 어려움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 믿음뿐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어떤 어려움을 당하든지, 또 어떤 역경이나 고난이 우리를 힘들게 하든지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십시다. 힘들다고 믿음을 버리거나 고통스럽다고 믿음의 자리를 떠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을 이기는 것이 믿음인데, 믿음을 버린다면 무엇으로 그 어려움과 시련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우리에게 승리를 줍니다. 믿음이 우리 앞에 당한 고난과 어려움을 재해석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일어설 수 있게 해 줍니다.
요셉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주인아주머니의 유혹과 부당한 명령 앞에서도 ‘지금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지금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데 내가 어찌 그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수 있겠느냐’고 말하고,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감옥에 가는 것도 두렵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감옥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본문 20-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또 23절에서도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며 지켜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특히 어려운 일을 만나면 내 주위에 아부도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더욱 힘이 듭니다. 심지어 기도를 해도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신 것처럼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아무 것도 안 하고 계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왔을 때에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창세기 39:2절에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라고 말씀합니다. 요셉이 노예생활할 때 하나님께서 늘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은 늘 요셉과 함께하셨습니다. 요셉은 그것을 믿었고, 그것 때문에 요셉은 범죄에 빠지지 않고 성실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도 이 믿음을 가지십시다. 내가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일수록 하나님은 더욱 우리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 믿음으로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고, 힘들 때 내 손을 꼭 붙잡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이끌림 받으며 사십시다. 우리가 내민 손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요셉의 그 믿음이 그의 길을 형통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읽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23절 마지막에서 말씀하고 있는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똑같은 말씀이 39:2-3절에도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여러분, 형통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것이 형통한 것입니까?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찬송가 384장)고 찬송합니다. 그렇다면 만사형통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흔히 별 어려움이 없이 내가 계획한대로 잘 되어가면 형통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이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평안하게 잘 진행되고 있으면 형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계획한대로 잘 이루어져 가고 있으면 형통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사형통하리라”고 찬송할 때도 그런 의미의 형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한 삶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는 대로 되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 계획이나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바대로 되어가는 것이 형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간 것도 형통한 길이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것도 형통한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왜 자신이 노예로 팔려오게 되었는지, 왜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지를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 그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세기 45:5-8)
요셉은 자신이 노예로 팔려왔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꿈을 이루시기 위해서 자신을 먼저 여기로 보내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옥에 갇히는 것도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꿈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과정을 거치게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바로 형통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기 위해서 그 과정을 거치게 하시는 것이기에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을 만나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었고, 불평 대신에 찬송과 감사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셉이 형들에 의해 팔려 애굽 땅으로 오지 않았다면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그는 바로 왕 앞에 설 수 없었습니다. 감옥에 와서 바로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바로 왕 앞에 설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요셉의 가족들은 7년의 흉년 가운데서 굶어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당신이 뜻하신 바를 이루어가셨고, 결국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의 약속들을 이루어가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총무의 일을 하게 된 것이나 감옥에서 제반 사무를 보게 되었던 것이 나중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국정을 운영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언제 어디에서 행정경험을 쌓을 수 있겠습니까? 보디발의 가정총무와 감옥에서의 제반 사무를 보던 것이 큰 경험이 되어서 국무총리의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내고 보면 우리의 삶에 그냥 되어지는 것도 없고, 의미 없이 경험되는 것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섭리의 과정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내가 지금 어려운 가운데 있다고 생각된다면 지금 내가 겪는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로 인도하실 것인가를 기대하시고, 그 어려움을 잘 이겨나가면 나중에 그 경험이 내 인생에 아주 중요하게 쓰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37-50장까지 기록된 요셉의 이야기 가운데 특이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요셉의 삶에는 어떤 특별한 기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가진 것 외에, 그 어떤 기적을 행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어떤 기적이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요셉의 위대한 모습은 계속된 고난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단 한 번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고,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셉에게 있는 꿈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요셉이 가진 믿음 우리도 가질 수 있습니다. 요셉이 가졌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 우리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꿈과 믿음과 확신을 회복하셔서 그것을 더욱 굳게 붙잡고 사십시다. 그러면 요셉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오늘 우리를 통해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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