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주일낮예배설교:축복받는 새해

 

 

 


주일낮설교

 

말씀 : 잠3:1~10

제목 : 축복받는 새해

지하철에서 어떤 아저씨가 칫솔을 팔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안녕 하십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너무 좋은 물건 하나 소개해 드리려고 여러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물건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게 뭡니까? 칫솔입니다. 왜 가지고 나왔습니까? 물론 팔려고 가지고 나왔습니다.

자, 칫솔이 이렇게 다섯 개가 한 묶음으로 되어있습니다. 얼마일 것 같습니까? 단돈 천원입니다. 뒤에 보면 made in korea라고 쓰여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수출품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수출이 잘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망했습니다. 잘 되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요.

자, 어쨌든 백문이 불여일견, 하나씩 드릴테니 찬찬히 구경해 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몇 분이나 사실까요? 저도 모릅니다. 잠시 후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 네. 점잖은 신사 분 한분이 구입하셨습니다. 더 구입하실 분 안 계십니까? 네, 많은 분들이 저를 믿지 못하고 망설이고 계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만 팔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몇 개를 팔았습니까? 네, 한 개입니다. 그럼 제가 얼마를 벌었습니까? 1,000원입니다. 아니 원가를 빼면 300원 벌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실망했을까요? 네, 아주 많이 실망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여기서 포기할까요? 아닙니다. 저는 다음 칸으로 갑니다. 남은 하루도 즐거운 시간 되시고 안녕히 가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다음 칸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멋있는 아저씨입니까? 비록 지하철에서 칫솔을 팔고 있지만, 비록 수입은 많지 않지만 얼마나 여유가 있고, 얼마나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입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혹시 실망할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다음 칸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새롭게 밝아온 새해에는 혹시 좀 실망스럽고 힘든 일이 있다해도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희망과 긍정 속에 한 해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주님 말씀따라 한걸음 한걸음 앞을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분명히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한해가 될 줄로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복된 한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한해를 정말 은혜가 충만한 시간들로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혜가운데 살려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그러나 긍정의 생각이라고 내 마음대로, 세상 가치관대로의 긍정은 안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긍정하는 것이 올바른 긍정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죄와 어둠 가운데 있고 하나님은 빛이시오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긍정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을 긍정하는 것이 뭐냐,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수1:8절을 보십시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보십시오. 말씀을 묵상하라. 지키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할 것이라. 형통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모든 생명과 축복과 평강과 위로와 기쁨의 근원자이십니다. 모든 우주만물과 그 질서와 규칙과 규범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우주만물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모든 우주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당연히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따라가면 그 인생이 생명과 진리와 은혜로 충만해 질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빛이신 하나님, 생명이신 하나님을 따라가면 빛의 은혜, 생명의 은혜를 누릴 것이요, 어둠과 사망에 속한 마귀 사탄을 따라가면 어둠과 사망의 그늘 속에 살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죄와 어둠속에 있는 너무나 많은 인생들이 자기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마귀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인생의 참된 생명의 양식이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가져다주는 유일한 규범이며, 규칙이며, 가이드라인이며, 사용설명서인 성경을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도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룰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해서 인간이 스스로 만든 룰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오직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이 정해주신 룰만이 하나님께 통하는 길이며 그것만이 인간의 생명을 보장하고 풍성케 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직 성경만이 인간의 삶에 유일하게 완전한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유일한 규칙이요, 규범이요, 가이드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생의 영과 육과 정신에 관한 유일하고 완전한 규범은 오직 성경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천지창조 때부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알고 인간 존재에 대하여, 인간이 살아가야 할 올바른 길에 대하여 규칙을 정할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우주와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올바른 정보를 가지고 모든 인생은 이러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실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우주안의 그 어떤 존재도 우주와 인간과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다 알지도 못하고 권한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제시할 수 없고, 모든 우주의 질서를 정할 수도 없고, 규범을 만들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룰을 바르게 알고 그 가이드라인을 따라, 그 설명서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이드라인으로 삼아 육신을 사용하고 시간을 사용하고 물질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새롭게 밝아온 이 새해에는 오직 우리 인생의 유일하고 완전한 규범이며 등불이이며 가이드라인이며 사용설명서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한해 동안도 말씀이 여러분을 지키고 인도함으로 말미암아 말씀 안에 있는 생명과 기쁨과 평강과 은혜와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님의 은총이 풍성한 삶을 살려면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따라 살게 되고, 그러면 당연히 그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6절 말씀 보십시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러분, 이 말씀에서 특별히 범사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범사, 즉 모든 일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릴 때만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밥 먹을 때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직장에서 일을 할 때로 인정하고, 장사를 할 때도 인정하고, 공부할 때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잘되고, 건강하고, 형통하고, 축복받을 때도 인정하고, 잘 안되고, 건강하지 못하고, 불통해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만나도, 불만스러운 일이 있어도, 이해 못할 일이 벌어져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시간과 장소와 환경과 상황을 불문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생명과 지혜와 능력과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나 내게 주어진 시간이나 물질이나 재능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고 그러면 반드시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인정하면 어찌 예배와 찬송과 기도에 열심을 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어찌 내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며, 나아가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하나님과 나 자신과 이웃을 위하여 바르게 사용하며 살아갈 때에 어찌 그 인생이 별처럼 빛나지 않겠습니까? 그 인생이 어찌 아름답고 복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여러분,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음을 믿고 그저 하나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 할뿐입니다.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도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내 할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와같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정말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갈 때에 그 인생이 어찌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움과 은혜를 인정하고 예배드리고 찬송드리고 기도하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우리의 육신이나 정신이나 물질이나 시간이나 모든 것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사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어렵고 힘들고 이해가 안되고 억울한 일을 만나도 그저 하나님께 맡기며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존중히 여김을 받으며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가득한 이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하나님의 지혜를 따라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그 은혜를 누리려면 하나님의 지혜는 나보다 천배 만배 억배 더 크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오늘 7절 말씀 보십시오. “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자기가 똑똑한 것처럼 생각하며 제 고집대로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다고 내 놓을만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비록 피조물들 중에서는 제법 지혜롭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우리 인생이 아는 게 얼마나 됩니까? 우리가 경험한 것이 얼마나 됩니까? 배웠으면 얼마나 배웠습니까? 알면 얼마나 압니까?

욥이 고난을 당했을 때 욥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너무 답답해서 따져 묻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했습니다. 나는 정말 나름대로 선하고 의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왜 나에게 이런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오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악한데도 잘 먹고 잘 사는데 난 정말 억울하다고 하소연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내게 대답하라. 네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거기 있었느냐, 바닷물이 넘치게 하였느냐, 네가 아침이 오게 하였느냐, 네가 별들을 매어 묶을 수 있느냐, 네가 눈과 비를 내리었느냐,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네 가슴속의 지혜는 누가 주었느냐, 네가 염소의 새끼를 낳을 때를 아느냐,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러자 욥은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욥42: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렸고,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욥을 고난에서 건져주시고 다시금 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인품이 좋고 선하고 잘나도 하나님 앞에서 지혜를 자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처럼 여기고, 하나님앞에서 의로운 것처럼 여기는 인생은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마귀사탄에게 철저히 속고 있는 사람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솔직히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 우주 공간속에서, 천지가 창조되고 영원한 세계로 나아가는 길까지, 영원한 세상이 지속되는 그 모든 일에 대하여 아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자신의 한계와 무지와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자신과 세상의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지혜와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더욱 풍성히 누리는 이 복된 새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4.하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려면 진실로 하나님을 공경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9절 말씀 보세요.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보십시오. 네 재물과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제일 먼저,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아가서 십일조를 비롯한 모든 감사예물을 드릴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여호와를 인정하는 일이요, 바르게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게다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는데, 게다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야말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일에 사용되는 것인데,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이 유일하게 하늘 곳간에 쌓는 일인데 하나님을 믿고 인정하고 공경한다면 어찌 하나님께 먼저 드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무엇인가 힘써 노력해서 얻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야, 말합니다. ‘너, 정말 수고 많았다. 너 정말 대단하다. 이제는 좀 쉬면서 먹고 마시고 놀자.’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부모님이 날 낳아 주시고 열심히 키워 주신 덕분이라며 부모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곁에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던 친구나 선배나 기타 다른 사람에게 공을 돌리며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면 우리도 여전히 인본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육신으로 물질로 시간으로 하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었다해도 근본적으로나 실제적으로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터전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생명과 육체과 지혜와 능력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는 재료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햇빛과 비와 공기와 토지를 주셔서 그 안에서 활동하며 살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제일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제일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간도 물질도 재능도 다른 모든 것도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공경할 때 그 믿음과 신실함을 보시고 더욱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0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오늘 이 귀한 말씀들을 기억하며 올 한해 동안도 정말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결코 자신이나 세상의 지혜를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유일한 규범이며 잣대이며 안내자인 하나님의 말씀의 안내를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과 물질과 육신을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창고가 가득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은총과 귀중이 여김을 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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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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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설교] 살아있는 교회

 

 

 


제목 : 살아있는 교회

말씀 : 행 2:1~4

1.혼이 담겨 있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6, 70년대에 영국에 '비틀즈'라는 락그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Yesterday, Let it be, Love me do 등의 수많은 곳을 히트시켜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열광시켰고, 수십억달러의 돈을 벌어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1965년 이들의 외화획득의 공적을 인정하여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비틀스가 이탈리아에서 공연을 할 때의 일입니다. 공연장에는 수만 명의 청중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한참 공연이 무르익어 열창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갑자기 무대위로 뛰어올라서는 권총을 겨누면서 빨리 노래를 그만두고 돌아가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지 않으면 쏘아 죽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삽시간에 공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다행히 경찰의 침착한 대처로 이 사람은 잠시 후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범인을 잡아놓고 보니까 이 사람은 괴한도 깡패도 아닌 유명한 음악대학의 교수였습니다. 경찰이 어이가 없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느냐고 묻자 그 교수는 비틀즈를 보면서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너희들 음악에는 혼이 배어 있질 않아. 그런 혼도 없는 속된 노래를 가지고 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장 그만두고 돌아가라.’

즉 이 음악교수는 노래에 자신의 진실과 마음과 혼까지 담아 음악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그런 순수한 음악, 그런 영혼이 담겨있는 음악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틀즈라는 락 그룹이 그러한 혼이 담겨져 있는 순수한 음악이 아니라 상업적이고 세속적인 노래로 사람들을 현혹하며 그래서 순수음악을 더럽힌다고 여겨 그런 과격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사건속에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우리가 하는 일에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기에 진실이 있고,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림을 아름답게 그려도 거기에 혼이 담겨져 있지 않고 그저 상업적으로 그린다면 그 그림은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웅변술을 가지고 열변을 토해도 거기에 혼이 담겨있지 않고 진실성이 없다면 위선에 불과한 것입니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회사에 다닐 때 한 2,3년동안 서예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서예도 마찬가집니다. 글씨에도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가 있고, 그저 기교적으로 쓴 글씨가 있습니다. 혼이 담겨져 있는 글씨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감동이 전해져 오고, 힘이 있고,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기교로만 쓴 글씨는 왠지 천박해보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거기에 혼을 담고, 진실을 담고, 정성을 담을 때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신앙생활은 더더욱 혼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담지 않는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아무리 귀한 직분을 가졌어도, 아무리 교회를 위해서 봉사해도 자신이 하는 일에 영혼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찬양을 잘해도 거기에 혼이 담겨져 있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세상적인 노래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거기에 혼을 담지 못하면 그냥 시간을 때우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제가 말하는 영혼이란 내 자신만의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주관하시고, 성령님께 붙들린바 된 그러한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근원이신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그러한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우리가 하는 일속에 그 살아있는 영혼을 담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정 생명과 은혜가운데 거하며 참된 가치를 누리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4:24절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146:1절에서는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진정 혼을 담아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 사로잡힌 바 된 그 영혼을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가정 생활하고, 직장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온전히 진정성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영위함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사람을 감동시킴으로 하나님과 사람앞에 인정받고 존중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삶에 진정 살아있는 영혼을 담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매사에 영혼을 담아 하려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사로잡힌 바된 진정 살아있는 영혼으로 무엇을 할 때 그게 진정한 혼으로 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내 정성만 담는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인격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자연적인 혼을 죄로 말미암아 죽어 있기 때문에 그 혼만을 담아서는 진정으로 나를 드리는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며 거룩한 영이신 성령께 사로잡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 전체에 살아있는 영혼을 담아 영위함으로 진정 살아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인데 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이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하기에 힘쓸때에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기억하며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힘써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그것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우리 주님의 구원의 역사를 일으켜 나갔던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진정한 생명력을 가지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때에 그러한 성령에 붙들린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던 그 일을 기억하며 오늘에 되살려보는 그러한 절기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날의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오늘 우리도 경험하며 생명가운데 은혜가운데 주님의 사명을 감당해보자는 그러한 취지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우리의 영혼속에 담고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에는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어질때에 우리는 복음의 큰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최권능목사님은 본래의 이름은 최봉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얼마나 권능이 많으신지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많은 교회를 세우고, 신유의 은사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별명으로 최권능목사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은 전도할 때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돌아다니신 분으로 유명했습니다. 무슨 교리나 말씀이나 원리나 이치 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조건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치고 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게 어떻게 보면 정말 무식하게 전도했는데 이분의 전도를 받으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 목사님이 시냇물을 건너려는데 어떤 양반 하나가 담뱃대를 길게 물고 둑에 점잖게 앉아 있는 것입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이때도 예외없이 둑에 앉아 잠시 쉬고있는 영감님에게 귀에다 대고, 「예수 천당, 마귀 지옥」하면서 냅다 소리를 지르고는 징검다리를 건너 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점잖은 양반이 깜짝 놀라서 「저, 저 저런 고얀놈이 있나.」하면서 소리를 쳤지만 목사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징검다리를 건너갔습니다.

그래서 이 양반도 어쩔 수 없이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하고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이 양반이 집에 도착해서 지내고 있는데 자나깨나 자꾸만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앉아 쉬려고 하면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고, 잠을 자면 꿈속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양반이 예수 귀신 붙었다고 하면서 그 지방에서는 제법 용하다고 하는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굿을 해도 계속 귀에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 소리만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서양귀신은 서양귀신 들린 사람에게 가야된다고 해서 교회를 찾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누구냐 하면 그분이 바로 고당 조만식 선생님의 부친인 조을선씨였고, 이 한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통해서 조만식 선생이 믿게 되고, 조만식 선생을 통해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이라는 말속에 무슨 철학이 있습니까? 무슨 논리가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그럴듯한 웅변이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사람들을 불러모을만한 재미있는 이야기거리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최 권능 목사님은 그 말 한마디로 수천명의 사람을 전도하였고 수십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천당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겠습니까?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때야, 세상은 참 어수룩 했으니까. 그때야 가난하고 못배워 사람들이 좀 단순하고 순진했으니까. 그때야 무슨 재미있는 일도 없었으니까 그냥 예수천당만 해도 믿었지 지금 세상은 그렇게 안됩니다.」라고 말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개연성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만약 오늘 최권능 목사님이 이 안강땅에 오셔서, 저 시장 바닥과 저 일터를 다니면서 「예수 천당 마귀 지옥」라고 다니신다면 분명 이 안강지역에도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저 서울 바닥에 가서, 저 부산 바닥에 가서, 저 유흥가와 환락가에 가서 최권능목사님이 「예수 천당, 마귀 지옥」을 외쳐댄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품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그 단순한 말속에는 비록 철학도 이론도 교리도 없지만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살아있는 예수의 혼, 예수의 영,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최권능 목사님 속에 주의 성령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비록 단순하고 어떻게 보면 유치한 말이지만 그가 혼을 다해서, 영혼을 다바쳐 복음을 증거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셨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안 믿고는 배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령이 그 안에서 차 있을 때 그의 삶은 성령이 담겨져 있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성령이 인도하는 그러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가득차 있기에 그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명력이 왕성한 삶을 살았고 동시에 그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품으로 인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이라야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살아 있어야 생육하고 번식을 하는 것입니다. 죽어있는 것은 자체로서도 별 의미가 없거니와 생육하고 번식하는 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생명의 영이신 성령으로 사로잡힌 사람은 살아있는 신앙인입니다. 이런 살아있는 신앙인만이 참된 생명의 가치를 누리게 되거니와 동시에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3.어떻게 성령충만함을 받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초대교회는 이처럼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살아서 펄펄 뛰는 물고기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힘차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그런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그들은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순절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전혀 기도하기를 힘쓰다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들속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정녕 살아있는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충만이 무엇입니까? 충만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철철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내 안에 성령이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는 더 이상 다른 것이 자리잡을 수가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와 생명과 은혜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인격을 지배하고, 내 자아를 지배하고, 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의 영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넘쳐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성령이 내 안에 가득하니 이제는 내 욕심, 내 못난 자아, 내 짧은 소견, 내 미련한 인생관 이러한 것들은 죽고 맙니다. 그 대신 성령님안에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과 은혜와 진리가 나를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배하니 내 인생의 가치관, 내 성품의 기질이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혼이 나를 지배하니 나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자랑들은 사라지고 이제는 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이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우리를 살리겠습니까? 무엇이 우리 교회를 더욱 힘있게 하겠습니까? 무엇이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속에 진정한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나가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릴 때 우리는 놀라운 생명력을 갖게 되고, 그렇게 생명력을 갖게 될 때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감당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과 우리 교회가 성령에게 붙들릴 때, 속된 말일지 모르지만 거룩한 영이신 성신으로 신들릴 때 우리안에 우리 가정안에 우리 교회안에 이 지역사회안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쁨과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신들려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 진리안에서 참된 가치와 의미와 보람을 찾게 되며, 진정한 평안과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세상에 모든 헛된 욕심들을 버리고 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가운데 정녕 소망중에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혼에 충만할 때 봉사하며, 전도하며,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속에 진정으로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속에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신에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요, 생명의 영이요, 은혜와 사람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과 우리의 모든 가정들과 모든 성도들 생명 속에 이 하나님의 혼이 살아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랑하는 성도들속에 그리고 우리의 가정속에 교회속에,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혼이 살아서 역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생명이 역사합니다. 은혜와 사랑이 역사합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이 물러가고, 모든 우고와 질환이 물러갑니다. 추하고 더럽던 것이 아름답고 깨끗하게 됩니다. 혼돈된 것이 질서를 찾게 되고, 죽어 가는 것들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얼어붙은 동토에도 생명의 싹이 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녕 성령충만함을 받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는데는 다른 왕도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자들이 보여 주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늘어져야 합니다.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충만함을 받고, 성령충만함을 받으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과 어둠과 미움과 욕심과 저주의 권세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우리 가정안에서 우리 교회안에 생명의 역사가 은혜의 역사가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다시한번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기 위하여 더욱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덧입어 세상을 이기고, 죄와 사망을 이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김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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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행복한 인생

 

 


제목 : 행복한 인생

말씀 : 골4:2~4

1.행복은 마음에 있습니다.

존 스타인벡의 ‘진주’라는 소설의 내용입니다. 멕시코의 어느 바닷가에 가난한 부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아들이 전갈에 물려 병원을 찾아갔지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할 수 없이 엄마는 전갈에 물린 부위를 입으로 빨아 독을 빼내고 아버지는 아들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진주조개를 잡으러 갔다가 엄청나게 큰 진주가 들어 있는 조개를 잡게 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야말로 로또복권에 당첨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돈이 없다는 이유로 전갈에 물린 아들을 문전박대하던 의사가 스스로 찾아와 치료해 주겠다고 하고, 그를 업신여기며 따돌리던 동네 사람들도 너나 할 것없이 찾아와서 친한 척을 하였습니다. 또 평소에는 왕래도 없던 먼 친척들이 찾아와 도와 달라고 하고, 사회복지 단체에서도 찾아 도움을 요청하고, 성당의 신부도 은근히 큰 헌금을 기대하여 부담을 주었고, 각지에서 장사꾼들이 몰려와 협작하여 진주를 헐값에 사려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부부는 고민하다가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는데 거기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떻게 찾았는지 많은 사람들이 쫓아와 도움을 요청하고, 장사꾼들이 헐값에 진주를 차지하려고 달려들어 결국 그들이 손에 의하여 사랑하는 아들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자 아버지도 그들을 추적하여 원수를 죽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진주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존스타인 벡은 소설을 통하여 현대인들이 돈만 있으면 행복할 줄 알고 난리를 치지만 오히려 돈 때문에 도리어 서로 싸우고 속이고 심지어는 죽이며 그래서 결국 행복은커녕 불안과 두려움과 고통 속에 빠질 때가 많다는 것을 일깨워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행복은 조건이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성적순도 아니고,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 순이 아닙니다. 행복은 마음순입니다. 그래서 “봄은 만물이 소생하니 좋고, 여름은 초목이 우거지니 좋고, 가을은 열매가 있어 좋고, 겨울에는 하얀 눈을 볼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시사철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봄은 건조해서 싫고, 여름은 더워서 싫고, 가을은 고독해서 싫고, 겨울은 추워서 싫다.”고 하는 사람은 사시사철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잠4:23절에서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마15:18절에서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생명과 기쁨과 슬픔과 아름다움과 추함이 마음에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마음을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감사로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을 그렇게 진정 복된 마음으로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생명과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심령 속에 들어있는 죄와 무지를 해결해야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데 이것은 이것을 이기는 길은 말씀과 기도뿐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말씀과 기도로 우리의 심령 속에서 꿈틀거리는 죄와 무지를 물리칠 때만이 진정한 은혜와 사랑과 기쁨으로 우리의 심령이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2절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즉 꼭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되 계속해야 한다. 계속하는데 특히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행위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요, 영적인 호흡을 통해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들이는 일이요,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이요,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요, 교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과 올바른 교통이 이루어질 수 없고, 하나님과 올바르게 교통하지 않으면 진정한 생명과 은혜와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반드시 해야 하는데 지속적으로 계속해야 합니다. 몇 번 해보고 때려치우거나 옛날에 많이 했다고 중단하거나 응답이 없다고 그만 두거나 하지 말고 천국에 갈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성이 풍성한 상태가 계속 유지되고 영성이 풍성한 상태가 계속 유지되어야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평강도 계속적으로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뿐만 아니라 삶 전체가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조금하다 말면 소용없습니다. 축구선수가 축구를 잘하려면 매일 꾸준히 공을 차야 합니다. 피아노를 잘 치려면 매일 계속해서 피아노를 쳐야 합니다. 공부도 꾸준히 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 까먹는 것입니다. 기도도 계속 끈질기게 해야 합니다. 잘 안 들리는 것 같아도, 응답이 없는 것 같아도 계속 기도해야 주님과의 교통이 지속적으로 잘 이루어져 계속해서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주님과의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주님과의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지 않고는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온전히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되 중단하지 말고 계속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하나님과의 깊고 풍성한 교제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범사에 감사하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모두가 그런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할 때에 끈질기게 하는 것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감사함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어떤 분이 실험을 했습니다. 빈민촌에 들어가 열집을 선택해서 현관에 매일 50불을 놓고 갔습니다. 그러자 첫 날은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멈칫멈칫하다가 돈을 집어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열흘 쯤 지나니까 사람들은 그를 기다렸다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돈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한 20여일 지나니까 돈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돈이 오자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되어 돈을 갖다놓지 않으니까 ‘왜 오늘은 돈을 안 가져오는 거야. 뭐야 우릴 놀린 거야 뭐야. 주려면 계속주지 왜 주다 마는거야?’하면서 비난하고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을 보자 ‘여보, 오늘은 왜 돈을 안 주는 거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건 당연한 일 아니요?’하면서 마치 빚쟁이처럼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무언가 은혜를 끼쳤을 때 처음에는 감사하고 기뻐하지만 그것이 일상화되면 감사는커녕 도리어 무슨 빚쟁이처럼 내놓으라고 하고 안주면 난리를 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신 것인데 계속 너무 많이 주시니까 감사할 줄 모르게 된 것입니다. 감사는커녕 남보다 조금 덜 받았다고 생각하면 불평불만을 토하고 하나님께 내 놓으라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아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모르고 마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자처럼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정말 얼마든지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얼마전 신문에 보니까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우리나라 꽤 괜찮은 나라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우리만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모임에서 세계적인 명사들이 모였습니다. 거기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김용 세계은행 총재도 있었고 오바마 현 미국 대통령과 클링턴 전 미국 대통령도 참석하였습니다. 그때 클링턴 미국 전 대통령이 한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농담아닌 농담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유엔사무총장이 한국인이었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국제기구중 하나인 세계은행 총재도 한국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얼마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국제연합기구 중의 하나인 GCF(녹색기후기금)의 한국유치가 확정되었습니다. 세계경제10개대국의 반열에 올랐고,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확산 되어 문화강국도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자유와 질서가 잘 잡힌 나라도 그닥 많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꽤 괜찮은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대선 레이스를 벌이고 있는 3인방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상에 걸맞는 지도자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대한민국을 정말 어떻게 하면 세계에서 리더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갈 것인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서로 물고 뜯고 과거에만 집착하여 흠집내고 할퀴기에만 급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정말 놀라운 축복의 땅에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은 감사해야 하고 다음에는 어떻게 우리의 다음세대에게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운 땅을 물려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현재에 감사하며 더욱 나은 미래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기 위해서는 정말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늘 헤아려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2절 말씀 다시 봅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계속 기도하라. 특별히 감사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것이 많지만 감사할 것만큼 많습니까? 우리가 살아 숨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먹고 입고 자고 생각하고 말하고 숨쉬고 걷고 뛰고 움직이고 생활하는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알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때 은혜가 임하고 기쁨이 임하고 평안이 임합니다. 성령이 역사합니다. 그러나 불평불만하면 마귀가 역사하고 어두움이 임하고 미움과 시기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이 최고의 부자이고, 최고의 신자입니다. 최고의 기도, 최고의 영성은 감사할 줄 아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늘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 가운데 살고 있는지를 기억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갈 때에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과 은혜가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귀한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높은 자존감 가운데 만족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둔형 외톨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은둔형 외톨이는 밖에 잘 나오지 않고 방에 틀어 박혀서 TV를 보거나 인터넷에 빠져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원인은 주로 가정 파탄, 부모의 폭행, 집단에서의 왕따, 인터넷 게임 중독 등으로 보고 있으며, 이들은 많은 경우 우울증, 성격장애, 강박증, 공격성 등의 정신적 장애를 가지고 있어 이들로 인하여 큰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는 근본적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가정 붕괴, 부모의 폭행, 왕따, 인터넷 게임 중독 등은 외적인 요인이고 내적인 요인은 그런 환경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자존감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학대받고 무시당하고 살아감으로 자신을 무가치하고 무능하게 여기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만나기 싫어지고 그래서 결국은 거기에 대한 반항으로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존감은 자존심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존심은 남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높임을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남보다 더 잘나고 더 높아지고 더 많이 가져야하기 때문에 남을 헐뜯고 무시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자존감은 남이나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스스로를 귀하고 가치있는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남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남보다 높아지려고 애쓰지도 않습니다.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헐뜯지도 않습니다. 나 자체로 귀한 존재니까 그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과 남을 귀히 여기며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내가 너무나 귀한 존재니까 나 자신을 무가치하게 무의미하게 추하게 사용하지 않고 귀하게 아름답게 사용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정말 아름답고 복되며 만족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전도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하라. 나는 이 일을 위하여 매임을 당하였다. 즉 사도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지 스스로 이 거룩한 사역을 위한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 거룩하고 귀한 사역에 쓰임받고 있다는 분명한 자긍심 가운데 자부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주신 사명 감당하여 살아가는 행복한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사역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고 동시에 우리 자신도 귀한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아니겠습니까? 세상에서도 사람들이 보기에 귀한 일을 한다면 얼마나 스스로가 자랑스럽겠습니까? 자신이 자랑스러우면 그 삶에 또한 얼마나 만족과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온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이 귀한 사역에 참여한다면 얼마나 굉장한 일이겠습니까? 이 귀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참여한다면 얼마나 귀하고 자랑스럽겠으며, 그러면 또 얼마나 감사와 기쁨과 만족함이 넘치는 삶이 되겠습니까?

저는 솔직히 시켜주지도 않겠지만 국회의원하라고 해도 안 할 겁니다. 저는 목사라는 이 신분이 가장 자랑스럽고 가장 좋고 가장 행복합니다. 그까짓 세계 권력과 명예와 부에 관심없습니다. 시찰회나 노회나 총회나 이런 기관에서의 무슨 감투 에도 관심 없습니다. 그저 목사라는 신분 하나에게 감사하고 감격하고 기뻐할 따름입니다.

얼마 전 신문사설에서 폴리페서 즉 정치교수들의 정치참여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폴리페서는 정치를 뜻하는 폴리틱스(politics)와 교수를 의미하는 프로페서(professor)의 합성어로서 교수본연의 직업에 충실하지 않고 정치에 뛰어들어 명예를 얻으려는 교수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교수들이 그렇게 세상적인 명예를 좇으려고 한다면 대한민국은 노벨상을 받으려면 아직 멀었다고 개탄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적어도 대학교수라면 교수라는 신분에 자긍심과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까짓 세상 감투하나 씌워준다고 낼름 교수직을 포기하고 정치에 뛰어들고 한다면 결코 학문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학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학문에 열정을 쏟아야 학문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분야에 자긍심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열정을 쏟을 때에 본인도 행복하고 나라의 미래도 더욱 밝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목사 장로 권사 집사로서의 분명한 정체성과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영혼 구원의 이 귀한 사명을 가진 자로서 자존감을 가지고 이 생명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욱 큰 긍지와 자존감을 가지고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정말 늘 깨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심령을 성령의 은총으로 가득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살고 있는지를 기억하며 정말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도 적극 참여함으로 높은 자존감 속에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주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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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진정한 소망

 

 

 

 

제목 : 진정한 소망

본문 : 딤전6:17~19

1.진정한 소망

여러분,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정말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기대하며 사십니까? 부자 되는 것, 자식이 출세하는 것,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그것도 기대하고 그것을 위해서도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렇게 되면 무슨 뾰죽한 수가 생길까요?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고 날마다 싱글벙글하며 살아갈까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가보면 똑같아요. 뭐 많이 배우고 돈많고 출세하고 건강하면 맨날 좋아 죽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똑같이 걱정하고 불안하고 염려하고 싸우고 갈등하고 지지고 볶고 삽니다. 그래서 뭐 전직 대통령, 전직 총리, 장관, 재벌 총수, 무슨 팝의 황제니 골프의 황제니 하며 불리던 사람들이나 유명 연예인이나 할 것 없이 자살도 하고 잡혀 가기도 하고 가정불화도 겪고 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의 것은 죽을 둥 살둥 달려가서 얻었다고 하는 순간 이미 멀어지기 시작해요. 세상의 것으로 누리려는 행복은 잡았다고 하는 순간 저만치 날아가서 날 잡아봐라 하면서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좇아 다니다가 결국 인생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도 모르고 세상 것 좇아 다니다가 죽는다면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하고 비참한 인생이 되겠어요.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기대하고 기다리고 힘써 나아가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하고 그래서 우리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만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희망이요, 소망입니다. 주님안에 만이 진정한 생명과 평화와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는 이세상에서도 모든 상황을 초월해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안과 은혜가 있으며, 더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보장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완전하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영광과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대한 기대와 소망속에서 사는 자들만이 완전히 후회없는 성공한 인생이 됩니다.

오늘 17절 말씀 보세요.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무엇에 소망을 두지 말라.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무엇을 소망을 두라? 하나님께 두라.

왜요? 재물은 정함이 없으니까. 정함이 없다는 게 뭡니까? 정해져 있는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즉 불확실하다는 거지요.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는 거라는 거지요. 내께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무슨 소리냐 영원토록 내꺼다. 실컷 쓰고 누리고 살다가 죽으면 그게 내꺼지 누구꺼냐 그럴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생명도 돈도 내일을 장담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설령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어도 결국 놓고 가야하고 그거만 믿고 산 인생이라면 결국 영원한 고통 밖에는 남아 있을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소망은 다릅니다. 주님께 있는 소망은 완전하고 영원하고 온전합니다. 영원하고 완전한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평안을 주십니다. 그것만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19절 보세요.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이것이 뭡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선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좋은 터를 쌓는 것이고,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생명이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단순한 육체적 생명이 아닙니다. 영적, 정신적, 육체적 생명을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완전한 생명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뜻을 따라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쌓는 지혜로운 인생이다, 그런 인생속에 영원한 생명의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정함이 없는 재물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세상의 즐거움을 기대와 기다림과 소망으로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유일한 참 소망이신 주님을 소망께 대한 소망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결코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세상에서도 평안과 기쁨을 누리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2.선한 사업에 부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소망이 다른 사람은 삶의 목적도 다르고 삶의 방향도 다릅니다. 돈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삶의 목적이 돈을 모으는 것입니다. 세상 즐거움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그저 먹고 마시고 노는 일에 사용합니다. 그저 부자되고 건강하게 잘먹고 잘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그저 돈이나 모으고 제 몸 하나 잘 입히고 잘 먹이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세상의 것을 목적으로 삼지도 않고 거기에 얽매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를 준비하며 삽니다. 그래서 돈을 버는 목적도 다르고, 돈과 시간과 재능과 육신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돈과 지식과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는 목적이 다릅니다.

그게 뭡니까?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나 혼자 잘먹고 잘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고 그래서 결국 주님과 나와 이웃이 함께 기뻐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삶이 이생에서나 저생에서나 가장 복되고 기쁘고 아름답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깊이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솔직히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게 무슨 그렇게 의미가 있겠어요? 돈이든 시간이든 재능이든 권력이든 지식이든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게 무슨 큰 가치를 만들어 내겠어요? 그렇게 해서 자신이 무엇이 그렇게 크게 즐겁겠어요? 여러분, 좋은 것은 함께 나눠야 더 좋아지고 더 많은 가치가 있는 거예요.

자 여기 맛있는 음식이 있어요. 저 혼자 독차지하고 앉아서 먹으면 무슨 맛이 그렇게 있어요? 여럿이 같이 먹으면 얼마나 더 맛이 있어요. 너무 너무 좋은 일이 있어요. 혼자 히죽히죽 웃으며 좋아하는 것보다 모든 사람이 함께 웃고 축하해주고 기쁨을 함께 나누면 얼마나 더 기뻐요? 호화판 유람선이 있어요. 저 혼자 타고 다니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함께 타고 다니며 서로 웃고 즐거워하면 얼마나 더 기쁘겠어요? 좋은 집이 있어요. 저 혼자살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함께 살 때 즐거운 거지요.

여러분, 사람은 원래 관계적인 존재예요. 가족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존재하는 거예요. 본래 그런 존재로 지음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절대 혼자 행복할 수 없어요. 혼자 배터지게 먹고 혼자 대궐 같은 집에서 살고 혼자 좋은 입고 하면서 행복할 수 없어요. 그러면서 행복하다면 그 인생은 죽은 인생이요, 병든 인생이요, 죄와 무지의 종이 된 인생이예요. 결국 영원한 지옥속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이예요.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자기만을 위해서 살면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18절 말씀 보세요.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선한 일이란 포괄적으로 좋은 일을 말합니다. 가난한 자를 돕고, 병든 자와 갇힌 자를 돌아보고, 절망속에 있는 자를 위로하는 등 모든 어렵고 고통받는 이웃을 돌아보는 것을 말합니다. 선한 사업에 부하라는 것은 그런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인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한 일들을 위하여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사용하는데 인색하지 말고 넉넉히 드리라는 것입니다. 나눠주기를 좋아하라는 것은 억지로 마지못해 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런 일들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들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된 인생의 올바른 가치관입니다.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19절에 있습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생명을 취하는 길이다.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나눌 때 그것이 결국은 자기 생명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택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지 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라는 뜻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너도 살고 나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너도 기쁘고 나도 기쁘고 주님도 기쁘고 결국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말 자기 혼자 잘먹고 잘사는 거 그거 별거 아닙니다. 그런 삶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안과 은혜도 없고요, 있다 해도 별거 아닙니다. 그런 삶은 죄와 무지속에 있는 인생의 모습이요, 영적, 정신적, 인격적, 체적 미숙아의 삶입니다.

여러분, 갓난아기 보세요. 갓난아기는 남을 모릅니다. 그냥 자기밖에 모르죠. 남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성장하여 성인이 되면 남을 배려하게 됩니다.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적, 인격적, 영적으로 자꾸 자라나야 합니다. 자라나서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이웃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여러분, 지금은 대강절 기간입니다.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 속에 기쁨으로 거하시도록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심령속에 기쁨으로 거하시겠습니까? 어떤 심령속에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주님께서 기쁘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자는 부자가 아닙니다. 권력자가 아닙니다. 지식인이 아닙니다. 단순히 윤리적으로 깨끗한 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죄와 무지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거기에 욕심을 두지 않고, 거기에 얽매이지도 않고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심령으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기쁨으로 오십니다.

또한 그렇게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그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자에게 기쁨으로 찾아 오셔서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평강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목적인 것입니다. 대강절은 바로 그런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기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세상의 별거 아닌 돈과 명예와 지식을 바라보며 거기에 소망을 두고 거기에 얽매이는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소망이요, 나의 기쁨이며 영원한 생명의 은총과 더불어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메시야라는 점을 기억하며 그저 겸손히 엎드려 그 분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정말로 주님을 기대하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산다면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살피고 이웃을 돌아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어지 모든 것들을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여러분 심령속에 가득하여 주님과 이웃을 기쁘게 해드리며 여러분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축복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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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기다림과 인생 

 

 

 
말씀 : 눅2:25~27

제목 : 기다림과 인생

1.기다림이 인생을 결정합니다.

19세기 중반 미국에 나다니엘 호손이라는 작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청교도 가정에서 태어나 대표작인 주홍글씨를 비롯한 많은 교훈적 소설을 남겼는데 그중에 ‘큰 바위 얼굴’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 어니스트의 고향마을 앞산에는 인자한 사람얼굴 모양의 큰 바위가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언젠가 이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나타나 이 땅에 큰 소망과 위로를 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기다리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어니스트는 한편으로는 그런 분을 꼭 만나보겠다는 기대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나도 큰 바위 얼굴을 닮아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과 위로를 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진실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갑니다.

세월이 흘러 그가 장성하였을 때 그 마을에는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는 많은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돈을 많이 벌어 거부가 된 사람, 위대한 장군이 된 사람, 유명한 정치가나 학자가 된 사람 등 소위 사회적으로 성공하였다고 하는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큰 바위 얼굴처럼 환대를 받습니다. 그러나 어니스트는 그들이 큰 바위 얼굴이 아님을 알고 실망합니다.

그러는 동안 어니스트는 전도사가 되어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는데 이 설교를 들은 한 시인이 이 분이 바로 큰 바위 얼굴이라고 외치게 됩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도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임을 인정하며 그의 삶과 말씀을 통해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정작 어니스트는 자신은 큰 바위 얼굴이 아니라며 계속해서 큰 바위 얼굴처럼 살기를 힘쓰며 그를 기다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기다림이 우리의 미래의 모습을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됩니다. 어니스트는 인자한 얼굴의 성인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렸기에 그를 기쁨으로 만나기 위하여 또는 그 자신이 큰바위 얼굴과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큰 바위 얼굴 닮기 위하여 힘썼던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큰 바위 얼굴을 기다리며 그 모습을 닮기를 힘썼을 때 마침내 큰 바위 얼굴과 같은 모습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죽자사자 돈만 바라는 사람은 죽자사자 돈을 따라가게 되고 그러면 그 사람에게서는 돈 냄새가 날 것입니다. 그저 세상 즐거움만 바라보는 사람에게서는 결국 향락에 찌든 모습이 나타날 것입니다. 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은 일에 파묻혀 살게 되고 결국 그 얼굴이 일에 찌든 모습이 나타날 것입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주님 뜻대로 살아가기를 힘씀으로 주님의 모습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설렘으로 기다립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기쁨으로 만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하고 예쁘게 단장을 합니다. 그래서 겉모양뿐 아니라 말도 예쁘게 하게 되고, 행동도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몸도 마음도 예뻐지는 것이지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기다림은 우리에게 꿈과 희망과 설렘을 가져다줍니다. 동시에 기다림은 그 기다림의 대상과의 기쁨의 재회를 위하여 우리를 돌아보게 만들고 가다듬게 만들고 아름답고 거룩한 모습이 되기를 힘쓰게 만듭니다. 그래서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희망과 소망과 아름다운 삶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8:34,35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주의 은혜를 간절히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가까이할 때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받기 위하여 더욱 힘쓰게 되고 그럴 때 결국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에게 정말 생명의 은총과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에 대한 기다림속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의 유일하고 완전한 스승이시며 구세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영광과 은총을 가져다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완전한 생명이시며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기대와 소망과 기다림속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주실 참된 평안과 위로와 영원한 천국에 대한 기다림속에 살아갈 때에 점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며 더욱 은혜와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기다림의 대상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암만 기대하고 기다리고 힘을 써도 엉뚱한 것을 기대하고 기다리고 힘쓰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아니 그냥 아무 소용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공연히 시간과 돈과 정열을 헛된 곳에 사용하게 되고 정작 반드시 해야 할은 하지 못하게 됨으로 큰 낭패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에게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있는 것을 기다리며 그런 분을 만나고 그 안에 있는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로 그렇게 우리가 유일하게 기다리고 사모해야 할 분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살던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시므온이라는 할아버지였는데 당시 이스라엘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압제 하에 있었고, 경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형식주의와 외식주의가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류의 위로자시며, 구원자이신 메시아가 속히 오셔서 그 나라와 백성을 구원해 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그저 정치 경제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시므온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과 위로와 자유를 가져다 줄 참 메시아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 참 생명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25,26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무엇을 기다렸다고요? 이스라엘의 위로입니다. 그러면 그 위로라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정치적으로 로마에서 해방되는 것이었습니까? 헐벗고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까? 더 웅장한 예배당에서 멋진 프로그램과 그럴듯한 예배의식 속에서 폼나게 종교생활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어떤 것을 통한 위로가 아니라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2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그는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이신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렸고 그러자 성령께서 죽기 전에 꼭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래서 그 말씀대로 그는 죽기 전에 예수님을 만나 큰 위로와 기쁨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위로와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정말 우리에게 자유와 평화와 안식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돈도 어느 정도 위로가 됩니다. 정치가 안정되면 어느 정도 평안을 줍니다. 경제가 활성화되면 어느 정도 사람들의 삶속에 활기가 넘치게 됩니다. 압제를 당하던 사람들이 압제에서 풀려나면 그것도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우리의 완전한 위로와 소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은 결코 참된 평안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 돈이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와 평안이 된다면 왜 대기업 총수들이 무슨 비자금이다 사기성 어음이다 하면서 툭하면 검찰에 불려 다니고 심지어는 자살까지 하겠습니까? 권력과 명예와 지식이 위로와 기쁨과 평안을 줄 수 있다면 왜 많은 정치인이나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뇌물이다 향응 제공이다 하면서 불려 다니고 망신을 당하고 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위로와 기쁨과 평안과 소망과 안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 안에 참 생명과 기쁨과 행복과 자유가 있습니다. 요8:32을 보십시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무엇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까?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와 유혹과 욕망과 어둠과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과 사망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세상의 모든 돈과 권력과 명예와 영광으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4:27절에는 또 말씀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나의 평안을 주겠다. 세상이 주는 것은 상황과 환경에 따라 변하고 결국은 사망에 삼킴을 당하는 것이지만 내가 주는 평안은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고 심지어는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의 소망이나 기다림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확실히 현실화된다는 보장도 없고, 설령 현실화된다해도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이요, 한시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안개처럼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지켜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기대와 소망과 기다림은 너무나 확실하게 우리 현실 속으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인생의 모든 문제에게 대한 완전한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모든 시대 모든 공간 모든 사람에게 효력이 있습니다. 영원하고 완전한 생명과 평안과 위로와 기쁨을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한 소망과 기대는 우리의 모든 것을 완전히 충족시켜 주는 완전한 소망이요, 완전한 기다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에 필요한 정신적 물질적 육체적 풍성한 은혜에 대한 소망이나 기다림도 물론 가져야 하겠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온전한 위로와 자유와 평강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진정으로 완전한 소망과 기쁨과 자유와 평강을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예수님이 주실 그 놀라운 은혜에 대한 기다림속에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리는 자에게 한량없이 베풀어주시는 주시는 풍성한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기쁨과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기다리는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기다림이 있어야 하는데 우선은 기다림의 대상이 올바르게 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기다리는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헛된 것을 기다리면 소용이 없고, 또한 아무리 옳은 것을 기다려도 기다리는 자세를 올바르게 하지 않으면 기다림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승진을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하는 사람이 성실하게 일하며 열심히 자기를 계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기다림이 이루어지겠습니까?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사람이 열심히 씨앗을 뿌리고 가꾸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기대가 이루어지겠습니까? 좋은 성적표를 원하는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좋은 성적표를 받아 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사실 꿈이라고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허황된 꿈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올바르고 건전한 꿈이라해도 열심히 꿈만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힘쓰지 않는다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25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시므온이라는 분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주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즉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올바른 기대 즉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바라보는 삶이 아니라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주님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렸기 때문에 더욱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에 성령이 함께 하셨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보기전에는 죽지 않을 거라는 약속을 받게 되었고, 결국 그 약속대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래서 감사와 기쁨으로 영광을 돌리고 할렐루야 찬양하며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만이 진정한 생명과 평안과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위로와 소망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러한 주님 안에 있는 위로와 소망과 은혜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의롭고 경건한 모습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 그 풍성한 은혜를 누리다가 마침내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롭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말그대로 옳은 것입니다. 그러면 옳은 게 뭡니까? 무엇이 정말 옳은 것입니까?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옳습니까? 정치인들이 말하는 게 옳습니까? 경제적 논리에 부합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다수가 가는 길이 옳습니까? 물론 그 중에는 옳은 것도 많은 있습니다. 그러나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설령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절대 의가 아니라 상대적인 의에 불과합니다. 한시적이고 부분적인 것들입니다.

절대적인 의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바르고 확실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오직 거기에 영원한 생명과 자유와 평강과 은총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의로운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경건은 뭡니까?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이 말씀도 의롭다는 말씀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옳고 그 안에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자유가 있음을 믿고 그래서 하나님께 경외심을 가지고 말씀을 따라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말씀에 비추어 정말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인지 아닌지, 이것이 그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는 길인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길인지를 따져보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따라 행동하는 것이 경건한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의롭고 경건한 삶입니다. 오직 그 안에 생명과 기쁨과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십니다. 진리이고 생명이십니다. 완전한 거룩과 의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한 의이고 생명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따르는 것만이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은총을 보장받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의요 경건이요 진리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죽으나사나 주만 따라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안에 진정한 소망 생명 기쁨 은혜 자유 평안 행복 은혜가 있음을 기억하며 주님께 대한 소망과 기대속에서 그 은혜를 사모하며 그 은혜를 기다리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특별히 대강절 첫째주일입니다. 대강절은 성탄절을 맞으며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절기입니다. 기쁨으로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우리 심령을 성결하게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강절을 맞이하여 더욱 우리의 유일한 참 생명이요 기쁨이요 은혜와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주님이 주실 평안과 위로와 영광의 나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기쁨으로 만나기 위하여 의롭고 경건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주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우리 속에 찾아오실 때에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과 기쁨과 희망과 위로와 소망과 평안을 마음껏 맛보며 더 나아가 세상에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과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평안을 보여줌으로 세상에도 생명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주는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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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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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진정한 소망


 

 
 
제목 : 진정한 소망

본문 : 딤전6:17~19

1.진정한 소망

여러분,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정말 무엇을 기다리고 무엇을 기대하며 사십니까? 부자 되는 것, 자식이 출세하는 것,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그것도 기대하고 그것을 위해서도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렇게 되면 무슨 뾰죽한 수가 생길까요?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고 날마다 싱글벙글하며 살아갈까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가보면 똑같아요. 뭐 많이 배우고 돈많고 출세하고 건강하면 맨날 좋아 죽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똑같이 걱정하고 불안하고 염려하고 싸우고 갈등하고 지지고 볶고 삽니다. 그래서 뭐 전직 대통령, 전직 총리, 장관, 재벌 총수, 무슨 팝의 황제니 골프의 황제니 하며 불리던 사람들이나 유명 연예인이나 할 것 없이 자살도 하고 잡혀 가기도 하고 가정불화도 겪고 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의 것은 죽을 둥 살둥 달려가서 얻었다고 하는 순간 이미 멀어지기 시작해요. 세상의 것으로 누리려는 행복은 잡았다고 하는 순간 저만치 날아가서 날 잡아봐라 하면서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좇아 다니다가 결국 인생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도 모르고 세상 것 좇아 다니다가 죽는다면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하고 비참한 인생이 되겠어요.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기대하고 기다리고 힘써 나아가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하고 그래서 우리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만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희망이요, 소망입니다. 주님안에 만이 진정한 생명과 평화와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는 이세상에서도 모든 상황을 초월해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안과 은혜가 있으며, 더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보장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완전하고 절대적이고 영원한 영광과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대한 기대와 소망속에서 사는 자들만이 완전히 후회없는 성공한 인생이 됩니다.

오늘 17절 말씀 보세요.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무엇에 소망을 두지 말라.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무엇을 소망을 두라? 하나님께 두라.

왜요? 재물은 정함이 없으니까. 정함이 없다는 게 뭡니까? 정해져 있는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즉 불확실하다는 거지요.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는 거라는 거지요. 내께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무슨 소리냐 영원토록 내꺼다. 실컷 쓰고 누리고 살다가 죽으면 그게 내꺼지 누구꺼냐 그럴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생명도 돈도 내일을 장담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설령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어도 결국 놓고 가야하고 그거만 믿고 산 인생이라면 결국 영원한 고통 밖에는 남아 있을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소망은 다릅니다. 주님께 있는 소망은 완전하고 영원하고 온전합니다. 영원하고 완전한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평안을 주십니다. 그것만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19절 보세요.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이것이 뭡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선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좋은 터를 쌓는 것이고,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된 생명이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단순한 육체적 생명이 아닙니다. 영적, 정신적, 육체적 생명을 말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완전한 생명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뜻을 따라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쌓는 지혜로운 인생이다, 그런 인생속에 영원한 생명의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정함이 없는 재물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세상의 즐거움을 기대와 기다림과 소망으로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유일한 참 소망이신 주님을 소망께 대한 소망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결코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세상에서도 평안과 기쁨을 누리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2.선한 사업에 부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소망이 다른 사람은 삶의 목적도 다르고 삶의 방향도 다릅니다. 돈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삶의 목적이 돈을 모으는 것입니다. 세상 즐거움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그저 먹고 마시고 노는 일에 사용합니다. 그저 부자되고 건강하게 잘먹고 잘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그저 돈이나 모으고 제 몸 하나 잘 입히고 잘 먹이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세상의 것을 목적으로 삼지도 않고 거기에 얽매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를 준비하며 삽니다. 그래서 돈을 버는 목적도 다르고, 돈과 시간과 재능과 육신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돈과 지식과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는 목적이 다릅니다.

그게 뭡니까?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나 혼자 잘먹고 잘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고 그래서 결국 주님과 나와 이웃이 함께 기뻐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삶이 이생에서나 저생에서나 가장 복되고 기쁘고 아름답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깊이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솔직히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게 무슨 그렇게 의미가 있겠어요? 돈이든 시간이든 재능이든 권력이든 지식이든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그게 무슨 큰 가치를 만들어 내겠어요? 그렇게 해서 자신이 무엇이 그렇게 크게 즐겁겠어요? 여러분, 좋은 것은 함께 나눠야 더 좋아지고 더 많은 가치가 있는 거예요.

자 여기 맛있는 음식이 있어요. 저 혼자 독차지하고 앉아서 먹으면 무슨 맛이 그렇게 있어요? 여럿이 같이 먹으면 얼마나 더 맛이 있어요. 너무 너무 좋은 일이 있어요. 혼자 히죽히죽 웃으며 좋아하는 것보다 모든 사람이 함께 웃고 축하해주고 기쁨을 함께 나누면 얼마나 더 기뻐요? 호화판 유람선이 있어요. 저 혼자 타고 다니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함께 타고 다니며 서로 웃고 즐거워하면 얼마나 더 기쁘겠어요? 좋은 집이 있어요. 저 혼자살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함께 살 때 즐거운 거지요.

여러분, 사람은 원래 관계적인 존재예요. 가족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존재하는 거예요. 본래 그런 존재로 지음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절대 혼자 행복할 수 없어요. 혼자 배터지게 먹고 혼자 대궐 같은 집에서 살고 혼자 좋은 입고 하면서 행복할 수 없어요. 그러면서 행복하다면 그 인생은 죽은 인생이요, 병든 인생이요, 죄와 무지의 종이 된 인생이예요. 결국 영원한 지옥속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이예요.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자기만을 위해서 살면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18절 말씀 보세요.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선한 일이란 포괄적으로 좋은 일을 말합니다. 가난한 자를 돕고, 병든 자와 갇힌 자를 돌아보고, 절망속에 있는 자를 위로하는 등 모든 어렵고 고통받는 이웃을 돌아보는 것을 말합니다. 선한 사업에 부하라는 것은 그런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인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한 일들을 위하여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사용하는데 인색하지 말고 넉넉히 드리라는 것입니다. 나눠주기를 좋아하라는 것은 억지로 마지못해 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런 일들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들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된 인생의 올바른 가치관입니다.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19절에 있습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생명을 취하는 길이다.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나눌 때 그것이 결국은 자기 생명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택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지 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라는 뜻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너도 살고 나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너도 기쁘고 나도 기쁘고 주님도 기쁘고 결국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말 자기 혼자 잘먹고 잘사는 거 그거 별거 아닙니다. 그런 삶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평안과 은혜도 없고요, 있다 해도 별거 아닙니다. 그런 삶은 죄와 무지속에 있는 인생의 모습이요, 영적, 정신적, 인격적, 체적 미숙아의 삶입니다.

여러분, 갓난아기 보세요. 갓난아기는 남을 모릅니다. 그냥 자기밖에 모르죠. 남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성장하여 성인이 되면 남을 배려하게 됩니다.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적, 인격적, 영적으로 자꾸 자라나야 합니다. 자라나서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이웃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여러분, 지금은 대강절 기간입니다.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 속에 기쁨으로 거하시도록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심령속에 기쁨으로 거하시겠습니까? 어떤 심령속에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주님께서 기쁘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자는 부자가 아닙니다. 권력자가 아닙니다. 지식인이 아닙니다. 단순히 윤리적으로 깨끗한 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죄와 무지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거기에 욕심을 두지 않고, 거기에 얽매이지도 않고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심령으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기쁨으로 오십니다.

또한 그렇게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그저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자에게 기쁨으로 찾아 오셔서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평강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목적인 것입니다. 대강절은 바로 그런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준비하는 기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세상의 별거 아닌 돈과 명예와 지식을 바라보며 거기에 소망을 두고 거기에 얽매이는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소망이요, 나의 기쁨이며 영원한 생명의 은총과 더불어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메시야라는 점을 기억하며 그저 겸손히 엎드려 그 분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정말로 주님을 기대하고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며 산다면 그저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살피고 이웃을 돌아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어지 모든 것들을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여러분 심령속에 가득하여 주님과 이웃을 기쁘게 해드리며 여러분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축복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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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은혜충만한 성도

 

 

 

 
말씀 : 엡 3:14-19

제목 : 은혜충만한 그리스도인

 

1.선한 싸움에 승리해야 합니다.

 

어떤 어린 소녀가 큰 사고를 당하여 양쪽 다리를 심하게 다쳐 거의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여러 번의 수술과 물리치료를 받으면 회복될 것이라고 하여 이 소녀는 수술을 받고 물리 치료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기를 몇 차례하는 동안 이 어린 소녀는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 부모님에게 이제 그만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물론 허락할 리가 없었습니다. ‘얘야, 안된다. 힘들어도 참아야한다. 지금 잘 견뎌야 나중에 걸을 수도 있고, 그래야 생활하는데 힘들지 않단다.’하면서 달랬습니다. 그러자 어린 소녀는 ‘아버지, 아버지는 내가 다리를 못쓰면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나를 사랑해 주실 거잖아요? 그러니 저를 집으로 데려다 주세요.’하면서 애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어린 딸을 안아주며 말했습니다. ‘그래, 나는 네가 다리를 못쓰게 되어도 아니 설령 네 온몸을 못쓰게 된다고 해도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그러나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이 고통의 시간들과 싸워 이겨서 더 건강하고 아름답게 성장하기를 바란단다. 왜냐하면 그래야 네 인생이 더 행복하고 풍요롭게 아름다워 질 것이기 때문이란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이 소녀는 일년여 동안의 긴 고통의 순간을 이겨내고 성한 몸으로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모두의 부모님도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아니 아예 바보가 된다고 할지라도, 또 심지어는 죄가운데 빠진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비록 힘들지라도 우리가 어떤 고난이나 죄악과 싸워 이기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고난에 지거나 혹은 어떤 어둠의 세력에 억눌려 초라한 인생이 되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조금 힘들더라도 선한 싸움을 잘 싸워 더 아름답게, 더 거룩하게, 더 온전하게 성장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받아 누리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어떤 고난과 시험과 유혹이 오더라도 그것들과 맞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과 적당히 타협하고 양보하며 살아가는 것은 당장은 조금 편하고 쉬울지 모르지만 결국은 우리 영혼이 유린당하여 그런 것들에게 얽매이고 종노릇하며 결국 인간으로서의 참된 가치나 의미도, 주님 안에 있는 그 풍성한 생명과 자유와 평화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세상의 고난과 시험과 유혹과 핍박과 죄악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맞서 싸울 때 비록 그 과정이 조금은 힘들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누려야 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살다가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상급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딤후4:7,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결코 조금 힘들다고 세상의 죄와 유혹에 적당히 타협하며 양보하며 살아가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모든 죄의 유혹과 시험과 환난을 이기고 진정한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고난과 유혹과 왜곡된 가치들과 맞서 싸워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 안에 온전한 선과 의와 진리와 사랑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심령을 채울 때 하나님의 능력과 선과 의와 진리와 사랑으로서 세상의 모든 고난과 시험과 죄되고 왜곡된 것들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이기겠습니까? 무엇으로 모든 고난과 죄와 악을 이기겠습니까? 우리 힘으로 가능하겟습니까? 그것으로는 안됩니다. 우리는 강한 것 같지 심히 약한 존재입니다.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존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죄와 무지를 깨달아 알 수 있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것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9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바울은 지금 하나님 앞에 간절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데 무엇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느냐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충만한 은혜로 가득 채워지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물질적인 부요함이나 세상의 명예나 세상적인 어떤 축복이나 건강이나 이런 것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함을 덧입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겠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하는 것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 안에 있는 진리와 선과 은혜와 사랑 등의 선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한 가치로 채워져 있지 않으면 죄와 어둠의 세력을 이길 수 없고 따라서 다른 것들 즉 돈이나 건강이나 명예나 지식이나 이런 것들이 아무리 풍성해도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육신이라는 그릇 속에 무엇을 채우느냐가 우리의 삶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이 들어있으면 하나님의 사람이요, 마귀가 들어있으면 마귀의 사람입니다. 진리가 들어 있으면 진리의 사람이요, 거짓이 들어있으면 거짓말쟁이입니다. 사랑과 은혜로 가득차 있다면 은혜의 사람이요, 악과 거짓과 추함이 가득 들어 있으면 악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복된 마음이 가득차 있으면 축복의 사람이요, 원망과 미움과 저주가 가득 들어 있으면 저주의 사람이 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안에는 생명과 진리와 선과 의와 사랑과 축복과 은혜가 가득 들어있으므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우리는 모든 죄와 유혹과 어둠을 이기고 생명과 사랑과 진리와 은혜가운데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함을 받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온갖 충만한 것들로 자신을 채우는 것, 이것이 우리가 정말 은혜와 진리와 생명의 풍성함 가운데 살아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것들로 우리를 채우지 못하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세상의 죄와 악과 어둠의 세력을 이기지 못하여 진정한 평안이나 행복이나 은혜를 누릴 수 없고, 나아가서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은총도 누리기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십니까? 무엇을 위하여 힘쓰십니까? 여러분이 정말 복된 삶을 살려면 무엇을 먼저 채워야 합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물론 육신도 건강해야 합니다. 지식과 교양도 쌓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명예나 권력도 얻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먼저 인간이 되라고 하지 않습니까? 국회의원 판사 의사 목사가 되기 전에 하여튼 외형적으로 무언가 그럴듯한 무엇이 되기 전에 먼저 올바른 인성을 갖춘 인격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정한 인간이 되려면 올바른 인성을 가진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거기에다가 올바른 영성을 플러스해야 합니다. 아니 인성보다 영성이 먼저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인성만 좋으면 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영혼이 죽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올바른 영성과 인성과 지성과 감성을 갖춘 사람이 온전한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이라야 완전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누려야 할 영적 육적 물적 지적 정적 모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을 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믿음과 사랑과 은혜과 진리와 거룩과 의와 선과 지혜로 충만함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올바른 영성과 이성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정말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와 능력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이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함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8,19절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간단히 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면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함을 받을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넓고 길고 크고 높고 깊은 것인가를 알면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함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한마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한없이 크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는 어떻습니까? 그것은 물론 모든 인류, 모든 우주 공간에 미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길이는 어떻습니까? 그 길이는 무한대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어지는 무한한 것이지요. 또 그 깊이는 어떻습니까? 그 사랑의 깊이는 바다 밑바닥까지, 지구 깊은 곳까지 모든 곳에 미치는 것입니다. 높이는 어떻습니까? 그 높이는 하늘 끝에까지 닿는 숭고하고 존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모든 시대, 모든 지역, 모든 인류에 미치는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함을 덧입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 집니까? 그야 우리가 주님의 그 사랑을 알 때 우리는 그 앞에 엎드려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며 엎드릴 때 하나님께서 무한한 은혜로 채워주시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주님이 어떻게 우리는 사랑하셨는지를 안다면 어떻게 그 놀라운 사랑 앞에 감격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 그냥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 가운데 차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을 위하여 그 온갖 모욕과 멸시와 천대와 고통을 당하시고 마침내 처절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그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어찌 그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진정 겸손히 엎드려 그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영광과 찬양을 돌리고 말씀묵상할 때 어찌 주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않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 앞에 엎드리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래서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 때에 우리의 심령에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감격의 눈물이 쏟아져 내리게 됩니다. 그 감격의 눈물과 함께 세상의 모든 원망 불평 짜증 미움 저주 불신 어두운 것 더러운 것 다 독기 시기 질투 이런 모든 찌꺼기들도 다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내 심령속에 천국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하늘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고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하게 빛나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기쁨과 능력과 사랑과 감사가 넘쳐흐르는 삶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느끼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죄인,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이 죄인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건져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더욱 주님 앞에 엎드릴 때 더욱 은혜의 충만함을 입어 우리 가운에 남아 있는 모든 찌끼 같은 것들을 다 쏟아내 버리고 주님안에 있는 놀라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예수님을 온전히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와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하겠는데 어떻게 그 놀라운 사람을 진정으로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늘 17,18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그리스도를 마음에 온전히 모심으로 하나님도 그리스도도 그리고 그의 사랑도 올바르게 안다는 것입니다. 뭐 당연한 거지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실 때 비로소 우리의 어둠과 무지는 물러가게 됩니다. 사단은 결박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갖게 되고, 생명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당연한 일 아닙니까? 우리 속에 빛과 진리와 생명과 사랑의 영이 들어오면 우리 안에 도사리고 사탄의 영이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죄와 어둠의 그림자도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속사람이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게 하시고, 따르게 하시고, 생명가운데 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까짓 알량한 내 고집, 생각, 이성, 가치관, 주장, 경험들을 버리고 예수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께서 나를 완전히 주장하게 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나의 삶에 완전한 완전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니까 빛이시니까 은혜이시니까 능력이시니까 우리는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어떤 유혹과 핍박이 와도 끄떡없이 서서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까짓 세상의 것들에 연연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물결따라 이리저리 휩쓸려다니지 않게 됩니다. 내 작은 생각과 가치관과 의지를 따라 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밝은 눈으로 세상을 보며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모든 약하고 추하고 왜곡된 것들을 이기고 생명력이 넘치고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승리의 사람, 능력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돈도 명예도 권력도 지식도 건강도 좋지만 그보다 앞서 여러분의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정말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생명과 사랑과 진리와 선과 의와 빛과 기쁨과 평강와 위로와 소망 등의 온갖 좋은 것들로 여러분의 심령이 가득채움 받아서 진정 세상의 모든 약한 것과 어두운 것과 힘든 것과 죄의 유혹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이기고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 되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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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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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주님과 동행하려면

 

 

 

제목 : 내가 먼저 하나님 편에 섭시다.

말씀 : 눅18:9-14

 


1.내가 먼저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1861년부터 65년까지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북부지역은 공업이 발달하여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지만 남쪽에는 농없이 주업으로 노예제도가 존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때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을 천명하자 이에 반발한 남부 사람들이 연방에서 탈퇴하고 별도의 대통령을 뽑으면서 남북전쟁이 시작되어 4년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결국 링컨이 이끄는 북군이 승리하여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민주정치를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4년간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동안 웃지못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남군이나 북군이나 모두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북군에 속한 교회의 목사님들과 교인들은 하나님이 우리 편에 되어 주셔서 북군이 이기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또한 남군에 속한 교회는 교회대로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셔서 남군이 이기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얼마나 난감하셨겠습니까? 양쪽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며 싸우며 죽고 죽이고 하면서 서로 내 편이 되어 달라고 하니 하나님이 어느 편에 서야 하겠습니까? 이때 링컨 대통령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전에 먼저 정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하고 그 뜻대로 행하고 그 뜻대로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점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정말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편을 들어달라고 하기 전에 나는 정말 하나님 편에 서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편에서 생활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서 복을 달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는 별로 하나님 편에 있지 않으면서 다른 교인이나 교회의 잘못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교회의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교회가 하는 일들에 대하여 비판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은 그다지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누구 때문에 교회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정녕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교인들과 교회의 잘못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편에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교회가 하는 일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얼마나 열심히 교회를 섬겼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은 사랑의 주님이라서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함에도 우리를 찾아와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요,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다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찾아오실 때에 주님을 진정으로 영접해야 하고, 영접하였으면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응답하여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고, 그렇게 주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질 때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충만하게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요14:2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말씀그대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라야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자요, 또한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께도 사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를 달라고 하기 전에 주님이 우리를 그 놀라운 부르심과 사랑에 응답하여 주님 말씀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교회나 성도나 기타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하여 비난하기 전에 먼저 내 스스로가 주님편에서 말씀대로 살아가며 그래서 사랑과 긍휼을 베풀고 교회도 열심히 섬겨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며 주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과 은총을 세상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우리가 주님의 편이 되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주님편이 되어 주님과 동행하려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오늘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과 세리, 이 두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보세요. 어디에 갔습니까? 성전에 갔습니다. 왜 갔습니까? 기도하러 갔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리새인은 교만하고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기도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물리침을 당하고, 겸손히 자신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는 기도를 드림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편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몸인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말씀듣고, 찬양하는 것이 내가 주님의 편에 서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증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교회가 뭡니까?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엡1:23절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 즉 예수님으로 충만한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물론 주님의 자녀이며 동시에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입니다. 고전12:27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우리가 주님의 몸의 지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우리는 그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인데 지체인 우리가 어떻게 몸된 교회를 떠나서 존재할 수 있습니까? 또한 교회는 주님으로 충만한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지상 교회가 온전치는 못하지만 그래도 지상에서는 주님으로 가장 충만한 곳이 교회밖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주님으로 충만한 교회를 가까이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주님 편에 설 수가 있겠습니까?

요15:5절을 보십시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보십시오. 주님은 포도나무 원줄기이고 우리는 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 붙어 있어야만 생명을 부지할 수 있고 나아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우리는 그 지체입니다. 주님은 포도나무 원줄기이고 우리는 그 가지입니다. 또한 교회는 주님으로 충만한 곳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떠나 어떻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어떤 분은 꼭 교회에 다녀야 신앙생활하나? 혼자하면 되지. 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분은 교회를 안다니며 나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은 100%틀린 생각입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절대로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멀리하는 사람치고 신앙생활 제대로 하는 사람 없습니다.

물론 정말 교회에 가기를 간절히 원하는데 도저히 갈 수가 없는 상황이라면 문제가 다릅니다. 그러나 얼마든지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지 않는 사람은 무슨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고, 나아가 신앙생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어떻게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인 우리가 몸된 교회를 뗘나서 신앙생활을 한단 말입니까? 어떻게 주님으로 충만한 교회를 떠나서 은혜충만한 신앙생활을 한단 말입니까?

여러분, 부모님을 멀리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허물이나 들추고 다니면서 부모님을 공경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남편과 아내가 서로 멀리하고, 대화도 하지 않고, 요구를 거부하고, 헐뜯고 비방하며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모이기를 힘쓰라, 주일을 성수하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하셨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살면서 하나님 편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로 하나님 편에 서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공경한다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한다면 교회와 성도들을 비난하고 비평하기 전에 내가 먼저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앞장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를 원하신다면 열심히 교회에 나아와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말씀듣고 찬양하는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편이 되기 위하여 기억해야 할 두 번째는 주님 앞에 자신의 죄와 무지와 연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먼저 11,12절에 보면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토색과 불의와 간음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 드렸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사실 감사한 것 아닙니까? 못된 짓 안하고 금식하고 십일조 생활하고 얼마나 그럴듯한 삶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받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한마디로 바리새인의 기도는 자기 의를 내세우며 남을 정죄하고 무시하는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 나는 이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즉 옆에서 기도하고 있는 세리를 지칭하며 나는 저 나쁜 사람, 저 죄인과 같지 않기 때문에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즉 이 사람은 교만하고 무지하고 남을 정죄하고 무시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세리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습니까? 13절 보겠습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세요. 세리는 ‘멀리 서서’ 기도하였습니다. 즉 자신의 죄와 무지를 생각할 때에 감히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가 없어 멀리 서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자신의 죄와 무지와 허물을 생각할 때 너무 죄스럽고 너무 송구스러워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가슴을 치며’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왜 가슴을 칩니까? 너무 슬프고 답답하여 가슴이 뻐개지는 것 같아서 가슴을 치는 것입니다. 이 세리가 자신의 죄와 무지와 허물을 생각할 때에 너무 마음이 답답하고 아파서 가슴을 치며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자신의 죄와 무지를 인하여 애통하며 회개하며 죄사함 은총을 간절히 탄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 세리의 기도를 주셔서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편이 되기 위한 또 하나의 과정입니다. 먼저는 하나님 앞에 나와야 되고, 그 다음에는 겸손히 자신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과 한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5: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진실로 자신의 죄와 무지와 허물과 미련한을 인식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긍휼을 구하는 자에게 주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열심히 주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나와서 진실로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부족합니다. 미련합니다. 주여 저를 용서하소서.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저를 도와주소서하면서 주님의 긍휼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남의 죄나 허물이나 부족한 것을 보고 비난하고 헐뜯음으로 남의 가슴을 치게 만들지 말고 겸손히 자기 가슴을 치며 엎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온전힌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축복과 은총을 더욱 충만히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겸손하게 엎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내 편이 되고 내가 하나님의 편이 되려면 자신의 죄와 무지와 허물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오늘 14절 하반절을 보세요.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다시 말씀드려 바리새인이 의롭다하심을 받지 못한 이유는 교만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외적으로는 바리새인이 세리보다 더 깨끗하고, 종교생활도 잘 했을지 모릅니다. 세리는 외적으로 바리새인보다 더 죄인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자기 죄는 말하지 않고 그 쥐꼬리만한 의를 내세웠습니다. 자신의 죄는 모른 채 세리를 경멸하고 멸시하고 조롱했습니다. 반면 세리는 비록 외적으로 허물이 많았지만 자신의 죄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감히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우러러 보지도 못했습니다. 겸손히 엎드려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를 받아 주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사회와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교만입니다. 인간이 과학이나 문화나 예술이나 지식이나 제법 뭐 좀 이루었다고 교만에 빠져 하나님까지도 제멋대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자기 눈속에 들보가 있는 줄은 모르고 남의 눈의 티를 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은 깔아 뭉기고 자신을 높이려고 합니다. 이런 행위는 첫째는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감히 하나님께 도전하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행위요 동시에 결국 인간 사이에 갈등과 아픔과 고통을 주는 미련한 행위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물리침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자신의 분수를 알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시147: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잠18:12에서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여러분, 오늘은 대강절 둘째주일입니다. 대강절이란 주님의 낮아지심과 사랑을 기억하며 그 주님이 우리 심령가운데 온전히 임하시도록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나아가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과 사랑과 은총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강절을 보내면서 저와 여러분은 더욱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편이 되어달라고하기 전에 나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정말로 하나님 편이 되어 은혜가운데 살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남의 허물과 죄를 말하기 전에 자신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과 허물을 인정하고 자기 가슴을 치며 겸손하게 엎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와같이 여러분이 진정 하나님 편이 되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편이 되어 주실 때에 하나님안에 있는 그 놀라운 은총을 충만히 받아 누리고, 더 나아가 주님안에 있는 그 생명과 평강과 자유와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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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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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문제이길 수 있습니다

 

 


제목 : 문제, 이길 수 있습니다

말씀 : 눅4:38,39


1.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시각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조금 지저분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개 눈에는 똥밖에 안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관심 갖는 것만 보인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대부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종북주의자들은 북한 정권을 고무 찬양합니다. 그들은 대한민국 정부의 발표보다 북한정권의 발표를 더 신뢰한다고 합니다. 평양에 다녀와서 그들이 다같이 잘 먹고 잘살고 있다며 이상적인 사회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억압과 강제노동과 굶주림 속에 북한을 탈출하다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대한민국 세금으로 운영하고 있는 일부 정당에서도 북한 당국의 온갖 만행과 거짓과 유린당하는 주민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없고, 우리 정부에서 조금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난리를 칩니다.

이게 바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관심 갖는 것만 보는 거지요. 그러면 내가 보고 싶고 관심 갖는 것이 뭡니까? 그게 바로 내 인격이고, 사상이고, 가치관입니다. 그 잣대로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거지요.

이런 원리는 세상의 모든 것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자기의 사상과 생각과 가치관 같으면 좋게 보이고, 좋게 보이면 허물은 보이지 않고 좋은 점만 크게 확대되어 보입니다. 반대로 좋지 않게 보면 좋은 점은 작아져 잘 보이지 않고 나쁜 점만 크게 확대되어 보입니다. 그래서 지난 대통령선거 유세시에 문재인 후보가 말하기를 이명박대통령은 빵점짜리 대통령이고 고 노무현대통령은 그래도 70점은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빵점이 뭡니까? 교회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조금 잘못하는 것은 침소봉대시켜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며 난리를 치고, 잘하는 것에 대하여는 입 딱 다물고 아무소리도 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앞에 다가오는 모든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문제의 시각으로 보는 사람은 작은 문제도 큰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문제를 단지 하나의 과정이나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작은 문제로 보는 사람은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얼굴이 좀 못났어도 아무 문제없이 당당하게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은 꽤 괜찮은 얼굴인데도 이리 저리 뜯어 고칩니다. 공부를 좀 못해도 당당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공부를 꽤 잘하는데도 성적이 좀 떨어졌다고 자살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꽤 괜찮은 직장에 다니면서도 맨날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고, 남들 보기에 번듯한 직장은 아니어도 감사하며 기쁨으로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많지 않아도 남을 도우며 사는사람이 있는가하면 많은 것을 가지고도 어떻게든지 더 가지려고 혈안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문제가 문제가 아니고 문제를 문제로 보는 사람이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수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데스바네아에서 열두명의 정탐꾼들을 보냈을 때 열명의 정탐꾼들은 큰 일 났다. 우리는 메뚜기 같다. 가면 다 죽는다. 그러니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반대로 아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가자. 그 땅은 약속의 땅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생각과 말대로 되었습니다. 열명의 정탐꾼들과 그들의 말을 듣고 가면 죽을 것이라면서 원망하고 불평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로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복지에 들어갔습니다. 문제를 문제로 본 사람은 실제로 문제가 되었고,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은 사람은 문제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결코 문제에 함몰되어서는 안됩니다. 상황, 현실, 조건, 문제에 끌려 다녀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꾸만 문제의 눈으로 문제를 보며 맨 날 환경 탓, 상황 탓, 다른 사람 탓 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꾸만 남의 탓만 하면서 심지어 남편이나 아내를 바꾸면 문제가 해결 될까하고 쉽게 이혼을 하기도 합니다. 직장을 바꾸면 해결될까 하여 이리저리 직장을 옮기는 사람도 있고, 교회에 문제가 많다며 이 교회 저 교회를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죽을 때까지 문제 해결 못합니다.

여러분, 마14:30절의 말씀을 보세요.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어서 예수님에게로 가다가 일어난 일입니다. 처음에 주님을 보고 갈 때는 잘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가다보니 성난파도가 넘실거리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자 두려움이 생기고, 두려움이 생기자 바다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난 파도라는 문제를 보지 않고 주님을 보았을 때는 성난 파도가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문제를 바라보니까 문제가 생겼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문제 저 너머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문제를 이기게 하시고 해결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문제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주님의 뜻을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여러분 앞에 놓여져 있는 모든 크고 작은 문제들을 이기고 승리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2.예수님을 온전히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올바른 가치관과 시각을 가지고 다가오는 모든 문제들을 이기고 승리하려면 예수님을 우리의 심령속에 온전히 모시고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올바른 시각과 가치관을 갖게 되고 나아가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문제가 생긴 베드로의 가정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그 집에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즉 38절의 말씀처럼 베드로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열병도 그냥 열병이 아니라 중한 열병 즉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심한 열병에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으로 바로 이 때 예수님이 이 집에 오시게 되어 문제를 해결해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39절의 말씀이지요.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문제가 생긴 베드로의 가정에 예수님이 찾아가셨을 때 문제가 해결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적의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이 무슨 마술사나 그저 엄청난 능력자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계신 곳에 문제가 사라지고, 문제가 사라진 곳에 생명이 역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그렇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생의 가장 큰 문제인 죄의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십니다. 반대로 마귀는 문제를 만드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고, 사람과 사람사이를 사랑하게 만들고 화해하게 만들고 그래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하십니다. 반면에 마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을 갈라 놓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갈등과 미움과 분열을 조장합니다. 그래서 죽음의 길로 치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계신 곳에 반드시 문제가 해결됩니다.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습니다. 난 주님을 모셔 들였는데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하면서 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유는 셋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아직 온전히 만나지 못했거나 아니면 이미 해결이 되었는데 깨닫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아직 좀 기다려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문제를 해결하시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즉시로 해결 주십니다. 바로 오늘 베드로의 장모와 같은 경우입니다. 복음서에는 이렇게 즉각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신 예가 부지기수로 나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게 즉각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아주 오래 걸릴 때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손을 하늘의 별과같이 땅의 티끌처럼 많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받고도 25년이 지난 뒤 겨우 이삭 하나를 달랑 주셨는데 바로 그 이삭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도 근 10년 동안이나 사울왕의 끈질긴 추격을 받으며 쫓겨 다니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되어 왕위에 올라 이스라엘의 최고의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반면 문제를 제거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신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사도바울입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 곧 큰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복음 사역에 큰 장애물이 될 만큼 큰 육체의 가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육신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고후12:9절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무슨 뜻입니까? 너는 그 약함으로 나를 더욱 의지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내 능력이 더욱 너와 함께 하여 복음의 역사를 더 잘 감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네게 주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그 즉시로 주님의 뜻을 받아드리고 감사와 영광을 돌렸습니다. 아니 도리어 자랑거리로 여겼습니다. 문제는 제거되지 않았지만 문제는 해결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문제는 반드시 해결됩니다. 주님앞에서 해결되지 않을 문제는 없습니다. 때로는 즉시 문제를 제거하시기도 하십니다. 때로는 소망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게 우리를 훈련시키고 연단시켜 문제를 서서히 해결해 나가게도 하십니다. 때로는 문제를 그대로 놓아두고 그 문제를 통하여 주님의 능력을 나타냄으로 해결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 여러분의 삶속에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두려워말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해결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를 상황과 환경과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겸손히 주님 앞에 내려놓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주님이 여러분과 더욱 함께 하심으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문제를 이기는 또 하나의 적극적인 방법은 섬김의 삶입니다. 섬김의 삶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삶입니다. 죄와 어둠 가운데 있는 영혼들에게 기쁨과 희망과 생명을 주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문제가 다가오지도 않고, 혹 다가와도 얼마든지 이기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을 만나 문제를 해결받고 나서 전혀 다른 삶으로 인생의 방향 전환을 하게 됩니다. 39절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여기서 수종든다는 것은 ‘시중들다, 섬기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원어에서 이 말은 과거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과거미완료시제란 과거에 어떤 동작이 시작되어 아직 완료되지 않은 그러니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 여인은 예수님께 은혜를 받고 기쁨으로 예수님을 섬기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그때로 끝나지 않고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따라가며 주님을 섬겼던 많은 여인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 눅8:2,3절에 보면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많은 여인들이 주님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소유를 가지고 주님을 섬겼는데 그 들 중에는 이름이 알려진 여인도 있고, 알려지지 않은 여인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여인들가운데 틀림없이 베드로의 장모도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조금 전에 말씀드린대로 수종든다는 것이 그 당시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시작한 순간부터 후에 그 사실을 기록한 그 시점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여러분, 예수님 곁에는 이렇게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예수님을 섬기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그 놀라우신 은혜를 기억하며 예수님 곁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섬겼습니다. 그렇게 예수님 곁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섬길 때 그들은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게 되었고 그러니까 더욱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문제는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고, 문제가 와도 넉넉히 물리쳤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곁에서 주님을 섬기는 것은 은혜를 받은 자의 응답임과 동시에 은혜와 능력을 덧입는 비결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자들이 교회 다니라 하면 이런 저런 이유가 많이 있지만 그 중에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교회에 다니면 하고 싶은 일도 맘대로 못하고 구속당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일날 놀러도 못가고, 술도 못 먹게 하고, 화투도 못치게 하고, 이래라 저래라 간섭이 많고 그래서 재미도 없고 구속받기도 싫다며 교회에 오지 않는 경우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중에도 심지어는 일이 바빠서, 혹은 산에 가기 위하여 교회에 못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모습은 인생의 진짜 기쁨이 무엇인지, 진짜 보람과 가치와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몰라서 하는 소립니다. 그까짓 것 놀러 다녀봐야 얼마나 마음이 기쁘고 흡족하겠습니까? 그까짓 것 먹고 마시며 놀아봐야 그게 뭐 그렇게 재미있습니까? 더군다나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은 공허할 뿐이고 후회만 남는 일입니다. 물론 건전한 쉼이나 놀이마져도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 때문에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하고 그것이 주님을 섬기는데 방해가 된다면 단연코 배격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여러분, 설령 세상적으로 건전하게 보낸다고 할지라도 그저 나하나 편하게 재밌게 먹고 마시고 즐긴다면 그게 무슨 큰 기쁨이 있겠습니까? 무슨 큰 보람이 있겠으며, 무슨 큰 가치가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부모에게 유산을 받든지 아니면 복권에 당첨에 되든지 아니면 투기를 하든지해서 힘 안들이고 편히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사는 것을 자랑거리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쉽게 궂은 일, 힘든 일 안하고 먹고 사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건 결코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하셨습니다. 편하게 무사안일하게 호화스럽게 사는 인생은 육체는 조금 편할지 모르나 무가치한 인생입니다. 세상을 위해서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나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하는 그런 인생에게 무슨 진정한 기쁨이나 보람이나 가치나 의미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 최선을 다하는 삶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를 위하여 섬기는 삶에 기쁨이 있습니다. 마음 뿌듯함이 있습니다. 뒷맛이 개운합니다. 자존감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도 인정을 해줍니다. 그런 인생에는 문제도 저절로 사라집니다. 혹 문제가 온다해도 그런 사람은 의연히 이겨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만 바라보지 말고 문제 저편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문제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주님의 은총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문제를 남의 탓으로 돌리지도 말고 주님을 의지하며 적극적으로 풀어나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섬김으로 삶의 가치를 높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모든 문제를 물리치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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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윤택한 영혼을 위하여

 

 

 

 

말씀 : 갈2:19~21

제목 : 영혼을 윤택함을 위하여

 

1.진리 안에서의 갈등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마음이 무겁고 갈등과 고민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초신자들은 공연히 교회에 나와서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차라리 아예 하나님도 모르고 말씀도 듣지 않았더라면 부담없이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텐데 공연히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말씀 듣고 보니까 부담만 되고, 걱정이 되고, 갈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일을 잘 하지 못하는 것도 부담이 되고, 이웃을 섬기지 못해서 마음이 무겁고, 때로는 주일날도 가족들하고 어디 나들이나 다녀오고 싶은데 그것도 맘대로 못하고, 헌금생활 제대로 못하는 것도 마음이 무겁고 그렇다고 또 하자니 돈이 아깝고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과 고민이 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 여러분에게 이런 고민과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혼의 감각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고민과 갈등이 없다면 그 영혼은 완전히 죽어서 감각이 없는 영혼인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은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육신이 시키는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놀고 싶으면 놀고, 아무거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도 고민도 없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도덕적 감각이 완전히 죽어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도적질을 하고도 오늘 한건 했다며 먹고 마시고 즐깁니다. 사기꾼들은 사기 쳐서 돈을 빼앗고는 기분이 좋아서 낄낄 거립니다. 마약에 취한 사람은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좋다고 희희낙락합니다. 술에 취하면 죄를 짓는데 용감해 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덕성이 마비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양심이 죽어서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때리고 차고 꼬집고 별짓을 다해도 아픈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죄짓고 제멋대로 살아가면서도 고민이 없습니다. 희희낙락합니다. 제 마음대로 살아가면서 나는 자유하다, 평안하다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아픔이 있습니다.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은 죄를 지으면 아픕니다. 조그마한 죄에도 통증을 느낍니다. 그러나 죽은 것은 아픔이 없습니다. 죄를 짓고도 뻔뻔합니다. 그래서 영혼과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저 육의 욕구를 따라 살면 되었지만 예수님 믿고 영혼이 살아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한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도 옛 자아가 남아서 자꾸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도록 충동질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주인이었기 때문에 내 맘대로 살면서 아무 갈등과 고민 없이 마음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새주인이신 예수님을 모셔들이고 예수님이 이끄시는대로 살아가려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내가 주인 노릇하던 그 행세가 남아 있어서 자꾸만 육의 욕망을 따라 가려고 할 때가 많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진리 때문에 겪는 고민과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요, 진리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갈등과 고민이 우리를 더욱 하나님 앞에 세움으로 성화의 길을 가게 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좀 더 풍성하게 누리게 하는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후7:10절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지만 그 죄인중에 괴수라는 인식이 자신을 더욱 하나님 앞에 가까이 세우게 함으로써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던 신앙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신앙생활하면서 진리 때문에 겪는 갈등과 고민이 있을 때, 내가 정말 너무 부족하고 미련하고 죄많은 인생이라고 생각될 때, 하나님께 너무 죄송스럽고 마음에 부담이 되고 갈등이 생길 때 너무 낙심하고 탄식하고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책하고 탄식하고 낙심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더 주저앉힐 뿐입니다. 힘을 빼놓고 무기력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은 하납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래서 갈등과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으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께서 힘주시고 은혜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점점 성화되어가고 그러면 점차 그런 갈등과 고민도 최소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고민과 갈등보다는 성령께서 주시는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훨씬 크기 때문에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소망과 참 자유가운데 할렐루야 찬양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하면 좀 더 성화되어 주님과의 갈등을 최소화시켜 주님의 은혜들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을까요?

2.속사람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갈등과 고민을 이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우리를 그렇게 고민과 갈등과 죄속으로 몰아가는 옛자아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자아를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속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자아보다 새 자아가 힘이 훨씬 세면 우리는 옛자아에게 질질 끌려다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자아보다 옛자아가 힘이 세면 옛자아에게 질질 끌려다니니까 우리의 삶이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한 인디언 노인이 손자에게 말했었습니다. “얘야, 사람의 마음속에는 늘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단다. 한 마리는 악마 같은 놈으로 늘 거짓과 미움과 도적질과 향락과 음란과 분노와 질투와 탐욕과 교만 등의 악한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나쁜 길로 내몰려고 하고, 다른 한 마리는 착한 늑대로써 믿음과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희망과 친절과 선함과 겸손과 진실과 용서 쪽으로 우리를 끌고 가려고 하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와 같이 나쁜 늑대와 좋은 늑대가 들어 있어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단다.”

그러자 손자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그러면 좋은 늑대와 나쁜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기나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그야 사람이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기지!” 그러니까 나쁜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나쁜 늑대가 힘이 세져서 이기고, 좋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좋은 늑대가 힘을 얻어서 나쁜 늑대를 굴복시킨다는 것이지요. 힘이 센 놈이 이기는 것은 당연한 거지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 믿고 예수님을 새 주인으로 모셔들이더라도 지금까지 우리를 완전히 지배해왔던 이 나쁜 늑대인 옛자아가 완전히 물러가지 않아서 자꾸만 새자아에게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나쁜 늑대인 옛자아를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 나쁜 옛자아를 이기려면 새자아를 강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3:16절에서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속 사람을 강건케 하라. 그래야 너희가 세상의 모든 죄와 유혹과 왜곡된 사상들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쁜 늑대의 힘을 약하게 만들고, 좋은 늑대를 힘이 강하게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육체를 강건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육신에 필요한 영양분을 듬뿍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하면 됩니다.

영혼의 강건함도 동일합니다. 영적인 좋은 양식을 충분히 섭취하고 영적으로 열심히 훈련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쁜 늑대인 옛 자아에게는 먹이를 주지 말고, 좋은 늑대에게만 먹이를 주고 그 좋은 늑대가 열심히 움직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쁜 늑대는 점점 힘을 못쓰게 되고, 완전히 먹이를 끊어 버리면 굶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좋은 늑대인 새자아에게는 영양가 있는 풍성한 양식을 충분하게 공급해 주면 살이찌고 생명력이 풍성해지고 힘이 세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양식만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영양가 있는 양식을 듬뿍주고 열심히 운동을 시켜야 근육이 튼튼해져 힘이 세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자아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듬뿍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시키면 힘이 세져 바짝 말라서 힘없는 옛자아 따위는 단숨에 때려 눕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쁜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무엇이고, 좋은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무엇입니까? 물론 영적, 정신적 양식입니다. 나쁜 늑대에게 주는 먹이는 이런 것들입니다. 맨날 싸우고 죽이고 빼앗는 폭력적인 오락을 즐기거나 그런 폭력적이고 음란한 영화를 보고, 술집이나 도박장을 기웃거리고, 거짓되고 속되고 우상숭배와 저속하고 더러운 말을 일삼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등이 모두 못된 늑대가 좋아하는 먹이인 것입니다.

반대로 책을 읽어도 건전한 교양도서를 읽고, 아름다운 사랑과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줄수 있는 영화를 보고, 믿음의 사람들, 선한 사람들, 진실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는 것은 좋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확실한 영혼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것은 우리 영혼을 살리는 확실한 양식입니다. 기도하며 찬양하며 믿음 안에서 아름답게 교제하는 것도 우리 영혼을 살찌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생명력이 넘치게 하는 귀한 양식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전도를 하고 이웃을 돕고 선을 행하는 것은 좋은 늑대를 열심히 운동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의 양식을 먹고, 세상에서도 아름답고 선한 것들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며 선을 행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좋은 늑대에 양식을 풍성하게 공급하고 열심히 운동을 시키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100%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아가 옛자아를 이겨 거룩하고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꾸만 옛자아에게 먹이를 주고 새자아는 거의 굶다시피 한다면 보나마나 옛자아가 새자아보다 힘이 세니까 옛자아에게 져서 질질 끌려다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6:55절에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생수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우리 심령에 모셔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잘 안하니까 영양실조에 걸려 새자아가 맥을 못추는 것입니다. 자꾸만 세상의 헛된 양식만을 사모하며 그것만을 쫓아다니니까 옛자아는 기세등등하고, 새자아는 빈약하기 짝이 없어 옛자아 앞에서 기도 못펴고 초라한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시편1:1-3절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양식을 잡수시기 바랍니다. 억지로라도 잡수시기 바랍니다. 살기 위해서 잡수시기 바랍니다. 밥맛이 없을 때 살기 위해서라도, 힘을 내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억지로라도 먹고 영적인 운동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몸을 안 움직이면 몸이 자꾸 약해집니다. 아예 안 움직이면 온 몸이 굳어서 꼼짝도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움직이기 싫어도 자꾸 움직여야 합니다. 운동하기 힘들고 귀찮아도 자꾸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몸이 힘을 쓰는 것입니다.

새 자아도 그렇습니다. 억지로라도 먹어야 합니다. 귀찮아도 먹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영적인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자아가 강해집니다. 힘이 세집니다. 그래서 옛자아를 이깁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양식, 생명의 양식을 열심히 먹고, 열심히 영적인 활동을 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속에 있는 새 자아, 영혼, 좋은 늑대가 토실토실 살이찌고 강건해지고 생명력이 넘침으로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전해오는 옛자아를 단숨에 눕혀 버리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예수님을 완전한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속사람을 강건케하여 옛자아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듣고 선하고 좋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열심히 참여해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변화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런 과정에서 예수님이 내안에 온전히 들어오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런 지혜와 능력과 은혜를 달라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세울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드디어 예수님이 완전히 우리 가운데 들어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진리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옛자아란 놈이 감히 준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악바리 같은 옛자아가 대들긴 하겠지만 그러나 한방에 K.O. 시켜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옛자아가 우리 가운데 온갖 유혹과 정욕과 탐심을 불러 일으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고 협박도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면 옛자아는 이빨도 빠지고 발톱도 빠지고 힘도 다 빠져버린 호랑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빨도 발톱고 힘도 다 빠져 버린 호랑이는 무늬만 호랑이지 실상은 호랑이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런 나쁜 늑대, 나쁜 호랑이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그런 것들을 물리쳐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삶을 살았기에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을 온전히 그의 심령속에 모셔 들여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을 때에 모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도전과 유혹과 핍박과 환난과 고난을 이기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0절에서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죽었다.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있는 것은 오직 믿음 안에서 즉 믿음을 따라서, 말씀을 따라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이 되셔서 완전히 그를 사로 잡았기 때문에 주인이신 주님만을 위해서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에게는 옛자아가 더 이상 준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모든 역경속에서도 주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고 하면서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며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에게 신앙적 갈등과 고민이 있습니까?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습니까? 희망적 징조입니다. 무언가 영혼이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거기에 안주하지도 마십시오. 주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조금 더 힘을 내어 여러분의 거듭난 자아에게 양식을 듬뿍 공급하십시오. 영적인 활동을 조금 더 활발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힘 주시고 은혜 주시고 능력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새자아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생명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새자아가 옛자아를 확실히 제압하고 예수님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와 기쁨과 평안과 은혜를 온전히 누리는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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