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설교 ]기다림과 인생 

 

 

 
말씀 : 눅2:25~27

제목 : 기다림과 인생

1.기다림이 인생을 결정합니다.

19세기 중반 미국에 나다니엘 호손이라는 작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청교도 가정에서 태어나 대표작인 주홍글씨를 비롯한 많은 교훈적 소설을 남겼는데 그중에 ‘큰 바위 얼굴’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 어니스트의 고향마을 앞산에는 인자한 사람얼굴 모양의 큰 바위가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언젠가 이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나타나 이 땅에 큰 소망과 위로를 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기다리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어니스트는 한편으로는 그런 분을 꼭 만나보겠다는 기대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나도 큰 바위 얼굴을 닮아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과 위로를 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진실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갑니다.

세월이 흘러 그가 장성하였을 때 그 마을에는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는 많은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돈을 많이 벌어 거부가 된 사람, 위대한 장군이 된 사람, 유명한 정치가나 학자가 된 사람 등 소위 사회적으로 성공하였다고 하는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큰 바위 얼굴처럼 환대를 받습니다. 그러나 어니스트는 그들이 큰 바위 얼굴이 아님을 알고 실망합니다.

그러는 동안 어니스트는 전도사가 되어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는데 이 설교를 들은 한 시인이 이 분이 바로 큰 바위 얼굴이라고 외치게 됩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도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임을 인정하며 그의 삶과 말씀을 통해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정작 어니스트는 자신은 큰 바위 얼굴이 아니라며 계속해서 큰 바위 얼굴처럼 살기를 힘쓰며 그를 기다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기다림이 우리의 미래의 모습을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됩니다. 어니스트는 인자한 얼굴의 성인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렸기에 그를 기쁨으로 만나기 위하여 또는 그 자신이 큰바위 얼굴과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큰 바위 얼굴 닮기 위하여 힘썼던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큰 바위 얼굴을 기다리며 그 모습을 닮기를 힘썼을 때 마침내 큰 바위 얼굴과 같은 모습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죽자사자 돈만 바라는 사람은 죽자사자 돈을 따라가게 되고 그러면 그 사람에게서는 돈 냄새가 날 것입니다. 그저 세상 즐거움만 바라보는 사람에게서는 결국 향락에 찌든 모습이 나타날 것입니다. 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은 일에 파묻혀 살게 되고 결국 그 얼굴이 일에 찌든 모습이 나타날 것입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주님 뜻대로 살아가기를 힘씀으로 주님의 모습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설렘으로 기다립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기쁨으로 만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하고 예쁘게 단장을 합니다. 그래서 겉모양뿐 아니라 말도 예쁘게 하게 되고, 행동도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몸도 마음도 예뻐지는 것이지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기다림은 우리에게 꿈과 희망과 설렘을 가져다줍니다. 동시에 기다림은 그 기다림의 대상과의 기쁨의 재회를 위하여 우리를 돌아보게 만들고 가다듬게 만들고 아름답고 거룩한 모습이 되기를 힘쓰게 만듭니다. 그래서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희망과 소망과 아름다운 삶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8:34,35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주의 은혜를 간절히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가까이할 때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받기 위하여 더욱 힘쓰게 되고 그럴 때 결국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에게 정말 생명의 은총과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에 대한 기다림속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의 유일하고 완전한 스승이시며 구세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영광과 은총을 가져다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완전한 생명이시며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기대와 소망과 기다림속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주실 참된 평안과 위로와 영원한 천국에 대한 기다림속에 살아갈 때에 점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며 더욱 은혜와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기다림의 대상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암만 기대하고 기다리고 힘을 써도 엉뚱한 것을 기대하고 기다리고 힘쓰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아니 그냥 아무 소용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공연히 시간과 돈과 정열을 헛된 곳에 사용하게 되고 정작 반드시 해야 할은 하지 못하게 됨으로 큰 낭패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에게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있는 것을 기다리며 그런 분을 만나고 그 안에 있는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로 그렇게 우리가 유일하게 기다리고 사모해야 할 분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살던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시므온이라는 할아버지였는데 당시 이스라엘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압제 하에 있었고, 경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형식주의와 외식주의가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류의 위로자시며, 구원자이신 메시아가 속히 오셔서 그 나라와 백성을 구원해 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그저 정치 경제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시므온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과 위로와 자유를 가져다 줄 참 메시아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 참 생명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25,26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무엇을 기다렸다고요? 이스라엘의 위로입니다. 그러면 그 위로라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정치적으로 로마에서 해방되는 것이었습니까? 헐벗고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까? 더 웅장한 예배당에서 멋진 프로그램과 그럴듯한 예배의식 속에서 폼나게 종교생활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어떤 것을 통한 위로가 아니라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2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그는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이신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렸고 그러자 성령께서 죽기 전에 꼭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래서 그 말씀대로 그는 죽기 전에 예수님을 만나 큰 위로와 기쁨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위로와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정말 우리에게 자유와 평화와 안식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돈도 어느 정도 위로가 됩니다. 정치가 안정되면 어느 정도 평안을 줍니다. 경제가 활성화되면 어느 정도 사람들의 삶속에 활기가 넘치게 됩니다. 압제를 당하던 사람들이 압제에서 풀려나면 그것도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우리의 완전한 위로와 소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은 결코 참된 평안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 돈이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와 평안이 된다면 왜 대기업 총수들이 무슨 비자금이다 사기성 어음이다 하면서 툭하면 검찰에 불려 다니고 심지어는 자살까지 하겠습니까? 권력과 명예와 지식이 위로와 기쁨과 평안을 줄 수 있다면 왜 많은 정치인이나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뇌물이다 향응 제공이다 하면서 불려 다니고 망신을 당하고 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위로와 기쁨과 평안과 소망과 안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 안에 참 생명과 기쁨과 행복과 자유가 있습니다. 요8:32을 보십시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무엇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까?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와 유혹과 욕망과 어둠과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과 사망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세상의 모든 돈과 권력과 명예와 영광으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4:27절에는 또 말씀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나의 평안을 주겠다. 세상이 주는 것은 상황과 환경에 따라 변하고 결국은 사망에 삼킴을 당하는 것이지만 내가 주는 평안은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고 심지어는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의 소망이나 기다림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확실히 현실화된다는 보장도 없고, 설령 현실화된다해도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이요, 한시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안개처럼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지켜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기대와 소망과 기다림은 너무나 확실하게 우리 현실 속으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인생의 모든 문제에게 대한 완전한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모든 시대 모든 공간 모든 사람에게 효력이 있습니다. 영원하고 완전한 생명과 평안과 위로와 기쁨을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한 소망과 기대는 우리의 모든 것을 완전히 충족시켜 주는 완전한 소망이요, 완전한 기다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에 필요한 정신적 물질적 육체적 풍성한 은혜에 대한 소망이나 기다림도 물론 가져야 하겠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온전한 위로와 자유와 평강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진정으로 완전한 소망과 기쁨과 자유와 평강을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예수님이 주실 그 놀라운 은혜에 대한 기다림속에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리는 자에게 한량없이 베풀어주시는 주시는 풍성한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기쁨과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기다리는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기다림이 있어야 하는데 우선은 기다림의 대상이 올바르게 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기다리는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헛된 것을 기다리면 소용이 없고, 또한 아무리 옳은 것을 기다려도 기다리는 자세를 올바르게 하지 않으면 기다림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승진을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하는 사람이 성실하게 일하며 열심히 자기를 계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기다림이 이루어지겠습니까?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사람이 열심히 씨앗을 뿌리고 가꾸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기대가 이루어지겠습니까? 좋은 성적표를 원하는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좋은 성적표를 받아 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사실 꿈이라고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허황된 꿈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올바르고 건전한 꿈이라해도 열심히 꿈만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힘쓰지 않는다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25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시므온이라는 분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주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즉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올바른 기대 즉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바라보는 삶이 아니라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주님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렸기 때문에 더욱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에 성령이 함께 하셨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보기전에는 죽지 않을 거라는 약속을 받게 되었고, 결국 그 약속대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래서 감사와 기쁨으로 영광을 돌리고 할렐루야 찬양하며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만이 진정한 생명과 평안과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위로와 소망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러한 주님 안에 있는 위로와 소망과 은혜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의롭고 경건한 모습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 그 풍성한 은혜를 누리다가 마침내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롭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말그대로 옳은 것입니다. 그러면 옳은 게 뭡니까? 무엇이 정말 옳은 것입니까?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옳습니까? 정치인들이 말하는 게 옳습니까? 경제적 논리에 부합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다수가 가는 길이 옳습니까? 물론 그 중에는 옳은 것도 많은 있습니다. 그러나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설령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절대 의가 아니라 상대적인 의에 불과합니다. 한시적이고 부분적인 것들입니다.

절대적인 의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바르고 확실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오직 거기에 영원한 생명과 자유와 평강과 은총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의로운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경건은 뭡니까?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이 말씀도 의롭다는 말씀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옳고 그 안에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자유가 있음을 믿고 그래서 하나님께 경외심을 가지고 말씀을 따라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말씀에 비추어 정말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인지 아닌지, 이것이 그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는 길인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길인지를 따져보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따라 행동하는 것이 경건한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의롭고 경건한 삶입니다. 오직 그 안에 생명과 기쁨과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십니다. 진리이고 생명이십니다. 완전한 거룩과 의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한 의이고 생명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따르는 것만이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은총을 보장받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의요 경건이요 진리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죽으나사나 주만 따라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안에 진정한 소망 생명 기쁨 은혜 자유 평안 행복 은혜가 있음을 기억하며 주님께 대한 소망과 기대속에서 그 은혜를 사모하며 그 은혜를 기다리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특별히 대강절 첫째주일입니다. 대강절은 성탄절을 맞으며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절기입니다. 기쁨으로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우리 심령을 성결하게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강절을 맞이하여 더욱 우리의 유일한 참 생명이요 기쁨이요 은혜와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주님이 주실 평안과 위로와 영광의 나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기쁨으로 만나기 위하여 의롭고 경건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주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우리 속에 찾아오실 때에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과 기쁨과 희망과 위로와 소망과 평안을 마음껏 맛보며 더 나아가 세상에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과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평안을 보여줌으로 세상에도 생명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주는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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