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설교 / 광채나는 얼굴(전8:1)

 

하강교회 조학환목사  주일낮설교  


제목 : 광채 나는 얼굴

말씀 : 전8:1

1.얼굴이 밝아야 합니다.

오늘은 제가 설교를 하려니까 좀 위축이 됩니다. 왜냐하면 ‘광채 나는 얼굴’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면 얼굴에 광채가 좀 나야 되는데 그렇지 못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 얼굴이 예수님 믿고 정말 많이 좋아진 겁니다. 옛날에 거의 그랬지만 저도 솔직히 어렸을 때에 가정이나 마을이나 그렇게 좋은 환경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서 사회에 대한 불만도 많고 생각하는 것이 부정적인 것이 많아 얼굴에 그늘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고 정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깨닫고 정말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게 굉장히 밝아지고 좋아진 거니까 그런 줄 아시고 설교를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여하튼 여러분, 우리는 밝게 살아야 합니다.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아무리 믿음 안에서 거듭났어도 과거의 잔재를 완전히 털어버리고 또 현재의 상황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고 거듭났다면 이제는 좀 달라져야 합니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감사와 긍정의 말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나 세상도 감사와 사랑의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얼굴이 밝아지고 사는 모습이 밝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과 은혜와 평안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렇게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자유가 있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당연히 우리의 얼굴에 밝고 기쁘고 은혜로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혹시 살아온 과정이 순탄치 않았고, 현재의 상황이 좋지 않다해도 예수님을 믿고 5년 10년 20년 30년 40년 지나면 사는 모습이 환하게 바뀌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행6:15절을 보십시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여러분, 이때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스데반에게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을 씌워 산헤드린공회 법정에 세웠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이때의 스데반은 죄수 아닌 죄수의 몸으로 끌려와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아니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니라 그는 이 종교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실제로 돌에 맞아 죽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법정에 앉아 있는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으로 충만하니까 성령께서 기쁨을 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고 영광의 나라를 환하게 보여주시니까 그 심령 속에 기쁨이 넘쳐 얼굴이 밝게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져 있는데 인상을 잔뜩 쓰고 있다면 뭔가 마음에 원망과 불평과 미움과 근심 걱정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받고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은 그래서는 안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며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도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주는 빛나고 아름다운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2.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빛과 같이 밝은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 예수님 안에 있는 그 온갖 좋은 것들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로서 얼굴에 밝은 빛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세상의 유일한 참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은혜와 평안과 기쁨과 소망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런 예수님을 바라보며 따라가면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들로 충만하게 되고 그러면 우리 모습이 밝고 깨끗하고 희망차고 소망이 넘치게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히12:2절에서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러분, 보세요. 믿음의 주시오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이십니다.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 믿음과 삶이 점점 온전케 되어 생명의 기쁨과 능력과 은혜 가운데 살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되고 아름답도 멋있고 빛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이 결정됩니다. 자꾸 나쁜 것, 안 좋은 것, 악한 것, 부정적인 것, 어두운 것을 생각하며 그것을 바라보면 결국 부정적이고 어두운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열악하고 부족하고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현실만 바라보면 자꾸 불평불만만 생기고 의욕도 없어지고 그러면 인생이 점점 어두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늘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이미 가지고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 소망이 있는 그것을 바라보면 긍정적이고 밝고 활기가 있고 의욕적이고 적극적이 되어 그 삶이 점점 정오의 빛과 같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평안을 주고 능력과 지혜를 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물론 온 인류의 유일한 생명이며 소망이며 위로이며 희망이며 빛이신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면 빛과 같은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요8: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여러분, 보십시오.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빛이 뭡니까? 모든 어둠을 밝혀주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예수님 믿고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이 어찌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지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15:11절에서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는 그 어떤 어둠의 그림자도 없이 오직 생명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만이 넘칩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감사와 기쁨과 은혜로 현재적인 천국을 누리며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얼굴이 밝아지고 삶이 밝아지고 생각이 밝아지고 긍정적이고 소망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여기서 누려야 할 하나님의 나라도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을 바라보면 어떻습니까? 여러분,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지식이나 세상 즐거움을 바라보는 사람은 결국은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바라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망하고 낙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이 본래 죄와 무지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너도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요 연약한 자요 부족한 자요 허물투성이 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돈도 명예도 권력도 그 어떤 세상의 부귀영화도 결국은 다 썩어 없어질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돈이나 권세를 바라보면 자꾸 욕심이 생기고 그러면 결국 시기 질투 원망 불평 미움 싸움이 생기고 그래서 얼굴이 어두워지고 삶이 어두워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살면서도 기쁘고 즐겁게 산다면 그건 마약이나 환각제나 술을 마시고 정신이 혼미해지고 감각이 무디어져서 누리는 왜곡된 기쁨이요, 순식간에 사라질 가짜 기쁨인 것입니다. 아니 그냥 가짜 기쁨만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만을 초래하는 어리석고 불쌍한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 목적을 두고 예수님의 삶을 모델로 삼아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 기쁨 은혜 사랑 소망 위로를 사모하며 주님을 가까이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그 놀라운 진짜 참 영원하고 온전한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소망과 위로 가운데 할렐루야 찬양하며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감으로 해처럼 밝고 아름답게 빛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정오의 빛과 같이 빛나는 인생이 되기 위하여 주님을 바라본다면 주님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목적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신 주님께 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주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렇게 주님을 소망과 목적으로 삼고 달려가려면 주님의 뜻을 늘 생각하며 그 뜻을 바르게 알고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목적지에 잘 도착하려면 일단은 목적지를 바르게 알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올바른 방법과 코스로 달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라톤에서 승리하려면 골인지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올바른 코스를 따라 정해진 규칙대로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목표지점을 정확하게 알고 열심히 달려가 일찍 도착을 했어도 그 과정에서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실격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이겁니다. 주님을 목표로 삼고 그 다음에는 주님의 뜻과 방법을 따라 살아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목표만 주님으로 정해 놓고 주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목표지점을 향하여 잘 가지도 못할뿐더러 자신의 잘난 경험과 이성과 지식을 따라 왜곡된 길로 가기 십상이고 더 적극적으로는 악과 불의를 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주님을 향해 가도 주님께 인정받지 못해 실격패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3:1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생각하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까지 지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라. 예수님께서 그러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생각하라. 그래서 그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말씀과 생각과 방법을 따라 예수님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게 되고 그럴 때 주님을 닮아가며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며 그 주님의 빛을 세상에 비추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돈만 생각하면 돈 따라 갑니다. 명예를 생각하면 명예 따라 갑니다. 술을 생각하고 도박을 생각하고 향락을 생각하면 결국 그걸 따라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생각하고 영광의 나라를 생각하면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생명의 사람, 진리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23:7절에서는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네게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렘6:19절에서는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율법을 거절하였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생각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의 모습은 우리의 생각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좋은 것을 생각하고, 의를 생각하고, 진리를 생각하고 거룩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먹고 사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자식도 생각해야 하고, 부모님도 생각해야 하고, 농사일도 생각하고 연구도 해야 합니다. 직장인은 직장생활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할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의 생명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세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방법대로 주님의 뜻대로 자녀도 사랑하고 부모님도 공경하고 공부도 하고 장사도 하고 농사도 짓고 사업도 하고 직장생활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해야 할 일들을 지혜롭게 성실하게 은혜 가운데 기쁨으로 할 수 있게 되고, 그럴 때 최상의 결과를 가져오고 그래서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고 얼굴에 빛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생각이 온통 세상의 것에 집중되면 엉뚱한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깨끗하고 바르고 성실하게 할 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도리어 자기 욕심을 따라 하게 되고, 시기와 질투에 빠지기 쉽고 실망하고 낙심하고 원망과 불평과 시기와 질투가 생기기 쉽습니다. 심지어 악을 행하고 남에게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굴에 빛이 나지 않고 어둠이 깔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전8:1절을 보겠습니다.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지혜는 얼굴에 광채를 내게 한다. 사나운 것을 비롯한 모든 어두운 것을 물러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가 뭡니까? 지혜는 하나님이 지혜이고 그 말씀이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생명이시며 빛이시며 진리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는 자는 빛과 같은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뭐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오 빛이신데 우리가 그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으면 그 인생이 어찌 밝게 빛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 그렇게 밝게 빛나는 사람은 사나운 것이 사라진다고 하였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마음 속에 평안과 기쁨과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데 어떻게 사납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불평 불만하면 안됩니다. 추한 말, 악한 말, 독한 말, 모진 말을 하면 안됩니다. 자꾸 싸우려고 대들면 안됩니다. 어찌 하든지 부드러운 말, 사랑의 말, 은혜의 말, 깨끗한 말을 해야 합니다. 갈등을 유발시키지 말고 화해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당연하잖아요. 우리 가운데 예수님의 사랑과 빛과 은혜와 생명과 기쁨과 평안이 있는데 어찌 추하고 악하고 독하고 모질고 싸우려고 대들겠습니까? 여러분, 마5:5절을 보십시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또 마5:9절을 보십시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정 믿음과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살아감으로 자신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며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주는데 가운데 얼굴에 광채와 윤기가 나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세상의 왜곡되고 부패한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지 말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주님의 방법을 생각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점점 주님을 닮아감으로 진실로 여러분의 심령이 밝아지고 얼굴이 밝아져 생명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세상에 빛을 비추며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낮예배설교 /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행2:1-4)

 

하강교회 조학환목사 


제목 : 잃어버린 자아를 찾읍시다.

본문 : 행2:1-4

1.영적인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특히 겨울밤에는 마실이라고 해서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도 방학 때는 이웃집에 놀러가 함께 놀다오곤 했었습니다. 지금은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할 것 없이 텔레비전을 보든지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놀든지 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런 게 없었죠. 그래서 동지 섣달 긴긴 밤에 별로 할 게 없으니까 마실을 가곤 했는데 때로는 좀 늦게까지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아이들은 그만 잠이 들기도 했는데 이 때 아이들이 짓궂게 불침이라는 걸 놓곤 했었습니다.

불침이라는 것 혹시 놓아 보거 맞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성냥개비를 반쯤 태우고 나서 숯처럼 만들어 끝에 불을 붙이고 다른 한쪽에 침을 발라 자는 아이의 다리 같은데 세워 놓으면 불이 숯을 타고 내려가 살에 닿으면 물론 아주 센 불은 아니어서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지만 자던 아이가 그만 기겁을 하고 벌떡 일어납니다. 그렇게 놀라서 일어나는 것이 재미있어서 아이들이 장난을 치곤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설교 준비를 하다가 이 이야기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름 아니라 우리 영혼도 불침을 한번 맞아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여러분, 육체의 잠이 깊이 들어있으면 곱게 깨우면 안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업어 가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금방 일어납니까?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뜨거운 맛을 보든지 아니면 반대로 찬 맛을 보면 됩니다. 즉 불침을 한방 놓든지 찬물을 한 바가지 끼얹으면 정신이 번쩍 나서 벌떡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잠만 아니라 영적인 잠이나 정신적도 잠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깊은 잠이 들어 있으면 웬만한 충격으로는 깨어나질 않습니다. 그야말로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죽어라고 왜곡되고 변질되고 추하고 어리석고 심지어 악한 생각과 경험과 이성과 가치관을 고집하며 살아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마치 바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바로는 아홉 번씩이나 끔찍한 재앙을 당하고도 깨닫지 못하다가 마침내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는 참혹한 꼴을 당한 후에야 비로소 심령에 충격을 받고 이스라엘을 보내게 되지 않습니까? 그만큼 인간의 심령이 얼마나 어둠과 무지 속에 굳어져 있는지 그 영적 정신적 잠에서 깨어나기가 정말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게 오히려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오면서 맨날 보고 듣고 배우고 말하고 행동한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맨날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잘먹고 잘살며 재미있게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것들만 생가하며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육체적 물질절 생각과 가치관과 삶의 모습들이 완전히 굳어져 버렸고,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두 그런 가치관 속에 살고 있으니까 그게 본래의 모습인 줄 알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물론 그게 인생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고 잠자고 놀고 그저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더 좋고 너 낫고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도 아니고 거기에 행복과 기쁨과 만족과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너무나 귀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육체적 물질적으로 잘먹고 잘사는 것만으로는 자신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누리지 못하고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마는 불쌍하고 어리석은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창1:2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여러분, 보세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이라니 얼마나 고귀한 것입니까? 물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물질적인 형상은 없으시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영적 정신적 감정적 지적 의지적 형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존귀하신 모습을 닮아 영적 정신적 감정적 의지적 지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선과 사랑과 의를 행하며 영육간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려야 할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그 모습도 심히 좋았고, 그 목적도 심히 좋았고, 그 마음도 영혼도 육체도 모든 것이 심히 좋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지혜롭게 다스리며 아름답게 가꾸는 가운데 사랑과 기쁨과 선과 의를 행하며 영육 간에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그런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어리석게도 그만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여 죄와 무지와 어둠속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어둠과 무지 속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며 육체적 물질적으로 기쁨과 영광을 누리는 것을 인생이라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본래의 모습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냥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본래의 모습인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이와 같이 너무나 왜곡된 가치관에 길들여져 온전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더 이상 그저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의지하며 그저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욕망을 채우고 거기서 인생의 기쁨과 목적과 행복을 찾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위로 하나님을 잘 섬기며 아래로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사랑과 선과 의를 행하며 진리를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본래의 인생의 모습이고 그럴 때 당연히 진정하고 영원하고 온전한 행복과 기쁨과 만족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4:22~24절에서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제 정말 더욱 겸손히 그리고 열심히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함으로 진정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령의 불방망이를 맞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면 진정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본래의 그 아름답고 가치있고 생명력이 충만한 모습을 회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방법은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우리 인생이 본래 죄와 무지 가운데 있으니 우리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는 안됩니다. 천만년 도를 닦아도 안됩니다. 이건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무언가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게 쉽게 깨지겠습니까? 단단한 쇳덩어리가 웬만한 충격을 주어서 깨지겠습니까?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쉽게 깨지겠습니까? 영적 정신적으로도 오랜 세월 동안 굳어진 것들은 웬만해선 안 깨집니다. 그렇게 단단하게 굳어지고 무디어진 것들을 능히 깨트릴만한 강력한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딴딴하고 질기게 굳어진 그 왜곡되고 무지하고 추하고 어리석고 심지어 악하기까지 한 그 무지하고 강퍅한 심령을 깨트릴 수 있는 무기는 무엇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성령의 역사하심 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불망이로 한번 뜨거운 맛을 봐야 합니다. 그러면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납니다. 우리가 멍하게 앉아 있거나 졸려서 눈꺼풀이 천근만근 내려앉을 때에 뒤통수를 한번 얻어맞든지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뜨거운 불 맛을 보면 정신이 번쩍 나는 것처럼 성령의 불방망이를 한번 맞으면 정신이 번쩍 나서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세상에서 굳어진 것들이 정말 끈질기게 내 안에 달라붙어 있어서 자꾸 그 잘난 이성과 경험과 지식을 따라가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좀 따라가는 것 같다가도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되고 세상의 것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게 되고 그래서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능력과 은혜를 맛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어떤 분들은 아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그냥 옛날에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하는 식으로 복이나 구하면서 종교생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가는 여기서도 진정 생명의 기쁨과 은혜도 누리지 못하거니와 나아가서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불쌍하고 어리석은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성령의 불망이를 한번 얻어 맞고 잠들어 있던 영혼이 깨어나 새로운 세계 속으로 들어오면 정망 여기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저도 정말 호된 충격을 받고 정신을 번쩍 들어 인생의 방향전환을 한 사람입니다. 일차적으로 저 자신에게 육체적 정신적 충격이 왔었습니다.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신경쇠약 같은 증세도 좀 있었고 특히 신경성 위염으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이번에는 자녀를 통해서 큰 충격이 왔습니다. 큰 아이가 큰 질병에 한달 이상 치료를 받았지만 영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때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나 잘나서 내 힘과 능력과 지혜로 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구나. 내가 아는 것도 별로 없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구나. 내가 기댈 곳은 하나님 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밤낮으로 하나님을 찾아 울고불고 눈물콧물 흘리며 회개하며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내 심령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회개와 감격과 기쁨이 수없이 교차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참 빛, 생명의 빛이 내 심령 속에 채워지며 내 속에 있던 모든 부정적이고 추하고 어리석고 악한 것들이 빠져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자연히 신경성 위염이나 신경 쇠약 증세도 함께 쫓겨 나갔고, 결국 아이의 병도 나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새로운 세계가 환하게 보였습니다. 영광의 나라가 보였습니다. 지금까지의 가치관과 목적과 방향은 산산조각으로 깨져 버리고 삶의 이유와 목적과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할렐루야 찬양이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정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습니다.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회사 생활을 청산하고 지금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충격을 받고 자아가 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세계가 똑바로 보입니다. 환하게 보입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러나 자아의 껍질이 깨지지 않으면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씨앗이 껍질을 깨트리지 않고 어떻게 새 생명을 싹틔울 수 있겠습니까? 계란 껍데기를 깨트리지 않고 어떻게 병아리가 이 밝은 세상으로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애벌레가 껍질을 벗어 던지지 않고 어떻게 나방이 되어 훨훨 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내 자아와 경험과 이성과 지식의 틀을 깨트려야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로운 세계로 나오게 됩니다. 안 그러면 맨날 그 자리에 있습니다. 안 그래요? 내 지식과 경험과 이성의 틀을 깨트리지 않고 여전히 그 안에 있으면 어떻게 새로운 세상으로 나오겠습니까?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걸 깨트려야 하는데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이게 여간해서는 잘 안 깨집니다. 우리가 몇십년 동안 살아오면서 단단하게 굳어져 그 알량한 지식과 경험과 이성이 단단한 껍질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알량한 경험과 지식과 이성의 껍질이 나를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세계를 보지도 못하고 그곳을 향하여 달려가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걸 깨트려야 합니다. 깨트려야 변화가 옵니다. 이걸 깨트려 버려야 비로소 새로운 세계를 향해 비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성령의 불 맛을 한번 봐야 합니다. 성령의 불망이로 우리의 심령을 두들겨 부숴야 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지식이나 과학으로 되는 게 아니라 강력한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 능력있게 은혜가운데 신앙생활하며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았던 사람들은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다가 하나님의 빛으로 충격을 받고 깨졌습니다. 하늘에서 밝은 빛이 비추더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그때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 자리에 엎어지고 눈이 멀어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눈의 비늘이 벗겨지면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그의 영혼과 마음에 단단한 껍질처럼 붙어 있던 껍데기가 벗겨져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180도 궤도 수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던 삶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세를 추구하던 삶에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엄청만 충격 앞에서 그의 자아는 완전히 깨어지고 성령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큰 충격을 받고 비로소 온전히 거듭나 제자다운 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좀 길지만 전체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러분, 보세요.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무리 120여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흘 동안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쓸 때에 성령의 불이 임한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가 같은 것이 들리더니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불이 거기 모인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각자 따로따로 성령의 불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확 뒤집어 진 것입니다. 심령이 뜨거워지고 감격과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능력을 받고 자신들도 모르게 알 수 없는 방언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후의 삶은 완전히 180도 바뀌었습니다. 자기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고집하지 않고 자신의 것을 다 내놓고 유무상통했습니다. 지상의 메시아 왕국을 꿈꾸던 삶에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보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갔던 비겁한 자들이 십자가의 순교를 택하는 진정한 용기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직 자신을 위해 살던 삶에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하여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영적인 큰 충격을 받아 옛자아가 완전히 깨지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영혼 속에 남아 있는 모든 어둡고 칙칙하고 추하고 악하고 독한 것들이 온전히 쫓겨나가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히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자신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의지하여 세상의 욕망과 유익과 기쁨을 따라 살던 삶에서 돌이키고, 세속에 얽매이고, 물질에 얽매이고, 육신에 얽매이고, 상황과 조건에 얽매이던 삶에서 벗어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로서 진정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낮예배설교 / 복된 만남을 위하여(눅10:30-37)

 

하강교회 조학환목사

 

말씀 : 눅10:30-37

제목 : 복된 만남을 위하여


1.내가 먼저 좋은 사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태어나서 어떤 사람과 만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의하여 우리의 삶의 모습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도 잘 만나면 좋습니다. 돈과 명예와 사회적 지위와 게다가 인품까지 좋은 부모를 만나면 자식의 삶이 평안하고 부요하고 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술주정뱅이에다가 인품까지 고약한 부모를 만난다면 자식의 삶이 험난할 것입니다.

물론 배우자도 그렇죠. 그런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와 출중한 외모와 훌륭한 인품을 가진 배우자를 만난다면 당연히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쥐뿔도 없는데다 성품까지 고약한 배우자를 만난다면 당연히 삶이 힘들고 고달플 것입니다. 물론 친구나 이웃도 마찬가집니다.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나면 많은 유익과 기쁨을 누리게 되지만 고약한 사람을 만나면 정말 피곤하고 힘든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러므로 물론 다 기왕이면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나야 되겠지만 그러나 내가 그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먼저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좋은 사람이 못되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한다면 속된 말로 도둑놈 심보가 아니겠습니까? 소위 황금율이라 불리는 마7: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당연하잖아요? 나는 남을 대접해주지 않으면서 나는 남에게 대접받으려고 한다면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내가 좋은 이웃, 좋은 친구가 되어 주지 않는데 누가 나를 좋은 이웃, 좋은 친구로 대하겠습니까? 나는 좋은 남편, 좋은 아내가 되지 못하면서 어떻게 배우자에게 좋은 아내, 좋은 남편이 되어 주기를 바라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삶에 있어서 정말 만남이 중요하므로 여러분도 좋은 분을 만나되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이 먼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씀으로 결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고, 좋은 만남이 되어 서로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2.남에게 끔찍한 불행을 준 사람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오늘 말씀에 보면 자기는 좋은 것을 누리려고 하면서 남에게 너무나 끔찍한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주는 아주 나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오늘 3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여러분, 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고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입니까? 서로 생명을 살려주고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어도 시원찮을 판에 이 무지 몽매한 강도는 돈 몇푼 얻으려고 다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리고 심지어 다 죽어가는 사람을 버리고 도망을 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강도는 잘먹고 잘살려고 이런 몹쓸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정말 행복과 기쁨과 가치를 가져다주겠습니까? 뭐 빼앗은 것을 사용할 때에 잠시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켜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그 심령이 평안할 리도 없고 성령 평생 그 짓을 해서 잘 먹고 잘 산다고 할지라도 평생 동안 온갖 비난과 욕을 얻어먹고 손가락질 당하며 살아가는 더럽고 추하고 무가치한 인생에 불과한 것이요, 결국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너무나 불쌍하고 불행한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 이 강도를 당한 사람의 고통과 아픔과 상처는 어떻겠습니까? 물건을 빼앗겨 물질적으로 많은 손해를 본 것은 고사하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습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엄청난 아픔과 상처를 받았고, 극도의 공포와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후의 삶도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즉 이 미련한 강도의 짓은 결국 자기도 죽고 남도 죽게 만드는 심히 어리석고 무지하고 바보 같은 짓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결코 이런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또 크든 작든 또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나 절대 남에게 상처와 아픔과 고통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하나님께도 책망듣고, 사람들에게 욕먹고 멸시당하고 손가락질 당하고 무시당하는 어리석고 무지하고 더럽고 추하고 볼품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더 생각 해야 할 것은 내가 남에게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동시에 나 스스로가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론 때론 불가항력적인 불행이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스스로 자초한 불행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정말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그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구하며 그 말씀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살아야 하는데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도 마음에 새기지 않고 그래서 주님의 뜻과는 어긋나게 자기 마음대로 왜곡된 길로 잘못된 길로 다니다가 마귀의 밥이 되어 봉변을 당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강도를 만난 사람도 사실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람에께 끔찍한 고통을 준 강도는 엄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 중의 죄인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강도를 당한 사람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닥 봉변을 당했는데 그 길은 본래 매우 험한 길이라서 강도가 자주 출몰하는 우범지역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그 길을 가기를 꺼렸고 부득불 가야 할 때는 여럿이 함께 다니는 것이 상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대책도 없이 혼자 그 길을 가다가 그만 봉변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우리 인생길 전체에서나 혹은 인생길의 어떤 한 과정에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든 나혼자 내 마음대로 하다가는 그런 불행한 일을 만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즉 기도하며 말씀 안에서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인생길을 걸어가며 무엇인가를 추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냥 내 마음대로 자신만 믿고 자기 생각대로 주님께서 동행하지 않는 길로, 심지어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길로 가면 자칫하면 이런 봉변을 당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캄캄한 밤길, 으슥한 길에 숨어 있는 강도처럼 숨어 있다가 우리 영혼과 정신과 물질과 육신을 덮침으로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당하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에 우리가 경험했던 실패나 아픈 기억들이 엎드려 기도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삶을 영위했더라면 대부분은 경험하지 않아도 될 아픔이 아니었을까요? 그냥 내 경험과 지식과 이성을 따라서 내 마음대로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길로 자기 마음대로 갔기 때문에 당했던 그래서 결국 스스로 자초한 불행과 아픔과 상처는 아니었을까요? 마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불행을 자초했던 것러첨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내 경험과 이성과 지식을 따라 내 마음대로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우리의 완전하고 유일한 보호자이시며 인도자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동행해야 합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안전하고 그 길이 복되고 그 길이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자신의 생각과 능력과 경험만을 의지하며 자기 마음대로 다니지 말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그 뜻을 따라 겸손히 주님과 동행할 때에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 사람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또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지나쳐간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31절, 32절을 보겠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여러분,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지금 강도를 만난 사람은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때 제사장이 그 길로 지나가면서 어찌된 영문인지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레위인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도 역시 이 사람을 못 본척하고 지나쳐 버렸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을까요? 물론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 강도 만난 사람이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당시 시체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걸 접촉하면 자신도 부정하게 됨으로 피해서 갔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금방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아 아직 강도들이 근처에 있을 것으로 보고 서둘러 도망갔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무언가 급한 일이 있어 이런 일에 끼어들었다가 시간이 지체되거나 성가신 일이 생길까봐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떤 경우든 그들의 행동은 생명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상황이나 안위나 평안함만을 구하는 무지하고도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어떤 경우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은 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안타깝게도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강도만난 사람은 생명을 구함 받음으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반대로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어가며 고통 받는 생명을 살림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복된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니 복된 기회를 그냥 날려버린 정도가 아니라 이건 제사장과 레위인으로서 아니 굳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림으로 주님의 책망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주는 것만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는 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사람을 직접 해치거나 고통을 주지는 않았지만 마땅히 돌봄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아픔과 고통을 당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의 준엄한 경고를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적극적인 악만이 죄가 아니라 소극적 악, 즉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 마땅히 선을 행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 것도 악입니다. 그래서 약4:1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여러분, 보세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하지 않으면 죄라고 하지 않습니까? 당연하잖아요. 선을 행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주는 것이 사람의 책임과 의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내가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결국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거나 아픔을 겪지 않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죄가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에게 적극적으로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유익을 주어야 할 때에 수수방관함으로 결국 죄를 짓는 어리석은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도리어 적극적으로 선과 진리와 의를 행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며 결국은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생명의 기쁨을 가져다 준 사람

앞에서는 여러 가지 안타까운 모습들이 있었는데 다행히 우리는 마지막 부분에서 정말 아름다운 장면을 보게 됩니다. 33~35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강도 만나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드디어 구세주와 같은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행을 하던 중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지체 없이 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신속히 응급조치를 취한 다음에 주막으로 데려다가 주고는 치료비까지 내어 주며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자기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아름답고 귀하고 멋있는 사람입니까? 이 귀한 사람으로 인하여 강도 만나 다 죽어가던 사람은 새 생명을 얻음은 물론 비록 한편으로는 이 아픈 기억으로 말미암아 힘들 때도 있겠지만 이 귀한 사람으로 인하여 감사와 기쁨의 마음도 갖게 되고 새로운 희망과 소망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사람은 육체의 생명을 살릴 뿐 아니라 영적 정신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주는 복되고 아름답고 귀한 일을 한 것입니다. 또 사실 그 자신도 하나님께서 천하보다도 귀히 여기는 생명을 사랑하여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정성을 드려 살려 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게 되고 그래서 그 자신도 더욱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으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도 이와같이 하라고 하시면서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 좋은 만남의 관계 속에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을 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을 상고해 보면서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났던 적이 있다면 환경이나 상황이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먼저 스스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들어갔었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구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데 내 생각과 경험과 의지와 왜곡된 가치관을 따라 내 코가 석잔데 남에게 도움을 줄 여유가 어디있느냐며 합리화시키고 변명하면서 하지 못할 때가 많았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 이제 후로는 먼저 정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만나 교제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와 상황과 환경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밀접한 만남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주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주님의 주시는 힘과 능력과 지혜로서 우리의 육신과 영혼과 마음을 공격하는 마귀사탄의 공격을 물리침으로 절대로 강도 만난 인생이 되지 않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축복이 넘쳐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은총으로 영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강도를 만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낮예배설교 /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마7:12)

 

하강교회 조학환목사


제목 :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

말씀 : 마7:12

1.기독교의 황금율

오늘 말씀은 기독교의 황금율이라고 일컬어지는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을 황금율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3세기의 로마 황제 알렉산더 세베루스라는 사람이 이 말씀에 감동을 받고 황금판에 새겨 서재에 걸어 놓고 늘 음미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사람은 예수님을 잘 믿어서 이 말씀을 황금판에 새겨 서재에 걸어 놓고 이 말씀을 묵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교도 곧 우상숭배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 말씀을 너무나 귀하게 여겨 황금판에 새겨서 걸어놓고 늘 묵상하며 대중 앞에서 연설할 때나 재판을 할 때 이 말씀을 종종 인용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상숭배자가 이 말씀을 황금율로 여겼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해야 할까요? 안 그렇습니까? 물론 주님의 말씀이 다 황금보다 귀한 말씀이지만 이 말씀도 얼마나 지당하고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이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아끼고 존중하며 서로 귀하게 대접하며 살아간다면 우리 모두의 삶이 얼마나 서로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 말씀이 곧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이 선지자가 말씀하고 율법에 기록된 말씀의 근간이요, 핵심이라는 말씀이지요. 이것도 당연하지요.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아래로 사람들 간에 서로 사랑하며 귀하게 대접하면서 그래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이게 말씀이 곧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22:37-40절에서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러분, 이 말씀도 사실 같은 말씀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나 대접하는 것이나 같은 말씀이죠, 사랑하면 대접하고, 진실로 대접하면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이 말씀도 서로 대접하라는 말씀과 같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물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은 물론 이웃을 대접하는 것, 이것이 곧 율법이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두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안다며 위로 하나님은 물론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귀히 여기고 존중하고 섬기고 대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그래야 합니까?

2.우리 모두가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남을 사랑하고 대접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우리가 함께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전에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무조건 이유없이 해야 되지요. 안 그래요? 우주만물의 주권자시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명령인데 이유고 뭐고 따질 일이 뭐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아니라면 아닌 줄 알고 무조건 순종해야지요.

그러나 물론 주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을 때 왜 이유가 없겠습니까? 물론 많은 이유를 말할 수 있겠지만 우선은 서로 사랑하고 대접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 모두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사랑과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이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여러분, 이 말씀 제일 앞에 보면 ‘그러므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즉 앞에서 무슨 내용을 이야기하고 그런 이유로 어떻게어떻게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학생이다. 그러므로 공부해야한다. 나는 성도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와 같이 앞에 있는 내용이 이유가 되어 뒤에 있는 행동을 꼭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러므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으니까 남을 대접해야 할 이유가 그 앞에 나와 있는 거예요. 그게 뭡니까? 앞의 말씀 1~11절 전체 말씀인데 특별히 2절과 11절에 잘 나타나 있는데 먼저 2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즉 네가 남을 비판하면 너도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니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네가 남을 대접하지 않으면 남도 너를 대접하지 않을 것이니 네가 대접을 받고 싶다면 네가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대접이란 먹을 것을 사주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며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도 사랑받고 존중받고 귀히 여김받고 인격적인 대접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내가 남을 무시하는데 상대방이 나를 존중하겠습니까? 내가 욕하는데 상대방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겠습니까? 내가 상대방을 미워하는데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겠습니까? 내가 남을 비방하고 깎아 내리는데 누가 나를 높여 주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높여주면 그 사람도 나를 그렇게 대해주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려면 서로 대접하되 내가 먼저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11절에 보면 우리가 서로 대접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같이 보겠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줄줄 안다면 선한 나는 너희에게 얼마나 좋은 것을 주겠느냐? 그리고 실제로 나는 너희를 사랑하고 귀히 여겨서 너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었다. 너희가 먹고 입고 잠자며 활동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거저 주었고, 나아가 독생자까지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귀하게 대접해 준 것처럼 너희도 서로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너무나 귀한 대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 거저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비롯해서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삶의 터전을 삶고 있는 땅, 세상에 빛을 주고 따뜻하게 하여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게 하는 태양, 물, 공기, 각종 동물이며 식물들, 지혜와 능력과 이성, 게다가 하나님의 아들로 대접해주셔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까지 주셨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뭐 잘나고 똑똑하고 선하고 의롭고 거룩해서가 아니라 그냥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아들 대접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아무 공로없이 귀한 대접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웃을 귀하게 여기고 높여주고 대접해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올바른 인간이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한편으로는 서로 대접하는 것이 결국 우리 모두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길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그리고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과분한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정말 사랑하고 아끼고 귀히 여기며 서로 대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며 주님의 영광 나타내는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누구를 어떻게 대접해야 합니까?

3.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대접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 대접해야 하는데 그 전에 먼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 드려야 합니다. 앞에서 보았던 마22:37,38절 말씀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여러분, 보십시오. 첫째 계명이 뭡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도 그냥 대충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께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이고 의무이며, 진정 영원하고 완전한 능력과 사랑과 지혜의 하나님, 완전한 선과 진리와 의이신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예우이며 바르게 대접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위하여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거룩과 의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십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우주만물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분이십니다. 반면에 우리는 어떻습니까? 인간적으로 제법 똑똑하고 위대하고 선한 모습이 있을지라도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면 정말 한없이 작은 자입니다. 정말 무지하고 어리석고 미련하고 한계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인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셔서 영원한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 앞에 겸손히 엎드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 높고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찌 몸과 마음과 정성과 심지어 목숨을 바쳐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주님께 드리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정말 그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며 경배와 찬양을 드리며 우리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섬겨야 합니다. 이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당연한 태도요, 이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대접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하나님을 바르게 만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 드릴 때 우리 인생은 비로소 올바른 길,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온전하고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며 동시에 사람을 귀히 여기며 서로 대접하며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세주이시며,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마땅히 드릴 것을 드리면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올바르게 대접해 드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자기 생각 능력 지혜 경험대로 살아감으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완전한 주권자이시며 능력자이시며 생명과 진리와 지혜가 되시는 하나님을 따라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은혜의 길로 잘 달려가며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을 충만히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4.이웃을 사랑하며 대접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대접해 드리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시는 사람을 바르게 귀하게 대접해야 합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그저 열심히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교회만 열심히 섬기는 것만이 거룩한 삶이 아닙니다. 물론 당연히 그러한 삶은 거룩한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일이지만 그렇게 예배드리고 말씀듣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알면 당연히 받은 은혜를 삶속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위로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의롭고 깨끗하고 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위로 하나님을 대접해 드리고 아래로 사람을 대접해주어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경건이요, 거룩한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마22:39,40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보십시오.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요 두 번째는 이웃사랑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말씀은 레19:18절을 인용하신 말씀인데 거기에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을 있는 레19장의 말씀은 한마디로 성도의 거룩한 삶에 관한 말씀입니다. 즉 레19:2절에서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즉 나는 거룩한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자녀다. 그러므로 너희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다음에 그러면 거룩한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신데 거기에 보면 ‘네 부모를 경외하라. 안식일을 지키라. 헛것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께 올바른 제사를 드리라. 곡물을 거둘 때에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속이지 말라.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 이웃을 압제하지 말라.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두지 말라. 불의를 행하지 말라.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등등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위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고,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고, 부모님을 공경하고, 거짓과 도적질과 불의를 버리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곧 거룩한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며 깨끗하게 진실하게 의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마땅한 태도이고 서로가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서로 사랑하고 귀하게 대접하며 살아야 하는데 특별히 여러분, 먼저 가족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며 서로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가족은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고 가장 귀한 이웃이 아닙니까? 그러면 먼 이웃도 사랑하고 귀히 여겨야 한다면 가족은 얼마나 더 아끼고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대접하고 존중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물론 이웃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가족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존중하고 대접함으로 서로에게 정말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족 못지않게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대접해야 할 이웃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겠습니까? 물론 성도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성도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형제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똑같은 아버지를 섬기면 형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엡2:19절에서는 하나님의 권속 즉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권속이요, 형제이면 얼마나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존중하고 대접해야 하겠습니까? 그렇게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아끼고 존중하며 살아간다면 교회에서 얼마나 주님의 향기가 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겠으며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겠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또 얼마나 아름답게 이루어져가겠습니까?

그런데 근간에 보면 성도 간에 서로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높여주고 하지 못하고 도리어 시기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싸우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건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미워하시는 일이므로 우리는 절대로 그러면 안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주변의 모든 이웃도 사랑해야 합니다. 귀하게 여기고 대접해 주어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사는 길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빛을 비추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힘있게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며 섬기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대접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고 존중하며 귀하게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운 이웃인 가족을 정말 서로 귀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하며 귀하게 대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믿음안에서 한 형제자매된 성도들간에 정말 서로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아끼고 존중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생명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낮예배설교 / 복된 만남을 위하여(눅10:3-37)

 

하강교회 조학환목사


말씀 : 눅10:30-37

제목 : 복된 만남을 위하여

1.내가 먼저 좋은 사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태어나서 어떤 사람과 만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의하여 우리의 삶의 모습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도 잘 만나면 좋습니다. 돈과 명예와 사회적 지위와 게다가 인품까지 좋은 부모를 만나면 자식의 삶이 평안하고 부요하고 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술주정뱅이에다가 인품까지 고약한 부모를 만난다면 자식의 삶이 험난할 것입니다.

물론 배우자도 그렇죠. 그런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지위와 출중한 외모와 훌륭한 인품을 가진 배우자를 만난다면 당연히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쥐뿔도 없는데다 성품까지 고약한 배우자를 만난다면 당연히 삶이 힘들고 고달플 것입니다. 물론 친구나 이웃도 마찬가집니다.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나면 많은 유익과 기쁨을 누리게 되지만 고약한 사람을 만나면 정말 피곤하고 힘든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러므로 물론 다 기왕이면 좋은 부모, 좋은 배우자, 좋은 친구, 좋은 이웃을 만나야 되겠지만 그러나 내가 그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먼저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좋은 사람이 못되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려고 한다면 속된 말로 도둑놈 심보가 아니겠습니까? 소위 황금율이라 불리는 마7: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당연하잖아요? 나는 남을 대접해주지 않으면서 나는 남에게 대접받으려고 한다면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내가 좋은 이웃, 좋은 친구가 되어 주지 않는데 누가 나를 좋은 이웃, 좋은 친구로 대하겠습니까? 나는 좋은 남편, 좋은 아내가 되지 못하면서 어떻게 배우자에게 좋은 아내, 좋은 남편이 되어 주기를 바라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삶에 있어서 정말 만남이 중요하므로 여러분도 좋은 분을 만나되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이 먼저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씀으로 결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고, 좋은 만남이 되어 서로가 함께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2.남에게 끔찍한 불행을 준 사람

그런데 여러분, 안타깝게도 오늘 말씀에 보면 자기는 좋은 것을 누리려고 하면서 남에게 너무나 끔찍한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주는 아주 나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오늘 3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여러분, 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고 안타깝고 비극적인 일입니까? 서로 생명을 살려주고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어도 시원찮을 판에 이 무지 몽매한 강도는 돈 몇푼 얻으려고 다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리고 심지어 다 죽어가는 사람을 버리고 도망을 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강도는 잘먹고 잘살려고 이런 몹쓸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정말 행복과 기쁨과 가치를 가져다주겠습니까? 뭐 빼앗은 것을 사용할 때에 잠시 자신의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켜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그 심령이 평안할 리도 없고 성령 평생 그 짓을 해서 잘 먹고 잘 산다고 할지라도 평생 동안 온갖 비난과 욕을 얻어먹고 손가락질 당하며 살아가는 더럽고 추하고 무가치한 인생에 불과한 것이요, 결국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너무나 불쌍하고 불행한 인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 이 강도를 당한 사람의 고통과 아픔과 상처는 어떻겠습니까? 물건을 빼앗겨 물질적으로 많은 손해를 본 것은 고사하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습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엄청난 아픔과 상처를 받았고, 극도의 공포와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후의 삶도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즉 이 미련한 강도의 짓은 결국 자기도 죽고 남도 죽게 만드는 심히 어리석고 무지하고 바보 같은 짓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결코 이런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또 크든 작든 또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나 절대 남에게 상처와 아픔과 고통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하나님께도 책망듣고, 사람들에게 욕먹고 멸시당하고 손가락질 당하고 무시당하는 어리석고 무지하고 더럽고 추하고 볼품없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더 생각 해야 할 것은 내가 남에게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동시에 나 스스로가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론 때론 불가항력적인 불행이 있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스스로 자초한 불행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정말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그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구하며 그 말씀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열심히 성실하게 진실하게 살아야 하는데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도 마음에 새기지 않고 그래서 주님의 뜻과는 어긋나게 자기 마음대로 왜곡된 길로 잘못된 길로 다니다가 마귀의 밥이 되어 봉변을 당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강도를 만난 사람도 사실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람에께 끔찍한 고통을 준 강도는 엄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 중의 죄인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강도를 당한 사람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닥 봉변을 당했는데 그 길은 본래 매우 험한 길이라서 강도가 자주 출몰하는 우범지역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그 길을 가기를 꺼렸고 부득불 가야 할 때는 여럿이 함께 다니는 것이 상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대책도 없이 혼자 그 길을 가다가 그만 봉변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우리 인생길 전체에서나 혹은 인생길의 어떤 한 과정에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든 나혼자 내 마음대로 하다가는 그런 불행한 일을 만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즉 기도하며 말씀 안에서 오직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인생길을 걸어가며 무엇인가를 추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냥 내 마음대로 자신만 믿고 자기 생각대로 주님께서 동행하지 않는 길로, 심지어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길로 가면 자칫하면 이런 봉변을 당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캄캄한 밤길, 으슥한 길에 숨어 있는 강도처럼 숨어 있다가 우리 영혼과 정신과 물질과 육신을 덮침으로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당하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에 우리가 경험했던 실패나 아픈 기억들이 엎드려 기도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온전히 주님의 뜻대로 열심히 성실하게 삶을 영위했더라면 대부분은 경험하지 않아도 될 아픔이 아니었을까요? 그냥 내 경험과 지식과 이성을 따라서 내 마음대로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길로 자기 마음대로 갔기 때문에 당했던 그래서 결국 스스로 자초한 불행과 아픔과 상처는 아니었을까요? 마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불행을 자초했던 것러첨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내 경험과 이성과 지식을 따라 내 마음대로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우리의 완전하고 유일한 보호자이시며 인도자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동행해야 합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는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안전하고 그 길이 복되고 그 길이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자신의 생각과 능력과 경험만을 의지하며 자기 마음대로 다니지 말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그 뜻을 따라 겸손히 주님과 동행할 때에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 사람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또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지나쳐간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31절, 32절을 보겠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여러분,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지금 강도를 만난 사람은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때 제사장이 그 길로 지나가면서 어찌된 영문인지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레위인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도 역시 이 사람을 못 본척하고 지나쳐 버렸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을까요? 물론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 강도 만난 사람이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당시 시체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걸 접촉하면 자신도 부정하게 됨으로 피해서 갔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금방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아 아직 강도들이 근처에 있을 것으로 보고 서둘러 도망갔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무언가 급한 일이 있어 이런 일에 끼어들었다가 시간이 지체되거나 성가신 일이 생길까봐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떤 경우든 그들의 행동은 생명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상황이나 안위나 평안함만을 구하는 무지하고도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어떤 경우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은 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안타깝게도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강도만난 사람은 생명을 구함 받음으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고, 반대로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어가며 고통 받는 생명을 살림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복된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니 복된 기회를 그냥 날려버린 정도가 아니라 이건 제사장과 레위인으로서 아니 굳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림으로 주님의 책망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주는 것만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는 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사람을 직접 해치거나 고통을 주지는 않았지만 마땅히 돌봄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아픔과 고통을 당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의 준엄한 경고를 받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적극적인 악만이 죄가 아니라 소극적 악, 즉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 마땅히 선을 행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 것도 악입니다. 그래서 약4:1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여러분, 보세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하지 않으면 죄라고 하지 않습니까? 당연하잖아요. 선을 행함으로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주는 것이 사람의 책임과 의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내가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결국 다른 사람이 손해를 보거나 아픔을 겪지 않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죄가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에게 적극적으로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유익을 주어야 할 때에 수수방관함으로 결국 죄를 짓는 어리석은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도리어 적극적으로 선과 진리와 의를 행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며 결국은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복된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생명의 기쁨을 가져다 준 사람

앞에서는 여러 가지 안타까운 모습들이 있었는데 다행히 우리는 마지막 부분에서 정말 아름다운 장면을 보게 됩니다. 33~35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강도 만나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드디어 구세주와 같은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행을 하던 중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지체 없이 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신속히 응급조치를 취한 다음에 주막으로 데려다가 주고는 치료비까지 내어 주며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자기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아름답고 귀하고 멋있는 사람입니까? 이 귀한 사람으로 인하여 강도 만나 다 죽어가던 사람은 새 생명을 얻음은 물론 비록 한편으로는 이 아픈 기억으로 말미암아 힘들 때도 있겠지만 이 귀한 사람으로 인하여 감사와 기쁨의 마음도 갖게 되고 새로운 희망과 소망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사람은 육체의 생명을 살릴 뿐 아니라 영적 정신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주는 복되고 아름답고 귀한 일을 한 것입니다. 또 사실 그 자신도 하나님께서 천하보다도 귀히 여기는 생명을 사랑하여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정성을 드려 살려 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게 되고 그래서 그 자신도 더욱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으며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도 이와같이 하라고 하시면서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 좋은 만남의 관계 속에서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을 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을 상고해 보면서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났던 적이 있다면 환경이나 상황이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먼저 스스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들어갔었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구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데 내 생각과 경험과 의지와 왜곡된 가치관을 따라 내 코가 석잔데 남에게 도움을 줄 여유가 어디있느냐며 합리화시키고 변명하면서 하지 못할 때가 많았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 이제 후로는 먼저 정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과 온전히 만나 교제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와 상황과 환경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밀접한 만남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어 주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주님의 주시는 힘과 능력과 지혜로서 우리의 육신과 영혼과 마음을 공격하는 마귀사탄의 공격을 물리침으로 절대로 강도 만난 인생이 되지 않고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축복이 넘쳐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과 은총으로 영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강도를 만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주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


주일낮예배설교 / 마음을 옥토로 만듭시다(마13:3-9)

 

 하강교회 조학환목사  


말씀 : 마13:3-9

제목 : 마음을 옥토로 만듭시다

1.풍성한 열매의 관건은 밭입니다.

농사를 지어서 풍성한 수확을 얻으려면 여러 가지 구비 조건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밭이 가장 중요하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아무리 품종이 좋고 기후나 기술이 좋아도 토질이 형편없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농부가 농사를 지으려면 밭을 갈아 부드럽게 하고, 돌멩이를 골라내고, 퇴비도 넣고 토양 소독도 하면서 밭을 장만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밭이 깨끗하고 진실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워야 인생의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려면 우리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인간의 심령이 너무 왜곡되어 있어서 복음이라는 너무 귀하고 복된 생명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해졌는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귀한 생명의 말씀을 아예 받아들이지도 않고,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마저도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든지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상황속에 있습니다.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나라와 동시에 이 땅에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화와 소망을 주는 복음의 씨앗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의 밭에 뿌려 졌고 또 얼마든지 그것을 믿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릴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거부하고, 어떤 이는 겨우 받아들이긴 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거나 심지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생명의 열매를 맺으며 그 은총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무엇이 문제입니까? 왜 같은 생명의 씨앗이 들어갔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거부당하고, 어떤 사람은 조금 자라다가 말라죽고, 어떤 사람에게는 근근이 목숨만 부지하고 있고,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는 것입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이 문제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밭이 완고하고 단단하게 굳어져 있거나 돌밭과 같이 얄팍하거나 세상의 온갖 잡초들로 무성하여 복음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지 못하여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능력을 본 사람들 중에도 어떤 이는 복음을 받아들였고, 어떤 이는 복음을 거부하였다는 사실에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은 감히 세상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지혜와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엄청난 능력으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군중들이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능력을 본 사람들 중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시면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과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생명의 복음을 받아들여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지만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자기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이성대로 살아가는 완고하고 어리석은 자는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겨우 받아들인다해도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마음의 밭을 잘 다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것으로 인해 단단해지고, 세상의 온갖 잡초로 가득하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이성을 의지하려는 완고하고 교만한 마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깨트리고 부드럽고 깨끗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이 옥토가 되어 생명의 말씀이 싹이 트고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마음의 밭을 옥토로 만들 수 있습니까?

2.단단히 굳어진 마음을 깨트려야 합니다.(3,4절)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옥토로 만들려면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과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말씀묵상하며 깨어 기도함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심령속에 들어있는 단단하게 굳어진 것들을 깨트려 버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속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먼저 3,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이 말씀은 비유의 말씀으로 씨를 뿌리는 자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씨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고, 밭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길가란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인간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해졌건만 사람들의 마음이 세상에 태어나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로 완전히 굳어져 있어서 생명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의 심령은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으로 너무나 단단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은 대부분 물질적으로 많고 좋은 것을 누리며 높은 자리에 올라가 대접받으며 육체적 물질적으로 평안하고 부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위하여 기를 쓰고 공부하고 일하고 힘쓰고 애쓰며 거의 대부분의 시간과 정열을 거기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육체적 물질적 사고로 심령이 완전히 굳어질 수 밖에 없고, 그러한 물질적 사고로 심령이 굳어지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명의 말씀에는 아예 관심도 없고,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도 못함으로 이를 거부하고 영원한 멸망의 길로 치달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나마 복음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마저도 아직도 그 심령 속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물질적 육체적 가치관으로 인하여 말씀 따라 가지 않고 세상을 따라 감으로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단단하게 굳어진 심령을 깨트려 부드럽게 하고 생명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다른 방법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와 무지가운데 있는 존재인지,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이성과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너무나 왜곡되게 굳어진 옛자아가 깨트려 주심으로 진리를 향해 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성령이 역사하시고 성령이 역사하시면 그 동안 살아오면서 단단하게 굳어진 왜곡된 가치관들이 깨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심령 속에서 말씀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서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어 그야말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찌 하든지 정말 겸손한 마음으로 더욱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며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죄인이요 어리석은 자요 완고한 인생임을 고백하고 기도하며 성령의 역사하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충만하게 임함으로 세상의 것으로 굳어져 있던 마음이 활짝 열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온전히 심겨지고 그래서 그 말씀이 여러분 심령 속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그 은총을 충만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말씀이 심령 속에 깊이 뿌리 내려야 합니다.(5,6절)

그렇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 마음이 옥토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온 말씀이 우리 심령 속에 깊이 뿌리 내리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5,6절을 보십시오.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여기서 돌밭은 돌이 많은 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위 위에 약간 흙이 덮여있는 밭을 말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싹이 텄으나 가뭄이 들자 땅속의 습기를 공급받지 못함으로 금방 말라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심령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령에 말씀의 씨가 겨우 들어가긴 했는데 그 마음속이 아직도 세상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물질주의와 인본주의적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어서 말씀이 그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주님 안에 있는 진정한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고 세상의 복이나 기쁨이나 평안을 위해서 다니고, 그래서 뭔가 믿는 흉내를 내기는 내는데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만 실족하여 넘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10년 20년 30년 교회에 다녔다고 하면서 아직도 세상의 가치관으로 굳어진 심령이 깨지지 않음으로 그저 세상 기쁨이나 평안이나 위로나 복을 위해서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서 별일 없이 웃고 떠들고 재미있게 교제할 때는 그 재미로 교회에 다닙니다. 또 뭔가 어려움이 없고 일이 잘 되면 좋다고 교회에 다니고 어떤 때는 은혜를 받은 것처럼 눈물 흘리며 기도하기도 하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교인과 뭔가 관계가 틀어지고 뭔가 좀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만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뭔가 좀 자기에게 서운하게 대하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알아주지 않는 것처럼 여기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나도 왕년에 세례를 받았다, 성가대를 했다, 교사를 했다고 하면서 교회에 안 나오는 분들도 많습니다. 여러분, 그건 그냥 교회에 왔다갔다 한 것이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속된 말로 때려 죽여도 교회에 안 나올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생명의 주를 만났는데, 천국과 지옥을 아는데 어떻게 교회를 안 나올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다름 아니라 마음이 돌밭이라 그렇습니다. 말씀을 받기는 받았는데 그 심령 속에 아직도 인간적인 생각과 가치관과 경험과 이성이 바위처럼 굳어 있어서 그냥 인간적인 생각으로 교회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교회생활하면 안됩니다. 정말 나 자신을 깨트려 부수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고, 오직 그 말씀만이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걸 알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냥 인간적으로 사랑하고 돕고 위로하는 것은 직장이나 마을이나 동호회나 계모임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도 사랑도 나눌 수 있고 서로 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단순히 인간적으로 교제하는 곳이 아닙니다.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래서 이 땅에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다가 무엇보다도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한 진리이고 이것을 아는 사람은 죽어도 교회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교회생활하면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조금 어려움이 오고 일이 잘 안 풀리면 그만 졸업해 버립니다. 교회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조금 서운하게 하면 그만둡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정말 우리 심령 속에 바위처럼 굳어져 있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지식의 단단한 것들을 주님의 능력으로 깨트려 버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인간적인 기쁨이나 평안이나 욕구 충족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며, 오직 말씀안에서 주님과 동행함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그 역사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살다보면 인간적인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사랑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심령속에 굳어진 왜곡된 생각들을 하루속히 버리고 오직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 가운데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권능과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먼저는 나 자신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마음속의 잡초를 뽑아버려야 합니다.(7절)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들로 완고하게 굳어져 있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그 다음에는 마귀 사탄이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뿌려놓는 잡초를 제거해야 합니다. 아무리 마음의 밭을 부드럽게 해도 온갖 못된 잡초들이 무성하면 생명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7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말씀을 겨우 받아들이긴 했는데 그래서 뭔가 자라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만 마음속에 세상의 온갖 잡동사니 같은 것들로 가득차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밭을 아무리 부드럽게 하고 퇴비를 넣고 씨앗을 뿌려도 잡초가 무성하면 어떻게 좋은 열매를 맺겠습니까?

여러분, 인간의 마음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심령에는 너무나 많은 잡초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 근심과 걱정이 잡초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향락과 즐거움이 잡초가 됩니다. 어떤 이는 원망과 불평과 미움과 욕심이 잡초입니다. 어떤 이는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잡초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잡초는 얼마나 질기고 강하고 잘 자라는지 모습니다. 밭에 곡식의 씨앗을 뿌려 놓으면 잡초가 먼저 납니다. 조금만 방치하면 잡초가 곡식을 완전히 덮어 버려 곡식은 약해져 죽거나 겨우 살아남아도 열매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 인간 심령도 그렇습니다. 마귀가 얼마나 강렬하게 역사하는지 조금만 방심하면 온갖 왜곡되고 추하고 부정적이고 악하고 불신앙적인 것들이 우리 심령을 차지해 버립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와 영광과 향락과 원망과 불평과 증오와 미움과 같은 잡초들이 말씀을 덮어 버립니다. 그래서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걸 제거하고 이겨야 합니다. 이걸 이기는 방법도 다른 게 없습니다. 더욱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과 은혜를 덧입어 마귀가 잡초의 씨앗을 뿌리지 못하게 하고 자라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아니 완전히 뿌리째 뽑아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의 말씀이 무럭무럭 자라나서 생명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음으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8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고 말씀으로 채우고 잡초들을 제거하면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고 그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 심령속에 있는 세상의 온갖 잡다한 것들을 제거하고 진정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 사랑의 말씀이 무럭무럭 자라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되고 귀하고 영광스럽겠습니까? 얼마나 자신의 삶이 윤택하고 부요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 주겠습니까? 주님은 오늘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이러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뿌리박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심령의 밭에 있는 모든 잡초들을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진정 주님의 인도하심과 성령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오직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할 때에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생명의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면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갈 수 있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