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설교
제목 : 어느 부자 청년의 번민

말씀 : 막10:17-22

 

1.어리석은 선택

여러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 어떤 때는 너무너무 똑똑하고 잘나고 멋있는데 어떤 때는 정말 어리석고 바보 같을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착하고 대견스럽고 훌륭한데 또 어떤 때는 정말 무지하고 추하고 심지어 악할 때가 많습니다. 그 중에 가장 어리석고 바보 같은 것은 하나님과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자기 마음대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런 건 없다고 하고 자기 힘과 돈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어떤 이들은 교회나 절이나 사원이나 아무데나 다니면 좋은 데 간다고 하며 나름대로 종교생활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종교고 뭐고 그냥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면 그게 천국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아니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합니까? 자기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아니 다 똑같은 죄인이요 무지한 자요 어리석은 자인데 그걸 가르쳐 줄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아니며 죽어서 확인이라도 해 봤습니까? 아니 진짜 그렇잖아요?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인간이 그래서 이 세상의 일도 만분의 일, 억분의 일도 모르면서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과 창조와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알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은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과 한계 속에 있는 존재로 본질적으로나 일상생활에서나 무지하고 어리석고 악하고 추한 것들이 너무나 많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런 근원적인 문제들은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릅니다. 아니 근원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눈앞에 펼쳐져있는 현상적인 문제들도 아는 것은 쥐꼬리만큼도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알고도 때로는 몰라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너무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잘못된 선택을 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도 그랬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청년은 인간적으로는 돈과 명예도 있었고 인격적으로도 상당히 멋있고 훌륭한 청년이었습니다. 마19:20절에서는 이 사람을 청년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눅18:18절에는 관원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 22절에는 재물이 많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17절에 보면 이 청년은 예수님이 자기 마을에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 앞에 무릎 꿇고 영생의 길을 묻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청년은 부자였고, 관원이었고, 예수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영생의 길을 물을 만큼 겸손하고 예의 바르고 진리에 대해 관심이 많은 참 여러모로 너무나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 22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부자고 사회적 지위도 있고 윤리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있었고 진리에 대한 관심도 컸던 사람이었지만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만 영생의 길을 포기하고 근심하며 돌아가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왜 그랬다고요? 부자라서...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가고 싶긴 한데 돈을 다 포기하라고 하니까 너무 아까워서 그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예수님 말씀을 거역하려니 너무 괴롭고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슬퍼하며 근심하다가 결국은 돈에 져서 근심에 쌓여 돌아가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무지하고 어리석고 연약한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는 나름대로는 정말 멋있고 훌륭한 사람이었는데 그만 돈에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인생의 모습이요 그래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잘못된 선택을 하며 살아갈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우리가 이렇게 무지하고 허물어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며 겸손히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의 도우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결코 내 생각이나 경험이나 이성을 좇아 잘못된 선택을 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함으로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잘 달려가 진정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 청년은 왜 이런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요?

2.예수님을 자기 나름대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청년의 결정적인 잘못은 예수님을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르게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17절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여러분, 보세요.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참 괜찮은 청년 아닙니까? 예수님을 찾아와 무릎을 꿇고 선한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겸손하고 예의바르고 거기다가 영생에 대한 관심과 갈망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청년의 결정적인 오류는 예수님을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줄 알지 못했고,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결국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의 길을 버리고 세상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청년은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즉 주님이 아닌 선한 선생 정도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의 잘못된 시각을 고쳐 주시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8절을 같이 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여러분, 그러면 예수님이 선하시지 않다는 말씀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이 선하시지 않다는 말씀이 아니라 사람은 아무도 선한 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사람으로 아니까 그런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는 나를 선한 사람으로 알고 찾아왔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것입니다. 아니 번지수를 잘못 찾은 정도가 선한 선생에게서 영생의 길을 찾으려고 하는 그 시도부터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히 선하시고 그 분만이 영생의 길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선한 선생을 찾지 말고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 하나님께서 보내신 진정한 선한목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나를 바르게 알고 나를 믿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영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청년에게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존경받으실 만한 인류의 스승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무지에 의한 커다란 오해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성인 즉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인간은 아무리 위대해도 완전한 선한 선생이 될 수도 없고, 더더구나 인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구세주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위대하고 선하고 아름답고 멋있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말 우리는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예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성인군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다만 인간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과 미련함과 한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시오, 완전하게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완전하고 영원한 스승이시며 구원의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오늘 말씀에 나오는 청년처럼 자신의 그 알량한 생각과 경험과 이성을 가지고 예수님께 대하여 제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버리고 죽음의 길로 달려가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의 죄와 무지와 한계를 인정하고 내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예수님 앞에 온전히 엎드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하고 그 예수님 말씀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서 온전히 해방되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것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영생의 길을 자기 마음대로 생각했습니다.

이 부자청년이 가지고 있는 두 번째 오류는 영생의 길을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여 선한 행위로 영생을 얻는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17절 다시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보세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즉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얼마나 선을 행해야 구원을 받느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18절에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은 완전히 선할 수 없으므로 어떤 선한 행동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 계속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네가 정말 선을 행하여 구원을 받으려 한다면 이런 계명들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참 괜찮은 청년이었는데 또 어리석고 바보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여러분, 참 맹랑하지 않습니까? ‘다 지켰습니다.’ 이게 가능하겠습니까? 물론 상대적으로 남보다 좀 잘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다 지켰다고 말한 것은 상대적으로는 꽤나 깨끗하고 올바르게 살아왔을지 모르지만 그가 얼마나 무지 속에 있었는지를 반증하는 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21절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를 사랑하사.... 나름대로 선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무지를 안타깝게 여기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깨닫게 하시려고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네가 정말로 완전히 선하게 살아왔다고 여기느냐? 그렇다면 네가 정말 완전히 선한 존재라는 것을 네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을 통해 입증해 볼 수 있겠니? 네가 정말로 온전히 선하다고 여기고 또 나를 선한 선생으로 안다면 나의 말을 100% 따를 수 있겠니? 그렇다면 네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거라. 그러면 내가 인정해 주리라.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자 그 자신만만했던 사람은 그만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맙니다. 근심과 고민에 쌓이고 맙니다. 그리고는 힘없이 돌아서서 예수님을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인간의 선과 의와 똒똑함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인간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무지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제 아무리 선하다고 여기는 사람일지라도 모두가 약하고 어둡고 죄가운데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제 아무리 똑똑하다고 여겨도 무지한 존재요, 제아무리 선해도 악이 동시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행함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따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돈이나 선이나 권세나 지식이나 철학으로도 안되고 백년 천년 만년 도를 닦아도 안되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 모든 자만심, 지식, 경험, 이성 다 버리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모든 부족함, 어리석음, 죄됨, 모두 고백하고 주님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만이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길임을 믿고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함으로 주님의 은혜를 덧입어 구원받고 여기서도 진정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물질에 인생의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청년의 또 다른 오류는 물질을 진리보다 우선순위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시급하고, 가장 절실한 것인지 그걸 잘 몰랐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서 보았던 22절 다시 봅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참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영생과 진리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고, 겸손히 무릎 꿇고 진리의 길을 물었고, 계명을 모두 지켰노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청년이 네가 그렇게 완벽하게 계명을 지켰다면 네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만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모든 재물인데, 그러면 난 뭐 먹고 살라고, 무슨 재미로 살라고 하면서 가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럴까요? 정말로 예수님은 그 청년이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정작 자신은 가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살아가라고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했다가 망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초라하고 흉하고 궁핍하게 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도 안되는 명령을 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말도 안되는 말씀에 순종을 합니다. 칼을 들어 아들을 죽여 번제로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깜짝 놀라십니다. 아니, 쟤가 정말로 아들을 잡아 제사를 드리려는 거야. 저런 순진한 녀석. 얘야, 안된다. 그만 두어라. 칼을 멈춰라. 깜짝 놀라서 아브라함을 가까스로 말리고 옆에 양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더 축복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청년이 정말 예수님을 진정으로 메시아로 영접하고 그 말씀대로 재산을 다 팔려고 했다면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을 말렸거나 아니면 다 주게 하신 다음에 더 풍성한 은혜로 채워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청년의 재산을 다 파느냐 안 파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청년이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얼마나 순종하느냐,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느냐 그게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예수님도 우선순위도 제대로 몰라 그만 낭패를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예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우선순위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바르게 알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 때에 진정 생명의 은혜가 넘치고 참된 자유인이 됩니다. 평강과 위로와 소망이 넘쳐나 이 땅에서 누려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귀하게 쓰임받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다 잘나고 똑똑하고 선한 것처럼 여기면서 예수님도, 인생의 우선순위도 몰라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심지어는 우리들조차도 이런 우선순위를 혼동하고 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돈을 더 중요시하고, 세상 즐거움을 더 중요시하고,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을 더 중요시하고 그것을 좇아가는 모습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바보 같은 일입니다. 그건 결코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결코 거기에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안이 있는 게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오직 말씀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것, 거기에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단순히 위대한 성인이 아닌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고 알고 바르게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 주님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오로지 우리 주님과 그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의 가치와 목표와 방향을 우선순위로 삼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도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시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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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인생의 완전한 주인

말 씀 : 눅11:21-26

 

1.인간은 온전한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요즘에 보면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상황이나 환경이나 외모나 조건이나 이런 것들에 신경 쓰거나 그런 것들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 인생을 자신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생각이라는 측면에서는 상당히 바람직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이 이리저리 휩쓸리지 않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영위하게 되고 그래서 발전성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 주도적인 자세는 필요하고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삶의 자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한도 내에서만 적용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인간의 분수를 모르고 진짜로 자기가 자기 인생의 완벽한 주인이라고 착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다면 이는 정말 치명적인 착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는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자기가 자기 인생의 완전한 주인이라고 여기고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나나마 심각한 오류를 범하게 되는 거지요. 안 그래요? 우리가 다 죄인이요 무지한 자요 어리석은 자요 한계가 있는 데 자기가 주인이라며 자기 생각과 이성과 지식을 따라 살아간다면 어떻게 오류에 빠지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도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해야 되는데 하면서 하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고,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면서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또 생명은 어떻습니까? 시간은 어떻습니까? 돈은 어떻습니까? 맘대로 할 수 있습니까? 세상만사 내 맘대로 되는 게 별로 없습니다. 생명도 시간도 돈도 건강도 자식도 권세도 명예도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거두어가시면 속된 말로 찍소리 못하고 반납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즘 사람들은 자꾸만 자기가 진짜 인생 주인행세를 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모습은 부분적으로는 분명히 긍정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그러나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훨씬 강합니다. 즉 인본주의, 개인이기주의에 빠져 누가 뭐라 건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이지요. 왜 남의 눈치나 심지어 하나님의 눈치도 안보고 선 진리 의 거룩 이런 것들도 신경 안 쓰고 그저 나 좋은 대로 나 편한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내 생명, 내 돈, 내 시간 하면서 마음대로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남에게 기쁨을 주며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기쁨과 만족과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이 사탄의 달콤한 속삭임에 속아 자기 분수를 모르고 사탄의 술수와 모함과 유혹에 놀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주인처럼 여기고 있지만 실상은 사탄을 주인으로 섬기며 거기에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로 치달아 가면 멸망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깨어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며 정신을 차리고 이런 왜곡된 가치관을 배격하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올바른 주인의식을 가지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거야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야 올바른 분별력과 능력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사탄의 유혹과 도전과 속임수에 속지도 않고 능력 있게 물리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귀사탄이 우습게 여기고 얼씬 거리지도 못하고 또 설령 덤벼든다 해도 즉각 깨닫고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치고 하나님 안에서 능동적이고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선과 진리와 의를 향하여 달려가면서 정말 능력 있고 생명력 넘치는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20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기적들을 행하시는 것은 물론 당연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시는 일이고, 이런 일이 세상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귀에 속한 모든 유혹이나 핍박이나 더럽고 추한 것들을 얼마든지 물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론 하나님의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라고 여기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세상의 왜곡된 물결을 따라가지 말고 오직 우리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심령 속에 모셔 들이고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능력과 지혜로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유혹과 시험과 도전과 환경과 상황과 어둡고 칙칙하고 추한 모든 것들을 물리치고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기쁨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심령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사탄의 모든 지배 속에서 온갖 왜곡된 가치관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며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그 역사를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심령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심령 속에서 사탄이 좋아하는 것들을 씻어버리고 사탄이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것들, 반대로 말하며 예수님이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것들로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이 물러가고, 성령님이 기쁘시게 우리 심령 속에 거하심으로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똥파리가 어디에 꼬입니까? 똥이 있는 곳입니다. 벌은 어디로 날아갑니까? 꿀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어디에 거하기를 좋아합니까? 깨끗하고 아름답고 향내 나는 심령입니다. 마귀는 어디가 좋다고 얼씨구나하고 들어와서 서식합니까? 더럽고 추한 심령입니다. 마귀는 우리 심령 속에 악하고 추하고 속되고 거짓되고 음란한 것들을 자꾸 집어넣기도 하거니와 동시에 그런 것들이 들어 있으면 얼씨구나 네가 내 친구로다 하면서 좋다고 그 심령 속에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심령 속에 믿음과 선과 의와 거룩함 등의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들로 채워져 있으면 성령님이 기쁘시게 거하시게 되고 그러면 마귀는 도망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인데요, 오늘 말씀은 소위 빈집의 비유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귀신에게 제압당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들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회에 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추했는지 깨닫고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심령이 깨끗해지자 귀신은 그곳이 살만한 곳이 못되어 이 사람에게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여기저기 자기가 좋아하는 곳을 찾아봤지만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아 다시 이 사람에게 와 보았더니 깨끗이 수리가 되어 있긴 한데 주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귀신은 이 영혼을 완전히 제압하고 유린하여 거기 거하기 위하여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악한 귀신 일곱의 지배로 돌아가 전보다 더 형편없는 모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빈집의 비유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영혼을 청소했기 때문에 귀신이 나갔다는 것입니다. 25절 보세요.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 말씀은 귀신이 쫓겨났기 때문에 수리가 되었다는 말씀임과 동시에 청소를 하였기 때문에 귀신이 나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서 집은 인간의 심령입니다. 심령이 청소되었다는 것은 물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더럽고 추하고 악하고 음란한 것들이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이 살만한 곳이 못되니까 나가게 되었고 귀신이 나가니 그 심령이 더욱 깨끗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자꾸 귀신 귀신 그러니까 혹시 오해할까봐 말씀드리는데 여기서 말하는 귀신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영혼은 한번 죽으면 낙원과 음부로 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낙원과 음부에서도 서로 왕래할 수 없고 이 세상과도 왕래 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의 귀신은 죽은 자의 영혼이 아니라 마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하여튼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이 집을 수리했을 때 귀신이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 속의 온갖 더럽고 추하고 속된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이 들어오셔야 깨끗해지지만 성령이 들어오시게 하려면 우리가 얼마나 죄와 무지와 추함 가운데 있는지 인정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죄를 고백하고 완전치는 못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히 못한 것들을 심령 속에서 스스로 추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귀가 서식할 공간을 해체시키고 반대로 우리 심령의 공간을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과 선과 의와 거룩한 것들로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는 도망가고 성령님이 기쁘시게 거함으로 은혜 충만한 삶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약4:7,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성결케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도망하고 하나님이 가까이해주심으로 은혜가 충만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어찌 하든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자꾸만 우리 심령을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진리와 선과 의로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심령 속에 더럽고 추한 것들이나 원망이나 분노나 증오나 욕심들이나 마귀에 속한 것들이 자리 잡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께 속한 믿음과 선과 진리와 의와 거룩함으로 충만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마귀가 쫓겨나고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기쁨이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3.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심령을 깨끗하게 한 다음에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건 뭐냐 주님을 우리의 새 주인으로 온전히 모시고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람은 약간의 은혜를 받고 심령을 좀 깨끗이 함으로 귀신이 나가긴 했는데 그리고 나서 주님을 온전히 새 주인으로 모셔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갔던 귀신이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 그 영혼을 무참히 짓밟고 유린해서 전보다 더 형편없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 정말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심령을 깨끗이 청소를 했으면 다음에는 반드시 예수님을 완전히 새 주인으로 모셔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더러운 마귀사탄이 다시 침범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웬만큼 청소를 하긴 했는데 완전한 능력자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지 않으면 자칫하면 또 마귀의 밥이 되기 싶다는 것입니다. 마귀란 놈은 얼마나 집요한지 쫓겨나가서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끊임없이 찾아와 때로는 유혹하고, 때로는 조롱하고, 때로는 핍박을 합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면 그대로 덮쳐 우리 영혼을 유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나름대로 마음을 청소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영위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완전한 주인으로 모셔 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름대로 기도도 하고 찬송도 하고 말씀도 묵상한다해도 정말로 예수님을 온전한 주인으로 모셔 들이지 않으면 언제든 허점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아니 사실은 온전히 예수님을 모셔 들이지 않으면 그건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에 불과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기는 다니는데 진정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능력과 생명과 감격과 기쁨도 맛보지 못하고 다니니까 사단의 표적이 되어 집요하게 유혹하고 사납게 대들면 그만 사단의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람에게 명령하시고, 마귀에 호통을 치시는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그 분을 주인으로 섬기면 감히 마귀사탄이 얼씬 거리지 못합니다. 혹시 얼씬거리면서 수작을 건다해도 즉시 깨닫고 사탄아 물러가라 호령하면 쫓겨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21,22절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인 것입니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여기서 강한 자는 사탄이고, 더 강한 자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사탄도 나름대로 힘이 있어서 세상을 어느 정도 지배하고 마치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강한 자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탄을 무장해제 시켜버리면 사탄은 꼼짝없이 자신이 지배하던 것들을 예수님께 내어 드려야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모든 추한 것들을 몰아내고 그 다음에는 정말 온전히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 들이기 바랍니다. 이미 모셔들인 분들은 절대로 내가 주인이 되어 내 생각, 내 이성, 내 가치관을 따라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지 말고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주님의 지시를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감히 마귀 나부랭이가 우리를 우습게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도리어 우리를 보고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속에 있는 예수님을 보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갈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런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심령을 깨끗이 하고 주님을 온전히 나의 주인으로 모셨으면 이제는 그 말씀을 따라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계속해서 더욱 생명의 은혜와 능력과 기쁨이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한마디로 우리가 정말 예수님 편에 있다면 하나님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하나님의 역사에 방해꾼과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안다면,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안다면, 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한지를 안다면,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안다면 생명의 역사에 어떻게 참여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사랑하는 영혼을 사랑한다면, 한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알고, 그래서 주님이 그 영혼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안다면, 그 일이 얼마나 귀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인지 않다면 어떻게 복음의 역사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러한 복음의 역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물론 우선은 자신이 먼저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게다가 복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르는 것이요,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수수방관하는 일이요,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수고하는 자들의 힘을 빼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고의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았고 헤치지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반대한 것이나 헤친 것과 진배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안다면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길이요, 동시에 우리의 신앙을 더욱 활기차게 하고, 생명력이 있게 하고, 은혜가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길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리고 교회를 섬기고 전도하고 하면 얼마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겠습니까? 얼마나 영성이 풍성해지겠습니까? 그러면 얼마나 사랑과 은혜와 능력이 넘치겠습니까? 또한 그러한 왕성한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얼마나 힘차게 이루어져 가겠습니까? 그리고 함께 수고하는 자들에게 얼마나 힘과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씀으로 우리 심령 속에서 주님이 싫어하시는 모든 것들을 깨끗이 씻어내고 주님을 진정한 주인으로 모셔 들임으로 진정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 더욱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주님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에 참여함으로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힘차게 이루어 가며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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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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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제목 : 샬롬을 누립시다

말씀 : 대하14:1~7

 

1.부정적인 에너지를 추방합시다.

여러분, 우리나라의 독특한 병 중에 화병이라는 게 있습니다. 화병은 불 화(火)자에 질병 병(病)자를 씁니다. 즉 가슴 속에 속에 불덩어리 같은 게 들어있는 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가슴속에 분노나 증오나 불평 등의 뭔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화병의 원인은 한마디로 억압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분노 증오심 불평불만 시기질투 등의 감정을 표출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쌍아둠으로써 마음속에 화덩어리가 뭉쳐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물론 살다보면 분노나 미움이나 불평불만이나 시기질투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속된 말로 쎄가 빠지게 일해도 겨우 돈백만원 조금 넘는 월급을 받으며 힘겹게 살아가면서 시대가 하도 속되어 결혼도 조건을 보고 하는 시대라 이런 사람들은 심지어 결혼조차하기 힘든 그런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부모가 능력이 있거나 혹은 머리가 뛰어나거나 재주가 좋아 억대 심지어는 몇 십억의 연봉을 받으며 온갖 좋은 것들을 누리며 대접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들도 그런 위치에 오르기까지 많은 노력을 했겠지만 그래도 해도 너무하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마음에 불평불만 시기질투가 생길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경우든 원망이나 불평이나 분노나 증오나 이런 부정적인 에너지를 마음에 담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들에게 있어서 합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나쁜 에너지로서 우리들의 삶에 너무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한 부정적인 에너지가 우리 심령 속에 들어 있으면 자연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부정적이고 독하게 되고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오게 되고 공격적으로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내 심령이 황폐하게 되고 가족과 이웃에게도 상처와 고통을 주어 서로의 삶을 파괴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엡4:26,27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그러니까 잠깐 분이 일어날 수는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분을 마음에 계속 품고 있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틈타 그 분(憤)이 우리를 삼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전5:16~18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혹시 힘들고 어렵고 심지어는 좀 억울한 일을 당한다해도 원망이나 불평이나 분노나 이런 나쁜 에너지를 마음에 품고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령 어렵고 힘들고 불공평하고 억울해도 실상은 우리가 받은 은혜가 더 크다는 것, 게다가 우리에게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오직 믿음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 여러분 자신이 생명의 기쁨과 평안을 마음껏 누리고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그런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차피 죄와 무지 속에 있어서 불공평한 일도 있고 어려운 현실도 때로는 억울한 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천국에 가기까지는 그런 현실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부조리한 현실들이 없애고 평안을 누리려 하지 말고 그것을 뛰어넘어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완전한 생명이시며 진리이시며 선이시며 평안과 위로와 소망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면 주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말미암아 이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불평불만이나 분노의 감정이 잘 일어나지도 않거니와 설령 일어난다해도 쉽게 이기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내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들임으로 주님이 나를 온전히 지배한다면 어떻게 불평불만 시기질투 미움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주님은 완전한 사랑과 기쁨과 은혜와 빛과 평안과 위로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주님이 내 이성과 생각과 감정을 완전히 사로잡으면 어떻게 우리 심령 속에서 미움과 원망과 증오와 불평불만과 시기와질투가 일어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는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전혀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완전할 수만 있다면 완전하게 일어나지 않겠지만 완전치 못하기 때문에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일어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를 사로잡고 있지 않을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적게 일어나고 또 내가 부족해서 일어난 그 부정적인 감정들도 사랑의 주님, 은혜의 주님, 위로의 주님, 능력의 주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시고 인도하셔서 얼마든지 다스리며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미술대학교에서 ‘평안’을 주제로 그림경시대회가 열려 많은 학생들이 실력을 인정받고 상금도 타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실력을 동원해서 평안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주어진 시간이 지나고 심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두 학생의 그림이 최종결선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평안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렸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한 학생의 그림은 정통적인 평화의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양 옆과 뒤쪽은 푸르고 아름다운 산에 둘러싸여 있고 앞에는 평평한 풀밭이 있는 호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호수 앞 풀밭에는 온갖 종류의 꽃이 만발해 있고,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고, 호숫가에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 다정하게 담화를 나누고 있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학생의 완전히 반대로 바닷가에 큰 바위 절벽에 엄청난 파도가 부딪쳐 사나운 거품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얼마나 심한지 바위 절벽에 있는 나무가 부러져 바다에 떠다니고 있는 사납고 험악한 풍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절벽 사이의 바위틈에 갈매기 둥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바위틈 둥지에서 갈매기 새끼들이 엄마 품에 안겨 평안히 쉬고 있었습니다. 둥지 밖에는 사나운 바람과 험한 파도가 난리를 치고 있는데 이 새끼들은 엄마 날개 밑에서 조금도 두려움이나 걱정 없이 평안히 쉬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그림이 최우수작으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그림은 평화롭기는 한데 너무나 이상적인 환경에 의존하는 평안으로 그 상황이 변하면 언제든 깨질 평안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그림은 그 험한 풍랑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여 누리는 평안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물론 외적인 평안 즉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 누리는 평안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보다도 내적인 평안 즉 조건이 충족되지 못했어도 누리는 평안이 진짜 평안이고 더 중요하고 우리가 꼭 누려야 할 평안입니다. 물론 외적인 평안 즉 조건이 충족됨으로 누리는 평안도 당연히 필요하고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상황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언제라도 상황이 변하면 곧바로 사라져버릴 그런 물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아비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 그의 시대에 그의 땅이 십 년 동안 평안하니라.” 여기에 보면 십년 동안 평안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평안은 전쟁이 없으므로 누리는 외적인 평안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평안은 몇 년 동안 누렸다고 했습니까? 10년입니다. 왜 십년입니까? 십년 후에 외국군대가 침입하여 그 평안이 산산조각 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 읽지는 않았지만 9절에 보면 10년 후에 구스 나라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여 이 평화는 그만 물거품처럼 깨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즉 외적인 평안은 그 평안을 주는 외적인 조건이 사라지면 곧바로 사라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외적인 조건은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므로 외적인 조건에서 오는 평안은 늘 불안한 평안이요 금방 사라질 평안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돈 때문에 평안한 사람은 돈이 없어지면 평안도 없어집니다. 건강 때문에 평안하면 건강이 사라지면 평안도 사라집니다. 높은 지위 때문에 누리는 평안은 지위가 사라지면 사라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돈과 명예와 권세와 건장을 지키려고 난리입니다. 왜요? 그런 것들로 평안을 누리려는 사람들은 그게 없으면 평안도 기쁨도 사라지니까요. 그래서 그것을 더 가지려고 난리를 치고 또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이 사라질까봐 전전긍긍하며 참 평화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평안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려면 외적인 평안보다 주님의 평안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진정하고 완전한 영원한 평안입니다. 주님은 모든 생명과 기쁨과 평강과 위로의 소망의 근원이십니다. 주님은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람을 잔잔케 하시고 성난 파도를 잠재우시고 모든 죄와 어둡고 칙칙하고 추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쫓아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주님을 심령 속에 모셔 들이면 사탄에 속한 모든 어둠과 두려움과 분노와 원망과 불평을 쫓아냄으로 온전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14:27절에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보십시오. 내가 평안을 주겠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하십니다. 즉 세상이 주는 것은 잠시잠깐 뿐이요, 환경에 지배를 받는 것이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영원하고 모든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근심걱정하지 말고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참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분명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고 은혜가 있고 소망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그렇게 완전한 생명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과 평안이신 예수님을 심령 속에 모셔 들이면 당연히 내 심령 속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과 지혜가 충만함으로 분노와 미움과 저주 원망 불평과 사나움 등 모든 부정적인 에너지를 쫓아내고 주님이 주시는 참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보다 주님을 심령의 중심에 모셔 들이고 주님과 동행할 때에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심령 속에 모셔 들이고 주님 안에 있는 참 평안은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건 뭐 간단합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아야 주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으며 가까이하면 주님이 기쁨으로 내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그러면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기고 진정한 평안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아사와 시대에 평안을 누리게 되었던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4절을 같이 읽습니다.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또 7절 후반절도 보겠습니다.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 사방에 평안을 주셨느니라.”

어떻게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을 찾고 명령을 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찾았다는 것은 ‘자주가다, 찾다, 구하다, 문의하다, 노력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늘 하나님을 찾아가서 엎드려 기도하며 무엇이 옳은 것인지,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찾고 구하며 주의 뜻을 따라 살기를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심령 속에 임재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덧입게 되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적군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인도하셨고 그래서 그들이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나타난 것은 주로 외적인 평안을 의미하지만 외적인 평안이든 내적인 평안이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심령 속에 임재하시면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능력과 지혜를 주셔서 내적인 것이든 외적인 것이든 세상의 것을 이기고 평안과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평강의 주님이십니다.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성난 파도를 명령하여 잔잔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난 바람을 명령하여 잠재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심령속의 모든 두려움과 공포와 욕심과 독과 화를 제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만이 참 평안을 줄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이 만이 평안을 주실 수 있고 끝까지 지켜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그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과 지혜와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그러면 그 은혜와 능력과 지혜로서 외적인 것이든 내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세상에서 다가오는 모든 적들을 물리치고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직 하나님 안에 진정한 평안과 위로와 기쁨이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기억하며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을 찾기보다 하나님을 열심히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능력과 은혜와 평안을 충만하게 덧입어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을 이기고 참된 평안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온전한 평안을 누리려면 먼저 주님을 찾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왜 하나님을 찾습니까? 물론 먼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주님의 생명과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덧입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열심히 찾아 주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를 얻었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진정 생명의 은혜와 능력과 평안이 넘치는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찾아와서 말씀을 듣기만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지 않는다면 그 찾아온 발걸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데요, 4,5절의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애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누리니라.” 나라가 평안했는데 어떻게 평안했습니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우상을 깨트리고 율법과 명령을 다 행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뭐 당연하지 않습니까? 생명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의 근원이신 하나님, 완전한 선과 진리와 의이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시고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어찌 평안이 없겠습니까? 반대로 이런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탄의 조종을 따라 살아간다면 어찌 평안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은 주님 안에 생명이 있고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고 소망이 있기에 분명히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은 그런 놀라운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고 허물 많고 미련하고 무지하고 어리석지만 우리 주님은 모든 마귀 사탄의 역사를 결박하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그 분 안에는 그 어떤 어둠도 깃들 수 없습니다. 마귀 사탄이 역사할 수 없습니다. 어둠의 세력이 득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오늘 말씀을 분명히 기억하며 진정한 생명과 평안과 위로와 기쁨은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예수님을 여러분의 심령의 중심에 온전히 모셔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더욱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가까이와서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모셔들이고 찾고 가까이 하며 주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일상의 삶속에 온전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죄와 무지와 왜곡된 가치관이 판을 치고, 그래서 불공평하고 힘들고 심지어 억울한 일을 만나기도 하는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주님의 능력과 은혜와 지혜와 인도하심으로 그러한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이기고 하나님이 무한정으로 내려주시는 샬롬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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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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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말씀 : 수14:6-12

제목 : 멋있는 인생


1.내면이 멋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멋있는 게 뭡니까? 보통은 멋있다 그러면 겉모양을 생각하죠. 저 사람 멋있다. 아름답다. 그러면 인물도 좋고 허우대도 멀쩡하고 세련되고 그러면 보통 멋있다. 아름답다 그러죠. 물론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도 있고,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도 있듯이 기왕이면 외모도 멋있고 아름다운 것이 좋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누구나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지 못나고 추한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정말 멋있고 아름답고 훌륭한 사람은 외면이 아름답고 멋있는 것보다는 내면이 아름답고 멋있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설령 겉보기에는 썩 아름답고 멋있고 세상적으로 내 놓을 만한 것이 없어도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은 뭔가 모르게 그 사람에게서 향기가 뿜어져 나옵니다. 반면에 설령 높은 지위와 학식이 있고 멋있게 생겼어도 내면이 추하거나 악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삶속에서 악취가 나게 마련 인 것입니다.


사실 뭐 당연한 거죠. 여러분, 우리 삶의 모습들이 무엇에 의하여 결정됩니까? 물론 내면 즉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지요. 안 그래요? 우리 마음속에 올바르고 고상하고 깨끗하고 의롭고 선한 것들이 들어있다면 당연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반면에 왜곡되고 추하고 거짓되고 악한 것들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면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눅6:45절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말씀그대로 마음속에 선이 쌓여 있으면 선한 행동이 나오고, 악이 쌓여 있으면 악한 행동이 나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또 삼상16:7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람은 외모 권력 능력 돈 조건 등의 외적인 조건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오직 마음이 얼마나 진실하고 아름답고 깨끗하고 성결하고 사랑과 은혜가 많으냐 그걸 본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게 선이니까요. 그게 인간의 생명을 아름답게 하는 거니까요. 그게 우리를 아름답고 평화롭고 복되게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물론 기왕이면 외적인 것도 아름답고 넉넉하고 멋있어야 하겠지만 그보다 어찌하든지 먼저 여러분의 심령을 믿음과 사랑과 은혜와 선과 진리로 채우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향기가 있고 아름다움으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받고 인정받으며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는 아름답고 복되고 멋진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대접받기보다 역할에 충실했던 사람


오늘 본문에는 바로 이런 귀하고 훌륭하고 아름답고 멋있는 분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갈렙이라는 분인데 오늘 말씀에 보면 이 분이 얼마나 멋있고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중에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이분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40년동안 힘든 생활을 보내고 드디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도착하여 땅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상황을 생각해보세요. 그들은 천신만고 끝에 꿈에도 그리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도착하여 각 지파별로 땅을 분배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누구나 기왕이면 좋은 위치에 많은 면적을 분배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혹은 우리 지파는 출애굽과 광야생활에서 이렇게 충성하며 공적을 세웠다며 은근히 자신을 내세우며 기대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갈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12절을 보겠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여러분, 보세요. 갈렙은 어떤 땅을 달라고 합니까? 헤브론 산지입니다. 게다가 그 땅에는 누가 있다고 했습니까? 아낙 자손 즉 거인 족속들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그리고 견고한 성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고많은 땅 중에 하필 그 땅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넓은 들판에 초지가 형성되어 있고,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꽃들이 만발하고 그래서 농사를 짓거나 목축하기에 좋은 땅이 아니라 반대로 산지에 그것도 거인들이 살고 있고 견고한 성읍이 있어 정복하기도 힘든 땅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갈렙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45년전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이 각 지파별로 한명씩 열 두명의 정탐꾼을 보낼 때에 유다지파의 대표자로 선발되어 가나안 땅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40일 동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 보고를 할 때에 다른 10명의 정탐꾼들이 그 땅 거민이 워낙 강하고 성읍도 튼튼해서 그 땅을 점령한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하다고 할 때 ‘아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그들이 비록 강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외쳤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수인 열 명의 정탐꾼의 이야기를 듣고 원망하고 불평하여 결국 출애굽 1세대의 사람들은 다 죽고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외쳤던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만 살아남아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즉 갈렙으로 말할 것 같으면 출애굽 1세대 중 여호수아와 함께 딱 두 명 밖에 살아있지 않은 이스라엘의 어른 중에 어른이요, 원로중의 원로요, 이스라엘 역사의 산 증인이요, 이스라엘의 영적 정신적인 지주와 같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만하면 이제는 대접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까? 나이로 보나 공로로 보나 지위로 보나 무엇으로 보아도 이제는 좋은 땅을 분배받아 좀 편히 쉴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까? 오랫동안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 하며 공적을 남기며 이스라엘을 이끌어왔던 원로중의 원로이니 백성들이 미리 알아서 대접을 해 줄만한 위치에 있고, 그럴만한 충분한 권리가 있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갈렙은 오히려 산지를 내게 달라...... 거기 비록 아낙 자손이 거하고 있지만 그까짓 것 문제될게 없다... 비록 그 성읍은 크고 강하고, 내 나이 85세로 비록 늙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나는 충분히 그들과 싸워 이길 수 있다. 그러니 거인이 거하고 있는 그 땅, 크고 견고한 성읍이 있는 그 땅을 내게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물론 일차적으로는 믿음 때문이었고 동시에 그는 자신이 뭔가 한 것이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그 자체가 축복이요 감사거리였고 영광을 돌릴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안 그래요?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은혜입니까? 하나님께서 할 수 있는 마음과 힘과 능력과 지혜와 여건과 상황과 환경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닙니까? 정말 내가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이나 마을에서나 국가에서나 뭔가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은혜요 기쁨이요 영광입니까?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까? 반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얼마나 초라한 인생입니까? 아니 얼마나 무가치한 인생입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이나 마을이나 국가를 위해 무언가 기여한 부분이 있었다면 그건 너무나 큰 축복이요, 감사거리요,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그것이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뭔가 좀 했다고 내세울 일이 무엇입니까? 대접받으려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오히려 감사한 것 뿐이요, 영광스러운 것 뿐이지요.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무언가 기여한 부분이 있다면 정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언가 할 수 있었던 게 복이요 은혜요 귀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에서나 어느 곳에서나 자신을 내세우거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더욱 감사와 기쁨으로 자신의 역할을 충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더욱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귀히 쓰임받는 복되고 아름답고 멋있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85세나 된 어른의 대단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갈렙은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가운데 오직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정말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역사를 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일찍이 45년전 다른 열 명의 정탐꾼들이 한결같이 이 땅 사람들은 거인이요, 성읍은 요새라서 우리는 도저히 그들을 이길 수 없다고 했을 때에 ‘무슨 말이냐, 이 땅은 하나님이 주신 땅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비록 강할지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외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45년의 세월이 지나 나이가 85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이 85세이면 이젠 패기도 용기도 도전심도 다 사라지고 현실에 안주하며 편히 쉬며 대접받으며 살고 싶어할 나이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지금도 여전히 젊은이와 같은 아니 젊은이보다 나은 믿음과 용기와 도전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로중의 원로요, 어른 중의 어른인 그가 ‘나는 산악지대이든, 거인이 거하든, 견고한 성읍이 있든 관계없다. 그 땅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땅이니 내가 가서 점령하겠노라고, 그러면 그 땅은 반드시 내 땅이 될 것이라.’며 헤브론 산지를 요구한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 85세의 노인이 어떻게 그런 용기가 있었을까요? 물론 그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 말씀은 신1:36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그가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그들은 우리 밥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그 땅은 우리 땅’라는 긍정적인 보고를 했을 때 그 믿음대로 내가 그 땅을 너에게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렙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곳이 산지이든, 아낙자손이 있든, 성읍이 강하든 내가 가서 취할테니까 나에게 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당연히 이래야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완전한 능력과 사랑과 지혜와 권세와 선과 의와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완전한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입니다. 오직 거기에 생명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오직 그 말씀을 믿고 주님의 약속의 땅을 향해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그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은혜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거기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고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자기가 잘나고 똑똑하다고 여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따르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말씀따라 살기보다는 자기 생각과 경험과 지식과 이성대로 살아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우리 인생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잘나고 똑똑하고 위대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도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때로는 정말 대단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은 얼마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 속에 있는지 모릅니다. 아는 게 많은 것 같지만 실상은 쥐꼬리 만큼도 안됩니다. 모르는 것이 천배만배 더 많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것 같지만 못하는 만배 억배 더 많습니다. 우주에 대하여, 인간에 대하여, 영원한 세계에 대하여, 선과 진리와 의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아는 게 별로 없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생각과 지식과 경험만을 믿고 살아간다며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고 무모한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아니, 안 그래요? 모르고 할 수 없는 것이 천배만배억배 더 많은데 어찌 자기 지식과 경험을 따라 살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가지고서야 어찌 진정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가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인간의 경험과 논리와 지식과 환경과 이해관계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유일한 전능자이시여 전지하시고 완전한 사랑과 은혜와 능력과 진리와 선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약속을 믿고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순수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갈렙에게서 또 하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성실함입니다. 오늘 7절을 보세요.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여기서 ‘내 마음에 성실한대로’라는 말씀은 그 어떤 가식이나 꾸밈이나 과장이나 거짓 없이 오직 마음속에 있는 그대로, 내가 확신하는 그대로 보고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가나안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그 땅은 우리 땅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보고는 전혀 과장도 아니요, 허풍도 아니요, 꾸밈도 아니고, 아부의 말도 아니고 마음에 있는 사실 그대로, 확신한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내게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너무나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 땅은 우리 땅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전혀 의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과 믿음은 지금도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믿음입니다. 주님은 완전히 신뢰할 만하고, 주님의 약속은 100% 진짜인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순도가 100%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100%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정말로 갓난아기가 엄마를 100%신뢰하고 죽으나 사나 엄마 손잡고 따라가듯 주님의 손을 잡고 졸졸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갈렙은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진실로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인 신뢰속에서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추호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85세가 된 지금까지 변치 않는 성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순수하고 성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의 권리나 대접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가기 싫어하는 땅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땅으로 들어가 결국 견고한 성읍을 무너뜨리고 거인들을 물리치고 그 산지를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살다가 마침내의 아름다운 인생을 마감하고 할렐루야 찬양하며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갔습니다. 얼마나 멋진 인생입니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한 그의 삶에는 얼마나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쳤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이 귀한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과 성실함으로 주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언가 한 일이 있다면 자신의 권리나 공로나 업적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은혜요 축복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후로도 계속해서 가정이든 교회이든 사회이든 어느 곳에 있든지 믿음과 감사와 기쁨으로 충성스럽게 역할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과 은혜 가운데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복된 아름답고 멋있는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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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제목 : 참된 생명의 기쁨

말씀 : :요일1:1-4

1.신앙은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병든 자를 고쳐주시기 위해서 일까요? 배고픈 자에게 빵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서 일까요? 잘 먹고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일까요? 착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 일까요? 전쟁과 기아와 폭력이 없는 평화의 땅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보다는 혁명을 일으키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강력한 능력으로 침략하고 착취하고 죽이고 빼앗고 압제하는 자들을 제거하고 강력한 세상적 메시야 왕국을 만드셨을 것입니다. 또 수백수천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사 아니 오병이어의 기적이 아니라 그냥 하늘에서 먹을 것이 막 쏟아져 내려오게 하셔서 당시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과 지혜와 권세가 있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리어 33살의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로마의 군병들과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모진 고초와 온갖 멸시 천대를 다 당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시고 무덤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은 단순히 이 세상에 물질적, 정신적, 정치적 파라다이스를 건설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예수라는 그 이름 자체가 그런 뜻 아닙니까? 마1:21절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은 구원자이신데 무슨 구원자이시냐 죄에서 구원하실 분, 그래서 마귀사탄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천국을 주실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왜 교회에 다녀야 합니까? 물론 구원받고 생명의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전인격적 생명의 은총을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그리고 그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 이것이 교회에 다녀야 할 이유이고 교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10:10절 보겠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보세요. 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생명을 얻게 하려고... 또 요11:25,26절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보세요. 나를 믿는 자는 어떻게 된다고요? 부자되고 건강해지고 높아지고 그게 아니라 온전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것도 얻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생명을 얻는 게 중요하다. 그런 말씀입니다.


물론 건강, 권세, 명예, 평안도 좋습니다. 아니 그것도 주십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 온전히 믿고 참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것, 이것이 중요하고 이것이 우선이고 이것이 예수님 믿어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야 행복하고 그래야 평안하고 그래야 자유합니다. 그래야 건강하고 그래야 부유해지고 그래야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도 진정한 평안도 기쁨도 자유도 만족도 누리지 못하고 게다가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니 이렇게 안타깝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세상의 다른 것을 바라보고 거기에 얽매이고 그것 때문에 지지고 볶고 시기질투 낙심근심 원망불평하지 말고, 그런 것들을 위하여 정열을 다 바치지 말고 오직 예수님을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들이고 오직 주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의 듯을 바르게 분별하고 주님의 방법대로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예수님이 생명의 주이심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 안에 있는 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이 진정 완전하고 유일한 생명의 주님이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평안이 있고 위로가 있고 소망이 있음을 분명하게 확실하게 마치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이는 것처럼 알고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죽어도 예수님을 따라 살면서 그 안에 있은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 안에 생명의 은총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면 어떻게 예수님 따라 가며 그 은총을 누리겠습니까? 반대로 예수님이 진정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그 안에 정말 영원하고 완전하며 영적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온갖 풍성한 생명의 은총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실히 알고 믿는다면 어찌 주님을 따라가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영적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주시는 예수님을 확실히 알고 따라간다면 어찌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진정하고 유일한 완전한 생명의 주가 되심을 확실히 믿어야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건 다름 아니라 내 지식과 경험이나 이성을 내려놓고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인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알면 얼마나 알고 경험했으면 얼마나 했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한계와 무지 속에 있습니까? 우리가 영생복락의 길을 어떻게 압니까? 천국과 지옥을 어떻게 압니까?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 이 짧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어떻게 압니까? 아니 우리가 다 죄가운데 무지가운데 있는데 어떻게 압니까? 아니 죽음 이후의 세상을 스스로 어떻게 압니까? 그런데 마치 영원전부터 영원후까지 모르는 것 하나없이 다 아는 것처럼 여기고 자기 생각과 경험과 이성을 따라 살아간다면 세상에 이렇게 미련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인생의 길도, 행복의 길도, 참된 진리도 선도 의도 영원한 세계에 대해서도 모두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아니 그 이전에 그것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배워야 하는데 그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것을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부르셔서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신 것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고 그 길로 달려가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즉 이 말씀은 제자들이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 것도 아니고, 꾸며낸 것은 더더구나 아니고 직접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께 보고 듣고 가르침을 받고 경험한 것을 액면 그대로 기록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오직 유일한 생명의 주가 되심으로 이 예수님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3년간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이 일으켰던 기적과 그분이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고 죽으시는 것과 사망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분이 명령하시자 죽어서 나흘이 지나 냄새가 나던 나사로가 어정어정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고, 야이로의 딸이 살아나는 것을 보았고,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중풍병자가 일어나며, 귀신이 쫓겨나며, 주님의 말씀에 성난 파도가 가라앉고, 바람이 잔잔해 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시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시고, 그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말씀과 기적과 능력으로 똑똑히 보여주셨고, 그들의 두 눈으로 승천하시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그분이 다시 오시마 약속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렇게 직접 보고 듣고 만져보고 확인해서 이 분이 정말 메시아구나, 이 분안에 생명이 있구나, 영광의 나라가 있구나 하는 것을 확실히 알고 믿고 기록한 것입니다.

어떤 강퍅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치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죽을 자를 살리고 자신이 살아나고 한 것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신격화시켜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도 강퍅하고 무지한 인간의 어리석은 소리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이나 능력이나 말씀이나 이런 것들을 뻥튀기해서 기록했다면 그래서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것도, 예수님이 자신이 부활하신 것도, 다시 오마 약속하신 것도, 천국과 지옥도 거짓이라면 어떤 바보가 그렇게 자기가 꾸며놓은 거짓말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겠습니까? 아니 안 그렇습니까? 거짓말을 기록하고 그것을 증언하다가 무슨 부귀영화나 큰 권력이나 명예라도 얻게 된다면 혹시 몰라도 어떤 바보멍청이가 자기가 꾸며낸 허무맹랑한 것을 위하여 핍박당하고 멸시천대를 당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칼에 맞아 죽고 불에 타서 죽고 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을 당하심으로 죄사함의 은총을 주신 예수님, 그러나 그 크신 권세와 능력으로 사망권세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한 승리를 주신 예수님, 그리고 마침내 때가되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예수님, 그 분만이 우리의 완전하고도 유일한 생명의 주십니다.

여러분, 이걸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믿음을 주셔서 영원한 생명의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가장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죄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소유하게 된 사람은 지금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게 됩니다. 참 자유와 기쁨과 평강과 위로와 감사가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정말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완전하고도 유일한 구세주시오 생명의 주님이심을 알고 믿고 따라 살아감으로 정말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의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축복은 단지 영원한 생명의 은총만이 아닙니다. 제가 앞에서 세상에서 복받고 건강하고 출세하고 부자되고 평안하기 위해서 예수님 믿는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은 그것이 진정한 신앙의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이지 세상의 복은 필요치도 얻을 수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 믿는 사람은 일차적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고 계시고 이차적으로는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복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28:2-6절에서는 “2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3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6:33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일단은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얻게 되고 그러면 이 땅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가운데 육체적 물질적 필요도 채워주심으로 말 그대로 영육간에 풍성한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죄와 무지 속에 있는 내 생각과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속에 주님과 온전히 동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말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영적 육체적 물질적 복을 온전히 누리게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믿지도 않거나 믿는다고 하면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멀리하며 살아가면 어떻게 예수님 안에 있는 복을 충만하게 누리겠습니까? 안 그래요? 빛을 떠나 빛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까? 영하 50도나 되고 칼바람이 몰아치는 허허벌판에 서서 따뜻함을 누릴 수 있습니까? 더럽고 추하고 썩은 내가 풀풀나는 곳에서 향기로울 수 있습니까?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신명기 28장의 축복의 말씀에도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입니다. 그러면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네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오늘 3절도 보세요.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이 말씀을 전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사도들과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인데 사도들과의 사귐은 단순히 인간적 사귐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서의 사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되면 생명을 얻고 더 나아가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참된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은 절대로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지식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누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참되고 영원하고 온전한 기쁨과 만족하고 행복과 자유는 예수님과의 올바른 사귐을 가질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내안에 온전히 모셔들임으로 예수님과 온전한 사귐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고, 죄의 벽이 무너지고, 어둠이 물러가고 생명의 빛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물론 하나님 안에 있는 온갖 좋은 것들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충만하게 있는 영원한 생명, 온전한 평안, 충만한 기쁨, 위로, 소망, 안식, 사랑, 은혜 모든 것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온전한 사귐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과 나 사이만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아와 나 사이에도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나와 자연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나와 물질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그래서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고 천국 가는 것은 물론 이 땅에서의 모든 문제도 해결됨으로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존중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면 내 심령과 가정과 교회와 이 땅에 현재적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기서도 천국과 같은 은총을 누리다가 마침내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 성도님들은 우리가 교회에 다녀야 할 목적, 신앙생활의 목적을 바르게 알고, 진정 영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인생의 복이 어디서 오는 지를 분명히 알고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을 구하고 바라보기 전에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모셔 들이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다른 무엇과 교제하기 전에 주님과의 온전한 사귐 속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온전히 사귀는 삶을 위하여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고, 이웃과 물질과 자연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어 이 세상에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기쁨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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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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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말씀 : 고후5:13-17

제목 : 내가 새 것이 되어야 합니다.


1.내가 새것이 되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대부분 새 것을 좋아합니다. 새 집, 새 차, 새 옷, 새 신발, 새 전자제품 등등 새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물론 일단은 새것이 일반적으로 깨끗하고 아름답고 편리하고 성능이나 기능도 좋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늘 접하는 것들은 우리 감성을 무디게 만들어 식상해지고 그래서 뭔가 만족이나 설렘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뭔가 새로운 것들은 우리 오감을 자극하여 신선감과 설렘을 주기 때문에 뭔가 자꾸 새것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은 새로운 것을 찾는 이러한 것들은 겉으로 보이는 외견적인 이유이고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건 물론 인간의 본성속에 자리 잡고 있는 뭔가 더 기쁘고 만족하고 행복하려는 욕망 때문입니다. 그런데 늘 곁에 있는 것들은 식상함을 느끼게 되어 그러한 더 기쁘고자하는 욕망을 채워주지 못하고 새로운 것들은 뭔가 신선감과 셀렘을 주기 때문에 자꾸 새것을 찾는 것입니다. 더 많은 것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좀 더 다양하고 새로운 경험들을 할 수 있으므로 좀더 만족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러다보니까 인간은 커다란 딜레마 또는 역설적인 현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즉 행복하기 위하여 자꾸 더 새롭고 좋고 많은 것을 찾는데 오히려 그게 우리를 행복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행복하기 위하여 무언가 끊임없이 더 새롭고, 더 좋고, 더 아름답고, 더 많은 것을 찾다 보니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렇게 죽어라고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 더 새로운 것, 더 아름다운 것을 찾으러 다니다가 그만 거기에 노예가 되어버려 정작 본래 우리가 찾아다니던 만족도 기쁨과 자유도 평안도 누리지 못하는 역설적인 현실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아니 그냥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기에 노예가 되어 하나님과 진리와 선과 의를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악한 방법으로라도 그걸 얻으려고 하니까 행복은 고사하고 멸망 길로 치닫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좀더 새롭고 좋고 아름다운 것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분명히 우리가 영적으로만 아니라 정신적 물질적 육체적으로도 아름답고 멋있고 좋고 더 많은 것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신28장에서도 분명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면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즉 많게 높게 해 주시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열심히 하나님과 동행했던 아브라함과 다윗과 솔로몬도 부귀영화를 누리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도 영적으로만 아니라 육체적 물질적으로도 기왕이면 더 좋고 많은 것을 누려야 합니다. 그래서 나도 풍요롭고 남도 풍요롭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도 더욱 힘있게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왜 성경에서는 자꾸 부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 세상의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이런 말씀들은 하나님 말씀을 잘 들으면 부자가 되게 해주시겠다는 모순되는 말씀입니까? 물론 그럴 리가 없지요.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그것도 당연히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마6:33절을 보실까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그대로 죽자 사자 세상의 것에 매달리지 말고 먼저 하나님을 찾고 말씀과 진리와 선과 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것도 바르게 찾게 되고 그러면 세상의 것으로도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할 나위가 뭐 있습니까?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야 합니다. 아담의 범죄 이래로 죄인이 된 인생은 영성이 파괴되어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거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멀리하며 선과 진리와 의를 먼저 찾지 않고 죽어라고 세상 것만 좇아 살고 있는데 이제는 다시금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와 먼저 하나님을 찾고 의와 진리와 선을 따르며 세상의 것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 보시기에 옳고 바르고 좋은 사람이 되면 설령 세상의 것을 많이 주시지 않는다해도 상관없습니다. 돈이나 명예나 지식이나 심지어는 건강이 좋지 않아도 내가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내가 새 사람이 되면 세상과 환경과 상황을 탓하지 않고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의 대상이었던 세상이 감사의 대상이 됩니다. 미움이 변하여 사랑이 되고, 원수가 변하여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집은 같은 집이라도 그 집이 새 집이 되고, 천국이 됩니다. 같은 직업이라할지라도 내가 새것이 되면 나의 직업이 그렇게 귀하고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내가 달라지면 가족도 맨 그 가족일지라도 더 사랑스러워지고 귀해지고 더 예뻐 보이는 것입니다. 이웃이 그대로 있어도 고맙고 감사한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엡4:23,24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에서 새것을 찾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이 새것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무언가 새것을 찾고 더 많은 것을 찾으며,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전에 내가 먼저 새것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심령이 아름답고 깨끗하고 진실하고 가치있고 사랑과 은혜가 넘침으로 자신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가운데 살아가며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 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 우리가 이렇게 새것이 되어 새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건 말할것도 없이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실 때에 가능한 일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정말 새로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단 먼저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면 결코 새것이 될 수 없습니다. 내 자아가 죽지 않으면 아무리 발버둥쳐도 옛자아가 그대로 남아 있으면 새로운 인생을 살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은 죽어야 하는데 그러나 죽기만해서도 안됩니다. 일단은 죽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새로운 것을 덧입어야 합니다. 안 그래요? 죽고 가만히 있으면 뭐 합니까? 설령 죄가운데 살지 않는다해도 생명이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그러면 새로운 존재로서의 삶은 요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우리가 온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면 죄에 대하여 죽고 새생명을 얻어야 하는데 그것은 오로지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를 영적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으로 온전히 죽게 하고 다시 살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인간의 지식이나 과학이나 문명이나 물질이나 이런 것들이 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인간에게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조금 유익을 주고 희망을 주고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절대로 인간을 죄와 무지에 대하여 죽게 만들고 자유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 안에 있는 죄와 무지를 일깨울 수도 없고, 그래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게 할 수도 없고, 영원한 생명을 줄 수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죄된 본성을 이기게 할 수도 없고, 영원하고 완전한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인도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알려 주시고 그리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됨은 물론 이 땅에서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7절에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보십시오. 우리가 이제는 이전 것 즉 죄와 무지 속에서 세상의 헛된 것들을 따르던 삶은 지나가고 이제 새로운 인생,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는데 그건 어떻게 가능했느냐,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드리면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되고 영원하고 온전한 새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경험과 이성과 물질로 말미암아 감겨있던 눈이 온전히 떠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이고, 천국이 보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자신이 달라지고 내 이웃이 새롭게 보이고, 세상이 새롭게 아름답게 보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깨닫게 됩니다. 날 구원해주신 그 은혜에 감사와 영광과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참된 사랑과 인생의 목표와 인생의 가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와 기쁨으로 살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심령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완전한 능력과 사랑과 은혜와 생명의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여러분의 심령 속에 주인으로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생명의 영, 사랑의 영, 은혜의 영, 감사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우선은 여러분 자신이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아가며 동시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예수님의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존재로써 기쁨과 감사로 주님과 동행하려면 일단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들여야 하고, 모셔들였다면 당연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으로 내 심령에 채워야 합니다. 오늘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즉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나 자신이 완전히 깨지고 새로운 존재가 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되었고 그러자 그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자신의 모든 가치관과 생각과 경험과 영광을 버리고 그 사랑의 포로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을 모셔들여야 하고 모셔들였으면 정말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그 사랑과 은혜로 우리 심령을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분명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과 세상과 이웃을 바르게 사랑하게 됩니다. 원망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불평이 기쁨과 감사와 사랑 안에서 살게 됩니다. 근심 걱정 절망이 아니라 위로와 소망 가운데 살게 됩니다.

 

여러분, 안 그렇겠습니까? 주님이 얼마나 끔찍이 나를 사랑하셨기에 그 십자가의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으셨는지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찌 작은 어려움에 원망 불평하겠습니까? 주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켜주시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그 은혜를 기억한다면 어찌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나의 죄를 위하여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그분의 은총을 기억한다면 어찌 이웃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주님이 나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인생을 나와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어찌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러한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하고 복되고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주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시려고 그 멸시천대 고통 다 당하시고 결국 자신을 송두리째 드릴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우리의 심령 품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으로 자신과 가족과 이웃을 올바르고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래서 주님도 기쁘시게 해드리고 이웃에게도 기쁨을 주며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새 사람으로 새 인생을 살기 위하여서는 또 기억해야 할 것은 이제는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나를 행복하게하고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주님을 행복하게 하는 복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15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한마디로 예수님을 알지 못할 때는 죄와 무지 속에서 살던 때는 인생이 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도무지 알지 못해서 그저 자신만을 위해서, 그저 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만을 위해서 살아왔는데 이제 예수님을 만나 죄와 무지에서 해방되고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참된 생명의 은총을 알게 되었은즉 다시는 자신의 육체의 정욕만을 위해 살아가는 그런 이기적이고 볼품없는 인생이 되지 말고 주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은 물론 일단은 말씀그대로 우리를 구원하여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하려 하심이요, 더 나아가서는 이러한 생명의 역사에 참여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생명의 은총을 가져다주는 복되고 아름답고 멋있고 상급 받는 인생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나만 구원받고 천국 가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할 것도 없이 그게 정말 아름답고 멋있고 귀하고 복되고 다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은 결코 그저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자신의 욕망만을 위하여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쌓고 소유하고 사용하며 살아가는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함께하면서 사랑과 선과 진리와 의와 물질과 시간을 함께 하면 나누는 가운데 거기서 복을 누리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무언가 진리와 가치 있는 어떤 것과 올바른 그 무엇을 사랑하고 그것을 위하여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투자함으로 무언가 가치를 창출해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타인을 행복하게 하면서 거기서 삶의 가치와 행복을 누려야 할 존재입니다. 물론 그럴 때 우리 모두가 함께 행복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세상에는 생명의 은총이 충만해집니다. 그렇게 우리가 함께 행복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실 때에 하나님께서도 너무나 행복해하십니다. 그게 바로 인류를 창조하신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 잘 먹고 잘살고 그저 육신의 욕구충족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은 가치가 있는 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아름답고 훌륭하고 멋있고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도리어 갈등과 시기와 질투와 거짓이 난무하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나도 행복하지 못하고 너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심령 속에 온전히 모셔 들이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 들임으로 온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어 새로운 삶의 양식, 새로운 삶의 가치, 새로운 삶의 방향, 새로운 삶의 방법을 가지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감사와 사랑과 은혜 가운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진정 올바르게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사회를 사랑하며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 진리와 생명과 복음의 역사에 기쁨으로 참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자신이 먼저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면서 여러분의 가족과 이웃과 이 사회 속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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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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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제 목 : 순진한 믿음

말 씀 : 고전2:1-5


1.순진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언젠가 어떤 유명한 배우가 ‘나는 개그맨들을 정말 존경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유가 뭐냐고 했더니 자기들은 남이 다 써 준 각본대로 연기만 하면 되는데 개그맨들은 때로는 밤을 새워가며 머리를 쥐어짜서 뭔가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고 그 아이템을 가지고 어찌하든지 사람들을 웃게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이 생각하고 연구하고 연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매 회마다 색다른 소재를 발견한다는 게 너무너무 어려울 것 같다고 하며 자기는 그렇게 못할 것 같다고 하며 그래서 개그맨들을 존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그 말을 듣고 보니까 개그맨들이 다시 보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게 뭐냐하면 시키는대로 하는 것은 쉽고, 스스로 생각하고 연구하여 물질적인 것이나 지식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이든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미 전부터 있었던 것, 남이 다하는 것,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연구해놓아 지금까지 해 왔던 것들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그대로 따라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이 하지 않았던 것, 아직 표준화 되지 않고 매뉴얼이 없고 스스로 뭔가 개발하며 표준화시키고 매뉴얼을 만들고 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하다 못해 간단한 장난감을 하나 만드는 것도 뭔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혼자 연구해서 만들려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비로소 완성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중요한 것은 인생은 더욱더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한 길이기 때문에 혼자 생각하고 연구하고 경험하여 개척하며 가려면 너무나 어렵고 너무나 많은 오류와 착오를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너무나 고차원적이고 변화무쌍하고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는 인생의 문제를 온전하게 풀어낼 방정식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분들은 목사님, 왜 불가능합니까? 왜 혼자 연구하고 혼자 생각하는 길입니까? 우리 선인들이 오랜 세월의 경험을 통해서 생각하고 연구해서 만들어 놓은 매뉴얼이 있지 않느냐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우리 선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그들이 알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길을 나름대로 연구해 만든 매뉴얼이기 때문에 물론 그 중에 옳은 것도 많지만 그러나 왜곡되고 잘못된 것도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인생의 완전한 매뉴얼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완전한 매뉴얼은 무엇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대하여 말씀하신 성경 말씀뿐입니다. 오직 거기에 우리 인생이 무엇인지, 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궁극적인 목적지가 어디인지 완벽하게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매뉴얼인 성경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길만이 유일하게 완전히 안전한 길이고 가장 쉬운 길이고 완전하게 옳은 길이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은 인간 자체가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기 때문에 결코 완전한 매뉴얼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한번도 가보지도 않은 길이고 알지도 못하는 길인데 자꾸 혼자 이리저리 연구하며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너무나 큰 시행착오와 낭패를 경험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영원한 고통 속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그런 딱한 처지에 이르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안타깝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아니 도대체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인생이 어떻게 인생의 완벽한 매뉴얼을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매뉴얼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마다하고 자꾸 알지도 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일에 대하여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실패를 경험하고 고통을 맛보고 생명의 기쁨은커녕 멸망 길로 가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아니 이미 하나님께서 다 가르쳐 주신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로 가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에이, 목사님. 하나님이 정해주신 매뉴얼대로 사는 게 어떻게 쉽습니까?’하실지 모르지만 그러면 그게 쉽지 않으면 무엇이 쉽습니까? 알지도 못하는 길을 혼자 개척하며 연구하며 가는 게 쉽습니까? 혼자서 온갖 유혹과 어둠의 세력과 상황과 환경과 세상의 거센 풍파와 맞서 싸우며 사는 게 쉽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신 길을,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능력과 지혜로 모든 어둠의 세력들과 약한 것과 도전과 유혹과 시험을 이기며 가는 길이 쉽습니까? 전혀 모르는 길을 혼자 찾아가는 게 쉽습니까? 안내자를 따라 가는 게 쉽습니까?

 


여러분, 신30:11절과 14절 말씀 보십시오. 11절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4절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보세요. 이 말씀은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 저 미국이나 러시아라도 가야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바로 우리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말씀을 따라가는데 억만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피땀 흘리며 뼈 빠지게 일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머리 싸매고 골머리를 앓으며 연구해야 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농사짓는 게 쉽습니까? 하나님 믿는 게 쉽습니까? 세가 빠지게 일하는 게 쉽습니까?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게 쉽습니까? 아니 얼마나 쉽고 평안하고 좋습니까? 그냥 교회에 와서 평안히 앉아서 말씀 듣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얼마나 쉽습니까? 하나님이 그렇다 그러면 네, 하나님 알겠습니다. 그러고 그냥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하나님께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지혜와 평안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놀라운 은총가운데 살게 하십니다. 세상에 이 쉽고 이 좋은 것을 왜 안하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자신이 알지도 가보지도 못한 길을 자꾸 혼자서 자기 마음대로 어렵게 가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길, 예수님이 우리의 인도자가 되셔서 이끌고 가시는 그 길을 그냥 예수님만 졸졸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완전한 매뉴얼인 성경을 따라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가운데 생명의 길, 복의 길로 잘 달려가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자기 지혜를 의지하면 실패합니다.

 


오늘본문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보게 되는데요,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을 만난 후에 정말 자신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갔던 사람 바울이 한 때 실패를 경험한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며 그 실패를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보지는 않았지만 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여러분, 보세요. 바울이 약하고 두려워하고 떨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심히 떨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누굽니까? 그는 빌립보에서 죽지 않을 만큼 맞고 쇠사슬에 묶여 감옥에 갇혀서도 찬송하고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귀신을 쫓아내고, 그의 몸에서 앞치마나 손수건을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서 떨어져 죽자 기도하여 살게 한 사람입니다.

 


이런 천하의 바울이 약하고 두려하고 심히 떨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아덴에서의 실패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오기 전에 아덴에서 자신의 지식과 지혜로 사람들을 설복시키려다가 실패했던 것입니다. 아테네는 헬라제국의 수도로서 당시 철학, 문화, 학문, 종교,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으나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도 있을 만큼 우상이 득실거리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바울은 의분이 일어나 너희가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생각하는 그가 누구인지 알려 주겠다면서 그게 바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 역설하며 철학적 지식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설복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덴 사람들은 그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말쟁이인가보다 하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관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크게 낙담하여 그곳을 포기하고 고린도로 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실패하고 낙심하고 좌절했던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이성과 지혜를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 2절에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즉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바울은 아테네에서 자기 이성과 지혜를 의지했다가 철저히 실패하고 그곳을 떠나 고린도로 오면서 다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절대로 내 꼴 난 지혜를 의지하지 않으리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증거하리라. 그리고 고린도에서는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과 부활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쟁이처럼 오직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결국 고린도에서 성공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을 구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참된 지식이나 능력은 결코 인간의 지식과 지혜와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신의 그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 앞에 엎드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그 도를 따라 살아갈 때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진정한 지혜와 능력 가운데 생명의 길로 달려가며 인간의 모든 문제를 이기고 생명의 기쁨을 누리는 진정한 능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령 세상이 아무리 외적으로 좋아진다해도 인생의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여러분, 보세요. 오늘날 세상은 불과 10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습니다. 과학이나 문화나 교육이나 소득 수준이나 모두 백배 천배는 올라갔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물론 가난과 질병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해결된 문제보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백배 천배 많습니다. 못먹고 못살던 옛날이나 잘먹고 잘사는 지금이나 병들고 늙고 죽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죄악은 오히려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빼앗고 사기치고 강도짓하고 간음하고 살인하고 성폭력을 저지르로 하는 일들은 더욱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이만큼 잘 살게 되었으면 좀 감사하며 살만도 한데 힘들어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극심한 이기주의와 물질주의로 말미암아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툭하면 싸우려고 대들고 폭언과 독설을 퍼붓고 투쟁을 하곤 합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아무리 과학과 문화와 지식이 발달하여 혹 물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좀더 풍요로워진다해도 그런 걸 가지고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도리어 그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고 더욱 죄의 길로 달려감으로 말미암아 더욱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지식과 지혜와 과학과 물질문명에 내 인생을 맡기면 안 됩니다. 세상의 지식과 과학과 물질문명이 좀 발전했다고 그것 의지하고 바라보고 그런 관점에서 살아간다면 세상에서도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결국 영원한 멸망길로 갈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게 참된 능력이요 지혜요, 그런 사람들이 여기서도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5절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믿음은 인간의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꼴난 인간의 이성과 지혜와 경험으로 요리조리 백날 생각해봐야 참 생명의 도는 알 수 없다. 그저 우리의 약함과 무지와 부족함과 허물과 죄를 인정하고, 그저 순진한 아이처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러면 주의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그러면 영광의 나라를 알게 되고 그럴 때 생명의 능력이 넘쳐나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별 것 아닌 지식과 이성과 경험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런 거 내려놓으십시오.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인생이 백날 연구하고 따져보고 해봤자 그야말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맨날 거기가 거깁니다. 알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알고 이해하면 그게 이상한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하나님같이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죄와 무지와 한계를 인정하고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는 것뿐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그리스도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 예수님 안에 영광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그냥 어린애처럼 받아들이고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확실히 믿게 하십니다. 그러면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쳐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순종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복음을 순진하게 받아들이고 따라가면 복음에는 생명이 있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분명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4절을 보십시오. “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인간의 이성이나 능력이나 지혜나 이런 다 집어 치우고 그냥 단순무식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에 성령께서 역사하셨고, 성령이 역사하시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앞에 순진한 사람이 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분명 은혜의 사람, 능력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지식을 신뢰하고 그걸 따라가는 사람은 너 잘났으니 네 맘대로 해봐라 하면서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길은 요원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진정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며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순진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험한 풍랑 일어나는 바다위로 걸어오라고 하자 풍덩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물위를 걸어서 주님을 향하여 걸어갔습니다. 주님의 말씀이니까, 주님이 지켜 주실 것을 믿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물위로 뛰어내렸고 그리고 실제로 물위를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가다가 험한 풍랑 일어나는 바다를 보자 그만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러나 인간적으로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하였고 그러자 능력을 잃어버리고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어땠습니까? 하인이 병이 들자 예수님을 찾아가자 예수님이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자 그저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하고 말합니다. 주님이 수고스럽게 저희 집까지 가실 일이 뭐있습니까? 그냥 말씀 한마디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이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하시자 그 즉시 하인의 병이 낫지 않았습니까?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대어도 낫겠다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졌을 때 병이 나았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침으로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른 다음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지시를 받고 그대로 하자 눈이 떠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니까 순진하게 드리자 하나님께서 이삭도 살려주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순진하게 골리앗을 향해 돌진하여 결국 승리하였습니다. 나아만장군은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까 문둥병이 떠났습니다.

 

여러분, 믿음에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우리가 정말 우리 자신을 안다면 모든 면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안다고 하는 순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본다고 하는 순간 아무것도 못 보는 진짜 소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41)고 하십니다. 그들은 성경과 천국과 하나님에 대하여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못 보는 소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부족하고 연약하고 미련함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더라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참된 생명과 진리를 알게 되련마는 그 꼴난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이성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여 결국은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소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순진하게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내 지혜나 이성이나 감정이나 경험을 일단 다 내려놓고 주님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뭐가 어떠니 저떠니 이야기하지 말고 그저 겸손하게 엎드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다시 오실 예수님을 믿고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향해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겸손하고 순진한 마음으로 예배드리고 설교 듣고 찬양하고 기도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성령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기고 더욱 은혜와 능력과 기쁨이 충만한 복된 삶이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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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본문 : 마21:33~43절

제목 : 열매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설교 : 김 혁래 목사 (예성교회)

 

<마21:33~43절>열매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좇아 죽였느니라,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다같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 하십니다

이 시간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열매맺는 백성’에 관해서 상고하시므로 함께 은혜 받는 시간 되시기 바람니다.

<여러분 성경책이 무엇을 기록한 책입니까>?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유대인들 즉 이스라엘 민족들의 구원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고, 신약성경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이   이방 민족들에게 전파되는 역사를 기록한 책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심으로, 유대인을 위한 복음이 만국인을 구원하기위한 복음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의 ‘포도원 비유’ 말씀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빼앗아‘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에게 주실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와 목자들은, 하나님의 ‘장자권 축복’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에서에게서 ‘장자의 축복’을 빼앗은 것과같이, 하나님의 축복은  ‘열매 맺는 백성’이 빼앗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람니다.
주님께서도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매 맺기를 힘쓰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사5:7절 말씀을 함께 찿아 보시겠습니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포도원은 무엇이고, 나무는 누구라고 말씀 합니까>?
분명하게“포도원은 이스라엘 백성이요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포도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단순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말하는것이 아닙니다, 장차 ‘새 예루살렘 성’에서   ‘장자들의 총회’에 참여하여 ‘왕 노릇’할 수 있는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히12:22~24절“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할렐루야!
열매맺는 성도가 되어서, 장차 ‘새 예루살렘 성’에서 ‘장자들의 총회’에 참여할 수 있는 축복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

이제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에 관해서 자세하게 알아 보시겠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너희는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하셨으며,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일찍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나라의 ‘지리적인 위치’와, 그 ‘백성들의 풍습’까지도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주실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열매맺는 백성의 지리적인 위치>를 알아 보시겠습니다.
이사야 18장과 41장 .46장. 55장. 56장. 65장의 말씀들을 찾아 보시기 바람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나라는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이며,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키며, 땅 끝,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 돗는 곳에서 오게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된 백성이 어떤 나라인지 세계지도를 펴놓고 지리적인 위치를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세계지도를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기준으로하여, 중국과 러시아로 국경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또한 한국은 땅 끝이며, 땅 모퉁이인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반도의 나라 입니다.
그러므로, 세계의 사람들이 한국을 일컬어서 ‘한반도’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한국을 일컽어서 해 돗는 나라, ‘동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동방 예의지국’이라고 말하며,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그의 시에서“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찬란한 빛이 되리라”고 일찍이 한국을 일컬어서   아시아 ‘동방의 등불’이라고 세계에 소개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구라파 사람들은  한반도 지역을 일컬어서 ‘극동 아시아’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지리적인 위치’를 가진 축복 받은 나라는 우리  나라 대한민국이 분명히 맞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람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같은 말씀을 가르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교회들과 성도들은 천국의 ‘장자들의 축복’과는 거리가 멀고 관계과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축복된 말씀을 믿고, 증거하는 교회와 성도 여러분들은 진실로 축복된 성도들임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이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 마다 내가 그를 성산으로 인도하여 그들을   기쁘게 할것이라.” 
“나를 구하지 않고, 나를 찿지 아니 하던자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하셨으며,
또 롬9장에는“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에 우리나라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하나님을 전혀 알지도 못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요, 불선한 길을 행하는 이방인이었던 것입니다.

사65장에는 <열매 맺는 백성의 풍습>에 관해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65:1~7절 말씀을 함께 상고해 보시겠습니다.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위에서 분향한다’는 말은, 우리 조상들이 즐겨지내던 ‘산신제’를 뜻 하는 말입니다.
또한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지내며, 산 위에서 분향하며 작은 산 위에서 나를 능욕하였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문화에 따라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무덤 근처에다가 ‘초막집’을 짖고 3년 상을 지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런 풍습을 ‘은밀한 처소’에서 지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돼지 고기를 즐겨 먹으며 가증한 물건의 국을 그릇’에 담는다. 고 말씀 합니다.
세계에서 한국은 돼지고기를 가장 즐겨 먹기로 소문난 나라중의 하나입니다.
오직하면 삼겹살을 즐겨먹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가증한 물건을 그릇에 담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먹지말라고 하신 ‘부정한 음식’을 먹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같은 풍습들이 패역한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풍습들이라고 이해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점은 모세오경인 신명기 14장에 보시면, 돼지고기는 먹을수 없는 부정한 음식으로‘너희는 이런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그 사체를 만지지도 말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풍습은 이스라엘의 풍습이 아닌것이 분명함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나를 구하지 않고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하시면서 우상을 숭배하며, 불선한 길을 행하던 패역한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 주시고, 불러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으로 축복해 주신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날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열매 맺는 백성의 축복‘을 받은 나라임을 믿으시기를 바람니다.
다같이 찬송가 261장을 합창합니다 <어둔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
이제 다시 한번 정리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하셨던 말씀은 이사야서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백성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포도원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민된 ‘장자의 축복권’을 빼앗기고 예수님의 말씀대로‘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받게되며, 그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바라시는 섭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는 ‘포도원의 비유’의  말씀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가르치지 못하는 성도와 교회들은 하나님 나라의 ‘장자들의  총회’에 참여할 수 있는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고전9:24~25절“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할렐루야!
우리의 믿음의 목적은 하나님의 선한경기에 참가해서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는것은 기본이요, ‘더 좋은 구원’인 ‘장자들의 총회’에 참여하여,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할 수 있는 ‘승리의 면류관’을 받는 것이 목표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딤후2:5~6절 말씀을 합독 하시고 마치겠습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할렐루야!

올림픽 경기에 참여하려면, 먼저 경기에는 어떤 종목들이 있으며, 그 종목의 규칙은 무엇인지 알아야지만, 경기에 참여하여 금메달을 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경기하는 법, 즉 규칙을 모른다면, 아무리 실력있고 휼륭한 선수라 할지라도 경기 규칙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 선수는 예선도 통과하지 못하고 본 경기가 시작 되기도 전에 실격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예성교회 성도들은 ‘경기하는 법’을 알았음을 감사하시기 바람니다.
섭리의 말씀을 알았으니 경기에 참여하여, 열매 맺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람니다.
주님 재림하실 때 ‘새 예루살렘 성’에서 장자들의 총회에 참여하여 승리의 면류관을 받고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는, 축복을 누리시는
예성교회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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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으세요

 

본문 : 요한복음 14: 1 -6

제목 : 땅 끝까지 가는 날

설교 : 권 오 선 목사

 

사람들은 자기 얼굴이 너무 예뻐다 . 와 머리 죽인다 . 어느 미용실에서 했어 . 만원짜리 길표 옷을 입었는데도 와 100 만원 줬다해도 믿겠다 . 혹시 하늘에서 목욕하러 내려왔다가 옷을 잃어버려서 남아 있는 것 아니야 그러면 그날은 지갑 다 털고 카드 한도액까지 그어댑니다 . 그걸 노리고 그러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 그런데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면 기분 나빠하고 오늘 재수 징그럽게 없다라고 합니다 . 참으로 어리석고 안타까운 생각입니다 .

예수 믿으세요 라는 말이 세상의 그 어떤 말보다 복있는 말입니다 .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영생을 얻고 천국을 소유합니다 . 저는 오늘 우리 예안교회에 오신 여러분들께 예수 믿으세요 라는 인류 최고의 복된 말씀을 드립니다 .

초대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고백록 이라는 유명한 책을 남겼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방황과 타락의 세월을 보내다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내가 예수를 믿고 나니 엄마의 품에 안긴 것 같이 평안하다 고 고백했습니다 . 여러분은 오늘 어떤 동기에서 오셨든지 예수를 믿으셔서 엄마 품에 안긴 것과 같은 평안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예수 믿으세요 라고 전도하다가 죽었습니다 . 그들은 예수 믿으세요 라는 말에 자기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 기독교 2 천년 역사 동안 예수 믿으세요 라고 전도하다가 죽은 사람들은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 우리나라도 1884 년 개신교가 처음 들어오면서 예수 믿으세요 라고 전하다가 많은 선교사들과 성도들이 죽었습니다 . 지금도 이 말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

기독교 2 천년 역사에서 제일 많이 사용하는 말이 예수 믿으세요 라는 말입니다 . “예수 믿으세요 라는 말에 자기의 생명과 인생을 거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 왜 그렇습니까 ? 예수 믿으면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 바둑에 꽃놀이 패 라는 것이 있습니다 . 패싸움만을 놓고 보면 꽃놀이 패를 가진 사람이 무조건 이깁니다 .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 꽃놀이 패인데 , 무슨 수로 이깁니까 ? 예수 믿는 것이 꽃놀이 패와 같습니다 .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복을 받으니까 좋고 , 죽으면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사니까 좋고 . 이것이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이제 곧 하나님 나라에 간다 고 하셨습니다 . 그러자 제자들이 주님이 가시면 우리 혼자 어떻게 살라고요 라며 걱정합니다 . 그때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아라 . 내가 하나님 나라에 먼저 가서 너희들을 위한 집을 마련하고 다시 와서 데려가겠다 고 하셨습니다 . 그러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 어떤 축복입니까 ?

 

첫째로 ,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

 

대부분의 종교는 다 구원관이 있습니다 . 회교는 마호멧트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 불교는 고행을 통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얻는 자력구원 입니다 . 20 세기 한국 불교의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는다면 성철스님일 것입니다 . 그 분은 결혼직후에 출가해서 부모가 찾아와도 고행에 방해가 된다면서 만나지 않았습니다 . 기거하는 곳에 철조망을 치고 10 년 동안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고행했습니다 . 16 년 동안 솔잎가루와 쌀가루만 먹었습니다 . 8 년 동안 장좌불와 ”, 즉 눕지 않고 앉아서 잠을 자고 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 참 대답합니다 .

이 정도의 수행을 했다면 마지막에는 나는 성공적인 수도생활을 마치고 , 속세로부터 해탈하여 최고의 경지인 열반의 세계로 간다 는 행복한 고백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 그런데 그 분이 마지막으로 남긴 열반송 에 보면 , “나는 한평생 무수한 사람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 보다 더하다 . 산채로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갈래니 한덩이 불덩이 푸른산에 걸려 있다 고 합니다 . 쉽게 풀어보면 나는 한 평생 많은 사람을 속였으니 그 죄가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높다 . 그 죄로 인해 나는 살아 있는 모습으로 지옥에 떨어지게 생겼다 는 것입니다 .

기독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 평생 남들이 흉내도 낼 수 없는 고행을 했으면서도 죄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 구원의 확신도 없습니다 . 지옥에 가게 생겼다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 이것이 20 세기 한국불교의 가장 위대한 인물의 고백이자 탄식입니다 . 그러니 산은 산이고 , 물은 물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 평생 고행하기 전이나 고행한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 죄는 그대로 있고 ,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 얼마나 허무하고 안타깝습니까 ?

인도의 위대한 전도자 썬다싱은 히말라야 산맥과 티벳고원을 넘나들며 고행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 평생 앉아서 먹고 자는 사람 , 하루 종일 물구나무 서 있는 사람 , 몸도 비틀지 못하는 좁은 공간에서 꼼짝하지 않는 사람 , 별의별 방법으로 고행을 했습니다 . 썬다싱은 그들에게 고행하니 평안하십니까 ? 구원의 길을 찾으셨습니까 ?”라고 물었지만 , 한결같이 마음이 더 불안하고 복잡하다 고 대답했습니다 .

모든 고행자들이 평생을 고행을 했으면서도 마지막에는 하나 같이 만족과 평안이 없고 , 구원의 길을 찾지 못했다 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를 핍박하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 평생 예수 전하다가 죽었습니다 . 그는 마지막에 내가 믿음으로 살았으니 하나님 나라에 간다 는 행복한 고백을 했습니다 . 다윗도 시편 23 편에서 내가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리로다 라고 합니다 . 스데반이 예수를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예수님이 나를 반기신다 고 합니다 . 세계적인 부흥사인 디엘 무디 목사님은 죽음 직전에 나는 하나님의 나라로 이사 간다 . 천사들이 나를 마중 나온다 고 행복해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 성 경에 보면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같이 천국에 간다면서 감격함으로 죽었습니다 .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 , 영생의 길을 찾아서 헤매고 고행을 하지만 , 예수를 떠나서는 길과 방법이 없습니다 . 오늘 본문 6 절에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 고 말씀하십니다 . 모든 종교인들이 죽음 앞에서 근심하며 후회합니다 .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죽음 앞에서도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에 가기 때문입니다 . 기독교가 참 생명의 종교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여러분도 예수 믿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둘째로 , 예수 믿으면 자유함이 있습니다 .

 

어떤 분들은 예수 믿으면 술담배도 못하고 , 주일날도 교회 가야하는데 무슨 자유함이 있나 라고 생각합니다 . 이것은 오해입니다 . 예수를 믿어야 진짜 자유함이 있습니다 . 요한복음 8 장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고 합니다 . 확인해 볼까요

예수 안 믿으시는 분들은 자녀들 이름도 마음대로 짓지 못하고 ,이사도 손 없는 날을 택해야 하고 , 묘터도 잘못 잡으면 가문이 망한다고 합니다 . 귀신을 노하게 하면 다 망한다면서 돈도 바치고 , 음식도 바치면서 잘 대접합니다 . 귀신이 좋아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 겁이 나서 섬깁니다 . 귀신으로부터 자유함이 없습니다 .

귀신이 무서운 분들은 예수를 믿으세요 . 귀신 섬기는 분들은 기절초풍할 일이지만 , 예수 믿는 사람들은 더러운 귀신 , 악한 귀신이라 고 저주합니다 . 사람이 개와 대결할 때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 개가 공격하려고 하면 사람도 같이 무서운 표정으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자세를 보이면 개는 꼬리를 내리고 도망합니다 . 그런데 사람이 먼저 겁을 먹고 도망가려고 하면 개는 사납게 공격을 해옵니다 .

귀신도 같습니다 . 귀신에게 겁을 먹으면 절대로 이기지 못합니다 .겁을 먹으면 귀신의 노예가 되어서 평생 자유함을 잃어버리고 살아야 합니다 . 그런데 귀신은 예수님과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무서워 합니다 . 성경을 보면 귀신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보고는 벌벌 떨고 다 도망갔습니다 . 믿음이 큰 능력이고 권세입니다 .

잘 안믿어 지십니까 ? 무당이 푸닥거리하고 점장이가 점치는 곳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 예수 믿는 사람 앞에서 짝두를 타면 발이 상하고 , 대나무나 숟가락을 아무리 세우려고 해도 안됩니다 . 귀신이 예수 믿는 사람들 앞에서는 겁이 나서 아무것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

저는 목회하면서 귀신들린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 귀신들린 사람은 장정도 제어할 수 없는 초인적인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 가족들도 무서워서 접근을 못합니다 . 그런데 목사와 교인들이 가면 벌벌 떨면서 구석에 쳐박혀 있습니다 . 거기서 기도하고 찬송하면 귀신들린 사람은 숨도 제대로 못 쉽니다 . 귀신이 예수를 무서워하기 때문입니다 . 이 얼마나 큰 권세입니까 ? 요한복음 1 12 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권세를 주셨다 고 합니다 .

귀신이 무서워서 섬기는 분들에게는 자유와 평안이 없습니다 .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받습니다 . 이것이 진정 자유이고 평안입니 다 . 예수를 믿으면 귀신이 두렵지 않습니다 . 죄의 문제로 죽는 순간까지도 고민하고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 하나님이 믿음을 보시고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 죽으면 마귀가 없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

마태복음 8 장에 보면 ,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배를 타고 가는데 태풍을 만나 배가 뒤집히게 생겼습니다 . 베드로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셔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사도행전 12 장에 보면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서 내일이면 죽습니다 . 그런데도 사형 전날 밤에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 베드로를 구하러 온 천사가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데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 천사가 발로 옆구리를 뻥차면서 일어나 하니까 겨우 일어나서 탈출했습니다 . 예수 믿고 천국을 소유하니까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평안했던 것입니다 .

이런 삶이 진정 자유고 평안입니다 . 여러분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 누구든지 예수만 믿으면 이런 자유와 평안의 삶을 사실 수 있습니다 .

 

셋째로 ,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존귀함을 받습니다 .

 

구약 욥기 36 7 절에 그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들과 함께 왕좌에 앉히사 영원토록 존귀하게 하신다 고 합니다 . 시편 16 편에서도 하나님께서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다 고 합니다 .

누가복음 15 장에 보면 어떤 큰 부자집의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간섭이 싫어서 유산을 받아 집을 나갔습니다 . 떠나면 행복할 줄 알고 떠났지만 , 나중에 돈이 다 떨어져 거지가 되었습니다 . 그때 이 아들이 우리 아버지 집은 부자라서 먹을 것도 많은데 , 내가 왜 뛰쳐나와서 이 고생을 하나 돌아가야겠다고 합니다 .

아버지는 밤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문 열어놓고 아들을 기다리는데 , 어느 날 아들이 거지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 모두가 더럽고 냄새난다며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 아버지는 이 아들에게 입을 맞추고 얼굴을 비비면서 손에 금반지를 끼우고 새 신발을 신기고 좋은 옷 을 입혔습니다 . 아들을 존귀하게 여기는 아버지입니다 .

이 아들의 아버지가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좋다며 하나님을 떠납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한 순간도 잊지 않으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 돌아오기만 하면 아들로 맞아주시고 존귀하게 대우해 주십니다 .

사회에서 존귀함을 받고 , 회사에서 존귀함을 받는 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어디서나 존귀함을 받고 살아간다면 큰 복입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 존귀함을 받는다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큰 복입니다 . 하나님께 존귀함을 받으면 셀 수 없는 축복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

예수 안믿는 사람들도 비가 오지 않으면 하나님 비를 좀 내려 주세요 라고 합니다 . 위험한 일을 만나도 아이구 하나님 살려 주세요 라고 합니다 . 스님들도 겨울에 얼음 위를 염불을 외우며 가다가 갑자기 얼음이 쩌정그러면 아이구 하나님 살려주세요 라고 한답니다 . 그런데 예수를 안믿으면서 이런 기도를 백날 해봐야 응답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십니다 .

2 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카이제 황제가 자기의 시종에게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거를 보여주면 나도 하나님을 믿겠네 라고 했습니다 . 그때 시종이 폐하 , 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 그렇습니다 . 이스라엘은 4 천년의 역사 중 , 3,300 년을 남의 나라 지배를 받았습니다 . 세계에서 가장 전쟁이 많았던 나라가 이스라엘이고 , 가장 전쟁이 많았던 도시가 예루살렘입니다 . 옛날 앗시리아 제국과 바벨론 제국 , 헬라제국과 로마 제국이 이스라엘을 아예 멸종시키려고 했습니다 . 히틀러도 그랬습니다 . 수천년 동안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

그런데도 지금 전세계의 경제나 정치 , 문화와 과학 등 모든 분야의 리더들이 유대인입니다 .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33%가 유대인입니다 . 이 기적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

여러분들이 혹시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못하신다면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히 보여줍니다 .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존귀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으면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 축복을 받습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자녀가 가출한 부모님들이 애타게 찾는 문구를 신문이나 길거리 벽보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 “내가 잘못했다 . 다 용서할테니 제발 돌아와라 . 엄마 아빠는 문열어 놓고 잠도 못자고 기다린다 고 호소합니다 . 돌아오기만 하면 다 용서하고 무엇이든 주려고 합니다 . 이 부모의 심정이 우리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 지금도 하나님은 문을 열어놓으시고 여러분이 돌아오도록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든지 사랑으로 다 덮으시고 큰 복을 주십니다 . 여러분 모두 기다리시는 하나님께 다 돌아오셔서 이 축복을 받으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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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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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순복음 교회 이 영훈목사 주일낮설교

 

본 문: 2:8-11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말씀 봉독>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등단 후 멘트>

할렐루야. 스크린을 보기만 해도 젊어지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옆에 있는 분과 이렇게 인사 나누겠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좋은 일이 있습니다.” 한 번 더 인사하십시오. “사랑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렇게 고백해야 됩니다. “나는 예수님 안에서 행복합니다.” 언제나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나는 복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렇게 믿음으로 고백해야 됩니다. 나에게 좋은 날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복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오늘도 이 하루가 주님께서 내게 주신 놀라운 하루, 축복의 하루, 기적의 하루가 될 것을 믿습니다. 예배 참석할 때마다 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줄 믿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믿음으로 고백하고 찬송할 때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주님 은혜를 늘 사모하고 주님 앞으로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님 앞에 찬양과 기도로 나아갑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이 시간 주님 함께 하여 주옵소서.” 통성으로 기도합니다

(통성기도)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 만입이 있어도 우리는 다 감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많고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님 저희를 택하여 자녀 삼아주시고 오늘 이 시간 이 자리까지 주님의 은혜가운데로 인도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 그와 같은 놀라운 은혜를 받고도 세상에 나가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살았던 것을 이 시간 회개합니다. 예수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주셔서 우리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죽도록 충성하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올리옵나이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계시록 28절로 12절의 말씀을 가지고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사람들이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서점에 가보면 행복’ ‘성공이런 주제로 하는 책들이 계속 잘 팔려나갑니다. 그런데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냐? 자기가 하는 일에 참 만족함을 느끼고 기쁨으로 그 일에 열심을 다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은 마음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일에 늘 기쁨과 만족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을 해 나가도 늘 마음의 참된 만족이 없습니다. 어딘가가 비어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가지고 최선을 다할 때 그것이 행복이요 그것이 기쁨이요 그것이 축복이요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우리 삶 가운데에는 허무와 절망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의미가 있고 그 일을 통하여 우리가 보람을 느끼고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을 잘 섬기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고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하여서 장차 주님 앞에 설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칭찬받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소아시아 일곱 개 교회 중에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이 서머나라고 하는 지역은 에베소 북동쪽 약 67km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인데 아름다운 항구 도시입니다. 아시아의 보석, 아시아의 꽃으로 불리었던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아시아의 어느 도시보다도 로마에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이 많은 혜택을 주었습니다. 자유 순회 재판소도 설치해주고 또 이 곳에서 저들이 많은 우상을 섬겼고 또 황제를 숭배했습니다. 이 서머나는 학문, 특별히 과학과 의술이 발달한 도시였고 무역도시로서 물질적인 풍요를 누렸던 곳입니다. 또 이곳은 일찍이 유대인들이 자리를 잡고 상권을 쥐고 있어서 유대인들이 돈을 많이 벌고 그곳에서 로마제국과 손을 잡고 그들의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니까 유대인들이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아주 힘들고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그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하여 칭찬받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1.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교회

첫째로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교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28절로 9절에,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처음이요 마지막이시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환난과 핍박을 많이 당하고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겨서 남이 볼 때는 궁핍하고 어려운 가운데 있는 것 같지 만은 실제로는 내가 부요한 자니라.’ 할렐루야.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 되시고 처음과 나중 되시고 온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를 인정하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 주님 앞에 인정받고 칭찬받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는 잘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주님 앞에서는 소홀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약속시간은 잘 지키면서 주님과의 약속시간은 잘 지키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삶의 순서를 바꾸어서 먼저 주님을 잘 섬기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 앞에 충성하고, 주님 앞에 칭찬받는 주님의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복을 우리에게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많은 환난과 핍박을 당한 교회입니다. 특별히 저들이 로마 황제를 우상화 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우상숭배를 반대했습니다. 그러니 로마제국에서 볼 때는 아주 이교도입니다. ? 로마 황제를 숭배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이 기독교인들을 저들이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유대인도 앞장서서 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인이 유대교에서 나온 이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치 사울이 예수믿는 사람을 붙잡아 감옥에 넣고 교회를 무너뜨리는데 앞장섰던 것 같이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기독교를 핍박을 했습니다. 그래서 서머나 지역에 살고 있던 많은 기독교인들이 재산을 몰수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비록 물질적으로는 남들이 보기에 모든 것을 다 빼앗겨서 가난하고 어려운 상태에 있는 것 같지만은 실상은 너는 부자니라, 부요한 자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의 환난과 고통을 잘 아시고 그들을 격려하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이 세상 사는 동안 때때로 핍박을 당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합니다. 문제를 만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변치않고 주님을 기쁨으로 섬기면 주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어려움을 안다. 네 고통을 안다. 네 슬픔을 안다. 네 문제를 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라. 너는 주 안에서 부요한 자니라. 너는 주 안에서 승리자이니라. 너는 주 안에서 축복받은 자이니라. 너는 주 안에서 잘 될 수 밖에 없는 자이니라.” 할렐루야.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악한 원수 마귀는 어떡하든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고 우리를 공격해옵니다. 시험에 들게 하고 상처받게 하고 분열이 생겨나게 하고 다투게 하고. 이런 일을 뒤에서 조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환난에 동요되지 않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만 바라보고 주님 앞에 변함없는 모습으로 충성할 때 주님께서 복에 복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내가 너의 믿음과 인내와 수고를 안다. 너는 부요한 자니라. 서머나 교회는 많은 것을 잃었지만은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교회가 되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에 많은 순교자가 우리 교회 역사가운데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 중에 주기철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아들되신 주광조 장로님이 나의 아버지 순교자 주기철 목사이라는 책을 썼는데, 신사 참배를 반대해서 얼마나 많이 감옥에 들어갔는지 모릅니다. 거꾸로 매달아서 고춧물 가루를 막 코와 입에 쏟아 붓고 잔혹한 고문을 감행하다가 결국은 그 고문에 못 이겨서 세상을 떠나시게 됩니다. 그 온갖 고문을 받고 목사님이 돌아가시자 온 교인이 시신 앞에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그 때 사모님이 말씀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울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주 목사님은 나약해서, 힘이 모자라서, 무식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말해야 할 때 벙어리가 될 수 없어서, 당연히 가야할 길을 도망치거나 피할 수 없어서, 당연히 죽어야 할 시간에 살아남을 수 없어서 죽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자만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사모님도 십여 차례 감옥에 끌려가서 많은 고문을 당했는데 아주 목사님과 같이 이와 같은 굳센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헌신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열세살에 아버지가 그렇게 죽는 모습을 봤으니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충격을 받아서 실어증, 말을 못하는 그러한 증세가 와서 8?15광복 후에야 정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당시 어린 소년이었던 장로님이 그 때의 자기 모습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아버지가 순교한 지 14개월 만에 해방이 찾아왔다. 당시 어머니는 위암으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찾아와 어머니에게 돈과 가옥문서 그리고 논밭문서를 내놓았다. 항일투사인 아버지의 숭고한 정신에 감복해서 김일성이 보낸 포상금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목사님은 이 세상의 포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순교했으니 하나님의 상을 받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말하며 완강하게 거절했다. 옆에 있던 나는 마음에 커다란 갈등이 왔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어머니, 이 험한 세상에서 나 혼자 살아가려면 저 돈이 필요한데그런데 어머니는 그런 내 생각을 아셨는지 그들이 돌아간 다음 나를 앉혀놓고 성경구절을 찾아 읽으라고 했다. 시편 372526절의 말씀이었다.” 현대인의 성경 번역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의롭게 사는 자가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녀들이 구걸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가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므로 그의 자녀들이 복을 받는다.”

그렇습니다. 순교자의 자녀들이 하나님 은혜 가운데 복을 받은 것입니다. 죽도록 주님 앞에 충성한 하나님의 일꾼들의 자녀들이 자자손손 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환난과 핍박속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그들이 궁핍한 자처럼 되었지만은 주님 보시기에 실제로 영적으로 부요한 자였고, 주기철 목사님도 생명을 바쳐 헌신했는데 모든 걸 다 빼앗겼지만 영적으로 볼 때 실제로 부요한 자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부요한 자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부요한 자가 될 때 하나님께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게 되는 은혜와 축복을 우리에게 더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만 함께 계시면 우리는 바로 부요한 자인 것입니다. 온 우주 만물을 소화하신 주님이 나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나는 행복하고 주님 안에서 나는 복받은 자이고 주님 안에서 나는 승리자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큰 백화점을 가진 회장님이 아들 약혼자인 여자를 데리고 백화점을 구경을 시켜줬어요. 1층부터 꼭대기층까지 다 구경을 시켜준 다음에 얘야, 너 둘러본 중에 뭐든지 좋아하는 것 있으면 말해라. 내가 약혼 선물로 줄테니까.” 쭉 다 돌아보고 나서 그 며느리가 될 아들 약혼녀가 뭐라고 그랬는지 아십니까? “회장님, 저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신 아드님 하나면 충분합니다.” 왜냐면 그 아들이 다 물려받을 거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한 것입니다. 온 우주 만물의 소유자가 되시고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예수님만 계시면 우리는 부요한 자입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풍성한 하나의 은혜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주님 앞에 설 때 모두가 칭찬 받는 자 되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달란트 비유가 나오는데 다섯 달란트 받고 다섯 달란트 남긴 사람과 두 달란트 받고 두 달란트 남긴 사람에게 주신 칭찬의 말씀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521절에,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할렐루야. 이렇게 주님 앞에 인정받는 자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환난과 핍박을 이겨낸 교회

둘째로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핍박을 이겨낸 교회였습니다.

요한계시록 29절로 10절을 보니까,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서머나 교회의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의 훼방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에 서머나로 옮겨와서 상권을 쥐고 있었던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회당을 세우고 그 지역에서 로마제국에 협조하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예수 믿는 사람이 들어와서 교회를 세우고 이제 복음을 전하니까 그들의 눈에 가시처럼 여겨서 그들을 핍박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온갖 루머를 만들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성찬식을 하니까 저들이 살과 피를 마시는 식인종이라고 그랬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랑의 교제를 나눈다고 하니까 도덕적으로 문란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온갖 악성루머로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기독교를 핍박하기 위해서 저들이 앞장을 섰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교회를 무너뜨리는 세력은 사탄의 회당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세우신 이 교회는 이 세상 그 어떤 권세도, 이 세상 어떤 사람도 무너뜨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독생성자 예수의 피로 값 주고 이 교회를 세우셔서, 이 교회 머리는 예수님이요, 이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를 훼파하고 무너뜨리는 세력은 사탄의 회당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이 유대인들의 손을 잡고 대대적으로 교회를 핍박했지만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지켜주시고 오히려 저들에게 은혜와 축복을 더해주신 것입니다.

사탄의 회당을 두려워하지 말라. 교회를 무너뜨리려 하는 세력은 하나님께서 역사가운데 다 멸망 받게 하셨습니다. 그 어떤 세력도 교회의 절대적인 권위에 도전할 수가 없습니다. ? 이 교회의 주인은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교회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날마다 부흥하고 은혜 가운데 성장하며 하나님의 귀한 역사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서머나는 태양신과 황제를 숭배하는 그러한 도시였기 때문에 앞장서서 예수 믿는 사람을 붙잡아 사형에 처하고 온갖 박해를 가했습니다. 특별히 이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 감독의 순교 장면은 매우 유명합니다. 이 분은 사도 요한의 제자인데, 이 분에 대해서 많은 책들이 나왔습니다. 곤잘레스의 초대교회사를 비롯한 여러 책에 나오는데 이분은 A.D. 155223일 토요일날 순교를 합니다. 그런데 그때마침 운동경기 축제기간에 저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황제와 로마를 반역하는 기독교인들 죽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지도자가 되는 폴리갑 감독님을 붙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로마 총독이 보니 이 폴리갑 감독은 온 지역주민이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분을 자기가 앞장서서 죽이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기회를 주었습니다. “가이샤 황제가 주이시요.” 라고 한마디만 하고 그에게 재물을 드리시면 당신은 죽음을 면할 것입니다. 한 번만 예수님을 모른다고 그러시고 황제를 주라고 시인하시오. 그때 폴리갑 감독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지난 86년 동안 주님은 단 한 번도 나를 배신하지 않았는데, 그런 주님을 저는 배신할 수가 없습니다.”

86년을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나를 모른다고 하신 적이 없고, 나를 배신하신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주님을 모른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당신은 저 장작에 불더미에 태워져 죽임을 당하게 될 거라고 말을 하니까 당신이 잠시 타다 곧 꺼져버리는 불로 나를 위협하지만 이는 당신이 다가올 심판 날과 영원한 형벌의 날에 악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불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지체하는 것입니까? , 어서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그래서 이 폴리갑 감독은 붙들려 그들이 보는 앞에서 화형을 당해 죽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죽는 모습에 대해서 프랑스 화가 레이몽 페레가 그림을 그렸는데 지금 서머나 교회, 폴리갑 기념교회에 걸려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불을 태우는데 하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얼굴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활과 영생 천국을 바라보며 이 폴리갑 감독은 불속에서 순교했던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환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 죽음 이후에 더 큰 상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내게 큰 문제가 다가온다 할지라도 절대로 주님을 배반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주님 몸 된 교회를 떠나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더욱더 충성하고 헌신하고 주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 복에 복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148절에 이와 같이 고백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여러분 우리에게 다가오는 환난은 변장된 축복인 것입니다. 이 환난을 잘 견뎌나가면, 견디고 지나고 나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다가옵니다.

그래서 로마서 53절로 4절에,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할렐루야. 주님을 섬기다가 어떤 어려움이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뒤로 물러서지 말고 환난과 핍박이 다가와도 믿음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칭찬받고 하나님 앞에 큰 상급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중국이 공산화 될 때 기독교 인구가 450만 명입니다. 모든 선교사가 다 쫓겨나갔고 그리고 모든 신학교가 문을 다 닫았습니다. 그러나 공산화가 되고나서 지금 70년이 되기 전에 지금 중국의 상황이 어떠합니까? 그들이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450만이 1억이 넘는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저들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중국정부가 더 이상 기독교를 앞장서서 박해를 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정부 고위 관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작년 한 해 동안 중국정부에서 찍은 성경이 8천만 권이래요. 이제는 중국에 복음의 문이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박해 속에서 저들이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중국에 있는 다른 종교들은 다 사라졌는데 기독교가 살아남아서 큰 부흥의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3. 하나님의 상급이 예비 된 교회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의 상급이 예비 된 교회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요한계시록 210절에,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모든 환난을 잘 참고 견디어 마지막 주님 앞에 다다르게 되었을 때, 우리 모두에게, 승리자에게 주는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한 분도 빠짐없이 이 생명의 면류관을 다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생명의 면류관은 썩어 없어지는 면류관이 아닙니다. 영원한 면류관입니다. 영원한 상급입니다. 우리가 찬란한 빛이 나는 이 면류관을 쓰고 주님 앞에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하며 기쁨 가운데 주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처음이요 나중이시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이 상급을 주시려고 지금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두 팔을 벌리고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이 주님 앞에 나오는 그 날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3대를 이어서 온 가죽이 주님 앞에 헌신하며 우리 한국 선교를 위해서 희생했던 셔우드 홀 선교사님 가정이 있습니다.닥터 홀의 조선회상이라고 하는 책도 나와 있는데요. 양화진에 가면 그 양화진에 이 온 가족이 함께 묻혀있는, 홀 가족이 묻혀있는 비석이 있어요. 그런데 여기가보면 아버지 윌리암 제임스 홀, 어머니 로제타 셔우드 홀, 그 아들 셔우드 홀의 묘비가 있고 그 옆에는 셔우드 홀의 아들과 여동행의 무덤이 같이 있습니다. 3대에 걸쳐서 여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와서 헌신하고 그 다음에 그 곳에 묻혔어요. 그 아버지 되시는 윌리엄 제임스 홀 그리고 부인 로제타 제임스 홀이 의료선교사로서 우리 조선 땅에 왔습니다. 어느 날 윌리엄 선교사에게 화상을 당해서 손가락 세 개가 붙은 소녀가 왔습니다. 그 손을 잘 떼어내는 수술을 했는데 피부가 모자랍니다. 그런데 이 선교사님이 피부가 모자라니까 자기의 피부 일부를 떼어내 가지고 그 상처에 붙여서 치료를 마무리해주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자기 껍질을 벗겨 병자를 치료해준 아주 귀한 분이라고. 그래서 고쳐진 손을 보는 사람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주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에게 아들이 태어난 다음해에 청일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일본과 청나라가 전쟁이 벌어져서 그 평양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많은 부상자들이 오게 되었습니다. 전염병이 창궐했습니다. 그래서 선교본부에서 위험하니까 본국으로 돌아오시오라고 하는 명령을 내렸지만은 나는 이들을 버리고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서 병자를 고쳐주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사랑으로 돌보다가 1894년에 과로와 발진디프스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납니다.

죽기 전에 남편이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평양에 갔었던 것을 원망하지 마시오. 내가 예수님의 뜻을 따른 것이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소.” 한국에 온 지 2년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 부인 로제타에게는 두 살 된 아들하고 그 다음에 뱃속에는 일곱 달 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기 위해서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그 남편 장례식을 치러주고 많은 사람들이 조의금을 냈는데 그것을 모아가지고 한국에 보내서 또 한국에 기념병원을 평양에 세웁니다. 그리고 딸을 낳았는데요. 딸을 낳아가지고 남편이 섬기던 교회, 선교사로 파송 받은 교회에 갔는데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 남편 윌리엄이 이루지 못한 조선 사랑을 네가 이루어라.” 그래서 남편이 사역하다 죽은 평양에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다시 한국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어린 딸이 한국에 온지 20일 만에 전염병에 걸려서 또 죽어요. 이질에 걸려 죽습니다. 그래서 그 어린 딸의 시체를 그 함께 사역하는 목사님 등에 업혀가지고 양화진까지 와서 그 남편이 묻힌 옆에다 딸을 묻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내 아들 셔우드 홀과 한국에서 평생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제 어린 아들 하나 남았는데, 어린 아들과 함께 평생동안 한국을 섬기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68세가 되기까지 43년 동안 일생을 조선 땅을 위해서 헌신했는데 그 여자분 한 분의 헌신이 얼마나 큰 역사를 이루었는지 처음으로 맹인들 교육을 시작하였고 동대문 부인병원을 시작했는데 현재 이대부속병원이 되었고요, 그 다음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세웠는데 현재 고대의대가 되었습니다. 그 아들 셔우드 홀 역시 조선에서 최초로 결핵환자를 위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고 선교활동을 하다가 일본에 의해서 강제 추방을 당합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인도에 가서 계속 선교를 하면서 한국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은퇴한 후에 캐나다에서 쉬고 있을 때에 결핵협회와 아버지가 세운 광성고등학교에서 초청장이 날아왔습니다. 91세의 나이로 한국에 와서 그 고국(한국)을 방문했을 때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이 묻힌 그 양화진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저는 여전히 한국을 사랑합니다. 제가 죽거든 절대로 미국이나 캐나다 땅에 묻지 마시고 제가 태어나서 자랐던 사랑하는 이 나라, 또한 내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누이동생이 잠들어 있는 이 한국 땅에 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9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부인과 함께 양화진 땅에 묻혔습니다.

이렇게 대를 이어서 충성하고 그 삶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온 가족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주셨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112절은 말씀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장차 여러분 모두가 한 분도 빠짐없이 모두가 생명의 면류관을 다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승리한 주님의 귀한 일군들이 되어서 주님 앞에 칭찬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 우리에게 다시는 둘째 사망의 해가 있지 않을 것을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211절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두 번째 사망을 당합니다. 첫 번째 사망은 육신의 사망이요, 두 번째 사망은 영원한 지옥 형벌의 사망입니다.

요한계시록 2013절로 15절에,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은 마지막 영원한 지옥 형벌에 던져질 것이지만은 우리 예수를 믿고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저 찬란한 천국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쓰고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한 분도 빠짐없이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들어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의 축복의 자리에 다 들어갈 수 있도록, 한 사람도 빠짐없이 생명의 면류관을 쓰고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주님, 은혜 내려 주옵소서. 한번뿐인 인생, 정말로 주님 안에서 의미 있고 행복하고 보람된 삶을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게 하여주시되 죽도록 주님 앞에 충성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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