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주일낮예배설교 / 강을 건넌 사람들 (October,Sunday Sermon)
 
제목 : 강을 건넌 사람들

말씀:수3:14-17


1.현실의 강을 넘어서야 합니다.

어떤 인터넷 매체에 보니까 박명수 어록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 보면 이런 말들이 있었습니다. ‘성공은 1%의 재능과 99%의 빽이다.’ ‘일찍 일어난 새가 피곤하다.’ ‘고생 끝에 골병난다.’ ‘가는 말이 고우면 얕 본다.’ ‘늦었다고 생각할때는 늦은 거다.’ ‘참을 인이 세 번이며 호구된다.’ 그리고 이런 말들에 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고, 이런 말들을 주옥같은 명언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지요? 공감이 가는 말들인가요? 물론 어떤 면에서는 오늘 우리의 실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 공감이 되는 부분들이 없지 않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설령 그런 말들이 오늘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게 진리는 아닙니다. 아니 도리어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다면 그것은 현실이 그만큼 왜곡되고 썩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사고 방식은 결코 인간의 삶을 가치있고 의미있게 하며, 기쁨과 평안과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갈등과 탈법과 술수와 상처와 아픔과 시기와 질투와 무질서를 초래하여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더구나 그걸 진짜로 알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말 뿐입니다.

여러분, 세월이 어떻게 변하고, 가짜가 어떻게 그럴듯하게 가장해도 거짓은 거짓에 불과합니다. 세월이 변한다고 진리가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진리가 가짜가 되는 일이 있다면 그건 처음부터 진리가 아니었을 뿐이지 진리가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너무나 왜곡된 가치관이 마치 진리처럼 가장하고 판을 치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와 인본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무사안일주의와 쾌락주의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무슨 박명수 어록이니 뭐니 하는 이런 허접스런 말들이 나오고 그걸 또 무슨 주옥같은 명언이니 어쩌니하며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열심히 말씀과 기도로 훈련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당당하게 큰소리를 치며 흘러가고 있는 이 왜곡된 가치관들 속에 끌려가기 십상입니다. 우리가 맨날 보고 듣고 이야기하고 교제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이 자신이 죄와 무지속에 있는 줄은 모르고 그저 자기중심, 자기 소견, 자기 의지, 자기 경험대로 물질주의, 이성주의, 이기주의 물결속에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정말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거기에 휩쓸려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롬12:2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세대의 왜곡되고 거짓된 것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 영혼이 변화되고, 마음이 변화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그 뜻을 좇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 온전한 분별력을 가지고 모든 거짓되고 왜곡된 가치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다수라는 이름으로 진짜를 가장하고 있는 가짜를 바르게 분별하고 배격함으로 그런 것들에 결코 농락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오염되고 추하고 왜곡된 현실을 이기고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잘 달려감으로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현실의 강을 건넌 사람들

여러분,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런 왜곡된 현실의 강을 건너 살 것을 계속 말씀하셨고, 또 그런 말씀을 따라 삶으로써 성공했던 많은 사람들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노아 할아버지도 그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죄가 세상에 관영하여 하나님께서는 땅을 홍수로 멸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 할아버지 가정은 그런 현실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그 현실의 강을 건너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가시려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어 홍수를 피라하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노아는 즉각 순종하여 배를 만들기 시작하여 무려 120년 동안에 걸쳐 방주를 지었습니다.

여러분, 노아의 방주는 길이가 137m, 넓이가 23m, 높이가 14m의 3층짜리 배로 용적량이 3만톤이 넘는 거대한 배입니다. 물론 지금의 조선기술로는 이런 규모의 배 정도야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노아의 가족 여덟식구가 순전히 손으로 이 정도의 배를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120년동안 그 엄청난 일을 하면서 얼마나 힘이 들었겠으며, 또한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있었겠습니까? 이 배를 정말 우리가 완성이나 할 수 있을까? 정말 120년 후에 인류가 멸망할 비가 오기는 오는 걸까? 또 10년 30년 50년 70년 100년이 지나면서 내가 정말 말씀을 바로 듣기는 들은 걸까 등등 많은 생각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전 세계의 홍수심판이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믿고 배를 만드는 노아의 가족을 미치광이 취급을 하면서 노아의 가족을 비웃으며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런 모든 현실을 뿌리치고 배를 만들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오직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였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지만 중단하지 않고 열심히 성실하게 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120년이 지났을 때 정말로 하늘에 구멍이 뚫려 밤낮 40일 동안을 양동이로 물을 퍼붓듯이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온 세상이 물에 다 잠겼고, 노아를 비웃으며 먹고 마시고 즐기던 사람들은 하나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뭐라 그러거나 말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내부 속에서 어떤 생각들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120년간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의 가족 8식구만이 방주 안에서 안전하게 대홍수의 강을 건너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창12: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밑도 끝고 없이 무작정 가라는 것입니다. 떠나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 왜곡되고 죄된 문화가 판을 치는 이 땅과 이 사람들과 이 문화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들을 떠나 내가 새롭게 시작할 그 땅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아버지와 고향산천과 그 모든 환경과 문화의 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구원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애굽의 우상숭배의 문화의 땅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홍해 바다를 건너 멀리 가나안 땅까지 가게 하셔서 거기서 새역사를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들이 뜻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죄와 무지와 왜곡과 어둠의 현실들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딛고 일어서든지 아니면 그곳을 떠나든지 여하튼 왜곡된 현실의 강을 건너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고, 거기에 생명의 풍성한 은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에덴의 모습들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렸고, 너무나 많이 변질되어 있어서 우리가 넘어야 산과 건너야 할 강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때로는 환경과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산입니다. 때로는 이성과 경험이 우리가 건너야 할 강입니다. 불신과 의심과 욕심과 욕망과 돈과 권력도 넘어서야 할 강입니다. 사람과 문화와 과학도 우리가 넘어서야 할 산 중의 하나입니다. 술과 담배와 향락과 무사안일은 말할 것도 없이 반드시 건너가야 할 강입니다. 물질주의와 인본주의과 종교다원주의와 개인이기주의도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요, 건너야 할 강입니다. 이러한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비로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 모두가 원하는 진정한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정말 내가 지금 시급하게 넘어서야 할 산이 무엇인지, 빨리 건너야 할 강이 무엇인지 되새겨보면서 그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인도하심과 능력 주심을 따라 그 산을 넘고 그 강을 건너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산과 강의 저너머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에덴의 축복을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약속의 말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산과 강을 넉넉히 건너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말씀드리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 어떻게 왜곡되고 오염된 가치관과 문화가 판을 쳐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푯대로 삼고 천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바로 그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오매불망 기다리던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요단강을 건너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중요한 시점에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그때가 우기라서 요단강이 넘칠만큼 싯뻘건 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요단강을 건널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런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갔습니까? 오늘 14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이것은 6절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으로 거기에 보면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장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에 도착하면 무조건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요단강이 갈라질 것이다. 그러면 백성들은 제사장들이 멘 언약궤를 보고 건너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무슨 뜻입니까? 한마디로 세상 물결이 어떻게 넘실 거려도 말씀을 따라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약궤가 뭡니까? 말그대로 약속의 말씀이 들어있는 상자입니다. 그 안에는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생명의 떡이요,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따라가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 생명의 말씀을 따라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요단강물이 아무리 사납게 덤벼들어도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약속을 바라보며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요단강을 가나안복지로 인도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그 때 그 사람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갈때에 사나운 강물이 넘실대며 그들을 방해하고 위협하고 낙심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우리가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갈때에 우리를 실망시키고 낙담케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환난과 풍파가 닥칠때도 있고, 때로는 환경과 상황 때문에, 때로는 물질과 건강 때문에, 때로는 사람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말고 흔들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부여잡고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위협하고 유혹해도 그런 왜곡되고 죄되고 혼잡한 것들에게 눈길도 주지말고, 흔들리거나 낙심하지도 말고,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오직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부여잡고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장애물을 제거해 주시든지, 상황과 환경을 변화시켜 주시든지 아니면 상황과 환경을 그대로 두고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서 이기게 하시든지 여하튼 어떤 방법으로든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며 가나안 복지를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히 주님이 인도하십니다. 힘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이기게 하십니다. 환경과 상황을 변화시켜 주셔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그러실만한 능력과 권한과 사랑과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정말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주님의 방법과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때에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를 위협하고 유혹하고 넘어뜨리려는 모든 세력들을 이기고 에덴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또 하나 기억할 것은 에덴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려면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15,16절 말씀 보겠습니다.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자 보십시오, 요단강물의 흐름이 언제 그쳤습니까?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물속에 들어섰을 때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스라엘을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이 덤벼들던 요단강의 흐름을 끊고 강바닥을 드러내어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는데 그런 기적이 일어난 시점이 언제냐?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언약궤를 메고 사납게 요동치며 흐르는 요단강속으로 들어갔을 때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기적을 일으켜 놓고 건너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부분의 경우 기적을 만들어 놓고 누리게 하시기 보다는 믿음으로 행동할 때 기적의 은총을 누리게 하십니다. 노아에게도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들어놓고 타라고 하지 않으시고 네가 만들어서 타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실때도 먼저 그냥 무조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동안 반석에서 물을 내실 때도 모세에게 반석을 향하여 명령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포도주를 만들어 놓고 갖다 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물을 떠서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를 부활시킬때도 마르다에게 무덤 입구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는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실로암 못가에 있던 맹인에게는 흙을 눈에 바르고 실로암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말씀에 순종했을 때 결국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즉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갓난아기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믿음과 순진한 마음을 보시고 은헤를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세월이 어떻게 변해도 열심히 성실하게 진리를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든지,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지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따르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따라가도 하나님이 아니라 하신 것,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왜곡되고 거짓된 것을 버리고 넘어가고 떠나 갈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유는 두말할나위도 없이 거기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 사랑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이 땅에서 누려야 에덴 동산이 있고 나아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로 이어지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앞에 높게 서 있는 왜곡된 현실의 산들을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무나 도도하게 흐르는 왜곡의 가치관의 강을 건너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일한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푯대로 삼고 저 가나안복지를 향해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넉넉하게 건너가게 하십니다. 승리하게 하십니다. 이 땅에서도 진정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다가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주십니다. 이런 진정하고 영원한 승리를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우리 온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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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설교 / 십자가의 승리 (September,Sunday Sermon)

 

제목 : 성령 세례를 받읍시다.

 

말씀 : 1:4,5

 

1.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먹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많고 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재물도 얻고 싶고, 건강도 얻고 싶습니다. 기왕이면 권세도 얻고 싶습니다. 기왕이면 예쁜 부인이나 백마 탄 왕자같은 남편도 얻고 싶습니다. 평안도 자유도 즐거움도 기쁨도 사랑도 존중도 받고 싶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 좋은 것을 누리며 사랑과 축복과 기쁨 속에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당연한 일입니다. 또 그렇게 뭔가 좋은 것들을 누리고 싶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게 됨으로 좀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동기가 됨으로 이러한 것들에 대한 건전한 추구는 도리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도 열심히 노력해서 얻고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말로 이러한 것들보다 더 우선해서 받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도 우리 인생에게 보템과 유익과 기쁨이 되지만 그보다 더욱 보템과 유익과 은혜와 기쁨을 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우리는 인생의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인으로서의 인간 영혼은 죄와 무지속에 있어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축복의 길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 인간 영혼이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으로서 누릴 수 있는 그 엄청난 축복들을 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영, 생명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심령속에 들어오셔서 우리 심령속의 굳어지고 무지한 것들을 깨트려 버리고, 죄된 것들을 씻어 버려야 비로소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알게 되면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게 되고 예수님 믿고 정말로 그 안에 있는 그 놀라운 생명 은혜 기쁨 자유 평안을 마음껏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 천만금을 얻을 것보다도, 천하제일의 권세를 얻은 것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무엇을 기다리라? 아버지께서 약속한 것. 그게 뭡니까? 성령입니다. 14:16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바로 이 약속하신 성령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성령을 받아야 너희들이 나를 바르게 알고 사명을 힘있게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약속하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심령이 깨끗해져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이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리고, 천국이 보이게 됩니다. 그래야 자신을 알고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알게 됩니다. 성령을 받아야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래서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생명과 기쁨과 평강과 위로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위협이나 유혹도 넉넉히 이기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던 제자들, 심지어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며 부인했던 베드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믿지를 못했던 제자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한곳에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던 제자들도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다가 성령 충만함을 받은 다음에는 완전히 180도 달라겼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자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고 하늘나라가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참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워서 걸어 잠갔던 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뛰어나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러나 부활하셨다. 이 분이 그리스도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힘차게 외쳤습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게 옳으냐 너희들 말 듣는 게 옳으냐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에 삼천명 오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세워졌고, 계속해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헌신을 통하여 또 다른 교회가 세워지고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까지 이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20:22절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지식을 얻는 것도 좋지만 그러나 그보다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 받아야 죄사함 받습니다. 그래야 심령이 깨끗해 집니다. 그래야 눈이 밝아집니다. 천국이 밝게 보입니다. 선과 악을 바르게 분별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똑똑하게 들립니다. 지혜와 능력과 분별력을 갖게 됩니다. 상황과 환경을 이깁니다. 죄와 유혹을 이깁니다. 능력있게 생명있게 담대하게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의 은혜가 풍성한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을 구하기 전에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요, 지혜의 영이요, 능력의 영이신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따라 생명과 진리와 능력이 충만한 복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됩니까?

 

2.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려면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가 뭡니까?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1:23절이지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만물을 충만케하시는 이 곧 예수 그리스도 곧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은혜,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지혜, 예수님의 능력으로 가득한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지상교회는 온전치 못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교회 안에 만이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가 있습니다. 주님의 삶과 주님의 가르침과 주님의 뜻을 가르쳐 주는 곳은 오직 교회 뿐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의 몸된 교회를 가까이해야 성령 충만 받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앞에서 보았던 4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예루살렘은 어떤 곳입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모리아 산입니다.(22:2) 다윗이 장막을 치고 언약궤를 모셔두었던 곳입니다.(대상15:1)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곳입니다.(대하3: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인류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곳입니다. 즉 예루살렘은 인류구원의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거룩한 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있는 곳, 말씀이 있는 곳, 하나님의 특별하신 임재가 있는 곳,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 머물며 더욱 말씀 위에 서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성령의 능력을 덧입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금까지는 너희 연약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성령의 능력을 덧입어 제자의 사명을 감당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의 예루살렘은 어디 입니까? 교회밖에 더 있겠습니까. 주님의 피값으로 세우신 곳,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 예배와 기도와 말씀과 찬양과 전도와 섬김과 봉사가 있는 곳입니다. 이런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봉사와 섬김 등으로 주님과 교제하고 성도와 교제할 때 성령을 받지 못한 자는 성령을 받게 되고, 이미 받은 자는 더욱 충만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충만하게 받은 사람은 생명의 은총이 있고 기쁨이 있고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주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며 주의 사역 힘있게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몸된 교회,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섬김이 있는 교회, 그래서 이 땅에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유일한 기관인 교회를 가까이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다른 어떤 곳을 가까이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보다도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섬기고 교제하는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말씀과 사랑과 은혜와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교제할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 정말로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이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를 가까이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언제 참 제자가 되었습니까? 앞서 말씀드린대로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나서부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까? 기도에 힘쓸 때였습니다.

 

1:14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분부를 따라 예수님을 따르는 다른 많은 분들과 더불어 마가의 다락방에서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을 때 드디어 오순절 날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후 제자들은 능력있는 제자들이 되어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즉 기도할때에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았고, 기도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이후 능력있는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9:29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어느 날 예수님은 산에 기도하러 가시고 제자들만 남았는데 어떤 아버지가 귀신 들린 소년을 데리고 와서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하였지만 못고쳐 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오셔서 귀신아 나가가 한마디 하니까 귀신이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우리는 왜 못쫓았습니까, 그러니까 기도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너희 믿음의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이런 모든 잡류들, 더러운 것들, 추한 것들, 유혹들, 마귀의 장난들 다 물리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수요기도회,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성도들과 신령한 교제를 나눌 때 성령의 능력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히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들이 대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깨어 기도하며 주님과 온전한 교제를 이룰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모든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들을 물리쳐 버리고 더욱 큰 감사과 기쁨과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겸손히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를 가까이 한다는 것은 또한 말씀을 듣고 받기 위함입니다. 그럴 때 성령의 능력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10:44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이 말씀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넬료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온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까지 불러 모아놓고 베드로를 모셔옵니다. 베드로가 도착하자 밖으로 나가 발 앞에 절하고 모셔 들이고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자 그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정말 사모하는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고넬료는 베드로가 오자 그 발아래 엎드려서 절했습니다. 가족은 물론 친척, 친구들까지 모아놓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만큼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 앞에 엎드렸다는 것입니다. 그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사모하는 마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과 가치관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기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말씀, 은혜의 말씀, 능력의 말씀 앞에 조용히 무릅꿇고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곳에 은혜가 있습니다. 능력이 나타납니다. 다윗은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는지 말씀이 송이꿀보다도 더 달다고 하였습니다.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위대한 신앙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저와 여러분은 더욱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리고, 말씀에 귀를 기울여 말씀의 은혜로 내 심령이 밝아지고 희망과 은혜가 넘치고 능력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성령의 지배 속에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할 이유는 기본적으로 그래야 믿음을 갖게 되고 나아가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뿐이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온전히 성령의 지배속에서 살면서 능력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능력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세상에서는 돈이 힘이고 권력이 힘이고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지만 그게 진짜 힘이 아닙니다. 진짜 힘은 죄를 이기는 힘입니다.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힘입니다. 상황과 환경과 유혹과 핍박과 죽음을 이기는 힘입니다.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성령의 충만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며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는 죽음도 마귀사탄의 권세도 모두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돈과 명예와 권세가 있어도 결국 지는 자가 됩니다. 심지어 아무리 고상하게 종교생활해도, 교회가 아무리 웅장해도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하면 힘이 없습니다. 환난풍파 몰아치면 무너집니다. 세상의 유혹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래서 엡5:18절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술 취하지 말라. 술의 지배를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술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혼란스럽게 만들고 분별력을 희미하게 만듭니다. 영적 도덕적 윤리적 감각을 무디게 만듭니다. 술 뿐아니라 세상의 것들이 다 그렇습니다. 향락과 오락은 말할 것도 없고 물질과 명예와 지식과 권세와 이런 것들도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에 취하면 마침내 감각이 무디어지고 영혼이 황폐해지고 그러다 마침내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에 취하지 말고 성령으로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성령은 살리는 영이니까. 지혜의 영이니까, 생명의 영이니까, 사랑의 영이니까, 은혜의 영이니까, 화평과 위로와 소망과 자비의 영이니까, 이런 영으로 충만해야 비로소 올바른 분별력이 생기고 기쁨과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충만해 지니까, 그러므로 성령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의 역사하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세상의 다른 것으로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정말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물밀 듯 쏟아져 내려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완전한 생명의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세상의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지식이나 그까짓 술이나 향락이나 오락이나 이런 것들이 주는 기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이 기쁨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이기는 기쁨입니다. 모든 더러운 것과 추한 것들과 죄와 유혹과 핍박을 이기는 고상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기쁨입니다. 그러다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퍼펙트한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을 구하기에 앞서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위하여 교회를 가까이 하고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정말 한분도 빠짐없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세상의 모든 죄와 추한 것들과 환난과 환경과 상황과 조건을 이기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감사와 평강과 위로 소망이 충만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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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ion School

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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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은혜받은 믿음

 

말씀 : 20:1~16

 

1.포도원품 꾼의 비유의 의미

 

오늘 본문은 유명한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어느 날 포도원 주인이 포도를 한창 수확할 시기에 일손이 너무 부족하여 장터로 품꾼을 데리러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아침 일찍 즉 0(오전 6)나가 몇 명을 불러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일손이 부족하여 3(오전9)에 장터에 가서 사람들을 불러 가서 일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계속 일손이 부족하여 육시, 구시, 심지어 십일시 즉 오후5시에도 가서 일꾼을 불러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하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십이시 즉 오후 6시가 되어 일을 마치고 품삯을 주는데 먼저 제일 늦게 온 사람 즉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아침부터 일찍 와서 열심히 일한 다른 품꾼들이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으면 우리는 훨씬 더 받겠구나.’하고 은근히 기대를 하며 품삯을 받으러 갔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 데나리온 밖에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주인에게 따집니다. ‘아니, 이 사람은 다 저녁때 와서 겨우 한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고 우리는 하루종일 12시간 동안이나 뙤약볕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했는데 어떻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 밖에 안 줍니까?’ 그러자 주인이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냐? 애시당초 너희와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일하지 않았느냐? 나중에 온 저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선을 행한 것이어늘 너는 너는 내가 저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준 것을 악하게 보느냐? 너는 네가 받아야 할 것을 정당하게 받은 것이니 네 것이나 가지고 가거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비유의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절을 보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여러분, ‘천국은 마치하시면서 이 비유의 말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무엇에 대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려고 하신 것입니까? 그렇죠. 천국에 대해서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의미입니다. 천국이 있다. 천국을 믿어라. 천국을 믿고 천국시민으로 살아라 그런 이야기죠.

 

그 다음에는 포도원주인이 새벽6, 아침9, 정오, 오후3, 오후5시에 계속 품꾼을 찾으러 나갔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포도원 주인은 물론 하나님이시오, 품꾼은 우리들입니다. 포도원주인이 계속 품꾼을 찾으러 갔다는 것은 우선은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천국으로 보내시기 위하여 계속해서 우리를 찾아와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의미로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시기 위하여 계속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몰라도 천국은 반드시 소유하야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시려고 끊임없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의미는 우리를 그렇게 계속 찾아오시는 것은 우선은 우리를 천국백성으로 삼기 위해서 이지만 단순히 그것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꾼으로 세우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품꾼이 일꾼 아닙니까? 우리를 하늘나라 일꾼으로 세우셔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참여시키려고 부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의미는 저녁때가 되어 품삯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녁때란 우리에게 활동할 수 있도록 주어진 시간이 다 지나고 하나님품으로 갈때를 말합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그 삯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의 말씀의 교훈인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며 첫째는 천국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요, 두 번째는 천국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요, 셋째, 그렇게 천국백성이 되었으면 그 너무나 소중한 하늘나라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이며, 네 번째는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하나님 뜻안에서 살아갈 때에 천국은 물론 큰 상급까지 주신다는 것입니다.

 

2.예수님은 천국을 가장 강조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천국은 반드시 존재한다. 천국은 예수님이 다른 어떤 것보다고 강조해서 말씀하신 가장 중요한 명제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약성경에 보면 천국 혹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씀이 60여차례 나오는데 대부분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4:17절에서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 제일 먼저 하셨던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4:23절에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하셨습니다. 5장의 팔복에서는 계속해서 어떻게 어떻게 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6:19절에서는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2:2절에서는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25:1절에서는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고 하시는 등 수없이 천국에 대하여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계속해서 천국에 대하여 강조하고 계십니까? 두말할나위도 없이 천국이 반드시 존재하고, 천국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수 없는 가장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려고 오셨고 그것에 대하여 계속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조차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꾸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13:44절을 보십시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한마디로 천국은 우리의 전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아니 우리의 육체의 생명을 팔아서라도 반드시 사들여야 할 가장 중요한 재산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정말로 천국을 바르게 알고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천국이 신앙생활의 목적입니다. 물론 지금 여기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느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천국입니다. 천국이 궁극의 목적이고, 궁극적 종착점이며, 우리가 마침내 들어가 살아야 할 영원하고 완전한 복락의 본향집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국 천국 그러면 아주 유치한 것으로 알고 뭐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철학적으로 고상하고 선하면 대단한 것으로 압니다. 성경을 요리조리 분해하고 쪼개고 뭐 그럴듯한 말을 하면 대단한 것으로 알고 천국을 이야기하면 시원치 않게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무슨 대단한 미사여구를 사용하고 무슨 아주 심오한 철학적인 이치를 말하고 요리조리 분석해보고 쪼개보고 무슨 심오한 철학적 이론을 대입해봐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합니다. 간단명료합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내가 세상의 빛이다. 나를 믿으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 나는 다시 온다. 믿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 그러므로 나를 믿고 나를 따르라. 보화를 땅에 쌓지 말라. 하늘에 쌓으라. 그냥 단순명료한 화법을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냥 그 단순명료한 명제를 그대로 믿고 따르면 되는 것이지 거기에 무슨 다른 해석이나 주석이나 조건을 붙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그토록 강조하신 천국을 확실히 믿고 공연히 이것 저것 갖다 붙이지 말고 그냥 단순무식하게 천국의 법과 원리와 규범과 목적과 가치를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리는 것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양하며 모든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여 현재적 천국와 영원한 천국을 마음껏 맛보며 감사와 기쁨과 소망과 위로를 마음껏 맛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하나님은 열심히 우리를 찾고 게십니다.

 

그렇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와같이 천국은 우리에게 있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명제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천국에 가기를 간절히 원하셔서 열심히 우리를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계십니다.

 

오늘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보십시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직접 집을 나가 품꾼을 찾았습니다. 여기서 포도원의 의미는 이중적입니다. 하나는 이 땅에 이루어진 현재적인 천국이요, 다른 하나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다시 말해 일단 하나님을 믿으면 현재적 천국을 누리다가 마침내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천국의 놀라우신 은총을 주시기 위하여 이른 아침부터 저녁 해가 저물 때까지 일꾼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른 아침에 집을 나가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삼시 육시 구시 열한시까지 계속 일꾼을 부르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도원 들여보내시려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계속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포도원 들어가기만 하면 우리는 그 놀라운 천국의 은총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끊임없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죄와 무지 속에 신음하고 있는 인생을 찾아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먹고 죄에 빠져 두려움 속에 숨어있는 아담을 찾아와 만나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어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주셔서 우리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도 제가 비록 부족하지만 제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게 함으로 여러분을 찾아가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그 놀라우신 사랑과 열정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정말 너무 약하고 추하고 때로는 정말 악하기까지 한 우리들이지만 이렇게 찾아오셔서 불러주시고 은혜주셔서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운데 살게 된 것입니다. 내가 무슨 큰 능력이 있어서, 무슨 구원받을 만한 선행이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살게 되었고 구원받고 천국시민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저와 여러분은 이 놀라우신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 앞에 겸손히 엎드려 절하며 그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를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살아숨쉬고 천국백성되어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게 된 것은 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며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며 겸손히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큰 은혜를 채워주시는 그 은총을 덧입어 정말 감사와 기쁨과 은혜와 찬양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은혜 받았으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포도원으로 부르시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포도원에 들어와 풍성한 것을 누리게 하려 함임과 동시에 우리를 포도원 품꾼으로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오늘 1절 말씀을 또 보십시오. 오늘 비유의 말씀의 핵심을 모두 1절에 다 들어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무엇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낸다? 품꾼입니다. 품꾼이 뭐하는 사람입니까? 일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일만 시키려는 것은 아닙니다. 포도원에서 주인의 보호와 인도와 사랑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일한 연후에는 삯도 받습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를 받았으면 그리고 그러한 삯을 받으려면 마땅히 자신이 있는 그곳에서 열심히 일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포도원에 살게 하신 것은 첫 번째는 하나님의 동산의 은총을 누리게 하려 하심이, 두 번째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동산에서 일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동산을 가꿈으로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동산의 은총을 주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의 동산에 서 수고하다가 일을 그칠 때가 오는데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한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새벽 6시에 온 사람이나 오후5시에 온 사람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셨다고 말씀함으로 마치 1시간 일한 사람이나 12시간 일한 사람이나 무조건 똑같이 주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많이 했다고 자랑하지도 말고 적게 했다고 낙심하지도 말고 그저 주어진 시간 동안 부름 받은 그 시간와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이지 무조건 똑같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22:1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은혜를 받은 자로서의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 은혜를 누리며 그 은혜의 역사를 위하여 수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내려놓아야 할 짐이 있고, 반면에 새롭게 짊어져야 할 짐이 생깁니다. 11:28~30절을 보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여러분,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즉 인생의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을 맡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저 먹고 마시고 입고 잠자고 육신의 것만을 위해서 사생결단하며 살아가는 무거운 짐을 벗겨 주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죄와 근심과 걱정과 염려의 무거운 짐도 벗겨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쉼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나의 멍에를 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멍에는 뭡니까? 생명의 역사를 위한 멍에, 사랑의 멍에, 헌신의 멍에입니다. 생명과 진리와 평안과 참된 기쁨을 위한 멍에입니다. 그러면 왜 어떤 짐은 벗으라 하시고 어떤 짐은 지라고 하십니까? 물론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상의 짐과 죄의 짐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생명을 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주시는 짐은 생명을 살리고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희망과 소망과 위로를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그렇습니다. 우리를 죽이는 짐이 있고 살리는 짐이 있습니다. 죽이는 짐은 뭡니까? 죄의 짐입니다. 그저 육신의 영광만을 위하여 수고하는 짐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지는 짐입니다. 그러면 살리는 짐은 어떤 짐입니까? 사랑의 짐입니다. 진리를 위한 짐입니다. 생명의 역사를 위한 짐입니다. 이런 짐들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은혜를 주고 참된 가치를 가져다 줍니다. 긍지와 자부심과 자존감과 뿌듯함을 가져다 줍니다.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남을 행복하고 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부모는 자녀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를 위하여 짐을 지면서 행복해 합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를 위해서 짐을 지면서 행복해 합니다. 자신이나 남에게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행복을 주는 짐을 지고 나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만을 위한 짐, 심지어는 죄를 행하며 지는 짐은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도리어 결국 자신과 남을 죽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런 세상의 모든 짐은 내게 맡기고 내가 너에게 주는 생명의 짐, 사랑의 짐, 진리를 위한 짐을 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럴 때 영원한 천국의 은총을 누림은 물론 지금 여기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충만하게 이루어져 사랑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과 행복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천국이 우리의 삶의 중심에 있게 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천국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 분들을 위하여 더욱 사랑과 말씀과 기도로 관심을 쏟음으로 온 가족과 모든 교우들이 한분도 빠짐없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해서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천국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으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이라는 점을 잊지 말고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각자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을 가꾸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힘있게 이루어가는 가운데 주님의 거룩한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는 자로서 누릴 수 있는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은혜와 보람과 가치와 의미와 행복을 누리며 현재적인 천국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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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 십자가의 승리 (September,Sunday Sermon)

제목 : 십자가의 승리

말씀 : 갈3:13-14

오늘은 고난주일입니다. 고난주일이란 약2000여년 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십자가에 달려서 그 참혹한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온 인류에게 죄사함의 은총을 가져다주신 사건을 회상하면서 그 고난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절기입니다.

또 오늘은 종려주일이라고도 하는데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실때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면서 주님을 환영한데서 유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종려주일이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지만 그 십자가의 죽음은 승리를 위한 죽음이었음을 상기하는 주일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한 죽음이었으므로 주님의 고난가운데서 주님의 부활을 바라보며 희망과 소망을 갖는 그러한 절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고난과 승리, 절망과 희망, 죽음과 생명이라는 이 역설적인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주님의 십자가 속에는 어떻게 고난과 승리, 절망과 희망, 죽음과 생명이라는 이 역설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까?

1.죄의 참혹한 결과를 보여주는 십자가.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우선 죄가 우리에게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다 주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가장 참혹한 사형틀입니다. 요즈음에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차에 걸고 무슨 장식품이나 부적처럼 달고 다니지만 십자가는 본래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혐오스러운 물건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가장 잔인하고, 가장 끔찍스럽고, 처절한 고통을 주는 가장 참혹한 사형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상에서의 고통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의 정도도 말로 할 수 없고, 고통의 시간 또한 많게는 40여일 동안 계속되는 너무나 잔인한 사형방법인 것입니다.

게다가 십자가의 사형은 먼저 채찍으로 때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채찍도 보통의 채찍이 아니라 끝에 쇠갈고리가 달려 있는 채찍입니다. 이것으로 사정없이 후려치니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이렇게 살쩜이 떨어져 나가는 채찍질을 당하며 사형장소로 이동합니다.

사형 장소에 도착하면 십자가에 손과 발에 못을 박아서 세워놓습니다. 그러면 못박힌 손목과 발목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밤에는 추위가 엄습합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아픔을 당합니다. 심지어는 독수리가 와서 뜯어먹기도 합니다. 그것도 잠시잠깐이 아니라 목숨이 긴 사람은 40일 동안이나 그 끔찍한 고통을 당하며 서서히 죽어갑니다. 그러니 그 고통과 비참함과 참혹함을 어찌 말로 다 표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 끔찍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죄를 지은 인생은 그런 끔찍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셔서 그 참혹한 고통을 당하시지 않으면 우리 모든 인생이 그런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계21: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진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런데 더 끔찍한 것은 그 고통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계9:6에서는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죄는 너무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 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속에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영영토록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죄는 나중에 지옥에서만 고통을 가져다주는 게 아닙니다. 지금도 여기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에게 아픔과 상처와 고통과 미움과 저주와 갈등과 시기와 질투와 두려움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영원한 천국의 은총은 물론 여기서도 빛과 같은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늘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통하여 빛과 같은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저주를 풀어준 십자가

여러분, 십자가는 바로 이렇게 처절한 고통의 장소였기 때문에 십지가가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가 받을 그 저주, 그 참혹하고 처절한 고통을 대신한 대속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13절 말씀 보세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죄없고 흠없고 티 없으신 예수님,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영화로우신 예수님이 내가 받을 저주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순전히 내가 받을 고통을 위하여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내가 받을 지옥의 형벌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죄의 저주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사탄의 권세에서 구속함을 받아 죄에서 자유인이 되어 새생명가운데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20:28절에서 예수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래서 요19: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처절한 고통을 당하시고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여러분, 인간적으로는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사형을 당하면서 그것도 그 저주받은 그 끔찍한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다 이루었다니 이성적으로는 이게 어디 말이나 됩니까?

그러나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그야말로 다 이룬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저주받은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받을 저주를 풀어버린 것입니다. 십자가의 그 처절한, 그 끔찍한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지옥에서 당할 그 처절한, 그 참혹한 고통의 굴레를 벗겨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죄의 저주에서, 지옥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도를 닦아도 죄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가 없습니다.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지식으로도 과학으로도 물론 안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을 당하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죄로 말미암아 그 끔찍하고 처절한 고통을 영원히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그 저주에 풀어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일 입니까? 영원한 고통에서 해방시켜 영원한 복락으로 인도하셨으니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과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어도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 영원한 저주에서 해방된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기뻐하며 영광 돌리며 찬양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3.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십자가

여러분, 그렇습니다.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다른 어떤 사랑과도 비교도 할 수 없이 너무나 큰 사랑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남의 자식을 살리기 위하여 여러분의 자식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주실 용기가 있으십니까? 여러분, 내가 아픈 것은 참을 수 있어도 자식이 아픈 것은 차마 보지 못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닙니까? 차라리 내가 죽을지언정 자식이 죽는 것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이 천한 곳에 보내셨습니다.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가장 처절한 죽음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여기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요3:1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입니다. 범죄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열정적인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되었습니다.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저주와 고통에서 해방되어 영생복락을 누리는 너무나 크나큰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이런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더 감사하고 주님을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또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며 저와 여러분은 더욱 감사하여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축복을 가져다준 십자가

여러분, 오늘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느냐, 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느냐?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기 위해서 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복이 뭡니까? 한마디로 영생복락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천국에 가는 복입니다. 그래서 눅16장에 보면 거지 나사로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영원한 천국의 복을 주셨다는 말씀이고, 이 복이야말로 지고지선지은의 복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복복복하면서 복을 누리기를 원하지만 세상의 복은 온전치 못한 복입니다. 제 아무리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도 세상에는 걱정 근심이 있고, 질고가 있고, 불안과 외로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복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복은 완전한 복입니다. 100%입니다. 아니 200%, 1,000%입니다. 넘친다는 것이지요. 충만하다는 것이지요. 무엇으로 은혜와 기쁨과 평강과 행복이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들은 조금치도 깃들일 수가 없지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요.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덧입은 우리는 바로 그 복을 누릴 사람들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덧입어야만 죄사함을 받고,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만 이런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고난주일이지만 동시에 종려주일인 것입니다. 종려주일은 승리의 주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부활하셔서 새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승리의 날인 것입니다. 주님의 처절한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절기를 보내며 그 저주 받은 십자가, 그 끔찍한 십자가, 그 참혹한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지옥의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주님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새 생명의 역사를 이루신 것처럼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만이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하며 어떤 형태로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먼저는 자신이 더욱 생명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며 주님의 역사를 아름답게 이루어 가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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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제목 : 축복받는 새해

 

지하철에서 어떤 아저씨가 칫솔을 팔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안녕 하십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너무 좋은 물건 하나 소개해 드리려고 여러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물건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게 뭡니까? 칫솔입니다. 왜 가지고 나왔습니까? 물론 팔려고 가지고 나왔습니다.

자, 칫솔이 이렇게 다섯 개가 한 묶음으로 되어있습니다. 얼마일 것 같습니까? 단돈 천원입니다. 뒤에 보면 made in korea라고 쓰여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수출품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수출이 잘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망했습니다. 잘 되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요.

자, 어쨌든 백문이 불여일견, 하나씩 드릴테니 찬찬히 구경해 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몇 분이나 사실까요? 저도 모릅니다. 잠시 후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 네. 점잖은 신사 분 한분이 구입하셨습니다. 더 구입하실 분 안 계십니까? 네, 많은 분들이 저를 믿지 못하고 망설이고 계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만 팔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몇 개를 팔았습니까? 네, 한 개입니다. 그럼 제가 얼마를 벌었습니까? 1,000원입니다. 아니 원가를 빼면 300원 벌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실망했을까요? 네, 아주 많이 실망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제가 여기서 포기할까요? 아닙니다. 저는 다음 칸으로 갑니다. 남은 하루도 즐거운 시간 되시고 안녕히 가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다음 칸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멋있는 아저씨입니까? 비록 지하철에서 칫솔을 팔고 있지만, 비록 수입은 많지 않지만 얼마나 여유가 있고, 얼마나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입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혹시 실망할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다음 칸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새롭게 밝아온 새해에는 혹시 좀 실망스럽고 힘든 일이 있다해도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희망과 긍정 속에 한 해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주님 말씀따라 한걸음 한걸음 앞을 향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분명히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한해가 될 줄로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복된 한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한해를 정말 은혜가 충만한 시간들로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혜가운데 살려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그러나 긍정의 생각이라고 내 마음대로, 세상 가치관대로의 긍정은 안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긍정하는 것이 올바른 긍정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죄와 어둠 가운데 있고 하나님은 빛이시오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긍정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을 긍정하는 것이 뭐냐,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수1:8절을 보십시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보십시오. 말씀을 묵상하라. 지키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할 것이라. 형통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모든 생명과 축복과 평강과 위로와 기쁨의 근원자이십니다. 모든 우주만물과 그 질서와 규칙과 규범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우주만물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모든 우주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당연히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따라가면 그 인생이 생명과 진리와 은혜로 충만해 질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빛이신 하나님, 생명이신 하나님을 따라가면 빛의 은혜, 생명의 은혜를 누릴 것이요, 어둠과 사망에 속한 마귀 사탄을 따라가면 어둠과 사망의 그늘 속에 살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죄와 어둠속에 있는 너무나 많은 인생들이 자기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마귀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인생의 참된 생명의 양식이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가져다주는 유일한 규범이며, 규칙이며, 가이드라인이며, 사용설명서인 성경을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도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룰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해서 인간이 스스로 만든 룰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오직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이 정해주신 룰만이 하나님께 통하는 길이며 그것만이 인간의 생명을 보장하고 풍성케 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직 성경만이 인간의 삶에 유일하게 완전한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유일한 규칙이요, 규범이요, 가이드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생의 영과 육과 정신에 관한 유일하고 완전한 규범은 오직 성경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천지창조 때부터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알고 인간 존재에 대하여, 인간이 살아가야 할 올바른 길에 대하여 규칙을 정할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우주와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올바른 정보를 가지고 모든 인생은 이러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실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우주안의 그 어떤 존재도 우주와 인간과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다 알지도 못하고 권한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의 길, 진리의 길을 제시할 수 없고, 모든 우주의 질서를 정할 수도 없고, 규범을 만들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룰을 바르게 알고 그 가이드라인을 따라, 그 설명서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이드라인으로 삼아 육신을 사용하고 시간을 사용하고 물질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4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새롭게 밝아온 이 새해에는 오직 우리 인생의 유일하고 완전한 규범이며 등불이이며 가이드라인이며 사용설명서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한해 동안도 말씀이 여러분을 지키고 인도함으로 말미암아 말씀 안에 있는 생명과 기쁨과 평강과 은혜와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님의 은총이 풍성한 삶을 살려면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따라 살게 되고, 그러면 당연히 그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6절 말씀 보십시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러분, 이 말씀에서 특별히 범사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범사, 즉 모든 일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릴 때만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밥 먹을 때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직장에서 일을 할 때로 인정하고, 장사를 할 때도 인정하고, 공부할 때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잘되고, 건강하고, 형통하고, 축복받을 때도 인정하고, 잘 안되고, 건강하지 못하고, 불통해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억울한 일을 만나도, 불만스러운 일이 있어도, 이해 못할 일이 벌어져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시간과 장소와 환경과 상황을 불문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생명과 지혜와 능력과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나 내게 주어진 시간이나 물질이나 재능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고 그러면 반드시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인정하면 어찌 예배와 찬송과 기도에 열심을 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어찌 내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쓰며, 나아가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하나님과 나 자신과 이웃을 위하여 바르게 사용하며 살아갈 때에 어찌 그 인생이 별처럼 빛나지 않겠습니까? 그 인생이 어찌 아름답고 복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여러분,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음을 믿고 그저 하나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 할뿐입니다.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도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내 할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와같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정말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갈 때에 그 인생이 어찌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움과 은혜를 인정하고 예배드리고 찬송드리고 기도하는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우리의 육신이나 정신이나 물질이나 시간이나 모든 것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사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어렵고 힘들고 이해가 안되고 억울한 일을 만나도 그저 하나님께 맡기며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인정받고 존중히 여김을 받으며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가득한 이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하나님의 지혜를 따라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그 은혜를 누리려면 하나님의 지혜는 나보다 천배 만배 억배 더 크다는 것을 잊지 말고 자신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오늘 7절 말씀 보십시오. “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자기가 똑똑한 것처럼 생각하며 제 고집대로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혜롭다고 내 놓을만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비록 피조물들 중에서는 제법 지혜롭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우리 인생이 아는 게 얼마나 됩니까? 우리가 경험한 것이 얼마나 됩니까? 배웠으면 얼마나 배웠습니까? 알면 얼마나 압니까?

욥이 고난을 당했을 때 욥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너무 답답해서 따져 묻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했습니다. 나는 정말 나름대로 선하고 의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왜 나에게 이런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오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악한데도 잘 먹고 잘 사는데 난 정말 억울하다고 하소연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내게 대답하라. 네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거기 있었느냐, 바닷물이 넘치게 하였느냐, 네가 아침이 오게 하였느냐, 네가 별들을 매어 묶을 수 있느냐, 네가 눈과 비를 내리었느냐,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네 가슴속의 지혜는 누가 주었느냐, 네가 염소의 새끼를 낳을 때를 아느냐,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러자 욥은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욥42: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렸고,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욥을 고난에서 건져주시고 다시금 복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인품이 좋고 선하고 잘나도 하나님 앞에서 지혜를 자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처럼 여기고, 하나님앞에서 의로운 것처럼 여기는 인생은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마귀사탄에게 철저히 속고 있는 사람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솔직히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 우주 공간속에서, 천지가 창조되고 영원한 세계로 나아가는 길까지, 영원한 세상이 지속되는 그 모든 일에 대하여 아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자신의 한계와 무지와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자신과 세상의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지혜와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더욱 풍성히 누리는 이 복된 새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4.하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려면 진실로 하나님을 공경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9절 말씀 보세요.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보십시오. 네 재물과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제일 먼저, 제일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아가서 십일조를 비롯한 모든 감사예물을 드릴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여호와를 인정하는 일이요, 바르게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게다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는데, 게다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야말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일에 사용되는 것인데,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이 유일하게 하늘 곳간에 쌓는 일인데 하나님을 믿고 인정하고 공경한다면 어찌 하나님께 먼저 드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무엇인가 힘써 노력해서 얻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야, 말합니다. ‘너, 정말 수고 많았다. 너 정말 대단하다. 이제는 좀 쉬면서 먹고 마시고 놀자.’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부모님이 날 낳아 주시고 열심히 키워 주신 덕분이라며 부모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곁에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던 친구나 선배나 기타 다른 사람에게 공을 돌리며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면 우리도 여전히 인본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육신으로 물질로 시간으로 하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었다해도 근본적으로나 실제적으로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터전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생명과 육체과 지혜와 능력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는 재료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햇빛과 비와 공기와 토지를 주셔서 그 안에서 활동하며 살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제일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제일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간도 물질도 재능도 다른 모든 것도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공경할 때 그 믿음과 신실함을 보시고 더욱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0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오늘 이 귀한 말씀들을 기억하며 올 한해 동안도 정말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결코 자신이나 세상의 지혜를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유일한 규범이며 잣대이며 안내자인 하나님의 말씀의 안내를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과 물질과 육신을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창고가 가득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은총과 귀중이 여김을 받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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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창22:9~14

제목 : 믿음과 순종과 축복

1.믿음과 순종과 축복

믿음이 있는 곳에 순종이 있고, 순종이 있는 곳에 축복이 있다. 여러분, 맞는 말입니까? 예, 맞는 말입니다. 안 그래요? 믿음이 있으면 순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있고말고요. 아니 믿는데 순종이 없을 수 있습니까? 안 그래요? 좋으신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데 어찌 순종이 없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또 순종이 있는 곳에 축복이 있다. 이것도 마찬가지잖아요. 순종하는 복이 안 오면 그게 이상한 거지요.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데 어찌 복이 없겠습니까? 여러분, 신28:2절 보세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하시면서 오만가지 복을 다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잖아요. 여러분, 하나님이 뭐 허튼소리 하시는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진실로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지금 여기서고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브라함인데요, 오늘 말씀은 여러분이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어떻습니까? 귀가 따갑도록 들었는데 잘 됩니까? 잘 안되지요. 왜요?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실상은 그래봤자 얼마나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요? 이 이야기 들어봤자 몇 번 들었습니까? 한 백번 들었을까요? 그런데 세상에서 정치이야기, 경제이야기,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는 몇 번 쯤 들었을까요? 한 천 번 들었을까요? 만 번도 더 들었을걸요. 그러니까 믿음 안에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는 아무리 많이 해도 세상에서 먹고 입고 잠자고 놀고 하는 이야기의 백분의 일, 천분의 일도 못 듣고 못 보는 거예요. 그러니 잘 안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하지요. 그러면 안 되는 게 당연하다고 가만히 있을 겁니까? 아니죠. 그러므로 더욱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하지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기독교적 가치관이 확립되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땅의 기름진 축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인간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다 읽어드리지 못했지만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삼아 각을 뜨고, 불에 태워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인신제사는 우상숭배자들이 하는 악습으로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삭은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무려 25년 만에 달랑 하나 주신 약속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장차 큰 민족을 이루고 주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삭을 잡아 불에 태워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말이나 되느냐 말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일까?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자녀가 아닌가? 그것도 아이를 도저히 낳을 수 없는 100세나 되어서 기적적으로 주신 아들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큰 민족을 이루려면 오히려 더 많은 자식을 주셔야 하는데 겨우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불에 태워 인신제사로 드리라니 내가 늙어서 헛소리를 들었나? 망령이라도 들었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고 말도 안되는 명령에 순종합니다. 왜요? 그게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분명 말도 안되지만 분명 뭔가 하나님의 섭리와 뜻과 계획이 있을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의 이성으로 다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우리 보다 높고 깊어서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이성과 경험과 능력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성적으로 이해가 됩니까? 예수께서 사망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다. 경험적으로 납득이 갑니까? 저 영원한 천국, 이것이 인간의 논리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이성과 과학과 논리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그런 것들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해가 되든 말든 납득이 되든 말든 순종할 것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만약 조금이라도 이성이나 논리를 가지고 생각했더라면 절대로 이삭을 바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인신제사를 드리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명령을 내리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내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티끌과 같이 많게 해주시겠다고 해놓고 25년 만에 겨우 아들 하나 주어놓고 그걸 도로 달라고 하십니까? 하면서 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자신의 모든 생각들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인 것입니다. 이해가 가든 안가든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와 무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높으심과 인도하심과 선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언제나 내 뜻과 이성과 경험과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잠3:5,6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해가 되든 말든, 세상의 가치와 같든 다르든, 내 경험과 맞든 안 맞든, 손해가 되든 유익이 되든, 내 생각과 관계없이 인정하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내 모든 생각과 경험과 환경을 떠나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오직 온전한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신 예수님의 뜻에 온전히 순복하십시오. 그저 갓난아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그때에 분명 주님 안에 있는 은혜의 풍성함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2.온전한 순종

여러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말씀에 순종합니다. 창22:3,4절 보세요.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여러분, 이 말씀을 보십시오. 그는 아침 일찍 떠났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솔직히 무언가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것임을 믿었지만 밤새도록 얼마나 고민을 했겠습니까?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아들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는데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날이 밝자마다 곧장 시행에 들어간 것입니다. 아내 사라에게 말도 없이 떠났습니다. 아내에게 말했다가 보나마나 이 양반이 나이가 들더니 드디어 망령이 들었냐고 하면서 핀잔만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아내에게 말도 하지 않고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자신도 시간을 지체하다간 아들을 번제로 드릴 자신이 없었기에 마음 변하기 전에, 마귀가 틈타기 전에 떠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즉시 시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시행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일을 뒤로 미루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계속 나중에 나중에 그럽니다. 이것만 해 놓고, 저것만 해결하고...... 나중에 생활이 안정되면, 나중에 시간 나면, 나중에 할 일 없어지면... 그러나 여러분, 지금 못하는 사람이 나중에 여유 생기면 할 수 있을 것 같죠? 그런 사람은 99%는 여유생기면 놀러 다닙니다. 여유돈 있으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쓰게 됩니다. 설령 나중에 한다 해도 지금 못한 것은 죽을 때까지 아니 천국에 가서 까지 못한 것으로 계속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마귀가 장난칩니다. 마음이 변하기 쉽습니다. 방해꾼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길을 떠나 사흘 동안 걸어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걸어갑니다. 여러분, 그 사흘길을 걸어오는 동안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래서 길을 떠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외아들을 자기 손으로 잡아 불에 태워서 번제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마음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발걸음은 재촉합니다. 이삭을 잡아 번제로 드릴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그는 묵묵히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 지시한 산 밑에 이르러 종들을 거기 머물라고 하면서 번제에 쓸 나무를 아들의 등에 지우고, 자기는 칼과 불을 들고 산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때 이삭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번제를 드리려면 제물이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제물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나무와 불은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이 말을 듣는 순간 아브라함의 마음이 얼마나 뜨끔했겠습니까? 차마 ‘네가 바로 번제물이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단다. 나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하나님께서 너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단다. 그러니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구나.’ 차마 이렇게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비해 주실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묵묵히 산에 올라 드디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도착하게 되고, 아브라함은 번제를 드릴 준비를 합니다. 장작을 쌓아 올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제물을 잡아서 각을 떠서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태워야 할 차례였습니다. 그 번제물은 다름 아닌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떨리는 목소리로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하나님께서 너를 번제로 드리라는구나. 내가 너를 대신해서 번제가 될 수만 있다면,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그러나 내가 아닌 너를 요구하시는구나. 그러나 사랑하는 아들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야. 그러니 순종해야지.’ 하면서 아들을 결박합니다. 그 운명의 순간에 하늘이 무너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아픔이 몰려 왔습니다. 그러나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아들을 붙잡아 결박하고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죽이려고 눈을 감고 칼을 높이 들어 올렸습니다.

여러분, 그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결박하는 아버지의 심정. 아들을 장작더미위에 올려 놓고 칼을 높이 들어 올린 아버지의 심정,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이삭, 그것도 하나 밖에 없었던 아들 이삭,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결박 당할수만 있다면.... 내가 너를 대신하여 번제물이 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해서 불 태워 질수만 있다면.... 이런 마음으로 이삭 대신 자신이 번제물이 되고 싶었지만 하나님이 요구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이삭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무슨 선한 뜻이 있을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니 거역할 수 없었기에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속에서 도저히 눈뜨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눈을 감고 아들을 향해 칼을 내리치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게 순종입니다. 내 생각과 달라도, 도저히 이해가 안가도, 있을 수 없는 일을 시켜도 그냥 따르는 것이 순종입니다. 아무리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라도 하나님이 필요로 하신다면 그냥 드리는 것이 순종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순종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의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믿음이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며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믿습니까? 주님의 선하심을 믿습니까? 구원자이심을 믿습니까?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상황이 이래요. 형편이 이래요. 저래요. 이래서 곤란해요. 저래서 곤란해요. 그럼 내가 손해봐요. 웃음거리 돼요. 주일날 하루 쉬면 손해가 얼만지 아세요? 아니 이 귀한 걸 달라고요? 그럼 난 어떻게 살라고요? 여러분, 이런 거 다 버리세요. 그냥 믿고 따르세요. 순종하세요. 그게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에게 주님의 한량없는 은총이 임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순종하는 자에게 임할 복

여러분, 그렇습니다. 순종이 곧 온전한 믿음이기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이 임합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내리치려고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창22:11,12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던 하나님께서 도리어 다급하게 아브라함을 제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너 정말로 이삭을 잡으려는 것이냐? 내가 정말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받기를 원하는지 아니냐? 아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네 믿음을 보고 싶었단다. 이제 충분하다. 그 믿음이면 충분하다. 너는 정녕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 자격이 있다. 그러니 이삭을 풀어주고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양으로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아들을 풀어주고 옆에 뿔이 나무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는 양을 가져다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삭이 아닌 양으로 제사를 모두 마쳤을 때 다시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창22:16,1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요구했던 것은 이삭이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순종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빼앗아가려고 했겠습니까? 왜 말도 안되는 인신제사를 드리라고 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셨고 그 믿음과 순종이 있는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은총을 그렇게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순종하게 되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순종이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하나님께 대한 신뢰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곧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하나님의 나의 주인이라는 종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종이 주인에게 따질 수 있습니까? 우매 자가 지혜 자에게 따질 수 있습니까?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왜 그래야 하느냐고 따질 수 있습니까? 죄인이 구세주에게 이러니저러니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믿음과 순종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요, 진정 주님만이 생명의 주님이시오, 구원자시오, 주권자라는 믿음이 있다면 순종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이 곧 믿음이요,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게 복이 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러한 순종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아도, 현실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달라고 하셔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결코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종하실 때에 좋으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의 모든 생각 지식 경험 이성 가치관 나 내려놓고 순종하심으로 주님께서 채워 주시는 영육간의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받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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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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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네째주일 예배설교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August Sunday Sermon)
제목 :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말씀 : 요15:5~11

 

1.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든 부모들은 한결같이 자녀들이 기쁘고 즐겁고 감사하며 의롭게 선하게 아름답

고 복된 가정도 이루고 서로 사랑하며 아껴주며 복되게 살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부

모도 자녀가 슬프게 고통스럽게 원망하고 짜증내고 싸우고 죄짓고 무가치하게 살기를 바

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시겠습니까? 물어보나마마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이 행복하고 기쁘고

감사하고 선하게 의롭게 아름답게 살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들이 그저 자나깨나 내 새끼 잘되고 밝게 기쁘게 감사하며 살

기를 바라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도 우리가 정말 늘 기쁘고 즐겁고 감사하며 살기를 바라

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구원이 뭡니까? 죄와 무지와 어둠과 슬픔과 고통에서 건져주어 천

국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이 뭡니까? 물론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감사와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가 모든 죄와 고통과

불안과 미움과 저주 속에서 해방되어 선과 진리와 의 속에서 참된 기쁨과 평안과 은혜의

삶을 살게 해 주시기 위한 것이지요. 이게 주님이 오신 목적이고 이게 천국의 삶이고 이

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내는 삶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으면 그 은혜를 누리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선과

진리와 의 가운데 감사하며 기뻐하며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생명의 기쁨과 은혜가 넘치

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것이 아니

라 지금 여기서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여기서의 천국은 완전하지는 않습니

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있으면 천국의 모형을 맛

보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천국에 근접한 삶을 살아다가 죽어서 완전

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구원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주 말씀드렸지만 예수님께서 눅17:20,21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

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

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

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국은 이미 우리 안에 도래

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1절 말씀에서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앞에서 예수님께

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

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서 맺을 열매는 뭡니까? 물론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사랑 등의 주님이 주시는 온갖 좋은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이러한 내가 주는 온갖 좋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될 것이므로 너희가 생명의 기

쁨이 넘치는 복된 삶을 살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16:1절에서는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정말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도말

하시고,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온전히 심령

속에 모셔들이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 지금 여기서도 주님이 주시는 그 생

명의 기쁨과 은혜와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면서 주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2.온전히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미 앞에서 얼마간 언급이 되었지만 우리가 진정한 기쁨의 삶을 살

려면 말할 나위 없이 온전히 예수님을 심령 속에 모셔들이고 예수님 안에 살아가야 합니

다. 그러면 반드시 확실히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뭐 지극히 당연한

거 아닙니까? 주님이 누구십니까?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

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모든 마귀 사탄과 어둠의 세력들 물리쳐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안에 있으면 그런 은혜들을 누리게 되는 것은 너무

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요? 어두운 곳에 있으면 왠지 불안하고 두렵지 않습니까? 반대로 빛 가운데 있으

면 마음이 밝아지고 따뜻해지고 편안해지지 않습니까? 따뜻한 곳에 있으면 따뜻하고 추운

곳에 있으면 춥습니다. 상처와 고통과 아픔이 있는 곳에 있으면 마음이 슬퍼지고,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곳에 가면 나도 덩달아 마음이 기뻐지지 않습니까? 분위기가 험악하거나

어두침침한 곳에 있으면 두려움이 생기고, 뭔가 음침하고 더러운 곳에 있으면 영혼이 더

러워져 집니다. 그러나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곳에 가면 나도 은혜가 넘치게 되고, 깨끗

하고 정결한 곳에 가면 마음이 정화가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유일한 길이

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 안에 있으면 어찌 예수님 안에 있는 그 생명의 기쁨

과 평안과 위로를 누리기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좌우단간 어찌하든지 죽으나사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약4:8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

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즉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자꾸 세상의 것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갈리게 하지 말고 어찌하든 하나님을 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가까이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해 주시면 당연히 하나님안에 있는 그 생

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은 저절로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오늘말씀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은 포도나무

이시고 우리는 가지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가지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

니까? 그건 말하나마나 죽으나사나 나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래야

영양분을 공급받습니다. 그래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안 그러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으나사나 우리의 줄기이신 즉 우리의 근본이며 기초이며 생명의 주권

자이시며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

면 예수님께로부터 영적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좋은 것들을 충

분하게 공급받음으로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고 잎이 싱싱해지고 꽃이 실하게 피고 충실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5,6절에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

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주님 안에 있으면 주님이 주시는 능

력과 지혜로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지가 줄기를 떠나면 말할 것도 말라 죽게 되고 그러면 아무 쓸모없어 불태워 버

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나사나 예수님께 붙어 있어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온전히 예수님께 착 달라붙어서 온전히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그 생명의 은혜를 풍성하게 받아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

분 주님께 딱 달라 붙어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건 여러분 7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7절 보겠습니다.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보세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님이 우리 안에 있고, 동시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그러면 너희가 구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무른 말씀입니까? 내가 너희 안에 거한다면 내 말도 너희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든 원하는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

면 주님의 말씀도 당연히 우리 안에 거해야 하고 그러면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되고

그러면 주님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으나사나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고, 예수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다. 이건 좀 추상적이예요.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는 걸 보여줄 수도 없고,

만져 볼 수도 없고,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들어 볼 수도 없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압니까

?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선과 진리와 의

와 거룩을 따르고 그러면 그게 바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으나사나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주님

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판단과 가치와 행동과 삶의

잣대여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삶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가까이하는 자의

삶이요, 예수님과 동행하는 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1:2,3절에서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

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

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죽으나사나 주님을 심령속에 온전히 모셔들이고, 주님을 모셔들였

으면 더 이상 세상의 헛되고 왜곡된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지 말고 오직 유일한 진리의 말

씀, 생명의 말씀이시며 인생의 유일한 등불이며 기준이며 안내자인 말씀을 따라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가 넘쳐

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어떤 은총을 누리게 됩니까?

3.천국의 은총을 온전히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자는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천

국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천국은 두가지 천국

이 있고, 예수님 믿는 사람은 이 두가지 천국을 동시에 누리게 됩니다.

물론 1차적으로 누릴 천국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입니다. 예수님 믿으면 죄에서 해방되고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래서 지옥

백성에서 천국백성으로 옮겨집니다. 그래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천지가 개벽을 해도 이것만은

먼저 얻어놔야 합니다. 그까짓 세상적인 부귀영화 영광 명예 아무리 얻어 놔봤자 별것 아

닙니다. 진정한 생명의 은혜도, 영광의 나라도, 진정하고 영원한 자유와 평안과 기쁨과

소망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에게 완전한 생명의 은총을 주십니다. 영광의

나라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예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

수님이 믿고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천국은 지금 여기서 누리는 천국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은혜받고 천국

의 은총을 누리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과 지혜와 은혜를 주셔서 세상의 모든 어

둠의 세력과 마귀 사탄의 유혹과 시험과 도전을 이기게 하십니다. 세상에서 우리에게 진

정으로 생명과 기쁨과 은혜를 주지 못하는 세상 영광이나 명예나 즐거움으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에게 얽매이지 않게 되고 끌려다니지 않게 됩니다. 오히

려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향하여 달려가게 하십니다

. 그래서 진정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상

황과 환경과 환경에도 얽매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권세와 지옥의 권세와 세상

의 모든 왜곡되고 추하고 악한 것들에게서 자유하게 되어 지금 여기서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적인 천국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어둠의 권세에 얽매이고

상황과 환경에 얽매이고 온갖 시기와 질투와 욕심 가운데 살면서 아무리 가져도 만족함을

모릅니다. 도리어 싸우고 빼앗고 갈등하고 어떻게든지 더 가지려고 난리를 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러한 세상의 것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명의 기쁨

과 은혜와 감격과 행복과 가치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다 썩어지고 없어지고 우리

를 떠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엄청나고도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 영원하고 완전한 복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과 행

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심지어 우리 믿음의 사람들조차도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세

상의 것은 대단한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엄청난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세상의 것을 얻

으면 다 얻은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세상의 것을 갖지 못하면 아무것도 못 가진 자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을 얻은 것, 구원을 얻은 것, 이것을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정말 기뻐하지도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영광을 돌려 드리지도

못하고 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하찮은 것 때문에 걱정과 원망과 불평을

할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믿음을 팔아먹고 세상의 것을 위하여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닙니다. 그건 정말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실상은 정 반대여야 합

니다. 믿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세상의 별 것 아닌 것, 세상의 대단치 못한 것 그런

것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것들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예수님 때문에, 믿음 때문에, 구원의 은총 때문에 얼마든지 버려도 좋은 것들입니

다. 그게 손해인 것 같지만 손해가 아니고, 그것이 잃은 것 같지만 실상은 모든 것을 얻

는 길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별 것 아닌 것 때문에 믿음 안에 있는 것, 대단한 것,

엄청난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껍데기를 위하여 알맹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썩어 없어질

것을 위하여 영원한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더 나은 것을 위해서라면 덜 나은 것은 버릴 수 있지 않습니까? 더 좋

은 것을 위해서는 덜 좋은 것은 포기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덜 좋은 것을 위해서

더 좋은 것을 버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대단치도 않은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하

여 참으로 가치있는 믿음의 행위를 포기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또 세상의 별

로 대단치도 않은 것을 좀 잃었다고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생각하며 절망하며 슬퍼하며

원망하며 산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의 별 것 아닌 것을 좀 잃었다고 마치 천국마져 잃어버린 것처

럼 탄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돈과 건강과 지식으로 부요하지 않더라도 설

령 있는 것마져 빼앗겼다해도 천국을 놓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실제로 모든 것을 가지

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16:25,26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

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

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

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예수님을 위하여 세상의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모든 것

을 얻을 것이고, 세상의 것을 위하여 예수님을 포기하는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잃을 것

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결단코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물론 여기 누릴 현재적 천국

의 은총을 누리기 위한 것들과 세상의 것을 바꾸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정말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들이

고, 모셔들였으면 이제는 정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오직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의 별 것 아닌 것들에 끌려다니거나 거기에 함몰되

어 현재적인 천국을 누리기 위한 일들을 게을리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 안에 진정 생명의 기쁨과 자유와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며 오

직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 진정 생명의 은혜와 기쁨과 능력과 평안이

넘쳐나는 삶이 되실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과 도전과 유혹을 이기고 자유의

평안을 누리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행복하고 기쁘고 감사하고 은혜가 사랑이 넘

치고 생기가 흘러넘치는 복되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생이 되실 것입니다 주의 영광 나타

내며 주님 나라 이루어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정말 이런 복된 인생

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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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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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제목 : 영혼이 잘 되어야 합니다.

말씀 : 골4:2~6

1.영혼이 잘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은 어디서 나옵니까? 물론 마음에서 나옵니다. 안 그래요? 마음에 미움이 잔뜩 들어 있으면 미워하게 되잖아요. 마음에 원망과 불평이 들어 있으면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잖아요. 마음에 사랑이 들어있으면 사랑하고 나누게 되잖아요. 마음에 욕심이 잔뜩 들어있으면 어떻게든지 더 가지려고 난리를 치잖아요.

 

그러면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그것은 어디서부터 왔을까요?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보고 듣고 배운 것들입니다.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이 뇌와 마음과 영혼 속에 축적되어 가치관과 인격을 형성되고 그렇게 형성된 가치관과 인격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무엇을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까? 99%가 사람과 교제하며 거기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입니다. 즉 하나님과 교제하며 보고 듣고 배운 것은 별로 없고 거의 대부분을 사람과 교제하며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는 주님의 가치관이 아닌 사람의 가치관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뜻대로 살지 못하고 자꾸만 왜곡된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일주일동안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일주일이 168시간입니다. 그러면 그 중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은 몇 시간입니까? 일주일 달랑 한번 예배드리는 사람은 불과 1시간이지요. 그러면 1/168입니다. 약 0.6%지요. 오후예배까지 드리는 사람은 2시간 즉 1/84 약 1.2%입니다. 수요예배까지 드리는 사람은 3시간 약 1/55 약 2%입니다. 매일 새벽기도까지 드리는 사람은 10시간 약1/16 약 6%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떤 사람은 아예 하나님을 찾지 않고 세상과만 교제하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도 많아야 6%, 적으면 1%도 안되는 시간만 하나님과 교제하고 나머지 시간은 세상과 교제하며 거기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 뇌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겠습니까? 우리 가치관과 인격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겠습니까? 물론 당연히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로 가득차 있겠죠.

 

물론 그렇게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이 완전히 옳고 바르고 선하고 의롭고 진실하고 거룩하고 하다면야 문제될 게 없겠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지를 못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영혼이 죄로 심각하게 오염되어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와 무지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죄와 무지 가운데 있음으로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심히 죄되고 왜곡된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그렇지 않아도 내 영혼도 이미 심각하게 죄로 오염되어 있는데 거기다가 또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우리 영혼과 인격이 어떻게 올바르게 형성되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지극히 인간적 물질적 이기적 자기중심적 사고와 그 밖에 온갖 왜곡된 가치관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지극히 왜곡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서 선과 진리와 의를 따르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자신도 생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남에게도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주는 그러한 삶을 살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어찌하든지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우리 영혼이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과 사랑과 선과 진리와 의와 진실 등의 하나님의 가치관, 예수님의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야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과 선과 진리와 의와 은혜와 사랑을 덧입어 내가 먼저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올바른 관계가 되면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물질 사이에도 올바른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러면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선과 진리와 의로 대하게 됩니다.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바르게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전인적인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됨은 물론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함께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복된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42:1절에서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주의 은혜로 가득할 때에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릴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내 영혼에 은혜로 가득 채워 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어찌 하든지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히 회복되어 여러분 자신도 생명의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고 남에게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 영혼이 늘 은혜가 충만한 삶이 될 수 있습니까?

 

2.말씀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영혼이 잘 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두말할 나위가 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인류에게 완전하고 유일한 생명의 양식이며 동시에 완전한 나침반이며 규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혼이 살아나고 바른 길을 깨닫고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영생 복락의 길을 가려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거기에만이 완전하고 영원하고 생명과 진리와 은혜가 있습니다. 우주와 하나님과 인간과 이 세상과 내세와 영원한 나라에 대하여 유일하고 완전하게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누가 우리에게 완전한 생명과 진리와 의와 영생 복락의 길을 알려 주겠습니까? 누가 우주만물에 대하여 다 알겠습니까? 그 어떤 철학이나 도덕이나 지식이 생명의 길을 알겠습니까? 무엇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과 가치를 가르쳐 주겠습니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다 죄인이요 무지한 존재요 한계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인간은 그 아무도 자신이 길이요 진리가 될 수도 없고, 우리에게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영생 복락의 길로 안내해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영생복락을 주실 수 있고 우리를 선과 진리와 의와 영생 복락의 길로 인도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만이 유일한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19:7,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 영혼을 소생케 하고 영혼의 눈을 밝혀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유일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압니다. 그래야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알게 됩니다. 그래야 지혜와 능력을 얻게 되고, 그래야 속지 않고, 시험에 들지 않고, 세상에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모르면 인생을 모릅니다. 인생의 목적과 가치와 의미를 모릅니다. 인생의 종착역도 모릅니다. 온전한 지혜도 능력도 분별력도 없어집니다. 그러면 왜곡된 가치관에 판판이 속습니다. 세상에 질질 끌려 다닙니다. 유혹에 빠지고 시험에 듭니다. 그래서 자신이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줄도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삶으로 세상에서도 볼품없는 인생이 되고 끝내 멸망의 길로 가는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우리의 작음과 무지와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이성을 따라 살지 말고 오직 인생의 유일한 참되고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가까이하며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에 순복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말씀이 주시는 능력과 은혜와 권세와 지혜로 세상의 모든 왜곡되고 악한 것들을 물리치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잘 달려가 여러분의 영혼이 생명의 은혜가 넘쳐 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기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영혼이 회복되어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기 위하여 또 하나 정말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체가 육체적 호흡을 통하여 산소를 공급받음으로 육체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마음껏 활동하는 것처럼 우리 영혼도 기도를 통하여 영적 산소를 공급받아 영적 에너지를 얻어야 영적으로 생기 있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단지 하나님께 무언가를 요구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우리 생각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결단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과 은혜와 지혜와 위로와 평안과 능력이 내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욕심과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원망과 불평과 근심과 걱정과 좌절과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들이 물러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이 생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전한 분별력과 능력을 가지고 세상의 유혹을 이기게 되고, 마귀사탄에게 속아 끌려 다니는 일이 없게 됩니다. 세상의 유혹과 도전과 시험을 얼마든지 이기며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26:41절에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고, 오늘 2절에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여러분 보세요. 계속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즉 언제 어느 때 어느 상황이라도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에 보면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즉 맨 날 달라는 기도만하지 말고,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요구만 하는 게 아니라 먼저 감사해야 하고 회개해야 하고 또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하겠다고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달라는 기도도 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런 기도를 하기 전에 먼저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주님, 때를 따라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신 주님께 먼저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기억한다면 당연히 내가 이렇게이렇게 하겠노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요구하는 것과 무작정 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요구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잘 알지 못하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기도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면서 먼저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은혜를 아는 사람도 요구하는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요구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 아닙니다. 그 요구는 나와 내 가족과 이웃에게 정말로 생명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기 위한 기도입니다.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가 나옵니다. 맨날 무엇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족과 이웃과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하겠노라는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자의 기도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응답해 주시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물론 그 기도자의 심령 속에 은혜를 주셔서 더욱 감사와 기쁨이 넘치고, 하나님께도 더욱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기도와 관련하여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은 영혼 구원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3절을 보겠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고 저들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영혼 구원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당연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영혼 구원하는 것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영혼 구원을 받지 못했을 때 당하는 고통과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이 어디 있겠습니까? 반대로 영혼 구원을 받았을 때 누리게 되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평안보다 더 크고 기쁘고 즐겁고 복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가족에게 억만금을 주는 것보다 그 영혼이 구원받게 해야 합니다. 가정이나 국가의 경제발전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내 가족 이 나라 이 백성이 하나님을 알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여기서나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나 진정한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여러분의 영혼이 밝아지고 지혜로 충만하고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고 특별히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지역사회와 나라와 민족의 영혼이 깨어나고 살아나서 우리 모두 함께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게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영혼이 잘되어 생명의 은총을 누리면서 그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려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먼저 예배와 말씀과 찬양과 기도를 통하여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생명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걸로 끝나면 안되고 그렇게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는 당연히 일상생활에서 은혜 받은 자로서 거룩하고 진실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생명의 은총을 누리고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12:1절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셨고, 오늘 5절에서도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세월을 아끼라는 것은 세월을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으라는 게 아닙니다. 세월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돈이나 시간이나 재능을 아끼는 게 뭡니까? 그냥 고이 간직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돈이든 시간이든 재능이든 그 본래의 목적대로 바르게 사용하는 게 아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월을 아끼라는 것도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게 아니 원래의 목적대로 바르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할나위없이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시간이든 재능이든 돈이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될 때에 가장 올바르게 사용되어 우리 모두가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과 유익과 복을 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풍성하고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여기서 맛을 낸다는 것은 세상에 기쁨과 평안과 은혜와 사랑과 소망과 위로를 주어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렇게 맛을 내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선 말을 예쁘게 곱게 긍정적으로 상냥하게 친절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로서 다른 사람에게 기쁨과 은혜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말도 예쁘게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만 잘하면 뭐하냐, 행동을 잘해야지 그럽니다. 그러면 그렇게 말하는 너는 얼마나 행동을 잘하냐?

 

여러분, 말도 나쁘게 하고 행동도 나쁘게 하면 빵점입니다. 그러나 비록 행동은 다 못할망정 말이라도 잘하면 50점은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말만 잘하면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우선 말을 예쁘게 하고 그 다음에 행동도 예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우선 말이 예쁘고 그 다음에 행동도 잘해야 합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의로워야 합니다. 성실해야 합니다.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곳에 있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과 유익과 소망을 가져다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소금으로 맛을 내는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하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이 잘 된 자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세상의 것도 잘되기를 바랍니다. 가정이 화목하고 모두 건강하고 출세하고 물질적으로 부유해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영혼이 잘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받은 은혜를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먼저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살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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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말씀 : 고전10:31-33

제목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분, 사람이든 물건이든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모습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무엇인든 본래 그것을 만든 목적에 부합되는 상태를 유지하고 그 목적에 맞게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TV가 아무리 크고 디자인이 좋아도 영상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자동차가 아무리 크고 멋있어도 잘 달리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것이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인물이 훤하고 키가 크고 능력이 많아도 사람 노릇 제대로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지식과 능력과 부와 명예와 권세가 있어도 그걸 본래의 목적에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아무 유익이 없지 않습니까? 아니 유익은커녕 도리어 그걸 잘못 사용하면 인간의 삶에 해악을 끼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존재의 목적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생명과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거기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정말 멋있고 아름답고 가치 있고 생명의 은혜가 넘치는 고귀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존재의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1.인간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생 뭐 있냐 잘 먹고 잘 놀고 잘살면 되지 그럽니다. 기왕이면 부귀영화도 누리고 명예도 누리고 그래서 떵떵거리며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그게 인생이지 그럽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잘먹고 잘살기 위하여 인생의 모든 것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부귀영화 누리면서 살다가 죽으면 대단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누구 맘대로 그게 인생이라고 그럽니까? 그건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이 자기 멋대로 생각하는 인생이지 결코 그게 인생이 아닙니다. 여러분, 인간의 목적은 사람이 정하는 게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만들어진 존재가 어떻게 자신의 목적을 정합니까? 텔레비전이 자기가 목적을 정했나요? 밥그릇이 나는 밥을 담는 그릇이 되어야지 하면 자기가 목적을 정하고 만들어졌나요? 사람이 태어나면서 나는 이런 인생이 되어야지 하면서 스스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나요? 아닙니다. 물건은 그것을 만든 사람이 정하고 우리의 목적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은 것입니다.

그게 뭡니까? 그건 사43:7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같이 보실까요?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무엇이 인간의 목적이라고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어졌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자세히 말하면 길어지니까 간단히 말씀드리면 첫째는 직접적인 의미로서 우리를 지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며 찬양하여 섬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간접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혜와 능력을 잘 활용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되게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아름다운 창조의 세계에서 인간도 자연도 하나님의 은혜를 흡족하게 누리며 살아감으로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신 의미와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은 인간은 무조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말하면 뭐하겠습니까?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약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간이 우주만물의 창조주로서 전지전능하시고 영화로우시고 완전히 거룩하고 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사랑과 은혜만이 충만하신 하나님께 어찌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드리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걸 모르는 인생이라면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모르는 자로서 결국 하나님의 은총에서 끊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갈 때에 세상은 가장 아름답고 복된 세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행하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무엇을 하든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생각과 지식과 경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길을 따르게 됩니다. 선과 진리와 의를 따르게 됩니다. 목적도 방법도 의도도 선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바르게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도 영광이 돌려지고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내 영광을 위하여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죄와 무지 속에 있는 내 생각과 방법과 경험과 지식을 따라 행하게 됩니다. 그러면 물론 옳은 것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죄와 무지가운데 있기 때문에 선하고 아름답고 귀한 목적과 방법과 의도를 가지고 하지 못하고 잘못된 목적과 방법과 의도를 가지고 하기가 십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기도 하고 헛된 것에 인생을 바치기도 하고 그저 자신의 욕심과 영광을 위해 하다보니까 시기와 질투와 분쟁과 싸움이 일어나 결국은 서로 아픔과 고통과 상처를 주는 어리석은 삶을 살 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죄와 무지 가운데 있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겸손하게 엎드려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으로 행할 때에 선과 진리와 의를 따름으로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내 경험과 지식과 이성이나 세상의 왜곡된 풍조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여러분도 귀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모든 행위를 하나님의 영광과 결부시켜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영광과 결부시켜야 합니다. 즉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이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인지 혹은 가리는 일인지를 깊이 생각하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쪽으로 결론이 나고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3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보십시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구이며 행위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본능적인 욕구나 행위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살기 위해서 먹는다거나 아니면 식탐을 채우기 위하여 먹는 것이 아니라 먹음으로 건강을 유지하여 그 건강한 육신으로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먹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의식주 생활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의식주 생활도 정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방법으로 영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 중에서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멀리까지 유명한 음식점을 찾아 여기저기 다니기도 합니다. 또 일인분이 몇 만원, 몇 십만원씩하는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기도 합니다. 혹은 몇 만원짜리도 수두룩한데 굳이 몇 십만 몇 백만 원짜리 옷을 입기도 하고, 그저 삼십여평만 되어도 충분할 것 같은 데 굳이 몇 십 평짜리 집에 살면서 온갖 비싸고 좋은 것들로 장식을 하고 호화롭게 살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런 모습들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일일까요? 어떤 분들은 내가 능력이 있어서 돈 잘 벌어서 내 돈 가지고 내가 쓰는데 왠 잔소리냐 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능력도 지혜도 여건도 환경도 상황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필요이상으로 크고 화려한 곳에서 살며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옷 입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영광과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므로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제적 능력이 있어도 적당한 수준에서 검소하게 의식주생활을 하면서 내 영광과 내 기쁨을 위하여 사용하는 그것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그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인 것입니다.

뭐 기타 지식이나 권력이나 지위나 그 어떤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릴 것은 드리고, 복음의 역사를 위하여 사용하고, 이웃을 위해서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남에게 생명의 기쁨을 가져다주고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고 우리도 귀하고 복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이 사실을 잊지 말고 가장 기본적으로 먹고 마시는 일 조차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말을 할 때나 공부를 할 때나 일을 할 때나 직장 생활을 할 때나 결혼을 할 때나 무엇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대전제를 잊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고 여러분도 주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남을 세워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저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일 중의 하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그건 다름 아니라 남을 세워주는 자 즉 남에게 힘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과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가져다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인데 어떻게 그 귀한 존재를 아프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겠습니까? 또 그렇게 서로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고 넘어지게 하면 서로가 얼마나 힘들겠으며 또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서로 사랑하고 세워주고 위로하고 힘을 주고 하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더 아름답고 풍요로워지겠으며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겠습니까?

 

오늘 32,3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누구에게나 남을 걸려 넘어지게 만들고,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주는 자가 아니라 기쁨과 위로를 가져다주는 자라가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뭐 당연하지요.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서로 세워주고 위로하고 힘을 주고 유익을 줄때에 우리 모두가 함께 복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내 식구나 남의 식구나 할 것없이 누구라도 걸려서 넘어지게 하고,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는 자가 아니라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복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의무이고 그게 우리가 서로 행복한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 반대로 행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오직 자기 영광을 위하여 남을 넘어뜨리고라도 자신의 유익을 취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기치고 도적질하고 싸우고 때리고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남에게 상처와 고통과 아픔을 줄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이런 모습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헐뜯고 싸우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입니까? 이건 우선은 교인들을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일입니다. 나아가서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막는 행위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결코 이런 우를 범하지 말고 서로 정말 사랑하고 용납해야 합니다.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것들이 사랑과 진리와 의 안에서 이루어지게 해야 합니다. 어떤 삶의 자리에 있든 자신이 있는 삶의 현장에서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정직하고 모범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갈등과 시기와 질투와 아픔을 주는 자가 아니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이 사회를 아름답게 세워가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며 우리들도 생명의 은혜가 가득한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꼭 이런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영혼구원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남을 유익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남을 가장 유익하게 하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머니가 아니라 복음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유익한 것입니까? 물론 생명이지 않습니까? 온 천하를 얻어도 생명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니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으며 이보다 기쁨과 유익과 은혜를 주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33절 다시 보십시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어찌하든지 남을 유익하게 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여 구원의 길로 이끌라는 말씀입니다. 즉 남에게 유익을 주는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고, 병든 자를 고쳐주고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만약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물론 먹을 것을 주고, 입혀주고, 병을 고쳐주는 일들은 그것대로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기에 그런 일도 중요하고 당연히 해야할 일이지만 그러나 단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것을 통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남을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에 보다 더 관심과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가운데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에서 누려야 할 영적, 물질적, 정신적, 육체적 은혜도 누리다가 결국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 인생을 전인적으로 영원히 유익하게 하는 일이요, 행복하게 하는 일이요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사순절과 대강절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평소에도 해야할 일이고 또 평소에 사랑과 거룩과 진실과 선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그 선하고 아름답고 의로운 모습을 보면서 주님품으로 오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결정적으로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게 하고 예수님 믿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목적이요 이것이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유익과 기쁨과 은혜를 주는 일이요. 이것이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해드리는 길이요, 이것이 우리가 생명의 은총을 가장 풍성하게 누리는 길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공부하고 일하고 힘쓰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시기 바랍니다. 남을 기쁘게 하고, 남의 유익을 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열심히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며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려 드리는 가운데 여러분도 더욱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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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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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예배설교

제목 : 사랑의 십자가

말씀 : 마27:38-44


1.우리의 저주를 대신한 주님의 십자가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사실은 저주의 상징입니다. 끔찍한 고난의 상징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저주받은 십자가가 교회의 상징이 되었습니까? 말할나위없이 우리의 저주를 대신한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지옥의 저주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고전1:18에서는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 즉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시는 것만이 우리를 모든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건져주는 유일한 능력이요 힘이요 지혜라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무슨 다른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다른 방법이 있다면 예수님인들 왜 십자가를 지고 싶으셨겠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셨기에 그 저주받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다른 무슨 방법으로 인류의 죄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돈으로 할까요? 지식으로 할까요? 과학으로 할까요? 윤리도덕으로 할까요? 다른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오직 죄없고 흠 없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만 죄를 용서 받을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모릅니다. 아니 자신들이 죄가운데 있다는 사실 조차 모릅니다. 다 자기가 잘나고 똑똑하다고 옳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죄와 무지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새까맣게 모르고 천국이 있네 없네, 아무거나 믿으면 좋은 데 가네 마네하며 떠듭니다. 누구 맘대로 그럽니까? 참 안타깝고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그러니 반대로 이 놀라운 생명의 비밀을 알고 믿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된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다행이고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정말 나같은 죄인을 위하여 그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주신 주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고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며 겸손히 동행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주님의 영광 나타내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이 놀라운 은총을 입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2.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은 우리는 죽을 때까지 감사하고 영광돌리고 찬양해야 하는 것을 말할 것도 없고 동시에 죄를 미워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놈의 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까? 그 놈의 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아픔과 상처를 받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 놈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참혹한 죽음을 당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죄를 가까이 할 수 있습니까? 얼마나 죄를 혐오하고 멀리해야 되겠습니까? 정말 그렇잖아요? 그 놈의 죄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지옥가게 되고 지금 여기서도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받게 되고 그래서 주님이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 받으시려고 그 끔찍하고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 흉악하기 짝이 없는 죄를 가까이 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닌지 하면서 좀 걱정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끔찍한 죽음을 당하심으로 생명을 얻었는지를 망각하고 마치 구원이 거저 얻어진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지 못하니까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죄에 대하여 무감각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거저 얻어진 것은 귀한 줄을 모릅니다. 귀한 줄을 모르면 감사할 줄도 모르고 또 가치 없이 막 써버립니다. 그래서 부자집 자녀들은 돈 귀한 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르고 흔전만전 써버리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우리가 얻은 이 영원한 생명이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주어진 것인지를 알면 절대로 우리가 얻은 구원을 조금이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거나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여 죄를 가까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짜 안 그래요? 여러분, 여러분은 온갖 썩은 냄새와 똥냄새가 풀풀나고 구더기가 들끓는 그런 더럽고 추하고 혐오스러운 곳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또는 사자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리며 대드는데 그곳으로 가까이 가겠습니까?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도망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죄는 이보다 더 더럽고 악하고 사납고 흉악한 것인데 어찌 그것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그래서 약4:8절에서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사순절 특별히 오늘 고난 주일을 맞이하여 먼저 그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주님께 정말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며 동시에 정말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고 오직 주님을 가까이 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한 은혜가 넘쳐나는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은총을 기억할 때에 우리가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기 위하여 온갖 저주와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고난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주님이 그토록 원하셨던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 온갖 저주와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고난과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 사실을 몰랐으면 몰라도 죄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그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주님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당하셨는지, 그리고 처절한 고통을 통해서 주신 생명이 얼마나 고귀한 줄 안다면 우리가 어찌 생명의 역사를 위한 일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너무나 끔찍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로마의 병정들이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는 채찍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넘어지고 쓰러지면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셔서 십자가에 손과 발에 대못이 박혀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런 육체적 고난 뿐 아니라 주님은 온갖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당했습니다. ①로마 병정들은 사정없이 때린 후에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히고, 침을 뱉으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하면서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②유대종교지도자들은 눈을 가리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뺨을 치며 너를 친 자가 누구인지 알아맞혀 보라면서 조롱했습니다. ③불과 며칠전만 해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환호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④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있을 때는 지나가는 사람들은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⑤심지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는 강도들도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며 모욕했습니다. 이런 참혹하고 끔찍하고 처절한 고통을 통하여 우리 죄가 용서되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 놀라운 은혜를 입은 우리는 백번 천번 만번 죽어도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하지 않습니까? 또 그냥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면서 그 은혜만을 누리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래서 주님이 그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얼마나 처절한 고통을 당하신 것을 안다면 어찌 그냥 편히 앉아 은혜만 누리고 있을 수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16:24절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정말 백번 죽고 또 죽어도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도 주님의 그 거룩한 생명의 역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게 주님의 은혜를 덧입은 자의 마땅한 의무이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일이고 우리 자신이 더욱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길입니다.

물론 주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마귀사탄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죄와 무지 가운데서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이기주의와 인본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라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참여하려면 이러한 모든 마귀사탄의 역사와 세상의 물결을 거슬러 올러가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며 육신의 안일함과 평안함과 즐거움만을 향하여 가던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세와 세상 즐거움보다는 선과 진리와 의를 따르며 주님의 거룩한 역사를 위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과 정열을 받쳐야 합니다. 열심히 모여 깨어 기도하고 말씀 묵상함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을 베풀어야 하고 전도도 해야 하고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역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생명의 은총을 덧입은 자들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복되고 고귀하고 영화로운 삶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살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자신도 정말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된 기쁨과 은혜와 가치를 누리며 살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정말 복되고 아름답고 고귀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또 오늘 성찬식을 행하면서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며 주님이 당하신 그 처절한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며 주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려드리시기 바랍니다. 정말 죄를 멀리하고 오직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며 우리 각자에게 주신 십자가를 기쁨으로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위에 생명의 역사를 아름답게 이루어가며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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