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개신교 전래의 준비(1832 - 1884)
상업과 정치적이 목적으로 조선과 연관을 맺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네덜란드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입국한 칼 귀츨라프 선교사, 런던 선교회 소속 로버트 토마스, 그리고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은 선교를 목적으로 입국하거나 한국선교를 측면에서 지원한 이들이었다.
독일에서 발흥한 경건주의 운동의 저변 확대, 요한 웨스리 형제의 조지휫필드를 통한 영국의 부흥운동, 그리고 1740년대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도은 교회의 영적인 생명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고, 이와 같은 영적인 생명력은 선교열을 가속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고 귀츨라프, 토마스, 그리고 윌리엄슨의 한국선교의 준비 역시 그와 맥을 같이한다.
1832년 7월 통역인, 의사 및 선교를 위해 로드암허스트호를 타고 충청도의 홍주 고대도시에 정박한 귀츠라프는 선교 목적으로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다. 따라서 그의 입국은 비록 직접적인 결실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선교를 목적으로 한 순수한 입국이었다. 또한 1866년 대동강에서 순교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와 그를 배후에서 지원하면서 한국선교의 장을 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알렉산더 윌리엄슨 선교사 모두 한국개신교 선교의 문호를 여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들이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는 외구과의 개항의 문제가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줄기차게 지기되었다. 문호개방은 단순히 조선이 외국과 수교를 시작했다는 의미 그 이상이었다. 외국과의 개항 문제를 두고 우리나라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안 미국에서는 해외 선교열이 고조되고 있었고, 이미 일본과 청나라에 입국해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 특히 미국 선교사들은 조선선교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조선선교는 알렌의 입국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미 그 전에 존 로스 선교사를 통해 성경이 번역되고, 그를 통해 복음을 접한 한국인들이 매서인이 되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은 한국인들 사이에 조용히 저변 확대되고 있었다. 되돌아보면 한국선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복음을 전하기에 좋은 토양이 조성되었고, 따라서 복음을 수용할 준비가 이루어진 적기에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에서 강화도 조약과 그후의 정치적 대립, 개항의 문제를 두고 전개되는 영미의 해외선교운동, 존 로스와 맥킨타이아, 그리고 의주 청년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만주에서의 복음의 준비, 이수정을 통한 일본에서의 선교 준비는 한국개신교 선교의 장을 여는 직간접적인 전기가 되었고, 국내선교를 저변 확대시키는 중요한 정치적, 종교적 토양을 제공해 주었다.
주변국에서는 한국선교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문호개방이 진행되고 있었다. 강화도조약 후 정치, 경제적인 일본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라도 문호개방은 이제 피할 수 없었다. 강화도조약에 따라 1880년 원산항을 개항하고 3년 후인 1883년에는 제물포항을 개항하였고, 이들 항구를 통해 자행되는 일본 경제의 국내 침투에 대해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일본인들의 독자적인 무역으로 인한 국내 시장의 잠식, 일본인들의 경제적인 수탈, 일본 화폐의 유통으로 인한 국내 화폐의 통화장애, 점점 더 강화되는 일본의 정치, 경제적인 개입에 대해 더 이상 좌시만 할 수 없다는 여론이 여기저기서 제기되었다.
차제에 열국과의 과감한 개항을 통해 그들이 힘을 빌려 일본의 세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정서가 일부 정부 지도자들 사이에 강하게 일고 있었다. 개항을 반대하던 이들도 일본의 정치, 경제적인 개입이 강화되자 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은 원하든 원치 않든 서양열국에 문호를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서양에의 문호개방은 곧 서양 문물과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한국선교는 개항, 특히 조미수호조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