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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기도를 통한 동행  (A powerful prayer)

 

 


강력한 기도의 사람이 강력한


영적 능력의 사람이 된다.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는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삶은 그 전체가 기도의 삶이었다.


그는 밤낮으로 기도했다.


홀로 외롭게 말을 타고 끝이 안 보이는 숲을 지나면서도


기도했다.


짚으로 만든 침대에서도 기도했다.


울창한 숲속으로 돌아 와서도 외롭게 혼자 기도했다.


날마다, 매 시간마다, 이른 아침에도, 밤늦도록 그는 기도하고


금식하고 중보기도를 드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의 영혼을 하나님께 쏟아 놓았다.


그는 강력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은 강한 팔로 그를 붙잡고 그와 동행 하셨다.


이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육신은 죽었으나


여전히 살아서 말하고 일한다.


세상 끝날까지 말하고 일할것이며, 저 영광의 날에


가장 영광스런 자들 중 하나로 인정 될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기도의 강력 /이 엠 바운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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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 바로 이해하기

 

아무리 성경박사라 하더라도 기독교 교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으면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이신칭의 교리가 한국교회의 윤리의식을 저하시켰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이론상 그럴듯 해 보이지만 적어도 역사적으로 검증될 수 없다.

 

1. 개인적인 경험에서 판단해 보면 한국교회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제대로 가르친 적이 없다. 사실, 한국교회는 교리 자체에 대해서 무관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정적 칭의(forensic justification), 이중적 전가(imputation), 도구적 원인으로서의 믿음, 구원에 이르는 믿음, 칭의와 선행의 관계, 능동적 의와 수동적 의의 구분 등.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2. 이신칭의의 교리를 가장 강조했던 시절에 교회는 윤리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에 있었던 경우가 많다. 존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 등. 따라서 칭의 교리가 신자의 윤리를 오히려 강화시킬 수 있다.참고로 종교개혁은 선행이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거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논란의 핵심은 선행이 어떤 점에서 구원에 필수적이냐는 것이다.)

 

3. 교리의 내용과 교리의 사용을 구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옳은 교리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잘못 사용될 수 있다.어머니 손에 있는 칼은 음식을 만들지만, 살인자의 손에 있는 칼은 사람을 죽인다.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인 예라로 할 수 있다. 칭의 교리를 통해서 자신의 윤리적 나태를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다.

 

4. 칭의 교리가 틀렸다고 치자. 그리고 행위가 구원을 얻는데 믿음과 더불어 어떤 원인이 된다고 천주교식으로 가르쳐 보자. 그렇게 가르치면 신자들의 윤리의식이 올라갈까? 선행은 믿음의 결과이자 감사의 표시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식이라고 가르치면 윤리의식이 저하되는가?

 

5. 심지어 이방인들과 같이 믿음이 아니라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면 윤리의식이 더 올라갈까? 문제는 무엇인가? 선행을 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통해서 선행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하는데,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6.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선을 행할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가? 믿음을 통해서 온다. 다른 방법이 있는가? 그렇다면 선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 더 나아가 믿음으로 행한 행위가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확신이 어디에서 오는가? 아무리 우리가 지극한 정성으로 선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우리의 죄로 오염되어 있을 뿐이다. , 아무리 우리 눈에 선한 행위로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죄일 뿐이다.

 

7.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는 무엇인가? 놀랍게도 칭의의 은혜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분명히 가르치듯이 우리의 보잘 것 없는 행위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안에서 보시기 때문에 우리는 선행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보면, 칭의는 선행을 불필요하게 하기 보다는 그와 정반대로 선행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만든다.

 

8. 한국교회의 윤리의식의 저하는 칭의 교리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와 정반대로 칭의교리를 전혀 혹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9. 결론: 열심히 교리를 제대로 공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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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개신교 전래의 준비(1832 - 1884)

 

상업과 정치적이 목적으로 조선과 연관을 맺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네덜란드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입국한 칼 귀츨라프 선교사, 런던 선교회 소속 로버트 토마스, 그리고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은 선교를 목적으로 입국하거나 한국선교를 측면에서 지원한 이들이었다.

 

독일에서 발흥한 경건주의 운동의 저변 확대, 요한 웨스리 형제의 조지휫필드를 통한 영국의 부흥운동, 그리고 1740년대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도은 교회의 영적인 생명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고, 이와 같은 영적인 생명력은 선교열을 가속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고 귀츨라프, 토마스, 그리고 윌리엄슨의 한국선교의 준비 역시 그와 맥을 같이한다.

1832년 7월 통역인, 의사 및 선교를 위해 로드암허스트호를 타고 충청도의 홍주 고대도시에 정박한 귀츠라프는 선교 목적으로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다. 따라서 그의 입국은 비록 직접적인 결실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선교를 목적으로 한 순수한 입국이었다. 또한 1866년 대동강에서 순교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와 그를 배후에서 지원하면서 한국선교의 장을 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알렉산더 윌리엄슨 선교사 모두 한국개신교 선교의 문호를 여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들이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는 외구과의 개항의 문제가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줄기차게 지기되었다. 문호개방은 단순히 조선이 외국과 수교를 시작했다는 의미 그 이상이었다. 외국과의 개항 문제를 두고 우리나라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안 미국에서는 해외 선교열이 고조되고 있었고, 이미 일본과 청나라에 입국해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 특히 미국 선교사들은 조선선교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조선선교는 알렌의 입국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미 그 전에 존 로스 선교사를 통해 성경이 번역되고, 그를 통해 복음을 접한 한국인들이 매서인이 되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면서 복음은 한국인들 사이에 조용히 저변 확대되고 있었다. 되돌아보면 한국선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복음을 전하기에 좋은 토양이 조성되었고, 따라서 복음을 수용할 준비가 이루어진 적기에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에서 강화도 조약과 그후의 정치적 대립, 개항의 문제를 두고 전개되는 영미의 해외선교운동, 존 로스와 맥킨타이아, 그리고 의주 청년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만주에서의 복음의 준비, 이수정을 통한 일본에서의 선교 준비는 한국개신교 선교의 장을 여는 직간접적인 전기가 되었고, 국내선교를 저변 확대시키는 중요한 정치적, 종교적 토양을 제공해 주었다.

 

주변국에서는 한국선교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문호개방이 진행되고 있었다. 강화도조약 후 정치, 경제적인 일본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라도 문호개방은 이제 피할 수 없었다. 강화도조약에 따라 1880년 원산항을 개항하고 3년 후인 1883년에는 제물포항을 개항하였고, 이들 항구를 통해 자행되는 일본 경제의 국내 침투에 대해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일본인들의 독자적인 무역으로 인한 국내 시장의 잠식, 일본인들의 경제적인 수탈, 일본 화폐의 유통으로 인한 국내 화폐의 통화장애, 점점 더 강화되는 일본의 정치, 경제적인 개입에 대해 더 이상 좌시만 할 수 없다는 여론이 여기저기서 제기되었다.

 

차제에 열국과의 과감한 개항을 통해 그들이 힘을 빌려 일본의 세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정서가 일부 정부 지도자들 사이에 강하게 일고 있었다. 개항을 반대하던 이들도 일본의 정치, 경제적인 개입이 강화되자 이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은 원하든 원치 않든 서양열국에 문호를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서양에의 문호개방은 곧 서양 문물과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한국선교는 개항, 특히 조미수호조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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