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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예배 대표 기도문

 

 


은혜가 풍성하시니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어서
부활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며 이 시간 경배와
찬양을 올리오니 영광 받으시옵소서.
오늘 부활절 예배를 통하여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참된 소망을 주시고
교회를 굳게 세우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찾으며 다니는데,
이들은 죽음의 세력을 쥐고 인생을 위협하며 우리들을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께서 십자가과 부활을 통하여
이미 사탄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으므로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믿음으로 사탄의 세력을 능히 이길 줄 믿습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부활의 진리를 분명히 깨닫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불의한 세상에 대하여 정의와 진리의 말씀을 힘차게
외치셨던 것 같이 우리들도 지금 이 땅위에서 부활의 담대한 신앙으로
무장하여 주님의 복음을 분명히 전하면서 사탄의 역사를 물리치고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게 하옵소서
 
이 시간에도 죽음과 질병과 공포와 절망으로 살아가는 심령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불쌍한 이들의 심령들에게 부활의 주님께서
찾아가 위로하여 주시며 그 모든 악한세력들을 깨뜨려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들이 부활의 주님을 체험하여 모두 예수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위에 세워주신 각 기관과 모든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주
님께서 함께 하셔서 부활의 산 신앙을 가지고 잘 감당할 수 있게
하시옵고 겸손히 봉사할 수 있게 하옵소서.
이 시간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살아있는
예배가 되어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말씀을 대언하실 목사님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셔서 살아있는
능력의 말씀으로 우리가 큰 은혜 받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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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운 설교,기도,찬양이 있는 곳 (선교사를 교육하고 후원하는 선교사 언어 교육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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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기예배 ]  부활주일예배  

 
 


 나는 왜 예수부활을 믿는가?
 
 
부활 신앙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1. 나는 부활에 대한 역설적(逆說的) 증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1)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을 맹목적(盲目的)으로 믿지 않았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맹목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의심하고, 충분히 불신하고, 충분히 거리를 두고 예수의 부활을 검토한 뒤에 믿기 시작한 것이다. 사기꾼들은 처음부터 믿음을 주려고 노력한다. 성경은 제자들의 믿음을 그렇게 과장하거나 포장하지 않는다.

  첫 번째 부활의 날 아침 신문 속보에 실린 1면 기사는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아다닌 사람들 이야기’가 정작 부활하신 주님보다 더 많이 다루어졌다. 부활 아침에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았으나 부활하신 예수를 찾지는 않았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막 16:6).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고 와서 제자들에게 이야기 했을 때 마가복음 16:11은 이렇게 반응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듣고도 믿지 않았다. 누가복음 24:11은 좀 더 강하게 묘사한다.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눅 24:11). 심지어 마태복음 28:17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신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말씀을 하실 때의 반응도 보여 준다.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을 책망하셨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제자들은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 이야기나 덥석 믿어버리는 맹목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어리석은 촌뜨기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부활에 목숨을 건 제자들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도 나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4).  

 

2)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신앙을 날조(捏造)하지 않았다.

  ‘날조’란 없는 일을 있는 일처럼 조작하는 것이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완전히 날조하여 퍼트리려고 작정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부처 실패했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은 모습은 마치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검찰이 론스타 회사의 불법을 조사하기 위해 700상자 분량의 서류를 검토한 적이 있다. 불법을 저지르려면 철저하게 잘못을 감춰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위해서 어떤 안전장치도 만들어 놓지 않았다. 부활 사건을 보호하려는 어떤 인간적인 시도도 하지 않았다. 부활을 음모하려면 모든 제자들이 모여서 입을 맞추고, 모든 사건 순서와 모든 내용을 똑같이 증언해야 하며, 부활에 대한 대단한 확신도 보여주어야 하고, 부활에 대한 모든 증언이 일치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성경은 지난 수천 년 동안에 오류를 바로 잡을 기회가 있었으나 한 번도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없다. 왜? 부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부활 사건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꾸밀 필요가 없다. 예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류나 인간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사건이 오류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도 잡혀가 죽을 까봐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부활신앙을 믿는 사람들 같지 않았다.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 같았다. 얼마나 겁이 났던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 주변에는 요한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다 달아났던 제자들이다.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장례를 치른 것은 의외의 인물들이다. 예수 믿는 신앙을 감춰왔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나서서 예수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렀다.

 

  이런 정황으로 보건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꾸미거나 부활을 확신하는 척하거나 목숨을 걸고 군인들이 지키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보기엔 너무 무리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예수 믿는 신앙을 후회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끝이 났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문을 듣고 오히려 마음이 상했다. 그들은 마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가는 실패한 사업가와 같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황우석 박사의 추종자들만도 못했다. 목숨을 건 제자도 없고, 나서서 데모하는 제자도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위하여 어떤 인위적인 시도조차도 할 수 없었을 만큼 부활을 믿지 않았던 자들이다.

  

3) 예수 부활은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처음으로 증언되었다.

  예수님이 처음 태어나셨을 때 그의 증인은 목동들이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목격하고 전한 사람들은 여성들이었다. 목동이나 여성들은 1세기 유대사회에서 별 볼일 없는 그룹이다. 그들의 증언은 법정에서 증언으로 채택되지도 않는다. 만일 사람들을 믿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좀 더 그럴싸한 증인을 내세워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부활소식을 전하게 하려고 초대교회는 믿을 만한 사람을 뽑아서 사기극(詐欺劇)을 연출할 필요가 없었다. 하찮은 여인들의 증언이야 말로 초대교회가 부활을 날조하지 않았다는 좋은 증거다. 노예해방의 전기를 가져온 엉클 톰의 이야기를 쓴 사람을 만났을 때 링컨은 놀랐다. 이렇게 키도 작은 여성이란 사실에. 부활의 증인은 위대한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사람이면 족한 것이다.

  

  4) 예수 부활 사건 기록은 수정되거나 보완되지 않았다.

  만일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음모나 날조로 부활이야기가 생겼다면 시간이 흘러 부활 이야기는 좀 더 완벽한 시나리오로 고쳐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교회 한만오 목사님이 미국에서 논문 초고를 제출하면서 지도교수에게 물었다. “이 논문이 지금 어느 정도 평가를 받겠습니까?” 슈미트 박사는 말하기를 “이 논문은 B급이라”고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한만오 목사님이 실망하여 내게 전화를 했다. “목사님, 어떡하면 좋지요? 내 논문이 B밖에 안 된데요.”

  내가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격려해 드렸다. “목사님, 논문 초고(first draft)를 내면서 B라면 아주 잘한 겁니다. 논문 수정을 한 번 거치면 B가 B+이 되고, 두 번 거치면 B+이 A-가 되는 겁니다.  졸업할 때까지 논문 방어를 하고 나서 한 번 더 수정하면  A-가 A가 됩니다. 틀림없이 A 받으실 겁니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부활 점수를 A로 받기 위해 박사 논문을 수정하듯 손대지 않았다. 수정할 필요도 없다. 성경은 누구의 변호도 필요치 않는다.

 

  데이빗 스티브스는 1957년 공군 중위로 공군 훈련 제트기를 타고 훈련받다가 비행기가 추락, 실종 된지 54일 만에 캘리포니아 주 시에라 산중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이미 시종 사망 처리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스티브스가 말하는 것처럼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를 찾지 못해 사건 조작 혐의로 강제 전역 당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뒤에 그 비행기 잔해가 캠프 하던 보이스카우트 소년들에게 발견되어 20년 만에 그의 이야기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왜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라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마치 부활이 조작이라고 말하도록 만들게 되지 않을까? 그의 청중을 위해 예수님이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나타나셨다고 수정하고 싶지 않은가?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왜 실망하여 예루살렘을 떠나려했고, 그들은 예수님이 대화에 끼어들어 한 동안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알아채지 못했을까? 뭔가 부족한 듯 보이는 이 이야기를 좀 더 완벽하게 수정하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성경은 예수의 부활 이야기를 도무지 변증하거나 잘 보이려고 애쓰거나, 보다 완벽한 구성을 해서 제공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부활 사건을 경험했던 충격 그대로 우리에게 기록하여 전해준다. 나는 부활에 대한 역설적(逆說的) 증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2. 나는 부활의 역사적(歷史的) 사실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프랑스의 한 신문사가 세계의 저명인사 100명에게 ‘지구의 파멸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안전하게 반출해야 할 지구상의 보물이 무엇이냐?’고 설문조사를 했다. 2위는 인간예술의 극치로 평가받는 미로의 비너스상이다. 1위는 무엇일까? 폭 1m, 길이 4m 20cm인 세마포,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하찮은 삼베 수의천이 인류 최고의 보물로 간주되었다. 수년 전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 화재가 일어나 완전히 전소되었을 때 그 역사적 성당 안에 수많은 보물들이 불에 타 한 줌 재가 되어버렸다. 그 당시 가장 큰 관심은 토리노 성당 안에 있던 세마포였다. 화재 신고를 받은 소방대원들은 화염에 휩싸인 성당 안으로 목숨을 걸고 들어가 3층으로 된 방탄유리를 도끼로 찍어 깨트린 뒤 그 세마포가 담긴 상자를 안고 나왔다. 왜 세마포롤 첫 번째 보물로 여기고, 소방관은 자기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면서도 세마포를 가지고 나왔을까?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것을 보라”(마 28:6). 

 무덤은 비었고, 수의는 어떻게 되었는가? 요한복음 20:3-08을 보면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수의는 예수님을 장사지낼 때처럼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향유를 바르고, 미이라를 만들어 놓았던 바로 그 모양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1) 빈 무덤과 빈 수의는 부활의 큰 증거다.

  2) 유대 지도자들은 부활에 관한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3) 유대 종교와 로마의 통치 속에서 기독교가 탄생했다.

  4) 주일을 예배드리는 날로 시작한 것은 부활의 역사적 부산물이다.

 

3. 나는 부활 신앙을 인해 변화된 사람들 때문에 예수부활을 믿는다.

 

  의심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믿으라고 하면 쉽게 믿어지겠는가? 믿기 어려워서, 믿을 수 없어서 고민한 사람들이 많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누가 돌을 치웠는가??(Who Moved the Stone?)이라는 책을 쓴 영국의 저널리스트 프랭크 모리슨이다. 모리슨의 의도는 부활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려던 것이었는데 쓰다 보니 결론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영국의 두 젊은 무신론 변호사 길버트 웨스트(Gilbert West)와 리틀톤(Lyttleton)은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기독교를 무너뜨릴 궁리를 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사울의 회심 이야기가 역사성(歷史性)이 결여되었다는 사실을 입증만 하면 기독교는 모래성처럼 허물이 지게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길버트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리틀톤은 사울의 회심에 대한 책을 각각 쓰기로 했다. 성경을 포함한 많은 책을 읽고 연구를 하던 중 얼마 후에 그들은 다시 만났다.

  그들의 결론은 놀라웠다. 아무리 보아도 예수는 부활하셨고, 사울은 다메섹에서 회심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조사하고 연구한 책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과「사울의 회심」(The Conversion of St. Paul)이다. ?벤허?라는 영화의 원작을 쓰기 전까지 월러스(Wallace)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예수를 믿는 것을 우습게 여겼던 작가이다. 그의 친구의 말을 믿고 있었다. “기독교는 얼마 후에 이 세상에서 존재를 감추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월러스가 소설을 쓰기 위해 성경을 읽고, 역사적인 자료들을 검토하면서 영화 속의 불신자 벤허처럼 그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앞에 무릎을 꿇어다. 영화 속의 벤허는 복수심에 불타 칼과 창으로 민족을 해방시키겠다는 사람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자 그는 딴 사람이 된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자 그는 딴 사람이 되었다.  

 


   1) 부활을 받아들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다.

  숨어있기에 급급했던 이 제자들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면서, 부활하신 예수를 40일 동안 11번 넘게 만나면서, 순교도 마다않는 겁 없는 전도자들로 변했다. 그들의 변화를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사라진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공포가 사라진다.  

 

  2) 예수의 육신적인 형제며 불신자인 야고보의 변화도 부활의 증거다.

  야고는 부활 사건 전까지는 예수의 주님 되심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부활 사건은 그의 형을 그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진다.

 

  3) 의심 많은 제자 도마의 변화도 부활의 증거다. 

  요한복음 20:25을 보면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던 제자이다. 도마에게 감사하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의심해 준 것, 우리가 거쳐야 했을 고민을 그가 먼저 해 준 것을 감사하자. 요한복음에서 가장 감격적인 신앙 고백은 도마의 입술에서 나왔다. 그는 먼저 회의론자, 의심 많은 자로서 고통스런 시간을 먼저 보냈다.  그런 뒤에 이런 위대한 고백을 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 20:28).

 

  4)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울은 부활의 증인으로 변했다.

  사울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던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 교회들을 핍박하고 잡아 가두는데 힘썼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를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만난다. 그것은 사울에게 엄청난 충격이자 사건이었다. 그는 3일 간을 금식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 그리고 나서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그는 왕 앞에서도 부활을 증거 했고, 이방인들 앞에서도 부활을 증거 했다. 그의 변화는 마치 아인슈타인이 예수를 믿은 것보다 더 큰 사건이다. 위대한 과학자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노후에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 이런 유명한 고백을 남겼다.

 

“나는 평소에, 특별히 젊었을 때 교회를 경멸했습니다. 교회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내 조국 독일이 어두워 졌을 때, 그리고 나치의 핍박 아래 있었을 때 내가 경멸하고 무시했던 교회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었고 사람들의 안식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 노후에 인생의 석양녘에 나는 교회 이외에 내 영혼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제 교회로 다시 돌아옵니다. 내 영혼의 안식처인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진짜 똑똑한 사람들이 예수도 잘 믿는다. 나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이유와 근거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 소크라테스는 하나님을 믿었다. 갈릴레오, 베이컨(Bacon), 과학자 아이삭 뉴톤 경(Sir Isaac Newton), 파스테르(Pasteur) 같은 뛰어난 과학자, 철학자, 사상가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들이 바보라서 믿었을까? 아니다.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에 대한 해답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우리들의 삶과 죽음에 의미를 주시기에 그 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죄의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기에 삶을 의탁하는 것이다. 이별의 아픔에서, 무덤의 그림자에서, 죽음의 공포에서, 예수님만이 구원하시며 희망이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아멘.

  예수님만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부활의 보증이시다.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에 충분하신 분이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주이시다.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과 부활에 관한 희망을 주신다.

 

4. 나는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 때문에 예수 부활을 믿는다.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못 자국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요 20:20). 왜 우리를 향한 대속(代贖)의 상처는 낫지 않았을까? 사라지지 않은 채 주님 몸에 남아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상처에서 희망(希望)을 본다. 그 상처는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을 이어주는 중요한 표시이다. 구원과 구원의 보증(保證)의 표시이다. 상처가 준 고통은 사라졌지만 상처의 흔적은 남아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1) 나를 위해 어떤 사랑의 희생(犧牲)도 치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나를 구원할 능력이 충분(充分)함을 보여준다.

  3) 나의 죄 사함과 구원이 영원(永遠)함을 확증한다.

 

  언젠가 주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며 그 손에 난 상처를 보실 것이다. 부활신앙이란 우리가 흘린 눈물, 우리가 당한 비극,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치른 모든 희생을 주님이 기억하여 주시는 것이다. 예수 몸에 난 상처가 그렇듯이 나와 여러분의 마음과 몸에 난 상처는 새로운 몸을 입어도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은 주님에게 증거가 된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증거가 된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나는 어머니의 굵게 파인 주름살을 기억한다. 나는 어머니의 거치러진 손의 느낌이 가슴에 남아있다. 나는 그 손을 만져보고 싶고, 그 주름진 얼굴이 보고 싶은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인도에 썬다씽이라는 유명한 성자가 있다. 그거 어느 해 영국을 방문해서 국회에서 연설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의 강연을 경청하였다. 참석자 중의 유명한 교수 한 사람이 질문을 했다. “당신은 뿌리 깊은 힌두교의 유명한 학자이고 철저한 힌두교인인데 어떻게 해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까?”

  썬다씽은 이렇게 대답했다.

 “예수 부활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이 있다. 힌두교나 불교는 인생무상이다. 그러나 기독교만이 생명을 준다.  주님께 감사하자. 의심 많은 내게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다가오신다.  주님께 감사하자. 의심의 돌을 굴려버리시고 죽음에서 일어나셨다. 주님께 감사하자. 슬픔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우리들 때문에 다시 무덤까지 찾아주시기 때문이다.  주님께 감사하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실망의 길을 걷는 우리들을 따라오신다.  주님께 감사하자. 종종 낯선 사람의 모습으로, 낯선 방법으로, 낯선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신다. 기뻐하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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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기예배 ] 부활주일예배 예수부활 

 
 

 


 나는 왜 예수부활을 믿는가?
 
 
부활 신앙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1. 나는 부활에 대한 역설적(逆說的) 증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1)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을 맹목적(盲目的)으로 믿지 않았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맹목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의심하고, 충분히 불신하고, 충분히 거리를 두고 예수의 부활을 검토한 뒤에 믿기 시작한 것이다. 사기꾼들은 처음부터 믿음을 주려고 노력한다. 성경은 제자들의 믿음을 그렇게 과장하거나 포장하지 않는다.

  첫 번째 부활의 날 아침 신문 속보에 실린 1면 기사는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아다닌 사람들 이야기’가 정작 부활하신 주님보다 더 많이 다루어졌다. 부활 아침에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았으나 부활하신 예수를 찾지는 않았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막 16:6).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고 와서 제자들에게 이야기 했을 때 마가복음 16:11은 이렇게 반응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듣고도 믿지 않았다. 누가복음 24:11은 좀 더 강하게 묘사한다.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눅 24:11). 심지어 마태복음 28:17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신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말씀을 하실 때의 반응도 보여 준다.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을 책망하셨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제자들은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 이야기나 덥석 믿어버리는 맹목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어리석은 촌뜨기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부활에 목숨을 건 제자들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도 나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4).  

 

2)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신앙을 날조(捏造)하지 않았다.

  ‘날조’란 없는 일을 있는 일처럼 조작하는 것이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완전히 날조하여 퍼트리려고 작정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부처 실패했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은 모습은 마치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검찰이 론스타 회사의 불법을 조사하기 위해 700상자 분량의 서류를 검토한 적이 있다. 불법을 저지르려면 철저하게 잘못을 감춰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위해서 어떤 안전장치도 만들어 놓지 않았다. 부활 사건을 보호하려는 어떤 인간적인 시도도 하지 않았다. 부활을 음모하려면 모든 제자들이 모여서 입을 맞추고, 모든 사건 순서와 모든 내용을 똑같이 증언해야 하며, 부활에 대한 대단한 확신도 보여주어야 하고, 부활에 대한 모든 증언이 일치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성경은 지난 수천 년 동안에 오류를 바로 잡을 기회가 있었으나 한 번도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없다. 왜? 부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부활 사건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꾸밀 필요가 없다. 예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류나 인간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사건이 오류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도 잡혀가 죽을 까봐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부활신앙을 믿는 사람들 같지 않았다.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 같았다. 얼마나 겁이 났던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 주변에는 요한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다 달아났던 제자들이다.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장례를 치른 것은 의외의 인물들이다. 예수 믿는 신앙을 감춰왔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나서서 예수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렀다.

 

  이런 정황으로 보건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꾸미거나 부활을 확신하는 척하거나 목숨을 걸고 군인들이 지키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보기엔 너무 무리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예수 믿는 신앙을 후회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끝이 났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문을 듣고 오히려 마음이 상했다. 그들은 마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가는 실패한 사업가와 같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황우석 박사의 추종자들만도 못했다. 목숨을 건 제자도 없고, 나서서 데모하는 제자도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위하여 어떤 인위적인 시도조차도 할 수 없었을 만큼 부활을 믿지 않았던 자들이다.

  

3) 예수 부활은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처음으로 증언되었다.

  예수님이 처음 태어나셨을 때 그의 증인은 목동들이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목격하고 전한 사람들은 여성들이었다. 목동이나 여성들은 1세기 유대사회에서 별 볼일 없는 그룹이다. 그들의 증언은 법정에서 증언으로 채택되지도 않는다. 만일 사람들을 믿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좀 더 그럴싸한 증인을 내세워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부활소식을 전하게 하려고 초대교회는 믿을 만한 사람을 뽑아서 사기극(詐欺劇)을 연출할 필요가 없었다. 하찮은 여인들의 증언이야 말로 초대교회가 부활을 날조하지 않았다는 좋은 증거다. 노예해방의 전기를 가져온 엉클 톰의 이야기를 쓴 사람을 만났을 때 링컨은 놀랐다. 이렇게 키도 작은 여성이란 사실에. 부활의 증인은 위대한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사람이면 족한 것이다.

  

  4) 예수 부활 사건 기록은 수정되거나 보완되지 않았다.

  만일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음모나 날조로 부활이야기가 생겼다면 시간이 흘러 부활 이야기는 좀 더 완벽한 시나리오로 고쳐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교회 한만오 목사님이 미국에서 논문 초고를 제출하면서 지도교수에게 물었다. “이 논문이 지금 어느 정도 평가를 받겠습니까?” 슈미트 박사는 말하기를 “이 논문은 B급이라”고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한만오 목사님이 실망하여 내게 전화를 했다. “목사님, 어떡하면 좋지요? 내 논문이 B밖에 안 된데요.”

  내가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격려해 드렸다. “목사님, 논문 초고(first draft)를 내면서 B라면 아주 잘한 겁니다. 논문 수정을 한 번 거치면 B가 B+이 되고, 두 번 거치면 B+이 A-가 되는 겁니다.  졸업할 때까지 논문 방어를 하고 나서 한 번 더 수정하면  A-가 A가 됩니다. 틀림없이 A 받으실 겁니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부활 점수를 A로 받기 위해 박사 논문을 수정하듯 손대지 않았다. 수정할 필요도 없다. 성경은 누구의 변호도 필요치 않는다.

 

  데이빗 스티브스는 1957년 공군 중위로 공군 훈련 제트기를 타고 훈련받다가 비행기가 추락, 실종 된지 54일 만에 캘리포니아 주 시에라 산중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이미 시종 사망 처리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스티브스가 말하는 것처럼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를 찾지 못해 사건 조작 혐의로 강제 전역 당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뒤에 그 비행기 잔해가 캠프 하던 보이스카우트 소년들에게 발견되어 20년 만에 그의 이야기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왜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라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마치 부활이 조작이라고 말하도록 만들게 되지 않을까? 그의 청중을 위해 예수님이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나타나셨다고 수정하고 싶지 않은가?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왜 실망하여 예루살렘을 떠나려했고, 그들은 예수님이 대화에 끼어들어 한 동안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알아채지 못했을까? 뭔가 부족한 듯 보이는 이 이야기를 좀 더 완벽하게 수정하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성경은 예수의 부활 이야기를 도무지 변증하거나 잘 보이려고 애쓰거나, 보다 완벽한 구성을 해서 제공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부활 사건을 경험했던 충격 그대로 우리에게 기록하여 전해준다. 나는 부활에 대한 역설적(逆說的) 증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2. 나는 부활의 역사적(歷史的) 사실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프랑스의 한 신문사가 세계의 저명인사 100명에게 ‘지구의 파멸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안전하게 반출해야 할 지구상의 보물이 무엇이냐?’고 설문조사를 했다. 2위는 인간예술의 극치로 평가받는 미로의 비너스상이다. 1위는 무엇일까? 폭 1m, 길이 4m 20cm인 세마포,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하찮은 삼베 수의천이 인류 최고의 보물로 간주되었다. 수년 전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 화재가 일어나 완전히 전소되었을 때 그 역사적 성당 안에 수많은 보물들이 불에 타 한 줌 재가 되어버렸다. 그 당시 가장 큰 관심은 토리노 성당 안에 있던 세마포였다. 화재 신고를 받은 소방대원들은 화염에 휩싸인 성당 안으로 목숨을 걸고 들어가 3층으로 된 방탄유리를 도끼로 찍어 깨트린 뒤 그 세마포가 담긴 상자를 안고 나왔다. 왜 세마포롤 첫 번째 보물로 여기고, 소방관은 자기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면서도 세마포를 가지고 나왔을까?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것을 보라”(마 28:6). 

 무덤은 비었고, 수의는 어떻게 되었는가? 요한복음 20:3-08을 보면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수의는 예수님을 장사지낼 때처럼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향유를 바르고, 미이라를 만들어 놓았던 바로 그 모양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1) 빈 무덤과 빈 수의는 부활의 큰 증거다.

  2) 유대 지도자들은 부활에 관한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3) 유대 종교와 로마의 통치 속에서 기독교가 탄생했다.

  4) 주일을 예배드리는 날로 시작한 것은 부활의 역사적 부산물이다.

 

3. 나는 부활 신앙을 인해 변화된 사람들 때문에 예수부활을 믿는다.

 

  의심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믿으라고 하면 쉽게 믿어지겠는가? 믿기 어려워서, 믿을 수 없어서 고민한 사람들이 많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누가 돌을 치웠는가??(Who Moved the Stone?)이라는 책을 쓴 영국의 저널리스트 프랭크 모리슨이다. 모리슨의 의도는 부활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려던 것이었는데 쓰다 보니 결론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영국의 두 젊은 무신론 변호사 길버트 웨스트(Gilbert West)와 리틀톤(Lyttleton)은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기독교를 무너뜨릴 궁리를 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사울의 회심 이야기가 역사성(歷史性)이 결여되었다는 사실을 입증만 하면 기독교는 모래성처럼 허물이 지게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길버트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리틀톤은 사울의 회심에 대한 책을 각각 쓰기로 했다. 성경을 포함한 많은 책을 읽고 연구를 하던 중 얼마 후에 그들은 다시 만났다.

  그들의 결론은 놀라웠다. 아무리 보아도 예수는 부활하셨고, 사울은 다메섹에서 회심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조사하고 연구한 책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과「사울의 회심」(The Conversion of St. Paul)이다. ?벤허?라는 영화의 원작을 쓰기 전까지 월러스(Wallace)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예수를 믿는 것을 우습게 여겼던 작가이다. 그의 친구의 말을 믿고 있었다. “기독교는 얼마 후에 이 세상에서 존재를 감추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월러스가 소설을 쓰기 위해 성경을 읽고, 역사적인 자료들을 검토하면서 영화 속의 불신자 벤허처럼 그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앞에 무릎을 꿇어다. 영화 속의 벤허는 복수심에 불타 칼과 창으로 민족을 해방시키겠다는 사람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자 그는 딴 사람이 된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자 그는 딴 사람이 되었다.  

 


   1) 부활을 받아들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다.

  숨어있기에 급급했던 이 제자들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면서, 부활하신 예수를 40일 동안 11번 넘게 만나면서, 순교도 마다않는 겁 없는 전도자들로 변했다. 그들의 변화를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사라진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공포가 사라진다.  

 

  2) 예수의 육신적인 형제며 불신자인 야고보의 변화도 부활의 증거다.

  야고는 부활 사건 전까지는 예수의 주님 되심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부활 사건은 그의 형을 그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진다.

 

  3) 의심 많은 제자 도마의 변화도 부활의 증거다. 

  요한복음 20:25을 보면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던 제자이다. 도마에게 감사하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의심해 준 것, 우리가 거쳐야 했을 고민을 그가 먼저 해 준 것을 감사하자. 요한복음에서 가장 감격적인 신앙 고백은 도마의 입술에서 나왔다. 그는 먼저 회의론자, 의심 많은 자로서 고통스런 시간을 먼저 보냈다.  그런 뒤에 이런 위대한 고백을 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 20:28).

 

  4)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울은 부활의 증인으로 변했다.

  사울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던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 교회들을 핍박하고 잡아 가두는데 힘썼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를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만난다. 그것은 사울에게 엄청난 충격이자 사건이었다. 그는 3일 간을 금식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 그리고 나서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그는 왕 앞에서도 부활을 증거 했고, 이방인들 앞에서도 부활을 증거 했다. 그의 변화는 마치 아인슈타인이 예수를 믿은 것보다 더 큰 사건이다. 위대한 과학자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노후에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 이런 유명한 고백을 남겼다.

 

“나는 평소에, 특별히 젊었을 때 교회를 경멸했습니다. 교회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내 조국 독일이 어두워 졌을 때, 그리고 나치의 핍박 아래 있었을 때 내가 경멸하고 무시했던 교회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었고 사람들의 안식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 노후에 인생의 석양녘에 나는 교회 이외에 내 영혼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제 교회로 다시 돌아옵니다. 내 영혼의 안식처인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진짜 똑똑한 사람들이 예수도 잘 믿는다. 나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이유와 근거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 소크라테스는 하나님을 믿었다. 갈릴레오, 베이컨(Bacon), 과학자 아이삭 뉴톤 경(Sir Isaac Newton), 파스테르(Pasteur) 같은 뛰어난 과학자, 철학자, 사상가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들이 바보라서 믿었을까? 아니다.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에 대한 해답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우리들의 삶과 죽음에 의미를 주시기에 그 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죄의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기에 삶을 의탁하는 것이다. 이별의 아픔에서, 무덤의 그림자에서, 죽음의 공포에서, 예수님만이 구원하시며 희망이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아멘.

  예수님만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부활의 보증이시다.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에 충분하신 분이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주이시다.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과 부활에 관한 희망을 주신다.

 

4. 나는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 때문에 예수 부활을 믿는다.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못 자국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요 20:20). 왜 우리를 향한 대속(代贖)의 상처는 낫지 않았을까? 사라지지 않은 채 주님 몸에 남아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상처에서 희망(希望)을 본다. 그 상처는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을 이어주는 중요한 표시이다. 구원과 구원의 보증(保證)의 표시이다. 상처가 준 고통은 사라졌지만 상처의 흔적은 남아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1) 나를 위해 어떤 사랑의 희생(犧牲)도 치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나를 구원할 능력이 충분(充分)함을 보여준다.

  3) 나의 죄 사함과 구원이 영원(永遠)함을 확증한다.

 

  언젠가 주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며 그 손에 난 상처를 보실 것이다. 부활신앙이란 우리가 흘린 눈물, 우리가 당한 비극,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치른 모든 희생을 주님이 기억하여 주시는 것이다. 예수 몸에 난 상처가 그렇듯이 나와 여러분의 마음과 몸에 난 상처는 새로운 몸을 입어도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은 주님에게 증거가 된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증거가 된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나는 어머니의 굵게 파인 주름살을 기억한다. 나는 어머니의 거치러진 손의 느낌이 가슴에 남아있다. 나는 그 손을 만져보고 싶고, 그 주름진 얼굴이 보고 싶은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인도에 썬다씽이라는 유명한 성자가 있다. 그거 어느 해 영국을 방문해서 국회에서 연설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의 강연을 경청하였다. 참석자 중의 유명한 교수 한 사람이 질문을 했다. “당신은 뿌리 깊은 힌두교의 유명한 학자이고 철저한 힌두교인인데 어떻게 해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까?”

  썬다씽은 이렇게 대답했다.

 “예수 부활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이 있다. 힌두교나 불교는 인생무상이다. 그러나 기독교만이 생명을 준다.  주님께 감사하자. 의심 많은 내게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다가오신다.  주님께 감사하자. 의심의 돌을 굴려버리시고 죽음에서 일어나셨다. 주님께 감사하자. 슬픔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우리들 때문에 다시 무덤까지 찾아주시기 때문이다.  주님께 감사하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실망의 길을 걷는 우리들을 따라오신다.  주님께 감사하자. 종종 낯선 사람의 모습으로, 낯선 방법으로, 낯선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신다. 기뻐하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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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절기예배] 송구영신예배

 

 

 

 

영적인 눈을 활짝 뜹시다

 

말씀 : 왕하6:14-17

제목 : 영적인 눈을 활짝 뜹시다.

우리 사람의 눈은 세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육안입니다. 말 그대로 육신의 눈입니다. 이 눈은 물질적인 눈이므로 물질을 보는 눈입니다. 자연을 보고, 길을 보고, 사람을 보고, 글씨를 봅니다. 그러므로 이 눈도 밝아야 좋습니다. 육신의 눈이 밝지 못하면 실족하기 쉽고, 아름다운 것을 볼 수가 없고, 글씨도 읽기가 어려우니 불편합니다.

그 다음에는 정신적인 눈입니다. 이 눈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지식의 눈, 윤리적 눈, 문화의 눈, 과학의 눈, 예술의 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역시도 밝아야 좋습니다. 윤리와 도덕에 밝아야 하고, 지식이나 과학이나 예술이나 문화적인 안목도 좋아야 합니다. 그래야 좀더 풍성한 삶을 사는데 유리합니다.

그 다음 마지막 눈이 영적인 눈입니다. 소위 영안이라고도 하고 신령한 눈이라고도 하는 눈입니다. 이 눈은 인간에게만 주신 특별한 눈입니다. 물론 다른 눈들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눈들입니다. 인간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인간의 삶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영적인 눈입니다.

왜냐하면 이 영적인 눈이야말로 그야말로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인 눈이야말로 육적인 눈과 정신적인 눈을 통합하여 인간존재의 전체적인 면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총체적인 안목으로 영과 육과 정신을 통괄하고 모든 환경과 상황과 조건들을 초월하여 엄청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눈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어떤 눈이 인간에게 진정한 생명을 주겠습니까? 육적인 눈입니까? 정신적인 눈입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한 눈도 인간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진정한 생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인간에게 생명을 주고 은혜를 주고 영원한 영광을 보장해주는 것은 영안입니다. 영안이 열려야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진정한 생명의 세계를 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렇게 영적인 눈이 열려 있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었기에 결국은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를 누린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우리도 그렇게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도 영안이 활짝 열려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안된다고 말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았기에,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기억하였기에 된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거인들 앞에 있는 자신들이 메뚜기같다고 말할 때, 그 거인들과 강한 성 때문에 우리는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했을때 갈렙과 여호수아는 오히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기에 우리는 분명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이 보고 말했던 그대로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복지를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말했던 그대로 광야에서 메뚜기같이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빈들에서 배고픈 사람들을 위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약 이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피하여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시금 예수님을 찾아 따라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입니다. 즉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니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 먹고 입을 걱정은 안해도 좋을 것 같아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그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썩지 않는 양식을 주기 위하여 즉 영생을 주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을 모두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못박는 사람들의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육적인 눈을 밝았는지 모르지만, 경제적인 눈은 밝았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정작 중요한 눈인 영적인 눈은 완전히 감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난 군중들 틈에서 빌라도를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를 외쳐댔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영적인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세계가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들려야 합니다. 그러한 인생에게만 희망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한 영적인 눈과 귀가 활짝 열린 사람만이 진정으로 세상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두 종류의 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는 영적인 눈이 활짝 열려있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눈이 활짝 열려져 있는 사람은 선지자 엘리사요, 감겨져 있던 사람은 엘리사 선지자의 종 게하시였습니다.

그때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주변에 있던 아람나라는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침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떤 계획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침공하려고 가기만하면 어떻게 알았든지 귀신같이 나와서 방비를 하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계속하다가 결국 그것이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에게 미리 알려주어 그들의 침공에 대비케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람나라는 이스라엘을 치기 위하여서는 저 엘리사를 먼저 죽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14절에서 왕이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어 그 성을 에워쌌다는 것은 아람왕이 엘리사를 죽이려고 그가 머물고 있는 도단 성에 많은 군대를 보내어 그 성을 포위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아람의 군대가 엘리사를 죽이려고 도단성을 포위하고 있을 때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성위에 올라가 보니 자기들이 살고 있는 성이 적군에 의하여 완전히 포위당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게하시는 너무 두렵고 놀라 허겁지겁 선지자 엘리사에게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아아, 우리가 어찌 하리이까? 아람군대가 저렇게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우리는 이제 꼼짝없이 죽었습니다.’라고 외칩니다.

물론 뒤의 말씀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아, 우리가 어찌하리이까하는 말의 의미는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꼼짝없이 죽었습니다. 저 많은 말과 병거와 군대를 좀 보십시오. 저렇게 우리를 에워싸고 죽이려고 하는데 우리가 살길이 어디 있겠습니까하는 절망적인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겁에 질려 두려워하고 있는 게하시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그러자 게하시의 눈 앞에 엄청난 광경이 펼쳐집니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산 주위에 불말과 불병거가 가득하여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밖에는 아람의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지만 성안에 하나님의 군대인 불말과 불병거가 가득하여 성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아람군대는 물러가고 말았고, 그 이후 얼마동안은 이스라엘을 침공해오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영적인 눈이 열렸을 때와 감겼을 때의 차이입니다. 먼저 게하시를 보십시오. 그는 영적인 눈이 감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저 육적인 눈으로 모든 것을 판단했습니다. 육적인 눈으로, 감각적인 눈으로, 세상의 경험적인 눈으로 판단을 했습니다.

그 눈으로 볼때는 상황은 분명 절망적이었습니다.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숫적으로 월등히 열세입니다. 전력이 비교가 되지를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경험적으로, 지적으로 아무리 따져보고 또 따져봐도 아니 따져 보나마나 척 하면 삼천리라고 이건 도저히 게임이 안되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죽었다고, 이제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똑 같은데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달랐습니다. 분명 사람의 논리나 경험으로 봐서는 절망적이었습니다. 분명 상대가 안되는 게임이었습니다. 적군이 월등히 우세했습니다. 그냥 맞붙어 싸운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제대로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함락 당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걱정하지 말아라, 두려워 말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절망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와함께 하기 때문이다. 불말과 불병거를 보여 주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물론 우리가 손으로 만질수 있고 실제적 육체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물질적인 말과 병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불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특별히 불말과 불병거를 보여 주셨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군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군대는 말할 것도 없이 내가 너희를 안전히 보호해 주겠다는 하는 분명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중요한 사실은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분명히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비록 숫적으로 우세하고, 전력이 월등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분명히 인도해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을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절망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결론이 났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죽지도 않았습니다. 멸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도 다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절망도 아니었습니다. 두려워해야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육적인 눈으로 결론 내렸던 것과는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 결론이 난 것입니다. 인간의 논리와 경험과 지식과 과학적 사고에 의하여 두려워하면서 이제는 끝장이라고 절망에 빠졌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세상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떠지지 않으면 상황만 보이고, 물질만 보이고, 조건만 보입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세상적인 힘의 논리만이 있게 됩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세상의 재물만 보입니다. 세상의 권세만 보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것으로 결정을 내립니다. 그것 때문에 좌절하고 실망하고 두려워하고 무서워합니다. 그것 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고 목숨을 겁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실패를 경험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리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보게 됩니다. 마치 빙산이 8/9은 물속에 잠겨 있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삶에는 육적인 눈으로 보이지 않는 영역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무한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의 세계를 알게 됩니다.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믿음안에서 살아가는 자는 결국은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이고 믿게 됩니다. 아니 그 영광의 나라가 분명히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의 눈이 열린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환경에 사로잡히지도 않습니다. 조건에 붙잡히지도 않습니다. 돈과 권세와 명예와 향락의 노예로 전락하지도 않습니다. 염려와 근심과 절망의 수렁속으로 빠져 들지도 않습니다. 보다 멀리, 보다 온전히, 보다 아름답게, 보다 소망가운데, 보다 영광스러운 세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경을 이기고, 조건을 이기고, 상황을 이기게 됩니다. 어둠의 세력들과 모든 유혹자들을 이기게 됩니다. 진정한 소망과 위로와 기쁨과 평안과 생명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한해가 또다시 밝아 왔습니다. 시간은 어제나 오늘이나, 작년이나 올해나 동일하게 흘러가지만 그러나 그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결국은 승리하게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정녕 지배할 수 있는 자는 곧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눈이 활짝 열린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눈이 활짝 열린 사람들이 시간을 지배하고, 환경을 지배하고,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영안이 활짝 열린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 5:4,5)

그러므로 이 시간 새롭게 밝아온 새해에는 여러분의 영적인 눈이 더욱 활짝 떠지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귀가 더욱 활짝 열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믿음안에서 하나님안에서 세상을 보고 나를 보고 이웃을 보고 상황을 보고 조건을 보고 환경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눈으로 모든 환경과 상황과 약한 것들과 부족한 것들과 어두운 것들을 이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안에서 말씀안에서 인도하심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가난과 미움과 증오와 염려와 낙심과 절망을 이기시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이 한해에는 더욱 기쁨과 은혜와 소망이 충만한 아름다운 한해가 되어지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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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 / 추석 가정 예배순서 -- 기도문 

이 시간 우리 민족의 고유명절인 추석을 맞이하여 주 앞에 예배 드리겠습니다

1) 묵상 기도 - - - - - - - - - - - - - - - - - - - - - - - - - - - 다같이

2) 기 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인도자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만물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명절 아침에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의 찬송과 기도와 예배를 받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아멘 -

3) 찬 송 - - - - - - - - - - - - - 305, 78장 - - - - - - - - - - - 다 같 이

4) 신앙 고백 - - - - - - - - - - - - - - - - - - - - - - - - - - - 다 같 이

5) 기 도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인도자

하나님 아버지, 오늘까지 베풀어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올 한해 지나온 시간을 되새겨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가정을 건강하게 하시며, 믿음을 주시며,

오늘 이 시간 혈육들이 기쁨으로 만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게 하시며,

주님의 뜻을 이해하며 주님의 뜻을 우리 가정을 통해 이루어 주시옵소서.

오늘처럼 기쁜 날 아직도 우상을 섬기며

우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심령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며

불신의 눈을 떠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게 하옵소서.

이제 부부, 형제, 자매와 혈율간 화목을 이룰 수 있게 하시며

이 세상 살 동안 하나님 사랑을 나눌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멘 -

5) 성경 봉독 - - - - - - 고린도전서11:1-2, 에베소서6:1-4 - - - - 인도자

6) 설 교 - - - - - - - - - - - 믿음의 큰 유산 - - - - - - - - - - 인도자

가정은 인간 사회의 기본 단위요 질서입니다.

따라서 가정에서 받은 영향은 인간의 모든 생활과 보다 큰 사회의 삶을 좌우합니다.

그런데 우리 식구들이 신앙 안에서 굳게 서 있고 복된 가정이 된 것은

먼저 하나님의 축복 때문이요,

그리고 부모님이 남겨 주신 유산이 훌륭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님이 남겨 주신 큰 유산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신앙의 유산입니다.

가정은 신앙이 중심이어야 합니다.

가정이 아무리 물질로 풍요함을 갖추었다 해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습이 결여되어 있다면 복된 가정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가정이 복된 가정으로 살게 된 것은

부모님이 진실한 신앙 유산을 물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

신앙을 유산으로 남겨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사랑과 화목이라는 유산입니다.

사람은 먹는 것이나 입는 것만으로 살 수 없고,

사랑과 화목이 있어야 사람다워지고 가정다워집니다.

우리 가정이 남달리 화목과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 된 것은

우리 부모님이 남겨 주신 유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은 가족의 생명이 보전되며 참 교육이 실시되고

가치관이 형성되는 훈련장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이 넘치는 친교의 장,

서로 도와주는 협동과 화목의 장이어야 합니다. 부모님의 무덤 앞에서

다시 한 번 사랑과 화목이 넘치는

가정을 주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는, 효성이라는 유산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효도의 본을 보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성서는 부모공경을 약속이 붙어 있는 계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된 효성은 부모가 세상을 떠나신 후 제사를 잘 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 교훈과 그 생활을 후손 된 우리가 본받고 지키며 행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우리 가정이 오늘까지 이토록 건강하게

사는 복을 받게 된 것은 부모님이 조상에 대한 효성을

우리들에게 유산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조상들에게 묘자리를 잘 써드리고

훌륭한 묘비를 세워서 효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살아 생전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힘썼고, 부모님께 칭찬과

명예가 돌아갈 만큼 바른 삶을 사심으로 효를 드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주안에서 신앙으로 살아감으로 자녀가 부모님께

드리는 최상의 효성을 드렸습니다.

그 결과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이 붙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축복을 우리 가정이 받게 되어

지금 이렇게 복된 가정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눈이 보이는 물질적인 유산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과 화목과 효성과

신앙의 유산을 길이 보전하고,

우리 후대에 물려주는 가정이 되기를 다짐하며 그렇게 살아갑시다.

7) 찬 송 - - - - - - - - - - - - 307장 - - - - - - - - - - - - - 다 같 이

8) 주기도문 - - - - - - - - - - - - - - - - - - - - - - - - - - - 다 같 이

◆ 추모(追慕)예배의 의의 ◆

추모(追慕)라는 용어가 바람직합니다.

추도(追悼)라는 용어는 죽은 이를 생각하며 슬퍼해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속에는 다분히 불신자적인 인상이 짙습니다.

추모(追慕)라는 용어의 뜻은 죽은 사람을 기억하고 그리워함입니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에서 사용되어야하는 바른 용어는 추모(追慕)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모(追慕)예배의 의의

1) 불신자에게는 올바른 죽음의식을 주는데 있습니다.

죽음은 죄값이며 하나님을 향한 반역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죽음을 잠잔다는 말로 성경은 표현합니다. 이것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영혼이 깨어난다고 하는 것을 전제한 것입니다.

영혼은 사람들의 생각처럼 다시 돌아오거나 혹은 정처 없이 세상을 방황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죽음 이후에는 심판과 부활이 있습니다.

2) 믿는 가족들에게는 부활신앙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시간입니다.

먼저 신앙 안에서 위로를 받고 부활신앙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신자들이 부활신앙이 없는 불신자들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3) 조상과 부모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조상의 경건한 행위는 자손을 지키고 구원을 얻게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추모예배는 조상과 부모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드려져야 합니다.

4) 신앙상속을 인식하는 특별한 기회입니다.

추모예배는 신앙상속에 대한 감사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부모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부모님을 통해서 믿음을 상속받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게 됨을 다시 한번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고인을 기릴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5)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랑을 나누는 친교의 시간입니다.

가장 슬플 때에 사람들과 그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친교는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친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추모일이나 한식절이나 설날이나 추석절 때마다

목회자가 와서 의식을 집행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때에만 목회자가 집행하고

그 밖의 다른 경우에는 가장이나 가족대표가 진행합니다.

예배 인도자는 구습이나 미신적 요소가 나타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의문점이 있으면 담임목사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 추모 예배를 드릴 때 주의점 ◆

① 음식 준비 /

음식은 조상이 와서 먹는 것이 아니므로 제사상으로 차리면 안된다.

그러나 간편한 음식을 준비하였다가 추모 예배후에 가족들이 둘러 앉아 나누는 것은 좋은 일이다.

② 사진이나 영정 /

고인의 사진을 준비하는 것은 좋으나 향이나 촛불을 켜는 것은 기독교적이 아니다.

③ 절하는 문제 /

고인의 사진이나 영정 또는 음식물을 향하여 절을 하는 것은

우상 숭배를 금한 계명을 범하는 것으로 죄가 되므로 절대로 하지 않아야 합니다.

부모 공경은 살아 계실 때 최선을 다해서 해야하고

살아계신 부모님께 절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죄가되지 않는다.

④ 불신 가정에서의 문제 /

가족 전체가 불신 가정으로 제사를 드려야하는 입장에 있을 때는

그 자리를 피하지 말고 절하는 대신 가족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 된다. 

이 때 분명하게 신앙상의 이유로 절은 할 수없지만

가족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리겠다고 가족앞에 태도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 좋다.

⑤ 산소에 성묘갔을 때 /

음식을 차리고 절을 한다든지 묘지에 술을 붓는 행위는 신앙적인 것이 아니다.

대표자가 간단히 기도하고 묘에 묻힌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묘지의 상태를 점검하고 돌아보면 됩니다.

불신 가정일 경우에는 다른 가족이 절할 때에 함께 서서 기도하고

가족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할 수있도록 여러모로 힘쓰십시오.

⑥ 기타 /

우리도 언젠가는 조상들처럼

육신은 한줌의 흙이 되어 하나님 품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깨달아야 하며,

조상들이 볼 때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다짐해야 하고,

형제 자매들 간에 더없는 우애와 사랑으로 살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결심하는 시간이어야 하며,

조상들이 남겨 놓고 가신 훌륭한 뜻을 받들어 교훈을 받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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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가정예배

 
전통적인 제사는 고인에게 드리는 것이요, 추모식은 고인을 추모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대상과 예배를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멀지 않은 날 하나님 앞에서야 될 것임을 생각해 보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절하는 것은 금합니다. 추모식에는 조상을 추모하는 계기에 모인 가족들과의 친교가 중요시되어야 합니다. 고인을 기념하는 뜻에서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면 더욱 좋겠습니다.

 

【 예배순서 】

◎ 개 식 사 ------------------ 맡은이 지금부터 먼저 가신 조상들을 생각하며 추모예배를 하겠습니다. ◎ 신앙고백 ---------------------------------------------- 다같이

◎ 찬 송 ---------------------534장----------------------------- 다같이

◎ 기 도 ------------------------------------------------------- 다같이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지금 고인들을 추모하면서 온 가족과 친지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고인들이 과거에 살아 있을 때에 행한 모든 일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여 주시고, 그 분들이 하시고자 했으나 하지 못한 것을 자손들로 하여금 성취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다고 하시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영생이 있다고 말씀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모두 부활하여 영생에 들어가는 것을 기억하게 하시고 고인의 모범적인 신앙을 되새기게 하여 주시고 온 가정에 축복과 위로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낭독 ------------------ 시 25:12-14 ----------------------- 다같이

◎ 말씀 --------------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받는 복 ---------------- 맡은이

본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여호와께서 어떤 대우를 하시는가를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도 여호와를 경외하여 복 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 택할 길을 아는 복(12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택할 길을 가르치신다고 했습니다. 택할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일상은 선택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선택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그 결과도 달라지기 때문에 선택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그 생의 도상에서 바른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숙제를 안고 있는데 그 선택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이요, 고백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받는 복은 하나님께서 그 택할 길을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어떤 길을 택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런 복을 우리 모두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영혼이 평안을 누리는 복(1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누리는 복은 복중의 또 하나는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적 부요나, 세상적 형통으로 오는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그 심령에 있는 자가 누리는 평안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영혼이 평안을 누리는 복을 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언약 속에 사는 복(14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또 하나의 복은 하나님께서 친밀히 대하시고 그 증거로 그에게 언약을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바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이 일을 숨기지 않고 그 택하신 자들에게 이 언약을 계시로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언약 속에 사는 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 기 도 ------------------------------------------------------- 맡은이

오늘 말씀을 통하여 환란 풍파와 질고가 많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이며, 고인이 원하는 길임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일평생 믿음으로 사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주님이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찬 송 ---------------------559장----------------------------- 다같이

◎ 주기도문 ---------------------------------------------------- 다같이

"예배후 준비된 음식을 함께 나누면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며 친교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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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  성찬식예배절차 성찬식예순서

 

성찬식의모범

      성 만 찬  예 배 순 서 

 

    * 한 곳은 일어선다.
     11시
   1.전  주(묵상기도) -------------------------------------------------- 반 주 자
* 2.입 례 송  ------------------------ 1 3 장 ------------------------- 다 같 이
                   담임목사, 부목사를 비롯한 예배 위원들과 성가대원들이
                   예배당 입구에서부터 행진하여 강단으로 나아간다.
* 3.인   사
        목 사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회 중 : 목사님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 4.예배에의 부름 ----------------------------------------------------- 집 례 자
              (인사를 하고 종을 치면 모두 눈을 감고 부름의 말씀을 듣는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시 100:1-2)


* 5. 찬  송 -------------------------- 2 7 장 ------------------------- 다 같 이
* 6. 죄의 고백 ------------(다함께 고개를 숙인채 기도한다)------------- 다 같 이 
         오늘도 우리의 삶가운데 함께 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
        2,000년전 갈보리 언덕위 십자가에서 당신의 두 손과 발에 못을 박는
        그 둔탁한 소리가 들립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돌아가신 당신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그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였건만 우리는 우리의 온맘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였나이다. 우리가 지은죄가 너무나 크고 무거우오니
        하나님이시여 용서하여 주옵시고 새롭게 거듭날 수 있도록 하옵소서.
        그래서 주님께 날마다 영광 돌려 드리는 삶을 살 수 있게 하옵소서. 아멘.


* 7. 용서의 선언  ----------------------------------------------------- 집 례 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 8. 사 도 신 경 ------------------------------------------------------ 다 같 이
* 9. 성 시 교 독 -------------------- 54 성 례 식 --------------------- 다 같 이 
  10. 찬       송 ------------------------ 4 5 3 ----------------------- 다 같 이
  11. 대 표 기 도 ------------------------------------------------------ 맡 은 이
*12. 구약말씀 봉독 ------------------- 시 23: 1 - 6 ----------------- 남자 집 사   
*13. 신약말씀 봉독 --------------------요 5 : 19 - 29 --------------- 여자 집 사 
  14. 찬       양 ------------------------------------------------------ 성 가 대 
  15. 설       교 ------------------푸른 초장에 대한 그리움 ------------ 설 교 자 
  16. 기       도 ------------------------------------------------------ 설 교 자
  17. 주 기 도 문 ------------------------------------------------------ 다 같 이
  18. 성찬 찬송과 봉헌 ------------------------------------------------- 다 같 이
                 찬송가 3장을 회중들이 모두 일어나서 부르면서 장로들이 강단에
                 미리 준비된 상의 상보를 걷는다.
 
성만찬의 예전
  19. 처 음 기 원 ----------------------------------------------------- 집 례 자
       목 사 :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 우리가 언제나 주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하옵소서. 그리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회 중 :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죄를 고백합니다.
               주님, 주님을 바르게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지 못한 것 용서 하옵소서.
   20. 권 면 ---------------------------------------------------------- 집 례 자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 성찬은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죽으심과 사심을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우리로 악한 죄를 이기게 하시고
          모든 고난에서 더욱 굳세게 하사,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책임을 감당케 하며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게 하시고 마음의 평안함과 영생의 소망을 확실하게 하
          여 무한한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베푼 상을 통하여 그리스도 앞
          으로 나갑시다.
   21. 성경봉독및 간구 ----------- 고전 11 :23-29 ---------------------- 집 례 자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그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독생자를
           보내시어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하여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주께서 온몽으로 온세상의 죄를 사하시고
           완전하고 거룩하신 희생 죄물이 되사 우리의 고통을 대신하여 죽으심을 기념
           하는 성례를 세우시고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예식을 행하라고 분부하셨나이
           다.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 간구하옵나니 우리으 기도를 들으시고 성령으로
           이 떡과 잔을 축복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주님이 세우신 성례대로 이루게 하
           여 주시옵소서. 이제 부족한 저희들이 주님의 보혈을 기념하여 영생의 떡과
           구원의 잔을 받고자 하오니 생명과 은총을 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이 주님의
           베푸신 상에 같이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2. 성 찬 ------------------------------------------------------------- 위  원
            1. 떡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의 말씀을 성취하옵소서.
               (고린도전서 11:23-25)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시고(집례
               목사는 전병을 눈 높이 위에까지 높이 쳐들어 회중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한다)감사 드리신 다음에 떼시며(집례목사는 전병을 쪼갯 성반위에
               올려 놓는다) 축사하시고 떼어 주셨습니다. 찢기신 몸을 기념하며 주의
               떡에 참여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합시다.
                 ‘이것은 나의 몸이라. 너희를 위하여 준 것이니 행하여 나를 기념하
               라’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이 세우신 이 성찬을 베풀고 우리도 떡을
               떼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찢기신 몸을 분별하게 하시고 우리들이 나누     
               는 이 떡이 영생의 떡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
               니다. 아멘.
                (목사가 받고 교인에게 나눈 후 빠진 자의 유무를 확인하고 장로들에게
                 나누어 준다.)
            2. 잔
              식후에 주께서 잔을 가지사 축사하신 후 이 잔은 나의 피로 세운 새 언약
             이니 많은 사람의 죄사함을 위하여 흘림이라 하시었습니다. 우리가 이 잔
             을 받을때 합당하게 믿음으로 언약의 축복이 새로와지기를 바랍니다. 기도
             합시다. 거룩하신 주님, 저희가 주의 잔을 나누어 가지려 합니다. 흘리신
             보혈이 우리로 영생에 이르게 하옵소서. 주의 사랑 본받아 서로 사랑하게
             하시고 우리의 잔이 언제나 넘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
             다. 아멘.
               (목사가 받고 교인에게 나눈 후 빠진 자 유무를 확인하고 장로들에게
                 나누어 준다.)
    23. 감사와 축복의 기도 --------------------------------------------- 집 례 자      
                오 ! 하나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세례로 하나가 되게 하시고
               이 성만찬에서 기쁨으로 충만케 해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주께서
               우리들을 위해 흘리신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저희들을 살려 주셔서 영생의 소망을 갖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살
               아 계셔서 세상 끝날까지 성령과 함께 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예수님 이
               름으로 기도합니다.  
* 24. 찬      송 --------------------- 3 5 1 -------------------------- 다 같 이
* 25. 파송의 말씀
          목 사 : 여러분, 성령의 도우심으로 선교와 봉사를 위해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회 중 : 주여! 우리와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 26. 축      도 ------------------------------------------------------ 집 례 자     
   29. 후      주 ------------------------------------------------------ 반 주 자


    * 성찬 준비
         성찬예식은 당회가 작정하고 적어도 1주일 전에 회중에게 알려서 마음에
        준비를 시켜야 한다.
    * 성찬후 처리
         성찬에 쓰고 남은 떡과 포도즙은 목사의 책임하에 신중히 처리하되
        가급적 땅에 묻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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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기예배 /  성탄절 지도문

 

성탄절에 드리는 기도

                      (눅  2 : 10-11)

   <찬양과 감사>
   온 인류를 위하여 이 땅위에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
올해도 다시한번 성탄절을 맞이 하였나이다. 베들레헴 낮은 말
구유에 가난하게 오신 주님을 저희가 기억하옵고 저희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예배로 드리오니 기쁘게
받으시옵소서 .

    <회개와 고백>
   거룩하신 주님. 주님께서는 저희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늘
과 땅의 통로가 막힌 절망의 역사속에 오셔서 저희들에게 새소망의
길을 열어 만인의 구세주로 탄생 하셨고 사망의 길 내려가던
인생들에게 새로운 바른길을 가르치사 천국길로 인도 하셨나이다.

   그러나 저희들은 아직도 죄악에서 헤매며 빛과 생명의 길로
가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사오니 주여. 이 시간 다시한번 저희
들에게 임하시어 주님을 삶의 가장 높고 귀한 왕좌에 모시고
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허무하고 짧은 세상에 살면서 세상
의 노예가 되지 않고 일시적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당신의 거
룩한 백성으로 인쳐 주옵소서.

   <성탄을 위한 간구>
   전능하신 주님이시여. 이 성탄의 기쁜 소식이 온 세상에 널
리 퍼지게 하시고 아직도 암흑과 죄악에서 신음하고 있는 북
한의 형제들에게도 임하셔서 통일의 그 날이 어서 속히 임하
도록 역사 하옵소서. 그리하여 온 나라와 백성이 한 마음으로
드리는 찬송과 감사가 온 세계에 퍼져나가게 도와 주옵소서.

   <예배를 위한 간구>
   저희들이 드리는 이 축하가 황금과 유황과 몰약처럼 진실하
고 값진 정성으로 하늘 보좌에 상달하게 하옵소서. 이시간 주
님이 탄생하신 헛된 성탄절에 주의 천사들이 잠들어 있던 베
들레헴을 일깨웠듯이 잠들어 있는 저희들의 생명을 일깨워 주
옵소서. 이 기쁜 성탄에 온 성도들의 머리와 가정에 놀라운 축
복을 내려 주시고, 참여하지 못한 성도들에게도 함께 하옵소
서. 아직도 이 성탄의 기쁨을 모르는 저희 이웃들에게도 구주
께서 임하셔서 밝은 빛으로 그들을 비추소서. 성탄절을 위하
여 애쓰고 헌신한 많은 손길들위에 크신 축복 내려주시고 이
예배를 기쁘게 받아 주옵소서.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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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십자가


어떤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까?

(막15:16-32)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마 16:24).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배의 주제입니다. 모든 정상적인 목회자들은 모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릅니다. 그러나 목회자마다 십자가를 지는 느낌은 다릅니다. 십자가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1. 억지로 지는 십자가(막15:16-25).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에 이르러”(막15:21-22).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를 대신하여 얼마동안 십자가를 "억지로" 짊어져야 했습니다. 군인들의 창과 칼 앞에 자존심을 다 구기고 마지못해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날은 시몬에게 "개 같은 날의 오후"며 재수 없는 날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시몬에게 원치 않았던 굴욕이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며, 빨리 던져버려야 속이 시원한 불편한 짐이었으며 그가 비방하고 조롱한 형벌에 불과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위협에 시달리다 더 버티면 어쩐지 뒤끝이 좋을 것 같지 않다는 느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아닐까요? “이보게나, 내가 피 흘려 산 교회를 위해 그렇게 불평과 원망의 느낌을 가지고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면 이제 그만 내려놓게나. 내 마음이 편치 않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마16:24). 십자가의 감격을 회복하도록 주님, 도우소서! 십자가를 하나 더 얹어주실지라도 기꺼이 지고 갈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십자가의 은혜로 채워주소서!


  2. 마취제를 거절한 십자가(막15:22-25).


  “내가 목마르다!” 예수의 외침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를 지는 삶에는 목마름과 고통이 있습니다. 갈증이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고통과 갈증을 면하기 위해 마취제 같은 쓸개 탄 즙은 거절하셨습니다. 우리들이 목회자가 되어 한 없이 양보하고,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려 할 때 고통과 목마름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피곤해지는 순간이 있으며, 좌절을 겪기도 합니다. 하나님, 십자가의 목마름을 성스러운 목마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우소서! 이런 저런 목마름을 환영하는 모습으로 살 수 있도록 도우소서!  

  예수님께는 십자가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있으나 쓸개 탄 마취제를 거절하심으로 온 몸 그대로 고통을 느꼈습니다. 비통한 희롱과 조롱, 외면이 주는 정신적 고통도 감수했고 무서운 저주도 온 몸과 영으로 받았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로 향하는 가파르게 보이는 해골의 언덕을 오를 때 사람들이 제공할 고마운 마취제를 고대하며 십자가를 등에 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위로인 마취제가 필요 없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 하나님, 사람들의 비난과 비평에 몸서리치고 있는 저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자들이나 죽을 준비가 되었다고 큰소리치고는 잽싸게 달아나 버린 제자들을 향한 원망의 느낌, 버림받았다는 서러움의 느낌을 못 박아 버렸기에 마취제를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자기 연민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기 때문에 마취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길 원했습니다. 십자가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여, 우리들을 축복하소서! 십자가를 하나님의 위로며 영광으로 들어가는 감격으로 받을 수 있도록 도우소서! 


3. 죽어야 사는 십자가(막15:30-32).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다”고 했으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할 때까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도록 막고 있던 휘장을 하나님께서 친히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버리심으로 구원의 새롭고 산 길 을 열어 놓으시기까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죽어서야 십자가에서 내려 왔습니다. 저주를 받은 뒤에야 내려 왔습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완성한 뒤에 내려 오셨습니다!

“주님 오늘도 제 몸은 당신께 드리는 희생제물입니다. 명령을 기다립니다.”

  서 아프리카 선교사로 사역했던 테일러 스미스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교회 사임을 생각하고 있을 지 모릅니다. 우리들은 교회사역을 그만 둘 적절한 타이밍을 찾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린 애써 기도하며 개척했던 사역지를 떠나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왜 우리들은 사명을 중단하려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더 이상 헌신을 하지 않으려는 것일까요? 죽기살기로 헌신하더니 10년도 못 채우고 사역지를 떠나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성령님께서 나에게 물으십니다. "육신적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세상에 대해 죽었는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길 원하는가?"(고후 4:10)  "아닙니다. 성령님, 내 자존심 때문에 더 이상 목회 못하겠습니다." 성령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나타난다네. 네 자존심이 죽고, 네 욕심이 죽어야 교회가 살지 않겠나!"

   

  지금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있다면?  ‘사람들의 칭찬, 명예, 자존심, 대우’에 대해서 전보다는 더 적게 관심을 기울일 것입니다. 우리는 욕심에 대해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좋게 말하느냐 아니냐가 우리들의 헌신의 질을 결정할 만큼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죽는 순간에 이르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열심히 추구하던 것이 별 의미가 없게 됩니다. 죽음의 자리에선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혹독한 비판에 대해 죽은 자입니까? 사람들의 불친절에 대해 죽은 자입니까? 오늘도 나 자신을 향해 죽고 하나님의 영광과 목적을 위해 살려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인준하지 않으신 욕심에 대해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죽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열매 맺기 위함입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십자가에서 자아를 단호히 처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진가(眞價)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게 함이니”(빌3:8-9). 오늘도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4:10).  하나님,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내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실망해도 분노가 치밀고, 조금만 나의 지도력이 손상 당해도 견딜 수 없어하는 나를 철저히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주십시오! 내 눈물은 주님을 위한 눈물이 아니라 서러워서, 속상해서, 억울해서 흘리는 눈물 뿐이니, 주여 이 상한 마음마저도 십자가를 못 박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4. 당돌한 십자가(막 15:42-47; 요 19:38-42)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taking courage)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막15:42-47)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제자들은 모두 달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실패자처럼 보입니다. 아무도 예수님 편에 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십자가 주변에는 그 당시에 아무런 사회적 권리나 힘이 없는 여성들만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요, 실패자의 자리에 나서서 자신이 예수의 제자라며 밝히며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해 가겠다고 한 사람이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그는 주변에 믿는 사람처럼 보이는 이들이 없고, 믿는 사람들이 다 넘어진 것 같을 때 실망하지 않고 나서서 당돌히 십자가를 졌습니다. 억지로가 아닙니다. 마지못하여 십자가를 찾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용기있는 태도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요셉을 당돌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가 한 행동은 홀로 죄악에 맞서는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반역자의 신분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반역자의 시신은 가족들도 가져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한 것은 스스로 반역자의 제자라고 공개하는 일이므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예수의 제자임을 밝힌 신앙이 바로 빌라도와 세상이 볼 때 당돌한 신앙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 용기 있는 신앙입니다.  “반역자로 몰아가도 좋다. 아니 예수는 반역자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죄 없는 아들이심을 내가 믿는다. 빌라도 당신도 예수가 무죄라는 것을 알지 않는가!”라는 담대함이 이 시신을 달라는 요구에 담겨있었습니다.

 

  요셉이 용기있게 십자가를 지는 태도는 다른 사람에게 거룩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요 19:39). 자신의 신분 노출을 두려워해서 밤중에 찾아왔던 니고데모, 예수님이 비난당할 때 드러내 놓고 변호하지 못했던 니고데모, 드디어 그도 요셉을 보고 힘을 얻었습니다. 당당히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예수를 사랑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동료를 보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장례를 치르기 위해 100근이나 되는 값비싼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왔는데 이 양은 왕족의 장례를 치를 때에 사용하는 만큼의 많은 분량입니다. 내가 용기있게 십자가를 지고가는 삶이 어둠 속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감추고 살아가는 수많은 니고데모들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당당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게 되도록 도와주소서! 

 

  5. 자랑의 십자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6:1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고 사신 분 중에 최초의 미국 침레교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이 있습니다. 그는 미얀마에서 7년 동안 열심히 사역했지만 7년이 지나도록 예수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주변의 냉대 속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마저 병으로 잃었습니다. 자기 아내를 묻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친한 친구가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여보게 저드슨 형제, 너무 낙심치 말게나.”

그러자 저드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낙심이라고? 예수 안에서 소망은 태양처럼 빛나고 있다네!”  

  25년의 세월이 흘러 저드슨은 미국으로 돌아 왔습니다. 지금까지는 선교하면 영국이 대표였습니다. 미국이 아직 선교에 미약할 때였는데 위대한 사역을 마친 저드슨이 돌아오자 전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환영하고 그의 보고하는 자리에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선교사의 입에서 나올 흥미진진한 선교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저드슨 선교사는 첫째 날 우리 죄인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설교했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사람이구나”하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둘째 날은 저드슨이 번역한 미얀마-영어 사전과 미얀마 번역성경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어했습니다. 또 7년 동안 열매가 없다가 그 후 20여 년 동안 3,000명이 넘는 미얀마 원주민들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고 침례를 베푼 영웅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습니다. 또 감옥에 끌려가서 죽을 뻔한 고비를 수없이 넘긴 일화도 자세히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둘째 날도 예수 그리스도만 이야기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 53:5). 사람들은 셋째 날엔 틀림없이 선교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셋째 날에는 죄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오늘도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사회를 보던 목사님이 기다리다 못해 안타까워서 말했습니다.

“저드슨 선교사님, 성도들은 오늘 다른 설교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야기 말고 선교사님이 겪으신 재미있고 극적인 이야기를 좀 해주십시오. 또 선교사님이 회중교회 선교사의 신분으로 출발했다가 배를 타고 가면서 성경공부를 하는 중에 왜 침례교회 선교사로 바뀌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길 들려주십쇼”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에게는 저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나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우리 주님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고 더 감격스러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저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세상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우리 주님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감격스럽습니까? 자랑의 십자가가 우리 마음을 꽉 채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십시다. 하늘에서 드리는 예배의 중심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아멘!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합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합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고전2:2). 아멘.

 

  어떤 십자가를 지고 부활의 주님에게 나아가겠습니까?   (김택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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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예배/ 예수부활


 나는 왜 예수부활을 믿는가?  
 
  부활 신앙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1. 나는 부활에 대한 역설적(逆說的) 증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1)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을 맹목적(盲目的)으로 믿지 않았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맹목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의심하고, 충분히 불신하고, 충분히 거리를 두고 예수의 부활을 검토한 뒤에 믿기 시작한 것이다. 사기꾼들은 처음부터 믿음을 주려고 노력한다. 성경은 제자들의 믿음을 그렇게 과장하거나 포장하지 않는다.

  첫 번째 부활의 날 아침 신문 속보에 실린 1면 기사는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아다닌 사람들 이야기’가 정작 부활하신 주님보다 더 많이 다루어졌다. 부활 아침에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았으나 부활하신 예수를 찾지는 않았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막 16:6).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고 와서 제자들에게 이야기 했을 때 마가복음 16:11은 이렇게 반응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듣고도 믿지 않았다. 누가복음 24:11은 좀 더 강하게 묘사한다.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눅 24:11). 심지어 마태복음 28:17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신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말씀을 하실 때의 반응도 보여 준다.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을 책망하셨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제자들은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 이야기나 덥석 믿어버리는 맹목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어리석은 촌뜨기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부활에 목숨을 건 제자들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도 나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4).  

 

2)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신앙을 날조(捏造)하지 않았다.

  ‘날조’란 없는 일을 있는 일처럼 조작하는 것이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완전히 날조하여 퍼트리려고 작정했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부처 실패했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은 모습은 마치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검찰이 론스타 회사의 불법을 조사하기 위해 700상자 분량의 서류를 검토한 적이 있다. 불법을 저지르려면 철저하게 잘못을 감춰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위해서 어떤 안전장치도 만들어 놓지 않았다. 부활 사건을 보호하려는 어떤 인간적인 시도도 하지 않았다. 부활을 음모하려면 모든 제자들이 모여서 입을 맞추고, 모든 사건 순서와 모든 내용을 똑같이 증언해야 하며, 부활에 대한 대단한 확신도 보여주어야 하고, 부활에 대한 모든 증언이 일치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성경은 지난 수천 년 동안에 오류를 바로 잡을 기회가 있었으나 한 번도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없다. 왜? 부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부활 사건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꾸밀 필요가 없다. 예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류나 인간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사건이 오류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도 잡혀가 죽을 까봐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부활신앙을 믿는 사람들 같지 않았다.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 같았다. 얼마나 겁이 났던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 주변에는 요한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다 달아났던 제자들이다.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장례를 치른 것은 의외의 인물들이다. 예수 믿는 신앙을 감춰왔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나서서 예수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렀다.

 

  이런 정황으로 보건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꾸미거나 부활을 확신하는 척하거나 목숨을 걸고 군인들이 지키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보기엔 너무 무리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예수 믿는 신앙을 후회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끝이 났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문을 듣고 오히려 마음이 상했다. 그들은 마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가는 실패한 사업가와 같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황우석 박사의 추종자들만도 못했다. 목숨을 건 제자도 없고, 나서서 데모하는 제자도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위하여 어떤 인위적인 시도조차도 할 수 없었을 만큼 부활을 믿지 않았던 자들이다.

  

3) 예수 부활은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처음으로 증언되었다.

  예수님이 처음 태어나셨을 때 그의 증인은 목동들이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목격하고 전한 사람들은 여성들이었다. 목동이나 여성들은 1세기 유대사회에서 별 볼일 없는 그룹이다. 그들의 증언은 법정에서 증언으로 채택되지도 않는다. 만일 사람들을 믿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좀 더 그럴싸한 증인을 내세워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부활소식을 전하게 하려고 초대교회는 믿을 만한 사람을 뽑아서 사기극(詐欺劇)을 연출할 필요가 없었다. 하찮은 여인들의 증언이야 말로 초대교회가 부활을 날조하지 않았다는 좋은 증거다. 노예해방의 전기를 가져온 엉클 톰의 이야기를 쓴 사람을 만났을 때 링컨은 놀랐다. 이렇게 키도 작은 여성이란 사실에. 부활의 증인은 위대한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사람이면 족한 것이다.

  

  4) 예수 부활 사건 기록은 수정되거나 보완되지 않았다.

  만일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음모나 날조로 부활이야기가 생겼다면 시간이 흘러 부활 이야기는 좀 더 완벽한 시나리오로 고쳐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교회 한만오 목사님이 미국에서 논문 초고를 제출하면서 지도교수에게 물었다. “이 논문이 지금 어느 정도 평가를 받겠습니까?” 슈미트 박사는 말하기를 “이 논문은 B급이라”고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한만오 목사님이 실망하여 내게 전화를 했다. “목사님, 어떡하면 좋지요? 내 논문이 B밖에 안 된데요.”

  내가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격려해 드렸다. “목사님, 논문 초고(first draft)를 내면서 B라면 아주 잘한 겁니다. 논문 수정을 한 번 거치면 B가 B+이 되고, 두 번 거치면 B+이 A-가 되는 겁니다.  졸업할 때까지 논문 방어를 하고 나서 한 번 더 수정하면  A-가 A가 됩니다. 틀림없이 A 받으실 겁니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부활 점수를 A로 받기 위해 박사 논문을 수정하듯 손대지 않았다. 수정할 필요도 없다. 성경은 누구의 변호도 필요치 않는다.

 

  데이빗 스티브스는 1957년 공군 중위로 공군 훈련 제트기를 타고 훈련받다가 비행기가 추락, 실종 된지 54일 만에 캘리포니아 주 시에라 산중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이미 시종 사망 처리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스티브스가 말하는 것처럼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를 찾지 못해 사건 조작 혐의로 강제 전역 당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뒤에 그 비행기 잔해가 캠프 하던 보이스카우트 소년들에게 발견되어 20년 만에 그의 이야기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왜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라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마치 부활이 조작이라고 말하도록 만들게 되지 않을까? 그의 청중을 위해 예수님이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나타나셨다고 수정하고 싶지 않은가?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왜 실망하여 예루살렘을 떠나려했고, 그들은 예수님이 대화에 끼어들어 한 동안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알아채지 못했을까? 뭔가 부족한 듯 보이는 이 이야기를 좀 더 완벽하게 수정하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성경은 예수의 부활 이야기를 도무지 변증하거나 잘 보이려고 애쓰거나, 보다 완벽한 구성을 해서 제공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부활 사건을 경험했던 충격 그대로 우리에게 기록하여 전해준다. 나는 부활에 대한 역설적(逆說的) 증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2. 나는 부활의 역사적(歷史的) 사실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프랑스의 한 신문사가 세계의 저명인사 100명에게 ‘지구의 파멸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안전하게 반출해야 할 지구상의 보물이 무엇이냐?’고 설문조사를 했다. 2위는 인간예술의 극치로 평가받는 미로의 비너스상이다. 1위는 무엇일까? 폭 1m, 길이 4m 20cm인 세마포,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하찮은 삼베 수의천이 인류 최고의 보물로 간주되었다. 수년 전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 화재가 일어나 완전히 전소되었을 때 그 역사적 성당 안에 수많은 보물들이 불에 타 한 줌 재가 되어버렸다. 그 당시 가장 큰 관심은 토리노 성당 안에 있던 세마포였다. 화재 신고를 받은 소방대원들은 화염에 휩싸인 성당 안으로 목숨을 걸고 들어가 3층으로 된 방탄유리를 도끼로 찍어 깨트린 뒤 그 세마포가 담긴 상자를 안고 나왔다. 왜 세마포롤 첫 번째 보물로 여기고, 소방관은 자기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면서도 세마포를 가지고 나왔을까?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것을 보라”(마 28:6). 

 무덤은 비었고, 수의는 어떻게 되었는가? 요한복음 20:3-08을 보면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수의는 예수님을 장사지낼 때처럼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향유를 바르고, 미이라를 만들어 놓았던 바로 그 모양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1) 빈 무덤과 빈 수의는 부활의 큰 증거다.

  2) 유대 지도자들은 부활에 관한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3) 유대 종교와 로마의 통치 속에서 기독교가 탄생했다.

  4) 주일을 예배드리는 날로 시작한 것은 부활의 역사적 부산물이다.

 

3. 나는 부활 신앙을 인해 변화된 사람들 때문에 예수부활을 믿는다.

 

  의심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믿으라고 하면 쉽게 믿어지겠는가? 믿기 어려워서, 믿을 수 없어서 고민한 사람들이 많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누가 돌을 치웠는가?」(Who Moved the Stone?)이라는 책을 쓴 영국의 저널리스트 프랭크 모리슨이다. 모리슨의 의도는 부활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려던 것이었는데 쓰다 보니 결론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영국의 두 젊은 무신론 변호사 길버트 웨스트(Gilbert West)와 리틀톤(Lyttleton)은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기독교를 무너뜨릴 궁리를 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사울의 회심 이야기가 역사성(歷史性)이 결여되었다는 사실을 입증만 하면 기독교는 모래성처럼 허물이 지게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길버트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리틀톤은 사울의 회심에 대한 책을 각각 쓰기로 했다. 성경을 포함한 많은 책을 읽고 연구를 하던 중 얼마 후에 그들은 다시 만났다.

  그들의 결론은 놀라웠다. 아무리 보아도 예수는 부활하셨고, 사울은 다메섹에서 회심한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조사하고 연구한 책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과「사울의 회심」(The Conversion of St. Paul)이다. 「벤허」라는 영화의 원작을 쓰기 전까지 월러스(Wallace)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예수를 믿는 것을 우습게 여겼던 작가이다. 그의 친구의 말을 믿고 있었다. “기독교는 얼마 후에 이 세상에서 존재를 감추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월러스가 소설을 쓰기 위해 성경을 읽고, 역사적인 자료들을 검토하면서 영화 속의 불신자 벤허처럼 그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앞에 무릎을 꿇어다. 영화 속의 벤허는 복수심에 불타 칼과 창으로 민족을 해방시키겠다는 사람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자 그는 딴 사람이 된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자 그는 딴 사람이 되었다.  


   1) 부활을 받아들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다.

  숨어있기에 급급했던 이 제자들은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면서, 부활하신 예수를 40일 동안 11번 넘게 만나면서, 순교도 마다않는 겁 없는 전도자들로 변했다. 그들의 변화를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사라진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공포가 사라진다.  


  2) 예수의 육신적인 형제며 불신자인 야고보의 변화도 부활의 증거다.

  야고는 부활 사건 전까지는 예수의 주님 되심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부활 사건은 그의 형을 그의 구세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진다.


  3) 의심 많은 제자 도마의 변화도 부활의 증거다. 

  요한복음 20:25을 보면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던 제자이다. 도마에게 감사하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의심해 준 것, 우리가 거쳐야 했을 고민을 그가 먼저 해 준 것을 감사하자. 요한복음에서 가장 감격적인 신앙 고백은 도마의 입술에서 나왔다. 그는 먼저 회의론자, 의심 많은 자로서 고통스런 시간을 먼저 보냈다.  그런 뒤에 이런 위대한 고백을 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 20:28).


  4)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울은 부활의 증인으로 변했다.

  사울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던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 교회들을 핍박하고 잡아 가두는데 힘썼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를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만난다. 그것은 사울에게 엄청난 충격이자 사건이었다. 그는 3일 간을 금식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 그리고 나서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그는 왕 앞에서도 부활을 증거 했고, 이방인들 앞에서도 부활을 증거 했다. 그의 변화는 마치 아인슈타인이 예수를 믿은 것보다 더 큰 사건이다. 위대한 과학자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노후에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 이런 유명한 고백을 남겼다.

 

“나는 평소에, 특별히 젊었을 때 교회를 경멸했습니다. 교회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내 조국 독일이 어두워 졌을 때, 그리고 나치의 핍박 아래 있었을 때 내가 경멸하고 무시했던 교회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었고 사람들의 안식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 노후에 인생의 석양녘에 나는 교회 이외에 내 영혼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제 교회로 다시 돌아옵니다. 내 영혼의 안식처인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진짜 똑똑한 사람들이 예수도 잘 믿는다. 나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이유와 근거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 소크라테스는 하나님을 믿었다. 갈릴레오, 베이컨(Bacon), 과학자 아이삭 뉴톤 경(Sir Isaac Newton), 파스테르(Pasteur) 같은 뛰어난 과학자, 철학자, 사상가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들이 바보라서 믿었을까? 아니다.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에 대한 해답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우리들의 삶과 죽음에 의미를 주시기에 그 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죄의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기에 삶을 의탁하는 것이다. 이별의 아픔에서, 무덤의 그림자에서, 죽음의 공포에서, 예수님만이 구원하시며 희망이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아멘.

  예수님만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부활의 보증이시다.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에 충분하신 분이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주이시다.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과 부활에 관한 희망을 주신다.

 

4. 나는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 때문에 예수 부활을 믿는다.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못 자국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요 20:20). 왜 우리를 향한 대속(代贖)의 상처는 낫지 않았을까? 사라지지 않은 채 주님 몸에 남아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상처에서 희망(希望)을 본다. 그 상처는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을 이어주는 중요한 표시이다. 구원과 구원의 보증(保證)의 표시이다. 상처가 준 고통은 사라졌지만 상처의 흔적은 남아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1) 나를 위해 어떤 사랑의 희생(犧牲)도 치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나를 구원할 능력이 충분(充分)함을 보여준다.

  3) 나의 죄 사함과 구원이 영원(永遠)함을 확증한다.


  언젠가 주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며 그 손에 난 상처를 보실 것이다. 부활신앙이란 우리가 흘린 눈물, 우리가 당한 비극,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치른 모든 희생을 주님이 기억하여 주시는 것이다. 예수 몸에 난 상처가 그렇듯이 나와 여러분의 마음과 몸에 난 상처는 새로운 몸을 입어도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은 주님에게 증거가 된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증거가 된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나는 어머니의 굵게 파인 주름살을 기억한다. 나는 어머니의 거치러진 손의 느낌이 가슴에 남아있다. 나는 그 손을 만져보고 싶고, 그 주름진 얼굴이 보고 싶은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인도에 썬다씽이라는 유명한 성자가 있다. 그거 어느 해 영국을 방문해서 국회에서 연설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의 강연을 경청하였다. 참석자 중의 유명한 교수 한 사람이 질문을 했다. “당신은 뿌리 깊은 힌두교의 유명한 학자이고 철저한 힌두교인인데 어떻게 해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까?”

  썬다씽은 이렇게 대답했다.

 “예수 부활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이 있다. 힌두교나 불교는 인생무상이다. 그러나 기독교만이 생명을 준다.  주님께 감사하자. 의심 많은 내게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다가오신다.  주님께 감사하자. 의심의 돌을 굴려버리시고 죽음에서 일어나셨다. 주님께 감사하자. 슬픔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우리들 때문에 다시 무덤까지 찾아주시기 때문이다.  주님께 감사하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실망의 길을 걷는 우리들을 따라오신다.  주님께 감사하자. 종종 낯선 사람의 모습으로, 낯선 방법으로, 낯선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신다. 기뻐하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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