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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후회 없는 부르심

로마서 11장 29∼32절
 
모든 사람은 살면서 후회합니다. 지난 일을 돌아보며 괴로워합니다. 믿었던 사람이 약속을 저버릴 때 왜 저런 사람을 만났을까 후회합니다. 인생은 크고 작은 후회의 연속입니다. 믿음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한 우리 인생을 바라보는 주님의 심정을 생각해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실망스러우실까.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여전히 교만하고 순종하지 않는 우리의 행동에 얼마나 후회하실까. 그러나 이는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결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후회하고 실망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후회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부르신 데 대해선 후회하는 법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우리를 보고 후회하지 않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연약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른 건 무엇을 바라고 기대해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긍휼하심으로 은총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인생의 연약함을 아는 주님이 우리를 측은히 여기고 사랑으로 안아주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긍휼하심으로 주님은 사역하셨습니다. 소외당하고 죄인 취급 받던 사람에게 자유를 주심으로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연약한 인생에 베푸신 하나님의 가장 큰 긍휼이요 구원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할 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긍휼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주께서 우리 인생을 바라볼 때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유대인도 오늘날 자신들의 은사를 선용하지 못합니다. 다투며 미워하고 불순종하는 우리도 주님 보시기에는 그저 불쌍히 여김을 받을 대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은 연약한 우리 인생이 다 알 수 없고 그 긍휼하심의 깊이도 다 알지 못합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긍휼의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를 드러냄으로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태도를 불순종으로 간주했습니다. 이러한 불순종은 곧 불신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주님은 그 불순종과 불신앙마저도 구원의 기회로 삼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연약한 우리를 부르고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는 은총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으로 인해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불순종과 불신앙을 정당화하고 주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지 마십시오.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남을 비난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참된 신앙과 순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주님을 본받아 긍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에 불순종과 불신앙이 판친다 해도 흔들리지 말고 긍휼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모든 지각에 뛰어난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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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 바로 이해하기

 

아무리 성경박사라 하더라도 기독교 교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으면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이신칭의 교리가 한국교회의 윤리의식을 저하시켰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이론상 그럴듯 해 보이지만 적어도 역사적으로 검증될 수 없다.

 

1. 개인적인 경험에서 판단해 보면 한국교회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제대로 가르친 적이 없다. 사실, 한국교회는 교리 자체에 대해서 무관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정적 칭의(forensic justification), 이중적 전가(imputation), 도구적 원인으로서의 믿음, 구원에 이르는 믿음, 칭의와 선행의 관계, 능동적 의와 수동적 의의 구분 등.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는 신자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2. 이신칭의의 교리를 가장 강조했던 시절에 교회는 윤리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에 있었던 경우가 많다. 존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 등. 따라서 칭의 교리가 신자의 윤리를 오히려 강화시킬 수 있다.참고로 종교개혁은 선행이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거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논란의 핵심은 선행이 어떤 점에서 구원에 필수적이냐는 것이다.)

 

3. 교리의 내용과 교리의 사용을 구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옳은 교리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잘못 사용될 수 있다.어머니 손에 있는 칼은 음식을 만들지만, 살인자의 손에 있는 칼은 사람을 죽인다.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인 예라로 할 수 있다. 칭의 교리를 통해서 자신의 윤리적 나태를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다.

 

4. 칭의 교리가 틀렸다고 치자. 그리고 행위가 구원을 얻는데 믿음과 더불어 어떤 원인이 된다고 천주교식으로 가르쳐 보자. 그렇게 가르치면 신자들의 윤리의식이 올라갈까? 선행은 믿음의 결과이자 감사의 표시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식이라고 가르치면 윤리의식이 저하되는가?

 

5. 심지어 이방인들과 같이 믿음이 아니라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면 윤리의식이 더 올라갈까? 문제는 무엇인가? 선행을 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통해서 선행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하는데,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6.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선을 행할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가? 믿음을 통해서 온다. 다른 방법이 있는가? 그렇다면 선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 더 나아가 믿음으로 행한 행위가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확신이 어디에서 오는가? 아무리 우리가 지극한 정성으로 선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우리의 죄로 오염되어 있을 뿐이다. , 아무리 우리 눈에 선한 행위로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죄일 뿐이다.

 

7.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는 무엇인가? 놀랍게도 칭의의 은혜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분명히 가르치듯이 우리의 보잘 것 없는 행위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안에서 보시기 때문에 우리는 선행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보면, 칭의는 선행을 불필요하게 하기 보다는 그와 정반대로 선행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만든다.

 

8. 한국교회의 윤리의식의 저하는 칭의 교리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와 정반대로 칭의교리를 전혀 혹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9. 결론: 열심히 교리를 제대로 공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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