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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교절의 첫 날 유월절로 그리고 종려주일을 맞이하여(4)

 

 


종려주일을 맞이하여(4).

 

이 날은 무교절의 첫 날 유월절로 양을 잡는 날이었습니다.
가나안력으로는 아빕월이라 하고 바벨론력으로는 니산월 14일입니다.
이때로부터 일주일 간 무교절로 지키고 무교절 첫 날은 유월절과 합쳐져서
유월절은 무교절 첫 날로 간주됩니다. 태양력으로 보면 요즈음인 3-4월에 해당됩니다.

유월절은 출애굽의 마지막 재앙 장자의 죽음이 있었던 날로
히브리인 가정은 명령대로 양 한마리를 잡아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바르게 하였고
그렇게 한 집은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던 날 passover을 기념합니다.


유월절 저녁에는 일 년 된 수컷 어린 양을 잡고
뼈를 꺽지 않아야 하며 불에 구워서
무교절 기간에 먹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과 함께 먹으며
조상들이 황급히 애굽을 벗어나던 때를 기억하며 지키는 날입니다.


제자들은 유월절 음식 드실 곳을 어디서 예비 하면 되는지 주께 여쭙고, 주께서는 제자 둘을 보내시며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이를 만나게 될 것이니 그를 따라가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고 지시하십니다.


1. 도대체 누가 주를..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습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갑자기 예수께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신 뒤, 대야에 물을 담아 그동안 함께 해왔던 제자들의 발을 하나씩 어루만지며 씻기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십니다.


낡은 샌들을 신고 하루 종일 먼지나는 길로 다녔으니
때묻고 더러워진 그 발을 다른 사람에게 내밀기도 불편하지만,
더구나 주의 손에 그 발을 맡기기에는 참으로 송구스러웠을 것입니다.

더러워진 자기 발을
누군가에게 내밀고 닦아 주기를 기다리는 것은
종을 거느린 상전들이나 할 일이었지요.
그런데 하물며 하늘같은 주께서 발을 내밀라 하시다니요.


예수님의 갑작스런 행동을 지켜보던 베드로는
자기의 순서가 되자 황급히 일어나며 말하기를

"주여,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하시니
베드로는 곧 태도를 바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시면 안될까요?"~ㅎ

예수께서도 피식 웃음이 나셨을 듯 합니다.
베드로의 이런 넉살은 지금도 부럽기 이를데 없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닦으시는 주께서
그들의 발을 어루만지시며
함께 해 온 삼 년의 시간들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주의 이름으로 그들이 가야 할
그 험난한 길들을 걷게 될 그들의 발을 생각 하셨을 것입니다.

부디..
그 험한 날들을 이기고
승리하기를 축복하고 격려하시며 발을 닦으셨겠지요.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이 얼마나 사랑스러우셨을까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에
또 얼마나 눈물이 가렸을까요..

주께서 정성스럽게 닦아 주신 발을 거두고
제자들은 마음 깊은 감동과 함께
조용히 떡을 떼고 있을 때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이 왠 청천벽력 같은 말씀일까요?

충격적인 말씀에 깜짝 놀란 제자들이
서로 그 사람이 자기인지 묻습니다.
물론 결코 아니라는 강한 부정의 몸짓이지요.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시니,
유다가 짐짓 태연한 척 말하기를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어떻게 그 일을 아셨을지 궁금하기도 했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지체할 일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겠지요.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나
다른 제자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잘 알지 못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팔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인지.. 더 묻기도 난감합니다.

지금 그들의 머리 속에 채워진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은 지금 이 순간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이 순간에 대해 누가의 기록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이 긴장된 순간에.. 철없는 제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훗날 이들이 선택하고 걸어간 그 길은
대부분 순교자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 곁에 비스듬히 누워 듣던 요한은 이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베드로가 머리 짓으로 '주께서 말씀하신 자가 누군지 말하라'고 하실 때,
예수께서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는
곧 한 조각을 찍으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하시니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슨 뜻으로 하신 것인지 알지 못하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주를 따르는 이들이 헛된 곳에 마음이 팔리면 주의 말씀도 들리지 않지만
이런 헛된 마음은 무엇이든 자신의 생각을 믿어 버리는 습성이 생깁니다.

이어지는 기록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은 요한복음 15장의 기록을 통해 이 부분을 상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 기대어 들었던 요한이 가장 정확히 기억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2. 이를 기념하라

마태의 기록은 계속 이어집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떡과 잔을 나누시면서 마지막을 준비하시는 것이었으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제자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향하였다고..
거기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지 못한 채..
머리 속에는 여전히 누가 더 크고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지 내심 기대를 가지며..

누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붇는 것이라..
인자는 이미 작정한대로 가거니와.."

아마도 훗날..
이 기록을 남기는 제자들은 이날을 회상하며
뜨거운 눈물로 이 기록을 남겼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이때 성질급한 베드로가 바로 한 마디 합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그러자 모든 제자들도 베드로처럼 그렇게 말합니다.
주께서는 옅은 미소로 베드로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단코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제자들도 함께 그렇게 말하면서
겟세마네라 하는 운명의 장소에 이릅니다.

아마 지금의 마음 같아서는
볏 단을 지고 불속에라도 뛰어들 기세였을 것입니다.
곧 있게 될 예루살렘의 영광을 꿈꾸며..

오늘 우리는 다른가요?


3. 처절한 겟세마네 기도

겟세마네에 이르자 제자들을 한 곳에 앉아 기다리게 하시고,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저만큼 더 가서 고민하고 슬퍼하시며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혼자 조금 더 나아가셔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기도하십니다.

 

"내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시던 예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시니
그 시간 제자들은 피곤한 눈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들었다지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예수께서는 다시 돌이켜 두 번이나 같은 기도를 드리시는데..

통한의 새벽은 점점 다가오고..


누가는 이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얼마나 간절한 기도였는지를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새벽이 다가오자 눈물과 땀에 젖은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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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에 관하여 알아야 할것

 


 

 

사순절을 뜻하는 영어 렌트(Lent)는 고대 앵글로 색슨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독일어의 Lenz와 함께 '봄'이란 뜻을 갖는 명칭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희랍어인 '테살코스테'를 따라 사순절로 번역한다. 이는 부활주일을 기점으로 역산하여 도중에 들어있는 주일을 뺀 40일간을 주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 묵상하며 경건히 보내고자 하는 절기이다.

 

40이란 수는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받으심, 40일간 시내산에서의 모세의 금식, 이스라엘의 40년간의 광야 생활, 예수의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 등과 같이 성경에 여러 번 고난과 갱신의 상징적 기간으로 등장한다. 이에 고난 주간을 포함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의 구속을 위해 수난을 당하신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의의를 살펴보며 자신의 신앙을 재 각성하고자 비교적 긴 40일간의 절제 기간을 갖는 것이 바로 사순절이다. 사순절은 항상 수요일부터 시작되는데, 이 날은 재의 수요일, 성회 수요일, 속죄일 등으로 불리워진다.

 

사순절의 유래

 

사순절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준비하며, 주님이 겪은 수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가진 금식을 행하던 것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 유월절 전에 금식을 행했는데, 초대 교회 성도들도 신앙의 성장과 회개를 통한 영적 준비라는 차원에서 구약의 유월절 만찬을 새롭게 해석하여, 주님께서 제공하신 성찬식에 앞서 금식을 행했던 것이다. 또한 사순절이 끝나는 부활절에는 새로 영접되는 성도의 성례식이 있게 되는데, 세례 예비자들은 이때 세례와 입교(入敎)를 받기 위하여 두 주간의 준비기를 두고 금식과 기도로 신령한 훈련에 참여하기도 했다.

 

사순절 행사로서의 금식은 수세기 동안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다. 사순절의 식사로는 저녁 전에 한 끼 식사만이 허용되었으며, 물고기와 고기 등의 육류는 물론 우유와 달걀로 만든 음식까지도 금지되었었다. 그러나 8세기 이후로 가면서 이 규정은 많이 완화되기 시작해 14세기에는 금식 기도 대신에 절식 기도가 행해졌으며 , 15세기에 와서는 정오에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 관습이 되었고, 저녁 시간에도 간단한 식사인 콜레이션(collation)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사순절 기간 동안에 연극, 무용, 연애 소설 읽는 것과 같은 오락 해위는 여전히 금지되었으며, 화려한 옷을 입는 것, 좋은 음식을 먹는 것 등 호화 생활 등도 자제되었다. 대신 자선과 예배 참석, 기도 등이 권장되었다.

  

사순절의 풍습
 
 

▶ 종려나무의 재로 이마에 십자가 그리기

 

종려나무를 태운 재 혹은 숯으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는 풍습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Ash Wendnesday)에 행해지던 풍습이다. 이때 사용되는 재는 지난해 종려 주일에 사용했던 종려나무를 태워 만든 것으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대속의 죽음으로 이끌었던 인간의 죄에 대한 참회의 표시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다. 이는 또한 아름다운 풀과 꽃이 잠깐 후면 마르고 시들 듯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도 잠시 잠깐 후면 사라지고, 한 줌의 흙에서 왔던 우리도 또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엄숙한 인생의 교훈을 담고 있다. 또한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우리의 삶의 자세를 정비한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가지고 있다.

  

▶ 금식 기도

 

금식은 사순절의 가장 중요한 관습이었다. 시기와 장소에 따라 금식의 기간과 그 엄격성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속 사역을 기리고 하늘나라의 백성됨을 감사하며 그 백성 된 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돌이키게 하는 금식 기도는 초대 교회 시대부터 행해졌었다. 오늘날 행해지는 금식 기도는 엄격했던 초기의 형태에서 많이 변형되어 절식(節食) 기도의 형태로 행해지고 있다.

  

▶ 구제와 선행 베풀기

 

사순절에는 범죄한 인류를 위해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의미에서 불우한 이웃을 위한 구제와 자선이 행해졌다. 특히 사순절에 행해지는 금식 기도를 통해 주님의 고난에의 동참, 불의한 자신에 대한 회개뿐만 아니라 불우한 이웃의 배고픔과 가난을 생각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실천에 있음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랑을 본받아 이를 실천함은 성도의 마땅한 자세라 할 것이다.

 

성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의 금요일에 죽어 장사되신 주님은 삼일만인 일요일, 곧 주일날 스스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하셨다. 부활절은 이를 기념하는 주일날을 가리킨다.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절을 '파스카'(Psacha)로 불렀다. 이는 구약의 유월절(Passover)을 뜻하는 히브리어 '페사흐'( j s p )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구약의 초대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유월절 양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구속 희생을 당한 사실에 근거하여 구약의 유월절을 예수의 부활 기념일로 변용시켜 기념한데서 유래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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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과 성도의 교제에 관하여

 

성찬에 대한 피상적이해는 교회의 쇠퇴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성찬에 대한 몇가지 단상을 쓰고자 한다. 이 글을 통해서 성찬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이해가 있기를 바란다.

 

1.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성도의 사귐[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원문으로는 communio sanctorum이라고 표기되는데 이것은 성도의 사귐이라고 번역될 수 있고 "거룩한 것에 참여"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초대 교회에는 거룩한 것에 참여라는 것이 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참고:여기에 대한 최고의 권위서는 Werner Elert, Eucharist and Church Fellowship in the First Four Centuries] 따라서 성도의 사귐은 단지, 친교의 의미를 넘어서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며, 이것은 그 자체가 구원이다. 그렇다면, 성찬을 지금보다 현저하게 자주 시행하는 것은 한국 개혁교회의 과제라고 볼 수 있다.

 

2. 세례와 성찬. 우리는 이 2가지 성례만을 인정하는데, 세례는 한 번만 시행하고 성찬은 계속적으로 시행한다. 왜 그럴까? 세례는 칭의에 성찬은 성화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세례가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주어진 언약에 참여하는 것이라면, 성찬은 이 언약에 참여한 성도가 계속적으로 누리는 복이라고 할 수 있다.

 

3. 왜 목사만 성례를 집행할 수 있는가? 목사를 말씀의 종이라고 한다. 말씀은 들리는 말씀인 설교와 보이는 말씀인 성찬과 세례로 구별할 수 있다. 따라서 보다 구체적으로 목사는 말씀과 성례의 종이다. 이 점에서 한국의 목사들은 명백하게 직무 유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성도들이 1년에 2-3번 정도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영적으로 부요한 삶을 누릴 수 있겠는가? 이제 말씀의 사역자들은 보이는 말씀에 보다 관심을 많이 기울여야 한다. 세례 교육을 강화하여야 하고 성찬식을 자주 시행하여야 한다. 성찬식을 자주 시행하기 위해서는 성도들을 돌아보는 것, 즉 심방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생각해보라. 예식 만을 따진다면, 일반 성도들도 세례나 성찬을 베풀지 못할 이유가 없다. 몇번만 연습하면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세례나 성찬이 목사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성찬과 세례가 단지 그 예식 자체 뿐만 아니라 그 예식을 위한 목양, 즉 세례문답교육과 심방(권징)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3. 떡과 포도주가 각각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유월절에는 떡(무교병)만 사용된 반면 신약의 유월절인 성만찬은 포도주를 첨가시키고 있다. 주로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와 연결이 되고 따라서 포도주는 생명과 쉽게 연결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물이 아니라 포도주를 사용했을까? 또한 포도주가 생명을 지칭한다면 생명을 지칭하는 빵과 포도주의 궁극적인 차이점은 무엇일까?

 

최근에 Bread of Life, Cup of Joy라는 책이 나왔는데, 말 그대로 떡은 우리의 생명을 지칭하고 포도주는 기쁨을 지칭한다. 즉 빵과 포도주는 각자 독특성을 가지고 있다. 성찬 설교 때, 우리는 단지 성찬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본문만을 다룰 것이 아니라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 오병이어의 사건, 시편에 나오는 "구원의 잔을 들고"라는 구절,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축사하시는 장면, 등등을 통해서 얼마든지 성찬을 설교할 수 있을 것이다.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을 기쁨을 회복시키는 메시야로 나타내셨다. 그리고 이것은 이사야 55장에 나오는 "너희는 와서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는 말씀의 성취로 볼 수 있다.

 

4. 기쁨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오늘날 장례식과 비슷한 성찬식은 또한 극복되어야 한다. 주로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 성찬식이 제정된 사실때문에 한국교회는 너무 그리스도의 죽음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이것은 구속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성찬식은 십자가 전이지만, 우리는 부활 이후를 살아가는 성도이다. 제자들 역시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에 성찬식을 하지 않고, 부활하신 날 성찬식을 베풀었다. 그렇다면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동시에 고려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신약 교회에서, 성찬식은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누릴 식탁 교제를 지금 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영적 임재설에 대한 오해. 많은 사람들이 개혁파 성찬론은 영적 임재설이라는 것은 알면서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이해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기념설과 비슷하게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영적 임재설은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떡과 포도주에 임한다는 말이 아니다. 영적 임재설을 풀이한다면, 예수님의 참된 몸과 피가 성령에 의하여 떡과 피에 임한다는 뜻이다. 다시말하면, 영적 임재설은, 성령적 임재설, 혹은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의 참된 임재를 뜻한다.

 

여기서 다른 견해들과 비교를 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카톨릭: 떡과 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완전하게 변함. 이것은 사제(신부)의 중보적 역할의해 가능함. 보라! 사제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 떡을 예수님의 살로 변화시킨다.

 

루터란: 예수님의 진짜 살이 떡 "위에, 아래에, 그리고 떡과 함께" 임한다고 본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은 루터란의 독특한 기독론에 근거한다. communicatio idiomata라고 부르는데 그리스도의 양성, 즉 신성과 인성이 교류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실제 몸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 때문에 어느 곳에나 편재(ubiquity)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 루터교의 성찬론의 핵심은 기독론에 있다.

 

쯔빙글리 및 복음주의: 성찬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시키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실천적인 면에서 이 견해를 따르고 있다.

 

6. 다른 교리들과 비교해 볼 때, 개혁주의 성찬론은 성령론이 핵심인 것을 그대로 알 수 있다. 개혁주의 성찬론의 최고의 이론가는 버미글리(Peter Martyr Vermigli)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예수님의 참된 살과 피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성찬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인간이 그것을 먹을 수 있도록 하시면, 우리 육신의 입은 떡을 먹지만 우리의 영혼은 그 양식을 영혼의 입인 믿음을 통해서 먹는다고 말하였다. 그야말로 성찬은 spiritual meal인 것이다. , 성찬식에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참되게 혹은 정말로 참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다.

 

7. 카톨릭의 화체설[transubstantiation]과 루터란의 공재설[consubstantiation]은 서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몸을 지상으로 끌어내린다는 것이다. 반면, 개혁파 이론은 우리의 영혼을 예수님이 계신 하늘로 올리는 이론이다. 그래서 개혁파는 오랫동안 교회의 성찬에서 사용된 성찬용어 Sursum Corda [내 마음을 들어 올립니다]를 핵심적인 위치에 놓았다. 엄밀히 말해서 떡과 포도주에 주의 살과 피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들어 올려져서 하늘에 계신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다.

 

8. 참고로 루터란과 카톨릭은 Altar[제단]라는 말을, 개혁파는 table[식탁]이라는 말을 쓴다. 이 점에서 한국교회의 성찬은 카톨릭을 더 닮았다. 이것 또한 극복되어야 한다. 성찬은 카톨릭의 미사가 아니라 식사(Lord's Supper)이다. 식사의 시간은 즐거운 교제의 시간이다.

 

카톨릭이 성찬을 주로 sacrifice [희생제]로 보는 반면에 개혁파는 eucharist [감사제]로 본다. 성찬에 있어서, 카톨릭은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드리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개혁파는 주님으로부터 우리가 받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카톨릭에 있어서 성찬은 공로 [무엇을 드리는 것]이라면, 개혁파에 있어서 성찬은 은혜 [우리가 받는 것]로 이해된다.

 

9. 우리는 정말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가? 아니면 주일날 앵무새 처럼 외우기만 하는가? 더 나아가 우리의 삶과 예배 속에서 이 고백이 어떻게 실천되고 경험되고 있는가? 성찬론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우리의 교회를 다시 회복시키고 부흥시킬 수 있는 실천적인 이론이다. 우리의 고백이 실천으로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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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의 기독교

 I. 3 세기의 박해

II. 3 세기 - 변화

1 세기가 "시작"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면, 2 세기는 "박해"로, 3 세기는 "변화"의 세기로 명명될 수 있다.
기독교가 고통을 당하는 기간동안 태도와 교리에서 변화가 생겼다. 변화가 있었던 몇 가지 주요한 영역은 다음과 같다.

A. 교회 직분(Offices)의 변화
2 세기에 목양자와 집사의 성경적 직무에 변화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목양자의 권능과 특성이 커갔다. 그리고 성직자 계급제도를 높이는데 영향을 끼친 성직자직분의 특성이 뒤따랐다.

3 세기 중반에, 성직자 계급이 나뉘기 시작했다. 감독과 장로 사이에 차별이 확립되었다.이후에, 많은 직분(office)이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부집사, 성구 낭독자, 또는 성가대, 문지기, 시종직(acolytes)(감독 수종자), 무당(exorcists) 등이다.
오직 감독만이 임명하는 권리를 가졌다. 서방에서는 견진 성사(confirmation)의 개념이
생겼다. 견진례를 베푸는 권리는 오직 감독에게만 주어졌다.

성직을 계승하는 개념이 생겨났다.
요약하면 : 1 세기 - 성직자 없음 : 장로(감독) & 집사
           2 세기 - 평신도 위에 성직자가 등용
           3 세기 - 성직자가 여러 등급으로 나뉨

1. 이레니우스 (115-200 A.D.)
그는 사도직을 존속시키고 캐톨릭 전통을 전하려는 매체로서 감독제도 개념을 감독관구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이단에 대적하여 신앙의 보존자요 보호자로 "사도적 계승(apostolic succession)"을 강조했다.   

2. 키프리안(Cyprian)(200-256 A.D.)
그는 희생 사역의 성직자직분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회"의 교리를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그는 "감독은 교회 안에 있고 교회는 감독 안에 있다. 누구든지 감독과 같이 하지 않으면 그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B. 교회 행정의 변화
초기부터 성직계급제도의 경향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씨는 1 세기에 뿌려진 것이다. 

1. 교회 성직 계급제도의 출현에 영향을 끼친 요인
다음과 같은 요인의 영향으로 캐톨릭 성직계급제도가 서서히 발전되었다.

a.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모델들
기독교는 로마에 의해 지배받는 세상 안으로 태어났다. 로마는 종교적 의식(sacralist) 사회였다. - 로마의 행정과 종교는 분리할 수 없는 얽혀진 형태였다.
양자가 별개로 나뉘어서 존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제국의 영토 안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로마 행정의 지배를 받았고 당연히 로마의 다신교를 신봉해야 했다.
 

이 혼합 사회는 결국 로마와 참 기독교 사이에 충돌을 낳았고, 또한 기독교 안에 종교적 의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b. 유대 (구약) 체계
부분적으로는 초기의 유대교적 경향으로 인하여, 부분적으로는 교회 형태의 성직자 직분 개념에 대한 성경적 지지를 얻으려는 방법으로, 신약교회 체제(order)의 모형을 구약의 레위 성직자 직분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원래 종교적 의식 사회였다. 이스라엘 국가에 속한 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주어진 종교를 가져야 했다. 
 

구약 체제를 신약 교회의 실행에 적용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구약 성직자직분    →    신약 사제제도
구약 국가              →    신약 카톨릭주의
구약 할례              →    신약 유아세례
구약 유월절           →    신약 만찬
구약 종교적 의식   →    신약의 전례(예배식)


c. "모교회(Mother Churches)"의 승인
사도적 기원을 가진 교회들은 순수한 사도적 전통의 주(主) 매체(媒體)로 존중되었고, 자연히 이들 교회의 감독들은 큰 존경을 받았다.
로마제국은 정치적으로 감독관구로 나뉘어졌고, 각 감독관구는 여러 지방으로 나뉘어졌다. 각 지방에는 수도가 있었다. 수도에 위치한 교회의 감독들은 수도대감독(Metropolitan Bishop)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다른 지방 분구(分區) 주교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졌다.
수도대감독들에게 대주교(Archbishop), 수도대주교(Primates), 총대주교(Patriarchs)의 명칭이 주어졌다. 이 당시 그리스도인에게 영향을 끼친 3 대 중심지는 로마,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였다. 이 도시들은 무역과 여행과 정치적 영향에서도 주요한 중심지였다. 

d. 이단의 출현
이단들의 등장으로 참된 그리스도 교회(Catholic church)는 자신들을 알릴 수 있는 외적 특성들을 나타내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2. "우주적인 교회(Universal Church)" 

보편적(우주적) 교회 개념은 이 시대의 시대적 발전의 필연적 결과였다.
이 우주적 교회 개념을 조장시킨 이는 "부패한 교회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카르타고의 감독 키프리안(200-258)이다.

신학적으로, 이같은 이상한 개념은 "교회(에클레시아)"와 "왕국(바실레이아)"을 동일시함으로써 정당화되었다. 이 엄청난 오류는 "거룩한 보편적 교회"를 제안한 자들의 마음에 들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왕국은 "믿는이의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이며",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이고 보이지 않는 우주적인 실재(entity)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교회는 그 본성에 있어서 지역적이고 가시적인 것이다. 이 개념은 하나님의 왕국이 구원의 영역이기 때문에 "교회"도 구원의 영역이 된다는 논리적인 결과를 추가로 제안자들에게 제공했다. 키프리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고 있지 않는 자는 더 이상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
 (250 A.D.)

키프리안의 많은 교리는 그와 노바티안파와의 충돌의 결과로 발전된 것이다. 그는"한 개의 참된 우주적 교회(ONE true universal church)"를 제안하여 계급 제도를 반대하는 자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하였다. 

Cunningham은 이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교회 안에 오류와 부패가 진보하게 된 것은 키프리안의 지대한 공헌 때문이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개념을 거부하고 신약 형태를 고집스럽게 고수하였다. 그 결과 제도권 교회들은 이들을 "교회 분리자(Schismatics)" 또는  "이단(heretics)"으로 불렀다.

 

3. 로마 교회
이 교회는 그 당시 큰 교회 중의 하나로서(롬 1:8), 다른 이들에 의해 큰 존경을 받았다.
a.로마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였다.
b.가장 큰 교회 중 하나였다.
c.많은 교회들을 세우는데 활동적이였다.
d.많은 지역을 도왔다. 이 교회는 그들이 베푼 사랑으로 존경을 받았다.
e.로마 제국에 의해 첫 번째로 박해를 받았다.
f.그들의 순교자 명부에는 많은 유명한 순교자가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순교는 미덕으로 간주되었다.
g.논쟁이 있을 때에 권위를 가지고 말했다.
h.사도 시대에 세워진 오래된 교회였다.

모든 시선이 이 교회를 향했고, 곧 교회 권위의 가장 상좌(上座)로 여겨졌다.
로마의 감독 빅터는 교리적 문제로 소아시아 교회들을 파문했다.
키프리안은 베드로의 우월성을 가르쳤고, 로마교회 감독직은 사제의 유일성(unity)의 원천인  베드로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교황제도를 옹호하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3 세기에 로마 교회는 단지 교리의 해설자가 아닌 보호자로 여겨졌을 뿐이다. 로마 교회는 명령 또는 통제에 관한 어떠한 권리도 주장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무오하다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C. 교회 기율(紀律)의 변화.

성경은 때로는 교회 회원의 자격 박탈을 가르친다(마 18:17).
 

3 세기의 그리스도인 가운데 회개자(Penitent)라는 부류가 생겨났다. 이 부류는 파문되었다가 회개 의사를 표시한 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도록 특별한 장소에 앉아야 했다. 성직자들이 그들에 대한 벌을 정하였다.
비록 이 당시에는 참된 내적 회개가 강조되었지만, 결국 이 기율은 "고해성사 (Penance)"의 교리로 발전되는 기원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죄 가운데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와(venial sins)와 용서받지 못하는 죄(mortal sins)가 구별되었다.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후에 "밥티스마로 베푸신 은혜"를 상실하는 것으로 주장되었다)

 

D. 교회 예배의 변화

 

1. 금욕주의의 출현

금욕주의는 근본적으로 동양 신비주의의 산물이다. 금식의 날을 정하는 것과 독신주의는 금욕주의의 초기 형태이다. 많은 경우, 수요일과 금요일이 금식의 날인데,처음에는 자발적으로 정했다가 후에 교령(敎令)으로 정해졌다.

2. 예배장소

그리스도인들이 모임 장소로 사용한 초기의 건물은 로마의 공회당(basilica)을 모방한
것이다. 이 공회당은 그 당시 재판소와 증권거래소였다. 성찬을 받는 사람(communicants)은 본당에, 회개자는 현관에, 관객은 별석(別席)(gallery)에, 성가대와
감독은 후진(apse)에 모였다.

3. 상징(Symbols)
3 세기말에 사람들은 "십자가의 상징"에 신비한 효능 같은 것을 부여했다.

 

E. 밥티스마(침례) 실행의 변화
3 세기까지, 모든 밥티스마는 성인을 물에 잠그는 것이라고 확실히 공표되었던 것 같다.교회들이 규례에 성례전의 강조 사항을 넣을 경우, 유아들은 밥티스마를 받지 않았으며,
물 뿌리는 양식을 실행하지 않았다.  몇몇 교부들(특히 터튤리안)의 고증을 연구한 결과
밥티스마의 실행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얻을 수 있다.

 

1. 성인에게만 실행되었다.
2. 잠김으로 실행되었다.
3. 통상 긴 가르침이 선행되었다.
4. 자주 장대한 의식으로 거행되었다.

a. 이마와 가슴에 성호.
b. 밥티스마 후보자에게 우유와 꿀을 줌.
c. 소금을 baptizand의 머리 여러 곳에 둠
d. 256년 카르타고 공의회 후 밥티스마 전에 주문을 외우는 의식이 생김
e. 모든 밥티스마 후보자의 대부모(代父母) - 그들의 가르침을 보증

5. 효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짐
3 세기까지 밥티스마는 구원의 과정을 완성시키기 위해 지켜져 왔다. 밥티스마는 원죄를 씻어버린다고 했다.


a, 터툴리안

비록 밥티스트와 유아세례자들이 똑같이 그를 자주 인용하였지만, 터툴리안은 밥티스마와 관련한 많은 반대적인 실행에 대항했다. (터툴리안은 제도권 교회에 속했지만 후에는 회심하고 몬타니스트가 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것)터툴리안은 조기 밥티스마와 대부모의 사용을 반대했다.

b. 키프리안

대조적으로 키프리안은 밥티스마에 성수가 (따라서 성수를 뿌리는 자 -사제)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성수는 성령의 깨끗케 하는 에너지를 운반하는 매체가 된다"
또한 키프리안은 편의주의적 실행으로 물을 붓는(pouring) 것을 처음으로 지지하였다.

비록 밥티스마가 여전히 물에 잠그는 것으로 실행되었지만, 초기의 가장 큰 규례의 부패는 아프리카 교회로부터 왔다. 첫 번째 예로 Clinic Baptism을 들 수 있다.
그가 곧 죽을 것으로 여겨지자 노바티안은 Clinic Baptism을 받아들였다. 그가 종이로
자기 몸을 완전히 두룬 후 그 종이를 물에 담그어서 마치 그를 물 속에 잠근 것처럼 생각했다는 것은 주지해야 할 매우 흥미로운 것이다. 우리는 이 기사로부터 그 당시에는 물에 잠그는 실행을 올바른 양식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기 2 세기 동안 유아세례가 없었다는 사실은 많은 학식 있는 유아세례자들도 충분히
인정한 것이므로 그들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F. 주님의 만찬의 변화
     

1. "애찬(愛餐)(아가페)" 이는 초기부터 많은 교회들이 지켜 온 애찬(love-feast)이다 - 행 2:46, 유다12박해를 받는 동안 교회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모여서 음식을 나누었다. 때로는 주님의 만찬 후에 애찬이 있었으나 지나쳐서 문제가 발생했다.
 

2. Eucharist
이것은 주님의 만찬에 붙여진 초기의 명칭 중에 하나다. [헬라어 유카리스테로(Eucharisteo) - 감사(thanks)]. 성찬중시주의(sacrementalism)로 인해 주님의 만찬의 단순성과 순결성이 변했다.

 

3. 미사(Mass)

비록 오늘날 실행되는 것과 같은 미사가 얼마 동안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  용어는
만찬 때 성찬을 받지 않는 사람들(non-communicants)을 제외시킨 3 세기의 관습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예비 예배(Preliminary Worship) 후에 밥티스마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퇴장시켰다. "퇴장(dismissal)"의 라틴어 "missa"로부터 "미사"가 유래했다. 

 

G.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케 하는 영향력은 3 세기에 극에 달했다. 이는 주로 한 사람,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 학파 출신의 유명한 그리스도인 철학자(골 2:8), 오리겐의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1. 오리겐의 생애
a.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복한 그리스도인 부모 밑에서 태어남
b. 젊은 나이에 높이 평가받는 성공적인 교사가 됨
c.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193-211 A.D.)가 일으킨 박해 중, 202년에 생애의 극적인 변화를 맞이함.
그의 아버지가 순교를 당함

그의 가족이 빈곤하게 됨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강제로 도피하자, 203년에 18 세의 나이로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학교의 교장이 됨.
 

d. 그는 천재이며, 광범위한 독서와 저술과 수집을 함. 그노시스주의자 암브로우스의
서재를 가짐

e. 신플라톤주의 창시자인 이교도 암모니우스 사카스(170-243 A.D.)의 문하생이 됨.
f. 극단적인 금욕생활을 함. 맨발로 맨 땅에서 잤으며, 스스로 고자가 됨.
g. 박해에 맞서는 용맹성과 극단적인 인내로 존경을 받음.
h. 213년에 로마를 방문함.
i. 215-219 년 동안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되어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에 거주함.
j. 후에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서 231년까지 머무름. 231년에 알렉산드리아 지도자와
              다툰 후 추방당하여 영구히 알렉산드리아를 떠남.

k. 232년에 가이사랴로 가서 알렉산드리아 학교와 경쟁이 되는 다른 학교를 설립함
l. 데키우스 황제가 일으킨 박해 때 받은 가혹한 박탈과 고문의 결과로 죽을 때까지
계속하여 가이사랴에 머무름. 

 

2. 오리겐의 믿음

오리겐은 일반적으로 위대한 교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지만, 그를 숭배하던
자들조차도 그가 엄밀하게 정통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a. 비록 많은 그노시스파들과 철학적 논쟁을 가졌지만 그는 그노시스파의 신조에
               정통했다.
           b. 플라톤 철학에 몰두했다.
           c. 구약을 신약과 비유하여 알레고리로 해석하며 자주 구약을 신비적인 방법으로
               해석했다.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배운 철학에 따라 문법적 해석에서 자기 의견상
               불합리하거나 불가능한 의미가 도출될 때마다, 문자적인 의미를 벗어났다.

              그는 말하기를 "성경을 기록된 대로 이해하는 자에게 성경은 아무 소용이 없다"
              고 했다.

          d.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의 기사를 부인했다.
          e. 혼이 영원 과거부터 존재했다고 믿었다(혼의 선재).
          f.  어떤 사람의 혼이 죽은 후,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서 고등 생명이나 하등
             생명으로 귀속된다는 혼의 윤회를 믿었다.
          g. 사악한 자도 형벌(연옥?) 후 결국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 구원을 믿었다.
          h. 육체의 부활을 부인했다.
          I. 별들과 행성이 혼을 가졌다고 믿었다.
          j. 마귀들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k. 목양자를 사제로 언급한 최초의 사람 중에 하나이며 감독은 중대한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말했다.
          l. 밥티스마를 받지 않은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암시를 보였다.
         m.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후천년 견해를 주장했다. 대부분의 초기 교부들은
             전천년주의자(chiliasts)였다.

       3. 오리겐의 작품들
          오리겐을 유력한 사람으로 만든 것은 그의 작품이다. 그의 생애 동안 약 6000권의
          책을 저술했다. 초기 교부들이 작성한 현존하는 신약 인용문의 50 % 가 그가 작성한
          것이다. 7 명의 유명한 교부가 작성한 신약 인용문 목록에서 오리겐이 작성한 것이
          거의 18,000 개다.

          a. 그의 주요 작품들
            · 오리겐은 거의 모든 성경책에 대하여 주석을 썼다.
            · 그의 저서 "제 1 원리(De Principiis)"는 방대한 조직신학이다.
            · 그의 책 "켈수스 이단 반박"은 변증론이자 논쟁이다.

          b. 구약 본문에 끼친 그의 영향 - THE HEXAPLA
              헥사폴라는 6개국어 구약 대조(對照) 성경이다. 6 개의 난으로 구성되었고, 각
              난은 구약 본문의 번역본을 실었다.  
            · 그 크기가 대략 6500 페이지, 50 권의 대형 두루마리에 달한다.
            · 약 250 년에 완성되었다
            · 그는 7 명의 속기사와 7 명의 필경자와 같이 일했다.
            · 첫째 난
               히브리어 본문으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후기 마소라 본문과 실질상
               동일한 것이다.
            · 둘째 난
               히브리어의 그리스어 음역이다
            · 셋째 난
               아퀼라(Aquila)(95-137년)의 그리스어 번역본이다. 아퀼라는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로 회심한 후에도 점성술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문을 당한 후
               다시 유대교로 돌아갔다.
            · 넷째 난
               에비온파였던 심마쿠스(Symmachus)(160-211 년)의 그리스어 번역본이다.
            · 다섯째 난
               오리겐 자신의 작품으로 통상 70 인역(Septuaginst)과 동등시된다. 오리겐은
               히브리어에 대하여 불완전한 지식을 가졌으며, 그가 당시 유포된 그리스어 및
               히브리어 본문을 정열하려고 시도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 여섯째 난
               또 다른 에비온파 데오도티온(Theodotion)(160-211년)이 만든 그리스어
               번역본이다.
            · 헥사폴라는 가이사랴 도서관에 보관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이 침입하여 분실 또는
               파괴될 때까지(638년) 이 곳에 남아 있었다.
            ·  5 번째 난은 오늘날까지 모두 잔존하며, 바티칸 사본(B) 필사본, 시내 사본(K),
                알렉산드리아 사본(A), Ephraemi Rescriptus(C)에서 발견된다.

          c. 신약 본문에 끼친 그의 영향
           오리겐은 자주"추측 교정(Conjectural Emendation)"이라는 본문 비평학의
           방법론을 적용하여 신약 본문을 고쳤다. 추측 교정이란 "당신이 생각하기에 본문을
           고쳐야 한다면 고쳐라!"를 뜻한다.    
                
    H. 교리의 변화
    
         2 세기의 대표적인 이단이 그노시스주의였다면 3 세기는 일위신론(一位神論)
       (단일신론 : Monachianism)이다. 이 이름은 터툴리안이 하나님의 단일성(unity)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호하려는 시도로 계발한 가르침에서 적용한 것이다. 일위신론은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한다

         이 시대에 발달된 또 다른 이단은 "성자종속론(Subordinationism)"이다.

         1. 역동적 일위신론(Dynamic Monachianism)
            이것은 사실상 에비온 이단의 존속으로, 하나님의 단일성을 지지하는 이론이다.
            이 일위신론의 형식은 비잔틴의 데오도투스(Theodotus)가 처음으로 가르쳤으며,
            대부분은 특히 사모사타(Samosata)의 바울이 가르친 것이다.
            사모사타의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 "로고스(Logos)"는 아버지에게
            종속되었으며, 인간의 이성이 사람 안에서 존재하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다. 비인간적 권능(로고스)은 사람인 예수 안에
            들어가서 점차적으로 그를 신성화했다. 비록 그가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으로 간주될
            수 없다 할지라도"사람인 예수가 그렇게 신성화되었기 때문에 그는 신성한 영예
            (honor)를 받기에 합당하다".

            이 이론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기 보다는 사람이 하나님이 되었다고 가르친다.

         2. 양식론적 일위신론(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 :
            Patripassianism/사벨리우스주의 :
            이 이단은 신격의 세 인격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세 양식으로 생각한다.
            이 이론은 스미마의 Prakeas 와 Noetus이 최초에 주장하였다.  가장 잘 알려진
            제안자는 사벨리우스이다. 동부에서 이 교리는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ism)라고
            불린다.
            사벨리우스에 따르면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은 신성한 본질을 스스로 계시
            하는 세 양식(modes)또는 상(phase)의 명칭이다.이 이론은 '아버지가 육체가 되어서
            우리 안에 거하셨다'고 주장한다.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분은 아버지이시다. 따라서
            Patripassian 이라는 용어를 주장했다 (Patri = Father, Passion = suffering)

         3. 성자 종속설(Subordinationism)
            이 견해는 오리겐이 가르쳤다. 그는 아들이 아버지께 종속된 2 위(secondary divinity)
            를 가진 한 신(a god)이지 하나님(the God)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성령은
            아들에게 종속되고 실제로 아들이 창조한 것들 가운데 있다고 가르쳤다.

           "오리겐의 삼위일체 교리는 ....아리우스파에게 디딤돌을 제공했다"
           "아리우스파의 논쟁의 뿌리는 위대한 오리겐의 그리스도론의 모순된 원리(elements)
           에서 부분적으로 발견된다."

    I. 기억해야할 사람들

         1. 오리겐(184-254) - 부패한 성경의 아버지
         2. 키프리안(200-258) - 부패한 교회학의 아버지
         3. 유세비우스(260-339) - 부패한 사학의 아버지
         4. 어거스틴(354-430) - 부패한 신학의 아버지

III. 노바티안

     노바티안은 신약 신앙 및 반열의 노선에서 몬타니스트의 뒤를 잇는 다음 연결점이다. 2 세기의 몬타니스트 운동이 "모든 믿는이의 성직자직분 논쟁"이라면, 노바티안 분파는 "교회 기율 논쟁(church discipline controversy)"으로 불릴 수 있다.  양 운동은 신약교회의 순결과 관련된 것이다. 그들은 영 안에서 밥티스트였고 복음의 진보를 낳았다.

    A. 지도자
         노바티안파란 이름은 지도자 노바티안 때문에 명명되었다.
         노바티안은 250년경에 이교 철학의 배경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가 병들어 곧 죽을 것으로 여겨지자, 노바티안은 성경적으로 밥티스마를 받지 않고
         "clinic baptism"을 받았다. 회복된 후 그가 다시 올바르게 밥티스마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노바티안은 감독 파비안(Fabian)에 의해 로마교회의 장로(목회자)로 임명되었다.

    B. 노바티안의 분파
         데시우스 트라얀 황제의 칙령으로 교회는 가혹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우상과 황제의 수호신에게 희생물을 드렸던 자들이 교회로 다시 들어오려고
         하자, 심각한 논쟁이 고조되었다. 다음과 같은 두 견해가 주장되었다.

         1. 엄격한 기율
           배교에 대한 본성 때문에 그러한 자들은 결단코 다시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가능성이 거절당한 것은 아니었다)

         2. 엄격하지 않은 기율
            그러한 사람은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유예 기간이 지난 후 교회 일원으로
            복직될 수 있다.

            노바티안파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은 로마인 목양자 Hippolytus(?-235 A.D)이다.
            그는 이레니우스의 제자였으며 티버 강에서 순교 당했다. 그는 엄한 규율의
            주창자였으며, 스스로 로마 교회에서 분리되었다.

            노바티안은 엄격한 규율의 견해를 견고하게 지지했다. 250년에 파비안 감독이
            죽자마자, 그는 공석의 감독직을 가지고 유명한 코르넬리우스와 경쟁을 하였다.
            (코르넬리우스는 엄격하지 않은 규율을 지지했다) 코르넬리우스가 감독으로
            선정되자 노바티안은 교회의 소수 무리와 함께 교회를 떠났다.

           이 분열은 심각한 것이었다. 그를 비난하는 많은 거짓 고소가 유포되었다. 즉, 이 큰
           분열의 원인이 노바티안의 권력에 대한 개인적 야망 때문이며, 그가 당선되지 않자
           악의로 대항하는 교회를 세웠다는 거짓 고소가 유포되었다. 역사적 기록을 보면 이
           논쟁은 교회의 기율에 관한 것이며, 노바티안은 실제로 자신이 원했던 바와는 반대로
           분열되어 나온 그룹에 의해 목양자로 뽑혔다.

    C. 노바티안파의 교리

         노바티안파의 교리는 다음을 지지했다.
    
         1. 교회 일원의 순결
            교회는 모든 배교, 불순물,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2. 엄격한 교회 기율

         3. 배교자의 재 밥티스마

         4. 밥티스마
           a. 잠김에 의해
           b. 성인에게
           c. 장대한 의식이 없이
           d. 교회의 권위 위에
 
         이들 교리는 기독교계 가운데서 실제적인 영구한 분열을 낳았다. 노바티안 교회들은
         더 이상 제도권 교회들의 밥티스마를 수용할 수 없었다. 이 분열은 251 년에 발생했다.

    D. 노바티안에 대한 고소

         우리가 크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항은 노바티안이 성경적으로 밥티스마를 받지
         않았으며 소위 clinic baptism을 받아드렸다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1. 밥티스마에 관한 노바티안의 가르침
            밥티스마는 교회의 권위에 의해 그리고 오직 잠김에 의해 실행되어야 한다고 명확히
            가르쳤다. 그는 제도권 교회로부터 온 모든 자들에게 다시 밥티스마를 베풀었다.
            이 사실은 비록 준비된 증거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가 올바르게 밥티스마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밥티스마는 사람이 아닌 권위가 중요하다.
            비록 노바티안이 성경적으로 밥티스마를 받지 않았지만, 그는 밥티스마에 관한
            권위가 교회와 관련한 것이지 밥티스마를 집행하는 사람과 관련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노바티안파의 밥티스마는 유효한 것으로 여겨진다.

    E. 노바티안 운동의 영향
   
        그 이름과 초기 시작은 로마였지만 분열을 일으킨 의견은 널리 퍼졌고, 운동은
        신속하게 확산되었다.

        로마에서 보다 앞서서 250 년에 카르타고에서 유사한 분열이 일어났다. 키프리안이
        감독으로 성급하게 선임되자 노바투스라는 이름의 인자한 목양자와 Felicissimus라는
        이름의 집사가 교회를 떠났다. 그 때 회개자에 대한 논쟁에서 키프리안이 보다 더 엄격한
        견해를 가졌으나, 분열 후 노바투스는 그의 입장을 바꾸고 엄격한 노바티안 운동에
        합류했다.

         254년에 이들의 반대자들은 이들이 프랑스를 이들의 교리로 오염시킨다고 고소했다.

         역사가 샤프는 노바티안파가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인 진지함 덕분에
         동쪽으로 여러 지방에 전파되었고 서쪽으로는 6 세기까지 전래되었다고 언급했다.
         이들은 피리기아에서 몬타니스트의 잔류자들과 결합했다.

         "노바티안파는 최초의 재침례교도(Anabaptist)였다 : 반대자들의 사역과 성례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참된 교회가 될 것을 주장하며, 카톨릭 교회로부터
        온 사람들 모두에게 다시 밥티스마를 받을 것을 필수적으로 강요했다. 이 무리는
        소아시아에서 크게 세력을 얻었는데, 거기서 많은 몬타니스트가 합류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노바티안파는 6∼7 세기까지 잔존했다"

        "로빈슨 박사는 그들의 존속이 종교개혁과 재침례교도 운동의 출현때까지라고 밝혀냈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바티안파의 본을 따랐고  제국 전역에 걸쳐 순결한 교회들이
        세워졌으며, 200 년 동안 번창했다. 후에 가혹한 법 때문에 부득불 희망자를 은밀히
        가입시키고 몰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만 했을 때, 그들은 다양한 이름으로 특징을
        이루며 종교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그들의 순결한 삶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들을 '순결한'을 뜻하는 카타리(Cathari)라고
        불렀다. Mosheim은 말하기를 "더욱이 그들은 캐톨릭교회에서 온 자들을 다시 밥티스마
        를 베풀었다. 다른 단체에서 온 자들을 다시 밥티스마를 주었기 때문에 재침례교도라고
        불렸다. 제 4 차 라테란 공의회는 이 재침례자들을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법령을 포고
        했다. 로빈슨 박사는 그들을 Trinitarian Baptist(삼위일체를 믿는 밥티스트) 라고 했다.
        그들은 교회의 독립성을 주장하고 존엄과 권위에 관하여 모든 목양자들의 동등성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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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두려울 때 -옥한흠 목사 -




(요한복음 12장 1절-11절)

1.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2.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쌔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자 중에 있더라


3.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8.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9.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오늘의 설교


사람이 두려울 때 -옥한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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