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안수: 문화적 해석에 대한 반론 성경의 여인

 

여성에 대한 바울의 차별을 문화적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 몇가지 반론을 제기하고 싶다.

 

1. 서론적으로, 만약 바울이 성경에서 "여자들이 군대에 가는 것을 금하는 것은 옳다. 왜냐하면, 여자는 전쟁을 할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고 해 보자. 이것은 당연히 그 당시 문화를 반영한 것으로 오늘날 적용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여군이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옛날과 달리,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첨단 장비의 역할이 커지기 때문에 일정 부분에서는 보다 섬세한 여성들이 전쟁을 더 잘할 수도 있다.

 

2. 만약 바울이 성경에서 "여자들이 가르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옳다. 왜냐하면, 여자는 가르칠 만큼 교육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고 해 보자. 이 역시 그 당시 문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오늘날 적용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옛날과 달리 오늘날 여성들 중 상당수가 남자들 보다 월등한 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자들이 남자들 보다 가르침에 있어서 더 나을 수도 있다.

 

1. A. 미국 기독교 중 어떤 교단은 여성의 군대에 가는 것을 총회적인 차원에서 반대를 결의하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여성은, 특히 젊은 여성은 생명을 잉태할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리 보호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바울이 성경에서 이렇게 썼다면, 그의 논증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것은 문화적 상황에 관계 없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아야 한다.

 

2. A. 여자들이 가르치는 것을 금한 이유를 사도 바울은 창조 질서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그의 논증 자체는 문화적 상황과 관계가 없고 따라서 그의 주장은 오늘날 교회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물론 바울도 인간이고, 그 당시 문화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여성에 대한 바울의 논증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대한 계시에 훨씬 더 분명하게 근거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는 그 당시 문화가 바울에게 얼마만큼 영향을 주었는지 규명하기가 심히 어렵다.

 

3. 문화적 해석을 강조하는 입장은 성경을 폭넓게 이해하게 하는 장점을 가짐과 동시에 성경을 전문가의 성경으로 고착시킬 위험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 당시 문화를 전혀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문화 보다는 텍스트 자체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 문화는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보조 수단일 뿐이다. 우리는 그 당시 문화를 정확하게 알아내는데 너무나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성경은 그 자체로 신자들에게 권위를 가지지만, 문화에 대한 연구는 시대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여성이 머리에 쓰는 것조차도 쉽게 그 당시 문화였다고 단정하기 쉽지만, 내가 읽은 한 박사 논문은 머리에 쓰는 두건은 그 당시 문화와 별 상관이 없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였다. , 문화에 근거한 해석은 문화에 대한 연구 결과가 달라지면, 그 설득을 잃어버릴 위험을 갖고 있기에 불안정하다.

 

4. 여성 사사와 선지에 근거한 여성 안수 옹호에 대하여. 이것은 역사적 본문을 규범적 본문으로 해석하는 대표적인 오류이다. 바울 사도가 여성 사사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여자 선지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바울 사도는 그 누구 보다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자에게 가르치는 것을 금하였을까? 그 이유는 그가 역사적 사실이 교회의 영구적인 규범으로 받아 들일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만약 여성이 사사가 된 역사적 사실 하나를 근거로 해서 그것을 오늘날 지켜야 할 규범으로 본다면, 성경의 수많은 다른 역사적 사실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부담이 생긴다.

 

5. 문화적인 해석으로 본다면, 오늘날 수많은 나라에서 여성 차별을 받아들이고 있는 나라에서는 여성 안수에 옹호에 대한 설득력이 현저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교회 문화는 과연 여성 목사를 받아들일 정도의 성숙한 문화인가? 심지어 미국에서 조차 여성 목회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여성 안수에 대한 문화적 옹호는 오히려 문화적 옹호에 갖히는 위험을 동시에 안고 있는 것이다. 문화는 앞으로 어떻게 바뀔 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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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안수 반대자들이 극복해야 할 과제 성경의 여인

 

최근 여성안수에 대해서 보수적인 입장에서 쓴 글을 몇개 읽어 보았다. 여성안수에 반대하는 나로서는 그 결론에는 찬성하였지만, 그 결론에 도달하는 논의 과정이 여성안수를 찬성하는 사람에 비해서 훨씬 엉성하다는 것을 보고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1. 성경은 여성안수를 금하는가? 금한다면 어떻게 금하는가?

성경에 명시적으로 여성안수를 금한다는 말은 없다. 이 말은 성경에 "여자에게는 안수를 금하느니라"는 구절이나 그에 준하는 구절이 없다는 말이다. 또한 머리에 손을 얹는 안수라는 말의 의미도 상당히 부정확하다. 실제로 영어권에서는 여성안수라는 말 보다는 여성 임직 (Women in Office)라는 말을 쓴다. 따라서 논란이 되는 부분은 안수가 아니라 직분에 관한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안수가 논쟁의 핵심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여성 안수를 금한다는 말을 신중하게 사용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여성안수 금지는 성경에 대한 해석이며, 그 해석이 올바르게 제대로 적용되었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성경에서 여자에게 명시적으로 금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다스리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보수적인 성경 해석가라면 그렇게 믿을 것이다.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가르치는 것"을 안수와 거의 동의어로 보고 있는데, 안수가 가르치는 것과 관련이 전혀 없을 수는 없겠지만, 전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적으로 안수와 "가르치는 것""다스리는 것"이 무슨 연관이 있나를 살펴야 한다. 이 점에서 두 질문을 할 수 있다. 첫째, 교회의 직분자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안수를 해야 하는가? 둘째, 안수는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에 국한하는가?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여성안수를 반대하면서, 거의 대부분 이 본질적인 문제들을 건너뛰고 있는데, 만약 이 부분에 대해서 명확한 설명이 없다면, 여성안수 반대의 논리는 사상누각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첫째 질문에 대하여는 교회 안에서 여러 전통이 있다. 직분을 위해서 안수가 필수적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또한 이 부분에 있어서 성경은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 물론 성경에 안수를 통하여 직분을 세운 예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교회 안에서 보편적으로 필수적으로 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안수가 임직과 필수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 집사보다 훨씬 큰 역할을 하는 권사나 전도사에게는 안수를 하지 않는다. 왜 어떤 직분에는 안수를 하고 어떤 직분에는 안수를 하지 않는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따라서 "여자가 목사와 장로가 될 수 없다"는 것과 "여성에게 안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조심하게 구별을 하여야 할 것이다. 여성안수를 반대하기 위해서는 목사가 장로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안수가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과제가 있는 것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선교사와 전도사 직분이다. 아직은 논란이 되고 있지 않지만 신학교 교수도 여기에 포함된다. 여자 선교사와 전도사들은 실제적으로 남자 선교사나 목회자가 없는 곳에서, 가르치는 역활을 하고 있다. 또한 출교까지는 아니더라도 교회의 영적인 대부분의 일을 관장하고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성경이 명시적으로 금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이었다. 여성에게 안수가 금지되는 것은 안수가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에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지, 여성 안수 그 자체의 이유 때문은 아니다. 성경 어디에도 안수 자체의 이유 때문에 여성에게 안수를 금지하는 곳은 없다. 그렇다면, 선교사나 전도사에게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을 허용하면서 안수는 주지 않는 것은 일관성이 없다. 성경이 명시적으로 금하는 것은 허용하면서, 성경이 비명시적으로 말한 것은 금하는 불일치는 어떻게 하든지 설명이 되어야 할 부분이다.

 

둘째 질문은 집사직과 특별히 관련이 있다. 집사직을 어떻게 볼 것인가? 만약 집사직을 순전히 봉사직으로만 보지 않고 다스림이나 가르침의 권한도 일부분 가지고 있다면, 여자는 집사가 될 수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른 명백한 성경적인 이유가 없는 한, 여자도 집사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적어도 부분적으로 집사에게는 여성에게 안수가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 심지어 개혁주의를 표방한 적지 않은 신학자들도 집사직은 여성에게도 개방을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점에서 여성안수에 대한 논의가 지나치게 장로와 목사, 특히 목사에 집중되는 것은 바람직하기 못하다. 여성안수를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보수주의자들이 성경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만 하면서, 실제 교회 현실에 있어서 일관성을 지니지 못하고 교회의 현실이나 편의에 따라 실천한다면 조롱거리가 될 뿐이다.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용어에 대한 의미부터 명확히 정리를 하여야 한다. 내가 보기에 보수적인 글은 대부분 두리뭉실하고 정리가 되어 있지 못하다. 앞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성실하게 답변을 할 준비를 해야 하고, 교회 현실이란 핑계로 자신들의 비일관성을 변명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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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안수와 남녀 평등 성경의 여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남녀평등은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만약 여기에 의의를 달면, 전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게 될 것이다. 심지어, 남녀평등 자체가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성경을 판단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남녀 평등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구절들을 문화적으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후대에 첨가되었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하나의 큰 기준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완전히 백지 상태에서 성경을 읽을 수는 없지만, 성경자체가 최고의 진리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 앞에서는 인간의 이성이나 일반적인 상식 마저도 접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남녀평등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무엇보다, 우리는 성경이 남녀평등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적어도 2000년 전에는 현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남녀 평등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남녀평등이란 잣대로 성경을 읽게 되면 성경을 왜곡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성경을 읽어 보면, 남녀가 평등하다는 말씀도 보이고 그렇지 않은 말씀도 보인다. 예를 들면, "남녀가 차별없이 하나다"라는 것과 "여자는 복종하라"라는 말이다. 자연히 여성안수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전자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후자를 강조한다. 그런데, 이 두 개념이 서로 상충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 둘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 본성은 타락해 있기 때문에 평등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정말로 평등한 사회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평등한 모습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평등한 사회는 복종을 배제하는 사회일까?

 

일반적으로 평등이라고 하면, 친구와 친구 혹은 국가간의 연합과 같은 모델을 떠 올린다. 친구는 서로 각자가 완전한 독립을 유지하면서 우정이라는 끈으로 연합한다. 국가간의 연합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사이에서는 서로에 대한 일방적인 복종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모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평등한 사회는 바로 삼위 일체 하나님 그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 삼위는 각각 온전한 하나님으로 절대적으로 하나이시지만, 성자는 성부께 철저히 복종한다. 얼마나 복종하는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성령님 역시 자의로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철저하게 성자께서 주시는 말씀만을 교회에 주신다. 현대의 남녀 평등이라는 개념을 보면, 삼위 일체만큼 불평등한 사회는 없을 것이다. 왜 성자만, 왜 성령만 복종해야 하는가?

 

일반적인 가족의 경우에도 한 번 살펴 보자. 아버지와 아들이 평등한가? 이렇게 누가 묻는다면 정말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똑같으며 다름이 없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에게 권위를 갖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두셨기 때문이다. 아들은 아버지께 복종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할 때 진정으로 평등한 가족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부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부부간의 관계가 친구 대 친구의 관계에 가까울까 아니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가까울까?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남녀 평등에 대한 차이가 드러나게 된다. 우리가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 모델 모두가 하나 됨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인가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하나인가? 아니면 친구와 친구와의 관계처럼 하나인가?

 

남편과 아내는 하나이다. 어떻게 하나인가? 바로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인 것처럼 하나이다. 어리석은 우리들을 위해서 성경이 좀 더 쉽게 비유했듯이, 부부간의 관계는 오른 손과 왼손의 관계가 아니라 머리와 몸의 관계처럼 하나이다. 머리가 높은가 아니면 몸이 높은가라고 "평등"에 대해서 질문을 한다면 실로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다.

 

부부간의 관계는 그렇다 하더라도 이 논리를 교회에까지 확장시킬 수 있을까? 확장시킬 수 없다고 본다면, 그는 현대의 개인주의라는 사고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일 것이다. 교회와 가정이 구분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두 개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만약, 여자에게 다스림을 허용한다고 하자. 여자에게 가르치는 것을 허용한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아내가 목사이거나 장로인 남편은 자신의 아내에게 다스림을 받거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이 명시적으로 금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여러 곳에서 여자에게 설교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 그리고 나는 이 글에서 적어도 이 금지가 남녀평등이라는 개념과 상충하지 않음을 증명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 참된 성도들은 세상이 가르치는 남녀평등에 따라 살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남녀 평등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 가야 할 것이다.

 

사실, 절대적인 남녀평등의 개념은 오늘날 현대사회에도 통하지 않는다. 물론 극단적 패미니스트의 경우에는 절대적인 평등을 추구하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까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표적인 것이 여성에게 군대에 갈 기회를 제한하는 것을 약자에 대한 배려라고 보지 불평등이라고 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어떤 이유(궁극적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에서 여자 성도들에게 일정한 권한을 제한시켰다. 그것은 여자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여자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임이 분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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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교회와 자매관계에 있는 화란개혁교회가 최근 여성안수(보다 정확한 용어로는 여성임직)를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 슬픔을 금할 수 없다. 진리를 추구하였던 이 교회의 이탈로 인하여 이제 고신교회는 이전 보다 더 외로운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보다도 훨씬 더 진리에 민감했던 교회가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고신교회도 결코 안전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솔직히 여성안수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토론할 필요가 없다. 이미 토론할 수 있는 내용들은 다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단지 어느 해석을 따를 것인가의 문제일 뿐이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도 뭔가 새로운 해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여성안수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이전에 여성안수를 받아들였던 신학적 논의 과정을 그대로 답습하였을 뿐이다. 그들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동성애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이다.

 

여성안수는 결국 성경해석의 문제이고 성경해석의 문제는 성경해석 방법의 문제이다. “오직 성경의 원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개신교회는 로마교회와는 달리 성경은 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오직 성경을 통해서 해석되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오직 성경의 원리를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성경해석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성경 해석의 방법이 달라지면 해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떤 성경해석 방법을 취할 것인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은 성경 해석에 대해서 2가지 중요한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성경의 명료성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치성에 관한 것인데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 두 항목은 다음과 같다.

 

7.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은 자체로서 똑같이 명백하지도 않으며 만인에게 똑같이 분명하지도 않다. 그러나 구원을 위하여 반드시 알고, 믿고 준수해야 할 바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아주 분명하게 공표되었고 열려 있기 때문에 배운 자든 못 배운 자든 통상적인 방편을 합당하게 사용하여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다.

 

9. 성경을 해석하는 정확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이다. 그러므로 어떤 성경구절의 참되고 완전한 의미(여럿이 아니고 하나이다)에 대하여 의문이 있다면, 보다 분명하게 말하는 다른 구절을 가지고 살피고 깨달아야 한다.

 

성경은 본래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평신도들이 함부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종교개혁 당시 로마교회의 공식 입장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교육을 받지 못한 평신도들이 읽지 못하도록 성경 번역을 원천봉쇄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거짓된 로마교회의 교리에 반하여 종교개혁가들은 목숨을 걸고 성경을 번역하여 모든 성도들이 성경을 읽는 시대를 열었다. 성경이 어렵다는 로마교리에 대항하여 종교개혁가들은 성경의 명료성을 주장하였다. 이 점에서 7항은 대단히 중요한 신앙고백이다.

 

 

성경의 명료성은 모든 성경의 내용이 이해하기에 쉽다는 말은 아니다. 7항이 분명히 언급하듯이 성령의 명료성은 구원을 위하여 알고 믿고 준수해야 하는 것들에 한정된다. 이것들은 아무리 못 배운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알 수 있다. 이것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전문적인 신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신학 공부가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시골 할머니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데 고대근동 문화에 대해서 10년을 넘게 연구한 학자가 그것을 모를 수도 있다. “인자(人子)”를 그냥 단순히 인간의 아들로만 이해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여성안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이 문제는 우리가 알고 믿고 준수해야 하는 항목이기 때문에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그렇게 많은 연구를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여성안수 문제를 문화적/역사적 해석을 통하여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여성안수와 같은 중요한 교리적 문제가 문화적, 역사적 해석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 때로는 전문 분야의 연구자들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교리적인 문제를 결정하는 데에까지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에 그렇다면 성경은 중세 기간처럼 전문가들의 손에 놀아나게 될 것이다. 또한 문화적 해석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나중에 새로운 사료가 발견된다면 성경 해석은 또 달라질 것이다. 그러면 성경해석이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믿고 준수해야하는 내용은 오직 성경의 명료한 가르침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의 명료성과 더불어 일치성도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원리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저자가 한 분이시기 때문에 성경 안에 상호 모순이 있을 수 없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여성안수를 찬성하였고 바울은 반대하였다는 식의 해석방법을 받아들일 수 없다. 물론 상호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보기에 그러한 것뿐이다.

 

성경을 보면 여성안수를 찬성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여자 사사 드보라의 예)도 있고 반대하는 구절(여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금하노니)도 있다. 아마도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구절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옹호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따르면 보다 분명하고 명료한 구절에 근거하여 그렇지 않은 것들을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분명하고 명료한 구절은 무엇인가?

 

필자가 생각하기에 여성안수에 대한 가장 분명하고 명료한 성경구절은 딤전 32절과 9절이다. 그곳에 보면 감독과 집사의 자격은 한 아내의 남편이다. 본문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구절은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 않을 정도로 분명하다. 동성결혼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남편은 남자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다른 구절들은 가장 명백한 이 구절에 비추어서 해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성안수에 대한 논의는 결국 어떤 성경해석 방법론을 취할 것이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모두가 저마다 자신의 시각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있다. 어떤 시각도 가지지 않고 순수하게 성경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바른 시각을 가지는 것이다. 성경의 명료성과 일치성에 대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해석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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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안수(여자 목사, 여자 장로)를 금하는 성경적 교훈

(Biblical Teaching against Women’s Ordination)

 

(조영엽 박사)

 

 

(딤전 2:11-12) “11.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고전 14:34-35) “3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딤전 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딛 1: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여성 안수를 금하는 가장 핵심 되는 성구들이다. 그만큼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이 말씀들을 아전인수 격으로 달리 해석한다.

 

1. 디모데전서 2:11-12 주해

 

(딤전 2:11-12)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 말씀은 여자는 ① 전적으로 순종하라 ② 조용히 하라 ③ 배우라 ④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⑤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요약된다.

 

(1) 전적으로 순종하라.

 

“일절 순종함으로”(엔 파세 휘포타게, ; in all subjection; 모든 복종으로, 전적 복종으로)는 전적 완전 복종(full submission)을 가리킨다. 이 단어(복종)는 신약에 4회 나타난다(고후 9:13; 갈 2:5; 딤전 2:11; 3:4). “복종”(휘포타게, ; subjection; 복종)은 영어성경 KJV에는 복종(subjection)으로 바로 번역되었다. “휘포타게”는 군사적 용어로서 이는 하급자가 상관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을 뜻한다. 휘포타게의 동사 휘포타소( )는 후포(; under; 밑에)와 타소(; to arrange; 정열하다, 배치하다)로 구성된 합성어이다. 파세(; all, 모든)는 복종을 강조하는 형용사이다. 따라서 병사가 상관에게 절대 복종하듯이 여자가 권위에 전적으로 복종하라는 말씀이다. 여 성도는 교회에서는 감독자(목사와 장로)에게 복종하여야 하며, 가정에서는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한다(딛 2:5; 딤전 2:11). 그러나 한국어로는 순복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순복은 부드러워 귀에 거슬리지 않는 반면 의미는 그대로 살아 있으니 여자에게는 순복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여자가 권위에 전적으로 순복하는 것은 여자가 취할 적절한 자세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되는 것만 순복하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2) 조용히 하라.

 

“조용히”(엔 헤쉬키아, ; in silence; 조용히)는 침묵을 뜻한다. ‘헤쉬키아’가 KJV, RSV에는 silence(침묵, 조용함)로, NASB, NIV에는 quietness(고요함)로 번역하였다. 헤쉬키아는 방해받지 않는 조용과 고요의 상태를 의미하거나,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조용하게 있는 태도로서의 침묵을 의미한다. 본문에서 헤쉬키아는 종교집회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서 조용하게 배우는 자의 자세를 가리킨다. 여자가 공예배시에 말을 하여 예배를 방해하거나 또는 질문하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이 단어는 완전한 침묵 또는 함구무언(complete silence or no talking)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행 22:2; 살후 3:12; 딤전 2:11; 벧전 3:4). 전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또는 침묵한다는 단어는 씨가오(; to be silent; 조용히 하다, 침묵하다)이다(눅 9:36; 18:39; 고전 14:34).

 

(3) 배우라.

 

“배우라”(만다네토, ; let learn; 배우라)는 단어는 3인칭 · 단수 · 현재 · 명령형으로 사람이 행하여 오는 전례·관습·규례 등을 주시하여 관찰하므로 배우고 지식을 증가시키라는 말씀이다. 이 단어는 단순히 강의를 통하여 지식적으로만 배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학생들이 실습을 통하여 지식을 획득 증가시키는 것과 같다. 본문에 누구에게 배울 것인가에 대하여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과 성경원리에 입각하여 고찰할 때 의심 없이 교회의 지도자로부터 배우라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여자는 교회에서나 어떤 종교적 모임에서도 조용히 배울 것을 가르친다.

 

(4) 여자의 가르치는 것(강도권)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자의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여자가 남자 어른들을 포함한 전체 회중 앞에서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가르치다”(디다스코, ; to teach or instruct; 가르치다, 교육하다)라는 단어는 가정에서 아버지가 자녀들을, 남편이 아내를,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을, 교회에서 교역자들이 평신도들을 교훈할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가르친다”는 이 단어는 주로 사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사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회당들·성전·마을·들판·해변가 등에서 제자들과 수많은 무리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하실 때 사용하였다(마 5:2, 19; 7:29; 9:35; 11:1; 13:54; 21:23; 26:55; 28:20; 막 4:1; 6:6…). 그리고 사도들과 가르침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선포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행 4:2; 5:21, 25, 42; 11:26; 15:35; 18:11, 25; 20:20; 21:21, 28; 28:31; 엡 4:11; 딤전 4:11; 6:2; 딤후 2:2). 그러므로 본문에서 가르침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선포함이며, 이것은 설교를 포함한다. 이 직분은 족장들이, 제사장들이, 랍비들이, 감독들이, 목사들(엡 4:11)이 감당하여 왔다.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원문에는 “나는 허락하지 않는다”(우크 에피트레포, ; I do not permit)라고 되어 있다. 이 말씀은 부정을 나타내는 매우 강한 표현이다.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 단어는 충고나 권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암시한다. 따라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공예배시 여자가 남자 어른들을 포함한 전체 회중에서 교역자(감독=장로=목사)로서 설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강도권을 말한다.

 

칼빈(John Calvin)은 고린도전서 14:34 주석에서 “교회에서 가장 최고의 위치를 점령하는 가르침과 설교를 위한 책임은…여성이 교회 전체에서 권위를 가짐은 얼마나 부당한가? 가르침의 직분은 교회에서 최고의 직분이요, 결과적으로 복종하는 것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1)

 

그러면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여자의 가르침 자체를 부인하는 말씀인가?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교훈하는 의도는 무엇을 말하는가? 여자의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여자가 가르치는 것 자체를 금하신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여자가 남자의 권위와 지도하에서 가르치는 것은 귀한 일이다. 사도 바울은 늙은 여자들로 하여금 젊은 여자들을 가르치라고 권면하였고(딛 2:3-4), 디모데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는 사내 아이인 디모데를 가르쳤다(딤후 1:3-5). 이와 같이 교회에서 여성도들이 주일학교 반사·성가대·구역장·전도회·기타 여러 면에서 가르치는 일·전도·상담·봉사·구제 등은 매우 중요하므로 강조되어야 한다.

 

(5) 남자 주관하는 것(치리권)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자의 남자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을, 교회에서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남자”(아넬, ; an adult male, husband)는 남자 어른 또는 남편을 뜻한다. “주관하는 것”(아우덴테인, ; to exercise authority; 권위를 행사하다) 이 단어는 권위를 행사하다(아우덴테오, ; to exercise authority or to domineer over, 위에 권위를 가지다 또는 지배하다)의 현재·부정·능동이다. 현재 부정사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로서 행동의 계속이나 반복개념이 있다.

 

“허락지 않는다”(우크 에피트레포, ; do not permit;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가르치는 것과 연결되어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일, 남자 위에서 권위를 행하는 일을 계속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은 성경이 허락하지 않는다.

 

성경은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선언하였다(고전 11:3; 엡 5:23). 성경은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를 사람의 머리와 몸으로 비유하였고,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도 사람의 머리와 몸으로 비유하였다(엡 1:22, 23; 4:15; 5:23; 골 1:18). 머리는 온 몸과 지체들을 주관하고 다스리듯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주관하고 다스리듯이, 남자는 여자를 주관하고 다스리는 것이 성경의 원리이다. 여자가 남자 어른들이나 남편을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이유는 여자는 순종적·복종적·종속적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여자를 남자의 몸으로 삼으신 제도와 위계질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때로부터 하나님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설정하신 원리요 제도이다. 주관하는 일(치리권)은 교회에서는 감독(장로)의 임무이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히 13:17)고 하였다. 여기서 다스리며 권면하는 자들과 인도하는 자들은 동일한 직분을 맡은 하나님의 사역자들 곧 장로들을 가리킨다(딤전 3:5; 5:17).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여자가 남자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여자의 목사 또는 장로 되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목사와 장로는 남자 어른들을 포함한 전체 회중을 가르치는 직분과 다스리는 직분이다. 이 직분들은 남자들에게만 주어졌으므로 여자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2. 고린도전서 14:34-35 주해

 

(고전 14:34-35)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신도들을 향하여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권면하였을 때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귀에는 그 말씀이 하등의 이상한 말씀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고린도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이 무엇인지 자신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자”는 일반적으로 여자들(구나이케스, ; women; 여자들)로서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과 결혼한 여자들 전체를 가리킨다.

 

 

(1)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공예배(Public Worship)와 관계된 교훈의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배우지 못하고 교양이 없는 일부 여신도들이 예배시간에 무질서하게 질문 아닌 질문들을 하거나 또는 말을 하므로 예배를 방해하지 않도록 교훈하였다. 즉 그런 질문들을 즉시 중단할 것과 장기적으로는 그들을 교육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교훈하였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예배 도중에 자기 남편에게 질문하는 것까지도 규제하였다. 교회에서 무엇을 배웠어도 잘 알지 못하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배우라고 하였다(14:35).

 

“교회에서”(엔 타이스 에크레시아이스, ; in the churches; 교회들에서)는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모이는 어떠한 집회에서도(in any assemblies) 잠잠하라는 말씀이다(Calvin, Bengel, Meyer, Ellicott).

 

“잠잠하라”(씨가토산, ; let be silent; 조용히 하라, 잠잠하라, 침묵하라). 이 단어는 디모데전서 2:11에 “조용하라”(헤쉬키아, )는 말씀보다 강한 표현이다. 이 단어의 시상은 3인칭·복수·현재· 명령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무조건 순종을 요구한다. 그리고 원문에는 여자가 잠잠하여야 할 이유를 “왜냐하면”(가르, ; for, because; 왜냐하면, …때문에) 이라는 접속사가 밝히고 있다. 즉 여자가 잠잠하여야 할 이유는 여자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영적 은사들(Spiritual gifts)과도 관계된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에는 방언과 예언도 포함된다. 사도 바울은 본 장(고전 14장)에서 방언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고, 오용과 남용으로 인한 무질서와 혼돈을 방지하기 위하여 방언에 대한 규례를 상세하게 교훈하면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하였다.  따라서 영적 은사로서의 방언이 존재하던 사도시대에도 방언이 여자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물며 영적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닌 계속적이고도 반복적인, 뜻이 없는, 정신나간 사람의 헛소리 같은, 중언부언하는, 이해가 되지 않는 소위 현대 방언이란 말할 나위도 없다. 성경적 방언은 외국어였으며, 계시의 완성(기록)과 더불어 자연히 끝났으므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3)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여자의 강도권과도 관계되는 교훈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디모데전서 2:12, “여자의 가르침을 허락함이 없나니”라는 말씀과 맥락을 같이한다. 즉 남자 어른들을 포함한 전체 회중 앞에서 가르치는 것(강도, 설교)과 전체 회중을 다스리는 것(치리)을 여자에게 허락함이 없다.

 

(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여자의 치리권과도 관계된 교훈의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말씀의 근본적 권위는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상기시키면서 여하한 의문이나 반대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였다. 이 말씀은 여자가 가정에서는 남편에게, 교회에서는 가르치는 자와 다스리는 자에게 순종하에 있음(to be under obedience)을 가리킨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본절에서 “율법에 이른 바와 같이”라는 말씀은 “오직 복종할 것이요”라는 말씀과 연결되었다. 그리고 여자의 복종은 창조의 질서와 타락의 결과 즉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는 말씀과 연결하여 해석하여야 정당하므로 본절에서의 율법은 모세오경을 가리킨다고 해석하여야 마땅하다.

 

“오직 복종할 것이요.”(휘포타세스도산, ; let them be subject; 그들로 하여금 복종케 하라)는 휘포다소()의 3인칭·복수·현재·명령·중간태이다. 중간태(middle voice)는 주어가 어떤 면에서 그 주어 자체에 관계되거나 또는 주어 자체가 직접 행동(동작)에 관계하는 것을 나타낸다.2) 그러므로 “복종할 것이요”라는 말씀은 여자들 자신들이 주체가 되어 자원하여 직접 복종할 것을 가리킨다. 여자가 가정에서는 남편에게 그리고 교회에서는 목회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요, 명령이요, 여자의 미덕이다.

 

사람의 머리는 온 몸을 주관하고 다스리며 온 몸은 머리의 명령에 복종하듯이, 여자는 가정에서는 남편에게(엡 5:22) 그리고 교회에서는 영적 지도자에게(고전 14:34; 딤전 2:11-12) 복종하여야 한다. 이것은 질서의 개념이요, 불평등의 개념이 아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만 복종을 요한다.

 

3. 디모데전서 3:2; 디도서 1:6 주해

 

(딤전 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딛 1: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디모데전서 3:2절과 디도서 1:6절 말씀은 남녀의 성별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중혼자가 아니어야 한다는 데 그 진의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목사는 한 남편의 아내도, 독신녀도 무방하다고 한다.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라는 “말 때문에 여자는 그 직분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지나치게 일방적인 것이라 보아야 한다”(『교역과 여성 안수』, pp. 103-104) 라고 한다.

 

반증(反證):

 

(1) 본 절은 교역자의 자격에 대하여 말씀하였다.

 

감독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도 무흠하고 고상한 인격자이어야 한다. 교역자는 결혼관에 있어서도 성경적이어야 한다. 교역자는 이성적으로도 깨끗함을 요구한다. 성경적 이성관 결혼관은 일부일처(one man-husband and one woman-wife)이다. 결혼은 성적 순결성(sexual purity)을 강조한다. 사람이 결혼하였을 경우 한 아내만을 소유한 자(only one wife at a time)만이 교역자의 자격이 있다.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며”라는 말씀은 결혼하지 않은 미혼 독신(single)이나 또는 결혼은 하였으나 아내가 사망한 연고로 홀아비가 된 독신은 성직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은 아니다. 이 말씀은 교역자가 결혼하였을 경우 한 아내만을 소유하여야 한다는 진리이다. 목회자의 자격에 기혼과 미혼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목사는 한 남편의 아내도 독신녀도 무방하다는 주장은 논리적 비약으로 성경교훈에 위배된다.

 

(2) 감독은 남자이어야 한다.

 

성직자의 자격에 기혼이냐 미혼이냐의 구별은 없다. 그러나 남녀의 성 구별은 분명히 있다. 감독은 남자이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감독직을 여자에게는 허락하지 아니한다는 말씀이다.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말씀의 논법을 빌어 감독은 한 남편의 아내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성경해석은 성경의 원리에 근거하여야 한다. 구약시대 제사장들이나 신약시대의 사도들 그리고 그 이후 이 제사장 직분(예배를 주관하는 직분)은 남자에 의하여 남자만이 수행하여 온 직분이다. 성직에는 인간의 자유선택이 존재하지 않는다.

 

4. 여성 안수를 금하는 이유들(Reasons Why Against)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와 인간의 타락 사건에 근거하여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이유(가르, ga;r; for; 왜냐하면)를 밝혔다. 이 두 가지 이유가 우리에게 공평한가 또는 합리적인가는 큰 문제가 아니다. 이 이유들은 하나님의 이유들(God’s reasons)이기 때문이다.

 

(1) 창조의 원리와 질서에 있어서-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helper)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는 하나의 이유는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도덕적·인격적·영적 실유(實有)임으로 금수(禽獸)와는 만족할 만한 인격적·유기적 관계를 맺기 불가능하였다. 사람이 홀로 지낸다는 것은 곧 고독과 공허감을 면할 수 없다. 아담은 독처하였기 때문에 외로웠으며, 그러기에 옆에서 돕는 배필이 필요하였으며, 하나님은 하와(여자)를 남편을 돕는 배필(helper)로서 지으셨다(창 2:18). 이런 의미에서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고전 11:9)라고 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곁에서 돕는 자는 순종적·복종적·종속적 위치에 있음이 분명하지 않는가! 순종적·복종적·종속적 위치에 있는 여자가 남자 어른을 포함한 전체 회중에게 설교하거나 그들을 다스리는 것은 창조의 원리, 성경의 교훈에 위배된다.

 

그러나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돕는 배필은 종속적 의미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열등성도 우월성도 의미하지 않는 상응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돕는 이란 “아담을 위하여가 아니라, 아담에게 어울리는, 아담에게 상응하는 것으로 번역하여야 한다. ‘에제르’는 단순히 일을 돕거나 자식을 낳아주고 살림을 살아주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후원을 뜻하며 협력(partnership)을 의미하는 말이다.”3) “… 여기서 강조는 남자와 여자의 종속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양자의 동반자로서의 결속과 책임성에 대한 당위적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4) 이 단어 자체는 높거나 낮은 등급이나 계급을 언급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면서 “돕는 배필”의 참된 의미를 변절시켰다.5) 그와 같은 아전인수격의 해석은 본문의 내용과 성경해석의 원리(문자적·문법적·역사적·교리적 해석)에 위배되므로 고려할 가치도 없다.

 

(2) 창조의 순위에 있어서-여자는 나중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여자는 나중에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딤전 2:13)

 

여자가 남자를 주장할 수 없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여자는 나중에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담은 만물의 영장으로 먼저 지음을 받았고 하와는 아담을 돕는 배필로 나중에 지음을 받았다(창 2:21-23).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으니 원리상 먼저 태어난 것과 같다. 먼저 태어난 자(장자, first born)는 아버지의 차석에 있는 자요, 아버지 사후에는 가정을 다스릴 책임이 있다(창 27:19; 49:3; 왕하 2:9; 눅 15:11-32). 그런데 나중에 지음을 받은 자가 먼저 지음을 받은 자를 주관한다는 것은 몸이 머리를 주관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니 이는 성경의 원리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여자는 남자보다 나중에 지음을 받았다는 이 사실을 근거로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거나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창조의 원리와 순위에 있어서도 여자는 남자 위에서 남자를 가르치거나 주관하도록 의도된 바가 없다.

 

(3) 범죄의 순위에 있어서-여자가 먼저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딤전 2:14).

 

사도 바울은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여자가 먼저 사단의 꾀임을 받아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았다. 이 말씀은 아담은 범죄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와가 속임과 꼬임을 받아 범죄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음을 보여준다. “속이다”라는 단어가 아담의 경우에는 “아파타오”(; to mislead, deceive, beguile; 잘못 인도하다·속이다·기만하다·미혹하다)로 사용되었고, 하와의 경우는 “엑사파타오”(; to deceive wholly, beguile throughly; 완전히 속이다·철저히 기만<미혹>하다)라는 강조형이 사용되었다.6)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다 사단의 속임을 당하였으나 하와의 경우는 사단으로부터 완전히 철저히 꾀임을 받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창세기 3:6은 아담과 하와가 각기 범죄한 사실을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하와는 뱀(사단의 화신)의 꾀임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범죄하였고, 아담은 하나님께로부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 2:17)는 금령을 직접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와의 꾀임으로 하와로부터 금과를 받아먹음으로 범죄 하였다.

 

이상과 같이 창세기 3:6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사실을 상세히 보도하였고, 로마서 5:12-21은 아담이 하나님과의 행위언약(a Coverant of Works)의 당사자로서 인류의 대표로 범죄한 사실을 지적하였고, 디모데전서 2:14은 하와가 범죄한 사실을 지적하였다. 하와는 아담처럼 비록 하나님과의 언약의 직접적 당사자는 아닐지라도 언약에 관계된 자로서 범죄한 것은 사실이다.

 

로마서 5:12-21, “한 사람”(one man)이라고 5번 기록되었는데(롬 5:12, 15, 16, 18, 19), 여기서 한 사람이란 분명히 “아담 한 사람”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한 사람 아담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임을 또한 가리킨다. 따라서 아담 한 사람의 범죄의 결과는 아담 자신에게는 물론 아담의 후손 전(全)인류에 똑같이 그 영향이 미친다는 사실을 밝히 보여준다.

 

그러면 아담 한 사람의 범죄는 자신과 전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정죄와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많은(many) 사람은 모든(all) 사람을 가리킨다.

 

아담은 전 인류의 대표자로서 그의 범죄와 그 결과는 온 인류 위에 미치는 것과 같이, 하와는 행위언약에 관계된 자로서 그녀의 범죄와 그 결과는 모든 여자들 위에 미친다는 사실을 성경은 또한 밝히 가르치고 있다. 그 한 예는 여자의 해산의 고통과 남편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창 3:16). 해산의 고통은 잉태하는 모든 여자들 위에 임하며, 여자가 남자에게 다스림을 받는 것은 창조의 원리와 타락의 결과에 의한 것이다. 하와는 모든 여자들의 대표라는 “대표성의 원리”(A principle of representative)에 의하여 여자의 가르침과 다스림(설교하는 목사와 다스리는 장로)을 성경은 금하였다.

 

(4) 신적(神的) 권위에 있어서 - 여자가 남자 주관함을 허락하지 않음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하와와 범죄로 인한 결과이다.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

 

하나님은 태초에 사람을 남녀로 창조하시고 남자를 머리로, 여자를 몸으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가정·교회에서의 남녀의 직분에 관한 매우 중요한 원리이다. 성경은 여자는 남자 아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남자는 그리스도 아래 있음을 또한 말씀하셨다(엡 4:15; 5:23). 따라서 남자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여야 한다. 다스림을 받을 자가 다스리고, 가르침을 받을 자가 가르친다면 그것은 신적(神的) 권위에 정면 도전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가정과 교회의 위계질서를 전복(뒤집어 엎음)하는 일이다. 경건한 여성도들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자신들의 높은 신분을 깨달아 여성 안수를 반대한다.

 

(5) 신체적·정신적·심리적 측면에서 - 여자는 연약한 그릇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여자들의 신체적·정신적·심리적 면에서이다.

 

신체적인 면에서 여자는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하였다.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벧전 3:7). “그릇”(스케우스, ; vessel; 그릇)은 문자적으로는 컵이나 쟁반 같은 그릇을 가리키며(막 11:16; 눅 8:16; 요 19:29; 행 10:11, 16; 롬 9:21; 딤후 2:20; 히 9:21; 계 2:27; 18:12), 상징적으로는 사람의 육체를 가리킨다. 즉 사람의 육체를 질그릇으로 비유하였다. 본래 사람의 육체는 흙으로 만든 질그릇과 같다(창 2:7). 질그릇은 깨지기 쉬운 연약한 그릇이다. 이와 같이 사람의 육체도 깨지기 쉬운 질그릇처럼 매우 연약하다. 남자의 신체도 연약하지만 여자의 신체는 더욱 연약하다.

 

“더 연약한”(아스데네스테로, ; weaker; 더 연약한·더 힘없는·더 무기력한)은 아스데네스()의 비교급이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신체적인 면, 정신적인 면, 심리적인 면 등 여러 면에서 더 연약하므로 남자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야 할 위치에 놓여있다.

 

남자와 여자는 신체적·정신적·심리적 차이가 있으며 그로 인하여 비롯되는 “남성과 여성의 삶에 있어서의 역할과 위치의 불가교체성(the inexchangibility of roles and places in life between man and woman)을 믿기 때문에 여성의 교회에서의 남자 어른들을 포함한 전체 회중에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강도와 치리)을 반대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여자는 신체적·정신적·심리적 측면에서 남자보다 더 제한성을 지니고 있다. 여자는 독립적이 아니라 의존적이며, 다스리는 위치에 있지 아니하고 다스림을 받는 위치에 놓여있다. 이러한 신분과 위치에 있는 여자가 남자를 주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위배된다. 남자는 남자의 위치를 지키며 남자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유익이 되는 것처럼, 여자는 여자의 위치를 지키며 여자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유익이 될 것이다.

 

(6) 여자의 생리적 현상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이 적합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여성의 생리적 현상(멘스, menstration)이다. 성경은 여자의 월경 기간이나 해산 후에는 부정하다고 하였다(레 12:2, 5; 15:25-26). 이것은 현대 의학상으로나 위생상으로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월경 기간이나 해산 전후 상당한 기간에는 부부가 서로 가까이 하지 않도록 명령되었다(겔 18:6; 22:10).

 

월경기간에는 생리적 변화가 많이 일어난다. 구토·변비·속쓰림·가스 형성·두통·현기·요통·질 분비물·피곤·치질·살 부음 …. 월경기간에는 정신적 심리적 변화도 많이 일어난다. 짜증·신경질·히스테리 등 심경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이상과 같이 생리적·정신적·심리적 변화가 1개월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계속되는 상황 하에서 어떻게 올바른 목회를 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를 양육하며, 집안일을 돌보는 이 중요한 일들을 제쳐놓고 어떻게 성직(聖職)을 잘 감당할 수 있겠는가? 사실상 여자 목사 제도를 찬동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약한 자매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요,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도록 강요하는 것이요, 신앙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케 한다.

 

(7) 여자의 음성(목소리)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또 하나의 증거는 여자의 목소리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여자의 음성을 아름답게 그리고 고음(high volume)을 내어 앨토(Alto)나 소프라노(Soprano)를 맡게 하셨다. 반면에 남자의 음성은 굵게 그리고 저음을 내어 테너(Tenor)나 베이스(Base)를 맡게 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서 남자의 음성과 여자의 음성의 조화와 미를 산출케 하신다. 또한 여자의 음성은 여자의 신분에 맡도록 남편을 돕는 배필로서 남편을 기쁘게 하는 꾀꼬리 소리 같은 음성을 내게 하시며, 남자의 음성은 남자의 신분에 맞도록 아내를 다스리는 머리로서 권위적 저음을 내게 하신다. 여자의 음성 자체가 여자의 강도권과 치리권을 거부한다.

 

(8) 여성 안수를 찬동하여 시행하는 교단들도 실제상은 여성 안수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취하고 있다.

 

여성 안수를 시행하는 교단들의 교회들 다수는 여성 안수에 대하여 그리고 안수 받은 여자 목사(신부)를 교역자로 모시는 데 대하여 거부 반응을 취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본성(human nature)도 거부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여성 안수 허용하는 교단들의 성직자 통계들이 이것을 증명한다.

 

 

5. 여성 안수 찬동자들의 궤변들(Arguments for Women’s Ordination)

 

(1) 여성 안수 반대는 성 차별이라는 궤변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로마서 10:12; 고린도전서 12:13; 갈라디아서 3:26-28; 골로새서 3:11 등의 구절들을 오용하여 여성 안수 반대는 성 차별(Sexism)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성직에 남녀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성직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 여성 안수를 금하는 것은 성경적 신학적 근거가 없다. 남자니까 성직을 맡을 수 있고 여자니까 성직 안수가 불가하다는 주장은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분명히 잘못된 것으로 여겨진다. 성직 안수 문제에 있어서 남녀차별의 잘못은 구약의 관점에서 성서 신학적으로 갈라디아서 3:28에 이르러 시정될 수 있고 긍정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어진다.”7) “남자와 여자의 교회직제의 구별이란 더 이상 성서적이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라고 주장한다.8) 아이디(Ide)는 “여성 성직의 권리와 책임을 제거하는 것은 오로지 성차별 때문에 나왔다”라고 주장하였다.9)

 

반증(反證):

 

성 구별과 성 차별은 전연 별개의 문제이다. 성 구별은 남성·여성을 구분하는 것이요, 성 차별은 어느 한 성(남성 또는 여성)을 다른 한 성(性)보다 대우를 달리하는 것이다. 성경은 자초지종 성 구별이요 성 차별이 아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성(sex)을 구별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직분을 달리 맡기셨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분리의 역사(work of separation)를 하신다.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고(창 1:4), 하늘 위의 물(구름)과 궁창 아래 물로 나누시고(창 1:7), 육지와 바다를 나누시고(1:10), 주야를 나누시고(1:14), 해와 달과 별을 창조하시되 그 영광을 달리하시고 (1:16), 모든 생물들을 암수로, 사람을 남녀로 나누어 구별하셨다(2:18).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격적 존재들이다(창 1:27). 그리고 남녀 모두 구속함을 받아 천국 유업도 같이 누릴 형제자매들이다. 그러나 가정·교회에서의 직분과 기능은 상이하다. 이것은 남녀의 차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구별에 의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며 동시에 상이하다(equal but different).

 

여성 안수 찬동자들이 오용하는 성구들은 과연 여성 안수와 관련된 여성 안수를 지지하는 말씀들인가?

 

(롬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는 민족적 구별이다. 율법아래서 유대인은 선민(택한 백성)이요, 헬라인은 이방인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여러 면에서 큰 차이·차별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이방인들보다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고 이방인들과의 거리를 멀리하였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자신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하기를 원치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기를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주(Lord)가 되신다. 여기서 “부른다(call upon)는 말씀은 간구하다·예배드리다라는 뜻으로 구약의 표현이다”(창 4:26; 12:8; 13:4; 21:33; 26:25; 왕상 18:24; 왕하 5:11; 시 79:6; 사 64:7; 욜 2:32).10) 그리스도께서는 저를 부르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말하면 저를 믿고 저에게 예배드리는 사람들에게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 없이 모두에게 같은 주님이 되신다(행 9:14, 21; 22:16; 고전 1:2; 딤후 2:22). 그리스도 안에서는 민족적 구별, 인종적 차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여성 안수와는 전연 상관이 없다.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② “종이나 자유자나 …”는 사회의 신분적 구별이다. 일반적으로 과거에는 종은 가난한 자요, 자유자는 부자이었다. 실제상 그 당시 고린도 지방에는 종(노예)이 약 40만 명이요, 자유인이 약 25만 명이었다고 한다.11)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회 신분적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기 때문이다.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라는 말씀은 성령세례를, 성령세례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중생”을(요 3:3, 5), “한 몸이 되었고”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몸의 지체가 되었음을,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은 상징적 표현으로서 성령을 받음을 가리킨다.

 

(갈 3:26-28)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③ “… 남자나 여자”는 성적 구별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성 구별은 있어도 성 차별은 없다. 여성 안수 문제는 성 차별의 문제가 아니라, 성 구별의 문제이다. 이 세상에는 민족적 차별·인종적 차별·사회적 신분의 차별·성 차별 등이 있어 왔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자유자는 종보다, 남자는 여자보다 우위에 있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성 차별(sexism)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윤리적 사회적 성적 구별을 초월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는 그와 같은 차별들이 다 철폐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남녀 관계는 성 차별이 아니라 성 구별이다. 이 말씀도 여성 안수와는 전연 상관이 없는 말씀이다.

 

(골 3: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④ 할례당과 무할례당: 종교적 구별이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을때에는 이방인도, 무할례자도, 약속의 언약들에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자요,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종교적 구별이 없다(옙 2:11-16). 모두가 새로 지음을 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갈 6:15). 거기에는(축복받은 자리에는) 할례 받았으면 들어가고 할례 받지 못하였으면 제외되는 곳이 아니다.

 

⑤ 야만인이나 구스디아인: 문화적 구별이다. 거기에는 문화적 구별이 없다. 당시 야만인은 헬라 언어와 문명에 무식한 자들, 문명에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구스디아는 발칸 반도 북쪽 남러시아 지방에서 온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그곳 사람들은 짐승들보다 조금 나은 야만인들 중의 야만인이었다고 한다.

 

상기 구절들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 전에는 민족적 인종적 차별·사회의 신분적 차별·성 차별·문화적 차별 등이 있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죄 사함과 구원을 받음에 여하한 차별이 없이 동등하다는 말씀이다.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여성 안수 찬동자들이 오용하는 성경구절들은 여성 안수와는 전연 상관이 없는 말씀들이다.

 

(2) 여성 안수를 금하는 성구들은 그 당시 특정한 상황 배경 위에서 해석하여야 한다는 궤변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주장하기를 고린도전서 14:34-35이나 디모데전서 2:11-12 말씀들은 그 당시 공동체의 특정한 상황 배경 위에서 이해하고 해석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 편지들이 쓰이고 보내어진 배경들을 성경해석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2)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고전 11:5-6) 등을 실례로 든다. 그들은 말하기를 “여자들로 하여금 머리에 수건을 쓰도록 권면한 것은 창녀들과의 혼돈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창녀들은 남자들에게 매력을 얻기 위하여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얼굴을 노출시켜 남자들을 유혹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쓸 것을 말하였다. 만일 자기 아내가 밖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다니는 것을 남편이 발견하면 이혼의 근거가 되었다.”13)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여성들이 창기들과의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그리고 권위에 복종하는 표시로 머리에 꼭 수건을 쓰고 다녀야 할 것인가라고 반문하면서 그와 같이 “여자는 일절 순종하므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딤전 2:11-12)는 말씀도 그 당시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이니 지금 이 시대에는 해당이 안된다고 한다.

 

반증(反證):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생활양식과 영구 불변한 보편적(우주적) · 신앙적 · 도덕적 진리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특별한 상황(specific situation)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하므로 그 당시 특정한 상황 배경 위에서 이해하고 해석하여야 한다. 그러나 보편적(우주적) 일반적 규칙들(universal, general rules)은 시대 변천 상황 배경 위에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일반적 규칙들은 시대 변천이나 문화적 배경에 관계없이 어느 시대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적용되는 영구불변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4:34-35; 디모데전서 2:11, 12 등은 영구불변한 보편적 진리이다.

 

물론 그 당시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닌 것은 당시 상황 배경 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쓴 것은 남편에 대한 순복과 존경의 표시로서 남편에게 순복하고 남편을 욕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은 창기로 오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수건을 썼다. 그리고 공중 앞에서는 잠잠하였고 집 밖에서는 수건을 쓰지 않고는 다니지 아니하였다.14)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예배드리는 것은 자신을 욕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남편을 욕되게 하는 일이었다.

 

1세기에 유대인들은 물론 로마와 헬라인들도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녔다.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쓴 것은 권위(남편)에 대한 복종의 상징이었다. 여자에게는 남자라는 보이는 머리(visible head)가 있음으로 그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머리에 수건을 썼다(고전 11:10). 그러나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닌 것이 오늘날에는 제재를 받지 않는 것처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을 금한 것도 이 시대에는 제재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의 원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에서 나온 말이다.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니는 것 여부는 당시 공동체의 특정한 상황배경에 의한 것이요, 따라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시대 그 지방의 생활 양식이었다. 그러나 남자 어른들을 포함한 전체 회중 앞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 주관하는 것을 금하신 말씀들은 상황 배경 위에서 이해될 내용들이 아니다. 성경에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천하는 문화적 배경들이 있으며, 세월이 변하고 또 변해도 변치 않는 변할 수 없는 영구불변한 진리가 따로 있다. 전자는 문화적 생활양식이요, 후자는 영구불변한 보편적 진리이다. 그런데 여성 안수를 금하는 말씀들은 시대적 배경에 의한 문화적 생활양식이 아니라 영구불변한 진리이다.

 

예를 들면 구약시대 입을 것과 입지 않을 것, 먹을 것과 먹지 않을 것 등등 생활양식에 관한 규례들이나 생활양식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많이 변화되었다. 그 변화들이 성경의 교훈에 역행하거나 충돌되지 않는 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10계명을 위시한 신앙적·도덕적 규범들은 시대 변천에 관계없이 변할 수 없는 영구불변한 보편적 진리이다.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이 진리를 바로 깨닫지도 구별하지도 못하므로 창조의 원리와 질서를 파괴하고 있다.

 

(3) 구약시대에 여선지자들이 있었음과 같이 신약시대에도 여자 목사가 있어야 한다는 궤변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구약시대에 여선지자들이 있었고 신약시대(초대교회시대)에도 여선지자들이 있었음과 같이 이 시대에도 여자 목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5)

 

구약시대에 여선지자들이 있었다. 출애굽시대, 사사시대, 열왕기시대, 그리고 구약 말기에 미리암·드보라·훌다·노아댜·안나 등 여선지자들이 있었다. 미리암(Miriam)은 모세와 아론의 누이로서 여선지자(prophetess)였다(출 15:20-21). 그리고 미리암이 여선지자로서 무엇을 전하였는지, 사역 기간이 얼마이었는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드보라(Deborah)는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을 통치한 여선지자이었으며, 동시에 여자로서는 유일한 사사였다. 고로 사람들은 드보라에게 나아와 재판을 받았다. 그녀는 바락으로 하여금 가나안의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 군대를 멸하도록 명령하였다(삿 4:4-24). 야빈은 이스라엘을 20년 동안 심히 학대한 고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훌다(Huldah)는 유다 왕 요시아시대에 살룸의 아내 여선지자이었다. 훌다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gods)에게 분향하며 죄를 범하였음으로 회개를 촉구하였다(왕하 22:8, 14-20; 대하 34:22-28).

 

노아댜(Noadiah)는 거짓 여선지자로서 도비야와 산발랏과 합세하여 느헤미야와 느헤미야가 기도한 자들을 반대하였다(느 6:14).

 

안나(Anna)는 여선지자로서 결혼하여 7년 간 남편과 같이 살았고 84세가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 기도하며 하나님을 예배하였다. 안나는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말씀하였다(눅 2:36-38).

 

탈무드(Talmud)에 의하면 이 여선지자들 이외에도 사라, 한나, 아비가엘, 에스더 등도 여선지자라고 불렀다. 초대교회에도 예언하는 여자들이 있었다(고전 11:5). 빌립의 결혼하지 아니한 네 딸들도 여선지자들이었다(행 21:9). 따라서 신약시대에도 여자 목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증(反證): 

 

상기와 같이 우리는 구약시대에 소수의 일시적 여선지자들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여선지자들은 구약시대 전반에 걸쳐서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들의 사역도 매우 미흡하였다. 그들은 제사장적 직분, 왕적 직분 즉 제사 드리는 일과 다스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 경우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한 일시적 역사인 것이다. 하나님의 일시적 역사는 하나님의 일반적 역사에 위배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

 

(4) 사도행전 21: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는 말씀을 근거로 빌립의 네 딸들도 여선지자들이었다는 궤변

 

반증(反證):

 

일반적으로 예언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말하는 것(마 15:7; 요 11:51; 벧전 1:10; 유 14절)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고전 11:5; 14:1-5).

 

그런데 빌립의 딸들이 예언하였다는 말씀은 고린도전서 11:5; 14:1, 3-5, 24, 31, 39의 말씀들과 같은 맥락에서 고찰해야 한다. 고린도전서에서 우리에게 교훈하는 예언은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나가서 전하는 것으로서, 예언은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며 안위를 주며, 믿지 않는 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므로 그 예언을 사모하라고 하였다. 복음을 나가서 전하는 것은 선지자나 성직자만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할 일이다. 빌립의 네 딸들은 선지자가 아니었다.

 

존 칼빈(Calvin)은 빌립의 네 처녀 딸들의 예언에 대하여 논평하기를 “이 처녀들이 예언의 직분을 어떻게 실행하였는지는 불확실하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인도하고 다스리심으로…그들이 일반 회중 집회 아닌 가정에서 또는 어떤 개인 장소에서 예언하였다고 생각이 든다”라고 하였다.16)

 

초대교회에서 여자들이 예언하였다는 말씀은 가정에서나 또는 어떤 개인 장소에서 복음을 잘 전하였다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하며, 여자의 강도권과 치리권을 금한 고린도전서 14:34, 35; 디모데전서 2:11-14의 말씀과 충돌되지 않는다. 우리도 이와 같은 의미에서 빌립의 네 딸들처럼 기록된 말씀을 나가서 사람들에게 전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고전 14:1)

 

(5) 구약시대 남자 제사장직은 그 당시 이방종교들의 여제사장에 대한 반작용이었다는 궤변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주장하기를 중동의 고대 이방종교들은 여신들에 대한 숭배는 물론이고 신전(temple)에서의 여제사장들은 풍요를 기원하는 하나의 종교의식으로서 매춘행위를 하였다.17) 이러한 배경에서 이스라엘의 제사장직은 여성을 제외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남자 제사장직만이 존재하여 왔다.18) 구약 율법에서 여성이 제사장 자격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오늘날도 여성 안수가 불가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19) 오늘날은 여성들에게도 교육과 훈련을 시켜 안수를 줄 수 있다고 궤변을 토한다.

 

반증(反證):

 

물론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신앙은 그와 같은 혼음종교와의 구별은 언제나 분명히 하였다(레 18:3; 렘 3:1-2; 겔 16:16, 23). 그러나 구약시대 제사장직은 그 당시 이방종교들의 여제사장들에 대한 반작용이 아니다. 구약시대 제사장직은 모세시대부터 제도화되었으나 실상은 인류의 초창기 아벨 때부터이다(창 4:1-5; 히 11:4). 아담의 10대 손 노아는 족장으로서 온 가족을 위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창 8:20-21). 욥도 자녀들의 수대로 매일 아침 일찍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곤 하였다(욥 1:5). 아브라함도(창 12:7-8), 이삭도(창 26:25), 야곱도(창 35장; 36장) 그 이후 아론의 자손들을 통한 제사를 드렸다(레 10:1-2). 구약시대 공적인 제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계속되었다. 구약시대 남자 제사장직은 이방종교들의 여제사장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하여 태동된 것이 결코 아니며, 하나님의 자아의지에 의하여 결정된 성직(聖職)이다. 그리고 구약시대 제사장 직분은 신약시대에 장로와 감독(목사와 감독)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저들은 구약시대 남자 제사장직은 그 당시 이방종교들의 여제사장들에 대한 반작용이었으므로 여제사장은 제외되었다고 주장하니 성경도 신구약 교회 역사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나타낸다.

 

(6) 신약시대에도 여성 동역자들이 있었다는 궤변

 

“여성도 동반자(partner)로서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성직에 봉사함으로 이 시대의 사명을 다해 보자는 것이다”.20) 그리고 “로마서 16:1, 3, 7, 12; 빌립보서 4:2-3 등에서는 뵈뵈·브리스길라·안드로니고·유니아· 순두게·유오디아 같은 여인들을 동역자라 칭하고 복음을 위하여 주안에서 바울과 함께 힘쓰며 수고하였다” 특히 겐그리아 교회 일꾼 뵈뵈는 집사가 아니라 복음사역을 맡은 사역자라고 주장하면서 여자 목사 제도를 주장한다.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동역자”를 성직자(목사 또는 신부)로, 일반적으로 여자 교역자를 디아코노스()라고 불렀다고 하면서 뵈뵈는 겐그리아 교회의 교역자라고 주장한다.21)

 

반증(反證):

 

사도 바울은 디모데서에서 교회 내에서의 여성들을 환영하고 그들의 직분을 귀하게 여겼다. 그는 빌립보 교회의 유오디아와 순두게에 관하여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빌 4:3)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는 또 로마에 있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이라”(롬 16:3)고 언급하고 문안을 부탁하였다. 그는 또 겐그레아 교회의 자매 뵈뵈를 교회의 일꾼으로 많은 사람들을 돕는 자로 천거하였다(롬 16:1).

 

그러나 위의 여러 부녀자들은 각기 속한 교회에서 각기 맡은 직분(봉사직)에 충성하므로 사도 바울을 조력한 자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여러 부녀자들은 교회의 일꾼들이요, 광의적 의미에서 사도 바울의 동역자들이라고 칭하였다. 그 부녀자들은 기름부음 받은 종으로서의 사도 바울의 동역자들은 결코 아니었다.

 

(7) 신약시대는 남녀 모두 제사장이므로 여자도 제사장 직분을 맡아야 한다는 궤변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신약시대 제사장 직분은 남녀 모두에게 주어진 특권이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직분으로서의 성직 안수는 남녀 모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이다(Ibid., p. 57)라고 주장한다.

 

반증(反證):

 

물론 구약시대 제사장 직분은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참 신자들에게로 이전되었다. 민족적 이스라엘로부터 영적 이스라엘로 이전되었다. 그러므로 성도마다 왕같은 대제사장(every believer-High Priest)이 되어(벧전 2:9)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하나님께 직접 예배드리는 특권이 부여되었다(히 4:16).

 

그러나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예배 인도자와 예배드리는 자를 구별하지 못하고 동일시하는 데 문제가 있다. 물론 예배 인도자도 예배드리는 자들 중의 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예배 인도자는 예배의 요소들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체 회중 앞에서 설교(강도), 성례(세례·성찬) 거행, 다스리는 일(치리),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는 축도 등을 포함한 예배 순서 일체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사역자이다. 반면에 예배드리는 자들은 일반 회중들이다. 구약시대 제사는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이 드렸고 신약시대 예배는 기름부음 받은 목사가 인도한다. 따라서 성직 안수는 남녀 모두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란 남녀의 구별에 의하여 제정하신 하나님의 성직 제도를 전면 부인하고 도전하는 행위이다.

 

(8) 여자도 남자와 동일한 은사를 받았음으로 성직자가 되어야 한다는 궤변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동일한 은사를 받은 사람은 남녀 차별 없이 다 성직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증(反證):

 

우리는 여자들의 받은 은사의 다양성과 탁월한 지식·재능·능력 그리고 신앙적 열심 등을 결단코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여하한 이론적 뒷받침이나 근거가 없다. 여자들도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과 기능을 발휘한다. 특히 여성도들의 신앙적 열심과 헌신적 봉사는 참으로 남성도들의 귀감이 된다. 그것은 구약시대에도, 신약시대 초기에도, 지금도 변함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많은 여성도들이 어떤 은사들은 남자와 동일한 은사를, 또는 남자보다 더 많은 은사를 받았으므로 각기 전문분야에서 높은 직위에 앉아 활동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서 동일한 직분을 받은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동일한 은사를 받았을지라도 동일한 직분을 받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직분들은 남자들에게만, 어떤 직분들은 여자들에게만 그리고 어떤 직분들은 남녀 모두에게 맡기셨다.

 

제사장직은 이 세상의 다른 전문직들과는 분명히 상이하다. 제사장 직분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천직(天職)이다.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들도 많이 있다. 성직은 천직이요, 천직은 하나님께서 제정, 선택하시기 때문이다.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이 중요한 원리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여성 안수 반대는 여성은 열등하고 남성은 월등하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따라서 각기 받은 은사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잘 개발하여 사용하여야 한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4-6).

 

(9) 여성 안수 반대는 형평의 원리에 어긋난다는 궤변(여신도들의 수, 봉사에 비추어)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주장하기를 교회에는 여성도들이 다수이며 교회의 봉사도 여성도들이 더 적극적이니 형평의 원리에 맞도록 여성 안수를 허락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증(反證):

 

물론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는 여성도들이 다수이며, 여성도들의 헌신적 교회 봉사는 뭇 남성도들의 귀감이 된다. 그러나 성직은 남성과 여성의 수의 비례에 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성직은 소위 형평의 원리에 맞도록 여성 안수를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직의 원리에 따라서 안수를 허락한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직의 원리란 성직은 남자에 의해서만 수행된다는 사실이다. 성직을 남녀 평신도의 수에 비례하여 분배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10) 여성 안수 반대는 비민주적이라는 궤변(최고 의결기구에서 제외되므로)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주장하기를 교회의 최고 결정기구는 당회인데, 당회는 소수 남자 목사와 남자 장로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전체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 비민주적 결의기관이다. 소수 남성이 다수 여성을 지배하는 것은 여권 침해라고 한다. 다수의 여성들이 결의 기구에 참여치 못하니 교회 운영이 잘못된다고 한다.

 

반증(反證):

 

물론 당회는 남자 목사, 남자 장로로 구성된 교회의 최고 결의기구이다. 그러나 개신교 다수는 회중이 공동의회를 열어 장로들을 선택하고 노회가 안수하여 장립한 후 장로들로 하여금 성도들을 대표하여 일을 처리하는 의회 민주주의이다. 그러므로 당회는 교회 전체의 의사를 반영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남자 장로들로 하여금 교회를 다스려 왔으니 과거 2,000년 동안 교회의 행정은 비민주적이고 독재였단 말인가? 교회 역사에 그 많은 훌륭한 하나님의 종들은 어찌하여 여성 안수를 허락하지 않았는가? 경건한 여성도들은 어찌하여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가? 그들은 성령의 뜻을 거슬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11) 하나님의 여성상(Female image of God)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말하기를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남성상(male image of God)만을 전통적으로 생각하여 왔다. 과거의 유대교 전통이나 기독교 전통은 하나님을 남성으로 비유하는 데만 치중하여 하나님을 “남성신”으로 착각해 온 경향이 있다. 남성신은 남자와 연결되어 남성 제사장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결과 여성이 성직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하나님의 여성상(female image of God)을 발굴하여 여권(woman’s right)을 다시 찾고, 여성들에게 안수를 허락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여성상을 엘 샤다이에서 발견한다고 궤변한다. 하나님의 명칭들 중 “엘 샤다이”()는 주석적으로 볼 때 양육하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가진 하나님으로 이해되며, 젖먹이는 가슴(젖가슴)을 가진 하나님으로 해석되는 엘 샤다이의 모성적 이미지는 구약의 하나님 이해로서 무리 없이 수용될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고 하였다.22)

 

반증(反證):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명칭들 중 엘 샤다이(; God Almighty)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뜻이다(창 17:1; 28:3; 35:11; 48:3; 49:2; 출 6:3 등). 70인역에는 엘 샤다이를 판토크라톨(; Almighty; 전능자)로 번역되었다. 신약에도 하나님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 Lord God the Almighty)으로 되어 있다(계 4:8).

 

“엘 샤다이”를 양육하는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하나님의 양육하심과 돌보심을 나타내는 모성적 이미지로 이해해도 무리 없이 이해될 수 있다는 말은 억지 주장이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아버지로서 역할을 하시며 해산의 수고와 양육하심과 돌보심을 나타내는 은유적 모성적인 역할도 하신다(사 49:15). 그렇다고 하나님의 명칭을 임의로 “하나님 아버지와 어머니”로 개칭할 수 있는가?

 

 

(12) 포괄적 언어의 성구집(An Inclusive Language Lectionary)

 

미국의 자유주의 교회들의 연합단체인 미국교회협의회(NCCC in USA) 교육목회분과위원회는 여성해방, 여권운동, 남녀평등 운동의 일환으로 남성 명칭들을 남녀를 함께 지칭할 수 있는 포괄적 용어들로 대치하였다. 남녀 11명이 위원이 되어 1980년부터 3년 동안 『포괄적 언어의 성구집』이란 책들을 출간하였다. 포괄적 언어의 성구집은 3권으로 되어 있는데 첫 권(Cycle A)은 1983년부터, 둘째 권(Cycle B)은 1984년부터 그리고 셋째 권(Cycle C)은 1985년부터 예배 시 교독문으로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23)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은 포괄적 용어로 『신약과 시편』(An Inclusive Version)을 5년 편집 끝에 출간하였다.24)

 

미국교회협의회가 남성 명사들을 남녀가 공히 사용할 수 있는 포괄적 용어들로 대치시킨 명칭들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 아버지”를 “하나님 아버지와 어머니”로(God the Father→God the Father and Mother)

 

신구약 성경은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하였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이다. 우리 주님도 우리를 위한 그의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불렀고(마 6:9), 빈번히 “아버지” 또는 “나의 아버지”(Father or my Father)라고 불렀다(막 14:36; 마 11:27; 23:9).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중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양자)가 된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을 아바(Abba)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이 남녀평등을 운운하면서 하나님의 명칭까지도 임의로 변경한 것은 불신앙적 배교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신(神)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sex)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버지라고 계시하신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가장 잘 묘사한다.

 

②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이”로(the Son of God→Child of God)

 

자유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자격(sonship)으로서의 아들이라는 특수명칭을 아들과 딸 모두에게 사용할 수 있는 포괄적 용어인 아이(child)로 대치하였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여자아이로 성을 바꾸거나 또는 여자아이로 부를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성인신 하시기 전에는 성자 하나님(God the Son)으로 그에게는 신성(deity)만 있었다. 그러나 도성인신 하심으로 그의 신성에 인성(humanity)을 취하사 신인(God-Man)이 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취하시고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만은 완전한 신(神)이신 동시에 또한 완전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인성(人性)으로서의 예수님은 남자(male)이었다(마 3:17; 막 1:11; 마 4:1-3; 11:27; 15:39; 27:40; 막 13:32).

 

③ “왕”을 “지배자”로(King→Ruler)

 

왕이란 명칭은 위엄과 권위 그리고 통치권을 나타내는 남성 명사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세상에는 여왕(queen)들도 있다고 하면서 왕이라는 명칭 대신 지배자란 명칭으로 대치하였다.

 

④ “남자”를 “사람”으로(Man→Person)

 

자유주의자들은 남자를 가리키는 단어 안트로포스()는 남자와 여자를 다 가리키는 명칭이므로 남녀를 모두 나타내는 단어인 사람(person)으로 대치하였다고 궤변 한다. 물론 남자를 가리키는 단어 안트로포스는 일반적으로 남자와 여자를 다 가리키는 “사람”이라는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마 4:4; 12:35; 요 2:25). 그러나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 의미에서 “남자”까지도 남자와 여자를 다 포함하는 사람(person)으로 대치한 것은 성 구별까지도 철폐하는 망동(妄動)이다. 그러기에 저들은 호모섹스까지도 허용하지 않는가?

 

⑤ “형제들”을 “형제자매들”로(Brethern→Brothers and Sisters)

 

자유주의자들은 주장하기를 성경에 형제들이란 형제 자매들을 가리킨다고 하면서 형제들을 형제 자매들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물론 형제들이란 단어 아델포스()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친구들을 가리키기도 하며(요 20:17), 형제들을 가리키기도 하며(마 1:2; 14:3), 이웃을 가리키기도 하며(마 5:22, 23, 24; 18:15, 21), 같은 민족을 가리키기도 하며(행 3:17; 롬 9:3),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을 가리키기도 한다(마 28:10). 그러나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남자 형제들(brothers)만을 가리킬 때도(행 7:23, 26; 히 7:5) 자매들(sisters)이란 말로 대치할 수 있는가? 이는 어불성설이다.

 

⑥ “아브라함”을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갈로(Abraham→Abraham and Sarah and Hagar)

 

여권운동자들은 주장하기를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에 사라와 하갈의 이름을 더 추가함으로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사라의 계통인가? 하갈의 계통인가?를 알 수 있다고 궤변한다. 그리고는 마태복음 3: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을 “아브라함을 우리의 아버지로 사라와 하갈을 우리의 어머니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임의로 추가하였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가감할 수 없다는 무서운 계명(계 22:18, 19)도 아랑곳없다.

 

⑦ “경찰”을 “경찰관”으로(Policeman→Police officer)

 

폴리스(police) 다음에 접미어로 맨(man; 남자)이 붙었으니 맨(남자) 대신에 어휘서(officer; 관)를 붙이므로 남녀경찰관 모두에게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⑧ “의장”을 “의장”으로(Chairman→Chairperson)

 

의장(chairman)은 체어(chair) 다음에 접미어로 맨(man; 남자)이 붙었으니 맨(남자) 대신에 펄손(person; 사람)으로 고쳤다.

 

(13) 외국의 전통적 교회들은 다 여성 안수를 시행한다는 궤변

 

여성 안수 찬동자들은 주장하기를 “우리와 신앙 교류를 같이하는 다른 나라들의 전통적 교회들은 다 여성 안수를 허락한다. 국제 교류적 측면에서도 여성 안수를 허락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증(反證):

 

먼저 여성 안수를 실시하는 다른 나라들의 소위 전통적 교회들이란 어떤 교회들인가를 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교회들과 교류하는 다른 나라들의 교회들도 자유주의 교회들 아니면 신비주의 교회들이다. 실례로 우리 나라의 통합측 장로교와 기장측 장로교가 교류하는 미합중국장로교(PCUSA), 기독교감리회와 교류하는 미국연합감리교(UMC) 등은 극도로 타락한 자유주의 교회들이며, 우리나라의 순복음 하나님의 성회(기하성)와 오순절 성결 교회와 교류하는 미국의 하나님의 성회는 현대 방언과 신유의 은사를 강조하는 신비주의 교회들이며, 구세군은 오래 전부터, 영국 성공회는 1974년부터 여성 안수를 실시하고 있다. 이들 교회들은 여자목사, 히피목사는 물론 호모섹스 목사들도 있다. 이 교회들은 오래 전부터 신앙고백이 일치하지 않는 교회들과 비성경적 연합운동(Ecumenical Movement)도 하고 있다. 그래도 이들 교회들이 전통적 교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14) 여성안수 반대는 생명경시라는 주장

 

여성안수 찬동자들, 여권운동자들은 여성안수 반대를 생명경시와 동일시하여 여성안수 반대는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예장 합동 총회장 여성비하? 생명경시 발언 대책위원회).

 

반증(反證):

 

여성안수 반대와 생명경시는 전연 무관한 일이다. 그러므로 여성안수 반대와 생명경시를 동일선상에서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납득이 안 되는 논리적 모순이다. 생명은 생명체를 존재케 하는 원동력이다. 원동력이란 생명체를 활동시키는 힘이다. 영존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의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만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마꾸겠느뇨?”(마 16:26)

 

그런데 아이러니칼한 것은 소위 생명을 중시한다는 여권운동자들과 여성안수 찬동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오히려 산아제한(Abortion)을 찬동한다. 산아제한은 무제한 어린 생명을 죽이는 살인죄이다. 생명의 근원이시오 부여자이신 하나님은 살인하지 말라(출 20:13; 창 9:5-7; 제 6계명)고 명령하셨다.

 

(15) 여성안수 반대하는 자들은 철저히 회개하고, 여성안수 반대제도를 철폐하라는 궤변

 

최근 “예장합동 총회장 여성비하 생명경시 발언 대책위원회”에서 있은 윤철호 교수의 특강의 마지막 발언들 중의 하나.

 

반증(反證):

 

모든 사람은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가 있다. 이는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와 더불어 인간의 기본권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든지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의 원리에 입각하여 어떤 종파, 어떤 교단의 신앙노선, 교리적 입장, 예배의 형태 등등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각 개인에게 달려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앙관은 자신에게 있어서는 생명과 같다.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의 원리에 입각하여 어떤 종파, 어떤 교단, 어떤 신앙노선을 선택하는 여부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따라서 나의 신앙관과 다른 사람의 신앙관은 전적으로 반대될 수 있다. 그 때에 나는 다른 종파, 다른 신앙에 관하여 나의 신앙의 세계에서 잘못된 신앙, 잘못된 교리 등에 관하여 가르쳐야 하며,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리를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한다(유 3). 그러나 자기의 신앙관과 배치된다 하여 그 세계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 철폐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월권이요, 양심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의 원리에 위배된다.

 

6. 여성 안수 제도의 진전 과정(Developments in Womens Ordination throughout Church History)

 

(1) 1927년 배교와 불신앙으로 타락된 자유주의 교회들의 연합단체인 세계교회협의회(WCC)의 모체 중에 하나였던 신앙과 직제 위원회(Commission on Faith and Order)가 1927년 스위스의 로잔(Lausanne)에서 처음 모였을 때 400명의 대표들 중 7명이 여성들이었다. 여성 대표들은 교회 내에서의 여성의 사역과 직분에 관하여 진술하기를 “교회 내에서의 여성의 올바른 위치는 모든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에 새겨져야 한다”고 하였다.25)

 

(2) 1948년 8월 22일부터 9월 4일까지 화란의 암스테르담에서 147개 교단 352명의 대표들이 모여서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조직한 그때도 “여성의 완전 목회사역에 합의하지 못하였다”고 함으로 일부 자유주의교회들이 여자 목사 제도를 채용하고 있으면서도 여자 목사 제도의 찬반의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26)

 

(3) 1961년도 11월 18일부터 12월 6일까지 인도의 뉴델리에서 모였던 WCC 제3차 총회 시에 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가정, 교회, 사회, 남녀 협력 분과 위원회와 협력하여 여자 목사 제도를 연구하도록 요청받았다.

 

(4) 이에 호응하여 불란서 파리에서 모였던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1963년도 7월 12-26일까지 캐나다 몬트리얼에서 모였던 제4차 신앙과 직제 위원회에 “여자 목사 안수에 관한 연구 보고서”가 나왔다. 이 연구보고서는 여자 목사 문제에 대하여 적극 찬동하였다. 그리고 “목회사역에 있어서의 여성”이라는 주제 하에 연구를 계속할 것을 추천하였다.27)

 

(5) 1967년 영국의 브리스톨(Bristol)에서 모였던 신앙과 직제 위원회는 “현재 교회 연합 협상에서 제기되는 문제들 특히 여자 목사 문제에 관하여 연구하도록” 결의하였다.28)

 

(6) 1968년 7월 4일부터 20일까지 스위스의 읍살라(Uppsala, Switzerland)에서 모였던 WCC 제4차 총회에서는 여자 목사 문제에 관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찬동하는 피치를 들었다. “현재 여자 목사 제도가 점차 증가한 것과 이 경험에 비추어 신학적인 반영이 더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29)

 

(7) 1970년도에 “앞으로 다가 올 안수 문제는 무엇인가?”라는 WCC 조사에 의하면 당시 215개 WCC 회원 교단들 중 “72개 교단들이 여자 목사 제도를 허락하고 있다”고 하였다.30)

 

(8) 1971년 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가 루베인(Louvain)에서 모였을 때 여자 목사 문제에 관하여 토론에 더욱 집중하였다. “19세기 동안의 여자 목사 제도 반대세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전통은 교회에서 변하고 있다. 여자 목사 문제는 취급하여야 하며 그때는 바로 지금이다”라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남녀의 동등한 공동참여 문제에 관하여 활발히 토의하면서 남녀의 공동 참여야말로 참된 공동사회의 지표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목회사역에 남녀 상호 인정을 강조하고 이것이 복음에 대한 반응의 한 형태라고 하였다. 여자 목사 제도는 교회정치와 헌법에 관련된 것이요, 교리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31)

 

(9) 1975년도 11월 23일부터 12월 10일까지 아프리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개최되었던 WCC 제5차 총회에서도 여자 목사 제도를 제 2분과와 제 5분과에서 취급하였다. 제 2분과에서는 “연합은 완전한 이해를 요구한다”라는 제목 하에, 제 5분과에서는 “교회와 사회에 있어서의 여성; Women in Church and Society”이라는 제목하에 여자 목사 제도를 토의 및 결의하고, 이 안건에 대한 특별 건의서를 WCC 총회에 건의하였으며, WCC 총회에서는 그 건의서를 채택한 후 WCC 산하 회원 교단들에게 여자 목사 제도에 관한 결의문을 추천 및 권장하였다.

 

WCC 제 5차 총회의 결의 채택 사항들

 

여자 목사 제도에 관하여 결의 채택한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① 세계교회협의회(WCC) 산하 회원 교단들은 여성들의 신학적 교육을 위한 자금을 마련할 것.

 

② 회원 교단들은 모든 결의기관들 안에 적극적인 여성 참여를 보장할 것.

 

③ 여자들에게 목사 안수를 허락하는 교회들은 남자들과 동일한 기회를 제공하고, 동일한 급료를 지급할 것.

 

④ 여자 목사 제도에 신학적 반대 입장을 취하지 않는 회원 교회들은 모든 안수직 목회사역에 여자들이 참여하도록 행동을 취할 것.

 

⑤ 여자들에게 목사 안수를 허락하는 회원 교회들, 다른 교파들과 대화를 나누지 않는 교회들, WCC에 가입하지 않은 비회원 교회들 모든 교회들에게 여자들이 받은 은사의 척도에 따라서 안수직 목회사역에 전적인 여성참여를 권장 한다”고 하였다.32)

 

실제상 WCC는 나이로비 총회에 참가하는 대표들 중 상당수의 여성들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회원 교단들에게 강조하였으며, 그 결과 그 총회의 “총대 20%는 여성들이었다”.33)

 

(10) 1975년 헬렌 스파울딩(Helen Spaulding)이 마련하고 WCC의 교회와 사회분과 위원회에서 주최한 “여자 목사 안수에 관한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295개 회원 교회들 중에 104개 교회(교파)들이 여자 목사 제도를 허락하고 있으며, 기타 교회들은 보고하지 않았다”고 하였다(Ibid.). 그러나 동년(1975년) WCC의 자체조사에 의하면 WCC 회원교단들 중 ⅔이상이 여자 목사 안수를 허락한다고 보고하였다.

 

(11) 1978년도 8월 15일부터 30일까지 인도의 방갈로에 있는 기독교 에큐메니칼 센터에서 모였던 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에서는 WCC에 13개 추천사항들을 건의하였는데 그 중에 제 9항의 내용에 의하면, “여러 교회 단체들에게 여자 목사 안수를 권장한다”고 하였다.34) 세계교회협의회(WCC)의 “교육 목적 중 하나는 교회와 사회에 여성 참여를 증가하기 위함이다”고 하였다.35)

 

여자 목사 제도는 자유주의 신신학 노선을 걷고 있는 교회들, 신오순절주의(신비파) 교회들, 군소 독립교단들, 그리고 지금은 소위 복음주의 노선을 걷는다고하는 신복음주의 교회들 대다수가 채택하고 있다. 한국에 교회들 다수는 앞을 다투어 여성도들에게 목사 안수를 줌으로 여자 목사 홍수시대가 이미 도래 되었다. 더욱이 급진적 자유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일부 교회들(예를 들면 미국 장로교나 미국연합감리교 같은 교파들)은 여자 목사는 물론 히피 목사, 호모섹스 목사까지도 허용하고 있다. 분명히 앞으로는 더 많은 여성들이 목사 안수를 받고 교회의 강단을 점령하게 될 것이다. 그 증거로는 여자 목사 제도를 채택하고 시행하는 “교파 신학교들의 학생수의 30-40%가 여학생들”이라는 사실에서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36)

 

1) Calvin’s Commentaries, XX, p. 468

 

2) James A. Brooks, Syntax of N. T. Greek,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83, p. 11

 

3) 『교역과 여성 안수』, p. 56

 

4) Ibid., p. 86

 

5) Russel Prohl, op. cit., p. 37

 

6) Vine’s op. cit., p. 151

 

7) 『교역자 여성 안수』, pp. 56-7

 

8) Ibid., p. 89

 

9) A. F. Ide, Woman as Priest, Bishop and Laity, Ide House, U. S. A. 1984, p. 48

 

10) John Murray, The Epistle to the Romans, 10:12

 

11) NIV Study Bible, Zonderran, 1985, p. 1732

 

12) Ibid., p. 102

 

13) The Origin and History of Hebrew Law, p. 232, Chicago, 1961

 

14) Russell Prohl, Woman in the Church, pp. 51-4; Andre Dumas, Biblical Anthropology and the Participation of Women in the Ministry of the Church, pp. 28-30

 

15) Paul K. Jewett, The Ordination of Woman, pp. 62-5

 

16) Calvin, Commetary on Acts, vol. 19, p. 271

 

17) Mary Hayter, The New Eve in Christ, Eerdmans, 1987, pp. 70 이하

 

18) Canon R. W. Howard, Should Woman be Priests?, Oxford, 1949. pp. 22-5

 

19) 『교역과 여성 안수』, op. cit., pp. 54-5

 

20) Ibid., p. 18

 

21) Ibid., pp. 71-2, 182. Arthur Frederick Ide, Woman as Priest, Bishop and Laity, pp. 41, 42, 44, C. K. Barrett, A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 p. 282

 

22) Ibid., pp. 49-51

 

23) An Inrlusive Language Lectionary, John knox Press, 1985

 

24) One World, p. 2. 1995. 11

 

25) Faith and Order, Proceedings of the World Conference, Lausanne, 3-21 Aug. 1927, H. N. Bate, N. Y. 1927, pp. 372-3

 

26) The First Assembly of the WCC, Amsterdam, 22 Aug. to 4 Sept, 1948. W. A. Vissert’s Hooft, N. Y. 1949, p. 147

 

27) Concerning the Ordination of Women, Depts on Faith and Order and Cooperation of Men and Women in Church, Family and Society, WCC: Geneva, 1964, p. 5

 

28) Faith and Order Paper No. 9. 1968, p. 148

 

29) Official Report of the Fourth Assembly of the WCC, Uppsala, 4-20 July 1968, WCC: Geneva, p. 250

 

30) C. F. Parvey, Ordination of Women in Ecumenical Perspective, WCC, Geneva, 1980, p. 9

 

31) The Ordained Ministry in Ecumenical Perspective Study Encounter, vol. 8. NO. 4. 1972, p. 12

 

32) A Report on Sexism from the Nairobi Assembly of the WCC in 1975

 

33) Alan A. Brash, The WCC, Geneva, WCC, 1981, p. 21

 

34) Sharing in One Hope, Commission on Faith and Order, Bangalore, India, 1978, WCC, Geneva, pp. 269-70

 

35) Ans J. Van Des Bent, What in the World is the WCC?, p. 40

 

36) Parvery, op. cit. p. 13

 

 

출처:  클릭=>  계약신학대학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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